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고린도후서31강-구원의 날(고후6;1-2) 170409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4. 11. 07:00
2017-04-09 12:40:32조회 : 100         
   구원의 날 170409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구원의 날(고린도후서 6:1-2)

음성 동영상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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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17-04-09 13:24 

구원의 날 

2017년 4월 9일                        본문 말씀: 고린도후서 6:1-2 

(6:1)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6:2)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날’이라는 것은 누가 독점할 수 없는 대상입니다. 날을 결정하는 것은 개인적인 자질이나 능력이 아닙니다. 창세기 1:14에 보면,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주야를 나뉘게 하라 또 그 광명으로 하여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이루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넷째날 이전에도 이미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는 절차를 통해서 ‘날’이 성립됩니다. 따라서 ‘날’이란 모든 인간들이 공통적으로 부여받는 조건이 되니 어느 누구가 그 날을 ‘자기를 위한 날’로 잡아놓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구원의 날’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구원’이라는 말씀은, 현 인간들이 참담한 형편에 놓여 있음을 전제로 하는 겁니다. 그냥 그대로 살면 비참한 지경에 이른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구원’이란 ‘탈출’, 혹은 ‘구출’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탈출에 실패하면 파멸이야’라는 취지로 주어지는 것이 구원이라는 단어입니다. 

따라서 ‘구원의 날’이란 모든 인간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인간들이 개인적으로 다룰 수 없이 공통적으로 적용받는 형편에 다 같이 갇혀있다는 것을 바탕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개인적으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구원되더라도 집단적으로, 단체로 구원됩니다. 왜냐하면 ‘날’이라는 시간 요소에 받침이 된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은 형편 위주가 아니라 집단적이라는 점을 알기 위해서는 성경을 처음부터 하나님 안목에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을 배제한 채, 천지 창조가 시작되고 마무리 되었다는 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창세기 1:26에서 ‘우리의 형상대로’라고 해서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알고 있는 그 한 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한 분으로 알고 있는 것은, 인간들이 상대할 하나님이 하나라는 뉘앙스가 강합니다. 만약에 한 분이 아니라면, 여기서 하나님과 하나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으며 무슨 약조가 성립되고 무슨 의논이 있었느냐를 무시할 수 없는 요소가 됩니다. 천지창조에 하나님 외에 가담한 하나님이 누구신가 하는 것과 그 하나님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떤 것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1:1에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창조에 한 하나님이 개입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골로새서 1:16에 보면,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천지창조가 창세기 1장과 2장으로 마감되지만 거기에 담긴 뜻을 펼치는데 있어 하나님은 창세기 1장과 2장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최종 결론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이 세상의 ‘주’가 되시는데 있습니다. 

‘주’가 되시는 데에 있어 하늘에서 작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작업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죄가 있어야 하고 죽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 작업을 위한 배역을 맡은 존재로 악마와 인간이 있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 사이의 전쟁의 장이 되기 위해 역사는 마련됩니다. 

인간들은 어디까지나 들러리입니다. 


역사 내막에 깔려 있는 이런 사실은 나단 선지자가 찾아든 다윗 왕을 통해서 분명하게 알려집니다. 

우리아 장군의 아내 밧세바와 간통하고 그 남편인 우리아 장군을 죽일 때 누가 봐도, 사람이 사람에게 죄지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니었습니다.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죄를 통보받은 다윗왕은 성신을 통해서 다음과 같이 진실을 수정합니다. “내가 주께만 범죄했다”(시 51:4) 

그 이유가 곧이어 나옵니다. 내가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죄가 나를 가지고 죄답게 드러내었는데 그 이유는 내가 바로 죄 속에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은 죄를 물리칠 입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원천적으로 죄 속에서 출생한 존재입니다. 이로서 다윗은 현상의 내막에 진입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왕이란 단순히 이방민족처럼 일반 백성들 중의 한 사람이 아닙니다. 잠언 25:2-3에 보면,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 하늘의 높음과 땅의 깊음 같이 왕의 마음은 헤아릴 수 없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숨어계시는 하나님께서는 독점적으로 자신의 정보는 오직 ‘주’, 곧 ‘이스라엘 왕’에게 다 알려주시는 겁니다. 따라서 이제부터 시간이란 인간들의 자기 스케줄따라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왕의 등장과 그 역할과 하시는 일 중심으로 새로운 ‘날’이 정해집니다. 원래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 날은 그 내용물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첫째날은 ‘빛’이 만들어주기고 그 창조된 빛을 지키기 위한 용기(容器)로서 등장한 것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3장에 들어가면 인간들은 이미 악마의 심성을 담는 용기, 즉 그릇으로 활동당합니다. 그것이 바로 ‘나 중심의 스토리’로 장식된 자기 인생을 살게 되는 겁니다. 

즉 ‘나의 날’에 담길 내용물들을 채워넣기 위해 성경을 펼치기 온갖 좋아보이는 개념들을 다 쏟아붙습니다. 이는 강한 집착을 낳습니다. 즉 “절대로 악에게 지지않고 악마에게 속아넘어가지 않을래”라는 각오를 보이게 됩니다. 하지만 ‘속지 않겠다는 방식’으로 더욱더 속게 됩니. 

왜냐하면 끝까지 ‘자기를 위한 시간’, ‘자기를 위한 날들’을 고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게 드릴 마일리지를 놓지를 못합니다. 이런 미래는 주님의 세계가 아니라 자신의 세계입니다. 이것을 ‘자아동일성의 귀환’이라고 합니다. 모든 예언은 주님에 의해서만 달성되었습니다. 

