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강-고후 6장 7-10절(반대로 살기)17042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후서 6장 7-10절입니다. 신약성경 291페이지입니다.
고린도후서 6:7-10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어 의의 병기로 좌우하고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누가? 이런 사람 누구 있어요? 우리가 보는 이 책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쓰인 책이지요. 그러면 이 성경말씀은 천국에 살 사람 뽑아내는 말씀입니다. 천국에 살 사람 뽑아내는데 땅의 사람들은 사절합니다. “오지 마세요. 와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이 성경말씀은 “오지 마세요. 그냥 땅에서 살다가 그냥 지옥가세요.”
아무나 넣어주는 곳이 아닙니다. 이론 조건에 맞아야 됩니다. 시도한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가야될 곳과 우리가 땅에서 평소에 살던 습관과 행태하고는 너무나 다르지요. 그래서 성경말씀은 이런 말씀을 줌으로 말미암아 결국은 어지간하거든 오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경험 없거든 아예 넘보지도 말라는 거예요. 예수 믿고 뭘 한다고 해서 넣어주는곳이 아니에요. 이 말씀은 사도바울이 하나의 과정을 의미하는 겁니다. 두 개의 대립되는 색다른 과정을 극단적으로 다 겪은 겁니다. 여기 보면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는 이 사도가 8절에 보면, “영광과 욕됨”이라고 되어 있지요.
영광이라는 것은 대우받는 겁니다. 칭찬받는 것이고 자랑스러운 것이고요, 욕됨이라 하는 것은 정반대지요. “저게 인간이야? 저거 뭐야?” 하고 개무시당하는 겁니다. 욕됨이라는 것은 비웃음당하는 거지요. 욕됨을 목표로 인생 살아가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지요. 영광과 욕됨이 같이 있다는 것, 이것은 우리로서는 도저히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 악한 이름이라 하는 것은 쉽게 말해서 최순실이라고 보면 되지요. 모든 사람들로부터 욕 얻어먹는, 이름만 대도 “상종하지 마.”라는 식으로 대우받는 이름이 악한 이름입니다. 그런데 아름다운 이름, 이것은 서로 친해지려고 애 쓰는 이름이죠. 그 두 개의 이름이 하나의 사도 안에 다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과정으로서.
그 다음에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너, 사기꾼이지? 요즘 사기꾼 왜 그렇게 많은지 몰라. 너 이단이지? 귀신들렸지? 어딜 사람을 사기 쳐서 속이려고.” 하는 비난과 욕설을 듣는데 그것이 하나님보시기에는 참되고. 그 다음에 “무명”이라는 것은 유명하지 않은 사람을 말하지요.
유명하다는 것은 그와는 반대로 상당히 대단한 사람을 말하지요. 그 다음에 “죽는 자 같으나” 죽기 위해서 살아가는 자 같으나, 곧 죽었으면 좋겠다 했는데 본인의 의사에 반해서, 본인의 뜻은 죽고 싶은 것인데, 죽고 싶은 것이 본인의 소망인데……, 사도바울은 빨리 죽는 것이 소망이에요.
그런데 죽지를 않네요. 그런 경험도 했어요. “근심하는 자 같으나” 세상근심은 혼자 다 하는 것 같은데 가만 생각해 보니 항상 기뻐하고요. 조울증 환자입니까? 웃다가 울었다가. 꼭 군산의 어떤 분 같아요. “가난한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개뿔도 아무것도 없어요. 돈 없어요. 그런데 남을 부자 되게 만든다는 거예요.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서로 대조가 되는 두가지 경험을 함께 공유하고 있는 사람. 정말 아무것도 없는 자의 넋두리일까요? 아니면 아무것도 없어야 구원받는다는 전략으로 드디어 아무것도 없이 사는 일에 성공한 사람일까요? 세상에서 예수님을 본받아야 구원된다는 그러한 것을 간직해서 자발적으로 이 세상에서 유배당하기를 작심한 사람일까요?
이것은 그런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에요. 털 많은 개에게 물을 뒤집어 씌우면 물 털기 하지요. 이거 물털기입니다. 털어버리는 겁니다.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할 때 속이는 자에 대한 그 의미, 그 개념에도 신경 쓰지 말고, “저 사람 보면 참 참돼. 진리만 전해.”라는 그들의 평가도 신경 안 쓰게 되는 사람.
