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170616a히13장20절(언약의 피)-이 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히브리서13장20절입니다. 제가 읽어볼게요.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이리 되어있지요. 거기에 예수님이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이리 되어있어요. 이 말은 뭐냐, 하나님이 예수님을 끄집어낼 때, 뭐로 끄집어내느냐 하면 언약의 피. 앞에 언약의 떼어버리면 한 자로 뭡니까? 피. 피로 끄집어냈다는 거예요.
왜 그래야 되는가를 이 시간에 알아봅시다. 왜 피냐 말이죠. 왜? 예수님이 착한 일도 할 수 있잖아요. 예수님이 깨끗하게 말씀 지킬 수도 있지 않습니까. 왜 피냐 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피는 어디 안에 들어 있느냐 하면 오늘 본문에 보니까 언약의 피해서 언약 안에 들어있습니다.
자, 예수님의 십자가가 이리 있고요, 십자가니까 붉은 걸로 해볼게요. 예수님의 십자가가 이리 되어있고 여기서 뭐가 흐르느냐 피가 흐른다. 피가 흐르거든요. 그러면 인간들이 예수님이 피를 흘린다는 것은 그 당시 인간들은 다 알고 있지요. 아~ 저 분은 피를 흘렸다. 그런데 피를 흘렸다! 에 주목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예수님이 죽는다! 이렇게 알고 있어요. 죽는다.
어떤 사람은 ‘아! 저 분이 자칭 메시아라고 우기다가 이렇게 정치적으로 힘에 의해서 죽는구나! 안됐다. 괜찮은 사람이었는데.’ 피에 대해서 사람마다 피를 보는 느낌이 다 다르지요. A, B, C, D...,있다면 어떤 사람이던 피를 보던 간에 사람은 이 피를 어떻게 보느냐 하면 자기가 인생을 살아온 체험으로서 피를 보게 되어있어요. 자기 인샌 살아온 체험으로서.
‘나 피 흘릴 때 굉장히 아프던데 주님은 얼마나 아팠을까?’ 요게 A라는 사람의 피의 관점이에요. ‘아휴, 피가 나올 때까지 하게 되면 숨이 굉장히 막힐 건데. 얼마나 숨이 막혔을까?’ 또 이런 식으로 봐요. 또 어떤 사람은 ‘아, 피 흘리면 수분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피를 흘리면 목마르겠다. 내가 마음 같으면 물을 갔다 드리고 싶다.’ 이런 식으로 또 피를 생각하는 거예요.
어쨌든 그 동일한 피가 흐르는데 이 피에 대해서 이해하고 생각하는 것은 각자 자기 인생과의 바탕으로 해서 피를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까 이 피는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우리의 인생에서 우리 인간들이 느꼈던 그런 체험에서 나온 피가 아니고 언약의 피로 되어있어요. 언약의 피.
언약의 피기 때문에 그러면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어떤 인간도 언약을 모르기 때문에 피에 대해서 알 수도 없어요. 언약을 모른다고 이렇게 단 칼에 장담할 수 있는 이유가 언약을 안다면 언약 완성이 예수님의 피다! 하는 것을 아는 경우에만 피를 출발점으로 해서 거꾸로 언약을 이해할 수가 있는 겁니다.
언약을 제대로 안 사람이라면 언약의 완성이 피다. 다 이루었다 했으니까. 언약의 완성된 것이 피다. 그리고 내 살과 내 피가 너희를 위한 하나님의 새 언약이라 했기 때문에 언약을 아는 사람이라면 피가 완성이 된다는 것을 알지요.
그러면 언약을 이해한다는 것은 언약부터 해서 피를 이해할 수는 없고 완성되는 피를 통해서 거꾸로 언약을 해석하게 되면 언약을 이해한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제 말이 복잡하지만 이해는 쉬울 거예요.
유대인들이 십계명을 볼 때에 예를 들어서 부모를 공경하라. 그럼 부모를 주안에서 공경하라. 했으니까 공경합니다. 그럼 자기는 언약을 안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공경한 사람이 어느 날 몇 천 년 후에 1400년 후에 피 흘려 죽었다면 나는 부모를 공경했는데 피 흘려 안 죽었잖아요. 그런데 언약을 다 이루었다는 분이 십자가의 피를 줬기 때문에 저쪽 노선이 언약을 제대로 이해한 것이냐, 아니면 나는 부모를 공경했다는 이 내 노선이 언약을 제대로 이해한 것이냐, 둘 중에 어느 것이겠어요? 어느 쪽이 제대로 이해한 거예요? 예수님이겠지요.
그러니까 나는 언약에 대해서 그동안 몰랐다가 되고 몰랐기 때문에 부모를 공경하면 언약을 지키는 줄 알고 있었던 거예요. 그러면 나중에 보니까 내가 부모 공경하면 말씀 지킨 것이라 하는 것이 어디서 나왔는가 보니까 나의 인생 체험에서 나왔어요. 인생 체험에서. 인생 체험을 성경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걸 ‘육’이라 합니다. 육에서 언약을 이해했고 육에서 예수의 피를 이해해놓고, “나는 피를 믿습니다.” 라고 해버리는 거예요. 육이.
그런데 영으로 오신 분이 누구냐 하면 바로 예수님이거든요. 예수님의 언약 완성에 대해서 언급하는 그 결론은 뭐냐 하면 십자가의 피다. 해놓고 오늘 본문은 뭐로 되어있어요? 그게 무슨 피라 했습니까? 그게 언약의 피다. 이렇게 되면 인간이 알고 있는 피와 주님이 알고 있는 피가 달라요.
그렇다면 여기서 히브리서 마지막 대목에 와서 뭘 정리해야 되느냐 하면 우리가 예수의 피를 믿는다 하는데 과연 우리가 제대로 이해했느냐, 그걸 다시 한 번 분석하고 점검해야 됩니다. 그러면 점검하는 쉬운 예를 들겠으니 지금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보통 공간을 가지고 사방이라 합니다. 사방이라 하는 것은 방향이 4개라는 뜻이에요. 동서남북이지요. 그러면 방향이 동서남북 4개밖에 없겠습니까? 이렇게 공간이 있다면 중심이 있다면 북, 동 이것밖에 없어요? 북, 동 중간에 또 있잖아요.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라는 영화도 있듯이. 북북서로. 그러면 사람들은 그렇게까지 복잡하게 안하고 그냥 동서남북으로 대충하는 거예요. 그러면 공간을 동서남북 정하는 것은 뭐냐 하면 내가 속해있는 세상을 분류하는 방식이에요.
또 하나의 예를 들면 문어하고 낙지가 영어로 같은 단어입니다. 문어하고 낙지가. octopus라고 해요. 문어하고 낙지를 미국 사람은 외국 사람은 영어로 같은 단어를 사용해요. 똑같다고 본 거예요.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문어하고 낙지 맛이 달라요. 한국 사람에게는. 여러분, 다릅니까? 나는 다른 줄 모르겠는데. 항상 문어 낙지를 그냥 먹는 게 아니고 산낙지하고 문어 맛이 다르잖아요. 다른데 외국 사람은 그걸 구분을 못한답니다. 그냥 둘 다 octopus에요.
그 말은 뭐냐 하면 문어, 낙지를 보면서 분류체계방법이 그냥 같이 가는 거예요. 분류 방식이. 따라서 세상에 대해서 어떤 개념을 설정할 때에 인간은 그냥 개념을 설정하는 것이 아니고 나는 세상을 이렇게 볼란다. 하는 자기 방식이 있어요. 나는 세상을 이렇게 볼란다.
어린애가 기차가 지나가니까 “야, 기차간다.” 이렇게 하니까 엄마가 “얘, 저거는 기차라 하지 말고 저걸 열차라 하는 거야. 기차라 하는 것은 옛날에 연기 태울 때 하는 기차야.” 이렇게 하게 되면 애는 그걸 짜증내요. 왜냐 하면 자기는 그렇게 까지 세분화 연구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안 그래도 딴 거 신경 쓸 거 많은데 그까지 신경 못 쓴다 말이죠.
특히 시어머니들이 며느리 처음 올 때 기죽일 때 단어를 사용하게 되면 “얘야, 우리 집안에서는 그렇게 하는 게 아니야. 세분해야 돼.” 혼수를 해온다. “뭉쳐서 혼수를 해오면 안 돼! 요거는 고모님 거, 요거는 누구 거, 요거는 누구 거, 다 해야 돼! 우리 집안은 그런 집안이야.” 초장부터 기 죽이려고. “니가 아직 시집을 모르는 모양인데.” “제 남편 말은 제사가 10번이라는데요.” 그러면 “10번이라도 사실은 10번 더 되는데 많이 줄여서 10번이야.” 이런 식으로.
그 깊은 층, 만약에 보통 시가집 아니고 종가집에 시집왔다면 그 20대 30대 초반의 아가씨가 뭘 알겠어요? 그냥 시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옆에서 시다바리라 해서 밥해주면 훌륭한 며느리 되는 줄 알았는데 시어머니가 “얘야, 나는 이제 손 뗀다. 나도 어지간이 많이 했다. 우리 시어머니한테 많이 당했는데 이제는 니가 앞으로 종가집 제사 다해라. 반찬은 56가지이고. 전 이런 거 다 준비하고.” 이러면 감당 못하지요. 그만큼 개념이 세분화되어 가는 거예요. 어떤 특정 지점에 세분화되는 겁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세상을 볼 때 언약으로 보는 거예요. 언약으로 보는데. 인간은 세상을 볼 때 세상의 기존의 인간들이 나한테 막 던져준 개념들이 있어요. 시집에서는 이렇게 하고 직장생활을 이렇게 하라. 그 개념들 대충 주워 모으면 그게 남들한테 인정받는 내가 되는 겁니다. 사람이 나라 하는 것은 사실은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고 남으로 인하여 살아가요. 만약에 남한테 인정받지 못하면 자살할 수밖에 없어요.
옛날에는 안 그랬는데 요새는 청소년들도 부모한테 꾸중 듣고 이러면 죽으려고 해요. 옛날에는 밥이나 먹여줬으면 고마운 줄 아는데 꾸중 들었다고 가출해버리고 꾸중 들었다. 가출했다. 그러면 가출하기 전에 너라는 인간은 어떤 인간이냐, 부모로부터 조립당하는 부모로부터 구성당하는 나인 거예요. 그래서 부모로부터 뭘 하나할 때마다 속속 집어넣지요. 집어넣는데 계속 부모가 잔소리가 심해지니까 이게 집어넣는 그것이 아니 아니야~ 그게 아니야~ 으응 내가 원하는 아들은 그 모습이 아니야! 계속 이렇게 나오니까 그 아들이 “그러면 나 누구에요?”
그러면 자기 자아 찾기 위해서 그만 가출해버리는 겁니다. 더 이상 여기서는 부모 말에 부합할 자신이 없기 때문에 가출해버리고 뛰어나가는 거예요. 골치 아프지요. 그러면 엄마, 아빠는 괜히 책임감을 느끼는 겁니다. ‘내가 뭘 잘못한 게 있나?’ 속으로 이런 생각 들어요. 엄마가 그런 소리를 하더라도 니는 니 줏대가 있어야 할 게 아니냐 말이죠.
