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고린도후서40강-평균(고후8;9-15) 170618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6. 20. 06:37
2017-06-18 12:35:49조회 : 156         
   평균 170618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평균(고린도후서 8: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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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17-06-18 13:30 

평균 

2017년 6월 18일                    본문 말씀: 고린도후서 8:9-15 


(8: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8:10) 이 일에 내가 뜻만 보이노니 이것은 너희에게 유익함이라 너희가 일 년 전에 행하기를 먼저 시작할 뿐 아니라 원하기도 하였은즉 

(8:11) 이제는 행하기를 성취할지니 마음에 원하던 것과 같이 성취하되 있는 대로 하라 

(8:12)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을 받지 아니하시리라 

(8:13)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평균케 하려 함이니 

(8:14) 이제 너희의 유여한 것으로 저희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저희 유여한 것으로 너희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평균하게 하려 함이라 

(8:15) 기록한 것 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 

사람들은 평균되는 것을 싫어합니다. 평균으로 계속 유지하게 되면 사람 사는 보람이나 포부가 무산되기 때문입니다. 남보다 앞서고 튀는 것으로 상대적인 우월감을 느끼게 됩니다. 이런 재미없이 계속 살아간다는 것은 ‘지루함’이 주는 고문같은 것이라고 여기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경쟁에서 스릴을 느낍니다. 

이 세상이 경쟁으로 이어진다는 것내일에 대한 희망을 계속 만들어낸다는 것을 뜻합니다. 미래는 그냥 시간 간다고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박차고 나갈 능력자들에게 미래가 보장됩니다. 따라서 멈추지 않는 현재의 추진력은 평균되기 위함이 아니라 평균 안되기 위함입니다. 

현재는, 미래에 도달하지 못할 자들을 가려내어 도태시키는 작업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살아남은 강자만이 미래의 세계의 백성이 되는 겁니다. 바로 이런 생각들이 자기 중심의 평균성입니다. 자기를 중심으로, 자기를 향하여, 자신의 가치를 인정해주는 조건으로 펼쳐지는 세계를 사람들은 꾸준히 이어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의 의도하는 세계는 ‘평균의 세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평균’을 위해 오셨습니다. ‘평균’이란 곧 ‘균등’입니다. 예수님 앞에서, 예수님 중심으로 균등이요 평균입니다. 이 마지막 때에 마지막을 몰고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방문하셨습니다. ‘평균’의 중심으로 오셨습니다. 

그 중심은 이러합니다. ‘부요하심’에서 ‘가난하심’으로의 변동입니다. 우리는 그 과정에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가난하심’은 재산상의 가난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부요하심이 ‘재산상의 부유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요하심은 하늘의 찬란함으로 그득한 상태를 말합니다. 

이런 상태를 지상에서 유사하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은 기껏 ‘태양빛’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사람에게 ‘흙에 속한 형상’에서 ‘하늘에 속한 형상’으로 전환시켜주시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기대하시는 ‘평균’이란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더는 사적인 영속성에 집착하지 않는 겁니다. 세상의 평균이란 실은 인간들 각자 ‘자기 중심’의 평균입니다. 

즉 “아직도 내 것은 있다”는 식으로 귀결되는 평균입니다. 사과 5개와 사과 3개의 평균은 (5+3)÷2=4 되는 식으로 계산하는 평균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앞에서의 평균이란 모두들 ‘나의 것 고수’하기가 파괴되는 식의 평균입니다. 마치 아이돌 그룹 콘서트 장에서, 학교 성적이나 가정 환경이나 건강 장애 여부와 상관없이 “오빠!”를 연호하는 소녀팬들과 같습니다. 

선망하는 가수 앞에서 자아를 상실하는 상태입니다. 자아의 가치를 그 시간만큼 고집하지 않는 겁니다. 하지만 ‘평균’는 ‘땅에서 올라오는 평균’입니다. ‘위에서 내려오는 평균’은 먼저 예수님께서 제자 속에서 일구어내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가룟 유다’를 주목해야 합니다. 그는 끝까지 ‘사적 구원’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를 위한 예수를 원했던 겁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주님의 평균’을 설명하기 위해 출애굽기 16:17-20을 거론하십니다. “ 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기 식량대로 거두었더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 두지 말라 하였으나 그들이 모세의 말을 청종치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 이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애굽에서 빠져나온 자아가 그대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줄 알았습니다. 

도중에 그 자아가 바뀌어야 한다는 사실을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상대적으로 그들은 애굽나라를 이겼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곧 구원의 조건으로 충족될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바로 그 구원받았다는 그 몸 가지고 하나님께서 대한 원망을 유발시킵니다. 

물이 없는 것으로 그들을 인도했고, 양식이 없는 곳으로 인도했고, 고기가 없는 곳으로 인도했습니다. 하늘에 대한 원망은 자연적으로 나오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애굽과 비교해서 그들만의 평균을 생각했던 겁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생각한 평균을 알지를 못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몸들이 어떤 기능을 하는지 알아야 했습니다. 

