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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28강-새로운 피조물(고후5;16-17) 170319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3. 19. 20:43
2017-03-19 12:53:16조회 : 23         
   새로운 피조물 170319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새로운 피조물(고린도후서 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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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17-03-19 13:39 

새로운 피조물 

2017년 3월 19일                       본문 말씀: 고린도후서 5:16-17 

(5:16)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사도 바울이 ‘육체로 안다’는 말은 다른 시선으로 알아야 한 것이 또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성령으로 안다’입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 ‘성령’이란 자신이 요청해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넘어오므로서 가능한 겁니다. 사울이라는 자가 다메섹으로 예수님 믿는 자들을 체포하려 갈 때에 일입니다.(행 9장) 

따라서 사도 바울은 두 가지 다른 견해를 대비시킵니다. 하나는 육으로 따져보는 겁니다. ‘새로운 피조물’의 등장은 기존의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신 피조물로서의 인간은 무용지물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인간은 당연히 반발합니다. 사도 바울이 사도가 되기 전에 반발하는 것과 같은 취지에서입니다. 

사도 바울이 사도가 되기 전에, 곧 예수님께서 그에게 찾아오기 전에 그는 태어난 인간으로서 개선이 된다면 얼마든지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세상에 살면서 각종 세속적으로 속물적인 것에 오염된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므로서 얼마든지 변화와 개선의 여지가 있다고 믿었던 겁니다. 

게을리지 않고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면 천국에 충분히 들어갈 수 있는 그런 자질과 능력은 여전히 인간 내부에 잠재되어 있다고 믿는 겁니다. 따라서 

사도가 되기 전에 사도 바울이 생각하는 ‘영적 생활’이란 

자신이 신을 향해 반듯하게 살고자 하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 판명된다고 여긴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식의 구원이라면 구태여 예수님께서 사도에게 찾아올 이유가 없습니다. 사도행전 17:18에 보면, “어떤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혹은 이르되 이 말장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뇨 하고 혹은 이르되 이방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또 몸의 부활 전함을 인함이러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본문에 의하면, 사도 바울은 에피큐로스 철학자와 스토아 철학가 복음을 놓고 논쟁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복음이란 이처럼 기존의 ‘육’으로 세상 이치를 말하는 자들의 논쟁을 통해서 그 본질이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이들 철학자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에픽테토스’라는 철학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신이 우리 자신을 우리 자신에게 맡겼고 이러한 위임을 통해 자유로울 수 있는 가능성과 지유로워야 하는 의미를 부여 했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즉 ‘나의 구원은 내가 나에게 어떻게 하기 나름이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자기 수양을 의미합니다. 자기 영혼을 돋보기로 보듯이 살펴서 더 순수해 질 수 있는 경지에 매진해야 한다는 겁니다. 

서기 300년 경에 활동한 성 안토니우스 라는 수도사는 늘 수첩을 갖고 다닙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적습니다. “밤 사이에 내가 받은 모든 유혹들과 악마의 형상들 등 사탄이 나를 쓰러뜨리기 위해 암시한 모든 것을 나는 기록해놓았다”는 겁니다. 왜 그렇게 하는 걸까요? 기록은 과거의 기억을 살리기 위함입니다. 

기억을 살리는 것은 현재와 자신이 기억하는 과거와 비교해서 그 향상된 점을 점검하고 보완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자기 수양에 필요한 테크닉을 자기를 향하여 가동시키는 겁니다. 하지만 이러한 자기 돌봄은 ‘새로운 피조물’이 아닌 ‘기존의 피조물’을 재료로 하여 성경에서 말하는 ‘새로운 피조물’을 제조해내려는 시도가 됩니다. 

하지만 마태복음 22장에 나오는 ‘혼인잔치’ 비유에는 천국은 이런 시도를 통해서 들어가는 것이 아님을 나타냅니다. 임금이 아들의 혼인잔치를 벌리고 미리 초청할 자에게 기별을 했건만 그들은 자기 일에 바쁘다고 모두 거절합니다. 화가 난 임금은 거리에 나가서 아무나 데리고 오라고 합니다. 

선한 자나 악한 자가 가리지 말고 데리고 혼인 잔치 자리를 채워라고 명합니다. 이것으로 과연 혼인잔치가 마감될까요? 아닙니다. 여기에 반전이 있습니다. 혼인의 주최측에서 마련한 예복을 입지 않는 사람은 혼인잔치에 참석하지 못하고 쫓겨나게 됩니다. 이는 곧 ‘예복’이라는 요소가 사전에 인간들에게 알려진 내용이 아닙니다

즉 기존의 피조물을 유지하는 자에게는 있어 ‘새로운 피조물’이란 전혀 예상 못한 요건이 됩니다. 사람들은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단어에 주목하면서 ‘기존의 피조물상’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나아가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인간들의 타고난 본심을 드러내어 줄 뿐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은 후유증으로 자신이 자신에 대해서 창조주 노릇을 하고 자신이 또한 자신의 피조물 노릇을 하게 됩니다. 

즉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아가 그렇게 만들어지기를 욕망하는 식으로 살아갑니다. 거기에 비해서 영적 안목에서 보면, ‘새로운 피조물’이란 인간의 예상과는 전혀 상관없고, 인간의 입장에서 전혀 ‘없는 피조물’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꼭 있어야 할 이유에 대해서 인간들에게는 설득력을 잃습니다. 

인간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자아’를 천국까지 그대로 밀어붙일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제시한 ‘새로운 피조물’이란 

자신이 전혀 모르고 있는 자아상입니다. 

