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고린도후서30강-하나님의 의(고후5;20-21) 170402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4. 4. 06:58
2017-04-02 12:42:10조회 : 101         
   하나님의 의17 0402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하나님의 의(고린도후서 5:20-21)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wmVc7LQrLWc, Hit:2
 이근호17-04-02 13:25 
하나님의 의  

2017년 4월 2일                          본문 말씀: 고린도후서 5:20-21 

(5:20)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오신 것을 죄라는 죄는 죄다 긁어모으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 죄를 자기 몸을 담습니다. 죄를 모르신 분이 ‘죄의 몸’이 되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로마서 8:3에 보면,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죄를 정하사’라는 말씀은 죄를 확정했다 는 뜻입니다. 즉 인간들은 자신의 죄를 모른다는 말입니다. 죄도 모르면서 죄를 피해보려고 한 것입니다. 물론 이런 시도가 죄가 되는 것을 물론입니다. 아담의 범죄로 인해 인생들은 악마를 대신하는 ‘청부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인간들은 힘든 대지 위에서 살면서 거침없이 신을 향하여 데모하고 시위합니다. 즉 “우리에게 구원을 달라”, “죽어서는 천국에 가게 해달라”고 외칩니다. 그들은 자신의 죄인이라서 그것을 요구할 그 어떤 권리나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그저 몸이 괴로우니 외칠 뿐입니다. 

장래가 걱정되기 미리 대비하고 싶을 것뿐입니다.
장래가 모호하니 미래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싶을 뿐입니다. 그래서 현재를 안심 놓고 살고 싶을 뿐입니다.
이런 욕구들은 다 자신의 육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육신의 욕구를 과연 인간이 감당할 수 있을까요? 

예를 들어, 맛집을 찾아가고 싶은 욕구가 생길 때에 그것은 ‘안 생긴 것’으로 취소시킬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본인의 희망은 신체의 욕구에 대해서 뒷치닥거리할 뿐입니다. 더 근본 
적으로 말해서 그 충동을 억지로 억누른다고 해서 아예 그런 욕구가 발생된 것 자체를 무효 
화 할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이미 ‘죄인으로 살다 죄인으로 죽어야 될 운명을 지니고’ 태어났기 때문입 
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나타난 활동한 내용이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잘 나와 
있습니다. 사람들은 여기에 대해서 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는지를 모른다. 그저 예수님 
을 훌륭한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코 훌륭한 분이 아닙니다. ‘죄의 육신’으로 아버지께 버림받아야 될 분으 
로 일하신 것입니다. 인간들이 기대하는 구원을 제공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인간의 소원대 
로 구원해 주실 분을 하나님께서는 결코 보내신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구원받을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현 인간을 구원해준다’는 대목이 전혀 없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께서 
는 오직 예수님에게만 관심을 두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대신 하심’에 주목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관계만이 ‘하나님의 의’가 되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이러합니다. 

어떤 동양화에 물고기 몇 마리 놀고 있는 그림이 있는데 그림값이 3,300만원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보고 있는 어떤 무식한 관람객이 생각하기를 “물고기 4마리 노는 게 3,300만원이라면 만약 20마리 그려 놓았다면 그림값이 억대가 넘어가겠다”하면 누가 들어도 웃을 이야기입니다. 

그림값은 그 안에 그려져 있는 물고기 숫자하고 상관없습니다. 수산물 시장에서 경매하는 것과 다릅니다. 물고기는 단지 3,300만의 예술적 가치를 표현하기 위해 동원된 대상일 뿐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의’란 이 창조 세계의 전체 원리를 말합니다. 그런데  인간 개개인이 독자적인 ‘자기 의로 구원’을 챙기기 위해서 ‘하나님의 의’를 생각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악마의 생각입니다. 

이사야 45:7-8에 보면,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 너 하늘이여 위에서부터 의로움을 비 같이 듣게 할지어다 궁창이여 의를 부어 내릴지어다 땅이여 열려서 구원을 내고 의도 함께 움돋게 할지어다 나 여호와가 이 일을 창조하였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은 피조 세계 전체가 ‘하나님의 의’로 덮여지는 그 날입니다. 그렇다면 인간들이 개인적인 ‘목적’을 가질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자기 인생을 목적이나 목표를 갖겠다는 것은, 이미 죄을 짓기 위해 살아가야 한다는 ‘하나님 의’ 차원에서 규정된 인간의 목적에 대해서 모독하는 짓이 됩니다. 

인간은 아무런 목적이 필요치 않습니다. 그냥 목숨 붙어 있는 대로 지속적으로 죄 짓고 살면 됩니다. 그러라고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어놓으신 것입니다. 인간은 죄 짓는 것 이외에 할 게 없습니다.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를 말합니다.그것은 지상에서 다 이루어졌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관계성이 이제 성령님을 통해서 그대로 새로운 피조물에 복제가 됩니다.
그 복제된 관계가 바로 ‘하나님의 의’가 되는 겁니다.이렇게 된 자가 곧 성도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로마서 4:6에,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인간들이 이 땅은 그리 대단한 일들을 했더라도 하나님 보시기에 ‘의에 해당되는 일’은 전혀 없는 겁니다. 나름대로 의미를 두고 한 일이나 그렇지 않고 무심코 한 일이라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전혀 일한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의는 어디서 주어지는 겁니까? 로마서 4:25에 보면,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범죄함’이라는 우리 인간들이 ‘나는 죄지었음’이라고 알고 있는 그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들은 자신들의 하는 행위가 죄인지 아닌지를 구분 지을 그 어떤 능력도 결여되어 있는 존재입니다. 설사 안다고 하더라도 그 죄를 벗어날 수 없는 처지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신체의 욕구는 인간의 양심으로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독자적인 ‘하나님의 의’를 쟁취하지 않게 해주시옵시고 그 의 앞에서 그동안의 의도 놔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17-04-03 13:47 

230강-고후 5장 20-21절(하나님의 의)17040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후서 5장 20-21절입니다. 신약성경 291페이지입니다. 

