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요한복음14장20절(체험)170705b-이 근호 목사
두 번째 하겠습니다.
그날에 너희가 알리라 했습니다. 지금은 아니예요. 지금은 아닙니다. 그러면 제자들은 모르는데 예수님이 계속 할일이 또 남아있는거죠. 근데 남아있는 일이 무엇이냐면 예수님이 성령이 오신다고 되어있어요. 그런데 제자들은 헛갈리는 거예요. 예수님만 있으면 되지 성령이 왜 와야됩니까? 지금 주님이 함께 있잖아요. 그걸로 충분한거예요. 주님과 함께 있는 걸로.. 그런데 주님께서 떠나겠다 하니까 떠날 이유를 모르는 거예요.
엄마가 아이 키우다가 엄마가 '얘야, 엄마는 앞으로 5년간 너와 떨어져야해.' 하면 애가 한 3살 4살 먹은애가 얼마나 울겠어요. '엄마, 나도 같이가.' '아니 내가 가지 아니하면 너에게 엄마의 영이 못와.' 이렇게 한다면 왜 그말을 구태여 해야되는지를 바로 이것은 제자들은 이해를 못해요. 떠난 이유도 모르고 성령이 와야하는 이유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이유를 누가 아느냐하면은 바로 아버지와 예수님만 아는 아버지와 아들만이 아는 내용이예요. 떠나야되고 성령 보혜사를 보내야 되고. 떠나야 되는 내용이다 이말입니다. 아들만 아는 내용이라 이말이죠. 이 사람들은 몰라요. 이 사람들은 모른다구요.
그렇다면 아까 제가 이야기한것은 하나님의 일은 인간중심, 사람중심이죠. 다른말로 하면 아들중심이예요. 예수님 중심에서 성령이, 성령이 아들이 가고 성령이 오게되면 제가 아까 분명히 이야기 했습니다. 성령방사라 했습니다. 그러면 이들에게 성령이 임합니다. 성령이 밥상보 처럼, 성령이 이렇게 오게되면 아들중심이 되어서 아버지께서 계획하신 바가 이들을 함께 합류시킴으로서 완성이 되는 거예요. 합류시켜서 완성이 되는 겁니다. 근데 여기서 뒤에 나오지만 왜 아버지하고 아들 둘만 있으면 왜 완성이 안됩니까? 왜 자기 백성, 제자들이 있어야 완성이 되는 거죠?
그것은 바로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는 사랑은 있어요. 지금 있거든요. 근데 예수님이, 예수님 중심의 새로운 사랑이 될려면 예수님이 사랑하는 백성들이 있어야되요. 구약이 바로 왕제도이기때문에. 왕이 백성을 사랑해서, 그래서 이스라엘 나라가 되는 겁니다. 그 구약에 있는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아버지께서는 예수님을 ‘주’로 왕으로, 주라하는것은 왕입니다. 왕으로 이렇게 추대를 하게되있습니다. 추대할려면 그냥 아버지와 아들 둘만 추대해서는 안되고, 반드시 백성들이 동반해서 거기에 혜택을 입어야해요. 그 혜택입는 그 혜택입을려면 완벽한 혜택, 그야말로 아들이 의로운것처럼, 같이의롭게 되는 완벽한 혜택이 주어져야 됩니다. 그 혜택이 주어지는데 그 혜택을 뭘로 주어지냐하면 보혜사가 와서 주어져야되는 거예요. 보혜사가 와서 주어지는 겁니다.
지금까지 여러분 다 아는 겁니다. 그 다음 질문 들어갑니다. 예수님이 주가 되셨다면 왜 제자들로 하여금 이제부터 ‘예수님이 주 시구나, 아 주님이네 그렇다면 이제 예수님을 주로 잘 모셔야되겠다.’ 왜 사람들에게 그 사람의 권한을 인정하지 않습니까? 그들이 노력해서 '예수님이 주님이래. 그러면 우리가 바르게 살자.' 왜 이렇게 해서 백성만드는 작업에 안나서냐 이말입니다. 왜 그게 안되죠? 하나님의 계획은 성령이 와서 하잖아요. 성령이 오지말고 자기들이 이제 주님을 알았으니까 자진해서 열심히 해서 예수님을 잘 모시면 그게 백성다운 모습이 아니겠어요? 왜 그런 방식을 왜 하지 않으냐 이말입니다.
그것은 성령이 오게되게 되면 인간이 하는 모든것은 예수님이 하는것에 못 미치기때문에 그래요. 아무리 인간이 애쓰고 말씀지키고 노력해도, 예수님 한분이 하신 것, 그것을 해내지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아버지를 알고 다른사람들은 이미 범죄했기때문에 아버지를 몰라요.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에게 순종한 것과, 아버지를 모르고 자기가 지어내서 하는 그 하나님은 엉터리일수밖에 없거든요. 그만큼 아버지와 예수님이 아는 그 관계를 이룰수가 없습니다. 그 다음을 봅시다. 문제는 이것이죠. '성령의 오심' 입니다. 이것이 뒤에 주욱 나옵니다. 성령의 오심. 성령의 오심입니다.
자, 성령이 오시게 되면 23절 끝에 봅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말을 지키리니,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그 다음에 그 다음 어디입니까? 거처를 함께 하실 것이죠. 우리가 저어게서 와서 거처를 함께 하신다. 저가 누구냐면 바로 성령이십니다. 성령님이 오시게되면 성령님은 어떻게 오셨는가 하면 예수님이 다 이룬것을 가지고 우리에게 선물로 주게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무엇을 위한것이냐하면은 아버지께서 하시고자 하는 그 모든 목적이 예수님 앞에 응축이 되요. 다 모아집니다. 이것을 가지고 무엇이라 하냐면 ‘보편적 단독자’ 라 해요.