엄마 말 다 듣는다고 해서 사실은 엄마가 좋아하는 게 아니고 사실은 엄마가 아들에게 뭘 하는 것은 니 나름대로의 구성된 니 자아상을 내 말을 참고로 해서 콩고물로 생각해가지고 싫으면 툭툭 털면 그만이고 필요하면 언지고 해서 니 나름대로의 인생을 만들라고 했는데 애는 엄마 말 아니면 나는 없어. 이리 돼버리면 갑자기 엄마의 자기 책임이 많아져버립니다.
많아지게 되면 누가 힘드느냐 하면, 잔소리하는 엄마가 힘들어져요. “나이가 몇 살인데 니 앞길 니가 못하나?” “엄마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잖아요?” 사실은 그렇게 노골적으로 하는 가정도 있지만, 대부분 노골적으로는 이야기 안하지만 자꾸 엄마나 아빠 눈치를 봐요. 저 괜찮지요? 요번 성적 괜찮았지요? 그렇게 되면 좀 의식 있는 엄마 같으면 ‘내가 나이 20이 넘어서도 뭔가 내가 잘못 가르쳤는가? 저한테 정신적으로 내가 압박을 너무 심하게 했는가? 애부분에서 내부분이 너무 많이 차지하고 있지 않은가?’ 은근히 이제 와서 발빼려하니까 또 발목 잡을까 걱정되고 하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어째나 인간이라 하는 것은 남이 인정해 줄때만 자아가 돼요. 남이 인정해 줄때만. 그래서 나온 게 뭐냐 이게 무슨 결속이냐 결속인데, 무엇과 결속이냐 자기가 속해있는 현 세상과의 결속입니다. 현 세상과의 결속. 그래서 이건 세상이 계속해서 아담자식들을 세상이 만들어요. 세상이 아담의 죄 있는 그 죄인을 오는 세상이 또 만들고. 오는 세상이 또 만들고. 현실은 그렇게 되어있어요.
현실은 무지 무지 간단해요. 세상이 나를 만들었다. 끝! 요게 현실입니다. 그리고 그 현실을 내가 만들 때 내가 만드는 재료는 바로 언어에 의해서 개념이 실려서 나한테 왔고 나는 남한테 이야기할 때 그걸 말로서 글로서 이렇게 보여주게 되면 나는 그 사람한테 인정받는다. 이리 되는 겁니다.
나는 누가 만든다 했어요? 세상이 만든다. 세상의 일부가 바로 내가 태어나기 전에 있었던 나의 부모, 세상이 이만큼하다면 그 중의 한 빌라, 한 가정이 있다면 이 가정에서 한 남자, 여자 있었고 그 사람이 나를 낳았으면 나는 이 가정의 자식이 되는데 이 부모는 또 기존의 살았던 모든 세상의 자식이기 때문에 결국 우리는 이 세상의 자식이에요. 결국 어두움의 자식들이에요. 우리는. 빛이 아니고 어두움의 자식들이에요. 그래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자, 여기서 제가 이리 이야기하면 요런 힌트를 딱 얻어야 돼요. 세상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면 그럼 나는 세상에서 내 힘으로는 못 빠져나가지요. 그러면 내가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말은 나한테 누가 알려줘서 될 수는 없어요. 새로운 세상이 오게 되면 그 새로운 세상과 연관된 새로운 피조물이 바로 천국 가는 백성이 되는 겁니다. 이야기가 세상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세상이야기 아니고 세상이야기를 하는 그 논리와 똑같은 논리가 맞은편에 있어요. 맞은편에. 그게 무슨 세계냐 그게 낯선 세계에요. 낯선 세계.
자, 이제부터 어렵게 시작합니다. 이 기존의 세상은 언어로 서로 통해요. 말로 서로 통한다 말이죠. 쉽게 말해서 개념으로 통한다면 이 낯선 세계도 마찬가지로 언어로 개념으로 낯선 세계가 찾아옵니다. 낯선 세계가 찾아오게 되면 그것을 가지고 예레미야에서는, 이사야에서는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계시’라 해요. 천상회의에 참석한 선지자들이 말을 하니까, 예레미야가 말을 하니까 낯선 세계의 말을 해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기존의 어두운 이스라엘 사람들은 단어는 그 단어고 문맥도 그 문맥인데, 그 문맥이고 그 단어인데 말이 안 통해요. 그러니 똑같은 단어인데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는 거예요. 그 중에 하나나가 아까 뭐했습니까? 피라는 것. 예수님이 피를 흘리니까 아프겠다. 아~ 저렇게 죽는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아휴, 목마르겠다. 얼마나 고생했나?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기존에 우리가 통하는 내가 들었던 개념, 단어에 의해서 피. 피라 하는 것은 지금 히브리서 13장20절 나오지요.
이 단어를 이렇게 봐도요, 언약의 피로 이렇게 하니까 이 ‘언약의 피’라는 한글로 된 단어를 보면서 우리는 내가 알고 있는 한글 쓰는 이 세계에서의 피는 어떤 개념을 품고 있고 한글 세계에서 영원한 언약 그런 개념을 동원해가지고 예수의 피를 이해하고 해석해버린다 말이죠.
이렇게 하니까 낯선 세계에서의 입장에서는 그 뜻이 그 뜻이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의 체험에서 나온 피, 언약, 그 개념이 낯선 세계에서 보기에는 그게 엉터리가 되는 겁니다. 유대인들보고 하는 말이 그 착한 분을 왜 죽였느냐 이렇게 하지만 그 남 말 하지 말라는 거예요. 지금 이 시대에 낯선 세계의 말을 우리가 오해하게 되면 우리는 지금 가정의 가정주부로 있으면서 매일같이 주님을 죽이는 거예요. 개념이 다르고 단어가 다르기 때문에.
언약에 들어가야 되는데 우리는 언약에 들어가기 전에 언약이란 단어 자체가, “많이 알고 있습니다. 예, 그 약속이잖아요. 약속 단어 모를까요. 제가 바보인 줄 알아요? 약속 알아요. 언어 알아요.” 이렇게 한다 말이죠. 좀 더 확대해보면 하나님의 아들, “아! 하나님의 아들 알아요.” 그리고 아들, “아들알지요. 우리 집에도 아들 있는데.” 하나님께서 아들 낳았다. 하나님 믿고 아들 믿으면 우리는 구원받는다. “아휴, 나 잘 알지요.” 이리 나오더라 말이죠.
그리 잘 아는 사람이 이스라엘은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에요. 여호와 알지요. 자기 아들이지요. 다 아는 그들이 누굴 죽였습니까? 하나님의 아들 죽였잖아요. 히브리서 끝부분에 와가지고 우리는 다시 한 번 이 성경을 제대로 지금 이해했는가를 점검 타임. 점검하는 시간을 가져야 돼요. 히브리서 마지막에 와가지고.
낯선 세계에 휘둘려야 됩니다. 낯선 세계. 만약에 낯선 세계가 아니고 우리가 아는 세계라면 이건 전도할 때 말만 잘하면 전도가 돼요. 니가 아는 개념, 내가 아는 개념, 같은 동네에 살기 때문에 알지? 나는 이런 뜻으로 이해했어. 으응, 언더스탠. 응 되지. 이러면 그만 형제가 되어버리고 전도한 게 되고 갑자기 사랑하는 이웃 형제 노래 부르면서 어깨동무하고 그런다 말이죠.
그러나 사도바울은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전한 말이 아니라 했지요. 방금 말을 해놓고 말이 아니래. 이런 무슨 뚱딴지같은 말이 있어요? 고린도전서2장4절에 나옵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내가 말을 하는데 너희들은 내가 너희들 아는 그 말로 듣기느냐? 그거 아니거든. 나는 말의 지혜로 하는 것이 아니고, 개념에 담긴 의미로 하는 게 아니고 성령의 나타남으로 한다. 성령 낯선 세계입니다. 낯선 세계의 위력이 너희로 하여금 내 말이 기존에 인간들이 쓰는 통용되는 그 뜻이 아님을 안다는 거예요.
십자가가 우리가 있는 세계에서는 정치범을 죽이는 사형방식이 되지만, 사도바울 낯선 세계에 속한 사람한테는 뭐냐 그거 외에는 다른 방법으로 구원의 능력이 없어요. 십자가가. 십자가가 구원의 능력이라는 거예요. 제 말의 취지를 잘 아셔야 돼요. 기존의 십자가는 뭐냐 하면 내가 여기 있고 십자가 달린 그 사형수를 내가 믿어주면 나는 구원받는다. 이게 기존의 맥락에서는 이해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낯선 세계에서는 뭐냐 하면 십자가가 하나의 사건으로 끝난 게 아니고 그 십자가가 살아있어 그 십자가 졌다는 그 말 자체에서 2000년 전의 능력이 지금 2017년도에 그대로 이게 적용이 된다는 것이 결과물로 우리한테 받아진다는 걸 믿는 것. 이게 낯선 세계에 속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축복입니다.
내가 믿어줘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십자가가 내속에까지 들어와서 믿어지게 하는 거예요. 이게 새 언약의 원칙입니다. 새 언약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고 아예 우리의 허락도 없이 우리 안에 접수하고 점령해버리는 겁니다.
그 다음부터 문제는요, 술술 풀려요. 그 다음 문제는 뭐냐 하면 “왜 우리 쪽에서 다가가서는 안 됩니까?” 할 거잖아요. 성경이야기는 뭐냐 “니는 뭘 해도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니가 죄인이기 때문에 그렇다.” 하면 우리 쪽에서 또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래도 말씀은 지켰습니다. 율법은 지켰습니다.” 할 때 저쪽에서 하는 말이 “율법은 모든 입을 막고 저주아래 있게 함이라.” 로마서에 나온 이야기가 다 이해가 되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여겼습니다. 자기는 믿는다고 알았지요. 아브라함 본인이 하나님을 믿는 줄 알았지요. 믿는다면 더 이상 믿으면 합격이잖아요. 믿음으로 구원받았으니까. 합격 같으면 테스트가 더 이상 필요치 않아요. 서울대학 합격했는데 또 서울대학 입학시험을 치를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이쪽 세계에서는. 그렇지요?
육군사관학교 합격했잖아요. 육군사관학교 합격했는데 팔굽혀펴기 이거 떨어지면 취소된다. 이런 거 있습니까? 이미 합격해놓고. 없다 이 말이죠. 이미 합격하기 전에 팔굽혀펴기하고 턱걸이하고 체력검사 다 보잖아요. 경찰시험에서는 손 쥐는 힘이 없으면 안돼요. 어떤 사람은 필기시험에서 거의 만점 받아 합격됐는데 세 번이나 손 쥐는 힘이 안 되어서 떨어졌는데 기어이 되기는 됐어요. 노량진에 경찰공무원하면 손 쥐는 시험까지 다 가르칩니다. 학원 다녀야 돼요. 집에서는 이거 소용없어요. 운동하고 다해야 돼요.
아브라함 같은 경우 내 쪽에서 하나님을 믿었어요. 이미 믿으니 하나님의 의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테스트가 필요치 않은데 주께서는 창세기22장에서 테스트해버려요. 니 아들 사랑하는 독자를 바쳐라. 이미 합격했는데 왜?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다. 할 때 믿음에 그 주체가 누구냐 하면 내가 믿어요. 내가. 이쪽 인간세계에서의 모든 단어사용은 항상 숨겨져 있는 주체가 있어요.
