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강-고후 5장 14-15절(대신 죽으심)17031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후서 5장 14-15절입니다. 신약성경 290페이지입니다.
고린도후서 5:14-15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성경을 보는 입장에서는 우리가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주위의 많은 사람들과 세상에 섞여 있습니다. 섞이다 보니까 세상에서 주어지는 사고방식에 푹 젖어 있는 입장에 있지요. 우리가 성경을 보기 전에 성경을 보는 이 시간 말고 다른 시간에는 우리는 무엇을 듣고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끼며 살아가는가?
그것은 누구나 알 수 있지요. 세상에서 들려오는 것, 보여 지는 것, 느껴지는 것에 안겨 있습니다. 그것을 이렇게 정리하면 돼요. 세상에는 해와 달과 별과 나무, 사람들, 참새소리, 인공적으로 만든 기차, 자동차 같은 것들, 그런 것들을 그냥 자연이라고 해요. 자연 또는 대자연, 또는 문명.
거기다가 인간이 자기에게 의미를 줘버리면 그게 뭐가 되느냐 하면, 그걸 과학이라고 합니다. 과학 또는 기술. 대자연이 있는데 거기에서 생존하기 위해서 인간이 그것을 개발하고 노동을 해서 소유권을 획득하는 그것을 과학, 과학시대, 또는 문명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성경보기 전에 이미 세상에 그러한 의미를 줘 왔다는 말이지요. 그렇게 보고 난 뒤에 고린도후서 5장을 딱 보자는 말입니다. 딱 보게 되면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이건 뭐냐 이 말이지요.
이것은 우리가 평소에 듣던 말은 아니거든요. 이것은 뭐냐 하면, 인간을 포함해서 대자연에 하나님 쪽에서 의미를 붙인 것이 방금 제가 읽은 겁니다. 우리는 평소에 내가 살기 위해서 대자연을 향하여 눈에 보이는 것, 들려오는 것에다가 의미를 주고받으면서 살았는데 하나님은 다른 일을 하신다고요.
어떤 일을 하는가? 우리가 똑같이 보고 있는 이 대자연에 하나님이 나름대로 의미를 주고 있습니다. 의미를 주는데 오늘 본문에 보면,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이것은 kbs뉴스에는 안 나오는 거예요. 모든 사람이 죽었다는 이야기는 뉴스에 나오지 않는 겁니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은, 사람이 왜 사는가? 사람이 왜 살아야 되고 어떻게 살아야 그것이 바르게 사는 것인가? 자기를 위해서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아야 된다. 평소에 자식들에게 가르칠 때 그렇게 가르쳤습니까?
“엄마, 아빠! 난 어떻게 살아야 해?” “널 위해서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해서 살아야 해.” “엄마, 문장이 너무 길어. 간단하게 해.” “간단하게 이야기해줘? 그냥 돈 벌어. 돈 버는 그게 사는 거야. 돈 못 벌면 인간취급 못 받아. 인간대우 받아야 해, 못 받아야 해?” “받아야지.” “그러면 돈 벌어야 돼. 나는 지금 한이 맺혔어.” “왜 한이 맺혔어?” “돈 못 벌어서 한이 맺혔는데 그 한을 너에게 대물림하기는 싫어. 그래서 너를 과외 보내고 공부시키는 거야. 게임하지 말고 그저 공부해. 빨리 공부해. 그래야 살아, 네가 이 땅에서.” “누굴 위해서?” “너 자신을 위해서 살아.”
다르지요. 달라도 너무 다르지요. 우리가 평생 동안 살아오면서 몸에 익히고 그 익힌 것을 자식에게 대물림하는 그 교육방식, 방침, 세상에서 들려오는 모든 것, 그것과 진짜 하나님이 똑같이 보고 있는 대자연, 똑같이 보고 있는 인간에 대한 의미 붙이는 것이 다르지요.
그 다른 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예수님이 대신 죽으심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가치가 있어서 대신 죽는 것이 아니고 차이 나게 하는 거예요. 죽으심을 통해서. 그래서 십자가가 복음이에요. 교회에서 십자가복음을 전해야 될 이유는 사람들로 하여금 알아듣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못 알아듣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교회 온 사람들이 평소에 교회 오기 한 시간 전에 뭐 하고 있었습니까? 하동의 꽃구경하고 있었잖아요. 하동에 꽃구경하러 온 거예요. 왜 갔지요? 세상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 행복을 위해서 갔잖아요. 잘 살기 위해서. 그런데 오늘 본문은 잘 사는 이야기가 아니고 잘 죽으라는 그 말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살아갈 때 자연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과 보이지는 않지만 진짜 살아계신 하나님이, 진짜 자연을 만드신 당사자, 본래 주인 되시는 분이 자기가 만든 피조세계에다 의미를 붙이는 것과 엄청난 차이가 나고 그 차이가 난다는 것은 십자가에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확연하게 증거를 다 보여줬어요.
