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 살해 (마 22:34-46) 대전-84강
이근호
2017년 1월 24일 본문말씀: 마태복음 22:34-46
(마 22:34)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마 22:35)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마 22:36)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마 22: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 22: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마 22: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 22: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 22:41)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
(마 22:42)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마 22:43) 이르시되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마 22:44)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마 22:45)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마 22:46) 한 마디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
마태복음22장 34절입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여기서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느냐하면 바로 하나님 주변에 인간들이 포진해 있다 이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 땅에 안 오면 인간은 자기의 본색을 모르지요? 그런데 하나님이 이 땅에 오니까 예수님하고 주고받는 대화 가운데서 숨겨놓은 인간의 본색이 드러나는 계기가 되는 겁니다. 이것을 어두움 이라고 해요.
빛이 오매 어둠이 깨닫지 못 하더라 그러면 노출된 들켜버린 인간의 마음은 어떤 식으로 신을 섬기고자 했던가? 아까 첫째 시간에 했던 것은 이방민족에 관해 이야기 했지요. 블레셋, 그리고 그 당시 이스라엘도 이방 민족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이방 민족인 블레셋에게 졌잖아요. 그런데 율법이 주어지고 난 뒤에 신을 섬기는 방식은 새로운 노선이 마련됩니다.
수서라는 곳에서 대전을 거쳐가는 새로운 SRT(Super RapId Train) 인가 하는 고속열차 노선이 새로 생겼어요. 전에는 서울역에서 대전을 거쳐서 갔는데 수서에서 가는 새로운 노선을 새로 까는 거에요. 그러면 전에 노선은 뭐냐하면 기적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획기적인 기적, 또는 성신에 취했다. 성신에 취하면 정신이탈, 정신이 혼란되는 것, 몽롱한 상태에 빠지는 거죠.
인간은 이성적으로 따지는데 따지다가 신의 능력이 임하면 황홀한 상태로 빠져버립니다. 황홀한 상태(ecstasy) 그 사람을 선지자로 쳐져요. 선지자는 마치 술 취한 것처럼 성신에 취했다고 그렇게 이스라엘에게 소문이 도는 겁니다. 이런 사람들이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다른 민족에도 공통적으로 있는 겁니다. 이런 것을 샤먼이라고 해요. 무당이라고 하지요. 샤먼이라고 하는 그런 사람들은 가만있다가도 신의 계시가 오면 벌벌벌 떨며 어떤 징후가 보여요.
그러면서 뭔가 내뱉는 겁니다. 옛날 로마 그리스 시대에는 이 샤먼(Saman)에는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고 그랬어요. 심지어 이스라엘도 주변 이방 민족들의 영향을 받아서 남창이 있고 여창이 있었다 하잖아요. 원래 간음이라는 것고 이때부터 나온 것이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이 믿는 신에게 합류하므로 남편으로 오시는 여호와에 대한 배신으로 봐서 간음이라 합니다. 신랑이 원래 한 명이면 신부도 하나뿐이죠.
그래서 이스라엘 전체를 하나의 단일체로 보는 겁니다. 그래서 개인 구원은 없어요. 단일체로 보려면 이스라엘에서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동일한 원리가 있어야 되겠지요. 개개인의 역량에 따라서 구원되는 게 아니고 어떤 단일체라고 한다면 이스라엘이 단체로 구원받는다고 한다면 이스라엘 단체라는 토대 자체는 개인의 역량을 묻지 않아야 되지요. 그러면 그 토대 자체는 대표자가 있어야 되는데 그 대표자가 누구냐 하면 왕이에요.
대표자인 왕하고 맺은 것이 다윗언약이라는 것이고 이스라엘이나 유대는 왕만 잘되면 백성도 복을 받게 되어 있어요. 반면에 왕이 시원치 않으면 백성들이 고생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계약 관계에 있어요. 이것을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하면 어떻게 되냐하면 우리의 왕이 누굽니까? 그리스도라 하는데 그리스도가 누굽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지요.
예수 그리스도가 왕이 되심으로 말미암아 왕이 백성이라고 인정해주면 심지어 예수를 믿는다고 잡아 죽이던 사울이라는 작자도 얼마든지 사도가 될 수 있어요. 사도 바울이 되거든요. 이런 관계입니다. 예수를 믿을게 아니고 그 앞에 뭐가 붙어야 되요. 주 예수를 믿어야 됩니다. 그러면 주 예수를 믿어라를 풀이하게 되면 무슨 뜻이야 하면 ‘나의 왕이시여!’가 되요.
