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9 외삽 070417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5. 14. 10:34
2017-05-11 22:05:24조회 : 39         
[17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9 - 외삽이름 : 구득영 (IP:203.223.97.162)

[17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9 - 외삽


                                                             07,04,17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42페이지부터 하겠습니다.


** 그러나 성경을 해석할 때는 원칙이 있습니다. 어떤 성경이든 예수 그리스도를 경유해서 해석이 되어져야 합니다. 이 말은 주님이 보여주었던 허무를 경유해서 해석이 되면, 처음에 경유하게 이전에 생각했던 그 해석이 허무한 해석으로 출구를 통해서 나오게 됩니다.  


성경해석은,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경유해야 !!


여기에 "어떤 성경이든 예수 그리스도를 경유해서 해석되어야 합니다" 라고 하는데, 그러니 하나님의 관점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1KM를 전진하면 하나님도 함께 전진하시고, 그것을 마태복음 17장에서는 "너희는 저의 말을 들어라" 라고 하시는데, 그것으로 성경해석은 완결이라는 말이죠.


(마 17: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은, "나는 너희에게 주목하는 것이 아니다" 라는 것인데, 즉 "너희 행세, 착함, 열심과 같은 것은 일체 보지를 않고, 나는 내 아들에게만 주목한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자기 아들에게 모든 일을 다 떠맡겼다는 말이죠.


심판까지 아들에게 !!


그래서 요한복음 5장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심판까지 아들에게 다 맡겼다" 라고 하시는데, 즉 "심판까지 니가 다 알아서 해라" 라는 겁니다. 이렇게 숨어있던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에 나타나셔서 자기의 모든 생각을 다 드러내셨다는 말이죠.


(요 5: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그래서 요한복음 3장에 보면, "아들을 믿고 인정하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반면에 아들을 인정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저주가 그 위에 머물러있다"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들을 기준으로 해서 일을 하신다는 겁니다.


(요 3:35)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니
(요 3:3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악마의 일은 기능으로 !!


그런데 예수님 당시에 그 아들은 인정하지 않지만 여호와는 인정하는 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누구입니까? 그들이 바로 유대인들인데, 그들은 예수님은 인정하지않지만 여호와는 인정한다는 말이죠.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나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여호와를 인정한다는 것은, 그것은 너희 아비가 악마이기 때문이다" 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악마가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해보아야 하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소식을 가리는 것, 즉 "하나님은 예수님만 생각한다" 라는 점에 대해서 거부하고, 하나님과 인간을 직접 연결하려고 하는 모든 시도가 바로 악마의 일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악마를 형체로, 모양으로 생각하지 말고, 기능으로 생각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로서 모든 운명이 결정된다" 라는 사실을 외면하게 만드는 모든 것이 악마의 일인데, 그러면 우리가 하는 일을 왜 안 됩니까? 예수님께서 대신해서 다 하셨기 때문인데, 그것을 성경에서는 '보혜사' 라고 하는데, 혹시 들어봤습니까?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보혜사, 변호사 !!


좀 어려운 용어인데, 쉽게 말하면 '변호사'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보혜사가 오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변호사가 계시니", 혹은 "우리를 대신할 분이 계시니" 라고 할 수 있는데, 그분이 알아서 우리의 모든 미래를 책임져 주신다는 겁니다.


여기에서 보혜사, 즉 성령을 받는 사람과 받지 않은 사람이 표시가 나는데,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겁니다. 사골교회에 가면 그런 할머니들이 많이 있는데, 물론 도시교회도 마찬가지이지만 말이죠. "무엇을 믿습니까?" 라고 하면, "하나님을 믿습니다" 라고 하는데, 목사들에게 모두들 그렇게 배웠으니 말이죠. 조물주 하나님을 믿는다는 겁니다.


내가 하나님은 믿는다는 것은, 내 최후의 착한 일 !!


그러니 이게 유대인인지 아닌지 구분이 되지 않는데, 그러면 예수님은 무엇인고 하면, 일종의 옵션이고 덤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을 구축해놓고, 거기에 예수님이란 숟가락만 놓는 식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그것이 바로 마귀입니다" 라고 하면, 그게 무슨 말인지 전혀 알아듣지 못한다는 겁니다. 


마귀라는 것이 모호한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자기가 생각한 하나님을 붙드는 것, 그게 바로 마귀의 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붙드는 것에 대해서 마귀가 왜 옹호를 해주는고 하니까,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믿는다는 것이 자기에게 있어서 최후의 착한 일이 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외삽(外揷, EXTRAPOLATION) !!


우리 인간이 성령을 받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제일 착한 일은 무엇인고 하니, 조물주를 믿는 것인데, 그것을 교재 43페이지에 뭐라고 하는고 하니, 거기에 아주 고급스러운 단어가 나오는데, '외삽(外揷)' 이라고 말이죠. 영어로는 'EXTRAPOLATION' 라고 하는데, 즉 "외부적으로 둘러친다" 라고 하는 의미라는 겁니다. 


이게 철학용어인데, 그러면 사람들이 전혀 사용하지를 않는 이런 용어를 왜 사용하는고 하니, 그런데 달리 쉬운 말로 하려고 하면 이게 더 어려워진다는 겁니다. 바깥에 나와서 둘러치는 것, 이렇게 길게 표현이 되는데, 그런데 그게 외삽의 의미를 정확하게 풀이해주는 것도 아니라는 말이죠.  


왜 그런고 하니, 'A' 라는 지점에서 'B' 라는 지점으로 간다는 것을 확실하게 안다고 치고, 즉 'A' 라는 것이 원인이 되어서 'B'가 되었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차가 고장이 났다. 그래서 나는 걸어왔다" 라고 하면 딱 말이 된다는 말이죠. "왜 걸어왔어? 차가 있잖아?" 라고 하면, "응, 차가 고장이 났어" 라고 하면, 그것으로 다 설명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B' 지점이 집은 아닌데, 아직까지 집까지는 반이 더 남았다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집이라는 'C' 지점까지 왔을 때, 이 점선을 두고 외삽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기존의 자기가 아는 그 원칙 그대로 자기가 도달하지 않은 미래까지 연속될 것이라고 짐작하는 범위인데, 그러니 바깥으로 둘러치는 것과는 좀 다르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이렇게 둘러치게 되면, 안에 있는 내용과 바깥에 있는 내용이 연속적이라고 하는 보장이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어렵지만 '외삽' 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데, 그러니 외삽이라는 것은, 'A'에서 'B'까지 일어난 그 원칙이 그대로 'C'까지 유지가 되어서 연장해서 이어진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인정해주실 것이다 !!


그러면 왜 이런 이야기를 성경을 공부하면서 하는고 하니, 자기가 조물주를 믿는데, 그렇게 조물주를 믿었던 착한 일이 자기가 죽어서도 연장이 되지 않겠느냐고 한다는 말이죠. 아직까지은 죽지 않았으니 말이죠. 그렇게 자기가 죽더라도 하나님께서 인정해주지 않겠느냐고 하는, 그만 그게 외삽이 되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종교인데, 지금 한국교회가 다들 그렇게 가르치고 있지 않느냐는 말이죠. 그것을 예수님께서는 악마의 일이라고 하시는데, 그러면 유대인들은, 바리새인들은 천국에 가봤습니까? 가보지를 않았는데, 그런데 하늘에서 살다가오신 분이 누구입니까?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겁니다.


유대인들은 천국에는 가보지 않았지만, 자기들이 하던 그대로 하면, 이것이 외삽인데, 오늘 강의제목을 이것으로 했으면 좋겠는데 말이죠. 아무튼 이것은 율법대로 하는 것이기에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인정해주실 것이라고 여기는 외삽적인 사고방식으로 천국을 가르쳤는데, 자기들만 그렇게 믿은 것이 아니라 온 국민들을 그렇게 가르쳤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뭐라고 하십니까? "너희들이 여호와를 믿기 위해서 하는 그 모든 일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다" 라고 선포를 해버리니, 그들은 예수님을 살해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죠. 그들에게 달리 다른 방법은 없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예수님을 살해한 것을 우리는 믿는데, 이것은 무슨 의미인고 하니, 유대인들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말이죠. "지금 내가 하는 일은 하나님께서 인정해주실 것이다" 라는 것을, 그렇게 자기 자신이 바로 유대인들이라는 것을 예수님이 오셔서 비소로 알게 되었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하는 그 어떤 일도 하나님은 받으시지 않으시고, 오직 예수님만 상대하신다" 라는 것인데, 그것을 두고서 "예수님을 믿습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달리 말하면 "나를 믿지 않습니다" 라는 의미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동안 살아온 자기의 가치는 다 허물어지고 만다는 것이죠. 


