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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29강-화목제물(고후5;18-19) 170326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3. 26. 15:57
2017-03-26 12:35:04조회 : 28         
   화목제물 170326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화목제물(고린도후서 5:18-19)

음성                  

 이근호17-03-26 15:00 

화목 제물 

2017년 3월 26일                          본문 말씀: 고린도후서 5:18-19 

(5: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5:19)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화목이란 두 상대자 사이에서 평화롭고 정상적인 관계가 된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화목’을 언급하신다는 말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가 정상이 아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들은 이 세상 사태에 대해서 그렇게 비관적으로 보고 있지 않고 무난하게 여기며 산다는데 있습니다. 

“이 세상이 뭐 어째서?”라는 식입니다. 사는데 별반 지장을 못 느낍니다. 창문 너머를 봐도 세상 파멸의 기운을 느끼지 못합니다. 하나님쪽에서 평화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참으로 평화로운 사회가 지속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 자체가 호들갑 떠는 것으로 보이게 마련입니다. 

그만큼 인간들은 세상 형편에 감을 못 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현 인간에게 화목을 요청하는 것처럼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하고 화목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멸망하십니다. 멸망받을 자들과 거래하거나 협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죄를 증오하시기 때문입니다. 

교회사 내내 사람들은 이 ‘화목’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자비로운 하나님께서 오랫동안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힘들게 사시는 것을 보시고 가슴 아파 참지 못해서 기어이 인간의 무능력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자비심의 발로로 인간들을 구원하기로 작심하시고 거기에 필요한 조치를 취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죄’로 막혀 있는 부분을 자기 아들을 보내어 뚫어주시는 방식으로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했다는 겁니다. 

이 주장이 완전히 거짓말이고 사기며 있지도 않는 사실인 이유는, 화목의 대상자를 잘못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인간들은 선악과를 따먹고 선과 악으로 자신을 신의 신분으로 고정하기 위한 시도를 해오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답답한 쪽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쪽이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향한 자신의 넘치는 사랑을 주체를 못해 기어이 인간들을 불쌍히 여기기 시작했고 그 결과로 세상에 나타난 것이 바로 ‘화해 제의’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보다 하나님쪽이 훨씬 사랑이 많기에 참다 참다 도저히 참다못해 비록 인간이 죄인이지만 사랑하기로 작정했다는 주장이 바로 이런 논리로 나타난 겁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러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화목’의 대상자는 ‘우리’인데 이 ‘우리’는 기존의 인간들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고린도후서 5:14에 보면 ‘모든 사람이 죽은 것’으로 규정지어지고 있습니다. 마치 놀이동산에서 어떤 아이가 풍선을 들고 있다고 바람에 풍선을 날려 보낸 이야기가 같습니다. 

엄마는 아이의 풍선을 잡아 주기 위해 달려갔지만 키가 모자라 날아갔고, 아이는 울고 있습니다. 마침 옆의 가게해서 행사를 하면서 홍보요원이 들고 있는 낯선 풍선을 아이에게 손에 쥐어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어떤 분이 찾아와서 그 잃어버린 풍선 그것을 찾아주었습니다. 

이로서 아이에게는 두 개의 풍선을 쥐게 되었습니다. 하나는 전에 쥐었던 풍선, 다른 풍선은 가게 홍보행사용 풍선입니다. 간의 육신은 원래 주인이 하나님 것입니다.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인간은 죄 중에서 태어나면서부터 자신의 육신을 자기 것이라고 우깁니다. 

“내가 아프다”는 겁니다. 아닙니다. “주님의 것이 아픕니다” 내 것이든 주님의 것이든 아프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맞습니다. 그러기에 육체가 아픈 겁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이 육체를 ‘자아의 것’으로 여기는 겁니다. 이 육체가 아이라면 자아는 풍선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성령세례를 받은 성도만이 두 개의 상호 다른 자아를 느끼게 됩니다. 

하나는 일반인들처럼, 내 몸은 내 것이라고 우기는 겁니다. 자연적으로 인생도 나의 인생이라고 우기겠지요. 반면에 성도는 자신의 몸은 원래부터 자기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임을 인정합니다. 이렇게 되면 팔자 사나운 자신의 인생도 주님이 만들어 나가시는 인생이 되겠지요. 로마서 14:7-8에 보면,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고 되어 있습니다. 

새로운 풍선, 즉 새로운 자아는 예수님의 영광된 몸에서 만들어집니다. 즉 흙에 속한 자는 흙에 속한 형상을 입고 결국에는 쇠하고 폐지됩니다.(고전 15:45-49) 하지만 하늘에 속한 자는 하늘의 속한 형상으로 창조됩니다. ‘화목’이라 바로 이러한 새로운 피조물 안에 들어있는 내용을 뜻합니다. 

화목은 인간을 상대하지 않는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상대한 자를 없는데서 새로 만드신다는 뜻입니다. 그런 자들이 과연 있을까요? 있습니다. 구약 이스라엘입니다. 원래 이들은 히브리민족입니다. 히브리민족과 이스라엘은 같은 개념이 아닙니다. 애굽에 살던 히브리민족이 이스라엘이라는 국가 되려면 필히 하나님께서 친히 개입하셔야 합니다.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할례를 행하고, 죽음의 바다인 홍해를 건너오지 아니하면 결코 이스라엘이 되지를 못합니다. 이스라엘에 하나님에서 제사법을 주시는데 이는 이스라엘을 상대로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화목의 상대자는 제사법대로 행사되는 그 제사 자체에서 새롭게 생겨납니다. 

제사는 번제와 소제와 속죄제와 속건제와 화목제로 되어 있습니다. 번제는 제단 위에 제물을 다 태우는 것을 말합니다. 소제는 곡물를 태우되 갈아서 태우는 것을 말합니다. 나머지 속죄제는 속건제는 화목제는, 제물의 몸체에서 기름부위만을 따로 떼어내어 제단 위에서 태웁니다. 