교회가 뭡니까? 우리가 인간에게 붙인 의미를 전하는 게 교회가 아니에요. 하나님입장에서 하나님이 세상에 부여한 그 의미를 선포하는 데가 교회잖아요. 그러면 교회가 십자가복음으로 나가야 되지 않습니까? 당연히 그래야지요. 그래서 제가 하는 이야기가, 복음이 전파되는 곳이 교회고 20년 동안 복음 전파하다가 어느 날 복음이 끊어지면 그것은 교회 아니고, 모여 봤자 친목단체가 되고 아무 의미 없는 겁니다.
왜 그래야 되느냐 하면, 결국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기 때문에. 결국은. 복음 전해서 사람들 끌어 모으자는 그것도 의미 없어요. 가봤자 주님 앞이거든요. “난 절에 갈래.” 절에 가. 갓바위 올라가. 하지만 70, 80살고 가 봤자 주님의 심판 앞에 서요. 사람이 죽는 것은 정해진 것이고 그 뒤에는 심판이 있으리라.
어떤 분이 이야기를 하는데, 어떤 사람이 전도한다고 성경말씀을 올려놓은 거예요. 성경구절이 그 분에게 온 거예요. “죽는 것은 정하신 바다.” 이렇게 딱 올려놓은 거예요. 그걸 보고 저에게 이야기하신 분이 어, 이건 반칙이라. 그 뒤엣 말을 안 붙인 거예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
이걸 언급하니까 그 사람과 결별되어 버렸어요. 심판을 첨가해 버리면 부정적이라 해서 도망가면 어떻게 하는가, 그 걱정을 한 거예요. 주님의 도를 전해야 전도인데 자기가 중간에 편집을 해서 나 전도한다는 것을 자랑질하려고, 사람 끌어 모았다는 것을 자랑질하려고 성경말씀을 잘라버린 거예요.
이런 현상을 보면서 생각한 거예요. 인간의 세계가 주님의 세계에 도달하지 못하는데 왜 도달하지 못하느냐? 유리판이 있다고 치고 그 유리판에 잉크를 부었다고 칩시다. 잉크는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고 옆으로 계속 퍼져나가지요. 지금 이 세상은 옆으로 퍼져나가는데 옆으로 퍼져나가는 이 세상이 뭐냐? 제 4차 산업이라 하지요. 제 4차 혁명.
돈 천 만원만 주면요, 4d프린트로 해서 하루 만에 집 한 채 지어요. 인공지능 나오지요. 새로운 기술이 새로운 투자처가 됩니다. 그러니 이 세상 문명은 계속 옆으로 퍼집니다. 그런데 아무리 퍼져봐야 그 유리판을 뚫을 수가 없어요. 밑으로 침투가 안 됩니다.
그러면 현재 눈에 펼쳐져 있는 이 인간들의 4차 산업혁명의 바탕에 있는 진짜 하나님께서 의미를 붙인 이 세상은 결국은 이 세상만 남을 거예요. 마태복음 7장에 홍수가 덮치매 모래위에 지은 집은 다 무너진다고 되어 있잖아요. 결국 마지막 남을 세상은 뭐냐? 하나님나라, 그것만 남아요. 물론 지옥도 남지만.
사도바울이 만약 지금 제 4차 산업혁명이 일어난 이 시대에 전한다면, 사도바울이 이 자리에 서 있다면 똑같이 고린도후서의 이 이야기를 하고 있을 거예요. “여러분, 4차 산업혁명이 도래했습니다. 정신 차리지 않으면, 새로운 기술을 따라잡지 못하면 우리나라는 못삽니다.”라는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고 이 성경 이야기를 한다는 말이지요.
주님께서 의미를 붙인 이 세상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여러분 생각에, ‘그러면 이것도 챙기고 그리고 성경의 이것도 하나님이 주신 의미니까 같이 챙기면 되겠네.’라고 생각할 겁니다. 그런데 이것도 챙기고 저것도 챙길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유리판 위에 세계에서 아래로 오는 데는 뭐가 있어야 되느냐 하면, ‘자기를 부인하고’가 있어야 돼요.
자기를 부인해야 돼요. 이것 챙기고 저것 챙기고, 라는 마음은 자기부인이 안돼요. 이것 알아서 세상 살고, 주님 주신 것 알아서 천국가고, 이렇게 되면 자기긍정이 되지 자기부인이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어느 누구도 자기부인이 안되기 때문에 하나님이 부여한 의미, 이 성경말씀의 영역에 아무도 도달할 수가 없어요. 설교 끝!
그냥 인간들이 부여한 행복과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사는, 자기긍정만 하는 세상에서 살 뿐이에요. 지금 성경말씀에 나왔다고 해서, 이 정보를 안다고 해서 하늘나라 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자기부인이 안돼요. 자기긍정이 되기 때문에 성경말씀으로 도배를 해도 안돼요.
