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7-함축 170320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4. 10. 17:56
2017-04-02 23:22:27조회 : 40         
[17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7 - 함축이름 : 구득영 (IP:203.223.97.162)

[17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7 - 함축


                                                             07,03,20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예루살렘의 왕 !!


오늘은 교재 34페이지부터 하겠는데, 그 제목이 '예루살렘의 왕' 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와 같은 이방인의 입장에서는 이 예루살렘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잘 몰라요. 우리는 이렇게 지구에 각자가 흩어져서 살면 그만이라고 여기는데, 그렇게 자기가 사는 곳이 곧 고향이고 말이죠.


(전 1:1)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보고 "고향을 떠나라" 라고 하셨는데, 히브리서에서는 이것을 고향 차원이 아니라 "지구를 떠나라" 라는 의미로 이야기를 한다는 겁니다. 우리는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으로 오면 되는 줄로 알았는데 말이죠.


여기가 지중해인데, 여기 아래가 아프리카이고 위쪽이 유럽인데, 여기가 터키이고, 더 오른 쪽이 이스라엘이라는 겁니다. 요즘 이 지중해가 죽음의 바다가 되고 있는데, 아프리카 난민들의 배가 침몰해서 말이죠. 그러면 갈대아 우르는 어디인고 하니, 지금의 이라크 지역이라고 보면 되는데, 이스라엘보다 더 오른쪽이죠. 그 옆에 덩치가 큰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가 위치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기에는 여기든 저기든 다 지구인데,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목성을 가라고 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같은 지구인데, 지구는 둥글게 되어있는데, 여기에는 내핵과 외핵으로 되어있는데, 여기에 양배추처럼 얇은 표면이 바로 지각이라는 겁니다. 물론 요즘도 지구가 편평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고 하는데 말이죠(ㅋㅋ).


지각은 깊이가 기껏해야 10KM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지각이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데, 액체 위에 고체가 있으니 고체는 움직일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마치 물 위에 스티로폼을 올려놓은 것과 같은데, 그 스티로폼 위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겁니다. 일본에 왜 지진이 자주 일어나는고 하니, 해양판과 육지판이 만나는 지점에 일본이 놓여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인간은 아무 것도 아닌데, 밑에서 흔들어버리면 아수라장이 되고 만다는 겁니다. 몇 년 전에 일본에서 대형지진이 일어나서 원자력 발전소에서 핵이 누출되고 난리가 났는데, 그때 거기에 땅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물론 지금은 들어오라고 한다고 하는데, 겁이 나서 들어가지를 못한다는 겁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왜 하는고 하니, 예루살렘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말이죠. 예루살렘이라는 동네는 원래 없는 동네인데, 그런데 아브라함이 여기 이라크에서 터키를 거쳐서 올라오면서, 아브라함의 자손, 자손, 자손, 자손, 자손이 누구인고 하니, 바로 '다윗' 이라는 겁니다.


다윗언약, 다윗과 약속의 결합 !!


그런데 그 다윗을 통해서 무슨 정보가 주어지는고 하니까, 천국의 정보가, 즉 예루살렘이 시온이라는 정보가 다윗을 통해서 알려진다는 말이죠. 이렇게 다윗과 약속이 결합된 것을 두고 '다윗언약'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런 것을 교회에서 이야기를 해주어야 하는데, 대한민국에서 잘 먹과 잘 사는 것만 이야기하지 말고 말이죠.


우리는 어차피 떠나야 하는데,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갈 곳도 모르는 아브라함을 보고 가라고 해놓고는, 그런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보고 뭐라고 합니까? "너희들의 고향은 이 땅에는 없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시고자 하는 말씀은 무엇인고 하니, "떠나라, 떠나라, 떠나라" 라는 것을 통해서 "몽땅 떠나라!"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히 11: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
(히 11:15)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히 11:16)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요즘 젊은 사람들이 이사를 많이 하는데, 주인이 집세를 올려달라고 해서 말이죠. 처음에는 서울에서 살다가 인천으로 오고, 그 다음에는 김포로 가고 말이죠. 그러면 "어느 곳이 주님께서 허락하신 곳입니까?"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는 그렇게 이동을 시키는 과정을 통해서, 자기 백성들에게 "지구를 떠나거라!"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갑자기 개그맨 김병조가 생각나는데 말이죠(ㅋㅋ). 


지구를 떠나거라 !!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지구를 떠나면 지옥에 가는데, 이왕 지구를 떠나는 것이니, 천국에 가야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천국은 그냥 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알려준 정보가 있어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그 정보를 다윗에게 약속으로 주셨다는 말이죠. 그러니 일종의 천기누설인데, 하나님의 천국에 관한 정보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 다윗에게 주어졌다는 겁니다.


이런 것이 참으로 중요한데, 그런데 제대로 모른다는 말이죠. 교회에 다닌다고 하면 마태복음 1장의 내용은 다 아는데, 그런데 정작 그 의미는 모른다는 겁니다. 마태복음 1장 1절에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라고 하는데, 그것을 제가 방금 설명해드렸다는 말이죠. 


(마 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천기누설인데, 즉 아무에게나 알려주지 않는데, 그런데 아브라함에게 알려주셨고, 그러면 아브라함은 기다려야 한다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죽고 자손이 태어나고, 또 죽고 자손이 태어나고, 그렇게 죽고, 죽고, 죽고, 그렇게 하다가 어디서 천국의 정보가 주어지는고 하니, 다윗에게 나타난다는 말이죠. 그게 바로 '14대' 라는 겁니다.


교회에 다니게 되면 누구나 제일 먼저 보는 마태복음 1장에 그런 내막이 들어있는데, 천국은 죽으면 가는 곳이 아니고, 정보를 알아야 간다는 겁니다. 천국은 약속의 나라인데, 그 약속은 인간들이 알 수 있는 약속이 아니라, 알려주어야만 아는 약속이란 말이죠. 바로 그 약속과 다윗의 만남을 '다윗언약' 이라고 했는데, 그러니 천국은 어떤 곳입니까? 다윗언약에 의해서 만들어진 동네라는 말이죠.


(마 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그러니 소위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다 잊으시면 되는데, 교회에 와서 재미나게 어쩌고 하는, 그런 놀이문화는 다 잊고, 말씀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말씀 속으로 들어가면, 교회와 천국은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알 수 있는데, 즉 교회는 노는 곳이지만, 천국은 약속으로 가는 곳이란 말이죠.


방금 제가 다윗언약을 천기누설이라고 했는데, 천국을 유일하게 아는 유일한 정보는 아브라함 자손에게 주어졌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다루셨는고 하니, "떠나라, 떠나라, 떠나라" 라고 하셨다는 말이죠. 여기서 떠난다는 의미는 아예 지구를 떠나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냥 떠나면 안 되고 정보를 알고 떠나야 한다는 말이죠.


여기서 시편 122편을 보겠는데, 1절에서 6절입니다.


(시 122:1) [다윗의 시 곧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시 122:2) 예루살렘아 우리 발이 네 성문 안에 섰도다
(시 122:3) 예루살렘아 너는 조밀한 성읍과 같이 건설되었도다
(시 122:4) 지파들 곧 여호와의 이름에 감사하려고 이스라엘의 전례대로 그리로 올라가는도다
(시 122:5) 거기 판단의 보좌를 두셨으니 곧 다윗 집의 보좌로다
(시 122:6)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모든 이스라엘아, 예루살렘을 사랑해라 !!


