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

잠언서3-성령과 잠언 140317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12. 19. 16:38
2014-03-17 22:17:10조회 : 1254         
[14 대구강의] '잠언'속의 그리스도 3 - 성령과 잠언이름 : 구득영 (IP:203.223.97.152)

[14 대구강의] '잠언'속의 그리스도 3 - 성령과 잠언

                                                            14,03,10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15페이지부터 살펴보자.

** 이게 바로 강력한 외부구조의 투입입니다.

여기에 외부구조의 투입이라고 되어있는데, 어떤 외부인이 투입되는 정도가 아니라 외부구조가 투입된다는 것이다. 외부인이 투입되는 것과 외부구조가 투입되는 것은 다른데, 즉 어떤 사람이 오게 되면, 그 사람을 언급하지 질서나 구조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 외부구조의 투입 !!

예수님이 오셔서 죽고 부활하시기 이전에 죽고 부활한 사람이 있는가? 물론 죽고 부활한 사람도 있고, 아예 죽지 않고 천국에 간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에녹이나 엘리야가 그러한데 말이다. 그러면 부활의 첫 열매가 누구인가? 에녹이나 엘리야가 아니고, 그리고 예수님 이전에 죽었다가 살아난 자가 있는데,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빠인 나사로가 그러한데 말이다. 베드로의 장모도 죽었다가 살아났고 말이다.

그러면 우리 생각에는 부활의 첫 열매가 누구여야 하는가? 예수님이 아니라, 예수님이 오시기 이전에 그들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어야 하는데, 그런데 고린도전서 15장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의 첫 열매라고 한다는 것이다.

(고전 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전혀 새로운 질서인, 부활의 세계 !!

그러면 어떻게 이렇게 되는가? 부활의 첫 열매가 왜 시간을 고려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부활이라는 것은, 여기 교재에 나오듯이 어떤 새로운 질서를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부활은 죽어서 사는 세상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것부터 수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빠인 나사로가 죽었다가 살아났는데, 그러면 이 오빠가 계속해서 사는가? 그게 아니고 또 죽는다는 말이다. 그러니 부활의 세계라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히 죽었다가 살아나는 세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뭔가 모든 질서가 재편성되는, 바로 그러한 전혀 새로운 세계라는 것이다.

그러니 부활의 세계에서는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던 개념이 전혀 달라진다는 말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죽음과 삶' 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즉 '죽었다' 라는 것과 '살았다' 라는 것이, 그런 의미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의미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아기가 하나 산부인과에서 태어났다고 하면, 그렇다면 그 아기는 살았는가? 죽었는가? 우리가 보기에는 분명히 살았는데, 그런데 성경에서는 무엇이라고 하는가? 죽어가고 있다고, 즉 '죽음'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아기가 태어난 것은 죽음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마치 아기가 실험실의 실험용 쥐처럼 등장했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 어디에 계시는고 하니까, 죽었다가 살아난 이 새로운 부활의 세계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그래서 이 부활의 세계에서는 하나님을 죽인 이 모든 이쪽의 세계를 죽음의 세계라고 본다는 것이다. 죽음의 세계로 말이다.

◈ 죽음을 경험한 신 !!

제가 어제 낮 시간에 설교하면서 신을 두 가지로 나누었는데, 즉 "신이 살아있다" 라는 것과, "신이 부활했다" 라는 것은 다르다고 했다는 말이다. "신이 살아있다" 라고 한다면, 그것은 옛날에도 살아있었고, 그렇게 계속해서 살아서 존재해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신이 부활했다" 라고 하면, 신이 한번 죽은 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이나 이슬람교나,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신이 죽을 리가 있느냐는 말이다. 물론 사람은 죽지만, 신이 죽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둘 중에서 어느 것이 참된 신이겠는가? 존재하는 것이 참된 신인가? 아니면 부활해서 활동하는 것이 참된 신인가? 그것부터 따져봐야 한다는 것이다.

신이 살아있다고 하는 것은, 그것이 어디에서 나온 이야기인고 하니, 인간들이 스스로 자기가 살아있다고 여기고, 자기가 손에 만져지고 이렇게 물렁물렁하게 살아있으니, 그렇게 인간이 살아있다는 개념을 연장해서, "우리가 이렇게 살아있으니, 신도 하늘나라에서 할아버지처럼 살아있을 거야" 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우상과는 거래가 가능해 !!

그것을 두고 성경에서는 '우상' 이라고 하는데, 즉 없는 신인데, 신이 없다는 말이다. 이런 신은 우리 인간이 조작한 신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이렇게 "내가 살아있으니 신도 살아있다" 라고 하게 되면, 그게 어떻게 되는고 하니, 신과의 거래가 형성이 된다는 것이다. 즉 "얼마면 되겠습니까?" 라고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이번에 복을 받는데, 얼마나 금식하면 되고, 기도하면 되고, 헌금하면 되고, 얼마나 나를 낮추면 되겠습니까? 어떻게 나를 더욱 낮추고 눈물로서 회개하면, 제가 원하는 것을 주시겠습니까?"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있지도 않은 신에게 흥정을 제시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흥정에 대한 반응은, 그것도 역시 본인이 스스로 하게 되는데, 왜냐하면 결국 신은 없으니 말이다. "아하, 이번에는 이 정도로만 금식하면 되겠다" 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렇게 본인이 결정하게 되는데, 그것은 당연히 본인이 달성 가능한 목표가 된다는 것이다. 불가능한 것은 제시하지를 않은데, 40일 금식기도도 40일이면 적당하다 싶어서 그렇게 한다는 말이다.

바로 이러한 것을 두고서 구약에서는 우상숭배라고 하는데, 그러면 구약에서의 신은 그냥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고 하니, 언약 안에 있다는 것이다. 즉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약속 안에서 살아있다는 말이다. 약속 안에서 말이다. 

◈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언약 안에 있기에 !!

구약에서는 신을 두 종류로 나누는데, 이스라엘의 신은 언약 안에 숨어있기 때문에, 그러니 언약을 앞장세워서 나타나는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신이 아닌 다른 모든 신을 이스라엘에서는 뭐라고 하는고 하니, 그것을 두고 '우상' 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남들이 보기에는 상당히 독단적이고 독선적인데, 왜냐하면 "우리에게 나타난 하나님만이 진짜 하나님이고, 나머지는 하나님이 아니고 조작된 것이다" 라고 하니 말이다. 그들은 왜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고 하니, 모세가 시내산에서 직접 누구를 만났는가?

(녹취자 - 지금 녹취를 하는 이 순간에, 스님이 가게와 들어와서 목탁을 두드리면서 거래를 원하고 있네요. 물론 저는 모른 체를 하는데, 제 아내가 용감하게 나서서 이야기를 합니다. '스님, 나가주세요. 우리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라고 말이죠. 전에는 제대로 말도 못하고 끙끙거렸는데 말이죠. ㅋㅋ)

◈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 !!