모르고 있기에 그렇게 만들어지는 방법에서 인간이 나설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예수님이 제시한 ‘새로운 피조물’이란 그 주도권이 결코 인간에게 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예수님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생각해둔 피조물상입니다. 


창세기 4장에서, 아담에게는 두 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둘 다 천국 가는 아들이 아닙니다. 

천국가는 아들은 오직 한 아들 ‘아벨’ 뿐입니다. 

그렇다면 ‘새로운 피조물’이란 천국가지 못하는 쪽으로부터 

반복적으로 핍박과 비난을 받는 존재를 말합니다. 

즉 천국가는 사람은 단독적으로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지옥가야만 하는 쪽과 짝을 이루면서 등장합니다. 

일종의 예수님의 아이디를 증거하는 매개체로 등장하는 자들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피조물은 자체적인 잘남과 못남은 따지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영 없으면 그리스도 사람이 아닙니다.”(롬 8:9) 

성령이 전달자인 동시에 증거자가 곧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개인 구원’을 염원하지 않습니다. 단지 영적 안목을 가지고 과연 지옥갈 자들이 어떤 자들인지, 곧 육으로 세상을 보면서 사는 자들이 어떤 자인지를 알아서 그들과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연결시키는 자들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스스로 의지할 만한 것들을 다 끊으시고 오직 어리석고 미련한 십자가 피만 의지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28강-고후 5장 16-17절(새로운 피조물)17031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후서 5장 16-17절입니다. 신약성경 290페이지입니다. 

  

고린도후서 5:16-17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새로운 피조물이라 하는 것은 기존에 있는 인간에 대한 극단적인 모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것이 있다는 말은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이 피조물은 뭐가 되는가? 이것은 폐기처분해야 되는 거지요.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새로운 피조물을 염두에 두지 말고 제대로 인간을 만들었으면 새로운 피조물자체도 필요 없는 거지요. 

  

“인간이냐? 천국 넣어줄게.” 이러면 아주 간단하게 끝날 문제입니다. 인간을 만들어놓고 그게 인간이니까 그게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지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를 만들었으니 감사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거 아니거든.” 그게 아니라면 우리 몸은 왜 만드셨어요? 장난칩니까? 가지고 노는 거예요? 

  

이렇게 되면 어떤 논리가 되느냐 하면, 새로운 피조물만이 천국에 들어간다면 기존의 우리 이 몸 가지고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겁니다. 달리 이야기해서 천국은 “기존의 인간이냐? 들어오지 마라.” 그러한 원칙이 작용하는 곳, 작동하는 세계 그게 바로 천국입니다. 

  

그걸 더 줄여서 하면 “천국은 아무도 못 간다.” 천국은 아무도 가지를 못해요.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나와 있으니까, “그러면 새로운 피조물이 되면 되지. 한 번 시도해보지. 교회 가서 새로운 피조물 만들기를 한 번 해보겠다.” 이렇게 나오는데 기존의 피조물 가지고 새로운 피조물을 만들어낼 수가 없어요. 

  

이유가 뭐냐? 그것 때문에 16절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 말은 요한복음 3장 6절에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와 같은 뜻이에요. 기존의 육, 이 육체를 가지고 새로운 피조물을 만들어 낼 수가 없는 거예요. 육에서 나온 것은 육이기 때문에. 

  

그런데 그동안 사람들은 예수님을 육체로 알았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예수님이 자기한테 찾아오기 전에, 사도바울 되기 전의 사울시절 때 그 사람이 한 일이 뭐냐? 예수 믿는 것은 이단이니 잡아서 죽이자, 그 일에 전념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다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예수님이 찾아와서 “사울아, 사울아! 왜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 이렇게 됐거든요. 

  

그렇다면 예수님에 대해서 육체로 알지 아니 하노라, 라는 멘트를 날린다는 자체가 이미 영적영역에 속해있기 때문에 이런 발언을 할 수 있는 겁니다. 이미 성령을 받은 사람에게는 육과 영을 구분할 수 있는 시선, 안목이 발생되는 겁니다. 성령을 받지 아니하게 되면, 육과 영이라는 두 개의 영역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그저 하나의 영역에서 천국갈 때까지 연속성, 어떤 연결성을 갖는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지금 내가 이 몸을 가지고 있는데 장차 죽으면 천국 갈 그 몸이 지금 이 몸, 이라는 거예요. 다들 그렇게 알고 있잖아요. 이 몸을 죽어서 천국에 쏙 집어넣는 이 몸 되고자 노력하는 겁니다. 헌 피조물은 못 들어가는데,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의도적으로 이렇게 집어넣어 놓았는데. 

  

새로운 피조물을 생각지 못하고 지금 내가 이 몸을 가지고 성경에 새로운 피조물이 이렇게 나오니까 교회 와서 뭔가 공작하고 작업을 해서 괜찮은 인간으로 탈바꿈 해서 그것가지고 “하나님, 어떻습니까? 제가 3, 40년 교회 다니면서 신앙생활 잘 했으니까 제 작품 어때요?”라고 내 밀면 “허허, 괜찮게 수리했네?” 이렇게 받아준다는 아이디어를 갖고 있는 겁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 힘으로 새로운 피조물 만들고자 하는 노력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이 그것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이유가 기존의 피조물이라 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익히 알고 있기 때문에 달리 어떤 재료가 없어요. 이 몸을 포기할 수가 없고, 이 몸의 자아가 붙어 있으니 이 몸 가지고 천국 가면 자아도 영원히 천국 가서 산다는 그 노림수 외에는 별 다른 대책이 없다는 말이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왜 새로운 피조물을 언급했느냐 하면, 이미 인간 아담이 범죄를 했어요. 범죄하고 난 뒤의 상황이 아주 위험한 상황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자기에 대해서 신이 되고 인간이 스스로 자기에 대해서 피조물이 되는, 그렇게 인간이 둘로 나뉘어졌어요. 신인 내가 피조물인 나를 신답게 변모시키는 작업에 나서는 겁니다. 