이 예루살렘을 두 글자로 표현하면 '시온' 인데, 물론 예루살렘은 그 동네를 말하고 시온은 조금 더 넓은 범위이기는 하지만, 같이 겹친다고 보시면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여기 시편 122편에서는, "모든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을 사랑해야 한다" 라고 하는데, 왜 그렇습니까?


여기 4절에 보면, "지파들 곧 여호와의 이름에 감사하려고 이스라엘의 전례대로 그리로 올라가는도다" 라고 하는데, 작 지파들이 예루살렘에 올라간다고 하는데, 이것이 얼마나 감동적인지 모른다는 겁니다. 물론 지금 분위기는 저 혼자 감동하고 있는데 말이죠(ㅋㅋ). 


원래 천국은 이 땅에 없는데 있게 하셨다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는데, 있어야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든지 할 것이 아니냐는 말이죠. 물론 죽어도 갈 수 없고, 천사의 날개에 올라타도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천국이 이 땅에 '예루살렘' 이라는 형식으로 고맙게도 친히 하나님께서, 이것을 '터미널' 이라고 하는데 말이죠.


버스나 기차를 아무런 곳에 간다고 해서 태워주는 것이 아니라, 터미널에 가야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천국으로 갈 수 있는 은하철도를 탈 수 있는 곳, 그곳이 바로 시편 122편에 보면 '예루살렘' 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들을 보고, "예루살렘을 사랑하고, 그곳으로 모여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단군을 모시고 있는 저기 강화도는 왜 되지 않습니까? 강화도를 사랑하면 왜 되지 않느냐는 것이죠. 예루살렘보다 우리에게는 훨씬 더 정감이 있는데 말이죠. 그것은 약속이 아니라는 겁니다. "강화도에 가서 단군에게 제사를 드려라" 라는 약속을 하신 적이 없다는 말이죠. 한국 사람은 얼굴이 못나고 이스라엘 사람은 잘나서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의하면 예루살렘에 가야 한다는 겁니다.


지금도 이것을 문자대로 이해를 해서 예루살렘에 성지순례를 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나라 사람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전 세계에서 다 모여든다는 말이죠. 물론 예루살렘에 여행을 가는 것에 대해서 말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는데, 저는 돈이 없어서 가지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ㅋㅋ).


지금의 예루살렘은 하나의 관광단지인데, 시편 122편의 그 예루살렘은 아니라는 말이죠. 그 이유가 골로새서 3장에 나오는데, 이 땅의 것은 다 죽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2절에 보면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터미널이 될 수 없다는 말이죠.


(골 3: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골 3: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지금 우리가 구약을 보고 있는데, 이 구약 때는 이스라엘이 의미가 있었고, 그 의미가 무엇인고 하니, 예루살렘에 성전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성전에는 하나님이 대기하고 계신다는 말이죠. 그렇게 대기하시는 하나님을 '주의 이름' 이라고 하는데, 그게 신약에 오면 '주 예수 그리스도'가 되는데, 그러니 장소와 인간이 다르다는 겁니다.


삼촌이 부흥이 됩니까?


어제 오후시간에 그러한 질문을 했는데, "삼촌이 부흥이 됩니까?" 라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겁니다. 삼촌은 어떤 어른인데, 그게 부흥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말이죠. 그러면 성경에서는 교회를 뭐라고 합니까? '그리스도의 몸' 이라고 하는데, 그러니 몸인데, 몸이 과연 부흥하느냐는 겁니다. 몸은 움직이지는 것이지 부흥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고전 12: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제가 이렇게 몸을 움직인다고 해서 "너, 부흥이 되었다" 라고 합니까? 부흥이라는 것은, 어떤 물체가 커지고 양이 많아지는 것인데, 그러면 살이 찌는 것이 부흥인가요? 어제나 오늘이나 같은데, 무엇이 부흥이 되느냐는 겁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이죠. 


대한 예수교 장로회 우리교회 !!


제가 무엇을 의식해서 이러한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사람들이 교회라고 하면, 간판을 내걸고, 건물을 짓고, 주차장을 만들고 하는데, 그런 것을 의식한다는 말이죠. 그런 것은 어디까지나 부동산이지 무슨 그리스도의 몸이냐는 겁니다. 성경은 그런 것을 교회라고 한 적이 없다는 말이죠. 오직 그리스도의 몸인데, 거기에 '대한 예수교 장로회' 라는 간판이 왜 붙느냐는 것이죠. 


그러면 또 질문을 하겠는데, "그 몸이 죽었습니까? 살았습니까?" 라는 겁니다. 우리가 매 주일마다 모여서 제사를 드리는 겁니까? 제사는 죽은 사람에게 드리는 것인데, 만약 살아있는 사람에게 제시를 드린다고 하면, 당사자가 열을 받아서 그 제사상을 엎어버린다는 말이죠. "이것들이 미쳤나? 이게 무슨 짓이고?"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런데 지금 누가 그렇게 합니까? 교회에서 그렇게 하고 있는데, 살아있는 예수님을 그만 죽은 이순신 장군으로 만들고 말았다는 겁니다. 이순신 장군을 모시고 하는 것이 무당들이 그렇게 하는데, 죽은 사람을 불러내서 굿을 하고 점을 쳐주고 돈을 받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교회는 굿집이 아닌데, 무엇이 좋다고 굿집이냐는 겁니다(ㅋㅋ).  


교회는 주님이 살아계시는데, 그러면 그 다음 질문에 들어갑니다. "주님이 살아계시면 가만히 계시겠습니까? 활동을 하시겠습니까?" 라는 겁니다. 활동을 하시는데, 그러면 만약에 우리 집에 주님이 들어오신다고 하면, 벨을 눌리겠습니까? 눌리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이 부활하고 난 뒤에 12제자들이 무서워서 벌벌 떨고 있을 때, 예수님은 벨을 눌려서 문을 열고 들어오신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것이 바로 교회인데, 그러면 그 다음 질문이 무엇인고 하니, "그러면 어떻게 들어오십니까?" 라는 겁니다. 벨을 눌려서 들어오신 것이 아니라고 했는데, 그렇다고 해서 스마트폰 키가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죠. 그것은 바로 "성령으로 들어오신다" 라는 것인데, 그것이 어려우면, '성' 이라는 글자를 빼면 "영으로 들어오신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육이 영을 만나서 교제하는 것, '영적 사람' !!


그러면 우리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육' 인데, 그러면 육이 영을 만나는 것인데, 그러면 육이 영이 된다는 겁니다. 육이 영을 만나서 교제하는 것을 두고 '영적 사람' 이라고 하는데, 두 글자로 '성도' 라고 하고 말이죠. 그러니 성도들이 모인다고 해서 교회가 아니고, 성도들이 주와 함께 모인 것, 그게 바로 교회라는 겁니다. 즉 성도들이 성령 안에서 모인 것, 주님 안에서 모인 것, 그것을 교회라고 하고, 로마서 14장에서는 '하나님의 나라' 라고 한다는 말이죠.


(롬 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주님에 의해서, 누가 주님인가요? 나사렛 예수님이 주님인데, 그것을 시편 122편에서는 예루살렘, 즉 성전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주의 이름으로 모인 곳이 교회이고, 그리스도의 몸이고, 성도가 된다는 말이죠. 