비가 온다. raining이 아니에요. 그냥 쓸 때는 raining이라고 쓰지 않고 It’s raining. It’s 라는 것은 가상적인 주어를 갖다 붙입니다. 그것이 비가 내린다. 그것은 그냥 붙이는 거예요. 주어가 항상 있어요. 인간은 자기 자신이 주어가 되는 겁니다. 믿음하면 누가 믿는다? 내가 믿는 거예요. 남이 믿어서 내가 구원받는다. 이건 터무니없는 거죠. 그런데 낯선 세계에서는 누가 믿었어요? 예수님이 믿었는데 내가 구원받아요.
“나도 믿을 수 있는데. 왜 그렇게 부질없는 짓을 했습니까? 주님이여! 나는 믿을 수 있는데.” 이리 되잖아요. 그럴 때 주님께서 하는 말이 “니는 믿을 수 없어. 왜? 니는 처음부터 관계가 끊어진 죽은 자니까.” 죽은 자니까 믿을 수 없는 거예요. 그래서 죽은 자라는 이 내용을 가지고 하나님의 의가 되는 믿음은 나의 믿음과 의가 연결되는 것이 아니고 이 죽은 자를 가지고 우짜 우짜 어떻게 어떻게 하신 분.
그러니까 죽은 이삭 대신에 수풀에 갇혀 있었던 하나의 양이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는 거예요. 지난 수요일에 했지만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했잖아요. 양 잡아서 하나님이 받지 않습니다. 양 잡아서 받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받는 것은 약속된 사람을 받아요. 인자. 수요일 날 들어봤으면 알아요. 인자를 받아요. 인자를. 시편8편 인자를 받는다고요.
인자가 어느 자리에 가느냐 하면 양 바칠 자리에 가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말을 잘못한 거예요. 지금. 여러분들에게는 양 바칠 자리에 인자가 들어간다. 하잖아요. 왜냐 하면 예수님은 나중에 왔고 앞에는 양 드린 제사가 있었으니까. 시간상 양 제사 있다가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 드리잖아요. 시간상 그리 되는데.
사실은 내용상 그게 아니에요. 예수님 자리에 어떤 분이 들어간다. 알려주기 위해서 미리 양을 모형으로 계속 바쳐온 거예요. 그래서 양은 모형이 되고 예수님은 실체가 된다. 이 말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양을 바쳐버리면 양을 바친 주체가 누굽니까? 내가 “하나님 보세요. 제가 양을 드립니다.” 이렇게 해서 주일날 할 걸 다 했다. “제가 양을 드립니다. 받으세요.” 이게 구약 때 한 거예요.
그런데 양 자리에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쳐야 된다 말이죠. 이삭을 바치기를 원했던 거예요. 양은 폼이에요. 그냥. 형식이라고요. 양 백 마리, 천만마리 바쳐 바야 구원 못 받아요. 이삭을 바쳐야 된다고요. 이삭을 바칠 것을 양으로 대체시킨 거예요. 그렇다면 그걸 알고 양을 바친다면 이건 양이, 양이 아니고 누구 양이냐,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체를 대신해야 돼요.
그러면 내 믿음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고 누구의 믿음으로? 예수님이 아버지에게 드린 아버지의 아들이 된 입장에서 우리 자리에 아들로 오셔서 우리를 대신해서 아버지 앞에 옳은 믿음을 드림으로서 우리는 그 예수님의 일에 파급된 예수님의 일에 초청받은 이끌림 받은 그 사람이 바로 예수님의 믿음으로서 구원받는 거예요.
믿음의 주체가 “내가 믿습니다.”에서 뭐로 바뀝니까? 예수님의 믿음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그래서 믿음은 행함이 아니고 믿음은 에베소서2장8절에 나오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에요. 선물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나한테 없는 게 새롭게 주어지는 게 선물이라 하는 겁니다.
그러면 다시 나한테 오면 어떻게 돼요? 낯선 세계가 이쪽 세계에 오면 어떤 고백이 됩니까? 이쪽 세계에 있으면서 낯선 세계를 표현하는 방법은 간단해요. 부정적으로 어떻게? “나는 예수님을 믿지 못합니다.” 이 고백이에요. 내가 주체돼서 구원 받는 동네가 천국 아니에요.
그러니 천국가면 면류관도 다 반납해요. 내가 쓴다면 내가 주체인데, 면류관을 쓰지 않고 벗어서 누구한테 주욱 달려갑니다. 누구한테 달려갈까요? 주님이 쓰시옵소서. 옛날에는 대학 졸업식 할 때에 대학가기 힘들었을 때 기존에 8%밖에 대학 갔을 때 대학 졸업식하게 되면 부모님하고 사진 찍잖아요. 그러면 학사모를 지가 먼저 쓰고 그 다음에 학사모를 누구한테 씌우냐 하면, 엄마한테 씁니다.
“이건 내가 대학졸업 하는 게 아니고 엄마의 공이 큽니다. 시금치 팔아서 밭 팔아서 했습니다.” 엄마는 또 그걸 눈물 흘리고 자랑스럽게 학사모 쓰고 사진 찍는 건 좋은데 그 얼굴이 늙었어. 학사모하고 어울리지를 않아. 그 사진 가지고 촌에 와가지고 사진액자에 사진 여러 장 더덕 더덕 붙이는 거예요. 애 낳으면 또 붙이고. 먼지 허옇게 묻고. 퇴색된 사진 있잖아요. 그렇게 붙였다 말이죠.
그게 뭐냐 하면 자식 입장에서 첫 월급은 부모님 내복 사주고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는 겁니다. 이게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뭡니까? 모든 공로를 누구한테 던져요? 주님한테 던지는 거예요. 참 쉬워요. 부도났잖아요? 부도난 공로를 누구한테 돌립니까? 주님 덕분에. 애 성적 막 내려가잖아요? 그것도 주님한테 범사에 감사하는 거예요.
미장원에 갔는데 머리가 엉망으로 나왔어요. 누구 덕분입니까? 주님 덕분에 머리 잘못 깎았어. 주무시다보니 그만 잘못 깎았어. 낯선 세계입니다. 이 성경의 세계는 낯선 세계에요. 낯선 세계인데 우리가 낯선 세계인지도 모르고 건방지게 주체를 가지고 그냥 덤벼든 거예요. 덤볐다는 말은 성경 자체를 이미 시작할 때부터 곡해하고 왜곡할 수밖에 없어요.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또 죽이는 2번 3번 계속 죽이는 일들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예가 무슨 예인가 하면 성경을 볼 때에 바로 인간의 자기 주체를 위해서 보는 경우를 가지고 뭐라고 하는가 하면 ‘개인구원’이라 합니다.
개인구원으로 성경을 보는 한 예를 들겠습니다. 시간이 역사가 이리 있다면 항상 개인구원의 출발은 역사에요. 역사 선이 있다면 예수님이 여기 재림이 이쪽이라면 마지막 때가 어떤 때냐 하면 1290일로 봅니다. 이걸 7년 환란으로 봐요. 어디서 많이 봤던 그림 같지요. 다니엘에 보면 70이레 중에서 7+62=69가 돼요. 1이레가 남았어요. 1이레는 ½+½로 되어있어요. 요 1이레를 설명해서 1290일, 1335일 요렇게 다니엘 끝에 보면 마지막 때까지 두 개의 시간 기간이 나와 있습니다.
1이레는 7년이니까 3년 반 돼요. 반 토막 내야 되니까. 문제는 관심사가 이렇게 그려놓고 휴거를 언제 받느냐 이거에요. 휴거를 언제 받느냐? 환란 전에 받느냐? 이때가 환란 때니까 환란 전에 받는다. 이 때 휴거한다. 휴거하고, 휴거하고 난 뒤에 그동안 예수 안 믿는 사람한테는 이게 죽 산다 말이죠. 살아가면서 악마가 마지막 발악을 하니까 사는 게 괴롭잖아요. 고로우니까 그때는 힘드니까 회개하는 거예요.
힘드니까 회개를 하면서 여기에서 이제는 휴거를 하는 사람이 있고, 힘드니까 잘못했습니다. 하고 중간에 휴거하는 사람이 있고, 고집부리다가 재림직전에 휴거하는 사람 있고, 그러니 휴거가 한 번 내지는 두 번, 세 번, 네 번, 막 이리 될 수가 있다는 거예요. 이것도 이론이 분분해요. 들어보니 아스라이 추억들이 생각나십니까?
그런데 앞의 환란은 뭐냐, 소환란. 환란이 좀 이렇게 약해. 요건 대환란. 요거는 견디기 힘들어. 아주 심한 환란. 중간쯤에는 적그리스도가 나타나요. 적그리스도가 나타날 때는 뭐냐 하면 요 때 적그리스도는 하는 짓이 있어야 돼요. 적그리스도가 하는 짓이 뭐냐 하면 이스라엘 성전이 회복이 돼가지고 이스라엘 성전을 박살을 내야 돼. 그러면 여기서 그 못 돼먹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인 유대인들이 이제사 정신 번쩍 차려가지고 우리가 죽이지 않아야 될 분을 죽였구나! 어이고~ 어찌할꼬. 회개해서 이스라엘로 돌아오게 되면 이방인에다가 이방인 + 이스라엘이 딱 되게 되면 요게 수가 다 차게 되면 그 때 예수님이 재림해가지고 천년왕국이 시작된다는 설이 있고.
벌써 여기부터 휴거자체가 천년왕국해가지고 위에서 2층에서 즐기고 있고, 카페도 2층 있잖아요. 2층에서 지금 커피마시고 있는데 아래층에서는 지금 물난리 났어요. 느긋하게 즐기면서 아래층을 보면서 “그리 진작 예수 믿지. 그래~ 그러니 여기다가 바코드 박지 말라 했잖아.” 이런 식으로. 히히닥거리는 그런 설도 있고.
아니야, 환란이라는 것은 환란 속에 환란을 견뎌야 하기 때문에 휴거를 일찍 받는 것이 아니고 재림 때 받는다. 한꺼번에 받는다. 이쪽 설도 있고. 적그리스도가 오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성령께서 우리를 지키기 때문에 무사히 적그리스도를 통과한다. 참아야 된다. 그렇게 통과해야 될 이유는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이 본 백성 회개하라고 이렇게 해야 된다. 그러니까 우리는 한국에서는 전도그만하고 이스라엘로 이사 가서 그 사람들 유대인들을 위해서 구원하는 게 아니고 유대인들이 빨리 회개해줘야 이게 결합이 되어가지고 예수님 재림한다니까요.
유대인들이 느긋하게 자꾸 딴 짓하고, 차 시간 됐는데 화장하고 느긋하게 하게 되면 늦어지면 우리들이 더 환란 속에 있으니까 힘들거든요. 그러니 지금 조사해보니까 유대인들 가운데 지금 5만 명쯤 된답니다. 5만 명 가지고는 안 된다는 거예요. 1500만 명중에서 5만 명이니까 몇 %되겠어요? 온 이스라엘이 다 들어가야 되니까. 온 이스라엘이. 그러니까 더욱 더 열심히 해가지고 전도해야 된다. 쉽게 말해서 돈 내라. 이스라엘 전도하는데 돈 내라 이 말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계획을 앞당기는데.
