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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강의-하나님의 형상(히13;5) 170210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2. 23. 09:18
2017-02-22 18:27:36조회 : 26         
안양20170210a히13장5절(하나님의 형상)-이 근호 목사이름 : 공은주 (IP:119.207.152.148)

안양20170210a히13장5절(하나님의 형상)-이 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히브리서13장 5절 할 차례입니다. 히브리서13장 5절에 보게 되면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이렇게 되어있거든요. 5절 말씀에 앞의 대목과 뒤의 대목이 맞지를 않습니다. 돈을 사랑하지 말라. 있는 바로 족한 줄로 알라. 그 뒤에 나오는 말이 돈을 사랑하지 말라하고 연결이 잘 안돼요. 돈을 사랑하지 말라. 참아라. 언젠 가는 세상을 떠날 거잖아. 이리돼야 어울리는데.

 

돈을 사랑하지 말라, 라고 해서 그 뒤에 쪽의 말씀이 뭐냐 하면 내가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이 말은 주님이 함께 있다는 말이잖아요. 그러면 한 번 이렇게 정리하면 되지요. 주님이 함께 하심. 문제를 내보는 거죠. 주님이 함께 하심의 반대말이 무엇이냐. 라고 이렇게 하게 되면 주님이 함께 하심의 반대말이 돈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게 돈을 사랑하지 않으면 주님과 함께 하실 수 있습니까? 라는 말도 아니고 돈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구원해 주는 거 아니거든요. 돈을 사랑하지 않게 되면 그냥 부화만 늘어날 뿐이지 구원받는 건 아니거든요. 어떻게 주님과 함께 하심의 반대말 다시 말해서 주님이 함께 하지 않는 것이 어떻게 돈을 사랑하는 게 되느냐, 이 말입니다.

 

그리고 더 무서운 것은 “주님과 함께 하느냐?” “예, 함께합니다.” “그러면 너는 돈을 사랑 안하겠네.” 라는 질문으로 이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이 사실을 이렇게 연결시켜 버리면 누가 이해하겠어요? 아무도 이해 못해요. 주가 함께 하시기 때문에 돈을 사랑하지 말자. 그러면 괜히 가만히 있는 돈만 덤탱이로 욕 얻어먹게 되어있다 말이죠. 돈 있는 게 무슨 탈이 되고, 돈이 있는 게 주와 함께 못 있게 하기 위해서 방해공작을 하는 요인으로 돈이 들어가게 되니까.

 

그러면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하면, 5절 앞에 있는 1절부터 4절까지 이야기와 다 같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가 하면 이렇게 연관되어 있어요.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이 기쁘지? 라고 물으면 이해돼요. 


“주와 함께 있으니까 든든하지?” 

“든든하고 말고요.” 

“돈 버는 것으로 든든함을 안 채우겠지? 그치?” 라고 묻는 거예요. 

돈으로 든든할래? 주님과 함께 하심에 든든할래? 이렇게 묻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주님이 함께 하심으로 든든하지만 좀 보다 더 든든함을 채우기 위해서 돈까지 챙기면 더 좋겠습니다. 이게 우리의 본심인데. 주님께서는 돈으로 인생을 든든하게 채운다면 그것은 주님과 함께 있음에 든든함이 주어질 수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걸 두 개 연결시켰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누구냐 너?” 이 이야기에요. “너 누구야?” 라는 뜻이에요. 이 말씀이. 이 성경을 보고 있는 너가 니 자신에 대해서 제대로 아느냐고 묻는 겁니다.

 

“누구냐, 너?” 이건 올드보이에 나오는 최민식이 하는 대사 중에 있지요. 15년 동안 군만두만 집어넣는 감금방에서 이유도 모르는 채 갇혀있었다가 누구야 너? 삐죽한 안경 하나 쓰고 물을 때처럼. 누구야? 너? 하는 것처럼 주님이 묻는 겁니다. 이 성경 말씀을 가지고. 너 주와 함께 있는 너냐? 아니면 돈과 함께 있는 너냐? 둘 중에 어느 쪽이냐? 누구야 너? 정체를 밝히라고 묻는 겁니다.

 

이렇게 물을 수 있다면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정리할 수 있는 게 이거에요. 인간은 무엇이냐 하는 거예요. 성경에서 인간을 어디에다가 위치에 놓고 묻느냐 하면, 살아있는 우리보고 누구야 너? 너 뭐야? 이렇게 묻는 것이 아니고 자리를 딱 마련해요. 자리를 마련해놓고 이쪽과 이쪽을 마련해 놓습니다. 성경 이야기입니다. 이쪽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세계, 하나님만의 세계가 있고 이쪽은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세계가 있습니다. 자연세계 다른 말로 하면 피조 세계. 피조물의 집합이죠. 피조물 세계 해놓고 인간을 어디다가 집어넣는가 하면 요 중간에 통로로 집어넣었어요. 이것을 창세기1장에 보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되어있습니다.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든 이유가 인간 좋아라 만든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자기가 만든 세계에 이걸 개입하겠다는 하나의 절차로서 인간을 중간에다가 세운 거예요. 인간은 뭐냐, 통로. 어떤 통로? 통로라 하니까 빈 하수구, 또는 빈 파이프라 생각하면 제일 이해가 쉬워요. 누가 인간을 통해서 다녀가는 거예요. 하나님이 인간을 통해서 자연세계 속에, 본인이 만든 세계 속에 본인이 뛰어들기 위해서 필요 조치에 의해서 만든 게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통로입니다. 빈 통로. 파이프.

 

어릴 때 동네에 전신주나 하수구 공사할 때에 이만한 빈 콘크리트통로를 먼저 재워놓잖아요. 재워놓고 인부들이 땅을 파고 묻는데. 어릴 때 학원 안 다닐 때 어디서 놉니까? 그 통로에 가서 까꿍하고 기어 다니고 그러지요. 그런 커다란 빈 파이프 같은 그러한 기능이 인간의 기능이에요.

 

이 기능을 충실하게 수행하신 분이 계십니다. 누굽니까? 바로 예수님이 이 통로를 수행했습니다. 골로새서 1장에 보면 예수님이 누구냐 하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냐? 하나님이 이 피조세계에서 자신의 실존을 보여주는 형태가 하나님의 형상이에요.

 

하늘에 계신분이 이 세상에 들어올 수 없어요. 왜냐, 이 피조물이 다 죽으니까.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하늘의 영광 성을 포기를 해야 돼요. 빌립보서 2장에 하나님이 자기 영광을 포기하고 하나님 됨을 인정치 아니하고 그걸 스스로 포기하면서 죽기까지 낮아졌다. 했지요. 그러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분이 자기가 만든 피조세계에 창조주가 감히 끼어든다는 것. 섞인다는 것. 여기에 같이 살려고 들어온다는 이 사실은 인간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을 위한 인간이 아니고 그런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통로로서 제공되어야 됩니다. 그래서 인간은 인간을 위한 인간은 없습니다.

 

주께서 벌리고자 하는 일에 쓰시옵소서! 하고 제시해야 됩니다. 인간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일 벌리옵소서!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되시는 분과 결합이 되면서 하나님의 형상에 본래의 기능을 드러내는데 그 본래의 기능이 예수의 증인 되는 겁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형상의 기능을 보여줄 때 본래의 인간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예수님은 혼자 왔습니까? 아니면 누구와 함께했습니까? 아버지와 함께 한다 했지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아버지와 함께 했지요. 그게 아까 봤던 히브리서13장 5절 말씀, 주와 함께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6절에 보면,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 이 말씀은 어디에 나온 말씀이냐 하면 시편118편 6절에 나온 말씀이에요.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게 두려움이 없나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꼬” 라고 되어있어요.

 

그런데 시편을 보시면서 시편의 해석에 가장 기본이 뭐냐 하면, 시편에 등장하는 나가 있잖아요. ‘나’ 나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에요. 다윗이 노래에 맞춰 지은 시라 할 때, 구약에 있는 구약학을 전공한 신학 교수들은 말하기를 이것은 다윗이라고 이야기하거든요. 그 사람들은 뭘 모르는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으로 왔다는 사실을 몰라요. 그들은 문자적으로 보는 겁니다. 다윗이 시를 지었으니까 다윗이 지었다는 거예요.

 

그 사람들이 시편 연구할 때는 뭐냐 하면 다윗의 심리상태, 다윗의 사회적 상황, 그리고 다윗이 쳐해 있던 정치적 입지. 그런 걸 가지고 시편을 해석하다보니까 시편이 보편적인 해석으로 주어지는 게 아니고 다윗처럼 그렇게 쫓겨 다녀야 비로소 그 마음에 동감할 수 있는 시가 되어버리는 겁니다. 평소에는 시편과 관련 없다가 자기가 뭔가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아! 시편을 보자. 시편에 나오는 다윗의 심정이나 내 심정이나 똑같네.’ 이리 되는 거예요.

 

그러면 다윗처럼 사울에게 쫓기지 않는 쫓길 경험이 없는 사람은 생전 시편에 대한 내용에 대해서는 무관한 사람이 되고 마는 겁니다. 억울한 일을 당했다든지 어떤 상사한테 혼나게 당했다든지 아니면 부교역자가 당회장한테 너무 오감을 당한다. 이럴 때는 시편23편 여호와는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 때 써먹을 구절처럼 되는 겁니다. 정치적 상황이거든요.

 

신학자들이 시편을 해석하면서 다윗이 사울에게 당했던 정치적 상황으로 해석을 한다면 그것은 무엇과 같으냐 하면 예수님을 죽였던 예수님을 싫어했던 바리새인의 해석하고 동일한 해석이 되는 겁니다.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인간의 이성적으로 해석할 때는 바리새인의 해석법에 범주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한 가지 또 예를 들면, 5절에 봅시다. “돈을 사랑치 않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이 말씀이 딱 나오잖아요. 이 말씀을 지금 우리만 보고 있는 것이 아니고 수억명이 봤어요. 소위 수억명이 이 성경을 보면서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졸로 알라.” 딱 보는 순간 그 수억명 되는 인간들이 무슨 생각을 하겠어요? 이런 생각합니다. 최선을 다하여 돈을 사랑하지는 않겠습니다. 최선을 다하여 나름 노력해서 이 말씀 순종하도록 하겠습니다. 될 수 있는 대로 돈을 사랑 안하고 될 수 있는 대로 있는 바를 족한 줄로 노력에 노력을 경주하겠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 말씀을 지켰다 하는 그 말씀의 범위가 자기 행위 안으로 축소가 되지요. 한 번 적어보겠습니다. 말씀을 지키라는 그 말씀의 범주 또는 범위가 자기 행위에 능력 속으로 축소가 되지요.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까? 지키려고 지키는데 자기가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만 지켰습니다. 라는 비겁한 변명이 나오겠지요. 나름 노력을 다하고 있고, 나름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까 “하나님이여! 내가 노력하는 그것과 이 말씀을 지켰다 하고 같이 봐 주세요.” 가 되는 거예요.

 

“봐 주세요. 지금 노력하고 있잖아요. 저희 형편에는 더는 못합니다. 지금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어요. 그저 하루 세끼이외에는 돈을 사랑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세끼이외 돈을 사랑하지 않는 이것도 ‘돈을 사랑치 않고’에 해당되는 말씀이 되게 해주시고 ‘족한 줄로 알라.’에 딱 일치가 되고 부합이 되는 걸로 그만 눈 한 번 질끈 감으시고 봐주시기 바랍니다.” 그리 나오겠지요. 누가? 수억명이. 모든 인간들이. 유대인들이 이런 해석을 했어요. 유대인들이.

