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강-고후 5장 13-14절(사랑에 미친 자)170305-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후서 5장 13-14절입니다. 신약성경 290페이지입니다.
고린도후서 5:13-14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복음은, 물론 유대교도 마찬가지고 이 신약시대에 나오는 이 모든 이야기가 인간의 지혜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지혜에서 나온 것이지요. 그것을 두자로 기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기적을 밑에 깔고 본문이 설명 돼야 돼요. 만약에 이 기적이라는 것을 인정치 아니하면 이 본문이 설명되지 않습니다.
바다가 갈라진다. 그럴 리 있겠어, 한다면 구약의 출애굽에 대해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여리고성이 그냥 돌기만 했는데 무너졌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 뒤에 나오는 것을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에 오게 되면, 바다가 갈라진다든지 혹은 여리고성이 무너진다는 자연현상의 놀라운 기적과는 전혀 상관없이 먼가 굉장히 조용합니다.
그래서 옥에 갇힌 세례요한이 의구심이 들어서 전갈을 보내 예수님에게 물었어요. 예수님 당신이 진짜 오실 메시아가 맞습니까, 라고 물은 겁니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에 대해서 그렇게 질문한 이유가 있어요. 자기가 받은 하나님의 계시는 뭐냐 하면, 마지막 때 하늘나라가 오게 되면 불세례와 성령의 세례를 주게 되어 있는 거예요.
불세례란 세상을 불로서 싸질러 버리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은 인정하겠는데 조용해도 너무 조용해요. 아무 일이 없어요. 세상은 그냥 그대로 가고, 권력체도 그대로 가고, 해와 달과 별도 그냥 갑니다. 동방박사 올 때는 별이 이동했지만 그 뒤에는 별이 꿈적도 안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나버렸는가?’ 그래서 유대인들은 여전히 뭘 기다리느냐 하면, 기적을 기다립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네가 어떤 기적을 제시할 것인냐?”라고 할 때에 그들은 자연현상으로 네가 메시아 됨을 증명하라는 조로 시비를 걸은 거예요.
그럴 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보여줄 마지막 기적이 있는데 그 기적은 뭐냐? 요나의 기적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요나의 기적이라는 것은 죽었다가 살아나는 기적입니다. 만약에 자연현상이 기적이라면 자연현상 속에서 내 몸은 기존의 내 몸을 유지해가요.
잘난 이 몸은 계속 살고 싶어 하고 “대 자연아, 나를 도와 달라. 내가 살고 싶으니 도와 달라.” 이런 기적을 구약 때 유대인들이 기다렸다면 예수님께서는 “이제는 그렇게 지키고 싶은 네 몸을 다른 몸으로 바꿔줄게.” 바꿔주는데 어떻게 바꿔주는가? 죽었다가 살아나는 기적을 네 몸에 일어나게 되면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했던 기적의 현상입니다.
나는 계속 살아야 되겠습니다, 라고 고집하는 네 몸에 대해서 그렇게 고집하는 것을 꺾어버리고 죽음에 담갔다가 그 죽음속에서 다시 살려내는 새로운 몸으로 교체를 시켜주는 기적이 주님 앞에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 기적을 실시하는데 있어서 주님께서는 강력하게 차단시키지요.
뭘 차단시키느냐 하면, “그냥 이 몸 가지고 계속 나는 천국까지 개기겠습니다. 이 몸이 이 몸에서 어떤 선한 것, 거룩한 것, 고상한 것, 다 여기에 투자를 해서 이 몸이 괜찮은 몸으로 개선되어서 이 몸 그대로 천국 가겠습니다.” 하는 그 인간들의 타고난 종교성을 주님께서는 강력하게 저지하지요.
글쎄 그런 방식이 아니라니까? 내 몸을 어떻게 살릴 것인가, 하는 것은 방향이 잘못되었다는 거예요.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라고 했어요. 살고자 하지 말고 이 몸을 어떻게 취소시킬 것인가, 몸에 대한 취소에 관한 기적이 주님에 의해서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옥에 갇힌 세례요한에게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세례요한아, 네가 지금 그냥 이 유대인들인 자기백성을 건진다고 생각하는데, 그래서 나에게 그런 질문을 하는구나. 앉은뱅이가 걸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소경된 자가 보게 되며, 죽은 자가 살아날 때, 내가 그렇게 할 때 메시아인줄 알아라.”