속죄제는 기름부위 말고 나머지는 제단 밖에 쓰레기 태우는데서 나무 위에서 다 태웁니다. 하지만 속건제는 그 고기를 제사장과 그 가족을 먹도록 허락합니다. 화목제의 경우에는 제사장과 그 가족 뿐만 아니라 제사를 드린 자까지 고리를 먹도록 요청합니다. 과연 이러한 차이를 낳는 근원 원리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화목제를 통해서 알 수 있는 화목제는 그냥 드리는 것이 아니라 번제물 위에 드립니다. (레 3:5 )이는 더 이상 인간을 상대로 화목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화목은 화목을 받을 대상자를 죽은 데서 다시 만들어내어지는 바로 그들입니다. 또한 화목제와 다른 제사의 차이점이 제물로 들어가는 것 가운데 유교병을 허락하신다는 말입니다. (레 7:13) 

‘유교병’이란 누룩이 포함된 떡을 말합니다. 소제에서는 유교병은 아니되고 무교병만 됩니다. (레 2:4) 누룩이란 죄의 씨앗을 말하는데 이는 아담이 악마와 한통속에 되면서 죄의 핵심요소가 인간에게 넘겨진 그것을 뜻합니다.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합당한 조치는 오직 심판과 저주와 죽음 뿐입니다. 

그런데 화목제에서는 유교병을 허락하신다는 말은 인간쪽으로 드리는 것으로 화목제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께서 맛있게 드신 그 하나님의 만족스러운 양식을 새로운 만들어진 자기 사람들에게 제공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성도는 이미 ‘자신의 죄가 자기에게 돌아오지 않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도 그것이 나와 있습니다.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제사를 통해 개인적 죄나 개인적 구원을 성사시켜주시는 것이 아니라 몽땅 다 ‘죄’ 속에 용해시켜 버립니다. 마치 계란혼합기에서 계란의 형체가 뭉개지는 원리와 같습니다. 

죄와 저주 속에서 자기 백성을 새롭게 창조하시는 겁니다. 바로 예수님 자신이 화목제물이 되셔서 거기에 대한 하나님 아버지의 만족스러움에 의해서 생산된 새로운 피조물들이 이 구원의 혜택을 입게 됩니다. 아들도 아니면서 감히 ‘아바 아버지’라고 가족의 자리를 부여받게 됩니다. 

이로서 성도는 화목제물의 운반체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원하시는 바 ‘예수의 증인’입니다.(행 1:8)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시 115:1)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후서 5장 18-19절입니다. 신약성경 290페이지입니다. 

  

고린도후서 5:18-19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방금 읽었던 고린도후서 5장 18, 19절은 세상적으로도 유명하지 않지만 교회에서도 별로 유명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이게 무슨 말인지를 몰라서 그래요. 오늘 읽었던 내용은 하나님이 우리하고 화목, 또는 화해를 했다는 겁니다. 

  

화해를 했다는 말은, 사람이 가만히 있는데 어떤 사람이 와서 “내가 당신과 화해를 하기로 했어요.”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보고 ‘이 사람이 미쳤나? 우리와 당신과 좋은 관계로 유지되는 줄 알았는데 화해를 했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지금 이 관계 괜찮다고. 좋아.’ 새삼스럽게, 화해합시다, 악수를 내밀 하등의 상황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뭔가 문제가 터지고 서로 원수지간이 될 경우가 전제된 뒤에 화해합시다, 가 성립되는데 교회 와서 예배 잘 드리고, 집안 밥 먹고 사는데 별 문제 없고, 6,25전쟁도 벌써 오래전 일이고 전쟁도 일어나지 않고, 별 하자 없는 이 세상에서 “내가 너희와 화해하겠다.”라고 할 때 상당히 생뚱맞은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그 취지가 뭔지가 상당히 수상스럽지요. 하나님의 입장은 이렇습니다. 화해한다는 그 사실을, 내가 신중하게 생각하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그 마음을 너는 그동안 전혀 모르고 살았다는 것이 네가 얼마나 엉터리로 인생을 살아왔는가를 반증해 준다는 겁니다. 

  

화해하겠다는 것이 하나님 편에서는 굉장히 중요한데 우리는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세월호 물에 빠진 것 건지는데 신경 쓰고 있다는 말이지요. 교통사고 일어난 그것. 중요한 것이 여기 있는데 세월호 배 건지는 것, 북한 핵문제, 그런 것에 신경 썼다는 말은 평소일상을 엉망진창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거예요. 

  

나는 하나님이 나와 화해 안 해주면 나는 큰일날거야, 이런 긴장감이 없어요. ‘하나님이 화해의 손길을 내밀지 않으면 나는 살아도 소용없고, 배 한척 건져낸다고 해도 소용없고, 전쟁 일어나서 북한의 핵이 터져도 그런 것은 아무 문제도 아니야. 그런 것보다 더 큰 문제야.’라는 인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느냐는 말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8절, 19절이 하나님한테는 굉장히 중요한데 우리한테는 전혀 중요하지가 않습니다. 들으나마나 상관없이 살 수 있다고 우기는 겁니다. “그러면 목사들이나 신학자들은 이 말씀의 중요성을 알겠지요. 우리는 아마추어니까 프로들은 잘 알겠지요.”라고 하는데 이것이 또 오해입니다. 

  

그 사람들은 2천년동안 성경을 연구했어도 뭘 모르냐 하면, 하나님이 누구하고 화해하는지를 몰라요. 성경에 화목제물이 나오고, 화해한다는 말이 나오고, 내가 너희에게 온 것은 평화를 주로 왔다는 말씀이 나왔지만 하나님께서 왜 화해를 해야 되는지 이유 모릅니다. 하나님의 화해대상이 이 세상에 없어요. 그 사실을 몰라요. 

  

하나님이 인간하고 화해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하고 화해할 것 같으면 아예 에덴동산에서 추방하지도 않았어요. 약 올립니까? 추방할 때는 언제고 또 고생했지, 하면서 쓰담쓰담하는 것은 뭡니까? 그런 식으로 하나님이 일 안하시거든요. 화해할 것이 뭐가 있어요? 

  

처음부터 에덴동산에서 사람이 나무의 과실 하나 따먹었다는 것,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해서 따먹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약간 짜증나고 자존심 상하시면 그 선악과 나무 뽑아버리고 새로 심으면 되고. 어린애가 나무 하나 따먹었다고 자기가 사는 동네에서 내쫓는 법이 어디 있어요? 

  

전세 사는데 방에 못 박았다면 그게 문제가 되면 빼내면 되지 우리 집에서 살 자격이 없다고 내 보낸다면 그것은 너무 혹독한 주인이 아닙니까? 성경 창세기를 보면서 왜 하나님께서 선악과 따먹었다고 그렇게 화를 내는지, 그 화내고 난 뒤에 인간들을 살기 좋은 곳에서 추방해서 저주받도록 의도적으로 내 모시는지. 