모세가 시내산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직접 만났는데, 그리고 아브라함도 하나님을 만났고 말이다. 또한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을 때도 몇 명의 천사를 만났는가? 세 명의 천사를 만났는데, 그러한 이스라엘에게 독단적으로 자기들만 아는 신이 무엇이라고 하는가?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사야서에 보면 아예 다른 신은 애초부터 없었다고, 그렇게 과격하게(?) 나온다는 것이다.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 라고 말이다. 여러 군데에서 말이다. 그런데도 인간들이 자꾸만 신을 만드니까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하시는가? 그렇게 신들을 만드는 것은, 그것은 당연히 인간들이 조작하고 상상해낸 허구이고 허상이며, 가짜 신이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사 44:6)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속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

그러면 이런 이스라엘의 이야기를 다른 민족들은 듣고 뭐라고 했는가? 당연히 "너희들은 독선적이고 너희 자신들밖에 모른다" 라고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전혀 대화가 되지 않는데, 자기들만 하나님의 백성이고, 다른 민족들은 전혀 아니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들과 이스라엘 사이에는 전쟁이 아니고서는 소통이 있을 수가 없는데, 물론 전쟁을 소통이라고 하기는 좀 곤란하지만 말이다. 전쟁이 아니고는 다른 것이 있을 수가 없는데, 그래서 이스라엘 역사는 90프로 이상이 전쟁이 이야기라는 것이다.

◈ 전쟁이 아니고서는 !!

그러니 그 전쟁은 무엇을 확인하는고 하니, "너희들이 믿는 신은 가짜이고, 우리가 믿는 신이 진짜로 살아있는 하나님이다"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것을 확인하는 전쟁을 하는데, 그 전쟁의 마지막에서 이스라엘이 이겼는가? 이방 나라가 이겼는가? 이방나라가 이겼는데, 그래서 결국에 이스라엘은 멸망해서 사라지고 만다는 것이다. 지금 있는 이스라엘은 가짜인데, 하나님은 사라지고 없다는 말이다.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는 딜레마인데, 하나님이 만든 나라를 하나님이 스스로 없애버렸다고 할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가능성은 그만 제로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동안 무엇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을 믿었느냐는 것이다. 자기들 나라가 없어진다고 하면 말이다.

이사야서 마지막에도 보면 그런 내용이 나오는데, 즉 "바벨론에서 너희들이 망하게 되는데, 그렇게 의도적으로 하신 분이 여호와다" 라고 말이다. 그러면 여호와라는 분은 이 땅에서 자기 백성을 만들겠다는 것인가? 없애겠다는 것인가? 일차적 목적은 있는 것을 없애는 것에 있다는 말이다.

왜 그렇게 하시는고 하니, 있는 것을 없애버리고 없는데서 있게 하는, 즉 죽은데서 살리는 방식 외에는 천국에 합류하는 방식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없애고, 살았다고 여기기 때문에 죽여야 되는, 그 모든 과정이 언약에 담기게 된다는 말이다.

◈ 아브라함의 자식은, 없는데서 생겨남으로서 !!

아브라함은 자식이 없었는데, 그런데 생겼다는 것이다. 하지만 누구를 잡는가? 생긴 자식을 아버지의 손으로 잡게 되는데, 왜 그렇게 하는가? 그냥 좀 곱게 가면 안 되는가? 우리가 신을 섬기는 것처럼, 즉 "주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그렇게 고요하게 가지를 못하느냐는 말이다. 왜 말썽을 일으키고, 그런 놀랄 이벤트가 왜 일어나야 하느냐는 것이다.

모든 인간들은 자기 존재를 알고, 그렇게 존재하게 해주신 신을 믿는데, 조물주라고 하면서 말이다. 모든 이방인들도 조물주를 믿는다는 것이다. 신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것이다. 자기가 따져서 해결이 되지 않으니, "신이 있어서 내가 있다" 라고 하면서, 즉 "신이 우선이고 그 다음이 나다" 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하면 평화롭지 않은가? 그리고 신에 대해서 성의를 다해서 제사를 드리고,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서 추수감사제를 드리고 말이다. 그렇게 살면 하나님도 좋고 우리 인간도 좋고, 그렇게 서로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가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거기에 무슨 성경이 필요하고 신학이 필요하냐는 것이다. 그런 것은 없어도 되지 싶은데, 그렇지요?

받은 것에 대해서 감사하면서 평화롭게 살면 되는데, 그것이 무슨 제사인고 하니, 가인의 제사라는 것이다. 가인이 드린 제사의 특징이 받은 것에 대해서 감사하는 것인데, 일반적인 말이다.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는데,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시고, 다른 아벨의 제사를 받는다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아벨의 제사는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복잡하고 정상적이지를 않다는 말이다. 받은 것에 대해서 감사하는 의도가 아닌, 뭔가 다른 의도가 있어 보인다는 것이다. 다른 의도가 개입이 되어서 섞여버렸는데, 오늘의 주제가 '성령과 잠언' 인데, 지금 서론적으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을 설명하지 않으면 주제에 대해서 접근할 수 없으니 말이다.

◈ 하나님을 알되 !!

계속해서 이야기하면, 로마서 1장에 '하나님을 알되' 라고 나오듯이, 그렇게 우리 인간이 정상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식으로, 그렇게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그것을 차단시켜버리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롬 1: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예를 들어서,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잡았는데, 만약에 옆에 수양이 없었다고 하면 아들은 죽었다는 것이다. 스톱을 걸어서 산 것이지, 그게 아니라면 그냥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과 로마서 4장에서는 예수님을 믿는 것과 관련을 시켰다는 말이다.

이렇게 물건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 "물건을 집어라" 라고 해서 물건을 집었다고 하면,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니가 나에게 순종을 했구나" 라고 하면, 우리는 "예, 제가 물건을 집으라고 해서 집어서 순종했습니다" 라고 할 것이란 말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너는 내 말에 순종을 했으니 믿는 자이고, 그러니 천국에 오너라" 라고 하면, 그러면 아주 자연스럽고 여기에 전혀 난해한 것이 없다는 말이다. 시키는 데로 순종을 했으니 말이다.

◈ 먼저 너의 자식을 죽이고 !!

그런데 그렇게 물건을 옮겨서 순종하는 것보다도, "먼저 너의 자식을 죽이고 물건을 옮겨라" 라고 되어버리면, 물건을 옮기는 것은 쉬운데, 그런데 그 이전의 전제조건이 무엇인고 하니, "니가 사랑하는 너의 자식을, 그것도 남이 아니라 너의 손으로 죽여라" 라는 것에 대해서, 과연 우리가 그것을 할 수 있느냐는 말이다. 감히 말이다.

우리가 물건을 옮기는데 있어서 자기 자식을 하나 죽이고 옮기고, 또 죽이고 옮기고, 그렇게 할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아버지가 자식을 죽이는 것이 어디 자연스럽고 일상적인 일이냐는 말이다. 그것이 아브라함 아침마다 일어나서 하던 일인가? 언제 아브라함이 그런 것을 연습한 적이 있었는가? 전혀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우리가 "제가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을 받겠습니다" 라고 하면, 그것은 얼마나 수월하냐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습니다" 라고 하면, 그것으로 끝이라는 말이다. 물건을 집어오라고 하면 집어오고, 그리고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하면 예수님을 믿으면 된다는 것이다.

◈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곧 '가짜' !!