첫째, 가치관은 어디서 생기는가?


그러면 인간들의 가치관은 어디서 생길까요? 여기에 대해서 학자들이 연구를 많이 했는데, 즉 "인간들의 가치형성은 어디서 생기는가?" 라는 겁니다. 조선시대에는 여자를 왜 그렇게 우습게 보았느냐는 말인데, "남자는 하늘이고 여자는 땅이다" 라고 말이죠. 그것은 서양도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조선시대의 사람들은 그것을 묻지 않는데, "우리는 유교의 바탕 위에 있다" 라고 하는데, 그러면 유교가 옳다고 하는 가치관은 어디서 생겼느냐는 겁니다. 그런 것은 물으면 곤장을 맞는데(ㅋㅋ), 성종 때 '경국대전' 이라는 것을 완성했는데, 유교적 가치관에서 최고의 법을 만들었다는 말이죠.


조선을 세운 정도전은 불교의 고려시대를 끝내고, 모든 것을 유교중심으로 전환을 시켰다는 겁니다. 그렇게 유교중심의 가치관으로 가면, 왕 중심이 아니라 선비 중심이 되고 마는데, 즉 엘리트 중심이라는 겁니다. 배운 사람들이 정치를 하고, 거기에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 형식적으로 명령을 하는 자리가 곧 왕의 자리라는 말이죠. 정도전과 이성계와 함께 조선을 만들 때, 건국이념이 그러했다는 겁니다.


1948년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는데, 그때는 조선의 이념과는 다르다는 말이죠. 고려는 불교이고 조선은 유교지만, 대한민국은 근대의 인권중심이라는 겁니다. 즉 "사람 위에 사람이 없고, 사람 밑에 사람이 없다" 라는 것인데, 즉 민주주의의 가치관이라는 말이죠. "족보나, 혈통이나, 학벌이나, 종교나, 그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모든 것은 법으로 보호를 받는다" 라는 것이 대한민국의 건국이념이라는 겁니다. 


둘째, 가치관이 왜 변하는가?


그러면 이런 가치관이 어디서 왔느냐는 것인데, 그런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왜 가치관이 변하는가?" 라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10대에 이 세상을 보는 것과, 20대에 보는 것, 30대에 보는 것, 40대에 보는 것, 50대에 보는 것, 60대에 보는 것이 왜 다르냐는 말이죠. 그때그때마다 왜 다르냐는 겁니다.


물론 이런 이야기를 하면, "10대나 20대는 철딱서니가 없어서 그렇다" 라고 하는데, 물론 그들이 철이 없는 것은 맞는데, 그러면 철이 있으려고 하면 어떤 변화가 있어야 하느냐는 겁니다. 이게 참 답변하기가 곤란한데, 그런데 이게 엉뚱하게도 어디서 답변이 나오는고 하니, '에너지의 활용'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딸기를 따먹고 꿀을 따먹고, 그렇게 채집을 하면서 살아갈 때는 이동을 해야하는데, 그런데 그럴 때는 무엇이 번거러운고 하니, 가축이 번거럽고 소유재산이 번거럽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때는 대규모로 이동하기가 힘드니 소규모로 움직인다는 말이죠. 10명에서 50명 정도의 단위로 말이죠. 그럴 때는 소유재산의 가치가 없다는 겁니다. 


농경시대가 되면서 !!


그렇게 수렵채집을 하다가 농경시대로 바뀌게 되는데, 이 농경시대에는 목축도 포함이 되는데 말이죠. "야, 여기는 풀이 참 좋다" 라고 하든지, 혹은 "여기는 어떻게 물 반, 고기 반이네" 라고 하게 되면, 그러면 그 자리를 떠나겠습니까? 떠날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물고기에서 생존할 에너지가 나오는데, 그러니 힘들이 굳이 떠돌아다닐 이유가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정착을 하게 되는데, 그러면서 그 물고기를 보다 많이 잡을 도구와 같은 것들이 발달하게 된다는 겁니다. 이것은 어업에 관한 것이고, 그러면 농업의 경우는 어떻게 됩니까? 농사를 짓는데 그게 해마다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라, 가끔 홍수가 난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것을 미리 달력에 기록을 해놓았다가, 물론 처음에는 달력이 아니고 돌을 가지고 어떻게 표시를 하든지 하는데, 그렇게 해서 사람들을 모아서 관개시설을 만들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렇게 관개시설을 만들려고 하면, "아저씨, 거기 똑바로 좀 잡으세요" 라고 하면서 명령을 내릴 사람이 필요한데, 즉 추장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왕이 말이죠.


그리고 인간들이 서로 의사소통을 하려고 하면 언어가 있어야 하고, 그것을 기록으로 남기려고 하면 문자가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일을 하려고 하면 사람마다 다들 능력이 다르니, 힘이 센 사람이 있고 또한 머리를 잘 쓰는 사람이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게 분업화가 되는데, 그러면서 생산이 늘어난다는 겁니다. 


수렵과 채집을 할 때는 하루하루를 먹고 살았는데, 없으면 또 이동하고 말이죠. 물론 지금도 아프리카의 부시맨들은 그렇게 산다고 하는데 말이죠. 아무튼 이제는 굳이 이동할 필요가 없는데, 그리고 먹는 것보다도 더 남아돈다는 겁니다. 그렇게 남아돈다고 해서 '잉여 생산물' 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사유재산이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사유재산이 생기면 강도나 도둑이 있을 것이고, 그러면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법이 필요해진다는 겁니다. 그래서 기원전 17,000년경에 '함무라비 법전' 이라고, 그것이 역사상 최초의 법전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십계명을 무엇인가요? 그것을 법을 지키라고 온 것이 아니라, "여호와가 누구인가?" 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한 것이란 말이죠.


함무라비 법전과 십계명 !!


그러니 함무라비 법전 인간들끼리 어떻게 잘먹고 잘살 것인지, 거기에 관한 것인 반면에, 그런데 시내산에서 모세가 받은 법은 무엇인고 하니, 인간들끼리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을 만들기 위한 법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 십계명은 나중에 무엇과 결합되는고 하니, 제사법과 결합이 되는데, 그러면서 희생의 피가 발생하게 되고, 그 피가 묻어있는 언약궤가 이 세상의 인간중심의 세계를 물리치고 약속의 땅을 접수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 약속의 땅이 '가나안 땅' 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자기 가게 상호를 이런 것을 많이 짓고 했는데, 혹시 '가나안 제과점' 이라고 들어보셨나요? 물론 요즘은 거의 없는데 말이죠. 특별히 왜 제과점이 많았는고 하니까, 젖과 꿀이 흐른다는 겁니다. 그러니 빵이 아주 맛있다는 말이죠(ㅋㅋ).


여러분, 이 차이점을 알겠습니까? 이 세상의 가치관은 무엇과 연결이 되는고 하니, 첫째로 "내가 이 땅에서 어떻게 밥을 먹고 사는가?" 라는 것이고, 그리고 두 번째는 "사유재산이 생겼으니 어떻게 늘이는가?" 라는 겁니다. 그게 바로 가치관이라는 말이죠.


주님의 원수와 싸우게 하는 새로운 가치관 !!


어제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즉 "나의 재산과 내 몸에 해를 입히면 나의 원수가 된다" 라는 것인데, 하지만 성도에게 성령을 주신 것은 자기 원수와 싸우라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은 여자의 원수, 즉 예수님의 원수와 싸우라고 성령을 주셨다는 말이죠.