 

유대인들이 하는 해석이 왜 성경에 나오느냐 하면, 니들이 아무리 신약 성경을 해석하고 십자가 은혜 받고 해석해봤자 유대인의 해석의 범위를 너희는 뛰어봐야 벼룩이라는 것을 거기서 벗어날 수 없어요. 딱 그 마음에 그 맘으로 가는 겁니다. 신학교수도 박사도 마찬가지에요. 시편 해석하라 하니까 다윗이 고생한 정치적 상황이 바로 시가 나왔다. 끝.

 

그러나 제가 아까 정답 말씀드렸지요. 시편에 나오는 모든 나는 누구라고 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지요. 제가 이걸 구약 박사들 앞에서 이리 말하면 멱살 쥐려고 할 거예요. 당신은 무슨 근거로 그런 비약적이고 점프하는 식으로 도약하는 식으로 해석하느냐 라고 멱살 쥐면 저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그걸 가지고 하겠어요. 사도행전에 사도들이 성령을 받고 난 뒤에 구약을 어떻게 해석했습니까? 그 시편에 있는 나가 다윗이 아니고 바로 예수님인 거예요.

 

그들에게는 이건 터무니없는 해석이 되는 거예요. 왜 그들이 그렇게 터무니없는 해석이 되느냐 하면 이게 만약에 시편에 나온 그 나가 다윗이 아니고 예수님이 된다면 자기가 20년 10년 동안 박사학위 받은 거 전부 다 찢어버려야 돼요. 소용이 없는 거예요. 구약 박사학위 받고 신학 교수 강의하는 게 전부 거짓말이 되어버려요. 왜 거짓말 되느냐 하면 자기가 자기 실력으로 아무리 해봐야 시편에서 나오는 나가 신약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고리를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어떤 알고리즘이라 하는데.

 

컴퓨터에서 명령어의 연결고리를 알고리즘이라고 합니다. 지시와 지시의 연결고리 알고리즘이라 합니다. 논리의 연결고리. 구약에서 신약까지 연결시켜야 하는데 연결시킬 수가 없어요. 왜냐 하면 문자로 한 것은 연결이 안 됩니다. 유대인들이 바보가 아니거든요. 세계에서 제일 똑똑하다고 자부하잖아요. 아무리 예수님의 말로 평가하고 분석하고 해석해봤자 그들이 알고 있는 구약해석하고 예수님의 말과 도무지 연결이 안돼요.

 

메시아라고 쳐주고 싶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성경의 모세오경을 해석하는 그들의 해석법으로서는 예수님의 말씀이 모세오경에 완성으로서 끼어들 여지가 전혀 없어요. 니가 미쳤거나 아니면 우리가 잘못됐거나. 그런데 예수님 앞에서 자기가 잘못됐다고 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답변하기 전에 내가 그냥 측정해 볼게요.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로 족한 줄로 알라. 방금 봤습니다. 그러면 제일 떠오르는 생각이 뭐라고 했습니까? “예, 그 돈 나쁘지요. 돈 필요하지만 돈은 나쁜 거예요. 딱 평소에 내 생활하고 똑같네. 지키겠습니다.” 라고 하는 것이 나쁜 짓이라는 인식을 누가 갖겠어요? 누가?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데. 정성을 다하는데. 지정이면 감천이라고. 이 말씀 지키려고 노력하는 내가 나빠요? 그럼 어쩌라는 말이에요. 이것조차 나쁘다면. 그러면 우리보고 어쩌란 말이에요. 이게 나오냐는 말이지요. 이게 한계거든요.

 

그 한계에 대해서 오늘 본문의 해답은 뭡니까? “주가 함께 있잖아. 니 옆에.”이게 해답인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와 함께 있다는 것에 대해서 “예, 함께 있는 것 알지요.” 해놓고 

돈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니까 “최선을 다해서 하겠습니다.” 

그러면 함께 있는 거예요? 단독 자에요? 단독 자잖아요. 단독 자.

 

아~ 이 대목을 구약은 빼놓고 이게 신약이니까 신약 교수들이 신학교에서 어떻게 가르치나 보라 이 말이죠. 이 대목 나오면 신학 교수들은 수업시간 때우기 좋아요. 왜?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로 족한 줄 알아라. 이 대목 나오면 요즘 같으면 대번 나오는 게 최 순실 이야기 나옵니다. 봐라. 돈 끌어 모아가지고 비자금 마련하고 권력이용해서.

 

그 사람이 신자라면 신자에 맞는 행동을 보여줘야 행함을 보고서 신자 되는 거야. 이 학생들아! 여러분들은 나중에 개척교회 할 때는 이 말씀을 생각해서 돈을 사랑하지 마세요. 오늘날 이 기독교가 욕 얻어먹는 이유가 뭔 줄 압니까? 말씀대로 안 살아서 그렇습니다. 신학교수는 시간 빨리 잘 가. 지금. 지 다 아는 이야기 있잖아요. 지만 아는 줄 알고 막 하게 되면 수업시간 때먹는 거예요. 그게 해석입니까? 그게 바리새인 해석이잖아요.

 

그러면 학생들은 그 소리 듣고 역시 세상은 썩어도 우리 신학 교 수님은 참 진짜 훌륭한 교수님이야. 진짜 이건 말씀대로 사는 진짜 신자 같아. 종교심이 마구 일어나겠지요. 참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그게 더 미워. “여러분, 우리가 예수 믿는 사람답게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 돈을 사랑하지 맙시다.” 라고 하는 이게 등짝 때리고 싶어. 더 미워.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유대인들이 오늘날 교인들이 돈을 사랑 안한다고 칩시다. 안한다고 치면 

그것은 인간은 뭐가 되느냐 하면 이게 개체가 되고 말아요. 

개체. 개체화 되어버리면 빈 통로, 파이프가 아니고 단독 자가 되어버려요. 단독 자. 

나는 히브리서13장5절 잘 지킨다. 주여 오늘도 지키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죽 돈을 못 벌었으면 그런 식으로 위로할까요? 

돈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돈을 안 벌게 해줘서. 

버는 게 아이 셋 낳고 키운 거 그것 밖에 안 주니까 

이건 자동적으로 돈을 사랑해도 돈이 있어야 사랑하지.

 

그런다고 자기는 말씀 잘 지키는 줄 알고 자꾸 스스로 자기한테 변명들을 해놓는 거예요. 이게. 돈이 한 200억 놓고 700억 있어놓고 돈을 사랑하지 말라 이렇게 해야 되는데 돈 몇 푼이나 그저 한 달 월급 받아가지고 세금 나가고 다 나가고 마이너스 20만원되는 이런 입장에서 돈을 사랑하느냐, 안 하느냐 그런 여건도 안 돼. 그걸 측정할 수 있는 여건조차도 마련되지 않은 입장에서 돈을 사랑한다. 돈이 있어야 사랑하지. 사랑할 돈도 없는데. 돈 몇 푼 월급 받으면 나갈 곳이 더 많은데 무슨 돈을 사랑해요? 집사님, 돈을 사랑합니까? 뭐 돈이 있어야 사랑하지. 돈 사랑을 해봤으면 좋겠어. 돈 사랑이 뭔지 구경이나 해 봤으면 좋겠어.

 

그러니까 이 교회라는 것이 성경 말씀 보면서 제대로 말씀도 못 지키면서 지 형편 따라서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까, 최선을 다 하는 것은 점수 좀 주시는 참 잘했어요! 도장 찍어달라는 그런 사람들이 모인 곳이 교회에요.

 

근본적으로 인간은 빈 통로입니다. 자기 고유의 자기 의, 자기 가치를 챙기면 안돼요. 그것 챙겼다가는 단독 자가 되고 단독 자가 되게 되면 하나님의 언약의 체결자로서, 언약의 체결자도 안되는데 언약은 성부와 성자가 체결하는 그 자리에 본인도 히브리서13장 5절 지켰으니까 나도 거기에 한 목 했습니다. 해가지고 그 근거로 나를 구원해 주세요. 이렇게 들이 민다니까요.

 

이 성경이라는 언약을 내가 지금도 성심성의껏 지키고 있으니까 지킨 것을 봐서라도 천국은 기본이고 하늘나라 상급이라도 보너스도 주시옵소서. 이리 나오기 딱 십상이에요. 가난하다는 이유 때문에 돈 사랑 못해놓고 마치 200억 있어도 돈 사랑 안할 것 같은 사람으로 스스로 자기를 조작해내는 겁니다. 200억 한 번 있어봤습니까? 딱 깨놓고 진짜 사랑할 만한 푼돈이라도 목돈이라도 있었으면 좋겠어. 그런 것도 없어요.

 

그러니 이 말씀은 뭐냐 하면 주가 함께 있느냐를 측정하는 방법으로서 쑤셔보는 겁니다. 그걸 제가 울산강의에서 함정수사라 했지요. 니가 평소에 주님만 의지합니다. 라는 말이 이게 말로 끝나는 게 아니고 이게 생활화 되어있는가를 한 번 쑤셔보는 거예요. “돈 사랑하나?” “사랑하지 않겠습니다. 예써! 충성!” “아이고, 잘났다. 니 혼자 잘해가지고 천당가거라.” 이게 안돼요. 주와 함께 있다는 것은 진짜 하나님의 형상은 빈 통로입니다.

 

주님께서 이 자연세계에다가 뭘 집어넣었느냐 하면 말씀을 집어넣어요. 히브리서13장5절 같은 말씀 그리고 히브리서13장4절 말씀 그리고 2절 말씀.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우연히 천사를 대접한 그런 대목들이 막 들어가요. 이것은 이 말씀이 중간에 말씀이 너를 거쳐서 오는 게 아니고 예수님에게 거쳐서 너에게 다가가는 거예요. 예수님을 거쳐서 들어가는 거예요.

 

그러면 이 말씀을 돈을 사랑하지 않음을 제대로 지킨 결과가 뭐냐 하면 “돈을 사랑하지 않겠습니다.” 라든지 “지금 돈 사랑 안 합니다.” 이게 아니고 “주와 함께 있으니 주께서 아시나이다.” 베드로가 세 번씩 이야기한 거죠. “니 나 사랑하냐?” 이 말은 보통 사람 같으면 “나를 사랑해야 돼!” “나를 사랑하란 말이야.” “똑바로 해!” “지금까지 나를 사랑한다고 거짓말 했잖아. 이젠 똑바로 해.” 이런 말로 들리겠지요. 베드로는 그런 말로 들은 게 아닙니다.

 

못난 인간, 

도망친 인간, 

비겁한 인간, 

스승 버리고 가룟유다처럼 자살이나 하지, 자살도 못할 비겁한 인간. 

자살도 못할 그런 쪼다 같은 인간

을 일부러 찾아오셨다는 말은 

주께서는 이미 까발렸다는 거예요. 

내가 어떤 존재인지, 그리고 이 평생 나는 이런 존재로서 절대로 변화지 않는다는 사실을 충분히 아시는 거예요. 

기회를 3번 줘도 4번 줘도 소용없어요. 10번을 줘도 인간될 가능성은 있다? 없다? 없습니다. 그게 저와 여러분들이에요. 백날 잔소리해도 안돼요. 백날 해도 인간은 안 들어요.

돈을 사랑하지 말라. 했지요. 돈 없을 때는 지키는 것 같지만 갑자기 로또 바람에 날려 와 얼굴에 붙어 가만히 쥐고 있다가 220억 얻었다든지 갑자기 누가 와가지고 유산이라 해가지고 모르는 사람이 와가지고 어떤 할머니가 죽어가면서 “아이고, 쓸데없는데 니가 양자 돼가지고 대충 40억 빌딩2채 받아라.” 이러면 그 다음부터는 뭐 생각합니까? ‘까짓 거 뭐 주님과 함께 있는데 이 쓰레기 같은 거 뭐 할라고?’ 이런 생각이 절대 안 들게 되어 있어요.