원망밖에 할 수 없기에 원망이 나온다고 핑계는 대지만 그들, 이스라엘이 몰랐던 것은 약속의 땅이 그들이 알고 있는 세계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들이 사랑했던 그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 아니었던 겁니다. 인간의 사랑과 믿음과 소망은 ‘종말의 막’에 의해서 차단됩니다. 마지막 때에는 ‘새로운 평균’이 하늘에서 내려옵니다. 

이 새로운 평균은 인간이 스스로 자기를 판단하고, 성인군자가 되고, 도를 닦는 방식을 일체 인정하지 않습니다. 무엇은 되고 무엇은 아니되고를 인간이 결정하지 못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원망만 쏟아내는 기능이 작동되는 몸을 지니고 인간들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가룟 유다가 대표적 예입니다. 그는 말년에 스승을 팔아먹고 자신은 자살합니다. 자기 중심의 ‘평균’을 고집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모든 제자들이 다 그러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부활하셔서 그들을 다시 찾습니다. 이는 그들이 영생의 길로 들어서는 것은 예수님께서 친히 그들을 이끄셔야 할 문제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주님께서 장만해놓으신 그 길이 아니면 영생으로 통하지 못합니다. 주님은 십자가 앞으로 자기 사람을 데려가서 못박아 버리시는데 이것은 매일같이 반복합니다. 마치 광야에서 ‘원망 이후의 떡’인 만나를 매일같이 먹어야 하는 이치와 같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자기가 생각하는 ‘나 중심으로 펼쳐지는 평균된 세계관’을 버려야 합니다. 

다음과 같이 살아야 합니다.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2-13) 매일 주시는 일용할 양식은 곧 천국의 방향을 가리킵니다. 자기 자랑할게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돈으로 자기를 이해하는 방식말고 십자가 앞에서 자신을 세워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17-06-19 20:31 
241강-고후 8장 9-15절(평균)17061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후서 8장 9-15절입니다. 신약성경 293페이지입니다. 

  

고린도후서 8:9-1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이 일에 내가 뜻만 보이노니 이것은 너희에게 유익함이라 너희가 일 년 전에 행하기를 먼저 시작할 뿐 아니라 원하기도 하였은즉 이제는 행하기를 성취할찌니 마음에 원하던 것과 같이 성취하되 있는 대로 하라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을 받지 아니하시리라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평균케 하려 함이니 이제 너희의 유여한 것으로 저희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저희 유여한 것으로 너희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평균하게 하려 함이라 기록한것 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 

  

헌금을 이야기하면서 그 출발을 예수님부터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을 지나가시면서 남기신 것이 있어요. 어떤 인간도 주님 앞에 튈 수가 없다는 것, 독자적인 자기가치를 내세울 수가 없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여기서 두 번씩이나 나오는 평균됨이에요. 주님 앞에서 자기만의 가치를 따로 챙기지를 못한다, 라는 식으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보여주시고 그 다음에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고 다시 부활하셨거든요. 

  

부활하시고 난 뒤에 제자들에게 다시 찾아왔어요. 제자들에게 다시 찾아오시면서 하신 일이 뭐냐 하면, 예수님 본인이 걸어가셨던 그 길로 제자들을 이끄십니다. 인도하십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좁은 길로 가면 영생이고 넓은 길로 가면 지옥인데 어느 인간도 자진해서 좁은 길로 나설 사람이 없어요. 

  

말씀은 좁은 길로 가면 천국이고 넓은 길로 가면 지옥이라고 말씀만 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친히 부활해서 다시 열 두 제자에게 찾아오셔서 좁은 길로 가게 인도하십니다. 그 좁은 길이 무슨 길이냐 하면, 이미 주님이 닦아 놓은 길이에요. 주님 가신 길 그 길만이 좁은 길이에요. 

  

절에 가서 자학하듯이 하고 교회에 재산 다 바치고 혼자 외롭게 사는 것이 좁은 길이 아니에요. 좁은 길은, 내가 갈 수 없는 길입니다. 내가 갈 수 없는 길이 좁은 길이기 때문에 가지 마세요. 초반부터 기쁜 소식이 팍팍 쏟아집니다. 좁은 길 가지 마세요. 

  

본인이 알아서 가겠다는 그 좁은 길은 결국은 자기 가치가 녹녹하게 살아 있는 길이기 때문에 모든 영광을 본인이 회수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성인군자 되는 거예요. 도덕군자가 되는 겁니다. 주님이 인도하는 그 좁은 길을 본인이 가게 되면 본인이 어떤 생각을 하느냐 하면, 이것은 하지 말아야 되고 이것은 해도 괜찮고, 본인 스스로 그렇게 결정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은 도닦는 것이지요. 그것은 또 하나의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입니다. 전에는 틀렸고 오늘은 맞고, 그게 아니에요. 전에도 맞고 오늘도 맞고 내일도 맞을 거예요. 홍상수 감독의 작품에 그런 것이 있어요. 우리는 항상 주님 보시기에 그게 맞아요. 