왕이라는 말은 내가 있고 왕이 있는 게 아니고 나에게 일어나는 일상의 소소한 모든 일들은 왕이 은혜로 베풀어 준겁니다. “오늘 왜이리 어깨가 아프나?” 왕이 아프게 하신 거에요. “오늘 왜 이렇게 날씨가 맑아?“ 왕이 날씨를 맑게 하신 거에요. 만유의 주가 되는 겁니다. 아까 어떤 목사님이 질문을 하셨어요. 하나님의 주권 사상이 왜 문제입니까? 뉴질랜드에서 라인으로 질문해서 답변해주었어요.
성경은 예수님의 주권이지 하나님의 주권이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말을 써도 괜찮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것을 쓰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맞아 죽었습니다. 그 말은 뭐냐하면 어떤 표현을 할 때 성경엔 하나님의 주권도 나오고 예수님의 주권도 나와요.
하지만 전하는 입장에서는 복음을 전해야 되거든요. 그러면 복음을 전하는 계획과 원칙은 하늘에서 정했어요. 어떻게 정했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거 하므로써 아버지까지 영광을 받게 짜여져 있어요. 그러면 성경에 하나님의 주권이 있더라도 우리가 들을 때는 뭐냐하면 예수님의 주권을 앞장세운 것이 아버지의 주권에도 부합된다 이렇게 이야기해야 되요.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도 모르고 복음을 모르고 삼위일체라는 논리나 전해버리니까 성부 주권 따로 있고 성자 주권 따로 있어 버리면 누가 섭섭해 하냐하면 성령 주권 섭섭해 해요. 시아버지에 시어머니를 세분 모시려 하니까 이게 엉망진창이에요. 결국 위선자만 될 뿐이에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게 뭐냐 주 예수를 증거하라는 그거 하나만 알면 되요.
삼위일체 이런 거 말고 예수님이 나를 본 자가 아버지를 본 것이고 나를 믿는 자가 아버지를 믿는 거에요. 왜 세분을 다 이렇게 못난이 삼형제 인형처럼 침대 맡에 올려놓고 세분 다 우는 이런 것을 왜 보고 있어요. 다윗 언약은 왕이 모든 것을 책임 져 버립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믿습니다라는 것이 뭐가 되겠습니까? 나의 미래와 나의 운명은 주께서 다 가져 가신 것 맞지요? 더는 제 미래에 대해서 걱정 안 해도 되지요? 이겁니다.
그런데 철야 기도를 보면 온갖 걱정을 다가져 오는 지? 어디서 쓰레기는 다 들고 와요. 왜 답답하고 컬컬한 건 다 가져 오는지? 컬컬하면 막걸리나 마시든지 온갖 것 다 가져 와요. 그러면 목사들은 둘러보고 오늘도 장사 잘되겠네! 저희 집 옆에 절이 있어요. 그 절을 보면 수시로 그 짓 하고 있어요. 비는 것, 중도 없어요. 중은 녹음기 틀어놓고 가버리고 회색 보살 몸빼 알지요? 추울 때는 누비로 되어 있는 것.
차암! 세상에 사기꾼도 이런 사기꾼이 없어요. 중 볼 때마다 다 사기꾼으로 보여요. 인간의 나약한 한 맺힘을 이용해서 돈 빼먹는 겁니다. 중이나 목사나 다를 바가 뭐 있어요? 똑같지요. 왕이 이미 결정했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남은 것은 뭐냐? 예수님이 내려 주신 사다리가 어떤 종류이나 그것만 보면 되요.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유대인들이 인정 안 한거에요.
인정을 안하니까 그들이 율법을 지키는 상황에서 노선이 두 개가 된 겁니다. 하나는 뭐냐하면 하나는 기적, 기적을 베푸는 것, 병을 고치는 것. 가락 강의에서도 이야기 했지요 중풍병자가 왔을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네 병이 나았다가 아니라 네 죄 사함을 받았다, 이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병 낫고자 지붕 뚫은 것도 죄다. 너는 병이 문제이지 내가 보기엔 죄가 문제이다. 너는 올 때 죄를 그대로 가져 왔다는 거에요.
아픕니다! 이 아픈 것을 회복시켜 주옵소서! “그게 비로 죄야!” 이것이 예수님이 주시는 사다리, 십자가라는 뜻입니다. 나는 너를 위해 죽었는데 너는 왜 살고자 하느냐 그 이야기입니다. 사는데 힘들어 못 살겠습니다 이렇게 나온 거에요. 그러면 주니께선 “내가 힘들게 했어? 이 인간아! 네가 행실을 잘못하고 죄를 많이 지어서가 아니고 내가 일부러 힘들게 했어! 그런데 너는 마귀에게 속아서 착하면 덜 힘들거야! 착하면 이 저주가 풀릴거야!”
자꾸 마귀의 꾀임에 빠지는 거에요. 그 마귀 역할을 누가 해주는가! 바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해 주는 거에요. 그 당시 일반 사람들은 율법을 무시하기 때문에 기적과 정성의 노선이 있다면 바리개인들은 율법을 가지고 노선을 까는 거에요. 위로 올라가려고 사다리를 놓는 거에요. 율법으로. 그러면 그들에게 율법은 그들에게 주어졌잖아요. 율법 책이, 경전이 있잖아요.