  

그것보다 더 심한 예는 두 번 다시 발길 끊으라고 경계하는 두루 도는 화염검 가지고 그것을 지키는지, 그것을 교회가 생긴지 2천년이 되도록 아직도 몰라요. 너도 모르고 나도 모르고 다 넘어가는 겁니다. 어떤 분이 저에게 이런 질문을 했어요. 질문하는 사람은 신학생이 아니고 그냥 평신도고 교회 다닌 지 채 1년도 안되었을 정도고 자기 친구는 신학교에 다닌다는 겁니다. 

  

신학교 다니니 프로라는 자랑질 한다고 친구에게 묻는 거예요. 신학생이 아니니 이런 것은 모르지 하면서 “모세가 창세기 언제 썼는지 알아?” 모르니까 약간 자존심이 상한 거예요. 그래서 저에게 카톡으로 질문을 했어요. 모세가 창세기를 언제 썼습니까, 라고 하기에 답변을 이렇게 했습니다. 

  

질문을 똑바로 해야 된다고. “모세가 창세기를 언제 조작했습니까?”라고 질문을 해야 돼요. 헌재 신학교에서 나온 답변이 그겁니다. 모세가 출애굽 이후에 창세기를 조작했고, 그 조작한 것을 다윗시대 때 다윗이 신학자 시켜서 조작했고, 그 조작한 것을 포로 이후에 또 유대신학자 70명이 모여서 조작했다. 그래서 결론은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다 조작된 것이다. 

  

그게 현재 신학교에서 정설입니다. 차라리 신학교에 안 갔으면 좋았을 것을. 성경 자체가 전부 조작된 거라는 거예요. 목사는 성경이 조작되었다는 식의 이야기를 안 해요. 왜? 그 사람들은 장사하는데 바빠요. 조작되었다는 식의 이야기를 해서 장사가 더 잘되면 그런 소리 하겠는데 성경 조작된 것은 알고만 있고 그저 “기도하면 복 받습니다.” 그것만 이야기하고 진짜 성경 이야기는 하지도 않지요. 

  

그런데 신학자들이 교수들은 학생들에게 왜 그렇게 이야기하는가? 그 사람들은 성경 자체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책이에요. 무슨 천지창조를 그렇게 해요?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것이 딱 하루거든요. 긴 하루가 아니라니까요. 수억 년 하루가 아니고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그게 하루인데 그걸 하루로 쳐서 6일 만에 천지를 창조하고 7일 만에 마무리 지었습니다. 

  

이것을 어떤 똑똑한 이성을 가진 신학자들이 믿습니까? 방사선동위원소연대측정법에 의해서 지구역사는 47억년이 되었고 우주의 연대는 137억년이 되었는데 성경에 보니 6일 만에 창조되었습니다. 창세기 1장은 무식한 옛날 사람들의 전설로 치는 거예요.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자기형상대로 아담을 만들었고 2장에 보니 인간은 흙으로 만들었다. 

  

그러니까 신학자들이 “조작한 티가 나네.” 1장은 엘로힘 하나님이 했다는 조작된 전설이 내려오고 2장은 여호와가 했다. 문서가 두 개가 짜깁기가 되어 있는 것을 바보같이 우리가 모를 줄 알고? 이것이 신학자들의 주장입니다. 너희들이 짜깁기 한 것을 우리는 가위로 잘라서 추립니다. 

  

J를 여호와라 하는데 여호와가 나오는 대목을 다 추려서 따로 만들어서 J문서, 또 E문서, 엘로힘 문서라고 해서 따로 만들어서 두 사상이 흘러내려왔다. 그런데 두 달 믿을만한 요소는 전혀 없는데 단지 이스라엘 사람들의 정신을 하나로 단합시키기 위해서 조작된 전설이라도 짜 맞춰서 나라만 하나로 잘되면 그만 아닌가? 

  

마치 단군전설에서 곰이 인간되었다는 그거 믿을 인간 아무도 없지만 어쨌든 홍익인간이라 해서 한민족으로 유지되면 그것이 남는 장사가 아니냐는 말이지요. 모든 역사라 하는 것은 과학적 근거가 없는 전설로 되어 있는데 성경도 마찬가지다. 모세가 조작하기 이전에 이미 우가릿 신화에 보면 홍수이야기 같은 비슷한 이야기가 다 나오니까, 역시 성경도 조작된 것이다. 

  

그러니까 젊은 사람들이여, 성경을 보되 진지하게 보지 말고 대충 보고 신경 너무 쓰지 말고 그저 착하게 살면 복 받고 천당 갑니다. 그 이야기만 하는 거예요. 이 이야기가 창세기의 문제뿐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따먹었는데 왜 그렇게 화를 내는가? 하나님께서 화를 낸다는 것은 진짜 하나님이 아니고 그 당시 옛날 사람들, 전혀 미개한 인간들이 자기들끼리 상상한 하나님이 화 잘내는 하나님이어서 그게 그대로 기록된 것이 창세기 2장이다. 

  

오늘 여러분이 갖고 있는 믿음 다 깨버립니다. 그게 그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방금 읽은 고린도후서 5장에서 하나님께서 인간과 화목 한다는 이 문제도, 하나님 보시기에,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그것은 모르고 믿지도 않지만 어쨌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원하니까 하나님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목사 본인이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에요. 목사는 돈을 믿지 하나님 안 믿어요. 돈 많은 장로, 이런 것을 믿지 하나님을 안 믿거든요. 다만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아오니까 하나님이야기를 끄집어내는 거예요. 가게에 물건 없으면 안 되잖아요. 상품 구색은 갖춰야 되니까요. 하나님 좋아하십니까, 드리겠습니다. 예수님 좋아하십니까, 드리겠습니다. 내놓는 거지요. 

  

들어간 돈만 빼내면 되니까. 고린도후서 5장에서 하나님이 화목했다 하니까 2천년동안 전부 이렇게 가르쳐요. 하나님께서 인간이 고생하는 것을 너무 서럽게 봐서, 사랑의 하나님 자비의 하나님이 인간을 두고 “고생 많이 했지? 내 새끼 고생 많았어.” 하고 다시 거두어들이기 위해서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다. 그것이 십자가인데 그것을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내밀 것 처음부터 쫓아내지를 말지. 거기에 대해서 그것이 엉터리라는 것을 누가 언급해주는 사람이 없어요. 제가 분명히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하고 화해 안합니다. 미쳤어요, 화해하게? 차라리 인간하고 화해하느니 악마하고 화해하는 것과 똑같지요. 이미 인간은 악마의 편에 섰는데. 광야에서 악마가 예수님을 시험하는 것 봤지요? 