사람들은 성령을 받으면 부자가 되는 줄로 아는데, 성령을 받으면 말씀을 지키게 되고, 그러면 복을 받는 줄 안다는 겁니다. 하지만 성령이 오시는 것은, 우리가 구원을 받지 못하도록 발목을 잡는 진짜 원수가 누구인지 알라고, 그렇게 정신을 차리라고 하는 새로운 가치관이 주어진다는 겁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의한 가치관인데, 즉 예수님의 가치관을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다는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기존의 우리 안에 있던 가치관과 성령에 의해서 주어진 가치관이 서로 싸우게 되는데, 늘 싸운다는 겁니다. 우리의 가치관은 무엇입니까? 자기 생명과 자기 재산을 이 땅에서 지키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것을 더 확장시키려고 한다는 말이죠.


부자 되세요 !!


그게 바로 "부자 되세요" 라는 것인데, 즉 부자가 되어서 떵떵거리고 남들에게 갑질하는 것이 우리의 가치관이라고 하면, 주님의 가치관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라는 것인데, 그러니 달라도 완전히 다르다는 겁니다.


(마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특히 하박국서 3장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한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합 3: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합 3:18)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그런데 만약에 교회에서 이런 가치관을 자꾸 설교를 하면 어떻게 될까요? 만약에 그런 교회가 있다고 하면, 그런 교회는 얼마 가지를 못해서 문을 닫아야 하는데, 왜냐하면 기존의 자기 가치관을 위해서 온 사람들에게 주님의 가치관을 선포하게 되니 말이죠.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는 이유는 간단한데, 신에게 뇌물을 주고 30배, 60배, 100배를 얻으려고 하는데, 그런데 다른 가치관을 이야기하게 되면, 당연히 "이 교회는 이단이지?" 라고 나온다면 겁니다. 워낙 교회들이 세상 가치관을 이용해서 사람들을 모으는데 열중을 하다보니, 성경대로 하게 되면 이단이라는 소문이 난다는 말이죠. 지금 우리교회도 이 동네에서 이단이란 소문이 자자하다는 겁니다(ㅋㅋ).


다시 정리하면 !!


이 정도로 했으면 다시 확인을 해보겠는데, '외삽' 이라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유대인들이 자기들이 자기 나라 이스라엘을 지키는 방법으로서 율법대로 하면, 이 율법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고, 성경말씀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니, 그러니 그대로 하면 하나님이 엄청 좋아할 것이라고 여겼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방식이, 그게 진짜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께서 이 땅에 등장함으로 말미암아서, 그것이 다 거짓이고 악마의 유혹이었음이 드러났다는 말이죠. 그것을 외삽, 즉 엉터리라고 할 수 있는데, 우리 인간들이 "지금까지 내가 해왔던 대로 하면 된다" 라고 생각해왔던 것 자체가, 그게 마귀가 우리를 그렇게 유도해왔다는 겁니다.


그러니 어떤 면에서는 기적이나 기도의 응답을 받았다는 것 자체가 참으로 위험한데, 무슨 말인고 하니까, 이전에 기도한 것이 응답이 되어서 그게 그만 외삽이 되어버리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합니까? 그 다음에도 역시 또 그렇게 하게 된다는 겁니다.


저도 처음에는 그런 외삽적인 행동을 많이 했는데, 몸이 아플 때마다 기도를 하니까 낫더라는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구나. 나는 주의 사람이 맞구나" 라고 착각을 했는데, 그런데 복음을 알고 나서는, "아하, 하나님께서 마귀를 통해서 나를 그렇게 이끌었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때부터는 몸이 아프면 쌍화탕을 먹었다는 말이죠(ㅋㅋ).


굳이 기도해서 주님을 시험하고 말고 할 필요가 없더라는 겁니다. 그리고 더 알게 된 것은, 몸이 아픈 것이 비정상이 아니고 그것이 오히려 정상이라는 사실인데, 즉 감기에 걸리지 않고 건강하게 살아가는 것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이죠.


그러니 가치관이 반대로 뒤바뀌는 것인데, 노력해서 잘 사는 것이 정상이 아닌데, 왜냐하면 노력해서 가난한 사람이 90퍼센트를 넘는다는 겁니다. 사업을 열 명이 하면, 한 사람은 성공하고 나머지는 다 문을 닫는다는 말이죠. 우리동네만 보더라도, 제가 이사를 오고 나서 시작한 치킨집이 문을 닫았는데, 그러면 다른 치킨집은 장사할 맛이 난다는 겁니다. "나는 아직 망하지 않았어" 라고 하면서 말이죠.


이런 못나고 자기밖에 모르는 마음을 가지고도, 우리가 이렇게 밥을 먹으면서 산다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설명이 되지 않는데, 도대체 이것이 말이 되는 사고방식이냐는 겁니다. "나만 잘 되고 남들은 모두 다 망해라" 라는 것인데 말이죠.


그래서 연예인들이 이혼을 했다는 뉴스가 나오면, 겉으로는 안 되었다고 하면서도 속으로는 속이 시원하다는 겁니다. "까불다가 내 그럴 줄 알았어" 라고 하면서 말이죠. 자기는 아직 이혼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우리가 이란 못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런데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있으니, 이런 은혜가 어디에 있느냐는 겁니다.  


착각하지 말라 !!


그래서 누가복음 1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서 죽은 18명이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착각하지 말라. 너희들에게 경고하는 입장에서 그들이 먼저 죽었다" 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눅 13:4)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눅 13:5)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그러니 성경전체를 보라는 말이죠. 우리의 가치관이 얼마나 자기 개인위주인지 모르는데, 그게 바로 자기 생존을 위한 에너지 활용의 변천에 의해서 자기의 가치관이 그때그때 바뀐다는 겁니다. 그래서 로또에 당첨되기 이전의 가치관과, 그리고 로또에 당첨되고 난 그 이후의 가치관이 같을 수가 있겠습니까? 없는데, 당연히 바뀐다는 말이죠.


로또에 당첨되고 난 뒤에도 악착같이 사는 사람이 있던가요? 거의가 없는데,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아예 로또와 같은 것은 쳐다보지도 않는다는 겁니다. 로또의 모토가 무엇입니까? "인생은 한 방이다" 라는 것인데, 그것 때문에 로또를 구입한다는 말이죠. 로또를 구입한다는 것은 그만큼 욕심이나 허영심이 많다는 것이고, 달리 말하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 불만이 많다는 겁니다.


깡패, 즉 왕의 등장 !!


그렇게 남들이 더 부러워지는 가치관은 농경시대에 들어오면서 사유재산이 발생하면서 시작이 되는데, 그렇게 되니 누가 등장을 합니까? 깡패들이 등장하는데, 즉 "당신들의 그 남은 잉여재산을 내가 지켜줄 테니, 거기에 상응하는 보상을 해라"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 깡패를 한 글자로 '왕' 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데 말이죠.


다시 말해서, "너희들의 재산을 다른 민족들로부터 지켜줄 테니 자릿세를 달라" 라는 것인데, 그것을 요즘 말로 '세금' 이라고 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왕인데, 하지만 그 왕은 무너진다는 말이죠. 그게 언제인고 하니, 1776년 7월 4일에 미국에서 독립선언을 하게 되는데, 즉 "영국의 왕에게 더 이상 간섭을 받을 이유가 없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대표가 없는 세금은 없다" 라는 유명한 구호를 외치면서, 메사추세츠 주에 있는 보스턴에서, 프랑스의 도움으로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에 성공하게 된다는 것이죠. 그런데 프랑스의 루이16세는 이렇게 남의 일을 도와주다가 그만 단두에서 목이 잘리게 되고 말이죠. 그렇게 해서 "이제 왕은 없다. 왕은 우리에게 내재되어있다. 우리 각자 각자가 왕이다" 라고 나오게 되었다는 겁니다.