그것은 오히려 물건을 집어오는 것보다 더 쉬운데, 그래도 물건을 옮기는데는 약간의 수고가 필요하지만, 마음속으로 예수님을 믿는 것은 그러한 수고조차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얼마나 수월하냐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가짜라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만들기 위해서, "무엇을 하라" 라고 지시를 하시기 이전에 무엇부터 시비를 거는고 하니, 그것은 바로 아브라함 자신의 선입관과 인식을 무효로 돌리는 직업에 나서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예를 들어서, 지난 동계 올림픽이 어디에서 열렸는고 하니까, '소치' 라는 곳인데, 그러니 우리는 이미 그 소치를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 천국에 가는 것을 누구를 믿으면 되는가? 예수님을 믿으면 되는데, 그러니 그것도 우리가 알고 있다는 것이다.

소치에서 동계 올림픽이 열렸다는 정보를 우리가 알 듯이, 천국에 가는 것도 예수님을 믿으면 된다고, 그렇게 같은 것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2+3'이 얼마인가? 그것이 '5' 라는 것인데, 6이나 7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이 진리인가? '2+3=5' 라는 것이 말이다. 그러니 '2+3=5' 라는 것이 틀렸다고 여길 때만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성립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2+3' 이라는 것이 얼마인가? 4인가? 아니면 6인가? 그렇다고 -1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철학자들이나 과학자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이 수상한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들은 '2+3=5' 라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면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한다는 것이다.

◈ 누가 복의 근원인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오셔서 복의 근원이 누구라고 했는가? 아브라함 자신이 복의 근원이라고 했는데, 물론 동시에 아브라함은 저주의 근원도 되는데, 그것을 복잡하니 일단 빼고 말이다. 아무튼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임에 분명하다는 것이다.

(창 1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창 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창 12: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그런데 그 복의 근원인 아브라함의 아들을 잡아버리게 되면, 아브라함은 졸지에 아들을 죽인 살인자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면 살인자가 복의 근원이 될 수 있는가? 없는데, 만약에 살인자가 복의 근원이 되려면 그 다음부터는 다 살인자가 되어야하니 말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이라고 해놓고, 그 다음에 복의 근원이 누가 되는고 하니, 이삭이 된다는 것이다.

◈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

아브라함이 이삭을 잡아죽이는 장면이 창세기 22장에 보면 나오는데, 18절에 보면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라고 되어있는데, 그러니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이 복의 근원이라는 것을 언제 알게 되는고 하니, 자기 아들을 잡아죽이는 사건 다음에 하나님께서 알려주신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 하나님의 계시가 주어지니 말이다.

(창 22:15)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창 22:16)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창 22: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창 22: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그러면 그 이전까지는 누가 복의 근원인가? 아브라함 자신이 복의 근원인데, 무슨 말인고 하니, "나로 인하여 자식이 복을 받는다" 라고 아브라함은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건 이후에는 오히려 자식인 이삭을 통해서 자기가 복을 받는다는 것을, 거꾸로 소급해서 복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예수님이 오시기를 기다렸다는 것이다.

◈ 아브라함에게 예수님이 왜 필요한가?

그게 요한복음 8장에 보면 나오는데,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시는가?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저도 여러 차례 이 성경구절을 언급했던 것 같은데, 기억이 나는지 모르겠는데 말이다. 

(요 8: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바치는 믿음을 주었으면, 그 믿음으로 구원이 완성되면 되는데, 누구를 기다리고 할 필요가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자기가 순종해서 아들을 바쳤으면, 그것으로 이미 믿음이 확정되었는데, 그런데 기다리기는 누구를 더 기다린다는 말이냐는 것이다.

그런 믿음으로 합격해서 천국에 가면 되는데, 그런데 왜 예수님을 또 기다리고 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그런 추가적인 요소가 왜 필요하냐는 말이다. 아브라함은 자기 행함으로 이미 믿음을 정리했는데 말이다. 쉽게 말해서 "아브라함에게 예수님이 왜 필요한가?" 라는 것이다. 이것이 이상하고 신기하지 않은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게 아닌데, 분명히 순종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하나님께서 저에게 "근호야, 컵을 옮겨라" 라고 해서, "알겠습니다. 컵을 옮기겠습니다" 라고 순종했다면, 그렇게 제가 컵을 옮겼다고 해서 구원을 받느냐는 것이다. 즉 '2+3=5' 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해서 구원을 받고, 또한 "예수님을 믿습니다" 라고 고백한다고 구원을 받느냐는 것이다.

결코 그렇게 해서는 구원이 안 된다는 말이다. 만약 그렇게 해서 구원이 된다고 하면, 제가 녹음기를 가지고 다니면서 모든 사람들에게 강제로라도 그런 이야기를 하게 해서, 그들이 구원을 받도록 할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된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 성령이 오지 않고 인간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이야기가 무엇인고 하니, 오늘 주제가 '성령과 잠언' 인데, 즉 "성령이 오지 않고 인간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라는 문제를 지금 따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굳이 성령이 오지 않아도 이 성경책을 모두 다 외울 수가 있고, 누가 성경에 대해서 무엇을 물으면 답변을 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성경에 그런 대목이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고, 또 예수님을 믿으라고 하면 "예수님을 믿습니다" 라고 얼마든지 이야기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성령에 의해서 예수님을 믿는 것과, 성령이 오지 않고 예수님을 믿는 것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그것을 지금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 자꾸만 뒤로 밀리는 복의 근원 !!

아브라함 이야기를 계속 해보겠는데, 아브라함에게 예수님이 왜 필요한고 하니, 복의 근원이 자꾸만 뒤로 밀린다는 것이다. 분명히 자기가 복의 근원인 줄 알았는데, 자기는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아무리 어리석은 아이라도 사탕을 싼 봉지를 가지고 알맹이를 버리지는 않는데, 물론 옛날에 수박이 처음 나왔을 때 속을 다 파서 버리고 껍질을 먹었다는 말은 있는데 말이다(ㅋㅋ).

일단 사탕을 사면 껍데기인 비닐은 버리고 알맹이를 먹게 되는데, 하지만 사탕 그 자체는 복의 근원이 된다는 것이다. 막상 그런 복의 근원에 들어간 사람은, 막상 자기는 버려져야하고, 진작에 죽어야 하고, 자기로 인하여 태어난 자기 자식이 복의 근원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삭이 복의 근원인가? 이삭은 또 하나의 껍데기를 형성하면서 자기 자식인 야곱에게 물려준다는 것이다. 그러면 야곱이 복의 근원인가? 야곱은 이름이 바뀌는데, 그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면서, 그게 요한복음 1장에 보면,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라고 되어있는데 말이다.

(요 1:51)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그러니 정작 '이스라엘' 이란 이름은 야곱의 이름이 아니라, 장차 오실 메시야인 예수님께서 자기 이름을 야곱에게 빌려주었다는 것이다. 야곱은 이미 브니엘에서 하나님의 사자를 만났을 때 이미 죽었는데, 그런데 이스라엘이라는 이름 때문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말이다. 

(창 32:30) 그러므로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그러니 진짜 자석은 예수님이고, 그 앞에 있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모두 다 쇠붙이라는 말이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아들을 바쳤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닌데, 그러면 저도 바칠 용의가 있는데 말이다. 이것은 바로 자석에 쇠붙이가 들어 붙는 방식을 특수하게 하나님께서 제공하셨다는 것이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라고 말이다.  
 
◈ 육이 필요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육은 모형으로서 !!