  

고린도후서 5:20-21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인간이 그냥 하나님 섬기면 되는데 

그 인간과 하나님이 관계 사이에 끼어드신 분이 있지요. 

예수님이라는 분이 그 중간에 끼어듭니다. 끼어드는 이유가 뭐냐? 

너희들이 죄를 모른다는 거예요. 

죄를 모르기에 착하게 살려고 해요. 

만약에 죄를 안다면 평생 노력하고 아무리 애를 쓰고 교회 나와도 

인간은 죄 짓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자기가 알게 됩니다.  

죄라는 것은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처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제일 밉상이 뭐냐? 

죄를 짓는 것이 밉상이 아니고 죄를 지었으니 다음에는 안 지어야지, 하고 노력하는 그것이 최고의 밉상이 되는 겁니다. 

  

지난번에 죄 지었는데 나도 자존심이 있고 나도 한 선함 하는데, 나도 얼마든지 착해질 수 있는데 지난번에는 실수해서 죄를 지었으니 이번에는 실수를 안 하고 전보다 개선의 여지를 보여야지, 이런 식으로 시도한다면 그 사람은 예수님을 개무시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예수님이 끼어들 이유가 없어요. 차라리 이렇게 생각해야 돼요. ‘전번에 실수해서 지은 죄는 사실은 실수가 아니었다. 내가 미처 몰랐던 나의 본성이 튀어나온 것이다. 따라서 그런 지난 죄는 아무것도 아닌 죄고 앞으로 인생 살면서 큰 덩어리가 같은 죄가 계속해서 나를 통해서 튀어나올 것이다. 죄를 지을 각오를 하자.’ 그렇게 되어야 돼요. 

  

교회 다녔으니 이제 개과천선해서 인간되어야지, 그게 바로 밉상, 교회밉상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이 존재할 이유가 없어요. 자기가 잘나서 자기가 천국가게 되면 그 천국은 주님의 나라가 아니고 본인나라에요. 본인나라에서 자기혼자 대장질하고 있다는 말이지요. 

오늘 본문 보면서 사도바울이 이런 말을 할 때는 앞에 있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고 예수님 가셨던 그 흔적, 마태, 마가, 누가복음,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살았던 그것을 제대로 우리에게 이해를 시켜주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인간은 죄라는 권세, 힘에서 아무리 애를 써도 벗어날 수가 없는 존재라는 겁니다. 
그것이 하나의 운명이고 팔자에요. 죄 안지 을 수가 없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예수님이 그런 조로 이야기를 했는데 대부분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반대로 이해를 했습니다. 훌륭한 분이 오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본받아서 착하게 되면 죽으면 하늘나라갈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오해한 겁니다. 

그런 오해가 결국 예수님이 하시는 것에 대해서 나중에는 납득이 안 되어서 예수님존재자체를 제거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일어난 일이 십자가라는 겁니다. 십자가라는 것은 충실하게, 열심히 예수님에 대해서 오해했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잘못 생각한 거예요. 

그 당시 사람만 예수님에 대해서 오해한 것이 아니에요. 그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예수님의 행적에 대해서 나와 있는 이 책을 보면서, 이 책을 보는 누구든지 예수님은 훌륭하다, 예수님은 훌륭한 분이니 본받아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자는 식으로 나가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훌륭하다는 말을 누가 지어낸 거예요? 하나님은 반대로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은 훌륭한 분이 아니에요. 예수님은 오실 때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 죄가 없으신 분인데 예수님이 하는 일이 뭐냐? 세상에 있는 쓰레기 같은 죄는 죄다 자기 몸으로 불러 모아서 그것을 한 짐 지시는 그 일을 하신 분이에요. 

죄 안 짓는 것이 아니고 죄를 안 짓는 그 바탕에다가 인간들이 지어낸 죄는 몽땅 다 자기가 짊어지는 거예요.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만 봐서는 왜 예수님이 그런 식으로 행동했는지를 눈치 챌 수가 없어요. 어디서 되도 않는 그런 해석이 나오는가, 이렇게 깜짝 놀랄 겁니다. 
사도바울도 역시 그랬지요. 누가 누가 착하냐가 그 사람의 미래를 결정한다. 살아 있을 때 착하면 그 착한 것은 그냥 넘어가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그 성과가 주어지는데 그것은 죽고 난 뒤에 그 성과가 보상으로 주어진다. 이렇게 사람들마가 생각했던 겁니다. 

예수님은, 그게 바로 그동안 너희를 꾸준히 속여 왔던 악마의 생각이고 마귀의 생각이라는 겁니다. 

교회 와서 착하게 살면 천국가게 되고, 천국에 가도 착한 사람들의 착함의 양에 따라서 좋은 천국자리, 나쁜 천국자리의 차등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그게 바로 교회를 악마의 전당으로 만들어낸 결과입니다. 

교회 안다니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고 교회 오는 사람은 착한 사람이라는 그 인식자체가 마귀가 그렇게 유포시킨 거예요. 사람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교회 왔다고 인간 달라질까요? 안 달라져요. 교회 와서 우리가 해야 될 것은 그 죄를 철저히 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내가 교회를 안다니면, 혹은 어떤 잘못을 하고 실수를 했다면, 이것은 내 본색은 실은 착한 인간인데……. 
맹자의 성선설이지요. 인간은 날 때부터 착하게 태어났다는 거예요. 본성은 착한데 살다보니까, 돈 벌다 보니까, 내 가족 밥 먹고 살다보니 약간 양심을 뒤로 미루었다. 본디 나는 착한 사람인데 환경이 나를 잠시 그렇게 만들었다. 