  

시험하는 그게 뭐냐 하면, 우리가 지금 추구하고 있는 겁니다. 돈이 있어야 살고 또 사람은 돈만 있으면 안 돼. 외롭지 않고 인기가 있어야 해. 또 인기만 있으면 돼? 세상의 욕망은 가만있지 않고 세상 모든 좋은 것, 아름다운 것, 탐스러운 것 다 갖고 싶은데. 돈이 있어야 되고, 자기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많아서 인기가 있어야 되고, 세상의 부귀영화를 가져야 되고, 이것이 인간이거든요. 

  

이게 가득 들어있는 것이 인간이라는 말이지요. 이것이 없으면 인간이 아니지요. 정박아든 정신이상자든지 하지 이것이 있어야 정상인이에요. 정상인이라는 것은 곧 무슨 마음이다? 악마의 마음으로 무장되어 있는 그것이 정상이에요. 악마의 마음이 너무 많이 들어있어서 다른 마음이 들어올 틈새가 없어요. 

  

어떤 분이 질문했어요. 사람 사는 목적이 뭐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아, 웃기고 있네. 무슨 영광을 ……. 딱 들어보면 거짓말. 오늘 설교준비와 어떻게 딱 들어맞았는지. 시편 115편 1절에 보면, 잘 들어보세요.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성경에 이런 것이 있는지 몰랐지요. 

  

주여 주의 영광을 우리 인간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하나님하고 주고받고 거래 안 된다는 그 말입니다. 하나님에게 줄 것 주고 내가 챙길 것 챙기겠다, 이런 거래하는 식으로 교회 오지 말라는 그 말입니다. 하나님께 줄 것 주면 우회해서 내 것 얻을 것을 얻겠다는 그런 심보로 오지 말라는 그 말이에요. 

  

시편 115편 1절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하나님이여, 하나님의 영광에 우리가 따로 내 영광 챙기겠다는 것이 절대적인 훼방이 되고 방해가 된다는 그 말입니다. 누이 좋고 매부 좋고가 안된다니까요. 그게 피조물의 역할이 아니에요. 이제 정답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람 사는 목적은 지금과는 다른 인간되기 위해서, 지금의 나 말고, 지금의 내가 뭐냐, 그거 말고 이 보고 있는 인간 말고 다른 인간으로 바뀌기 위해서 주께서는 우리를 이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현재 자기 자리나 자기 모습에 대해서는 점점 더 미련을 두지 마세요. 현재 자기과거부터 이어진 자기 자신에 미련두지 마시고 주께서 준비한 새로운 것이 무엇일까, 그것을 잔뜩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그거 기대해도 괜찮아요. 목사님, 지금 말로만 합니까, 하는데 말로만이 아니고 성경대로 했어요. 

  

우리가 생각하는 나라는 것은 옛날에 흙으로 만들었어요. 고린도전서 15장에 나오는 말입니다. 흙으로 만들었는데 흙에서 창조된 것은 잊으시고 이제는 예수님이 십자가지신 부활의 영광이 있잖아요. 그게 하늘의 영광이에요. 예수님이 영광스러운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그게 바로 두 번째 부활이에요. 그거 기대해도 좋습니다. 흙에서 만든 창조는 잊어주시고 부활의 영광에서 만든 창조는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전에 흙에서 만든 인간은 죽어줘야 됩니다. 그냥 죽어주면 안되고 그게 죄로 바뀌어야 됩니다. 십자가로 가는 코스에서 부활이니까 그 코스를 밟아가야 돼요. 

  

주님께서 죄도 없으면서 십자가라는 코스를 밟아가야 됩니다. 주님은 자진해서 죄인 되시고 자진해서 심판받으시고 자진해서 저주받으셨거든요. 그 코스가 좁은 길이고, 그 코스가 영생으로 통하는 유일한 길, 하나밖에 없는 길이에요. 그 길로 우리를 가게 하면 우리는 죄가 되어야 됩니다.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어린애가 복잡한 놀이동산에 놀러갔는데 풍선 달라 해서 사줬어요. 풍선을 쥐고 있었는데 정신이 없다 보니 풍선이 손에서 날아갔다는 말이지요. 풍선이 날아가니까 그때서야 애는 자기 손에서 풍선이 날아갔다는 것을 알았어요. 엥, 하고 울면서 “엄마! 내 풍선 날라 가!” 하고 소리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엄마가 그걸 알고 얼른 풍선을 잡으려고 하는데 키가 작으니까 풍선이 날아가 버렸어요. 애는 주저앉아서 울어대고 있고요. 마침 옆에 있는 가게에서 홍보 이벤트를 하고 있었는데 거기에 풍선이 있었어요. 애가 우니까 이벤트하고 있던 직원이 풍선을 애한테 줬어요. 아까 그 풍선생각도 나고 새 풍선은 쥐고 엉거주춤 있는데 뒤에서 어떤 아줌마가 풍선을 하나 들고 왔어요. 

  

“얘야! 네가 잃어버린 풍선이 여기 있어.”라고 줬어요. 아까 놓쳤던 풍선이 그 아줌마 손에 들어와서 가져온 겁니다. 그래서 애한테 풍선이 두 개다 된 겁니다. 실제로 있었던 일이에요. 이건 조작된 이야기가 아니에요. 지금 J문서, E문서 이야기가 아닙니다. 실제로 있는 이야기에요. 

  

인간은 자기육체를 자아가 못 이깁니다. 그리고 자아는 헛방이고 없는 거예요. 육체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파생된 것이 자아입니다. 추상적이지요. 풍선은 자아에요. 우리 인간의 신체가 있는데 그동안 ‘이 손톱 발톱 내 신체는 내 것’이라고 합니다. 신체에서 유발된 자아가 거꾸로 되어서 신체가 자아 것이라는 것, 내 것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신체는 하나님 것이니까 신체의 원래 자아는 우리가 아니고, 신체에서 만든 우리가 아니고 따로 계신 거예요. 신체의 주인이 따로 계시다는 것이 로마서 14장에 나옵니다.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고 했거든요. 고린도전서 6장에도 나오고. 

  

이게 우리것이 아니고 하나님 것인데 우리는 내 것이라고 여긴 겁니다. 날 때부터. 이미 날 때부터 모친의 죄 중에서 태어났는데 죄라는 것이 뭐냐 하면, 원래 주님의 것을 빼앗는 것이 죄에요. 육신은 주님의 것인데 내 것이라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몸이 아파서 어쩌면 좋으냐고 자꾸 하소연하는데 원래 몸이 아프든 안 아프든 간에 이게 내 몸이 아닌데 우리는 누가 아프냐 하면, 내가 아픈 거예요. 