구원의 날, 은혜의 날은 이사야 49:8에 나오는 예언입니다. 이 예언의 성취자는 다윗이 아니라 예수님 뿐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예수님에게 다 맡겨야 합니다. 마치 발포산 정제를 물에 타게 되면 그 모든 형체가 분해되듯이 말입니다. 행함이 아닙니다 느끼세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의 날을 놓치지 못해 종교에 탐익하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

 이근호17-04-11 05:49 

231강-고후 6장 1-2절(구원의 날)17040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후서 6장 1-2절입니다. 신약성경 291페이지입니다. 

  

고린도후서 6:1-2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여기 때가 나오고 날이 나오거든요. 이 날이라는 것이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하루 이틀 사흘 그 날을 말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날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는 너의 날, 나의 날이 따로 구분이 안 되고 전부 다 같은 시간대에 같이 살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물건은 내 물건이 있고 네 물건이 있지만 시간은 네 시간 내 시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동일한 해가 뜨고 해가 지고, 거기에 다 같이 종속되어서 살고 있습니다. 

  

구원이라는 말은 갇혀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는 뜻이거든요. 갇혀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구출, 구원이라는 것이 의미가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동일한 태양 밑에서, 동일한 별과 달밑에서 동일하게 몽땅 다 갇혀 있는 형국이다, 그런 뜻입니다. 같은 시간을 느끼십니까, 그러면 같이 갇혀 있습니다, 라는 뜻이에요. 

  

같은 태양을 보고 하루를 보내십니까, 그러면 똑같이 여러분은 구출되지 아니하면 멸망되는 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지요. 이것은 개개인의 어떤 역량이나 실력이나 기술, 재력, 인품, 인격, 그런 구별들이 구원의 날에 아무 소용이 없어요. 기도를 오래하고 오래 안하고, 교회 며칠 출석하고 빠지고, 그게 구원의 날에는 의미가 없습니다. 

  

같은 별을 보고 같은 달을 보고 같은 해를 보기에 그렇습니다. 날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왜 목사님이 해와 달과 별을 자꾸 언급하는가? 그것은 창세기 1장이 그래요.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첫째 날이니라. 창세기 1장에서 네 번째 날부터는 아침과 저녁을 누가 주관하는가? 주관하는 물체가 있어요. 

  

해가 뜨면 낮이 되고 해가 지면 밤이 되는 겁니다. 넷째 날부터는 하루, 1년, 2년, 이것을 따로 주관하는 물체가 따로 천공에 떠 있습니다. 창세기 1장 14절에 보면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주야를 나뉘게 하라 또 그 광명으로 하여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이루라.” 이렇게 되어 있는데 이 징조와 사시, 일자, 연한, 절기, 이런 것이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라 그 목적이 따로 있어요. 

  

창세기 2장에 보면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해와 달과 별에 의해서 우리에게 표시를 해주는 그 저녁과 아침, 날이 다 목적이 있는데 그 목적은 어디서 다 이루어지느냐 하면, 일곱째 날 안식하면서 그것이 다 이루어지는 거예요. 무슨 말인지 모르시겠지요? 

  

인간 너는 빠져라, 그 말이지요. 인간은 빠지고 이 세상이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 것, 그것을 하루, 오늘 본문에서 날인데, 그 날 자체로서 목적이 완료되는 것이 아니고 그 날은 어떤 목적을 지향하는데 그 날이 일곱 번을 반복해요. 일곱 번 반복하면서 그 일곱 번째 되는 날이 안식일입니다. 

  

그 안식일이 무슨 날이냐? “하나님이 친히 홀로 천지 만물을 만족스럽게 이루었습니다.”라고 날로, 날짜로 표시하는,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로 표시하는 그런 것을 흘러가는 시간에다가 새겨 넣은 거예요. 안식일을 새겨놨다는 말이지요. 이걸 알려면 일단 인간은 빠져야 돼요. 

  

인간이 일하다 보니 너무 피곤한데 하나님께서 인간 좋으라고, 피곤 풀라고 일요일을 만들었다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서는 안 됩니다. 무슨 해가 인간을 위해서 있고 달이 인간을 위해서 있습니까? 별이 인간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에요. 인간을 위한다면 별이 너무 멀어요. 별이 좀 가까이 왔으면 좋겠어요. 

  

해와 달과 별은 인간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안식일을 위해서 있고

안식일은 하나님이 자기가 한 작품을 보고 “작품 좋다.”

스스로 자기만족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이 목적과 생각을 같이 해야 돼요.

해와 별과 달과 생각을 같이 해야 됩니다. 

  

우리가 나타나고 사는 이유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대해서 만족스럽다는 증거물로 살려고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난 겁니다. 나는 너를 보니 왜 그리 만족스러운지, 라는 반응을 주께서 가져갈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창세기 1장 2장에서 안식일을 만들었는데 우리들의 생각이 짧은 것이 뭐냐? 

  

그렇게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고 모든 것이 만족스러우면 성경은 한 페이나 두 페이지만 있으면 돼요. 천지창조 이야기하고 그 다음에 안식일 이야기만 하게 되면 더 이상 성경은 필요치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했습니다. 창세기 1장 2장에서 성경은 그것으로 끝나야 돼요. 

  

끝나야 되는데 성경은 3페이지, 4페이지 계속 넘어갑니다. 이것은 무슨 이야기를 담으려고 있느냐는 말이지요. 그렇게 보기에 좋았다면 그걸로 죽 가면 될 텐데 뭐 때문에 3장 4장의 이야기가 계속 나와야 되는가? 1장 2장에서 아직 나타나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들 이야기에요. 

  

예수님 이야기가 안 나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안식했다, 하는데 안식할 때 누구랑 안식했느냐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창세기 1장 26절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는 하나님이 한 분 인줄 알았는데 갑자기 여기에 우리의 형상대로, 해서 한분이 아닌 걸로 나타나요. 