제가 안양강의하면서 성경말씀으로 완전히 덮고 교회에서 하라는 것을 다 하는 것을 가지고 뭐라고 했느냐 하면, ‘튀김통닭’이라고 했습니다. 가만 계시는 것을 보니 아무도 안 들었어요. 맨 살 그대로의 닭에다 계속 튀김옷을 입히는 거예요. 기도의 튀김옷, 전도의 튀김옷, 헌금의 튀김옷, 튀김옷을 입어봤자 툭툭 털면 다 떨어져 나가요. 맨살 그대로입니다.
아무리 성경말씀, 십자가, 해도 그 안에 들어있는 맨살 통닭은 자기긍정이잖아요. 나는 이래서 살래, 나는 이래서 유리판 위에서 살래, 하는 그 사고방식 그대로 유지되면서, 나는 이래서 천국 가서 또 살래, 그 ‘살래’가 우선되기 때문에 이것은 튀김 닭밖에 안되고 소용없는 겁니다.
14절 다시 봅시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여기서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고’가 성립되려면 자기부인이 되지 않고서는 안돼요.
자기긍정이 해당사항이 안됩니다. 우리가 가만있는데 주님께서 구원의 요소를 줘서 구원하시는 것은 맞아요. 우리는 가만있는데 주께서 찾아오셔서 구원하시면서 우리 쪽에서 달라지는 것이 있어요. 뭐냐? 자기긍정에서 자기부정으로 바뀌는 것이 필수입니다. 그런데 내가 스스로 나 자신을 부정한다는 것은 기껏해야 불교교리밖에 안돼요.
나는 부족합니다. 또는 천주교처럼 내 탓이오, 내 탓이오, 차 뒤에다 내 탓이오, 붙여놓고 내 탓이오, 해 봐야 내 탓이오, 라고 한 그 결과물은 호호, 헤헤거리면서 내가 스스로 나한테 작업 걸어서 내 탓이오, 해 봐야 남는 것은, 내가 이렇게 나에게 이런 작전을 벌여서 이렇게 성공했구나, 하는 자기긍정만 남잖아요.
그것은 꼼수입니다. 초등학교 때 공작시간에 뭔가 만들기를 했던 기억이 나요. 교회에서 이렇게 합니다. “여러분, 거듭나야 하늘나라 갑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기 때문에, 성령으로 거듭나야 되기에 거듭나세요.” 이렇게 과제를 주게 되면, 교인들은 교회 와서 공작시간처럼 자기를 거듭나게 하는 그것을 만들어요.
스스로 자기를 거듭나게 하는 작전을 벌여서 노력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걸 가지고 자각몽이라고 하는데, 꿈속의 꿈이라 하지요. 꿈을 꾸는데 꿈을 꾸면서 꿈에서 깨어나는 꿈을 꾸는 거예요. 백날 깨어나 봐야 꿈입니다. 이것을 고상한 말로 대안현실이라고 합니다. 나를 포함한 현실을 내가 스스로 어떤 대안이 없을까, 해서 계속 대안현실을 만듭니다.
20살 때 대안현실은 30살 때, ‘아, 이건 안 맞아.’ 그리고 40이 되면 ‘안맞아.’ 매년 그 때 그 때 나에게 적합한 대안현실, 자각몽, 또는 꿈속의 꿈, 백날 해 봐야 유리판 위에서 벌이는 종교의 일이지요. 비트켄슈타인이라는 철학자는 아주 멋지게 이야기했습니다. 유리판 위의 그 세계를 가지고 그 사람이 이야기한 것이 아직도 모든 철학자들한테 정말 최고의 명언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게 뭐냐? 세상은 게임이라는 겁니다. 철학자들은 게임이라 하면 그것으로 끝나요. 그게 진리의 끝이에요. 비트켄슈타인은, 진리란 게임에 불과하다는 거예요. 그런데 일반인들은 거기에 함축된 의미가 뭐가 그렇게 대단하냐, 하는데 이번에 촛불집회와 태극기가 붙었지요. 그러면 한국 사람의 관심사가 어디 있습니까?
게임이에요, 게임. 누가누가 이기나? 이제 그거 끝났으니 또 무슨 게임을 할지 몰라요. 사람들은 게임이 있어야 사는 재미가 나요. 이걸 두고 비트켄슈타인은, 세상은 그냥 게임이다. 이기든 지든 아무 의미 없는데 이기면 이상하게 기분 좋더라는 말이지요. 기분 좋을 게임이 어디 있는가를 또 찾고 다녀요.
목표 정하고, 이기고, 즐겁고, 또 목표 정하고, 이기고, 즐겁고. 사업이 다른 거 있습니까? 목표 정하고 달성하고 즐겁고, 목표 정하고 달성하고 즐겁고.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 하는 사람들의 즐거움이 뭐예요? 시험치고 5등하고, 시험치고 4등하고, 시험치고 3등하고, 점점 더 목표에 가까이, 다음에는 전교 1등, 그 다음에는 전체에서 몇 등하고.