  

예수님께서 오셨다 하는 것은 그냥 오신 것이 아니고 복음을 가지고 오셨는데 이 복음을 가지고 왔을 때 갈라디아서 2장 4절에 보면, 복음이 안 왔으면, 주님이 오지 않았으면 일어나지 않았을 상황이 벌어집니다. 갈라디아서 2장 4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까닭이라 저희가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다른 말로 하면 주께서 우리와 동행하신 그 동행의 관계, 이것을 끊고자 하는 겁니다. 혼자서 잘 할 수 있는데 왜 자꾸 본인의 자유의지를 발휘하지 않으려고 하느냐, 이런 식으로 막 나오는 거예요. 제자들을 예수님이 부활해서 인도하는 것처럼 성도는 나중에 오순절에 성령이 오시게 되면 성령이 제자들을 넘어서서, 그것을 범람해서 이제는 모든 택한 백성에게 성령이 오게 됩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예수님이 제자들 속에서 행했던 그것이 반복적으로 우리 안에서 그대로 재현됩니다. 재현되게 되면, 제자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무지해서 실수한 것, 잘못 생각한 것, 곡해한 것을 그대로 우리 인생을 통해서 다 뽑아내요. ‘아, 이런 점이 나의 실수였구나. 이것을 내가 잘못 생각했구나.’ 이게 평균이고 자유라는 겁니다. 

  

자유라는 것은 내가 주체가 되어서 뭘 하는 것이 자유가 아니고 이미 주어진 그 환경 속에서 구태여 내가 스스로 자신에 대해서 판단할 필요조차 없는 새로운 피조물로 계속해서 발견되는 겁니다. ‘오늘도 주께서 주님 가신 길로 인도했구나.’ 주님 가신 길이 무슨 길이냐 하면, 주님 가신 길……, 주님 가신 길은 세상에 얽매이지 않는 길입니다. 

  

세상에 얽매이지 않는 길은 세상가치에 놀아나지 않는 것,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했잖아요. 세상의 가치에 휘둘리지 않는 거예요. 남들의 평가에 주눅 들지 않는 것, 그야말로 이것은 주님 가신 길, 그 주님가신 길에 주께서 동행하니까 여기서 티격태격 다툼이 벌어집니다. 

  

우리는 살아온 버릇이 있어서, 이렇게 하면 남에게 욕 얻어먹는데, 자꾸 우리는 평소에 하던 행세를 자꾸 발휘하려고 하고 주님께서는 때치, 때치, 하면서 “그것은 넓은 길이야. 좁은 길로 가야지.” 주님 가신 길로 우리를 이끄시는 겁니다. 주님 가신 길로 이끄시는 방법 중 하나가, 예루살렘 성도가 가뭄에 굉장히 어렵다는 소식을 듣고 그리스지역의 개척교회 교인들로 하여금 구제할 맘이 들도록 하는 거예요. 

  

이렇게 하면 가진 우리가 못가진 자에게 뭘 제공한다, 세상 적으로 보면 그렇게 되잖아요. 우리는 여유가 있어서 여유 없는 자를 도와준다, 이렇게 되는데 사실은 그리스에 있는 교인들도 가뭄 들어서 극한 가난에 빠져 있다고 되어 있잖아요. 고린도후서 8장에 나오지요. 2절에 나오거든요. 극한 가난이 풍성한 연보를 넘치게 했다고. 

  

오히려 가난함으로서 자기주제파악을 한 거예요. 보통 가난하게 되면 원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평균이라는 말이 굉장히 어려운 말로 등장해요. 평균이라는 말은 두 종류의 말로 구분되기에 어려운 겁니다. 우리가 보통 평균이라 하면 어떤 것이냐? 나한테 사과 다섯 개가 있고 저 사람에게 세 개가 있다면 5 더하기 3 나누기 2 하면 4가 돼요. 

  

그래서 나 네 개 가지고 저쪽 네 개 가지면 똑같다. 이것을 사람들이 평균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나 그 평균은 문제가 있어요. 여전히 내 것이 챙겨지고 있다는 사실이에요. 평균 그 이후에도 네 개라는 사과를 내가 갖고 있는 셈이 되어버려요. 주님이 생각하는 평균은 그 평균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평균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뭐냐 하면, 복지사회가 잘되고 사회주의 국가가 되어서, 또는 공동체 생활을 해서 능력대로 일하고 필요대로 일할 수 있는 세계. 레닌이 이야기한 것이고 레닌이 소련에서 실현하려고 애썼던 공산주의혁명 이론이에요. 능력껏 일하고 필요에 따라서 가져가는 것. 

  

멋지지 않습니까? 그걸 다른 말로 하면 ‘분배의 정의’라고 하는 거예요. 지금 이 세상에서 외치는 정의롭다는 것은 분배의 정의를 말하는 겁니다. 부자에게서는 세금을 많이 거두어서 복지자금으로 해서 골고루 평등하게 살면 그 국가나 사회는 불만이 최소화 되면서 평화로운 사회가 된다는 그것을 지향하는 것, 그게 바로 복지국가거든요. 