당신은 속이는 사람이라는 그런 평가도 개털에 묻어 있는 물방울이고, 당신은 정말 사도 같아요, 라는 칭찬도 개털에 묻어 있는 물방울에 지나지 않아요. 묻어 있는 온갖 것을 털어내는 모습을 이렇게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사도바울이 구태여 우리 앞에, 자랑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여튼 자기가 경험했던 대립되는 이중성, 이 모순되는 것을 이야기했을 때 그것은, 너희들 자신은 내가 경험했던 것과 같은 지를 한번 맞춰보라는 겁니다. “내가 이렇게 성령세례 받고 주님이 찾아와서 성도로서 이렇게 살아가는 이런 체험을 했는데 여러분들은 어때요? 그렇지요?”라고 묻는 식입니다.
로마서 14장에도 비슷하게 묻는 대목이 나옵니다. 로마서 14장 7절에 보게 되면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그 뒤에 붙인다면 “그렇지요? 여러분이 지금 다 아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 뜻이에요. 잘 못 들었다면 다시 할게요.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 그런 사람들만 모였지요. 그렇지요?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사도바울이 이런 투로 지금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왜 그런가 하면 사도바울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보내지 아니하면 아무도 예수님께 올 수 없다는 요한복음 6장과 똑같은 취지에요.
하나님께서 택한 자라고 해서 딱 집어서 예수님과의 만남을 주선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그 그리운 천국에 갈 수가 없다는 겁니다. 명백합니다. 요한복음 6장의 말씀을 다시 보면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는 거지요.
가락강의에서 제가 이것을 두고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화투를 죽 치고 있습니다. 한 여덟 명에게 화투장을 죽 나눠주고 화투를 치고 있다 치면 거기서 진짜 화투를 치는 사람은 두 사람밖에 없어요.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 두 분이 화투를 치고 나머지는 그저 화투패만 쥐고 있는 거예요.
화투자체가 안됩니다. 누가 천국에 가야 되고 그리고 갈 사람은 본인의 의사와 전혀 상관없이 주님에 의해서 강제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해주는 거예요. 어젯밤 12시 48분입니다. 시간도 정확하게 기억하는데 그 시간에 저에게 질문하신 분이 있어요.
다음 세가지중 어느 겁니까? 1번, 하나님은 하나님만 사랑하신다. 2번, 하나님은 예수님만 사랑하신다. 3번은 생각이 안 나는데 비슷한 내용인데요. 성경은 뭐부터 봐야 되느냐 하는 질문이 또 뒤에 붙어 있는데. 잠이 다 달아났어요. 답변을 해야 되니까. 1번도 아니고 2번도 아니고 3번도 아니고요.
아, 3번지문은,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사랑한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한다. 이것이 맞습니까? 하나님은 예수님만 사랑한다. 이것입니까? 하나님은 자기 피조물을 다 사랑한다. 이것입니까? 1, 2, 3번 중에 분명히 정답이 들어 있는데 어느 것이 정답입니까, 라고 했어요.
제 답변은 이랬어요. “하나님은 인간을 죄인 만들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만 사랑합니다.” 그분이 질문하면서 뭘 빠트렸느냐 하면, 하나님이 인간을 죄인 만든다는 이 대목을 빠트려버렸어요. 질문이 틀리면 답은 안 나오게 되어 있어요. 질문자체가 수정이 돼야 돼요.
하나님은 날마다 우리를 죄인 만드는 겁니다. 죄인 만드는데 그 죄인 이전과 죄인 이후를 알아야 돼요.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이 한 체험은 뭐냐? 사도바울에게 두 가지 모순되는 성향이 자기 몸에 함께 있는 것은 하나의 과정입니다. 인간들이 스스로 구원받고자 하는 것과 하나님이 구원하기로 작심해놓고 예수님을 만나게 해주는 사람들의 특징, 이 둘 다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체험 해봤냐 그 말입니다. “우리는 이런 체험들을 다들 했지요?”라고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거예요. 하나님에 의해서, 성령에 의해서, 예수님을 알게 된 사람들의 그 죄라는 것은 뭐냐 하면,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이냐, 라고 따지는 것, 그 따지는 그것 자체가 바로 죄였다는 거예요.
착함과 악함의 문제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에요.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하면 구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문제는 착함과 악의 문제가 아니고 약속의 문제입니다. 오늘 설교가 진짜 짜고 치는 것인지 아까 장로님이 기도할 때부터 계속 약속 이야기가 나왔어요. 사전에 협의한 바도 없습니다.
약속이라 하는 것은 철저하게 인간이 생각하고 사고하는 모든 것을 배제하는 거예요. 인간의 사고와 그 경험은 그것이 곧 자기의 정체성, 자기의 동질성을 만드는데요. 인간이 경험하고 생각하고 몰두하고 도닦고 하는 이 모든 것이 왜 문제가 되느냐? 사람이 도 닦고 아는 그것이 자기의 지식으로 누적이 되니까 누적이 된 그것이 진리를 아는데 한계가 돼요.
