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고린도후서41강-동역자 디도(고후8;16-24) 170625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6. 26. 21:11
2017-06-25 12:40:51조회 : 62         
   동역자 디도 170625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동역자 디도(고린도후서 8:16-24)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yzrWUkOWeEA, Hit:1
 이근호17-06-25 13:35 
동역자 디도 

2017년 6월 25일                        본문 말씀: 고린도후서 8:16-24 

(8:16) 너희를 위하여 같은 간절함을 디도의 마음에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8:17) 저가 권함을 받고 더욱 간절함으로 자원하여 너희에게 나아갔고 

(8:18) 또 저와 함께 한 형제를 보내었으니 이 사람은 복음으로서 모든 교회에서 칭찬을 받는 자요 

(8:19) 이뿐 아니라 저는 동일한 주의 영광과 우리의 원을 나타내기 위하여 여러 교회의 택함을 입어 우리의 맡은 은혜의 일로 우리와 동행하는 자라 

(8:20) 이것을 조심함은 우리가 맡은 이 거액의 연보로 인하여 아무도 우리를 훼방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8:21) 이는 우리가 주 앞에서만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선한 일에 조심하려 함이라 

(8:22) 또 저희와 함께 우리의 한 형제를 보내었노니 우리가 여러 가지 일에 그 간절한 것을 여러 번 시험하였거니와 이제 저가 너희를 크게 믿은 고로 더욱 간절하니라 

(8:23) 디도로 말하면 나의 동무요 너희를 위한 나의 동역자요 우리 형제들로 말하면 여러 교회의 사자들이요 그리스도의 영광이니라 

(8:24) 그러므로 너희는 여러 교회 앞에서 너희의 사랑과 너희를 대한 우리 자랑의 증거를 저희에게 보이라 

주님 앞에서 특정 인간을 앞장 세우는 것은 복음의 훼방하는 짓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주님 활동을 설명하는데 있어 인간들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충만은 인간들의 다양성을 통해서 알려지기 때문입니다. 각자가 재주가 넘친다는 말이 아니라 각자 사이에 예수님의 활동성이 개입되기 때문입니다. 

그 개입되는 관계를 에베소서 1:22-23에서는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즉 교회를 통해서 온 천하가 예수님의 활동성이 넘쳐남을 증거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 증거 중의 하나가 오늘 본문 23절에 나옵니다. “디도로 말하면 나의 동무요 너희를 위한 나의 동역자요 우리 형제들로 말하면 여러 교회의 사자들이요 그리스도의 영광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디도라는 사람은 처음에는 사도 바울처럼 안디옥 사람입니다. 1차, 2차 세계전도일에 동참하면서 세 번씩이나 고린도교회에 갔으며, 사도 바울의 명을 따라 달마디아(지금의 알바니아) 지역에 전도했고 여생은 그레데섬에서 보낸 분입니다. 

그만큼 사도가 신뢰하지만 ‘동역자’, 혹은 ‘동무’라는 칭호는 그 실무적 관계를 넘어서 존재적으로 결속되어 있는 입장입니다. 여기에 보면 ‘동무’라는 말이 나옵니다. ‘동무’가 성립되려면 둘 이상의 다른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 위주입니다. 즉 인간에게 있어 ‘의미의 충만’이란 곧 자기 자신으로 모든 의미가 귀환된다는 점에 충만입니다. 원칙을 세운다면 이런 식입니다. 1. 나는 너와 다르다. 2. 내가 네가 될 수 없고, 너는 내가 될 수 없다. 3. 나는 도로 내가 되고, 너는 도로 너가 된다. 

그런데 주님 나라의 충만이란 모든 의미가 인간에게로 소급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로 소급되는 현상을 말합니다. 즉 아픔, 슬픔, 사랑, 미움, 기쁨, 좋음 등등의 모든 개념들이 모두 주님에게서 나와서 주님에게도 돌아갑니다. 예를 들면 치과에서 이를 뺄 때, 너무너무 아픕니다. 

그럴 때 사람들은 외칩니다. “내가 아프다”고 말입니다. 실은 ‘내가 아픈 것’이 아니라 ‘아픔’을 드러내기 위해 내가 있는 겁니다. 즉 이 세상은 인간으로서 충만한 게 아니기 때문에, 인간이 원하든 원치않든 간에 아픔이라는 늘 들이닥치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아픔이 상주하고 있는 겁니다. 

인간 본인이 행실이 반듯하고 마음씨가 착해서 아픔이 겁나서  찾아오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날마다 허약해가는 인간성 뿐만 아니라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상은 예수님의 뜻에 의해서 항상 우발적으로 일어나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구성한 이 세상에서 이미 인간은 주인행세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충만’으로 가득찬 세계에 대해서 인간들은, 인간의 지혜와 솜씨로 가득한 세계로 변모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즉 인간들에게 의미있는 것만이 의미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교만이 자동적으로 “내가 아프다”고 고함치는 겁니다. ‘나는 안 아파야 한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주장입니다. 

‘나는 실패 없어야 하고 늘 성공해야 하고 나는 늘 행복해야 한다’는 것은 모두 비-현실적 발상에 불과합니다. 마치 온 세상이 본인의 의미로 ‘충만에 충만스러워’야 하는 것처럼 떼를 쓰고 있는 겁니다. 그럴 권리가 있는 것처럼 굽니다. 어린 아이들이 태어나면서 그들은 이유 있어 울고 칭얼거리고, 혹은 떼를 쓰는 것이 아닙니다. 

주어진 상태를 그대로 반응을 보입니다. 즉 이 세상에서 발생된 자신의 신체가 곱게 지낼 그 어떤 희망을 보이지 않음을 솔직하게 나타냅니다. 하지만 부모들의 조치가 곧 이어집니다. 소위 ‘말(語)의 세계’입니다. 말로서 양육에 나섭니다. 동시에 아이의 정신세계로 그 잔소리에 맞추어 형성됩니다. 

그게 아이들 내부에 차곡차곡 쌓이게 되고, 그것이 자기 기억으로 구축이 되고, 그것이 자기 정체성을 형성합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의 정신세계는 본인이 느끼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성인이 되면 자기 기억보다, 그런 기억을 유발시킨 ‘타인의 기억’이 더 중요하게 됩니다. 