  

이것은 자기가 자기에 대해서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자기한테 집중, 집착하는 겁니다. 이것을 개인구원, 또는 자기구원,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기존의 피조물을 가지고 어떤 조건들을 여기에 채우는 겁니다. 성경을 백독하고 천 독하고 큐티해 가면서 기도도 하고, 헌금도 하고, 시키는 대로 전도도 하고 온갖 것을 하면서, 어떤 구절을 나에게 장착을 해야 이 몸이 구원받겠는지를 생각하는 겁니다. 

  

성경 보면, 예수를 믿으라고 나오니까 예수 믿고, 피를 믿으라고 하면 피를 믿고, 말씀에 순종하라고 하면 순종하고, 말씀을 들으라고 하면 듣고, 교만하지 말고 겸손하라고 하면 겸손도 해복, 온갖 할 수 있는 것은 다 집어넣는 거예요. 다 집어넣고 교회도 섬기고 목사도 섬기고 할 수 있는 것은 다 섬기는 겁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점점 더 새로운 피조물 쪽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고 기존의 피조물에 아주 집착을 할 수밖에 없어요. 그것을 포기를 못해요. 그동안 공들인 것이 얼마인데요. 자기가 자기의 욕망의 대상이에요. 구원이라는 것을 달성하기 위해서 자기를 재료로 해서 자기라는 결실물, 결과물을 낳겠다는 온갖 노력을 다 하는 겁니다. 극기의 노력을 다 하지요. 

  

사도행전 17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사도가 되고 난 뒤에 누구하고 논쟁을 벌이는데 그 논쟁 벌이는 대상자가 나옵니다. 사도행전 17장 18절에 보면, “어떤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 쌔.”라고 되어 있어요. 일반 성도님들은 에비구레오가 뭐며 스도이고 철학자들이 뭐냐, 잘 모를 거예요.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라고 하는 겁니다. 그들이 어떤 주장을 했기에 사도바울과 복음을 사이에 두고 논쟁을 벌일 수밖에 없는지, 거기까지 알아야 되거든요. 에피쿠로스와 스토아학파의 논리는 그겁니다. 딱 단적으로 말하면 자기수양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정화시키는 테크닉을 발휘하는 거예요.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는 누구한테 배웠느냐? 소크라테스한테 배운 겁니다. 소크라테스, 그 다음에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에피쿠로스, 스토아, 이런 식으로 가거든요. 소크라테스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자기를 배려해야 된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기 자신을 배려하지 않으면 지도자가 될 수 없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자기를 배려한다는 말을 흔히 일반사람들이 상식으로 알고 있는 말로 하면, 너 자신을 알라는 뜻이에요. 자기를 인식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관리하고 절제하라는 뜻입니다. 자기수양의 테크닉을 이야기한 겁니다. 스승이 되는 소크라테스가 이야기한, 자기관리를 얼마나 철저하게 할 것인가의 테크닉들을 개발한 신학자들이 에피쿠로스와 스토아학파사람들입니다. 

  

스토아학파철학자 중에서 에픽테토스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뭐라고 했는지를 읽어드릴게요. “신이 우리 자신에게 우리 자신을 맡겼고 이러한 위임을 통해서 자유로울 수 있는 가능성과 자유로워야 하는 의미를 부여했습니다.”라는 말을 했어요. 신이 우리 자신을 우리 자신에게 맡겼다. 하나님이 우리 자신을 개선하는데 전적으로 우리 자신에게 우리 자신이 개선되도록 맡겼다는 그 말입니다. 

  

이게 스토아학파의 철학이에요. 들어보니 상당히 낯설지가 않지요. 납득이 되잖아요. 술 끊고 담배 끊고 교회 왜 옵니까? 내가 천국 가는 인간 만들기는 내 손에 달렸소이다. 목사는 설교에서 명령만 하면 되고 나는 시키는 대로 따라가게 되면 오늘 죽어도 나는 하늘나라 간다. 그거 노리고 교회 오는 거예요. 

  

삼위일체를 만든 사람들이 있어요. 그 주동자 되는 니사의 그레고리우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순결론>이라는 책을 썼는데 그 책에서 누가복음 15장을 인용했어요. 거기 보면 잃어버린 동전, 드라크마를 찾고자 해매다 기어이 찾고서 기뻐하는 어떤 아가씨 이야기가 예수님 비유에 나오는 겁니다. 

  

니사라는 것은 지역의 이름이고 그 지역의 그레고리우스라는 이 사람이 이걸 어떻게 이해했는가? “여러분 속에 여러분의 순결한 영혼을 찾게 되면 여러분은 천국 가는 기쁨을 누립니다.”라는 이론을 제시했습니다. 천국 갈 만한 순결한 영혼은 이미 우리 속에 내장되어 있다는 거예요. 

  

문제는 살기 바빠서, 돈벌기 바빠서 찾아내지 못하는 그것이 문제인데 열심히 그것을 찾고자 테크닉을 발휘하게 되면 그것을 찾아낼 수가 있다는 겁니다. 이미 거기에 잠재되어 있다는 거예요. 니사의 그레고리우스신학은 천주교입니다. 천주교에 수도원이 많은데 수도생활의 원조 격인 성자 중에 성 안토니우스라는 사람이 있어요. 이집트 출신의 성자인데요. 