이 말은, 멀쩡한 자가 귀머거리 되었다가 들어야 되고, 멀쩡한 자가 앞 못보는 소경되었다가 봐야 되고, 멀쩡한 자가 앉은뱅이, 걷지도 못하는 자가 되었다가 일어나야 되고, 그 모든 기능의 의미의 종합된 것은, 인간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게 하는 그 과정 속에서, 그렇게 나에게 그런 일을 퍼부어주는 그 분이 바로 메시아라는 거예요. 그분이 하나님이 준비한 메시아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자기의 과업을 달성할 때에 열두 제자마저 예수님을 이해할수 없는 입장이라는 것을 우리가 이해해야 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바꿔치기 하는 그 몸을 이해 못하고 이 몸이 어떻게 건강하게 오래 사느냐 하는 그것만 계속 신의 기적이라고 우기고 있고, 잘 먹고 잘사는 그것에 행복의 요건이 있다고 보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원하는 기적을 베풀어줬으면 인기가 높아져서 추종자가 많이 생길 것인데 인간들이 생각지도 못한 요나의 기적, 죽었다가 살아나는 그 죽어야 된다는 그 기적을 왜 베푸는가? 예수님이 보여주고자 하는 그 기적은 죄짓기 전의 원형을 보여주는 기적을 베푸는 겁니다.
아담이 죄짓고 난 뒤에 인간은 이미 원형을 잃어버렸어요. 우리는 죄 짓기 전을 이해를 못해요. 죄 지은 상태의 아담의 몸에서 새끼 쳤기 때문에, 그래서 그 dna가 계속 퍼져 있기 때문에 우리는 죄 짓기 전의 상황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습니다. 그 원형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어요. 그 원형이 뭐냐? 하나님이 처음 인간을 만들었을 때에 그 순수함에 접근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의 기적이라 하는 것은, 인간이 죄짓기 전의 인간은 하나님께서 어떤 취지와 의미를 담아서 만들었는가, 그 뜻을 드러내기 위해서 자기백성을 사용하고 그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면 죄짓기 전의 처음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일단 봐야 되지요. 주례할 때 이 본문으로 많이 했는데요.
창세기 2장 24절, 25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여기 보면 아담과 그 아내를 ‘두 사람’이라고 했어요. 두 사람이라고 했고 24절에서는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라고 했어요.
두 사람이 두 사람으로 유지한 채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두 사람을 한 몸으로 만들겠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렇게 두 사람이 한 몸이 되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무화과 나뭇잎으로 옷 입는 것 자체가 원형이 아니고 하나님이 만든 그 인간이 아니라는 거예요.
이게 원형입니다. 원형을 보면서도 우리는 납득이 안 되지요. 어떤 점에서 납득이 안 되느냐 하면, 어떻게 두 사람이 한 몸이 되느냐는 거예요. 우리의 논리로서는 두 사람은 어디까지나 두 몸이에요. 두 사람이 두 몸이라고요. 그런데 두 사람이 두 몸인데 각기 다른 성을 갖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남성이고 하나는 여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새롭게 결합된 몸은 남성이다 여성이다 할 게 없어요. 초월적인 몸을 부여받습니다. 남성 여성 요소가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 몸을 부여받게 돼요. 이런 이야기가 납득이 안 되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메시아나 신이나 예수나 부처나 뭘 찾을 때 내가 지금 이 살아있는 몸을 어떻게 내 소원대로, 행복이 되는 쪽으로 조건을 맞춰주세요, 라고 성당이나 절이나 교회 와서 빕니다.
그러나 살아계신 주님께서는 네가 원하는 그런 메시아가 아니고 나는 원형을 보여주는, 기적이라는 이름으로 원형을 보여주는 작업을 실시하는 메시아로서 너희에게 다가가겠다. 그것은 납득이 안 되지요. 납득이 안 되니까 기적이잖아요. 납득이 되는 메시아는 우리가 골라잡은 가짜입니다.