여기서 민주주의가 시작되는데, 그런데 서로가 다 왕이 되면 안 되니 대표자를 뽑는데, 이게 입헌주의, 즉 의회중심의 민주주의가 시작된다는 말이죠. 이게 1776년에 시작된 것이니 지금부터 불과 300년도 되지 않는데, 그러니 인류는 그 수많은 세월을 깡패들에게 삥을 뜯기면서 살아왔다는 겁니다.


농경사회와 봉건사회 !!


그러면 옛날에는 왜 민주주의를 하지 않고 그렇게 삥을 뜯기면서 살았는고 하니, 그때는 농경시대이기 때문에 토지를 가진 사람이 귀족이 된다는 겁니다. 그 토지는 전쟁을 통해서 깡패가 빼앗아서 준 것인데, 그러면 일반 사람들은 임대차 계약을 맺어서 살아간다는 말이죠. 그러니 토지는 왕과 귀족들의 것인데, 그것을 '봉건사회' 라고 한다는 겁니다.


땅 주인은 따로 있고, 농민들은 거기서 엄청난 세금을 뜯기면서 땅을 빌려서 농사를 지으면서 살아간다는 말이죠. 왕과 귀족들을 또 전쟁을 해서 땅을 빼앗아서 주면 된다는 겁니다. 광개토왕, 연개소문, 그들이 하는 짓거리가 무엇이었느냐는 말이죠. 표현이 좀 거시기한데, 아무리 우리나라라고 해도 그렇지 않느냐는 겁니다. 


김유신 장군도 그러한데, 물론 이순신 장군은 방어만 했지만 말이죠. 김유신 장군이 신라에만 머물러 있었던 것이 아닌데, 백제를 치고, 힘이 부족하니 당나라의 힘을 빌어서 고구려를 치는데, 그게 바로 깡패들이 하는 짓이라는 겁니다. 남의 나라 땅을 주인의 허락도 없이 빼앗는 것이니 말이죠. 그런데 그게 신랑의 입장에서는 위대한 왕인데, 그러니 얼마나 가치관이 자기 중심적이냐는 겁니다.


(녹취 구 - 해군군함에는 삼국을 통일한 김유신함이나 김춘추함은 없다고 하는데, 광개토함은 있어도 말이죠. 왜냐하면 통일을 하는데 동일한 민족을 쳤다고, 그것도 남의 나라의 힘을 빌려서 말이죠.)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당연히 지옥으로 !!


여기에 대해서 저에게 어떤 질문이 들어오는고 하니,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온 지가 얼마 되지 않는데, 그러면 그 이전의 사람들은 지옥에 갑니까?" 라고 하는데, 당연히 지옥에 간다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순종치 아니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말이죠. 늦게 들어오던 말던 간에,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반드시 지옥에 간다는 겁니다.


"아이쿠, 그 훌륭한 우리나라의 선조들은 어떻게 합니까?" 라고 하는데, 하늘나라에 무슨 대한민국이 영향력을 미치느냐는 말이죠. 하늘나라는 예수님의 나라이지, 단군의 후손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자기가 태어나고 산다고 해서 성경말씀을 그렇게 끼어 맞추면 안 된다는 말이죠.


지금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경말씀을 자기 이스라엘 위주로 보는데, 즉 "언젠가 다윗의 자손이 메시야가 오면 이스라엘은 전 세계의 제사장 나라가 될 것이다" 라고 말이죠. 그것을 유대교라고 하는데, 이스라엘 전체가 그러하고, 미국에도 제법 이런 유대교를 믿는 자들이 있다는 말이죠.


그들은 신약은 믿지 않고 오직 구약만 믿는데, 또한 구약을 문자적으로 보면 그렇게 보이는 것 같기도 한데, 그런데 신약에 오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이제는 십자가를 통해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여자나 남자나 종이나 자유자나 할 것 없이, 그리스도로 옷을 덧입는 사람은 모두가 다 천국 백성이라는 겁니다.


(고전 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성도는, 무국가주의자 !!


그래서 성령을 받고 성도가 된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 '무국가주의자' 라고 할 수 있는데, 즉 "이 땅에 내 나라가 없다. 본향은 하늘에 있다" 라는 것이죠. 그런데 이게 '무정부주의자' 와는 다른데, 그들은 "정부가 필요가 없다" 라고 주장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로마서 13장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이 땅에 정부가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악이 너무 범람해서 안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사자 역할을 하라고 이 땅에 관료들을 허락하시는데, 그래서 법질서가 주어져 있는데,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거할 영원한 나라는 아니라는 말이죠.  


(롬 13:1)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이 땅에 있는 관료들은 하나님의 심부름꾼에 불과한데,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질서가 필요하기 때문에, 그렇게 분위기를 조성해준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질서 유지책으로 그들을 사용하시는데, 물론 사용하신다고 해서 구원을 시켜주는 아니지만 말이죠.


그 예로서 이사야서에 나오는 '고레스' 왕을 들 수 있는데, 메대바사, 즉 페르시아인데, 그때의 고레스 왕이 그런 역할을 했다는 겁니다. 그 왕은 여호와 하나님을 모르는데, 그런데 그 왕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자기들 본토로 돌아가도록 해준다는 말이죠. 그러니 고레스가 마치 메시야와도 같은 역할을 하는데, 이사야 선지자가 그것을 예언하고 있다는 겁니다.


(사 45:1) 나 여호와는 나의 기름 받은 고레스의 오른손을 잡고 열국으로 그 앞에 항복하게 하며 열왕의 허리를 풀며 성 문을 그 앞에 열어서 닫지 못하게 하리라 내가 고레스에게 이르기를


천국은, 예수님의 나라 !!


그래서 성경을 자기 중심으로 해석을 하면 안 되는데, 처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어떤 성경이든 예수 그리스도를 경유해서 해석되어야 합니다" 라고 했다는 말이죠. 그리고 하늘나라는 예수님의 나라인데, 그러니 그 나라에 들어가고 말고 하는 것은 누구의 소관이라는 겁니까? 예수님의 결정에 달려있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오라고 하면 오고, 오지 말라고 하면 안 된다는 말이죠.


어차피 우리는 갇혀있는 입장이기에 어쩔 수가 없는데, 그래서 구원을 받은 사람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 때문에 구원을 받았습니다" 라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것도 진지하게 말이죠. 그러면 "예수님 때문에 구원을 받았습니다" 라고 하는 전제가 무엇인고 하니까, "내가 나를 구원할 수 있는 그 어떤 능력도 나에게 나올 수 없습니다" 라는 것인데, 성령을 받지 않으면 이러한 순수한 고백이 나올 수 없다는 겁니다.


자기가 아무리 기도를 하고 전도를 하고 봉사를 해도, 이것은 전혀 자기 구원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인데, 성만찬을 한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죠. 어제 부활절을 지킨다고 하면서 어떤 교회는 달걀처럼 생긴 초코렛을 나누어주었다고 하는데, 돈이 많으니 별 짓을 다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번 부활절 때문에 시중에서 달걀 값이 올랐다고 하는데, 30개 한 판에 만원을 한다고 하니, 이게 말이 되느냐는 겁니다.


성경에는 절기를 지키지 말라고 분명히 나와있는데, 그런데 교회에서는 왜 성경말씀을 무시할까요? 그것은 바로 '내 교회' 라는 자기의 사유재산을 지키기 위한 수작에 지나지 않는데, 이런 것들이 다 오늘 강의의 표현대로 하자면 '외삽'에서 나왔다는 말이죠. 


(골 2:16)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골 2:17)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여기서 다시 교재 42페이지를 펴보겠습니다. 


** 그러나 성경을 해석할 때는 원칙이 있습니다. 어떤 성경이든 예수 그리스도를 경유해서 해석이 되어져야 합니다. 이 말은 주님이 보여주었던 허무를 경유해서 해석이 되면, 처음에 경유하게 이전에 생각했던 그 해석이 허무한 해석으로 출구를 통해서 나오게 됩니다. 성전을 짓겠다고 생각하고 성전을 지어보지만, 그 성전마저도 허무의 또 다른 모습인 것이 드러나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반드시 허무를 경유해야 !!