제가 이렇게 이야기할 때는 무엇을 의식한다고 했습니까? 간판을 걸어놓고, 건물을 지어놓고, 11시만 되면 오고, 그리고 마치면 다 사라지는, 그런 부동산, 교단, 그런 것에는 이제 그만 속아넘어가자는 겁니다. 그것은 인간들의 지혜로 만든 종교단체인데, 그러니 성경 속으로 들어가 보자는 말이죠.


성경은 알다시피 약속인데, 옛날의 약속은 구약이라고 하고, 새로운 약속을 신약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두 개를 합쳐서 신구약, 즉 성경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는 어떠한고 하니까, 주님이 지금도 열심히 활동하고 계신다는 겁니다.


멋진 주일학교 그림 !!


제가 주일학교 설교를 하는데, 너무 너무 재미있는 그림이 있어요. 이전에도 언급한 것 같은데, 양이 이렇게 있으면 주님이 양 앞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뒤에서 붙잡고 있는데, 그런데 양은 어디로 가는고 하니, 마귀가 꼬드기는 쪽으로 따라가고 있다는 말이죠.


마귀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줄게" 라고, "돈을 주고 인기를 주고 줄게" 라고 하니, 양은 좋다고 하면서 그쪽으로 간다는 겁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뒤에서 누가 붙들고 있다고 했지요? 주님께서 붙들고는 "안 돼, 거기로 가면 안 돼"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런 주일학교 그림이 있는데, 얼마나 멋진지 모른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가 알아서 주님 쪽으로 가는 것이 전혀 아닌데, 그것은 백발백중 실패라는 겁니다.


주님은 지금도 살아계시고 활동을 하시는데, 어떻게 활동을 하십니까? 성령으로 인도하시는데, 그렇게 되면 "이게 지옥에 가는 자들이 가는 넓은 길이고, 이게 바로 천국에 가는 자들이 가는 좁은 길이다" 라고, 그렇게 매일같이 우리에게 친절하게 안내해 주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길은 어떤 길인고 하니, 인도함을 받고 나서 보면 이미 그게 성경에 나와있는 길이란 말이죠. 즉 예루살렘을 향하여, 시온산을 향하여,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다시 복습을 하면 !!


여기서 복습을 하겠는데, 시온인 예루살렘은 무엇과 무엇의 결합인고 하니, 다윗과 약속의 결합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다윗이 오기 이전에 다윗의 조상이 누구인고 하니, 마태복음 1장 1절에 보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성도에게는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있었던 그 원칙이 그대로 적용이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아브라함은 어떻게 구원을 받았습니까? 본토 자기 아비의 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자기 고향인 갈대아 우르를 떠나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지금 성령께서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신다는 겁니까? 대구에 사는 우리를, 광주에 사는 우리를, 부산에 사는 우리를, 서울에 사는 우리를, 다른 지역은 그만 생략하고(ㅋㅋ), 그 지역을 떠나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어디로 가면 됩니까? 미국으로 갑니까? 아프리카로 갑니까? 그게 아니고, 우리의 본향은 위에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위에 있으면 우리는 여기서 높이뛰기를 해야합니까? 주님께서는 약속에 의해서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말이죠. 이것은 사람들이 모르는 약속인데, 주님만이 아신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약속은 점점 더 구체화가 되겠습니까? 모호하게 되겠습니까? 구체화가 되는데, 그게 바로 교재 34페이지에 나오는 '예루살렘의 왕' 이라는 겁니다. 그냥 왕이 아니라 예루살렘의 왕이라는 말이죠.


시편 122편에서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예루살렘에 모이면 건져주겠다" 라고 하셨는데, 그러면 그렇게 예루살렘에 모일 때, 12지파를 보고 오라고 하셨는데, 그게 여호와의 지파이고, 여호와는 그 이름인데, 그것은 바로 주님께서 친히 지파를 만들어내신다는 의미라는 겁니다.


(시 122:4) 지파들 곧 여호와의 이름에 감사하려고 이스라엘의 전례대로 그리로 올라가는도다


여호와의 지파 !!


지금 반응들이 없어서 헷갈리는데, 그래도 이해를 한다고 여기를 진도를 나가겠습니다. 이렇게 부부가 있는데, 그들이 동침을 해서 자식을 낳으면 그 자식이 누구의 자식입니까? 당연히 부모의 자식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 자식에 대해서 누가 관여합니까? 부모의 자식이니, 당연히 부모가 관여를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남들이 물으면 "내 아들이야"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 이스라엘의 지파가 있다면, 이 지파는 그 아버지가 있다는 겁니다. 그가 바로 야곱인데,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보는 게 아니라, '여호와의 지파'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여호와의 지파와 인간의 지파는 차이점이 있는데, 인간의 지파는 결혼을 해서 동침을 하면 자식을 낳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즉 육에서 육이 나온다는 말이죠.


그런데 여호와의 지파는 무엇인고 하니, 그냥 생겨먹은 것이 인간이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만들어진다는 겁니다. 약속이 또 나왔는데, 다윗은 지상에 있는데 하나님께서 성신을 통해서 다윗에게 약속을 주셨다는 말이죠. 그것은 다윗 혼자 구원을 받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다윗이 12지파의 책임자로서 그들을 데리고 천국에 들어가야 하는 임무가 주어진다는 겁니다. 그게 다윗언약이라는 말이죠.


예수님은 혼자가 아닌, 예루살렘의 왕 !!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머리를 좀 쓴다는 분들은 "예수님 혼자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까?" 라고 할지 모르겠는데,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을 구원해야 하는 근거가 무엇일까요? 그게 다윗언약인데, 다윗언약에 보면 예수님은 혼자가 아니라 예루살렘의 왕이라는 겁니다. 전도서가 다윗언약이 말이죠.


여기서 '왕' 이라고 하는 것은, 말로만 왕이 아니라, 12지파로 구성된 이스라엘의 운명과 미래를 책임질 자라는 겁니다. 그러면 다윗이 이스라엘을 책임을 졌습니까? 모두 다 천국에 보내었느냐는 말이죠. 전혀 그렇지가 못한데, 다윗 자신도 구원을 받지 못하는데, 그런데 성신에 의해서 받았다는 겁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이 신기하게 생각하는데, 다윗은 육이기 때문에, 육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죠.  


그런데 성신에 의해서 간음을 하게 되었고, 표현이 조금 이상인데 말이죠. 그리고 자기 죄를 감추기 위해서 바세바의 남편을 죽였다는 겁니다. 역시 성신에 의해서 그렇게 했다는 말이죠. 그리고 성신에 의해서 나단 선지자가 앞에 등장했고, 그리고 성신에 의해서 다윗은 자기가 죄를 짓고 말고 하기 이전에,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었다는 겁니다.


육에서 육으로 태어난 다윗 !!


다윗은 누구입니까? 시편 51편에 보면, 자기는 죄악 중에 태어났는데, 어미의 뱃속에서부터 말이죠. 즉 죄에서 죄로 태어난 자라는 겁니다. 달리 말하면, 육에서 육으로 났다는 말이죠. 우리가 왜 송편을 만들 때 쌀가루로 반죽을 하는데, 그리고 거기서 조금씩 뜯어낸다는 겁니다. 그렇게 죄에서 뜯어내진 것이 바로 '나'가 된다는 말이죠.  


(시 51:4)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시 51: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여기 5절에 보면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가장 적합한 비유가 '송편 만들기' 라는 겁니다. 뚝 뚝 떼어서 동글동글하게 만들어놓고 거기에 설탕과 팥을 적당히 넣으면 송편이 된다는 겁니다. 솔직히 송편은 그 재료나 만든 정성에 비해서 맛은 별로 뛰어나지 않는데, 만두가 더 맛있다는 말이죠.   


