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의존교회 170512b (전시가치)-이 근호 목사
중부교회에 안 다니면서 중부교회에 주차를 했는데, 그것이 왜 성령의 역사로 절제에 해당 되는지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도저히 이 성경말씀의 교훈은 납득이 되지 않아요. 왜냐하면 성경에 대해서 인간의 주체를 경유하면.... 첫째 시간을 다시 해봅시다. 인간의 주체는 더욱더 자기를 견고하게 하고 단도리 하기 위해서 법을 자꾸 찾고 있어요. 이 법을 지킴으로써 점점 더 이 주체는 강화되고 더 단단해지고 멋있어 보이죠.
그런데 주님께서는 법을 준 게 아니고 뭘 줬습니까? 명령자를 주죠. 법의 명령자. 그럼 주체가 둘이 되니까 여기서 경쟁이 생기는 겁니다. 경쟁이 생길 때, 경쟁이 생기도록 주님께서 유도하시는 거예요. 그럼 유도하는 방법이 뭐냐 하면 이겁니다. 경배의 가치와 전시의 가치를 나누는 겁니다. 경배의 가치⧸전시의 가치.
전시의 가치라고 하는 것은 쇼윈도show window, 보여주는 거예요. 골라잡는 것. 인간은 자기의 주체됨을 주님 앞에서까지, “나 자신이 주님 앞에 지거나 포기하거나 없다고 여기거나 죄인이라고 고백하기 싫습니다. 내 주체는 어릴 때부터 가져온 주체이고 줄곧 관성으로 이어진 주체기 때문에 나는 주님 앞에서도 나 자신을 포기할 마음이 추호도 없습니다.”라고 할 때, 그때 그 주체가 하는 행동이 뭐냐 하면 전시의 가치에요.
죽 보면서 어느 것이 나한테 이익이 되고 보탬이 되는가를 골라잡는 그런 행동을 하게 됩니다. 백화점에 옷이 죽 있으면 나한테 맞는 것을 골라잡잖아요. 전시한 옷을 골라잡듯 법들을 주면 저 법들 중에서 이거는 나중에 지켜야 되고, 저거는 지금 지켜야 되고, 이거는 좀 여유 있을 때 지키고, 요건 지킨 거고 하면서 골라잡을 수 있는 권한이 본인한테 지금 있다는 겁니다.
근데 경배의 가치는 뭐냐 하면 무조건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하는 거예요.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경배라는 것은 경배한다고 경배가 되는 것이 아니에요. 드럼치고 기타 치면서 찬양한다고 해서 경배가 아니고, “주님 만나니까 나는 망해도 당연하고 나는 망하고 지옥 간다고 하더라도 잘하겠습니다.”라는 이런 고백. 경배의 가치에요.
나의 운명이나 어떤 미래에 대해서 나의 기대나 희망이 요만큼도 포함이 되지 않는 것. 내 미래의 운명에 대해서 내가 전혀 기여하는 바가 없는 것. 손 떼는 것. 그럴 때만 이게 뭐가 되느냐 하면 경배가 돼요. 경배가. 근데 현대인들은 뭘 날려버렸어요? 옛날에도 그렇지만 뭘 날려버렸어요? 경배라는 것을 날려버렸어요. 교회가도 경배가 없어요. 지 잘난 맛에 사는데 무슨 경배가 돼요.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라는 것을 하지 않는데 무슨 경배가 되겠습니까?
또 몰라요. 예배당에 갔는데 갑자기 지진이 나가지고 무너져서 벽돌이 한 열두 장이 깔릴 때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이래 나올지 모르겠어요. 다시 원상복귀 되면 경배의 가치에서 뭐로 바뀌느냐 하면 전시의 가치로 바뀔지도 모르죠. 처음에는 경배한다고 해놓고, 망한 죄인이라고 해놓고, 뭔가 숨통이 트이게 되면 자기가 원하는 것만 채택해서 전시의 가치를 추구할 수 있는 그럴 가능성이 많다 이 말입니다.
제가 나이아가라 폭포에 간 것 여러분들 아셔요? 제가 우리교회에 올려놨죠. 삼성스마트 폰으로 찍었다고. 제가 찍은 것이 아니고 제 아내가 찍었고 나는 보조만 했는데. 그 나이아가라 폭포를 찍을 때 찍을 수가 없어요. 원래 나이아가라 폭포에 카메라 들고 가는 사람은 나이아가라 폭포를 하나의 대상으로 보고 ‘찍는 것은 내가 찍는다. 너는 나한테 찍혀버려라.’라는 이런 생각을 하고 가요. 안 가본 사람은 그런 생각을 해요.
그런데 막상 가 보면 촬영 자체가 성립이 안 됩니다. 그쪽에서 물보라가 쳐가지고 비닐이고 뭐고 다 날라 가요. 어떤 사람은 카메라에 비닐을 씌웠는데 이게 화면이 나오겠어요? 제가 보기에는 촬영에 성공한 사람은 우리 부부밖에 없기를 제가 원하고 있어요. 남들은 못하고 나만 해야 고소하니까. 정말 다 포기를 하고 말았어요. 전부 다. 나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찍다가 내가 포기를 하고, 자기를 부인한다고 하죠.
자기를 부인하고 아내 손만 받쳤어요. 안 받쳐주면 카메라가 날라 가니까. 아내는 그냥 들고, 보지도 못했어요. 나는 받치고. 눈에 물보라가 들어오고, 나중에 보니까 그렇게 찍혔어요. 그러다 우연히 거기다가 배경음악을 깔았네요. 배경음악 장엄하대요. 사랑의 교회 호산나 성가대 삼백 명. 그 안에 김자옥 권사님도 들어있는. 물론 살아있을 때. 그 편곡을 너무 잘했어요. 우리교회에 있으니까 나이아가라 폭포 한 번 보세요.
그 폭포가 떨어지는 모습이....근데 그 현장감은 못 미쳐요. 그 현장에는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따라서 나는 거기서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나라는 존재가 여기 앞에 있다는 것조차도 느낄 수가 없어요. 폭포만 있지 나는 없어요. 그냥 폭포만 있어요.