이제는 그런 죄도 눈치 챘기 때문에 반성하기 위해서 주님 앞에 나와서, “주님이여, 주님이 사랑해줬는데 또 제가 돈 번다고 이런 실수를 했는데 사실은 제가 그렇게 나쁜 인간이 아닌 것을 주께서 아시겠지요. 이번만 눈 감아 주시고 헌금 받으시고 대충 때워주세요. 이렇게 반성하고 회개를 하니 주께서는 회개하는 자를 용서 한다 약속했으니 그 약속 믿고 회개합니다.” 그렇게 교회 와서 죄 처리해버리면 자기는 못난 사람이 아니고 잘난 사람이 되어버려요. 

  

본인이 잘났다는 근거가 성경에 어디에 있습니까? 자기가 잘났다고 한다는 것은 이미 마귀한테 물들어서 그래요. 로마서 8장 3절에 보면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역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을 단정 지으사, 확정지으사, 이렇게 생각하면 좋아요. 

  

“육신에 죄를 확정지으사”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은 죄인 아닌 자가 없다고 확정지은 겁니다. 노력하든 안하든 그 여부와 관계없어요. 모든 인간은 죄인일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예수님마저 이 땅에 들어왔기 때문에 예수님마저 죄인으로 하나님 앞에 확정지어졌습니다. 

  

그 결과가 뭐냐? 하나님 앞에 죄가 있기에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 이렇게 버림받은 거예요. 이것을 오늘 본문에서 뭐라고 하는가? 21절,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 나오고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은 의를 행함이 아니고, 더 착해짐이 아니고, 내가 누구냐, 내가 죄에 대해 감당할 수 있느냐, 감당 못해, 우리는 원래 죄를 감당 못하게 되어 있어, 죄 짓는 것이 평생의 우리의 팔자고 이것은 어쩔 수 없는거야, 그리고 전에 실수해서 죄 지은 것이 아니고, 그동안 실수해서 죄를 안 지어 온 거지요. 

  

제대로 살았으면 내가 죄인인 것을 아는데 죄인이면서도 죄 안 짓겠다는 이중인격자생활을 열심히 했기 때문에 마치 죄 아닌 것처럼 그렇게 행세를 해온 겁니다. 어려운 사람 동냥한다든지, 하나님 앞에 기도한다든지, 헌금한다든지, 예배참석 한다든지, 이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설마 이것마저 죄가 될 수는 없을 거야, 라고 하는 그것. 

  

전도한다든지, 청춘을 바쳐서 파키스탄이나 아프리카에서 선교한다든지, 이런 결단에 하나님은 아마 고개 끄덕이면서 착하다고 볼 거야, 라고 생각하는 그것이 감추어놓은 죄가 트릭을 쓴 거예요. 죄 아닌 것처럼 위장하려고 노력하는 것, 그것을 가지고 쉬운 말로 인생의 목표, 목적이라고 하는 겁니다. 

  

성경에서, 모든 인간은 죄인이다, 라고 한다면 이걸 제대로 알았으면 뭐가 날라가야 되느냐 하면, 어떤 목적과 어떤 목표가 날라 가야 돼요. 인간이 목적을 갖고 있다는 것이 굉장히 수상합니다. 본인이 뭔데 목적을 가져야 됩니까? 규정을 해도 하나님이 규정을 하지 본인이 본인을 규정하면 안돼요. 

  

그러나 본인이 본인을 규정하게 되면 지금보다 더 나은 나를 상정하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의 나의 목적이 되고 맙니다. 지금은 지질이 못났지만 5년 뒤에는 큰 아파트에서 살겠다는 그 자체가 본인이 누군지를 모르는 거예요. 어떤 중학교 2학년생이 인터뷰한 내용이 있어요. 

  

목적이 뭐냐고 하니 중2학생이 이렇게 이야기를 해서 새롭게 들려서 적어왔습니다. 20대에는 아이돌이 되어서 부자 되고, 30대에는 김태희보다 더 예쁜 여자하고 결혼하고, 40대에는 외제차 2대굴리면서 세계여행 다니고. 중 2학년생입니다. 입이 열려 있는데 무슨 소리는 못하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그 옆에 그 소리를 듣고 있는 아빠 엄마가 문제지요. “그래, 열심히 공부하면 네 목적을 이룰 수 있을 거야.” 목적이 이끄는 삶이 되겠지요. “꿈이 있어야 해. 사람이 꿈이 없으면 인간도 아니야. 사람은 꿈을 키워야 돼. 꿈이 크면 작은 것이라도 건지는 거야. 성경에 나오잖아. 입을 크게 벌리면, 각도를 크게 해서 벌리면 좋은 것 챙긴다고 하잖아.”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옆에 있는 부모가 왜 이렇게 애의 목적을 거드느냐 하면, 이미 자기도 나름대로의 어떤 목적이 있었는데 자기는 이미 세월이 지나서 그 목적대로 잘 안되니까 자식한테 은근히 미루는 거예요. 내가 못 이룬 것을 네가 이루라고 슬쩍 부담을 주는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 성경을 몰라서 그래요. 성경은 그런 것이 없습니다. 

  

성경은 일체 인간은 목적이라는 것이 없어요. 목적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중 2의 그 소리 듣고 내가 생각한 것이, 50대 어떤 아저씨는 쿠알라룸푸르에서 암살을 당했는데 왜 그것은 목적으로 안 넣지? 김정남이라는 사람이 공항에서 테러를 당한 것은 그 사람에게만 일어난 특이한 사건이라고 보는 거예요. 

  

자기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본 겁니다. 성경은 죽음이라는 것은 보편적인 인간의 운명, 타고난 운명입니다. 죽기 위해서 태어난 거예요. 이미 목적은 인간 본인이 정하는 것이 아니고 목적은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거기에 목적을 심어주는 겁니다. 그 목적은 뭐냐? 너는 필히 꼭 죽어야 된다는 것이 주께서 정해놓은 목적입니다. 

