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강의(2017. 1. 20) 35-2
개가 인간보다 나은 점은 자기감정은 숨기지 않다는 것입니다. 개는 좋으면 꼬리를 흔들어요. 반대로 싫은 상대를 만나면 짖고 으르렁거립니다. 이처럼 자기감정을 속이지 않는 이유는 개는 악마가 직접 다루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개는 천사 쪽에 가깝고 인간은 사단 쪽에 가까워요.
마가복음 9장 40절을 봅시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이 말을 달리 표현하면, ‘나는 여기 없다.’ 그럼 있는 것은 뭔가? ‘신체는 여기 있다.’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몸은 여기 있습니다. 이 몸을 성경에서는 ‘육’이라고 합니다.
성령이 임한 사람은 예수님 관점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두 개의 관점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아담의 관점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 관점입니다. 사실 둘 다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둘 다를 가지고 있었어요. 예수님이 세상을 볼 때 육으로 보는 관점도 있었고, 영적 관점도 있었어요.
사람들이 영적이란 말을 오해하는데, 영적이란 말은 언약적이란 말입니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창세전에 예정한 것으로 예수님은 죄 있는 육신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몸으로 왔다는 말은, 우리는 기껏해야 신체고 물질 덩어리란 것입니다. 주님은 인간으로 와서 인간이 되신 것이 아닙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지요. 신학자들이 이 사실을 모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된 것이 아니고 육신이 된 거예요. 왜 주님의 관점으로 보지 않고 내가 원하는 종교적 관점으로 자꾸 바꿉니까?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으니까 이제는 사람이 신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었기에 이미 신으로 살고 있어요. 이 신은 사단이지만.
사단은 하나님과 직접 관계를 가지려 해요. 그런데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주가 되게 적극적으로 밀어주잖아요. 그러니까 마귀는 어떻게 하든지 예수님이 주가 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서 발악을 합니다. 심지어 마귀가 베드로에게도 찾아갔어요. 예수님이 죽고 사흘 만에 부활한다고 하시니까 베드로가 하는 말이 “주여, 그러시면 안 됩니다.”라고 했지요.
이 때 주님은 “사단아 물러가라.”고 했지요. 이 말씀은, 베드로가 사단이란 말이 아니고, 사단이 베드로의 입을 통해 말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사단의 말을 베드로가 대신한 거지요. 예수님은 언약을 이루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언약을 완성할 때 주가 되십니다. 그런데 사단은 예수님이 주가 되는 것이 싫은 거예요. 왜냐하면, 주는 사단을 심판할 권한이 있기 때문입니다.
원래 심판권은 아버지가 갖고 있었어요. 그런데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습니다. 요한복음 5장 22절에 나오지요. 아버지가 심판하는 것과 아들이 심판하는 것은 차이가 있어요. 아버지가 심판하시면 자신이 만든 것을 자신이 심판하는 모순이 발생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심판하시면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고 해서 아버지가 빠질 수 있는 거예요. 기준이 확정되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언약을 시작하신 분의 입장에서 심판이라면, 예수님은 언약을 완성한 입장에서 심판하기 때문에 사단은 이제 지옥 불에 들어가야 합니다.
사단이 이것을 알기 때문에 인간을 덮쳐서 인질극을 벌인 거예요. “이래도 계속 할 거야!”라고 하면서. 그럴 때 하나님은 이런 방법을 사용합니다. 인간은 망하게 하시고 인간 속에서 여자를 끄집어내요. ‘하와’란 이름은 ‘생명’이란 뜻입니다. 그 전에는 여자의 이름이 없었어요. 그냥 아담에게 속한 자였습니다.