  

복지국가를 최초로 주창한 사람이 독일의 히틀러라는 사실을 여러분은 아십니까? 그것은 세상에서 나오는 복지입니다. 가진 것 가지고 잘 산다 못산다, 행복 하냐 안하냐를 결정하는 겁니다. 왜 인간은 가진 것, 사과 세 개, 네 개, 이것을 가지고 하느냐 하면, 사람은 자기에 대한 이해를 뭘 로 하는가? 

  

남과 비교해서 소유가 어느 정도 많으냐 적으냐, 소유의 차등을 가지고 나 자신이 누구냐를 그 사회에서 결정지으려고 하는 거예요. 재산이 많으면 나는 높은 사람, 괜찮은 사람이고 갑자기 행복해지고, 가진 것이 적어버리면 나는 불행한 사람이라고 스스로 자신을 규정하고 이해해버리는 겁니다. 

  

이런 것이 참 어렵거든요. 평균이라는 것, 이미 이것을 안다고 우기기 때문에 성경말씀의 평균을 이해를 못하는 거예요. 본문 8장 9절을 봅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이렇게 되어 있잖아요. 

  

우리가 주목해야 될 것은 뭐냐 하면, 예수님이 가난했다는데 주목하면 안돼요. 가난하게 되었다는데 주목해버리면 남미에서 신부들이 외치는 해방신학이 되는 겁니다. 가진 자는 착취를 했기에 다 도둑놈이고 가난한 사람들은 구원받을 사람들이고, 이런 식으로 신학이 정립되는 거예요. 

  

그 사상이 촛불집회로 이어지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되는 것은, 주님이 가난하게 되심이 무슨 의미냐 하는 것은 부요하신 주님이 가난하게 되었을 때 그 과정에 주목해야 돼요. 그 되는 것, 뭐가 변하는 것, 변하는데 주목하게 되면 여기서 말하는 가난이라는 것은 무엇의 반대말이냐 하면, 예수님의 부요함의 반대말이거든요. 

  

예수님의 부요함이 뭐냐? 재산 많은 것이 예수님의 부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늘나라에 재산이 많아서 부요한 하나님 아니십니다. 거룩과 영광가운데 계심이 부요함이에요. 하늘의 보석 많다고 주님이 부자 되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고린도전서 15장에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흙에 속한 형상을 입은 너희가 하늘에 속한 형상을 입을 것이다. 하늘에 속한 형상이 어느 정도냐? 기껏 지상적으로 표현하자면 해같이 빛난다는 그 정도. 해를 눈으로 직접 못 보잖아요. 눈부시잖아요.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눈부셔서 못 본다고요. 그 하늘나라의 영광, 광채, 그거 보고 난 뒤에 삼성그룹이 어떠니, 그런 세상 부자를 논하게 되면 진짜 웃기지도 않은 거예요. 

  

부패하고 썩어질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 하신 말씀이 썩어질 것을 썩을 땅에 두지 말라는 것, 그러면 다 썩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돈은 놔두면 썩는다는 것을 본인이 알아요. 하지만 인간들은 자기가 어느 정도 되는 인간인지를 돈 말고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데 어떡합니까? 

  

그걸 돈의 보편성이라고 그것을 자본주의라 합니다. 나라는 것은 돈 말고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어요. 나 이 정도야, 라고 표현할 길이 없어요. 착한 아들이 있다. 착하고, 부모 많이 생각하고,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빨래도 잘하고, 음식도 잘하고, 밭일도 잘하고, 다 잘해요. 단 한 가지 흠이 있다면 취직을 못했다는 거예요. 

  

취직 못한 것은 착한 아들 아니에요. 늘 부모 옆에 있어서 안마 해주고 어깨 주물러 주고 늘 같이 있을 때 “엄마, 내가 옆에 있어주니 얼마나 좋아요? 아빠도 없는데 혼자 있는 엄마 내가 봉양해주니 좋지?” 하면 엄마는 휙 돌아보면서 “취직해라. 돈 벌어오너라.” 

  

이 세상이 돈으로 하나가 된 이유가 있어요. 옛날에는 왕이 나라에서 자리를 잡아요. 왕은 백성이 왕이라고 해줘서 왕이 되는 것이 아니에요. 왕은 그 자리가 있어요. 하나의 최고 자리가 있다면 그 다음 밑의 자리는 그 왕의 권위에 비교해서 자리가 다 정해져 있어요.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 인도의 카스제도가 있잖아요. 왕과 제사장 계급이 있으면 그 밑에 저절로 계급이 죽 있고 제일 밑에는 불가촉천민이라 해서 만져서도 안 되는 천민계급이 있어요. 옛날에는 지정된 자리에서 그냥 살면 되는 겁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식으로 자기 자리에 그냥 있으면 나라가 평화롭게 돼요. 

  

그런데 근대자본주의가 들어오고 난 뒤에는 뭘 정하느냐? 인간이 물건과 물건을 사고팔고, 사고팔고는 옛날 신분제도 때도 있었어요. 그 때도 시장도 있었고 물물거래도 하고 다 있었는데 옛날 신분제도와 오늘날 자본주의 차이점이 뭐냐? 옛날에는 물건만 팔았는데 지금은 자기 자신을 하나의 상품으로 교환시장에 내놓는 겁니다. 