  

죽을 때 그냥 죽으면 안 되고 죄와 연관해서 죽어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의 일생이라 하는 것은 뭐냐? 계속해서 죄 짓는 세월을 보내게 하는 거예요. 70까지 살았으면 70까지 죄짓고 80까지 살았으면 80까지 죄짓고, 88세까지 살면 88세까지 죄 짓고, 90까지 살면 90까지 죄짓고, 100세까지 살면 100세까지 죄짓고, 사는 만큼 계속해서 죄를 생산해야 되는 겁니다. 

  

마치 죄를 생산하는 공장, 방앗간 같은 느낌이에요. 성경에는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렇게 죄를 짓는데 그럼 이제부터는 칼 들고 온갖 죄를 지으러 나가자, 라고 할 필요가 없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율법, 성경말씀이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를 다 집어서 봅니다. 

  

어제한 행동은 에베소서에 보면 이 죄고, 지난번에 한 행동은 고린도서에 보면 그것이 죄가 되고, 전부 다 우리가 행동한 것이 죄 안에 있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친절하게 알려주는 겁니다. 설교를 쉽게 하겠습니다. 우리는 그냥 죄만 지으면 돼요. 딴 짓 하지 말고. 죄만 지으면 되는데 교회가 얼마나 나쁜 짓을 하느냐 하면, 이런 나쁜 짓을 해요. 

  

죄만 지으면 되는 사람을 가지고 바람을 불어넣습니다. 뭐라고? 구원받을 수 있다는 거예요. 구원 받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해요. 심지어 길거리 돌아다니면서, 혹시 언제 구원받았습니까, 묻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유병언이 구원파 같은 사람들. 또 기존교회 다니면 구원이 안 되고 우리교회 와야 구원이 된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워치만 니, 위트니스 리의 지방교회들. 

  

자유주의신학하면 구원이 안 되고 정통보수주의신학을 해야 구원받는다는 쪽도 있어요. 대한예수교 괄호열고 합동, 괄호 닫고. 민주화운동해야, 촛불집회를 해야 그것이 성도답다고 주장하는데도 있어요. 대한예수교 괄호 열고 통합, 괄호 닫고. 괄호열고 감리, 기장, 천주교. 

  

여러분, 구원은 없어요. 인간은 구원을 목적으로 교회 다니면 안돼요. 구원은 절에 가면 돼요. 착하게 살면 나중에 극락 가는 거예요. 성경에는 인간을 구원해주겠다는 것이 한군데도 없어요. 성경은, 인간아, 제발 인간으로만 살아가라. 그 인간이 뭐냐? 인간이 태어난 목적은 죄 짓다가 하나님 앞에 심판받아 죽는 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역할 전부입니다. 

  

그것만 하면 돼요. 설교 끝났어요. 아무것도 할 필요 없어요. 사람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교회 안온다고 인간 안 되고 그런 것은 없어요. 그냥 구원은 없어요. 구원을 잊으세요. 그러면 구원을 잊는다면 성경은 왜 이렇게 두꺼운가? 간단하게, 구원은 없으니 집에 가세요, 하면 끝날 문제인데 천 페이지가 넘는데 왜 이렇게 성경의 내용이 많은 것인가? 

  

구원이 없는데 구원이 있다고 자꾸 우기니까. 누가? 인간의 배후가 악마거든요. 그래서 인간은 청부인생이에요. 인간은 악마의 일의 청부업자, 대신해서 하는 거예요. 신은 인간을 구원해 다오, 라고 촛불집회를 여는 겁니다. 구원을 달라는 거예요. 너만 신이냐, 라고 데모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의 편은 누구냐? 악마가 인간의 편이 되는 겁니다. 악마에서 뭘 만들어내는가? 악마에서 예수 만들어내고, 성령 만들어내고, 삼위일체 만들어내고, 복음 만들어내고, 교회 만들어내고, 절 만들어내고, 이슬람 만들어내는 겁니다. 종교라는 것을 만들어요. 

  

종교를 만들어놓고 종교를 운영하는 것은 각자의 양심에 호소해버려요. “당신들은 선과 악이 뭔가를 구분할 줄 압니다. 여러분이 우리 종교에 왔으면 악을 줄이고 선을 줄이면 나중에 죽더라도 하나님이 그동안 여러분이 노력한 것을 가상히 여겨서, 그동안 관찰하고 다 지켜봤기 때문에 여러분의 정성을 헛되이 하지 않고 필히 지은 죄보다 행한 선이 많다면, 빼기 더하기 계산해서 남는 선이 있다면, 그 선한 분량만큼 여러분은 천국에서 자리 정해져서 구원받습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이것이 불교의 극락적 아이디어에요. 염라대왕아이디어라는 말이지요. 성경 볼 필요 없어요. 그냥 조절하면 되거든요. 어릴 때 착한 일 많이 한 집안 같으면 20대 좀 나쁜 짓해도, 탈선을 좀 했어도 계산을 해 보는 거예요. 내가 탈선했지만 어릴 때 부모에게 효도하고 잘 한 것이 많이 있으니까, 이렇게 계산하는 거예요. 

  

심하다 싶으면 줄이면 되고, 선행에 여유가 있다 싶으면 소주 더 먹고, 나쁜 짓도 더 할 수 있는 거예요. 군에서 제대하고 난 뒤에 탈선하고, 군에 가기 전에 탈선하고. 어떤 힘든 프로젝트 하고 난 뒤에는 휴식한다고 태국 가서 탈선하고. 

  

그러니 인간은 본래 죄짓고 싶은 것이 근원적인 본심, 원초적인 본능인데 죄만 지으면 남들이 돈을 안 벌어주니까 죄 짓기 위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서, 그것도 맘 놓고 죄짓기 위해서, 남에게 간섭받지 않고 죄짓기 위해서, 남에게 간섭을 사서 하는 거예요. 간섭하고 굴복하고 하지만 ‘에이 씨, 참아야 한다. 이것만 되면, 돈만 벌게 됩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야지.’ 