다윗은 자기의 원천을 알았는데, 즉 "나는 태어났다. 바르게 살아야지" 라는 것이 자기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다윗은 알았다는 겁니다. 그것은 다른 인간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자기 혼자 바르게 산다고 해서, 그리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러니 다윗은 죄의 일부로서 떨어져 나왔는데, 그런 죄의 일부로서 간음을 하고 살인을 함으로서, "내가 잘못했다" 라고 하는 게 아니라, "내가 누구인가?" 라고 하게 되는데, 그래서 자기가 죄인임을 알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러한 다윗의 체험이 개인적인 체험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언약의 내용을 구성하게 된다는 말이죠.


나실인과 서원 !!


어제 오후시간에 서원과 나실인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는데, 각 시대마다 하나님께서 지정해서 서원을 하도록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러면 서원한 사람이 해야하는 일이 무엇인고 하니, 다른 사들은 몰라도 그 사람만은 그 시대에 주어진 죄의 바닥을 터치하게 된다는 겁니다. 죄의 근원과 접촉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보다 앞서서 세상을 알고 자기를 알고 구원을 알고 주님을 안다는 의미라는 말이죠. 


삼손의 경우에, 그의 최후가 어떠했습니까? 눈알이 뽑히고 머리카락도 잘리고, 그리고 자기 몸은 적들과 함께 장렬하게 죽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를 보고 삼손을 하라고 하면 다들 도망가지 싶은데, 자기만 편하면 되지 국가를 위해서 그게 무슨 짓이냐는 말이죠. 


그게 맞는 말인데, 그런데 이상하게도 태어날 때부터 죄의 근원을 알려고 태어난 자가 있다는 겁니다. 그가 바로 '나실인' 인데, 삼손은 하나님의 천사에 의해서 태어났다는 말이죠. 삼손은 평소에 그 힘을 자기를 위해서 사용했는데, 즉 자기 기분대로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나중에 이스라엘의 실패를 대신 경험하기 위해서 자기가 태어났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오늘 강의제목을 여기에서 정했으면 하는데, '실패' 라고 말이죠.


성도는, 실패한 경험이 있어야 !!


여러분, 실패를 해본 사람이 겁이 없을까요? 실패를 해보지 않은 사람이 겁이 없을까요? 질문을 다시 하겠는데, 인간의 저지를 수 있는 최악의 실패를 경험을 해본 사람이 겁이 없을까요? 그러한 경험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 사람이 겁이 없을까요? 해본 사람이죠.


그게 성도인데, 그러니 성도는 찡찡거리는 인생을 살면 안 된다는 말이죠. 예수님이 흘린 피는 돈으로 환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 그러니 예수님의 피가 언제 가장 고맙겠습니까?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실패로 끝났을 때, 그러니 이제는 달리 다른 것은 전혀 의지할 것이 없을 때, 심지어 자기의 몸도 망가지고 말이죠. 그리고 돈도 없고, 그래서 김치조차도 훔쳐먹을 수밖에 없는, 차라리 그런 사람은 교도소가 낫지 싶다는 겁니다.


AMAZING GRACE !!


남들도 자기에게 기대를 해주지 않고, 자기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 전혀 기대할 수 없는, 그때 성령이 오시게 되면, 그 사람에게는 감사 외에는 달리 나올 것이 없다는 말이죠. 그야말로 찬송가 가사 그대로인데, 즉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라는 겁니다. '놀랍다' 라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전혀 예상치도 못했다는 것인데, 어떻게 이런 횡재가 주어지느냐는 말이죠.


그것이 바로 그 시대의 나실인인데, 즉 '서원자' 라는 겁니다. 물론 지금은 예수님께서 그렇게 되도록 하신다는 말이죠. 인간은 실패를 하지 않으면 실수에 겁을 내게 되는데, 그래서 실수를 하게 되면 또 다시 실수를 할까 싶어서 겁을 낸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투자를 잘못해서 돈을 날리면 그 다음에는 제대로 투자를 하겠다고 하는데, 제대로 투자는 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조심조심해서 하겠다는 말이죠. 그렇게 조심하겠다는 것은 앞으로 마귀에게 당할 일이 많이 남아있다는 겁니다. 벌벌 떨면서 "더 이상은 실패하면 안 돼. 그러면 나는 가망이 없어" 라고 하는데, 그러니 마귀에 보기에 가장 가지고 놀기 쉬운 경우가 된다는 말이죠.  


과메기 인생 !!


약장수들이 노인네들을 상대로 사기를 치는데, 왜 그럴까요? 노인네들은 겁이 많은데, 왜냐하면 몸이 마치 과메기처럼 말라간다는 겁니다. 요즘 말하는 과메기는 주로 꽁치를 시원한 바다바람이 부는 곳에서 말린 것을 의미하는데, 청어 과메기도 유명한데 말이죠. 처음에는 탱탱한 생물이었지만, 그런데 말라가면서 그만 무생물이 되고 만다는 겁니다. 죽음과 삶의 경계선에 있다는 말이죠.


다윗은 실패자였는데, 그런데 만약에 하나님께서 그를 실패하지 않게 하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러면 당연히 자기 잘만 맛에 살게 될 것이고, 그렇게 자기만 잘 되면 그만이란 겁니다. 하지만 다윗은 자기 실패를 통해서 비로소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게 된다는 말이죠.


마치 삼손처럼, 나실인처럼 자기 하나가 다른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 희생을 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 희생하는 방법이 무엇인고 하니, 남들이 실패 때문에 겁내는 그 상황을 주님께서는 다윗을 그런 상황 속에 집어넣어 버리신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디모데전서 3장에서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라고 하는데, 그러면 사도바울이 자신만 구원을 받았습니까? 아니면 남들에게 자기 체험을 전달합니까? 자기가 받았던 예수님에 관한 체험을 전달하는데, 그러면 주님은 그것을 계시로 활용하신다는 말이죠.


(딤전 1:13)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성도는, 새언약의 증인 !!


그러니 성도라고 하는 것은, 자기 몸이 망가지고 말고 하는 것을 떠나서, 이미 영적으로 자기는 버린 몸이라는 것을, 그래서 천국에 갈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성령을 통해서 예수님의 십자가 체험을 우리의 체험이 되게 하신다는 것이죠. 그렇게 되면 그 십자가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게 되는데, 자기 통장에 백억이 있어도 말이죠. 


그런 성도를 두고 '새언약의 증인' 이라고 하는데, 그래도 노파심으로 다시 물어보겠는데, 다윗언약은 무엇의 결합이라고 했습니까? 정말 쉬운 문제인데, '다윗+언약' 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성도는 무엇과 무엇의 결합입니까? 새언약, 즉 십자가와 죄인의 결합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설교시간에 십자가가 증거되면 듣는 우리는 무엇이 됩니까? 죄인이 되는데, 이것이 결합하게 되면 예수님의 증인, 즉 예수님을 전달하는 매개체, 우편배달부,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편배달부는 얼굴의 생김새가 중요한 것이 아닌데, 전달해주는 내용물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자기가 성공과 실패여부에 관여할 바가 되지 못한다는 말이죠. 이것을 어제 낮에 했는데, 아직은 기억이 나지요? 


다시 정리하면 !!


