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8 - 총괄의지
07,04,03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37페이지부터 하겠습니다.
** 우리나라의 경우에 모든 것이 삼성그룹이 중앙부를 차지합니다. 삼성그룹과 관련된 업체에 가까이 간 자들은 우리나라의 중심부에 접근하게 된 자들이고, 삼성과 무관하게 지내는 자들은 중심부에서 밀려난 인생을 살고 있는 겁니다. 야구도 삼성, 수출도 삼성, 백화점도 삼성, 놀이동산도 삼성, 증권회사도 삼성, 변호사 업체도 삼성, 연봉도 삼성, 그렇게 삼성이 최고 위상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중심부 !!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사람들은 현실을 구성할 때 '중심부'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겁니다. 그냥 "현실이다. 똑같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죠. 그 중심이 없는 것을 '균열' 이라고 하는데, 이 균열은 민주주의와 통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원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원하지 않는데, 중심이 없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뭔가 중심부에 힘이 있는 것을 원한다는 말이죠. 그래야 정신적으로 안정을 취할 수 있다는 겁니다.
중심이 없는 것을 두고서 '중구난방' 이라고 하는데, 이런 것을 사람들은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핵심이 있어야하는데, 교회든 무슨 조직이든 간에 중심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친목회나 동호회도 그렇다는 말이죠. 그것은 국가도 마찬가지인데, 방금 중심이 없는 것을 민주주의라고 했는데, 그러니 민주주의는 일종의 허세이고, 실제로는 중심이 있기를 원한다는 겁니다.
고대국가와 종교 !!
그 중심이 정치, 예술, 과학, 종교에 있는데, 중세만 해도 그 중심이 종교에 있었다는 말이죠. 5세기에서 12세기경에 '아즈텍' 이라는 문명이 있었는데, 현재의 멕시코 지역인데, 그게 그만 스페인이게 망했다는 겁니다. 그 문명을 발굴해보니 수많은 피라미드가 나오는데, 피라미드가 이집트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들의 중심은 무엇인고 하니, 그게 종교인데, 고대국가들은 다 그 중심에 종교가 있었다는 겁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이집트의 피라미드인데, 그들이 그것을 왜 만들었습니까? 왕이 신의 아들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그러니 모든 중심이 종교에 있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젊었을 때는 종교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그런데 나이가 들면 대부분이 종교를 가진다는 말이죠. 그것은 중심 때문에 그러한데, 젊었을 때는 자기가 중심이었는데, 나이가 많아지면 그 중심이 자기가 아니라 다른 현실로 이동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이가 들었는데 가장 비참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아무런 종교도 없이 살아가는 모습들인데, 그러면 그 대신에 술로 달랜다는 말이죠.
토속신앙이 없는 곳이 없어 !!
종교란 개인적으로 자기 마음이 신에게 있다고 하는 것인데, 그런데 이것이 옛날에는 개인이 아니라 국가가 실제로 종교중심으로 되어있다는 겁니다. 그게 지금도 남태평양의 각 섬들에 가보면, 그 부족들이 종교중심으로 살아간다는 것이죠. 물론 아마존의 부족도 그러한데, 그것을 토속신앙이라고 하는데 말이죠.
그런 토속종교가 없는 곳이 없는데, 그런데 대규모의 종교가 나타나면 이러한 토속종교는 죽는다는 겁니다. 라마교, 조로아스트교 등이 그래서 사라졌다는 말이죠. 혹시 '오딘(Odin)' 이라는 신을 들어보았는지 모르겠는데, 요즘 미국 드라마에도 많이 등장한다고 하는데, 노르웨이를 비롯한 북유럽의 고대 신인데, 그게 켈트족의 신이라는 겁니다.
그 신이 삼위일체 여호와로 바뀌었는데,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말이죠. 로마 때 기독교가 온 유럽을 다 점령하면서 종교가 그만 바뀌는데, 종교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 바뀐다는 겁니다. 그 켈트족이 영국에 가서는 그쪽 사람들의 조상이 되었다는 말이죠.
모든 것 중심에는 경제가 !!
그런데 지금은 그때와는 달리 종교가 중심이 아니라, 방금 이야기를 했지만, 정치, 예술, 과학, 종교, 그렇게 되는데, 그 모든 것은 껍데기이고 중심에는 경제가 있다는 겁니다. 경제는 알다시피 자본인데, 그 자본이 중심이 되는 것을 '자본주의'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아까 이야기한 것과 겹쳐보면, 민주주의는 어떤 경우에 인정되는고 하니, 자본주의가 성립될 때 민주주의가 성립된다는 겁니다. 이것을 지금 중국이 시도하고 있는데, 중국은 지금 공산당 독재인데, 당이 하나밖에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 공산주의자를 보고 싶으면 중국에 가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을 자본주의를 통해서 민주주의를 지향하고 있는데,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공산주의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죠. 가난한 공산주의는 말이죠. 우선 인민들이 잘 먹고 잘 살아야 나라꼴이 되는 것이지, 이게 해결되지 않으면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다는 겁니다.
사회주의가 무엇인고 하니까, 중심이 없이 골고루 잘 사는 것인데, 하지만 이것은 이미 무너졌다는 겁니다. 소련, 즉 소비에트 연방이 바로 그것인데, 러시아를 비롯해서 19개의 나라로 이미 분리가 되었다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이제는 모든 것이 자본이 중심이라는 겁니다.
현재는 삼성이 절대중심 !!
그래서 조금 전에 시작하면서, 교재 37페이지에서 우리나라의 중심은 삼성에 있다고 했다는 말이죠. 그 삼성그룹에 들어가야 최고의 대기업에 들어간 것이고, 비로소 그 집안은 출세를 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겁니다. 물론 일이 너무 힘들어서 다른 곳으로 갈 수도 있지만 말이죠. 아무튼 삼성에 갔다는 것은 중심부에 들어간 것인데, 그것이 그 현실에서는 '절대중심' 이라는 겁니다.
이제 제가 이야기하는 취지를 알았지 싶은데, 현실이라는 것은 막연한 것이 아니라 무엇이 중심인고 하니, 정치, 예술, 과학, 종교, 그런 것들은 모두 나가라는 겁니다. 민주주의고 사회주의고 간에, 그런 것은 다 치우고, 중요한 것은 무엇인고 하니, 누가 뭐라고 해도 경제가 우선이라는 말이죠.
그리고 그 경제 중에서도,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삼성그룹이 중심이라는 겁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또 바뀌겠지만 말이죠. 이것을 '계층' 이란 용어를 집어넣어서 설명하면 좋은데, 그것은 너무 어려워서 곤란할 것 같고 말이죠. 무슨 말인고 하니, 경제가 바탕이 되지 때문에 정치도 경제를 살리는 쪽으로 나가야 한다는 겁니다.
박근혜가 쫓겨난 이유는?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박근혜가 쫓겨난 이유는 단 하나뿐인데, 경제를 말아먹었다는 것이죠. 경제만 잘 된다고 하면 독재를 해도 괜찮은데, 누가 대통령을 해도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먹고 사는 것이 너무 힘이 드니, 특히 젊은 사람들의 경우에는 취직도 되지 않으니, 그쪽으로 불만이 나타난다는 겁니다. 물론 쫓겨나고도 남을 짓을 하기는 했지만 말이죠.