단독자란 숫자로 하면 1이죠. 보편이란 무슨뜻입니까? 영어로 하면 all. 전부, 전부를 커버해서 하나로 응축이 되는 그분. 존재잖아요. 그분이 누구냐하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 그러면 보편적 단독자 이것을 구약에서는 무엇이라 하냐면 인자라고 해요. 인자. 그 느부갓네살왕이 그 동상이 금상이 있을때 뜨인돌이 와가지고 발을 치니까 동상이 완전 무너져있고, 그 다음에 뭐가 됩니까? 그 앞에 돌이 어떻게 되요? 뭐가되요? 높다란 태산이 되죠. 태산이 뭐냐하면 모든걸 커버하는 거예요. all. 모든것을 커버하는 겁니다. 모든것을 커버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느부갓네살 이 우상을 앞으로 오고 오는 모든 제국들 모든 나라를 이 우상안에 다 응축을 시킨거예요. 다 집어넣은 거예요.
그러니까 이말은 뭐냐하면은 여러분들이 알아야할것은 주님의 모든 말씀안에는 뭐가 들어있다? 모든것이 여기에 응축이 되어 있어요. 말씀하나 풀면 요한계시록 창세기가 다 풀려나와야되요. 실타레처럼 다 풀려나와야되요. 응축이 되어있으니까. 응축이 된 이유가 이 말씀을 주신 분이 보편적 단독자이기때문에. 보편적 단독자 이니까 보편에서 갑자기 여기 있는 다양성에서 하나하나 끌어당겨서 어디로 이어져야한다? 최종적으로서는 예수그리스도로 이어져야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그렇게 만들었어요. 세상을 그렇게 만들었어요.
따라서 성령이 오는 이유는 성령이 오지 않으면 우리가 착한일을 해서 만약에 주의 백성된다면 단독자가 몇명되요? 예수님도 단독자, 나도 나름 착한일한 단독자, 너도 착했으니까 너도 단독자, 이렇게 되면 이건 천국이 아니고 중구난방이 되어버려요. 그야말로 주님 보좌에 있는게 아니고 원형테이블에 앉아야되요. 그런데 요한계시록에 보니까 면류관을 누구한테 반납합니까? 주님한테 반납하죠. 보편적 단독자에게 보편에 해당하는 사람이 단독자에게 면류관드리면서 뭐라하냐고하면은 내가 나 된것은 주의 뜻입니다 하고 던지는 것이예요. 주의 뜻입니다. 그렇게 되는 그 거처가, 거처를 위해서 성령이 오신거예요.
예수그리스도를 높이기 위해서 성령부터 모든 천사부터 모든 주의 백성까지 모든 심지어 지옥간 사람까지 전부다 주의 이름을 찬미하고 찬양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이렇게 만들었다는 겁니다. 여러분 이야기 들어보니까 이게 거대담론이죠. 거대담론. 소소한 것이 아니고 전체를 다 포괄하는 거대담론이죠. 문제는 거기 성경의 내용인것처럼 느껴지잖아요.
‘목사님 성경의 내용이 그렇다는것은 동의되는데 실제로 그렇습니까?’ 문제는 실제로 그렇습니까 입니다. 아까 우리 집사님 이야기 한것처럼 이제부터 체험되어야해요. 체험. 이제부터 체험을 해야되요. 성경내용은 그런데, 요 이야기 듣고 집에 갑니다. 집에가면 벌써 설겆이, 밥먹고 설겆이도 안해놓고 이만큼 쌓여있다구요. 이 보편적 단독자를 위해서 살기로 맘먹다가 짜증부터 나는 거예요. 오랜만에 나왔는데 알아서 설겆이좀 도와주면 안되나? 너는 뭐하냐? 티비나 보고있고, 먹을거나 찾고 있고, 막 잔소리부터 늘어나는 거예요.
그리고 또 내일도 또 적금만기된거 그거 계산하고 일상생활에 빠지게 되면 보편적 단독자가 없고, 중심이 누구 중심으로 바뀌었습니까? 벌써 몇분안지나 집에 가기 전에 그리스도 중심이 아니고 내 중심이 되어가지고 그 다음에 내중심이 되면 뭐냐하면 그 다음 중요한 것 오늘 제목을 이걸로 할까? ‘나의 거처’가 따로 생각이 된다니까. 나의 거처 '나 어떻게 사나? 그만두고 나오니까. 나 자식하고 어떻게 살지?' 자기 신세한탄부터 해가지고 자기 거처 생각난다니까요.
예수님께서 이런이야기 할때 제자들이 물어봅시다. 제자들이 위로받겠어요? 고민되겠어요? 둘중에 하나다. 마지막때에 거처를 함께 할때 위로가 되겠어요? 걱정이 되었겠어요? 걱정되지요. 주께서 또 무슨짓을 할지 상상이 안가거든요. 왜그러냐하면은 내가 너와 거처를 함께 해버리면 말로는 주님을 좋다 했는데 좋은분과 같이 살까? 그건 아니고~! 그건 아니거든요.
제가 그 어제 대구강의에서 예를 잘못들었어요. 쌈마이웨이인가? 그 드라마 얘기하면서 반대로 이야기했는데 제 아내가 지접이야기해줬어요. 남녀가 서로 사귀다가 손을 놓는다는 그 대목 이야기 하면서 남자가 그동안 여자 꼬실려고 얼마나 투자했느냐 했는데 그 드라마는 그 반대랍니다. 여자가 남자한테 그렇게 투자했데요. 드라마를 봐야알지. 그냥 우연히 그냥 지나갔을뿐인데. 뭐가 걱정이 되냐하냐면 ‘사랑해’ ‘사랑해’ ‘그럼 같이 살자.’ 그 문제는 나중문제예요. 왜냐하면 좋아해서 사는건 좋은데 같이 사는 문제는 아니거든요. 같이 사는 것. 이것은 생각할게 많이 남아있어요.