물론 육이 필요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육이 필요해야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을 잡는다는 것이다. 그런 것이 다 육인데, 하지만 육의 어떤 특수한 형태, 육이 보여주는 특이한 모습과 같은 것이, 물론 그런 형식 자체가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형식은 알맹이를 모형으로, 즉 그림자로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이벤트가 된다는 말이다. 거기에 아브라함이 말려들었다는 것이다.

사람이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그 신앙생활을 하게 된 것을 간직하게 되는데, 그렇게 간직하게 되면 자기가 그만 알맹이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즉 예수를 믿는 자기 자신을 자기가 믿게 된다는 말이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예수님을 믿는 자기 자신을 늘 자기가 간직하고 지키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누가 우상이 되는가? 예수님을 믿는 자기가 그만 자기의 우상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우상을 가지고 남들하고 비교하고 경쟁하고, 심지어 졌다고 스트레스를 받고 우울증까지 걸리고 말이다. 구원을 해주실 분은 따로 계시는데, 쓸데없이 자기들끼리 경쟁을 벌리고 있다는 말이다. 믿음이 좋으니 나쁘니 하면서 말이다. 믿음은 다른 곳에서 주어졌는데 말이다.

예수님만이 진리 !!

그러므로 '2+3=5' 라는 것이 결코 진리가 아닌데, 인간에게는 진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복음 14장에서 예수님이 뭐라고 하시는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라고 하시는데, 오직 예수님만이 진리라는 것이다.

(요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그래서 수학자들은 이것을 이상적이라고 가르치는, 이것이 진리라고 우기는, 그것이 곧 육신이고 죄고 죽음이란 말이다. 산부인과에서 아기가 태어났을 때, 그 아이가 수학을 잘해서 나중에 수학교수가 된다고 하면, 그러면 그 아이가 생명인가? 죽음인가? 죽음의 형태가 수학교수라는 말이다. 수학의 박사학위가 죽음의 또 다른 형태라는 것이다.

이것을 인정하는 수학교수가 거의 없는데, 이것을 인정하는 물리학 박사가 없고, 물론 대기업의 임원들도 거의 없다는 말이다. 인류에 공헌하는 새로운 신약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위해서 새로운 방정식을 만들고 밤새도록 수고하고 실험하는 자들이, 이러한 지시, 즉 "내가 죽어 마땅하다" 라는 것을 인정하는 자들이 거의 없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을 믿기 때문에 말이다.

그렇게 하면서도 교회에 다니는 자들이 많은데, 그들은 신이 존재한다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신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했는데, 즉 언약대로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말이다. 그렇게 부활했다는 것은, 그 이전에 죽은 적이 있다는 말인데, 그러면 누구의 손에 죽었는가? 그것은 바로 인간의 손에 의해서 죽었다는 것이다.

◈ 인간의 손에 의해서 죽었다가 부활하신 그분만이 !!

다시 말해서, 그렇게 우리 인간의 손에 의해서 죽었다가 부활하신 그분만이, 오직 그분만이 인간에게 유일하게 나타난 진짜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 하나님이 아닌 다른 하나님은 없고 전부가 가 가짜라는 말이다. (녹취자 - 목사님, 그렇다면 모세에게 나타난 하나님은요?)

그래서 예수님은 "나를 본 자가 곧 아버지를 보았다" 라고 하셨는데, 그러니 아버지를 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성경 한 군대를 찾아보겠는데, 이렇게 하고 나서 요한복음 1장을 보면 그 의미가 또한 새롭지 싶은데 말이다. 여기서 18절을 보자.

(요 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여기에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라고 되어있는데, 그러면 세례요한이 이런 이야기를 했을 때, 세례요한은 유대인들이 믿는 하나님을 인정했는가? 인정하지 않았는데, 그래서 요한복음 8장에서 예수님은 "너희들이 믿는 하나님은 마귀다" 라고, 즉 "너희들은 마귀새끼라"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요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그런데도 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우기는데, 하지만 그러한 하나님은 인간들이 상상해서 만든, 인간들의 머릿속에서 나온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모든 철학자들이 뽑아낸, 심지어 물리학자들도 신을 믿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하나님은 우상인데,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언약의 하나님과 이방민족의 하나님은, 즉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라고 계속 언급하셨다는 것이다. 

인간이 태어나서 느끼는 신은 우상인데, 그것의 문제점이 무엇인고 하니, 우리 인간들 속에서 이미 이상한 신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사실은 이상하다기보다는 가장 정상적인 신인데 말이다. 왜냐하면, 하늘에 계시고, 또한 여기에 있고, 그래서 우리의 정성과 기도를, 우리의 가장 경건한 마음을 모아서 드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을 주신다고 하는, 이것은 어느 민족이든지 간에 뽑아내어서 보면 그 공통점이 바로 이것이란 말이다. 즉 "지성이면 감천이다" 라는 것이다.

지금도 역시 그러한데, 심지어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오기 이전에 우리의 할머니들은 정안수(정화수?)를 떠놓고 월초마다 빌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을 하기 전에 목욕탕에 가서 때를 먼저 밀고, 깨끗한 하얀 옷을 입고, 깨끗한 물을 떠놓고 손바닥으로 빌었다는 말이다. "그저 내 새끼들, 하는 일이 잘되고 몸 건강하도록 해주소서" 라고 하면서 말이다.

◈ 우상은, 곧 자기 자신의 투영 !!

보름달을 보고 빌고, 저기 동해안의 정동진에 가서 첫 해가 떠오를 때 비는 그들의 마음은 그야말로 순수하기 그지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해와 달을 보고 신이라고 하지 않는데, 신은 그와 같이 인자하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인자함이 어디서 나온 것인가? 그것은 곧 자기 속에 있는 선과 악 중에서 선에 포진되어있는, 그런 자기가 생각한 인자를 연장하고 확장을 시키면, 그것이 바로 인자하신 하나님이 된다는 말이다. 즉 자기 자신이 투영되었다는 것이다.

왜 '배트맨' 이라는 영화에 보면, 옥상에서 조명을 가지고 커다란 배트맨 모양을 하늘에다가 비추는 장면이 나오는데 말이다. 그렇게 자기 속에 있는 극단의 선의 요소를 모아서 크다랗게 확대시킨 것이란 말이다. 물론 우리 인간에게는 극단의 악도 있지만 말이다. 그러한 선을 무한으로 확대시키면 곧 신이 된다는 것이다.

◈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마태복음 19장에서 부자청년이 예수님에게 와서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고 하니까,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라고 하는데, 바로 그 선함이라는 것이다. "내가 어려서부터 십계명을 지켰습니다" 라고 하는데, 그 선함과 이 선함이 같다고 여긴다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수밖에 없는 죄를 발산시키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마 19:16)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마 19:17)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마 19:18) 가로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마 19:19)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마 19:20)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마 19: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마 19:22)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아버지로부터 받은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저주인데, 그렇게 예수님께서 저주를 받은 것은 인간 편에 섰기 때문인데, 왜냐하면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렇게 인간 편에 선 것을 아버지께서 저주하셨는데,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그 어떤 인간도 이러한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분명히 해주셨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인데, 그러니 우리가 아무리 경건하다고 해도, 그것은 곧 저주를 받을 일의 일부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즉 저주를 받을 짓이라는 말이다. '거룩하라' 라고 해서 거룩했고, '경건하라' 라고 해서 경건했고, '회개하라' 라고 해서 회개했고, '믿어라' 라고 해서 믿었던, 그런 모든 것들이 저주를 받을 짓에 해당이 된다는 것이다.

