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3강-고후 9장 6-9절(넘치는 착한일)17070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후서 9장 6-9절입니다. 신약성경 294페이지입니다.
고린도후서 9:6-9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한바 저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오늘 본문에 보면 이 고린도교회가 헌금, 연보를 했어요. 그런데 연보를 누구에게 했는가? 연보를 사도한테 했습니다. 고린도교회가 고린도교회한테 연보하지 않았다는 말이에요. 참 중요한 문제지요. 헌금을 거두는 수납기관이 헌금을 사용하지를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고린도교회는 교회 잘되라고 헌금 하지를 않는다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제일 중요한 문제는 헌금을 거두는 주체가 누구냐? 누가 헌금을 시켰고 누가 거두느냐 그 말입니다. 누가 거두고 그걸 누구한테 내느냐 하는 겁니다. 정답부터 말씀드릴게요. 주님이 헌금하라고 해서, 그 다음 더 중요한 문제, 주님께서 그것을 사용하시고자 한 겁니다.
주님이 용돈이 부족해서 그런가? 그게 아니고 주님은 이 땅에 하실 일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돈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헌금을 거두는 그 과정이 복음전파용도가 되는 겁니다. 돈이 있어야 선교가 되는 것이 아니고 돈을 거둘 수 있는 사건이나 사태를 없는데서 일부러 만들어내서 주님이 소위 주님을 믿는다는 사람에게 이렇게 묻는 겁니다.
“누구야 너!” 너 누구야, 너 신자 맞아, 라는 것을 묻는 계기로 삼는 거예요.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사람에게 헌금을 요청하지 않는다는 논리가 성립됩니다. 사람에게 헌금을 거두는 것이 아니에요. 사람에게 헌금을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기껏 해봐야 사람의 일밖에 못해요.
사람이 일에서 주의 일이 나오지를 않습니다. 주의 일을 할 수가 없어요. 성도라 하는 것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도라 하는 것은 언제 생기느냐 하면, 신약때 생기거든요. 신약시대에 와서야 성도가 있습니다. 그 성도는 어디서 생기느냐 하면, 이미 죽은 분에 의해서, 죽은 쪽에서 새로운 능력이 유입이 될 경우에만 인간이란 존재가 성도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죽음이라는 능력, 죽음이라는 동네가 어떤 동네인가 하면, 사람들이 안 믿겠다고 작심을 하고 죽음의 세계로 내쳐버린 그 동네거든요. 쉽게 말해서 인간은 뭔가 배제하는 것이 있는데 뭘 배제하는가? 예수님 같은 사고방식을 가진자는 인간이 천성적으로 배제하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 같은 사고방식, 예수님 같은 생각을 가진 인간을 모든 인간은 태어났다 하면, 얼마 전에 태어난 외손자를 비롯해서 다 마찬가지인데, 모든 인간은 예수님과 같은 사고방식에 대해서 극구 밀치게 되어 있어요. 그렇게 해서 밀친 그 극한이 뭐냐? 십자가죽음이었습니다.
따라서 어떤 인간도 구원받겠다고 자진해서 자기가 밀친 그 세계에 다가설 수 있는 의지를 갖고 있는 인간은 없습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은 구원 없습니다. 인간이 구원받겠다 하는 것은 마귀의 장난이고 마귀가 인간에 대해서 허풍을 집어넣는 거예요. 판타지를 집어넣었어요. 인간에게는 구원이라는 것이 애초부터 없어요.
모든 교회는 전부 거짓말하는 사람들이 모인 거예요. 교회 자체가 사기집단이에요. 구원이라는 것이 없어요. 구원은 언제 있느냐 하면, 죽었던 쪽에서 능력을 줘야 비로소, 내가 뭐가 잘못되었구나, 눈에 보이는 세상이 다가 아니구나, 우리가 쓸데없다고 밀친 예수님 쪽에서 능력이 올 줄이야, 이것은 생각도 못한 것, 상상도 못한 겁니다.
이 세상에 종교가 부족합니까? 조로아스터교, 힌두교, 이슬람교, 얼마나 많은 종교가 있습니까? 골라먹는 재미가 있어요. 필요한대로 골라먹는 재미가 있습니다. 내가 죽어서 좋은데, 천국가려면 나에게 맞는 종교를 선택할 수가 있어요. 그러나 거기에는 천국은 없습니다. 어떤 종교에도 천국은 없습니다.