이게 폭포 앞에서만 그런 게 아니고, 인생을 살면서 자기가 정말 사랑하는 여인 앞에서 그렇게 돼요. 그대 있음에 나는 있는 둥 마는 둥 하는. 그걸 가지고 절대적 사랑이라고 하죠. 그대 있음에 나는 있는 둥 마는 둥, 그대 밥 먹음에 나는 먹는 둥 마는 둥, 그대 살아 있으매 나는 죽어도 좋아! 이런 것. 나는 없어져도 괜찮아. 그대만 있다면.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방을 함부로 터치하지 않아요. 왜? 더러운 내가 묻으면 그 값이 떨어지니까. 그냥 바라보기만 하면 돼요. 물론 그냥 바라만 보면 저쪽이 감질나서 또 짜증내겠죠. 어떤 조각품을 바라보듯이. 그걸 가지고 발트베냐민이라는 사람은 ‘아우라’라고 해요. 현대인들은 아우라가 날라 가버렸어요. 아우라가. 왜 날라 갔느냐, 현대인들은 모든 게 복제물이에요. 복제물.
복제물은 바로 소셜 미디어를 통해서 계속해서 복제하다보니까, 복제 자체에 뭐가 없느냐, 원작이 없고 원형이 없습니다. 복제한 것을 복제하고, 복제한 것을 또 복제하고..,팝 아티스트에 보면 마릴린 먼로의 사진을 그냥 복제를 하죠. 똑같은 것. 그리고 캠벨깡통, 통조림을 그대로 똑같이 해놓아요. 이게 현대사회의 특징입니다.
현대사회는 자기들끼리, 그 누구도 원작을 인정하지 않기로 작심하고 모이는 사회가 현대사회에요. 그렇게 구성된 사회가 현대사회입니다. 왜냐하면 시장에서는 시장의 어른인 손이 없어요. 그걸 아담 스미스는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했는데, 시장에서 손이 움직이는데 그 손이 없어요. 안 보여요. 그냥 상품들만 나열될 뿐입니다. 스스로 전시되고 스스로 전시된 것을 고르고 복제품이 양상 될 뿐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이미 자기가 시장에서 하나의 상품으로 진열되기를 원하고 있는 거예요. “나 이정도 아는데 나 사갈 사람?” 이게 마치 뭐와 같은가 하면 지금은 없어졌지만, 청량리 창녀촌이 있잖아요. 안 가봤습니다만 영화 보면 나와요. 여자들이 그냥 야한 옷을 입고 앉아있어요. 와서 고르라는 말이죠. 인형 뽑기 하는 것처럼. 이건 직접적이고 노골적이지만, 사실은 시장 자체가 이런 것이잖아요. 시장 자체가.
시장 자체가 전시가치만 인정하고 경배의 가치는 완전히 사라져버렸어요. 경배가치가. 참 이것이 이 사회, 현대사회의 특징이라고 본다면, 그럼 교회는 어떻습니까? 교회도 골라잡아야 돼요. 어느 교회가 에어컨이 빵빵하고, 어느 교회가 회비 안 내도 놀러 자주 가고, 어느 청년회 모임이 당회에서 자금 나와서 필리핀이나 파키스탄에 단기선교를 보내주고, 어느 교회에서 축구 동호회가 잘 되어 있고, 어느 교회에서 공짜로 아이들에게 영어 가르쳐주고, 어느 교회에서 부모들이 직장 나가면 공부방을 잘 운영하느냐. 교회가 창녀에요.
우리교회 오시면 이런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이때를 위해서, 이걸 생각한 것은 아닌데, 이때를 위함인가, 제가 찍어온 게 있어요. 지금 온갖 것, 현대기계를 다 동원하고 있습니다. 경북 어느 곳에 가니까, 읽어보겠습니다. 서예사군자. 풍물놀이. 컴퓨터교실. 노래교실. 건강체조. 실버댄스. 이렇게 가르쳐요. 어떤 교회는 색소폰. 기타. 교회가 왜 그렇게 합니까? 경북 영양에 가니까 교회에 이게 붙여져 있어요. 레크리에이션 스케줄이 있어요. 우리교회 바로 밑에 있는 수정교회도 꽃꽂이, 드럼, 한자 가르치고 이렇게 해요. 왜 그렇게 합니까? 교회가 창녀거든요.
전시적 가치를 원하니까 교회라는 시장에서 자기가 살기 위해서는 고객들이 원하는 것을 제공하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하면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다.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런 이야기는 없습니다. 그런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면 다 나가버리거든요. 사도바울이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할 때, 심판, 저주 자체에는 뭐가 담겨있습니까? 경배의 가치가 담긴 개념이 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이걸 믿으면 당신이 구원받는다는 이야기가 아니고, 믿든 안 믿든 이게 이미 확정된 미래라는 거예요. 이게. 주의 스케줄이 이미 끝난 거예요. 끝났음을 통보하는 겁니다. 어디에서? 미래에서. 이미 종말이 되면 미래잖아요. 종말 이후가 미래잖아요. 모든 일이 마무리된 상태에서, 그 마무리된 상태가 오늘날을 향하여 거꾸로 침범해서 들어오게 되어 있어요. 들어오게 되면 인간 세상은 계속해서 영원토록 반복적으로 과거가 되는 겁니다.
조금도 현재나 미래라는 것은 인간에게 없습니다. 과거에, 똑같은 과거의 순환적인 반복. 이걸 영겁회귀라고 해요. 니체는 영겁회귀라고 하거든요. 영원토록 과거에요. 과거라는 것이 변형된들 미래에서 못 나오면 과거가 되는 거예요. 목사님 왜 현재는 이야기 안 합니까? 현재라는 것은 없어요. 현재라는 것은 뾰족ᐱ하거든요.
