서울강의

디도서5-전시가치 70512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5. 27. 06:51
2017-05-13 19:08:09조회 : 282         
전시가치 170512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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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아 (IP:122.♡.183.206)17-05-18 22:51 
서울 의존교회 170512a (전시가치)-이 근호 목사 

  

디도서 2장 1절부터 6절을 하겠습니다. 

  

“오직 너는 바른 교훈에 합한 것을 말하여 늙은 남자로는 절제하며 경건하며 근신하며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에 온전케 하고 늙은 여자로는 이와 같이 행실이 거룩하며 참소치 말며 많은 술의 종이 되지 말며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고 저들로 젊은 여자들을 교훈하되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근신하며 순전하며 집안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라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 너는 이와 같이 젊은 남자들을 권면하여 근신하게 하되” 

  

긴 말씀인데, 이 말씀이 아무리 길어도 이렇게 간단하게 정리가 돼요. 어떻게 정리가 되느냐 하면 전부 다 지정된 위치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어떤 전자제품 같은 것들을 조립할 때 부속품이 제자리에 딱딱 꽂혀야 되겠죠. 제자리에. 이 위치, 제자리에 꽂힌다는 말이죠. 

  

그러면 1절에서 6절까지 나오는 그 자리에 어떤 항목들이 있느냐 하면 늙은 남자, 늙은 여자, 젊은 남자, 젊은 여자, 뭐 다 나왔네요. 늙은 남자는 이래야 해야 되고, 늙은 여자는 이래야 해야 되고, 젊은 남자는 이래야 되고, 젊은 여자는 이래한다고 나와 있죠. 

  

그런데 이게 하나의 모판이라고 그렇게 생각하시면 돼요. 여기에 나를 집어넣으면 안 돼요. 나를. 주께서 이런 일을 하는 늙은 남자를 그 위치에 넣으실 거예요. 이렇게 하는 늙은 여자를 이렇게 넣고, 그렇게 되게 하실 겁니다. 젊은 여자 되게 하실 겁니다. 젊은 남자 되게 하실 거예요. 

  

그럼 이름은 어디에 있느냐? 이름은 어디서 오느냐? 없어요. 없습니다. 내가 여기 있다고 생각을 하게 되면 저건 나하고 상관이 없는 거예요. 내가 없어지고 내가 없다고 생각을 하게 되면 말씀이 나로 하여금 저런 자리에 적당하게 칩을 넣듯이 딱딱 꽂으실 겁니다. 

  

나는 여기에 있고 나는 저 중에 어느 자리에 갑니까? 라고 시작하게 되면 그 자체가 말씀하고는 상관이 없는 겁니다. 주님은 말씀의 입장에서 볼 때, 우리가 여기에 있어도 우리를 없는 존재로 간주해버려요. 없는 존재기 때문에 지킬 것도 없어요. 뭐가 있어야 지키죠. 없는데. 주인공이 없고 주체자가 없는데 뭘 지킵니까? 죽은 해골이 뭘 지켜요? 

  

좀비 영화가 미국에서 왔을 때, 여러분 좀비가 뭔지 아시죠? 살아있는 시체. 좀비라는 영화가 우리나라에 왔을 때, 그 좀비가 무서운 이유는 좀비가 사람을 안 죽입니다. 좀비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사람을 먹죠. 죽이는 게 무서운 것이 아니고 먹어버린다는 것이 무서워요. 먹어버린다는 게. 저 사람이 나를 죽인다는 것이 무서울까요? 저 사람이 나를 삼켜버린다는 것이 무서울까요? 

  

영화에 나오는 좀비는 칼 들고 “죽어라!”하면서 죽이고, 총 들고 두두두 쏘아서 죽이고, 또 딴 데 가서 죽이고 하는 이런 존재가 아니고 자기 것으로 만든다니까요. 그러니까 이건 뭐냐, 삼킨다는 말은 내 몸의 전부를 자기 몸의 일부로 전환시킨다는 것을 말하죠. 전환시키는 것. 좀비한테 삼키는 것이 왜 이렇게 무서운가 하면 삼킴을 당하게 되면 내가 나를 지켜왔던, 평소에 꾸준하게 나는 내가 지킨다는 이것이 힘 있는 좀비 앞에서는 이게 소용이 없잖아요. 그게 기분 나쁘죠. 

  

여자애들 지금은 두 살이 안 돼서 모르는데, 네 살이나 다섯 살 쯤 되게 되면 그때부터 애들이 자의식이 강하게 발달합니다. 발달하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엄마가 함께 바깥에 외출하자고 한다든지, 교회에 가자고 해서 이거 입으라고 원피스를 내놓게 되면 애가 막 울어요. 왜냐하면 그 옷을 입기 싫거든요. 입어주면 되는데 그 옷을 못 입겠다는 거예요. 그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옷 입는 것을 누가 결정하느냐 하면 내가 결정해야 돼요. 내가. 

  

그러면 애가 안 나가면 안 나갔지, 자기 결정권에 대해서 침해받는 것을 새로운 두려움으로, 새로운 공포로 인식하는 겁니다. 그게 자아가 점차 커져가는 증거에요. 밥을 못 먹고 해서 인생이 힘든 게 아니고, 인생이 힘든 이유는 이 세상이라는 것이 내가 이렇게 설계하고 내 뜻대로 세상이 움직여 주는 게 너무나 당연한데, 이게 내가 희망하는 세상인데, 그게 안 될까봐 조마조마하고 겁나는 겁니다. 그게 안 될까봐. 아까 질문할 때 우연, 필연을 이야기했잖아요. 

  

우연, 필연이라는 개념자체가 있다는 말은 앞에 뭐가 전제되어 있느냐 하면 내가 여기 있으매 세상은 나를 따라야 된다는 이것을 포기할 마음이 없어요. 이게 옳으냐, 그르냐를 따지는 것은 나중문제고, 내 마음이 ‘그래, 세상이 내 마음대로 안 되니까 나는 이 세상을 따라야 돼.’라고 선뜻 그런 마음이 본성적으로 들지를 않는다는 거예요. 

  

청소년 애들을 보게 되면 “이거, 이거 하지 마세요.”라는 말이 있기 때문에 그 지시를 의도적으로 위반해버립니다. 왜냐하면 그럴 때 내가 나답다는 것이 비로소 그 순간에 확인되기 때문에 그래요. “열시까지 오너라!” 근데 사람 심리가 이렇습니다. 착한 딸이 되가지고 늘 학교 마치면 6시 되기 전에, 저녁을 집에서 먹기 위해서 딱 오는데, 그 사실은 엄마가 알고 있어요. 근게 그걸 모르는 아버지가 혼자 착각을 해가지고 “요새 젊은 애들이 밤늦게 다닌다는데 너는 앞으로 무조건 10시 전에 들어와! 내 지시다.” 이러면, 지금까지 애가 착해서 꼬박꼬박 6시에 들어왔잖아요. 근데 아버지가 너는 10시 이전에 들어와야 너는 내 딸답다고 하면 몇 시에 들어오겠어요? 9시 55분에 들어옵니다. 

  

그래서 성경해석은 뭐냐, 성경해석은 주체를 의식하면서 주어지는 겁니다. 명령자를 느끼도록 말씀이 주어지는 겁니다. 제가 방금 뭐라고 했습니까? 명령자를 느끼도록 한다고 했죠. 인간은 이 세상을 구성하는데 있어서 명령을 느끼면서 구성하게 되어 있어요. 명령을. 

  

세상 법이, 아까 제가 아버지가 10시 이전에 집에 들어오라고 했다고 한다면, 그 딸은 평소에 한 번도 안 빠지고 6시 이전에 들어왔는데, 딸이 이렇게 착실한 것을 미처 모르고, 아버지 자기 혼자 항상 12시 되어서 들어오니까, 괜히 자기 딸을 뒤늦게 간수한다고 “우리 딸은 10시 이전에 들어와야 돼!”라고 하는 순간 그 딸은 6시 전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고 9시 55분까지 들어와 버리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법이라는 것은 그 법이 객관적으로 따로 있고 주체적인 법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이 주체라고 하는 것은 어떤 법이 있는 자를 늘 가름하면서 그때그때마다 주체를 새롭게 구성하게 되어 있어요. 인간은 구성하게 되어 있다고요.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는 것처럼. 그럼 이 말은 뭐냐, 법이 없는 곳에는 뭐도 없어요? 법이 없는 곳에는 주체도 없어요. 법이 없는 곳에는. 

  

어린애가 16개월에서 24개월쯤 되게 되면 자아가 형성돼요. 16개월에서 3살까지 자아가 대충 형성된다고 심리학자들은 이야기하는데, 그때 자아가 형성되도록 누가 외부에서 자극을 주는 자가 있어요. 그게 부모에요. “쉬 할 때는 여기에서 하면 안 돼. 저기 가서 해야 돼.” “식사 할 때는 흘리면 안 되지.” “가려먹지 말고 콩도 먹어야 돼.” 3살 때까지 계속 잔소리가 주어집니다. “손님들 왔을 때는 그렇게 왔다 갔다 하지 말고 점잖게 앉아있어야 돼. 인사할 때는 안녕히 가세요, 라고 인사 꾸벅해야지.” 또 말을 하게 되면, “그 말이 아니고 이 말이야.”라고 하면서 말도 교정해주고.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근데 그걸 지시할 그게 없다면 그 애는 주체가 형성되지 않습니다. 짐승하고 똑같이 돼버려요. 그냥 본능만, 계속 본능대로 하는 거예요. 어릴 때 부모가 옆에 있다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거예요. 두뇌 피질이 그때 굳어지고 형성되기 때문에. 계속해서 지시와 명령을 해줘야 돼요. 그렇게 되면 결국은 뭐가 되느냐 하면 후천적 맞춤존재자가 돼요. 후천적 맞춤 존재. 어디에 맞춤 존재냐 하면 그 가정에 합당한, 그 가정의 질서와 역사적인 전통과 관습에 합치된 아이가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겁니다. 

  

이삭은 날 때 며칠 만에 할례를 받았습니까? 8일 만에 할례를 받았죠. 그것은 인간의 모든 창조위에 권한 밖을 보여줍니다. 창조 7일 밖에서 8일 째 만들어져요. 사람에 의해서 태어난 자식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걸 가지고 로마서 4장에서는 이삭은 없는 데서 생겼고 죽은 데서 살아나는 거예요. 처음에는 없는 데서 생겨난 것이 이삭이고 나중에는 하나님 아버지가 이삭을 바치라고 하죠.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아! 그냥 빈손으로 가도 돼. 가면 수풀에 양이 잡혀있을 거야. 그 양 잡으면 돼.”라면 될 텐데. 

  

근데 지금 제물 없어가지고 하나님께서 양을 준비하고 그 양 잡아서 제사 드리는 것이 목적이 아니에요. 그거는 아브라함을 시험하기 위해서 했던 거예요. 하나님이 지금 제사 못 받아서 환장하신 것이 아니고. 그냥 양이 어디에 있으니까 양 잡아서 드려라고 해서 기능적으로 그냥 제사 드리면 됩니다. 그게 아니고 뭘 바치라고 했습니까? 양을 바치라고 하지 않고 이삭을 바치라고 했단 말이죠. 이삭을. 