자, 이런 이야기에 초점이 어디가 있습니까? 이 모든 성경에 있는 단어, 다니엘, 요한계시록, 모든 단어의 초점은 결국 뭐부터 출발한 거예요? 개인구원이죠. 개인구원의 주체가 누굽니까? 본인이에요. 본인. 내가 성경연구해서 나 구원받으면 된다는 거예요. 다만 구원 받았는데 그동안 정보가 부족했는데 성경을 통해서 필요한 정보를 해가지고 그 정보가 안 잊어버리고 내가 갖고 있으면 나중에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거예요. 치매 걸리면 어떻게 할 건데? 사람은 나이 들면 아는 정보도 잊어버려요. 아는 성경도. 희미해진다고요. 오늘 조카 오는 것도 잊어버리고. 모든 게 뒤죽박죽이에요. 앞으로 점점 그럴 거예요. 점점 뒤죽박죽이에요.
젊으신 분은 몰라요. 그거 뭐 정신 바짝 차리면 되지 하는데. 정신 바짝 차려도 안 되고 심지어 메모해도 어디에 메모했는지 모른다니까요. 메모해도. 어디에 치웠는지 몰라요. 치워놓는데 잊어버리면 안 돼! 가만히 있어봐라. 어디에 치웠더라. 성경책을 가져와놓고 뒤에 놔두고 성경책 안 가져왔다고. 정신없을 때는 말려야 돼요. 목사님! 그만하세요. 할 만큼 했습니다. 주위에서 말려야 돼요. 안 말리면 안 되는 줄 알고. 교주인줄 알고 지 아니면 안 되는 줄 알고. 이런다니까요.
얼마나 많은 사람을 이런 식으로 그들의 기쁨을 인간들의 타고난 악마의 욕구를 구원 욕구를 채워줬습니까? 그래서 내가 하잖아요. 창세기3장에 보면 인간은 쫓겨났다. 그리고 그냥 아이구~ 실수다. 실수다. 미안하다. 내가 다시 찾을게. 이게 아니고 실수가 아닙니다. 아예 생명나무 차단시켜놨어요. 왜 그랬겠어요?
그리고 그 의지가 그 때 뿐일까요? 계속될까요? 세상 끝 날까지 그 의지가 계속됩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3장에 보면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니라. 그리고 예수님은 이야기해요. 들을 귀 있는 자만 들으라. 사도행전 마지막에 보면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할 것이다. 사도행전 중간 중간에 나와요. 영생주기로 합당한 자에게는 안다. 영생주기로 합당한 사람, 또는 영생 받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되어있어요.
사도바울은 말씀을 전하면서 세상적인 자기 자아 주체에 홀로 있는 사람을 찾는 게 아니고 누구나 인간은 자기중심입니다. 그런데 낯선 세계 그러니까 성령이죠. 낯선 세계에서 그 주체를 덮친 그 사람이 누군가를 찾는 방법이 바로 복음 전하고 말씀전하는 것이라고 사도바울은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믿으니까 “당신은 영생주기로 작정된 자이기 때문에 믿는 거예요. 본인의 의사로 믿는 게 아닙니다. 본인의 자유의지로 믿는 게 아니에요. 로마서9장 창세전에 이미 구원 받기로 작정됐기 때문에 지금 내 말에 믿어지는 겁니다.”라고 이야기해요.
로마서10장에서는 그걸 아주 단 도리 하듯이 이야기해요. 로마서10장15절 봅시다.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면, 남들이 사도바울보고 “니나 내나 똑같은 인간이잖아.” 이렇게 할 때 사도바울이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물론 그 사람들이 믿을 사람들이 아니겠지만, 아닌 건 아닌 거예요. 자기는 주님에 의해서 보내심을 받은 거예요.
지난 수요일 날 기도제목이 이렇습니다. 사명감이 없으면 홀로 산다는, 사람이 보내심이 없으면 사람은 혼자 살다가 굉장히 외로움을 느껴요. 그런데 보내심을 받아버리면 보내신 자와 함께 있기 때문에 외롭지를 않아요. 나한테 니는 인생을 이렇게 살아라. 니는 남자로 살지 말고 여자로 살아라. 이 모든 것까지 어느 것 하나, 이상히 평발이 되어서 양말이 잘 떨어집니다. 니는 양말 잘 떨어지는 사명을 받은 거예요.
모든 조건들이 나라고 구성된 모든 조건들이 보내신 분의 작품이에요. 보내신 분에 의해서. 보내신 분을 믿었기 때문에 구원받는 게 아니고 이미 구원 받았기 때문에 되돌아보니까 모든 것이 주께서 다 만들어준 구성물이에요. 구성물. 그렇게 되는 겁니다. 자, 아직까지 히브리서13장20절 아직까지 안 들어갔어요. 들어가기 전에 우리 자기 자신에 대해서 분명히 알아야 되기 때문에 한 겁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하게 되면 인간에게는 언어가 있고 언어 속에 말도 포함되지요. 말이 있고 이 말은 말을 통해서 자기의 주체의 본색이 나와요. 본질이 다 나와요. 그런데 이 똑같은 말을 누가 사용하느냐 낯선 세계에서 성령께서 예수님께서 이 말을 사용을 해버렸어요. 다 같은 단어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같은 말을 사용하니까 “아~~ 그런 뜻이군요.”라고 자기 주체를 부인하지 않고 그냥 덤벼드는 겁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나중에 예수님을 따르겠습니다. 이렇게 마태복음9장에서 하니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죽은 자로 하여금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할 때 주님께서는 이 죽음이란 단어자체를 그 제자가 쓰는 거하고 주님이 쓰는 거하고 달라요. 숨 쉬어도 죽은 자다. 지금 살았다고 하지만 그건 죽은 거다. 죽은 이삭을 누가 살립니까? 어린 양이 살리잖아요. 하나님이 살리는 게 아니에요. 어린양이 있어야 돼요. 이삭을 뭐로 본다? 죽은 자로 보고 어린 양이 이삭을 살릴 때 비로소 이삭은 죽었다가 살아난 자가 되고 그걸 증거 하는 자가 아브라함이에요.
그래서 아브라함은 죽었다가 살아난 것을 믿어서 그 믿음에 테스트가 똑같은 테스트가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가지고 우리에게 등장한 겁니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했다. 이것이 십자가 끝이 아니에요. 주님의 십자가를 보니까 ‘아! 내가 죽은 자구나! 실은 내가 지금.’ 십자가를 바라본 내가 죽은 자구나 하는 것을 아는 자가 정말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그러면 제가 묻지요. “죽은 자입니까?” “예, 죽은 자입니다.” “그럼 죽은 자 행세를 해보세요.” 이러면 사람들은 “어휴!” 한다고요. 시체 놀이한다고. 그게 죽은 자가 아니고, “아이고, 목마르네. 요거 마시고 어디 놀러갈까요?” 요게 죽은 자의 모습이에요. 제가 했지요. 요거 참 중요한 건데. 평범한 것이 저주다. 그냥 평범하게 사세요. 그게 저주에요. 나쁜 짓한다고 저주가 아니고. 그냥 평범하게 살다가 나중에 국회의원되고 대통령될 때 그게 저주라니까요.
평범히 살고 어떤 남편이 있는데 머리는 약간 희었지만 유엔에서 좀 활동하다가 외무부 장관해가지고 하는 그게 저주라니까요. 그게 죽은 거예요. 죽었다 하니까, “그럼 나는 아무것도 안 해!” 아무것도 안하는 게 죽은 게 아니고 까불고 설치고 만날 모였다가 찜질방 놀러 다니고 놀고 난 뒤에는 점심 먹고 하루 다해가지고 저녁때는 남편 밥해주고 이리 사는 거.
그냥 평범하게 애 키우고 개 키우고 이리 사는 것. 이게 죽은 거예요. 죽은 것은 되게 바빠요. 할 일이 많아요. 오늘 스케줄이 꽉 짜여 있어. 오늘 저녁 때 무슨 드라마 봐야 되고. 할 말이 있고 할 일들이 꽉 있다고요. 그게 죽은 모습이에요. 이게 뭐냐, 오늘 강의 제일 처음에 했습니다. 사람의 본질은 그 사람이 속해 있는 그 세상 자체에서 규정이 되지 본인이 본인을 규정하는 게 아니에요.
어떤 학자는 인간은 지혜롭다는 거예요. 그 학자가 왜 주장하는가 하면 원숭이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겁니다. 비교할 걸 비교해야지. 원숭이하고 비교하고. 그게 바로 심리학자들이고 생물학자들이에요. 맨날 연구하는데 쥐하고 연구하고 원숭이하고 연구해요. 안 죽고 영원히 사흘 만에 사신 분 앞에서 연구해야 될 게 아닙니까.
예수님이 연구대상이 아니고 만날 지보다 못한 거 비교해가지고 인간은 영원히 대단한 존재가 될 수 있다. 인공지능을 보아라. 달까지 가잖아. 달까지 가는 게 중요합니까? 달 만드신 분이 중요합니까? 빵 만드신 분이 중요해요? 맛있게 먹어주는 것이 중요합니까? 만드신 분이 중요하잖아요.
주님이 주신 거 공기가지고 사용하면서도 지 잘났다고 우기는 게 인간입니다. 배후에 악마가 역사해요. 마귀가 그렇게 하게 했어요. 무쏘의 뿔로 가라. 니는 니 힘으로 살아가라. 다들 지 힘으로 살아가잖아요. 평범한 겁니다.
다시 평범한 거 이야기해볼까요. 인간의 소망은 이것밖에 없어요. 안일무사. 쉽게 짧게 하면 편하게! 요거에요. 우리 집 가훈, 편하게! 요게 좀 천박하면 우리 집 가훈,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행복하자! 에요. 전부 다 행복하자! 에요.
에피쿠로스학파의 주장은 이겁니다. 인간이 행복한 게 목적이다. 행복 하는 방법을 가르치면 너무 욕심내지 말고 준칙이 있어요. 그런데 에피쿠로스학파의 그것이 왜 로마시대 때 그게 안 받쳐줬느냐 로마는 이렇게 합니다. 시저는 이렇게 합니다. 나라가 잘돼야 개인도 행복한데 개인이 행복하다고 나라가 잘되나? 나라가 원하는 것은 니 행복이 아니고 국가에 복종하라.
남자들은 군에 안 가는 게 편해요. 그러나 가야 돼요. 나라 없으면 내 행복도 없어요. 인민군 되어 가지고 아바이 수령 섬길 겁니까? 그러니 인간이 행복하지만 인간의 모순점이 있어요.
나냐? 아니면 나보다 더 센 어떤 힘이냐? 그 고민 죽을 때까지 안 풀립니다. 그걸 어떻게 푸는가, 10분 쉬고 합시다.
공은주 (IP:119.♡.152.148) | 17-06-26 16:29 | 안양20170616b히13장20절(언약의 피)-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해봅시다. 아까 첫 번째 시간에서 제가 한 것은 무사안일 또는 안일무사 했는데 이게 우리가 성도는 이래서는 안 된다고 백날해도 조금만 약간 한가하고 시간이 남아터지면 이쪽으로 끌리게 되어있어요. 편한 게 최고에요. 하늘에 별 따도 소용없어요. 성령 받은 거 보다 편한 게 좋고, 은혜 받은 거 보다 편한 게 좋아요. 은혜고 자시고 간에 병으로 아팠는데 기도해서 나았다. 그것도 귀찮아요. 아예 안 아팠으면 좋겠어. 처음부터 아예 말썽 없으면 최고에요.
그래서 인간은 이런 입장이기 때문에 이 무사안일을 좋아하고 편한 걸 좋아한다는 이것은 이미 우리라는 주체를 주께서 버리지 않는 거예요. 이게 시커먼 죄인덩어리라 할지라도 주께서 죽을 때까지는 계속 이것이 유지되어야 되는 겁니다. 유지되는데, 유지되면서 뭘 아느냐, 죽음이란 의미를 주변사람들이 돌아가시는 그걸 우리는 죽음으로 보는 거예요. 왜? 무사안일이니까. 내 중심이니까.