천국은 인간이 장악할 수가 없어요. 인간의 타고난 본성이 그리스도를 추방하게 되어 있는 본성이기 때문에 어떤 단체든, 어떤 교회든, 어떤 교단이든, 어떤 기독교든, 어떤 것도 예수님을 붙잡을 수 있는, 유지될 수 있는 힘과 능력은 인간에게 없습니다. 오히려 반대지요.
복음 전했다 하면 쫓겨나오고, 복음 전했다 하면 쫓겨나오고, 그것이 바로 복음의 흑역사입니다. 어느 누구도 구원을 받을 수 없음, 그 시대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것을 두고 마지막 때라고 이야기합니다. 그것을 종말이라고 해요. 성경에서 그렇게 나와요. 마지막 때, 종말에 오순절 성령, 예수님의 마음이 자기가 택한 자에게 다가옴으로 말미암아 영생주기로 작정된 자에게만 성령이 오게 되어 있고 그들만 그리스도의 나라에 갈 수 있게 된 겁니다.
그래서 아무리 구원받고자 해도 주도권은 우리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우리 자신에게 주도권이 없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받는다면 세상에 이런 특혜는 없습니다. 이런 빽도 없어요.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을 받았습니다. 최고의 선물입니다. 행운도 그런 큰 행운이 없습니다.
이게 얼마나 큰 행운이었기에 사도나 초대교인들은 목숨도 아깝지 않고 다 털어 냈어요. 가져가, 가져가, 하는 식으로. 얼마나 로또가 얼마나 대단한 로또였으면, 그까짓거 대충 인생 다 살았어요. 다 버려도 괜찮았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주님의 붙잡힌 바 되어서 살아간 사람들입니다.
이 연보, 인간이 할 수 없는 이 연보의 특징이 뭐냐? 8절에 나옵니다.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미 연보의 주체자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연보의 특징이 뭐냐? “너희에게 넘치게”한다는 거예요. 카드 한도액이 없습니다. 끝도 없이 하게 하세요.
인간세상이라 하는 것은 일방적으로 주는 것이 아니에요. 줄 때는 반드시 돌아올 것을 계산하는 겁니다. 주는 것도 한도가 있어요. 어디까지는 내놓고 어디까지는 그만, 이렇게 한도가 있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넘치게 한다는 것, 그릇은 용량이 있는데 그게 넘쳐버린 거예요.
넘치게 하는 것, 그릇 이상으로 넘친다는 이런 사도바울의 복음 전하는 방식은 로마서 5장에도 나와 있어요. 로마서 5장에서 하나님의 의를 설명할 때 그대로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주어질 때 단순히 우리의 죄 지은 것을 용서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마지막 때 주시는 용서나 은혜가 아니라는 거예요.
나는 죄 지었는데 이 죄를 어떻게 할꼬, 주께서 용서하시는구나, 그렇게 되면 이것은 죄 지은 것만 용서가 돼요. 그런데 하나님의 의는 로마서 5장에서 그렇게 하지 않고 넘친다는 거예요. 죄지은 곳에 은혜가 넘치느니라.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수돗물 틀어놓고 양동이에 물 받는데 딴 생각 한다고 하다 그만 잊어버렸어요. 나중에 보니까 이 가뭄에 미안스럽지만 양동이에 수돗물이 콸콸콸, 넘쳤어요. 나는 4백리터를 받기로 했는데 이것은 4천, 4만, 한도 끝도 없이 계속 넘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뭐냐? 넘치는 은혜가 발산되는 하나의 그릇처럼 이 마지막 때에 주께서 자기 택한 백성의 신체를 사용하시는 거예요. 죄 지었는데 이제 죄 없다는 이 정도로 그치면 안돼요. 내가 원하지도 않은 이 하나님의 의가 왜 자꾸 나에게 흘러넘치지, 라는 식으로 나와야 됩니다.
요즘 질소과자라는 것이 나왔어요. 과자에 질소가스를 집어넣으니까 먹을 때 여기서 김이 막 새나오는데 어떻게 나오는가? 넘치게 나오는 거예요. 콧구멍으로, 입으로. 성도의 기능은 넘치는 은혜가, 하나님의 넘치는 의가 계속해서 나오는 거예요. 주님, 어제는 죄를 지었으니 용서하세요, 이런 차원이 아니에요.