  

이삭을 바침으로 해서 뭐가 부각되느냐 하면 바친 자가 부각되는 것이 아니고 바쳐진 제물이 하나님과 관계성을 성사시키는 겁니다. 그 제물이. 어떤 제물?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자. 그런 존재만이 하나님과 연결되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살아있는 자는 절대로 하나님과 관련될 수 없다. 따라서 네가 하나님과 관련을 맺으려면 너는 죽었다가 살아난 그 앞에서 너 자신을 제거해야 돼요. 

  

제가 강의 처음 할 때 뭐라고 이야기했습니까? 늙은 남자는 이래야 되고, 늙은 여자는 이래야 되고, 젊은 남자는 이래야 되고, 젊은 여자는 이래야 된다고 했죠. 사람들은 이 대목을 보면서 뭐라고 생각합니까? “자, 나는 젊은 여자한테 해당이 되니까 늙은 남자, 늙은 여자, 젊은 남자는 나한테는 별 볼일 없고, 나는 젊은 여자에 해당되는 그 법만 나한테 합치시키면 나는 성도가 맞다.”라고 이렇게 성경해석하고 싶죠. 

  

이게 뭐냐 하면 인간은 평소에 하던 대로 주체는 뭘 가지고? 법을 가지고 자기 주체를 새롭게 정리하는 겁니다. 젊은 여자가 어떤 여자인지를 좀 봅시다. 4절, “저들로 젊은 여자들을 교훈하되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5절에 “근신하며 순전하며 집안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라” 젊은 여자들은 여기서 뭘 해야 된다?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는 역할을 하라고 늙은 여자보고 그렇게 교훈하라고 하는 이 말이 아닙니까? 

  

그럼 젊은 여자 같으면 뭐만 하면 돼요?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만 하면 돼요. 그렇죠? 자기는 아직 늙은 여자가 아니기 때문에 자기한테는 해당사항이 없잖아요. 그렇게 생각이 되죠? 그러면 젊은 여자는 몇 년 생부터 젊은 여자로 쳐줘야 됩니까? 성경을 그렇게 해석하면 안 된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이 성경을 해석할 때 제가 뭐라고 했던가요? 했는데, 여러분 다 잊어버렸죠? 여기에 해당되는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까? 없다고 했습니까? 없다고 했죠. 늙은 남자 없고, 늙은 여자 없고, 젊은 남자 없고, 젊은 여자 없어요. 없습니다. 아니, 여기에 해당되는 사람 자체가 없어요. 뭐 사람이 있어야 이걸 지키지. 이걸 지킬 사람이 없는데요.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내가 있고, 여기 주체자가 있고, 법이 있으면, 그러면 내가 법을 지키면 지금보다도 향상된, 경건된 신앙인이 될 거라고 이렇게 착각을 하는데, 주님의 모든 말씀은 뭐냐 하면 이 세상에 현존하지 않는 인간에게 준 거예요. 지킬 사람이 없게 만들어요. 우리는 내가 먼저 있고 법은 나중에 있는데 성경은 반대에요. 법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그 법에 합당한 사람은 주께서 따로 만들어서 여기에 칩처럼, 키보드 판의 칩처럼 딱딱 집어넣어버린다고요. 

  

그러면 늙은 남자 역할이 생기고, 늙은 여자 역할이 생기고, 젊은 남자 역할이 생기고 젊은 여자 역할이 생기는데, 그러면 여기에 있는 자들이 어디서 나오느냐, 반드시 경유하는 것이 있어요. 뭐냐 하면 여기에 있는 사람들은 그냥 나오면 안 돼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온 사람들이에요. 이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전부 다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입장에서 이 역할에 가담하는 것입니다. 지체라는 입장에서. 

  

근데 기존의 주체는, 주체가 있고 법을 지킴으로써 이 주체를 계속해서 발전시키고 하나님의 경건으로 함양하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겁니다. 인간은, 보통 인간을 말하는 거예요. 이거는 먼저 내가 여기 있음을 전제로 하고 그 다음에 있고 난 뒤에 법이 있으면 내가 이 법을 지키고 나면 훨씬 더 개선되고 나아지는 인간이 된다, 라고 보통 사람은 생각을 한다 이 말이죠. 

  

왜냐하면 우리는 어릴 때부터 그런 식으로 답습을 해온 사람들이에요. 부모로부터 맞춤아이가 된 거에요. 그게 사람의 양심이 되고 선악체제가 되는 겁니다. 나중에 그 아이가 어느 집에 가서 있더라도, 그 아이가 거기서 잠시 숙제를 하고 있더라도 그 아이는 그 집의 아이가 아니고 지가 태어난 자기 집의 아이로서 숙제를 하고 있는 겁니다. 

  

제가 전에도 이야기했는데, 제가 너무나 잊을 수 없는 애라서 몇 번씩 이 아이의 예를 드는데. 비 오는 날 버스를 탔는데, 비가 올 때 애들이 버스에 올라탔어요. 그럼 우산을 어떻게 할까요? 그냥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우산 들고 카드 찍고 들어오잖아요. 대부분의 애들이 그래요. 근데 한 아이가 어떻게 하느냐 하면 우산을 착착 접어요. 제가 평생에 그런 애를 처음 봤어요. 

  

그럼 그걸 누구한테 배웠어요? 학교에서 그렇게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가정에서 가정교육을 그렇게 한 거예요. “니가 비 올 때는 니가 비 안 맞는 것만 생각하지 말고 뒤처리할 때 남한테 피해되는 것을 생각해라.”이미 그런 것을 훈련받은 거예요. 같은 버스 안에 여러 종류의 사람이 있더라도 그 사람들은 자기 집안에서 맞춤된 대로 그대로 행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빗물이 줄줄 흐르게 해서 남한테 피해주는 행동을 하죠. 

  

그처럼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고 어릴 때부터 주위에 뭐가 착착 쌓이고 있다? 법이 쌓이고 있고, 그 법은 그 가정의 질서에 만족스럽게, 어른들, 기성세대가 만족스러울 정도로 거기에 딱 맞춘 법입니다. 거기에 맞춤 가족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그래야 하나의 가족이 되죠. 그게 안 되면 “호적 빼라! 나는 니 같은 자식을 둔 적이 없다.” 이렇게 될 수가 있어요. “나는 더 이상 못 키우겠다. 니 같은 자식이었으면 나는 낳지도 않았다.” 이런 과격한, 심한 말로 욕을 막 얻어먹고 하죠. 

  

그런 식으로 양육 받고 훈계를 받는데, 백날 양육 받고 훈계를 받아봤자 그 사람의 주체를 쫙 쪼개보면 뭐가 들어있어요? 법이 들어있죠. 그것도 둘둘 감긴 채. 저는 그것을 인간의 나이테로 봅니다. 인간의 모든 나이테는 법으로 완전히 꽉꽉 차있어요. 법으로 차있어요. 그래서 누가 옆에서 시비를 걸면 “나는 이런 것 때문에 욕 얻어먹은 적 없다.”라고 이렇게 저항이 나오는 겁니다. 

  

어릴 때 부모가 어른이 돈 주면 고맙다고 인사를 드려야 된다는 것을 안 가르쳐주면 그냥 받죠. 근데 다른 쪽에서 어른이 돈 줬으면 고맙습니다, 라고 인사를 하라고 하면 나는 어릴 때부터 그렇게 교육받은 적이 없다고 하죠. 왜? 그게 법이니까. 나의 주체 안에는 당신과 다른 법의 구조로 짜여져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사람에게 성경을 들이대면 이 성경을 지키려고 할 거예요. 지켜버리면 이 사람은 누구한테 쫓깁니까? 결국 마귀한테 쫓기는 거예요. 계속 정죄 받아요. 

  

1절에 봅시다. “오직 너는 바른 교훈에 합한 것을 말하여” 2절, “늙은 남자로는 절제하며 경건하며 근신하며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에 온전케 하고” 그럼 늙은 남자를 60대로 봅시다. 60대 아저씨 불러 놓고, “당신은 절제하며 경건하며 근신하면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으로 온전케 했습니까?”라고 물어보세요. “아니 이 호로자식이 어디서 어른 붙들고 함부로 하냐?” 이렇게 이야기를 한다 이 말이죠. 

  

인간은 자기의 몸 처리를 어떻게 해야지, 이게 인간의 전부에요. 몸 있다. 처리한다. 그냥 처리하는 거예요. 뭘 정당화하면서? 자기가 살아온 법과 경험과 체험들을 정당화하면서. 늙은 남자를 한 열 명으로 해놓읍시다. 열 명으로 해놓고, “당신은 경건하며 근신하며 절제합니까?”라고 물어보면, “믿음과 사랑과 인내합니까?”라고 물어보면 다 그렇게 한다고 해요. 교회 다니는 사람 열 명 모아놓고 물어보면. 

  

근데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보라고 하면 다 달라요. 왜냐하면 처리과정에서 자기 몸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쪽으로 처리했기 때문에. 이건 비겁한 변명이고, 이게 결국 뭐냐 하면 위선이죠. 위선을 부리는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 법을 주신 것은 이런 인간이 있다고 해야 해요? 없다고 해야 해요? 이렇게 위선을 떠는 이런 인간은, 그런 남자는 나이만 들었지, 오늘 본문 디도서 2장에서 말하는 늙은 남자한테 해당이 돼요? 안 돼요? 해당이 안 되죠. 해당이 안 되면 늙은 남자는 없는 거예요. 

  

그럼 주님께서는 뭘 주느냐, 명령을 준 게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명령자를 주죠. 명령을 줘버리면 명령을 받는 자가 있고 명령을 주는 자가 있죠. 그럼 주체가 몇 명입니까? 달랑 두 명이죠. 두 명 나왔으면 여기서 뭐가 생기겠어요? 누가 주체자냐, 하는 경쟁이 생기겠죠. 이 주체자가 누굽니까? 바로 예수님이죠. 예수님이냐, 예수님이 이 몸 되기 위해서 말씀을 줬느냐, 아니면 어릴 때부터 익숙해진, 잘난 내가 되기 위해서 이 말씀을 줬는가에 경쟁이 생기겠어요? 안 생기겠어요? 생기겠죠. 

  

그러니까 주님께서 이 말씀 주시면서 내 앞에 무릎을 꿇으라고 하는 말씀인 겁니다. “늙은 남자야! 니가 이 말씀을 나름대로 지켰다고 우기느냐? 그렇다면 내 앞에 무릎을 꿇어라.” 지금 제가 고함을 지른다고 이해되는 것은 아니고요. 누가복음 18장을 봅시다. 11절을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 하나이다”이렇게 되어 있죠. 

  

그래서 자칭 자기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성전에서 자기는 죄인이 아니고 의인이라고 하는 거예요. 이 사람이 의인이라고 한 것은 뭘 했느냐 하면 12절에 나와요.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십일조라는 율법이 있으니까, 이런 율법대로, 법이 있으니까 법을 지키는 거예요. 