여기에 "주님이 보여주었던 허무를 경유해서 해석이 되면, 처음에 경유하게 이전에 생각했던 그 해석이 허무한 해석으로 출구를 통해서 나오게 됩니다" 라고 하는데, 문장이 길고 또한 어려운데 말이죠. 그래서 그 다음 그게 무슨 의미인지를 설명해주고 있다는 겁니다. "성전을 짓겠다고 생각하고 성전을 지어보지만, 그 성전마저도 허무의 또 다른 모습인 것이 드러나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라고 말이죠. 


성경을 예수님 중심으로 해석한다는 것은 분명히 맞는 말인데, 그런데 그렇게 예수님을 중심으로 할 때는 반드시 허무를 경유해야 한다는 겁니다. 지금 이게 전도서이니 말이죠. 즉 헛되고 헛되며 헛되니 모든 것은 헛되다는 겁니다.


그러니 반드시 허무를 경유해서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을 제대로 해석할 수 없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예수님을 해석해내는 자기 능력과 자기 자질에 대해서 흐뭇해하는 것이 바로 우리 인간이기 때문에 말이죠. 그게 문제가 된다는 겁니다.


어느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었는데, 탕자가 가출을 했기 때문에 아버지를 제대로 안다는 말이죠. 그 아들이 그냥 형과 같이 아버지를 모셨다고 하면,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모른다는 겁니다.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해서 아버지를 아는 것이 아니라, 자기는 아들됨의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 때만 아버지를 안다는 것이죠.


다시 말해서,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다" 라고 한다고 해서 아들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아들의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 때, 그런 자기를 아들로 보담아주시는 아버지의 기능, 그것이 바로 아버지를 다시 아버지로 새롭게 이해하게 만든다는 겁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그러면 우리도 가출을 하고 교회도 나오지 않고 깽판으로 살면 됩니까? 그래야 우리가 하나님을 제대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라고 할지 모르겠는데, 지금 열심히 깽판을 치고 있는데, 무슨 새삼스럽게 가출을 하고 교회에 나오지 않고 하느냐는 것이죠. 지금 살고 있는 것 자체가 그러한데 말이죠(ㅋㅋ).


왜 우리는 남들이 이혼하면 고소한가?


우리는 남들이 이혼하면 고소한데, 이게 바로 가출이고 깽판이라는 겁니다. 이런 자기 중심을 우리는 죽을 때까지 버릴 수가 없다는 말이죠. 자기는 잘되고 남들은 못되어야 하는데, 다같이 잘되면 좋을 것 같지만, 그러면 사는 맛이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옆에서 누가 망하고 하면, 약간의 긴장감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맛이 난다는 말이죠.


이것은 타고난 것인데, 우리 인간은 죄 가운데 태어났다는 겁니다. 이것을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말이죠. 경쟁이 왜 있습니까? 경쟁이 없이는 나라가 될 수가 없는데, 우리나라가 그래도 잘 산다고 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지하자원이 있습니까? 지리적, 정치적 환경이 좋습니까? 전혀 그렇지가 않은데, 그 이유는 단 하나인데, 그것은 엄마들의 치맛바람이라는 겁니다. 


치맛바람 덕분에 !!


그게 바로 사교육인데, 무슨 말인고 하니, 세계시장에서 필요한 것은 양질의 생산성인데, 제대로 된 인간을 인간을 뽑아야 회사가 된다는 것이죠. 놈팽이들을 모아놓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사교육을 통해서 아이들을 그냥 죽여놓는데, 선행학습이니 뭐니 하면서 말이죠. 그런 아이들을 끌어 모아서 지금의 삼성그룹이 되었다는 겁니다. 


이것이 다 옛날에 일본이 했던 것인데, 일본의 유명한 기업들이 다 그렇게 해서 세계시장을 휘어잡았다는 겁니다. 공부를 하지 않는다면 무슨 양질의 생산성이 나오겠느냐는 말이죠. 물론 아이들은 죽을 맛인데,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다른 것이 아무 것도 없으니, 그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고생을 하지 않고 잘사는 방법이 없다는 말이죠. 


"젊어서 고생을 사서한다" 라고 하는데, 젊을 때 고생을 해야 늙어서 고생을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 땅에서는 그것 외에는 달리 대안이 없다는 말이죠. 지하자원이 많다고 해서 잘 사는 것도 아닌데, 중앙 아프리카나 러시아는 지하자원이 없어서 그렇게 힘들어합니까? 특히 러시아는 위에 있는 놈들이 돈을 다 가지고 가고 빈민층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는 말이죠. 


중국이 요즘 조금 산다고 하는데, 그것은 화교출신들이 유학을 갔다가 돌아와서 그러하다는 겁니다. 그런 양질의 인력이 있으니 말이죠. 그리고 지금은 중국의 치맛바람이 우리나라보다도 더 심하다는 겁니다. 초등학교 2학년에게 벌써 논문을 쓰는 법을 가르친다고 하는데, 물론 학원에서 말이죠. 아이를 완전히 잡아버린다는 겁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이 치열한 세상에서 살아남는 것이 목적인데, 그런데 그 사는 모습이 죽을 지경이라는 겁니다. 살려고 하는데, 그게 사는 것이 아니라 죽는 것과 같다는 말이죠. 그러니 얼마나 모순인지 모르는데, 잘 살려고 하면 죽어야하니 말이죠. 좀 편안하게 살려고 어릴 때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중에 고생을 죽도록 하는데, 이게 바로 허무한 이 세상의 모습이란 겁니다.


결국 이 세상은 허무하지 않는가?


결국은 완전한 대안은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인데, 그래서 허무하다는 말이죠. 그것을 성도는 미리 알고 있어야 하는데, 이 세상에서 아무리 잘 먹고 잘 살아도 이 세상은 결국 허무한 세상이란 것을 말이죠. 그러한 허무를 통해서 성도는 어떻게 됩니까? "나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를 원한다" 라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즉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허무하다는 겁니다.


(고전 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성전을 지어도 불에 타고 !!


그래서 성전을 지어도 어떻게 됩니까? 그만 성전은 불에 타고 마는데, 왜냐하면 허무한 세상이니까 말이죠.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께서 성전을 지으라고 허락을 하셨다고 하면, 그러면 성전이 계속해서 유지가 되도록 해주셔야 하는데, 그런데 왜 성전에 불이 나서 홀라당 다 타도록 하시느냐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A에서 B까지, 그 모든 것은 다 허무하다는 겁니다. 그러면 누가 허무하게 하시는 겁니까? 그것은 외삽에서, 즉 외부에서 새롭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내부를 허무하게 조성하시는데, 그게 바로 예수님이 하실 일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결코 만만치가 않은데, 그 어떤 것도 다 각오를 해야한다는 말이죠. 만약에 자기 인생이 잘 되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시작에 불과한 것이고, 진짜 예수님을 알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자기가 어떻게 살던지 간에, 자기 집이 세 채든 자가용 비행기가 있던지 간에, 그 인생을 기어이 허무하게 만드시고야 만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예수님의 인생개입인데, 주님께서는 우리 각자의 인생을 그렇게 개입하신다는 말이죠.


계속해서 교재 42페이지를 보겠습니다.


** 어떤 이들을 성경을 해석하면서 아브라함이 복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러면 과연 자기가 아브라함이 되어서 살 의향이 있을까요? 사랑하는 하나뿐인 아들을 제단에 눕혀놓고 칼질을 할 용의가 있느냐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살아온 인생은 한 마디로 걸레입니다. 


아브라함은 걸레 인생 !!


"아브라함이 복을 받았으니 나도 복을 받아야지" 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경유한 성경해석이 아닌데, 여기에 무엇이 빠졌습니까? 허무가 빠졌다는 말이죠. 자기 인생자체가 허무하다는 사실을 모르고, 성경에 아브라함이 나오니, 그리고 그가 믿음의 조상으로서 양도 늘어나는 복을 받았으니, "나도 아브라함처럼 살면 복을 받겠지" 라고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해석이 아닌데, 말로만 예수님 중심이라고 한다고 해서 예수님 중심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죠. 성경해석을 하면서 자기 자신이 허무해져야 하는데, 그런 체험을 하면서 예수님 중심의 성경해석이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야곱과 죽은 아들 요셉 !!