  

내가 아픈데 그걸 놓쳤으니까 이게 자살할 거 같은 거예요. 놓치니까 어떻게 되느냐 하면, 다른 사람의 자아를 내 자아라고 우기게 되는 겁니다. 옆에 있는 이벤트풍선을 가져오듯이. 성경에 보면 원래 이 몸의 자아가 누구냐?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었거든요. 창세기 1장에 나옵니다. 지금 중요한 대목에서 조시면 안 됩니다. 

  

창세기 1장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들었다는 말은 육체자체는 의미 없는데 육체의 주인공과 연결이 될 때 이게 비로소 하나님이 원하시는 피조물로 완성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중간에 누가 끼어드느냐 하면, 마귀가 끼어들어서 진짜풍선이 가짜풍선으로 바뀐 겁니다. 이 육체는 내 것이라고 우기고 있는 거예요. 

  

창세기 3장에 보면, 내가 신처럼 되리라, 하는 거예요. 이 육신을 가지고 내 자아가 신이라는 것을 증명해보이겠어, 하는 식으로 내가 이렇게 훌륭하고 똑똑하다는 것을 내보이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고린도후서를 통해서 우리와 화목케 한다고 할 때 그 ‘우리’가 뭐냐? 흙에서 만든 그걸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만드신 그 육신을 갖게 되기 위해서 하나님의 형상에서 새롭게 창조한 그 우리를 우리라고 하는 겁니다. 

  

그게 어디에 나오는가? 17절에 보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해요. 그 새로운 피조물을 말하기 위해서 5장 15절에, 한 사람이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다 죽었다고 본 거예요. 흙에서 태어났냐, 그러면 다 죽은 것이 맞네, 그 말입니다. 이거 세월호 물에서 건지는 그것보다 더 중요하지요? 자기자식 죽었다고 3년째 울고불고 하는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지요? 

  

온 세상이 헛된 자아에게 뭉쳐서 그 자아를 위해서 살아가고 있어요. 그걸 그들은 네 자로 이야기해요. ‘민주주의’ 하늘나라에 무슨 민주주의가 왜 있습니까? 하늘나라에 민주주의 없어요. 참 사람들이 민주주의도 모르고. 민주주의라 하는 것은……, 참 설교시간에 진짜 이런 이야기는 안 하는건데. 

  

상식으로 들어놓으세요. 민주주의라는 것은 헛방입니다. 민주주의의 바탕이 뭐가 있는가 하면, 사유재산이 있어요. 존 로크의 사유재산. 민주주의란 사유재산 지켜줘, 내 재산, 내 생명, 내 가족 지켜다오, 이게 민주주의에요. 민주주의를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다 내것 지키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에 보면 내 것은 이미 마귀 것이 되었어요. 내 것은 없어요. 옛날의 풍선을 쥐고 있는 겁니다. 주께서 새로운 풍선을 줬는데 그 풍선은 뭐냐? 이 육체는 주님의 형상 것이지 네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런데 성도는 다행스럽게 풍선을 두 개를 쥐고 있어요. 진짜 그 애처럼 풍선을 두 개 쥐고 있습니다. 

  

풍선을 두 개를 쥐어줘야 어느 것이 가짜고 어느 것이 진짜인지를 알아요. 그런데 성령의 세례를 안 받으면, 주께서 성령으로 찾아오지 아니하면 달랑 풍선 하나만 쥐고 민주주의 하겠다는 거예요. 국가는 우리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줘야 국가고 대통령이라는 거예요. 대통령 파면되고 난 뒤에 큰소리 치고 있네요. 

  

세월호 사고 났을 때 빨리 구해서 내 자식의 생명을 지킬 때 내가 이 나라에서 살만 하다는 뜻입니다. 그게 뭐냐? 계속 마귀가 준 가짜자아를 계속 쥐고 있는 거예요. 교회 왜 오는가? 내 새끼 잘되기 위해서, 내 가족 잘되기 위해서 오는 거예요. 성경은 봐도 무슨 뜻인지도 몰라. 

  

화목케 했다고 하니까 아, 이거 지켜주려고, 우리를 천당 보내려고 우리를 화목케 한 줄로 알고 있어요. 2천년동안 교회는 그렇게 권력을 쥐어왔습니다. 사람들을 그렇게 속여 왔어요. 하나님은 새로운 인간을 위해서 화목케 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나타날 새로운 피조물보고 화목 하는 겁니다. 

  

그 이야기가 근거가 있으려면, 실제로 우리 인간하고 화목하지 않고 없는 인간을 위해서 화목케 했다는 그 근거를 대라고 한다면 저는 과감하게 구약의 이스라엘을 댑니다. 왜냐하면 화목이라는 말, 화목제라는 말은 인류최초로 이스라엘민족에게만 이야기했기 때문에 그래요. 

  

성경에 나와 있는 이 이야기는 오늘날 현대인에게 직접 다이렉트로 주어지면 안됩니다. 반드시 구약을 통해서 해야 돼요. 구약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으로서 없었던 민족이 새로 생긴 겁니다. 왜 없었던 민족인가? 히브리인들은 있었어요. 이런 말도 참 어렵습니다. 애굽에 있는 히브리민족이 이스라엘나라가 자동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거기에 홍해를 통과해야 되고 어린양이 죽어야 되는 거예요. 

  

그냥 멀쩡하게 가자, 그렇게 오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양을 잡아서 그 피를 보고 넘어간 증거물이 있어야 그게 이스라엘 돼요. 그리고 할례를 행해야 되고요. 할례, 유월절 어린양, 그리고 홍해건너기, 전부 이걸 가지고 하나님의 약속, 언약이라 하는 겁니다. 거룩한 내 백성이 되는 거예요. 

  

사람들은 언약 없이, “나는 하나님 인정한다, 하나님은 나에게 해줘.” 이런 식이에요. 중간에 언약이 없이. 잘 들으세요. 하나님은 인간하고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은 언약과 상대하고 언약이 상대해서 새롭게 생산된 민족들이 있어요. 그들이 이스라엘이에요. 다르지요. 

  

“나 여기 있으니까 하나님은 도와줘.” 이거하고 “나는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 다만 언약의 복주머니 안에는 내가 도와줄 영원한 내 백성이 들어있는데 그걸 언약을 통해서 터뜨리게 되면 그들이 바로 내 백성이다.” 이것은 다른 이야기에요. 