그래서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시큰둥한데, 왜냐하면 자기들은 연금을 받으면서 챙길 것은 챙기고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바꾼다고 해서 됩니까? 지금은 글로벌 경제사정이 좋지 않다는 말이죠. 세월호 사건을 걸고넘어지는 것은 일종의 핑계인데, 잘먹고 잘살게 되면 그런 이야기는 더 이상은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또한 그것이 유가족들을 위한 길인데, 자꾸 이야기를 하면 상처만 더 커진다는 말이죠.
정규직과 비정규직 !!
그러니 정치는 경제를 도와야하고, 예술도 경제를 도와야하는데, 과학과 기술이 없으면 경제는 발전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정규직과 비정규직 때문에 말이 많은데, 하지만 회사를 운영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이게 문제도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오너의 경우에는 회사를 살릴 기술자가 필요한데,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말이죠.
다른 회사보다 경쟁에서 앞설 수 있는 새로운 기술을 개발할 수 있다면, 오너의 입장에서는 얼마든지 정규직을 시켜줄 용의가 있다는 겁니다. 물론 월급도 더 많이 주고 말이죠. 그러니 계속해서 회사가 살아남으려고 하면, 남들보다 뛰어난 사람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음식점을 하나 하더라도 다른 식당보다 더 맛이 있어야 하는데, 사실은 맛있는 식당이 수상한 경우가 많지만 말이죠. 아무튼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 요리사가 있다고 하면, 주인은 절대로 비정규직으로 채용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정규직으로 채용해서 자기 식당에 꽁꽁 묶어놓으려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비정규직으로 채용한다는 것은, 새로운 창의성과 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고 그냥 보조만 해주면 되는데, 그런데 국가에서 자꾸만 젊은 사람들을 취직을 시켜주라고 하니, 그냥 할 수 없이 넣어주었다는 말이죠. 하지만 회사는 구제하는 것이 목적일 수 없다는 겁니다.
회사가 어떻게 하든지 해서 조금이라도 더 앞서나가야만 하는데, 그래야 월급이라도 줄 수가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남들이 가지지 않은 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이전에는 2시간을 일하고 백을 얻었는데, 새로운 직원이 와서는 2시간을 일하는데 2백을 얻는다고 하면, 그 직원의 월급을 올려주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회사 오너의 입장에서는 직원을 채용하고 싶어도 정작 뽑을 사람이 없는데, 물론 당사자나 그 가정에서는 왜 떨어뜨리느냐고 하지만 말이죠. 회사에서는 그 사람이 미워서 탈락시킨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뽑아서 그만한 수익이 나올 가능성이 없어서 그렇게 했다는 것이죠.
우리 서로 친하게 지내자 !!
다시 하겠는데, 이 세상은 "서로 사랑하자" 라는 것이 우선이 아닌데, 그것은 종교에서의 문제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 세상은 그런 문제가 아니라, 즉 "서로 친하게 지내고 하나가 되자"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경제적인 문제라는 말이죠.
"왜 세상이 이렇게 각박하게 되었습니까?" 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렇게 서로 좋게 지내던 나라들은 경제가 발전한 나라들에게 그만 다 잡아먹히고 말았다는 겁니다. 이것이 세계역사를 공부하면 다 나오는데, 자기 부족들끼리 친하게 지내는 것, 다 사라지고 없다는 말이죠.
그 대표적인 것이 남미의 잉카문명인데, 그들이 주장한 것이 "우리 서로 친하게 지내자" 라는 겁니다. 그들은 왕이 없는데, 부족끼리 친하게 지내는 것인데, 마치 우리나라의 고대 신라시대와 같이 말이죠. 화백제도라고 해서, 그게 특히 가야에서 그러했는데, 그 가야가 왜 일찍 망했는고 하니, 왕이 없어서 망했다는 겁니다. 6가야가 서로 친하게 지냈는데, 이런 것은 상식적으로 알아놓으면 좋은데 말이죠.
서로 친하게 지내면, 그렇게 친하게 지낸다면 적이 아니란 말이고, 그렇게 적이 없으면 농사를 열심히 지어서 신에게 제사를 드리고 서로 나눠먹고, 그러다가 죽으면 그 영혼은 영혼불멸의 상태인 천국에 간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것이 바로 유토피아라는 말이죠. 살아있어도 걱정이 없고 죽어서도 천국에 가고, 그러니 옛날이 행복했다는 겁니다.
그러니 아이를 많이 낳아도, 그때는 그 아이들이 다른 곳으로 가지를 않고 소복이 함께 모여서 살았는데, 그때 좋았다는 말이죠. 그런데 지금은 아이를 낳았다고 하면 서울로, 서울로 가버리고 마는데, 그래서 촌에 가면 농사를 지을 사람이 없다는 겁니다. 청년회 회장이 65세인데, 마을회관에서 커피를 나르고 있다는 말이죠(ㅋㅋ).
한 명에 매달 백만원씩 드리겠습니다 !!
저기 문경에 가면 아이를 낳으면 문경시에서 삼백만원을 준다고 하는데, 물론 매달 주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죠. 사실은 한 번만 해주면 안 되고 매달 그러한 혜택을 주어야 하는데, 그래서 아이를 세 명 정도만 낳으면 먹고 살 걱정은 없도록 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적어도 한 명당 백만원 정도로 책정해서 말이죠.
실제로 프랑스에서는 그렇게 한다고들 하는데, 아이를 낳아서 키우면 생계가 유지된다는 말이죠. 7급 공무원 정도의 월급이 나오는데, 육아정책을 하려면 그렇게 화끈하게 해야한다는 겁니다. 결혼을 하면 남편이 괴롭혀서 귀찮고, 그래서 싱글로 살면서도 아이만 낳아서 키운다는 말이죠. 그래서 프랑스가 유럽에도 아이들 증가율이 제일 높다는 겁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나라에 생기는 문제도 온 세계가 자본주의이기 때문에, 대통령이 자본주의에 적합한 인물이 아니었다는 것이죠. 왕조시대라면 몰라도 말이죠. 아무튼 지금은 경제인데, 이게 현실의 중심이란 겁니다. 이것을 제가 조금 전에 '절대중심' 이라고 했는데 말이죠.
중심이 바뀌지 않는 인간 !!
이미 우리 인간 안에는 이러한 절대중심이 박혀있는데, 그게 경제, 혹은 자본, 그것을 한 글자로는 '돈' 이라는 것이죠. 그것을 마태복음 6장에서는 '재물' 이라고 하는데, 그리고 마태복음 4장에서는 악마가 예수님을 시험하면서, "사람은 떡이 없이는 살 수 없다" 라고 했다는 겁니다.
(마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이렇게 중심이 돈이 자리를 강력하게 잡고 있는데, 그런 상태에서 교회에 나와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어떻게 말이 되느냐는 겁니다. 과연 그 중심이 바뀌겠느냐는 말이죠. 교회에 나오면, "나는 이제 돈이 싫어!" 라고, 그렇게 되느냐는 말이죠.
그래서 어제 낮에 뭐라고 했습니까? 사람은 교회에 다니든 다니지 않던 바뀌지를 않는다고 했는데, 중심은 그대로 있다는 겁니다. 오히려 더욱 더 심화가 되는데, 바뀌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런데 감히 우리가 전도서를 공부하고 있다는 겁니다.