  

영화에 보면 나오는데 아가씨들이 의자에 죽 앉아서 날 사가세요, 하는 것처럼 모든 인간은 노동시장에 자기를 상품으로 내놓고 자기를 사가라는 거예요. 어떤 의미에서 돈 앞에서 자기를 부인하는 겁니다. 돈 앞에서 자기를 부인하니까 계속해서 교환되는 순환의 효과로서 나중에 돌아오는 것은 뭐냐? 

  

나는 이 정도의 인간이라는 것이 돌아오는 겁니다. 지금 나라는 인간이 이런 직장생활 하지만 내가 다른 나라에 가면 얼마에 팔릴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겁니다. 포르투갈, 스페인, 경제위기에 있을 때 젊고 배운 사람들이 브라질로 간 거예요. 스페인 사람들이 독일로 간 겁니다. 

  

취업이 20퍼센트에서 25퍼센트가 되는데 취직할 데가 없으니까. 나라는 이 상품이 지금 내가 생각하는 가치보다 더 쳐줄 때 나를 아낌없이 상품으로 내놓겠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독일 갔다가 독일보다 더 값을 쳐준다면 한국까지 올 수도 있어요. 돌고 도는 그 회전목마같은 그 세계의 보편성을 오늘날 현실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 현실의 보편성이 이미 꽉 짜였다고 하는 그 증상이 있어요. 그 증상이 믿음이라는 겁니다. 나는 믿습니다. 자본주의를. 나는 자본주의를 믿기 때문에 계속해서 앞으로 이 자본주의가 이어질 줄을 믿습니다. 자본주의라 하는 것은 지금보다 내일이 더 나을 거니까. 돈 없어도 돈 대출받아서 신용으로 계속 굴러가는 세계가 자본주의거든요. 

  

앞으로 돈 더 벌게 해주는 괜찮은 상품이니까 써주시고 이익 남기시면 갈라먹기 합시다. 이게 계속 이어지는 거예요. 내일을 믿는 거예요. 더 나은 내일을 믿는 겁니다. 그 믿는다는 것, 그 믿음이 이미 모든 세상을 보편적으로 꽉 장악하고 있어요. 

  

그러니 교회에서만 믿음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모든 인간은 태어나서부터 부모의 믿음을 애한테 주입을 시키는 겁니다. 괜찮은 상품이 되지 않으면 너는 굶어죽는다는 거예요. 돈으로 환산하는 것이 참된 너에 대한 이해고 그것이 너에 대한 규정이라고 학교에서부터 또 교회에서 계속 가르치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하면 “목사님, 그게 뭐가 문제입니까?” 할 거예요. 뭐가 문제인지 알려 드려요? 예수님 오시고 난 뒤에 종말이라고 해요. 종말은 끝낸 거예요. 무대의 스크린을 내려버린 겁니다. 무대뒤에 환상은 없어요. 이미 종말을 삽입시켜서 들어온 거예요. 종말은 곧 자본주의의 종말이고 우리의 믿음의 종말입니다. 

  

내가 믿던 것이 완전히 차단되는 거예요. 끝난 거예요.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한다 했거든요. 따라올라야 따라 올 수 없는 사랑의 나라, 그것이 주님의 나라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사랑해도 따라잡을 수 없는 사랑이에요. 베드로의 사랑도 따라잡을 수 없다면 우리는 도저히 그 마지막 굴레를 벗어날 수가 없어요. 

  

세상 사람들은 골고루 잘 사는 나라 되기 위해서, 다 잘사는 평균되기 위해서 머리를 짜내서 부자한테 세금 더 거두어서 복지한다고 하지만 그게 자금이 어디서 나오는가? 내일은 더 나을 것이다. 내일은 경제가 나아질 것이다. 마이너스에서 플러스로 계속 갈 것이다. 그래서 내일 것을 지불한다 치고 미리 당겨서 복지정책에 다 쓰는 거예요. 

  

그런데 이게 마지막이 되어버리면, 끝이 되어버리면, 그동안 돈으로 규정되던 나는, 보편성 안에서 하나의 요소로서 생각했던 그 모든 규정이 다 환상이고 거짓으로 들통 나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의 평균이라 하는 것은 돈의 평균, 소득의 평균, 분배의 평균이나 흔히 말하는 사회정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주님이 갖고 있던 그 영광의 평균입니다. 매끄러운 유리표면에 물을 붓게 되면 매끄럽기 때문에 물이 어디로 갈지 모르잖아요. 물이 빠져나가는 모양새가 다 달라요. 다 다르더라도 그것은 매끈한 면, 매끈한 유리면에 있다는 것은 동일하잖아요. 주님은 우리의 월 소득, 건강상태, 수명, 직업, 학력, 일체 묻지 않고 전부 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앞에서 매끄러운 표면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복음 앞에서는 복음을 아는 사람을 뭐라고 하느냐? 부르짖게 되어 있어요. “주여, 어서 이 세상에서 저를 건져주옵소서.” 부르짖는 자만 구원받아요. 이 세상 자본주의에 푹 빠진 사람은 구원 안합니다. 전도할 때 그렇게 아쉽게 전도하지 마세요. 원하는 자에게만 복음 전하세요. 