같이 살게되면 집은 누구이름으로 등기하냐 그 문제 있고, 서로 아침형인간 저녁형인간 같이 살면 그 문제 있고, 또 둘이 살면 괜찮은데 이쪽에 얽혀 있는 친척들 오고, 네거티브들 이쪽에 친척들 이렇게 왔을때 서로 빚쟁이 관계있으면 난리 문제가 큰거예요. 그리고 집을 같이 살때 제주도에 살거냐 아니면 서울살거냐 강원도 살거냐 그 문제도 또 문제 있어요. 그러니까 사귀되 따로 필요할때 만나고 그다음에 따로 떨어져 살자. 지금 이런 중요한 얘기에 연예인 얘기하면 안되지만 복음을 위해서 모든것을 다 향유할수 밖에 없어요. 김국진하고 강수지하고 사귄다고 해 놓고 벌써 주위에서 결혼해! 안해요. 왜 현명하니까. 그 결혼 왜하는데. 각자 돈벌이 있겠다. 결혼 왜합니까? 사귀기만 하면 되지요. 혼인신고 할필요 없잖아요.
체험이 안되요. 체험이 '나 너와 함께 살께. 좋으냐?' '안좋아요. 안좋아요.' 왜냐 우리 살던 가락이 있어갖고요. 나는 내 노동으로 내가 돈벌어서 그래서 알뜰살뜰 이룬 아파트 이게 좋지, 나 이거 버리고 주와함께 살겠다. 미쳤나? 그럼 '그 아파트 나줘. 그럼 내꺼할께. 버릴거 같으면 나줘. 내가 살께.' 사람은 자기가 노동한것에 애착이 있어가지고, 주님께서 무슨 선물줘도 그것은 별로예요. 역시 내가 아끼고 살림사고, 쓸고 닦고 해가지고 세제 만들고 아토피 안되는 거 만들고 해서 이렇게 공들였던 그것이 나한테는 나의 거처로서 나는 족합니다.
아까 집사님이 좋은이야기 했어요. 그걸 가지고 뭐냐? 체험이 안된다는 거예요. 아무리 주님께서 좋은 말해도 체험이 되겠어요? 안되겠어요? 체험이 안되요. 체험이. 이게 안되는 거예요. 그러면 체험이 안되니까 누구 중심입니까? 제자들은 자기 중심이죠. 자기중심이 되면 여기서 뭐가 나온다고 했습니까? 뭐가 나온다? 자기의미가 나와요. 예수님을 믿으면 나에게 어떤 이득이 오나? 이렇게되는 겁니다.
여기서 인간은 그것을 자유라고 하는데요. 참고로 알아놓으세요. 자유는 3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공리주의 자유. 공리주의 자유라하는것은 뭐냐하면, 자기 이익을 위해서 선택할수 있는것. 짜장면 먹을까? 짬뽕 먹을까? 이게 공리주의예요. 어느것이 더 맛있겠느냐? 있잖아요.
두번째는 이것은 북한 김정은 자유. 무조건 일 저지르고 보는거예요. 무조건. 아무소리 안듣고 누가 부하가 무슨소리 했든 필요없이 누가 이야기 하든 무조건 일 저질러요. 하지말라고 하면 더 하고싶은거 있잖아요. 애들. 맹목적으로 일을 만들기. 이 자유. '내 자유다 왜' '아니 그렇게 하시면 남한테...밤 12시 넘었는데 라디오 크게 틀고 엠프 크게 틀면 시끄럽잖아요.' '내 자유인데 왜? 이 아파트 내 아파트야. 당신이 뭔데. 아파트 사는데 당신이 보태준거 있어? 내 아파트 내가 트는데 니가 왜?' ' 아니 시끄럽고...' '시끄러우면 니가 이사해야지. 이 아파트 니꺼야? 이게 시건방지게 돈도 안내놓고, 내가 내 아파트 내가 사가지고 내가 노력해서 촌에서 밭 다 팔아가지고 아파트 샀는데 내 아파트인데 니가 뭔데 너도 떠들지 그래. 너도 같이 볼륨 높여.' 지금 방금 이런예를 들었잖아요. 이것을 김정은이라고 했잖아요. 저는 이것을 김정은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이것을 ALL로봐요 ALL.
모든 인간 현재 다 이렇게 살아요. 점잖게 이익이 되는지 이익이 되냐 안된냐 이것은 아주 순한 사람이고, 대부분은 일을 저지릅니다. 사람이 일을 하는 이유가 뭔지 알아요? 심심해서해요. 그거 아니면 할게 없어요. 사업을 왜 하는줄 알아요? 이것 아니면 할게 없어요. 다른게 할게 없어요. 퇴직하고나서 제일 힘든게 할게 없다는게 제일 힘들어요. 하루에 우리나라 하루에 14000개가 문을 닫습니다. 자영업자. 그래도 또 해요. 할게 없으니까. 집에서 노는것보다 낫습니다.
세번째 자유는 불교입니다. 이 자유는 어떤자유냐 아무것도 안하는 자유. 백수자유. 아무것도 안하는 자유. 나이 50이 되었는데 하는일은 뭐냐하면 섹소폰 불고, 낚시 하고, 한 평생을 가장이 돼서 한평생을 취미생활로 다 보낸사람이 있어요. 방송에서 봤어요. 어떤개그맨이모부라 하던데. 이 사람이 절대 하는 한가지 일이 있어요. 아내가 돈벌어 오게되면 우리 마누라 돈벌어왔다 해가지고 꽹과리 치는 일이예요. 위로해준다고. ‘여보 힘내세요. 내가 있잖아요.’ 그 장단 맞춰주는 일만 해요. 하루종일 그것만 딱 해요. 나머지는 자기 취미활동해요. 그리고 그 사람은 마을의 통장입니다. 얼마나 할일 없으면..아무것도 안하는 자유.