천주교에서 1년에 몇 차례씩 정기적으로 신부에게 가야 됩니다. 죄를 고하고 사하는 의식이지요. 고해성사라고 해서 그걸 합니다. 신부가 삐딱하게 의자에 앉아서 처방전을 내리지요. 성경 읽으시고, 주기도문 30번 외우시고, 다음손님, 이렇게 하는데 그런 고해성사를 천주교에서 하는 이유는 옛날에 생각했던 본인을 자기가 계속 붙들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나의 주도권이 여전히 나에게 있습니다. 내가 나를 관리해서 주님 나라에 들어가겠다는 시도를 하는 거예요. 이것은 성경의 기본도 안 된 거예요. 마지막 때에 어떤 성질로 구원한다는 것도 전혀 모르는 겁니다. 천주교가 거기에 대해서 관심도 없고 전혀 모르는 이유는 천주교의 목적은 사람 꾀는데 있어요.
교회도 마찬가지지만, 말씀, 복음과 진리에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을 얼마나 꾀어서 교회를 운영할 수 있는 자금을 확보하느냐, 거기에 있는 겁니다. 그래서 십일조가 천주교에서부터 나왔어요. 그 때는 개신교라는 것도 없지만. 십일조 내는 것은 기본이고 감사헌금도 추가해야 되고 성당 짓는데 돈 내야 되고.
성당 짓는데 돈이 없다면 나중에 죽고 난 뒤에 부동산을 성당에 헌납해야 되고. 부동산이 역시 돈이 되잖아요. 그거 가지고 파티마 같은 병원사업도 하고 중고등학교 같은 교육사업도 하고. 그래서 돈의 쓰임새가 성당으로 돌아오잖아요. 성당 잘되기 위해서 돈을 갹출하고 고린도후서의 8장, 9장을 얼마나 써먹었겠어요.
신부나 목사의 자기 성경책 이 대목에 때가 많이 묻었을걸요. 인색함으로 하지 말고. “특히 오늘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사례를 위해서 오늘 특별히 헌금해서 부자 된 장로님을 모시겠습니다.” 2부 순서로 패키지 쇼를 하는 거지요.
전도사가 앞에 나와서 두드리면서 찬양하고. 그 다음에 목사는 설교하고 진짜 본론으로서는, 한때 교회를 핍박했다가 이제는 돌아와서 헌금 많이 했더니만 갑자기 30배나 보상받았다는 장로를 불러가지고 하는 소리가 있지요.
“여러분이 못사는 이유가 뭐냐? 여러분의 이가 아직까지 금이빨이 되지 못한 이유가 뭐냐? 적게 헌금했기에 여러분은 믿음, 그것도 어린애 같은 믿음이 없어서, 그냥 믿으면 되는데 그 믿음이 없어서 30배, 60배, 준다는 그 보너스도 못타고. 그깟 포트폴리오 펀드 넣어봐야 몇 프로 이득 본다고. 그런 펀드 하지 말고 교회에 헌금하는 것이 더 이윤이 많이 남는, 투자효과가 있습니다. 안 믿지만 일단은 해보시기 바랍니다.”
여기에 안 말려들어갈 인간이 있겠어요? 다 말려들어가도록 주께서 조치를 하신 거예요. 왜냐하면 인간이 원하는 것은 자기안정화작업이에요. 태어날 때부터 인간은 자기안정화작업에 나섭니다. 내가 근심걱정 없이 내 몸을 유지할 수 있는 필요한 자금은 어느 정도 되어야 되고, 주택은 어느 정도 되어야 되고, 생활비는 어느 정도 되어야 되고, 이런 안정화작업을 합니다.
모든 인간의 행동은 이 안정화작업과 관련되어 있어요.
이것은 생물학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자연에서 주어지는 모든 에너지, 태양에너지, 열에너지가
어떻게 하나는 해바라기로, 하나는 인간으로, 또는 코끼리로, 코스모스로 바뀌는가?
그것은 내부적으로, 인간은 여기까지만 인간, 면역체계가 있어서
그런 식으로 인간이 된다고 생물학자들은 이야기하거든요.
왜 그렇게 되는가 하면 그 사람들은 몰라요. 그 사람들은 아무것도 몰라요. 그래서 각자 개체가 형성된다는 거예요. 과학이나 이 세상의 목적은 뭐냐? 내 것을 어떻게 추스르느냐, 그래서 안정화시키느냐, 거기에 있습니다. 그게 불안불안 하니까 교회 나오는 거예요. 자기안정화작업에 차질이 일어나니까 든든한 분을 믿겠다는 거예요.
든든한 분, 이걸 두자로 하면 예수, 세자로 하면 하나님이잖아요. 하나님 믿는 이유가 자기안정화작업 때문에 믿는 겁니다. 든든한데다가 자기인생 보험하나 들어놓고 미래까지 걸쳐놓게 되면 자기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없어지고 자기를 안정되게 챙길 수 있다는 겁니다.