범죄한 후에는 하와가 생명의 이름이고 아담은 흙이 되잖아요. 여자가 빠져나오면서 ‘나는 여기 없다.’가 됩니다. ‘나’는 어떤 존재를 말하고, ‘여기’는 이 세상입니다. 갈라디아서 4장 26절에 보면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고 했어요. 여자가 무슨 뜻인가 하면, 남성과 여성 중 여자라는 뜻이 아닙니다. 남성, 여성의 성 차이가 없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지상은 남자가 대표해요. 이것이 어디에 나오는가? 창세기 3장에서 저주 받을 때, 여자는 남자를 사모하고, 남자는 여자를 지배하게 되어 있어요.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여자가 있더라도 여자는 마이너스(-) 남자예요. 남자에 예속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속되지 않는 어떤 인물이 등장한다는 말은, 아담은 흙이 되어 없어지니까 없어지는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남는 나는 여기(이 세상)에 없다.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님을 표시하기 위해서 ‘우리 어머니는 하늘에 있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여자지요. ‘여자의 후손’이란 표현에서, 이 땅에서는 마리아를 말했지만, 이 땅을 떠나면 남자, 여자의 성에서 벗어난, 남성의 세계에 속하지 않는 바깥에 실재하는 존재를 지상에서 볼 때 ‘여자’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은 남성이 지배하는 세계이기 때문이죠.
속함에 두 종류가 있어요. 하나는 남성에게 속함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러나 ‘여자의 후손’이라고 하면 이것은 예수님을 말합니다. 뱀의 후손은 마귀지요. 요한계시록 12장에 나옵니다. 두 그룹 사이에 전쟁이 있었지요.
여자에게 속했다는 말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이미 죽었고 우리의 생명은 하늘에 있다고 골로새서 3장에 기록하고 있어요. 살아서 말을 해도 되는데 왜 죽어야 하는가? 이 말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 세상 밖에 다른 세상이 있는 것이 아니고, 이 안에 있어요. 안에 들어온 밖입니다.
우리 세상 안에 들어온 밖이라고 함으로써 이 세상은 두 종류로 분류됩니다. 하나는 남성에게 속한 것, 다른 하나는 여성에게 속한 것.
41절을 봅시다. “누구든지 너희를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가 결단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제자들이 주님께 속했다면 다른 이들이 주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한다고 해서 고자질 할 필요 없지요. 그런데 제자들이 고자질을 하는 것으로 봐서, 저 사람들이 예수님께 속한 것처럼 제자들이 예수님께 속한 것이 아니고 자기 주도권을 가지고 경쟁하듯 고자질을 한 것이지요.
사람들은 신앙생활 하면서 제자들과 같은 생각을 많이 해요. ‘복음을 위해 했는데 왜 일이 안 됩니까?’ 복음을 위해 열심히 충성했는데 가정의 수입이 줄어들어서 겨우 밥 먹고 사는 정도인 것이 왜 그런가? 이게 오늘 본문과 통하는 이야기잖아요. 주님을 빙자해서 내 존재를 부각시키는 거예요. 나는 없는 존재가 되어야 하는데, 내가 있는 거예요.
나는 없는 존재이니까 스스로를 귀신, 또는 유령으로 생각합시다. 나는 유령에 지나지 않는데 어떤 사람이 나에게 물 한 그릇을 주면, 유령에게 준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생각해서 물을 준 거예요. 우리는 그냥 통과하는 파이프나 튜브같은 역할에 불과합니다. 우리에게 준 것이 아니라 주님께 드린 것인데 우리는 내게 준 것으로 여기고, 다른 사람에게도 받을 준비를 하고 있는 거예요. “너는 왜 나에게 바치지 않는가?” 이런 식입니다.
이런 모습을 제자들이 보인다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이런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열심히 헌신했으니까 내가 원하는 것을 주세요.’라는 흥정과 거래는 주님에게 통하지 않습니다.
대구 서문시장의 상인들은 근처 서문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런데 최근 불이 나서 상점의 물건들이 잿더미로 변했어요. 이런 상황에서 목사들이 피해를 입은 교인들에게 무슨 말을 하겠어요? “집사님은 주님께 헌신하셨으니까 주님이 몇 배로 갚아 주실 겁니다. 구하세요. 주실 겁니다.”
성경에는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신다고 했어요. 돈을 주는 것이 아니고 성령을 주십니다. 세상 보는 관점을 줍니다.
42절 봅시다.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바다에 던지움이 나으리라.”