  

그 하고 싶은 것이 뭐예요? 죄짓고 싶은 거예요. 그동안 얼마나 참았어요? 죄 짓고 싶어서 얼마나 참았어요? 여고생들 수능 끝나고 난 뒤에 입에 막 립스틱 칠하고, 화장 하고, 머리하고, 이거 얼마나 참았어요? 사람은 자기의 욕망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욕망에 대해서 인간은 책임감을 느끼게 되어 있어요. 

  

남들에게는 완전범죄지만 개인적으로는 절대로 완전범죄 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남 앞에서 트림만 해도 집에 와서는 자기 머리를 쳐요. ‘참지 좀. 왜 거기서 트림을 했을까?’ 만약 대통령 취임식 하다가 끄윽, 하고 트림해 버리면 위신 다 깨지잖아요. 대통령은 대통령이고 육신의 본능을 무엇으로 감당하겠습니까? 

  

방귀 뀌는 것, 이런 것뿐만 아니라 인간의 모든 육체의 욕망에 대해서 자아는 시달릴 수밖에 없어요. 내 육체의 욕망을 감당 못합니다. 맛집 있다 해서 갔는데 그 맛 집에 방송과 다를 때 거기에 대한 어떤 분노, 내가 기대했던 맛이 나와야 되는데 그 맛이 안 나오잖아요. 

  

5천원만 주면 맛있는 거 다 나온다는 대구 어느 뷔페집에 갔는데 영 반찬이 시원치않아요. 그러면, 내가 두 번 다시 그 백셰프 믿는가 봐라, 이렇게 화가 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생이라 하는 것은 육신에서부터 출발하는데 이 육신이 내가 원치 않는 욕구와 욕망을 자꾸 발산을 시키지요. 

  

그러니까 그 때 그 때마다 윤리와 도덕으로 나름 감당은 하는데 시도 때도 없이 막 터져 나올 때에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육신이 그런 것을 어쩝니까?” 이렇게 변명한다는 말 자체가 뭔가 숨기는 식으로, 위선적으로 떨면서 평생을 살 수밖에 없는 인간이라는 뜻이에요. 

  

계속 추궁당하는 겁니다. 우리의 욕구와 욕망에 의해서. 자식을 사랑해야지요. 안되는 것을 어떻게 합니까? 누구를 미워해서는 안 되지요. 안 되는 것을 어떻게 합니까? 이것은 내 양심의 문제가 아니고 이것은 어쩔 수 없는 거예요. 어쩔 수 없다는 그것을 성경대로 보자는 말이지요. 

  

우리는 어쩔 수 없는, 날 때부터 죽기 위한, 그냥 죄 값을 치르기 위한 죄인이야, 라는 이것을 받아들이면 되잖아요. 뭐가 어려워요? 아닌 척, 의인인척 하지 말라는 거예요. 잘난 척하지 말라는 거예요. 만약 우리가 남에게 죄 안 짓는 순간이 오거든 그것은 뭔가 실수한 거예요. 사실 그 때는 무심코 했지만 나중에 돌아보게 되면 내가 이렇게 착한 일을 했다는 것에 대해서 누가? 

  

내가! 그래서 나는? 잘난 인간이지. 다시 그것이 죄로 돌아오게 되어 있어요. 역시 나는 착한 일만 하는 훌륭한 사람이 맞아, 라는 이기주의적본성을 드러내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인간은 어쩔 수 없어요. 자꾸 제가 어쩔 수 없다고 말을 하는 것은 어디에 주목하라는 것이냐 하면, 오늘 본문 21절입니다. 

  

죄를 알지도 못한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여기서 ‘대신하여’ 여기에 주목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실 때 우리하고는 상대안해요. 우리는 이미 죽은 자인데 죽은 자하고 상대해서 뭐합니까? 상대 안하지요. 아까 예배전에 어떤 분이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우리 장로님이 영덕의 미술관에 다녀오셨습니다. 김재성 집사님 오늘 거기 가 계시는데 거기에 어떤 그림이 있어요. 김재성 집사님 작품은 아닙니다. 물고기를 서너 마리 그린 그림인데 그 그림 가격이 3천 3백만 원이랍니다. 자, 그림을 모르는 사람은 이렇게 할 거예요. 

  

물고기 네 마리 그리는데 3천 3백만 원 같으면 다섯 마리 그렸으면 3천 6백만 원으로 오를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그 말은 누가 들어도 말도 안 되는 소리지요. 10마리 그려놓으면 1억까지 갈 거라는 말이지요. 그게 물고기 값이 아니거든요. 그 그림 안에 고기가 들어 있다는 의미 아닙니까? 

  

마찬가지로 인생은 뭐냐? 예수님의 대신하심이 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 그림 안에 우리가 물고기로 들어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 물고기가 얼마나 철딱서니 없는지, 나는 물고기 한 마리인데 이 죄에서 구원되어야지, 교회 가서 예수 믿고 천당 가야지, 이렇게 나오더라는 말이지요. 

  

전체 작품의 의미는 날라가 버리고 개인적인 내가 어떻게 행복하게 되면 하나님이 가상히 여겨서 나를 구원할거냐, 그것만 생각하는 거예요. 얼마나 성경을 몰랐으면 그리 되겠어요. 하나님께서 주목하는 것은 뭐냐? 인간 너 아니고 인간을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하나님 쪽에서 파견시킨, 대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목을 하는 거예요. 

  

예수님은 종교를 만드신 분이 아니에요. 예수님은 종교 때문에 돌아가신 분이라는 말이지요. 종교는 예수님의 철천지원수에요. 종교는 가질 필요가 없어요. 여러분, 가지는 것이 쉽습니까, 놓는 것이 쉽습니까? 쥐는 것이 힘들어요, 놓는 것이 힘들어요? 놓는 것이 힘들어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목합니다. 19절에 봅시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하나님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이렇게 되어 있단 말이지요. 하나님께서 주목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요.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21절에 보니까 죄를 대신했거든요. 우리의 죄를 대신한 겁니다. 