안 가봤습니다만 남산에 가면 사랑하는 연인들이 자물쇠를 채우는 곳이 있대요. 그런데 자물쇠 채우는 그 난간에 바람에 홀라당 다 날라 가게 된다면, 거기 채워졌던 자물쇠 한 2만개가 태풍에 다 날라 가버린다면, 우리 사랑 계속 이어져야 돼, 라고 했던 그 사랑 다 깨집니까?
사람이 단단한 곳에 자기 이름을 새기는 이유가 뭐예요? 자기안정화작업이에요. 나는 못 믿겠고 내가 기댈 수 있는 든든한 곳에다가 자기 몸을 두는 거예요. 그게 성당에, 교회에 등록하는 겁니다. 옛날에 우리 조상들이 기독교 오기 전에 절에 자기이름 올리고 생전 절에 한 번도 가보지도 않은 자기 자식 열 다 올려요.
자식은 절 한 번 구경도 못했는데 불교신자 다 되는 겁니다. 우리 할머니가 그랬어요. 저는 절에 정기적으로 안 갔어요. 그런데 절에 가면 내 이름 다 올라가 있어요. 일방적으로 다 올려놨어요. 부처님의 은덕으로 남산위에 노루새끼처럼 잘 뛰어놀라고. 우리 할머니가 음력 2월이 되면 늘 비는 것이 있었어요.
새벽 네 시에 일어나서 기도하는 그 기도의 그 멘트, 제가 나이 먹어가면서 그 시간에 뭐하는가 싶어서 보게 되면 그 멘트가 똑같아요. 비는 것도 손을 어긋맞게 빌어요. 그저 내 자식들 남산위의 노루새끼처럼……, 그래서 남산을 구경하고 싶었어요. 남산에 노루새끼가 뛰어노는지.
남산위에 노루새끼처럼 뛰어놀게 해주시고, 앞으로 하는 사업이 잘 되게 해주시고……. 종이를 태우면 그 태운 종이가 중력에 반해서 신기하게도 위로 막 올라가요. 열기에 의해서 올라가는 거지요. 그게 교회 왔다. 교회 오면 그게 사라집니까? 자기안정화작업이 사라져요? 그 올리는 기도멘트가 성경의 단어를 집어넣어서 기독교멘트로 바뀌었을 뿐이지 밑에 있는 마음가짐은 똑같아요. 구약의 산당, 우상이 그런 거예요.
그걸 외장이라 합니다. 프랑스말로 미장센이라고 하는데 바깥을 계속 꾸미는 거예요. 안에는 자기안정화작업이고 바깥을 계속 꾸미는 거예요. 목사는 교인들이 그런 요구를 가지고 왔다는 것을 알고 교회는 나름대로 이득을 챙기기 위해서 뭘 하느냐 하면, 명령과 지시를 율법의 이름으로 계속 쏴대는 거예요.
“고린도후서 9장에 보세요. 여러분들이 부자되지 못하고 집구석이 망해가는 이유는 헌금을 해도 인색하게 했고 아끼면서 했기에 그렇습니다.” 이 말자체가 지시와 명령으로 주어지지요. 교인들이 오게 되면, 우리교회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만 매미채 헌금바구니가 죽 다니게 되면 컨닝해서 슬쩍슬쩍 본다고요.
얼마 넣는지 본다는 말이지요. 거기에 맞추어서 재수 없이 잘못 잡으면 5만 원짜리 잡히니까 교회 갈 때는 5만 원짜리는 빼놓고 가야 돼요. 천 원짜리로 바꿔서 아무거나 집어도 천 원짜리가 걸리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서 매미채에 천원을 내려놓는다는 말이지요.
그게 뭐냐 하면, 보는 눈이 있다는 겁니다. 인간은 보는 눈 때문에 살아요. 평생을 보는 눈이 있다. 내가 이런 행동을 하면 안 돼, 그 보는 눈이 있거든요. 보는 눈이 있다는 이 말을 쉽게 한다면, 담양에 대나무 숲이 있습니다. 그 대나무 하나하나가 율법이라 봅시다. 하나의 법이고 지시고 규칙이고 교회법이라고 봅시다.
교회 오게 되면 대나무 숲이 좍 있어요. 지켜야 될 법이. 그 대나무 숲이 널려 있으면 우리는 자기 몸을 가지고 그 자리에 등장합니다. 내 마음에 내 신체를 경계선으로 해서 바깥에는 법이라는 대나무 숲이 있고 내 안에는 그것을 모방한 것이 내 안에 그대로 들어오게 되면 내 안에 율법적인 펜스, 장벽이 마련되어 있어요.