그러면 그들이 구약을 가지고 사다리를 놓겠지요? 밑에서부터 점점 올라가겠지요. 그 정점에 누가 있다고 보는 겁니까? 바리새인 자신들이 있다고 보는 겁니다. 이렇게 자부하고 장담하며 큰 소리 치는 이유가 뭡니까? 그들의 눈에는 늘 못난 사람과 비교가 되기 때문에 그래요. 이게 교회의 모습이 아닙니까?
소위 장로들이나 간부급들이 목사 이런 사람들이 교회를 볼 때에 함부로 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뭐냐하면 교회 법 지키고 성경 지키는 데 있어서 자기들이 시간이 남아돌잖아요. 새벽 기도를 나오세요라고 목사가 명령을 했다, 고난주일을 앞두고 새벽 기도를 나오라고 했다 이걸 한번 적어 볼께요. 새벽 기도를 나오라고 했다 밑에 뭐가 깔려 있습니까? “헤!헤! 나는 갈 수 있는데” 이게 깔려 있지요.
그런데 편의점 아르바이트 한다고 새벽 3시에 일하는 아줌마가 새벽 기도에 나올 수가 있습니까? 못 나오잖아요. 못 나온다는 말은 이미 목사가 제시한 새벽기도 나오세요에 미흡하니까 일단 교회 안에서 갑 질하는 것을 용납하라! 이러한 질서가 잡히는 거에요. 이게 바리새인들이 하는 짓이에요.
어떤 교회에 공학 박사가 왔다. 돈 잘 벌지요. 똑똑하지요. 이런 분들이 살면서 어디에 몰두 하겠어요? 자기 일에 몰두하겠지요. 몰두하게 되면 성경에 대해 아마추어가 되잖아요. 아무리 박사가 되고 뭐가 되도 기껏 집사 밖에 안되고 집사는 누구에게 진다? 목사한테 꿀릴 수 밖에 없는 거에요.
그런데 집사가 목사에게 대드는 사건이 있었어요. 뭐냐하면 새누리당 집사는 서창원이 집사이고 임명진은 목사이고 한쪽은 거짓 목사님이라고 욕하고 다른 쪽에선 집사는 가만있어라 하는 거에요. 그리고 어떤 여자 집사인데 얘 키우고 살림살이하고 돈 번다고 바쁘다. 이런 집사는 교회가면 목사에게 꿀릴 수밖에 없지요. 성경도 잘 못 보니까
그런데 이런 권사들이 있어요. 자식 시집 장가 다 보내고 나이는 60넘어서 할 일이 없어, 할 일이 없어 CBS 방송 듣는다. 방송으로 설교 듣기 시작하는 거에요. 성경 보고, 그럴 때 어떤 신참 목사가 와가지고 “권사님! 이래도 됩니까? 당회장이 영발 세운다고 했더니만 권사가 ”목사님 지난 설교를 보니 틀렸는데요! 이렇게 나오면 다른 데선 다 큰 소리쳐도 그 권사에게는 약간 갑 질을 보류해야 되요.
또 그 권사가 집에 있어야 되는데 새벽기도 나오라 하니까 나오네! 이게 문제가 되요. 안 나와야 되는데, 갑 질 좀 하게, 안 나오게 되면 “권사님 뭐하십니까? 이제 연세도 그렇고 자식들 위해 신앙을 위해서 중보기도 해 주셔야지요!” 이어고 싶은데 계속 나오네! 나오는거 보다 더 미운 것은 목사보다 더 오래 기도하는 것. 눈치도 없고 이건 코치도 없고 뭐에요. 교회 질서에 문제 생길 수도 있어요.
그러면 목사가 참다 참다 이런 말 합니다. 꼭! 교회 문제 있는 것들이 봉사한다고 한 마디 하고 지나가면서 툭 던지죠. 그러면 권사가 “목사님! 저보고 이야기 했습니까?” 아이고! 권사님에게 이야기 할 일 있습니까? 십자가는 자기를 부인하는 거에요.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지금 죽어도 아쉬울 게 없다. 왜 내 죄가 실타래처럼 계속 나오니까.
이게 주께서 내어준 사다리인데 바리새인들은 뭐니까? “어디 천박하게 기적을 해!” 기적이라는 것은 딱딱 끊어져요. 한본 써먹었던 기적이 그 다음엔 먹히질 않아요. 이건 소 뒷발 치다가 쥐 잡는 꼴이에요. 한 번 한 것을 수십 년 우려먹을 수가 있어요. 처음에는 한 두 번은 속아요. 사람들이 야! 영발 있다. 그런데 같은 멘트 계속 날리면 영발 다 떨어졌나보다 해서 이제는 그 권위에 복종 안 해요.