이런 타인 지향적인 행동이 곧 생활화됩니다. 달이 지구없이는 돌지 않는 것처럼 인간들은 자신이 과연 누구인지를 재대로 보여준 상대를 찾게 됩니다. 이 ‘관계 맺음’을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사랑’이란 내게 맞는 나를 형성하기 위해 도와줄 자를 찾는 모습입니다. 자기를 보호하고 늘 위로해 달라는 겁니다. 

이 방식에 대해서 세상은 두 가지 형식이 있습니다. 하나는 ‘에로스 사랑’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흔히들 그냥 ‘사랑’이라는 것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곧 둘이 하나가 되는 관계를 말합니다. ‘내것이 네 것이 되고, 네 것이 내 것이 되므로서’ 너와 나 사이에 그 어떤 간격도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출발점 자체가 오로지 최후에 ‘나만 남는다’는 원리에 맞지 않습니다. 자꾸만 ‘더, 더’를 외치게 됩니다. 처갓집에 남편을 데려가면서, 남편으로 하여금 처갓집에 잘 하라고 닦달하는 아내처럼, 자기 위주의 모습으로 발휘되는 ‘자기 충만적’ 욕망을 그 누구도 저지할 수가 없습니다. 

남편이 아무리 처갓집에 잘 해주어서 아내는 말하기를 “당신은 우리 집에 하는 행동을 보면 건성으로 하고, 마지못해 하고, 진정성이 없다”라고 일방적 판정을 내리곤 합니다. 따라서 세월이 지나면 에로스 사랑은 필로스적 사랑, 곧 우정이 됩니다. 이는 에로스와는 달리, 서로가 서로의 간격을 인정해주는 조건하여 사귀는 것을 말합니다. 

즉 “당신 없이는 못산다”가 아니라 “당신 없이도 나는 남는다”는 전제로 하면서 사는 겁니다. 상대방에게 그다지 매일 필요없다 는 그런 관계입니다. 하지만 이와같이 에로스 사랑이란 필로서 사랑은 모두 시발점이 “나는 여기 살아 있다”부터 나온 겁니다. 즉 살아있는 나부터 충만해야 한다고 고집과 권리가 따라가면서 작열하고 있는 겁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 말하는 아가페 사랑은 그런 게 아닙니다. 요한복음 15:13-14에 보면,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 ‘죽음’을 가지고 찾아와서 그 죽음의 자리를 ‘공동의 자리’로 삼아버리십니다

즉 난입한 아가페 사랑으로 인하여 죽은 자는 더 이상 ‘자기를 위한 충만을 향한 권리행세’가 용납되지 않는 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일관성 있는 자기 스토리 전개가 불가능하게 되어버리는 겁니다. 본인이 요청하지 않았기에 본인이 처분할 수 있는 상대를 만난 겁니다. 삼킬 수도 없고 토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다고 해서 그분을 쫓아버리고 제거하는 순간, 자신은 영원한 지옥에 떨어집니다. 그분이 박혀 있는 조건으로 낯선 영생을 누리고 있는 겁니다. 바로 성도는 이 사랑 앞에서 그 어떤 구별이나 차이가 없이, 그리스도로 인하여 같은 동역자가 되고 친구가 되는 겁니다. 각자 “십자가로 인하여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성격의 그리스도에 의한 충만을 내보이게 됩니다. 

삼손은 비록 여자를 밝히면서 에로스 사랑으로 파멸한 것처럼 비치지만 원래 삼손은 나실인(희생하는 구원자)이라는 조건은 오히려 더욱더 부합되는 과정을 맞이한 겁니다. 오늘날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의 칼을 가슴에 꽂은채 수시로 에로스 사랑과 필로스 사랑을 맛보게 합니다. 

다시 반복해서 돌아오는 과정 속에서 주님의 십자가 피흘림의 사랑이 더욱더 깊어지기 위한 예수님의 충만한 전략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깨어지기 위한 나의 인생임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17-06-26 17:35 

242강-고후 8장 16-24절(동역자 디도)170625-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후서 8장 16-25절입니다. 신약성경 293페이지입니다. 

  

고린도후서 8:16-24 

  

“너희를 위하여 같은 간절함을 디도의 마음에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저가 권함을 받고 더욱 간절함으로 자원하여 너희에게 나아갔고 또 저와 함께 한 형제를 보내었으니 이 사람은 복음으로서 모든 교회에서 칭찬을 받는 자요 이뿐 아니라 저는 동일한 주의 영광과 우리의 원을 나타내기 위하여 여러 교회의 택함을 입어 우리의 맡은 은혜의 일로 우리와 동행하는 자라 이것을 조심함은 우리가 맡은 이 거액의 연보로 인하여 아무도 우리를 훼방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이는 우리가 주 앞에서만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선한 일에 조심하려 함이라 또 저희와 함께 우리의 한 형제를 보내었노니 우리가 여러 가지 일에 그 간절한 것을 여러번 시험하였거니와 이제 저가 너희를 크게 믿으므로 더욱 간절하니라 디도로 말하면 나의 동무요 너희를 위한 나의 동역자요 우리 형제들로 말하면 여러 교회의 사자들이요 그리스도의 영광이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여러 교회 앞에서 너희의 사랑과 너희를 대한 우리 자랑의 증거를 저희에게 보이라.” 

  

구원받는데 내가 예수 믿어서 나만 달랑 구원받는다. 그러면 남들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구원은 주님이 하시는데 같은 인간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 아니잖아요. 그렇다면 인간은 필요 없고 오직 주님만 있으면 될 문제일 것입니다. 논리가 그렇게 되는 거지요. 

  

그런데 오늘 성경 본문에 보니 주님 이야기만 나오는 걸로 알고 있는데 형제 이야기가 나오고, 교회 이야기가 나오고, 특히 구체적인 이름을 거론하는데 디도라는 사람을 거론하면서 23절에 “나의 동무요 너희를 위한 나의 동역자요 우리 형제들로 말하면 여러 교회의 사자들이요 그리스도의 영광이니라.”라고 해서 디도라는 사람을 특별하게 부각을 시키는 이야기를 편지에 집어넣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말고 같은 피조물인 디도 같은 사람들, 사람을 이렇게 앞장세워버리면 예수님의 복음이 훼손되거나 가려지지 않을까요? 교회가 주님만 찬양하고 높여야 되는데 디도 자기가 뭔데 사도바울은 이렇게 디도를 소개하는가? 우리는 얼른 그렇게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이렇게 디도를 소개하고 교회를 소개하는 것은, 이 세상전부가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가 이미 되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확인해주는 증거물로 이렇게 교회와 형제들과 디도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전부가 예수님의 세계라는 것을 에베소서 1장 23절에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네 눈에 사람으로 보이냐, 내가보기에는 그리스도의 형제로 보이고 그리스도의 지체로 보인다는 그 이야기에요. 사람들이 모여서 충만이 아니고 그리스도가 충만한데 그 충만하다는 그 증거가 뭐냐? 디도라는 사람이 나타나고 교회 형제들이 나타난다는 그 말이지요. 