  

이 바리새인은 법만 봤지 법을 준 명령자가 누군지 알아요? 몰라요? 모르죠. 자기 관심사는 이 명령을 따라서 현재 갖고 있는 자기 몸을 완벽하게 의로운 변신을 시키는 데에 지금 몰두하고 있는 겁니다. “법주세요. 내가 지켜서 착한 사람이 될게요. 천당 갈게요.”이거라니까요. 이거. 그거잖아요. 

  

십일조 언급을 왜 합니까? 평소에 지금 잘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럼 이 바리새인에게 한 번 물어봅시다. “당신은 십일조를 합니까? 안 합니까?”라고 물어보면 기다렸다는 듯이 이야기를 해요. “옛썰! 잘하고 있습니다.”라고 이렇게 한다 이 말이죠. 그럼 십일조를 잘 하고 있다고 우기니까, “그럼 당신은 죄인이요? 의인이요?”라고 물어보면 뭐라고 합니까? “나는 법대로 살았으니까 의인이죠.” 이 말은 나는 착한 늙은 남자고, 나는 착한 늙은 여자고, 나는 착한 젊은 남자고, 나는 착한 젊은 여자라는 이 말입니다. 법대로 했으니까. 

  

“아니, 내가 법대로 안 했어요? 법도 없는데 제가 십일조 하는 겁니까? 먼저 십일조라는 법이 있으니까 자기가 했다고 하는 거예요.” 나는 여기 있고 십일조라는 법이 있으니까. 법을 지키는 겁니다. 법을 지키는데, 최종 판결자, 순회 재판자가 나타났죠. 순회 재판자가 누구십니까? 예수님이죠. 예수님이 판결을 내렸습니다. “의인입니까? 죄인입니까?” “나는 피고를 죄인으로 간주하노라”탕! 탕! 탕! 끝났어요. 

  

근데 다른 사람 보세요. 어떤 사람은, 13절에 “세리가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근데 이야기가 바리새인부터 먼저 나오죠. 죄인부터 먼저 나오지 않습니다. 만약에 죄인부터 먼저 나와서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이렇게 하면, 예수님이 “니는 의인이다.”라고 하게 되면 바리새인이 그걸 보고 그대로 뒤따라서 할 거예요. 

  

왜? 바리새인은 지금 자기 자신을 구원하고 싶어서 환장한 사람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어릴 때부터 그렇게 해야 됐기 때문에. ‘내가 주의 법으로 무장하게 되면 지금보다 점점 더 향상되는 그런 존재로 변형될 것이고, 이런 식으로 가게 되면 백퍼센트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그런 자신을 만들어내고 싶은 겁니다. 

  

그런데 죄인인 세리가 갑자기 왜 의인이 되었습니까? 자기 안에 잘난 게 있어서 죄인 되었습니까? 잘난 게 없다는 것이 발견되어서 죄인 되었습니까? 자기 안에 잘난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았죠. 알았는데, 그게 왜 의인이 되는 겁니까? 

  

자기 안에 잘난 것이 없으면 지옥가야지 왜 의인되어 천국 가는 겁니까? 바로 천국과 지옥은 인간에 의해서, 인간이 어떻게 답변하는 것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판결자에 의해서 결정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게 바로 명령자에요. 명령자. 

  

오늘 디도서 2장 1절을 다시 봅시다. “오직 너는 바른 교훈에 합한 것을 말하여” 너라는 늙은 남자, 늙은 여자, 젊은 남자, 젊은 여자를 어떤 특정인 보고 말한 것이 아니고, 제가 처음에 뭐라고 했던가요? 위치라고 했죠. 어떤 위치? 말씀의 위치. 말씀의 위치는 뭘 보여주느냐 하면, ‘역시 나는 구원받은 사람이 맞다.’라는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 말씀의 위치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이렇게 명령할 위치에 있습니다. 명령자입니다.”라는 것을 증거 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를 증거 하는 겁니다. 성도의 기능은 예수님 증거 하는 거예요. 내가 괜찮은 늙은 남자, 늙은 여자가 되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을 증거 하는 겁니다. 이 말씀은 처음 예수 믿을 때 한 번 알고 그 다음부터 안 지키는 것이 아니고 죽을 때까지 이 말씀이 계속 적용돼야 돼요. 

  

전에는 늙은 남자한테 적용된다고 생각해서 젊은 여자인 나한테는 해당이 안 된다고 생각했던 그 말씀이, 나중에는 늙은 남자한테 했던 그 말씀이 바로 지금 젊은 여자인 나에게도, 나의 이야기로, 나의 죄를 지적하는 이야기로 그대로 받아들여져야 돼요. 

  

왜? 그래야 한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순환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한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따라서 이야기를 다시 하게 되면 디도서 2장 본문의 말씀은 기존의 어떤 인간을 죄인 되고 의인되게 하는 말씀이 아니고, 모든 인간을 그리스도 앞에서 없애버리는 말씀입니다. 모든 인간을. 

  

왜 없애버리느냐? 말씀을 주면 지키려고 하니까. 말씀 주면 지켜서 지킨 것을 근거로 해서 구원받으려고 설쳐대기 때문에. 이거는 그리스도 안에서 독자적으로 자기가 어떤 관찰의 위치를 따로 설정한 것처럼 그렇게 행사하는 거예요. 모든 인간은 타고나기를 그렇게 타고 났기 때문에.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느냐, 이 말씀가지고 그 인간을 날마다 죽여야 되죠. 아까 아브라함 이야기를 다시 할게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제사를 원했을 것 같으면 모리아산 어디 수풀에 가면 양이 잡혀있을 거니까 잡아서 드리라고 했을 것인데,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니 아들, 이삭을 제물로 드리라고 했단 말이죠. 그러면 명령자가 누굽니까? 명령자가 여호와 하나님이죠. 

  

그럼 그 순간이 명령이니까 아브라함은 어떻게 해요? 명령을 준수함으로써 자기가 신앙이 있음, 신앙 테스트에 합격자, 라는 생각을 갖고 싶죠. 나중에는 그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아브라함보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자신이 누구신가를 지상의 언어로 표현했을 때,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지상에 내려왔을 때, 하나님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 거냐를 아브라함에게 명령하는 형식으로 미리 자기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 거예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으로 오신 겁니다. 아브라함은 그런 작업에 활용당한 거죠. 활용. 이용당한 거죠. 아브라함은 하나의 도화지고 그림은 누가 그리는가? 여호와 하나님이 그리는 거예요. 이삭이, 사람이 죽어야 되고, 그 죽음의 의미는 양이고, 대신하는 양, 죄인을 대신하는 양으로서 하나님 나 자신이 죽어야 그 다음에 복은 아래로 점점 더 전수된다는 것. 그런 기능으로 앞으로 내가 일을 할 거라는 사실을 아브라함에게 실어버리는 겁니다. 

  

그걸 아브라함의 인생을 담보한다고 하는 건데, 거기에 합류하고 있는 거예요. 그럼 아브라함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아브라함의 본인 뜻이 나오겠습니까? 아니면 그 실어진 아브라함의 언약의 내용이 나오겠습니까? 언약의 내용이 나오죠. 그러면 아브라함은 자기 인생이 없어요. 

  

자기 인생은 만날 저지당하고 블로킹당하고, 그 블로킹 당한 것을 계기로 아브라함이 미처 몰랐던 하나님의 뜻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또 다시 펼쳐지고, 이러한 것이 아브라함언약, 그 다음 이삭언약, 이삭이 등장하고, 이삭은 자기 원하는 사람을 밀어주려고 하다가 이게 어떻게 됩니까? 원치 않는 자식에게 복을 다 밀어주죠. 원치 않는 자식에게. 

  

이게 바로 희생이거든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이삭이 죽어야 이삭의 하나님이 산다 이 말이죠. 니가 살아버리면 니가 원하는 맏이 에서에게 모든 복을 다 줘버려요. 주님께서는 이삭을 사용하면서 이삭을 허수아비로 만들어버려요.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이걸 그대로 적용시켜버립니다. 허수아비로 만들어버려요. 

  

허수아비는 어떤 허수아비냐, 허수아비란, 자기 나름대로 주의 뜻을 지키겠다고 하는 것을 간직하고 있는 허수아비에요. 그냥 허수아비가 아니고. 부지런히 말씀 지키겠다고 애쓰는데, 주님 보시기에는 주님의 일에 훼방자요, 방해자로, 포행자로 만들어버리는 겁니다. 그걸 죄인 중의 괴수라고 이야기하거든요. 

  

사도바울은 그걸 늘 고백해요. “나는 이 땅에 꼭 살아야 될 이유가 없어. 내 소원이 있다면 나는 빨리 죽는 거다. 하지만 살든 죽든 그건 내 소관이 아니고, 내가 살고 싶어서 살려 주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필요에 의해서 더 살아서 복음 전하도록 그렇게 조치를 하십니다.” 그럼 그 다음에 뒤에 나오는 말은 “그 정도로 나는 별 볼 일이 없는 인간이고 그 정도로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일은 누가 한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알아서 다 하십니다.”라고 고백하는 겁니다. 

  

그럼 우리에게 오늘 묻는 것은 그겁니다. 바르게 살래?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살래? 이걸 묻는 거예요. 성경 보고 ‘나는 개뿔도 아니네.’ 이걸 느낄 거예요? 아니면 ‘아, 나는 살아서 남들에게 신앙인이라는 것을 과시해야지.’라는 재미로 살래요? 어느 쪽이에요? 어느 쪽이냐 이 말이죠. 그게 어느 쪽이냐가 결판난 것은, 아까 뭘 봤습니까? 누가복음 18장 봤다고 했죠. 

  

거기에 누가 나옵니까? 바리새인이 먼저 나오죠. 자랑질 많이 했죠. “십일조 했습니다.”라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하기 힘든) 십일조 했습니다.” (하기 힘든)이 들어가요. “하기 힘든, 그 귀하디귀한 돈을 십일조로 냈습니다. 구제했습니다.”라는 것을 먼저 끄집어내죠. 주께서는 바리새인을 지옥 보냈습니다. 그 다음에 뭐가 나옵니까? 세리는 감히 얼굴도 못 들고 “죄인일 뿐입니다.”라고 하죠. “니가 가라! 천국.” 

  

왜? 너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 누굴 보여줘요? 아무것도 아닌데 일방적으로 그냥 구원의 손길, 그걸 아까 명령자라고 했는데, 그 명령자를 그대로 백퍼센트 다 보여주는, 훼방하지 않고. 왜? 본인은 꺼져있으니까. 주님께서는 “꺼져줄래!” 꺼져줄래, 라는 말은 나가놀라는 말이 아니고, 너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거품이 되어서 꺼지라는 이 말이거든요. 바른 인간하지 말고. 

  

그래서 이 본문 말씀은 평생 두고두고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이 모든 사람에게 말씀이 되는 겁니다. 말씀은 우리에게 법이 아니고, 뒤에 누가 계시다? 법 제정자, 명령자가 우리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뭐가 되면 돼요? 죄인이 되면 되는 겁니다. 어떤 죄인? 못 지키는 죄인이 아니고 지켰다고 우기는 죄인. 