그걸 양심이라고 합니다. 바깥에만 보는 눈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 바깥에서 보던 눈이 내 안까지 들어와 버리지요. 그러면 내가 누구하고 의논하느냐? 나하고 의논하는 거예요. 이게 해도 되는 일인지, 안해야 되는 일인지. 성경 보면서 알았던 그 모든 법들이 율법화 되어서 자기 안에서 계속 지시를 하는 겁니다.
고린도후서 9장에 적게 심은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은 자는 많이 거둔다는 것이 이미 내 안에 장착되어 있으면, 펀드 넣거나 주식투자 했는데 앞으로 한 달 내에 잘 안 오르거든 이것은 분명히 내가 인식함으로 하나님 앞에 헌금한 것에 대해서 벌을 받고 있다고 스스로 자인하는 과정, 절차가 자기 안에 작동되고 있는 거예요.
마귀 자식이 달리 있나요. 이게 바로 마귀자식이지요. 분명히 사도바울은 율법에서 너희를 자유케 했다고 언급했는데 그걸 우리가 싫어해요. 율법에서 자유하는 것을 우리가 싫어한다니까요. 구원자체를 우리가 자꾸 싫어해요.
왜냐하면 내가 주도권을 가지고 나의 안정화가 된 그 결실물, 내가 고생하고 내가 자기에 대해서 정돈하고 지키고 양심 있게 살아서, 내가 공들여서 만든 나의 작품을 최후에 경배하고 싶기 때문에. 나의 종교의 유일한 대상, 괜찮게 된 나 자신을 쳐다보는 그것으로 평생 사는 보람을 느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런 말씀들이 멋진 거예요. 내가 섬기고 싶은 그 나를 만들어내는데 좋은 재료, 소재가 되는 겁니다. 그걸 가지고 어려운 말로 자아이상, 이상자아라 하는데 쉽게 해서 가상적인 자아라, 자아를 가상적으로 만드는 겁니다.
이런 태도, 자기 챙기기, 자기안정화기 때문에 이런 태도를 가지고 교히 오나 누굴 만나게 되면 그 사람에 대해서 어떻게 나오는가? 당신을 좋아합니다, 사랑합니다, 이야기는 하지요. 사실은 그것은 다 거짓말이에요. 사람은 상대를 사랑하지 않고 혹시나 상대가운데 내가 사랑하고 싶은 것이 발견될 까 탐색중입니다.
그것이 알고 싶다. 이제는 알려드릴게요. 연애를 하든지 부부가 되었든지 누굴 만나든지 간에 계속 상대를 헤집고 탐색해요. 내가 보는 눈이 있어, 하는 식으로 길들여져 있는 내 안에, 내가 이렇게 될 때 나는 흐뭇한 가상자아가 된다. 그런데 여기에 필요한 재료를 혹시 당신은 갖고 있습니까, 라고 헤집고 찾는 작업을 갖고 ‘대화한다.’라고 해요. 말을 건넨다.
“혹시 내가 원하는 것을 당신이 갖고 있어요?” 이런 뜻이에요. 있다고 생각하고 했는데 없어요. “갈라서. 우리 헤어져.” 내가 원하는 것, 내가 사랑하고 싶은 것이 있다고 분명히 했는데 이것은 착각이었어요. 이것이 없으면 우리 갈라서, 이렇게 되는 거예요. 자기안정화작업에 전혀 도움이 안 되니까.
모든 관계가 이렇습니다. 제가 이야기를 여기서 끝내버리면 이것은 위기에요. 큰일 났어요. 구원은커녕 보는 눈에 너무 시달려서 피곤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실 때는 그것을 감안하고 주십니다. 율법은 우리를 구타하는 겁니다. 우리는 구타당하는 인생입니다. 계속 구타를 해요.
내게 강 같은 평화라고요? 우리는 공사 중입니다. 시끄러워요. 강 같은 평화 아닙니다. 한시도 우리 마음이 평화할 때가 없어요. 이것을 주님께서 마지막 때에 백성도 아닌, 스스로 백성 될 수 없는 인간을 십자가 죽음 저쪽 편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성령으로 찾아올 때는 구축함 몇 대, 비행기 몇 대, 항모 몇 대 이런 식으로 편대를 이뤄서 오는데 그 편대 중에 율법이 들어 있어요. 성령께서 율법을 가지고 우리에게 쳐들어오지요. 쳐들어오게 되면 우리가 평소에 남과 대화할 때는, “내가 이런 것을 원하는데 당신이 혹시 내가 원하는 것을 갖고 있어요? 갖고 있다면 내것을 줄테니 당신이 갖고 있는 것을 교환합시다.” 이런 식으로 인간관계가 계속 되거든요.