그리고 야곱을 부러워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아들을 잘 키워서 총리가 되었으니 말이죠. 그런데 자기 아들이 총리가 되는데 야곱이 해준 것이 있습니까? 놀라운 사실은 아들 요셉이 총리가 될 때, 야곱은 그 아들이 없었다는 겁니다. 이미 그 아들은 죽었는데, 즉 허무한 아들이 총리가 되었다는 말이죠.


그러면 요셉을 우리 자신이라고 여기고 대입을 시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를 들어서, 불교가 심한 집안에서 자기 혼자 교회에 다닌다고 하면, 그러면 집안에서 뭐라고 하겠습니까? "너는 내놓은 자식이다. 너를 죽었다고 간주하겠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 아이가 나중에 집안을 일으킨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바로 그런 방식이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에게 밀려서 죽었던 예수님이 우리의 구주가 된다고 하는 원칙을, 그것을 요셉을 통해서 미리 보여주는 방식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성경해석이라는 말이죠. 성경말씀을 그렇게 보아야 한다는 겁니다. 말로만 예수 중심의 성경해석이라고 하지 말고 말이죠.  


이제 교재 44페이지를 보겠는데, 참 교재를 보기 이전에 이것을 전도서에서는 뭐라고 하는지를 먼저 살펴보겠는데, 전도서 9장입니다. 


(전 9:2)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모든 것이 일반이라 의인과 악인이며 선하고 깨끗한 자와 깨끗지 않은 자며 제사를 드리는 자와 제사를 드리지 아니하는 자의 결국이 일반이니 선인과 죄인이며 맹세하는 자와 맹세하기를 무서워하는 자가 일반이로다
(전 9:3)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일반인 그것은 해 아래서 모든 일 중에 악한 것이니 곧 인생의 마음에 악이 가득하여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다가 후에는 죽은 자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 …
(전 9:10) 무릇 네 손이 일을 당하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음부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


이것을 어제 설교시간에도 잠시 했는데, 여기에서 '일반이라' 라고 하는 것은 '똑같다' 라는 의미인데, 즉 모두가 똑같이 죽는다는 겁니다. 또한 10절에서 "무릇 네 손이 일을 당하는 대로" 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어떤 직업을 가질 지는 자기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제공하신다는 말이죠. 즉 농사를 짓던 개인사업을 하던, 아니면 목사를 하던 간에, 그것은 우리가 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인데, 우리는 하나의 역할이라는 겁니다.


여기서 전도서 12장을 보겠는데, 1절에서 3절입니다.


(전 12:1)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전 12:2)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
(전 12:3) 그런 날에는 집을 지키는 자들이 떨 것이며 힘있는 자들이 구부러질 것이며 맷돌질 하는 자들이 적으므로 그칠 것이며 창들로 내어다 보는 자가 어두워질 것이며
(전 12:4) 길거리 문들이 닫혀질 것이며 맷돌 소리가 적어질 것이며 새의 소리를 인하여 일어날 것이며 음악하는 여자들은 다 쇠하여질 것이며


여기 1절에 보면 "나는 아무 낙이 없다" 라고 하는데, 솔로몬이 결코 짧게 살았다고 할 수가 없는데, 하지만 아무리 오래 살아봐야 이미 사라지고 없다는 말이죠. 즉 오늘이 될 때, 어제는 이미 자기 곁을 떠나고 없다는 겁니다. 과거를 가지고 낙이라고 할 수가 없는데, 이미 없어졌으니 말이죠. 낙이라는 것은 미래의 희망을 가지고 찾아야 하는데, 그 미래의 희망이 무엇입니까? 


3절에 "그런 날에는 집을 지키는 자들이 떨 것이며, 힘있는 자들이 구부러질 것이며" 라고 하는데, 이것은 신체를 완전히 해부하는데, 신체를 이루고 있는 그 골조를 말이죠. 그리고 4절에 '맷돌소리' 라고 하는데, 이것은 어금니가 서로 부딪치는 소리라는 겁니다.


그러니 낙이 있으면 일단 그 조건이 몸이 건강해야 하는데, 그런데 그 조건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젊었을 때 누리지 못한 낙을 늙어서 즐기려고 하지만, 이미 그때는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겁니다. 젊었을 때의 그 기대를 보장할 수가 없다는 말이죠. 어디 놀러가서 몸을 좀 흔들려고 해도, "아이쿠, 허리야!"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옛말이 틀린 것이 없는데, 그래서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라고 한다는 말이죠. 늙으면 놀아도 재미가 없다는 겁니다. 마누라와 같이 여행을 가도, 갈 때부터 해서 돌아올 때까지 싸운다는 말이죠. 물론 집에서는 휴전을 하는데, 다음에 놀러갈 때는 또 싸우고 말이죠(ㅋㅋ).


어떤 분이 식당을 하시는데, 손님이 자기 아내와 같이 왔는지, 아니면 바람을 피우는지, 그것은 보면 안다는 겁니다. 앞자리에 마주 앉아서 가격이 싼 음식을 시키면 아내와 같이 온 것이고, 그게 아니라 옆자리에 앉아서 비싼 음식을 시키면 분명히 불륜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왜 그렇게 비용이 많이 드는 짓을 합니까? 인생의 낙을 중고가 아닌 신상과 같이 즐기고 싶다는 것인데, 그런데 솔로몬의 경우는 아내가 무려 천 명이 넘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뭐라고 합니까? 천 명이 넘는 아내와 같이 살아도 낙이 없고 허무하다고 한다는 말이죠.


가치관의 변화를 동반하면서 !!


그러니 우리가 이 전도서를 보면서 예수님 중심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은 결국 무슨 의미인고 하니, "주님은 어떤 분입니까? 제가 믿겠습니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는데, 그런데 그 중심의 해석자는 자기 변천, 즉 자기 가치관의 변화를 동반한다는 겁니다.


자기가 이 세상의 부귀영화와 낙을 추구하는데, 그런데 그것이 얼마나 헛되고 헛된 짓인지, 그런 것의 일부에 해당이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인생의 즐거움을 찾겠다고 하는 것도 얼마 가지 않아서 어떻게 됩니까? 허무를 느끼는, 그런 방편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이제 교재 44페이지를 보겠습니다.


** 사람은 자기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이 기억하기 마련이거든요. 육신도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이 알게 됩니다. 


상업자본주의, 금융자본주의, 산업자본주의 !!


이것을 좀 설명해야 하겠는데, 아까 농경시대까지의 가치관을 이야기했는데, 그 다음이 산업시대라는 말이죠. 이 산업시대는 토지중심이 아니라 무역을 통해서 상업자본주의에서 금융자본주의로, 그리고 산업자본주의로 바뀌게 된다는 겁니다.


여기서 '상업자본주의' 라는 것은 공간이 차이가 나서 그 만큼의 이윤을 챙기는 것인데, 그러니 이쪽에는 고등어가 아니고 저쪽에서는 모시가 나온다고 하면, 옛날에는 서로 바로 교환을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제는 돈으로 교환해서 이윤을 챙기는데, 그것을 상업자본주의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금융자본주의와 산업자본주의로 넘어가면서 이제는 공간의 차이가 아닌 시간의 차이로 이윤을, 즉 이자를 받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 돈을 많이 투자해서 그 이상의 이익을 빼낸다는 겁니다. 그렇게 자본주의가 바뀌게 된다는 말이죠.  


이렇게 되면 왕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사유재산이 많은 쪽 중심으로, 그렇게 가치관이 바뀌게 된다는 겁니다. 돈 중심의 가치관으로 말이죠. 그러니까 인간이 위주가 되는 것이 아니라 돈이 위주가 되는 사회인데, 그래서 가치관도 바뀌어서 돈이라고 하면, 즉 부자라면 모든 것이 다 용서가 되는 사회가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거기에 기죽지 말라고 대통령에게 월급을 많이 주는데, 그런데 어지간한 재벌 회사들의 이사들은 대통령보다 월급이 많다는 겁니다. 그러니 시대가 어떤 시대인고 하니, 아이들이 "나는 앞으로 대통령이 되겠어요"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재벌회사의 회장이 되려고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가치관이 바뀐다는 겁니다.