  

그러면 디도나 형제에서 머물지 말고 디도나 형제를 경유해서 과연 주님은 모든 것에 아니 계신 곳이 없이 충만해 계시구나, 라는 그것을 확인하면 되지요. 그것을 느끼면 되는 겁니다. 소개하는 디도를 경유해서, 같은 형제를 경유해서, 세상이 이미 주님에 의해서 접수가 되었다는 사실을 날마다 느끼고 살아가는 거예요. 

  

주님의 세계지, 디도의 세계도 아니고 사도바울의 세계도 아니고 우리교회, 그 자체를 위한 세상도 아닙니다. 나 좋으라고 있는 세상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신난다 그 말입니다. 우리교회 좋으라고 세상이 돌아가지 않는 것에 대해서 너무나 감사하다는 그 말입니다. 

  

우리 가정, 내 사업체를 위해서 주께서 일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서 너무 고맙다는 그 말이지요. 왜냐하면 내가 구태여 충만할 필요가 없고 내 사업체가 충만할 필요가 없고 내 가정이 땅 끝까지 충만할 이유가 없어요. 그 가정은 대단한 가정이었다. 그 사람은 얼마나 훌륭한지, 책도 많이 쓰고 박사학위논문도 미국에서 얼마나 유명한지. 

  

그러나 청문회에서 털어버리면 부실의 삼종세트가 다 나온다는 말이지요. 위장전입, 논문표절, 가정의 문제 등등. 세상이 인간들의 충만이 아니구나. 예수님의 충만을 설명한다면 인간들의 충만이 아님을 경유해서 예수님의 충만으로 나아가야 됩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충만하게 일하고 있다는 것을 누가 방해 놓는가? 

  

음흉한 생각, 내가 잘 돼야 돼, 라는 생각 때문에 우리는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있는 여건이 주어짐에도 불구하고 짜증내면서 살아가지요. 비도 안 오는데, 라고 짜증내면서. 비도 조금 오다 말고, 이렇게 짜증낼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요. 비 안 오는 것도 주님의 충만을 보여주기 위한 하나님의 전략이고 작전입니다. 엘리야 시대에 3년 6개월 동안 비 안 왔어요. 

  

이 세상은 인간의 손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뭔가 드러내고자 하는 뜻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복음의 충만, 주님의 진리의 충만, 그렇게 되지요. 이런 일을 하는데 있어서 인간들은 극히 장애가 된 겁니다. 디도가 장애가 되고 교회를 소개하는 것이 장애가 되지 않겠는가? 

  

23절에 “디도는 나의 동무요”라고 할 때 처음부터 디도와 사도가 어릴 때부터 아는 사이가 아니었잖아요. 태어날 때부터 같은 동네 사람이 아니라는 그 말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는 사이가 된 것은 그 가운데 주님의 충만이 개입한 거예요. 주님이 충만이 개입하게 되면 어떻게 주 안에서 디도라는 낯선 사람과 사도바울이라는 사람이 동무가 되겠느냐? 

  

그걸 설명하기 위해서는 충만 앞에서 이 세상 모든 주체가 해체되어야 됩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은 없는 거예요. 인간이 없어져야 돼요. 인간이 있어버리면 인간이 있다는 것 때문에 세 가지의 딜레마에 빠집니다. 그게 뭐냐 하면, 나는 너와 다르다. 간단한 말이지만 평생을 두고두고 생각해도 이게 맞는 말 같아요. 나는 너와 다르다. 

  

전에도 그런 예를 들었습니다만 친구 할아버지 돌아가서 장례를 치르고 있는데 마침 그 장례식 날이 일요일인데 그 때 MBC에서 <웃으면 복이 와요>를 했어요. 옛날에는 집에서 장례를 치렀잖아요. 웃음꽃이 피었습니다. 구봉서와 배삼룡이 웃기는데 배를 붙잡고 웃었어요. 장례식이 완전히 웃음바다가 되었어요. 

  

왜? 돌아가신 너는 너고 나는 나라는 말이지요. 너는 너고 나는 나예요. 아무리 세상이 달라진다, 달라진다 해도 달라지지 않는 것은 뭐냐 하면, 너는 너고 나는 나예요. 그러니 이런 분명한 입장에서 뭐 예수를 믿어요? 말을 되는 소리를 해야지 다 들통날 거짓말을 하십니까? 

  

예수는 예수고 나는 나에요. 뭘 예수를 믿어요? 그래도 믿고 한 몸이 된다고요? 두 번째입니다. 나는 네가 될 수 없다. 이게 또 분명한 사실이에요. 나는 나고 너는 너인데 그래도 우리가 하나가 되자. 그거 하나 안 되거든요. 절대로 하나 안 됩니다. 왜냐하면, 세 번째, 도로 내가 되기에. 

  

그래서 나온 유명한 노래가 ‘도로남’이라는 노래입니다. 님에 점 하나 찍히면 남, 도로 남이 되는 거예요. 아무리 예수 믿어도 도로 남, 다시 나에게 돌아와요. 교회 5십년, 6십년 다녀도 소용없어요. 도로 남이 돼요. 역시 나는 나고 너는 너고, 너는 나 외곽에 있고 나는 내 자리에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혼자서 살면 되는데 그것이 사람 살아가는데 있어서 나만 챙기니까 자기자신에게 어울리지 않아요. 왜냐하면 달과 나는 관계없는데 관계없으면 달이 없어야 되고 해가 없어야 되는데 내 허락도 없이 왜 별은 있고 달은 있고 해는 있느냐는 말이지요. 