 

우리가 우리 자신을 너무 몰라요. 너무 모른다고요. 

그럼 어떻게 하느냐, 이 말씀에 성경책의 밖에 있으면 안 됩니다. 

주와 함께 있는 사람은 이 성경말씀이 

우리의 빈 파이프 그 앞면 쪽에 이걸 주께서는 새겨버려요. 

이제는 내가 움직이는 말씀이 돼요.

 

돈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사랑하는 못돼먹은 나로서 

주께서는 가지고 다니십니다

다니시면서 그러면 우리는 무엇의 증인이 됩니까? 예수의 증인되지요. 

나는 때려죽여도 돈을 사랑하는데 

이런 인간을 주께서 내 옆에 계셔서 이런 인간을 구원했습니다. 라고 소개하게 되면 

그 순간 그 사람은 뭐냐, 돈은 사랑한 것이 아니고 

옆에 계신 주님을 사랑한 사람으로 주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주의 증인되는 방법이 뭘 거쳐 와야 돼요. 뭘 거쳐 와야 된다고요. 그래서 죄인인 인간, 죄인들 인간이 누구냐 하면 구약의 이스라엘이거든요. 이스라엘에게 뭘 주느냐, 율법을 준 거예요. 율법을 주면서 주님이 따라 날아와요. 따라온 주님이 뭐냐 하면 ‘주의 이름’입니다. 주의 이름, 하나님의 이름, 또는 여호와의 이름.

 

구약에서는 예수님이 나타나지 않았어요. 예수님이 나타난 게 아니고 언약이 나타났습니다. 언약이. 신학 교수들이 이것도 몰라요. 이것을 알았으면 그들이 신자지요. 신자 같으면 신학 교수를 못해요. 불신자기 때문에 신학교수를 하는 거예요. 불신자기 때문에. 그런데 불신자라는 게 뭘까요? 이겁니다. 불신자라는 게 뭐냐 하면 죄 짓기 이전 상태에 있다고 착각하는 게 불신자입니다. 인간은 전적으로 죄인이 아니고 우리 조상은 실수했지만, 우리는 실수 안 할 가능성이 있다. 이게 불신자입니다.

 

불신자라는 말은 뭐냐 하면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이에요. 예수님의 복음을 안 믿는 사람이에요. 복음을 안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아직도 자기한테는 자기가 예수 믿을 수 있는 자기 역량이 있다고 보는 겁니다. 나에게는 아직도 예수 믿고 안 믿고 선택권이 아직도 있고 내가 마음먹기에 따라서 믿을 수도 있고 마음먹기에 따라서 안 믿을 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뭐냐, 나의 선택의 대상이 되지요. 예수님이 나를 선택하는 게 아니에요. 그렇게 되면. 누가 선택해요? 내가 정신 차려서 공자, 맹자, 소크라테스, 부처 있는데 어느 것이 좋을까? 에라~ 이렇게 집었다는 거예요. 그런 정도의 실력은 자기한테 있다는 겁니다. 인간이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담이 죄 짓기 전에 그때뿐이었어요. 그 이후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요. 누구의 선택입니까?

 

아벨의 제사를 받을 때, 아벨의 제사가 받을만해서 받았습니까? 아니면 아벨제사 받는 것이 누구의 선택권이었어요?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선택한 거예요. 하나님께서. 아벨이 제사를 똑바로 해서 받았다면 형 가인에게 불렀을 거예요. “가인아! 동생 제사 봤지? 제사는 저리 드리는 거야. 다시 드려. 서류 반납하고 결재 다시 올려” 이렇게 했을 거예요.

 

가인도 알아요. 이것은 주님께서 나에게 제사 잘못됐다는 것으로 문제 삼는 게 아니고 아예 내가 제사를 똑바로 해도 버릴 사람이에요. 버릴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은 이유를 막론하고 무조건 아벨은 선택하고 무조건 가인은 버리게 되어있어요. 그리스도의 노선이라 하는 것은 주님에게 선택권이 있지 인간에게는 없거든요. 왜? 인간은 이미 범죄한 상태이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기회를 부여하지는 않습니다. 다 추방된 존재이기 때문에.

 

에덴동산에 있을 때는 선악과 따먹지 말라. 선택권을 줬는데 이미 추방된 입장에서는 사실은 선택권을 줬다하는 것도 나중에 보면 준 건 아니지만, 일단 줬다고 치고, 추방된 입장에서는 마귀의 통제를 받기 때문에 자기는 선택권이 없어요.

 

아벨이 제사를 드리고 난 뒤에 “야~ 하나님이 나보고 제사 잘 지냈데. 그럼 나는 가치 있구나! 그럼 나는 살아남아야 돼!” 이게 안 됩니다. 아벨은 형이 와서 돌로 쳐 죽임을 당하는 자기가 일찍 죽어야 되는 선택권은 아벨의 본인의 결정 사항이 아니에요. 제사를 받는 것부터 해서 평생 나는 몇 년 살다 죽을래. 이것도 누구 소관입니까? 하나님의 소관이지 우리의 소관이 아니에요.

 

그래서 인간에게서는 미래라는 게 장래라는 것은 사실은 인간에게는 결정권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인도하는 대로 천국가고 주께서 인도함 따라서 지옥 갈 뿐입니다. 배를 항구에 댈 때, 그걸 잡아당기는 선을 배를 가지고 예인선이라 하지요. 예인선은 크지를 않아요. 큰 배도 잡아당기면 조금씩 오게 돼있거든요. 예인하는 배는 작아도 누구 말 들어야 돼요? 그 쪽의 지형과 그 쪽의 모든 내용이 잡아당기게 되어있어요. 오게 되어있어요. 따라서 그것은 큰 배도 아무소리 하지 말고 이끌려야 돼요. 그게.

 

그런데 문제는 그 분이 오늘 본문에 의하면 주는 나를 뭐하는 자라고 했습니까? 6절을 보세요.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나를 돕는다는 말이 내 뜻을 도와주는 게 아니에요. 이겁니다. 나의 필요에 의한 하나님이냐, 아니면 주님의 필요에 의한 나냐. 이 싸움이라니까요. 우리의 평생 신앙의 싸움은 이거에요. 나의 필요에 의해서 주님이 필요하냐 아니면 주님이 필요해서 나를 이렇게 일방적으로 사용하느냐 그 싸움이거든요.

 

그런데 그 둘 중에 어느 것이 옳으냐 근거는 뭐냐 하면 말씀 자체가 우리가 요청한 게 아니에요. 돈을 사랑하는 것은 안 된다. 이걸 누가 요청했습니까? 회의했습니까? “우리 앞으로 어떻게 살까요?” “예, 우리 돈을 사랑하지 맙시다.” “됐습니다. 결재 올립시다.” 이렇게 한 게 아니고 말씀 자체가 일방적으로 주님께서 요청한 거예요.

 

제가 캐나다 캘거리 강의에서 제일 처음 강의가 뭐냐 하면 “말씀은 우리가 요청한 게 아닙니다.” 그래서 그 다음날 논리가 뭐냐, 요청한 게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그 말씀에 대해서 이해를 못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강의를 그렇게 시작했습니다. 벌써 지금 우락부락 화를 내고 난리 났어요. 왜, 나름 교회 가서 말씀 지킨다고 최선을 다했는데 앉아있는 사람보고, 요청한 게 아닙니다. 그런데 당신은 그것을 요청한 게 아니기 때문에 당신한테는 낯설어야 되는데 우리는 마치 익숙한 윤리, 도덕으로 일방적으로 해석을 해버렸습니다.

 

그리고 목사가 거기에 편 들었습니다. 시킨 대로 했습니다. 잘한다고 거기서 박수쳐줬어요. “아이고, 성화되셨군요.” 했다 말이죠. 그러면 하나님의 요청대로 말씀을 지킨 경우는 어떤 경우냐, 주님께서 말씀을 지키는데 말씀을 만드신 주님도 같이 따라왔거든요. 따라왔는데 그 분이 이 세상을 떠날 때 어떻게 죽었습니까? 행복하게 환영 받으면서 떠났습니까? 비참하게 떠났습니까? 비참하게 떠났지요.

 

그러면 그 누구도 말씀에 대해서 제대로 알았다? 몰랐다? 제대로 해석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증거잖아요. 십자가가. 그러면 십자가를 모르면서도 모세율법을 지켰다. 십계명을 지켰다는 말을 우기는 것은 뭐냐, 그 지킴이 아까 제가 이야기한 것처럼 자기가 행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지켰다고 일방적으로 지금 우기는 겁니다. 우기는 것.

 

그렇게 해서라도 내가 천국 가는 것을 스스로 위로 받고 싶은 거예요. 20년 30년 교회 다녀가지고 지옥 가보세요. 이런 억울할 데가 어디 있습니까? 교회에 돈은 다 바쳤는데. 거기에 대해서 다 부질없는 짓들을 했군요. 세상사 인간사 다 부질없는 짓이라고. 제가 주일날 설교 때 했잖아요. 방실이의 〈서울탱고〉라는 노래 가사에서.

 

얼마나 화가 나겠어요. 그러면 이건 속아도 누구한테 속은 거예요? 기독교한테 속은 거예요. 기독교에서.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그 소리밖에 할 수 없어요. 잘한다! 잘한다! 해야 교회 교인이 얼추 유지가 되거든요. 부동산 해놨지 형광등 전기세는 나가야 할 게 아닙니까.

 

사람들 구원되는 거 목사는 이거 몰라요. 지도 모르면서 그냥 관심사가 뭐냐 하면 교회유지, 번창 그 외에는 아무것도 몰라요. 무슨 소리를 듣기를 원하십니까? 충분히 해드리겠습니다. 이런 계약 외에는 없어요. 그게 계약이에요. 여러분, 뭘 기뻐하십니까?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네, 얼마든지 해드릴게요. 이것 뿐. 돈을 사랑하지 마라. 하지 맙시다. 됐지요? 오늘 설교 끝! 은혜 받았지요. 갑시다. 이리 되는 거예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누구냐? 너?” 이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강단에 서서 설교할 때는요, 이겁니다. 

“오늘, 교회 너 누구지?” 

“너 진짜 주와 함께 있어? 

아니면 니 잘난 맛에 천당 가려고 온 사람이야? 

유대인이야? 아니면 성령 받은 성도야?” 

분명히 하라는 거예요.

 

왜, 그 차이 속에서 십자가는 반복이 되니까. 

십자가는 새롭게 해요. 십자가는 새롭게 피어납니다. 

지금 오늘 참 말씀 중요한 거예요. 제가 그렇게 우기는 게 아닙니다. 

성경의 앞, 뒤가 그렇게 연결되어 있어요. 앞, 뒤가.

 

특히 시편118편6절 다시 보게 되면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게 두려움이 없나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꼬”이리 되어있지요. 3절에 보면, “이제 아론의 집은 말하기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할찌로다” 여러 번 해도 잊어버리니까 반복하겠습니다. 다윗의 나가 누구라고 했지요? 다윗의 나가 예수님이죠. 이걸 유대인들은 사도바울이 한 이야기를, 예수님이 평소에 하는 이야기를, 유대인들은 박사들입니다. 성경을 그냥 달달 외워요.

 

아무리 구약의 시편을 찾아도 거기에 예수님이 안 보이는 거예요. 예수님은 그걸 알고 이야기했습니다. “다윗이 주라고 하는데, 왜 다윗의 후손이 주가 되지?” 먼저 물었어요. 마태복음 22장45절에 나와요. 그 박사들이 답변을 못합니다. 다윗은 다윗뿐인데. 그럼 예수님은 그런 취지로 또 물어요. 에스겔에 보면 장차 다윗이 온다고 하는데 왜 오지? 생각해보세요. 이미 다윗은 죽었잖아요. 죽은 분이 왜 옵니까? 에스겔37장 말씀입니다.