  

“하나님은 날 도와줘. 사랑의 하나님이라면서? 그러면 나를 사랑해.” 이거 하고 “모든 인간은 죽었다. 어떤 인간도 뼈다귀다. 하지만 그 죽은 인간가운데 하나님께서 새롭게 인간을 만들어서 그 만든 인간에게, 하나님이 고스란히 언약과 축복과 용서가 그들에게 해당된다.” 이거하고 이야기가 다른 겁니다. 

  

그래서 그걸 가지고 택하신 내 백성이라고 하는 거예요. 이것은 사람 꾀이기 용도가 아닙니다. 이것은 사람 꾀는 설교가 아니에요. 그러면 이스라엘에게는 왜 화목을 줬는가? 당신 말대로라면 인간하고는 화목이 상대가 안 된다고 했는데 이스라엘도 인간인데 화목했지 않는가. 

  

이스라엘한테 화목을 준 것이 아닙니다. 뭐냐? 이스라엘은 제사에 주목해야 돼요. 화목제물에 주목해야 돼요. 우리를 위해서 화목제물 주신 것이 아니고 제사 자체를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군으로 동원된 겁니다. 인간위주가 아니고 하나님이 벌이는 그 일 위주라니까요. 우리한테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예요. 

  

그 벌어지는 일이 뭐냐? 이스라엘에게 제사였고 그 제사가 번제와 소제와 속죄제와 화목제, 다섯 가지의 제사가 일어나는 겁니다. 그 제사 속에 무슨 일이 들어 있는가? 하나님께서 화목케 하실 새로운 피조물이 그 제사가 완료되면서 파생되는 겁니다. 생겨나는 거예요. 제가 이렇게 하면, “목사님, 왜 그리 복잡합니까?” 

  

복잡한 이유가, 너는 아니거든. 범죄한 인간은 아니라는 말이지요. 이 세상 모든 인간은 이미 악마에 의해서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이 아니에요. 악마의 인간이기에 하나님께서 일체 인간하고 상대 안합니다. 공산주의는 민주주의를 싫어하지요. 근로자들은 소위 빈곤한 삶을 싫어하고, 종교단체는 세속을 증오하고, 자본가는 노조를 증오하고, 지식인들은 개인적인 자유, 양심적인 자유를 증오하고, 여행자들은 국경을 증오합니다. 비자 때문에. 

  

젊은 사람들은 기성세대의 잔소리를 증오하지요. 잔소리 때문에. 노인들은 혁명을 싫어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죄를 증오해요. 이것을 로마서 5장에 원수 된 자, 너희는 나의 원수 된 자라고 해요. 인간은 하나님의 원수 편에 서 있는 겁니다. 마귀에 이미 소속되어있어요. 이미 마귀의 세간살이입니다. 

  

악마의 집의 세간살이에요. 누가 담 타넘고 나를 보쌈하지 않는 한 우리는 절대로 악마의 권세에서 못 벗어납니다. 이것은 종교가 아닙니다. 신에게 잘해보자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성의와 정성 다하면 복 받는다는 그것 아닙니다. 악마가 성경을 이렇게 보게 만듭니다. 

  

“스스로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는 사람은 그 노력을 가상히 여겨서 은총을 더할 것이다.” 이것이 2천년동안 교회를 유지했던 악마의 목소리입니다. 악마의 보이스. 스스로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면 그것을 하나님께서 가상히 여겨서 은총을 더욱 더해준다는 겁니다. 인간에게 납득이 되는 이야기에요. 평소에 그렇게 살아가니까. 

  

그런데 이것은 원수관계가 아니에요. 약간 철없는 관계지 원수관계가 아니라니까. 이렇게 할 것 같으면 자기가 노력하면 되는 거예요. 하나님 쪽에서 화목으로 넘어올 이유가 없어요. 노력만 하면 남보다 더 빨리 구원받을 수 있는데 뭐 때문에 하나님 쪽에서 화목케 하시겠습니까? 

  

화목이라는 말은 저쪽에서 손을 내밀지 않으면 이쪽에서는 희망이나 가망이 없다는 뜻이거든요. 화목을 하겠다는 그 말은 “너는 끝났어,” 그런 뜻이에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어떻게 하는가? 하나님의 제사제도에 그들을 일군으로 동원시키는데 일군도 되지만 재료도 돼요. 

  

인간의 죄를 죄로 만들어버립니다. 인간의 죄라 하는 것은 선악과에 의해서, 죄와 죄 아닌 것을 구분하거든요. 죄 지은 것에 대해서는 회개하고 착한 것에 대해서는 칭찬받을 생각하고 이것은 회개 안 해도 된다는 분류를 인간본인이 해요. 가짜풍선이 그렇게 생각해요. 선악과를 아는 인간이 그렇게 생각한다는 말이지요. 

  

그렇게 돼버리면 나쁜 짓 할 때마다 회개하고 나쁜 짓을 안 하면 회개라는 것은 성립이 안됩니다. 저 깊은 산속에서 혼자 사는데 회개할 것도 없는데 어떻게 합니까? tv도 안보고 라디오도 안 듣고 아무것도 안하고 그저 산나물 뜯어먹고 사는데 무슨 회개할 것이 있어요. 뭘 만나야 회개할일이 있지요. 간첩 만났습니까? 공산당이 싫어요, 뭐 그런 일 만났어요? 

  

한마디로 말해서 이겁니다. 화목이라는 오늘 본문을 준 것은, “네가 어디서 위반되었는지 너는 모르고 있지?” 그런 뜻이에요. 오늘 본문을 줘야 ‘야, 이것도 모른채 뭔가 위반했구나.’를 알아야 할 텐데 성경을 덮어버리면 우리는 어디서 위반했는지를 몰라요. 십자가 피를 왜 흘렸는지를 몰라요. 

  

잘나고 잘났는데 주님께서 왜 피를 흘리고 오버하고 난리냐는 말이지요. 떡국 해먹을 때 계란으로 지단을 만들잖아요. 지단 만들 때 계란을 풀어서 휘젓잖아요. 빵집에 가면 그 작업을 거품기에 넣어서 합니다.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죄, 또는 죄인을 섞어버려요. 혼합시켜 버리면 네 죄 내 죄 따로 없이 전부 다 형체가 뭉개져버립니다. 