  

물론 세상에서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어요. 직업, 학력, 가정환경, 성적, 다 무시하는 그룹이 있어요.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입니다. FT아일랜드, EXO, 백뱅, 슈퍼주니어, 방탄소년단, 이런 그룹의 콘서트 앞의 애들을 보세요. 수능이 몇 점인지, 가정환경이 어떤지, 아버지 뭐하시는지, 이런 것은 묻지도 않아요. 

  

“오빠!” 모두가 똑같아서 평균이에요. 심지어 60대 아주머니도 가끔 섞이지만. 잠시 잠간이지요. 얼마나 공부에 스트레스를 받고, 성적차등에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으면,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에요, 를 증명해주는 콘서트현장에 용돈 모아서 가겠습니까? 

  

이것을 밑에서 올라오는 평균이라고 보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평균을 위에서 내려오는 평균이라고 둘로 나누고 싶네요. 위에서 내려오는 평균을 사도바울이 이렇게 이야기할 때 신약, 마지막 때거든요. 마지막 때 보면 드디어 평균 앞에서 고린도교회는 주님의 영광이 얼마나 감격스러운지를 깨닫게 됩니다. 

  

이러한 마지막 때 주어진 평균은 이미 구약에 예언되어 있습니다. 구약에 예언된 것이 오늘 본문에 나와요. 15절에 “기록한 것 같이” 구약 때 기록한 것 같이. 그래서 신구약 죽 봐야 돼요. “기록한 것 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 

  

이 대목이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출애굽기 16장 18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 생활하는 그 대목이에요. 이 대목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강한 마음인가? 하나님에게 속았다는 느낌이 아주 강렬하게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에게 속았다는 것. 

  

그들은 개인적인 평균을 생각한 겁니다. 애굽에서 나왔던 그대로 천국까지 간다고, 약속의 땅에 들어간다고 자기 혼자 곡해한 거예요. 쉽게 해서 절에 가던 내가 이제 교회 나왔으니까 그 내가 그대로 천국 간다, 이렇게 생각을 한 겁니다. 그렇게 생각한 사람이 누구냐?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가룟유다가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예수님 덕 보자는 거예요. 나에게 스승이 어떤 이득을 가져다 줄 것인가를 늘 주시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지막을 몰고 오셨거든요. 가룟유다는 그 마지막을 구경하는 입장에 있지 그 마지막의 칼날이 자기를 쪼갠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한 거예요. 물론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지만. 

  

가룟유다가 결국은 예수님을 팔아먹고 마지막에는 스스로 자살을 한 이유가 사적인 구원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요. 개인적인 구원이죠. 나의 구원을 끝까지 포기 못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가룟유다 이야기하게 되면 한국교회 교인들 자기 돌아봐야 돼요. 

  

교인 백 명 있으면 가룟유다 백 명 모였다 생각하면 돼요. 자기구원을 포기 못한 거예요. 지난 부산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거든요. 한국교회라 하는 것이 결국 뭐냐? 구약에 보면 산당이 나오는데 산당이에요. 일반대중들이 주변 나라가 잘 사니까 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자, 이게 평균이에요. 

  

이 세상 평균이 뭐냐? 차등 속에서 자기의 위상을 발견하는 것이 평균이에요. 차이가 나서 내가 이 사람보다는 못하지만 저 사람보다는 낫다, 그 가운데 자기존재를 규정하는 이것이 평균입니다. 돌아보면서 나는 지금 어느 정도인가, 몇 등 정도까지 왔는가, 그걸 살피는 것이 평균이에요. 

  

지금보다 소득이 향상되는, 부자가 되는데 보탬이 되는 신을 내가 선택하겠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산당이었습니다. 산당이라 하는 것은 자진해서 그런 종교생활을 한 거예요. 산당이란 산 위에 있는 예배당들입니다. 제사장들이 있고 복주기 위해서 기다리고. 

  

인간의 욕망을 채워주기 위해서 봉사하는 사람들이라는 말이지요. 그것을 제가 이렇게 표현했어요. 산 속에 조폭들이 도박장 개설하고 그들이 자릿세 10프로를 뜯어요. 오늘날 교회가 뭐냐? 목사가 예배당이라는 도박장 개설하고 십일조명목으로 10프로 뜯어가는 거예요. 

  

이것은 조폭들만 나무랄 문제가 아니고 교인들이 똑같아요. 교인들이 어디서 왔느냐 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왔거든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나를 돈으로 표현한다고요. 돈으로 표현하는데 만만치 않으니까 교회 와서, 산당에 와서 비는 겁니다. 지금보다 더 남에게 인정받는 존재가 되게 해달라고 비는 거예요. 