지금까지 설명한 것이 납득이 되지요? 누가 주를 반대합니까? 주님 편에 섰다는 자들이 주님을 가로막고 있어요. 주님께 속했다는 말은 ‘나는 투명 인간이니까 내게 오지 말고 나를 통과해서 주님을 만나세요.’라고 하면서 남들 앞에 투명 인간처럼 살라는 것입니다. 투명 인간과 관련된 만화가 있어요. 어떤 박사가 약품을 개발했는데 이 약을 바르면 인간의 형체는 없어지고 투명 인간이 된다는 내용입니다.
박사가 자꾸 이상한 소리를 하니까 친구가 장난을 친 거예요. 박사가 개발한 약을 몸에 바른 후에 확인을 하기 위해 친구에게 질문합니다. “야, 내가 보이나?”라고 하니까, 친구가 “너 누구야? 옷만 보이는데.” 라고 거짓말을 한 거예요. 박사는 자신이 성공한 줄 알고 옷을 홀딱 벗고 밖에 나갔는데 어린아이에게 우사당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소위 예수 믿는 인간들이 이런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있어요. 날 보고 예수님 믿으라는 거예요. 뭘 보고 믿겠어요? 그 사람은 죽음 충동밖에 없는데. 마귀의 아바타인데 뭘 보고 믿을까요? 날 보고 믿으라네. ‘내가 행동 똑바로 할 때 주께서 영광을 받을 것이다.’ 이게 말이 됩니까?
이것이 바로 주님을 가리는 거예요.
목사인 나한테 잘 하는 것이 주님께 잘 하는 것이라고? 말은 맞아요. 문제는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주의 종이 아니라는 겁니다.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바다에 던지움이 나으리라.”고 했지요?
질문합니다. 소자를 실족케 하는 자가 바다에 빠집니까, 아니면 소자가 바다에 빠집니까? 누구 목에 맷돌을 다는가 말입니다. 실족케 한 자지요. 이 말은 무슨 뜻인가 하면, 집에 불이 나서 자식 3명이 다 죽었다. ‘주여,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합니까?’ 이게 바로 바다에 빠질 사람이에요.
왜 그럴까요? 자식과 재산이 다 불에 탔어요. 자신의 소중한 것을 다 잃었어요. 이처럼 자신의 자식, 재산을 귀하게 여겼다는 것은 주님을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이 어느 정도 귀한지를 모르는 거예요. 자신의 소중한 것을 빼앗겼다고 해서 주님을 원망하는 것은 주님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욥이 자식 10명 다 죽고, 재산 다 날렸는데 마지막에 복을 받았어요. 이것이 인간적으로 도저히 납득이 안 되는 것이, 복 받으니 뭣 합니까? 죽은 자식 생각 안 나겠어요? 당연히 나겠지요. 그러나 욥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이것까지 극복했습니다. 자식이든 뭐든 내가 하나님의 고귀함에 속했으니까.
나는 없는 존재입니다. 내가 자꾸 이 땅에 있다고 생각하니까 그것이 하나님에 대해 반발을 일으키는데, 내가 없는 존재라면 자식 10명 다 죽고 재산 다 소멸되어도 그것은 내가 관여할 바가 아니고 주님이 주신 은혜 앞에서는 그런 것들이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이사야는 하나님의 영광을 본 후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라고 했어요. 에스겔은 사랑하는 아내가 죽어도 울지 못했습니다. 미국의 어떤 여 집사님이 저에게 이런 상담을 했어요. ‘남편은 10년 넘게 백수생활을 하고 있고, 주위의 많은 남자들이 자신을 좋아하고 있는데, 남편과 이혼을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라고.
저는 이런 답변을 드렸어요. ‘이혼하자는 말은 하세요.’ 멋진 답변이지요? 이혼 하고 말고는 나중 문제고, 말은 해야 되잖아요.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이혼하자.’ 이렇게 남편이 나온다면 이혼하고, 자기를 좋아하는 남자 중 한 명을 골라 결혼하면 됩니다. 그런데 남편은 ‘너 없이는 못 산다.’고 나오니 괴롭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30분 정도 상담하면서 ‘지금 집사님은 예수님의 가치를 모독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혼할까, 말까는 소소한 문제입니다.’라고 얘기했어요.