그래서 기적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천박한 인간들이 하는 짓이라고 바리새인들이 이야기해요. 이건 딱딱 끊어지니까! 단절되어 있으니까, 그러면 계속 이어질 것은 뭐만 있습니까? 역시 율법으로 천국 가는 길, 그것이 최고지요. 성경책은 늘 있으니까, 염불같이 외우고 실천에 옮기면 되니까! 그래서 유일한 노끈이 뭐냐? 동아줄이라고 합니다. 붙드는 유일한 동아줄이 뭐냐? 그게 바로 율법이라는 거에요.
자! 여기서 질문 하나 할께요. 십자가를 붙들면 구원 됩니까? 안 됩니까? 구원이 안 됩니다. 동아줄 같은 거에요. 십자가를 붙들면 왜 구원이 안 되냐 하면 나중에 치매에 걸리면 자가 입으로 십자가가 뭐꼬? 이렇게 나옵니다. 십자가가 뭔데? 십자가를 우리가 붙들면 사적인, 개인적 십자가가 되요.
그런데 다윗 언약에 의하면 개인 용도로 십자가를 준 적이 없습니다. 우리를 살리는 십자가라면 이것 가지고 소유해서 살면 되는데 우리를 죽이는 십자가이기 때문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고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를 참신하게 바꿉시다. 오직 내 안에 내가 아니라로 내가 아닙니다. 여기서 내가는 죽었고가 합당하고 연결돼야 하고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살아있다고 할 때는 숨 쉰다고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말씀 주셔서 말씀으로 살아 있습니다. 예수님 증거하라고 살아 있습니다. 살아있는 체로 예수님 증거하라고 제가 지체로써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붙드는 것은, 붙들지 마세요. 십자가를 붙든다는 게 말이 안돼요. 어떤 엄마가 한 살 먹은 애의 손을 잡고 갈 때에 “ 너 엄마 손 꼭 잡아라!” 이렇게 하지요. 그러면 그 말 듣고 꼭 잡지요.
애가 꼬옥 안 잡으면 애 버릴 거에요? 왕인데 백성을 버리겠습니까? 안 버리지요. 부모가 자식을 안 버리지요. 소 주인이 소를 안 버리듯이 안 버립니다. 안 버린다는 것을 언제 아느냐? 자기가 주님을 생각 못하고 엉뚱한데 관심두고 얼굴 돌리면서 신경 썼을 때, 중요하지 않는데 본인에게 당장 일이 터지니까, 당장에 그것보다 중요한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그런데 그 생각하다 보니까 뭐를 잊어버리는 가?
내 인생은 내가 책임 진다로 돌아서 버린 거에요. 늘 주님 생각하다가 그 때 그만 주님 생각 안 한 거에요. 주님 생각을 하는 것이 하루 중에 5초이고 생각 안 할 때가 23시간 59분 55초가 되는 거에요. 그냥 남들처럼 살 때가 인간답다로 쭈욱 매여 살다가 갑자기 “내가 죽었지!”하며 자기가 죽었다는 사실을 다시 자각할 때는 성령이 침을 줘야 되요. “어잇! 정신차렷!” 이렇게 되는 겁니다.
사실 사람이 다급하다는 것은 예상 못한 일을 당할 때 사람은 준비가 안 되었기 때문에 다급해요. 뭐만 생각하면 되요? 왜 내가 예상 못한 일이 닥치는가? 누가 그렇게 합니까? 왕 되시고 주되시는 예수님께서 정신 차렷! 하고 나한테 주사 놓으시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어떻게 연쇠 됩니까? 아닙니까? 연속이 아닌 것처럼 보이지요. 그런데 이것을 연속이냐 아니냐는 이건 좀 어렵습니다.
인생을 하나의 선으로 보게 되면 연결되어 있는 연속 이것을 율법이라 했지요. 딱딱 끊어지는 것을 기적이라고 했지요. 제가 두 가지를 이야기했습니다. 인간 쪽에서 신에게 다가갈 때 예수님이 바리새인에게 다가 갈 때 이 두 가지 경우가 나타났어요. 그러면 예수님이 다가갈 때는 율법적일까요? 기적적일까요? 둘 다 아니에요. 동그라미에요. 이것을 예수 안이라고 합니다.
시간이 정지가 되요. 시간이 정지되면 선이라는 것도 무의미해지는 겁니다. 강아지가 이 집에 사는데 강아지가 혼자서 TV보다가 고독에 잠긴다 합시다. “나는 오늘 하루는 아침에 사료 먹고 하루를 보람되게 살았을까? 이렇게 하면 주인이 와서 ”이 강아지가 놀고 있네! 너는 우리 집 안에 들어 있어!“
그런 사적인 히스토리, 사적인 역사와 인생 추억이니 안에서는 무의미 한거에요. 로마서 14장 17절에 보면 천국,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 안이에요. 캡슐 안, 그리스도와 함께, 그 안에서는 시간이라는 게 의미가 없습니다. 백년을 살아도 안개 같은 순간이라는 거에요. 손바닥 만 한데 이것을 오므려 버리면 날아가고 없어요.