현재에 올라갔다고 하면 미래든지, 과거든지 둘 중의 하나에요. 뾰족하게 현재되는 순간에 미래든 과거든 둘 중의 하나에요. 현재에서 이미 된 것을 완료라고 하고, 못 된 것을 미완료라고 합니다. 히브리어에 동사가 이 두 개밖에 없어요. 현재는 없어요. 완료, 미완료 이거밖에 없습니다. 히브리서 문법에서. 과거(완료)ᐱ미래(미완료)
이 말은 뭐냐 하면 십자가 안이냐, 밖이냐 둘 중의 하나밖에 없어요. 십자가 안은 미래소년 코난이고, 십자가 밖은 과거소년 코난이고 뭐 그렇죠. 딱 둘 밖에 없어요. 중요한 것은 이겁니다. 성경공부를 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과연 천국 갈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우리가 천국 갈 수 있느냐? 몇 년 동안 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지금 어디 사느냐, 미국 사느냐, 중국 사느냐, 한국 사느냐, 캐나다 사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천국 살게 될 것이냐가 중요하잖아요.
그럼 천국 살려면, 문제가 굉장히 간단해요. 천국 살려면, 천국 가기 전에 천국을 아는 사람이 되면 돼요. 못 살아도 괜찮아요. 빵 안 먹어도 괜찮고 먹어도 괜찮은데, 천국이 뭔가를 아는 사람이 되면 되는 거예요. 그렇죠? 그럼 천국에서 뭐 할 건데요? 1번. 논다. 2번. 경배한다. 몇 번 입니까? 경배하죠. 그럼 경배하면 그 경배 할 것을 미리 이 땅에서 하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교육받고 하는 게 전시가치만 챙겼지 경배가치는 들어본 적도 없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경배가치는 없고 전시가치밖에는 찾지 않는 우리가 뭐로 바뀌어야 됩니까? 경배의 가치로 바뀌어야 되죠. 그 바뀌는 방법을 이제부터 알려드리겠습니다.
사물가치라는 것은 뭐냐 하면 그 사물과 나를 일치시키는 거예요. 이게 유혹이라는 거예요. 유혹. 아담이 뭘 따먹었죠? 선악과를 따먹었잖아요.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었는데, 하나님은 아담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고 뭘 문제 삼느냐 하면 선악과를 훼손했다고 문제삼아버려요. 세상에! 인간들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인간들은 하나님과 자기 사이에 아무것도 없이 다이렉트로 직접 교류하고 이야기하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하나님께 중요한 것은 인간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끼어든 게 더 중요해요. 그게 뭐냐 하나는 선악과 나무였고 하나는 생명나무였어요. 마치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평소에 아버지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한 10년 동안 계속 입이 닳도록 너를 사랑한다, 너를 사랑한다고 이렇게 했는데, 하루는 그만 아버지가 좋아하는 도자기를 깼다. 그 아들은 생각합니다. 아버지가 나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도자기를 깼어도, 에이 그럴 수도 있지. 도자기기 중요한 것이 아니고 니 다친 데는 없나? 라고 하면서 나의 건강 안위부터 챙길 거라고 생각을 했죠.
근데 아버지가 퇴근하자마자 도자기 깬 것을 보고 “이 도자기 누가 깼어? 니가 깼어? 나가! 내 자식 아니야.” 이런 아버지일 줄은 몰랐죠. 모른 본인 책임이죠. 천국은 뭐냐, 도자기 깼다고 닦달 내시는 아버지를 이해하는 것이 천국입니다. 나를 사랑해 주는 것이 아니에요. 도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천국의 주인공입니다. 그 도자기가 뭐냐, 언약입니다. 언약.
인간의 종교가 뭐냐 하면, 종교는 신이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신이 나를 내치지 않을 거라는 기조 하에서 움직이는 것이 종교에요. 아니, 만들어놨으면 책임질 거라는 생각입니다. 이게 종교라는 말입니다. 종교. 나는 피조물고 주님은 창조주이고. 인간적인 비유를 하자면 나는 아들이고 하나님은 부모님이고. 세상에 어느 부모가 아들을 내치는 부모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나 그것은 인간이 상상하는 잘못된 나라에요. 그런 나라는 하나님 나라가 아니고 나의 나라가 돼요. 나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는 나의 나라가 아니고 아들의 나라에요. 주님께서는 아들에게 관심이 있어요. 아들이 뭘 했기에 관심이 있습니까? 아들이 아버지와 맺은 언약을 완성한 그것이 주님에게는 가치가 있는 겁니다. 주 되심에. 그럼 남은 문제는 뭐만 알면 되겠어요? 언약을, 도자기를 알면 되겠죠.
언약이라는 것은 바로 무지개를 좇는 아이와 같아요. 무지개가 분명히 있어요. 근데 가까이 가면 무지개가 있어요? 없어요? 가까이 가면 사라지죠. 그럼 멀리가면 무지개가 있어요? 없어요? 보이죠. 가까이 가면 먼 것이 사라지고 멀리가면 가까운 것이 사라지는 것. 이 말은 뭐냐, 인간의 언약은 인간이 다룰 수 없다. 인간이 소유하거나 성취하거나 지킬 수가 없는 거예요. 지금 지킬 수 없는 말씀을 하고 있는 거예요.
디도서 2장 6절 봅시다. “너는 이와 같이 젊은 남자들을 권면하여 근신하게 하되” 7절, “범사에 네 자신으로 선한 일의 본을 보여 교훈의 부패치 아니함과 경건함과” 8절,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게 하라 이는 대적하는 자로 하여금 부끄러워 우리를 악하다 할 것이 없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구체적으로 이렇게 하라는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전부 다 추상적이에요. 여기에 나오는 것이. 2절에 “절제하며 경건하며” 뭐가 절제인데? 뭐가 경건인데? 뭐, 예를 들어줘야죠. 예를. 근데 예를 안 들어줘요. 왜? 예를 들어주면 왕창 다 따라 해요. 아까 무지개 했죠. 분명히 말씀이 있어요. 근데 말씀 지키려고 가까이 가면 말씀이 있어요? 없어져요? 없어져요. 누가 가까이 다가서기 때문에? 이 몸뚱아리가 다가서기 때문에 그래요. 이 몸뚱아리가. 내가 한 번 지켜보겠다고 나서는 이게 화근입니다.