  

인간의 죄를 죄로 만들어버려요. 그게 시편 51편에 나옵니다. 다윗은 “내가 간음했습니다. 내가 살인했습니다.” 라고 하다가 그게 아니고 “죄가 나로 하여금 살인케 했고 죄가 나로 하여금 간음케 했습니다.”라고 자리를 바꿔버려요. 나라는 것이 빠진다고요. 그러면 뭐냐? 하나님은 번제를 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상한심령이라는, 이미 혼합된, 멀건 용액에서 이미 상한심령의 덩어리가 된 그중의 하나에요. 

  

그 중에 걸죽하게 당겨보니 그게 이스라엘 왕이 된 거예요. 이스라엘과 다른 민족의 차이가 뭐냐? 이스라엘은 개인적으로 죄인이다, 의인이다, 이게 판정이 되지만, 형체가 유지가 되지만 이스라엘은 완전히 거품 내는 거품기에 들어가서 전부 다 똑같이 흰자나 노른자와 관계없이 다 형체가 뭉개져버립니다. 

  

그렇게 하고 난 뒤에 뭘 만나는가? 제사를 만납니다. 무슨 제사? 번제, 속죄제, 속건제, 소제, 화목제를 만나요. 제가 이렇게 하면, “그러면 그 제사를 통해서 새로운 피조물이 나옵니까?” 새로운 풍선 나옵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나와요. 하나님의 형상에 의해서 새롭게 창조된, 아무 탈이 없는, 이 모든 것이 바이러스가 제거된, 모든 죄를 죄로 돌리지 아니하시고 하나님께서 합격판정을 내린 거기서부터 새로운 피조물이 나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9절에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 다음에 보세요.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가 원형이 되고 그 원형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는 거예요. 17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안에 있으면 뭐다? “새로운 피조물이다.” 

  

그러면 예수님은 뭐냐? 예수님은 이미 아버지와 화목된 상태, 새롭게 형성된 하나님의형상인데 그 형상에서는 어떤 요소가 나오는가?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는 내용이 나온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그게 구약의 제사에 나옵니까? 나오지요. 

  

어떤 제사 말입니까? 번제 말입니까, 소제 말입니까, 속죄제 말입니까, 속건제 말입니까, 화목제 말입니까? 그것이 화목제로 나와요. 제사가 하나만 있으면 우리 아마추어들이 좀 편할 것인데 제사가 다섯 가지가 됩니다. 제가 이런 소리 할 때 딱 느끼는 느낌이 뭐냐 하면, “목사님, 다섯 가지 다 외워야 됩니까? 그래야 새로운 피조물 됩니까?” 하는데 걱정 말아요, 그대. 제가 요약해드리겠습니다. 

  

인간은 죄인이 아니고 죄입니다. 죄기 때문에 그 죄를 번제로 묘사를 해줘요. 제사 순서는 먼저 속죄제부터 들어가요. 속죄제 들어가고, 번제 들어가고, 화목제 들어가는데 레위기 1장에 나오는 번제는 뭐냐? 모든 제물은 위에서 다 태워버립니다. 번제할 때 제물 드린자가 안수하고 그 제물은 제단에서 내장이든 고기든 다 태워버려요. 

  

물론 양이나 소나 흠 없는 제물을 가져오게 되면 안수를 해서 흠없는 그 제물이 흠 있는 인간을 대신해서 하나님 앞에 처벌을 받는 거예요. 어떤 남자분이 40대인데 선을 본 모양이지요. 선보면서 그 남자분이 다짐을 한 것이 있답니다. 선 자리에서 내가 종교이야기는 절대 안한다. 복음 이야기는 절대 안한다고 다짐을 했는데 세상이 자기 마음대로 안 되지요. 

  

그 여자 분이 하는 말이 “성경은 뭐 때문에 있습니까?” 이렇게 슬슬 성경 이야기를 끄집어냈어요. 그 남자 분은 십자가마을의 복음을 좋아하는 분이 되어서 “성경은 주님을 증거 하는 것이 성경입니다.” 이렇게 하니까 여자 쪽에서 바짝 화가 난 거예요. “그러면 대속은 뭡니까?” “대속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함입니다.” 

  

그랬더니 삐져서 그걸로 끝났어요. 왜냐하면, 우리를 위하여, 나를 위해서 대속했다는 말을 왜 안 집어넣었느냐는 말이지요. 나 살기 위해서 예수님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왜 안 끄집어냈느냐는 그 말이거든요. 얼마나 교회에서 그런 걸로 교인들을 끌어 모았겠어요. 번제라는 것은 구원받을 자격 없다는 거예요. 

  

제사 드린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 아닙니다. 번제라는 제사를 내가 드린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에요. 그렇다면 맨 날 냄새피우면서 제사 드리면 되겠네요. 여기는 제단도 없고 벌건 불도 없잖아요. 주머니에 라이터는 있는지 모르겠지만 양 잡는다든지 그런 것은 없지요. 저 뒤에 쥐나 몇 마리 있을까 다른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뭘 잡고 그런 것이 없어요. 

  

번제라는 것은 다 태우는 겁니다. 흠 없는 것을 다 태우는데 놀라운 사실은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께 흡족한 냄새가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는 것은 결국 정리해보면 사람 사는 목적이 뭐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영광이 된다는 것은 뭐냐? 네 주제파악을 하는 것. 내 주제가 어때서? 너는 인간도 아니고 물컹한 죄에서 튀어나오는 물방울에 지나지 않음을 아는 거예요. 

  

그러면 그걸로 끝납니까? 그곳에서 다른 인간이 나온다는 그 사실. 없는데서 나오고 죽은데서 나온다는 사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이미 만천하에 공개되었잖아요. 이게 안 믿겨지니까 문제인 거예요. 풍선을 하나만 지고 있으니까 이 가짜 풍선에 뭘 그리느냐 하면, 십자가 그려놓고, 금식 했다는 것 해놓고, 선교 헌금했다는 것 해놓고, 십일조 한 것 그려놓고, 이거 들고 천당 가려고 하는 거예요. 

  

풍선이 내려앉으려고 해요. 너무 하는 짓들이 많아서. 40년 동안 신앙생활 하다 보니까 목사니, 장로니, 신학교수니 해서 풍선 껍데기에 다 해놨는데 바늘로 콕 찍어서 터뜨리고 싶어요. 이거 쥐고 거기서 십일조 하고 선교하고 전도하고 예배참석하고 백날 해도 소용없어요. 다른 풍선이 와야지요. 