여러분 1번 2번 3번 확연히 다른것 아시죠? 그런데 이 자유 모두다 all이니까 all은 아까 뭐랬어요? all은 보편적이다. 보편적. 근데 모든 이 자유를 하는데 나름대로의 뭐가 있느냐?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어요. 왜 의미가 있느냐 하면 전부다 자기 중심이기 때문에, 왜 자기 중심이냐 자기거처가 있어요. 자기 거처가. 따라서 지금 보편적 단독자가 예수님 이잖아요. 그러면 예수님같으면 단독자 답게 세상을 획기적으로 이제는 전환되는 것만 남아있죠. 전환될때 성령을 받았다는 말은 딴게 아니고 그 말에 해당되는 체험을 하게 하시는 거예요. 성령께서. 무슨체험? 내중심이 아니고 누구 중심이다? 예수님 중심인것을 다른말로 하면 십자가 중심인것을.
순수과거 중심으로 나의 현재 과거 미래를 순수과거 속에다가 거처를 함께 하게 하는 체험을 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 예수님 만나기위해서 기도원에 갈까요? 어떻게 할까요? 멀리 갈까요? 아니면 성지순례할까요? 거처를 함께 할 때, 거처 전에 성령오기 전에 거처가 뭐냐하면 바로 나의 거처였던 거예요. 나의 내가 이만큼 휼륭하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체험의 거처, 나한테 의미있는 거처.
어떤 아가씨가 이사를 가는데 엄마가 이삿짐 보는데 이삿짐 가는게 좁아서 강아지는 좀 놔두고 가라 그랬어요. 그러니까, 아이가 발끈하면서 딴 건 다 버려도 이 강아지 만큼은 내가 안고 갈거야! 왜 강아지를 안고 갔을까요? 강아지가 빠져버리면 내가 그동안 쌓았던 내 거처가 없어요. 강아지와 함께 추억을 이루었던 그 거처거든요. 전에 직장에 갔다가 한달도 안되서 나왔잖아요. 전에 직장에 추억이 있습니까? 없지요. 미련없이 밀어버릴수 있는거예요. 그러나 계속 누적된 의미같으면 그 빛바랜 사진하나 버릴수가 없습니다.
그 노래 있어요. 매기의 추억. 노래가 너무 구슬퍼요. 매기의 추억은 완전히 체험 덩어리예요. 내가 사랑하는 여자와 함께 거닐었던 그 밤송이 나무의 그 냄새와 그 때 날리던 그 꽃가루까지 전부다 기억이 나요. 여러분 그런 경험들 다들 있잖아요. 옛날 첫사랑과 함께 거닐었던 석촌호수가 가가지고 지금 롯데빌딩 들어서있습니다. 옛날에 어릴 때 있던 그 골목길 느티나무, 오랜된 그 하나하나에 손때가 묻었을거란 말이죠. 혹시 알아요? 그 나무 밑에 혹시 타임캡슐있는지 한번 찾아보세요. 엽기적 그녀 처럼 파헤치면 캡슐안에 우리 만났던게 있을거예요. 10년후에 여기서 우리가 만나자. 무엇이 되든 만나자. 있잖아요. 안나와요. 보통 10년뒤에 만나자고 하면 안나옵니다. 왜 안나오느냐? 출세해보세요 나오지 출세안했기때문에 안나오는거예요.
제가 하는 말은 인간은 자기가 쌓아온 체험에서 본인의 능력으로 벗어날수 있다? 없다? 못벗어 납니다. 왜냐하면 자유이기 때문에, 이 자유를할 때 내 중심으로 자유했거든요. 짬뽕먹을까? 짜장면 먹을까? 이것은 누구한테 이익이예요? 나한테 이익이거든요. 내가 없으면 짬뽕도 짜장면도 의미가 없는 겁니다. 인간의 체험은 뭐냐? 내가 지금 죽는다면 내가 지금 죽는 마당에 짬뽕먹을래? 짜장면 먹을래? 하면 지금 죽는마당에 살고 싶지 짬뽕 짜장면이 의미있는게 아니예요. 왜? 그게 체험화 됬다니까. 우리가 있는 체험, 과거의 추억에서 우리가 못 벗어나요. 자아라는것 주체라는 것, 이건 이미 체험으로 꽉꽉 채워져 있어요. 이걸 어떻게 버립니까?
그래서 제가 말하는 것은 예수믿는 다는 것은 내가 예수 믿는다는 것은 다 거짓말입니다. 자기 추억담을 이야기 할 뿐이지, 성령이 주는 체험은 아닙니다. 내가 종교생활한 누적된 체험들이예요. 날 무시하지 말라고, 나 이정도로 믿음좋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잠깐 동영상 촬영하기 전 그런 얘기했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이 회복하게 되면 메시아가 온다고 기다리는 사람들 있어요. 많은 사람들이 있어요. 이스라엘이 회복되고 전천년주의, 성전, 적그리스도 나타나고 뭐 그런얘기.
왜 이스라엘 사람들이 돌아오게 되면 메시아가 오는 때라,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수믿으면 이걸 메시아닉주라 해요. 주란 말 유대인, 젠타일(gentile)이란말은 이방인이고, 주와 젠타일은 서로 반대개념이거든요. 메시아를 믿는 예수를 믿는 주가 그들이 다시 돌아오게되면 메시아가 올때가 가깝다라고 할 때, 그들이 왜 이런 주장을 하느냐 하면은 자기들이 자기가 믿음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확인하는 방법이 뭐냐? 성경에서 성경대로 이스라엘이 여기 있잖아. 여기 있다는 거예요. 이스라엘 나라가 있으니까 성경이 맞다는 거예요. 그럼 그들은 복음이 뭐예요? 이스라엘 존재가 복음이예요.