주님의 십자가 용서를 생각한다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사소한 일입니다. 소소한 일을 크게 키우는 것은 사단이 노리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시달려야 합니까? 아무것도 아닌데. 지금 죽는다면 ‘이런 저런 경험을 했다.’고 할 거예요. 아무것도 아닌 작은 문제를 키우는 이유가 십자가를 가리기 위한 사단의 전략입니다. 늘 사단은 이렇게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지금 시험 다 쳤다고 오단이 신나하고 있는데, 이것이 마귀가 불어넣는 바람입니다.
시험이 어떻게 되든 그 모든 것은 사소한 문제고, 부부가 같이 사는 것도 소소한 문제입니다. 탐심은 우상숭배입니다. 십계명의 첫 계명은 우상숭배에 관한 것이고 마지막 계명은 탐심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고 중간에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부모 공경하라. 등이 있어요.
그렇다면 모든 계명은 탐심이 기초가 되어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를 모독하는 쪽으로 가는데 이것이 사단의 술책입니다. 탐심 없는 사람 있습니까? 탐심이 예수님을 모독하게 만들고, 탐심이 도둑질 하게 만들고, 탐심이 간음하게 만들어요. 그런데 이 탐심은 죽기 전에는 없어지지 않아요.
그런데 가끔 짧은 순간 탐심이 없어질 때가 있어요. 그게 언젠가? 주님 앞에 죄인인 것을 알았을 때. ‘죽어도 괜찮아요. 그동안 산 것도 감사합니다.’ 이런 마음이 들 때 탐심이 없어집니다. 길진 않아요. 5초 정도. 이 때 나타나는 것이 온유, 화평, 자비, 양선, 형제 우애가 한꺼번에 터져 나옵니다. 이것이 성령의 열매지요.
그런데 이런 성령의 열매를 그리워하면 ‘탐심’이 됩니다. 그러니까 성질대로 살 수밖에 없어요. 새로운 쾌락을 개발하세요. 새로운 금지선을 만들고 그것을 넘어서야 돼요. 제가 하는 말은 ‘이혼하지 마세요.’가 아니라, ‘이혼 하자.’는 말을 하란 말이지요. 이혼 하고 싶다는 말을 상대에게 하란 말입니다.
그 말을 안 하고 있으면 정신병에 걸려요. 이혼을 말한다고 해서 이혼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혼하자는 말을 해 보세요. 남편이 어떻게 나오는가. ‘당신이 그럴 줄 알고 내가 직장을 구했어.’ 이럴 수도 있고, ‘내가 그동안 당신한테 소홀했는데 이제 좀 더 잘 할게.’ 이럴 수도 있고 --
상대의 종이 되겠다는 것은 좋은 의미가 아닙니다. 이것은 죽음 충동인데, 인간은 죽음 충동에서 못 벗어납니다. 형제가 사이좋게 지내도 아버지 유산이 있으면 형제간에 싸움이 납니다. 예수님의 가치는 바꿀 수 없기 때문에 주께서 그냥 주시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안 받습니다. 왜냐? 더러워서 안 받아요. 죽음 충동, 마귀의 아바타를 어디에 쓰려고 받습니까?
이 땅에서 죽은 것으로 삼아요. 주님과 우리의 관계가 끊어졌음을 통보함으로. 관계가 끊어지면 그것은 죽음입니다. ‘나는 죽었고 통하는 것은 예수님과 통하는 구나.’ 이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 육신에 성령이 와서 예수님 안목을 우리에게 주시는 겁니다. 아직도 제자들은 그것을 몰라요.
43절 봅시다.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예수님 말씀은 인간들 보기에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어요.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늘 그랬어요. 예를 들겠습니다. 여기 비타 500이 있는데, 병뚜껑을 열고 마시려고 했는데 뚜껑이 미끄러워 잘 안 열려서, 혼자말로 “안 열리네.”라고 했는데, 할아버지가 그 소리를 듣고 하시는 말씀이 “근호야, 내가 평소에 운동하라고 했지?” 이렇게 시작해서 3시간을 잔소리합니다.