◈ 구원은, 그 능력이 덮쳐져야만 !!

그렇다면 구원은 무엇인가? 평생 신앙생활을 한 것이 저주라고 하면 말이다. 구원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능력으로만 받는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기 위해서 오셨기 때문에 말이다. 그런 능력을 우리가 소지하려고 하는 그 자체가 바로 죄에 해당되는데, 우리는 그런 주님의 능력을 소유하면 안 되고, 그 능력이 덮쳐져야 한다는 것이다.

젊은 사람들이 결혼을 하고 난 다음에 부부싸움을 하는 주된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다른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상대방을 자기 손아귀에 쥐려고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너는 내 것이야" 라고 하면서 말이다. 예를 들어서, 이번 중국에서 다음과 같은 강의를 했는데 말이다.

◈ 여보, 걸상을 내게로 좀 가져다주세요 !!

여기에 아내가 있고 또 남편이 있다는 것이다. 아내가 바빠서 남편에서 "여보, 걸상을 내게로 좀 가져다줄래" 라고 했는데, 그런데 그 이야기를 한 1초나 2초 사이에 남편이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자 다시 "여보, 내가 바쁜 것이 보이지 않아? 걸상을 좀 가져다달란 말이야" 라고 하니, 남편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 "가만히 있어봐. 나도 바쁘단 말이야. 걸상을 가져다가 줄 건지 말 건지는 내가 판단할 거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아내가 걸상을 가져다가 달라는 것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아내의 마음에서 나왔는데, 그러면 걸상을 가져다가 달라는 것은 누구의 영역인가? 아내의 영역인데, 그것이 확산이 되면서 남편의 영역으로 향하게 되는데, 그러자 남편이 잠시 멈칫했는데, 가져다가 줄 것인지 말 것인지를 말이다. 1초나 2초의 짧은 순간에 말이다.

그렇게 해서 "좋았어. 내가 가져다줄게" 라고 해서 걸상을 가지고 왔는데, 그러면 이렇게 남편이 걸상을 가지고 온 것은, 이것은 아내의 영역인가? 남편의 영역인가? 남편의 영역인데, 그러니 아내가 요구해서 남편이 들어주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당신이 그런 요구를 해서 내가 잠시 판단해보니, 그것을 들어주는 게 나에게 옳다 싶어서, 그렇게 내가 한량없는 자비심과 한량없는 관대함의 극치로서 내가 너에게 걸상을 가져다준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먼저 아내로부터 시작했어도, 결과적으로 그것은 남편의 관대함과 사랑의 넘침을 확인하는 증거로서 걸상 하나가 이리로 넘어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남편이 아내의 요구에 순종을 한 것인가? 아니면 남편이 걸상을 가져다주면서 아내에게 "당신은 나의 자비심과 관대함에 복종해" 라고 하는 요구인가? 어느 쪽이냐는 것이다.

물론 둘 다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대로 자기 쪽으로 생각하는데, 여기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인간은 그 어떤 경우에도 남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어떤 경우에도 말이다. 아내가 시키는 대로 하더라도, 그것은 자기의 자비심과 관대함의, 그런 자기 착함과 자기 의의 확장인 것이지, 결코 아내 말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러니 우리 인간은 그렇게 자기 자신밖에 모른다는 것이다.

◈ 그런데, 아내의 위치에 하나님을 넣으면 !!

방금 아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아내가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너는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고, 예수를 믿어라" 라고 했을 때, 주님이 그렇게 하셨는데 말이다. 거기에 대해서 "주님, 가만히 있어보세요. 지금 제가 너무 바빠서 자주 못 나가는데, 내년부터 열심히 다니면서 믿겠습니다" 라고 한다면, 그러면 예수님을 믿는 것은 누구의 영역에 속하겠는가?

자기 결정인데, 어떤 결정인가? 경건하고 착한 결정인데, 반성을 잘하고 훌륭하고 또 선한, 즉 자기의 선과 악 중에서 선의 극치를, 그런 솜씨를 발휘하는 쪽으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런 사람은 성경말씀을 가지고 뒷조사를 해서 건드리게 되면 그만 발작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내가 예수를 믿는 사람인데, 왜 나를 지적질하는가?"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러니 결국 무엇인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자기 선함과 자기 의를 업그레이들 해주는 하나의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결코 나는 저주를 받을 인간이 아니고, 지옥에 갈 인간이 아니다" 라고 하는 것이 전제되어있다는 것이다.  

◈ 결국 교회는, '가면 무도회' !!

그런 면에서 교회는 결국 '가면 무도회' 와도 같은 곳인데, 그야말로 자기 잘난 맛으로, 자기 잘남을 폼 잡기 위해서 모인 장소가 곧 교회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자기의 판단과, 자기의 이성적인 총명함을 과시하기 위해서 말이다. "너는 이해가 안 되지? 나는 이해가 돼" 라고 하면서, 자기의 결정이 얼마나 옳다고 하는 것을 말이다.

거기에다가 "목사님도 나를 보고 칭찬하더라" 라고 하면서 목사까지 끌어들이게 되면, 교회는 그야말로 자기가 어느 정도 수준이 되는지를, 그것을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서 자기 자리를, 자기 주체성을 확립하는 하나의 수단이 되고 구실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신은 저 윗동네인 하늘에 살아있는 것이지, 절대로 자기 죄 때문에 죽었다고, 십자가를 앞장세워서 "너 때문에 죽었다" 라고 지적질을 하시는, 그런 부활하신 주님과는 함께 있는 생활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구약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를 현대판으로 교회 안에서 늘 되풀이하고 반복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목사를 비롯해서 모든 교회가 다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재질과 실력을 마음껏 발휘해주셔서, 자신이 얼마나 착하고 대단한 존재인지를 증명해보시기 바랍니다" 라고 하는, 그것을 벌리는 장터와 같은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을 교회에 와서 인정받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한 두 명이 아니라는 것이다.

구약의 이스라엘이 바로 그러했는데, 하나님의 이름을 빌려서 '이스라엘' 이라는 자기 영토와 국가와 정권을 지키려고 하다가 멸망을 당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너희들 자신이, 너희들 자신을 만든 하나님을 너희들이 죽였다" 라는 것에 대해서 이해를 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 바벨론에 복종하라 !!

그들은 하나님이 양을 잡으라고 해서 양을 잡았는데, 하지만 그렇게 율법대로 양을 잡는 것이 죄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것도 사실 양을 잡은 것 이외에는 없었는데 말이다. 즉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양을 잡는 것이고, 그런데 그렇게 양을 잡는 것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죄라고 하면, 그러면 도대체 우리보고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말이냐?" 라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바벨론에 복종하라" 라는 것인데, 성경을 제대로 한 번이라도 읽어본 사람은 이 말씀을 놓칠 수가 없는데 말이다. 즉 "너희들을 멸망시키고 불태워버리는, 남은 가족들을 포로로 잡아가는 그 바벨론에 복종하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 쓴 잔을 마셔라 !!