자기가 살 동안에는 산다는 것이 바늘에 찔린 것처럼 실감나게 아프지만 마음이 쓰리고 아프지만 내가 죽고 난 뒤에 6개월 내지 일 년 어떤 사람은 6개월만 지나도 잊혀진 존재입니다. 지금 요양원에 모셔나도 잊혀진 존재인데요. 눈에 띄는 곳에 없으니까 잊혀진 존재가 되는 겁니다. 안에 들어 있다는 말은 늘 돌아온다는 말이 아니에요. 돌아오면 선이 되어 버려요. 돌아오면 10월의 마지막 밤이 되어 버려요.
해마다 10월 31일만 되면 10월의 마지막 밤인 노래가 나오잖아요. 그래서 노인들이 옛날 추억 생각하면서 화장 짙게 한 아줌마 찾아서 촌에 다방을 찾듯이 우리는 그냥 예수 안에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선교라는 것도 무슨 의미입니까? 예수 안에 내가 사는 이지점에서 주께서 하시는 것이 선교이지 정신 차려서 아프가니스탄 가고 이게 선교가 아니에요. 매일 주어지는 날이 선교 날이고 선교지고 그런 거에요.
하늘에서 별 딸 생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늘에서 별 따서 뭐 하려고요? 하늘의 별은 철광석으로 되어 있어요. 그냥 암석으로, 하늘의 별 보고 싶거든 광산에 있는 아무 돌이나 줏으면 그게 별이 타다 남은 운석들이라니까요. 왜냐하면 시간이 오래되면 원자가 제일 무거운 원자로 변하거든요. 철이 제일 안정된 것이기 때문에 철로 변한 겁니다. 가끔 다이아몬드도 나오기도 하지만.
인생이라 하는 것은 내가 걱정할 문제가 아니고 주께서 주신 게 있어요. 그게 뭐냐하면 율법 전체를 두 개로 축소시킨 겁니다. 이것을 요번 수련회에선 뭐라고 했습니까? 응축이라고 했지요. 두 개로 축소했다가 나중에 뭐로 바뀌게 되요? 하나로 되지요. 하나를 뭐라고 했습니까? 이것을 사랑이라고 했지요. 사랑이 두 개로 축소 된 것을 보면 하나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다른 하나는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고,
그래서 이 두 사랑의 공통점을 뽑아내 보니까 마지막 하나가 사랑이 되는 거에요. 믿음, 소망, 사랑 그 중에 제일이 사랑이라 그렇다면 율법에서 사랑으로 끄집어내면 되는데 끄집어 낼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율법을 끄집어내려면 율법에 대해서 율법 준수의 주체자가 둘이 되는 겁니다. 하나는 뭐냐하면 하나는 바리새인 및 인간, 모든 인간, 모든 인간이 법을 지키고 이방인들은 양심이 율법으로 되어 있어요.
또 한 분 누가 있어요? 예수님이 지키는 법이 있어요. 예수님이 지키면 뭐가 나오겠습니까? 율법의 완성이 되겠지요? 그게 뭐냐하면 이웃 사랑과 하나님을 예수님이 사랑이라는 형식으로 주어지는 것이고 인간이 지켜버리면 계속 누구의 사랑으로 되돌아가 버립니까? 이건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고 율법을 지켰다는 자기 자신을 부정 할 수가 없어요. 논리 상. 지키는 당사자를 없애버리면 율법은 누가 지키는 데요? 누가 지킬 거에요?
그럼 예수님만 사랑할 수 있고 율법을 완성 할 수 있다면 우리가 못할 이유가 뭐냐? 그것은 예수님에게 물어봐야 되요. 예수님은 내가 사랑이다라고 말로 했습니까? 아니면 실천으로 옮겼습니까? 그 실천이 바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에요. 그런데 십자가를 지신 분이 예수님 한 분 뿐이냐 아니면 또 있냐를 보란 말이에요. 보니까 예수님 한 분 뿐이죠.
그렇다면 이 말은 모든 인간은 율법을 지켜도 하나님이 원하는 사랑이 나온다? 안 나온다? 나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 사실을 믿는 거에요 우리가. 내가 아무리 법을 지켜봐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내가 제공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을 우리가 인정하는 거에요. 죄인 중에 괴수라하며, 성도라는 사람이 그것을 이야기하고, 그럼 그것을 이야기 할 때 뭐가 되냐하면 주님의 사랑이 현실화 된 거에요.