보게 되면 무슨 생각이 드느냐 하면 ‘아휴, 나는 다행이다.’ ‘아이고, 애도 많이 크지도 않았는데. 중학생인데. 내 나이에 죽으면 애가 크는 것도 문제지만 내가 가고 난 뒤에 내 남편이 다른 여자 만나서 사는 건 나는 시체에서 벌떡 일어나가지고 “이 여자 누구야?” 하고 싶을 정도로.’ 그걸 제가 요새 자주 이야기합니다.
내 인생에 내가 공들인 거 이게 너무 아까운 거예요. 왜 공들였느냐 무사안일 행복을 목표로 살아온 거예요. 행복이 목표다. 해서 달려온 게 아니고 내 속에 자동적으로 내 본성이라는 게 내 것도 아닌 게 들어와 가지고 그게 나를 어디로 몰고 가느냐 하면 행복하다, 무사안일, 편하다, 이런 쪽으로 자동적으로 가게 만들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죽음이라 하는 것은 최대의 적이 되어버렸어요. 성경에 보면 우리는 이미 죽은 자인데 성경을 덮어버리면 죽음은 멀리 할 것, 늙어서나 생각해볼 것, 공동묘지 그런데 가면 특히 비오는 날 공동묘지 근처도 안가. 여러분들이 자살했다는 어떤 사람의 지점이 있으면 그 다음부터는 그 지점을 그냥 못 지나갑니다. 무서워서. 막 떱니다. 여기서 자살한 게 기억이 나요. 죽음이 그 현장으로 보존되거든요.
죽음이 보존되면서 “여기 어떤 사람이 죽었데.” 만약에 이사를 가려하는데 지긋 지긋한 이 동네 피해서 이사를 가는데 나중에 복덕방 그 사람이 속였어. 나중에 보니까 그 집이 세 명이나 자살한 집이에요. 전번 주인은 안방에서 죽었고, 그 다음의 주인은 다른 방에서 죽었고, 세 명이 죽은 집으로 이사를 갔다. 첫날밤 잠자 보세요. 귀신 셋이 다 손들고 와가지고 니 죽으려고 왔느냐, 헐값일 때 니가 알아봐야지. 유난히 헐값이다 싶었지? 다 이유가 있어. 이런 거 가지고 막 하게 되면 우리는 무당 불러서 수맥도 하고 귀신아 물러가라, 하잖아요. 본인이 귀신이면서.
그런데 말입니다. 인민군이 쳐들어 와가지고 온 집을 다 폭격했는데 마치 빈집이 있어 가봤는데 소문으로 듣기는 그 집 옛날에 귀신 나온 집이다.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에요. 내가 지금 죽을 판에 귀신 나온 집이어도 괜찮아. 등 따시면 최고에요. 그래서 학자들은 뭐냐 하면 신체 감각의 안정을 가지고 이걸 인생의 행복으로 본 겁니다. 그걸 몸의 컨디션이라고 해요. 간단하지요.
모든 과학의 생활의 목적은 뭐냐 컨디션 유지에요. 아로나민골드를 먹은 날과 안 먹은 날의 차이점은 다르다는 거예요. 모든 것이 컨디션유지에요. 모든 상품의 수익은 “이 밤에 치킨 어땠습니까? 치맥 어땠습니까?” 묻는 거예요. 생각만 해도 기뻐요. 안 사먹어도 기뻐요. 치킨 뜯어 먹는 것. 따님들 계시지요. 살쪄도 운동하면 되니까. 치킨 먹고 싶어요. 치킨 먹을 때 누가 치맥 갔다 주게 되면 이게 바로 행복이에요. 내가 치킨을 원했고 치킨을 원한 예가 옛날에 치킨을 먹어봤기 때문에 그 맛있다는 감각이 여기에 삽입되어있어요. 신체에 감각으로. 정기적 신호로서 딱 누적이 되거든요.
그러니 현대 생물학에서의 행복이라 하는 것은 결국은 컨디션유지입니다. 컨디션유지가 뭐냐 하면 보통 봄가을의 습도40%에다가 기온은 19도와 23도 사이. 바람이 살랑 살랑 불어주면 괜찮아요. 3월, 4월, 5월 선한 바람 부는 그 순간 생각하면 쾌적하지요. 물론 황사 안 불어야 돼요. 황사 불면 마스크하고 골치 아파요. 요럴 때 우리는 뭐라고 하는가 하면 죽어도 좋아!
그런데 이렇게 되면 뭐가 없어지는가 하면 죄의 개념이 날아가 버려요. 죄의 개념이. 이건 죄 짓고 안 짓고는 신경 안 써요. 내 몸만 편하면 여기가 하늘나라에요. 여기서 천국이에요. 내 몸이 컨디션이 좋으니까. 성령의 열매를 해석하면서 인간들은 몸의 컨디션하고 결부시키게 됩니다.
누구를 사랑한다는 말은 일단 이빨이 안 아파야 돼요. 가시가 없어야 돼요. 그리고 사랑하기 전에 집에서 예상 못할 행운이 찾아와야 됩니다. 마음이 업 돼요. 애 성적이 오른다던지 예상 밖의 땅값이 올라가던지 이러면 100% 기가 서는 거예요. 그러면 상대가 뭐로 보느냐 갑자기 성령이 춤추고 은사를 많이 받은 거 같아. 사실은 그게 아니고 자기의 목적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이런 것에 우리는 얼마나 휘둘려 있어요. 우리는 얼마나 속고 삽니까? 이런 것에 대해서.
주의 성령은 그런 게 아니에요. 뭐냐 하면 바로 언약과 관련되어있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본문 들어가 봅시다. 피 인데, 무슨 피라했습니까? 언약의 피에요. 언약의 피.
언약의 피 인데, 아까 인간들은 행복하자. 하는 거예요. 이 피언약이 뭐 그리 좋아? 시답지 않게 여기는 거예요. 몸의 컨디션이 우선이기 때문에 언약의 피하는 것이 아무 의미 없어요. 그런데 아까 쉬는 시간에 이야기했지만 이런 겁니다. 이걸 언약의 피니까 장차 구원받기 위해서 믿으라 하니까 일단 믿어줘요. 믿워줘 버리면 이건 지식이 되고 정보로 끝나버립니다.
몸의 변화에 아무 영향을 안 줘요. 그냥 대뇌피질에 지식으로 누적이 될 뿐이고. 나중에 치매에 걸리면 날아가 버려요. 그래서 나이 많은 사람들은 찬송가는 계속 잊어버리고 나훈아의 노래는 오래 남고. 치매 걸린 권사들 장로들 보면 유행가 뽕짝은 오래가고 찬송가는 애초에 잊어버리고. 심방 가봐서 안다니까요. 이건 빈말이 아니고 진짜 심방 가서 알아요. 옛날에 새벽기도까지 찬송 그렇게 잘 부르던 권사님이 노래 부르려하니까 나훈아 노래 부른다니까요. 그거 배운 적도 없어요. 노래교실 간적 없어요. 그냥 한 번 들어도 쫙쫙 박힌다니까요.
뽕짝은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뽕필이기 때문에 이건 억지로 안 불러도 쫙쫙 붙잡게 되어있어요. 대중가요란 그런 겁니다. 성악가들이 놀러갈 때 노래방에서 뭐 부르는 줄 알아요? 유행가 불러요. 성악가들이 성악 부른다고 무대에서 얼마나 스트레스 받는데. 스트레스 받는 걸 유행가 불러서 푸는 겁니다.
교회 여전도회 모임이 놀러 갈 때 출발할 때 기도합니다. 목사가 기도합니다. “주여! 사고 나지 않게 하옵소서.” 기도 빡세게 하지요. 30분 지날 때는 찬송가 나와요. 그 다음부터는 올 때는 유행가 나와요. 지 혼자 부르기 미안하니까 “목사님도 한 번 불러보이소.” 처음에 춤은 율동 나오지요. 나중에 춤은 막춤 나와요. 올 때. 그래서 사고 나서 뒤차 박고 난리 났어.
언약의 피라 하는 것은 언약의 피가 없어요. 왜냐 하면 우리가 원하는 십자가 있더라도 이미 우리가 십자가 피를 OK해서 알아버리면 우리가 아는 십자가 피는 내 안에 두뇌에 저장이 되니까 실제로 언약의 피 십자가는 없다니까요. 모르면 있는데 이미 안다고 우기기 때문에 없어진 거예요. 언약의 피가. 따라서 언약의 피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우리 자신의 어떤 변화를 줍니다.
이게 어려운 거예요. 우리 자신의 변화를 줘요. 우리는 뽕필이기 때문에 유행가가 제일 좋아요. 그런데 어떤 변화를 주는가, 이 변화는 우리의 발걸음을 세시고 우리의 모든 세세한 것에 주님께서 개입을 하는데 그 개입이 무슨 개입이냐, 언약 사건을 유발시킵니다. 언약에 입각한 언약 사건은 바로 언약의 하나님에 의해서 언약 적으로 주어지는 겁니다. 아, 요거 설명 필요하겠지요.
달이 떴다. 달이 진다. 달이 떴다. 달이 진다. 언약입니까? 저는 언약입니다. 아무리 봐도 언약 아닌 것 같은데. 내가 그냥 봐도 예수 안 믿어도 다 아는 건데. 그렇지요? 예수 안 믿어도 달은 지고 떠요. 그게 하나님의 언약이 되어버리면 시편에 나오지요. 달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리로다. 이렇게 연관을 시키는데 제가 말하는 것은 어떻게 연관을 시키느냐 이 말입니다.
그 문제를 예레미야를 보겠습니다. 예레미야33장2절,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보세요. 희한하지요. 하나님이 일을 어떻게 합니까? 일을 성취하시고 행하시는데 그 일을 누가 만들었습니까? 누가 지었어요? 그 일을 행하시는 일을 누가 지었습니까? 여화와가 지었지요. 그러면 여호와께서 일을 만드시고 그 만드신 일만 행하시고 행함으로 끝납니까? 성취까지 갑니까? 성취로 가지요. 그 분이 바로 여호와에요.
인간이 끼어 들 자리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이게 성도의 행복이에요. 내 운명, 내 미래, 내 팔자, 내 가정, 내 직장, 내 이사 날, 그런 거 시답지 않게 신경 쓰지 마세요. 그런데 제가 이렇게 삼사년 보라 하셨잖아요. 1237 우리가 봤으니까 첫째시간 강의대로 한다면 우리는 이해하지요. 이해하니까 정보가 누적됐습니다. 이해는 하지만 별로 시답지 않아요.
그런데 사건을 일으킨다니까요. 요기에 합당한 사건을 우리에게 일으켜버려요. 일으켜버리면 우리의 반응은 뭐냐 하면 “하나님 왜 이러십니까? 제가 뭘 잘못했다고? 저를 왜 허망하게 하십니까? 왜 납득이 안 되는 일을 일으키십니까? 왜 납득이 안 되는. 제가 감당되지 않는 일을 왜 저한테 들이닥치게 하십니까? 저 우울증 걸리려합니다. 저 우울증 걸리면 좋겠습니까? 제가 허무하면 좋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나온다고요.