두 사람이 어떻게 한 몸이 됩니까? 두 사람이 한 몸이 되려면 내가 생각하는 나라는 이 몸은 하나님이 인정하는 몸이 아님을 내가 인정을 해줘야 돼요. 이 가짜 몸, 이걸 속임수라 하는데, 뭔가 자꾸 내 몸에 내가 속고 있어요. 내 몸에 밥을 달라 하면 이것이 옳은 일인 줄 알고, 내 몸이 만약 건강을 원할 때 건강을 주면 그게 진리인줄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주께서 생각하는 것은 다른 몸인데 우리는 어디에 집착하고 있느냐 하면, 내 몸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에 집착합니다. 제가 이걸 왜 속임수라고 하느냐? 하나님께서 구약과 신약을 주면서 그 성경전체가 어디에 집대성되느냐 하면, 하나님이 따로 이 땅에 보내주신 그 한 몸에 집약하도록 성경을 준 거예요.
요한복음 5장 39절에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라고 되어 있어요. 흩어져 있는 모든 개별성을 소환해서 하나님이 하나의 형상으로 집중시키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흩어져 있는 모든 개별성을 어떻게 하나에 집중할 수 있습니까? 군대도 그게 안돼요.
군에서 다 같이 머리 깎게 하고 같은 제복을 입혀서 훈련시키고, 함께 ‘보람찬’ 하고 군가 불러도 막상 자대에 가게 되면 달력에 가위표 그어가면서 언제 제대하느냐, 언젠가 나만의 개별성을 되찾는 그날이 오기만을 고대합니다. 군에서 강제로 집단화시킨 이것은 억지로 국가의 폭력에 의해서 된 것이지 자기가 의도해서 된 것이 아니에요. 자기가 원해서 된 것이 아니잖아요.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으면 제대한지 40년이 지났어도 꿈에 나타나요. 제대 했는데 아직 제대안한 상태로 되어 있어가지고 깨고 나면 식은땀이 죽 흐르는 거예요. 얼마나 억지스럽습니까? 그런데 현실에 돌아와서 이 개별적인 몸을 오직 나에게만 집약해서 살려고 하니까 다른 사람과 온전한 연합이 될 수가 없어요.
다른 사람들에 둘러싸여서 그 사람들의 시선을 막 쬐니까 내 몸이 다른 사람들 속에 살면서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자꾸 부끄러워하는 현상이 일어나요. 부끄부끄, 자꾸 부끄러운 거예요. 어느 정도 되어도 부끄러워요. 스물에 사법고시에 합격해서 초고속 승진검사장이 되고 민정수석이 되어도 나중에 검찰청 들어갈 때는 부끄럽다니까요. 우병우 이야기입니다.
정상이 아니에요. 뭔가 착오가 있어요. 나는 이렇다, 하는 그 규정에 뭔가 착오가 있습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뭔가 우리는 이미 망가져 버렸고 본래의 나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차단막에 갇혀 있는 국면입니다. 만약에 갇혀 있는 이 몸에서 누가 죽었다가 그 죽음세계에서 빠져나갔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백 프로 미친 사람이에요.
오늘 본문 봅시다. 13절에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라고 되어 있어요. 기적은 뭐냐? 기적이 오게 되면 우리는 미친놈이 될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미쳤다는 말은 뭐냐? 이 세상 사람들이 개별적으로 남에게 부끄러워하지 않기 위해서 온전한 척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이 사회입니다. 정상인이 되고자 분투노력합니다.
자기에게 있는 하자를 줄여가면서. 그러나 사도바울은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미쳐야 된다. 정상인 되려는 것을 포기해라. 정상인 되어버리면 지옥 가는 저들과 다를 바가 뭐가 있느냐?” 하는 겁니다. 울산의 어느 집사님이 저 대접한다고 정신이 좀 없으셨던지 차에 키를 놓고 문을 잠가버렸어요. 차키는 차 안에 갇혀 있는 셈인데 오늘쯤 풀었는지 모르겠어요.
만약에 우리가 갇혀 있고 외부에서 열어주지 않으면 못나온다면 정말 갇혀 있는 거지요. 그런데 어느 날 내 쪽에서 아무 조치도 없었는데 그 갇혀 있는 것이 바깥으로 나왔다. 그러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네가 미쳤구나.” 그렇게 되는 겁니다. 어떤 남자 세 명이 용광로 속에 들어갔는데, 죽은 줄 알았는데 멀쩡하게 살아서 불속에서 사우나하고 있더라. 이거 미친 겁니다.