  

유럽에서는 1월 14일 또는 17일에 이 성자를 기리기 위해서 공휴일로 지정하고 쉽니다. 그 정도로 유명한 사람이에요. 그 사람이 평소에 이런 것을 했어요. 자기 곁에 수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수첩에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수첩을 가지고 있으면서 밤사이에 그가 받은 모든 유혹과 악마의 형상들 사이에 사탄이 그를 쓰러뜨리기 위해서 암시한 모든 것을 수첩에 빽빽하게 적는 거예요. 

  

기록한다는 것은, 글을 쓴다는 것은 기억의 매체입니다. 지난밤에 악마와 투쟁했던 것을 낱낱이 기록함으로서, 일기장처럼 수첩에 기록함으로서 그 다음날은 그런 악마에게 보다 수월하게 승리하게 해서 한발자국, 두발자국 점점 더 천국이 가까이 보이는 쪽으로 수련해나가는 방식을 이 수도원의 기수라 할 수 있는 안토니우스가 했습니다. 수첩에다가 적은 거예요. 

  

요즘 개신교용어로 한다면 큐티가 되겠지요. 카톨릭에서는 자기 선배들이 했던 이러한 방법을 교회에 시스템화 시키는데 그걸 가지고 사목 권력이라고 합니다. 사목이라는 말은 천주교신부가 양떼를 다루는 그 기능을 사목이라 해요. 목자로서의 일이라고 하는데 그 사목이 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영혼을 장악해야 되고 그것을 사목 권력이라 합니다. 

  

사목 권력을 쥐고 있으면 어떤 점이 도움이 되느냐? 수양을 할 때 교회신부들의 도움을 받을 수가 있어요. 정기적으로 한 달에 한 번씩 고해성사를 하는 겁니다. 상담을 받는 거예요. 상담을 받게 되면 갈 길을 알려줘요. 신부가 삐딱하게 앉아서 상담을 하지요. 이것은 의사가 처방전을 내는 것과 똑같아요. 

  

다 듣고 난 뒤에 “주기도문 세 번 하세요.” 좀 심한 경우라면 “금식하시고 돌아오는 성찬식에는 참석하지 마시고.” 이렇게 해놓고 “다음 손님!” 이렇게 하지요. 그 찾아오는 고객과 상담해주는 신부나 다 같이 동의가 되는 것이 뭐냐? 내 구원은 내 손에 달렸소이다, 이것은 빈틈없이 합당한 진리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마태복음 22장에 보면 그것이 악마의 방법이에요. 왜냐하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하는 것은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인간은 이미 피조물 된 자기 자신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것은 인간에게는 없는 거예요. 오늘 본문에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주님만이 만들어내는 것이지 자기가 넘겨볼 수 있는 목표가 아니에요. 

  

마태복음 22장에 보면 “천국은 이와 같으니” 하면서 예수님께서 혼인잔치 이야기가 나옵니다. 자기 종들을 시켜서 혼인잔치에 오라고 하니 약속 때문에 못가겠다고 했거든요. 그러니까 임금이 화가 나서 길거리에 있는 아무나 오라고 했어요.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한대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자리에 손이 가득한지라.” 

  

여기에 반전이 있습니다. 공짜 밥 먹는데 누가 안 오겠어요? 오지요. 임금님 혼인잔치니 음식이 얼마나 좋게 나오겠습니까? 그래서 신나게 왔습니다. 왔는데 여기에 반전이 있어요. 이것은 생각지도 못한 반전입니다.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왔는데도 불구하고 쫓겨나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예복은 누가 제공하는 겁니까? 이것은 혼인잔치 주최 측에서 제공하는 거예요. 혼인잔치가 천국이라면 천국은 하나님 쪽에서 제시된 유니폼, 예복을 주지 않고 그것을 받지를 못한 사람이라면 아무리 공짜라 할지라도 천국에 갈 수가 없습니다. 이 마태복음 22장 이야기는 어느 누구도 천국에 가지 못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새로운 피조물에 대한 요건과 조건은 하나님 쪽에서 제시해야 돼요. 하나님 쪽에서 제시해야 되는데 제시할 때 기존의 피조물이 납득이 되고 수긍이 되는 쪽으로 제시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기에 큰 딜레마가 있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에게 구원을 제시할 때 왜 열 두 제자들과 사람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지를 못했습니까? 그들은 자신의 옛날 피조물, 지금의 피조물이 기대하고 예상하는 미래상을 미리 염두에 뒀거든요. 나는 이렇게 될 때 천국 가는 사람이 맞다, 라는 자기고집부리는 식으로 멋진 이상향, 거룩하고 경건하고 성스러운 요소를 미리 예상을 한 거예요. 

  

그러나 주님은 인간이 예상한 그것을 다 피해버리고 거기에 맞지 않는 식으로 다가오신 겁니다. 인간이 예상한 천국 가는 미래모습은 어디에 근거를 두느냐 하면, 기존의 피조물, 육적인 본성에 근거를 두고 출발했거든요. 이미 자기 자신이 불량품이고 오류가 있다는 말이지요. 

  

오류가 있는 인간이, 나는 이렇게 해서 천국 가겠다는 아이디어를 낸다면 그 자체가 오류가 있을 수밖에 없고, 그리고 그렇게 해서 천국 간다면 그 천국은 애초부터 있지도 않는 천국이에요. 마태복음 22장에서 아무나 오라고 했을 때 거기에 온 사람들의 임무는 뭐냐? 

  

아무나 오라는 말은, 누구도 가지 못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 혼인잔체가 보통 혼인잔치가 아니라는 사실, 우리의 상식밖의 혼인잔치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왔다가 쫓겨날 사람들이에요. 그냥 쑥 들어갈 줄 알았지요. 본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했을 때에 이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단어가 딱 나오면 사람들은 바보가 아닌 이상, ‘아, 새로운 피조물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가는구나. 새로운 피조물이 되면 되지.’ 이렇게 되는 거예요.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그 주체가 누구냐 하면, 

본인이 새로운 피조물 되겠다는 거예요. 