  

못 지키는 죄인은요, 이거는 아주 직무유기입니다. “이 말씀 지키세요.” “이근호 목사 말대로 하면 우리는 죄인이라 못 지킨다며? 나 안 지킬래.” 좋다. 참 핑계 멋지다. “나 안 할래. 죄인이라 안 할래. 나 기도할 줄 몰라. 나 선교할 줄 몰라요. 나는 죄인인데 뭐.” 그거는 죄인이 아니고 얍삽한 거예요. 

  

죄인의 자리는 어떤 자리냐 하면, ‘최선을 다하여 내가 이렇게 말씀을 잘 지키다니!’그게 죄인의 자리에요. ‘이 정도 하면 얼추 남보다 더 신앙적이잖아.’라고 착각하는 자리가 죄인의 자리라니까요. 사도바울이 뭐라고 했습니까? 나는 율법에 흠이 없다고 했죠. 그게 죄인의 자리에요. 

  

그런데 그걸 전부다 배설물로 여긴다? 누가? 주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내가 지킨 모든 의를 배설물로 여기는 거예요. “저리가! 저리가! 아휴 냄새나! 이 잘난 나야 꺼져줄래!”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십자가의 용서가 아니면 구원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겁니다. 

  

근데 제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은 반 이야기했어요. 요 본문에서 반 이야기했어요. 얼추 다 이야기한 것 같은데요? 아닙니다. 반 이야기했습니다. 왜 반 이야기했다고 하느냐 하면, 자 2절 봅시다. “늙은 남자로는 절제하며 경건하며 근신하며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에 온전케 하고” 

  

그러면 아까 제가 이야기한 원칙을 적용시켜보면 늙은 남자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그러면 주께서 우리를 죄인인데 의인되게 했다면, 우리를 뭐로 보느냐 하면 늙은 남자로 없는데서 새로 만들어내 버려요. 늙은 남자의 기능을 하게 돼요. 나이와 관계없이. 일곱 살 먹은 늙은 남자가 등장합니다. 열두 살 먹은 소녀가 늙은 남자로 등장해요. 등장해서 뭘 하느냐, 절제하며 경건하며 근신하며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을 하도록 주께서 그렇게 만들어버립니다. 

  

그 만드는 과정 속에서 절대로 내가, 주체가 했다고 하지 않고 다른 주체를 내세워버려요. 그 주체가 누구게요? 나는 죽고 내 안에 누가 산다? 그리스도가 살아서, 그리스도가 내뱉은 말씀을, 그리스도만이 이 말씀을 합당하게 해버려요. 그러면 믿음과 사랑과 인내에서, 믿음이 뭐냐, 라는 규정을 내가 하는 겁니까? 주님이 하는 겁니까? 주님이 하는 거죠. 

  

이게 어려운 거예요. 성경대로 믿음과 사랑과 인내를 하게 하는데, 믿음이 무엇이냐? 사랑이 무엇이냐? 인내가 무엇이냐? 라는 그 규정은 이미 죽은 자로 간주한 나에게 그걸 지시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알아서 해버립니다. 어떻게 하느냐 하면 믿음이 되도록, 사랑이 되도록, 인내가 되도록. 그럼 믿음, 사랑, 인내는 하나의 성령의 열매로써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예수님에게서 나오죠. 예수님에게서. 

  

그러면 성도는, 늙은 남자가 된 열두 살 아이는, 하나님의 법칙에 의해서 주님 앞에 부름을 받게 되면 이 아이는 이 믿음, 사랑, 인내라는 말씀으로 바로 가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경유해서 가게 됩니다. 그럼 그리스도 안에서 이 아이는 뭐가 되느냐, 죽은 자가 돼요. 쓸데없는 자, 쓸모없는 자, 찬송가에 나오죠. 아~하나님의 은혜로~♬ 그 다음에 뭐죠? 이 쓸데없는 자~♬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줄곧 쓸데없는 자죠. 쓸데없어야 이 성도를 근거로 해서 예수님의 믿음이 나오고, 예수님의 사랑이 나오고, 예수님의 인내가 나오는 겁니다. 이렇게 나와요. 믿음, 사랑, 인내의 본 내용이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과 찬양으로 된 것이 그 내용입니다. 믿음과 사랑과 인내, 그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공로만 나타나야 돼요. 

  

따라서 이런 과정, 절차는 인간은 못합니다. 주께서 인간을 아주 짓밟아놓고서 나오죠. 주일 오후 설교에 그런 이야기를 했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쥐어짜면 뭐가 나온다고 했어요? 피가 나오죠. 그 피로 구원받는 거예요. 내가 그 피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우리를 가지고 함께 쥐어짜버리면 그리스도의 피가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예수 피 믿는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아요. 이 차이점을 잘 알아야 돼요. 내가 예수 피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는 겁니다. 이걸 가지고 믿음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주체가 예수님이 될 때 믿음이고, 내가 주체가 되면 그건 믿음도 아니고 사랑도 아니고 인내도 아니라는 그 말입니다. Do you understand? 이해되시죠? 

  

그러니까 사랑 줬다고 보답하지 마세요. “아이고, 나에게 사랑을 주시다니 보답하겠습니다.”라고 하는데, 본인이 하면 보답이 돼요. 내가 얻어 챙길 것이 있으면 보답이 되는데, 챙길 것이 없는데 무슨 보답이 되겠어요. 어떤 보답도 할 이유가 없어요. 주님하고 거래하는 것이 아닙니다. 흥정하는 것이 아니에요. 

  

“내가 이렇게 사랑을 줬는데 니는 뭘 줬느냐?” 주께서 뭘 받으려고 하신 것이 아니잖아요. 아무것도 아닌 자에게 뭘 받아요? 벼룩의 간을 빼먹지. 뭐가 있어야 빼먹지. 빼먹을 것도 없는데, 이미 주님이 다 가져갔는데 뭘 빼먹어요. 다 가져갔는데, 국세청에서 와서 빨간 딱지 다 붙여놨는데 뭘 줘요? “이렇게 국세청까지 와서 너를 몽땅 망하게 했으니까 보답해라.” 망하게 했는데 뭘 보답을 해요. 보답이 안 되죠. 

  

헌금이라는 내용은 구약에서 나와야 돼요. 신약에서 백날 들여다봐야 헌금이라는 의미가 안 나옵니다. 헌금은 예수 그리스도 자체가 헌금이에요. 헌금은. 마치 설날 때 세배하는데 구십 넘은 노인네가 무슨 돈이 있습니까? 노령연금 한 이십 만원하고 어디서 해서 한 육십 만원밖에 없는데 뭐가 있겠어요. 근데 대학 들어 간 손자들이 죽 앉아 있다 이 말이죠. 

  

대학생 되었으니까 한 십 만원씩 주고 싶은데 돈이 있어야 주죠. 그때 뒤에서 아이들의 엄마, 딸이죠. “엄마! 봉투 받아서 줘라.” “그래.” 딸한테 받아서 손자들한테 주고. 이거 뭐 다보고 있는데. 자기가 준 게 아니죠. 딸이 준 것 가지고 했죠. 그러면 그 세뱃돈의 주체는 뭐냐 딸이 준 돈이니까 딸이잖아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인을 경유해서 주가 되시는 겁니다. 

  

이게 복음이에요. 죄인이 없으면 주가 안 돼요. 죄인을 계속 가지고 놀아야 돼요. 계속 죄인을 앞장세우면서 예수님은 계속 주가 되시는 겁니다. “니 대신 내가 죽었어. 니 알았지? 니 대신 내가 죽었어. 니 알고 있어? 니 대신 내가 희생을 했어. 니 알고 있어?” 그게 바로 주의 주 되심의 원칙이고, 오직 세상의, 우주의 원칙은 그 원칙 달랑 하나밖에 없어요. 세상에서 모든 돌아가는 우연이고 필연이고 그것은 뭐냐 하면, 예수님의 주 되심을 위해서 죄인과 더불어서 함께 움직이고 있다는 이 사실. 10분 쉽시다.

 이미아 (IP:122.♡.183.206)17-05-18 22:52 
서울 의존교회 170512b (전시가치)-이 근호 목사 

  

중부교회에 안 다니면서 중부교회에 주차를 했는데, 그것이 왜 성령의 역사로 절제에 해당 되는지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도저히 이 성경말씀의 교훈은 납득이 되지 않아요. 왜냐하면 성경에 대해서 인간의 주체를 경유하면.... 첫째 시간을 다시 해봅시다. 인간의 주체는 더욱더 자기를 견고하게 하고 단도리 하기 위해서 법을 자꾸 찾고 있어요. 이 법을 지킴으로써 점점 더 이 주체는 강화되고 더 단단해지고 멋있어 보이죠. 

  

그런데 주님께서는 법을 준 게 아니고 뭘 줬습니까? 명령자를 주죠. 법의 명령자. 그럼 주체가 둘이 되니까 여기서 경쟁이 생기는 겁니다. 경쟁이 생길 때, 경쟁이 생기도록 주님께서 유도하시는 거예요. 그럼 유도하는 방법이 뭐냐 하면 이겁니다. 경배의 가치와 전시의 가치를 나누는 겁니다. 경배의 가치⧸전시의 가치. 

  

전시의 가치라고 하는 것은 쇼윈도show window, 보여주는 거예요. 골라잡는 것. 인간은 자기의 주체됨을 주님 앞에서까지, “나 자신이 주님 앞에 지거나 포기하거나 없다고 여기거나 죄인이라고 고백하기 싫습니다. 내 주체는 어릴 때부터 가져온 주체이고 줄곧 관성으로 이어진 주체기 때문에 나는 주님 앞에서도 나 자신을 포기할 마음이 추호도 없습니다.”라고 할 때, 그때 그 주체가 하는 행동이 뭐냐 하면 전시의 가치에요. 

  

죽 보면서 어느 것이 나한테 이익이 되고 보탬이 되는가를 골라잡는 그런 행동을 하게 됩니다. 백화점에 옷이 죽 있으면 나한테 맞는 것을 골라잡잖아요. 전시한 옷을 골라잡듯 법들을 주면 저 법들 중에서 이거는 나중에 지켜야 되고, 저거는 지금 지켜야 되고, 이거는 좀 여유 있을 때 지키고, 요건 지킨 거고 하면서 골라잡을 수 있는 권한이 본인한테 지금 있다는 겁니다. 

  

근데 경배의 가치는 뭐냐 하면 무조건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하는 거예요.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경배라는 것은 경배한다고 경배가 되는 것이 아니에요. 드럼치고 기타 치면서 찬양한다고 해서 경배가 아니고, “주님 만나니까 나는 망해도 당연하고 나는 망하고 지옥 간다고 하더라도 잘하겠습니다.”라는 이런 고백. 경배의 가치에요. 

  

나의 운명이나 어떤 미래에 대해서 나의 기대나 희망이 요만큼도 포함이 되지 않는 것. 내 미래의 운명에 대해서 내가 전혀 기여하는 바가 없는 것. 손 떼는 것. 그럴 때만 이게 뭐가 되느냐 하면 경배가 돼요. 경배가. 근데 현대인들은 뭘 날려버렸어요? 옛날에도 그렇지만 뭘 날려버렸어요? 경배라는 것을 날려버렸어요. 교회가도 경배가 없어요. 지 잘난 맛에 사는데 무슨 경배가 돼요.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라는 것을 하지 않는데 무슨 경배가 되겠습니까? 