그걸 비트켄슈타인은 한 마디로 사는 것은 뭐다? 진리가 아닌 인간들이 일부러 만들어낸 게임 판에 뛰어들어서 그걸로 세월 보내는 것이 인생이니라. 그거보다 더 확실한 진리가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요. 그러면 죽으면. 게임오버에요.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기도 10분하려 했다가 10분하고 이기고, 15분으로 늘여볼까, 해서 이기고, 교회도 50명 넘었으면 이기고, 백 명 목표 또 이기고, 즐겁고. 백 명 하다가 50명으로 줄면 안 즐겁고, 50명 하다가 10명 되면 이상하게 안 즐겁고.
이 전체를 아울러서 비트켄슈타인은, 네가 어느 분야든 간에, 심지어 윤리도덕분야까지 인간은 게임의 본능이 작렬한다, 이렇게 본 겁니다. 여기에 누가 이의를 걸자가 없어요. 태극기가 지고 난 뒤에 70넘은 노인들은 할 일이 없어졌으니 뭐하고 노느냐는 말이지요. 내가 이상하게 걱정이 돼요.
왜 유리판에서 기껏 하는 것이 게임밖에 없느냐 하면,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인간은 선과 악을 놓고 게임 벌린 거예요. 그리고 인간은 대자연에 의미를 붙이기 때문에, 대자연은 있잖아요, 그래서 ‘있다, 없다’에 의미를 붙입니다. ‘있다, 없다.’ 그리고 ‘선하냐, 악하냐.’
사람이 일을 해놓고 반드시 뒤에 나오는 그 느낌이 뭐냐 하면 ‘내가 이번 일을 잘했어?’ 그 반대말은 ‘못했을까?’ 반드시 그런 가치관이 부여돼요. 이게 선악과 따먹었다는 성경말씀이 아니더라도 모든 일에 대해서 잘했다, 못했다, 못했다, 잘했다, 이게 계속해서 있어요.
이것이 자기와 자기가 혼자 노는 게임입니다. 이게 유리판 위에서 노는 게임이에요. ‘저 사람보다는 착하지 않지만 저 사람보다는 낫잖아.’ 평생을 돌아보면서. 죽음의 커튼이 내려왔을 때 뒤돌아보면서 ‘나는 그나마도 후회 없이 살았다.’ 윤동주처럼 ‘한줌 부끄러움 없이 살았다.’ 그게 전부다 게임이라니까요.
나중에 못 들었다 하지 마세요. 인생이 게임이라고 했는데 왜 게임인가, 하지 마세요. 제가 분명히 지금 알려드립니다. 어떤 게임? 내가 착할까, 선할까, 노는 게임. 내가 잘했다, 잘하지 못했다, 그 게임. 더 노골적으로 해서 나는 정직했다, 나는 부정직했다, 노는 게임.
그 게임은 꿈속의 꿈입니다. 자기가 혼자 노는 꿈놀이에요. 그 꿈놀이가 교회 안에서 계속돼요. 백날 해도 유리판을 침투하지 못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자기가 자기에게 일방적으로 의미를 붙인 거예요. 자기가 망가지고, 죄인이고 오류가 있는데 오류가 있는 인간이 자연을 보면서, 또 자기를 보면서 오류 있는 의미를 계속 던지니까 그 결과는 오류밖에 안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는 겁니다. 마태복음 16장에서, 자기를 부인하라고. 그걸 듣는 제자들은 뭐라고 합니까? “나를 부인하면 긍정적인 사람 됩니까?” 이렇게 나오더라는 말이지요. 결국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은 네가 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고 네가 지금 하지 못하는 세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제가 이정도 이야기하면 여러분은 대번에 이렇게 나와요. “그러면 저보고 어쩌란 말입니까?” 여러분은 짜증을 좀 내야 돼요. 짜증내는 얼굴은 아니고 지금 자는 듯한 얼굴인데. 어쩌란 말입니까, 할 때 오늘 본문은 이야기합니다. ‘대신’ 대구신학교 이야기가 아닙니다.
14절을 보세요.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15절에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대신하게 되면 대신 한 사람과 대신하지 않은 사람이 분류됩니다.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내가 독자적으로 선한가, 착한가를 가지고 게임을 벌이고 있어요.
‘이번에 자식이 공부를 잘한 것은 내가 착하기 때문이다. 사업이 잘 되는 것은 내가 교회에서 기도 많이 하고 헌금도 하기 때문이다.’라는 교회게임, 교회놀이, 종교놀이, 그것 가지고 기뻐하는데 그것이 바로 유리판 위에서 노는, 오류가 있는 인간들끼리 모여서 기독교라는 것을 만들어서 유리판 위에서 노는 거예요.