지금 나라는 피조물하고 성경 고린도후서 5장 17절의 피조물과 연결되어 있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착각도 보통 착각이 아닙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거든요. 아까 새로운 피조물이 없다고 이야기했지만.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커피전문점에 갔어요. 종업원보고 “나는 크림 없는 커피 주세요.” 이렇게 주문했어요. 그랬더니 종업원 하는 말이 “우리 가게는 크림 없는 커피만 팝니다.” 지금 제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를 거예요. 그거나 그거나 크림 없는 커피마시는 것은 마찬가지가 아닌가. 마찬가지 아니에요. 

  

손님이 와서 크림 없는 커피 주세요, 라고 했을 때는 주도권을 자기가 갖고 있어요. “내가 원하는 것을 달라는 그 말이야.” 거기에 대해서 종업원은 “손님이 원하는 것은 우리가게에서 주지 않습니다. 우리가게가 주고 싶은 것만 줍니다.” 그게 똑같은 크림없는 커피라 할지라도 거기에는 주도권이 있느냐 없느냐가 달려 있어요. 

  

성경에 나오는 이 새로운 피조물이라 하는 것은 사도바울이 지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뭘 겪었느냐 하면, 예수님을 육체로 알던 그 시절과 예수님은 육체로 알 분이 아니고, 예수님을 육체를 통해서는 아무도 알지를 못하고, 인간은 어차피 육체고 따라서 예수님을 제대로 알 사람은 아무도 없고, 아무도 모르기에 아무도 믿을 사람은 없고, 믿을 사람이 없기에 천국 아무도 못 간다, 라는 그 시절을 겪었던 사람이 사도바울이에요. 

  

그래서 16절에서, 나는 이제부터 예수님을 육체로 알지 아니한다. 예수님을 영으로 대할 것이라는 이 말은, 어떻게 똑똑하냐의 문제가 아니고 모든 주도권은 예수님에게 넘어간 이상 구원해 달라고 하지 말라는 그 말입니다. 예수님보고 저를 구원해달라는 그런 소리는 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네가 뭔데 구원을 요청하느냐는 말이지요. 

“크림 없는 커피 가져와.” 

“미쳤나? 지금 가게가 어느 가게인데. 

네가 뭔데 크림 없는 커피를 달래? 

너는 그냥 주는 대로 먹어. 크림 없는 커피야.” 

그것이나 이것이나. 아니에요. 같은 커피 아니에요. 

똑같은 커피라도 거기에는 주도권이 담겨 있습니다. 

이 가게의 주도권이 담겨 있는 거예요. 

  

이걸 정형화시켜 버리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하는 것은 기존의 육적인 인간에게는 사실 터무니없는 이야기입니다. 터무니없는 이야기인줄은 알겠는데 여기에 새로운 피조물이 나오니까 이제는 새로운 피조물로 내가 바꾸면 될 것이 아닌가, 이렇게 나와요. 16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 대목에서 육체대로 알았다는 말을 사도바울이 할 때 그 바탕에 뭐가 있느냐 하면, 모든 인간은 예수님을 못 알아봤다는 것을 바탕에 깔아요. 모든 인간이 예수님을 못 알아보게 되면 예수님은 지금 와도 십자가에 구타당해 죽어야 되고, 살해당해 죽어야 되는 겁니다. 

  

사람이 뭔가 소통이 되어야 믿든지 말든지 할것이 아닙니까? 예수님은 소통 안 되는 이야기를 한 거예요. 안 되는 이야기를 해줘야 우리가 육이라는 사실이 정형화되고 규정이 되기에 그런 겁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은 것을 사도바울이 근거로 한다면 지난시간에 본 14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 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지금 이 이야기를 계속 하고 있는 거예요. 일주일이 지났으니 다 잊어버렸지요? 성도가 할 일이 뭐냐 하면, 성도가 하는 일은 죽어가면서, 평소에 살아있으면서 뭘 끄집어 내냐 하면, 내가 어떻게 구원받느냐가 아니라 내 일상 속에서 대속하심의 흔적을 끄집어내서 보여주는 것이라고 설명해 드렸지요. 

  

기억이 안 나지요. 내가 붙드는 나 말고 내가 붙들지 못하는 나를 주께서는 구원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내가 붙드는 나만 죽자하고 아침에 거울 볼때부터 그것만 생각하는 거예요. 맨날 목사한테 묻는 것이, 어떻게 하면 구원받습니까, 어느 대목에 순종하면 되겠습니까, 헌금은 어떻게 해야 되고, 십일조는 어떻게 해야 되고, 일주일에 교회는 몇 번 나와야 되고, 열한시 예배인데 열시 반에 나가면 안 됩니까, 등등. 

  

열한시 반 예배면요, 열시 반에 나와서도 안돼요. 열시에 딱 나와야 돼요. 죽느냐 사느냐가 문제가 아니고 내가 아는 죽음과 내가 모르고 있는 죽음과의 문제에요. 예수님의 죽으심은 그 누구도 몰라요. 예수님이 죽으니까 ‘자기도 인간이니까 우리같이 죽은 거겠지.’ 이렇게 하는 거예요.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를 몰라요. 사도바울은 알아요. 그분이 죽음으로써 모든 인간이 이미 살아도 일괄 다 죽어 있다는 거예요. 죽어 있는 인간은 영적세계의 감각이 없어요. 따라서 백날 복음이야기 해봤자 못 알아듣는다는 말이지요. 전도가 뭡니까? 못 알아듣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전도에요

  

전도라는 게 알아듣지 못하게 하는 거예요. 혹시 여러분이 복음 전할 때 누가 알아듣거든 자기가 제대로 전했는지 점검에 나서봐야 돼요. ‘내가 뭔가 타협조로 나갔던가? 내가 미쳤지. 교인 하나 더 꾀려고 이상한 소리 한 것이 아닌가? 회원모집하려고 이상한 소리를 내가 한 것이 아니야?’ 