 

그런데 정작 온 것은 다윗이 왔습니까? 예수님이 온 거예요? 예수님이 오셨지요. 그러면 다윗은 뭡니까? 다윗은 빈 파이프가 되는 거예요. 이제 이해하시겠습니까? 다윗은 껍데기인 거예요. 그런데 다윗이 죄를 지을 때는 자기가 껍데기인 줄 모르고 자기가 이스라엘 왕으로 착각을 한 거예요. 이스라엘은 다윗이 왕이 아니고 다윗의 언약이 왕에요. 다윗 언약 안에는 미지의 점선으로 된 어떤 분이 있어요.

 

그런데 다윗은 본인이 점선이 아니고 실선이거든요. 자기가 있잖아요. 지금 자기 세포가 뛰고 있잖아요. 자기가 지금 왕의 자리에 앉고 있잖아요. 지금 요압하고 전쟁하고 있잖아요. 자기는 왕이니까 그냥 우리아 장군이 전쟁하고 지는 앉아가지고 그냥 즐기면 되는 거예요. 왜, 하나님이 함께하는 나라 승리케 해줄 거예요. 승리케 해주는데 내가 왕이니까 나의 왕 덕분에 승리케 한다. 이리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우리아가 전쟁할 때, 다윗은 누구하고 전쟁했습니까? 지금 죄하고 전쟁한 거예요. 누가 졌습니까? 죄가 이기고 누가 졌어요? 다윗이 진 거예요. 다윗언약은 우리가 죄에 질 때, 비로소 언약이 온 몸으로 확 올라오는 것처럼 올라오는 거예요. 자일리톨 껌처럼.

 

그래서 정죄함이 없으면 죄 사함이 없어요. 정죄함을 입기 위해서 참 고맙게도 주께서 마귀를 우리에게 보내가지고 사도바울의 권면과 명령 있잖아요. 이 편지라는 명령. 율법 있잖아요. 마귀가 그걸 쥐고 툭툭 매일같이 우리 양심에다가 쏘아대는 그런 착한 짓을 해요. 그런 착한 짓을. 오늘 착한 짓을 또 하는 거예요.

 

돈을 사랑하면 안 되고 있는 바로 족한 줄로 알라. 이게 아르바이트 20만원 받을 그 때도 그렇고 정식 돼가지고 200만원 받을 때도 그렇고 재벌 되어 한 달에 수입이 10억 들어올 때도 똑같아요. 그리고 부도나가지고 마이너스 통장 20억 될 때도 똑같아요. 마이너스 통장 돼서 마포대교 가서 죽으려고 뛰어내리는데 “잠깐만!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로 족한 줄 알아.” 돈이 있어야 사랑하지. 부도났는데. 이 말은 돈만 있으면 안 뛰어내릴 건데. 돈 없어 뛰어내린 그것이 돈을 사랑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보다 더 깊은 의미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나님이여! 직접 나하고 상대합시다. 나 얼마나 잘났는지 잘난 나하고 상대하셔서 잘났거든 천국 보내주시고 못 났거든 지옥 보내도 제가 못한데, 누구 덕분에 하지 말고 나와 직접 거래합시다. 이게 바로 마귀의 아바타에요. 마귀가 우리 속에 그런 마음을 집어넣어준 거예요.

 

하나님의 형상은 오실 분이 아니고 니가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창세기1장27절,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었으니까 니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니는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고 통치하라는 겁니다. 그게 칼빈주의 문화관이잖아요. 신학 때 다 배운 거예요. 칼빈주의 문화관, 정치관 이리 할 수 있지요.

 

소위 네일란드의 아브란 카이프가 한 이야기가 있잖아요. 유명한 거. 교회에 머무르지 말고 세상에 나가 빛과 소금이 되자. 칼빈주의자들은 그렇게 살아야 된다. 이게 마귀 발상입니다. 실존이에요. 실존. 실존적으로 성도가 되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하나님도 하나의 실존으로 다가오고 그 실존과 실존 사이에 발로 말씀의 순종이 따른다. 이게 2000년 기독교 신학이 이게 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없어요. 예수 그리스도는 이제 죄 용서 받았기에 잠시 등장했다가 빠지는 거예요. 왜? 주와 함께 있어. 내가 이미 성도 됐는데 내가 알아서 해야지. 언제까지 찡찡대면서 주님에게 얼라처럼 어린애처럼 주님이 하시옵소서. 그런 시절은 지나갔다는 겁니다. 이제는 우리가 예수라는 겁니다.

 

5절 끝에 봅시다.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과연 너희를 그 다음 뭡니까? 떠나지 아니해요. 결혼한 지 이제 3개월 됐는데 둘이 신혼해가지고 앞치마 두루고 여보, 안녕히 갔다 오세요. 이마에 뽀뽀. 이렇게 좋을 땐데 촌에서 시어머니가 시커매 해가지고 올라와 가지고는 “이제는 나는 떠나지 아니하리라.” “어머님, 언제 내려가십니까?” “떠나지 아니하리라.” “설 끝났는데 내려가시지요.” “떠나지 아니하리라.” 이게 골치 아픈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빈 깡통이에요. 주께서 떠나지 않겠다는 거예요. 뭘 몰고 와서? 돈을 사랑하지 말라. 이것을 끌고 와가지고 눌러 앉아버리니까 실존이 어디 있습니까? 맨날 해체되기 바쁘지요. 어디 주님하고 거래해요? 하나님하고 어떻게 거래합니까? 거래가 안 되지요. 지금 그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해석이.

 

이제 좀 더 생각해 봅시다. 그러면 다시 자, 하나님이 계시고 여기 자연세계 피조세계 있지요. 중간에 뭐라고 했습니까? 통로라 했지요. 통로, 하나님의 형상이 있습니다. 형상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왔다는 말은, 이렇게 온다는 말은 마귀가 이걸 통해서 하나님께 대들었다는 거예요. 누굴 통해서? 마귀가 인간을 앞장세워가지고 따먹어라! 따먹어라! 했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형상을 통로로 생각해가지고 하늘에 있던 전쟁이 땅에 까지 확산됐거든요. 미가엘 전쟁에서 패배해가지고 땅에 내려와 가지고 인간을 인질로 잡고 하나님의 형상을 건드린 겁니다. 따먹어라! 따먹어라! 이렇게 했다 말이죠. 마귀가 유혹했다 말이죠. 십년 째 건뎌도 11년째 또 만찬가지. 100년 가도 마찬가지에요. 101년째 가도 또 유혹받아요. 하나님의 형상을 건드려버린 겁니다.

 

이 건드린 이것을 하나님께서는 뭐로 보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마귀를 영원한 저주를 보낼 합당한 근거의 지뢰를 건드렸어요. 마귀는 하나님이 벌인 작전에 걸려든 거예요. 왜냐 하면 하나님의 형상이 누구냐 하면 결국은 예수님이거든요.

 

마귀의 적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마귀의 적은 예수님이에요. 그래서 적그리스도에요. 적 하나님이 아니고 적그리스도라니까요. 마귀는 시키는 대로 해요.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해요. 욥기에 보세요.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갔잖아요. 욥을 건드렸잖아요. 마귀의 적은 욥이에요. 물론 욥이 아니고 욥 속의 그리스도에요.

 

마귀는 시키는 대로 할 뿐이에요. 마귀도 시키는 대로 하는데 마귀가 라이벌이 누구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에요. 마귀를 영원한 유황불 그러니까 지옥으로 보내기 위해서는 주님께서 마귀를 영원히 보낼 수밖에 없는, 저주할 수밖에 없는 근거를, 근거로 작용하는데 그 근거로 하는 미끼가 누구냐 하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했던 그 인간이 사는 동네에 죽음을 집어넣어버린 거예요.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그 죽음이 뭐냐, 영원한 저주입니다. 목이 숨이 넘어가는 죽음이 아니고. 영원한 저주다 말이죠. 저주로 지을 수 있는 걸이를 아예 에덴동산에다가 이렇게 설치를 해놓은 거예요. 마귀는 그걸 건드릴 수밖에 없어요. 그걸 건드렸지요.

 

건드리니까 마귀는 영원한 저주를 받는 건 당연하고요, 이건 제 이야기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제일 먼저 저주를 누구한테 했습니까? 따먹고 난 뒤에. 뱀한테 했지요. 순서가 그래요. 뱀부터 저주하고 그 다음에 저주를 누구한테 합니까? 인간은 저주 안 받는다고요? 천만에 말씀. 누구를 저주했습니까? 여자 저주했지요. 그 다음에 남자 저주했지요. 이 저주가 주어졌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이미 하나님의 형상이 어느 편이 됐다? 에덴동산 가는 길을 추방하고 난 뒤에는 모든 것이 뭡니까? 이미 마귀편이 된 거예요. 신학자들은 이걸 인정하지 않아요. 인간의 가능성을 이야기하는데 성경에 창세기3장에 가능성 없어요.

 

인간의 인생이라 하는 것은 벌 받는 중이에요. 한 짓이기 때문에 벌 받는 게 당연한 겁니다. 인생 살면서 눈물 찡찡대지 마세요. 한 짓이 있으면 벌 받아야지요. 매매해야 됩니다. 오히려 밥 먹고 사는 것을 다행스럽게 여기세요. 주여, 이거 안 주셔도 되는데. 이 맛있는 물 안 주셔도 되는데. 아이고~ 세상에 지옥에도 보리차 나오네요. 요새 참 지옥 좋아졌네. 이리 마음을 먹고 살아야 돼요.

 

찡찡대지 말란 말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이게 왜 잘못 건드렸느냐 하면 하나님의 형상되는 인간을 건드렸잖아요. 인간을 건드렸으니까 형상 따라 누가 오겠어요? 진짜 형상되시는 분이 지옥세계에 침투해버린 겁니다. 마지막 때에. 신약 때에.

 

지옥나라 난리 났습니다. 일부러 성령께서 예수님이 누구를 만나게 합니까? 제일 먼저 광야에서. 마귀를 만나게 했지요. 이 몽땅 다 마귀편이니까. 만나게 해가지고 하나님의 형상과 악마가 적이니까 원수니까 적그리스도니까 만나게 해줬습니다.

 

성경 간단한 거예요. 마귀 조지는데 인간 걸려든 거예요. 하나님의 형상을 해서 다 마귀편입니다. 분명히 합시다. 다 마귀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마귀로부터 벗어난 그것을 토대로 해서 새롭게 MADE IN HEAVEN 수요일에 했잖아요. 메이드 인 차이나처럼.

 

예수님을 토대로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버리면 이 피조물의 특징이 뭐냐 하면 마귀가 손 못 대는 새로운 피조물이 등장하니 그들이 바로 새 예루살렘, 새 이스라엘, 새 교회 이게 바로 성도입니다. 3분 동안 성경 다 해버렸어요. 3분 동안. 요 짧은 거.

 

인간은 빠져라. 인간은 피조물이니까 빠지고 하나님의 예수 그리스도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 또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위해서 악마하고 전쟁하는 그 효과로서 성도라는 새로운 예수님의 형상에 의해서 새롭게 창조된 자가 등장했으니 그게 메이드 인 해븐이에요. 천국에서 제조된 상품들입니다. 10분 쉽시다.