  

세상 모든 것이 나에게로 돌아오게 되면 내가 시키지도 않는 저 일을 누가 했느냐는 말이지요. 내가 달 있으라고 했습니까? 별 있으라고 했습니까? 애를 낳는데 애가 내 맘에 안 들어요. 누가 내 몸에서 이런 자식을 낳으라고 시켰어요? 나는 시킨 적이 없어요. 

  

나는 나뿐인데 그리고 나뿐이라면 세상은 나에게 적합한 세상이어야 하는데 왜 내 소원대로 내 뜻대로가 아니고 세상이 제멋대로 돌아가느냐 이 말이지요. 여기서 인간들은 혼자밖에 모르는 인간이 혼자서 살려 하는데서 자기 뜻대로 안되니까 맘을 합치고 뜻을 합치고 생각을 합치려고 할 거예요. 

  

그것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뭐라고 하느냐? 사랑이라고 합니다. 지금 ‘동무’라는 것, 사도와 디도가 어떻게 동무가 되었느냐는 그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한 그 가운데 뛰어들었다는 그걸 설명하고 있는 거예요. 늦게 오신 분 위해서 다시 말씀 드리는 겁니다. 

  

사람들이 혼자로 돌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래서 너무 외롭고 불편하기 때문에 힘을 합치려고 해요. 그것을 세상에서는 사랑이라고 합니다. 사랑을 세상 사람들이 셋으로 나눴어요. 에로스, 필로스, 아가페, 셋으로 나눈 거예요. 부흥회 때 많이 들어 봤지요? 그걸로 부흥사들이 낮 공부 다 때우잖아요. 

  

에로스 사랑이라는 것은 뭐냐? 그 진리가 나에게 왔을 때 진리와 내가 합치되는 것. 남이 왔을 때 그 타인과 내가 하나가 되는 거예요. 이걸 에로스 사랑이라고 합니다. 결혼식에서 나오는 사랑이 에로스사랑이에요. 그래서 에로스사랑에서 에로스를 뗍시다. 

  

세상의 모든 사랑은 에로스사랑, 그게 전부인줄 알고 있어요. 저 사람과 내가 하나가 되는 거예요. 틈이 없는 거예요. 합치되는 거예요. 네 것이 내 것이고 내 것이 네 것이 되는 거예요. 성경에도 나왔잖아요. 남자와 여자가 부부가 되면 한 몸이 된다고. 그 사랑이 유일한 사랑, 세상에서는 그것이 끝이고 그것을 원하고 있습니다. 

  

힘든 나를 온전하게 맡길 수 있는 대상을 찾는 거예요. 누가 여러분들 위로해줍니까? 내가 안해도 여러분이 압니다. 여러분! 윤복희가 이야기했잖아요. 여러분, 누가 나를 위로해주지. 문제는 뭐냐? 네가 뭔데 위로를 받아야 돼? 그 질문을 본인에게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치과에 가면 이 빼는데 굉장히 아파요. 그럴 때 의사에게 화내고 간호사에게 시비를 걸지요. 아프다고. 본인에게도 진짜 치아관리 잘할 걸, 진짜 아프다, 하는데 생각해 보세요. 왜 안 아파야 되지요? 충만 이전에 모든 것이 혼돈상태에서는 나가 없어요. 나가 없으면 뭐만 있느냐 하면, 아픔의 충만이에요. 

  

나보다 아픔이 우선이에요.
나는 아픔을 경험하기 위해서 이 땅에 잠시 태어난 겁니다
.
그런데 인간들은 어떻게 잘못되어서
내가 아프다고 짜증내고 원망을 합니다.
우리 있기 전에 아픔이 있었어요.
이걸 두자로 자연이라고 합니다.
자연이 먼저 있었고
그 자연, 질서를 쪼개면 그것이 나가 돼요. 


  

초반에 어려운 것을 해서 죄송합니다.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이 땅에는 흙덩어리밖에 없는데 그걸 쪼개게 되면, 예를 들어서 카스테라를 쪼개면 그 한 부분이 내가 되는 거예요. 죽으면 다시 카스테라로 뭉쳐지고.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간다는 말이지요. 

  

이 세상은 아픔이 있고 그 아픔을 경험하라고 우리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거예요. 내가 아픈 것이 아니고 아파한다는 것이 이미 잠재되어 있고 이미 형성되어 있음을 이빨 뽑는 그 순간 경험하게 하는 거예요. 이빨이 안 썩고 있으니까 이 세상에 아픔이 없는줄로 알고 있어요. 

  

자기가 멀쩡하니까. 남들이 아프면 “좀 참지 성질도 더러워.” “너는 아픔을 몰라서 그래.” “나 같으면 참겠다.” 자식을 잃었다. “좀 슬퍼도 참지.” “너 한 번 잃어봐.” 주객이 전도되었다는 겁니다. 선후의 절차가 반대가 된 거예요. 내가 있고 나는 안아파야 된다는 일방적인 주장을 늘어놓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 땅의 모든 것은 상실되게, 잃어버리게 되어 있어요. 어릴 때 태어나서 어릴 때 죽으면 안 아파요. 그런데 내 것이라고 있게 되기에 상실감이 더욱 큽니다. 심지어 우울증 걸려서 자살까지 해요. 욥이 6개월 때 고난 받은 것이 아닙니다. 욥이 2개월 때 고난 받은 것이 아니에요. 

  

욥이 성인이 되어서 나는 나다, 라고 결국은 나는 나에게 귀환된다고, 그것이 확고한 가운데서 주께서 모든 것을 빼앗아 버렸습니다. 욥이 발악을 합니다. 줘놓고 왜 뺐습니까? 이론상은 알아요. 주신자도 하나님이요, 가져가신 자도 하나님이요. 이론상은 아는데 그 이론가지고 자기를 커버할 수 없습니다. 

  

이론은 자기 바깥에 있어요. 그러나 그 안에 들어와 버리면 우리자신은 원망과 불평이 나오는 겁니다. 원망과 불평이 나올 때 주님께서 원했던 것은 인간이란 자체가 원망과 불평의 바다, 혼돈의 바다, 말썽꾸러기의 그 허무의 소용돌이, 자기의 존재의 원천을 주께서 손을 댐으로서 자기 밑바닥을 접촉하게 하고 느끼게 만드는 겁니다. 