방금 이것을 정신적 절대공간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교재 41페이지를 봅시다.
** 그저 하나님께서 이 허무한 우리를 절대 허무를 증거하기 위하여 어떻게 사용하시는지를 살펴보면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절대공간과 절대허무 !!
37페이지에서는 '절대공간' 이라고 했는데, 여기 41페이지에서는 '절대허무'가 나온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전도서를 말씀하시면서 우리의 중심을 노린다는 말이죠. 우리 중심에는 항상 절대중심이 있는데, 옛날에는 그게 돈이나 재물이 아니라 종교, 즉 신이었다는 겁니다.
옛날에는 사람이 그렇게 살아도 행복했던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이게 팔자다" 라고 하면서 살았다는 말이죠. "엄마, 우리 집은 왜 이렇게 가난하지? 그리고 우리는 왜 쌍놈이고, 저쪽은 양반이야?" 라고 하면, "그게 팔자다" 라고 하면서, 그렇게 지냈다는 겁니다.
요즘 '역적' 이라는 드라마를 보면, 조선시대에는 쌍놈이 글을 배우면 주인이 그만 눈을 파버렸다고 하는데 말이죠. 만약에 집에서 키우던 개가 어느 날 말을 배워서 한다고 하면, 그러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같이 살 수 없는데, 개는 개이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개가 자기의 경계선을 넘어서 말을 하게 되면 개가 아니라 괴물이 되고 마는데, 그러면 우리는 공포를 느낀다는 겁니다.
다른 사람의 집에 가서 그 집안 일을 도와주는 사람을 뭐라고 합니까? 이 용어가 얼마나 많이 바뀌었는지 모르는데, 처음에는 '식모' 라고 했다가, 그게 '가정 관리사'로 바뀌었다가, 그 다음에는 '파출부' 라고 했다가, 요즘은 '가사 도우미' 라고 한다는 겁니다. 성경의 경우에도 보면 '문둥병자'를 '나병환자' 라고 바꾸었는데 말이죠.
민주주의는 인권을 우선으로 하기 때문에, 인간을 폄하하는 말을 다 바꾼다는 겁니다. 물론 비난받을 일은 하지만, 하지만 바꾼다고 해서 대하는 태도가 과연 달라지겠느냐는 말이죠. 겉으로 그렇게 바꾸어놓고, 마음속으로는 더 심하게 대하는 것이 인간이라는 겁니다.
경제를 아는 솔로몬 !!
다시 교재 41페이지로 돌아와서, '절대허무' 라고 했는데,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인간 중심에 절대공간, 즉 절대중심이 있는 것을 아시고, 그것을 표적으로 삼아서 말씀을 가지고 절대허무로 가버리신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렇게 공격하는 솔로몬이 어떤 분이고 하니, 경제를 아는 분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분은 얼마나 지혜로운지 경제만 아는 것이 아니라, 정치, 예술, 과학, 종교 등, 모르는 것이 없다는 겁니다. 솔로몬이 생물학자인데, 화초 등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없으니 남방에서 여왕이 와서 테스트를 해봤다는 겁니다. 전해지는 야사에 의하면 둘이 결혼을 했다는 말도 있는데 말이죠.
그런데 그 솔로몬이 뭐라고 합니까? "내가 아는 지식이 헛되다" 라고 했는데, 그러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내가 아는 지식과 내가 아는 모든 지혜가, 결국은 하나님께서 만든 현실에서 멀어지게 하더라" 라는 겁니다. 물론 자기는 지혜롭고 똑똑한데, 실상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만드시는 중심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똑똑한 사람을 중심으로 왕이 되는 것이 아니라, "너는 비켜라. 똑똑한 사람은 비켜라!"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그 자리는 어떻게 됩니까? 그 어떤 인간도 설 수 없다고 하는 절대허무가 자리를 잡는데, 그러니 이 허무를 중심으로 이 세상은 소용돌이를 치면서 돌아간다는 겁니다. 이게 신약시대에 보면 십자가가 그 중심이 된다는 말이죠.
십자가는 알겠는데, 그러면 부활은 왜 있는가?
어떤 분이 어제 저의 설교를 듣고 "십자가는 알겠는데, 그러면 부활은 왜 있는가?" 라고 했다고 하는데, 어제 우리교회에 처음 나오신 분인데 말이죠. 그래서 제가 그럴 줄을 알고 '대리'가 아니라 '대체' 라고 했는데, 어제 낮 시간에 말이죠. 무슨 말인고 하니, 구원을 해주는 자와 받을 자가 의논을 하는 것이 대리사상인데, 즉 "못난 니가 구원을 받을 때 내가 너와 의논하겠다" 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대체'는 무엇인고 하니, 구원받을 자가 이미 죽어버렸다는 말이죠. 그래서 목적이 없는데, 죽은 놈이 무슨 목적이 있느냐는 겁니다. 이 대체는 이미 상대방이 죽었는데, 그러면 부활을 꿈꿀 수 있는 권한도 이제는 없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리고 난 다음에 부활했다면, 그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그것은 바로 죽은 자 가운데서 대체할 사람을 뽑아내어서 예수님의 의를 증거하도록 하는 것, 그게 바로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겁니다.
친절한 근호 씨 !!
제가 어제 나름 친절하게 설명을 해드렸는데, 처음 나오신 분이 있으면 대부분이 그런 반응을 보이니 말이죠. 그런데 "십자가는 알겠는데, 그러면 부활은 왜 있는가?" 라고 한다는 것은, 그 부활의 자리에서 남들이 죽는 것만 바라보겠다는 것인데, 즉 자기는 죽지 않고 생생하게 살아있겠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자기 나름대로의 목적이 생기게 되는데, "일단 십자가를 알아서 믿고, 그 다음에는 나오는 부활을 챙겨야지"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제가 "쥐는 것이 싶습니까? 놓는 것이 싶습니까?" 라고 물었는데, 물론 묻는 취지를 알 리가 없지만 말이죠.
하지만 십자가든 부활이든 전혀 우리의 소관이 아닌데, 하나님은 우리가 아니라 예수님과만 의논을 하시는데, 하나님의 의는 무엇인고 하니,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바로 '의' 인데, 그 관계가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면, 우리는 주님의 의에 포섭이 되는데, 그래서 우리는 거기에 합류가 된다는 겁니다.
도대체 더 이상 어떻게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어야 할지 모르겠는데, 이게 이해를 못해서 모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죽은 즉 모든 사람이 다 죽었다" 라는 것에서 자꾸만 자기 발을 빼내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멀리 가서 쳐다보려고 하는데, 자기를 건드리지 말라는 것이죠. 자기가 알아서 골라잡겠다는 겁니다. 즉 정작 자기는 말씀 바깥에 있으면서, 정작 좋은 것만 챙기겠다고 한다는 말이죠.
(고후 5: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러면 그 사람의 중심에는 누가 있는고 하니까,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 있는데, 이것을 솔로몬이 알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전도서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까, 모든 헛된 것들 가운데서 솔로몬 자신은 포함이 되어있습니까? 아니면 혼자 빠져있습니까? 당연히 포함되어 있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나를 빼놓고 다 헛되다" 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포함해서 헛되다고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도 늙어죽으니 말이죠. 그래서 전도서 마지막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여러 책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케 하느니라" 라고 하면서, 인생자체가 주저앉는 대목이 나온다는 말이죠.