다니엘 세친구 이야기에요. 지금 성경은 미친 소리를 쫙 깔아놓은 거예요. 제정신인 사람들은 성경해석 못합니다. 그런데 미쳤다고 할 때 그 앞에 단어가 있어요. ‘우리’에요. 하나님의 기적을 받아서 특수한, 갇혀 있었던 예수님이 아무 조치도 없었는데 알아서 나왔다는 것이 정상인체 하고 있는 우리 입장에서는 “뭐 그럴 리가 있어요? 어떻게 사람이 죽었는데 다시 부활을 합니까? 그건 미친 소리에요.”라고 하는 것처럼 예수님만 미쳐서는 안돼요.
그런 쪽이라면 예수님이 미친 것이 맞아요. 그런데 예수님만 미쳐서는 안되고 예수님과 똑같이 미치지 아니하면 우리는 천국 못갑니다. 윤리도덕으로 무장하지 마세요. 교회 와서 착한 척 하지 마세요. 그런데 미쳤다는 이 말이 그냥 미침으로 스톱되는 것이 아니고 방향이 있어요.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고 합니다. “사도바울은 미친 것이 아니에요. 사도바울은 예수님처럼 성령받은 자잖아요.”라고 이해를 하고 그것을 인정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보기에 똑같이 미친 집단이 되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뭘 이야기했습니까? “예수님은 우리 죄 때문에 죽었다가 아무 한 것도 없는데 우리를 의인 만들기 위해서 다시 부활했습니다.” 로마서 4장 25절의 그 이야기를 한 거예요. 그 이야기를 할 때 스스로 개별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의미를 두려는 사람에게는 그런 이야기가 미친 소리라는 말이지요.
아무조치도 없는데 왜 우리가 의인 돼버려요? 맞잖아요. 내가 착해지려고 하지도 않았는데 주님 보시기에 네가 의롭다고 판정을 받았다는 이것이 말이 되는 이야기입니까? 이게 미친 짓이라는 말이지요. 그런 사람도 있고, 이유는 모르겠는데 왜 그 이야기가 납득이 되는지 헤아릴 수는 없는데, 사도바울이 이야기하는 그것이 그동안 궁극적으로 아무리 찾고 또 찾고, 철학과 과학에서 온갖 노력을 해도 도저히 이 세상 어디에도 나올 수 없는, 영세 전부터 감추어진 하나님의 영원한 비밀이라고 믿어지는 것을 어떻게 합니까?
그러니까 그걸 보고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너도 나하고 똑같이 미쳤구나.”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나만 미쳤는지 알았는데 너도 미쳤네.”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말이지요. 13절에 “정신이 온전하여도”라는 말을 왜 했습니까? 소위 정신이 온전하다고 해서 이게 이해될 내용이 아니라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한 말 중에서 장식으로 되어 있는 것 다 떼어내 보자. 다 떼어내고 깔끔하게 남는 것이 뭐냐?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걸 복음이라고 해요. 그러면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한 그것을 내가 받아들이면 될 것이 아니냐, 하는데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네가 온전한 정신으로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내가 보기에는 신자가 아니야.”라는 뜻이에요.
사람이 미치지 않고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를 했는데 네가 온전한 정신으로 받아들였으니까 백퍼센트 가짜라는 겁니다. 우리끼리는 다 같이 다른 사람들 보기에 미친 자가 되어야 되고, 미친자가 되어보니까 그 안에서 인간의 행함, 인간이 애써서 노력해서 된 결과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 오늘 13절,14절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냐?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합시다, 하는 우리 이야기 아니에요.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이 예수님 이야기 앞에서 우리는 뭐냐? 우리는 내가 하는 일을 다 잊어버려야 돼요. 농사를 짓느냐, 지금 교사냐, 장사를 하느냐, 백수냐, 다 잊어버려야 돼요. 이런 것 생각하지 마세요. 혹은 우리가 공직에 있느냐, 하는 그런 것들 아무것도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는 나 자신에 대해서 취소되어야 됩니다. 만약에 내가 이성적으로 똑똑하다고 우긴다면, 내가 성경 이것도 알고 저것도 안다고 우긴다면 그것은 주께서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그 똑똑한 그 몸은 소멸되어야 되기 때문에 그래요. 바꿔치기 해야 되기에. 똑똑한 그 이성과 똑똑한 그 계산적인 그것, 그 몸을 주께서는 폐기처분 하려고 하는 거예요.