자, 한 번 예를 들어봅시다. 투수는 공을 던지는 사람이죠. 야구에서 투수는 공을 던지고 포수는 공을 받는 사람이죠. 투수가 잘 한다는 의미는 뭡니까? 공만 던지면 잘 합니까? 그럼 좋은 투수에요? 자, 지금 뭐냐 하면 좋은 투수가 돼야 된다는 거예요. 그럼 좋은 투수는 공만 던지면 좋은 투수에요? 아니죠.
동네 애들 공만 다 던진다고 메이저리그 투수 시켜줍니까? 아니잖아요. 그럼 좋은 투수라고 하는 것은 누가 결정하는 거예요? 이게 아주 모호하기 짝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가까이 가면 사라진다 이 말입니다. 제 말은 언약은 법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미 예수님에게서 일어난 일을 성경이 퍼트리고 있어요. 예수님에게 뭐가 일어났느냐 하면 참사가 일어났어요. 어떤 참사입니까? 예수님이 스스로 자살했습니까? 누가 죽였습니까? 누가 죽였죠. 누가 죽였습니까? 사람의 대표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죽였잖아요. 이게 참사에요. 참사. 그러니까 인간에게 좋은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좋은 게 없죠.
아까 누가복음 18장에서 바리새인이 뭐했습니까? 자기가 구제하고 봉사하고 십일조 한 게 자기 눈에 좋아 보이죠. 그러나 막상 예수님 앞에 나오니까 자기에게 좋은 게 아니고 뭡니까? 이 사람, 바리새인은 지옥 갔잖아요. 자기 딴에는 좋은데 누구 앞에 서면? 예수님 앞에 서면 이게 참사가 되는 거예요.
류현진이가 우리나라에서 야구 제일 잘하죠. LA다저스에 있잖아요. 오늘 뉴스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4회 말에 류현진 대참사” 10점 내줬다고 대참사라고 하는 거예요. 한국 야구선수 중에 오늘도 10점 내준 사람들이 많아요. 근데 그 열점 내준 투수는 대참사라고 왜 안 하는 겁니까? 만약에 어떤 선수가 열점을 내줬는데 아주 잘하는 선수에요. 열두 살 먹은 초등학생이에요. 12살 먹은 초등학생이 성인들 야구에서 열점내주는 것, 이거는 정말 잘한 투수라 이 말이죠.
영국에서 어떤 프로축구선수가 축구했는데 3대3으로 비겼어요. 프로선수가. 자기는 3대3으로 비긴 것을 만족했어요. 왜 만족했느냐 하면 자기편은 1명이고 상대방은 30명이고. 30대2로 붙어가지고 3대3으로 비겼어요. 얼마나 뿌듯한지. 근데 30명이 누구냐 하면 초등학생들이에요. 초등학생 애들 30명하고 프로축구선수, 영국의 프리미엄리그의 정규선수하고 붙어가지고 3대3. 애들한테 축구를 전파하기 위해 이벤트 식으로 해서 3대3으로 비겼어요. 30명이 우르르 달려들고, 걔들은 오프사이드도 없이 우르르 그냥 쫓아다니면 되는데.
자, 좋다는 게, 이 말씀에 어떤 사례가 없어요. 그냥 부패치 아니하고 경건함과 책망할 것이 없고...계속 나오는 거예요. 그럼 이 말은 뭐냐 하면 니가 스스로 판단하기를, ‘나는 경건해. 나는 이만하면 착해. 나는 이만하면 절제한 거야.’ 이렇게 하지 말고 반드시 누구 앞에 서라 이 말입니까? 이 말씀을 주신 명령자 앞에 서버리면 이 말씀은 내가 지킬 것이 아니고 이미 주님께서 다 지킨 거예요. 다 지켜놓고, 이것을 누구한테? 새로 늙은 남자라고 지목한 사람에게 그걸 거기다가 빡빡하게 집어넣어버리는 거예요.
그럼 늙은 남자는 그냥 늙은 남자가 아니고 디도서 2장 2절을 봅시다. “늙은 남자로는 절제하며 경건하며 근신하며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이라고 할 때, 이 늙은 남자가 누군지 안 나와 있고 그리고 전적으로 어떤 일을 했기에 이렇게 말하는지, 어떤 사례나 모델, 매뉴얼이 안 나와요. 매뉴얼이. 이렇게, 이렇게 하고 아침 열시에 와서 주차관리하고...뭐, 이런 게 전혀 없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 늙은 남자로 절제하며 경건하며 근신하게 되면 이 사람은 무슨 이야기를 하겠어요? 무지개, 아까 제가 이게 법이 아니고 언약이라고 했죠. 언약의 법칙은 가까이 가면 사라지고 멀리가면 나타나고. 이 두 개를 다 할 수 있는 것은 뭐냐 하면 바로 무지개 밑, 또는 무지개 안에 있음을 인정하면 되죠. 무지개가 뭡니까? 노아언약이죠. 무지개언약이에요.
하나님의 언약은 누구하고 체결했느냐 하면 우리하고 한 게 아니에요. 언약은 아버지와 아들하고 체결한 겁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하고 맺은 것이 언약이에요. 그런데 우리가 언약을 지키려고 했던 것이 문제였단 말이죠. 옛날에, 구약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주니까 그 율법을 본인이 지키겠다는 거예요. 그러면 안 돼요. 십계명을 주니까 십계명을 본인이 지키겠다는 거예요.
그들로서는 할 말이 많아요. 이게 아니라고 한다면 그들은 화내요. 할 말이 많아요. 뭐냐 하면 십계명에 “부모를 공경~” 그 다음에 뭡니까? “하라’는 명령으로 되어 있죠. 명령. 히브리어에 보면 명령이 나오잖아요. 옛날에는 모음이 없고 자음밖에 없었지만. 명령이 나온다고요. 명령이. 명령하니까 주체로서 어릴 때부터 우린 명령 받았잖아요. 명령은 뭐하라고 준 거다? 지키라고 준 거다. 너무나 당연한 건데 그게 아니라면 뭐지? 이래 된다 말이죠.