그런데 그럴 때, 그 자체가 뭐냐 벌써 변화의 조짐이에요. 변화의 조짐이에요. 뭐냐 하면 우리는 행복하자, 이게 목적입니다. 이건 내가 목적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괴물이 그렇게 시켜서 그래요. “너는 무조건 행복해야 돼! 창세기2장 3장 쫓겨난 거 생각하지만 무조건 지금 습도40%에다가 17°C 행복해. 그게 인간이야. 그러니까 신자는 그런 조건만 있으면 컨디션만 좋으면 행복해.” 사실은 나이 한 70된 할머니도 습도 괜찮고 적정온도 맞으면 행복합니다. 창가에 내다본 게 문제에요. 창가에 내다보니까 같은 이웃집 같은 할머니 65살 할머니인데 너무 젊어 보여. 그 순간 행복 다 깨져버렸어요. 다 날아가 버렸어요.
그 이유를 설명해 드릴게요. 행복해야 되는데 행복의 반대말이 뭐냐 하면 우리는 허무다 말이죠. 그러니 인간은 뭘 경험하느냐 하면 행복을 원하지만 주께서는 허무를 경험해요. 허무를 경험하게 되면 우리는 여기서 강력한 반발과 반항이 나옵니다. 요 반발과 반항이 태어날 때 원초적인 우리의 본질, 우리의 본성이 수시로 튀어나온 거예요. 수시로. 하수도 낡으면 여기서 막으면 저기서 또 물새잖아요. 우리는 수시로 나와요. 튀어나와요. 뭐냐 하면 내가 원치 않는 그러한 경험들을 수시로 경험하게 됩니다.
행복을 원하는데 허무가 찾아오고 기쁨을 원하는데 슬픔이 찾아오고 늘 찾아오는 건 아니지만, 다른 날은 무심코 살아가고 무심코 살다가 혼자 있으면 또 내가 어떤 기분이냐 생각하다보면 허무가 찾아오고 이래요. 이게 뭐냐 하면 허무가 찾아온다. 쉽게 말해서 자기가 되게 불쌍하게 느껴져요. 아휴, 나같이 불쌍한 존재가 있을까? 여자 같으면 또 찔찔찔 울지요. 울고 또 음악 한 번 듣고 같이 또 음악 따라 리듬 맞춰 울고 이렇게 우는데, 이 반발과 반항이 뭐냐 하면 이게 바로 언약의 피가 유발되는 현장을 주께서는 이렇게 현장을 다져놓은 거예요.
십자가를 다시 발생시키려면 십자가 지는 그 현장, 무대가 세트가 마련되어야 돼요. 우리는 어떤 역할을 해야 되느냐 하면 예수님 십자가 못 박아 죽이는 그런 못된 역할을 해줘야 되는데, 그 못된 역할이 뭐냐 반항과 반발이 나오면서 그 역할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언약을 이 지상에서 언약을 성취하는 공식입니다.
다음 적용시켜보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출애굽 할 때 신났어요. 미리암이라는 모세의 누나가 선도해서 찬양을 불렀습니다. 그 찬양 가사를 보면 여호와는 용사시니 쉽게 말해서 대단한 분이 우리와 함께 있으니 더는 우리는 불행이 없을 것이고 감사합니다. 라고 불렀던 그들이 출애굽기 16장 들어오게 되면 원망, 원망이 터져 나옵니다. 반발, 반발이 나와요. 그런데 그들은 그걸 비정상으로 봐요. 이래서는 안 된다고 보는 거죠. 아니에요. 이래서는 안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구원은 그냥 물바다 건너온다고 그게 천국이 아니에요. 애굽에서 빠져나온다고 천국이 아니에요. 구원의 종착점이 아니에요. 우리 죄에서 건져냄을 해서 우리가 의인이 되어야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그게 종착점이에요.
그런데 사람들은 습도 맞추고 먹을 거 먹고 돈 많고 그리고 몸무게 다이어트해가지고 원하는 몸무게 50Kg 좀 나오고 160에 50, 대단하지요. 해당되는 사람 있습니다. 지금. 뱃살 안 나오고 얼마나 부럽겠어요. 사실은 오리가 물에 뜨기 위해서 얼마나 발을 움직여야 하듯이. 그런데 그게 종착점이 아니에요. 그게 복이 아니다 말이죠.
누가 이것이 복이 아니고 종착점이 아니라는 것을 누가 알겠어요? 동행해야지요.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동행을 해주게 되면 내가 생각하는 모델이 내가 가야 될 모델이 아니에요. 모델을 따로 마련해줘요.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동행하면서 하나님의 편에 선 사람이 등장합니다. 누구냐 하면 모세에요. 모세가 보여줄 모델이 뭐냐 하면 이거에요. 세자로. ‘억울함’입니다. 죄인을 구원하려고 하면서 죄인한테 욕 되게 얻어먹는 억울함. 그 억울함 뒤편에 누가 있느냐 하면 예레미야 33장 2절, 일을 행하시고 그리고 그 일을 만드시고 그리고 마지막에 그 일을 성취하시는 하나님.
이 이스라엘과 동행하면서 이스라엘이 맡은 배역이 뭐냐 원망하자. 대들자. 하나님 욕하자. 그걸 지난 주일날 하나님 죽여 버리고 싶어요. 하나님이 내 인생 책임 줘요. 안 그러면 하나님 살해해버리고 싶은 그런 욕망, 그것이 우리가 만든 역할이고 그 다음에 그 역할을 모세 자리에 누가 섰는가 하면 바로 예수님이 모세의 자리에 선 거예요. 해서 은혜 주고 다 줬음에도 불구하고 돌아오는 것은 뭐냐 하면 불평불만만 다 받는 요 역할, 요 두 역할이 세트가 돼요. 이게 언약 구성 세트입니다.
제 말이 맞다는 증거가 뭐냐 하면 내가 흘린 피, 내가 찢긴 살이 바로 아버지와 나와 새 언약입니다. 유월절 전날에 예수님이 제자들보고 한 새 언약의 완성이 바로 그거에요. 그런데 예수님의 피와 살을 낼 때 스스로 칼 들고 자살했습니까? 스스로 살점을 도려냈습니까? 누가 그렇게 했어요? 유대인들이 했고 제자들은 도망쳤고. 심지어 베드로는 유대인들과 한 패가 돼가지고 나는 예수를 모른다고 고백했고 이게 남의 이야기일까요? 이게 남의 일되면 우리는 구원 못 받아요.
그때 그 현장을 성령께서 구원받아야 될 성도가 있는 삶의 정황 속에 그것을 계속해서 인생가운데 계속 그걸 유발시켜버려요. 완전 지뢰 밟은 것처럼 유발시킨다고요. 잘 나가다가 반발하고, 잘 나가다가 대들고, 대들기 전에 일단 허무를 느끼고 자기 인생살이가 가련해 보이는 거예요.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재산 수십억 되고 남편 잘해주고 자식 공부 잘해도 사람이 혼자 있으면 천하에 자기가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팔자 더러운 공주. 마치 덕혜공주처럼. 지가 상상해보는 거예요.
특히 봄에는 여자들이 그런 경우가 있고, 가을에는 남자들이 또 깃 세우고 그런 게 있어요. 괜히 낙엽을 차보고. 괜히 우수하고 쓸쓸하고. 엘비스 프레슬리에 나오는 노래 들으면서 찬바람이 이런 노래 혼자 하고. 그래서 남자들도 갱년기 있다 합니다. 여자들이 갱년기 있듯이. 얼굴이 벌겋고 밤에는 잠도 안 오고 그런 거예요.
누가 그렇게 했는가, 그 문제는 행복의 문제에 뭐가 가려져있는가, 근본적인 하나님의 언약관계가 가려져있어요. 언약 관계가 뭐냐 하면 주님은 구원자요, 우리는 죄인되는 겁니다. 바로 우리가 자기를 죄인으로 간주 안했기 때문에 원망과 불평이 생기는 겁니다. 주께서 우리를 동행하시는 이유가 지금 성령께서 동행하시는 이유가 뭐냐 하면 제발 죄 좀 지으라는 겁니다. 죄를. 평생토록.
죄를 지으라는 거예요. 죄를 지으라고 명령 듣고 죄를 짓는 게 아니고 니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이 바로 죄를 들추어내는 거예요. 색깔있는 스폰지를 뜨거운 물에 집어넣으면 그 색감 다 빠지잖아요. 마찬가지로 우리를 세상에 던져놓으면 내가 몰랐던 내가 품고 같이 인생을 살아가는 그 죄가 전부 다 내 주변사람에게 전부 다 노출이 되고 공개가 됩니다. 괜히 컨디션 안 좋으면 화내고 특히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언제 패고 싶으냐 하면 부부싸움 했을 때.
오늘 너 죽었다! 괜히 부부싸움하고 자기 아내 얼굴 닮은 여학생 있으면 오늘 찝어서 마구 질문하고, 숫자 틀리면 그 숫자에다가 오늘 숫자에다가 오늘 몇 번 다 풀어! 해가지고 모든 인간이 행동 하나, 하나가 그 순간에만 조건에 뭉쳐서 한 행동이 아니고 그동안 본인 무의식 속에 있었던 모든 행동들이 얽히고 설켜가지고 하나의 분출하듯이 행동 하나 하나가 나옵니다. 괜히 투덜~ 투덜~ 걸음걸이부터 해가지고. 행동 인상 쓰는 것. 이 모든 것이 어디 분풀이 할 때 없나? 한 번 걸리기만 걸려봐라! 괜히 운전하다가 빵! 빵빵~~ 괜히 추월하고. 무슨 사단 있어요.
그것을 바로 히브리서는 보여준 거예요. 뜰채로 건져내는 겁니다. 죄인을. 모든 죄인을 뜰채로 건져내는데 그냥 건져내는 게 아니에요. 아예 의로 옷을 입히려면 죄를 죄다 끄집어내야 의를 입힐 때에 처음부터 하나님의 언약 작업에 내가 이미 말려들어있는, 초대받았다. 그걸 수요일 날 이렇게 했어요. 쓸려갔다. 구원은 내가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구원 작업에 휘말려 갑니다. 빨려 들어가는 겁니다. 쓸려갔다. 또는 진공청소기 속에 빨려가는 거예요.
주님이 하신 일에 주를 증거 하기 위해서 죄 짓는 일로 빨려 들어간 사람 성도가 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무슨 변화가 일어나느냐 하면 내 인생에 대해서 내가 나보는 데서 변화가 일어나요. 그 변화가 히브리서11장에 나오는 바로 믿음의 선진들입니다.
자, 이제부터 이 변화가 어떤 변화인지를 설명 드리겠습니다. 이 변화가 어떤 변화냐, 강의 듣느냐 힘들었으니까 쉽게 가겠습니다. “내가 안했어요.”라는 변화 내가 안했어요. 평생 부부 함께 살면서도 평생에 결혼하고 난 뒤에 남편한테 고맙다. 감사한 말 한마디도 안하던 그 아내가 나이 60이 넘어서 어느 날 남편한테 고맙다. 감사하다는 문자를 보냈다면 그 남편으로서는 굉장히 해석하기 힘든 거예요. 거북하지요.