이것은 바로 예수님에게 "이 쓴 잔을 마셔라" 라고 하는 것과 같은데,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뭐라고 하셨는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라고 하셨는데, 하지만 그 다음에 뭐라고 하셨는가?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마 26: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그러니 구약의 이스라엘도 그렇게 나와야 하는데, 하지만 그들은 어떻게 하든지 자기 가족들이 행복하게 살기를 원했는데, 다른 이방 민족들처럼 신을 저 위로 보내버리고,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자기들이 할 수 있는 장점들을, 즉 모든 것을 감사하게 여기고 경건하게 살면서 이웃에게 악하게 하지 않는 말이다.

그러면서 그저 신에게 제사를 드리면서 같이 평화롭게 살아가는, 너무나도 지극히 정상적인, 그렇게 해서 신앙의 나라가 되고 싶어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자기 나라를 때리고 치는 그런 복잡한 논리는 너무 힘들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 모두가 일종의 제천의식 !!

우리나라에도 고조선 이후에 부여, 옥저, 동예와 같은 부족들이 있었는데, 그들에게는 무슨 의식이 있었는고 하니, 제천의식(祭天儀式)이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삼국시대도 있었지만, 그 이전에도 있었다는 말이다. 진한, 변한, 마한도 그렇고 말이다. '제천의식' 이라는 것은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의식인데, 고대인들이나 현대인들이나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것을 보면 다 동일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창세기의 바벨탑이 흩어지면서 번진 것인지를 모르겠지만, 아무튼 전 세계가 다 동일하다는 말이다. 몽골이나 동남 아시아도의 원주민들도 그렇고, 제천의식은 전부가 한결같다는 말이다. 인간의 손때를 타지 않은 깨끗한 것을 정성껏 바치면, 신이 가뭄을 해소하고 홍수를 막아준다는 것이다.

그것이 그대로 기독교 용어에 들어와서 오늘날 교회가 되어버렸는데, 그러니 교회는 성경도 필요가 없고, 그저 자기가 아는 대로 기도할 따름이라고 하는데, 새벽마다 순수한 마음으로 비는 것, 그렇게 빌고 효과를 보고, 빌고 효과를 보는 것, 그것을 계속해서 되풀이하면서 수십 년을 걸쳐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은 그 전문가인 목사가 따로 있어서, 그 전문가가 시키면 그대로 순종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가 할 것은 무엇인고 하니, 빌고 빌어서 그 효과로 복을 받는 것, 그것이란 말이다. 물론 "신은 살아있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자기가 살아있으니 신이 살아있다고 한다는 것이다. 

◈ 이 바보야, 그게 아니야 !!

현재의 한국교회에 대해서 노골적으로 이야기하면 어느 정도인고 하니, 여기에 이렇게 성경책이 있는데, 물론 사람들은 상식적으로 아는데,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성경을 봐야 하고, 그 성경을 통해서 알아야 한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즉 자기가 여기고 있고, 하나님이 여기에 계시면, 그 하나님을 성경을 통해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는 말이다. 

그런데 자기가 이렇게 들어가게 될 때, 그때는 반드시 이스라엘을 통과해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은 모르고, 그냥 곧 바로 들어가 버린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을 거치지 않고 말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누구인고 하니, 그야말로 되먹지 못한 사두개인들이고 바리새인들인데, 그러니 바보들인데, 자기 같으면 그 하나님을 제대로 믿을 텐데 말이다.

그렇게 홍해를 건너고 요단강을 건너는 놀라운 복을 받아놓고,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위반하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러니 짜증난다는 것인데, 짜증이 나면 당연히 보지 않는 것이 최고라는 것이다. 산상설교와 사도바울의 권면을 제대로 지키면 복을 받는데, 바보처럼 그들은 그것을 해내지를 못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누가 바보인가? 오히려 자기들이 바보라는 것이다. 이스라엘 속에 들어가야 하는데, 왜냐하면 메시야가 누구의 메시야인고 하니, "나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왔다" 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는데, 그러니 예수님은 이스라엘과 함께 있는데, 하지만 이들은 예수님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니까, 이들은 순종할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사도들의 명령을, 즉 "서로 사랑하라. 서로 도와줘라. 서로 기도하라" 라고 하는, 그것과 같은 바구니에 "예수님을 믿어라" 라는 것도 있는데, 그러니 예수님도 믿고,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마치 뷔페식당과 같다는 것이다. 그것도 예수님만 믿는 것이 아니라, 재림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 바구니에 마치 쇼핑을 하듯이 다 골라서 담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쇼핑을 해도 자기가 지킬 만한 것만 하는데, 지키지 못하는 것은 빼놓는다는 것이다.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영생을 받는다" 라는 것은 말이다. "돈을 사랑하는 하는 것은 일만 악의 뿌리다" 라는 것도 미루어놓고 말이다. 그리고 온유와 자비와 양선과 화평과 같은 것은 성경이 좋은 자기가 할 수 있다고 여기고 말이다. 자기가 점잖을 빼고 있으면 되니 말이다.

물론 술을 좋아하는 사람은 "술 취하지 말라" 라는 것은 지키지 못하는데, 그러니 이것은 마치 마트에 가서 자기에게 필요한 물건을 바구니에 담는 것처럼, 그렇게 자기가 지킬 수 있는 것만 지키고, 나머지에 대해서는 잠시 미뤄놓으면 된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을 지키면 복을 받는 것은 알지만, 그것은 나중에 나이가 좀 더 들고 시간적 여유가 있으면 지키겠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을 받고, 그 나머지를 지켜서 보너스로 상급을 받고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멸망을 당한 이스라엘을 통과하지 않았기에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 이스라엘은, 말씀에 살고 말씀에 죽는 민족 !!

하지만 사람들이 그렇게 바보 취급을 하는 이스라엘은 어느 정도인고 하니까, 그야말로 말씀에 살고 말씀에 죽는 민족인데, 살고 죽은 것은 말씀에 달렸다고 생각하는 대단한 민족이라는 말이다. 건성으로 믿는 자들이 아닌데, 어려서부터 시편을 다 외우고, 말씀에 위배된다고 하면 사람들을 돌로 쳐죽였던 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런 민족이 하나님에 의해서 멸망을 당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장에서 뭐라고 하셨는가?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라고 하셨는데, 그러니 바리새인들이 일종의 커트라인이란 것이다. 그런데 그 바리새인들이 서울대 의대출신인데, 400점 만점에 399점 이상을 맞은 자들이라는 것이다. 그 정도가 아니면 명함도 내밀지 말라는 것이다.

(마 5: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심지어 예수님께서는 단서를 달았는데, 즉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라고 말이다. 율법의 슬쩍 몇 개라도 뽑아서 숨기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는 결코 양보를 하거나 봐주는 법이 없다는 것이다. 

(마 5: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 저주 아래 있는 자 !!

그러면 사도바울은 뭐라고 하는가?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저주를 받게 하게 위해서라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어떤 존재인가?" 라는 것은, 율법을 마주하게 될 때, "극명한 율법 앞에서 그나마도 나는 착합니다. 물론 완벽하지는 않지만, 내가 신이 아니고 천사가 아니지만, 그래도 최소의 노력은 하고 있지 않습니까?" 라고, 그렇게 자기 변명을 하게 되는 일을, 그것을 유대인들이 우리의 선배가 된 입장에서,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모든 것들을 이미 유대인들이 했다는 말이다. 