안양20170210b히13장5절(하나님의 형상)-이 근호 목사 

아까 중요한 거 다시 합시다. 무슨 뜻이냐 하면 이겁니다. 선악과가 있잖아요. 지금 선악과 위험한 지뢰밭을 에덴동산에 낙원에 왜 나두었느냐 말이죠. 그것은 마귀를 유인하기 위해서 하신 거예요. 마귀를 유인하는 겁니다. 인간 쪽에서 보면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되지요. 그건 사람에게 해당되는 식이고 마귀는 이미 죽은 거예요. 죽었으니까 죽은 행세를 하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마귀는 계속 따 먹으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어요. 아담보고. 이미 죽었으니까. 인간은 아직까지 선악과 따먹지는 않아서 안 죽었잖아요. 저주를 안 받잖아요. 에덴동산에 그냥 살고 있잖아요. 뱀이 에덴동산에 침투한 거예요. 침투해가지고 자기는 이미 신세 조진 거예요. 이미 저주 받는 겁니다. 저주 받는 티를 내는데 자기 자신의 본성을 그대로 발휘할 수밖에 없어요. 

선악과 따 먹어라! 선악과 따 먹어라! 지는 망했지만. 자꾸 망하라고 하는 거예요. 따 먹어라 하는 거예요. 따 먹어라 하는 대상이 누구냐 하면 하나님의 형상이다 말이죠. 그러니까 악마의 적이 누굽니까? 하나님의 형상이에요. 그런데 형상이 신약에 보면 누구에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마귀는 철저하게 아버지 앞에서 예수님과 같은 라이벌을 느끼는 겁니다. 그 라이벌이 진짜 아들과 가짜 아들이 라이벌처럼 느껴지는 겁니다. 이스마엘 말고 누구? 이삭. 에서아니고 누구? 야곱. 성경 보면 희한한 게 그냥 야곱만 구원하면 돼요. 그런데 왜 에서를 맏이로 들러리로 왜 나옵니까? 들러리로 왜 필요해요? 

인간 구원에 관한 문제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는 피조 세계에서 주가 되신 분이에요. 만들었다는 이유 때문에 주가 되신 게 아니고, 이게 삼위일체로 안 풀려요. 삼위일체 백날 해봐야 이거 안 나와요. 그래서 제가 삼위일체 싫어하는 거예요. 진짜 복음은 삼위일체에서 나온 게 아닙니다. 삼위일체는 어떤 궁극적인 논리를 끄집어내는 건데 그 논리가지고 영적세계로 점프할 수가 없어요. 

니고데모가 밤에 왜 찾아왔습니까? 비약하려고 하잖아요. 어떤 논리로 체계를 갖추면 나는 이 땅에서 하늘나라를 볼 수 있습니까? 어떤 논리를 제시하라고 하는데. 니고데모는 본인을 뭐로 봅니까? 인간으로 보잖아요. 예수님은 이 니고데모를 뭐로 바꾸는가 하면 육으로 바꾼 거예요. 왜냐 하면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어요. 

나머지 모든 인간은 죽으리라, 죽으리라, 이미 누구 편입니까?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쪽이에요. 생명나무 있는 쪽이 아니고 생명나무가 없는 쪽이에요. 아니 훌륭한 사람 많은 거 알아요. 착한 사람 많은 거 아는데. 자기 두 발 딛고 있는 자리가 생명나무가 없는 곳에 있는 한, 착해 봤자고 훌륭해 봤자고, 간디고 공자고 맹자고 해봐야 그 근처에 생명나무 있습니까? 부처 옆에 생명나무 있습니까? 없잖아요. 

종교가 무슨 소용이 있어요? 종교가. 아니 교회 다니는 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주님이 함께 있어서 계속 말씀가지고 우리로 하여금 얼마나 니가 일방적으로 니 변명으로 일관하는 인생인 것을 깨닫게 하는 거예요. 돈을 사랑 안하려고 애를 썼는데 마침 요번에 목돈 들어와서 잠시 한 이틀 동안 사랑했습니다.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양해해 달라는 소리를 하는 게 아니고 니가 누구냐는 거예요. 니가. 앞으로 잘할게요. 가 아니고 니가 누구냐는 겁니다. 

선악과를 심어놨을 때, 주님 쪽에서 인간보고 이야기합니다. 따먹지 말라. 정녕 죽으리라. 그런데 여러분, 어떤 말을 할 때는 경험되지 않은 말을 할 때는 어떤 말인지 못 알아들어요. 그런데 아담은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할 때에 사람이 죽는다는 것을 알았어요? 몰랐어요? 죽어봐야 알지. 죽어본 적도 없잖아요. 예를 들어서 세 살 먹은 애보고 엄마가 이 고추장은 굉장히 매우니까 먹지 말라 했어요. 그래서 조카이기도 하고 숙모가 그런 이야기하니까 저는 실감나는 교육을 했지요. 먹여봤어요. 자, 엄마가 하는 뜻을 알겠지? 맵지? 그러니까 먹지 말라. 하는 거야. 내가 실감나는 교육을 나름대로 했는데 나중에 그 소리 듣고 나를 죽이려고. 우리 애한테 왜 매운 걸 먹였느냐고. 철이 없었어요. 지금도 철이 없지만. 

하나님께서 의미 없는 말을 합니다.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죽는다는 걸 니가 알잖아. 그러니까 먹지 마!” 이게 성립이 안돼요. 그러니까 인간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독자적인 의미는 없어요. 인간은 어떤 창조주와 관련성을 맺어야 의미가 발생되는 겁니다. 결국 인간을 만들어 놓고 인간을 마귀가 유인하는 미끼로 사용한 거예요. 그게 하나님 앞에 주되심에 의미에요. 그 의미는 어디에 나오느냐,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금 이 말을 신학자들은 칼바트도 이해를 못해요. 형상대로 만들었다 하니까 칼바트는 이리 이야기합니다. 아~ 인간은 고귀한 존재다. 왜? 거룩한 하나님의 모습대로 만들었기 때문에 인간은 다른 동물보다 우수한 형상이다. 이리 했거든요. 제 뜻은 그게 아니고 예수님이 다녀가는 중간 절차로서 의미 있다 이 말입니다. 중간 절차. 고유한 의미는 없고 하나님의 형상되신 분이 나타나서 인간을 어떻게 다루었느냐 주님한테 의미만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니 옆에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뭐를 받는다? 저주를 받는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왜? 피조물이니까. 독자적인 의미와 가치는 피조물에게 주면 안돼요. 왜? 창조주도 아니잖아요. 영광을 창조주가 받아야지 피조물이 왜 받아야 됩니까? 

제가 이런 쪽으로 하니까 어떤 교수가 저한테 누구를 통해서 비난을 막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인간이 영광받기 위해서 그렇다. 이리 막 나오는 거예요. 그런 이야기 많이 들었지요. 물론 기본적으로 함께 영광 받지만, 인간도 영광 받는다는 겁니다. 그걸 가지고 공격하는 거예요. 저는 생각했습니다. 직접 그 사람과 만나서 토론 안 됐으니까. 왜 그런 발상을 해야 되는데? 주님만 영광 받으면 됐지. 콩고물로 우리 영광 받는 이야기를 왜 그걸 굳이 하는 이유가 뭐냐, 그건 교인들을 꾀기 위한 하나의 장사술밖에 안 되는 거예요. 

“여러분, 예수님께 잘하면 여러분도 영광 받습니다. 결국 여러분들이 원하는 대로 여러분의 뜻대로 되는 겁니다. 뜻을 위하면 교회에 나오셔야 됩니다. 절에 가면 안 되고. 교회에 나와야 되지요.” 이런 장사술을 펼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그런 이야기 듣기를 원했고 사람이 소망이 있어야 살지 소망이 없으면 못 살아요. 아무리 어려워도 의인이 7번 넘어져도 8번 일어나는 이유가 뭡니까? 아무리 어려워도 엄마가 “야, 야, 저녁 됐다. 빨리 와. 밥 먹어라.” 그 소리 듣고 죽는 것을 보류하고 밥부터 챙기는 겁니다. 인간은. 

인간은 누가 불러줄 때, 일단 희망을 얻고 가는 거예요. 인간은 희망입니다. 고도를 기다리잖아요. 고도가 뭐냐 하면 신이에요. 이름이.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신은 기다리는 맛이지 신이 나타나면 안 됩니다. 신이 나타나게 되면 뭐가 없어져 버려요? 그 순간 희망이 날아가 버려요. 블로흐라는 철학자가 희망의 철학이라는 것을 했고 그걸 누가 인정 했는가 몰트만이 희망의 철학에서 희망의 신학으로 바꾼 겁니다. 

사람은 희망 없이는 못 산다는 거예요. 가만히 보세요. 진짜 그렇지요. 어려워도 슬퍼도 달리잖아요. 하니는. 왜 달립니까? 아버지보다도 엄마가 그리워 달리잖아요. 은하철도999 왜 달립니까? 죽었던 엄마를 보고 싶어서 그 은하철도 타고 가잖아요. 철이가. 모든 드라마 모든 시청률이 희망으로 힘내는 거예요. 칼이 가슴에 꽂혀도 희망가지고 살아가요. 도깨비처럼. 이 희망밖에 없는 세상에서 누가 죽었어요? 예수님이 죽었잖아요. 그러면 진짜 예수님은 죽었고 가짜는 교회에서 대환영받고. 장난칠 거 장난쳐야지요. 진실가지고 장난치면 안 되잖아요. 

제가 이런 이야기하면 그 목사는 뭐라고 하는가 하면 누가 예수님을 봤나? 이리 나와요. 그러면 예수는 모르고 지금 목회하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 모르고. 사람들이 원하는 예수. 사람들이 원하는 예수하고 교환한 거예요. 

좀 더 진도 나가 봅시다. 다윗에서의 나는 누구라 했습니까? 예수님. 자, 이것을 어떻게 풀어나가는가 하면 다윗을 그냥 예수님 연결하면 예수님이 연결이 안돼요. 다윗에서 어디로 보내는가 하면 다윗 언약과 만나게 하는 겁니다. 다윗 언약과 만나는 순간 다윗은 내가 이스라엘의 왕이 아니고 다윗 언약 속에 어떤 분이 계시는데 그 분이 누구냐, 주의 이름이에요. 

주의 이름이 통치를 하시면서 하나의 미끼로서 누구를 사용하느냐, 소위 잘난체하는 다윗을 사용하는 거예요. 소년 다윗이 골리앗을 이겼잖아요. 이게 사실은 게임으로 불공평한 게임입니다. 30판 해서 1판 더 붙어야 돼요. 돌을 빼고 일단은 한 번 붙어야 돼요. 완전히  K1게임하듯이 한 번 하고 깨지면  안 됩니다. 두 번 다시없어요. 

홍해를 건널 때 애굽 군대가 빠져죽었잖아요. 그것도 불공평해요. 왜냐 하면 한 번 빠졌으면 그 다음에 바로 왕이 군대를 정비해서 다시 왔을 때는 공평하게 그들도 홍해가 갈라지고 말 타고 와가지고 애굽 군대하고 이스라엘 군대하고 30판 다시 붙어야 돼요. 그걸 가지고 이 세상에서 승리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에 나오는 승리는 그게 아니고 가만히 있다가 선박 날리는 거예요. 상대방은 생각도 않는데 선박 날리는 거예요. 먼저 선박 날리고 내빼는 겁니다. 이걸 가지고 사사기속의 그리스도 책에서 붙여놓고 승리한 것이 아니고 이미 확정된 승리를 못난 인간 보내서 확인 한다, 이렇게 했습니다. 그게 신약 오면 뭐냐, 십자가라는 새 언약의 승리를 위해서 작은 소자, 못났고 못난 인간을 이 땅에서 해가지고 누구나 니도 집적거리고 누구나 집적 건드리게 만드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도는 누가 봐도 건드릴 만할 정도로 본인이 죄인인 걸 알아야 돼요. “니 간음죄 했지?” “응” “니 살인죄 했지?” “응” “니 돈 사랑하지?” “어떻게 알았지?” 이게 성도에요. 누가 와서 집적거려도 “그래” “그래” “니는 간음에다가 거기다가 간음한 남편을 꼬셔가지고 미필적 고의에서 니가 앞장세워서 고난으로 니가 죽였지?” “응” “그래, 니가 잘났나?” “응 잘났어. 잘났어.” 이게 다윗입니다.  “그래, 밧세바가 낳은 애는?” “죽었어.” “니가 죽였지?” “응” 이거 뭐 말할 게 없어요.  