내가 월급 받아 당신 밥 먹여 줄 테니까 당신은 빨래하고 밥은 책임져 달라는 암묵적인 계약이 형성된 것이 부부 아닙니까? 그런데 여자가 돈을 번다. 그러면 계약이 또 달라져요. 나도 돈 버니 당신도 애 키우는데 한몫해야 되고 설거지는 당번정해서 하고 아침은 없고, 저녁에 늦더라도 딴 소리 하지 말고, 출장 가더라도 전화하지 말고, 나도 내 할 일이 있다.
알아서 정치적 타협을 하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서로가 서로의 안정화작업을 거쳐버립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이야기는 성도 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사람이 말을 건네지 않는다는 것은 그 사람은 있어도 나에게는 없는 존재에요. 나한테 필요 없으면 그것은 그냥 없는 존재에요.
그래서 부부가 위기 때는 말을 안 한다는 겁니다. 싸울 때는 그나마도 괜찮은 거예요. 아직 가능성이 있는 거예요. 싸움을 할 때는, 내가 원하는 것을 내 놓으라는 말이야, 이런 뜻이거든요. 그런데 말을 그쳤다는 것은, 이제 당신은 나에게 없는 존재에요. 쓸데없이 말만 해도 나만 피곤한 말할 필요도 없어요.
여자들 화가 나면 입을 다물잖아요. 남자 입장에서는 그 방의 온도가 영하 10도로 내려갑니다. 오뉴월에도 영하 10도까지 내려가서 서리가 막 낍니다. 써늘해지는 느낌이죠. 주님께서 율법을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와서 말을 걸 때는 이미 율법……, 잘 듣고 계시지만 오늘 설교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이니 잘 들으세요.
율법을 제안한 그분이 율법의 위반자가 받는 처벌을 율법완성으로 내 놓습니다. 어떤 조건을 제안할 때 조건의 제안자가 제일먼저 그 조건의 위반자로서 우리 앞에 등장하는 그것이 그 조건의 최후적인 완성품이고 완성된 모습이에요.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지요.
안식일을 지키라. 율법 십계명의 제안자가 하나님이지요. 신명기 28장에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을 받고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는 저주받아요. 우리는 생각하기를 율법의 제안자, 하나님이 율법을 제안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 율법의 실현자로서 복된 모습으로 올 것이라고 다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막상 율법의 제안자가 우리 앞에 등장할 때는 율법에 의해서 가장 극단적인 위반자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는 겁니다. 이게,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 율법의 위반의 대가가 뭐냐? 저주에요. 하나님께 버림받는 겁니다. 예수님은 버림받는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셨다는 것은 어느 누구도 이 세상에서 율법을 지킬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자기안정화작업은 해봤자 다 실패고 엉터리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의 완성으로서의 십자가 지도록 하시고 사흘 만에 살려냄으로서 율법 외에 다른 방식으로 살려내는데 그렇다면 율법 외에 다른 의가 양동이에 넘치려면 주님에게 안겨진 그 모든 과정을 백성에게 반복시켜 버립니다.
반복시키는 그 방법이 뭐냐? 인간 대 인간으로 대화할 때는 인간들 서로가 살아 있어야 돼요. 나라는 개체가 살아 있고 너라는 개체가 살아 있지만 주님께서 율법으로 할 때는 주님께서 우리를 갈아버립니다. 완전히 조각조각 내서 쪼가리로 내버려요. 우리 자신을 말씀으로 다 째버립니다.
말씀으로 다 찢어버리면 하나하나가 마치 뭐와 같으냐? 아름다운 예술처럼 바둑을 두잖아요. 친구하고 바둑을 두는데 갑자기 아버지가 와서, 공부도 안하고 바둑 둔다고 바둑판을 확 엎어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돌들의 규칙들, 안정화작업이 다 깨져버리고 낱개의 바둑알로 다 찢어지겠지요.
갈아버리는 겁니다. 산업폐기물 처리할 때 플라스틱 쓰레기를 집어넣으면 톱날이 있어서 아주 작은 알갱이로 분해돼요. 말씀으로 다 분해되어 버립니다. 그러면 우리는 나라는 입장에서 상대방에게 다가설 수 없습니다. 이미 안정화작업이 깨졌기 때문에 나는 말씀의 조각으로 변했습니다.