  

한분이 아니라면 하나님이 누구와 더불어서 하나님이라고 통합된 개념을 사용했는지 그것은 창세기 3장, 4장 죽 가서 요한계시록까지 다 나와야 됩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지만 한 분으로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그 하나와, 우리가 죄짓고 난 뒤에 하나라고 하는 그것과 하나님이 사용하는 그 하나가 숫자는 같은 1이지만 거기에 담긴 뜻을 우리는 몰라요. 

  

모르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틀려버려요. 창세기 2장 24절에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 할 때 둘이라는 숫자를 쓰면서도 한 몸이 되는 거예요. 2가 1이 되는 겁니다. 2가 1이 되지 말고 아예 처음부터 1로 하든지, 다시 말해서 남녀의 성을 구분하지 말고 한 몸에 양성을 하든지 그렇게 해야 되는데 남자와 여자 두 사람이라고 분명히 되어 있어요. 

  

2장 25절에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사람은 두 사람인데 이걸 한 몸으로 바꾸는 그 이유가 뭐냐? 그 이유를 파헤치는 가운데서 하나님에 대해서 소개를 하는 거예요. 소개했던 그 최종결론이 뭐냐? 하나님께서는 천지창조 할 때 혼자 창조한 것이 아니고 다른 분과 같이 창조했다는 것이 잠언 8장에 나옵니다. 

  

내가 천지를 창조할 때 내 곁에 지혜가 있어서 나는 지혜와 의논해서 천지를 창조했다. 그 이야기를 왜 인간보고 합니까? 너희들이 이것을 알아야 하나님의 만족에 같이 만족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제가 설교 시작하고서 줄곧 사람 이야기 안했지요? 지금 하나님 이야기만 한 거예요. 

  

그래야 되는 겁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장에 뭐라고 했느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그 뒤에 나오는 말씀이 굉장히 이상하지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갑자기 하나님이 한 분 인줄 알았는데 한 분이 두 분으로 갈라졌어요. 

  

이거 몰랐징, 그런 뜻이라는 말이지요. 이거 너희들은 상상도 못했지, 그런 뜻이에요. 마치 옷 갈아 입는 마술 같아요. 옷을 하나 입고 나왔는데 금방 옷이 바뀌었어요. 기네스북에서 세계신기록이 1분 만에 16벌을 갈아입는다는 거예요. 1초밖에 안 걸리는데 옷이 달라져요. 짠 하고 다른 원피스 입고 짠, 하고 다른 원피스 입고. 

  

하나님스스로 마술을 부립니다. 너희가 생각하는 하나님은 한 분이지? 천지를 만들었다고 생각했지? 짠, 아니거든. 이렇게 또 하나님이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우리 쪽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걸 우리 쪽에서 왜 알아야 됩니까?” 

  

하나님을 한 분으로 만들든 두 분으로 만들든 하나님이 우리가 필요한대로 도와주면 그만이지 하나님이 한 분이냐 두 분이냐를 왜 꼭 알아야 됩니까, 라고 물으면 하나님을 아는 것이 영생이기 때문에 그래요. 요한복음 20장에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영생이기 때문에. 또는 요한복음 17장에 겟세마네 기도에 나옵니다. 

  

하나님과 그 아들을 아는 것이 영생이라는 말이지요. 그 말은 뭐냐? 영생이라는 것은 그냥 주는 것이 아니고 영생이라는 것을 주면서 하나님께서 천지창조 했던 그 목적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합세를 해줘야 돼요. 그 목적하는 것이 뭐냐? 나는 아들을 주로 만들기 위해서 천지를 창조했다는 겁니다. 골로새서 1장 16절에서 18절. 

  

천지모든 것은 그 아들을 위하여, 아들로 말미암아, 그리고 그 아들이 친히 우리를 창조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아들이 우리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창세기 1장과 2장에서 처음부터 집어넣으면 되지 않느냐? 그런데 아들이 주가 되는 데는 뭐가 필요 하느냐 하면, 사람이 필요해요. 

  

사람이 필요하고, 사람만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죄를 지어줘야 돼요. 그래서 창세기 2장 다음에 3장이 나와서 뱀이 또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주 되심은, 아들은 아들인데 그 아들이 주가 되심은 필히 사람이 필요하고 여기에 또 소품으로 악마가 필요합니다. 뱀이 필요해요

  

그래서 인간과 뱀이 짝짜꿍이 되어서 하나님이 따먹지 말라고 한 것을 따먹어야 돼요. 따먹으면 거기서 생산되는 것이 뭐냐 하면, 이 지상에 저주가 나오고 그 저주, 죽음이 보편화되는 겁니다. 보편화되면서 하나님의 아들의 주 되심은 하늘에서 주가 되는 것이 아니고 이 지상에서 고생고생 하면서 주가 되는 겁니다. 

  

고생을 하는데 그 고생도 파트너가 있어야 돼요. 고생시키는 파트너, 나쁜 배역을 맡은 자가 있는데 그것이 창세기 3장 15절에 보면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라고 해서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나오면서 세상의 이 모든 스토리, 역사는 이미 그 핵심부분이 꽉 채워져 있습니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에요. 

  

여기서 인간은 일체 끼어들지 못합니다. 여자의 후손은 예수님이고 뱀의 후손은 악마기 때문에. 뱀과 여자와 싸우는 게 아니에요.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과 싸웁니다. 그 말은 뭐냐? 여자와 뱀이 싸우는 것 같으면 여자가 산에 올라가서 뱀 다 잡아야 돼요. 