사도바울이 이것을 복음이라고 했습니까? 사도바울은 눈에 보이는 것을 복음이라고 했습니까? 눈에 안보이는 것을 복음이라고 했습니까? 눈에 안보이는게 복음이잖아요. 십자가 눈앞에 보이거든 이랬다고요. 십자가 눈앞에 보이는데 아무리 봐도 교회 십자가 외엔 안보인다 이 말이죠. 그럼 십자가 눈앞에 보이면 나는 어떻게 된다? 나는 죽고 내안에 누가 산다? 그리스도가 살지요. 그럼 내거처가 내거처입니까? 그리스도 거처예요? 지금 있는것이 다 누구 거처예요? 그리스도 거처이고 고린도후서에서 보면 이것을 하나님의 성전이라 했단 말이죠.
하나님은 하나님 중심이 아니고 무슨 중심? 지금도 인간중심이예요. 지금도 성도 중심이예요. 똑같은 체험을 해도 이 체험이 의미가 다르고 내중심에서 했던 의미에서 예수님 중심의미로 바뀌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사람있어요. 손을 두두둑하는 사람있어요. 이게 누구체험이예요? 주님체험이라구요. 우두두둑~ 주님체험이라구요.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체험에서 못 벗어 납니다.
자 그러면 주님과 거처가 함께 있을때에 내 체험이 있는한 우리는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나는 내가 공들였던 내 아파트에서 내 거처, 내 자식들하고 같이 살고 싶지. 부등식 기호에서 내자식과, 내 재산과, 내 통장과, 내 아파트 그리고 예수님 거처, (내쪽)이렇게 되요? (예수님쪽)이렇게 되요? 강조점이? 성경상 예수님 거처가 옳잖아요. 그런데 체험상은 우리의 체험상은 3초도 안걸려요. 후딱 (내쪽)이렇게 되요. 주택 또 넣어가지고 가슴 부풀어 가지고 언제쯤 아파트 구해서 갈 생각하고 있단말이죠. 주님거처 가지고 '아 좋아요. 주님만나면 얼마나 좋을까. 얼마나 좋을까 주님 만나면...' 성경에 나와있단말이죠. 주의 날이 가까워 왔으니 너는 마음을 조아려서 기다리라 이런 대목이 있잖아요. 로마서에 보면 나온다구요. 그럼 너해라 이러죠. 후딱 덮어버려요. 난 안봤습니다. 덮어버려요.
그러니까 참 이걸 알게되면 그 당시 제자들이 얼마나 황당했겠는가 이말이죠. 지금 같이 있으면 되지. 가기는 왜 가고. 이 거처는 뭐냐 말예요. 새로운 거처가 온다니까. 여기서 말씀은 니가 니 중심에서 예수님 중심으로 바뀌어야 된다라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제자들은 뭐라하냐면 지금도 마음껏 주님 중심입니다. 제 중심 아니예요. 이렇게 이야기 하겠죠. 이말은 뭐냐? 절대로 나는 단절을, 다시 말해서 나는 나밖에 모른다는 그 절차를 반드시 겪어야 해요. 제자들도. 이것을 겪지 아니하면 주님과 함께 할수가 없습니다. 잘난체 해가지고는 절대 구원 못받습니다.
그래서 나온 유명한 노래가 여기까지가 끝인가보오. 찬송가에 넣어볼까?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 낭떠러지. 낭떠러지에서 우리는 어떻게 되느냐. 베드로처럼 유턴해야되요. 갔던 길로 돌아와서 우리는 고기잡으로 가야되요. 우리가 아는 체험은 그것이 전부이기 때문에. 그럼 ‘목사님 우린 아무도 구원못받겠네요?’ 하잖아요. 성령이 비로소 성령이 오심을 성령이 오신다는 것은 매일같이 바로 그 낭떠러지, 그 낭떠러지를 되풀이 하는데 그게 순수과거의 작용이라합니다.
내가 알고있는 과거는 이미 옛날 내가 잘한다 못한다 하는 그 과거가 아니고 순수과거는 난입하고 허락없이 개입하고 뛰어들어요. 뛰어들면 순수과거는 뭐냐? 과거니까 다 이루어진거예요. 다 이루어진것과 난 이것 했으면 좋겠습니다의 대결상태. 대립상태가 되는거예요. 다 이루었다 하고, 앞으로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 하고.
자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가 왜 문제점이 되느냐하면 내 자식 내 통장, 내 아파트 이것 이렇게 되면 사람이 이것에서 멈추지 않고 계속 이것을 동질성 여기면서 동질성을 눈올때 눈사람 만들때 처음부터 눈사람이 큰게 아니죠. 요만큼 만들어가지고 굴리면 어떻게 됩니까? 굴리면 계속 커가지요. 이 동질성을 굴려요. 굴리게 되면 내 자식은 이렇게 앞으로 판사 의사가 될거라고 굴리고, 실제로 그런 자식들이 있을수도 있겠습니다만은, 그 다음에 내 투자한것은 펀드 넣은것은 펀드가 너무 잘되어 가지고 60% 50% 막 때돈을 버는 거예요. 통장도 잘되고, 부동산 오르고, 그 다음 아파트 이사해서 보다 넓은 아파트 별장까지 한다. 현재 이것을 없애는 것이 아니고, 이것이 더 확장되고 확장되겠죠. 이걸 가지고 뭐라하냐 이걸 팽창이라 합니다. 팽창.
뭘 팽창입니까? 팽창하먄 악이 되는거예요. 악. 그러면 팽창이 뭐되요? 수축이 되야되겠죠. 어디로 수축되냐하면 보편적 단독자로 수축이 되는 겁니다. 전에 있는 이 아파트, 펀드해서 수익나는 것, 그거 니 거처 아니고 예수님 거처예요. 그래서 돈남았다고 해서 그 돈 교회갔다가 내면 되요? 안되요? 안되지요. 왜 주님의 거처인데 지가 왜 지가 처분해요? 다 챙기세요. 챙길 돈도 없지만.. 챙기되 주님 절대 과거, 순수과거에서 주신예요. 그러니까 범사에 감사하라는 겁니다. 갑자기 끝으로 복음으로 끝나죠.