내가 아는 상태에서 그 다음 것을 채택을 하게 되어 있다니까요. 뭔가 알게 되면 ‘아, 저것은 아는 것이고 저것은 내가 모르는 것이다.’ 이렇게 내가 골라잡게 돼요. 그러면 자기가 아는 것이 순수해지는 것이 아니고 점점 더 선입감으로 단단하게 굳어져버립니다. 이것은 내 구원에 필요한 것, 저것은 내 구원에 필요치 않은 것, 이렇게 내가 고르게 돼요.
예를 들면, 나는 예수 믿었다. 술 끊고 담배 끊었다. 그런데 회사에서 도둑질까지는 아니어도 뇌물을 받으라고 한다. “그래야 회사가 원활하게 돌아가니까 팀 프로젝트를 할 때는 그런 것도 같이 넘어가는 것이니 따지지 말라.”라고 했을 때 ‘저것은 신자로서 해야 될 일이 아니야. 저것은 나쁜 짓이야.’라는 기준을 내세울 때 그 기준이 나옴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은 그 순간 약속에서 벗어난 거예요.
성경 십계명에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는데, 내가 부모를 공경하는 이것은 착한 짓이다, 하는 그 순간 그 사람은 약속에서 벗어난 사람이에요. 그렇게 돼버리면 그 사람은 뭐가 되느냐 하면, “속이는 자 같으나”에 해당이 안 되어 버립니다. “속이는 자 같으나.”에 해당이 돼야 돼요.
뭘 해도 남에게 “사기꾼이지?”라는 말을 들어도 거기에 합당하게 우리는 살아가야 되는 겁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할 때 자꾸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거든요. 그러면 그 다음 구절 “우리는 무명한 자 같으나”가 나옵니다. “그런 인간이 있었어? 너 누구야? 나는 너 처음 봤다. 아, 네가 우리가운데 함께 있었구나.” 이렇게 개무시를 당하면서 있으나마나한 존재가 되지 아니하면 우리는 성도의 체험에 무명한 자의 이름으로 끼어들 수가 없어요.
지금 여기에 나오는 이 리스트, 항목은 주님의 평가에 의해서 “성도 맞지요? 그렇지요?”라고 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제공된 리스트 항목입니다. “다들 여기에 해당되는 것이 맞지요?”라고 이 항목을 줘버리면
우리는 속이는 자 안되려고 하고, 악한 이름이라는 소리를 안 들으려고 하고, 그저 참되려고 살아가고, 그저 유명한 자 되려고 하고, 우리는 그저 예수 믿고 잘 살려고 하고, 징계를 안 받는 자가 되려고 하고, 죽임을 당하는 자 안되려고 하고, 근심하지 않으면서 인생을 살려고 하는 겁니다.
그러한 선택을 한다는 자체가 이미 자신이 알고 있다는 그것이 주님의 약속을 훼방하는 훼방짓이 돼요. 내가, 내가 아는 방식으로 구원을 따내려고 하는 겁니다. 성경을 천 독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수십 년 기도를 해도 무슨 소용이 있어요.
그 판단은 본인이 이미 알고 있다는 것, 안에 꽉 차 있는 이 배설물이 자기가 자기구원에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골라잡는데 그런 짓거리를 하면서 어떻게 사도바울이 제시한 리스트가 우리의 리스트가 될 수 있습니까? 어떤 것은 기피하고 싶고 어떤 것은 취득하고 싶은데요.
하나님이 불러주지 않는 인간은 자기안전과 자기의 무사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그 기도를 컨닝해보세요. 뭐라고 기도하는지 한 번 들어보세요. 자기와 자기가족의 안전과 자기미래의 무사함을, 행복이라는 이름으로 달라고 기도합니다.
나는 기도 안하고 옆 사람 기도하는 것 컨닝만 했는데, 그 사람이 기도를 그렇게 했는데 기도하지 않은 나에게 그 사람의 기도한 응답이 다 주어지게 된다면, 그리고 정작 기도한 사람은 아무것도 안되게 되면 기도한 그 당자사가 얼마나 화가 날까요? 기도하지 않은 쪽이 잘되고 기도 열심히 한쪽은 더 꼴아 박는다면 얼마나 분노할까요?
그래서 주님은 우리의 내막을 압니다. 나는 매일같이 분노한다. 이 세상을 한마디로 하면 온 세상이 지금 분노중입니다. ing, 진행형이에요. 나는 항상 분노한다. 모든 인간이 같이 분노합니다. 한 사람이 그러면 착각일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착각을 하면 그것은 현실이 돼요.