똑똑한 몸을 폐기처분하면 우리에게 주어지는 몸은 뭡니까? 사랑의 미친 자가 되는 거예요. 이제는 똑똑함이 나를 지배했다면 이제부터는 주님의 사랑이 나를 지배하는 거예요. 주님의 사랑이 나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사랑이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면 미친다는 그 말은 뭐냐? 통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한 번 미친 것은 중간에 중단됨이 없다는 거예요.
“사랑에서 계속 도망쳐 봐라. 끝까지 따라갈 거야.” 이것이 구약의 아가입니다. 여자는 싫다고 하는데 죽자고 남자가 따라옵니다. 스토커도 그런 스토커가 없네요. 내가 보니 인류 최초의 스토커 같아요. 여자가 부담이 되어서 문을 닫았는데 남자가 문 닫는 그 틈새에 손을 그대로 집어넣습니다.
여자가 “뭐야, 이거 정말! 당신하고 엮이기 싫단 말이에요.” 하니까 남자가 하는 말이 “내가 가만 보니 당신이 어젯밤에 이슬 맞고 감기 들렸는데 판콜 하나 가져왔으니까 이거 드세요.” 손에 몰약을 쥐고 “나는 잊더라도 이 약은 드시고 오늘 편히 주무시면 내일은 낫습니다.”라고 하는 겁니다.
문틈에 손이 끼는데도 불구하고 판콜 A는 놓지를 않네요. 이 지독한 사랑, 지독한 사랑이에요. 당신이 거절한다고 해서 거두어질 사랑이 아니라는 겁니다. “심지어 당신이 죽더라도 죽음에서 당신을 건져낼 거예요.” 이게 아가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랑하는 그 남자의 직업이 뭐냐 하면, 예루살렘의 왕이에요.
다윗언약에 의해서 왕이고 그 다윗언약의 자손이 어디까지 이어지느냐 하면, 메시아까지 이어지는 노선입니다. 장차 올 메시아는 아가서의 술람미여인을 지독하게 사랑했던 그 남정네의 지독한 성품을 그대로 인수받아서 예루살렘의 왕으로서 메시아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처음 예루살렘 왕 솔로몬은 감기약 주는 그 정도인데 마지막 오는 그 분은 감기약이 아니고 십자가 피를 찍어서 “이거 발라서 당신의 몸을 원형적인 몸으로 부끄러워하지 않는 몸으로 바꿀 거야.”라고 하는 겁니다. 이 지독한 사랑을 누가 저지할 수 있습니까? 누가 감히 막아설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제가 죄를 지으라, 그 말입니다. 죄를 지어야 돼요. “내가 지은 죄가 센지 이 죄를 용서해주시는 당신의 사랑이 센지 한 번 붙어 볼까? 붙어 봐? 누가 센지?” 인간의 이성은 하나의 개별적인 자기 몸에 집착합니다. 내 몸은 내가 살리는 거예요. 제가 지난 목요일에 간만에 영화를 봤습니다.
<사일런스> 우리말로 하면 ‘침묵’인데 그 영화를 봤어요. 7천 원짜리 조조영화를 봤는데 영화 끝날 때 까지 저 뒤에 여자 한 분 있었고 중간에 나 하나, 딱 둘이 봤어요. 1640년대 일본에서 있었던 천주교의 순교이야기입니다. 그걸 누가 알아서 보겠습니까? 20만 명의 신자들이 천주 교리를 믿고 죽음을 당했어요.
그런데 감독이나 원작의 소설가가 굉장히 궁금한 것이 있어요. 옛날에는 천주교 믿는다고 20만 명이나 목숨을 날렸는데 요즘 천주교인들은 어디에 목숨 걸지, 그게 궁금한 거예요. 해답을 모르겠다는 거예요. 일본이 종교의 자유를 줘서 순교를 안 당하는 것인지? 만약 지금도 에도시대와 같다면 20만명씩 죽어나갈 것인지?
심지어 20만보다 더 많은 40만이나 혹은 백만이 죽어나간다면 과연 그게 순교자가 맞는지, 그게 되게 궁금한 거예요. 감독이나 원작의 소설가는 기독교 신자가 아니니까 그게 굉장히 궁금한 거예요. 순교를 통해서 하나님을 믿는다, 안 믿는다는 것이 결정되는 시대가 이미 훌쩍 지나버렸거든요.