제가 주일 낮에 그런이야기를 했잖아요. 헌금하는게 의미가 없기때문에 넘치도록 할수가 있다. 의미가 없기때문에 넘치도록 할수있다. 의미가 없기때문에.. 주님께서 이미 거처를 마련했어요. 뭐가 문제냐면 내중심에 주님중심으로 안바뀌는게 문제예요. 그것만 바뀌면 되는거죠.
①난 바뀌었는데 이러면 안되고, 이게 체험이 되어야해요. 체험이. 체험이 되는 방법을 하나 이야기 하나, 이 이야기 하면 오늘 저녁에 또 잠못잔다... 하여튼 실천해 봅시다.
펀드를 넣었는데 정말 100%되고, 주식을 했는데 갑자기 주식이 천만원 넣었는데 10억이 되었어요. 정말 기뻐요. 그래서 주님의 처소 감사합니다. 주님의 처소이기때문에 30배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진짜 다 잘됐는데, 좋다 했는데, 아들이 시름시름 죽어가고 있는거예요. 자 그 순간 보세요. 아들은 병원에 가니까 한달넘기기 힘들다 하는데 펀드는 지금 10배올랐어요. 그리고 자기 남편도 갑자기 승진했어요. 갑자기 새로 문재인대통령되서 장관으로 초청됬어요. 교수였다 장관됬어요. 그런데 자 아들이 멀쩡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어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막 하면서 주께서 주신 처소인줄 알았는데, 이것은 감사한데 아들이 죽는다 했을때에 아들이 죽으면 세가지 조건 가운데 두가지는 주님의 처소인데, 한가지는 여전히 나의 처소가 될때 여기서 모순이 벌어지죠.
나는 도대체 내 중심일까? 주님 중심일까? 이런경우도 있고, 지금 이런이야기 했으니까 이런일 다시 일어나지 않습니다. 항상 홍해 한번 하면 지나가면 두번다시 홍해 안나옵니다. 요단강 나오죠. 홍해 안나오거든요. 안좋은 일은 얘기해야 두번다시 안나오거든요. 아들은 서울 어디 나오고 펀드는 100배 오르고, 가정이 화목합니다. 가정하면서 드디어 주님의 처소, 역시 주님 중심으로 사니까 이런복을 받네 좋아했는데, 25년전에 지었던 죄를 그것을 어느 사람이 찾아와서 협박을 할때, 자 이것은 미리 여기있는 요소예요? 여기 없는 요소예요? 여기 없는 요소인데 나는 당신이 25년전에 여름에 한일을 알고 있다. 하고 찾아와가지고 사업을 하는데 돈이 모자라니까 2천만원만 주면 내 입 다물을께. 당신 남편 모르게 해줄게. 하고 옛날 빛바랜 사진 호텔에서 찍은 사진 내놓 했단 말이죠. 드라마 입니다. 드라마, 한국 드라마. 아침드라마예요.
이런경우가 왔다던지 아니면 어떤 여자가 와가지고 내가 당신 언니인데, 언니가 바뀌어 가지고, 원래 딸이 아닌데 남의 딸이 된거예요. DNA해보니까 진짜 딸이고, 나는 가짜인데 엄마는 울고불고 난리났어. 드라마입니다. 드라마. 자 이렇게 했을때 예상밖에 일이벌어졌잖아요. 예상밖에. 그렇죠? 예상밖에 일이 일어났는데 이것도 all이죠. 보편성이죠. 체험되지 않는 새로운 내가 나로 버틸수 없는 체험.
②나의 동질성을 가지고 천국가는것이 결국 실패로 끝날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앞당겨서 미리 알려주는 통보해주는 체험. 그것이 최고의 체험입니다.
이렇게 나의 25년 과거를 알때 과거가 와가지고 어떤 남자가 와가지고 나한테 돈달라고 협박하고 잘사는구만 여자가 그러면 이렇게 오천만원 떨어져라 하면 사실은 오천만원 더 뜯어내고 드라마 그런게 있어요. 이렇게 한번 당해봐야 '아 내 인생이 왜이렇게 된건가요.' 이것도 들어보니까 이것도 별로 맘에 안들지요. 인생이 이렇다면 인생 정말 괴롭지요. 그러면 이것도 탈락입니다. 안들은걸로 해주시고. 그러면 이것도 아니고 있는조건에서 뭉개지는 것도 아니고, 행복한데 단란한 가정인데 난데 없이 외부에서 쳐들어온 그 조건도 아니라면 그게 아니라면 그럼 어떤 조건이 있어야 여러분 만족하겠습니까?
이런거 하면 되요. 설겆이 하다가 예수믿는것. 최고입니다. 실제로 그래요. 실제로 설겆이 하다가 예수님 십자가 내대신 돌아가셨구나.. 아 죽음 너머에 있는 능력이 갈수도 없는 나를 건져 내셨구나. 그때부터 설겆이가 굉장히 가볍게 되요. 반들반들하게. 내가 설겆이 하는 것인지 내가 직장생활하는것인지 분간할수 없이 설겆이가 끝나버렸어요. 이러한 흉악한 비참한 경험을 안해도, 이미 이 사람은 구원이 된거예요. 그리고 이런 조건을 가볍게 갑자기 성령와서 하는 그것이 나는 좋겠습니다라고 선택할 문제는 아니고, 이 선택은 누가 하느냐하면 주님맘대로예요. 주님 마음대로 하는 거예요.