(전 12:12) 내 아들아 또 경계를 받으라 여러 책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케 하느니라
신약에 오면 이것이 그대로 십자가 안으로 들어가는데, 그래서 십자가 안에서 전도서가 마구 쏟아져 나온다는 겁니다. 잠언서도 나오고 말이죠. 지난번에 잠언서를 했는데, 잠언서라고 하니까 강의했던 것을 모두 잊어버렸을까 걱정이 또 되는데 말이죠(ㅋㅋ). 말이 나온 김에 잠언서 25장 1절에 보면, "이것도 솔로몬의 잠언이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잠 25:1) 이것도 솔로몬의 잠언이요 유다 왕 히스기야의 신하들의 편집한 것이니라
여기서 잠언서 22장 3절을 보겠습니다.
(잠 22:3) 슬기로운 자는 재앙을 보면 숨어 피하여도 어리석은 자들은 나아가다가 해를 받느니라
'애바'를 아십니까?
요즘 청소년들 사이에서 '애바' 라는 말이 있는데, 여러분은 다들 처음 듣는 이야기이지 싶은데, 애로 동영상 바이러스에 걸린 자들을 일컬어서 그렇게 부른다는 겁니다. 물론 자기들끼리 말이죠. 그러한 애로 동영상에 빠지게 되면 거기서 스스로 빠져 나올 수 없다는 것이죠. 친구를 비꼬면서 자기들끼리 그렇게 부른다는 겁니다.
(녹취자 - 목사님, 제가 식당에 온 학생들에게 물어보니 '오버하다' 정도로만 알더군요. ㅋㅋ)
그런데 이 애바가 잠언서에도 여러 번 나온다는 말이죠. 여기 3절의 말씀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뒷부분에 보면, "어리석은 자들은 나아가다가 해를 받느니라" 라고 하는데, 이것은 자기 스스로는 발을 뺄 수가 없다고 하는, 그런 의미라는 겁니다.
솔로몬이 아내가 무려 천 명인데, 물론 그게 좋지 않다는 것을 솔로몬이 아는데, 잠언서도 그런 내용이 나온다는 말이죠. 즉 "어리석은 여자는 질투심으로 가정에 분란을 일으킨다" 라고 하는데, 그러면서도 정작 자기는 그런 아내들을 위해서 우상신전을 지어준다는 겁니다. 그러니 무엇이 옳고 그른지, 그것을 안다고 해서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이 자기에게는 없다는 말이죠.
이 괴물아, 너는 누구야?
우리가 옳다는 것을 알아도,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솔로몬의 경우에 곤란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옳은 일을 할 수가 없다면 옳다는 생각도 없어야 하는데, 그런데 옳다는 생각은 있는데 그것을 바쳐주는 능력이 없을 때, 그러면 솔로몬은 자신을 보고 "너는 누구야?" 라고 하게 되는데, 도대체 자기에게 어떤 괴물이 들어왔느냐는 말이죠.
"십자가는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모든 사람은 죽으심이다" 라고 하면, 그게 성경말씀에 있으면 분명히 옳은 것인데, 그런데 "나는 죽고 싶지 않다" 라고 하면, 이게 도대체 무슨 괴물이냐는 겁니다. 가만히 지켜보다가, 십자가는 그냥 지나가고 부활이 나오니까, "목사님, 왜 부활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라고 한다면, 앞서 있는 것에 대해서 자기는 발을 빼고 있다는 겁니다.
성경말씀은 우리 자신의 절대중심을 향해서 쏘고 있는데, 과거에 '슉슉슉' 라는 젊은 아이들의 노래가 있었는데 말이죠. 활을 쏘는 모습인데, 그렇게 모든 성경말씀은 남을 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절대중심을 향해서 날아온다는 겁니다.
우리가 잠언서를 왜 봐야하는고 하니, 이 말씀 하나하나가 지킬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말이죠. 물론 전도서도 그러한데, 그러면 지키지도 못하면서 성경말씀을 본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우리는 평소에 위선자로 산다는 것인데, 그래서 허겁지겁 뭔가를 덮기에 급급해한다는 겁니다.
더욱 더 맛있는 맛집을 찾아서 !!
무엇을 덮습니까? 절대허무를 덮는데, 주님의 말씀이 오게 되면 절대허무가 나타나고, 우리는 그것을 덮기에 급급하다는 말이죠. 매사에 절대허무가 나타나는데, 어제도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맛집을 찾아간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나는 맛집 하나로 만족하리라" 라는 것인데, 그런데 막상 가보면 어떻습니까? "에이, 이것이었었어!" 라고 하게 되는데, 그렇게 다시 허무가 밀려온다는 겁니다.
물론 "역시 소문대로 맛있구나!" 라고 할 수도 있는데, 그런데 그게 그 집으로 스톱되는 것이 아니라, 그 집보다 더 맛있는 집을 찾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허무가 계속해서 나온다는 겁니다. 그래서 전도서에 보면, "책을 많이 읽어도 소용이 없고, 재산을 많이 가져도 소용이 없고, 여자를 많이 거느려도 소용이 없고, 심지어 건강해도 소용이 없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이래도 소용이 없고 저래도 전혀 소용이 없는데, 그러니까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전도서 7장 3절에 보면,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느니라" 라고 한다는 말이죠. 즉 잔칫집이 아니라 초상집에 가면 우리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죠.
(전 7:1)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전 7:2)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
(전 7:3)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함으로 마음이 좋게 됨이니라
(전 7:4)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느니라
이것은 우리를 보고 죽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솔직하게 까놓고 이야기하는 것이 낫지 않느냐는 겁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절대허무에 시달리지 않는 방법이 된다는 것인데, 그러니 마음을 완전히 낮추고 또 낮추라고 한다는 말이죠.
지금까지는 대단히 쉬웠다고 할 수 있는데, 이제부터는 본론에 들어가고자 합니다. 그러면서 약간의 염려가 되어서 교재 41페이지를 보겠는데, 거기에 역대상 29장 15절의 말씀이 나옵니다.
(대상 29:15) 주 앞에서는 우리가 우리 열조와 다름이 없이 나그네와 우거한 자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머무름이 없나이다
그림자를 따라서 움직이는 실체 !!
여기에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머무름이 없나이다" 라고 하는데, 이것은 우리의 상식을 벗어난다는 겁니다. 우리의 상식은 무엇입니까? 실체가 있으면 그림자가 그 실체를 따라서 움직이는데, 그런데 성경은 그것이 아니라, 그림자가 가라고 하면 실체가 따라간다는 말이죠. 어렵지요?
그러니 우리의 실체가 본체가 아니고, 그림자 안에 하나님이 감추어놓은 진짜 본체가 있는데, 그런데 우리는 주님이 인도하시는 그림자는 내버리고, 현실 속에 있는 손에 잡히는 이 세포, 이 덩치만 있으면 된다고 하면서 버틴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성경을 보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데, 성경에서 이런 말도 안 되는 비상식적인 이야기를 하니 말이죠. 사람을 왜 이렇게 허무하게 몰아넣느냐는 겁니다. 그렇게 살기를 싫다는 것인데, 그렇게 버티고 있다는 말이죠. 무엇을 가지고 그렇게 합니까? 가짜 본체를 가지고 그렇게 한다는 것이죠.