다시 정리하면, 왕은 자기만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국가를 책임져야 하는데, 그 국가가 어떤 국가입니까? 12지파인데, 그냥 12지파가 되면 육이 되어서 안 되고, '여호와의 지파' 라는 겁니다. 그러면 여호와의 지파는 누가 책임을 집니까? 여호와가 책임을 진다는 것이죠.


그래서 현재 우리 눈에 보이는 그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 아닌데, 왜냐하면 그들은 어디까지나 육의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말이죠. 그래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재미나게 해외관광은 할 수가 있겠지만, 그 이상의 의미를 두면 곤란해진다는 겁니다.


그러면 신약에는 이스라엘이 누구입니까? 여호와의 이름에 의해서 새롭게 조성되는 12지파가 있어야 하는데, 그들이 누구입니까? 강의 처음에 했는데, '그리스도의 몸' 이라고, 두 글자로 '교회'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 교회는 주님이 직접 관리하시는데, 마치 목자가 양을 돌보듯이 말이죠. 그래서 성도가 가는 곳에는 언제나 주님이 동행하시는데, 자기 백성을 챙기는 것은 왕의 책무라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하시는 일에 대해서 우리가 걱정할 이유가 전혀 없는데, 예수님은 자기 일을 완벽하게 하신다는 말이죠. 이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데, 여기서 퀴즈를 하나 내겠습니다. "내가 없어도 주님의 일은 차질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라는 것인데, 물론 정답은 없다는 것인데 말이죠.


주님께서 다 알아서 잘 하시기 때문에 !!


이제부터가 중요한데, 거기에 대한 반응인데, 1번은, "내가 없어도 되니까, 나는 그만 빠지겠다" 라는 것이고, 그리고 2번은 "내가 없어도 주님께서 다 알아서 잘 하시기 때문에, 나는 죽도록 충성하겠다" 라는 겁니다. 여기서 정답은 몇 번입니까? 2번이라는 말이죠.


여기서 주님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의 차이점이 드러나는데, 1번은 자기만 생각하는 경우인데, 마치 성신을 받기 이전의 다윗의 생각과 같다는 것이죠. 그러니 관련성을 인정하지 않는데, 즉 "나는 나고, 나는 너다" 라는 겁니다. 주님이 알아서 하시는데 자기가 왜 도와주느냐는 것이죠.


그런데 그렇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어떻게 하더라도 주님께서 다 하시기 때문에, 그래서 자기는 죽도록 충성하겠다고 나온다고 하면, 그런 새로운 의미가 생긴다고 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것을 두고 '사랑' 이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말이죠.


그러면, 영화를 한 편 땡기고 오겠습니다 !!


조금 더 쉬운 예를 들면, 추석을 맞이해서 음식을 만드는데, 그런데 며느리가 음식솜씨가 별로라는 겁니다. 그래서 시어머니가 "내가 할게" 라고 하는데, 그래도 며느리는 놀지 않고 시어미니가 하는 일을 열심히 돕는다는 말이죠. 그것은 자기가 음식을 잘 만들어서 그런 것이 아닌데, 시어머니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관계가 아니라고 하면, 물론 며느리와 시어머니 사이에는 그런 사랑의 관계가 거의 불가능한데 말이죠(ㅋㅋ). 시어머니가 "며늘아, 내가 할게" 라고 하니, 며느리가 한다는 말이, "그러면 영화를 보고 오겠습니다" 라고 하면, 물론 그래도 음식은 나오는데, 하지만 그 음식을 먹는데는 참여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시어머니가 "너는 너밖에 모르잖아" 라고 하면서 쫓아내어 버린다는 말이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인데, 그것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지, "내가 예수님을 믿으니 보상을 해주세요" 라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 세상 돌아가는 것은 다 주님이 알아서 하실 것이니, 저는 주님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시켜만 주세요" 라고,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주님은 뭐라고 하겠습니까? "지금 니가 하는 것이 다 내가 시켜서 하는 것이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책임을 지고 !!


아무튼 왕이란 본인만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12지파를 책임지는 자리라고 했는데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은 본인만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부활되는 것이 부활의 '첫 열매' 라고 하는데, 그러면 두 번째 열매가 있다는 것인데, 누가 그렇게 하십니까? 우리가 알아서 하는 겁니까? 왕이신 예수님이 책임을 지고 하시는 겁니까?


왕이신 예수님이 책임을 지고 하시는 것인데, 바로 그 관계를 믿는 것이 '믿음' 이라는 말이죠. 우리가 무엇을 제대로 했다는 것이 아니라, 왕을 잘 만나서, 모든 일을 제대로 하시는 왕 때문에 모든 일에 엉망인 우리를, 그러니 우리의 이름이 아니라 왕의 이름으로 구원을 하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거기에 주목하게 된다는 말이죠. 


(계 20:5)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계 20:6)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첫째 부활과 첫째 사망, 둘째 부활 둘째 사망 !!


여기에 보면, '첫째 부활'이 나오고, 그리고 '둘째 사망'이 나오는데, 그러니 부활이 첫째 부활이 있고 둘째 부활이 있고, 사망도 첫째 사망도 있고 둘째 사망이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첫째 부활과 첫째 사망은 어디에서 일어났을까요? 우리의 왕이신 예수님에게 일어났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게 그대로 끝나는 게 아니고, 그것을 이 세상에 그대로 적용시키게 되면, 예수님의 그 첫째 부활로 인해서 첫째 사망에 이른 자들 중에서, 예수님과 관련성이 있는 자들은 둘째 부활에 해당이 되고, 반면에 관련성이 없는 자들은 둘째 사망에 해당이 된다는 겁니다. 여기에서 둘째 부활을 천국이라고 하고, 둘째 사망을 지옥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전혀 복잡하지가 않는데, 예수님에게 일어난 것이 함축되어있다는 겁니다. 갑자기 강의제목을 '함축'으로 바꾸고 싶은 욕망이 일어나는데(ㅋㅋ), 즉 예수님의 공생애에 우리의 미래가 축소되어서 다 들어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죽기 살기로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하고,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게 우리의 운명이기에 말이죠.


그 코스가 성도에게는 둘째 부활인데, 그런데 그동안 그렇게 친했던 친구와는, 그야말로 죽마고우인데, 그런데 점점 더 멀어져 간다는 겁니다. 둘째 부활의 코스로 가는 사람은 예수님의 이야기가 그래도 가끔은 나오는데, 전적으로 나온다고 하면 여러분이 부담을 가질까 싶어서 못하겠는데 말이죠(ㅋㅋ).


요즘 같으면 최순실과 박근혜 이야기가 대부분인데, 그래도 마무리는 예수님 이야기로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저쪽은 어떻습니까? 입만 벌리면 정치 이야기라는 말이죠. 그래서 결론은 "더럽다. 이민이나 가볼까?"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죠. 하지만 아브라함은 무엇입니까? 그게 아니라, "시끄럽다. 그만 떠나라!" 라는 겁니다.


이민이 나쁜 것이 아닌데, 그게 의미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이 세상이 아무 것도 아니구나. 이민을 가도 별 것이 아니다" 라고 하면 되는데,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정유라처럼 덴마크에 가서 버틴다고 하면, 여전히 이 세상에 대한 집착이 너무나 강렬하다는 겁니다. "우리의 본향은 하늘에 있고, 우리는 이 땅에서 나그네다" 라고 하는, 히브리서 11장 말씀에 어긋난다는 말이죠.  


(히 11: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히 11:14)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여기서 교재 35페이지를 살펴보겠습니다.