  

그렇지 않고 후손끼리 싸운다는 말은 그 앞서서 있었던 모든 여자를 여자 되게 했던 그 끄트머리에 나타나는 원천적인 분, 그분을 여자의 후손이라고 하고, 뱀의 후손이라는 것은 이 땅에 모든 악한 짓은 다 하게 만드는 그 오야붕, 주동자가 뱀의 후손, 그 끝에 나타날 때, 여자의 후손과 함께 나타날 때, 그게 사탄입니다. 악마가 나타나는 겁니다. 

  

역사는 그 둘의 전쟁터고 싸움터고 투쟁의 현장이에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게 되면 또 인간은 빠져요. 그러니까 인간은 할 게 없어요. 저희 둘이 싸우는데 인간이 왜 낍니까? 여자의 후손도 속하지 않고 뱀의 후손도 속하지 않는 쪽에서는 그냥 저쪽 싸움에 동원된 들러리에 지나지 않아요. 

  

보조, 그것을 사자성어로 '시다바리'죠. 우리 인간이라는 게 저쪽 하는 일의 시다바리일 뿐이에요. 이런 이야기가 잘 안 믿겨지지요. 하나님은 한 분이 아니고 두 분이라는 것에서 시작해서 하나님이 또 하나님을 주로 만들기 위한 작업으로서 이 세상을 만들었다. 그 작업의 소품으로 악마가 들어가고 인간이 만들어졌다. 

  

그래서 인간이 우선이 아니고 하나님은 자기 아들이 우선이에요. 저의 이런 이야기가 듣기에 상당히 민망스러울 수 있는데 아까 우리가 보았던 교독문 15번 시편 51편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다윗이 밧세바와 간통했고 밧세바의 남편을 죽였습니다. 

  

그러면 누가 봐도 다윗이라는 개인이 밧세바와 우리야 장군을 죽인 것으로 되어 있어요. 사람이 사람들에게 죄 지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선지자가 와서 내막을 이야기해줘요. “너는 밧세바와 간음했고 그 남편을 죽인 것으로 그렇게 알고 있는 모양인데 너는 잘못알고 있는 거야.” 이렇게 나단 선지자가 와서 제대로 일러줍니다. 

  

너는 주께만 범죄 했다는 거예요. 너는 사람에게 죄지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게만 죄지었다. 하나님에게만 죄 지었고 인간에게 죄지은 것이 아니고 주께만 죄를 지었는데 문제는 그 하나님이 네가 아는 그 하나님이 아니고 주께, 주님한테 죄를 지었다는 거예요. 

  

이게 성경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이에요. 하나님이여 우리 죄를 용서하옵소서, 하는데 인간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에게는 인간이 죄 짓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어요. 이게 제 의견이 아니고 욥기에 나오는 겁니다. 욥이 하는 이야기에요. 아무것도 아닌 버러지 같은 인간이 죄 좀 지었다고 하나님이 하는 일에 무슨 영향력이 있겠습니까, 그렇게 기도하는 대목이 나와요. 

  

쉽게 말해서 우리는 누구한테 죄 지은 적이 없어요. 다윗이 알고 있는 바는 우리가 누구한테 죄 지은 적이 없고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해서 우리를 이용한 거지요. 어 다르고 아 달라요. 어 다르고 아 다르다니까! 무슨 죄에 대해서 회개할 것이 있어요. 반성할 것 없어요. 반성하면 인간이 더 나을 줄 압니까? 

  

회개라는 것은 우리가 아는 죄에 대한 회개를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내가 주인공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회개에요. 내가 이 세상 중심이 아니라는 것. 설교 다시 해 드릴까요? 여인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싸우는데 우리는 거기서 나가 있어야 돼요. 애들은 가라, 애들은 가! 우리는 그 중심부를 차지할 수가 없어요. 

  

주님께서 우리를 이용했는데 죄로 하여금 인간을 활용하도록 허락하시고 허락하고 난 뒤에 그 뒤에 누가 오느냐? 그 뱀을, 그 악마를, 죄짓게 한 악마를 처단할 주님이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원수 편에 한통속이 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통보를 해주는 거예요. 성령을 통해서, 나단선지자를 통해서. 

  

그것을 알고 난 뒤에 다윗이 하는 말이, 내가 주께만 범죄 했다, 라고 하고 주께만 범죄 했다는 이 말은 주께만 범죄 하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누구를 보내셨는가? 다윗의 어머니를 이 땅에 먼저 태어나게 하신 거예요. 그래서 거기 보면, 모친의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그 앞에,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내가 어떤 산부인과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이게 아니고, 해운대산부인과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이게 아니고 나는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고향은 합천이냐 김해냐가 아니고 광주가 아닙니다. 우리의 고향은 죄에요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이제는 엄마도 날아 가버려요. 엄마는 그냥 죄악 중에 출생함을 표시하는 하나의 수단, 기구, 기계에 지나지 않지요. 애 낳는 기계. 엄마라는 여자가 동원되었고 사실은 죄 중에 태어난 거예요. 이로서 다윗은 인간의 모든 그 물질적인 그 배후까지 성령을 받아서 질주하게 이르게 된 겁니다. 

  

다윗의 인식이 눈에 보이는 것 말고 보이지 않는 그 배후세력까지 들어서게 된 겁니다. 그래야 이스라엘 왕다워요. 그게 이스라엘 왕 다운 겁니다. 다윗이 간음죄나 살인죄 짓기 전까지는 같은 인간끼리의 백성들 중에서 너는 백성이고 나는 왕이라고 생각한 거지요. 아닙니다. 그는 특수한 배역을 맡았어요. 