“나는 죄인입니다.” 그래서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깨닫게 하시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는 겁니다. 그게 성경 어디에 나옵니까? 막달라 마리아지요. 울면서 향수를 뿌리지요. 평소에 그 여자가 향수를 모은다고 얼마나 신경 많이 썼겠습니까? 그런데 한 쪽에 향수 들고 한 쪽에 주님을 보고, 한 번 견주어 보세요. 두 개 다 가지지. 본인이 그게 용납이 안 되는 거에요. 두 개 다가 용납이 안 되는 거에요.
이 향수가 있다는 것은 주님의 존재가 본인 입장에서는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그래서 향수를 깨어 버렸다는 것은 뭐를 의미하는 거냐하면 ‘자아 살해’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죽이는 거에요. 이것을 예수님이 뭐라고 하냐 하면 나의 장례식을 위해서 네가 향수를 뿌렸다는 거에요. 그러면 예수님의 장례에 누가 포함되어 있다는 말입니까? 죽어 마땅합니다. 죽어도 아쉽지 않습니다. 그런 자와 합류된 장례를 주께선 준비하신 거에요. 십자가에서.
그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앞당겨 보는 거에요. 요한복음 11-12장에 나온 말씀일거에요. 마르다의 동생 마리아에요. 향수를 뿌려서 나의 장례를 예비했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제자들은 들어도 무슨 말인지를 모릅니다. 자기 살해하는 겁니다. 그럼 목사님 카메라고 뭐고 다 부술까요? 이 강아지도 마지막 날이다. 주님의 십자가를 가리는데(방해 되서),
부셔서 십자가를 예비하는 것은 십자가 이전까지이고 십자가 후에는 주시거든 챙기세요. 다 어디서 온 겁니까? 다 십자가 희생에서 주신 거니까! 하늘에서 비 내리거든 감사하고 눈 오거든 또 감사하고 서리 내리거든 감사하고 다 주님의 십자가에서 나온 거에요. 모든 게 주께서 다 주신 겁니다. 그래서 범사에 감사하라고 한 거에요. 뭐를 드리고 할 것도 없이 안 바쳐도 줴서 다 세뱃돈 주신 거에요.
세뱃돈 주듯이 주께서 무한 증여 하신 겁니다. 우리에게 주신 거에요. 성도는 그 증거로 사는 겁니다. 그 사랑으로 사는 거에요. 그런데 새삼스럽게 율법을 지킨다는 것은 관심사가 예수께 없다는 뜻이에요. 없으니까 요만큼 한 것을 가지고 30배, 60배, 100배 달라고 내밉니다. 도둑놈도 이런 도둑놈이 없어요.
목사들도 사기를 칩니다. 어린 아이와 같은 믿음만 있다면 30배, 60배, 100배로 얻어 낼 수 있습니다. 당신들의 인생이 괴롭고 저주받고 힘들고 매 맞는 것은 믿는다고 우기지만 따지는 믿음이라 그런 것인데 어린 아이 같은 믿음, 다시 말해서 목사가 때리면 그냥 맞고 돈 내라 하면 내고 교회에서 하라하면 하고 전도 집회하면 하고 제발 좀 어린 아이 같은 믿음만 가지면 복이 오지 말라고 해도 복이 옵니다.
그러면서 한 마디 덧붙이죠. “이래도 아멘 안 하지?” 반말 조로 나가지요. 그러면 “아~멘!” 하면 “목소리 봐라!” 하고 “아~멘!” 하면 “할렐루야 붙이고!” 하고 “할렐루야!” 평소에 이런 식으로 사육 받던 사람이 가끔은 저한테 목사님! 할렐루야~이렇게 나온다고요. 버릇이 얼마나 들었으면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 복이 온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있는 저주가 해결 되고 붙어 있는 더러운 저주가 떨어져 나간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이건 남묘호렌게쿄도 아니고.
제가 진짜 목회자에게 말하고 싶은 게 그거에요. 목회 성공 할 생각 하지 말아야 되요. 세상 자체가 어두운데 무슨 신자가 있겠어요? 신자가 없는 거에요. 혹시 있거든 기적인 줄 알게 되지 요렇게 설교하고 요렇게 쉽게 하면 알게 될 것이다. 그런 헛된 망상은 본인부터 지옥가고 있는 거에요.
하나님께서 이왕 신학교가게 하셔서 말씀 보게 했거든 세상이 왜 지옥이고 왜 마지막 때 믿음을 보겠느냐는 말씀이 왜 구태여 그런 말씀을 하셨는가를 실감하면 실감 할수록 죄 용서 해준 고마움이 점점 커집니다. 본인이라도 늘 감사하며 살면 되요. 그게 전도이고 그게 선교에요. 그게 바로 목회에요.