  

주목하는 것이 3천 3백만 원짜리 그 그림전체에요. 그 물고기 한 마리 한 마리에 관심 없어요. 그런데 우리 인간은 나를 위한 하나님, 나를 사랑해주는 하나님, 나를 사랑하는 예수한테 관심이 있어요. 자기한테 관심이 있다 보니까 이 자체가 일종의 하나님에 대한 시위, 데모를 하는 겁니다. 

  

우리를 구원해 달라고, 우리에게 영생을 달라고. 자기는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데 가만 보니 자기 딸이 교회를 안가네요. 이번에는 떼를 쓰는 겁니다. 나는 구원받았는데 내 딸을 구원시키지 않으면 나는 지옥으로 갈 테니까 내 딸도 구원해내라고. 나를 믿는 자는 온 집에 구원을 받는다고 했으니까, 같은 집안이니 구원해 달라고. 

  

이것은 협박도 아니고 공갈도 아니고 기도제목을 그렇게 거는 겁니다. 그런 기도를 중보기도라 해요. 중보기도라는 것은 성경에 없는 건데 교회에서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나처럼 구원해달라고. 교회에서 그렇게 닦달을 내거든요. 여러분만 나오지 마시고 여러분의 남편도 교회에 데리고 오시라고. 총동원전도주일 만들어서 그렇게 한다 이 말이지요. 

  

대신이라는 말이 두 가지로 갈라지는데
하나는 대리, 또 하나는 대체로 갈라집니다
. 성경에 없는 말이지만 갈라질 수밖에 없는 게, 대신 죽으셨다는 이 말을 할 때
사람들은 대체로 생각하지 않고 대리로 생각하다 보니까
대신하신 예수님과 자기가 의논을 하고 조율을 해서 주인공 되는 나를 구원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그런 대리개념의 대신개념은 없어요.
성경에서 나오는 것은 대체입니다.

대체라 하는 것은 임시적인 것이 아니고 항구적이에요.
왜냐하면 그 대체할 자가 이미 죽었기 때문에.
그게 고린도후서 5장 14절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이 모든 사람이 죽은 거예요. 에스겔 37장에 보면 하나의 뼈, 바짝 마른 뼈가 되는 거예요. 우리가 보기에는 살아있는 듯이 보이지만 주가 보기에는 이미 죽은 자에요. 어차피 죽을 인간이니 죽은 자로 보는 겁니다. 죽은 자에게 기대할 것은 그들이 지은 죄밖에 기대하지 않아요. 

  

요한복음 8장에 보면 간음하다 잡힌 여자가 있습니다. 그 대목을 자세히 보세요. 간음하다 잡힌 여인이 예수님한테 자기 간음죄를 용서해달라고 요청한 적이 없어요. 이게 성경의 기본이에요. 죄 지은 자가, 나 죄었으니 용서해달라는 요청을 한 적이 없다는 말입니다. 

  

간음한 여인이, “아, 재수 없네. 걸려버렸네. 주님 당신이 죄 용서하는 전문가잖아. 당신이 죄 용서하러 왔잖아. 나 여기 있어. 다른 사람은 부탁도 안하는데 나니까 부탁해. 당신의 죄 용서를 나에게 덮어씌워서 나를 용서해주세요.”라고 요청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그 사람의 죄를 용서하러 오신 분이 예수님이 아니니 때문에. 

  

예수님은 용서하시는 분이 아니고 대신하시는 분이에요.
왜냐하면 용서할 자가 이미 죽어있기 때문에
죽어 있는 자는 요청이나 요구를 한다는 자체가
죽은 자가 죽은 값을 하는 죄의 하나의 형식일 뿐이에요.
주여 우리를 구원 하소서,
그게 바로 죽어야 될 이유중의 하나인 죄가 발산되는 순간입니다. 

  

죄용서 뿐만 아니고 복 달라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입 다물어, 입 다물어, 너는 입 다물어야 돼요. 네가 뭔데 내가 왜 네 죄를 용서해줘요. 근본부터 지금 기독교가 잘못된 거예요. 용서해줬다고 십일조내고, 거래하는 것도 아니고 이게 뭐예요. 하나님의 관심사는 예수님의 대신함, 대체함에 있습니다. 

  

대체는 대상자가 이미 죽었어요. 죽었기 때문에 의논할 그것도 없어요. 선교단체에서 보게 되면 이런 오류를 범합니다. 지금 예수님이 문 앞에 왔으니 문만 열기만 하면 되는데 네가 강퍅해서 문을 안 열리니까 구하고 두드리고 발로 차고 부르짖어서 예수를 영접하게 되면 그리스도가 너와 함께 있어서 구원받는다는, 요한복음 3장에 비슷한 이야기가 나와요. 

  

그걸 가지고 애들한테 앵벌이를 시킨다니까. 기도앵벌이, 헌금앵벌이, 학업 다 포기하게 만드는 앵벌이, 그래가지고 기껏 해봐야 간사된 애가 또 다른 애들 간사만들면서 똑같은 짓을 반복하는 겁니다. 유비에프, 내비게이트, 복음학교, 소위 뜬다는 단체들 다 마찬가지에요. 

  

애들 그 시간에 자기전공분야 살려서 공부해서 밥벌이 시켜야 될 시간에. 성경 배워서 그걸로 나중에 밥벌이 할 생각인가. 애들한테 무슨 그 몹쓸 짓을 합니까? 애들 이라크에 선교 보내고. 애들이 헛바람 들어서 저 낮고 천한 곳에 간다고 이라크에 들어가서 인질로 잡혀서 돈만 40만 달러 나가게 만들고. 

  

교회에서 애들을 왜 그렇게 앵벌이 시키는 거예요? 지하철에 전도시키고, 아줌마들 커피나 나눠주면서 돌아다니게 만들고. 왜 그렇게 하느냐? 그 자체가 죄기 때문에 그래요. 그 자체가 죄거든요. 그렇게 해야 주와 함께 있고 영접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그게 바로 가짜예수입니다. 