  

점점 설교가 어려워지지요? 어떤 유대인이 이런 소리 했어요. 유대인이나 요새 젊은 사람도 다 마찬가지지만. 유대인이니까 성경을 보잖아요. 현대과학교육을 받은 젊은이가 있었던 모양이죠. 그 젊은 사람이 유대인랍비를 보고 “홍해가 갈라지고, 해가 멈추고, 여리고성이 무너지는 게 나오는데 이거 실제로 일어난 일입니까?” 이렇게 물으니까 랍비가 하는 말이 “실제로는 안 일어났는데 사실입니다.” 

  

실제로 일어나지는 않았는데 사실이라는 거예요. 왜냐하면 과학시대에서 지구는 47억년이 되었고 우주는 131억년이 되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창세기 1장에 보세요. 달랑 일곱 번의 저녁이 되면서 끝나버렸어요. 7일 만에 창조했어요. 학교에서 진화론을 배운 사람에게는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격차가 져도 너무 격차가 지는 거예요. “랍비님, 하나님께서 달랑 일주일 만에 창조했습니까? 그게 사실입니까? 실제로 그렇게 되었습니까?” “실제로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다.” 그게 무슨 말이냐 하면, 그게 실제로는 그런 일이 없었는데, 홍해가 갈라지는 그런 일은 없었는데 다만 구원에 대해서는 그 의미는 충분히 살아있으니 그것을 믿으라는 그런 이야기에요. 

  

얼마나 타협적입니까? 그런데 예수님 입장에서는 그래서는 안돼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는데 십자가에 죽어서 부활한 그것이 맞습니까?” “실제로 일어났지만 사실은 아니다.” 이게 정답이에요. 실제로 일어났지만 그 의미에 대해서 너는 모르는 대상자일 뿐입니다. 왜 그게 모르는 대상자에 불과한가? 

  

“십자가에서 실제로 그 일이 일어났습니까?”라고 묻는 그 투, 이것은 여전히 “내가 인식하면 믿어드리겠습니다.” 하는 그 구원의 주도권, 내가 알아서 그 아는 것을 믿어서 정리가 된다면 그것을 가지고 “나 예수 믿었습니다.”라고 큰소리치면서 하나님 앞에 나서겠다는 그 주도권을 여전히 본인이 쥐고 있는 거예요. 

  

“실제로 일어났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야.” 쉽게 말해서 “너는 몰라. 주도권을 아직도 네가 쥐고 있다면 너는 성령 받지 않았어. 너는 모르게 되어 있는 것이 복음의 특징이야.” 이것은 어리석고 미련한 이야기에요. 고린도전서 1장에서, 십자가에 대해서는 모든 정상적인 인간이 보기에 어리석고 미련한 거예요. 

  

그러나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말을 하기 전에 왜 어리석고 미련한가를 충분히 설명을 해줘야 돼요. 복음이 왜 어리석고 미련할까요? 예수님이 죽었다는 그 사건이 계속해서 반복되어야 되기 때문에 그래요. 과거에 한 번 죽은 것이 아니고 계속해서 죽어야 되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3장 1절 말씀,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거늘” 십자가에서 죽은 지 벌써 15년이 지났는데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는 거예요. 어디에? 동쪽에서? 서쪽에서? 어디에서 보이는데?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는 것은 성령께서 계속 십자가사건을 반복해서 유일한 구원의 능력으로 계속해서 드러내 보인다는 겁니다. 

  

못 믿도록, 믿지 못하도록, 주도권을 갖고 있다는 인간들이 절대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더 노골적으로는 아무도 구원받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교회 와서 그냥 교회놀이 하시면 됩니다. 여전도회 조직하고, 목사장로 세우고, 권세 세우고, 십일조 내서 저희끼리 잘 먹고 놀고, 선교 핑계대고 외국에 놀러가고, 이렇게 잘 놀면 돼요. 

  

그러면 마음이 안정되고, 거기다가 스토아학파처럼 수양하고, 그리고 수첩, 그 방법도 쓰고. 옛날 수도원에서 수첩 있었지요. 또 다른 방법은 벽을 보고 명상했습니다. 그리고 역시 상담, 회개하면 용서해주는 그것. 한 달에 한 번씩 처방전 내리는 것, 그게 제일 심적인 안정성을 취할 수가 있습니다. 

  

점점 복음하고는 멀어지지요. 처음부터 단절되어 있지만. 하나님께서 이 새로운 피조물 이야기를 하면서, 십자가 이야기하면서 구약전체를 근거로 갖고 있는데 열왕기상 17장 5절부터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엘리야 이야기인데요. “저가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하여 곧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머물매 까마귀들이 아침에도 떡과 고기를, 저녁에도 떡과 고기를 가져왔고 저가 시내를 마셨더니 땅에 비가 내리지 아니하므로 얼마 후에 그 시내가 마르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엘리야선지자에게 까마귀가 

아침에 떡과 고기를 저녁에도 떡과 고기를 가져왔습니다. 

2월 16일 날 가져왔습니다. 

2월 17일 날 초조했습니다. 오늘 안 오면 어떻게 하는가? 2월 17일에도 왔습니다. 