내가 내중심으로 사는 이것이 바로 내가 지옥갈 모습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깨닫게 될 때, 꼭 집에 불나고 바람나야되고 꼭 이래야 됩니까? 집에 뭐 펀드가 돈이 날라가고 이래야됩니까? 조용하게, 조용하게 될수가 있어요. 조용하게 되나 요란스럽게 되나 역시 중심만 바뀌어 버리면, 그게 나의 엄청난 체험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겁니다. 엄청난 체험으로. 참 그래서 이렇게 암에 걸렸다 나은게 되버리면 간증하러 다니기 바쁘겠지만 조용하게 구원받으면요, 간증할것도 없어요. '장로님은 어떻게 예수 믿었습니까?' '나도 모르게 예수믿었어요.' '재미 하나도 없다.' '네 재미 없어요.' 네 그럴수 밖에 없어요.
성경에 보면 삼손같은 사람 요란스럽죠. 뭐 사자를 잡아 찢고 했잖아요. 하지만 그것은 요란스러운 방법이고, 다양합니다. 보편적이란 다양합니다. 다양한 방법 다 다르기 때문에 남이 가진 체험 그걸 탐내지 마시고, 내게 고요하게 다가오는 그 체험 귀한걸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어느순간에 부터 어느순간부터 이것이 내 인생이 아니고 주님이 만들어 가는 인생이란것을 안다면, 이미 그 사람은 성령세례 받은사람입니다. 아까 뭐라했죠? 성령의 방사, 로봇팔이라고 했죠.
자, 그러면 다시 정리해 봅시다. 거처가 어디라고요? 거처가 현재 아무것도 안하고 평소처럼 똑같은 생활해도 그것은 누구의 거처가되요? 성령의 거처가 되면서 그곳은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자 그다음 문제입니다.
③그럼 성전이 됬을 경우에 어떤현상이 일어나는가? 요것 빠지면 안되요. 자 우리가 성령의 거처가 됬다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바로 제자들이 성령받기전의 모습을 여기서 우리가 표출하게 되어있습니다. 안에 들어왔잖아요. 성령들어왔잖아요. 뭐가 나가는게 있어야될게 아닙니까? 그 나가는 것이 바로 제자들이 모델로 보여주고 그 제자들이 보여주는 그 모습이 오늘날 우리들이 모습을 본모습이 그래도 밖으로 나오는 겁니다.
④이것을 요한복음 16장에서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우리가 오해했던 것들이 바깥으로 나오는 거죠. 성도가 되어서 복음을 전한다는 말은 이 바깥으로 이게 나는 이렇게 생각했드랬습니다가 바깥으로 나오면서 복음이 증거되는 겁니다. 나는 기도하면 응답받는줄 알았습니다 라는 식으로 복음이 전달되는 거예요. 나는 헌금하면 십일조 하면 복받는줄 알았습니다. 이런 엉터리를... 이렇게 하면서 바깥으로 나오는 거예요.
구원은 주님의 손에 달렸는데 내가 열심히 하면 그만큼 하늘나라 상받는줄 알았습니다라는 식으로 바깥으로 나오는 거예요. 그게 자꾸 흘러나오는 겁니다. 흘러나오면 그것이 바로 복음전파하고 성령이 지금 제대로 안에서 가동되는 겁니다. 나는 죽고 내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거예요. 그렇다면 더 나가봅시다. 그럼 밖에 나온걸 조사를해보자. 조사를 해보면 이게 내중심이예요. 밖에 나온게, 밖에 튀어나온게, 내중심이고 내중심의 특징이 뭐냐하면 나는 살고싶다 입니다. 나는 살고 싶다. 이게바로 체험, 현재 우리가 흔히 하는 체험 덩어리예요. 모든 행동에는 안에 뭐가 깔려있는가? 나는 지금 죽기싫고, 나는 더 살고 싶어. 더 살고 싶어서가 밑에 쫘악 깔려들어옵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죠. 살고자 하는 죽음에서 오는 그 공포가 누구나 갖고 있는데, 그것을 바깥에 내 놓으면 성도고, 그 안에 꾹꾹 담고 눌르고 참고 위장하고, 자기가 자기를 스스로 조작해가면 이것은 성도가 아니죠. 왜냐하면 자기중심으로 버티고 있기 때문에.
⑤그래서 바깥에 내놓은 체험, 어떤체험이라 했습니까? 내가 나를 살려고 이런 짓까지 해봤다 하는 그 체험이 바깥으로 계속,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겁니다. 그럼 한 일년나오고 그만 나오겠습니까? 이년 나오고 그만 나오겠습니까? 죽을때까지, 죽을때까지 계속 나와요. 죽을 때 까지 계속 나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말이라는 것은요 반드시 밑에 감정선이 깔려있어요. 감정선이 말로 나오기 때문에 다 표현이 안됩니다. 다 표현이 안되요.
그래서 말을 많이 해서 말1, 말2, 말3해서 듣는 사람이 3개를 참고해가지고, 내가 무슨 뜻인지 알아서 기어라 이렇게 나옵니다. 정확한 단어, 내 감정을 표현할 정확한 단어는 아무리 공부를 해도 정확한게 없습니다. 말을 하기전에 그 감정과, 말을 내뱉은 후에 2초후의 감정이 달라요. '나 당신 좋아해요.' 그럼 상대방이 '아 당신이 나를 좋아한다는 그말이죠?' '아~!!아니예요. 취소 취소. 좋아한다가 아니고 너무 아낀다.' 그럼 '너무 아낀다?' 그 말이죠? '아~~!!아니야. 너무 사모한다.' 그럼 '사모한다?' '아~~~!!아니고 몰라. 사모한다 아낀다 그중에 당신 알아서 이해해.' 항상 말을 할때는 정확하게 말을 못해요. 왜냐하면 말자체가 사물의 어떤 차이를 차이를 유발하기 때문에, 차이가 자꾸 쌓이게 되어있어요. 차이가.
그뜻인가? 아니예요. 이 색깔이 뭐다? 푸르다. 아니 푸름직하다 그런뜻이야? 아니. 인간은 자기갖고 있는 말을 못하는 이유가 감정자체가 항상 시간마다 초마다 감정이 기복이 심하기 때문에. 방금 말해놓고 말하고 5초후에 생각이 달라졌어요. 믿을걸 믿어야죠. 인간은 못 믿습니다. 우리가 체험할수 있는것은 인간은 믿을 대상이 아니라는 것, 다만 이용될 대상이지 믿을 대상은 아니라는 것. 우리가 느끼는 그거예요.