자기부인이 안된 이상은 자기긍정, 자기자랑하면서 노는 게임들이에요. 그래서 교회라는 것은 놀이에요, 오락이고 취미활동이라니까요. 여가활동이에요. 요새는 잘 오지도 않아요. 하나님이 붙여주신 이 대자연의 의미는 뭐냐? 네가 거기서 대신하심을 찾아내라는 겁니다. 왜? 하나님이 대자연에다가 대신하심을 박아놓은 분을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오셨다 하는 것은 예수님이 대신하심이라는 의미를 짊어지고 이 땅에 박힌 거예요. 대신하심의 의미는 14, 15절에서 두 가지를 함유하고 있어요. 하나는 뭐냐? 모든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 다시 말해서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이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아버지를 대신해서 대신 죽이시는 겁니다.
요한복음 5장에 보면 모든 심판을 아들에게 맡김으로 아들은 세상을 다 심판하시는 거예요. 여기서 죽인다는 말은 단지 목숨이 끊어지는 것이 아니고 심판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이 나서서 세상 모든 것을 심판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은 심판의 대상이에요. 이 세상은 왜 있는가? 심판받기 위해서 있다는 겁니다.
“심판받기 위해서 있는 세상을 만들기는 왜 만들었어요? 어차피 심판받을 거, 멸망 받을 거 만들기는 왜 만들었어?”라고 따지신다면 그것은 있다, 심판받았다, 라는 과정을 통해서 심판자를 돌출하기 위해서, 그것을 축출하기 위해서 이 세상이 있는 겁니다. 이 세상에 절에 가는 사람, 예수 안 믿는 사람이 같이 있는 것은 심판받기 위해서, 그들이 하는 모든 행위에 대해서 심판주가 따로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여러분, 카톡에 날려드릴까요?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고, 거기까지만 하면 안 됩니다. 그 뒤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다는 겁니다. 누가? 모든 사람에게. 어떤 사람? all, 모든, everybody, 모든 사람은 예수님한테 심판의 대상이 된다는 거예요. “우리가 뭘 잘못했다고?” 이렇게 따지지 마세요.
우리가 뭘 잘못해서 심판받는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 찾아오신, 아버지로부터 의미를 부여받은 그 예수님이 하는 일이 모든 사람을 심판하는 일을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심판하기 위해서 심지어 마귀가 에덴동산까지 침투해서, 우리의 대장 아담으로 하여금 범죄케 해서, 그 뒤에 나오는 아담의 새끼인 모든 자식들이 아담과 동일한 속성을 지녀서 선악과 따먹었다는 속성을 지녀서, 하나님 앞에 심판받아 합당한 조건들을 하나님께서 이미 선점해서 차곡차곡 심어주신 거예요.
죄 지어서 죽음이 오는 것이 아니고 낯선 죽음, 주님의 심판에서 나오는 그 죽음이 우리를 데리고 가는 거예요. 우리가 살다보면 죽는 것이 아니고 죽음이 우리를 데리고 간다니까요. 죽음이 우리를 불러요. 더 살고 싶어도 부릅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될 것은 누가 부르냐는 겁니다.
그것은 심판을 대행하시는 분이 우리를 심판주 있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다 죽여 버리는 겁니다. 그 유리판 위에 있는 사람을 다 죽여요. 이것은 과학적으로 따진다고 해서 그 의미가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심판주가 됩니다. 그런데 대신의 또 다른 의미가 있어요.
방금 말한 죽었다는 것은 14절의 말씀이고 15절에는 ‘대신’에 담긴 다른 의미가 있어요. 15절에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여기 15절에는 ‘대신’이 두 번 나오거든요. 앞에 나오는 대신은 모든 사람을 심판해서 다 죽이는 역할을 하시는 대신하시는 분이라면, 15절에 두 번째 나오는 것은 뭐냐?
오직 살릴 사람만 살리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대신 죽었다는, 살릴 자를 살리기 위한 대신 죽으심이 있는 거예요. 보통 심판주는 심판만 하고 본인은 안 죽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심판주가 아버지의 심판 앞에 본인이 죽어요. 이게 십자가입니다. 이게 복음이에요.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것이 인간이 부인되지 않는 상태에서는 과학적으로, 이성적으로 알 수 없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세전부터 이 세상에 가지는 그 의미가 뭐냐? 살릴 사람만 살리기 위해서 심판주고 심판을 받는 겁니다. 지난 수요일 설교에서 이야기했지요. 소돔과 고모라에서 심판받는 분이 하나님이라고요.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시고 심판받는 당사자가 하나님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자세한 것은 지난 수요일의 설교를 참고하시고. 대신 심판받는 겁니다. 마태복음 8장 14절에 보게 되면,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이 걸렸습니다. 그 때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베드로의 장모가 살아났어요.
이 대목을 보고, ‘베드로는 결혼했구나.’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혼 안하고는 장모가 없지요. 그러고 난 뒤에 성경말씀을 인용하기를 17절에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예수님 오시기 전 700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가 하는 말을 이사야 그 당시 사람들은 못 알아들어요.