그럼 문자를 이렇게 보냅니다. “당신에게 변화 온 것이 나는 싫소!” 그냥 평소에 하던 대로 나를 이렇게 함부로 대하는 그것이 30~40년 죽 놈에 익혔거든요. 아내는 나를 함부로 대하고 나는 그 얻어맞는 즐거움으로 남편으로서 살아주고. 지 것 다해줬는데 아내는 나한테 욕할 때, 남편은 그렇게 즐거운 거예요. 왜? 평생 그것이 버릇이 되어가지고. 갑자기 당신은 훌륭해! 하면 아~ 싫어, 싫어. 그러지 마! 왜 당신답지 안 해. 그러니까 죽은 최진실 말이 맞아요.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이에요. 처음부터 꽉 잡아야 돼요. 꽉 잡아서 패버려야 돼요. 그런데 그게 길들여졌으면 그게 굉장히 편해요.
성도가 되었으면 자기가 십자가를 알잖아요. 성도니까. 그러면 십자가 능력이 자기한테 들어옵니다. 들어오면 자기가 하는 것은 뭐밖에 없느냐 하면 뭘 해도 죄가 돼요. 선교하던 아프리카 가든 뭘 해도 죄가 돼요. 죄가 되는데 여기에 죄한테 칭찬 이것은 정말 말도 안 되는 부담이 되는 겁니다.
“권사님 나와 보세요. 요번에 전도 10명했으니까 고구마 전도 상으로 목걸이입니다.” 이건 정말로 사람이 견딜 수가 없어요. “이번에 교육관 짓는데 세상에 2천만원을 냈습니다. 이럴 수가 있습니까?” 이건 참을 수가 없는 거예요. 그 교회 다닐 수가 없어요. 왜? 죄인이 내 죄를 아는 것이 행복이기 때문에. 교회 헌금한 것도 죄고, 애들 주일학교에 봉사한 것도, 찬양한 것도 죄고. 이 죄 이것이 너무나 행복했는데 거기다가 아예 오물을 뿌려요. 쓰레기를.
아주 칭찬을 해줘버리면 갑자기 칭찬하니까 칭찬 대상에 들어가요. 칭찬 대상이 누굽니까? 죄인일 때는 누굴 봤어요? 예수님이 주체고 내가 하나의 객체가 되지만, 칭찬 되어버리면 누가 주체에요? 누가 주체에요? 칭찬 누가 받습니까? “저 사람보고 했어요?” “아니 당신보고.” 내가 주체가 돼요.
그래서 여기서 하나의 공식을 끄집어냅시다. 성령은 또는 신앙의 세계란 뭐냐 하면, 인간들은 성령을 받지 아니하면 주관과 객관 또는 주체와 객체 둘 밖에 없어요. 주체와 객체 속에 남이 될 수도 있고 어떤 사물이 될 수도 있고 천문학자들이 별을 보지요. 별은 객체가 되고 보고 있는 나는 뭐가 됩니까? 주체가 되지요. 천문학자는 주체가 되고 별은 객체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천문학자는 그걸 연구해서 박사로서 교수로서 생활도 하고 하잖아요. 어떤 선반공이 기계를 해가지고 주문한 철제물을 만든다. 그 철제물은 뭡니까? 객체가 되고 만든 나는 주체가 되고. 그걸 주문하는 다른 사장님은 객체가 되고. 주체 객체밖에 없어요.
그러나 신앙인은 뭐냐 하면 제3의 존재가 등장합니다. 주체 객체를 못 벗어나요. 우리는 주체, 객체에서 못 벗어나요. 사람이 산다는 게 뭡니까? 남하고 상대하는 것이고, 물건과 상대하는 거예요. 요리를 할 때 도미찜을 한다. 물고기가 있잖아요. 그거 객체 아닙니까. 칼을 들고 있는 나는 주체가 되고, 칼이라는 객체를 가지고 도미라는 객체를 요리를 해서 맛있는 도미찜을 내놓는다. 우리는 전부 다 그런 거예요. 활동한다는 게 전부 다 그런 거예요.
내가 그것마저 죄가 된다는 것은 무슨 뜻이에요? 그 현장에 누가 있다? 그 도미찜을 만드는 일을 만드신 분이 예레미야33장2절에 그분이 나로 하여금 일을 하게 하시고 그분이 이걸 시키시고 성취가 뭡니까? 성취가 십자가 성취잖아요. 다 이루었다. 그 십자가를 알려주는 배역으로 하게 하신 것은 나는 죄인이고 주님은 의인이고. 주님이 그 십자가 피로 나를 도미찜을 하는 이 죄인을 주님의 피로 사는 거예요.
피로서 건지는데 그게 언약의 피라는 거예요. 언약의 피. 이제 진도 나갔어요. 오늘 본문. 그게 언약의 피 인데, 우리는 도미찜을 잘함으로서 주께 영광 돌린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제3의 인물 자리에 우리는 뭘 집어넣는가, 안 믿는 사람은 뭘 집어넣는가, 여기다가 하나님을 집어넣어버려요. 하나님을. “하나님의 은혜로 도미찜을 했습니다.” 이리 되어버려요.
그러면 하나님 넣는 거 하고, 주의 언약의 피가 들어온 거하고 차이점이 뭡니까? 자, 물어봅시다. 오늘 가만히 보니 제일 중요한 부분인데. ①번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 손님한테 도미찜을 해서 줬더니 그분이 맛있게 먹고 감사하다고 해서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의 자리에 예수님을 넣습니다. ②번 예수님의 은혜로 도미찜을 했는데 손님이 잘됐다 해서 나는 예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이거하고 ③번 언약의 피를 넣는 거 하고.
하나님 존재잖아요. 예수님 존재지요. 피는 존재가 아니고 사건입니다. 지금도 반복되는 사건이에요. 이 피를 집어넣으면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일을 만드시는 그 일에 의해서 나는 도미찜을 하게 되었고 손님은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그것이 나에게는 피 앞에서 뭐가 된다? 나는 죄가 된다. 나는 피 앞에서 죄가 된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걸 머리로서 이해한다든지 정보로서 그냥 들어와 버리면 이건 쓸데없는 이야기를 들은 거예요. 그런데 이걸 실제로 하게 되면 바로 이렇게 안돼요. ①번②번 다 거칩니다. 아이고, 하나님의 은혜로 마치 손님이 와서 도미찜을 하더니만 세상에 해가지고 나는 이 타이밍이라 해서 놓치지 않고 사실은 내가 한 게 아니에요. 우리 하나님의 은혜로 했어요. 라고 함으로서 완벽하게 주께 영광 돌렸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나의 새로운 주체로서 정립이 되어버린 겁니다.
야~~ 나는 뭘 해도 은혜로 돌리는 나같이 착하고 나같이 믿음 좋은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 하고 있는데 그 이야기 듣고 있던 어떤 집사님이 있다가 “당신 도미찜을 했어요? 나는 도미찜 + 밑반찬 10가지해서 줬는데.” 그렇게 되면 “아이고, 10가지?” “나는 시어머니를 잘 섬겼습니다. 반찬5가지” “나는 시어머니 잘 섬기고 반찬10가지했는데. 나는 도미찜까지. 빨래도 다했는데.” 이러면 저 쪽에는 오메 기죽어! 이쪽은 오메 기살어! 순악질 여사처럼 붙어가지고. 아직 멀었나? 그럼 마귀가 씩 웃는 거예요. 또 해라. 10가지 해야지. 10가지하면 이제 15가지 추월해야지. 마귀가 이제 슬슬 바람 부어주지요.
하나님, 예수님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이 죄인인 인간이. 하지만 제3의 예수의 피의 실제적인 피의 주입은 그 순간 우리가 성령이 역사해야 돼요. 성령이 역사해야 방금 이야기한 그런 모습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죄인 될 때, 죄인 되면 뭐가 좋습니까? 죄인 되면 우리가 그냥 행복이 아니고, 중요합니다.
예상 못할 행복이 옵니다. 줄을 그어야 돼요. 천국 시험에 나와요. 예상 못할. 내가 예상도 못할 기쁨이 주어져요. 내가 예상한 것은 뭐냐 ‘하나님 은혜로 도미찜 했습니다. 하나님 기쁘시지요. 얼굴보고 그래 너는 믿음 참 좋구나!’ 라는 그 시나리오를 쫙 생각해보니까 내가 그 정도로 괜찮은 존재라는 것이 나의 기쁨인 줄 알았는데 요게 예상한 건데.
예상 못할 기쁨은 뭐냐 하면 주께서 손님 보내셨네. 내가 나만 챙기는 인간인 줄을 죄를 들추어내기 위해서 손님을 보내셨네. 나는 나름대로 맛있게 한다고 도미찜을 했는데 결국 이 모든 것이 나는 나만 챙기고 나만 최고다! 그런 마음으로 사는 게 나의 인생의 목표처럼 한 게 그만 들켜버렸네. 들켜버린 거예요.
들키게 해주신 요 행복이 바로 예상 못할 행복이에요. 들키게 해 준 거. 그러니까 다음에 행복을 고칠 필요가 없다니까요. 원망하면 또 원망하면 되지, 요번에는 원망했는데 다음에는 원망 안해야지. 이러면 악마의 해석이 되는 거예요. 이건 마귀가 작정한 거예요. 그냥 살아요. 그냥 살 때만 예상 못하지 예상이 되어버리면 예상 못할 것이 날아가 버려요.
딸이 밉다. 패고 싶다. 그냥 패시라니까요. 막 매를 들고 패려고 하는데 음성이 들리기를 “알았다. 내가 니 믿음을 아노라. 거두어라.” 패는 대신 강아지가 옆에 지나가서 강아지를 팬다든지. 여호와이레 식으로. 그 작전은 누가 하느냐 주님이 하실 문제에요. 괜히 처음부터 예상해가지고 처음부터 착한 짓하려고 수작부리면 7귀신 다 달라붙습니다.
착한 짓에 대해서 컨설팅이 다 들어와요. 그러면 안 되지. 그건 누가 좋아하느냐 천주교 신부들이 잘해 주거든요. 컨설팅 아주 잘해줘요. 여러분, 이렇게 하시고 주기도문 100번 외우시고 성경 이렇게 하시고 여러분들이 할 때는 집중해서 성경 읽으시고 마음을 낮춰서 기도하셔야 됩니다. 기도할 때는 마음을 낮추어서 하시고 내가 금식한다는 마음으로 해야 됩니다. 내가 그걸 다 경험해봤기 때문에 제일 효과 좋았습니다.
효과 본 이야기를 객체들이 이야기를 해요. 객체들이. 그 순간 객체가 오게 되면 나는 점점 더 주체가 되고. 저거 해야 되나? 이거 해야 되나? 온갖 주체가 되고. 결국은 제3의 것은 날아가 버려요. 가만히 이야기 들어보니까 평소에 하던 짓이지요. 새삼스러운 게 아니고.
이 본문이 중요한 것은 이거에요. 영원한 언약의 피 할 때, 예레미야33장2절과 연관을 시키는 겁니다. 언약의 피로 건질 자를 건지는 그 작업마저 내가 끼어 들 자리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 작업에. 우리는 죄인으로 살면 되지 내가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내가 수정을 한다든지 계산할 필요가 없어요. 어차피 우리는 죄를 지어야 돼요. 죄 지은 인간이 수정해 봐야 나는 죄를 안 지었다는 요런 교만함밖에 더 나오겠어요. 일체 우리가 착한 일할 수 있는 모든 프로젝트는 사전에 지우세요. 사전에 그런 생각하지 마세요. 그걸 지운다고 안 생긴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저 더 착하고 싶어서 환장했어요. 우리가. 그만큼 켕기는 게 많은 모양이라. 이걸 덮으려고. 뭔가 켕기는 구석이 있는 모양이라. 그걸 착한 일로 어떻게 뭔가 이걸 덮으려고. 그런 본성이 하는데. 주께서는 다 아십니다. 그리고 그런 짓을 하는 것도 제가 말리고 싶지 않아요. 그런 죄도 지으세요. 왜냐하면 그것마저 주의 언약 행하시는 일이 되기 때문에. 이미 우리는 성취가 되었잖아요.