  

외로워서 하나가 되었다 하지요. 그 가운데서 자기는 사랑이라 여겼는데 그 사랑이 어느새 필로스 사랑으로 바뀌게 됩니다. 필로스 사랑이 뭐냐? 항상 갭이 있고, 틈이 있고, 차이, 간격이 생기는 그것을 우정이라 합니다. 에로스는 딱 들러붙어 있는 하나라고 생각하니까 여기서 뭐가 생기느냐? 자꾸 불안이 생기는 거예요. 

  

우리가 참 좋은데 만약에 우리 둘 중 하나가 죽어버리면 어떻게 해, 자식들은 어떻게 해, 이런 거요. 하나도 아닌데 하나라고 간주하다 보니까 거기서 추가적으로 계속 불안이 생기는 겁니다. 하나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 그걸 유지해야 되는지 이유도 없어요. 무조건 아빠는 나에게 잘해야 된다는 거예요. 

  

왜? 아빠하고 나하고는 한 식구니까. 그것은 제일 첫 번째 원칙에 어긋나요. 너는 너고 나는 나에요. 그러나 애는 그런 것을 인정 안 해요. 내가 어떤 짓을 해도 아빠는 나를 보호해야 되고, 나를 칭찬해야 되고 나를 사랑해야 된다는 겁니다. 아빠하고 난 하나고 무조건 아빠는 자식인 나를 도와줘야 되기에. 

  

어떤 부부가 처가에 갔어요. 아내는 남편이 자기한테 잘해주는 것을 처가에 자랑질하고 싶은 거예요. 남편도 거기 맞춰서 장모에게 정성을 다해요. 제가 들은 이야기인데 어떤 장모님 때문에 곤욕을 치르는 사위가 있어요. 사위나이 8십, 장모나이 1백. 일당 3천 원짜리 고생하면서 그 돈 백살 먹은 장모에게 다 바치는 거예요. 

  

자기 부인이 얼마나 감격하겠습니까? 하지만 사람은 자기에게로 돌아오게 되어 있어요. 자기 딴에 통닭사고 가게 되면 돌아오는 길에 아내가 이럽니다. “당신은 우리 집 사람들을 무시하는 것 같아.” “뭘 무시해? 통닭도 사서 갔잖아.” “진정성이 있어야지. 사람이 진정성이 없어. 아까 밥 먹을 때 말을 왜 그렇게 해?” “그럼 어떻게 고치면 될까?” “그걸 꼭 말로 해야 돼?” 

  

아무리 해도 좀 더 더, 좀 더 더, 좀 더 더, 처가의 욕망을 1백살이 되어도 다 못채웁니다. 하나라고 여기기에 자꾸 결핍이 생기는 거예요. 어제의 하나는 하나도 아니에요. 좀 더, 그 하나보다 더 깊은 하나. 결혼하면 물도 안 묻히게 할게, 해서 남편이 정말 설거지를 다 해줬어요. 아내가 그러면 만족합니까? 

  

“여보, 약속대로 설거지 내가 다 했잖아.” 그러면 아내가 뭐라고 하느냐? “설거지 하는 것은 좋은데 취직을 해서 돈을 벌어야지. 아직 안 돼. 더, 더, 더…….” “그러면 이만큼?” “아니, 더, 더…….” 그러면 남편이 “왜 그걸 요구하는데?” “사랑이거든.” 어느새 사랑은 우정이 되어 있습니다. 

  

우정은 항상 차이를 둬야 돼요. 사랑으로 가면 결혼생활 깨집니다. 깨진 결혼생활을 어설프게 급조해서 마크하는 것이 뭐냐? 이제는 하나 됨을 포기하고 우리 친구로 남자, 정으로 가는 거예요. 이걸 정으로 산다고 하지요. 처음에는 사랑으로 시작했다가 정으로 사는 거예요. 

  

이제는 서로에게 뭔가 과도하게 요구하지 않기. 왜? 자식이 있으니까. 이제 자식만 쳐다보면서 살면 되니까. 내가 하나되는 욕망을 포기한 것이 아니고 남편에 대한 하나 됨이라는 그 사랑의 욕망의 방향을 틀어서 자식에게로 향한 거예요. 자식한테 다 퍼붓는 거예요. 남편은 돈만 벌면 되는 돈 버는 기계고. 

  

남편한데 기대했던 그것이 자식에게 옮겨졌으니까 남편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어요. 그냥 하나의 친구, 갭이 있는 거예요. 나이가 한 30대 초반만 되면 각방 써요. 아침 되면, 안녕하세요. 남편은 바깥으로 돌면서 따로 놀고 친구와 술 먹으러 다니고 아내는 자식들과 함께 있으면 되고. 

  

결국 이 세상은 두 종류의 사랑밖에 없어요. 그 두 종류의 사랑의 기초가 뭐냐? 내가 여기 있다는 겁니다. 내가 여기 있고 세상 모든 충만한 것들은 나를 위해서 돌아가야 된다는 겁니다. 지구가 없으면 달이 돌지 않듯이 내가 여기 있기에 저 달도 의미 있고 저 별도 의미 있다는 겁니다. 

  

별 하나 나 하나, 하잖아요. 별 둘 나 둘. 별한테 물어보지도 않았어요. 자기 맘대로 화살표 꽂아서 사랑의 작대기로 자기한테 연결시키는데 얼마나 자기위주입니까? 요한복음 15장 13절에 보면, 그런 식의사랑은 그 자체가 혼돈입니다. 요한복음 15장 13절에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외부에서 새로운 공유의 자리를 주는 거예요. 새로운 공유의 자리를 따로 주께서 제공하는데 그 제공되는 재질이 죽음이에요.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이것이 사랑이라 할 때 이게 아가페사랑이라는 겁니다. 아가페사랑의 특징이 뭐냐? 필로스는 따로 떨어져 있는 거예요. 에로스는 둘이 한 덩어리 되는 겁니다. 

  

그래서 아가페사랑은 뭐냐? 분명히 들어왔는데 하나인데 내가 거기에 대해서 감당을 못해요. 내 것이 되지 않는 사랑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아가페사랑이 오는 순간 나는 나의 모든 권리와 자질을 박탈당하고 나는 죽는 존재가 됩니다. 

  

내가 삼키고자 해도 삼킬 대상도 아니고 내가 쫓아낸다고 해도 쫓겨날 대상도 아니에요. 일방적으로 난입, 쳐들어왔기에. 그 사랑이 아가페사랑이라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말한 주님의 사랑이 아가페사랑입니다. 