모든 인간이 앵그리, 분노중입니다. 화를 내고 있어요. 이 사실을 성도는 압니다. 왜 성도는 아느냐 하면, 구원받지 않은데서 구원받은 곳으로 이동하면서 성령이 오시고 주께서 오시면 그 어떤 층을 통과하게 되어 있어요. 그 통과된 층을 되돌아보면 그게 전부 다 분노의 층입니다. 화를 내는 층이에요.
화를 낸다는 말은 뭐냐 하면, 억울하다는 겁니다. 격분하고 억울하고, 내가 한 일에 대한 합당한 보상이 안주어진다는 거예요. 교회 다닌 만큼 복이 안 오고, 기도 한만큼 복이 안 오고, 헌금한 만큼 복이 안 오고, 모든 것이 내가 한 만큼 보상이 안 온다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신자라는 이유 때문에 그것을 강제로 참기름 짜듯이 위에서 억눌러요.
“오늘도 애가 아픈데 감사헌금 드립니다. 다른 사람 같으면 감사 안할 텐데 나는 얼마나 믿음이 좋은지 애가 아픈데도 감사헌금 드립니다.” 감사헌금 봉투가 강대상에 올라옵니다. 우리교회는 하나도 올라오는 일이 아예 없지만 하여튼 그렇게 해요. 역으로 하는 거예요. 이정도로 감사하는데 내가 원하는 대로 챙겨달라고 올리는 거예요.
남 같으면 그 정도 환란 받으면 믿음 없어서 떠나고 말겠지만 나는 한 믿음 하기에 주님이 고집이 센지 내 고집이 센지 한번 해보겠다는 식으로, 어려울수록 더욱 더 감사헌금 봉투는 올리는 거예요. 이게 누구하고 시합하는 것도 아니고요. 꼼수도 그런 꼼수가 없어요.
대선시즌인데 왜 우리교회는 헌금봉투가 안 올라오는지 몰라요. 전에 제가 있던 교회는 대선시즌이면 대목입니다. 막 올라와요. 기호 1번에서 올라오고, 2번에서 올라오고, 3번에서 올라오고. 그러면 그거 보고 목사는 광고를 하지요. “1번 후보 문재인 올라왔습니다. 3번, 안철수 올라왔습니다.” 홍은 이야기 안하겠어요. 그 후보는 이쪽 동네기 때문에.
지금까지 이야기한 이것이 사람의 마음을 사기 치는, 속이는 짓입니다. 이 모든 것이 사실은 속이는 거예요. 왜 그런가 하면, 인간은 진실을 원하는데 그 진실은 내가 구원받고자 하는 그 모든 시도에 부합되고 일치되는 그것만이 진실이라고, 이미 본인이 갖고 있는 그것이 한계가 되어 있기 때문인 거예요.
딱 들어보고 내가 구원받고자 하는 그 방식과 맞으면 진리라고 보고 안 그러면 나는 틀렸다고 보겠다, 라고 하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그렇다면 네가 원치 않는 진리 말고 나는 네 앞에 자진해서 속이는 자가 될게, 해서 “속이는 자요.”라고 나오는 겁니다.
속이는 자요, 해놓고 “속이는 자 같으나 (사실은 우리가) 참되고” 결국 이 말은 뭐냐? 약을 올리는 겁니다. “네 힘으로 교회 나와서 구원받고자 하는 인간들아. 뭔들 해 봐라. 그래서 구원이 되는지. 턱도 없는 소리다.” 이렇게 약을 올리는 겁니다. 이렇게 약을 올리는 방식을 사도바울이 사용하는 이유가, 본인이 이런 경로를 겪어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까 이야기한 대로, 하나님께서 일하실 때는 인간을 죄인 만들어서 그리스도 안에다 집어넣어놓고 그 다음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을 주께서 사랑하시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도 덤으로 사랑하시는 거예요.
이렇게 나온다면, 나는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 안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라는 아이디어가 떠올라요. 죄인 되어서 그리스도 안에 들어간다면, 그렇다면 나는 죄를 지어서, 탕자가 되어서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서 “내주여,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이런 식의 연출을 해본다면 어떻겠는가, 라는 생각이 들 겁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뭘 알고 있느냐 하면, 모든 구원의 시작이 예수 그리스도부터 시작된다는 겁니다. 우리가 생각하기는,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구원되었구나, 그렇게 생각들 하는데 그게 간단치가 않아요. 이렇게 되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처음 나타날 때는 여러 사람 가운데 한명이었어요.
여러 사람과 같은 인간 중에 한 명의 인간이었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움직거리고 말씀을 하면서 모든 그 시대의 정치적, 국가적 차원에서 예수님을 살해하는데 힘들이 응집이 되는 희한한 현상이 벌어져버렸어요. 어떤 인간이 죽는 일에 온 국가가 힘을 응집하지는 않습니다.