우리의 거처는 이처럼 요란스럽다는 거예요. 요란스러우면서 주님이 계시면 우리는 바깥으로 나 이런식으로 살려고 그만큼 체험들을 해왔습니다라는것을 내놓는데 그게 뭐냐하면 내가 나를 살리는 겁니다. 남을 살리는게 아니고 나를 살리죠. 그게 뭐냐면 자기중심적이죠. 자기 중심적이 되면서 내가 했던것은 나에게 의미로, 나에게 의미로 주어진 것입니다. 이게 1,2년 나오고 그만두는게 아니고, 언제까지 나온다 했습니까? 육신이 있는한, 이 육체가 있는 한 계속해서 이것이 죽을때까지 이것은 계속 흘러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뭐라했습니까? 내가 율법에 흠이 없는 자이지만 내가 율법으로 의롭다함을 받지 못하고 나는 죄인중에 뭐라고 했습니까? 죄인중에 괴수라고 그랬죠. 그래서 사람들이 죄를 지어서 문제가 아니고, 자기가 죄인인것을 몰라서 문제예요. 자기가 죄인인것을 인정을 안해서 문제라니까요. 죄를 지어서 문제가 아니고. 죄를 안짓고 싶어도 주님이 주신 말씀 딱 들이대게 되면 우리는 그 앞에 죄 아닌게 없어요. 전부다 죄로 다 드러나게 되어있어요. 체험을 이렇게 할수가 없어요.
베드로가 나름대로 체험한다고 7번용서하면 되겠습니까? 오늘 이것 하고 마치겠습니다. 베드로가 하는 말이 7번 용서하면 되겠습니까? 라는 이야기 했잖아요. 자 이야기 합니다. 봅시다. 인간은 뭘한다? 인간은 말을 내놓는다. 배운거 복습하는 거예요. 자기의 감정에서 나온 말이라 했지요. 그럼 이것은 무슨 중심? 내중심. 의미는 나에게 소환되는 의미. 그래서 나는 정당하다라고 소환되는 의미예요. 뭐라하냐하면 내가 7번 용서 하면 되겠습니까? 라는 말을 예수님께 했지요. 지금 예수님 말씀 안했어요. 베드로가 먼저 말했어요. 그런데 그 말에 뭐가 포함되어 있냐하면 나는 이런식으로 계속 동질성을 유지하면서 나는 살고싶다가 있는거예요. 어떻게? 정당하게.
무려 7번이나 용서하면서 나는 그런식으로 정당함을 부여받으면서 지금 내모습 그대로 동질을 유지하면서 천국까지 하늘나라까지 만나면서 살고 싶다. 내거처 그대로 유지하면서 라고 되어있단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 답변이 무엇이었습니까? 답변이 정말 장난도 아니고 이러했어요. 70번에 7번하라했어요. 그러면 베드로가 살고 싶어서 자기 행함을 얘기할때는 베드로는 언제까지 하면되요? 490번까지 하게되면 그 다음은 용서 안해도 되요? 어떻습니까? 지금 그런뜻이예요? 이게?
예수님보시기에 베드로가 뭐가 문제예요? 용서에다가 용서를 무엇으로 체험했습니까? 나는 용서하는 괜찮은 인간이라는 체험을 뽑아내려 했잖아요. 주님께서는 무엇으로 바꿔야되요? 용서는 니가 용서하는것이 아니고, 예수님 내 중심으로 예수님 중심으로 용서가 주어지는것으로 바꾸고 싶은 거예요. 베드로는 용서를 했기 때문에 갭이 있어야하는데 그 갭을 주님께서는 490으로 끊은 거예요. 490번 해보지. 그럼 490번 다 하면 숙제 다 했는데~ 하면 그 다음 뭐라합니까? 7x7x7 또 숙제라는것이 또늘어날 거예요.
베드로는 아무래도 그 갭, 그 절단, 낭떠러지를 본인이 인정을 해줘야되요. 내가 아무리 용서해도 구원 받지 못함을 인정해줘야 된다구요. 그러면 절대과거, 순수과거는 그렇게 7번용서하면 된다 하는 그것을 이미 절대과거에 보면 베드로가 그런 소리를 해야됩니다. 왜?! 베드로는 전도자이기때문에. 베드로가 하는 그짓. 7번 용서하면 됩니까? 하는 그것이 바깥으로 복음이 들어온사람에게 반드시 필히 지금 너와 나 여러분 다함께 지금도 나올수 있는 체험이기 때문에. 상황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윗집에서 시끄럽게 한다. 그럼 주여 몇번 용서해야합니까? 몇번째 떠들때 내가 올라가야합니까? 지금 세번까지 참았는데. 요게 바로 베드로가 미리 내놓은거예요. 왜냐하면 세번까지 하면 내가 이 아파트를 나의 거처로 삼고 나는 여기서 살고 싶습니다. 요게 내용이 들어있고 함축되어있는거예요. 함축되어있던거예요. 그런데 윗층에 주님계시다. 주님계시다. 그럼 할말없는거죠.
그때는 어떻게 하느냐. 첫번째 떠들때 올라가세요. 올라가서 성질부리세요. 당신이러면 이 동네 못사니까 쫓아내버리겠다. 이런이야기를 할때 우리는 복음을 접하게 됩니다. 왜? 내 성질 그대로 바깥으로 표출했기 때문에 왜? 나는 죄인이기 때문에. 성질대로 삽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하신일을 어떻게 견줄수가 있겠습니까? 보편적 단독자도 아닌게 영원히 영생을 누리고자하는 그 자체가 악마의 욕심인것을 이제는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