지금 교회 간다고 누가 죽입니까? 북한 말고는 없거든요. 그럴 때 내가 신자인지 아닌지가 어떻게 판정이 되는지 거기에 대한 대책이 없다는 겁니다. 그 영화가 하는 이야기에요. 그래서 그 영화를 보여줌으로서 각자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지의 개인질문으로 돌린 거예요.
뭘 모르느냐 하면, 오늘날 천주교 성당 다니고 교회 다닌다고 해서 안 믿는 사람들은 그 사람들을 신자라고 착각하고 있어요. 신자 아닙니다. 왜 신자 아니냐? 그 영화에 보면 이런 중요한 힌트가 나와요. 포르투갈에서 신앙 좋다고 소문났던 그 신부가 일본에 와서 배교를 하는데 신앙을 배신하는 그 핑계가 뭐냐 하면, “나는 의학과 천문학에 관한 책을 짓는 것으로 봉사해드리겠습니다.”라고 나와요.
우리교회 게시판에 다 올려놓았으니까 좀 보세요. 그게 무슨 말이냐 하면, 과학이 옛날 일본 에도시대 때 핍박했던 실체라는 사실을 감독이나 원작자나 모르고 있어요. 과학이 종교라는 사실을 몰라요. 종교의 범주를 소위 기독교나 천주교보다 더 넓게 포섭했다는 사실을 몰라요.
그 과학에서 나온 것이 뭐냐 하면, 민주주의입니다. 민주주의는 뭐냐 하면, 가족공동체의 안정의 이념을 보장해줘요. 옛날의 봉건제가 있을 당시의 국가는 깡패거든요. 옛날 순교자들은 내 가족은 내가 지킨다는 것에 대해서, 그 깡패 같은 국가가 “네가 왕을 위해서 살아야지 네 가족들을 위해서 살면 안 돼.” 해서 수십만 명을 죽인 거예요.
겉으로는 종교라는 이유 때문에 죽었지만 사실은 국가에 충성할거냐, 아니면 내 가족에 충실할거냐, 때문에 20만 명이 죽은 겁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민주주의는 가족의 행복을 보장해줘요. 그러니 순교할 이유가 없는 거예요. 교회 가서 내 가족 위해서 기도하고, 성당 가서 내 가족 위해서 기도하고, 성당이나 교회 안다니면서도 과학적 활동을 하면서 내 가족을 위하는 것, 나의 유일한 마지막 종교가 내 가족, 내 새끼, 내 혈육 지키는 겁니다. 그게 마지막 종교에요.
교회 다니는 사람, 성당이나 절에 다니는 사람들 중에서 안 그런 사람 나와 보라고 해요. 11월 초에 갓바위에 왜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이 많은데요? 자기자식이 수능치기 때문에 올라가는 거예요. 순교할 건더기도 없어요. 뭘 믿어야 순교하지요. 믿은 적이 없는데. 내거 내가 지키겠다는데 그게 무슨 순교입니까? 그것은 당연한가지요.
나라는 개별자를 내 개별자가 지키겠다는데, 그것은 타락된 아담의 본성인데 이게 뭐가 거룩합니까? 자기가 자기자식한테 거룩하고 본인이 본인의 윤리도덕에 거룩한 것, 이게 무슨 성스러움이에요? 그런 식으로 나를 구원하겠다는 것이. 그래서 그 글에 써놓았어요. 과학기술이 만들어낸 이 민주주의제도의 특징은 극단적인 자아주의입니다.
이제는 누가 나를 죽이기 전에 내가 알아서 나를 죽일 권한도 나에게 있고 살 권한도 나에게 있다. 이게 오늘날 현대인들이 믿는 종교입니다. 성당에 가든 절에 가든 껍데기에 불과하고 남아 있는 것은 오직 자기뿐이에요. 오직 나뿐이에요. 그게 창세기 2장이 이야기한, 두 사람이 결코 한 몸이 될 수가 없습니다.
남녀가 사귀다가 “이럴 것 같으면 헤어져!” 얼마나 빈번합니까? 요즘 저같이 나이 60대에 있는 사람들은 젊은 사람들하고 세대차이 난다고 하는데 요새 20대는요, 10대보고 세대차이 난다고 해요. 세대차이의 폭이 점점 더 좁아져요. 고등학생은 아마 중학생보고 세대차이난다고 할 거예요.