  

또 몰라요. 예배당에 갔는데 갑자기 지진이 나가지고 무너져서 벽돌이 한 열두 장이 깔릴 때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이래 나올지 모르겠어요. 다시 원상복귀 되면 경배의 가치에서 뭐로 바뀌느냐 하면 전시의 가치로 바뀔지도 모르죠. 처음에는 경배한다고 해놓고, 망한 죄인이라고 해놓고, 뭔가 숨통이 트이게 되면 자기가 원하는 것만 채택해서 전시의 가치를 추구할 수 있는 그럴 가능성이 많다 이 말입니다. 

  

제가 나이아가라 폭포에 간 것 여러분들 아셔요? 제가 우리교회에 올려놨죠. 삼성스마트 폰으로 찍었다고. 제가 찍은 것이 아니고 제 아내가 찍었고 나는 보조만 했는데. 그 나이아가라 폭포를 찍을 때 찍을 수가 없어요. 원래 나이아가라 폭포에 카메라 들고 가는 사람은 나이아가라 폭포를 하나의 대상으로 보고 ‘찍는 것은 내가 찍는다. 너는 나한테 찍혀버려라.’라는 이런 생각을 하고 가요. 안 가본 사람은 그런 생각을 해요. 

  

그런데 막상 가 보면 촬영 자체가 성립이 안 됩니다. 그쪽에서 물보라가 쳐가지고 비닐이고 뭐고 다 날라 가요. 어떤 사람은 카메라에 비닐을 씌웠는데 이게 화면이 나오겠어요? 제가 보기에는 촬영에 성공한 사람은 우리 부부밖에 없기를 제가 원하고 있어요. 남들은 못하고 나만 해야 고소하니까. 정말 다 포기를 하고 말았어요. 전부 다. 나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찍다가 내가 포기를 하고, 자기를 부인한다고 하죠. 

  

자기를 부인하고 아내 손만 받쳤어요. 안 받쳐주면 카메라가 날라 가니까. 아내는 그냥 들고, 보지도 못했어요. 나는 받치고. 눈에 물보라가 들어오고, 나중에 보니까 그렇게 찍혔어요. 그러다 우연히 거기다가 배경음악을 깔았네요. 배경음악 장엄하대요. 사랑의 교회 호산나 성가대 삼백 명. 그 안에 김자옥 권사님도 들어있는. 물론 살아있을 때. 그 편곡을 너무 잘했어요. 우리교회에 있으니까 나이아가라 폭포 한 번 보세요. 

  

그 폭포가 떨어지는 모습이....근데 그 현장감은 못 미쳐요. 그 현장에는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따라서 나는 거기서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나라는 존재가 여기 앞에 있다는 것조차도 느낄 수가 없어요. 폭포만 있지 나는 없어요. 그냥 폭포만 있어요. 

  

이게 폭포 앞에서만 그런 게 아니고, 인생을 살면서 자기가 정말 사랑하는 여인 앞에서 그렇게 돼요. 그대 있음에 나는 있는 둥 마는 둥 하는. 그걸 가지고 절대적 사랑이라고 하죠. 그대 있음에 나는 있는 둥 마는 둥, 그대 밥 먹음에 나는 먹는 둥 마는 둥, 그대 살아 있으매 나는 죽어도 좋아! 이런 것. 나는 없어져도 괜찮아. 그대만 있다면.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방을 함부로 터치하지 않아요. 왜? 더러운 내가 묻으면 그 값이 떨어지니까. 그냥 바라보기만 하면 돼요. 물론 그냥 바라만 보면 저쪽이 감질나서 또 짜증내겠죠. 어떤 조각품을 바라보듯이. 그걸 가지고 발트베냐민이라는 사람은 ‘아우라’라고 해요. 현대인들은 아우라가 날라 가버렸어요. 아우라가. 왜 날라 갔느냐, 현대인들은 모든 게 복제물이에요. 복제물. 

  

복제물은 바로 소셜 미디어를 통해서 계속해서 복제하다보니까, 복제 자체에 뭐가 없느냐, 원작이 없고 원형이 없습니다. 복제한 것을 복제하고, 복제한 것을 또 복제하고..,팝 아티스트에 보면 마릴린 먼로의 사진을 그냥 복제를 하죠. 똑같은 것. 그리고 캠벨깡통, 통조림을 그대로 똑같이 해놓아요. 이게 현대사회의 특징입니다. 

  

현대사회는 자기들끼리, 그 누구도 원작을 인정하지 않기로 작심하고 모이는 사회가 현대사회에요. 그렇게 구성된 사회가 현대사회입니다. 왜냐하면 시장에서는 시장의 어른인 손이 없어요. 그걸 아담 스미스는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했는데, 시장에서 손이 움직이는데 그 손이 없어요. 안 보여요. 그냥 상품들만 나열될 뿐입니다. 스스로 전시되고 스스로 전시된 것을 고르고 복제품이 양상 될 뿐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이미 자기가 시장에서 하나의 상품으로 진열되기를 원하고 있는 거예요. “나 이정도 아는데 나 사갈 사람?” 이게 마치 뭐와 같은가 하면 지금은 없어졌지만, 청량리 창녀촌이 있잖아요. 안 가봤습니다만 영화 보면 나와요. 여자들이 그냥 야한 옷을 입고 앉아있어요. 와서 고르라는 말이죠. 인형 뽑기 하는 것처럼. 이건 직접적이고 노골적이지만, 사실은 시장 자체가 이런 것이잖아요. 시장 자체가. 

  

시장 자체가 전시가치만 인정하고 경배의 가치는 완전히 사라져버렸어요. 경배가치가. 참 이것이 이 사회, 현대사회의 특징이라고 본다면, 그럼 교회는 어떻습니까? 교회도 골라잡아야 돼요. 어느 교회가 에어컨이 빵빵하고, 어느 교회가 회비 안 내도 놀러 자주 가고, 어느 청년회 모임이 당회에서 자금 나와서 필리핀이나 파키스탄에 단기선교를 보내주고, 어느 교회에서 축구 동호회가 잘 되어 있고, 어느 교회에서 공짜로 아이들에게 영어 가르쳐주고, 어느 교회에서 부모들이 직장 나가면 공부방을 잘 운영하느냐. 교회가 창녀에요. 

  

우리교회 오시면 이런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이때를 위해서, 이걸 생각한 것은 아닌데, 이때를 위함인가, 제가 찍어온 게 있어요. 지금 온갖 것, 현대기계를 다 동원하고 있습니다. 경북 어느 곳에 가니까, 읽어보겠습니다. 서예사군자. 풍물놀이. 컴퓨터교실. 노래교실. 건강체조. 실버댄스. 이렇게 가르쳐요. 어떤 교회는 색소폰. 기타. 교회가 왜 그렇게 합니까? 경북 영양에 가니까 교회에 이게 붙여져 있어요. 레크리에이션 스케줄이 있어요. 우리교회 바로 밑에 있는 수정교회도 꽃꽂이, 드럼, 한자 가르치고 이렇게 해요. 왜 그렇게 합니까? 교회가 창녀거든요. 

  

전시적 가치를 원하니까 교회라는 시장에서 자기가 살기 위해서는 고객들이 원하는 것을 제공하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하면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다.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런 이야기는 없습니다. 그런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면 다 나가버리거든요. 사도바울이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할 때, 심판, 저주 자체에는 뭐가 담겨있습니까? 경배의 가치가 담긴 개념이 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이걸 믿으면 당신이 구원받는다는 이야기가 아니고, 믿든 안 믿든 이게 이미 확정된 미래라는 거예요. 이게. 주의 스케줄이 이미 끝난 거예요. 끝났음을 통보하는 겁니다. 어디에서? 미래에서. 이미 종말이 되면 미래잖아요. 종말 이후가 미래잖아요. 모든 일이 마무리된 상태에서, 그 마무리된 상태가 오늘날을 향하여 거꾸로 침범해서 들어오게 되어 있어요. 들어오게 되면 인간 세상은 계속해서 영원토록 반복적으로 과거가 되는 겁니다. 

  

조금도 현재나 미래라는 것은 인간에게 없습니다. 과거에, 똑같은 과거의 순환적인 반복. 이걸 영겁회귀라고 해요. 니체는 영겁회귀라고 하거든요. 영원토록 과거에요. 과거라는 것이 변형된들 미래에서 못 나오면 과거가 되는 거예요. 목사님 왜 현재는 이야기 안 합니까? 현재라는 것은 없어요. 현재라는 것은 뾰족ᐱ하거든요. 

  

현재에 올라갔다고 하면 미래든지, 과거든지 둘 중의 하나에요. 뾰족하게 현재되는 순간에 미래든 과거든 둘 중의 하나에요. 현재에서 이미 된 것을 완료라고 하고, 못 된 것을 미완료라고 합니다. 히브리어에 동사가 이 두 개밖에 없어요. 현재는 없어요. 완료, 미완료 이거밖에 없습니다. 히브리서 문법에서. 과거(완료)ᐱ미래(미완료) 

  

이 말은 뭐냐 하면 십자가 안이냐, 밖이냐 둘 중의 하나밖에 없어요. 십자가 안은 미래소년 코난이고, 십자가 밖은 과거소년 코난이고 뭐 그렇죠. 딱 둘 밖에 없어요. 중요한 것은 이겁니다. 성경공부를 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과연 천국 갈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우리가 천국 갈 수 있느냐? 몇 년 동안 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지금 어디 사느냐, 미국 사느냐, 중국 사느냐, 한국 사느냐, 캐나다 사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천국 살게 될 것이냐가 중요하잖아요. 

  

그럼 천국 살려면, 문제가 굉장히 간단해요. 천국 살려면, 천국 가기 전에 천국을 아는 사람이 되면 돼요. 못 살아도 괜찮아요. 빵 안 먹어도 괜찮고 먹어도 괜찮은데, 천국이 뭔가를 아는 사람이 되면 되는 거예요. 그렇죠? 그럼 천국에서 뭐 할 건데요? 1번. 논다. 2번. 경배한다. 몇 번 입니까? 경배하죠. 그럼 경배하면 그 경배 할 것을 미리 이 땅에서 하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교육받고 하는 게 전시가치만 챙겼지 경배가치는 들어본 적도 없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경배가치는 없고 전시가치밖에는 찾지 않는 우리가 뭐로 바뀌어야 됩니까? 경배의 가치로 바뀌어야 되죠. 그 바뀌는 방법을 이제부터 알려드리겠습니다. 

  

사물가치라는 것은 뭐냐 하면 그 사물과 나를 일치시키는 거예요. 이게 유혹이라는 거예요. 유혹. 아담이 뭘 따먹었죠? 선악과를 따먹었잖아요.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었는데, 하나님은 아담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고 뭘 문제 삼느냐 하면 선악과를 훼손했다고 문제삼아버려요. 세상에! 인간들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인간들은 하나님과 자기 사이에 아무것도 없이 다이렉트로 직접 교류하고 이야기하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하나님께 중요한 것은 인간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끼어든 게 더 중요해요. 그게 뭐냐 하나는 선악과 나무였고 하나는 생명나무였어요. 마치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평소에 아버지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한 10년 동안 계속 입이 닳도록 너를 사랑한다, 너를 사랑한다고 이렇게 했는데, 하루는 그만 아버지가 좋아하는 도자기를 깼다. 그 아들은 생각합니다. 아버지가 나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도자기를 깼어도, 에이 그럴 수도 있지. 도자기기 중요한 것이 아니고 니 다친 데는 없나? 라고 하면서 나의 건강 안위부터 챙길 거라고 생각을 했죠. 