  

그러면 그것을 누가 해주는가? 목사가 매주 성경말씀 동원해서 격려해주면서 “예, 잘 오셨습니다. 이제 부자 되실 겁니다.”라고 해주는 거예요. 그래서 부자 되고 난 뒤에는 입 다물고 있으면 안 되지요. 기본 10프로에 감사헌금도 보태서 십의 2조는 해줘야 그 다음에 똑같은 도박장을 더 확장시키면 다른 친구들도 끌어모을 수가 있고 그것을 부흥이라고 합니다. 

  

와 봤자 사고방식이 똑같아요. 가룟유다들의 집합체입니다. 사적구원이에요. 그러나 주님의 평균이라 하는 것은 비교대상이 예수 그리스도에요.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부요하신 주님께서 이 땅에서 죄인 되신 거예요. 그게 가난이에요. 다시 말해서, 죄인인 주제에 밥을 세끼나 먹을 수 있지, 이렇게 이상하게 여겨지는 겁니다. 

  

빌립보서 4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잖아요.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이것은 틀리고 이것은 맞고, 가 아니라 주께서 그렇게 하게 하신 거예요. 내가 내 행동에 대해서 맞다 틀리다 판정내리지 마세요. 그것은 주님 자유를 빼앗는 거예요. 

  

율법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통해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자유를 확인하는 겁니다. 율법에서 의롭다 하지 못하는 것을 십자가 피로서 의롭게 만들어서 감히 흙에 속한 형상이 참여할 수 없는, 예수님만이 가질 수 있는 그 하늘의 영광을 우리가 주님과 똑같이 평균적으로 같이 누릴 수 있는 혜택을 얻었다는 그것을 위해서 사태가 벌어지는 겁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은 애굽과 달리 자기들은 구원받았다고 좋아했는데 그들은 자기자신이 누군지를 몰라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들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그들로 하여금 주님이 주시는 평균이 너희들이 아는 사적인 평균과 완전히 차이가 나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충돌을 일으킨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만나라는 것을 줍니다. 

  

애들 이유식 시작할 때 늘 먹던 젖을 빼앗고 이유식을 줄 때 애들은 아주 강력하게 반발하지요. 모유를 빼앗으니 내가 어떻게 사나,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 과정을 광야에서 하는 겁니다. 그들이 물을 원할 때 물을 주지 않았고 떡을 원할 때 떡을 주지 않았어요. 거기에 대한 답변은 뭐냐? 

  

우리는 못살겠다는 겁니다. 모세 따라서는 도저히 못살겠다. 어디로 돌아가자?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거예요. 여러분이 생각해 보세요. 처음부터 만나를 주지 않고 왜 원망이 일어나고 난 뒤에 주시는가를 생각해 봐야 됩니다. 이게 뭐냐? 원망이나 해대는 인간에게 주께서는 하늘에 넣어준다는 거예요. 

  

그 원망이 어디서 나왔느냐를 보라는 겁니다. 그 원망이 나라고 여긴 그 나에서 나온 거예요. 그 나는 뭐냐? 원망의 저장고에요. 인간이라 하는 것은 뭐냐? 이 더러운 현실, 세상을 생중계하는 모니터에요. 쫙 비춰줍니다. 내가 가는 곳마다. 미국가면 미국 간 그 모습을 좍 비춰줘요. 

  

미국 사는 사람들도 다 마찬가지에요. 캐나다 살면 캐나다 비춰주고. 모니터라니까요. 마지막 단말기에요. 이 악마의 조종을 받는 단말기를 내 인생을 통해서 다시 재현하고 보여주는 겁니다. 그것이 주님 보시기에 어떻게 다가오느냐 하면, 원망과 불평으로 다가오는 거예요. 

  

가룟유다가 달리 가룟유다가 아니라 우리 자신들이 가룟유다들이에요. 주님이 나한테 해준 것이 뭐가 있습니까, 하는 거예요. 순전히 자기 자신밖에 몰라요. 사회정의가 뭡니까? 사람들이 소득의 균등을 사회정의라고 알고 있어요. 돈 많은 사람들과의 차이가 적어지면 좋은 사회라고, 사회정의가 구현되었다고 보는 겁니다. 

  

결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결혼을 이렇게 생각해요. 결혼하기 전에는 여자가 어떤 마음인지를 남자가 모르고 또 결혼해도 여자가 어떤 마음인지 남자는 몰라요. 죽을 때까지 몰라요. 남자는 그냥 결혼으로 보지만 여자는 결혼하고 난 뒤에는 뭘 요구하느냐 하면, 네 안에 들어 있는 내 것을 내놓으라는 거예요. 

  

결혼은 여자의 복수극입니다. “내 안에 네 거 없잖아. 패물 말인가?” “그거 말고.” “나의 모든 것을 다 가져갔잖아.” “누가 달라 했나? 알아서 줘놓고 이제 와서 돌려달라니.” 결국 결혼이라 하는 것은, 나의 연속성을 위해서 상대를 도구로 삼는 것이 결혼이에요. 

  

내가 종말에 의해서 잘려나가는 것을 극히 싫어하고 그냥 이대로 가는 거예요. 그러나 그 결과로 인하여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천국은 십자가 뒤쪽에 있잖아요. 이쪽 사랑이 저쪽 사랑까지 이어지지 않아요. 도깨비 사랑이에요. 도깨비를 어떻게 사랑해요. 떨어지는 낙엽 잡으면 같이 기억나고, 그런 겁니까? 