조각조각이 된 그 말씀들을 예수님의 복음이라는 새언약의 원칙에 의해서 다시 모아버려요. 이걸 조합해버리는 과정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말씀에 의해서 나라는 주체가 다 찢어지고 흩어진 상태에서 주의 복음의 능력이 와서 흩어져 있는 것을 규합하고 융합해서 다시 모아버리면 그 모으는 과정에서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넘치는 착한 일이 나와 버리는 거예요. 인색함이 없는 일이 벌어지고 아낌없이 내놓는 현상들이 일어나는 겁니다. 눈치를 보니 전혀 못 알아듣는 것 같은 눈치인데 이렇습니다. 잘게 갈아버린 모든 조각들이 있잖아요. 그러면 이 조각들은 복음의 말씀에 의해서, 주님의 말씀에 의해서 다 떨어져 있는 거예요.
떨어져 있는 것이 스스로 지남철처럼 달라붙을 수는 없어요. 여기에 뭔가 개입이 되어야 하는데 그 연결 짓는 관계가 뭐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 그 주님의 행위를 반복시키면서 그걸 연결시켜 버립니다. 연결시키는 그 힘을 제공하는 주체자가 바로 주님이에요. 우리가 아니고요.
마가복음 12장 41절부터 보면 “예수께서 연보 궤를 대하여 앉으사 무리의 연보 궤에 돈 넣는 것을 보실쌔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 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희는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셨더라.”
이게 유명한 구절이거든요. 고드란트나 렙돈, 당시에 사용하던 작은 단위의 동전, 최소의 동전을 넣었는데 그게 그 과부의 생활비 전부였다는 그 말이지요. 여기서 소설을 써서 이야기를 더 이어봅시다. 나중에 누가 후원을 해서 이 과부의 재산이 77억쯤 되는 부자가 되었다 칩시다. 그러면 그 77억을 다 헌금으로 내겠습니까, 안내겠습니까? 안내지요. 안낸다 그 말입니다.
이 가난한 과부는 가난하게 되어야 할 이유가 무엇이고 과부가 되어야 할 이유가 뭐냐? 하필이면 예수님 앞에서 헌금 내는 그 것을 찰칵 포착당하는 이유가 무엇이며, 하필 예수님이 있을 때 모든 것을 넣는 이유가 뭐냐? 이것이 앞으로 예수님이 마지막 때 자기 백성을 자기 쪽으로 데려오기 위한 모든 과정을 앞당겨서 선행적으로 역할을 맡은 일종의 탤런트로서 이 과부가 등장한 거예요.
만약에 이 과부가 “주님, 제가 알아서 제 의지로서 헌금을 다 했습니다.” 한다면 그 과부는 지옥 갑니다. 어느 선에서 인색한 것이고 인색하지 않은 것이 되느냐 하는 그 기준이 내 안에 서버리면 내 안에 율법적인 펜스가 또 쳐져버린 거예요.
우리교회를 예로 듭시다. 우리 교회는 전혀 인색하지 않은 사람만 모였다고 칩시다. 그런데 새로운 교인이 와서 자기도 복음 안답시고 인색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우리 가운데 어느 사람을 기준으로 잡아서 어디서부터는 인색한 것이고 어디서부터 인색하지 않은 것이 되는지를 다른 사람을 살펴야 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그것은 교회 아니지요. 이상한 곳이지요. 인색하다는 것을 외부사람이 결정하면 안돼요. 보는 눈이 결정하면 안 된다고요. 그리고 본인이 결정하면 안돼요. 그러면 누가 결정해야 되는가? 정말 그 사람이 성령 받았다면 성령께서 헌금하라고 하신 이것이 주님이 헌금하라고 했기에 그것이 생활비의 천분의 1이든 만분의 1이든, 심지어 이번 달 10억을 벌었는데 5백 원을 헌금하든 그것은 인색함이 아닌 것이 되는 거예요.
그거 많이 심은 거예요. 5백 원. 그래서 많이 했다, 인색함이 없다는 것을 누가 아느냐? 본인이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인이 결정해버리면 이미 성도 아니에요. 자기 안에 율법이 있어요. 그러나 그 안에 주님이 있으면 주께서 나로 하여금 5백 원을 하게 하셨다고 한다면 그 순간이 오늘 말씀의 완성입니다.
그게 많이 낸 거예요. 5백 원. 얼마나 많이 심었는지 몰라요. 전혀 인색함이 없습니다. 결국은 5백 원 내놓고 많이 심은 것이고 그것이 인색함이 없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네가 집에 가서 하는 돈 씀씀이가 네가 결정했는가, 아니면 주님이 너를 통해서 결정했는가?