뭘 믿어야 순교가 있지 믿지도 않았어요. 처음부터 나만 믿었고, 끝까지 나만 믿었고, 그것을 가지고 자기처벌이라고 하는데 나를 처분하는 사람은 내가 알아서 처분한다는 이것을 인정해주는 그 이념이 뭐냐? 민주주의입니다. 민주주의가 종교에요. 그 바탕은 과학이에요. 과학과 기술입니다.
이제 인공지능과 경쟁할 판이에요. 인공지능한테 직업 다 빼앗겨라. 인공지능 때문에 8백만의 직업이 다 날라 가고 얻는 것은 2백만 밖에 안 되고 거기서 6백만의 차이가 나요. 이게 정상이 아닙니다. 이것은 인간이 이성적으로 따질 수가 있는 거예요. 예상되는 겁니다. 기적은 아니에요.
기적은 그런 나를 주께서 계속해서 저지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저지하는가? 사무엘상 17장 47절은 유명한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장면인데요. 거기 보면 다윗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하나님이죠) 너희(블레셋을)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다윗은 골리앗과 전쟁하면서 하나님의 개입을 이야기합니다. “너희들 보기에 지금 내가 저 거인과 전쟁하는 것으로 보이는가? 너희들은 그렇게 보여? 아니야. 이것은 하나님이 골리앗과 붙은 거야.”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면 다른 사람이 다윗보고 뭐라고 합니까? “애걔? 하나님이 저렇게 생겼어?”
인간들은 평소에 눈에 보이는 인간 대 인간의 관계만 전부로 알고 있어요. 그러나 다윗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머리가 되고 자신은 지체가 됩니다. 그걸 지난 골로새서강의에서 다중현실이라고 했지요. 현실에 보이는 이것은 지금 하나님께서 일하는 모습으로 평범한 나 소년 다윗에게 그 뜻을 퍼붓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겼다는 것, 소년이 거인을 이겼다는 것이 기적이 아니고 당사자인 소년 다윗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거예요. 하나님이 인간을 이긴 것이 당연하지 이야기할 것이 뭐가 있어요? 하나님이 인간을 이기는 이것이 뭐냐? 지금 다윗이라는 몸은 제 몸이 아니고 사랑에 미친 거예요.
하나님의 사랑이, 창조의 원형적인 그 힘과 원리원칙이 꽉꽉 소년 다윗에 채워 넣은 거예요. 소년 다윗과 하나님이 딴 몸이 아니고 이미 한 몸입니다. 주위에서 얼마나 놀리겠습니까? “네가 그런 거인을 상대해서 싸울 수가 있겠느냐? 부끄러운 줄 알아라.” 소년 다윗은 절대로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몸이 자기 몸이 아니기 때문에. 주의 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이야기가 골로새서 2장 9절과 10절에 나옵니다.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예수님의 그 키와 몸무게가 얼마인지 모르겠지만, 170에 몸무게는 한 70킬로, 예수그리스도의 그 신체 안에 하늘의 신성이 가득하게 넘치도록 충만하게 들어 있다는 겁니다.
골로새서 2장 9절 다시 읽어볼까요?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누구한테요? 예수님한테요. 이것이 예수님한테서 끝날 문제입니까?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시라.” 예수님의 조그마한 몸 속에 하나님이 그득 들어 있는 것처럼 이제는 너도 나처럼 조그마한 몸 안에 주님의 신성, 하나님의 능력이 가득 들어 있다는 거예요.
이것은 마치 소년 다윗 안에 하나님의 힘이 가득 들어 있는 것과 똑같은 차원, 똑같은 방식이에요. 그러면 그렇게 해서 누구하고 전쟁하는가? 골리앗 같은 키큰 누구 나와서 한 번 붙어보자는 말이지요. 우리는 골리앗하고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하고 싸우는가? 골로새서 2장 10절에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시라.”
다시 말해서 그동안 우리를 개별자로 각각 다루어왔던 그 악마의 권세, 이 세상의 권세와 우리가 싸우도록 되어 있습니다. 내가 싸우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싸우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이미 악마를 이기시고 세상의 권세를 이기신 적이 있습니다. 이미 이기시고 승리를 했습니다.
승리한 그 위세가, 부활의 능력이 우리 속에 들어오게 되면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이 싸웠던 그 정사와 권세를 똑같이 우리도 이기게 되어 있는 달라진 몸으로 살아간다는 거예요. 어떻게? 주님께서 죽었다가 살아났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그냥 죽으면 되잖아요. 우리가 이 땅에서 사랑의 능력으로 미쳐서 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미 산자가 죽은 자처럼 살아야 된다는 이것이 미친 짓인 거예요.