자, 갈라디아서 3장을 한 번 봅시다. 3장 17절,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아까 언약을 뭐라고 했습니까? 무지개처럼 여기라고 했죠. 무지개처럼 여기라고 한 이유가 있죠.
무지개는 가까이 가면 사라지고 멀리가면 보이고. 분명히 있는데 가까이 가면 없어지고 그렇죠. 그 이유가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있음이 강하기 때문에, 내가 만져야 된다는 것이 강하기 때문에 무지개는 사라진 거예요. 그냥 저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면 있는데, “저거 가질까?” 이러면 그건 없어지는 거예요. 내가 말씀 지키려고 하면 그 말씀 없다 이 말입니다.
여기도 나와 있죠. 하나님께서 사백삼십 년 후에 율법을 주셨잖아요. 그러면 율법이 주어진 것이 율법 자체를 지키라고 준 것이 아니고, 다른 것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다른 것이 현존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있다 이 말이죠. 그게 뭐냐, 아브라함의 언약이에요. 그럼 아브라함 언약을 위해서 보조하는 것이 뭐다? 모세언약이 되는 겁니다.
언약이라고 다 같은 언약이 아니에요. 보조언약이 있고 주된 언약이 있는데, 주된언약은 아브라함 언약이고, 보조언약은 율법이라 이 말이죠. 아브라함 언약의 의미를 살리기 위해서 보조적인 것이 받쳐준 거예요. 왜냐하면 보조언약인 율법이 들어가 버리면 인간은 지키려고 들 게 분명하고, 지키게 되면 자기가 지켰다고 우길 거고, 전시적 가치니까. ‘어느 것을 지킬까? 오늘은 이거 지키고 내일 지킬 것은 남겨두어야지.’ 지킨 만큼 자기는 의롭다고 여길 거니까. 지키라고 했는데 지켰으니까 이건 의롭죠. 어릴 때부터 인간은 그것을 교육받았으니까.
“밥만 먹지 말고 콩도 먹으면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 “콩 먹었으니까 맛있는 거 사 주세요. 햄버거 사주세요.” 잘했으니까 상 주는 거예요. 이게 인간의 주체가 형성된 거예요. 나쁜 짓 하면 벌 받고 착한 일하면 상 받고. 우린 어릴 때부터 그렇게 양육 받았고 그게 선악체계를 훼손한 그 후유증 아닙니까? 그게. 천국 못 간 후유증. 그것 때문에 우리가 천국 못 가요. 착하기 때문에 천국 못 간다니까요. 착해지려고 하기 때문에 천국 못 가는 거예요.
그런데 아브라함은 착하고 자시고 뭐고 할 것도 없었어요. 하나님의 약속이 오매, 그걸 믿으매 뭐가 된다? 하나님의 의가 되는 거예요. 이건 아브라함의 아이디어가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나는 율법을 못 지키니까 그런 식으로 구원해주세요.”라고 요청해서 결제 받아 내려온 그런 정보가 아니에요. 그냥 아브라함은 일방적으로 당했어요. 그냥 하나님 앞에 당한 거예요. “뭐지?” 영어로 “What?” “뭐지 이거? 왜 이래? 이거 내가 알던 현실이 아닌데? 동행이 이런 모습인가?”
누가복음 끝에 보면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가 있었잖아요. 예수님이 살아서 따라왔다 이 말이죠. 예수님이 따라서 동행했다 이 말입니다. 처음에는 못 알아봤지만 나중에 알아봤잖아요. 그러면 죽어서 부활되지 마시고 안 죽으면 되잖아요. 죽고 난 뒤에 부활해서 놀라게 하지 마시고, 처음부터 안 죽고 같이 계셔서 로마군사가 올 때 물리치시면 되잖아요. 그러면 그 백성, 저 백성 다 천당 가잖아요.
근데 왜 배신을 해서 천국 가도록 만드시는 이유가 뭡니까? 니가 아는 천국은 천국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전시적 가치로 뭉쳐진 천국은 천국이 아니에요. 천국은 경배적가치가 있어야 되지 전시적가치가 있으면 안 돼요. 내가 알아서 가는 나라가 천국 되면 안 돼요. 그거는. 내가 살고 싶은 본성의 연장선이 천국이 되면 안 돼요. 내가 살고 싶으면 내가 주인공이 돼버린다니까요.
그러면 그거는 천국이 아니고 자기나라가 돼요. 여기 갈라디아서 3장 17절에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못한다.” 보조적 역할을 하는데, 자 여기서 문제가 뭐냐 하면 왜 아브라함의 언약에 있어서 모세 율법이 꼭 있어야, 그게 꼭 보조적 역할을 해야 아브라함의 언약이 언약답게 되는 이유가 뭐냐 하는 겁니다.
처음부터 믿음으로 의롭다 했으면 믿음으로 의롭다 하는 걸로 가야지, 왜 율법이 들어갔다가 빠지고 왜 그렇게 하냐 이 말입니다. 모르겠죠? 예를 들면 엄마가 “오늘 저녁에는 잡채 한다.”라고 해요. 그럼 애들이 “와! 잡채한대.” “그냥 먹기만 하면 돼.” 다들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저녁에 엄마가 문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이 아니고 담을 타고 들어오는 거예요. 엄마가 담타고 들어오는 것하고 잡채하고 무슨 관계가 있는데? 이게 보조적 역할이에요. 이러면 애들이 알아듣겠어요? 담타고 들어오는 것하고 잡채 만드는 것하고 무슨 관계가 있다고?