주님이 어떻게 결정하는가? 말씀을 통해서 집에 가 있는 우리를 산산조각으로 말씀으로 찢어버립니다. 플라스틱 조각처럼 잘게 부수어버리고 잘게 부수는 작업과 동시에 잘게 부순 그것을 말씀의 덩어리로서, 복음으로 새롭게 태어난 피조물로서 다시 결합되게 만들어서 행동을 하는 겁니다. 못 믿겠지요?
콩나물을 사서 다듬는다 합시다. 콩나물 다듬을 때, 내가 이거 다듬어서 오늘 가족들과 먹어야지, 하는데 아차 이게 아니구나. 주께서 콩나물 사게 하시고, 이걸 다듬게 하셨구나, 할 때 고무장갑 끼고 콩나물을 다듬는 나는 그 뒤의 주님께서 고무장갑부터 그 모든 것을 주께서 조립해서 콩나물을 다듬게 하시는 거예요.
주께서 주체가 되어서 콩나물을 다듬게 하신 겁니다. 그래서 남편이 “야, 오늘 콩나물 맛있다.” 할 때 “주께서 맛있게 하셨습니다.”라고 속으로만 해야 돼요. 왜? 같은 인간개체에서는 복음의 그 말을 이해를 못해요. 그런데 그 남편이 콩나물 먹다가 하는 소리가 “여보, 내가 죄를 짓든 안 짓든 관계없이 나는 죄인인 것을 깨달았어.”라고 할 때 “오늘 콩나물 맛있지, 그치? 주께서 맛있게 하신거야.”
그 때 톡, 하고 복음이 담긴 콩나물 이야기가 나와야 되는 겁니다. 아무 때나 개한테 진주 던지면 안 되는 겁니다. 제가 말하는 절차가 더 힘들어요. 왜 그렇게 해야 되느냐 하면, 주께서 공생애를 살 때 항상 인간은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의미 없고 무가치한 존재가 되거든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율법을 집어넣고 우리를 무가치 하게 만들어서 플라스틱 폐기물 같이 완전히 잘게 부수는 작업과 동시에 주님께서 다 이루었다고 하는 그 하나님의 의로, 죄 된 그 조각들을 하나님의 의라는 이름으로 다시 뭉쳐주는 작업을 병행하거든요.
제가 연습문제를 내겠어요. “오늘 교회 나오셨네요.” “교회 나오는 것이 의미 없기에 저는 오늘 넘치도록 교회 나올 거예요. 내가 교회 나왔다고 해봐야 이것은 의미 없는 것이기 때문에 저는 아낌없이 교회 나올 수 있습니다.” 이렇게 교회 나오는 것을 예제로 할 수 있어요.
그 다음에 심화문제를 던집니다. “헌금 하셨네요.” 이거 여러분이 풀어야 돼요. “헌금을 해 봤자 헌금이 의미 없기에 저는 아낌없이 헌금합니다. 5백 원.” 내가 헌금하는 나를 주체자로 나의 안정화작업, ‘주님 저보고 탓하지 마세요. 저 헌금했습니다. 재정적으로 너무 어렵게 하는 식으로 벌주지 마세요. 오늘도 헌금 했어요.’라는 자기안정화작업 때문에 주께서 십자가 지셨거든요.
따라서 이미 십자가로 구원을 시킨 사람에게는 이것 때문에 네가 구원이 안 되었다는 그 소식을 저쪽에서 넘어오면서 우리에게 알려주기 때문에 아, 내가 주도가 되어서 헌금하는 것이 의미가 없어서 나는 아낌없이 마음껏 넘치게 헌금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는 겁니다.
왜? 헌금 자체가 의미가 없기 때문에. 의미 없는 것을 내가 함으로서 그 가운데서 내가 의미 없다는 것을 십자가 앞에서 날마다 새록새록 다시 재정립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나는 내가 다듬는 내가 아니라 주의 복음, 십자가능력이 나를 휘감아서 나로 하여금 율법에 얽매이지 않고 이제는 은혜가 넘치는, 단순히 죄용서 받는 정도가 아니고 주님의 천국가기에 너무나 합당한, 정말 합당한 넘치는 의가 마구 발생되는 여러분의 신체로서 다 같이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주께서 십자가 졌다는 것과 헌금한다는 것과 연계되기를 원합니다. 십자가 졌으니까, 내가 은혜 받았으니까 내가 하는 헌금이 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주께서 하신 그 어떤 일도 주께만 영광이 되고 우리에게 돌아오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