베드로보고 “당신, 죄인이야?” “응” “당신, 사도로 구원받았어?” “아니” “뭐로 구원받았어?” 베드로전서1장에서는 뭐라고 나옵니까? 보배로운 피로. 보배로운 피로 우리가 거룩함을 입었다. 내 대신 누가 죽었데. 이걸로 끝나고 말았어요. 이걸로. “바보야?” “응” “교회 몇 명이야?” “없어” 사도바울에게는 “교회 몇 명이야?” “아는 사람 몇 명 있어” “몇 명 되는데?” “편지에 등장하는 그 몇 명뿐이 없어.” “사도야?” “응” “니 전에 전도할 때 굶었잖아?” “응” “강도 만났지?” “응” “바다의 위협?” “응, 했어.” “사도야?” “응, 사도야.” “왜 그런데?” “은혜가 내게 족하데.” “니 병 들었어?” “응, 병 들었어.” “뭔데?” “사단의 가시라.” “기도했나?” “기도 했어.” “몇 번 했나?” “세 번 했어.” “주님이 고쳐줬어?” “아니” “왜 못 고치는데?” “은혜가 족하데.” 

그런 사도바울 간증집회 해봐야 교인 안 모입니다. 말이 통해야 되지요. 말이 통해야. 성경 보면서 여러분 뭐 봅니까? 그런 거 눈에 안 보이던가요? 횡재하려고 보지 마세요. 횡재는 없습니다. 이 땅은 굉장히 정확해요. 노력한 만큼 주게 돼 있어요. 놀면 백수 되고 안 놀면 돈 벌고 그래요. 돈을 챙겨야 돈을 벌게 되어있고 돈 안 챙기고 돈 버는 수는 없습니다. 돈 안 챙기고 돈 나오면 돈 다 날립니다. 교회에 헌금한다고 돈 다 날리고. 헌금하면 더 주는 거 아니에요. 그걸로 끝이에요. 나가면 손해에요. 

7절에 봅시다.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 다윗이 믿음의 종말이 어떻습니까? 진짜 다윗이 율법대로 살 때는 남들 보기에 믿음인체 보였지요. 그런데 진짜 믿음은 어떤 믿음이었습니까? 내가 모친의 죄 중에서 태어났다는 게 이게 농담이 아니고 진짜로 그렇다는 거예요. 이게 자기 겸손의 미덕을 발휘한 게 아닙니다. ‘그래, 내가 이렇게 겸손하게 되면 이스라엘 양들이 얼마나 존경하겠나.’ 이런 수작을 부리는 게 아니고 진짜로 그래요. 

그래 다가도 나중에는 마지막 때는 분명히 인구조사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우리 같으면 그렇게 얻어맞았으면 인구조사 안해야 되잖아요. 그런데 누굴 보냅니까? 사단이 와서 다윗에게 인구조사를 시킵니다. 책임은 누구한테 있습니까? 사단을 누가 보냈어요? 하나님이 보냈지요. 그럼 책임은 누가 져야 돼요? 분명히 하나님이 져야 될 책임을 누가 져야 되는가 하면 다윗은 누구 책임이라고 봅니까? 사흘 만에 칠만 명이 죽었지요. 온역으로 죽었어요. AI 조류 독감으로. 하여튼 죽었잖아요. 

하나님이 사단을 보내놓고 자기 책임을 하는 이것이 뭐냐 하면 다윗언약에 속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지금 앞당겨 보여주는 겁니다. 바로 죄 지은 적도 없으면서 그 죄를 책임을 누가 담당한다? 예수님 본인이 담당하는 거예요. 지금 예수님 바빠요. 구약대로 살기에 바빠요. 착하게 사는 게 바쁜 게 아니고. 구약의 언약대로 살기에 바빠요. 아브라함 구원하기에 바쁘고, 야곱 구원하기에 바빠요. 이삭 구원하기에 바빠요. 

그들에게 준 모든 코드. 그 코드를 예수님이 가져오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뭐가 되느냐 하면 패턴이 돼요. 같은 문양이 반복되는 것. 우리는 예수님의 뭐가 되느냐 하면 무늬가 돼요. 얼룩덜룩 무늬. 무늬의 특징은 중심이 없는 게 특징이에요. 남자들 예비군복보면, 예비 훈련가가지고 강의 들을 때 심심하잖아요. 맨날 하던 소리, 작년에 왔던 강사 또 와가지고 같은 농담도 한 번 들으면 좋은데 작년에 웃어줬지만, 그 다음 두 번째는 안 웃어주거든요. 같은 소리하니까. 

그 때 무슨 생각합니까? 휴대폰 다 빼앗겼으니까 뭐만 보느냐 하면 개구리복 보는 거예요. 그 무늬를 보게 되면 똑같은 무늬에요. 얼마나 시간 때우기 힘든지 그걸 다 볼까요. 그 얼룩무늬가 똑같아요. 얼룩무늬는 분명히 무늬는 있는데 그 천의 무늬의 뭐가 없어요? 중심이 없지요. 천에다가 중심이 들어가 버리면 그건 디자인 위험한 디자인이 돼요. 왜냐 하면 사람의 옷에 거기다가 집중을 해버리면 전체적인 조화가 안돼요. 아름다움은 대칭성이거든요. 중심이 하나 차지해버리면 대칭성이 깨져서 이게 아름답지가 않아요. 

어떤 옷 못 입는 여자가 원피스를 입었는데 거기다가 둥그런 태양 같은 하나 옆에다가 넣어보세요. 저런 미친 사람이 있나. 항상 옷 입을 때 앞뒤가 균형이 맞아야 돼요. 사람의 얼굴이 아름다운 이유가 균형이 맞기 때문에 그래요. 균형이 안 맞을 때는 성형외과 가야돼요. 이건 견적내서 고쳐야 됩니다. 한 쪽 눈은 나이 들어 주저앉았는데 다른 눈은 멀쩡할 때는 하나는 올려야 돼요. 주저앉은 거 집어가지고 올려줘야 돼요. 올려봐야 또 주저앉지만. 하여튼 버틸 대로 버텨봐야 돼요. 

우리는 중심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누가 너 뭐 때문에 사느냐, 누굴 믿느냐 할 때, 답변하기가 굉장히 난처해요. 예수를 믿습니다. 이리 되어버리면 그 쪽에서 오해를 해버려요. 예수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처럼 오해를 해버린다고요. 그러면 우리는 뭐냐 하면 죽을 놈이 믿기는 뭘 믿어! 이리해야 정답이 되는 거예요. 죽을 놈이. 이미 살았다 이 말이거든요. 그런데 그 쪽은 못 알아 듣지요. 그걸 감췄으니까. 나는 살았거든. 헤헤. 이걸 살짝 감추고 “죽을 놈이 믿기는 뭘 믿어. 이리 살다 죽지 뭐” 우리가 그런 말을 한다고 해서 죽는 게 아니고 그런 말을 하던 안 하던 우리는 죽어가고 있어요. 폐기처분하고 있어요. 

그래서 다윗은 다윗언약에 무늬고 이게 패턴으로 주어졌고 그 원형은 예수 그리스도가 되지요. 그래서 언약을 완성하신 분에 의해서 구약의 성도들이 무덤에서도 그들이 구원받습니다. 그래서 구약에 있는 무덤 문제는 먼저 일어나고 고린도전서15장에 보면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순서가 있습니다. 그 순서는 역사적 순서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가 터를 남긴 순서에요. 그러면 예수님이 누구부터 먼저 일을 했습니까? 아담부터 했으니까 아담부터 살겠지요. 이게 시간상 순서가 이리 한 것보다도 주께서 먼저 툭 툭 패턴을 던져놓은 그 패턴대로 이제 살아나는 거죠. 

그러면 이 세상이 그리스도 언약 앞에서는 시간은 뭐 밖에 없는가? 시간은 현재밖에 없어요. 모든 게 현재가 되는 겁니다. 그러나 현재지만, 우리의 육의 세계에서는 이게 과거와 현재, 미래, 후회와 소망사이에 나는 거기서 뭔가 실존은 갈등과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겁니다. 

현재는 성령이 주님께서 와버리면 말씀+십자가가 와버리면 나는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말씀되고 십자가가 십자가 되는 효과를 위해서 그리스도 증인하라고 지금 내가 이런 지점에 이 순간에 내가 아직도 여기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몇 초가지도 않지만. 몇 초가든 말든 그건 시간은 의미 없으니까.  

8절에 봅시다. 자, 아까 7절에서 믿음을 본받으라. 다윗의 믿음이 어떤 믿음이었다? 마지막 끝까지 사탄이 와서 인구조사해가지고 망가질 대로 망가지고 그리고 분명히 모든 일은 누가 벌렸다? 주님이 했지만, 다윗은 뭐라고 합니까? 다 누구 때문이요? 다~ 내 탓이오! 내가 인구조사해서 했습니다. 사탄 니가 아니고, 다 내 탓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다 내 죄 때문입니다. 사실은 따지고 보면 예수님을 증거 하라고 예수님이 그렇게 일을 만들어놨지만, 우리는 다 내 탓이오! 이리 되는 겁니다. 자, 그러면 여기서 주의할 게 있어요. 다 내 탓이라 했는데요. 이걸 주님 앞에서는 그렇게 하셔도 되는데 같은 인간보고는 그런 소리하면 안돼요. 같은 인간한테는 뭐? 뭐? 뭐? 뭐? 오늘 제목을 “뭐?” 라고 할까. 뭐? 뭐? 뭐? “니 잘났나?” “그래, 나 죄인이다! 왜?” 이리 나와야지 내 탓이오! 이러면 이용해 먹으려 해서 안돼요. 요거 밥이구나! 이러면 안 된다니까요. 같은 죄인에게 고백할 이유 없어요. 회개를 주님 앞에 해야지 왜 같은 인간보고 합니까? 목사보고 회개하지 마세요. 

자꾸 회개하라 하면 “니나 하세요. 니나 잘하세요.” 하면 되지. 그럴 필요 없어요. 목사가 와가지고 “집사님, 오늘 회개해야 되요.” “안 할 거예요. 니나 하세요. 나 안 할 거에요.” “성경 보세요. 회개해야 성령세례 받습니다. 회개하고 믿어야 그 다음 됩니다. 회개라는 행위로 구원받습니다.” “니나 회개하세요. 니나” “나 그냥 죽을 거예요. 지옥 갈 거예요.” 이게 믿음의 진수입니다. 믿는 자는 그렇게 살았어요. 

왜 그래야 되느냐, 그래야 주님 탓을 안 해요. “이번엔 주님이 실수하신 겁니다. 주님이 저를 잘못 관리하신 거예요. 복이 저쪽에서 이쪽으로 와야지요. 헌금은 제가 하는데 복은 왜 저쪽에서 받습니까?” 이런 노림수가 이러한 쓰잘데기 없는 그 흥정 같은 것을 안 하게 되지요. 됐지요. 그게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그 잔을 넘어갈 수도 있는데 넘어가지 않고 그 잔을 마시는 게 예수님의 믿음이었다. 죄도 안 지으면서도 그 죄를 자기가 담당하는 거죠. 