2월 16일에 오고 또 2월 17일에 왔어도 2월 18일에 또 온다는 보장은 없어요. 
2월 18일 아침에 까마귀가 떡과 고기를 줬습니다.그런데 저녁에도 온다는 보장은 없어요. 

2월 19일 아침에 까마귀가 왔습니다. 오늘 저녁에 온다는 보장은 없어요. 

엘리야가 이렇게 살았어요. 

내일이 없어요. 내일이 보장되지를 못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악성코드 같은 존재에요. 

  

의지하고 믿은 모든 관계를 다 끊어버리는 겁니다. 다 끊어버려요. 

마치 어떤 사람이 집에 앉아 있는데 ……, 집이라는 거주의 개념은 부산강의 레비나스 할 때 했습니다. 사람이 집을 지음으로서 자기고유의 영역, 자기자리를 확보하는데 포크레인 소리가 나더니만 지붕 뜯어내고 벽체 뜯어내고, 자기는 가만히 앉아 있는데 다 뜯어내 버리면 휑, 하니 그냥 하늘만 쳐다보고 있지요. 

  

자기를 지켜줄 것이 아무것도 없지요

주님이 성도에게 이 일을 해요. 의지할 만한 것, 내일을 보장할 만한 것을 다 뜯어가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천국에 가지 못할 옛 피조물을 죽자 하고 지키기 때문에.이거 버리면 안 된다는 겁니다. 

새로운 피조물의 정형을 보여 달라고 한다면 요한계시록 1장에 나오는 사도요한이에요. 

밧모섬에서 친척이 있었습니까, 재산이 있었습니까? 

다 없어지고 죽기만 기다리는데 그 때 그 현장에서 예수님의 나라의 환상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왜 환상을 못 보는가? 나를 지키기 위한 인공물이 너무 많아요. 한 두 번 들은 것이 아니고 수천 번 들은 이야기가 “목사님, 교회 안다니면 구원 못 받습니까?” 왜 교회를 의지합니까? 좋은 교회고 나쁜 교회고간에 의지한다는 것이 나빠요.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네가 뭔데, 주인공 네가 뭔데 구원을 받아야 됩니까? 

  

우리가 왜 구원받아야 되지요? 우리는 구원의 대상이 안 됩니다. 구원의 대상이 안 되는 이유가 하나님은 딱 한 아들을 원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창세기 4장에 가인과 아벨이 있는데 둘 다 아들이잖아요. 그러면 둘 다 구원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사이좋게 천국가면 되는데 하나님께서는 아들 둘을 놓고 뭐라고 하느냐? 

  

한쪽은 내 아들이 아니고 한쪽은 아들이라는 겁니다. 아들임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냥 존재함 자체로 아들이 아니고 아들 아님을 옆에 새로 만들어요. 만들어서 아들인자와 아들 아닌 자를 놓고, 이것은 아들이 아니고 이것은 아들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들 아닌 자에게 맞아죽었지요. 그 노선이 바로 성도의 노선이에요. 로마서 9장에 보면 긍휼의 그릇과 진노의 그릇, 긍휼의 그릇만 있으면 되는데 꼭 진노의 그릇을 옆에 둡니다. 리브가가 야곱만 낳으면 되는데 야곱 말고 짝을 이뤄요. 에서, 에서는 미움 받기 위해서, 지옥가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나야 할 사람이에요. 

  

꼭 짝을 이뤄야 돼요. 지옥가기 위한 사람과 그리고 천국 가는 사람으로 짝을 이룹니다. 

그리고는 이야기합니다. 둘 중에 누가 나쁜가. 누가 나빠요? 야곱이 더 나쁘지요. 

지옥 갈 형은 아무 나쁜 짓을 한 적이 없어요. 

이 말씀이 오늘날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지옥 갈 사람은 어질고 착해요. 

품행이 방정합니다. 기품 있고 품격 있는 인간이에요. 

그런데 천국가는 야곱은 사기꾼이에요. 석산 개발한다고 돈 빼먹는 그런 사기꾼이에요. 

자기밖에 몰라요. 그 자기밖에 모른다는 그것이 좋은 재료가 되는 겁니다. 

새로운 피조물되는 멋진 재료가 되는 거예요. 

에서는 너무 점잖아. 그런데 이건(야곱) 너무 지독해. 자기밖에 몰라. 

여러분도 자기밖에 모르시기 바랍니다. 

  

마귀의 수법은 가짜 죄를 가지고 진짜 죄를 가리는 역할을 하는데 그게 마귀의 수법이에요. 

가짜 죄, 내가 납득이 되고 내가 이해가 되는 죄. 간음, 살인, 거짓말 한 것, 그런 것을 죄라고 규정함으로 말미암아,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그 죄를 교만하게 가려버려요. 

교회 나오는 죄, 

성경 보는 죄, 

설교하는 죄, 

기도하는 죄, 

선교하는 죄, 

선교회비 내는 죄, 

예배 참석하는 죄, 

큐티하는 죄, 

그게 죄인데 그것은 죄가 아니고 나를 수양하는 멋들어진 하나님의 경건이고 의로움이라고 

마귀가 교회마다 유포를 시켜놓았어요. 

네 운명과 네 미래는 네가 하기 나름이라는 거예요. 

너를 포기하지 말라는 거예요. 이것은 소크라테스 이야기에요. 스토아학파 이야기입니다. 

사도바울이 복음가지고 왜 논쟁했겠습니까? 오늘날 교회와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이 모든 교회가 하는 꼴이 스토아철학이에요. 자기를 수련하라. 자기를 수양하라. 