다윗이 신앙인이 맞는데, 그렇다면 신앙인의 고향은 어디입니까? 하늘나라인데, 그러면 하늘나라에서 보는 자기 모습이 있다는 겁니다. 그 모습의 그림자가 지금의 가짜 자기를 자꾸만 재촉한다는 것이죠. "가자. 여기는 아니야. 여기는 나그네 생활이야" 라고 말이죠. 여기서 우방랜드를 지어서, 거기서 영원히 살려고 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성도는 이 세상에 집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여기에는 없고 하늘나라에 숨겨져 있는데,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서 실체라도 실체가 아니고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이죠. 그래서 이 땅에서는 그림자를 따라가야 하는데, 머무름이 없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이 세상에 있는 집 말고 다른 곳이 집이 없다는 겁니다. 이 세상을 전부로 여기고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죠. 물론 성경을 보지 않으니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데, 자기 집이 있는데 굳이 성경말씀을 왜 보느냐는 겁니다.
"집사님, 집이 있습니까?" 라고 하면, "이번에 40평짜리를 하나 힘들게 장만했습니다" 라고 하는데, "어디 그것 말고는 없습니까?" 라고 하면, "예, 그것 말고는 없습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 집은 걸어서 갈 수도 있고 버스를 타고 갈 수도 있는데, 그것뿐이란 말이죠.
그러니 하늘에 있는 집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도 없고 모르는데, 그게 우리의 본향인데 정작 그 집에 대해서는 감감 무소식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 집은 어떻게 갈 수가 있겠습니까? 그림자가 덮쳐서, 그 그림자가 인도하는 대로 가야한다는 말이죠.
계속해서 교재를 보겠습니다.
** 하나님이여, 제가 지금 받은 모든 재물과 권능은 다 주께 받은 겁니다. 이제 주께 받은 것을 성전 지음으로 되돌려드리겠습니다. 우리 인생은 잠시 머물다가 가는 나그네에 불과한데, 이런 돈을 가지고서 나를 위해서 쓰는 것보다 성전을 짓는 것이 옳습니다.
이게 역대상 29장에 나오는 내용인데, 제가 왜 오늘 강의의 본론이 어렵다고 했는고 하니까, 성전이 절대중심으로 등장한다는 겁니다. 조금 전에는 절대중심이 경제라고 했는데, 삼성그룹이라고 말이죠. 그런데 그게 이제는 성전으로 바뀐다는 겁니다.
여기에 "여기에 이런 돈을 가지고 나를 위해서 쓰는 것보다 성전을 짓는 것이 옳습니다" 라고 하는데, 그러면 오늘날 목사들이 이것을 어떻게 이용하겠습니까? 예배당을 짓는데는 더 이상 좋은 것이 없다는 말이죠. 하지만 예배당은 결코 성전이 아니라는 겁니다.
손으로 지은 성전, 손으로 짓지 않은 성전 !!
성전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불에 타는 지점에 짓는 성전이 있는데, 어디에 탑니까? 그게 바로 이 세상인데, 나중에 이 세상에 유황불이 떨어진다는 말이죠. 그게 베드로후서 3장에 나오는데, 그런 성전이 있고, 즉 사람의 손으로 짓는 성전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 성전은 불에 타버린다는 말이죠.
(벧후 3:7)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반면에 손으로 짓지 않는, 즉 재물로 짓지 않는 성전이 있는데, 이것은 스가랴서에 나오는데 말이죠. 하나님의 신으로 짓는데, 이것을 에베소서에는 성령으로 짓는다고 한다는 겁니다. 성령으로 짓는 성전은 '완료' 라는 것인데, 즉 종료가 되었다는 것이죠. 마지막 남은 성전인데, 이것이 곧 절대중심, 절대공간이라는 말이죠. 사람으로 손이나 재물로 짓지 않는 성전, 이것이 전도서에 나온다는 겁니다.
(엡 2: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엡 2: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엡 2: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그러면 절대성전, 즉 손으로 짓지 않는 성전에는 무엇이 담겨있을까요? 시편 84편에서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라고 하는데, 그리고 그 앞에 보면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성전에 가야한다는 말이죠.
(시 84:3)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
(시 84:10)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아하, 하늘나라에는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않는 성전이 있구나" 라고 하게 되는데, 그런데 그 다음이 궁금해야 합니다. "그 성전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가?" 라고 말이죠. 성전 안에는 무엇이 있는고 하니, 그것은 바로 '제사'가 있다는 겁니다.
한 번 제사는 영원한 제사 !!
이 땅에서의 제사는 한 번 드리면, 그게 두 번째 제사로 이어지지 않는데, 그런데 하늘나라의 제사는 한 번 드리게 되면, 두 번째, 세 번째 제사가 필요치 않다는 말이죠. 그 제사의 효과가 계속해서 간다는 겁니다. 이것을 단 번에 드린 제사, 즉 한 번만 드리게 되면 되는데, 두 번 다시 제사가 필요하지 않다는 말이죠.
종근당에서 나온 '젤콤 '이라는 기생충 약이 있는데, 그 광고문구를 보면 "한 번만 먹어도 기생충은 다 죽습니다" 라고 하는데, 물론 요즘 나오는 기생충 약은 다 그렇다고 하는데 말이죠. 그게 제법 오래된 광고인데, 저는 그것을 보고 "그것이 바로 십자가다" 라고 생각했는데(ㅋㅋ), 그러니 십자가의 효과로 인해서, 또 예배를 드리고 또 헌금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우리가 지정된 장소에서 예배를 드린다고 해서 그것이 예배가 아닌데, 왜냐하면 그것은 계속 효과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목사가 "다음 주에도 나오세요" 라고 한다는 것은, 진짜 제사도 아니고 예배도 아니라는 겁니다. 한 번만 드리면 깔끔하게 모든 것이 해결이 되는 제사, 그게 바로 진짜 제사라는 말이죠.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고 대체해서 아버지에게 드린 제사인데, 그 장소가 바로 영원한 성전, 즉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아니한 영원한 성전이라는 겁니다. 그 성전에 하나님의 진짜 제사가 들어있다는 것이죠. 그러면 여기서 스톱이 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나가야 하는데 말이죠.
그런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고 하니, '언약궤'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언약궤라는 것은, '말씀+제사' 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즉 언약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 제사를 이루는 것인데, 요한계시록에 보면 언약이 그렇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 언약은 인간은 모르고 아버지와 아들만 아는데, 그러니 말씀은 예수님만이 아시고, 그리고 제사는 예수님 본인이 제물이 되고 제사장이 되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앞에도 예수님께서 이루시고, 뒤에도 예수님께서 이루신다는 겁니다. 즉 언약은 결국 예수님이 홀로 다 이루셨다는 말이죠.
여러분, 예수님께서 다 이루셨습니다 !!
그러니 성령을 받은 증거가 무엇인고 하니, 단 하나인데, 예수님께서 다 이루신 나라에 우리가 공짜로 들어간다는 겁니다. 이것은 성령을 받은 사람만이 알 수 있다는 말이죠. 종교고 뭐고 필요가 없는데, 예수님께서 다 하셨는데, 우리는 전혀 거기에 동참한 적이 없다는 겁니다. 오직 예수님만 홀로 다하신 그 나라에 우리는 예수님을 초청을 받아서, 박수를 치기 위해서 그냥 쏙 들어간다는 말이죠.