예수님이 오셔야, 비로소 대신하시는 분이 오셔야 이사야가 하는 말이 비로소 통합니다.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신 거예요. 세상에 어느 의사가 감기 환자 낫게 하면서 그 감기환자의 감기를 똑 떼어서 자기가 짊어집니까? 자기가 도깨비입니까?
정신병의사가 정신병치료 하면서, 당신 정신병을 나에게 가져오고 내가 당신 정신병을 대신 가져감으로 말미암아 당신은 멀쩡하게 되는 이런 정신병전문의가 어디 있어요? 안 그래도 정신병환자 너무 대하다 보면 의사정신도 이상해진다고는 하지만. 의사는 고쳐주는 사람이지 환자의 병을 대신 짊어지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게 ‘대신’이에요. 그렇다면 성도의 의미는 뭐냐? 뭐가 나한테서 뚝 떨어져 나가서 “대신 지신 분이 대신 가져갔어요.”라는 그 하나님이 주신 의미를 평생토록 보여주는 자가 성도라는 겁니다. 그 성도에 대한 규정이 15절에 나옵니다.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그 산자들이 어떻게 살아가느냐?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다른 말로 하면 산자는, 성도는 더 이상 나를 위해서 사는 삶은 없다는 거예요. 그게 성도라는 겁니다. 자기긍정을 위해서 사는 사람은 없다는 거예요. 자기를 증거 하기 위해서 사는 사람은 없다는 겁니다.
주님께서 대신 했다는 그 대신의 취지를 우리가 살려줍시다. 살려주는 방법은 뭐냐? 뭔가 뚝 떼서 가져갔다는 것을 남에게 알립시다. 뭘 떼어갔는가? 내가 자기 잘난체 하는 그것과 내 가치 인정하는 것,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이런 죄들, 이런 교만한 죄를 뚝 떼어서 가져갔다는 겁니다.
“어이, 미쳤어? 네가 했는데 왜 남이 가져가?” “하여튼 가져갔어?” “미친거 아니야?” 미쳤다는 소리 듣더라도 할 수 없어요. 성령께서 우리를 그렇게 만들었어요. 설교 지금까지 한 것 다 잊으시고 다시 들어봅시다. 50킬로 밖에 있는 나무하는 어떤 아저씨가 나무하다가 죽었어요.
그런데 설교하는 제 죄가 없어졌어요. 이게 말이 되는 이야기입니까? 여기서 50킬로쯤 떨어진 곳, 저 안강쯤 되는 산엣 어떤 아저씨가 나무하고 있다는 말이지요. 교회도 안가고 산에서 나무하고 있어요. 자기 도끼에 맞아서 죽었다고 칩시다. 죽었는데 갑자기 내 죄가 사해졌어요. 이걸 이 과학시대에, 제 4산업혁명의 이 시대에 믿을 사람이 있어요, 없어요?
없는 거예요. 그래서 유리판 밑으로 침투가 안 되는 거예요. 인간의 이성과 윤리도덕으로는 침투가 안 된다니까요. 지금 그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요. 이 성경이 우리보고 지금 믿으라고 들이미는 거예요. 이 대신하심이 구약 사사기에 보면 수수께끼로 나타나 있습니다.
수수께끼가 나오는데 여러분이 풀어볼래요?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느니라.” 요게 수수께끼입니다. 시간 5초 드립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이런 사람 있을 수 있어요. 손 딱 들고, “목사님, 제가 맞췄습니다.” 어떻게 맞췄는가? “먹는자라는 것은 사자를 말하고, 먹는 것이라는 것은 꿀을 말하고, 강한 자는 사자를 말하고, 단 것은 꿀을 말합니다. 제가 맞지요?”라고 한다면 틀린 거예요.
왜냐하면 그것은 블레셋 사람들이 맞춘 거예요. 삼손이 나실인으로 가다가 사자를 때려잡았어요. 성령의 힘으로 때려죽인 그 사자의 시체에서 꿀이 나온 거예요. 그 꿀을 먹었어요. 이것은 본인만이 아는 경험이고 체험입니다. 하나님의 성신이 임했을 때지요. 일반 육적인 사람은 모르는 거예요.
육적인 사람은 모르고 삼손만이 아는 문제를 수수께끼로 냈을 때 기껏 육적인 사람이 내는 답변이 뭐냐? 강한 자는 사자고 단 것은 꿀입니다, 라는 수준밖에 내놓을 것이 없어요. 왜냐하면 그들은 자연에 속했거든요. 자연에 속하면 관찰밖에 없어요. 관찰은 과학이 되는 거예요.
자연에 속한 사람은 자연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해명하는 그 외에는 없어요. 그것 가지고는 자기부인도 안 나오고 50킬로 떨어진 어떤 아저씨가 죽었는데 내가 죄용서 받는다는 대신 살리심, 대신 죽으심도 안 나와요. 그냥 애들이 노는 수수께끼에 불과한 거예요. 이 수수께끼는 어디서 풀리는가?