지금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하고 율법이 들어온 것하고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아무 관계가 없어요. 아무 관계가 없는데 예수님하고는 관계가 있어요. 인간의 믿음은 믿음이 아니기 때문에. 그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의롭게 되는 것은 예수님이 주신 의가 아브라함에게 있어야 돼요.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걸 알았어요. 알고, 자기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예수님이 오기를 기다렸고 오고 기뻐했어요.
왜? 예수님이 뭘 했기 때문에? 자기 믿음이라는 죄 때문에 대신 피 흘리는, 그 십자가에 죽는, 그런 일을 경유해서 비로소 예수님의 믿음이고, 예수님의 믿음과 내 믿음을 교체함으로써 그 예수님이 주신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사실,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아브라함은 성령에 의해 미리 땡겨서 알게 된 겁니다.
왜 아브라함의 언약에 모세언약이 보조로 들어가야 하는가를 이제 아시겠죠? 인간은 반드시 전시적 가치를 추구하기 때문에 뭔가 좋다고 하면 다 믿고 뭔가 좋다고 하면 시키는 대로 다 해요. 좋은 것을 왜 안 골라? 좋은 것은 소유하려고 하고 획득하려고 하고 내 것 만들려고 하고.
그런데 율법이 딱 주어지니까 그 모든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선택하거나 획득하거나 예상하는 그 전체가 율법에서 저주가 되고 죄가 된다는 사실을 율법을 통해서 알려줍니다. “니가 뭘 기대해? 니가 뭘 기다려? 백날 기다려봐라. 죄인이 기다려봤자 지옥 가는 것 밖에 더 있어?”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바로 갈라디아서 3장 10절에 나옵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이래 되어 있죠.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다. 그러면 저주 안 받기 위해서 율법 행위에 아 속하면 되겠네요? “나는 율법 없습니다.”이러면 되는데? 그러면 될 거 아니겠습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예수님이 인간의 대표자가 됨으로써 모든 인간은 이미 본인이 율법 바깥에 있겠다고 백날 어떤 결정을 하든 상관없이 인간 자체가 율법 아래 태어나게 되어 있어요. 그걸 갈라디아서에서 육이라고 합니다. 육은 율법 아래 이미 놓인 상태를 육이라고 합니다.
이런 말씀을 사람들이 교회에서 이해 못하는 이유가 뭐냐, 전시적 가치를 하기 때문에. “나는 과학자인데 회사 다닌다. 집에 가면 나는 남편이고 가장이다. 교회가면 장로다. 하지만 이런 것들로 구원받지 못하고 나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이게 바로 전시 아닙니까?
물감 짜놓는 것을 뭐라고 해요? 팔레트라고 하죠. 팔레트. 팔레트에 보면 빨강색도 있고 노랑색도 있고 온갖 색깔이 다 있죠. 그럼 화가가 어떻게 합니까? 죽 전시되어 있는 물감을 보고 필요한 것을 골라서 찍어버리면 그 그림의 작품의 주인공은 누굽니까? 화가 자신이 되겠죠. 인간은 그런 식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거예요.
자, 회사에 다녀야 화목하고, 직장에서 돈을 벌어야 가정이 화목하고, 자식한테는 좋은 아빠가 되어야 하고, 교회 가서는 예수 믿어야 교인답고. 완전히 포트폴리오, 아주 분산투자를 잘 해놨어요. 한쪽이 펑크 나면 다른 쪽에서 회복하고. 포트폴리오로 딱 되어 있어가지고, 브라질에 투자해놓고, 인도 투자해놓고, 중국 투자해놓고, 한쪽이 이윤이 안 나오면 다른 쪽에서 이윤내서 보상받고. 투자의 재능인가? 전략인가? 부챗살처럼 쫙 펼쳐놓고.
그럼 이 사람은 지금 누굴 경배하고 있습니까? 본인을 경배해요. 본인을 경배하니까, 자기가 이렇게 착실하게 살아가니까, 교회는 왜 가요? 내가 이렇게 착실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식구들만 알아주면 재미없잖아요. 누가 알아줘야 돼요? 소위 주의 종이라는 목사, 장로가 알아주게 되면 나의 인생에, 나의 나와바리, 영역은 확장이 되는 겁니다. 집에서만 알아주는 것이 아니라 교회 가서도 믿음이 좋다고 알아주는 사람. 사는 게 뭐 있어요. 사람들한테 인정받는 그게 사는 재미잖아요. 그게 바로 자기 자신을 경배하는 거예요.
그런데 자기 자신을 경배하는 그것이 결국 뭐냐 하면, 그걸 시장원리로 보게 되면 하나의 상품이 되는 겁니다. 그 상품이 뭐냐 하면 인간이 사물화된 겁니다. 물체화 된 겁니다. 물체화. 사람이 아니므니다. 사람이 아니고 물건이에요. 시장에 나가서 내가 이 정도로 가치가 있으니까 나를 써달라고 전시를 하는, 그러한 가치 있는 존재로서 자부를 하고 있는 겁니다. 평생을 사물적 존재로 보게 되면 그런 사람이 모인 곳이 사물적 왕국입니다. 사물의 왕국.
사물의 특징이 뭐냐 하면 만나면 탁탁 이게 소리가 난다는 겁니다. 당구공끼리 서로 만나면 소리가 나죠. 소리가 나면서 상대방을 튕겨버립니다. 자기가 보존되기 위해서. 자기가 갖고 있는 에너지가 있기 때문에. 고유의 에너지를 지키기 위해서 남을 튕겨버려요. 하나의 당구공처럼 되어 있는 겁니다. 이걸 지난 수련회 때 골로새서 강의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두자로 입자라고 했죠. 입자.
입자와 입자의 만남에서 뭐가 생기는가, 운동에너지가 생기는 거예요. 에너지. 그래서 세상은 물리에서 말하는 것처럼 에너지 세상이에요. 에너지를 힘이라고 이야기하고 그걸 사회적 용어로 이야기하면 권세, 권력이라고 해요. 지금 문재인이 에너지가 많습니까? 홍준표가 에너지가 많습니까? 홍준표 미국에 갔어요. 문재인이 에너지가 많죠.