“남자가 되어 힘이 그렇게 없어서 나중에 국가와 민족을 위해 큰일을 하겠느냐?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 네가 힘이 없어 병뚜껑도 제대로 못 여는 것은 평소에 운동을 열심히 하지 않았기 때문이야. 그리고 아까 방에 들어올 때도 신발을 가지런히 챙겨놓고 들어와야 하는데 너는 그냥 들어왔어. 사람이 공부만 한다고 인간 되는 것은 아니야. 나는 인생 경험을 너보다 더 했기 때문에 너를 위해서 하는 이야기야. ----”
이렇게 시작된 할아버지의 잔소리가 3시간 동안 지속됩니다. 그러면 할머니가 “여보, 그만하세요. 벌써 3시간째 이야기하고 있어요.” 저는 피하면 되는데 왜 안 피했는가 하면, 피하면 다음 날 피한 것까지 포함해서 잔소리를 들어야 하기 때문에 피할 수가 없어요.
나는 병뚜껑이 미끄러워 잘 안 열려서 ‘안 열리네.’라고 했을 뿐인데, 할아버지의 말씀은 너무나 엄청나고 광범위한 내용을 거론합니다. 이유가 있어요. 내가 미워서가 아니라 우리 아버지가 미워서 그렇게 잔소리를 하는 거예요. 우리 아버지가 군에 제대한 후 돈을 안 벌었어요. 결국 돈 문제입니다.
그것은 저에게 퍼붓는 거예요. 지 애비 닮아서 그렇다는 식으로. 그래서 저는 할아버지의 잔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서 완벽하게 행동했어요. 그렇게 해서 할아버지에게 복수를 하려고. 신발도 가지런히 벗어놓고, 걸을 때도 뒤꿈치를 들고 사뿐히 걸었어요. 행동 하나하나 할 때마다 할아버지와 머리싸움을 하는 것 같았어요.
할아버지는 잔소리할 거리를 찾다가 없으면 “일주일 전에 근호 네가 --” 이렇게 나와요. 손자인 저의 기를 팍 죽여 놓는 거예요. 오 목사님도 그렇게 성정 과정을 보낸 것이 아닌지 궁금해요.
지금 제자들이 뭘 잘못했습니까? 자신들은 예수님 제자이고, 예수님의 권능과 지시를 받고 행동했어요. 예수님의 권능을 받아 귀신도 쫓아내고, 병든 자도 고치고 예수님이 하신 일을 자신들이 전담해서 행한 거예요. 그런데 제자들도 모르는 어떤 사람이 예수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냈어요.
“주님, 저 사람은 주님 허락도 없이 주의 일을 합니다.”라고 했어요. 단지 이 말을 했는데 4주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43절에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라.” 너무 오버하시는 것 아닌가요?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정말 심한 말을 한 거예요.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은, 인간의 생각하는 바가 예수님과 합치되지 않으면 세상 권력에서 못 빠져나오기 때문에 하신 말씀입니다. 아무리 예수님과 함께 생활해도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말씀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따라서 우리들의 신앙생활 자체를 우리 스스로 거짓이라고 인정해야 합니다.
신앙생활 한다고 생각하니까 자신의 거짓됨을 가리고 있어요. ‘신앙생활 어떻게 하지? 나는 할 줄 모르는데.’ 이렇게 나와야 합니다. 공중의 새를 누가 먹이고, 들풀은 누가 키웁니까? 주님이지요. 주님께서 성도를 어떻게 키우는가 하면 참새나 들풀처럼 키우는 것이 아니고, 그 나라와 의로 키우지요.