목사의 목회는 하나 밖에 없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하는 것 밖에는 없어요. 그래서 성도간의 만남도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것 밖에는 없어요. 교회가 조금 크면 다단계가 뛰어 들어요. 돈 불려 줄게요. 이자 꼬박꼬박 드립니다. 교회가 조금 크면 그런 게 있어요. (교회) 앞에다 약국 차렸는데 소망 약국이라고 써서 감사 헌금하면, 그러면 또 목사는 눈치체고 “이번에 소망 약국 개업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축복해 주시옵소서! 이건 간접 광고에요. 헌금 한 게 아니고 광고비 드린 거에요.
율법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사랑으로 건너 갈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거에요. 거기에 대해 바리새인들은 동의했겠습니까? 미워했겠습니까? 미워했겠지요. 그 미움이 사랑을 낳게 하는 동기로서 필히 발생 돼야 될 일입니다. 발생 돼야 될 현상이에요. 미워하는 자가 있어야 주님이 죽게 되거든요. 그러면 오늘날 이 미움의 역할을 누가 해야 됩니까? 바로 우리가 해야 되는 거에요. 이미 구원은 챙겨 놓고,
“주님 미워!” 그 쉬운 일을 마다 할 일이 있습니까? “기도 했는데 왜 응답 안 해줘잉~미워!” 우리는 눈만 뜨면 미움 밖에 나오지 안는데 그 역할을 원 없이 신나게 평생 동안 이거만하면 되요. 헌금 하려고 가져 왔는데 갑자기 길이 눈이 와서 미끄러워 넘어져서 뼈가 부러졌다. 가만히 계산해 보니까 뼈 부러진 거 치료비하고 헌금 하려 했던 것을 비교해보니 헌금이 더 적은 것 같애! 삐졌다.
헌금하려고 했는데 주님이 밀어서 넘어져서 다쳤으니 헌금은 그냥 없던 걸로 퉁 칩시다. 원망은 안 할 테니 퉁 칩시다. 이런 사고방식이 매일 일상 속에 피어나옵니다. 늘 피어나옵니다. 고3이니까 눈 감아 주세요. 다음에 헌금 만원 더 올려 드릴테니, 이런 것. 우리 아들 지금 고 3인데 공부해야 되니까 주일에 교회 안 보내겠습니다. 그 대신 헌금 만원 더 얹어 드릴께요. 이러한 계산이 우린 수시로 나와요.
그 다음 봅시다. 사실은 마태복음 22장에 나오는 계명이 누가 복음 10장에 보면 늘어났어요. 누가 복음10장 36절에 보면 뭐가 첨가 되냐 하면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누굽니까? 이렇게 나왔어요. 그래서 유명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이 뒷부분에 나오는 거에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 자신이 선한 사마리아인임을 알려 주는 겁니다.
그 다음에 마태복음 22장 계속 봅시다. 41절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앞에서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질문했는데 이번에는 적극적으로 예수님 쪽에서 바리새인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예수님이 질문을 던진다는 말은 그 만큼 예수님 자신이 죽어가는 길을 재촉한다고 보시면 되요. 격차를 점점 더 벌여 놓는 거에요.
그러면 바리새인들은 지도자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것을 장악을 해줘야 되지요. 안 그러면 나라에 혼란이 일어나니까 그러면 혼란이 유발되게 되면 방법은 이런 겁니다. 공동체에서 헌란을 유발하는 자를 뭐라고 하냐하면 죄인으로 규정합니다. 그러면 신에게 혼란의 요소를 전처럼 자기들의 질서를 바꾸려면 이 죄인을 희생물로 바쳐야 되요.
바칠 때 희생물이 더러우면 안 받기 때문에 대신 누가 깨끗한 것을 희생해서 추방되는데 추방되는 자로 하여금 양심의 가책을 유발하게 만들어 버려요. 이게 모든 고대 민족들의 제사법입니다. 시집도 안 간 처녀를 잡아서 아직 뭔가 밝혀 지지 않은 자기들 공동체에서 아직 꼼지락 거리며 남아 있는 질서를 어지럽히고 남에게 해코지한 범죄인으로 하여금 시집 안 간 생 처녀가 심장 도려내 죽는 것. 아즈텍 문화 멕시코의,
그 제사에 참여 할 때 뭘 느끼겠습니까? “아! 나 때문에 저 아가씨가 죽는구나! 다시는 이런 죄 안 져야지!”라고 양신에 가책이 되면 오는 해에는 나쁜 짓을 줄였기 때문에 신으로부터 축복이 그 만큼 더 많아지겠지요. 이것이 일반 제사입니다. 조산 제사도 마찬가지이고, 이게 어디에 나오냐 하면 사사기에 나옵니다. 사사기에서 입다가 아람나라와 전쟁 하면서 입다 이 사람이 길르앗 사람이에요.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고 그 쪽 동네 제사에 익숙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바치는 제물로 뭘 내놓으냐 하면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을 바치겠습니다. 딸이 나온다면 그런 소릴 안 하겠지요. 딸이 있어야 자랑 질 할 수 있잖아요. 평소라면 염소 새끼나 닭 새끼가 나왔겠지요. 심지어 종이라도 괜찮아요. 종은 죽여도 괜찮거든요. 그런데 보세요. 하나님께서 일을 어떻게 하십니까?