  

죄를 통해서 비로소 아무도 가보지 못한 세계, 진짜 인간의 고향, 죄 중에서 모든 인간이 나타났다는 것. 이제는 아담도 떨어져 나가요. 아담도 아니고 죄 중에서 태어난 거예요. 그래서 그 사실을 이스라엘 왕인 다윗에게 알려주지요. 그것을 누가 아는가? 다윗의 아들인 솔로몬이 압니다. 

  

잠언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잠언 25장 2절, 3절에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 하늘의 높음과 땅의 깊음 같이 왕의 마음은 헤아릴 수 없느니라.” 그 다음 5절, 6절에 “왕 앞에서 악한 자를 제하라 그리하면 그 위가 의로 말미암아 견고히 서리라 왕 앞에서 스스로 높은 체 하지 말며 대인의 자리에 서지 말라.” 

  

이렇게 해서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광입니다. 일을 살피는 것이 왜 왕의 영광이냐 하면, 왕이 일을 살피는 안목은 백성들이 왕의 진짜 마음을 아무도 알아채지를 못한다는 겁니다. 여기서 말하는 왕이라 하는 것은 이 세상나라 왕 말고 이스라엘의 왕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왕을 한자로 주라고 합니다. 그래서 나사렛 예수 앞에 뭐가 붙느냐 하면, 주 예수에요. 나의 왕이시여.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고, 그렇게 숨길 때 영광스럽고 왕의 일은 아무도 알지 못하는 숨어 있는 것을 오직 하나의 통로, 왕을 통해서만 이 땅에 드러내시는 그것이 숨어 있는 하나님의 일관된 일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왕은 독점한 거예요. 하늘나라의 모든 비밀을 왕이 독점했지요. 독점한다는 것은 뭐냐 하면, 왕하고 의논하거나 왕에 대해서 어떤 의견을 개진하지 말라는 거예요. 뭣도 모르면서 까불지 말라는 그런 뜻입니다. 그때는 어떻게 하느냐? 맡겨야 되지요. 

  

맡기는데 마지막 때에 오시는 그 왕이 옴으로서 창세기 1장에 이야기한……, 참 이런 이야기가 이해되는지 모르겠지만 그냥 저는 막 가겠습니다.

창세기 1장의 시간은 하나님의 일의 만족도를 위해서 시간이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 땅에서 오직 하나님만 아시는 그 뜻을 독점해서 왕이 나타나게 되면

시간은 어디로 쏠려 가느냐 하면, 그 왕이라는 인물 주위를 뺑뺑 돌면서 거기로 쏠리게 되어 있어요. 
그렇게 쏠리게 되어 있고 그 왕이 마지막이라고 선언해 버리면

그게 바로 구원의 날이고 은혜의 날이에요.

그런데 창세기 3장이 있지 않습니까? 창세기 3장에 이미 인간들이 범죄 해 버렸어요. 인간이 죄지었다 하는데 아까 설교할 때 인간은 죄 지을 수 없다고 했지요. 인간은 죄 지을 수가 없어요. 

  

죄가 인간을 사용하는 것이지 인간이 뭔데 지가 죄를 지어요? 지가 죄에 대해서 알아요? 몰라요. 모르기 때문에 죄짓는 것도 몰라요. 이미 인간은 죄지었기 때문에 에덴동산의 생명나무 못 따먹도록 하나님께서 억지로 차단시켜 놓았습니다. 근처에도 가지 말라고. 

  

정말 이런 이야기가 귀신 씨나락 까먹는 이야기로 들릴 것 같아요. 약간 걱정은 되는데 내가 걱정할 문제는 아니고요. 창세기 3장에서 인간들이 등장하면서 그 다음부터 인간들은 뭐냐 하면, 나를 위한 시간이 시작됩니다. 그게 추억이고 기억이라는 겁니다. 아름다웠던 그 때 그것을 가지고 마음속에 앨범을 작성합니다. 

  

자기를 위한 스토리가 돼요. 역사가 만들어져요. 예를 들어 어릴 때 초콜릿이 왜 그리 맛있는지. 누가 초콜릿을 구해 주게 되면 두 가지 타입이 있어요. 하나는 맛있다고 금방 먹는 타입이 있어요. 상당히 적극적인 인생이지요. 저 같은 경우에는 천하에 쫀쫀한 인간이잖아요. 두고두고 아끼다가 나중에는 잊어버려요. 형님이 뺏어먹고 삼촌이 뺏어먹고 그랬는데. 

  

인간의 시간에 두 가지 타입이 있어요. 얼른 인생을 빨리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 인생을 빨리 살아요. 세상의 정보를 알아서 젊을 때 온 투자를 거기에 다 해버립니다. 인생 뭐 있어 한 방이지. 그렇게 해서 열심히 살아요. 그런데 나중을 기약하면서 포트폴리오다 펀드다 해가면서 내가 늙었을 때 계산해 가면서 사는 사람이 있어요. 

  

초콜릿 남겨두고 조금씩 빨아먹고 다시 넣어놓고, 그런 타입이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둘 다 뭐냐 하면, 자기를 위한 시간입니다. 이 자기를 위한 시간 이 타입을 가지고 그 다음에 어디로 가는가 하면 교회로 와요. 교회에 와가지고 예를 들어 오늘 본문 같은 경우에, 은혜의 날이고 구원의 날이다. 

  

구원의 날이 있다고 하니까 천국이 있다는 것을 알았거든요. 천국 가기 전에 차근차근 목사가 시키는 대로 십일조 하고, 선교할 것 선교하고, 선교비 내고, 봉사하면서 마일리지를 쌓는 겁니다. 쌓고 또 쌓고, 이러면 나중에 상급 받겠지, 예수 믿었으니 천국 가는 것은 기본이고 보너스는 자기가 행한 대로 받는다고 했으니까 상급 받겠지, 이렇게 하는 거예요. 