  

근데 아버지가 퇴근하자마자 도자기 깬 것을 보고 “이 도자기 누가 깼어? 니가 깼어? 나가! 내 자식 아니야.” 이런 아버지일 줄은 몰랐죠. 모른 본인 책임이죠. 천국은 뭐냐, 도자기 깼다고 닦달 내시는 아버지를 이해하는 것이 천국입니다. 나를 사랑해 주는 것이 아니에요. 도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천국의 주인공입니다. 그 도자기가 뭐냐, 언약입니다. 언약. 

  

인간의 종교가 뭐냐 하면, 종교는 신이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신이 나를 내치지 않을 거라는 기조 하에서 움직이는 것이 종교에요. 아니, 만들어놨으면 책임질 거라는 생각입니다. 이게 종교라는 말입니다. 종교. 나는 피조물고 주님은 창조주이고. 인간적인 비유를 하자면 나는 아들이고 하나님은 부모님이고. 세상에 어느 부모가 아들을 내치는 부모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나 그것은 인간이 상상하는 잘못된 나라에요. 그런 나라는 하나님 나라가 아니고 나의 나라가 돼요. 나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는 나의 나라가 아니고 아들의 나라에요. 주님께서는 아들에게 관심이 있어요. 아들이 뭘 했기에 관심이 있습니까? 아들이 아버지와 맺은 언약을 완성한 그것이 주님에게는 가치가 있는 겁니다. 주 되심에. 그럼 남은 문제는 뭐만 알면 되겠어요? 언약을, 도자기를 알면 되겠죠. 

  

언약이라는 것은 바로 무지개를 좇는 아이와 같아요. 무지개가 분명히 있어요. 근데 가까이 가면 무지개가 있어요? 없어요? 가까이 가면 사라지죠. 그럼 멀리가면 무지개가 있어요? 없어요? 보이죠. 가까이 가면 먼 것이 사라지고 멀리가면 가까운 것이 사라지는 것. 이 말은 뭐냐, 인간의 언약은 인간이 다룰 수 없다. 인간이 소유하거나 성취하거나 지킬 수가 없는 거예요. 지금 지킬 수 없는 말씀을 하고 있는 거예요. 

  

디도서 2장 6절 봅시다. “너는 이와 같이 젊은 남자들을 권면하여 근신하게 하되” 7절, “범사에 네 자신으로 선한 일의 본을 보여 교훈의 부패치 아니함과 경건함과” 8절,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게 하라 이는 대적하는 자로 하여금 부끄러워 우리를 악하다 할 것이 없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구체적으로 이렇게 하라는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전부 다 추상적이에요. 여기에 나오는 것이. 2절에 “절제하며 경건하며” 뭐가 절제인데? 뭐가 경건인데? 뭐, 예를 들어줘야죠. 예를. 근데 예를 안 들어줘요. 왜? 예를 들어주면 왕창 다 따라 해요. 아까 무지개 했죠. 분명히 말씀이 있어요. 근데 말씀 지키려고 가까이 가면 말씀이 있어요? 없어져요? 없어져요. 누가 가까이 다가서기 때문에? 이 몸뚱아리가 다가서기 때문에 그래요. 이 몸뚱아리가. 내가 한 번 지켜보겠다고 나서는 이게 화근입니다. 

  

자, 한 번 예를 들어봅시다. 투수는 공을 던지는 사람이죠. 야구에서 투수는 공을 던지고 포수는 공을 받는 사람이죠. 투수가 잘 한다는 의미는 뭡니까? 공만 던지면 잘 합니까? 그럼 좋은 투수에요? 자, 지금 뭐냐 하면 좋은 투수가 돼야 된다는 거예요. 그럼 좋은 투수는 공만 던지면 좋은 투수에요? 아니죠. 

  

동네 애들 공만 다 던진다고 메이저리그 투수 시켜줍니까? 아니잖아요. 그럼 좋은 투수라고 하는 것은 누가 결정하는 거예요? 이게 아주 모호하기 짝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가까이 가면 사라진다 이 말입니다. 제 말은 언약은 법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미 예수님에게서 일어난 일을 성경이 퍼트리고 있어요. 예수님에게 뭐가 일어났느냐 하면 참사가 일어났어요. 어떤 참사입니까? 예수님이 스스로 자살했습니까? 누가 죽였습니까? 누가 죽였죠. 누가 죽였습니까? 사람의 대표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죽였잖아요. 이게 참사에요. 참사. 그러니까 인간에게 좋은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좋은 게 없죠. 

  

아까 누가복음 18장에서 바리새인이 뭐했습니까? 자기가 구제하고 봉사하고 십일조 한 게 자기 눈에 좋아 보이죠. 그러나 막상 예수님 앞에 나오니까 자기에게 좋은 게 아니고 뭡니까? 이 사람, 바리새인은 지옥 갔잖아요. 자기 딴에는 좋은데 누구 앞에 서면? 예수님 앞에 서면 이게 참사가 되는 거예요. 

  

류현진이가 우리나라에서 야구 제일 잘하죠. LA다저스에 있잖아요. 오늘 뉴스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4회 말에 류현진 대참사” 10점 내줬다고 대참사라고 하는 거예요. 한국 야구선수 중에 오늘도 10점 내준 사람들이 많아요. 근데 그 열점 내준 투수는 대참사라고 왜 안 하는 겁니까? 만약에 어떤 선수가 열점을 내줬는데 아주 잘하는 선수에요. 열두 살 먹은 초등학생이에요. 12살 먹은 초등학생이 성인들 야구에서 열점내주는 것, 이거는 정말 잘한 투수라 이 말이죠. 

  

영국에서 어떤 프로축구선수가 축구했는데 3대3으로 비겼어요. 프로선수가. 자기는 3대3으로 비긴 것을 만족했어요. 왜 만족했느냐 하면 자기편은 1명이고 상대방은 30명이고. 30대2로 붙어가지고 3대3으로 비겼어요. 얼마나 뿌듯한지. 근데 30명이 누구냐 하면 초등학생들이에요. 초등학생 애들 30명하고 프로축구선수, 영국의 프리미엄리그의 정규선수하고 붙어가지고 3대3. 애들한테 축구를 전파하기 위해 이벤트 식으로 해서 3대3으로 비겼어요. 30명이 우르르 달려들고, 걔들은 오프사이드도 없이 우르르 그냥 쫓아다니면 되는데. 

  

자, 좋다는 게, 이 말씀에 어떤 사례가 없어요. 그냥 부패치 아니하고 경건함과 책망할 것이 없고...계속 나오는 거예요. 그럼 이 말은 뭐냐 하면 니가 스스로 판단하기를, ‘나는 경건해. 나는 이만하면 착해. 나는 이만하면 절제한 거야.’ 이렇게 하지 말고 반드시 누구 앞에 서라 이 말입니까? 이 말씀을 주신 명령자 앞에 서버리면 이 말씀은 내가 지킬 것이 아니고 이미 주님께서 다 지킨 거예요. 다 지켜놓고, 이것을 누구한테? 새로 늙은 남자라고 지목한 사람에게 그걸 거기다가 빡빡하게 집어넣어버리는 거예요. 

  

그럼 늙은 남자는 그냥 늙은 남자가 아니고 디도서 2장 2절을 봅시다. “늙은 남자로는 절제하며 경건하며 근신하며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이라고 할 때, 이 늙은 남자가 누군지 안 나와 있고 그리고 전적으로 어떤 일을 했기에 이렇게 말하는지, 어떤 사례나 모델, 매뉴얼이 안 나와요. 매뉴얼이. 이렇게, 이렇게 하고 아침 열시에 와서 주차관리하고...뭐, 이런 게 전혀 없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 늙은 남자로 절제하며 경건하며 근신하게 되면 이 사람은 무슨 이야기를 하겠어요? 무지개, 아까 제가 이게 법이 아니고 언약이라고 했죠. 언약의 법칙은 가까이 가면 사라지고 멀리가면 나타나고. 이 두 개를 다 할 수 있는 것은 뭐냐 하면 바로 무지개 밑, 또는 무지개 안에 있음을 인정하면 되죠. 무지개가 뭡니까? 노아언약이죠. 무지개언약이에요. 

  

하나님의 언약은 누구하고 체결했느냐 하면 우리하고 한 게 아니에요. 언약은 아버지와 아들하고 체결한 겁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하고 맺은 것이 언약이에요. 그런데 우리가 언약을 지키려고 했던 것이 문제였단 말이죠. 옛날에, 구약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주니까 그 율법을 본인이 지키겠다는 거예요. 그러면 안 돼요. 십계명을 주니까 십계명을 본인이 지키겠다는 거예요. 

  

그들로서는 할 말이 많아요. 이게 아니라고 한다면 그들은 화내요. 할 말이 많아요. 뭐냐 하면 십계명에 “부모를 공경~” 그 다음에 뭡니까? “하라’는 명령으로 되어 있죠. 명령. 히브리어에 보면 명령이 나오잖아요. 옛날에는 모음이 없고 자음밖에 없었지만. 명령이 나온다고요. 명령이. 명령하니까 주체로서 어릴 때부터 우린 명령 받았잖아요. 명령은 뭐하라고 준 거다? 지키라고 준 거다. 너무나 당연한 건데 그게 아니라면 뭐지? 이래 된다 말이죠. 

  

자, 갈라디아서 3장을 한 번 봅시다. 3장 17절,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아까 언약을 뭐라고 했습니까? 무지개처럼 여기라고 했죠. 무지개처럼 여기라고 한 이유가 있죠. 

  

무지개는 가까이 가면 사라지고 멀리가면 보이고. 분명히 있는데 가까이 가면 없어지고 그렇죠. 그 이유가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있음이 강하기 때문에, 내가 만져야 된다는 것이 강하기 때문에 무지개는 사라진 거예요. 그냥 저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면 있는데, “저거 가질까?” 이러면 그건 없어지는 거예요. 내가 말씀 지키려고 하면 그 말씀 없다 이 말입니다. 

  

여기도 나와 있죠. 하나님께서 사백삼십 년 후에 율법을 주셨잖아요. 그러면 율법이 주어진 것이 율법 자체를 지키라고 준 것이 아니고, 다른 것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다른 것이 현존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있다 이 말이죠. 그게 뭐냐, 아브라함의 언약이에요. 그럼 아브라함 언약을 위해서 보조하는 것이 뭐다? 모세언약이 되는 겁니다. 