국가란 찬성하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반대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인데 이상하게 예수 그리스도가 가는 길에는 점점 더 누구 하나 한명 예외도 없이 모두 다, 예수는 죽어 마땅한 쓸데없는 존재라고 이구동성으로 동의를 하고 말았어요. 그렇게 함으로서 애초부터 인간은 구원될 수 없는 세계에 갇혀 있다는 것이 판명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처럼 훌륭하면 구원 받겠다 하는 것은 예수님 개인적으로 훌륭해서 구원받는 것처럼 그렇게 오해하니까 그런 생각이 들어가는 거예요. 예수님이 착해서 아버지께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가는 곳에 갑자기 먹구름이 생겨버려요. 예수님이 떠나고 난 자리에는 온통 이 세상에 먹구름, 지난 시간에 그것을 흑암의 권세라고 했지요, 먹구름으로 가득 차버려요.
그렇다면 제자들이 예수님 떠나고 난 뒤에 하늘을 쳐다보는 것처럼, ‘뭐지? 어디로 갔지? 애초에 누구였었지? 이상해. 우리가 이상해, 저분이 이상해?’ 우리는 분명히 저분이 이상하다고 죽여 버렸는데,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했는데 죽은 자를 하나님께서 살려서 우리가 모르는 세계로 이동시키니까 누가 이상하냐 하면, 우리 쪽이 이상한 거예요. 그렇다고 해서 따라 붙일 대책도 없고.
예수님 십자가에 죽고 난 뒤에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가 있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동행했습니다. 어떤 아저씨가 동행한 거지요. 낯선 이방인이. 못 알아봤습니다. 제자들의 기억력이 떨어진 것이 아니고 인식자체가 예수님의 세계와 이쪽 세계가 완전히 차단되어 있다는 것을 주님이 부활로 우리에게 보여줬습니다.
예수님 알아먹어서 구원될 사람 아무도 없다는 이야기에요. 생각하고 신학공부해서 구원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인식자체가 안돼요. 봐도 몰라요. 예수님이 이렇게 생겼고, 키는 얼마고, 이 정보를 입력해서 아무리 기억한다 할지라도 예수님 못 알아보게 되어 있어요.
우리 자신이 이미 어두움에 의해서, 죄에 의해서 망가졌습니다. 어둠에 의해서 망가져버리면 인간의 개성이라는 것은 무의미해요. 개성이라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직업, 잘남과 못남과 관계없이 뭉개져버리면 이것은 동일한 진흙덩어리가 될 뿐이에요. 코 좀 뾰족하고 쌍 커플 있다고 해서 별 개성 있다고 보면 안돼요.
피부가 탱탱하고, 윤기가 흐르고, 화장품 새로 발라놓고는 놓치지 않을 거예요, 이렇게 백날 해봐도 소용없어요. 어차피 인간자체가 한계입니다. 자기한계를 뚫고 나갈 위인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리스트, 이대로 살 사람이 없어요. 예수님만 이상한 것이 아니고 사도바울도 우리가 보기에는 미쳤어요.
그런데 사도바울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다들 그렇지요? 나처럼 미쳤지요?”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는 말이지요. 예수님이 가실 때 우리보기에는 나도 한 인간, 너도 한 인간이지만 주께서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거기에 이 세상 모든 권력이 거기에 둘둘 말려서 세상 권세가 예수 그리스도를 없애는 쪽으로 공격하는 그 공격의 성향을 띠는 가운데 예수님은 살해당했어요.
이게 무슨 뜻이냐? 모든 종교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는 소망입니다. 종교는 희망을 줘야 장사가 돼요.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일어난다는 희망을 줘야 돼요. 네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는 여호수아 1장의 희망을 줘야 돼요.
목사들이 군에 가는 장정들에게 전하는 성경구절이 여호수아 1장입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면 네가 후방으로 빠진다는, 혹은 카츄사나 좋은 데로 빠진다고 이야기하거든요. 항상 희망을 주는 것이 교회에서 해야 될 일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뭐냐? 희망의 종교가 아니고 이미 왔다는 거예요. 이미 모든 것이 끝났다는 겁니다.
인간도 모르게, 인간도 눈치채지 못하게. 모든 판결, 모든 심판을 끝내버린 거예요. 종료된 겁니다. 모든 사건이 이미 완료가 된 거예요. 다른 사람은 화투 패 쥐고 좀 따볼까 하고 있는데, 진짜 화투치는 아버지와 아들 두 분이 대화가 “아버지, 다 이루었습니다.” “음, 다 이루었지. 가자.”