  

천국을 자기를 위한 포상휴가로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시간이 마귀가 심어준 속임수라면 어떻게 하렵니까? 교회에서 말하는 구원의 날, 은혜의 날이 속임수라면. 구원의 대상자가 자기 자신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것은 예수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 거예요. 

  

교회에서 목사가 본인이 사기인지도 모르면서 그저 예수 믿으면 구원의 날에 구원받습니다, 이렇게 하니까 기다리는 겁니다. 심지어 요한계시록 들춰서 언제 예수님이 오시는가, 핵전쟁이 일어나고, 이스라엘이 마곡하고 붙어야 되고, 트럼프가 나타나서 세계은행을 어떻게 하고, IS가 어쩌고, 이슬람하고 붙어야 된다는 둥, 그러니까 빨리 교회에 돈 내서 단체로 방주 만들고 생수와 건빵 준비하자는 겁니다. 

  

재산 다 바쳐가지고. 구원의 방주를 만든다고요. 라면, 건빵, 생수 준비하고 그거 누가 훔칠까봐서 기관총까지 준비하고 무전기 준비하고. 아들딸 사위만 챙기는데 사위는 삐져서 안 오고, 아들 딸 불러 모아서 “급하게 되거든 내가 준비한 벙커가 있으니까 핵전쟁이 일어나서 세상없어질 때 거기서 살자.” 

  

“그게 어디에 있는데 엄마?” 뉴질랜드에 몇 군데, 캐나다에 몇 군데, 티벳에도 있고 아마존은 너무 더워서 그렇고 뉴질랜드 괜찮고 캐나다 약간 추워도 괜찮고요. 미국의 아주 은밀한 그런 곳에. 

  

이게 자기가 스스로 자기를 구원하겠다는 겁니다. 그러나 인생은 그렇게 쉬운 게 아니에요. 여러분이 자식을 키워보세요. 자식 키우는 부모가 소망이 뭐냐 하면, 자식 낳고 얼른 키우고 싶어요. 2살까지는 봐준다, 이런 식으로. 2살만 되면 어린이집 보내야지. 이렇게 후딱 키우고 싶은데 자식을 키워보면 맨 날 큰소리는 쳐요. 

  

대학만 들어가면 내 손 뗀다. 공납금만 대줄테니 나머지는 네가 아르바이트해라, 하지요. 졸업하면 네가 알아서 취직해라. 취직했다. 결혼까지는 봐준다. 애 하나까지는 키워줄게. 둘까지는 키워줄게. 끝도 없어요. 자식이 부모를 새로운 자아로 만들어냅니다. 내가 자식을 키우는 게 아니에요. 자식이 나를 키워요. 진짜 자아를 뽑아내는 거예요. 자식이 나를 뽑아내요. 

  

하나님이 왜 자식을 주시는 겁니까? 너는 모른다는 거예요. 자식과 마주치고 부딪히고 충돌하는 가운데서 자식의 날과 내 날이 너무 차이가 나는 거예요. 인간은 각자 자기 날밖에는 몰라요. 자기 날 밖에 모르니까 성경을 봐도 자기 날을 구축해놓고 거기다 성경의 좋은 문장, 좋은 구절 외워서 다 집어넣는 거예요. 누굴 살리기 위해서? 내가 나를 살리기 위한 방법으로. 

  

그게 무슨 은혜입니까? 행함이지요. 자기행위의 날이지요. 행위의 역사고. 그런데 말입니다. 이런 행위를 하다보면 행함은 내가 극복할 수 있는 목표를 가지고 극복을 해나가요. 국가가 어렵다. 이민 갈 준비하면 돼요. 문재인 뽑아서 북한하고 사귄다. 그러면 소위 태극기 부대는 이민 갈 준비하면 됩니다. 

  

북한의 공산당이 설치는 세계에서는 내가 못살겠다. 내가 공산당과 얼마나 싸웠는데. 나는 못산다. 필리핀 가면 권총 맞을 것 같아서 안 되고 인도네시아는 좀 더운데 어디 없나? 자기 살 궁리만 하면 되는 겁니다. 설교에서 정치 이야기 하면 안 되는데. 지난 수요일에 괜히 흥분했어요. 

  

우리교회 오는데 옥수수박사 대통령후보로 나온다는 벽보 보고 내가 약간 이성을 잃어버렸어요. 지나 개나 대통령 다 나온대요. 구원의 날이라고 할 때 인간은 자기 자신을 자기가 관리한다고 생각하잖아요. 하지만 극복될 수 있는 것,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사람이 오기로 해결을 해요. 국가문제, 경제문제, 병듦의 문제, 이건 병원에서 고치면 되니까. 

  

가난의 문제는 열심히 해서 돈 벌면 해결이 되니까. 그런데 정작 인간 자기 자신은요, 극복될 수 없는 문제에 있어서는 인간은 누군지도 몰라요. 다시 말해서 내게 극복될 수 없는 문제가 주어졌을 때 우리는 어떤 해답도 나에게 갖고 있지 않는 겁니다.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잠언서 19장 14절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집과 재물은 조상에게서 상속하거니와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느니라.” 전에 주례에서 이 대목을 했어요. 5월 6일의 결혼식에서는 이 대목 안합니다. 12시 반에 하는데 장소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집과 재물에 대해서는 이미 우리가 해결하고 극복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고 우리가 예상한 거예요. 

  

그러나 여호와의 개입은 우리가 생각 못한 겁니다. 그래서 저는 말합니다.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철학에서 말하는 것이고

인간은 육체와 유령으로 되어 있습니다.