성취되었기 때문에 제3의 기쁨이 예상도 못한 기쁨이 우리에게 솟아나옵니다. 그 기쁨이 어느 정도냐, 제가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어느 정도이냐 하면, 지금 당장 지붕이 무너져서 나를 누른다 할지라도 저는 감사히 그 지붕 짝과 콘크리트를 받겠습니다. 그 정도로 기뻐져요. 사람이 그 정도로.
차가 버스 4번 지나가잖아요. 열 대번 지나가도 괜찮아요. 그 정도로 기뻐요. 성령이 주는 기쁨이. 그 기쁨은 저절로 온유와 화평과 자비와 양선이 절로 나와요. 절로. 그냥 막 나와요. 그런데 문제는 얼마 안 간다는 것. 얼마 가지를 않아요. 그걸 병에 다 담아가지고 수시로 꺼내고 싶은 생각이 들어요. 그 기쁨의 순간을 비디오로 쭉 찍는 순간, 그 기쁨은 끝나버렸습니다.
왜냐하면 그 기쁨의 순간을 셀카 봉으로 해서 카메라에 찍어버리면 그것은 순간에 이 기쁨을 오래 연장해서 내일 그 화면보고 또 기뻐하는 내 모습을 새로운 주체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에 그래요. 새로운 주체로. 아, 인간은 복잡하지요. 나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고 내일까지 만족해야 만족하다는 새로운 주체가 짧은 그 순간 한 5분 지났나 벌써 생겨버렸어요.
그런데 이 말은 제 말 듣지 마시고요, 그러고 싶거든 카메라에 찍어놓으세요. 얼마나 기쁜지. 웃는 얼굴 셀카로 찍어보아요. 내일 되면 셀카 찍은 거 보세요. 이상하게 그 기쁨이 안 나와요. 어떤 식당 맛있잖아요. 이상하게 그 맛 기대하고 가면 안 맛있어요. 어떤 놀러가는 관광지도 마찬가지고. 관광지 가면서 내내 가스 불 껐는지, 안 껐는지 궁금해가지고 올케한테, 언니 한 번 가서 보라고 귀찮다 하면 귀찮더라도 한 번 가보세요. 동서한테 보게 해서 보고. 그 생각하는 동안에 가는 풍경 다 놓쳤어. 아름다운 풍경을. 여보! 여보 저것 좀 봐라. 보기 싫어. 뭔가 가스 불 안 끈 거 같아. 관광지에 가잖아요. 올 때 생각하는 거예요. ‘아이고, 밥 할 때 됐는데. 애가 지금 올 텐데.’ 이건 뭐 놀러간 건지?
그래서 예상 밖의 기쁨이라 하는 것은 예상하는 그 인간을 아예 통째로 죄인으로 만들어버리는 거예요. 죄인으로. 주께서는 그걸 죄 주머니에다 집어넣어버려요. 그럴 때 우리는 뭐가 되느냐 하면 그 자체 관계가 하나님의 의로운 관계입니다. 그런 짓 하던 셀카봉 찍던 말든 그래도 의가 돼요. 이게. 인생 뭐하고 살던 그게 의가 돼요. 뭘 하던 의가 돼요.
송대관이가 니가 욕 했니 안 했니 하는데 송대관 부인이 사기치고 했잖아요. 기독교방송 나와 가지고 찬양하고 은혜 받았다고 하고 이래요. 간증하고. 간증집회 다니고. 그럼 은혜 받았으면 욕 좀 해도 죄인이다 하고 받으면 되는데 도대체 무슨 마음으로 그렇게 고소하고 그러는지. 은혜라는 것은 십자가 앞이잖아요. 십자가 앞에. 그러니까 내가 보기에는 그 기쁨이 너무 오래가는 게 문제 같아. 오래 간다는 말은 분명히 가짜일 가능성이 많아요.
그래서 교회에서는 기쁨을 오래가기 위해서 먼저 부흥하기 전에 자기 손바닥에 열을 내는 작업을 합니다. 내게 강 같은 평화♪♬ 이건 천주고 피정가도 마찬가지고. 교인도 하고요. 끓어 앉아 하고 요 무릎에 모세혈관에 신경이 모이는 곳이에요. 끓어 앉아 하면 찌릿 찌릿 전기가 오거든요. 이게 성령 온 겁니다. 그게 수천년 요령, 법칙이 있어요. 어느 단체든지 다 그렇게 한다 말이죠. 먼저 전도사나 사회자가 쇼하는 분위기를 띄워야 집중도라 해서 말씀을 마귀가 못 뺏어가도록 그러니까 씨 뿌릴 때 마귀가 와서 못 가져가게 하고 졸음 마귀 날아가게 하고, 커피 막 마시게 해가지고 정신 번쩍 들게 해가지고 하는데, 내가 보니까 그거 해봐야 15분도 못 넘어요.
15분도 못 넘어가는데 성경이야기하면 누구든지 자게 되어있어요. 그런데 어떤 장로님이 이렇게 해서 부자 됐다고 이야기하면 잠은 다 가버리고 저 장로 어떻게 부자 됐지? 갑자기 막 잘 듣고 있어요. 나도 저리 해봐야지. 왜냐 하면 오는 목적이 내가 행해서 온 성과를 얻겠다는 게 오는 목적이기 때문에 거기에 정신이 번쩍 들지요. 그게 바로 뭐냐 하면 인간이 얼마나 뽕필이냐, 오늘 제목을 뽕필로 할까요? 얼마나 자기 행복, 자기 편한 것, 자기 감각적으로 신체가 안정되고 편하고 몸 건강하고 태평, 무사안일, 이것은 계속 잡아당기는 거예요.
자, 끝으로 누가 그렇게 잡아당길까요? 지금 언약을 이루려면 십자가를 이루려면 예수님이 유대인보고 너희 애비는 악마라 했지요. 그러면 악마의 역할이 있다 말이죠. 그걸 지금 성도건 성도 아니건 악마의 역할에 우리는 이렇게 다루어져야 돼요. 악마가 어떤 의미에서 참 고마운 거예요.
자꾸 우리는 십자가 해놓고 돌아서서는 다시 뽕필이라니까요. 다시 우리는 나훈아 좋아하고 신유 좋아하고 시계바늘의 시계바늘처럼 돌고 돌다가, 옛날에 보니까 해바라기를 아십니까? 권사님들이 너무 잘 불러요. 몰라요? 해바라기를 아십니까? 해바라기를 아시나요. 괜히 이상한 걸 여기서 유포하는 건 아닌지. 하여튼 그런 게 있어요.
왜 그래야 되느냐 하면, 그래야 예수님의 공로만 돌릴 게 아닙니까. 예수님의 공로만. 주님의 공로로 죄인 되었다가 그것도 몇 초 몇 분 가지도 않고 다시 역시 내 몸 편한 게 좋다고 해줘야 우리 인생 끝까지 누가 쥐고 있다? 주님께서 버리지 아니하시고 주께서 만드신 일을 주께서 알아서 성취하시고 결국은 내가 쓸 주체의 면류관이 아니라 주체는 주님이 쓰실 면류관이라고 영원한 주체의 주님이시라고 하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예수 이름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예수 이름으로. 그러면 마귀 있다. 우리는 속했다. 구원은 어떻게 받습니까? 마귀 이름으로? 내 이름으로? 아니지요. 내 이름 주체, 마귀 이름 객체. 아니지요. 제3의 주체. 주의 이름으로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걸 전도하려하니까 사람들이 하는 말이 보이지도 않는 것을 왜 자꾸 거론하느냐, 보이지 않는 것을 왜 자꾸 거론하느냐 이 말이죠. 어느 앞자리에 앉으면 은혜 받는다. 이렇게 이야기를 해줘야지. 손뼉을 어떻게 치면 은혜 받는다. 이렇게 방법을 이야기하고. 우리가 주체가 되어서 어떤 행동을 하게 되면 그게 합당한 거기에 딱 정해진 결과가 나오는 것. 우리는 그런 거 듣기를 원해요.
십일조를 하게 되면 30배를 받는다. 딱 딱 그걸 원하는데 제3의 인물을 이야기해버리면 저거 미쳤나? 이리 되어버려요. 사실은 우리 자신도 주께서 이렇게 늘 찾아올 때마다 그걸 새삼 느껴서 그렇지. 다시 돌아서면 아이고~ 뭐, 제3의 주님이 살아계시고 그런 건 신경 쓰이지도 않아요. 내 일도 바쁜데 주의 일은 언제 챙깁니까? 이리 되지요. 하지만 주께서는 말씀으로 늘 언약의 피의 실제성으로 우리에게 늘 이렇게 주어지는 겁니다.
오늘의 제목은 언약의 피로 하겠습니다. 그 다음에 21절하고 마치겠습니다.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뭡니까?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오죽 우리가 다른 즐거움을 찾았으면 언약의 피 흘리기까지 우리한테 희생당하기까지 낯선 즐거움을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겠어요? 그러니 성도는 뭡니까? 낯선 즐거움을 맛보게 된 사람이 성도에요. 그 텀이 길더라도 어떤 사람은 5분 만에 있는 사람도 있지만, 5년 만에 오는 사람도 있고. 하여튼 있더라도 5년 만에 오더라도 그 순간 앞으로 이전이나 이후나 어떤 짓을 해도 나는 십자가 앞에서 뭐다? 죄인이다. 라는 것을 한꺼번에 그것을 다 수용하게 됩니다.
주님의 프로젝트에 내가 말려들었다는 것. 그럴 때 그 순간 옆에 사람이 누가 있다면 그 사람은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예수의 증인. 나는 죄인이고 주께서 나로 하여금 믿게 하셨다는 것. 사실은 이것을 알았으니까 우리는 이제 주님이 역사하지 않더라도 평소에 이것을 누가 복음이야기하면 이 이야기를 하지요. 알고 있으니까. 정답이니까 하는 거예요.
정답이라고 한다고 해서 그 순간 우리가 낯선 즐거움과 기쁨에 충만한 건 아닙니다. 귀찮아 죽겠다. 우리가 아는 정답이야기 해야지 이래 놓고 지는 딴 생각 한다고요. 그러니까 내 놔라. 돈 내놔라. 이런 수작한다고요. 하지만 성도는 그것마저 죄라는 것을 나중에라도 그걸 깨닫게 해주시는 겁니다.
그렇게 해줄 때 이 히브리서13장 이 본문을 다시 보세요. 그러면 야! 이 말씀대로 우리가 지킨 게 아니고 우리가 순종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이 말씀대로 그대로 우리에게 적용시키는 그러한 증거물로서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서 지금까지 우리가 살도록 인도해 주신다는 것을 깨닫게 될 거예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일은 주께서 다 하셨고 일을 만드셨고, 행하시고 기어이 성취하시는 그 일을 우리에게 이렇게 적용시켜서 그걸 구체적으로 현실적으로 만들어주시니 감사합니다. 돌아서면 잊어버리고 다시 내 것만 챙기는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늘 주의 증인으로 사용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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