그리고 그 에너지가 없으면 못사니까. 왜? 에너지가 니는 뭐 해라, 뭐 해라, 무슨 국? 조국 민정수석보고 수사하라고 하면 그 사람은 드디어 권력의 에너지 속으로 들어오는 겁니다. 에너지 속에 들어온 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출세라고 해요. 출세. 볼록 튀어나왔다는 거죠. 이걸 회사로 말하면 승진했다고 하는 거예요. 권력이 많으니까.
그런데 주님은 어떻게 했습니까? 사람 앞에 높임을 받는 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다고 했죠. 주님을 배척한, 주님을 사형시킨 이 사회에서 높임이 되고 싶어 하는 것은 무슨 가치를 버려버린 거예요? 뭘 배척한 거예요? 경배의 가치를 버린 거예요. 그러면 죽어서 천국이냐, 지옥이냐가 결판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살아있으면서 천국과 지옥은 결판나버린 거예요.
전시의 가치를 가지고 싸움을 하느냐, 아니면 경배의 가치 앞에서 자기가 화로다 망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숯덩이처럼 아느냐. 그게 결정 나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읽었던 말씀을 보면서, 특히 8절에 보면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게 하라 이는 대적하는 자로 하여금 부끄러워 우리를 악하다 할 것이 없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을 어떻게 보느냐 하면 내가 죄인 되었을 때에 주께서 나를 사용해서 바로 이러한 결과들을 내 주변에 펼쳐지게 하는 거예요. 이런 결과들을.
그럼 나는 뭐가 됩니까? 어떤 때는 늙은 남자가 되고, 어떤 때는 젊은 남자가 되고, 그것도 바른 말씀을 지키는. 또 어떤 때는 늙은 여자가 되고, 어떤 때는 젊은 여자가 되는 거예요. 이게 어떤 특정인에게 주어지는 말씀이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 누구나 주어지는 겁니다.
여기에 늙은 여자 한 번 봅시다. 3절, “늙은 여자로는 이와 같이 행실이 거룩하며 참소치 말며” 그 다음에 뭐라고 합니까? “많은 술의 종이 되지 말며” 그 당시에 여자들이 술을 많이 먹었는가봅니다. 많은 술의 종이 되지 아니한다. 이게 늙은 여자한테 했기 때문에 젊은 남자는 많은 술을 먹어도 돼요? 어떤 늙은 여자가 술을 안 먹고, 어떤 젊은 남자는, “나는 이 본문 말씀에 해당 안 되는 젊은 남자니까 술을 먹어도 됩니다.”라고 이러면 둘 사이에 대화가, 소통이 안 되겠죠. 왜? 저쪽에서는 경배의 가치를 이야기하는 반면에 이쪽에서는 전시의 가치, 내가 필요한 것만 골라서 내 스스로 의롭게 되어서 천당 가려고 이 말씀 지킨다고 하니까 서로 대화가 될 턱이 없죠.
그렇다면 늙은 여자에게 술의 종이 되지 말라고 한다면, 그거는 늙은 여자한테 하는 것이 아니고, 같은 지체 안에 있는 나에게도 동일하게 하신 주의 말씀이라고, 명령자가 나에게 그렇게 이야기한 것이라고 받아들이게 되면, ‘아, 술이라는 것을, 이게 많은 술을 먹어서는 안 되는구나.’ 라는 것을 아는 겁니다.
자, 술 이야기를 좀 해봅시다. 여기에는 구체적인 사례가 없으니까 사례를 제가 만들어가는 거예요. 이 본문은 너무 관념적이고 추상적이니까. 술을 왜 마실까요? 술을 왜 마시냐 하면 이게 전시의 가치 때문에 그래요. 전시의 가치. 술이 언제 만들어졌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 술 때문에 일들이 많이 났어요. 노아도 이 술 때문에 일이 터졌잖아요. 술 때문에 일이 많은데.
술은 분명히 있습니다. 포도주가 있는데, 술은 왜 마시냐, 전시의 가치를 활용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 어떤 사람이 있는데, 포도 있고, 빵 있고, 여기 포도주가 있다고 합시다. 포도가 있으면 먹죠. 또 여기 돼지고기, 소고기 있으면 먹을 수 있어요. 빵 먹는다. 이거 먹고, A먹고, B먹고, C먹고, 술이라는 D를 안 먹을 수 있겠어요? 없겠어요? 전시되어 있는데? “저건 뭐지? 한 번 먹어볼까?” 한 번 먹어본다고요. 포도 먹듯이, 포도 먹으면 맛있거든요.
근데 못 먹는 독초를 먹었다고 합시다. 그러면 뱉어내겠죠. 그럼 술을 한 번 보세요. 여러분 이게 어려운데, 술을 보고, 만약 술이 먹을 게 아닐 것 같으면 주님께서는 술 에다가 독을 타야 돼요. 먹고 에잇 퉤! 퉤! 해버리면 술 취할 일이 없잖아요. “술 먹는 인간이 바보지. 어떻게 그런 걸 먹나? 그게 무슨 맛이 있어?” 그런데 전시의 가치에 의해서 술을 먹으니까 이게 어떻습니까? 밥 생각이 안 나네. 왜? 밥 먹어도 말짱한데 술을 먹으니까 이게 환락으로 인도하고 천국으로 인도하거든요. 술 먹으면.
다들 술을 안 먹어봐서 술 맛을 알 수가 있어야죠. 제가 강의하기 힘들어요. 술을 전혀 안 먹으니까. 이제는 술을 먹기 위해서 일을 해요. 이거는 왜 그러냐 하면 선악과를 따먹고 에잇, 퉤! 퉤! 해야 하는데, 선악과 어떤 나무에요?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죠. 그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게 누가 그렇게 선악과를 만들었습니까? 마귀가 만들었어요? 하나님이 만들었어요? 하나님이 만들었잖아요.