(갈 3: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 !!

그들은 자기 의를 생각한다고 주의 일에 복종하지 않았는데, 그래서 성경은 '율법 외의 한 다른 의'를 준비했다고 하는데, 자기 잘남이 아니라 다른 것을 준비했는데, 그 다른 것을 보기 위해서는 자기의 잘남을 접어야 한다는 것이다. 세리와 창기보다도 자기가 더 낫다고 말할 수 없는, 그런 마음가짐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천국에 가니 말이다. 자기가 세리와 창기보다도 자기가 더 낫다고 하는, 그런 마음가짐을 포기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롬 3: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그것을 어제 낮에 설교하면서 '추락' 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는데 말이다. 인간의 자아가 마치 자기부상 열차처럼 붕 떠있는데, 그래서 그것을 눌러주어야 하는데, 그게 곧 십자가 자리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갔는데, 그런데 예수님 외에 그 십자가에 올 놈과 년이 없다는 것이다. 남의 잘못을 왜 자기가 담당해야 하느냐는 말이다. 그러니 전부가 다 입이 툭 튀어나와 있다는 것이다.

"지금 내 몸이 아픈데 의사들이 파업을 하면 어떻게 하는가? 지금 내가 이렇게 바쁜데, 철도 노조에서 파업을 하면 어떻게 하란 말인가?" 라고 나온다는 말이다. 왜 그런 소리를 하는가? 자기가 불편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세상은 전부가 자기 중심이니 말이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어디로 가셨는가? 십자가로 가셨는데, 그러면 당연히 예수님을 따라가야 하는데, 그게 우리의 상식이(?) 아닌가?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 죄를 가지고 가셨으면, 우리 죄가 있는 곳에 우리도 쪼로록 따라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라오너라" 라고 하셨는데, 즉 예수님이 어디로 가셨는지를 보라는 것이다.

(마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그리고 사도바울이 빌립보서 3장에서 뭐라고 하는가? "내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고 십자가를 좇아간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무슨 의미인가? 부활에 이르기 위해서 부활로 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로 가야한다는 말이다.

(빌 3: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빌 3:11)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빌 3: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그런데 그 십자가가 무엇인가? 인간이 하나님을 죽인 현장인데, 그러면 하나님을 죽인 인간들이 어떤 인간들인가? 나쁜 인간들인가? 거룩한 인간들인가? 바리새인들이 거기에 앞장섰는데, 그런데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어떻게 평가하셨는가? "너희 의가 바리새인들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내세운, 즉 인간들 중에서 제일로 우수한 놈들이 바리새인들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죽였는데, 그러니 우리도 그 길을 가야한다는 것이다. 한량없이 착하고, 한량없이 거룩하고, 더 이상은 거룩할 수 없다고 할 수 있는 자들이 예수님을 죽였다는 말이다. 그러면 우리도 그 코스로 가야한다는 말이다.

◈ 십자가인가? 마일리지인가?

따라서 우리가 평소에 예수님의 십자가로 간다는 것은, 사실은 자기 잘난 척을 하면서 가는 것밖에 안 되는데, 그러니 사람들은 이 십자가를 어떻게 여기는가? 이것도 담고 저것도 담을 수 있는, 그런 하나의 정보로서 여기는데, 그러니 사람들이 십자가로 가는 것이 아니라, "너는 몇 개를 담았지? 나는 12개인데, 너는 7개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교회에 와서 자기가 얼마나 착한 인간지, 마일리지를 얼마나 많이 쌓았는지, 그것을 자랑질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목사님의 기도는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 의인의 간구에는 능력이 임한다고 하는데, 나도 목사님처럼 기도를 잘했으면 참 좋겠다" 라고 하면서, 그렇게 자꾸만 하나의 모델로 삼는다는 말이다. 하지만 성경에는 모델이 없는데, 왜냐하면 십자가를 바라보는 자에게는 모델이 있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손양원, 주기철, 한경직, 전부가 다 짝퉁이라는 것이다.

◈ 잠언서는, 외부에서 투입되는 구조이고 질서 !!

잠언이 하나의 잔소리와 같이 들리는데, 하지만 강력한 외부에서 투입되는 구조이고 질서라는 것이다. 읽어보면 속담에 지나지 않아 보이는데 말이다. 예를 들어서, 이렇게 도장이 있으면 그 밑에는 이름을 파서 새기는데, 그런데 이 몸통은 무엇인가? 보통은 나무인데 말이다.

그리고 조금 비싸다 싶으면 뿔을 사용하는데, 그것이 바로 질서라는 것이다. 그러니 잠언서에서 하는 것이 잔소리를 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그 몸통에는 무엇이 있다는 말인가? 죽었다가 살아난 부활의 질서가, 그것이 그 몸통에 길다랗게 달려서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잠언서의 말씀을 우리가 그 어느 하나라도 지킬 수가 있다는 것인가? 없다는 것인가? 없는데, 그러면 잠언서가 왜 있는가? 하나의 율법적 기능을 하는데, 즉 "잠언서 앞에서 나는 그 어느 말씀도 제대로 지킬 수가 없었다" 라는 것을 고백하게 한다는 것이다.

성경전체가 다 그러한데, 성경말씀이 모두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그래서 우리는 성경전체를 보면서, 자기가 이 말씀을 지키고자 했지만, 그런 우리 자신의 등뒤로 몰려오는 질서는 무엇인고 하니, "내가 얼마나 우수하고 잘난 놈인가?" 라는 것을 정리해주는, 악마적이고 비복음적인 질서가 하나의 뿔처럼 우리에게 달려온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 잘난 맛으로 사는 인간이, 오직 예수님만이 잘났다고 하는 말씀과 부딪칠 때는, 우리는 거기서 왜곡과 오류가 발생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강의제목을 '성령과 잠언' 이라고 했는데, 즉 "육으로 이 잠언서를 지킬 수 있는가?" 라는 것이다.

◈ 오직 성령이 임해야 !!

그렇다면 무엇인가? 성령이 임해야 하는데, 그러면 성령은 어떻게 임하는가? 그것을 설명하고 나서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야 하는데 말이다. 성령은 고린도후서 3장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영, 즉 '주의 영' 이라고 했는데, 그리고 로마서 8장에도 보면,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롬 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그러니 교회에 나와서 6개월만에 학습을 받고 세례를 받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는가? 그런 법은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그리스도의 사람이, 즉 성도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성도라는 것은, 교회라는 제도와 형식이 그 어떤 경우에도 그 사람을 성도가 되게 못한다는 것이다. 

사울이라는 사람이 다메섹으로 내려갈 때, 거기에 가서는 그만 성도가 되었는데, 그러면 어떤 사람이 사울을 성도로 만들었는가? 그 사울과 동행한 사람이 누구였느냐는 것이다. 말로 한 것인가? 복음을 가르쳐주니 사울이 성도가 되었는가? 누구를 만났는데, 그게 누구인가? 나사렛 예수가 나타나셨다는 것이다.