나중에 삼손이 죽었을 때, 머리 홀라당 깎였을 때 드디어 완성이 되는 겁니다. 그동안 삼손은 머리카락에 힘이 있다는 것을 가지고 블레셋을 억압하는 식으로 했던 겁니다. 그래서 강한 것은 우리 이스라엘이고 약한 것은 블레셋이고, 단 것은 약속의 땅에 있는 하나님의 축복이고 단 것을 못먹는 것은 저주받을 블레셋 사람이다.
이렇게 출발했던 것이 삼손이었습니다. 그런데 삼손이 그것은 주님이 주신 해석이라고 여기고 막상 블레셋과 붙었을 때에 내가 너무나 세상적으로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의미를 해석했다는 겁니다. 그 해석을 달리할 때 이렇게 되는 겁니다. 강자를 이기는 것은 더 강한 강자가 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강자에게 삼켜져 버리는 약자가 되는 거예요. 죽는 거예요.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죽는 겁니다. 심판주가 심판받을 자의 속에 들어와서 그 심판을 대신 같이 담당하는 거예요. 이것은 이 세상에서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모르는 겁니다. 비트켄슈타인, 철학박사, 뭐가 와도 이거 몰라요. 알 수가 없는 거예요.
하나님의 축복이라 하는 것은 강자가 약자가 되는 그 예수님의 경로, 하늘에 계신 주님께서 이 땅에 죄인이 되는 그 경로를 읽어내지 못한 사람 같으면 이 수수께끼를 풀어낼 수가 없어요. 더 강한 강자가 강한 것을 이기고 약한 자가 눌린다는 것은 선악과체제에서 인간이 벌이는 힘의 게임에 불과합니다.
죽어도 괜찮다, 가 되어야 하는데 죽으면 안 돼, 가 되어버리면 성경말씀 전혀 이해 못합니다. 성도는, 우리가 죄지어서 죽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죽으심을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는 주님에 의해서 대신하심을 풀풀 드러내면서 죽어가고 있어요. 죽어도 괜찮다는 겁니다.
아르트라는 철학자가 있는데 이 사람은 현대사회에 대해서 연구를 많이 했어요. 온갖 것을 다 해도 해답이 안 풀리는 거예요. 해답이 안 풀려서 그 사람이 마지막 내놓은 결론은 이렇습니다. 인생은 습자지다. 인생은 습자지인데 그 습자지가 점점 얇아져서 나중에는 이 세상 풍파에 의해서 구멍이 뚫어지고 찢어지고 결국 죽으면 남는 것이 없이 풀풀 다 조각조각 날라 가는 것이 인생이다. 끝.
하나님의 계시를 안 받았으니까, 성령을 안 받았으니까 알 수가 없는 거예요. 알 수가 없는데 나름대로 연구를 해보니까 인간이 폭이 두껍다고 여기는 것도 점점 얇아진다는 거예요. 박근혜대통령이 대통령 할 때는 두꺼웠어요. 권력이 많지요? 지금은 되게 얇을 거예요. 오늘내일 나가야 돼요.
모든 인생은 습자지입니다. 그러면 성령은 뭐냐? 아예 뾰족한 십자가로 뚫어버려요. 구멍이 나야 성령이 들락날락하지요. 내 몸이 내 것이 아닌 거예요. 내 것이 아니면 기도, 게임, 전도게임, 헌금게임, 충성게임, 그런 거 하지 말라는 거예요. 누가 착한가, 누가 선한가, 그런 게임 하지 마세요.
50킬로 밖에서 아저씨가 대신 죽은 이유가 뭔데요? 게임 잘하면 구원해줍니까? 아니에요. 의미가 없다는 거예요. 노력을 하나……, 하지 말라는 식인데 사실은 해도 괜찮아요. 하고 싶으면 헌금하고 기도하고 전도하는데 의미는 없어요. 그것은 하나의 꿈속의 꿈에 불과합니다.
남에게 안 지려고, 사는 의미 챙기려고. “바보같이 공부도 못하나!” 쥐어박는 이유가, 나는 이 게임에서 패배자인데 너는 강자의 강자가 되어서 우리 집안의 한을 성취 시키라는 이것이 바로 철딱서니 없던 삼손시절이었습니다. 삼손은 나실인이었거든요. 하나님께 바치는 자인데 예수님 같은 분이에요. 자기에게 주어진 나실인의 의미를 몰랐어요.
언제 알았느냐? 머리카락 다 날라 갈 때 그 때, 머리카락이 없을 때 알았어요. 다 날라 간 머리카락이 다시 자라났지만 그 자라나는 그 양은 결국 힘의 분량이 아닌 것을 그 때 알아요. 머리카락이 심어져 있다는 이 자체가 중요하지 머리카락에 주신 하나님의 의미가 중요하지 머리카락의 길이만큼 하나님의 의미가 더 증강한다는 그런 의미는 아니라는 사실을 삼손이 알게 돼요.