주님이 오게 되면 우리로 하여금 질서의 세계, 의미의 세계로 머무는 것이 아니고, 카스테라처럼 이 조각은 내 것, 이 조각은 네 것, 이것이 아니라 모든 조각을 혼돈으로 환원시켜 버려요. 하나의 검은 바다가 물결이 쳐버리면 어느 물방울을 따로 뽑아낼 수 없듯이 그냥 튕기는 대로 물방울이 되듯이 모든 것이 한데 섞여 버려요. 

  

그 섞인 상태로 돌아가게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좀 어렵게 말해서 이렇습니다. 본래 인간이라는 것은 처음 태어날 때 혼돈상태에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내가 배고픈 것이 아니에요. 배고픔이 있고 젖 달라고 우는 나가 뒤에 있어요. 배고픔을 경험하기 위해서 울어야 될 아기로 태어난 거예요. 

  

이 세상은 주님을 위한 충만이지 날 위한 충만이 아니잖아요. 방금 태어난 아기를 위해서 미국 대통령이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이지요. 내가 뭔데 미국 대통령이 나를 도와줘야 됩니까? 내가 뭔데 부모가 나를 도와줘야 돼요? 그런 것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에요. 아기는 뭐냐? 

  

배고픔, 아픔, 슬픔, 기쁨, 젖 먹으면 좋다고 혼자서 옹알이하면서 무슨 말인지도 모를 소리를 내뱉지요. 그런 것들을 보여주는 거예요. 자체적인 것이 없어요. 그런데 그 애가 크면서 말의 세계로 들어옵니다. 엄마가 자꾸 애에게 말을 던지는 거예요. 언어를 가르쳐 주게 되면 거기에 맞춰서 점차 나라는 것이 꾸역꾸역 만들어지는 겁니다. 

  

만들어지면 부모가 이야기했던 것이 애의 머릿속에 누적이 되고 저장이 돼요. 그리 되면 나의 기억보다 뭐가 더 중요하냐 하면, 남의 기억이 더 중요해요. 왜냐? 그렇게 양육 받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남의 기억이 더 중요하게 되면 그 다음부터 성인이 되어서의 행동 하나하나 하는 것이 내가 아파도 참아야 되고 장례식에 가서 웃으면 안 되기에 그것도 참아야 돼요. 


  

참아야 하느니라. 맨날 참아야 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내 기억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나를 주시하는 남들의 기억이 더 중요하기에 그렇습니다. 혼자 있을 때는 어떤 짓을 해도 괜찮지만 남 앞에서는 행동을 똑바로 해야 됩니다. 상대방의 기억이 나로 하여금 질타하게 되고 나무라게 되어 있어요. 

  

우리집안에 너 같은 애 없다. 이런 식으로 하게 되면 어떻게 수정해야 돼요? “네가 내 말대로 수정을 해줘야 나하고 에로스 사랑이 되는 거야. 한 덩어리 되는 거야.” “싫어요!” 하면 가출하는 거지요. 가출해서 혼자 살지 않아요. 가출해서 또 외로운 나를 받아줄 사람이 없는지 새로운 에로스 사랑을 찾는 거예요. 

  

있지도 않는 주체를 미리 이 세상을 접수하고 점령하고 선점해 있던 기성세대가 나를 어릴 때부터 계속해서 그 나물에 그 밥으로 융화되고 합치되게 만드는 겁니다. 그렇게 만든 세계가 있음의 세계에요. 죽음은 밀어내고 그저 살아있는 우리끼리 잘해보자는 이것을 가지고 두 자로 ‘문명’ 혹은 ‘문화’라 합니다. 

  

그 문명에서 과학 나오고, 그 문명에서 철학 나오고 학문 나온 거지요. 직장 나온 거예요. 지금 우리가 보는 이 고린도후서의 이야기는 암울한 이야기입니다. “야, 이거 보니 우리 교회도 디도 같은 사람이 있을 것이고 우리도 형제 하고 동무하면 착한 교회 되겠네.” 

  

교회라는 자체가 이게 가짜라니까요. 교회 자체를 뜯어보면, 나는 교회라는 그 단체 안에서 평화를 얻고, 위로받고, 마음이 안정되고, 하나님의 행운을 얻고자 하는 나를 위한 충만으로 가상적인 집단, 단체를 만든 그것이 교회에요. 교회는 복음 아닙니다. 교회는 복음을 가리는 곳이에요. 

  

성경말씀에 디도가 나왔으니 우리교회도 디도 같은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 디도 같은 사람 되지도 않을 사람 찾지도 마세요. 디도라는 이 동무가 나기 전에 아가페사랑이 움직인 겁니다. 원래 디도와 사도바울은 안디옥에서 알던 사람인데 1차, 2차전도 때 함께 다녔어요. 

  

그리고 고린도교회가 있어요. 그리스남쪽인데 사도바울이 디도를 세 번이나 파견해서 복음도 전하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헌금도 전달하게 했어요. 그리고 이 사람이 얼마나 의리 있는지 사도바울이 옥에 갇혔다가 잠시 풀려나왔을 때도 돌봤고, 달마디아라는 곳, 아드리아해 동쪽 지금의 알바니아인데 그곳에 처음 전도한 사람이 디도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그레데라는 섬에 가서 죽을 때까지 목회했던 사람이에요. 디모데후서 다음에 디도서가 나와요. 이 모든 디도의 움직임은 뭐냐? 아가페사랑의 움직임입니다. 아가페사랑이 뭐냐? 한마디로 말해서 그 사랑이 오면 나는 그 앞에서 죽어요. 내가 죽는 자가 된다니까요. 

  

사랑 앞에서 나는 죽어요. 내가 죽는 동시에 어릴 때부터 있던 내 자아와 주체라는 것을 가지고 이것을 달라, 저것을 달라, 요구할 권리나 자격자체가 없어져 버려요. 내가 있는 한 나는 기껏해야 에로스사랑과 필로스사랑만 원해요. 에로스사랑 안되면 차선책으로 친구나 돼야지, 필로스사랑으로 갑니다. 간격 띠우고. 