** 여기 A와 B라는 두 지점이 있다고 봅시다. A는 위로 가고 B는 내려가는 겁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자기는 가만히 있는데 상대방 쪽에서 움직인다고 본다는 겁니다. 그러면 누가 움직였다는 것을 누가 정하지요? 정해줄 사람이 없습니다. 서로 보는 입장에 따라서 다르게 때문에, 확실하게 규정을 지을 수가 없다는 말이죠. 이것이 바로 갈릴레오 갈릴레이(1564~1642)의 상대성 원리라는 겁니다.


갈릴레이의 '상대성 원리' !!


그러니 누구는 움직이고 누구는 서있다고, 그렇게 이야기할 절대적인 권한을 가진 사람은 이 세상에는 아무도 없다는 말이죠. 쉽게 말해서 "모든 의미와 가치는 상대적이다" 라는 겁니다. 그것을 갈릴레이의 '상대성 원리' 라고 한다는 말이죠.


계속해서 교재를 보겠습니다.


** 따라서 뉴턴(1642~1727)이라는 사람은 누구누구를 따로 절대자로 삼지를 않고, 절대공간을 따로 책정합니다. 이는 데카르트(1596~1650)가 만든 좌표를 염두에 두는 공간입니다. Y=X, 이것은 중학교에서 나오는 수학입니다.  


드디어 교황이 된 과학과 기술 !!


뉴턴 이전까지는 특정 사람이 기준이 되었는데, 그게 바로 교회의 수장인 '교황' 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18세기에 와서 뉴턴이 등장하면서, "사람은 절대적이 아니라" 라고 하게 되었는데, 사실상 그것은 이미 그리스 철학에도 나온다는 말이죠. 프로타고라스가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 라고 했는데, 그렇게 측정하는 것을 '캐논(CANON)' 이라고 하는데, 즉 측정하는 기준은 사람에 따라서 다르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람 위주로 하다가 뉴턴에 와서는, 뉴턴이 과학자인데, 드디어 과학이 기준을 쥐게 되었다는 말이죠. 그래서 과학과 기술이 절대적 기준이 되는 시대가 바로 18세기라는 겁니다. 이게 서양에서 먼저 했기 때문에, 서양은 동양과 전쟁을 해서 이길 수가 있었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과학에서 기술이 나오고, 그 기술은 전쟁무기의 발달로 이어진다는 겁니다. 그러니 동양은 서양을 이길 수가 없다는 말이죠.


영국의 동인도 회사에게 진 중국 !!


그래도 동양에서는 제일 강하다고 하는 중국이 1840년에 아편전쟁을 하면서 누구에게 졌습니까? 영국에게 졌습니까? 그게 아니라 영국의 한 회사에게 지고 말았다는 겁니다. 영국의 정규군에게 진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옛날에는 해적들이 많았기 때문에 국가에서 큰 상선에는 대포를 달게 해주었는데, 그 대포가 청나라를 물리쳤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아편전쟁이라는 말이죠.


차이가 그렇게 나는데,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최근에 미국과 이라크가 전쟁을 했는데,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라크 군대가 숫자적으로 10배나 많았는데도 15만명이나 전멸을 당했다는 겁니다. 그것은 미군기술이 발달해서, 낮에도 공격을 하지만 밤에도 적외선을 사용해서, 그야말로 밤과 낮을 가지리 않고 공격을 마구 해댄다는 말이죠.


그 공격하는 비행기는 무인 폭격기인데, 일종의 '드론' 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렇게 앞으로의 전쟁은 사람이 하지 않는데, 기계가 다 한다는 겁니다. 기계는 겁도 없고, 잠도 자지 않는데, 그러니 얼마나 전쟁을 하기에 적합한지 모른다는 말이죠. 물론 영화에 보면 배신을 해서 자기를 만든 인간을 공격하는데 말이죠. 그러니 과학과 기술이 절대적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자본과 기술 !!


그렇다면 이게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과학과 기술이 절대적이라는 말은, 나머지 다른 것들은 다 상대적이 될 수밖에 없는데, 그렇지요? 과학에서 기술이 발달한다고 했는데, 그런 기술이 발달하면 자본이 축적되는데,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것이 바로 자본주의, 즉 '돈' 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자본가는 자기 자본을 더욱 더 키우기 위해서 과학에 투자를 하게 되고, 그러면 그게 기술로 발전이 되고, 그게 대량생산으로 이어진다는 겁니다. 그러면 또 자본이 늘어나고, 그게 계속해서 돌고 도는데, 그러면 결국 인간은 돈의 노예가 되고 만다는 것이죠.


과거에는 상품을 만들기 위해서 공장을 세웠는데, 그런데 이제는 돈을 벌기 위해서 세운다는 겁니다. 옛날에는 상품이 먼저 있고, 그러면 그것을 소비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게 돈이 목적이 되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 상품자체에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소비하는 쪽에 가치가 있기 때문에, 소비하는 쪽에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을 파악해서 상품을 만들게 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라고 하게 된다는 말이죠. 과거에는 그게 아니라, "만들어진 것을 사세요" 라고 했는데, 그런데 이제는 "무엇을 사고 싶습니까? 여러분이 원하시는 대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래서 과감하게 기존의 만들어진 것은 다 폐기하고 새로 만든다는 말이죠. 물론 낭비라고 할 수도 있지만, 돈을 더 벌 수 있다고 하면, 그것은 낭비가 아니라 투자라는 겁니다. 그게 바로 돈이 절대적 가치가 되기 때문에 그러한데, 나머지는 다 상대적이 된다는 말이죠.


돈이면 모든 것이 다 용서가 !!


옛날에 교회에서는 예수님의 피가 우리의 죄를 용서한다고 가르쳤는데, 물론 지금도 말은 다들 그렇게 하지만 실상 그 분위기는 무엇인고 하니, 아이들이 공부만 잘하면 모든 것이 용서가 된다고 하는, 그런 모습이라는 겁니다. 반면에 아무리 착실해도 공부를 못하면 어떻다는 겁니까? 용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죠.


예를 들어서, 주일학교 때부터 예배시간에 전혀 빠지지 않고 착실하게 참석하는 아이는 반에서 꼴등을 하고, 한 달에 한 번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놈은 반에서 계속해서 일등을 한다고 하면, 그렇다면 그 아이의 부모는 누구를 더 좋아하겠습니까? 부모는 당연하고, 목사도 두 번째 아이를 더 좋아할 것 같은데 말이죠.


이것은 어릴 때이고, 어른이 되어서 사회에 나오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 한 달에 용돈을 백만원씩 주는 자식은 모든 것이 다 용서가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용돈을 고사하고 돈만 말아먹는 자식은 아무리 열심히 교회에 다녀도 용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돈이 절대적이고, 다른 모든 것은 상대적이 되어버린 시대이니 말이죠. 


여기 교재 35페이지에 나오는 것은 과학에 관한 것인데, '절대 공간' 이야기라는 겁니다. 방금 이야기했던 것이 36페이지까지 이어지는데, 일단 교재 36페이지를 보겠습니다.


** 과학은 모든 것을 '규격화' 합니다. 질보다 양으로 인간을 따지는 겁니다. 그것은 양이 질을 대신하는 과학시대이기 때문입니다. 양으로 보잘것없으면서도 질적으로 우수하다는 것을 주장할 수 없는 시대에 우리가 놓여있다는 겁니다. 


이제는 '양대 양'으로 !!