육체는 죽어도 유령은 영원합니다. 인간은 육체와 괴물로 되어 있어요. 
괴물은 뭐냐 하면, 자기 명석함과 총기와 지혜로

철저한 자기방어책을 늘 형성하라는 겁니다.

왜? 그 안에서 나의 날이 성사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나의 날의 내용을 채워야 되기 때문에.

쉽게 하겠습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할 때 한 날이 성사되려면 반드시 그 내용물이 충족되어야 돼요. 창세기 1장에서. 

  

빛이 있으라 해서 빛이 있음에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거든요. 빛이 없으면 첫째 날이 성립되지 않아요. 반드시 어떤 내용물이 있어요. 그걸 누가 흉내 내는가? 마귀가 흉내 내서 그것을 인간에게 그대로 집어넣어 준 거예요. 인간이 자기 인생, 자기구원, 자기천국, 자기영생, 자기하늘나라 만들기 위해서 자기인생의 터를 만들어놓고 거기에다 온갖 각양 좋은 것은 다 집어넣어요. 

  

전도, 선교, 기도, 철야예배, 성경공부, 목사섬기기, 교회섬기기, 온갖 것 다 집어넣고 그것을 가지고 어디에다 상납하느냐 하면, 하나님께 바치면서 받으소서, 그러고 있다는 말이지요. 그걸 받으라는 거예요. 내가 이만큼 철저하게 나를 관리해 왔다는 겁니다. 이것은 주의 날이 아니에요. 자기의 날이에요. 

  

무슨 은혜가 필요합니까? 자기구원의 날이지요. 구원의 역사라는 말이지요. 그래서 그 구원의 역사는 열 살 때나 스무 살 때나 똑같은 나를 중심으로 하기 때문에 그것은 내용이 동일합니다. 그것을 어려운 말로 동일성의 회귀라고 해요. 영겁회귀. 같은 것들이 반복해서 나에게 찾아온다는 겁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의 날은 주의 날이에요. 우리의 날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 1장 12절부터 보면, “ 몸을 돌이켜 나더러 말한 음성을 알아보려고 하여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같고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그 오른손에 일곱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이 세상에 이런 인물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하세요. 이런 모습을 두고 지난 울산강의에서 어벤져스라고 표현했어요. 생소한 언약 맨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완성시킨 주님이 이런 모습으로 등장해요. 사도요한은 예수님의 얼굴을 알아요. 함께 했기 때문에. 하지만 이 모습보고는 깜짝 놀라서 얼굴도 못 들고 엎어져 있었어요. 

  

그분의 날이 무슨 날이냐? 주의 날입니다. 이 세상 돌아가는 것이 나의 날이 아니었어요. 이 모든 일어나는 일이 사적인 구원을 채워주는 날이 아니에요. 이 세상 모든 일어나는 일은 주님의 날이에요. 세상의 모든 날, 4월 7일, 4월 8일, 4월 9일, 다 주의 날이었습니다. 

  

4월 10일도 마찬가지고. 나의 날이 없어요. 그러면 왜 주의 날을 몰랐는가? 마귀가 철저하게 안에서 방패로 담을 쌓았던 거예요. 성을 세운 거지요. 성을 세워놓고 그 안에 가두어놓고 그것을 타인에게 밀어붙이는 겁니다. 나의 동질성에 네가 동의해라, 이런 식으로 밀어붙이는 거예요. 

  

이 집안에서는 아버지가 어른이다. 자식들과 부인은 내 말을 들어야 돼. 이게 가부장 제도라는 거잖아요. 그게 뭐냐? 자기를 위한 가정이라 여기고 무조건 내가 시키는 대로 해야 가정이 편안하다는 겁니다. 그 가정은 자기가정이에요. 그렇게 애들이 교육받았으니까 애들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사는 거예요. 

  

자기 이름이 있더라도 자기 이름으로 안 살아요. 아버지의 이름으로 사는 겁니다. 내가 이런 짓을 하게 되면 아버지의 가문의 영광을 가리고 아버지의 이름을 훼손하게 될 거야. 사법시험 합격한다면 그걸 보지 못하고 돌아가신 아버지의 묘지에 찾아갑니다. 소주하고 마른오징어 사가지고 가서 뿌리면서, “아버지여, 이런 좋은 날을 기대했건만 왜 하필 합격 2주전에 돌아가셨습니까?” 헉헉 울면서 “여기 제가 사랑하는 여자 데리고 왔습니다.” 하고. 

  

돌아가는 인생이, 자기라고 여겼던 그것이 더 나아가서 남에게 보여주기 인생, 보여주려고 하는 인생이에요. 아버지가 나에게 그렇게 기대 걸었잖아요. 나는 기대에 부응했습니다. 그 아버지의 연속성에 뭐가 있느냐 하면, 하나님이 있어요. 

  

“하나님, 이 악한 세대에서 어려서 세례 받고 지금껏 이렇게 착실하게 악에 물들지 않고, 어둠에 물들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으면서 거룩하게 거룩하게,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해서 그렇게 거룩하게 살았습니다. 보시옵소서.” 그러고 있다는 말이지요. 

  

그것은, 그 짓거리는 마귀에 속아 넘어간 거예요. 마귀의 전략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속지 않으려는 자는 반드시 속게 되어 있는 전략. 속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더욱 더 속아 넘어가는 거예요. 맡길 이유가 없기 때문에. 안속기만 하면 구원받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신천지에 안속아 넘어가고, 안상홍에 안속아 넘어가고, 이단들에 안속아 넘어가면 구원받는 줄 아는 겁니다. 안속아 넘어가려고 하니까 자기도취에 빠지는 거예요. 오늘도 이단을 이기고 정통보수에 복음까지 알았으니 얼마나 나는 대견하냐. 자기가 스스로 자기를 쥐고 있으니 이걸 맡길 수가 없는 겁니다. 