  

언약이라고 다 같은 언약이 아니에요. 보조언약이 있고 주된 언약이 있는데, 주된언약은 아브라함 언약이고, 보조언약은 율법이라 이 말이죠. 아브라함 언약의 의미를 살리기 위해서 보조적인 것이 받쳐준 거예요. 왜냐하면 보조언약인 율법이 들어가 버리면 인간은 지키려고 들 게 분명하고, 지키게 되면 자기가 지켰다고 우길 거고, 전시적 가치니까. ‘어느 것을 지킬까? 오늘은 이거 지키고 내일 지킬 것은 남겨두어야지.’ 지킨 만큼 자기는 의롭다고 여길 거니까. 지키라고 했는데 지켰으니까 이건 의롭죠. 어릴 때부터 인간은 그것을 교육받았으니까. 

  

“밥만 먹지 말고 콩도 먹으면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 “콩 먹었으니까 맛있는 거 사 주세요. 햄버거 사주세요.” 잘했으니까 상 주는 거예요. 이게 인간의 주체가 형성된 거예요. 나쁜 짓 하면 벌 받고 착한 일하면 상 받고. 우린 어릴 때부터 그렇게 양육 받았고 그게 선악체계를 훼손한 그 후유증 아닙니까? 그게. 천국 못 간 후유증. 그것 때문에 우리가 천국 못 가요. 착하기 때문에 천국 못 간다니까요. 착해지려고 하기 때문에 천국 못 가는 거예요. 

  

그런데 아브라함은 착하고 자시고 뭐고 할 것도 없었어요. 하나님의 약속이 오매, 그걸 믿으매 뭐가 된다? 하나님의 의가 되는 거예요. 이건 아브라함의 아이디어가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나는 율법을 못 지키니까 그런 식으로 구원해주세요.”라고 요청해서 결제 받아 내려온 그런 정보가 아니에요. 그냥 아브라함은 일방적으로 당했어요. 그냥 하나님 앞에 당한 거예요. “뭐지?” 영어로 “What?” “뭐지 이거? 왜 이래? 이거 내가 알던 현실이 아닌데? 동행이 이런 모습인가?” 

  

누가복음 끝에 보면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가 있었잖아요. 예수님이 살아서 따라왔다 이 말이죠. 예수님이 따라서 동행했다 이 말입니다. 처음에는 못 알아봤지만 나중에 알아봤잖아요. 그러면 죽어서 부활되지 마시고 안 죽으면 되잖아요. 죽고 난 뒤에 부활해서 놀라게 하지 마시고, 처음부터 안 죽고 같이 계셔서 로마군사가 올 때 물리치시면 되잖아요. 그러면 그 백성, 저 백성 다 천당 가잖아요. 

  

근데 왜 배신을 해서 천국 가도록 만드시는 이유가 뭡니까? 니가 아는 천국은 천국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전시적 가치로 뭉쳐진 천국은 천국이 아니에요. 천국은 경배적가치가 있어야 되지 전시적가치가 있으면 안 돼요. 내가 알아서 가는 나라가 천국 되면 안 돼요. 그거는. 내가 살고 싶은 본성의 연장선이 천국이 되면 안 돼요. 내가 살고 싶으면 내가 주인공이 돼버린다니까요. 

  

그러면 그거는 천국이 아니고 자기나라가 돼요. 여기 갈라디아서 3장 17절에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못한다.” 보조적 역할을 하는데, 자 여기서 문제가 뭐냐 하면 왜 아브라함의 언약에 있어서 모세 율법이 꼭 있어야, 그게 꼭 보조적 역할을 해야 아브라함의 언약이 언약답게 되는 이유가 뭐냐 하는 겁니다. 

  

처음부터 믿음으로 의롭다 했으면 믿음으로 의롭다 하는 걸로 가야지, 왜 율법이 들어갔다가 빠지고 왜 그렇게 하냐 이 말입니다. 모르겠죠? 예를 들면 엄마가 “오늘 저녁에는 잡채 한다.”라고 해요. 그럼 애들이 “와! 잡채한대.” “그냥 먹기만 하면 돼.” 다들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저녁에 엄마가 문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이 아니고 담을 타고 들어오는 거예요. 엄마가 담타고 들어오는 것하고 잡채하고 무슨 관계가 있는데? 이게 보조적 역할이에요. 이러면 애들이 알아듣겠어요? 담타고 들어오는 것하고 잡채 만드는 것하고 무슨 관계가 있다고? 

  

지금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하고 율법이 들어온 것하고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아무 관계가 없어요. 아무 관계가 없는데 예수님하고는 관계가 있어요. 인간의 믿음은 믿음이 아니기 때문에. 그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의롭게 되는 것은 예수님이 주신 의가 아브라함에게 있어야 돼요.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걸 알았어요. 알고, 자기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예수님이 오기를 기다렸고 오고 기뻐했어요. 

  

왜? 예수님이 뭘 했기 때문에? 자기 믿음이라는 죄 때문에 대신 피 흘리는, 그 십자가에 죽는, 그런 일을 경유해서 비로소 예수님의 믿음이고, 예수님의 믿음과 내 믿음을 교체함으로써 그 예수님이 주신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사실,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아브라함은 성령에 의해 미리 땡겨서 알게 된 겁니다. 

  

왜 아브라함의 언약에 모세언약이 보조로 들어가야 하는가를 이제 아시겠죠? 인간은 반드시 전시적 가치를 추구하기 때문에 뭔가 좋다고 하면 다 믿고 뭔가 좋다고 하면 시키는 대로 다 해요. 좋은 것을 왜 안 골라? 좋은 것은 소유하려고 하고 획득하려고 하고 내 것 만들려고 하고. 

  

그런데 율법이 딱 주어지니까 그 모든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선택하거나 획득하거나 예상하는 그 전체가 율법에서 저주가 되고 죄가 된다는 사실을 율법을 통해서 알려줍니다. “니가 뭘 기대해? 니가 뭘 기다려? 백날 기다려봐라. 죄인이 기다려봤자 지옥 가는 것 밖에 더 있어?”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바로 갈라디아서 3장 10절에 나옵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이래 되어 있죠.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다. 그러면 저주 안 받기 위해서 율법 행위에 아 속하면 되겠네요? “나는 율법 없습니다.”이러면 되는데? 그러면 될 거 아니겠습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예수님이 인간의 대표자가 됨으로써 모든 인간은 이미 본인이 율법 바깥에 있겠다고 백날 어떤 결정을 하든 상관없이 인간 자체가 율법 아래 태어나게 되어 있어요. 그걸 갈라디아서에서 육이라고 합니다. 육은 율법 아래 이미 놓인 상태를 육이라고 합니다. 

  

이런 말씀을 사람들이 교회에서 이해 못하는 이유가 뭐냐, 전시적 가치를 하기 때문에. “나는 과학자인데 회사 다닌다. 집에 가면 나는 남편이고 가장이다. 교회가면 장로다. 하지만 이런 것들로 구원받지 못하고 나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이게 바로 전시 아닙니까? 

  

물감 짜놓는 것을 뭐라고 해요? 팔레트라고 하죠. 팔레트. 팔레트에 보면 빨강색도 있고 노랑색도 있고 온갖 색깔이 다 있죠. 그럼 화가가 어떻게 합니까? 죽 전시되어 있는 물감을 보고 필요한 것을 골라서 찍어버리면 그 그림의 작품의 주인공은 누굽니까? 화가 자신이 되겠죠. 인간은 그런 식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거예요. 

  

자, 회사에 다녀야 화목하고, 직장에서 돈을 벌어야 가정이 화목하고, 자식한테는 좋은 아빠가 되어야 하고, 교회 가서는 예수 믿어야 교인답고. 완전히 포트폴리오, 아주 분산투자를 잘 해놨어요. 한쪽이 펑크 나면 다른 쪽에서 회복하고. 포트폴리오로 딱 되어 있어가지고, 브라질에 투자해놓고, 인도 투자해놓고, 중국 투자해놓고, 한쪽이 이윤이 안 나오면 다른 쪽에서 이윤내서 보상받고. 투자의 재능인가? 전략인가? 부챗살처럼 쫙 펼쳐놓고. 

  

그럼 이 사람은 지금 누굴 경배하고 있습니까? 본인을 경배해요. 본인을 경배하니까, 자기가 이렇게 착실하게 살아가니까, 교회는 왜 가요? 내가 이렇게 착실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식구들만 알아주면 재미없잖아요. 누가 알아줘야 돼요? 소위 주의 종이라는 목사, 장로가 알아주게 되면 나의 인생에, 나의 나와바리, 영역은 확장이 되는 겁니다. 집에서만 알아주는 것이 아니라 교회 가서도 믿음이 좋다고 알아주는 사람. 사는 게 뭐 있어요. 사람들한테 인정받는 그게 사는 재미잖아요. 그게 바로 자기 자신을 경배하는 거예요. 

  

그런데 자기 자신을 경배하는 그것이 결국 뭐냐 하면, 그걸 시장원리로 보게 되면 하나의 상품이 되는 겁니다. 그 상품이 뭐냐 하면 인간이 사물화된 겁니다. 물체화 된 겁니다. 물체화. 사람이 아니므니다. 사람이 아니고 물건이에요. 시장에 나가서 내가 이 정도로 가치가 있으니까 나를 써달라고 전시를 하는, 그러한 가치 있는 존재로서 자부를 하고 있는 겁니다. 평생을 사물적 존재로 보게 되면 그런 사람이 모인 곳이 사물적 왕국입니다. 사물의 왕국. 

  

사물의 특징이 뭐냐 하면 만나면 탁탁 이게 소리가 난다는 겁니다. 당구공끼리 서로 만나면 소리가 나죠. 소리가 나면서 상대방을 튕겨버립니다. 자기가 보존되기 위해서. 자기가 갖고 있는 에너지가 있기 때문에. 고유의 에너지를 지키기 위해서 남을 튕겨버려요. 하나의 당구공처럼 되어 있는 겁니다. 이걸 지난 수련회 때 골로새서 강의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두자로 입자라고 했죠. 입자. 

  

입자와 입자의 만남에서 뭐가 생기는가, 운동에너지가 생기는 거예요. 에너지. 그래서 세상은 물리에서 말하는 것처럼 에너지 세상이에요. 에너지를 힘이라고 이야기하고 그걸 사회적 용어로 이야기하면 권세, 권력이라고 해요. 지금 문재인이 에너지가 많습니까? 홍준표가 에너지가 많습니까? 홍준표 미국에 갔어요. 문재인이 에너지가 많죠. 

  

그리고 그 에너지가 없으면 못사니까. 왜? 에너지가 니는 뭐 해라, 뭐 해라, 무슨 국? 조국 민정수석보고 수사하라고 하면 그 사람은 드디어 권력의 에너지 속으로 들어오는 겁니다. 에너지 속에 들어온 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출세라고 해요. 출세. 볼록 튀어나왔다는 거죠. 이걸 회사로 말하면 승진했다고 하는 거예요. 권력이 많으니까. 

  

그런데 주님은 어떻게 했습니까? 사람 앞에 높임을 받는 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다고 했죠. 주님을 배척한, 주님을 사형시킨 이 사회에서 높임이 되고 싶어 하는 것은 무슨 가치를 버려버린 거예요? 뭘 배척한 거예요? 경배의 가치를 버린 거예요. 그러면 죽어서 천국이냐, 지옥이냐가 결판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살아있으면서 천국과 지옥은 결판나버린 거예요. 