이제는 질보다 양으로 인간을 따지는 시대인데, 그러니 교회도 어떻게 됩니까? 그리스도의 몸을 교회라고 하는 것은 성경의 주장이고, 세상에서는 당연히 큰 교회를 이야기한다는 것이죠. 부동산이 값이 많이 나가고 교인수가 많은 말이죠. 그러니 좁은 공간을 빌려서 예배를 드리면 교회로 쳐주지도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오늘날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옛날의 구약 이스라엘을 봐도 그런 현상이 나타난다는 말이죠. 자기들은 덩치가 작아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면서 통곡을 한 자들이 바로 이스라엘이라는 겁니다. 그게 신명기 1장에 나오는데, 28절과 45절입니다.


(신 1:28) 우리가 어디로 갈꼬 우리의 형제들이 우리로 낙심케 하여 말하기를 그 백성은 우리보다 장대하며 그 성읍은 크고 성곽은 하늘에 닿았으며 우리가 또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노라 하는도다 하기로


(신 1:45) 너희가 돌아와서 여호와 앞에서 통곡하나 여호와께서 너희의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며 너희에게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셨으므로


왜 이런 현상들이 일어납니까? 질에서 양으로 바뀌다가보니, 그만 양과 양의 대결로 바뀌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니, 당연히 덩치가 큰 자들을 보고 그리고 왜소한 자기들을 보니, 겁이 나서 도저히 울지 않을 수 없는데, 그러니 이게 오늘날 우리에게 얼마나 큰 교훈을 주는지 모른다는 말이죠. 현재 우리와 그 사고방식이 너무나 똑같다는 겁니다.


그렇게 하나님으로부터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영생을 선물로 받았다고 한다면, 물론 우리교회의 이야기는 아니지만(ㅋㅋ), 그런데도 뭐라고 합니까? "영생을 받으면 무엇을 하겠노? 집에 돈이 없는데, 자식이 아픈데, 장사가 안 되는데!"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이게 과연 약속 가운데 들어있는가?


그러면 강의를 끝냈다고 치고 여러분에게 물어보겠는데, 과연 하나님께서는 이런 모습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까요? 하나님이 주신 천국은 약속으로 가는데, 그러면 과연 약속 안에 이런 내용이 들어있습니까? "덩치를 키워라. 잘 되어야한다" 라는 것이 들어있느냐는 겁니다.


약속은 예루살렘이고, 그 예루살렘에 왕이 있는데, 그 왕이 무엇을 해줍니까? 왕은 자기 백성들을 책임지는데, 그런 책임자는 있으면 되었지, 이 땅에서 좀 실패를 하면 어떠하냐는 겁니다. 어차피 자기 인생을 자기가 책임질 것이 아닌데, 그럴 수 없다는 말이죠.


우리 각자가 자기 인생을 책임지고 지금까지 온 것인가요? 그러면 정말 대단한데,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말이죠. 그러니 "내 인생을 내가 책임지는 것이 아니구나. 나는 책임을 질 수 없는 죄인이구나" 라고, 그것을 알게 된 사람이 곧 다윗이고, 그 다윗을 통해서 다윗언약이 우리에게 왔다는 것이죠.


그러니 십자가가 오게 되면, 자기가 자기 인생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 말고 할 것도 없는데, 모든 것을 주님이 알아서 하시는데, 그러면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제가 무엇을 하면 됩니까?" 라고 하면서, 거기에 참여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게 성도이고,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말이죠.


이제 교재 36페이지를 보겠습니다.


**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모든 것이 삼성그룹이 중앙부를 차지합니다. 그래서 삼성그룹과 관련된 업체에 가까이 간 자들은 우리나라의 중심부에 접근하게 된 자들이고, 삼성과 무관하게 지내는 자들은 중심부에서 밀려난 인생을 사는 겁니다. 


그러니 이게 질이 아닌 양이라는 것인데, 그러니 과학 이야기를 계속해서 하고 있다는 겁니다. 수학 이야기도 그렇고 말이죠. 그러면 계속해서 교재 37페이지를 보겠습니다.


** 바로 이 A와 B 사이와 C와 D 사이는 늘 동일화가 진행되는데, 이것을 가지고 자아, 혹은 자아 정체성으로 잡게 됩니다. 즉 자아란 필히 동일성이 지속되는 그 간격을 두고 말합니다. 그래서 낯설고 돌발적인 사태가 일어나면, 자아 정체성은 다시 재조립을 시도하면서 또 나름대로의 동일화를 이끌어내려고 한다는 겁니다.


체감의 법칙 !!


여기에 동일화가 나오고 자아 정체성이 나오는데, 우리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해야하는고 하니, 지금이 과학시대가 되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러니 질보다 양이 중요하다는 것인데, 즉 A와 B 사이에 질이 동일해야 하는데, 그런데 그 양은 차이가 난다는 말이죠. 즉 옛날에는 월수입이 200만원이었는데 지금은 300만원이라고 하면, 그러면 이제 성공했다는 겁니다. 그만큼 양이 늘어났으니 말이죠.


그렇다면 양이 늘어났다는 것에 대해서 동질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겠습니까? '나' 라는 인간은 동일한데, 즉 질은 동일한데 그런데 수입은 200만원에서 300이 되었으니, 그렇게 수입은 늘어났으니 어떻게 됩니까? "나는 성공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은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너는 니가 300을 버는 순간 너는 질이 다른 인간이 되었다는 것을 왜 생각하지 못하는가?"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점점 더 천국과는 멀어지고, 또한 이 세상에서 실패할까 싶어서 점점 더 심하게 떨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게 그만 300에서 250으로 내려갔다고 하면, 즉 C에서 D로 말이죠. 겨우 50이 내려갔는데도, 그만 낙담을 하고 난리가 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게 이상하게도 200에서 300이 될 때의 그 기쁨보다도, 300에서 250이 될 때의 그 슬픔이 훨씬 더 크다는 말이죠. 50퍼센트밖에 안 되는데, 그런데 느끼는 것은 그 2배가 더 된다는 겁니다. 


경제학에서는 이것을 '체감의 법칙' 이라고 해서 따지는데, 인간의 쾌락이라는 것이 잘될 때는 모든 것이 자기 탓이고, 못될 때는 남의 탓이라는 겁니다. 그 행복을 수치로 정하면, 잘될 때를 '20' 이라고 한다면, 못될 때 조금만 못해도 그 '20'을 다 까먹고 '-30'으로 내려간다는 겁니다.


이게 인간인데, 그러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물론 경제학에서는 이유를 모르고, 철학에서 다룹니다. 왜 그런고 하니까, 동질성이라는 것은 과거에서 정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서 '나'라는 것을 정하다보니, 200시절을 생각하지 못하고 자기는 늘 300시절에 살고 있었다고 여긴다는 말이죠. 그렇게 되어야 마땅한 존재라고 착각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근호 목사님, 300명 교회로 와주세요 !!