규칙을 가동시킵니다. 규칙을 만들어서 그 매뉴얼대로 가동시키는 겁니다. 

모든 선교단체의 그 순결지향. 우리나라 대학에 이런 것이 있어요. 

순결학과가 있어요. 처음 들어봅니까? 통일교에서 만든 대학에 순결학과가 있어요. 

왜? 하도 아가씨들이 결혼 전에 동침을 많이 하니까 

신의 뜻에 어긋난다 해서 집단으로 모아서, 우리만큼은 순결한 사람이 되자. 

순결 백날 해 보세요. 마음으로 간음한 것도 간음인데. 그리고 그렇게 하겠다는 그것이, 

내 인생은 내가 관리하겠다는 그것이 예복을 입지 않은, 내쫓김 당하는 마귀의 앞잡이에요. 

우리는 굴러 떨어져야 됩니다. 천로역정처럼 “아, 보인다, 보인다, 천국이 곧 보이네.” 

보인다고 하지 말고 발을 헛디디세요. 

헛디뎌서 저 나락으로 떨어져야 돼요. 

떨어져서 허리뼈고 엉치 뼈고 다 깨져서 스스로 일어나지 못하게 만들어야 됩니다. 

그 때 주님의 십자가가 보입니다. 그냥 떨어지지 말고 굴러 떨어져야 돼요. 

저는 인생을 과메기로 봅니다. 포항과메기. 가만 놔두면 저절로 바짝 말라가요. 

80정도 되면 이만큼 마르지요. 우리 권사님이야 70대여도 아직 탱탱하지만. 말을 조심해야 돼요. 과메기 있잖아요. 바짝 햇빛에 말린 과메기. 인생은 누구나 바짝 마른 과메기입니다. 젊을 때 설치지만 설칠 힘도 없어요. 그게 인생입니다. 이미 저 바닥에 굴러 떨어졌어요. 

굴러 떨어지게 한 그것, 그게 주님의 새로운 피조물임을 알려주는 하나님의 전략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마라. 아무것이라도 하겠다는 그 순간 행위의 주도권은 너에게 있는 거예요. 예수 믿을까요, 쌍시옷 두 개 써가면서 믿씁니다, 믿씁니다, 믿씁니까, 믿쑵니다, 그러므로! 이런 것들, 이런 것들이 마귀 짓이에요. 

하루하루 사는 것이 그만큼 천국과는 멀어지는, 

이 육신이 한 단계 더 굴러 떨어지는 세월이에요. 

집에 혹시 수첩 있거든 버리세요. 

끝으로 이 말씀 드리겠습니다. 

사도바울이 새로운 피조물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구원했다 매개체 노릇을 하라는 겁니다. 

매개체의 특징은 뭐냐? 

잘하고 못하고가 없습니다. 매개니까. 

우편배달부 인물 잘났다고 좋은 소포 옵니까? 아니지요. 

소포가 중요하지 우편배달부가 인물값 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성도는 매개체인데 매개는 성공실패를 묻지를 않아요. 

잘했나 못했나, 경건, 그런 것을 묻지를 않습니다. 

매개체는 개인구원이 없어요. 그냥 전달, 전달, 할 뿐이에요. 

사도바울이 예수님 때문에 새로운 성령을 받고 난 뒤에, 

이제는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어요.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다는 말은 십자가를 반복하는 겁니다. 

십자가를 반복한다는 것은 그 때 그 사건을 계속하는 거예요. 

새로운 피조물은 매일같이 반복됩니다. 

이것은 멈추라고 요청할 수도 없고 이미 한 번으로 끝난 것도 아니고 

매일같이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는 겁니다. 

어떻게?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게 하면서. 

어디까지? 십자가에 죽기까지. 과메기 될 때까지. 

똑같은 과메기지만 주님 때문에 매개체로 과메기 돼야 돼요

왜? 내가 만약 살아난다면 주님의 십자가를 내 잘남으로 가리거든요. 

복음을 가리는 것은 적그리스도가 하는 짓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앞에 얼쩡거리지 마세요. 

어리석고 미련하다고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 설명할 필요가 없어요. 

다만 우리 이성과 똑똑함이 얼마나 십자가를 모독 했는가 그걸 알아야 돼요. 

아무것도 안 해도 우리는 주님의 뜻대로 지금 과메기 되어서, 오늘 설교제목을 과메기로 해버릴까, 

과메기가 되어서 결국 주님의 뜻대로, 죄의 삯은 사망이다, 죽습니다. 

옛 몸, 옛 피조물은 이제 은퇴를 해야 됩니다. 이것은 폐기처분 되어야 됩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그것을 그렇게 하게 하신 십자가만 점점 더 크게 보이기를 바랍니다. 

누구처럼? 사도요한처럼. 아무 일가친척도 없고 

밧모섬에서 귀양살이하면서도 은혜는 은혜대로 다 받고 있어요. 

“주님이여, 이렇게 된 것은 운명 따라 갈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감사합니다.” 

운명 따라 간 거예요. 사도요한이 안 것은 지금까지 주께서 이끄시는 대로 간 겁니다. 

뭘 증거 하라고? 십자가 증거 하라고. 그 매개체가 바로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자꾸만 걱정되는 것이 자신의 구원인 것을 육적인 요소가 어떻게 금지할 수가 있겠습니까마는 

그 때마다 더 한 단계 굴러 떨어지게 하옵소서. 

우리가 설치는 모든 경건이 얼마나 십자가를 욕되게 하고 

그것이 사도바울이 논쟁했던 스토아철학에 불과한 것을, 

자기가 자기 관리하는 그런 마귀 짓이 또다시 주님의 십자가를 또 다시 욕되게 한다는 사실을 

이제는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