이러한 진리를 위해서, 우리는 그 어떤 것이라도 단호하게 대처할 자신이 있어야 하는데, 진리를 모르면 자신감 있게 인생을 살아갈 수가 없다는 도저히 겁니다. 설교를 하거나 복음을 전파할 때, 진리의 자리에 있으면, 그 사람의 눈빛에서 자신감이 넘쳐나는데, 그렇지 않고 남을 의식하게 되면 그만 벌벌 떨게 된다는 겁니다.
그것은 인생을 살아도 마찬가지인데, 그렇게 자신감이 없으니 "나는 조졌다. 망했다. 겁난다" 라고 하는데, 진리의 자리에 서지 않아서 그런 현상이 일어난다는 말이죠. 그런 것을 노려서 보이스 피싱을 하고 하는데, "지금 당신의 아들이 우리에게 있다. 어디 사물함에 돈을 준비해서 넣어라" 라고 한다는 것이죠. 이번에 실제로 어느 대학의 사물함에서 거액의 돈이 나왔다고 하는데 말이죠.
그런데 절대공간에 허무가 찾아오면?
그런 소리를 들으면 두렵지 않은 부모가 없는데, 왜 두려워하지요? 복습을 겸해서 누가 대답을 해보세요. 절대중심 공간에 자식이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전도서에 의하면 절대공간이 무엇이 있어야 합니까? 허무가 찾아오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나그네이기 때문에 말이죠. 모든 것이 그림자라는 겁니다.
솔로몬이 그렇게 부자가 되고 자식이 많고 똑똑해도, 그런 것들은 다 허무에게 양보를 했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 허무가 말씀이고, 그 말씀이 하나님의 성전이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미 성전에 있는 사람은, 그 성전의 내용이 어떠하다고 했습니까? 하나님이 홀로 아시고 홀로 이루신 그 세계에, 자기는 아무런 한 것도 없는데 그냥 초대를 받았다는 겁니다.
자기는 아무 한 것도 없는데 진리에 들어갔다는 말이죠. 여기에 대한 안도감과 자신감, 그 완료성, 즉 "다 이루었다" 라고 하는 말이죠. 그것을 그 누구에게도 빼앗기면 안 되고, 그리고 빼앗아갈 권세자도 이 세상에는 더 이상 없다는 겁니다. 주님이 넣었기 때문에, 주님이 오셔서 빼앗아가지 않는 이상,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다는 말이죠.
주님은 우리처럼 줘놓고 빼앗고, 그렇게 하실 분이 아니라는 겁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이 세상에서 주님보다 더 강한 존재는 없는데, 그러니 주님이 주신 이 기쁨을 어느 누구도 빼앗아갈 자기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는 넉넉하다는 겁니다.
그리스도 안 !!
이제 진짜로 어려운 것에 들어가는데, 그게 '그리스도 안' 이라는 겁니다. 그리스도 안에 들어온다는 것을, 제가 이런 설명을 하지 않고, 강의를 시작하면서 바로 "여러분, 그리스도 안에 들어와야 구원을 받습니다" 라고 한다면, 그게 무슨 의미인지를 알 수 없다는 말이죠. 무슨 말인고 하니, "내가 여기에 있고, 그리스도가 여기에 있는데, 그런데 내가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 들어갈 수 있는가?" 라는 겁니다. 말도 안 되는데, 들어갈 수가 없다는 말이죠.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
예를 들어서, 처음에 결혼을 하면 남자들은 그렇지가 않은데, 대부분의 여자들은 그렇게 행복해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나름대로 연구를 해봤는데, 왜 여자들은 결혼자체가 그렇게 행복한지를 말이죠. 저의 연구에 의하면, 남녀가 합궁을 하게 되면, 남자는 괜찮고 돈이 들지 않는 식모를 얻었다고 생각하는데, 그런데 여자는 남자 속으로 들어온 것으로 여긴다는 겁니다.
그래서 심수봉이 그런 노래를 불렀는데,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라고 말이죠. 가사가 좀 이상하다고 해서 한 때 금지곡이 되기도 했는데, 결혼을 하게 되면 자기가 남자에게 들어가서 온통 남자가 자기를 보호한다고 여긴다는 말이죠. 물론 노래는 여자인 항구가 남자인 배를 보호하는데, 아무튼 여자는 그렇게 느낀다는 겁니다.
그러니 행복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이전에는 혼자 살기에 행복하기 위해서 챙길 것이 너무 많은데, "남들이 비난하지 않을까? 깡패가 와서 괴롭히지 않을까?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런데 남자가 와서 한 팔로 끌어 앉으면서 "이리와. 이제 보호해줄게" 라고 하면, 그때부터 여자는 "불행 끝, 행복 시작!",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제부터 모든 것을 다 남편이 책임을 져주기 때문인데, 그러니 자기는 이제 아이만 낳아서 키우면 된다는 말이죠. 돈벌이는 남편이 하고, 자기는 이제 사랑을 받기만 하면 된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남자 안의 여자' 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게 창세기 2장에 나오는데, 처음부터 아담은 자기와 결혼을 했는데, 왜냐하면 한 몸이기 때문에 말이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
자기 갈비뼈와 결혼을 했기 때문에, 그 갈비뼈가 떨어진 것이 아니라, "어, 갈비뼈가 여기에 있었네" 라고 하면서 그 갈비뼈를 다시 줍는데, 즉 여자는 남자의 일부라는 말이죠. 바깥으로 나오면 안 되는데, 바깥으로 나오면 여자가 아니라는 겁니다. 안에 들어있음으로서 두 사람이 한 몸이 된다는 말이죠.
(창 2:22)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창 2:23)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창 2: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이번 5월 6일에 주례사를 할 때 이것을 가지고 해야하겠는데, 그러니 여자로서는 그야말로 '땡' 잡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자는 결혼을 하게 되면 살이 찌기 시작하는데,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성경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남편은 예수님이고, 남자든 여자든 우리는 다 아내가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는 정죄함이 없다고 하는데, 그 그리스도 안이 천국 안이고 또한 성전 안이고, 그러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이미 하늘나라에 들어왔다는 겁니다. 그래서 먹든지 마시든지, 그 모든 것은 이제 남편이 다 알아서 책임을 지고 보장을 해준다는 것인데, 그러면 거기에 들어가기 위해서 우리가 얼마나 애를 썼는고 하니, 전혀 그런 것이 없다는 말이죠.
(롬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주님께서 오른손으로, 구약에 보면 왼손은 안 되는데, 구원은 오른손으로 하신다는 겁니다. 왼손잡이는 옛날에는 장애자인고, 물론 요즘은 오른손잡이가 장애인이고, 왼손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으니 말이죠. 하지만 왼손잡이는 오른손도 잘 쓴다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신부, 주의 것 !!