그러니까 신앙생활 50년, 100년을 해도 소용이 없어요. 성경을 천 독을 해도 소용이 없어요. 게임 판에서 안지기 위해서 힘을 증강하는 목적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힘을 소유하기 위해서 보신다면 이것은 자기부인이 점점 더 멀어져요. 습자지가 안 된다니까요. 두꺼워져요. 해봐야 양념통닭 양념 입히기에 불과합니다.
사도바울은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나는 아무것도 없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라고 했지요. 이것은 뭐냐 하면, 나를 보라는 것이 아니라 나 못난 것을 쳐다보라는 거예요. 이렇게 못난 자라도 대신 죽으신 그분 때문에 내가 이렇게 구원받았잖아, 라는 겁니다.
이렇게 이야기할 때 어떤 분은 저에게 이렇게 이야기해요. 제 설교를 가만히 들었으면 갑자기 뭐가 탐이 나느냐하면, 유리판 밑의 세계가 탐이 나거든요. 그러면 “목사님, 어떻게 하면 신자 될 수 있습니까?” 우리 가운데는 없겠지만 어떤 분은 그런 질문을 하고 싶어 할 거예요.
그러니 신자 되려고 하는 그 사람은 신자 안 됩니다. 이것은 어떻게 하면 신자가 됩니까, 라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에요. 더 노골적으로 해서 “목사님이 보시기에 제가 신자입니까, 신자 아닙니까?” 딱 깨놓고 그렇게 질문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러면 저는 요한일서 4장 13절을 이야기하지요.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안다는 것을 인식론이라고 합니다. 내가 신자인지 아닌지는 본인만 알아요. 제 3자인 나에게 묻지 마세요. 본인이 뻔히 알면서도 본인이 뻔히 아는 것을 안 들키게 챙겨놓고 그 다음에 자기가 어떤 마음인지를 네가 알아맞히는가, 못 맞추는가, 또 게임을 하고 있는 거예요.
신자 맞습니다, 하면 기분이 좋고. 왜? 승리했으니까. 계속 게임을 하고 있는 거예요. 게임을 하지 마시고 게임 안 해도 돼요. 선악게임, ‘나는 있다, 없다.’의 게임, ‘살았다, 죽었다.’의 게임 안 해도 돼요. 나는 이거다 저거다 할 필요 없어요. 모든 사람은 다 죽었으니까.
이런 말도 있잖아요. 깜깜한 밤에는 암소가 없다고요. 왜? 전부 다 검은 소밖에 없어요. 깜깜하니까. 헤겔이라는 사람이 이야기했어요. 밤에는 모든 소가 검다는 거예요. 다 고만고만하고 뛰어난 인간은 없다는 거예요. 이걸 아르트는, 모든 인간은 습자지다. 조금만 더 힘들게 살아버리면 구멍이 다 뚫려요.
요새 20대 들 보니까 불쌍해요. 왜? 구멍 다 뚫렸어요. 스펙 쌓아야 되지, 취직해야 되지, 영어연수 다녀와야 되지, 군에 갔다 와야 되지, 이거 하랴 저거 하랴 다 찢어졌어요. 뻥, 뻥, 구멍 다 뚫렸어요. 들게 되면 치렁치렁해. 어떤 분은 임신하면서 산후우울증이 걸렸다는 거예요.
산후우울증이 왜 걸리느냐 하면, 자기애를 보면서 하는 말이, “네가 뭔데 새벽 두시 반에 왜 일어나느냐? 네가 뭔데 내 잠을 깨우느냐?” 그 말이지요. 혼자 사는 것이 이력이 나서 습관화 되었는데 애를 낳으니까 새벽에 일어났다 잠들었다 싶으면 또 깨고, “누구야 너! 뭐야 너! 네가 왜 내 인생에 개입해서 나를 이렇게 괴롭히느냐?”
우울증 걸려요. 감당을 못하는 거예요. 얼기설기 다 찢어졌어요. 이 찢어진 것을 취미생활로 억지로 웃으면서 해봐야 땜질에 불과해요. 이왕 찢어진 거 성령에 맡깁시다. 성령의 말씀이 바람으로 들락날락 하도록, 고린도후서 14장 15절이 매일같이 왔다갔다하도록.
그래서 나는 그야말로 다 찢어진 걸레고, 구멍 난 걸레인데 그 구멍 난 걸레에 오직 성경말씀만 왔다갔다하는 사람, 여러분 본인들이 압니다. 그게 바로 신자인 것을. 신자는 말씀대로, 하나님이 주신 대신한 의미가 들락날락하는 사람, 누가 뭐래도 신자입니다. 성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의 말씀 허투루 듣지 않게 하옵소서. 예배 마치면 다시 세상의 산업사회로 나갑니다. 인간들의 게임, 이기기 위한 전쟁판에 나갑니다. 지기 싫어하는 우리의 본성을 자극하는 세상 판에 나갑니다. 이겼다고 자랑질 하고 졌다고 낙담하는 세상에 나갑니다. 주여, 구멍 난 주체가 되어서 나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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