인간을 뭐 되게 만든다? 죄인 되게 만들어서, 율법의 저주아래 있게 해서 누구만 드러내게 한다? 예수 그리스도만, 천국만, 아들의 나라만 만드는 그 작업에 우리가 말려든 거예요. 왜? 피조물이니까. 피조물의 의견을 왜 물어요. 아버지와 아들이 한 일에 이 피조물의 의견을 왜 묻습니까? 우리는 활용당하면 되죠. 활용당하면.
그러면 술의 종이 되지 말고, 라는 이 말씀은 너희들이 술을 먹지 말라고 해도, 물론 안 먹을 수도 있어요. 안 먹을 수도 있지만, 나는 술은 꼴 보기도 싫다고 하는 그런 인간은 없습니다. 말씀이기 때문에, 법을 지키기 위해서 안 먹겠다고 하는 것하고, 나는 처음부터 술은 안 땡긴다고 하는 이런 것은 없다는 말입니다.
뭘 먹지 말라, 선악과 따먹지 말라, 뭘 먹지 말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냐? 그럼 다 좋아하게 되어 있어.”라는 것을 전제로 깔고 하는 이야기에요. “술은 써서 못 먹겠다.” 그럼 달콤하게 만들면 되죠. 그게 뭐 어려운 문제에요? 달콤하게 만들면 되죠. “술은 너무 취하더라.” 취하라고 먹는 게 술 아닙니까? 안 취하면 그게 쌀뜨물이지 그게 술이겠어요?
술은 노림수가 있어요. 이거 먹고 모든 근심걱정을 잊어보겠다고 술을 먹는 거예요. 또 이 소리 듣고 오늘 저녁에 술 생각이 나가지고 소주 한 됫병 먹을지도 몰라. 사람은 하지 말라고 하면 더하고 싶어져요. 더 하고 싶어진다고요. 술 취하지 말라고 안 하면 술 생각 안 할 텐데, 술 취하지 말라고 하는 그 순간에 먹게 되어 있어요.
이게 로마서 7장에 나오는데 율법이 하지 말라고 함으로써 우리는 더 땡기는 요소가 솟아나게 하는 하나님의 작전입니다. 우리는 피조물이니까. 예수님을 증거 하기 위해서 어떤 식으로든 우리의 체면과 명예 같은 것은 아예 계산도 안 해요. 그냥 지저분하게 사용해버려요. 근데 그렇게 사용한 것을 감사히 여기면 천국이고, 거기에 대해서 분노하면 지옥이고 그런 겁니다.
그 당시에 늙은 여자들이, 할머니들이 외로우니까 술에 많이 호소했는지, 그레데 교회에서 술 먹지 말라고 한 겁니다. 근데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늙은 여자에게만, 그들에게만 해당된 사항이 아니고, 오고 오는 모든 인간에게 동일한 명령자가 동일한 내용으로 말씀한 것이 이 내용입니다.
그 다음에 4절, “저들로 젊은 여자들을 교훈하되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5절, “근신하며 순전하며 집안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라” 이 말씀을 이해할 때 이렇게 하면 돼요. 젊은 여자 치고 근신하는 여자 없고, 집안일을 하지 않고, 선하지 않고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지 않는 여자가 젊은 여자의 기본이라고 보시면 돼요. 그렇기 때문에 이 말씀을 준 거예요.
그래서 이 말씀을 지키면 지킬수록 거기에 대한 반대되는 요소가, 지킨다고 하기 때문에 점점 그 안에서 발굴이 되고 개발이 돼요. 근데 5절 마지막이 뭡니까?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누구에게서 나왔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왔죠. 예수 그리스도의 그 경배의 가치를 훼손하지 않기 위해서.
따라서 그걸 결론적으로 하면 회개할 수밖에 없죠. 이걸 지킨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못 지킵니다.” 이게 바로 그리스도를 더욱 경배하게 하는 거예요. 이걸 지켰다는 것으로 나오면 안 되고, 역시 주님의 십자가 복음밖에, 십자가 희생밖에 없다는 이런 결론으로 나와야 이게 복음이 되는 거예요.
그게 또 3장에 보면 나와요. 3장을 미리 볼까요? 5절,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긍휼하심이란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가 구원받는데 조금도 보탬이 된 게 없다는 뜻이에요. “아이고, 인간아! 참 패버릴까 보다. 내가 참 봐준다.” 이게 긍휼이에요. “패버릴까? 봐준다.” 이게 긍휼이라니까요. 팰만한데 안 패겠다는 거예요. 예수님의 자기의 자유권, 자율권입니다.
그 다음에 6절 봅시다. “너는 이와 같이 젊은 남자들을 권면하여 근신하게 하되” 7절, “범사에 네 자신으로 선한 일의 본을 보여 교훈의 부패치 아니함과 경건함과” 근신하게 한다는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나쁜 짓 했다는 것을 항상 전제로 깔고 살라는 이 말입니다. 촐랑대지 말고.
그 다음에 8절,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게 하라 이는 대적하는 자로 하여금 부끄러워 우리를 악하다 할 것이 없게 하려 함이라” 여기 대적하는 자라고 하니까, 교회라는 것은 그냥 기능하는 것이 아니고 악마의 정체를 밝혀서 십자가 외에는 다른 복음이 없음을 증거 하는 기능을 교회가 계속 하라는 이 말입니다.
결국은 뭡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 되시고 지금 교회와 함께 있다는 말씀입니다. 말씀을 훼방하지 말고 악에게 대적하고. 이것은 너라는 너 자신의 체면과 자존심을 위해서 이 땅에서 살아가는 그런 게 아니고, 바로 경배의 가치를 교회 속에서 유일하게 드러내기 위해서 주께서는 성령으로 이 말씀을 주신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살다보니 참 시장바닥에 내던져졌습니다. 남들이 나를 가치 있는 자로 봐줘야 되고 인정해줘야 한다는 근심걱정이 우리로 하여금 힘들게 살게 만들었습니다. 이제는 마귀한테 쫓기지 말고 이미 구원해주신 그 구원에 감사하면서 세상이 어떤 세상이고 주님이 어떻게 배척당하는지를 마음껏 세상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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