  

여러분이 남에게 맡긴다는 기적인 거예요. 맡기는 것은 불가능한 거예요. 예를 들어서 돈이 한 10억이 있다. 그런데 금리가 자꾸 내려가는 거예요. 지금 제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농협에 가니까 이자 2프로 준다는 거예요. 다른 데 가면 2.1프로 준다는 거예요. 새마을금고 가니까 2.3프로 준다는 거예요. 

  

농협에 있던 돈 싹 빼서 새마을금고로 옮기려는 찰나, 지점장이 나와서 꼭 그러셔야 됩니까? 직원들하고 말리는 거예요. “새마을금고 리스크가 큽니다. 위험부담이 만만치 않습니다. 안전한 게 좋습니다. 그래서 옛날에 신용금고가 날라 갔습니다.” 맡길 데가 없어요, 맡길 데가! 

  

꼴랑 돈 10억 맡기는 것도 그렇게 벌벌 떨어가면서 이거 날라 가면 노후고 뭐고 끝나는데, 이렇게 하는데 우리의 영혼을 맡길 데가 없어요, 우리의 영혼을. 오늘 본문은 이야기합니다. 이미 주의 날이라는 말이지요. 이미 주의 날인데 주께서 은혜의 날이고 구원의 날이라는 겁니다. 

  

주의 날이라는 것이 이사야 49장 8절에 나와 있어요.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은혜의 때에 내가 네게 응답하였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왔도다 내가 장차 너를 보호하여 너로 백성의 언약을 삼으며 나라를 일으켜 그들로 그 황무하였던 땅을 기업으로 상속케 하리라.” 

  

거기 보게 되면, 내가 너에게 응답하사 완전히 너의 날로 확정지어 줄게, 라는 것이 예언되었고 그 말씀대로 예수님께서 오셔서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습니다. 농협은 5천만 원까지는 봐주는데 그래도 9억 5천만 원이 날라 가잖아요. 믿을 수가 없어요. 이사야 49장 8절 다시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은혜의 때에 내가 네게 응답하였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왔도다.” 응답하였고 도왔도다, 그 증거가 뭐냐? 죽은데서 사흘 만에 부활한 거예요. 이것은 아무에게나 주어진 응답이 아닙니다. 죽은데서 사흘 만에 부활해서 성령이 왔기 때문에 예수님의 열두 제자가 구약을 설명할 때 구약에서 구약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복음을 통해서 이사야 49장을 다시 재해석해요. 

  

재해석해서 여기에 유일하게 응답받은 분은 이사야가 아니고 예수님이라는 겁니다. 아, 이 모든 것이 주의 날이구나.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할까요? 오랫동안 기차를 타게 되면 밤에 쥐가 나요. 쥐날 때는 어떻게 하느냐? 마그네슘을 물에 타면 분해가 되는데 그 물을 마시면 마시고 난 뒤에 1초, 2초, 3초 만에 쥐가 풀려요. 

  

물이 목 밑 정도까지 내려간 것 같은데 벌써 쥐난 것이 풀려요. 내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그걸 발포산이라고 해요. 주의 날에 성도는 물에 탄 발포산 되면 되는 거예요. 그래서 뭘 하지 마시고 느끼세요. 뭘 느끼는가? 내가 분해되는 것을 느끼세요. 이 세상에 나의 행함도, 나의 의로움도, 나의 착함도, 나의 날, 내 구원을 위해서 시도했던 그 모든 마일리지가 다 주의 피 안에서 보글보글 올라오면서, 물방울이 튀기면서, 이 딴 거 필요 없어. 네 피, 네 행함, 네 공로, 네 땀, 네 순종, 네 은혜 다 필요 없어. 이미 주께서 마귀에게 승리했으면 이제부터는 맡기면 되는 겁니다. 

  

농협에 맡기지 마시고 새마을금고도 믿을 것이 못돼요. 그냥 여러분의 그 모든 것을 주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그동안 나는 나에게 맡겼는데. 여러분에게 맡긴 것이 아니고 마귀에게 맡겼지요. 마귀는 자꾸 그러는 거예요. 네가 너를 관리안하면 너를 관리할 자가 없으니까 리스크, 위험부담이 없는 쪽에 가서 스스로 너를 지켜라. 

  

그러니까 절대적인 자기방어, 자기사수, 그것만 남았어요. 독선과 자기에 대한 집착이 교회 다니면 다닐수록 점점 더 강렬해져요. 목사 장로 집사 되면 될수록 점점 내가 이정도야 하는 것을 계속 지켜야 되는 거예요. 오늘 설교제목은 발포산입니다. 뽀글뽀글! 물에 가라앉는 순간 그게 물에 다 녹아져버리지요.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습니다. 물 안에서, 주 안에서 그리스도의, 주의 날을 증거 하는 하나의 증거물로 살아갑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피 안에서 의의 증인입니다. 의에서 태어났기에 의의 증인으로 살아갈 수가 있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성경대로 보이지 않으니 탈이 많습니다. 처음부터 나만 쳐다보고 살다가 우연한 기회에 교회 와서 성경을 봤지만 백날 보니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다 찬란한 내 역사, 내 잘남, 내 우수함, 내 대단함, 그것 증명하려고 얼마나 교회가 시키는 대로 마일리지 쌓았습니까? 주께서 그것 받아주는 줄로 착각했습니다. 그게 악마의 것인데, 악마의 속임수인데 그거 몰랐습니다. 이제는 십자가 앞에서 일한 것 없이 의롭게 하시는 주님의 의에 우리의 전부를 맡기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