  

왜 가짜 예수가 인기가 있느냐? 제가 처음에 이야기했어요. 인간은 목적으로 이끄는 삶이거든요. 그림속의 물고기 한 마리가 사적인, 독보적인 목적으로 인간은 사는 재미를 느껴요. 남이 잘되는 것이 짜증나요. 내가 잘되어야 돼. 기독교식으로 내가 잘되는 것이 뭐냐? 남들은 기도 못하는 데 기도 잘하고, 남들은 선교 못하는데 선교 잘하고. 

  

누가 선교 잘하나, 내가. 누가 기도 잘 해, 내가. 헌금 누가 잘해, 내가. 믿음은 누가 좋아, 내가 좋아. 이게 자기목적으로 이끄는 삶이 된 거예요. 우리는 주님 관심조차 없는데. 죽은 놈한테 무슨 관심이 있겠어요. 자기가 자기한테 최면 걸어서 살았다고 맨날 우기는 겁니다. 

  

하나님의 의라는 것은
처음 원초적인 창조의 계획을 두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사야 45장 7절에서 8절에 보게 되면,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이유가 뭐냐? 8절에 보면 하나님의 준비된 하늘의 의가 이 땅에 내려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비같이 쏟아진다고 되어 있어요. 

  

“너 하늘이여 위에서부터 의로움을 비 같이 듣게 할찌어다 궁창이여 의를 부어 내릴찌어다 땅이여 열려서 구원을 내고 의도 함께 움돋게 할찌어다 나 여호와가 이 일을 창조하였느니라.” 하나님의 의라는 것은 원래 창조의 원리, 원초적인 태초의 창조의 원리를 하나님의 의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의는 오직 누구만 달성할 수 있느냐 하면,
오직 예수님만 달성할 수 있어요.
로마서 1장 17절에 보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의 의는 예수님의 복음을 두고 이야기 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의가 이땅에 나타나는 현상이 뭐냐? 

  

로마서 4장 5절에서 8절에 나옵니다.
“일을 아니할찌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일한 것도 없이 하나님의 의로 여긴바 되었다는 겁니다. 로마서 4장 6절에 있어요. 평생 돈 한푼 교회에 낸 것도 없이. 평생 교회 출석 한 것 없이. 평생 기도한 번 한 것 없이. 전도는커녕 아무것도 한 것 없이. 평생 뭐만 했겠어요? 평생 죄만 지었지요. 말을 바꿔보겠습니다. 

  

평생 교회 나오는 죄를 지은 것 밖에 없이. 평생 교회 나와서 충성한다고 설쳐댄 죄를 지은 것 밖에 없이. 우리교회는 청소하는 분이 정해져 있습니다만, 평생 교회 와서 청소하는 죄를 지은 것 밖에는 없음에도 불구하고, 일한 것 아무것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의롭다 함을 받는 이게 의가 유발하는 유일한 특이성입니다. 

  

의가 일어나는 그 특이성이 어떤 현상이냐 하면, 교회 나오든 안 나오든 간에 그것은 바로 죄였습니다, 하는 고백이 나오게 하시는 거예요. 그 이유가 뭐냐? 예수님께서 다녀가셨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다녀가실 때 죄 없는 주님이 온갖 죄란 죄는 다 몸에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자기를 파견한 아버지에게 버림을 받는 그 포즈는 사실은 우리가 인생을 살아갈 진짜 원리가 들어 있는 포즈가 되는 거예요. 

  

그것을 하나님의 성령이 와서 예수님의 그 마음이 복제가 돼요. 복제가 되어서 와버리면 내가 교회 가도 죄가 되고 안가도 죄가 되는 겁니다. 가도 안가도 죄가 될 뿐이고 헌금해도 죄고 안 해도 죄고 십일조 해도 죄고 안 해도 죄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사람들은 뭐라 합니까? 이왕 죄짓는 것 둘 다 죄라면 안하고 죄 짓겠다. 

  

글쎄 안하고 죄 지으세요. 안하고 죄 짓는다 할지라도 그게 의가 될 수는 없는 겁니다. 뭘 해도 죄가 돼요. 왜? 그것이 하나님의 의라는 그림 작품의 하나의 물고기기 때문에. 예수님이 미리 물고기의 원형을 보여줬습니다. 이 땅에 인간은 무슨 짓을 해도 죄일 수밖에 없고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준 거예요. 

  

끝났습니다. 그것을 종료라고 하지요. 모든 것이 끝났어요. 그 다음부터는 하나님 소관입니다. 죽은 예수님을 아버지께서 사흘 만에 건져냈습니다. 로마서 4장 24절, 25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다시 말해서 우리가 죄 지었다고 기억하는 그것을 위해서 죽으신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가 이것은 죄지만 이것은 착한 일이야, 라고 분류하면서 죄 짓는, 우리가 미처 모르는, 그러면서도 죽을 수밖에 없는 내 이상한 운명, 착한 일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졸지에 죽는 사람들, 태어나서 열일곱 살이 되었는데 물에 빠져 죽은 세월호 애들, 그 애들은 열 예닐곱에 죽고 더 죄 지은 자는 멀쩡하게 살아 있고, 이게 인간은 감당이 안 되는 거예요. 



낳자마자 2개월 만에 죽는 애가 있고 90이 되도록 나쁜 짓은 실컷 다 하면서도 보약을 먹었는지 죽지도 않고 있다가 100살까지 살고 죽는 사람도 있고. 왜 하나님은 착한 사람은 일찍 죽이고 못된 사람은 오래 살게 만들고. 그 잘난 의인은 이 땅에서 환영받지 못하고 못된 짓만 하면서도 검사장이니 청와대 수석이니, 물론 특정 인간들, 김기춘이나 우병우같은 인물을 두고 하는 이야기는 아니에요, 그렇게 출세가도를 달리고 어떤 사람은 착실한데 지방을 전전하는 평검사로 끝나고. 