이미 모든 심판과 저주는 끝나버렸어요. 어떻게 하면 구원받습니까, 라는 말을 하면 안돼요. 게임이 연장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완료되었기 때문에 이미 그런 기회조차 날라 가버렸습니다. 구원될 수 있는 모든 기회는 박탈되었어요. 이게 복음하고 여타의 종교와 차이점입니다.
복음은 이미 주어진 어떤 사건이 있는데 그 사건이 완료가 되었고 그 완료된 사건이 눈사태처럼, 둑처럼 터져서 확 밀려온 거예요. 그 밀려버린 현상 그 효과가 구원의 효과가 되는 겁니다. 이렇게 하시면 구원받습니다, 그런 것은 없어요. 그런 것이 있을 수가 없어요.
구원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일을 통해서 구원이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뭐냐? 보통 사람들에게는 자기전문분야가 있겠지만 예수님의 이 땅의 모든 활동은 세상의 모든 힘이 예수님 중심으로 응집이 되는 현상을 보일 때 그것이 구원이라고 할 수 있어요.
기어이 예수를 향하여 “너도 우리와 똑같은 이 세상 사람에 불과하다. 4대성자에 불과하고.” 야스퍼스라는 철학자에 의하면, 소크라테스, 공자, 부처, 예수가 태어난 그 어간의 시대를 기축시대(Axial Age)라 해서 bc 4세기에서 5세기경에 인간의 뇌피질이 전환되어서 새로운 사상들이 파급되면서 인간이 정신적으로 진화했다는 이론이에요.
다들 그렇게 배워요. 철학이라는 학문에서. 예수는 우리하고 똑같은 인간이에요. 이순신장군이 우리하고 똑같은 인간이듯이. 약간 훌륭하지만 인간이 아닌 것은 아니라는 말이에요. 조립하는 장난감 주문하게 되면 플라스틱 부품이 짜여 있거든요. 칼 가지고 플라스틱에 붙어 있는 그 가지들을 떼 내면 그것이 하나의 조립품의 부품이 되는 겁니다.
지금 예수님은 세상권력의 플라스틱에 묶여 있어요. 묶여 있어서 예수님도 죽음을 못 이긴다는 말이지요. 못 이기는데 성령이 함께 하셔서 성령을 통해서 예수님을 무덤에서 일으켜 세웠거든요. 히브리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자진해서 일어난 것이 아니고 성령에 의해서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의 이야기가 그 이야기에요.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 8:9-11)
예수님은 그 당시사람이 되었든 오늘날 우리 같은 사람이든 다 똑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다소 훌륭하고, 다소 남을 위해서 희생하는 면에서는 우리보다 약간은 낫지만 우리하고 똑같은 존재에 불과하다고 보는 겁니다. 그런데 부활이 있어요. 붙어 있던 플라스틱이 다 떨어지는 겁니다.
우리가 그렇게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그 힘이 떨어지면서 주께서 부활해 버렸어요. 이것은 다중현실이에요. 현실이 있는데 또 하나의 현실층이 붕 뜨는 겁니다. 마치 드론처럼. 그게 바로 구원이에요. 구원은 착하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다르게 사는 거예요, 다르게 사는 것. 전혀 다른 존재가 되는 거예요.
뭘 생각하는데? 착하다, 악하다, 하는 생각을 일체 하지 않는 것. 거기에 두려워하지 않는 것. ‘이번 주 목요일에 중요한 계약이 있는데 내가 주일날 착실하게 정신 바착 차려서 성가대 봉사도 해야 계약 성사가 잘 될 것이다.’
이런 것이 있다는 그 자체가 내가 잘 살고, 행복해야 되고, 남 보기에 유명하고, 부자 되고, 징계를 받지 아니하고, 아름다운 이름으로 살고, 그 다음에 영광스럽게 사는 이 세상과 연결되어 있는 이 플라스틱 가지들, 이것을 공고히 하는 거지요. 떨어질 생각을 못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구원이 될 수가 없지요. 떨어질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거기에 푹 잠겨서 살기를 원하거든요. 오늘 본문 이야기가 도대체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아, 욕되게 살면 욕되게 살았다고 수고했다고 보상으로 영광 되는구나.’ 이렇게 해석이 되는 겁니다.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아, 남에게 욕 얻어먹더라도 참아라. 그러면 나중에 참되게 구원 받는 사람이 되는 거야. 지금은 이름이 좀 없더라도 참아. 그러면 유명하게 되고 죽는 자 같이 고생 많아도 나중에 영생을 얻고 징계를 받는 자 같아도 우리가 생명의 면류관을 얻고, 지금은 근심하는 자 같아도 나중에는 항상 기뻐할 것이다.’ 지금 이렇게 해석하는 거예요.