이것은 개척교회의 목사들이라면 너무나 잘 느끼는데, 만약에 저에게 300명이 모이는 교회의 장로가 와서 자기 교회에 와달라고 부탁을 한다면, 그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300명에서 400명으로 만들어서 달라는 것인데, 즉 A에서 B로 말이죠. 그런데 일년이 지나고 나니 400명은 고사하고 20명이 되었다고 하면,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물론 복음을 전해야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데 말이죠. 복을 받으려고 나온 사람들은 다 떠나고 없고, 그 20명도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믿어야 합니다" 라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몰라서 남아있다는 겁니다. 그래도 좋게 봐주어서 그 20명이 복음을 알아듣고 남아있다고 하면, 그러면 질적으로 어떻게 되는 겁니까? 언약에 합당한 사람들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처음부터 20명이 진짜이고 나머지 280명은 다 가짜였다는 것이죠. 그 가짜들 때문에 교회가 가짜 교회였는데, 그런데 280명이 나가고 나서 진짜 교회가 되었다는 겁니다. 교회가 아닌 그리스도만 바라보는 20명이 남아있으니 말이죠. 그러면 질적으로 전혀 달라졌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들은 질적인 것은 인정해주지 않는데, 그래서 "꼴좋다. 20명으로 교회가 유지되겠나? 그러니 목사 당신의 월급은 이제 없어!"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왜 400명에서 500명으로 가야되는고 하니까, "나는 이 정도가 되는 교회의 장로야"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하다가 그만 시골에서 10명이 모이는 교회의 장로가 되면 기분이 그야말로 묘해지는데, 행복감이 확 줄어들고 만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놀던 마당이 다르니 말이죠. "내가 이럴려고 여기 시골에 왔나?"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ㅋㅋ).


그러니 우리가 얼마나 과학과 그 기술에 세뇌를 당하고 있는지 모르는데, 질이 아닌 양으로 따지는 말이죠. 그러니 철저하게 악마적인데, 그러니 당연히 큰 교회를 바라보게 되지, 예수 그리스도의 함축된 공생애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성경말씀을 보지 않는다는 말이죠. 요즘은 스마트폰에 아예 넣어서 다니니, 더 그렇다는 겁니다.


이제 이것만 하고 마치겠는데, 교재 39페이지를 보겠습니다. 
 
** 전도서 3장을 살펴보면, 전도서 전체를 설명할 수 있는 개념이 하나 반복해서 나오는데, 그것은 바로 '때' 라는 겁니다.  


(전 3:1)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전 3:2)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전 3:3) 죽일 때가 있고 치료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전 3:4)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전 3:5)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전 3:6)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전 3:7) 찢을 때가 있고 꿰멜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전 3:8)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헛됨'과 적절한 '때' !!


그것을 헬라어로는 '카이로스' 라고 하는데, 우리나라 말로 번역하면 '적절한 때' 라고 할 수가 있는데 말이죠. 그러면 이것을 어떤 상황 속에서 말씀하시는고 하니까, 전도서 1장의 상황에서 전도서 3장을 이야기한다는 겁니다. 전도서 1장에는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전 1:1)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전 1:2)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이렇게 "모든 것이 헛되다" 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이렇게 헛된 것뿐인데 우리는 왜 살아야 합니까? 그것은 바로 '때' 라는 것 때문인데, 그 때를 증거하기 위해서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헛됨'도 알고 '때'도 알아야 하는데, 두 가지를 다 알아야 한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은 헛되지만, 그렇게 헛되기 때문에 이 때가 의미가 있다" 라는 겁니다. 그러면 이 때를 누가 정했습니까? 하나님께서 헛된 세상에 때를 집어넣었다는 말이죠. 그러니 모든 것에는 적절한 때가 있다는 겁니다. 그 때가 하나의 스토리를 이루고 역사를 이루는데, 그것들이 모아져서 '전도서' 라는 하나님의 계시말씀을 이루는데, 즉 예루살렘의 왕이 하는 일을 적절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전도서라는 것이죠. 예수님의 일을 말이죠. 


그렇게 모든 것이 헛되다고 하면 우리는 그야말로 살아갈 희망이 다 없어지고 마는데, 그렇지 않아도 봄이 되면 호르몬 이상으로 우울증이 온다고 하는데 말이죠. 그런데 이 전도서를 보고 더 우울하게 되면 어떻게 하느냐는 겁니다. 그런데 '때'가 있다는 말이죠.


그것이 어떤 때인고 하니, 2절에서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라고 하는 것은, 그 주도권이 누구에게 있다는 겁니까? 주님이 쥐고 계시는데, 우리는 그렇게 주도권이 주님에게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나야만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1958년에 태어났고, 또한 1966년에 태어났다는 겁니다.


그렇게 자기 인생을 소급해서 바라보게 되는데, 즉 그때 태어나야 하기 때문에 태어났고 아파야 하기 때문에 아팠다는 말이죠. 또한 장가를 가야하기 때이기에 장가를 갔고, 그리고 부도가 나야할 때이기에 부도가 났다는 겁니다. 물론 죽을 때가 되었기에 죽어야하고 말이죠. 그렇게 모든 것이 다 의미가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부도가 난 것을 두려워하면 안 되는데, 다시는 부도가 나지 않도록 그 주도권을 자기에게 넘겨오게 되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다" 라는 것을, 그것을 살아있으면서 나실인으로이 땅에서 직접 체험을 해보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즉 살아있는 말씀으로 살아가라는 겁니다. 


이제 교제 40페이지를 보겠습니다.


** 이처럼 '때'란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사건의 시작점으로서, 그래프가 단절되는 현상을 말합니다. 애초부터 하나님은 자아 정체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단절된 그래프 !!


이렇게 그래프가 단절되면 자기의 동질성이 끊어지게 되는데, 즉 "어제의 나가 오늘의 나가 아니다" 라는 것인데, 어제도 새로운 피조물이고, 오늘도 주께서 새로 만들어낸 피조물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나'와 '나'를 그냥 연결하는 게 아니라, "주님께서 이렇게 하셨습니다" 라는 것을 통해서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연결하라는 말이죠. 


그러면 자기 동질성이 아니라 주님의 살아계심의 일관성, 그것을 증거하게 된다는 겁니다. 즉 "어제는 내가 열심히 해서 살았고, 그러니 오늘도 열심히 하자" 라는 것이 아니라, "어제도 주님이 살리셨고, 오늘도 눈을 뜨게 해주셨군요"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므로 주님의 때를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가 하루하루를 더 살게 되는데, 그런데 내일도 계속해서 산다는 보장은 없다는 겁니다. 어제 낮에 엘리야의 까마귀 이야기를 잠시 했는데, 한 번 생각해보라는 말이죠. 아침까지 까마귀가 떡과 고기를 주었는데, 그리고 나서 까마귀는 가고 없는데, 저녁에 다시 와달라고 엘리야가 요청할 자격이 없다는 겁니다. 


오늘도 주님께서 !!


그것이 우리의 목숨도 역시나 마찬가지인데, 우리가 이렇게 오늘 살아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 이렇게 살아있으니 저녁까지 살려주세요" 라고 요구할 권한이 없다는 겁니다. 차를 몰다가 펑크가 난 터럭에 바치면 어떻게 됩니까? 그 순간이 마지막인데, 그 터럭기사가 악한 감정이 있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요즘은 졸음운전이 그렇게 많다고 하는데, 그렇게 와서 박아버리면 끝나고 만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뒤를 돌아다보면서 범사에 감사하면서 살아야 하는데, 즉 "주님께서 살려주시매 내가 살아있습니다"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 관계가 바로 언약의 관계이고, 그것이 바로 천국의 삶이 이미 시작된 성도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에게 일어나신 우리에게 일어난 일이라는 것을, 그것을 함축해서 보여주신 줄로 압니다. 그러니 이제는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면서 주님이 어떻게 사셨는지, 그것을 공감하면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7,4,2 오전11시에 마침.
                                          단절되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자아 때문에 참 힘이 드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