아무튼 유일한 정상인이 되시는 주님이 오셔서, 즉 주님의 오른손의 능력으로 자기 품 안에 넣으면, 두 번 다시 바깥으로 나갈 수 없다는 말이죠. 그렇게 꼬리가 끊어지면서,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는 '나'가 되는데,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면 '나' 라고 따로 챙길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는 것이지, '나' 라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즉 '주의 것'으로 바뀌는데, 그러니 이제부터는 주의 것으로 살아간다는 겁니다. 커피를 마셔도 주의 것으로 마시고, 자식을 낳아도 주의 것으로 낳는다는 말이죠. 그래서 주 안에 있는 자는 오직 주님만 자랑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결혼을 하기 이전에는 자기만 실컷 자랑하던 여자가, 결혼을 하고 나서는 누구를 자랑한다는 겁니까? 자기 남편을 자랑한다는 겁니다. 아가씨 때는 모여서 전부가 자기 자랑만 하다가, 그런데 그 중에서 하나가 결혼을 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신랑 이야기만 늘어놓는다는 겁니다. 자식이 있다면 자식 이야기만 하고 말이죠.
심지어 시어마니 자랑까지 하는데, "우리 시어머니가 얼마나 좋은지 몰라. 김치도 담아주고, 아이도 다 키워주신다. 나는 너무 행복해. 결혼하기를 너무나 잘했어"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야말로 행복 바이러스를 마구 퍼트리는데, 물론 듣는 사람들에게는 짜증 바이러스이지만 말이죠. 그래서 참다 못해서 다른 친구들이 뭐라고 합니까? "야, 저 인간은 우리 모임에서 빼자" 라고 한다는 말이죠(ㅋㅋ).
그리고 평소에는 남편 욕을 그렇게 하던 여자도, 그 남편이 죽고 나면 그만 우울증에 걸리고 마는데, 도대체 말이 안 된다는 겁니다. "너거 아버지 어디로 갔노?' 라고 하면서 말이죠. 물론 속시원해하는 여자도 있기는 하지만, 도대체 진심이 무엇이냐는 것이죠.
그래서 '여자의 후손' !!
그래서 '여자의 후손' 인데, 즉 여자처럼 되지 아니하면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여자는 자기를 내세우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가 사랑했던 남편만 자랑하는데, 그게 가부장적인 남자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혼자 살 수 없는데, 여자는 그리움 때문에 산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를 책임져주었던 바로 그 사람, 그것이 곧 사랑을 받은 신부의 모습이라는 말이죠. 성경은 바로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여자의 후손에서 메시야가 온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여자는 예수님의 신부가 된다는 말이죠.
이제 진짜 어려운 이야기를, '계층적 구조' !!
이제부터 진짜 어려운 이야기를 하겠는데, 그게 바로 '계층적' 이라는 겁니다. 인간은 외부에서 자극이 주어지게 되면 반응을 나타내는데, 그 반응을 '감각' 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이 감각은 시간의 순서에 따라서 플러스가 되면서 우리 안에 들어오는데, 그렇게 우리에게 들어와서 우리에게 결과로 나타날 때는 선형으로, 즉 직선이 아니라 계층적이라는 겁니다.
다시 설명을 해드리자면, 외부에서 자극이 들어오면 반응을 나타내는데, 그 반응을 감각이라고 하고, 그 감각이 우리 안에 장착이 될 때는 선으로, 즉 먼저 온 것부터 순서대로 될 것 같은데, 그게 우리의 상식인데, 그런데 막상 우리가 이해할 때는 그게 아니라 선형, 즉 선이 아니라 계층적 구조로서, 그것을 '다중현실' 이라고 한다는 것이죠.
그러면 이것이 그만 뒤죽박죽이 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일괄장악의지가 작동하기 때문에 말이죠. 악마가 그렇게 하는데, 즉 외부에서 들어오는 그 어떤 것도 악마가 원하는 대로, 악마 중심으로 되고 마는데, 악마가 우리를 앞장세웠다는 말이죠. 그것을 어제 설교시간에 '청구인생' 이라고 했는데, 악마는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우리에게 청구해서, 그것을 우리가 대신 해주고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나는 최고다. 다른 것은 모두 허무해도 나는 허무하면 안 돼. 나는 불멸해야하고, 나는 의미가 있어" 라는 것인데, 그 의미가 전체 모든 것을 일괄해서 다 장악한다는 말이죠. 그것을 의지로서 작동하게 되면, 그게 바로 자기가 원하는 현실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그게 하나의 고집으로 나타난다는 말이죠.
계층적 구조와 그리스도 안 !!
그러면 이것을 '그리스도 안'과 비교를 해보자는 겁니다. '그리스도 안' 이라는 것은, 모든 것을 예수님께서 다 하시고 우리를 초대했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철저하게 예수님 의존적일 수밖에는 없는데, 즉 예수님에게 기대고 또 기댄다는 말이죠.
만약에 여자가 결혼을 하고 나서 진짜로 남편을 욕한다고 하면, 그것은 제대로 된 결혼생활이 아닌데, 그러면 친구가 놀린다는 겁니다. "결혼을 했어? 말았어? 분명히 해. 결혼을 했는데도 남편이 싫다고 하면, 그것은 남편이 아니지. 그러면 갈라서라" 라고 하면서 말이죠.
결혼을 했는데도 남편이 싫고 꼴보기가 싫다고 하면, 그것은 전혀 행복한 결혼생활이라고 할 수 없는데, 그러면 진짜 행복한 결혼생활은 무엇입니까? 자기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남편 이야기가 나오고 자꾸만 시댁 자랑만 늘어놓게 된다는 겁니다.
"이 비싼 아파트도 시아버님이 다 사주셨어. 그러니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라고 하면서 말이죠. 물론 실제로 그렇게 해주면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그래서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시댁의 귀신이 되겠습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돈 앞에는 대장이 없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성도가 무엇입니까? 바로 이것인데, 즉 주님에게 "제가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라는 것이 곧 성도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2장 10절에도 그런 말씀이 나오는데 말이죠. 즉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계 2:10)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총괄장악, 그리고 억지 !!
그런데 이상하게도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은 뭐라고 합니까? 이 세상 모든 것은 자기를 위해서 존재해야 한다고 하는데, 그러니 '총괄장악' 인데, 즉 모든 것을 총체적으로 장악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모든 것을 자기 손에 쥐어야 만족해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괴물이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데, 이게 굉장히 강렬한 의지라는 겁니다. 따라서 이러한 인생은 억지가 참으로 많을 수밖에는 없는데, 자기에게 조금이라도 손해가 된다고 여기게 되면, 그것을 막으려고 억지 논리를 마구 펼친다는 말이죠.
예를 들어서, "세월호에 사건으로 우리 아이가 빠져죽은 것은 박근혜 때문이다" 라고 하는데, 이러한 것이 억지라는 겁니다. 즉 "당신이 뭔데 꽃다운 우리 아이를 죽였는가?" 라는 겁니다. 물론 대통령이 잘했다는 것은 아닌데,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다는 말이죠.
그런데 강원도 산골짜기에서 감자를 키우는 할머니는 무엇입니까? 세월호나 대통령은 관심도 없는데, 올해도 비가 제대로 와서 감자가 잘 열리기는 바란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할머니는 무엇이 총괄장악의지입니까? 감자가 잘되게 비만 오면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것도 역시 자기 중심인데, 그러니 이 세상은 자기 혼자라도 적합하게 살 수 있도록 돌아가 주어야, 그게 좋은 세상이고 좋은 하나님이고 좋은 예수님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것인데,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어떠하다고 했습니까? 자기 자랑이 아니라 예수님을 자랑하기에 바쁜데, 즉 "주님이 이렇게 적합한 현실을 주셨습니다" 라고, 즉 "저를 천국에 보내주기 위해서 절대허무를 저에게 집어넣어서, 나그네와 그림자 인생으로 살게 하셔서, 본향에 가도록 인도해주셨습니다" 라고 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남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당신은 이전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요즘은 왜 그래? 자꾸 합당한 성경말씀이 나오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좁은 길로 가라는 것이 이제 납득이 되더라. 왜냐하면 그 끝은 영생인데, 그런데 넓은 길은 불쌍하더라. 그 끝은 지옥이기 때문이다" 라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
나이아가라 폭포와 같은 우리 인생 !!