짐승보다 못한 인간이 주님의 나라와 의를 보려고 하면 주님의 욕을 얻어먹어야 돼요. 신앙생활은 누가 하는가? 신앙생활의 관계는 주님이 만들지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내가 신앙생활을 해버리면 금방 지칩니다. 얼마나 완벽하고 얼마나 철저해야 합니까? 아무리 노력해도 완벽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할아버지는 한 번도 저를 칭찬한 적이 없습니다. 할아버지 자존심에 허락이 안 돼요. 저는 할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울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할아버지는 자존심 때문에 직접 칭찬하지는 않았지만 우회적으로 한 번 칭찬한 적은 있었어요. “네 색시는 밥 먹을 때 참 복스럽게 먹는다.”
‘복스럽다’는 말은 할아버지 가족 중 어느 누구도 듣지 못한 큰 칭찬입니다. 제 아내는 할아버지가 전혀 무섭지 않았데요. 제 아내처럼 말한 사람은 우리 식구들 중 아무도 없었어요. 할아버지는 얼마나 무서운 분인지 남의 약점을 캐는데 귀신이고, 그 일이 자신의 즐거움인 것처럼 느껴졌어요.
예수님은 제 할아버지보다 더 한 분입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칭찬할 마음이 없습니다. 왜냐? 칭찬할 가치가 없기 때문에. 마귀의 아바타인 인간을 어떻게 칭찬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제자들은 은근히 기대합니다. ‘저희들은 주님과 함께 신앙생활 하고 있잖아요.’라면서.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을 향해 과격한 말을 하는 거예요. ‘따라오려면 따라와 봐라.’ 일곱 번 용서하면 됩니까? 아니. 일흔 번 씩 일곱 번 해라. 주님은 인간적인 신앙생활로 구원 받는 것을 허락한 적이 없습니다. 신앙의 표본은 도마가 보여줍니다. 도마가 진짜 괜찮은 사람이에요.
보지 않고는 절대 믿지 않겠다고 했어요. 그리고 예수님의 창자국, 못자국을 봤어요. 내가 여기 있다는 것 자체가 예수님을 찌른 이유가 된다는 거예요. ‘내가 여기 있는 것 자체가 예수님을 피 흘리게 한 것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45절에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했는데, 이 말은 모든 인간은 다 지옥에 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왜냐? 육신은 자아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몸밖에 없는데 악마가 찾아와서 자아라고 위장을 시킨 거예요. 그 자아는 악마의 속성이고, 악마의 속성이 이 몸을 주님이 다루는 것에 대해서 계속 반박하고 나서는 겁니다. 주님은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가는 것보다 절뚝발이로 영생을 얻는 것이 낫다고 했어요.
47절에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했어요.
예수님은 우리의 자아를 상대합니까, 우리 신체를 상대합니까? 신체를 상대하지요. 다시 말해서 충동을 보는 거예요. ‘너의 눈, 손, 발을 네가 관리할 수 있느냐?’고 주님이 묻는 거예요. 관리 안 됩니다. 자기 육체인데 왜 관리가 안 되는가? 그것은 주님이 우리를 육체로 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중학생 아들이 새벽이 고추가 빳빳하게 선다고 어떤 어머니가 말을 해요. 그건 자동입니다. 본인이 관리를 못해요. 잠을 자면서 자기 고추를 관리할 수가 없어요. 우리의 충동은 십자가 앞에서 그대로 노출되어야 합니다. 내가 충동을 조절해서 승리하면 안 됩니다.
복음은 주님의 안목을 주는 겁니다. 그러면 내가 이런 죄인이기에 주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48절에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고 되어 있지요? 제가 질문합니다. 죽은 자의 사회생활은 어떻습니까? 죽은 자들이 모인 곳에서는 어떤 사회를 이루고 사느냔 말이지요. 시간이 정지되면 성질만 남아요. 그것이 바로 48절 이야기입니다.
지옥에 가면 우리의 성질만 남아요. 인간들의 사회생활에서는 성질을 죽이고 살아가요. 만약 성질 안 죽이면 이 세상은 지옥처럼 됩니다. 만약 4명의 가족이 아침에 일어나서 전부 마리화나를 피우면 어떻게 될까요? 우선 집 안에 있는 칼은 다 치워야 해요. 아버지, 어머니 구분도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셔서 이 땅에 질서를 유지하게 합니다. 그것이 베드로후서에 나오지요. 마귀가 제 마음대로 할 수도 있지만 복음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셔서 세상 끝날 때까지 질서를 유지하게 하십니다. 이것을 로마서 13장에서는 ‘권세자들이 공연히 칼을 가진 것이 아니다.’라고 했어요.