변천하는 진리 !!


제가 왜 이렇게 가치관을 강조하는고 하니, 사람들이 진리라고 하는데, 그 진리는 변천하는 진리라는 말이죠. 우리가 이 시대에 태어났고 이 나라에 태어났기 때문에, 우리가 아는 가치관이 그렇게 한정되어있는데, 그렇다면 우리가 성경말씀을 왜 봅니까? 여기에는 절대적인 가치관이 들어있다는 겁니다. 그게 하늘의 가치관인데, 그러니 땅의 가치관을 유지하려고 하면 안 된다는 말이죠.


성경적 가치관으로 교체가 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데, 그래서 성령이 오셔서 우리의 기존 가치관, 즉 이 땅의 생존의 가치관과 하늘의 가치관을 교체시켜주는 작업을 해주실 때, 비로소 우리는 성도로서 아들의 나라에 갈 수 있는 자로 변모가 되어간다는 겁니다.


오른편과 왼편 !!


그렇다면 여기 교재에 "사람은 자기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이 기억하기 마련이거든요" 라고 하는데, 그러면 이것과 이 가치관이 무슨 관계가 있느냐는 말이죠. 성경에 어려운 것이 많이 있는데, 이것도 역시 어렵다는 겁니다.


전도서 10장에 보면, "지혜자의 마음은 오른편에 있고 우매자의 마음은 왼편에 있느니라" 라고 하는데, 도대체 그게 무슨 의미냐는 겁니다. 우리 사람의 몸이 이렇게 있는데, 우리의 몸은 오른손과 왼손이 다같이 한 몸으로 되어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왜 왼쪽을 생각하지 말고 오른쪽을 생각하라고 하느냐는 겁니다.


(전 10:2) 지혜자의 마음은 오른편에 있고 우매자의 마음은 왼편에 있느니라


그것은 바로 오른쪽이 구원하는 쪽인데, 그러면 왼쪽은 무슨 쪽일까요? 주님께서는 오른손으로 구원을 하시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널 때로 주님께서는 오른손으로 하셨다는 겁니다. 그러면 왜 왼손을 안 되고 오른손이냐는 말이죠.


(출 15:6)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 손이 원수를 부수시니이다


왜 주님의 오른손인가?


우리가 그런 질문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는데, 하필이면 왜 우편에 앉으셨느냐는 겁니다. 좌편은 왜 되지 않느냐는 말이죠. 이게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 왼쪽은 무엇인고 하니, "1번은 구원이 되지 않는 쪽이다(?). 2번은 저주하는 쪽이다" 라고 한다면, 과연 몇 번이냐는 말이죠. 2번인데, 저주 쪽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저주와 구원을 누구에게 있다는 겁니까? 처음에 했는데, 모든 세상은 누구 중심이라는 겁니까? 예수 그리스도인데, 그러니 예수님은 구원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저주도 하신다는 말이죠. 


노골적으로 말해서, 저주가 없이는 구원도 없다는 겁니다. 어제 낮에도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라고, 그러니 건져내는 것이 성립되려고 하면 먼저 흑암에 갇혀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또한 그렇게 갇혀있기 위해서는 아담은 선악과를 먼저 따먹어야 한다는 말이죠.


(골 1: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렇게 따먹힌 선악과와 동반해서 움직이는 것이 바로 생명나무인데, 즉 선악과를 건드려줌으로서 생명나무를 움직이게 만들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는 생명나무 앞에서 선악과를 따먹은 모든 자들은 생명나무를 따먹을 수 없는 입장에 놓여있고, 그래서 생명나무를 위주로 해서 이 세상을 저주한다고 해도 아무런 할 말이 없게 되었다는 겁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비유로 하신 말씀들이 많이 모아져 있는데, 그러면 그 중에서 47절에서 50절을 보겠습니다.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마 13:47)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마 13:48) 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 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 버리느니라
(마 13:49)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마 13:50)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천국에는, 나쁜 고기도 있어 !!


여기서 제가 질문을 하겠는데, 천국은 좋은 고기만 있습니까? 나쁜 고기도 있습니까? 나쁜 고기도 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여기 47절에 보면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는 천국은 어떤 것입니까? 이 세상 모든 일들이 다 마감이 되고 다음의 천국을 생각하는데,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천국은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게 마감이 되기 이전에 시작할 때부터를 천국이라고 하시는데, 그 이유가 있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천국은 예수님의 기능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기능이 곧 천국의 시작 !!


그러니 예수님의 기능이 천국의 시작인데, 예수님에게는 심판의 기능이 있기 때문에 말이죠. 그러니 착한 사람들만 있다고 하면 심판을 실시할 기회조차도 없는데, 그렇지 않습니까? 여기서 우리가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는데 말이죠. 예수님에게 심판권이 있다는 것은, 예수님을 위해서라도 지옥은 반드시 있어야 하고, 불신자도 있어야 하고, 이단도 있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단이 있다고 불평을 하지 마시고, 예수님이 있으면 이단도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예수님께서 일부러 이단을 만들었다는 겁니다. 즉 생명나무를 위해서 선악과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따먹어야 하는 나무가 있다면, 따먹지 말아야 하는 나무도 같이 있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구원중심이 아니라, 모든 성경말씀은 예수님 중심이라는 것이죠. 그러니 자꾸만 자기 구원중심으로 생각하면 안 되는데, 자기만 구원을 받으면 된다고 말이죠. 그런 개인적인 이기주의로 성경말씀을 보면 안 된다는 겁니다. 성령을 받았으면 예수님 중심으로 봐야한다는 것이죠. 


주님의 그물 !!


그렇게 예수님 중심으로 성경을 볼 때, 예수님은 그물을 다 치시는데, 그렇다면 이 예수님의 그물에 걸리지 않을 인간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전혀 없는데, 그러니 자기가 전도를 몇 명이나 했느니, 우리교회는 몇 명이 모이느니, 그런 이야기는 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런 염려나 초조함은 전혀 의미가 없는데, 우리가 거물을 짜서 쳐봐야 그것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주님이 치신 그물은 북한의 김정은까지도 다 걸린다는 말이죠. 이 세상의 인간들 치고 예수님이 치신 그물에 걸리지 않는 인간은 전혀 없는데, 모두가 다 걸린다는 겁니다. 이슬람교도들은 물론이고, 그 난폭한 IS 대원들까지도 말이죠.


시체들의 모임 !!


이번에 금융통합위원회가 모여서 회의를 한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의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좋은 일을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성경으로 보면 어떻습니까? 시체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는 것에 불과한데, 우리나라 중심이 아니라 예수님 중심으로 보면 말이죠.


모든 인간은, 자기가 경제학 박사든 말든 간에 다 예수님의 그물에 걸려있는데, 그러면 자기가 그물에 걸려있는 경제학 박사임을 안다고 하면, 자기가 경제학 박사인 것을 자랑하겠습니까? 아니면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자랑하겠습니까? 


사도바울은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했는데, 그러니 자기가 미국에 가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딴 것이 자랑거리가 아니고, 자기가 죄인임을, 즉 예수님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금융통합위원회가 회의를 할 때, 죽음의 사자가 들이닥친다고 하면, 그 사람을 빼고는 다 지옥에 간다는 말이죠. 이것이 바로 현실을 제대로 보는 눈이라는 겁니다.


다시 묻겠는데, 주님의 그물 바깥에 나와서 구경을 하는 물고기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는데, 그러니 전도나 선교에 대해서 너무 걱정을 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물은 주님이 던지시는데, 주님은 지금도 하나님의 일을 하고 계신다는 말이죠. "다 이루었다" 라는 차원에서 말이죠.


그러니 자식들에게 전화를 해서 "너는 나쁜 고기가? 좋은 고기가?" 라는 것만 물으면 되는데, "교회에 갈래? 말래?" 라고 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만약에 자식들 가운데서 중이 되겠다고 하는 놈이 있다고 하면, 그것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말이죠.