그 다음에 8절에 봅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 하시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뭐다? 동일하다. 여기서 이 말의 의미는 하늘나라에서 예수님은 동일한 뜻이 아니에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는 나사렛 예수입니다. 나사렛이라는 동네는 하늘나라 주소가 없어요. 어디에 있습니까? 나사렛은 이스라엘 북쪽 100키로 위에 그 동네가 나사렛이잖아요. 그러니까 나사렛 예수라 하는 것은 이미 이 세상도 누구 손에 접수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포위망을 벗어나지 못했다. 

김 정은이가 까분다. 주께서 그렇게 까불게 하시는 거죠. 질문) “목사님, 어제, 오늘, 현재, 시간개념 아니지요?” 이건 시간개념이에요. 시간개념 속에서 주님은 동일하다. 우리의 모든 시간은 변화를 유발하는 겁니다. 그걸 열역학 제2법칙 엔트로피의 법칙이에요. 엔트로피라 하는 것은 무질서는 커지는 쪽으로 가고 반대는 없다는 거예요. 반드시 이 세상은 파멸로 이어진다는 것. 그걸 열역학에서 이미 20C초에 알아냈어요. 모든 것은 무질서화된다. 질문) “지옥도 영원하지요?” 당연하지요. 지옥을 영원하다, 라는 말을 하기 전에 해야 될 것이 뭐냐 하면 언약은 영원하다, 에서 하나는 저주 받을 자 또 하나는 복 받을 자. 천국, 지옥은 영원한 거예요. 

언약을 영원히 하려면 언약이 영원히 성취가 되어야 돼요. 그래서 주님이 언약을 영원히 성취시켰거든요. 그렇다면 지옥에 누가 들어갑니까? 하늘나라 보좌에 마귀는 더 이상 오지 않아요. 지금은 까불락 거리면서 주의 보좌에 왔다 갔다 하면서 일을 시킨다 하지만 모든 게 마지막이 되면 영원한 무저갱에 들어가 놓고 맨홀 뚜껑 닫아버리면 못 나와요. 그게 바로 지옥입니다. 지옥은 딴 게 아니고 “에이, 지옥 가거라.” 이 말이 아니고 “에이, 마귀하고 살아라.” 이게 지옥이에요. 

“마귀하고 살아라.”를 다른 말로 하면 “에이, 적그리스도하고 살아라.” 이 말이고 “그래 주님 사랑하지 마! 그래 십자가 사랑하지 마!” 그 말이에요. 이게 오늘날 지옥이에요. 주님을 누가 사랑합니까? 자기만 사랑하지. 그래 얼마나 감사합니까? 천국 가기 전에 지옥 구경하고 싶었는데 실컷 하고 있잖아요. 아이고~ 고마워라~~ 

문밖에 나가면 다 지옥이에요. 계란이 왔어요. 계란! 이게 지옥이라니까. 무슨 천국이 계란이 필요합니까? 세상사는 게 전부 다 지옥이고 내일되면 또 촛불집회하고 지옥가고 태극기집회하고 지옥 갈 거예요. 실컷 관람하세요. 천국가면 어디 그런 좋은 구경하겠어요? 지옥 구경 실컷 하는 겁니다. 

자, 8절 봅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동일하지요. 동일하다 했으니까 그걸 어디다 적용시키는가 하면 6절에 적용시켜 봅시다. 동일한 분이 5절에도 붙고 6절에도 붙지요. 동일한 분이 우리와 함께 있다 이 말이죠. 그리니까 우리는 무엇에 기 죽었다? 겁냈다? 변화는 것에 너무 기죽었고 벌벌 떤 거예요. 

그러면 왜 돈을 사랑해서는 안 됩니까? 돈은 우리에게 새로운 더 많은 돈을 요구하는 변화를 우리에게 강요하거든요. 20억? 그게 돈이야? 다른 사람 봐! 40억 하는 사람 도와주지도 않아. 그래 40억 벌어야지. 돈은 계속해서 더, 더, 더.... 음주 측정하듯이 더, 더, 요구를 하니까 직장에서 승진하면 그걸로 멈추지 않아요. 더, 더, 더, 높은 자리로 또. 임원 자리까지 올라가야 돼요. 

애가 공부 잘해. 이제 전교1등까지 가야돼요. 전교1등, 전국석차가 10등 안에 계속해서 더, 더, 더. 애가 공부를 잘해? 그럼 효도해야지. 효도하면 뭐해? 돈을 더 벌어야지. 아휴~ 그게 참 자기의 소망이 되니까. 그러니까 이게 변화하는 것에 몸이 같이 놀아나고 있다는 자체가 그게 지옥이라는 겁니다. 

왜 사는지? 무엇 때문에 사는지? 주께서는 우리한테 꼭 필요한 것을 줬어요. 그게 용서입니다. 용서의 보자기에요. 제가 지난 수요일에 이야기했나요. 주일날 오후인가. 우리가 알고 있는 죄는, 내가 지은 죄가 한 25가지라면, 내려온 보자기는 뭐냐 하면 50,000가지의 보자기에 해당되는 용서를 가져온 거예요. 그러면 이상하다. 나는 25가지 이외에는 나머지 한 2000가지는 내가 착하다고 여겼는데 용서가 50000가지 해당되는 그게 왔으니까 결국 나는 2000가지라는 그것도 사실은 뭐라는 말입니까? 이게 나는 잘났다고 했는데 나는 잘난 게 아니고 이게 보류된 죄가 된 거죠. 

자기가 아무리 맨날 부흥회해서 회개하라 하는데 옛날에 했던 거 하라하니까 억지로 또 끄집어내서 되새김하듯이 하는데 용서는 이 오만가지에 해당되니까 보자기가 너무 커. 나는 그냥 반성합니다. 하고 교회 헌금 좀 바치라 하는데 예수님은 뭡니까? 용서는 자기 생명을 바쳐버려요. 너무 오버한 거 같아. 예를 들어서 애가 뭘 마시다가 물 좀 흘렸어요. 그러면 휴지가지고 닦으면 되는데 갑자기 엄마가 죽여주옵소서! 가슴을 마구 치면서 피를 흘리니까. 이상하다. 이게 균형이 안 맞는 거예요. 이걸 닦으면 그만인데 왜 엄마가 오버를 하고 있느냐 말이죠. 

그러니까 우리가 그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를 아직 멀었다는 거예요. 더 살아서 망가지고 더 살아서 죄를 더 지어야 돼요. 착하다 하는 것도 이게 누굴 위한 착함이냐, 나의 영광을, 자존감을 위한 착함 자체가 주님 앞에서는 용납이 안돼요. 우리끼리는 용납이 되는데 저 하늘에 계신 영광스러운 주님 보기에는 그것도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뭐냐, 주님께서 이 땅을 다녀갔다는 말은 니가 무슨 짓을 해도 이미 용서는 다 끝났다. 이제 남은 것은 그 용서를 확인하는 것만 남았어요. 회개한다고 용서 받는 게 아니고 이미 용서 받은 사실을 회개해보니까 다시 생각나게 만드는 거예요. ‘아! 바보같이. 용서받았지. 아이고~ 그것도 모르고 죄 지었다고 또 헌금 목돈을 내놓았으니 바보같이. 돈 낸다고 구원받는 거 아닌데. 또 속았어. 또 속았어!’ 이리 되는 겁니다. 

자, 그 다음에 9절 봅시다.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식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식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그 당시 히브리 당시에 얼마나 사기꾼들이 많았겠습니까? 거룩하는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이렇게 거룩하면 일단은 여러분은 구원받고 하나님한테는 영광이 됩니다. 이런 식으로 얼마나 했겠어요. 

음식물가지고 장난치고 있는 사람이 죽 있는데, 그걸 가지고 11절에 보게 되면 10절, 11절 설명이 필요해요. 성경을 보면서 설명이 필요한 대목이 나오는데 왜 그러느냐 하면 구약의 제사법하고 연관될 때는 사람들이 일반 교인들이 돈 번다고 바빠 가지고 언제 구약 제사법을 요약 할 기회도 없었잖아요. 구약 제사법 레위기 같은 거 신경 안 쓰잖아요. “예수 믿으면 됩니까?” “예, 믿으면 됩니다.” 아멘. 하고 끝나버리지 제사법하고 예수님의 어떤 관련을 몰라도 되는 것처럼 그렇게 느껴지잖아요. 

그런데 성경을 보게 되면 그러한 제사법이 주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에 이왕 나왔으니까 제사법을 한 번 정리해보겠습니다. 10절에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그 위에 있는 제물은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이 이 제단에서 먹을 권이 없나니”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그 위에 있는 제물은 장막에서 섬기는  법이 있다. 라고 했는데 이걸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설명이 그렇게 호락, 호락하지는 않을 거예요. 제단이라 하는 것은 장소 점유입니다. 점유라 하는 것은 어떤 걸 차지하는 거예요. 장소를 하나 차지하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지하철이 비좁을 때 엉덩이 큰 아줌마가 자리에 가방을 던져놓고 엉덩이 비비고 하면 장소를 점유한 게 되지요. 건드리지 마라고. 흔들면 앞뒤 다 튕겨져 나갈 정도로 자기 자리 장착하는데. 주님께서 이 땅을 한 곳을 점유했다는 말은 이 땅의 주인공이 나타난 거예요. 주인공이 나타나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책임을 물으면 안돼요. 이 땅에서 아무런 하나님 앞에 접촉점이 없으면 내 하는 잘못은 내가 책임져야 돼요. 

그런데 하늘나라에서 동사무소를 여기다가 분집을 냈다. 그러면 사무를 누가 봅니까? 우리 심판에 관한 행정 처리를 누가 합니까? 그것은 자리가 점유된 제단에서 해야 되는 거예요. 이게 이스라엘의 특혜입니다. 다른 민족한테는 이런 이스라엘 내에 어떤 장소를 준 게 아니에요. 이스라엘에게만 12제단이 있으면 텐트를 쳐가지고 포진해가지고 항상 이 중앙을 하나님이 점유를 한 거예요. 문제 있으면 누구한테 와야 돼요? 점유된 중앙 성소에 와서 죄를 용서받을 때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친히 이 경계선을 바깥의 이방민족과 차이 나게 지켜주는 겁니다. 

지켜줄 때 근거가 있어요. 이스라엘이라고 지켜주는 게 아닙니다. 생산된 게 있습니다. 그걸 의의 생산이라 하는데. 생산이란 말은 제가 썼어요. 복음의 생산. 의의 생산. 생산이라 하는 것은 경제적 용어에요. 경제적 용어라는 말은 생산이란 말은 무슨 뜻으로 이런 말을 썼느냐 하면 반드시 재료가 있지 않으면 생산물이 나오지를 않습니다. 재료가 있지 아니하면. 

그럼 재료가 뭐냐, 이스라엘이 재료에요. 그들의 죄가 재료가 되고 죄로 들어가서 나오기는 뭐로 나오느냐 의가 나오는 거예요. 요게 제단의 장치가 하는 일이 역할이 이거에요.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언약’이라고 하는 겁니다. 언약이라 하는 것은 input 죄, output 의. 편리하지요. 그러면 우리는 궁금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죄가 들어갔는데 의가 나옵니까? 죄가 들어갔으면 죄가 나와야 되는데 의가 나오느냐 말이죠. 

그 방법이 뭐냐, 죄가 들어갔으면 하나님의 법에 의하면 죄에 대한 벌이 있어야 돼요. 죄에 대해서 벌을 제대로 내릴 때 그게 하나님의 의가 되는 겁니다. 정의를 부르짖는 게 뭡니까? 죄인에게는 벌을! 이게 정의 아닙니까? 사회 정의. 정치 정의지요. 마찬가지에요. 죄를 지었으면 벌로 때려줘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왜 의가 나오느냐, 죄인을 때릴 때 그 죄의 것을 대신 얻어맞는 그 대상자가 나옵니다. 