‘내 딸을 내가 죽였다. 너희들이 왜 간섭을 해?’라고 할 때, 법정에서 어떻게 판결을 내렸지요? 여자에게는 징역 27년, 남자에게는 15년을 선고했습니다. 내 딸을 내가 죽였는데 남들이 왜 간섭을 하지요? 이유가 세상 법전에 나옵니까? 안 나옵니다. 이건 권세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영물이에요.
인간은 세상 돌아가는 것을 아무리 따져도 마지막 비약된 부분을 설명할 수가 없어요. 북한의 법도 상당히 윤리적으로 잘 되어 있어요. 가족 간의 끈끈한 정은 대단한 것입니다. 남들은 비난해도 가족끼리는 이해하고 용납해 줍니다. 만약 아버지가 가스관을 타고 올라가 도둑질하는 사람이라면, 그가 출근할 때 어린 딸은 ‘아빠, 힘내세요.’라고 인사를 할 것입니다.
인간들끼리 질서를 유지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런 권세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빼고 이야기를 하면 이것은 사회계약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도장 찍은 적이 없어요. 태어나자 말자 이 사회 법에 동의하겠다고 도장을 찍은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이것을 설명 못해서 그냥 ‘전통’이라고 해요.
과거가 없는 현재는 없어요. 그래서 역사를 공부해야 돼요. 역사는 현재 우리가 이렇게 사는 이유가 역사 속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역사를 추적해 봐도 잘 설명이 안 되는 구석이 많아요. 옛날에는 왕이 절대 권력을 가지고 살았는데 지금은 왜 국민이 투표해서 대통령을 세웁니까?
역사를 살펴서 현재의 삶이 다 설명되는 것이 아닙니다. 정답은 하나님이 그때그때 상황을 만들어 가십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하나님의 개입을 모른 채 역사만 거론합니다.
지옥은 뭔가? 원래 상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원래 인간은 피조물이죠. 그러면 창조주와의 관계가 유지되는 속성을 보여야 하는데 인간들이 마귀에 속해서 주님과의 관계를 끊어버렸어요. 끊어졌으니까 저희끼리 놀다가 지옥에 온 거예요.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를 악마가 끊어버렸어요. 악마가 시키는 대로 죽음의 충동 속에서 쾌락을 쫓아 살다가 본래의 자리, 공의의 하나님 앞에 서니까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48-49절에 보니까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함을 받으리라.”고 합니다.
왜 살아있을 때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은 생각 못했습니까? 이런 무서운 심판의 날이 있다는 것을.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으니까 지옥이 있는 줄 알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아닌 하나님이 보낸 자를 믿어야 제대로 지옥을 압니다.
손을 잘라버려라. 범죄하면 지옥 간다고 말씀하신 주님이 계시잖아요. 즉 예수님께 아버지가 모든 심판을 다 맡겼어요. 그 주님을 믿지 아니하면 지옥 갑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것이 옳고, 당연하고, 정상적이에요. 이건 성령 받은 사람은 알아요. 내가 비정상이란 사실을.
성령을 받지 아니하면 자신이 비정상이란 것을 모릅니다. 남들이 그렇게 살아가니까 다 그렇게 사는 것으로 알고 있지요.
우리가 이 땅에서 성령 받아 이미 천국 백성으로 합격이 된 자라야만 이 본문이 이해가 됩니다.
50절에 “소금이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이 말은, 영원한 것이 너희를 덮쳤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본인이 소금이고, 이 소금이 우리를 덮쳤기 때문에, ‘내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너희들도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으로 만들고 말겠다.’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어떤 상황이든 다 복음으로 설명이 되는 것을 저희들이 미처 몰랐습니다. 하루하루 살면서 왜 우리가 아담일 수밖에 없는가를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