  

그러나 아가페 사랑은 에로스나 필로스만 원해서 모든 것이 나위주로 살아가는 나에게 허락도 없이 난입합니다. 난입이 뭡니까? 그냥 뛰어 들어오니까 그 때부터 본래적인 혼돈으로 되게 되면 부모가 너는 너야, 라고 하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게 됩니다. 나는 납니다, 할 수 있는 것까지 날라 가버려요. 

  

그러면 내 주체는 어디 있느냐? 내 주체를 예수님이 대신해 버립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주님의 충만이란 말은 뭐냐? 이 세상 모든 인간들은 왔다가 사라지면 그만이지만 남는 것은 이름만 남아요. 

  

이름이라는 언어, 이름 안에서 나는 이미 죽어 있는 겁니다. 그게 야곱이 이스라엘로 이름이 바뀐 것이고 아브람이 아브라함 되는 거예요. 아브라함 이름 앞에서 아브람이라는 개인자아는 사라져 없어지는 겁니다. 날라 가면 우리가 서글프잖아요. 천만의 말씀. 원래부터 날 만든 분이 있기에 구태여 그 앞에서 또 나를 따로 제작하거나 구성할 하등의 이유가 없어요. 주시는 대로 살면 되는 겁니다. 

  

그게 아가페사랑이라는 거예요.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바칠 때 이것은 나를 위해서 친구가 필요하고 나를 위해서 남편과 아내가 필요하던 이 모든 것을 전부 다 찢어버립니다. 그것은 왜 엉터리냐 하면,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모르고 살아야 되겠다는 그것을 단단한 기초로 잡고, 잇몸에다 임플란트 하듯이 이유도 없이 무조건 나만은 살아야 되고, 내가 무조건 잘되기 위해서 나는 사랑이 필요하고, 친구도 필요하다고 출발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교회도 필요하고 목사님도 필요하고 다 나를 위해서. 그러면 주님이 그렇게 나의 자존심을 박살낸다면 주님을 뽑아 보내면 되지 않겠는가? 주님을 뽑는 동시에 우리는 영원한 지옥입니다. 같이 있으면 내 손으로 주님을 다룰 수는 없어요. 필로스, 우정은 서로 따로 떨어져 있고, 에로스가 하나라면 아가페는 뭐냐? 

  

하나 되는데 내가 다룰 수는 없는 이질적인 대상이 내안에 등장한 거예요. 그리고 그분은 나의 일관성을 불가능하게 만들어요. 나는 이렇게 살아왔습니다, 어릴 때부터 교회에 다녔고 나중에 개척교회를 열두 군데하고, 이런 시나리오 자체를 전부 다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려요. 그것을 전부 다 난도질 해버립니다. 

  

그것은 너의 충만이지 나의 충만이 아니야. 네가 어릴 때도 나의 충만이었고 네가 40때도 충만했고 50때도 충만했다. 그 충만한 몫을 도로 내가 가져가면 안돼요. 어떤 사람은 이것을 칼이라고 하는데 그게 도깨비 칼이에요. 칼 빼면 내가 죽어요. 살기 위해서는 칼이 내 가슴에 꽂혀야 됩니다. 

  

인생 내 맘대로 못살게 조종하고 있는 겁니다. 이것을 낯설다고 여기지 마세요. 이것은 내가 몰랐던, 내가 비로소 알게된 나의 바닥이고 원천이고 제일 밑바닥 모습이에요. 원래 그렇게 해서 천국 가는 겁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 하면, “목사님, 저는 아직 그런 레벨 그런 수준이 아닌데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하거든요.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설명한다든지, 자기 믿음, 소망, 사랑을 설명하면 그 순간 지금 자기 자신이 살아 있는 순간이에요. 내 믿음은 이런 믿음이고 내 사랑은 이런 사랑이고 나는 그걸 믿습니다, 해버리면 또 다시 내가 살아 있어버려요. 이런 경우를 성경에서는 아주 친절하게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사사기 16장 4, 5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이 후에 삼손이 소렉 골짜기의 들릴라라 이름 하는 여인을 사랑하매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이 그 여인에게로 올라와서 그에게 이르되 삼손을 꾀어서 무엇으로 말미암아 그 큰 힘이 있는지 우리가 어떻게 하면 그를 이기어서 결박하여 곤고케 할 수 있을는지 알아보라 그리하면 우리가 각각 은 일천 일백을 네게 주리라.” 

  

삼손에게 세 명의 여자가 있었는데 마지막 여자가 들릴라입니다. 그 여자에게 삼손이 푹 빠졌어요. 누가? 삼손이. 삼손의 주체가 아직 살아있어요. 그런데 삼손은 원래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하나님의 신에 의해서, 예언에 의해서 태어난 사람이에요. 삼손이 오늘날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성도라 할지라도 이 땅에서 살 때는 전부 다 누구누구를 좋아하고, 누구누구에 푹 빠지고, 세상에 푹 빠지고, 빠질 수밖에 없는 과정을 누구나 겪는다는 이야기를 삼손을 통해서 하고 있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백날 아가페사랑 이야기해봐야 이것은 이론이에요. 

  

내가 멀쩡한데 아가페사랑 이야기해도 이것은 나하고는 무관한 이야기에요. 그런데 그래야만 해요. 갑자기 복음 되었지요. 아가페라는 것은 도달할 수 없는 간격과 차이가 계속해서 일어나는 겁니다. 그런데 그 간격과 차이를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만듦으로 말미암아, 더 쉽게 해서 주님께서 아가페사랑으로 품어줬지만 자기가 품어준 자기성도를 계속 에로스와 필로스를 수시로 휴가 보내서 경험케 하는 거예요. 

  

경험이 좀 오래 걸린다마는. 휴가일수가 너무 많아. 365일 가운데 364일이 휴가에요. 주께서 자기백성을 이미 아가페로 가둬놓고, 칼을 꽂아놓고 꽂은 상태에서 이 칼의 의미, 아가페의 의미를 알도록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네가 그렇게 날 때부터 생래적으로, 원천적으로 좋아하는 에로스와 필로스를 계속 경험케 하는 겁니다. 

  

들어갔다가 손잡아서 다시 끄집어내는 그 과정에서 날마다 아가페사랑의 길이와 넓이와 높이와 깊이를 더 알게 하는 전략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해서, 아가페사랑 믿는다고 해서 맨 날 교회 가서 울고 그런 것 아닙니다. 우리는 아가페사랑의 복음을 들으면, 주님이 죽으심으로 우리를 친구로 만들었다. 