왜? 종교라 하는 것은 소망을 주고, 앞으로 잘 될 것이라는 희망이 죽어가는 나를 살릴 수 있는 긍정적 마인드를 제공하기 때문에 그래요. 종교장사가 뭐예요? 이 장사가 종교장사인데. 이게 종교장사 아닙니까? 이것 때문에 교회 오잖아요. “간암말기다. 해볼 것은 다 해봤다. 마지막 갈 곳은 주님 품 밖에 없습니다.”
왜 교회 나왔습니까? 병 낫기 위해서. 주님이 병 고치러 오신 분이에요? 주님이 병 고치러 오신 분이 아니잖아요. 주님이 병 고치러 오신 분이라면 병원은 전부 다 거짓말쟁이에요. 주님은 세상과의 모든 관계를 끊으려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처나 자식이나……,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은 혈연관계로 공고히 되어 있어요.
세상이 모든 바탕은 혈연관계입니다. 혈연관계를 두고 도킨스라는 학자는 dna라고 했어요. dna의 자기 확대를 누가 말릴 수가 있느냐는 말이지요. dna가 더 살고 싶어 하는데. 이걸 누가 말립니까? 구원 안 됩니다. 내가 살고보자 하는데 무슨 구원이 돼요. 내가 살고보자 할 때에, 성경이 있네.
성경에, 법을 지키면 구원받겠지. 그것은 구약시대지요. 구약시대는 율법을 준 겁니다. 주님께서 율법을 줘서 그 율법에 대해서 책임을 묻는 거예요. 그래서 율법 줘서 이스라엘 나라 망하게 하신 겁니다. 그 주신 율법을 옛날 계명, 옛날 언약이라 해서 그걸 두자로 구약이라고 하는 겁니다.
옛날언약, 구약. 그런데 그 구약이 아직도 구약입니까? 이미 구약은 완성이 되었어요. 끝났어요. 십자가에 다 이루었다, 할 때 “법 지켜라 구원해 줄게.” 이런 방식은 끝나버렸습니다. 세일기간 끝나버렸어요. 하나사면 하나 더 주기, 그런 것 없어졌어요.
율법을 줬을 때 그 율법을 받은 이스라엘이 메시아를 죽이는데 앞장서서, 모든 악마의 어두운 권력이 거기에 응집해서 예수를 죽였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그 개인적 구원을 통해서 인간은 단지 인간과 인간의 정에 얽매인 것이 아니고 악마에 얽매였다는 사실이 예수 그리스도 단독에 의해서 밝혀지고 말았습니다.
악마에 얽매였어요. 그리고 인간은 악마에 매달려 있는 촉수들입니다. 빨판들이에요. 자기 딴에 움직인다고 움직이지만 배후에 악마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겁니다. “너 그러면 죽는다. 너 그러면 불행해진다.” 오늘 본문대로 하면, “너 그러면 시시한 인간 돼. 너는 영광 근처에도 못가고 더럽게 살게 돼. 너 그러면 남에게 욕 얻어먹어. 너 그러면 가난한 자 돼. 너 그러면 평생에 근심하게 돼.”
얼마나 많은 협박과 공갈에 우리는 쫓겼습니까? 쫓기고 쫓겨서 교회까지 오는 거예요. “주여, 부자 되게 해주세요. 행복하게 해주세요. 착하게 해주세요. 내가 죄가 많아서 인생 더럽게 꼬였는데 이제 착한 일 많이 해서 그동안 날라 간 모든 것을 한꺼번에 30배, 60배, 100백 보상하게 해주세요.”
이걸 얼마나 많이 기대들 했습니까? 또 기대들 하고 있고. 그런 희망. 그러나 그런 것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스스로 희망을 골라잡는 거예요. 자기가 장래에 구원받고 천당 가기 위해서 골라잡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말합니다. 여러분 자신이 여러분의 구원을 막는 한계입니다. 내가 구원받겠다는 그것이 당신의 구원을 철저하게 봉쇄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구원받겠다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 잡아 죽이는 일을 했던 사람입니다. 그게 자기구원에 장해가 되었을까요? 주님은 우리하고 상대 안합니다. 장해가 되냐, 안되냐? 이것은 북한말로 해서 일 없어요. 그것은 아무 상관없는 일입니다.
우리가 무슨 짓을 해도, 벌거벗고 무슨 짓을 해도 전혀 구원받는데 지장 없습니다. “예수를 저주한다!” 베드로처럼 세 번씩 해 봅시다. 전혀 지장 없습니다. 구원은 나하고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약속의 실천에 의해서, 주님의 자기의사에 의해서 우리에게 선물로 믿음이 주어지기에 되는 겁니다.