죽어도 살게 된 이 몸을 가지고 살 필요도 없는데 꾸역꾸역 매일 살아야 된다는 것이 우리를 오히려 더 황당하게 만들고 미치게 만드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와서, 그럴 리 없겠지만 저에게 한 40억 주면서 목사 하지 말고 같이 절 차려서 스님이나 합시다, 라고 나온다면 그게 미친 짓인 거예요.
내가 믿고 싶어서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닌데, 주님의 사랑이 나를 미치게 만들었는데 이게 와서 또 다시 나를 미치게 만드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콜! 돈은 중요하니까 받고, 한 일주일 동안 해주고 그 다음에 떼어먹으면 되는 거예요. 어차피 우리의 몸은 죄 짓게 된 몸인데 죄 지은 몸 하나 더 추가한다고 용서 안 받을 것도 아니고.
우리가 왜 늙어가고 왜 죽어가고 맨날 콧물 흘리고, 왜 그렇습니까? 이미 폐기처분 되어야 할, 미련두지 말아야 될 몸이라는 것을 계속해서 기적적으로 보여주는 거예요. 주님의 기적은 뭐냐? 네 몸은 버려도 안 아깝다는 이야기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죽음보다 더 강하니까.
이걸 이성적으로 믿을 생각하지 마세요. 한국교회는 이걸 이성적으로 믿어요. 그러나 이성적으로 믿는 그것은 미친 인간은 아니에요. 진짜 이것은 이성적으로 하게 되면 나만 손해지, 하잖아요. 그러나 성령이, 주님의 사랑이 강권해서 믿게 되어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것이 환란이 되고 핍박이 돼요.
잘 먹고 잘 사는 것, 차를 벤츠로 바꾸는 그것도 환란이고요. 차가 소리도 없이 왜 그렇게 잘나가, 그게 환란이에요. 세상 살아가면서 모든 것이 이 사랑을 훼손시키는 환란으로 다가오는 겁니다. 라오스는 왜 그리 경치가 좋고, 태국은 왜 그리 날씨가 좋은지. 자칫하면 주님의 사랑을 빼앗기게 만드는 환란처럼 느껴진다니까요.
로마서 8장에 보면, 태국 가는 그런 환란과 핍박이 온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승진하고 출세하고 돈 잘 버는 환란이 온다 할지라도 주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다. 돈은 챙기세요. 놓치지 않을 거예요! 챙기되 “환란아, 오라. 나는 너에게 연연하지는 않겠다.”
자식은 공부를 왜 그리 잘하는지 “공부 잘해라. 하지만 자식에게 연연하지 않겠다.”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합니까? “네가 미쳤구나. 미쳐도 그냥 미친 것이 아니고 단단히 미쳤구나.” “고맙습니다. 당신이 납득 못할 소년 다윗으로 이해합니다. 나의 전쟁은 이미 끝났습니다.” 이제부터 살아가는 것은 주의 전쟁이지요.
주님이 이미 벌렸던, 그것도 이미 승리가 된 상태에서, ‘도대체 주님은 누구하고 전쟁한 거야? 대체 뭘 상대로 싸운 거야?’ 우리가 그렇게 유혹받고 남에게 우세하지 않으려고 하는 이것과 싸워서 승리한 거예요. 그래서 제가 성도 여러분에게 당부합니다. 세상에 어떤 일이 있더라도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로마서 9장에 나옵니다.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로마서 1장 16절에 보면,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여러분, 평생 살아가면서 명품가방 옆에 쥘래요, 십자가등불 쥘래요? 루이비통인지 무슨 똥인지 그거 쥐고 남에게 안 부끄럽다 하지 마시고 십자가 가방 들고, 십자가 들고, 십자가 등불 밝히면서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동안 미친 사람이 아니라는 남에게 좋은 평가 받으면서 보람 있게 살아가려는 우리의 모든 계획에 차질 나게 하여 주옵소서. 소경이 되어야 보고, 귀머거리가 되어야 들을 수 있는 말, 앉은뱅이가 되어야 걸을 수 있는 몸, 죽어야 살 수 있는 이 놀라운 기적적인 말씀이 이제는 납득이 되고, 우리의 보람이 되고, 기쁨이 되고, 보물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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