  

도깨비라는 드라마에 그런 대사가 나와요. 주님은 아무리 생각해도 믿음의 대상도 아니고 사랑의 대상도 아니고 소망의 대상도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 우리 자신을 속이고 있는 거예요. 내가 만든 예수, 내가 만든 성령, 내가 만든 하나님, 삼위일체를 나 좋으라고 그냥 믿고 있는 거예요. 

  

가룟유다에게 배신당한 주님이 주님이십니다. 나에게 매일같이 배신당하는 주님이 주님이에요. 주님의 평균을 우리가 싫어해요. 나는 돋보이고 싶어요. 남과 똑같이 된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모욕감을 줍니다. 내가 어떻게 저 인간과 똑같아. 그래서 자존심이 센 사람은 천국 넣어줘도 안 가려고 해요. 

  

왜? 심심해서 맨 날 무슨 재미로 사느냐는 거예요. 뭐하고 사는데? 찬양과 영광, 재미없어라. 평소에 나만을 위해서 살아온 그 보람으로 살았는데 나만을 위해서 살았다는 말이 뭐냐? 남과 거리 떨어진 그것을 추월하는 재미. 남자들 차모는 재미가 추월하는 재미 아닙니까? 조수석의 아내는 간섭하고. 

  

남 추월하는 재미, 남보다 월등한 그 재미, 그 재미로 살지 그거 없으면 왜 삽니까? 인기 있을 때, 박수 칠 때 떠나라는 말이 그 말 아닙니까? 더 오를 자리 없을 때 과감하게 던져버리는 그 말 아닙니까? 괜히 버티다가 감옥살이나 하고 법정에 왔다 갔다 하지 말고. 진즉 내려오라고 할 때 내려왔으면 될 것을. 이제는 주사도 못맞고. 

  

사람들은 최정점을 향하는데 기본이 나의 연속성이에요. 누가 나를 쪼개는 것이 싫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 종말이 남에 대한 종말이 아니고 나에 대한 종말이에요. 나 자신이 나 자신에 대한 구원을 방해하고 있는 겁니다. 주님 가신 길이 무슨 길이냐? 우리 모가지를 끌고 죽이는 거예요. 

  

가자! 내가 달린 십자가에 너도 달리게 하는 거예요. 달릴 때 뭐가 달리느냐 하면, 내가 나를 잘났다고, 우수하다고 여기는 그것을 십자가에 저주받은 형태로 달리게 하는 겁니다. 주께서 성도 같으면 오늘도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에 매달리게 하는 겁니다. 네가 너에 대해서 판정내리지 말라는 말이지요. 

  

내일은 뭐하고 모레는 뭐하고, 그러지 말라는 겁니다. 우리의 소망, 우리의 미래, 우리의 기대, 그것은 마지막을 장식하러 오신 주님의 마지막 작업에 대한 모독이에요.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원망을 유발시킵니다. 그 원망이 있고 난 뒤에 그 원망 앞에서 만나 내릴 때 사람들은 그 누구도 그 앞에서 자기중심의 가치를 내세울 수가 그 때만큼은 없겠지요. 

  

그래서 만나라는 것은 하루치만 주고 그 다음날은 주께서 또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합니다. 그래서 내일은 또 어디로 갈꼬, 영천으로 갈까, 그런 것은 없어요. 내일 아침되면 구름 기둥이 “가자! 오늘도.” 하고 이끄시는 겁니다. 주기도문에,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밥먹고 살라는 것이 아니고 방향타에요. 너는 오늘도 내가 이끄는 대로, 그 방향대로 가야 돼요. 그 가는 방향이 뭐냐?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 “나는 이것은 못해요. 저것은 부끄러워서 못해요. 내 주제에 저런 것을 합니까?” 그러지 말고 네가 맞닥뜨리는 모든 것에 대해서 영생으로 정향되어진, 그쪽으로 방향이 정해진 곳인지 알고 감사함으로 우리의 갈 길을 그쪽으로 가야 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범사에 감사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의 인생 가운데서는 주님의 부요함만 계속 흘러나옵니다. 교회가 뭡니까? 주님의 용서가 나오고 그대도 용서가 나오고, 그러면 그리스도 사랑 안에서 이미 똑같은 인도함을 받는, 한분의 부활하신 분 앞에서, 다 같이 부활하신 주님 앞에서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모임이 교회잖아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자본주의 사회에서 확정된 내 규정, 우리가 어떻게 깨겠습니까? 깨지지 않는 이 규정앞에 십자가 피로서 등장해 주시고 네가 나를 살해했다는 소식을 듣게 하심으로서, 아, 우리가 죄인인 것을, 우리가 주님의 자유와 주님이 주신 은총을 훼방했던 죄인인 것을 날마다 깨닫게 하시면서, 깨닫게 하시는 그것이 주님의 영생의 길로 통하는 길인 것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