조선시대 때 돈 많은 양반들이 매를 맞을 때, 아프니까 어떻게 합니까? 친척이나 빌빌거리는 노숙자보고 대신 한 대당 10만원씩 주고 대신 맞잖아요. 그러니까 우리의 용서가 공짜가 아니에요. 무상이 아닙니다. 채찍 맞은 아픔이 있어요. 지난 주 낮 설교에 했는데 도마가 창 자국 못 자국 보잖아요. “왜 주님이 이렇게 상처가 났어요?” “니 때문이잖아. 니 믿음 없어서 창 자국 났잖아.” “아! 내가 믿음 없는 게 맞는군요.”이게 믿음이에요. 믿음이 있습니다. 하고 달려들면 그건 믿음이 아니고. 

나로 인한 상채기. 나로 인한 상처가 주님 몸에 이게 영원토록 새겨져 있다는 사실. 그 상처가 새겨진 예수를 믿는 거예요. 그럼 그것은 뭘 믿는 거예요? 나는 죄인입니다.를 수용하는 겁니다. 받아들이는 거예요. 우리는 큰 소리 칠 수가 없어요. 범사에 감사할 뿐이지 찡찡거리고 이러면 안돼요. 지가 때린 상처가 있는데. 

어려운 것이 여기 어린 양이든 수양이 들어갑니다. 들어가게 되면 대신 받아요. 받고 난 뒤에 연기가 올라가는 걸 가지고 이걸 번제라 합니다. 번제. 번제는 뭐냐, 향기로운 냄새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냄새를 맡습니다. 음~ 향기 좋다. 다시 말해서 “나는 죄 지은 것한테 벌주는 게 취미야.” 그런 뜻이에요. “아이고~ 죄지은 놈한테 합당한 벌을 내리니까 내가 속이 다 시원하네.” 에스겔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이스라엘에 벌주니까 내가 속이 다 시원하다. 

그렇게 처리했거든요. 그런데 그 어린양이 이중성이 있어요. 대신 어린 양을 죽인다 하는 그 약속을 누가 수용하는가 하면 제사장이 수용을 하게 돼요. 그러면 그걸 무슨 나라라고 하는가 하면 거룩한 제사장 나라라고 합니다. 그 말은 뭐냐 하면 나는 인간하고 상대 안한다. 제사장들만 상대한다. 그래서 제사장 나라에요. 제사장 나라는 왕이 없어요. 제사장들이 숨어있는 왕 하나님하고 중간에 중보자 역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사장 나라는 다른 말로 하면 중보자의 나라. 다른 말로 아들의 나라에요. 그게 천국입니다. 중보자가 나서서 이렇게 하는 거예요. 

중보자가 처리를 제대로 했으니까 죄가 벌이 안 나오고 용서가 주어지지요. 제사장 나라에서 뭐가 나오는가, 제사장 덕분에 하나님의 의가 나오고. 의라는 말은 거룩이 되고 거룩이라고 하는 것은 더러웠는데 깨끗하다는 뜻이에요. 이런 말도 굉장히 어려운데 여러분이 어려운 말도 감당해야 돼요. 깨끗함이란 반드시 더러움이라는 게 선제되고 난 뒤에 깨끗함이 있는 것이지 그냥 깨끗함은 없어요. 

하늘나라는 깨끗하다. 하면 안돼요. 하늘나라는 반드시 이 땅을 경유한 분이 깨끗하다. 이렇게 되어야 돼요. 이 땅을 경유한 분. 아들의 영광이 아버지의 영광이에요. 이 땅을 경유해야 돼요. 그래서 이스라엘 이 피조세계에 하나님께서 의를 만들어내는 겁니다. 

피조세계가 없으면 이 이스라엘이 없으면 제단이 없으면 하나님 의가 나오지를 않아요. 언약대로 할 때만 의가 나온다는 말은 이 죄와 인간들과 상대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죄인인 인간들과 상대했다는 거예요. 죄인과 상대 안하면 의가 나올 수가 없어요. 하나님의 의가 성사가 될 수가 없습니다. 고린도후서5장21절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래서 이 의를 신약에 오면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화목제물이라 해요. 화목제물. 이 화목제물이 하나님의 의가 되는 겁니다. 일단은 제단이 있다는 것은 장소를 점유한 거예요. 장소를 점유했으니까 이 점유했다는 것은 중앙에 있다는 말이고 모든 인간들은 중앙의 취지를 위해서 그들이 부속, 쉽게 말해서 일본말로 시다발이. 우리는 주님의 시다발이입니다. “이 시다발이가?” 이러잖아요. 느 아버지 뭐하시노? 조폭입니다. 뭐 이런 것이 있어? 하듯이. 

우리는 주님의 시다발이에요. 그런데 그 시다발이가 주님의 시다발이는 천사도 그 시다발이 속에 들어갈 수 없어요. 천사는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인데도 불구하고 그 신분은 예수님의 신부의 자리에 진짜 영원한 자리는 인간이어야 되지 천사는 그 자리에 못 들어갑니다. 히브리서2장에서 그렇게 천사들이 부러워하는 거예요. 

요한계시록에서 사도요한이 누구한테 절합니까? 천사한테 절하지요. 천사한테 절하니까 천사가 갔잖아가지고 “재벌2세가 나한테 절하는 게 다 있나?” 재벌 집 아들이 양반집 아들이 종한테 왜 절을 해요? 꼬라지는 이래도 하나님의 양자입니다. 맏이를 잘 만나 가지고 줄줄이 동생들이 맏이 덕분에 호강을 누리는 거예요. 예수님이 우리의 맏아들 되게 하심이라. 로마서8장에 나온 것처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성경은 뭐냐, 중심 없는 자리에 중심을 이미 언약의 이름으로 중심을 잡았어요. 이제는 나머지는 뭐냐, 중심에 의해서 파생된 현상들이 점점 확대됩니다. 이스라엘에서 점점 더 확대가 되지요. 그게 뭐냐, 제사의 확대입니다. 제사장 너희는 다 해봐야 인간제사장은 어설프기 짝이 없어요. 제사장이 죽었다는 말은 메시아 아니구나! 메시아 아니야. 진짜 메시아가 아닌 거예요. 

그러나 메시아는 말라기에 보면 메시아는 반드시 레위언약을 통해서 오게 되어있습니다. 말라기에 마지막에 보면 모든 언약은 소멸되더라도 레위 언약은 남게 되어있어요. 그 거룩의 예수님께서 레위 언약을 이룸으로서 또 로마서에서는 다윗언약이고 하여튼 모든 언약은 전부 다 예수님이 합류가 됩니다. 이렇게 해서 이 땅에 장소가 점유되지요. 

요 장소를 뭐냐, 수련회에서 했어요. 다중현실. 아토피아. 장소 없는 장소. 주님이 우리와 함께 있고 주께서 우리를 도와줌에도 불구하고 어디 있는데? 하면 소개할 수는 없어요.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잘난 내가 천하 죄인으로 살아가는 이 모습 봐라. 이 변화가 내일 되도 마찬가지일거야. 이 동일한 변화가 주님 덕분에 생긴 변화야. 이게 바로 제사를 원하는 게 아니고 헌금을 원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원하는 것은 상한 심령이라는 것을. 이 놀라운 변화. 이것은 산이 무너지고 바다가 갈라지고 홍해가 갈라지는 그 기적은요, 백날해봐야 남의 일이에요. 

진짜 기적은 내 몸이 갈라져야 되고 내 마음이 쫙 갈라져가지고 내 죄가 드러나야 죄라는 마그마가 드러나야 기적이지, 헌금 얼마 했습니다. 교회 몇 년 다녔습니다. 목사, 장로입니다. 그건 기적도 아니에요. 땅 사놨더니 땅값 올라서 교회 지었다. 그건 기적도 아니에요. 진짜 기적은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거예요. 

어떤 분들은 머리가 안 나올 싶은데 머리가 잘 나와서 이것도 기적이라 하는데 뭐 감사하니까 좋아요. 좋긴 좋은데 그래서 본인이 뭡니까? 누구야, 너? 미장원에서 머리 잘 나와서 뭘 느꼈습니까? 내가 예상한 대로 안 되는 내가 죄인인 걸 알았습니다. 그게 바로 기적이다 말이죠. 머리가 못 나와야 되는데 잘 나왔다는 계기를 통해서 내가 죄인인 걸 내가 영원토록 동일하게 변화지 않는 죄인인 것을 깨닫는 그게 기적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미 장소가 점유된 겁니다. 이 땅에 장소 없는 장소로 죄인이 된 거죠. 

그 다음에 13장11절부터 이건 굉장히 중요한 건데 요건 다음 시간에 하겠지만, 우선 한 번 봅시다.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니라” 이렇게 되어있지요. 여기에 보면 짐승의 피가 들어가잖아요. 짐승의 피가 들어갔다는 것은 피는 태워지는 게 아닙니다. 피는 뿌려지는 거예요. 태워질 때는 연기가 돼서 사라지지만, 그 표현체, 인간의 눈에 띄는 표현체, 이 짐승이 우리를 위해서 어떤 일을 했는가를 확연히 드러내는 바깥의 유일한 증거물은 피입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의 피이죠. 

예수님은 피를 남기고 사라지신 분이에요. 피를 남기고. 그 능력은 부활해서 주어진 능력이고. 성령은 피를 앞장세워서 이야기하고. 그런데 구약에서는 이 기능을 누가 하느냐, 대제사장이 하지요. 제사를 할 때, 속죄제 제단이 있고 회막이 있습니다. 텐트가 있어요. 텐트는 둘로 나누어져 있고 커텐 쳐 있는데요. 속죄제 같은 경우에는 여기 향단이 있어요. 여기 뿔 바르고 7번 회막에다가 뿌리고 바르고 그 다음에 여기는 피를 제단 사면에 또 뿌리고, 피 가지고 뿌려줄 때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걸 거룩이라고 해요. 피로 말미암아 오염을 제거하는 겁니다. 

그럼 이것은 누가 하지요? 마지막 묻고 마칩시다. 이게 어린 양의 피지요. 어린 양이 하지요. 그럼 내가 어린 양입니까? 아니면 어린 양은 나와 타인입니까? 남이지요. 그러니 복음이 뭐냐, 남이 일을 저질러 놓고 우리는 그 효과 받는 게 복음이에요. 그러니 내가 내 인생을 책임지면 돼요? 안 돼요? 이것은 굉장히 수상한 거예요. 내 인생에 대해서 내가 닦달 낸다는 것은 이것은 정말 믿음 없는 짓입니다. 

“주께서 의도적으로 일으키셨습니다.” 이리 되어야지 그렇게 일으켰다는 것은 뭐냐 하면 그걸 인정할 때 구원받는 게 아니고 구원 받았다는 사실을 자꾸 놓치니까 일을 벌여가지고, 일을 벌리면 우리는 당장 본능이 뭡니까? “아이고, 안 그러는 건데. 그럴 필요 없었는데. 그 때 좀 속도 줄이지. 나는 순경 숨어있는 줄 몰랐지. 남들이 노랑불일 때 갔으니. 아이구!” 이렇게 하는데 그 경찰은 누가 배치했습니까? 주님이 배치했어요. 

평소에 얼마나 주님을 믿는다 해놓고는 사실은 뭡니까? 자책해서 지금보다 내가 개선하려는 그 육적인 본성을 여전히 견제하고 있다는 것을 티를 내기 위해서 주께서 그런 사태를 일으킵니다. 그 다음 중요한 것은 다음에 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빈 파이프에 지나지 않는데 독단적인 나만의 나를 움키려 하는 이 버릇이 바로 사탄에게 배운 버릇인 것을 저희들이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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