그 선물이 뭐냐?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 땅에서의 이중성입니다. 하늘의 사람이면서도 땅에서 살다보니까 악마에 속한 모든 자들이 예수님을 제거대상으로 본 거예요. “저거 죽어야 해. 저거 사기꾼이야. 저거는 하나님께 저주받아 마땅해.” 그래서 하나님의 법의 이름으로 예수님을 나무에 매달아서 처단한 겁니다.
왜? 신명기에 보면 나무에 매달려 처단한 사람은 하나님의 저주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말 맞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자진해서 저주받았습니다. 인간의 모든 활동을 이용해서 저주받은 자 되어서 이 세상이 악마에 갇혀 있는 세상이고, 탈출한 사람은 예수님 자신 외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그것을 다 이루었던 겁니다.
그것이 다 이루어졌어요. 그러면 그 다 이루어진 것이 저수지의 물이라면 그 저수지의 댐이 터져버리면 그 다 이루었다는 질적인 요소가, 양이 아니라 질적인 요소가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와 넘쳐버리면 ‘이래 사나 저래 사나 끝난 문제 아니야?’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일본영화 <카게무샤>라는 영화에서 성조가 죽었어요. 옛날에는 무사끼리 라이벌이 되어서 싸웠습니다. 그런데 성조가 이순신장군처럼 전쟁하다가 죽고 말았어요. 적들이 그 소식을 알게 되면 쳐들어오기 때문에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이렇게 된 거예요. 죽었다는 것을 알릴 수가 없어서 똑같이 닮은 인물로 성조역할을 하게 만듭니다.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영화가 나온 것이 있어요. 광해군하고 똑같은 왕 대타로 내세우듯이 그렇게 똑같이 한 거예요. 진짜는 죽었으니까 대역은 원래 도둑놈인데 가짜지요. 그런데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적들은 여전히 성조가 살아 있는 줄 알고 있고 대역맡은 도둑놈도 용감하게 싸웠습니다.
자기는 그냥 도둑놈이에요. 잠시 대역을 맡았을 뿐이에요. 다른 사람은 다 속아 넘어갔지만 말이 안 속아서……, 역시 인간은 말보다 못해, 그 말이 안 속는 바람에 들켜서 전쟁에서 졌어요. 그런데 그 뒤에 웃기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도둑이 막 울어요. “세상에 내 성이 무너지다니.” 이거 착각 아니에요?
네가 무슨 관계가 있다고 웁니까? 이 세상에 대해서 우리가 분노한다는 것, 이것은 주님이 보기에는 말도 안 되는 거예요. “주여, 내 인생이 왜 이렇게 꼬이게 하십니까? 억울합니다.” 이거 착각 아니에요? 우리는 주님 앞에 싹싹 빌어야 돼요. 이유 불문하고 “제가 이 세상이 내 세상인지 알고 착각했습니다.” 하고 주님에게 싹싹 빌 때 이 세상의 어떤 환란과 곤고가 온다 할지라도 우리는 오늘 말씀대로 기쁨입니다.
이것은 흉내 낸다고 해서 천당 갈 수있는 것이 아닙니다. 근심 하는자 같으나 기뻐한다는 거예요. ‘내가 또 착각했구나. 마치 내가 바르게 살아야 구원받는 것처럼 착각했구나. 교회 충성 봉사해야 구원받는 줄로 착각했구나.’ 그렇게 되는 겁니다. 우리가 아무리 돈 모아봐야 하나님한테 다 빼앗깁니다.
하나님한테 빼앗기기 때문에 절대로 여러분은 목사나 교회한테 빼앗기면 안돼요. 놓치지 않을 거예요! 꼭 쥐고 있다고 나중에 하나님에게 몽땅 다 빼앗기시기 바랍니다. 그게 바로 성도의 재물관입니다. 이 세상 어떤 사람에게 줄 사람도 없고. 왜? 아무도 날 구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줄 사람도 없어요.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은 그 빼앗기는 맛, 그래서 이것은 내 돈인데, 하다가 싹싹 비는 이 맛, ‘참 내 돈이 아니지요. 바보같이 착각했습니다. 이것은 내 돈이 아니잖아요. 주님 주신 거잖아요. 왜 자꾸 정신이 그 쪽으로 돌아가는지 몰라.’ 매일같이 싹싹 비는 이것이 진정한 자유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 앞에 싹싹 빌어본 적이 언제 적인지, 천당 따내려는 술책 부리려고 싹싹 빌어본 적은 있지만 구원 받았기에, 구원 이미 챙겼기에 싹싹 비는 그 즐거움이 없었습니다. 그 감사가 없었습니다. 주님이여, 약속에 의해서, 일방적인 주님의 호의에 의해서 구원을 받았으면 그 주님의 호의만 드러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