  

이건 뭐냐?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성경을 안보고 착한 일 한만큼 착하다고 여기는 그 오류, 그 오류 때문에 자기보다 상대적으로 나쁜 사람은 벌 받아야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나 주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인간은 이미 날 때부터 죄짓기 위해서 태어난 거예요. 그게 범죄함이에요. 

  

그래서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해서 내어주고. 내가 미처 모르는, 내가 몇 천 년을 살아도 다 모르는 그 범죄함을 위해서 알든 모르든 이미 죽으시고,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내가 구원을 요청하든 안하든, 이미 죽은 인간은 요청할 자격도 없고 권한도 없어요. 내 뜻도 아니고 내 소망도 아니고 내 목적도 아니에요. 목적을 없애버리라고 했지요. 

  

그냥 주님의 자기목적을 위해서, 하나님의 의, 예수님의 자기의를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를 이렇게 살려내 버렸어요. 그래서 산자는 고린도후서 5장 15절에 의해서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저희를 대신하여, 라는 말을 고치겠습니다. 저희를 대체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살았다는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다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한 것이 맞잖아요, 라는 고백의 관계성 때문에 살아있는 거예요. 

  

어제 어떤 분이 저에게 전화했어요. “어떤 분이 저에게 하나님의 의가 뭐냐고 묻는데 하나님의 의가 뭐예요?”라고 물어요.

하나님의 의라 하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이 관계했던 그 관계를 그대로 유지해서
예수님과 우리가 갖는 관계를 가지고 하나님의 의라 합니다. 
연결되어 있는 고무줄, 파이프, 이런 관계를 의라고 해요.
그러면 그동안 사람들은 관계를 의라고 보지 않고 어떻게 보았는가? 뭔가 소유하는 괜찮은 것으로 본 거예요. 내가 소유할 수 있는 괜찮은 것, 내가 쥘 수 있는 것, 쟁취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본 거예요. 

  

그걸 쥐고 있으니까 이걸 놓칠까 싶어서 벌벌 떠는 거예요. 5년 전에 예수 믿었는데 5년 뒤에 간음죄 범하면 이것이 떨어지는 줄 알고. 십일조 한 15년 했는데 약간 적게 하려고 하니까 그동안 쌓아놓은 의를 놓칠까 싶어서 벌벌 떠는 겁니다. 이걸 쥐고 있으니까 벌벌 떠는 거예요. 

  

누굴 위해서? 자기가 자기 스스로 구원받기 위해서. 예수님이 주는 그 의를 덜렁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겁니다. 소유 백날 해도 소용없습니다. 치매 걸리면 걸리는 순간, 예수가 누군데, 다 날라 가버려요. 인간은 자신의 육신의 약함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어차피 다 놔야 됩니다. 

  

교회 오래 다닌 것, 장로 목사 집사 된 것, 어차피 다 놔야 돼요. 우리 예배당이 5 백 평이라는 그것도 놔야 되고, 전도 2백 명 했다는 그것도 다 놔야 되고, 개척교회 10군데 했고 복음 전해서 2천명 구원했고, 몽땅 다 놔야 돼요. 왜? 그것이 전부 다 죄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하나님의 전략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너는 목사해서 죄짓고, 너는 장로해서 죄짓고, 너는 집사해서 죄 지으라는 말이지요. 너는 십일조 해서 죄 짓고, 너는 십일조 안 해서 죄 짓고, 그런 뜻이에요. 어떤 것도 예수님의 대신하심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간단합니다. 우리는 평생 죄만 지으면 되는 거예요. 

  

내일 되면 내일 또 무슨 죄가 기다리고 있을까? 기다리세요. 목적으로 이끄는 삶이 아니고 저주로 이끄는 삶. 처음부터 우리는 나쁜 짓을 해서 저주받는 것이 아니고 저주받기 위해서 태어난 겁니다. 예수님의 의는 예수님이 대신하기 위해서 했기 때문에 우리의 할 일은 아무것도 없어요. 

  

죄만 지으면 되는 겁니다. 죄는 어떻게 짓습니까? 평소에 하던 대로 막 살면 돼요. 편해요. 죄 짓는 것은 긴장하지 말고 평소에 하시던 대로 하면 됩니다. 하시던 대로 하면 뭐가 나오냐 하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목표로 인생 살게 될 겁니다. 남에게 안 지려고. 사람대우 받으려고. 

  

나 무시하지 마라. 나 건드리면 가만 안 있어. 그런 본성이 있잖아요. 이것은 우리가 참는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에요. 이게 타고난 거니까 타고난 것은 어쩔 수 없어요. 누굴 만나도 그 사람 등쳐먹고 이용해먹고, 이것은 타고난 거예요. 심지어 하나님 마저, 예수마저 예수 이름 불러서 축복 얻으려고 등쳐먹고. 

  

그렇게 하세요. 자꾸 저에게 기도를 어떻게 합니까, 바른 기도를 묻는데 바른 기도라는 것이 없어요. 평소에 죄 짓는 본성을 데모하듯이 그렇게 하세요. 하나도 어렵지 않습니다. 결혼하게 되면 하시면 되는 거예요. 결혼하고 싶은 마음을 누가 감당하겠어요? 

  

뭐든지 해놓고 이렇게 생각하세요. 이것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맛 집 찾아서 20킬로 차타고 가는 것, 이것은 내가 감당할 사항이 아닙니다. 후회하지 마세요. 일을 저질러 놓고 뒤에는 후회는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또 죄구나. 대속하심, 대신하심, 그리스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어차피 청부인생, 잘났다 우기는 자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똑같은 성품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나서 자기 잘난 맛에 인생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교회 나와서 기도 잘하고 하나님 앞에 예쁨 받고 축복 받아 쟁취하고 게다가 하나님의 의까지 소유했다고 자부했던 우리들, 점점 더 그것이 죄의 본색, 악마의 마음에 다가가는 그 모습인 것을 저희들이 깨닫는 그 사람이 바로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인 것을, 이미 구원된 사람인 것을 저희들이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