  

그리고 그 풍선은 내 육체가 내 것이라는 주장을 하지 않습니다. 주의 것이에요. 주의 것으로서의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자아를 우리에게 주는 겁니다. 예수님과 연결된 자아를. 번제는 다 태우는 거예요. 그러면 “목사님, 화목제 이야기하다가 왜 번제 이야기 합니까?” 화목제는 뭐냐 하면, 번제가 진행되고 난 뒤에 그 번제물 위에 화목제를 드려요. 순서가 그렇습니다. 

  

이것이 레위기 3장과 7장에 다 나오는데요. 화목제는 번제물 위에 제물을 얹는 겁니다. 화목제는 다 태우는 것이 아니고 기름부위만 골라서 태워요. 이것은 기름과 몸체부분을 분리한 아벨의 제사가 점점 다섯 가지 제사로 확장된 거예요. 하나인데 부채살처럼 벌어진 겁니다. 번제물위에 드림으로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이 다 죽은 상태에서 그 다음에 화목제물 드리는데 화목제물의 특징은 뭐냐? 

  

화목제물은 다른 제사와 달리 그 드리는 제물에 대해서 제물 드리는 자나 제사장이 다 같이 먹을 수가 있어요. 기름 부위는 단에서 태우고 그 나머지 고기는 다 같이 먹을 때 이것은 내가 준 것을 먹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맛있게 드시는 음식을 하나님 쪽에서 주시는 음식을 우리 속에 집어넣는 겁니다. 

  

제가 좋아하는 음식중의 하나가 고추 쪼개서 그 안의 씨 다 빼고 거기에 고기다진 것하고 잡채 섞은 것 넣어서 튀겨내는 그겁니다. 제가 여러 번 이야기 했는데 저에게 그거 해주는 사람은 없습니다만. 주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 내장을 째고 하나님이 만족하는 그것, 화목한 그것을 우리 안에 집어넣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만족을 운반하는 운반책이 되는 겁니다. 

  

껍데기가 되는 거지요. 이게 새로운 피조물이에요. 새로운 피조물은 내가 이 세상에서 어떤 권력을 갖고, 명예가 어떻고, 한 달 수입은 어떻고, 이걸 집어넣는 것이 아니고, 나 같은 죄인, 나 같은 상한심령에게 주께서 나의 죄를 나에게 돌리지 않는 요소를 장착하고 집어넣고 탑재했다는 것을 증거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성령 받은 예수의 증인이에요. 

  

속건제는 기름은 다 태우고 속죄제의 경우는 기름은 제단에서 태우고 나머지 내장부터 고기까지는 진 밖의 불결한 곳에 가서 다 태워버립니다. 제사 다섯 가지가 다 달라요. 소제는 곡식인데 곡식은 갈아서 태워요. 번제와 같은 겁니다. 무조건 다 태워버려요.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보통 번제라 하는 것은 무교병,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제물을 드려야 돼요. 

  

누룩이라는 것은 인간을 망치게 했던, 처음에 악마가 인간에게 선악과를 따먹으라고 한 그 요소를 누룩이라고 합니다. 죄 지을 때만 죄가 아니고 죄를 죄가 되도록 만드는 그 씨앗이 있어요. 핵심부분이 있습니다. 티눈이 바깥으로 딱딱하게 뭉쳐 있는데 그 안 중심에 보면 동그란 것이 박혀 있어요. 그 티눈 같은 역할이 뭐냐? 

  

처음에 아담과 악마가 만났을 때 들어왔던 바이러스 같은 거예요. 그게 바로 누룩입니다. 바리새인이 그걸 갖고 있어요. 누룩이라 하는 것은 빵의 이스트를 말하고 그것이 없는 떡을 바쳐야 되는데 화목제는 뭐냐 하면, 누룩이 있더라도 괜찮다는 겁니다. 레위기 7장 13절에서. 

  

누룩이 없는 것을 무교병이라 하고 그것은 번제 때 씁니다. 누룩이 있는 것은 유교병, 酵(교)라 하는 것은 누룩이고 유교병, 누룩이 있는 떡이라는 겁니다. 그 누룩이 있는 떡으로 화목제를 드리는 것인데 이게 뭐냐? 죄가 있든 없든 묻지 않겠다는 거예요. 네가 현재 어느 상태의 죄가 있는지 그것도 묻지 않겠다는 겁니다. 

  

네가 교도소에 갇혔는지 밖에 나왔는지 그것도 묻지 않겠다는 거예요. 일체 모든 누룩여하와 관계없이 하나님께서는 번제, 모든 것을 해결했고 그 다음에 고추에 맛있는 내용물을 집어넣듯이 하나님의 맛있는 음식을 집어넣는데 주님의 화목을 담는 운반체로서 껍데기에 대해서 문제 삼지 않겠다는 겁니다. 

  

그게 화목제물이에요. 이 화목제물이 마지막 제사입니다. 요한 1서 4장 10절에 보면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도바울의 이야기가 신화입니까? 조작된 겁니까? 십자가가 있는데, 실제로 사흘 만에 부활되었는데. 

  

사람이 죽었다가 부활되었다는 말은 의미가 뭐냐? 사람들 보기에 그냥 죽었다가 살아났겠지. 아닙니다. 그 의미가 이렇게까지 계속 파생되고 퍼지고 있는 거예요. 복음이라는 이름으로. 복음이란 뭐냐? 

  

고맙게도 나하고 상대하지 않고 하나님이 나 말고 예수님과 대신 상대하셔서 거기서 얻은 모든 성과를 그냥 운반책으로, 운반하듯이 우리에게 주어짐으로 말미암아 아들도 아닌 게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게 된, 호부호형하게 된 양자의 영을 받게 하셨으니 이제는 아들이 누려야 될 모든 영광을, 마귀의 종인 우리가 아들의 위상으로 바뀌면서 예수님이 누려야 될 모든 영광을 예수님의 신부의 이름으로서 다 누린다는 그 이야기로서 요한계시록 마지막이 끝이 납니다. 

  

“오소서 나의 신랑이여. 어서 오시옵소서.” 방금 설교한 이 모든 내용이 동화고 전설이고 조작된 것이라고 칩시다. 그러나 십자가와 부활은 어느 누구도 그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잘 되기 위해서 교회 나오게 마시고 내 몸 이 육신이 누구 것인가를 깨닫게 하옵소서. 아무리 내가 바르게 살고자 해도 이 육신이 밥을 달라고 하면 훔쳐서라도 돈을 벌어야 될 이 육신에게 따라가지 못할 우리의 입장인 것을 우리가 너무나 숨기고 살았습니다. 이제는 육신의 주인공 되시는 주님을 통해서 주 앞에 영광 돌리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