  

전시의 가치를 가지고 싸움을 하느냐, 아니면 경배의 가치 앞에서 자기가 화로다 망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숯덩이처럼 아느냐. 그게 결정 나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읽었던 말씀을 보면서, 특히 8절에 보면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게 하라 이는 대적하는 자로 하여금 부끄러워 우리를 악하다 할 것이 없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을 어떻게 보느냐 하면 내가 죄인 되었을 때에 주께서 나를 사용해서 바로 이러한 결과들을 내 주변에 펼쳐지게 하는 거예요. 이런 결과들을. 

  

그럼 나는 뭐가 됩니까? 어떤 때는 늙은 남자가 되고, 어떤 때는 젊은 남자가 되고, 그것도 바른 말씀을 지키는. 또 어떤 때는 늙은 여자가 되고, 어떤 때는 젊은 여자가 되는 거예요. 이게 어떤 특정인에게 주어지는 말씀이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 누구나 주어지는 겁니다. 

  

여기에 늙은 여자 한 번 봅시다. 3절, “늙은 여자로는 이와 같이 행실이 거룩하며 참소치 말며” 그 다음에 뭐라고 합니까? “많은 술의 종이 되지 말며” 그 당시에 여자들이 술을 많이 먹었는가봅니다. 많은 술의 종이 되지 아니한다. 이게 늙은 여자한테 했기 때문에 젊은 남자는 많은 술을 먹어도 돼요? 어떤 늙은 여자가 술을 안 먹고, 어떤 젊은 남자는, “나는 이 본문 말씀에 해당 안 되는 젊은 남자니까 술을 먹어도 됩니다.”라고 이러면 둘 사이에 대화가, 소통이 안 되겠죠. 왜? 저쪽에서는 경배의 가치를 이야기하는 반면에 이쪽에서는 전시의 가치, 내가 필요한 것만 골라서 내 스스로 의롭게 되어서 천당 가려고 이 말씀 지킨다고 하니까 서로 대화가 될 턱이 없죠. 

  

그렇다면 늙은 여자에게 술의 종이 되지 말라고 한다면, 그거는 늙은 여자한테 하는 것이 아니고, 같은 지체 안에 있는 나에게도 동일하게 하신 주의 말씀이라고, 명령자가 나에게 그렇게 이야기한 것이라고 받아들이게 되면, ‘아, 술이라는 것을, 이게 많은 술을 먹어서는 안 되는구나.’ 라는 것을 아는 겁니다. 

  

자, 술 이야기를 좀 해봅시다. 여기에는 구체적인 사례가 없으니까 사례를 제가 만들어가는 거예요. 이 본문은 너무 관념적이고 추상적이니까. 술을 왜 마실까요? 술을 왜 마시냐 하면 이게 전시의 가치 때문에 그래요. 전시의 가치. 술이 언제 만들어졌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 술 때문에 일들이 많이 났어요. 노아도 이 술 때문에 일이 터졌잖아요. 술 때문에 일이 많은데.

  

술은 분명히 있습니다. 포도주가 있는데, 술은 왜 마시냐, 전시의 가치를 활용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 어떤 사람이 있는데, 포도 있고, 빵 있고, 여기 포도주가 있다고 합시다. 포도가 있으면 먹죠. 또 여기 돼지고기, 소고기 있으면 먹을 수 있어요. 빵 먹는다. 이거 먹고, A먹고, B먹고, C먹고, 술이라는 D를 안 먹을 수 있겠어요? 없겠어요? 전시되어 있는데? “저건 뭐지? 한 번 먹어볼까?” 한 번 먹어본다고요. 포도 먹듯이, 포도 먹으면 맛있거든요. 

  

근데 못 먹는 독초를 먹었다고 합시다. 그러면 뱉어내겠죠. 그럼 술을 한 번 보세요. 여러분 이게 어려운데, 술을 보고, 만약 술이 먹을 게 아닐 것 같으면 주님께서는 술 에다가 독을 타야 돼요. 먹고 에잇 퉤! 퉤! 해버리면 술 취할 일이 없잖아요. “술 먹는 인간이 바보지. 어떻게 그런 걸 먹나? 그게 무슨 맛이 있어?” 그런데 전시의 가치에 의해서 술을 먹으니까 이게 어떻습니까? 밥 생각이 안 나네. 왜? 밥 먹어도 말짱한데 술을 먹으니까 이게 환락으로 인도하고 천국으로 인도하거든요. 술 먹으면. 

  

다들 술을 안 먹어봐서 술 맛을 알 수가 있어야죠. 제가 강의하기 힘들어요. 술을 전혀 안 먹으니까. 이제는 술을 먹기 위해서 일을 해요. 이거는 왜 그러냐 하면 선악과를 따먹고 에잇, 퉤! 퉤! 해야 하는데, 선악과 어떤 나무에요?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죠. 그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게 누가 그렇게 선악과를 만들었습니까? 마귀가 만들었어요? 하나님이 만들었어요? 하나님이 만들었잖아요. 

  

인간을 뭐 되게 만든다? 죄인 되게 만들어서, 율법의 저주아래 있게 해서 누구만 드러내게 한다? 예수 그리스도만, 천국만, 아들의 나라만 만드는 그 작업에 우리가 말려든 거예요. 왜? 피조물이니까. 피조물의 의견을 왜 물어요. 아버지와 아들이 한 일에 이 피조물의 의견을 왜 묻습니까? 우리는 활용당하면 되죠. 활용당하면. 

  

그러면 술의 종이 되지 말고, 라는 이 말씀은 너희들이 술을 먹지 말라고 해도, 물론 안 먹을 수도 있어요. 안 먹을 수도 있지만, 나는 술은 꼴 보기도 싫다고 하는 그런 인간은 없습니다. 말씀이기 때문에, 법을 지키기 위해서 안 먹겠다고 하는 것하고, 나는 처음부터 술은 안 땡긴다고 하는 이런 것은 없다는 말입니다. 

  

뭘 먹지 말라, 선악과 따먹지 말라, 뭘 먹지 말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냐? 그럼 다 좋아하게 되어 있어.”라는 것을 전제로 깔고 하는 이야기에요. “술은 써서 못 먹겠다.” 그럼 달콤하게 만들면 되죠. 그게 뭐 어려운 문제에요? 달콤하게 만들면 되죠. “술은 너무 취하더라.” 취하라고 먹는 게 술 아닙니까? 안 취하면 그게 쌀뜨물이지 그게 술이겠어요? 

  

술은 노림수가 있어요. 이거 먹고 모든 근심걱정을 잊어보겠다고 술을 먹는 거예요. 또 이 소리 듣고 오늘 저녁에 술 생각이 나가지고 소주 한 됫병 먹을지도 몰라. 사람은 하지 말라고 하면 더하고 싶어져요. 더 하고 싶어진다고요. 술 취하지 말라고 안 하면 술 생각 안 할 텐데, 술 취하지 말라고 하는 그 순간에 먹게 되어 있어요. 

  

이게 로마서 7장에 나오는데 율법이 하지 말라고 함으로써 우리는 더 땡기는 요소가 솟아나게 하는 하나님의 작전입니다. 우리는 피조물이니까. 예수님을 증거 하기 위해서 어떤 식으로든 우리의 체면과 명예 같은 것은 아예 계산도 안 해요. 그냥 지저분하게 사용해버려요. 근데 그렇게 사용한 것을 감사히 여기면 천국이고, 거기에 대해서 분노하면 지옥이고 그런 겁니다. 

  

그 당시에 늙은 여자들이, 할머니들이 외로우니까 술에 많이 호소했는지, 그레데 교회에서 술 먹지 말라고 한 겁니다. 근데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늙은 여자에게만, 그들에게만 해당된 사항이 아니고, 오고 오는 모든 인간에게 동일한 명령자가 동일한 내용으로 말씀한 것이 이 내용입니다. 

  

그 다음에 4절, “저들로 젊은 여자들을 교훈하되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5절, “근신하며 순전하며 집안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라” 이 말씀을 이해할 때 이렇게 하면 돼요. 젊은 여자 치고 근신하는 여자 없고, 집안일을 하지 않고, 선하지 않고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지 않는 여자가 젊은 여자의 기본이라고 보시면 돼요. 그렇기 때문에 이 말씀을 준 거예요. 

  

그래서 이 말씀을 지키면 지킬수록 거기에 대한 반대되는 요소가, 지킨다고 하기 때문에 점점 그 안에서 발굴이 되고 개발이 돼요. 근데 5절 마지막이 뭡니까?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누구에게서 나왔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왔죠. 예수 그리스도의 그 경배의 가치를 훼손하지 않기 위해서. 

  

따라서 그걸 결론적으로 하면 회개할 수밖에 없죠. 이걸 지킨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못 지킵니다.” 이게 바로 그리스도를 더욱 경배하게 하는 거예요. 이걸 지켰다는 것으로 나오면 안 되고, 역시 주님의 십자가 복음밖에, 십자가 희생밖에 없다는 이런 결론으로 나와야 이게 복음이 되는 거예요. 

  

그게 또 3장에 보면 나와요. 3장을 미리 볼까요? 5절,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긍휼하심이란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가 구원받는데 조금도 보탬이 된 게 없다는 뜻이에요. “아이고, 인간아! 참 패버릴까 보다. 내가 참 봐준다.” 이게 긍휼이에요. “패버릴까? 봐준다.” 이게 긍휼이라니까요. 팰만한데 안 패겠다는 거예요. 예수님의 자기의 자유권, 자율권입니다. 

  

그 다음에 6절 봅시다. “너는 이와 같이 젊은 남자들을 권면하여 근신하게 하되” 7절, “범사에 네 자신으로 선한 일의 본을 보여 교훈의 부패치 아니함과 경건함과” 근신하게 한다는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나쁜 짓 했다는 것을 항상 전제로 깔고 살라는 이 말입니다. 촐랑대지 말고. 

  

그 다음에 8절,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게 하라 이는 대적하는 자로 하여금 부끄러워 우리를 악하다 할 것이 없게 하려 함이라” 여기 대적하는 자라고 하니까, 교회라는 것은 그냥 기능하는 것이 아니고 악마의 정체를 밝혀서 십자가 외에는 다른 복음이 없음을 증거 하는 기능을 교회가 계속 하라는 이 말입니다. 

  

결국은 뭡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 되시고 지금 교회와 함께 있다는 말씀입니다. 말씀을 훼방하지 말고 악에게 대적하고. 이것은 너라는 너 자신의 체면과 자존심을 위해서 이 땅에서 살아가는 그런 게 아니고, 바로 경배의 가치를 교회 속에서 유일하게 드러내기 위해서 주께서는 성령으로 이 말씀을 주신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살다보니 참 시장바닥에 내던져졌습니다. 남들이 나를 가치 있는 자로 봐줘야 되고 인정해줘야 한다는 근심걱정이 우리로 하여금 힘들게 살게 만들었습니다. 이제는 마귀한테 쫓기지 말고 이미 구원해주신 그 구원에 감사하면서 세상이 어떤 세상이고 주님이 어떻게 배척당하는지를 마음껏 세상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