분명히 입다는 하나님의 실무자로 일을 했음에도 북구하도 하나님은 그 실무자의 공로로 돌리지 않고 모든 승리를 소급해서 하나자신의 공로로 돌리기 위해서 실무자가 내가 했다는 요소를 주께서는 부끄럽게 만들어 버려요. 아주 비참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뭐냐하면 여러분! 죽은 자가 비참하겠어요? 살아서 죽은 자를 보는 게 비참하겠어요? 산자가 비참해요. 심지어 죽은 자가 누굽니까? 외동 딸.
천하에 순실이도 정유라 이야기하면 눈물 난다 안 합니까? 그렇게 입다를 최순실로 보고 딸을 정유라로 본다면 감옥살이 안해도 그 자체가 감옥살이 일것다 말이죠. 손들고 차라리 누가 죽는다? 죽이려면 나를 죽여야지 왜 아무 죄 없는 딸을 죽이냐는 말이죠. “네가 큰 소리 쳤잖아!” 그러면 입다가 뭐라 합니까? “아니 농담도 못합니까? 다른 사람도 농담 다 했는데 왜 갈궈도 나만 갈굽니까?” 왜 하필 저에게?
이게 구약에 있는 십자가 의미입니다. 십자가는 난체 하는 인간을 실패로 만들어 버려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니가 성공 한 사람이라는 것을 일깨워주고 확인시켜 주는 거에요. 실패 없이는 우리가 성도로 티가 안나게 되어 있어요. 내 뜻이라는 것은 무조건 무산시킵니다. 그래야 우리 자신의 관심사가 주님의 십자가를 훼방하고 가리지 않게 만듦으로 십자가만 더욱 또렷하게 보이는 관련성을 주의 은혜로 유지하게 만드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는 거에요. 특징은 배설물이 계속 나온다는 거에요. 일 년치 오줌 한 번에 누는 게 아니라 계속 나온다는 거에요. 살다보면~ 죽을 때까지 까지 계속 나와요. 행진~행진~ 행진 하는 거야! 어찌 합니까 하면서 계속 나와요. 세상의 모든 드라마나 유행가가 전부 뭡니까? 배설물이에요. 이거 아니고 찬송가 부른다면 찬송가는 배설물이 아닌 줄 압니까?
이 몸 자체가 배설물을 생산하는 아지트인데 찬송가와 대중가요가 차이 나는 줄 알아요? 찬송가만 24시간 부를 수 있습니까? 목 아픈데 띄엄띄엄 하지요. 띄엄띄엄 하면 선이 되요. 둥그런 안이 아니고 주께서는 묻습니다. 네가 다윗의 자손에 대해서 아느냐? 왜 묻느냐? 너희는 다윗의 자손을 시간적으로, 역사적으로 평가한 것, 그래서 내가(예수님) 다윗의 자손인 것을 못 알아 본 거에요.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인 것을.
예수님이 묻는 이유는 다윗의 자손이 왔는데 다윗의 자손을 메시야라고 하는 거에요. 메시야가 왔는데 못 알아보는 거에요. 그 이유를 찾아 주시는 겁니다. 역사적으로 구원을 계산하다 보니까 과거가 먼저 있고 지금이 현재이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안았다 하는 거에요. 그런데 예수님은 뭡니까? 이미 와버렸어요. 와버리면 이건 선이 아니고 동그라미가 되어 버려요. 예수 안에 있는 자는 누구이다?
처음이자 나중이고 그리스도 안에서는 시간이 무의미 한 겁니다. 오늘 하루만 살아도 괜찮아요. 왜?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는 죽어도 살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합니다. 이 말을 알아들을 리가 없어요. 그러나 나사로는 그것을 알아요. 나사로는 죽었다가 다시 되살아나잖아요. 예수님이 우리에게 해주는 것은 딱 하나 밖에 없어요.
살게 해주는 것이 아니고 너는 죽어도 상관없어! 죽어도 괜찮아! 그 은혜를 우리에게 주시는 겁니다. 그러면 왜 삽니까? 너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살려 줬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죄 때문에 실패 하도록, 실패하는 즐거움을 주기 위해 우리를 살게 하시는 겁니다. 여러분 기도 하시고 어떻게 응답이 안 된다는 것을 찾아보는 즐거움이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산다고 했는데 바로 그것이 기준이 되고 모델이 되었습니다. 정말 우리는 짧은 순간이지만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