전도서에 의하면 "니가 중이 되는 것은 주께서 당하게 하심이라" 라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까, "중이 되는 것은 어떻게 말릴 수가 없는데, 하지만 중이 되어서 허무를 느껴라. 그리고 그것도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느껴라" 라는 겁니다. 예수님 앞에서, 하나님의 약속 앞에서 말이죠.


잊을 수 없는 세월호 사건 !!


지금도 모든 사람들을 예수님의 그물이 덮치고 있는데,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도 모르고 아직도 세월호 이야기를 한다는 겁니다. 3년이 지나도 왜 세월호 사건을 잊지 못하는고 하니, 자기가 감정이입을 해보니, 즉 만약에 자기 자식이 그렇게 되었다고 하면 어떻게 그것을 잊을 수가 있느냐는 말이죠.


그렇게 우리 인간은 이렇게 철저하게 자기 중심의 가치관을 가질 수밖에 없는데, 그런데 그런 가치관이 허무하다는 것을 자기는 전혀 모른다는 겁니다. 살아가는 목적이 자기 자신을 위해서, 그렇게 살아가는데, 그래서 자식도 자기 자식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자기 것을 건드리면 당연히 자기의 적이 되고 마는데, 그래서 박근혜는 영원한 자기의 적이 된다는 겁니다. 박근혜가 세월호를 타고 바다에 빠지면 그제야 풀어질지도 모르겠는데 말이죠. 결코 용서가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게 결코 남의 일이 아닌데, 우리는 당하지 않았으니 너무하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과연 자기 자식이 세월호를 타고 물에 빠져서 죽었다고 하면, 평소처럼 교회에 나와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느냐는 겁니다. 전혀 얼굴을 찡그리지 않고 말이죠.


인간은 트라우마를 평생 가지고 간다 !!


프로이드는 말하기를, "인간은 트라우마를 평생 가지고 간다" 라고 했는데, 어릴 때 받았던 정신적인 상처는 평생을 간다는 겁니다. 그것을 예수님 중심으로 보게 되면, "인간은 평생을 자기밖에 모르는 죄인이다" 라고 할 수 있는데, 자기에게 좋게 해주면 좋은 하나님이고, 나쁘게 해주면 나쁜 하나님이라는 말이죠.


그러면서도 교회에 나오면 어떻게 합니까? 목사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하니 억지를 부리는데, 그러한 모습이 애처롭기까지 하다는 겁니다. 가슴에는 상처가 있는데, 그런데 목사는 예수님을 사랑해야 구원을 받는다고 하니 예수님을 찬양하는데, 그 이중성이 가관이라는 겁니다.


그 위선 덩어리를 보면 아는데, 물론 자기도 알고 말이죠. 자기도 그게 싫어서 새벽마다 울면서 회개를 한다는 말이죠. 자기 마음의 상처가 그렇게 라도 하면 치유가 될까 싶어서 말이죠.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마음에 위로가 됩니까? 기억을 하면 할수록 상처는 점점 더 곪아간다는 겁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자기가 회개를 한다고 하면서 그것을 빌미로 해서 얼마나 못된 짓을 했는지를 깨닫게 되는데, 즉 자기 아이가 바다에 빠져죽고 난 다음에 자기가 얼마나 죄인인지를 알게 되고, 그것이 죄임을 고백하게 된다는 겁니다.  


오른손과 왼손 !!


이제 오른손과 왼손 이야기를 하겠는데, 우리가 오른손과 왼손을 가지고 있듯이 하나님도 다 가지고 계시는데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성경에서 "오른쪽을 생각하고 왼쪽을 생각하지 말라" 라고 하신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항상 왼쪽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들통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오른쪽이라는 것은, 그냥 오른쪽이 아니라 왼쪽이 있음으로서 해서 성립되는 오른쪽이라는 말이죠. 무슨 말인고 하니, 먼저 저주가 전제되고 난 뒤에 비로소 오른쪽의 기능이 구체화가 된다는 겁니다. 먼저 저주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여기서 창세기 35장을 보겠는데, 17절에서 19절입니다.


(창 35:17) 그가 난산할 즈음에 산파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말라 지금 그대가 또 득남하느니라 하매
(창 35:18) 그가 죽기에 임하여 그 혼이 떠나려할 때에 아들의 이름은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 아비가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
(창 35:19) 라헬이 죽으매 에브랏 곧 베들레헴 길에 장사되었고


슬픔의 아들, 오른손의 아들 !!


여기에 등장하는 라헬은 야곱의 첫 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인데, 야곱은 한 번 사랑한 여인을 끝까지 사랑했는데, 그래서 야곱이 요셉을 그렇게 사랑했다는 겁니다. 요셉은 라헬이 낳은 아들이기에 말이죠. 그리고 그녀가 두 번째로 낳은 아들이 베냐민인데, 그런데 그 아이를 낳으면서 그만 죽고 말았다는 겁니다.


래서 라헬은 그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 라고, 즉 '슬픔의 아들' 이라고 했는데, 즉 "너는 이 어미의 한을 가지고 평생을 살아간다" 라는 의미라는 것이죠. 그런데 야곱은 그 아이의 이름을 무엇이라고 합니까? '베냐민' 이라고 했는데, '오른손의 아들' 이라고 했다는 말이죠. 쉽게 말해서 '하나님의 아들' 이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이런 식으로 태어난다" 라는 것인데, 즉 슬픔 속에서, 허무 속에서, 죽음 속에서 말이죠. 그런데 가운데 하나님은 자기 면모를 제대로 보인다는 말이죠. 그러니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을 이렇게 야곱을 통해서 미리 보여주신다는 겁니다.


이렇게 야곱의 구체적인 일생을 통해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미리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야곱도 언약에 속하고 예수님의 행하신 일도 언약에 속하기 때문인데, 즉 같은 묵시세계에 속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서로 통한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이것을 예수님에게만 적용시키지 말고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을 시키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가 이 땅에서 '베노니' 라는 과정을 거쳐야 '베냐민'이 된다는 겁니다. 탕자가 가출을 해야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고 제대로 이해를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가 이 땅에서 무엇이 되어야 하는고 하니, 슬픔의 아들이 되게 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신다는 겁니다. 이 땅에서 말이죠.


야곱이 죽어가는 아내를 보고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과 같은데, 즉 "당신이 죽어가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니 그것을 개인적으로 슬퍼하지 말라. 아들도 보지 못하고 죽는다고 말이다. 지금 너는 주님의 슬픔에 동참하고 있다" 라는 겁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슬픔에 동참하는 삶을 !!


이것을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을 시킨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슬픔에 동참하는 삶을 살고 있다" 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게 성도의 삶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는 이 땅에 허무임을 알면서도 살 때까지는 악착같이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 모순이 있다는 말이죠.


주님께서 그냥 불러주면 참으로 좋겠는데, 나이가 80이 되고 하면 살만큼 살았는데 말이죠. 그런데도 주님께서 계속해서 살게 하시는 것은, 주님께서 이 땅에서 당했던 모든 시련과 비난과 아픔과 고생을, 그것을 계속해서 겪게 하신다는 겁니다.


여러분이 아직은 젊어서 실감이 나지 않는다는 표정들인데, 우리가 이 땅에서 50년을 살던 100년을 살던 간에 이 땅은 허무하다는 말이죠. 그것을 이미 이 땅에서 살만큼 살았던 솔로몬이 예수님의 영으로서 우리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허무가 살고 있는 'A'와 'B'에서 외삽을 하지 말라는 것이죠. 우리들만 허무한 것이 아니라, 이 땅에 뛰어드신 예수님께서 진정한 살아있는 우리의 외삽이 되어서, "내가 대신 다 처리했다" 라고 하는, 그것이 구원의 기쁜 소식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그동안 너무 태평하게 성경말씀을 생각하지 않았습니까? 먼저 살았던 신앙인들이 얼마나 슬픔 가운데서 살았는지 보면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7,5,10 오전11시에 마침.
                                                    문재인, 드디어 대한민국의 19대 외삽이 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