제가 나이아가라 폭포에 가보지 않았으면 말을 하지 않는데, 갔다는 말이죠. 그 나이아가라 폭포에 50미터 정도로 접근하면 스마트폰으로 찍을 수가 없는데, 너무 소리가 웅장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찍어도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는데, 그 범위를 능가했다는 것이죠. 나이아가라 폭포를 제대로 찍은 사람은 거의 없는데, 그래도 우리는 2인 1조가 되어서 겨우 찍었는데, 당연히 바람도 심하고 말이죠.
그게 허드슨 강이지 싶은데, 그게 결국은 폭포가 되어서 떨어지더라는 겁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삼성이고 현대고 간에 결국은 떨어지게 되어있다는 말이죠. 사람들이 다 이것을 좋아하는데, 중심에는 경제가 있고, 그 경제는 삼성그룹이라는 겁니다.
이것을 절대공간이라고 하는데,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이 절대공간을 절대허무로 바꾸게 된다는 말이죠. 그것은 바로 미래의 절벽을 미리 앞당겨서 우리 속에서 눈치를 채도록 하시는데, 즉 "인생은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살면 결국에는 절벽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총괄의지와 싸우는 말씀 !!
그런데 이제 성경말씀이 문자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 안으로 들어오는데, 그러면 우리 속에서 무엇과 싸우는고 하니, 그게 '총괄장악의도', 혹은 '억지' 라고 할 수 있는데 말이죠. 사람들과 이야기를 해보면 다들 억지가 담겨있는데, 억지가 없는 사람이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자기 중심이기 때문에 말이죠.
하지만 성도는 억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이 바로 죄이고 허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 그리고 그 허무가 하나님의 말씀과 만나게 된다는 겁니다. 허무와 말씀이 만나는 것은, 그것은 성전 안에 있는 언약의 구조인데, 즉 "예수님은 죄인이었으나 주께서 부활하게 하심으로서 영생의 나라를 완성했다" 라고 하는 말이죠.
역시 예수님이 최고입니다 !!
그리고 그 구조가 우리 안에서 반복이 되면서 일어나는데, 예수님의 영이 우리 안에 있으니, 그것은 예수님이 가지셨던 마음에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이고, 그러면 예수님의 마음을 무엇입니까? "내가 아무리 잘먹고 잘살아도 주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 라고 고백이 되는 것인데, 그것은 이미 예수님의 신부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주인인데, 그것을 바로 '주 예수' 라고 한다는 말이죠. 즉 '나의 남편' 이라는 뜻인데, "주 예수님, 나는 당신의 신부입니다" 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나는 주 예수를 믿습니다" 라고 하는 것은, "나는 더 이상 나를 위한 현실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한 현실 속에, 그 현실에 초대를 받아서 이 세상에서 누리고 있습니다" 라는, 그런 의미라는 말이죠.
따라서 솔로몬이 절대허무를 이야기하면, 우리는 인상을 쓰면서 억지로 동의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면서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도 절대허무를 넉넉하게 이야기할 수 있어야만 하는데, 영생의 가진 자의 여유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계속해서 교재 41페이지를 보겠습니다.
** 이로서 우리가 살던 모든 환경이 예수님으로 인하여, 결국에는 허무 덩어리로 바뀐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눅 9:62)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롯과 그 아내 !!
예수님께서는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않다" 라고 하셨는데, 그런데 소돔과 고모라의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다봤다는 겁니다. 왜 그런가요? 자아라는 것이 어디서 만들어졌는고 하니, 소돔과 고모라라는 도시에서 자기가 만들어졌기 때문에, 자기의 그 원천을 잊을 수가 없었다는 말이죠.
그런데 롯은 왜 뒤를 돌아다보지 않았습니까? 롯이 소돔과 고모라를 버릴 수 있었던 것은, 롯의 원천은 소돔과 고모라가 아니라 아브라함 언약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이게 지난 수요일에 한 설교인데, 지금 표정들이 처음이라고 하는 것 같은데 말이죠(ㅋㅋ).
롯은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자기는 소돔과 고모라와 관련성이 없다는 겁니다. 오히려 자기를 힘들게 한 것이 소돔과 고모라라는 말이죠. 그런데 롯의 아내는 무엇입니까? 롯과 같이 손을 잡고 나와도, 자기 토대를 잊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자기는 소돔과 고모라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마치 엿가락이 늘어나도 엿이듯이, 그런 자기 바탕을 잊을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 손만 놓으면 다시 돌아가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교회에 나온 것이 50년이 되고 목사가 되고 장로가 되어도 다시 세상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인간인데, 자기의 원천을 끊을 수가 없다는 말이죠. 교회에 나와서 제 아무리 기도를 해도, 자기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역시 자기의 총괄장악, 즉 "나는 혼자 영원히 살고 싶어. 나는 나만을 자랑하고 싶어. 다른 사람은 자랑하고 싶지 않아" 라고 하는 본성, 그것은 여전히 소돔과 고모라에 속해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아무리 교회에 나와서 장로가 되어도, 돈만 있으면 다시 시의원도 하고 싶고 출세가도를 달리고 싶어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권력을 쳐다보게 되어있다는 말이죠. 다시 돌아가려고 한다는 겁니다.
아하, 괴물이었구나 !!
롯의 아내가 뒤를 돌아보고 무엇이 되었습니까? 그만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는데,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이 보여주는 것은, 모든 인간은 인간이 아니었고 모두가 물체이고 물질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것을 하나의 튀어나온 여자를 통해서, 그 여자가 모든 인간을 대변해서 보여준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너희는 처음부터 인간이 아니기에, 심판에 대해서 섭섭하게 여기지 말라" 라는 겁니다. 판을 받을 물질에 불과하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인데, 인간이 아닌 것들이 인간 행세를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막상 모든 것이 종결되는 마지막 심판의 날이 되면 모든 본색이 드러나고 만다는 것이죠.
그러니 "아하, 사람이 아니었구나. 괴물이었구나!" 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인정하시는 것은 아브라함 언약인데, 즉 새 언약으로 인해서, 십자가의 완료에 의해서 새롭게 발생된 자들만 주님께서 받아주신다는 겁니다. 그들이 바로 성도라는 말이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과연 그 누구를 자랑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삶의 목표가 무엇입니까? 다시 한 번 모든 것이 헛되다고 하는 전도서의 말씀을 통해서 그것을 돌아보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렇게 지식도 많고 돈도 많고 여자도 많았던 솔로몬이. 주님의 신부가 되어서 모든 것이 헛되다고 하면서 기뻐했던 그 기쁨에 저희들도 참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7,4,7 오전11시에 마침.
그런데 왜 말씀이 아닌 마누라를 보면 총괄의지가 튀어나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