  

따라서 날 친구로 만든 그 예수님의 죽음이 디도와 사도바울사이에 들어오면 그 때부터 본의 아니게 사도바울은 디도와 친구가 되어야 되고 고린도교회와 형제가 되어야 돼요. 이것은 수동적이에요. 타율적입니다. 교회 와서 내 맘에 든다고 이야기하고 그런 것이 아니에요. 어쩔 수가 없어요. 타율적으로 그렇게 가도록 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생각하기를, “목사님, 내가 혹시 아가페사랑이 오지도 않았는데 오늘 이 말씀 듣고 아가페사랑이 왔다고 착각을 하면 어떡합니까?” 이런 질문을 계속 하는 사람이 있어요. 제가 믿는다고 하지만 이 믿는다는 것이 잘못된 믿음 같으면 어떻게 해요, 라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자신을 옥수수로 착각하는 정신병환자가 병원에 왔어요. 치료를 받고 “당신은 사람이지 옥수수가 아닙니다.” 하니까 “감사합니다.” 하고 정신병 문 열고 나갔다가 다시 후다닥 뛰어들어 왔어요. “나는 옥수수가 아닌 것을 아는데 저 닭이 나를 옥수로 알고 물면 어떻게 합니까?” 하는 거예요. 

  

나는 예수 믿는데 주님이 내가 믿는 믿음을 믿음이 아니라고 하는 순간 나는 헛짓이 되니까 그런 경우라면 어떡하느냐, 그 이야기지요. 사실은 말을 안 해도 다들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뭐냐? 방금 이야기한 것이 왜 잘못되었느냐? 그 사람은 순서를 이렇게 잡았어요. 

  

1. 예수님이 나를 구원했다. 2. 그런데 그것을 내가 뒤집어엎으면 어떻게 하느냐?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이 나를 찾아왔다는 그것이 찾아왔는데 내 안에까지 안 오고 그 앞에서 좋은 이야기라고 하고 서 있는 거예요. 그러면 내쪽에서 그 예수를 붙들려고 하겠지요. 그것은 에로스사랑입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을 믿습니다, 나는 주님을 소망합니다, 그게 자기가 살아있다는 증거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반대로 하면 돼요. “주님, 저는 주님 안 믿습니다.” 주님을 안 믿으면 어떤 좋은 점이 있느냐 하면, 주님 때문에 고민할 필요가 없어요. 

  

진짜 아멘 나와야 돼요. 왜? 주님은 충만 가운데 충만이기 때문에. 주께서 하고자 하는 자를 말씀대로 그대로 만들어지거든요. 디도하고 사도바울하고 언제부터 알았다고 친구합니까? 술친구입니까? 그런 것 없어요. 본문 23절에 “디도로 말하면 나의 동무요 너희를 위한 나의 동역자요 우리 형제들로 말하면 여러 교회의 사자들이요” 그 다음에 “그리스도의 영광이니라.” 

  

“그리스도 보고 싶어? 디도를 봐라.” 그 말이지요. “디도를 봐라. 둘이 서로 친구도 아닌데 친구가 되었어.” 디도도 주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고, 나도 주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식으로 사시면 되는 거예요.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자꾸 신경 쓰면 그것은 거짓말 하고 있는 겁니다. 

  

아무것도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살면 되는데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을 함으로서 내가 뭔가 되었다고 자꾸 자기 내에 또 하나의 주체를 만들어내는 겁니다. 삼손이 들릴라를 좋아해요. 오늘 이걸로 설교를 끝내게 되어서 참 감사한데요. 어떤 여자가 좋잖아요. ‘안 좋아야 돼. 안 돼. 나는 그 여자 안 볼 거야.’ 이러다가 전봇대에 받히거나 맨홀에 빠지지 말고. 

  

좋으라고 만들어진 거예요. 바람 다 피우겠다. 좋은 것을 안 좋다고 하면 이것은 억압이에요. 억압이 되면 억업하는 내가 강한 주체가 됩니다. 그러면 정신병 된다고요. 정신병이 뭐냐? 주께서 주신 것을 억지로 누르는 거예요. “믿습니다, 주여! 저는 착합니다. 선하게 해서 천국 가겠습니다. 사람이 달라져야 천당 가는데 내가 의롭게 되겠습니다.” 

  

여러분, 그거 다 엉터리에요. 사람은 죄 안 짓는 사람만이 죄의식을 갖고 있어요. 너무너무 예민해지는 거예요. 예민하면 마귀가 더, 더, 더, 착해야지, 더 착해야지. 이것은 마귀에 완전히 빠진 거예요. 누가 먹고 싶다. 잡수세요. 돈 없으면 돈 없게 하는 것은 할 수 없지요. 그러면 못 먹지만. 

  

누가 밉다. 미워하세요. 오늘 이게 복음이다. 미워하세요. 아프다. 이 땅에 아픔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태어난 거예요. 그거 주께서 아가페사랑 증거하기 위해서 사랑할 자는 사랑하고 미워할 자는 미워하게 하신 겁니다. 거기에 푹 빠지시고 주께서 손잡고 “자, 이게 에로스야. 이게 바로 필로스야. 이거 네가 살아 있다는 증거. 너 때문에 내가 죽었어.” 

  

예수님의 아가페사랑을 증명하기 위해서 반드시 우리는 세상을 좆는 우리가 꼭 필요한 거예요.
이게 주님의 충만이에요.
주님의 깨끗한 사랑만 있는 것이 충만이 아니고 죄인들을 다양성 있게 깔아놓고
그 어떤 죄든 구별하지 않고 차별하지 않고 주께서 자기의 피를 거기에 집어넣고
그 피만 드러내기 위해서 주께서 충만, 

특히 교회가 충만의 머리거든요,교회를 봐라,
주님은 지금도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오늘날 우리에게 알려주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정말 우리가 그동안 뭐하고 살았습니까? 무조건 나 위주로, 나밖에 모르는, 줄 것 주고 받을 것 받으면 그것이 요령있는 인생인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웬 은혜인지 십자가에 죽었다는 그 소식이 들릴 때, 이미 그 소식이 우리 안까지 파급될 때 주여, 우리는 주 앞에 이미 죄인된 것을 오히려 감사하면서 찬미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