그것이 문제가 되는데, 왜 그런고 하니까, 나사렛 예수가 나타나셔서 사울이 바울이 되었다고 하면, 그 다음 조건이 무엇인고 하니, 그러면 나사렛 예수를 만나지 않고 성도가 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말인가? 없다는 말인가? 그런 방법은 없다는 것이다.

◈ 어떤 목사가 개척교회를 했는데 !!

예를 들어서, 어떤 목사가 인천에서 개척교회를 했는데, 30명 정도가 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심사를 한다면, 물론 심사를 목사가 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죽어서 천국에 간다고 하면 "너는 어느 교회에 다녔어?" 라고 묻는 것이 아닌데, 주님께서는 뭐라고 하시겠는가? 성경대로 하면,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영으로 난 것은 영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성령을 받은 사람은,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받았기 때문에 성령을 받았다고 하면, 30명의 교인들 가운데서, 그들이 아무리 목사에게 잘해줘도, 안경을 사주고 밥을 사주고 해도, 그런 것은 하늘나라에서는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게 남들이 보기에 그럴싸하게 보일지 몰라도, 당사자인 목사는 그런 교인에게 감동을 받을지 몰라도, 그러나 그것은 가짜일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오직 성령을 받은 사람만 구원을 받는데, 성령이 아니고는 하늘나라를 볼 자가 없기 때문에 말이다. 그러면 그 30명 가운데서 달랑 두 명만 성령을 받았다고 하면, 그 교회는 성도가 몇 명인가? 30명이 아니라 두 명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목사는 두 명이 천국에 가도록 설교를 해야하고, 28명은 돌아가도록 설교를 해야한다는 것이다.

어차피 교회에 다니는 것이 목적지가 아니기 때문인데, 그러면 어디로 가야하는가? 천국에 가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괜히 마음만 들뜨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짜 28명을 위주로 설교를 하다가는 두 명도 상처를 받아서 나가는 수가 있는데, 그러면 100프로 가짜 교회가 될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28명의 교회 아닌 교회가 말이다.

그러니 목사의 경우에 걱정을 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성경에 있는 말씀이 옳은 줄은 알지만, 막상 30명의 교인들이 다 오더라도, 그들이 모두 가짜라고 하면 자기는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다. 그게 심히 고민이 되는데, 왜냐하면 성경에 의하면 구원을 받는 자들이 숫자가 너무나 적으니 말이다. 그래서 "일단 와서 헌금만 제대로 해라. 그러면 내 생계는 유지된다" 라고 하는 것이 너무 편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러분, 천국에는 이런 분들이 갑니다" 라는 말을 함부로 꺼내기가 난처한데, 왜냐하면 그런 말을 듣고 두 명을 빼고 28명이 낙심해서 가버리고 나면, 그러면 결국 손해를 보는 장사가 아니냐는 것이다. 적어도 30명은 되어야 교회가 유지가 되는데, 겨우 두 명을 데리고 무엇을 하느냐는 말이다. 그리고 그 두 명마저도 나중에 재정적 부담으로 인해서 떠나고 나면,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결국에는 자기 식구밖에 남지 않는 경우를 얼마든지 상상해볼 수 있는데, 그러면 하나님으로 인해서 자기가 손해를 보는데,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 목사를 그렇게 다루신다고 하면, 그 목사는 횡재를 했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축복인데, 왜냐하면 교회가 보이지 않고 무엇이 보인다는 말인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보이기 때문에, 정말로 그 사람은 다행스러운 목사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교인도 안 보이고 교회도 안 보고, 오직 주님만 있으면 족합니다" 라고 하는, 그런 고백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았다고 하는 사실이, 그것이 아무나 받는 축복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야말로 택한 자인데, 그런데 문제는 당장에 먹고 살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28명을 붙드는 목회를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땡기는 것을 어떻게 하란 말인가?

그래서 성경말씀이 싫은데, 무엇이 좋은고 하니,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하면 복을 받는다고 하는, 그런 민중종교가 좋다는 것이다. 십자가도 없고 부활도 없고, 다만 하나님은 저기에 계시고 우리가 정성을 다하면 감동을 한다는, 즉 "지성이면 감천이다" 라고 하는 것이 너무 땡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목사가 설교시간에 그런 복을 받는 간증만 하게 되면 교인들도 가만히 있지를 않는데, '아멘' 이라고 화답한다는 것이다. 무슨 의미인가? "나도 그런 복을 받고 싶어요" 라는 것인데, 즉 "아, 저런 방법이 있는 줄을 몰랐구나. 저렇게 금식하면 되는데, 그것도 모르고 주님을 그동안 내가 시험했구나. 내 잘못이야" 라는 말이다.

그렇게 자기 스스로 반성하고 회개하면서 더욱 더 교회에 충성하게 되는데, 물론 그런 교인들이 목사에는 너무나 예쁘다는 것이다. 그러니 굳이 이런 성경말씀이 필요가 없는데,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너무 편하고 땡긴다는 말이다.

◈ 성령은, 삼위일체가 아닌 '그리스도의 영' !!

그러나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인데, 이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영을 끊어버리고 삼위일체로 접근하는데, 그렇게 되면 '성부, 성자, 성령', 그렇게 되어서 각자 따로 활동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시어머니가 세 분이 되어서, 성부에게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아버지여!" 라고 하면서 찬양하면 되고, 성부에게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습니다" 라고 하면 되고, 그리고 본격적으로는 성부와 성자를 빼버리고 성령을 다루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성령을 다루는가? 성령은 여러 가지로 나타나는데, 즉 "뜨겁다. 회개를 한다. 감동을 받는다. 마음을 낮춘다. 착해진다" 라고 말이다. 그러니 성령을 받은 티를 내려고 하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 "뜨겁다. 회개한다. 감동을 받는다" 라는 것에다가 병을 고치고 방언을 하는 은사까지도 받는다고 하면, 그런 것을 모아놓고는 "그러니까 나는 성령을 받은 사람이 맞잖아!" 라고 하는데, 그러니 굉장히 편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시키는 조건을 맞추었으니, 즉 방언을 하고, 마음이 뜨겁고, 마음이 결코 차가우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회개하고, 감동을 받고, 마음을 낮추고, 착한 일도 열심히 하고, 그리고 봉사도 하면, 이런 조건을 맞추면 성령을 받았다고 한다는 말이다.

◈ 성령은, 십자가로 책망하시는 영 !!

하지만 성경은 그것이 아닌데, 계속해서 이야기하지만 성경은 성령을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이란 것은, 요한복음 16장 8절에 보면 뭐라고 하는가? 십자가로서 우리를 책망하는데, 그러니 그 십자가에 대해서 눈을 돌리는 순간 우리는 어떻게 되는가? 그만 잘난 사람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요 16: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는데, 그런데 자기가 그 정도의 죄인은 아니라고 여겨지는 것은, 십자가에서 눈을 돌리면 라이벌이 되는 같은 교인들과 목사들만 눈에 들어오니까, "나도 저 정도는 착해질 수 있다" 라고 하는, 라이벌 의식이 발휘되면서 자기 자아의 가치가 다시 한번 꿈틀거릴 수 있는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

"이 정도의 방언은 나도 할 수 있다" 라고 하면서, 기도를 열심히 하면 방언은 터지니 말이다. 그렇게 "저 정도로 착한 일은 나도 할 수 있다" 라고 하는 희망이 생기는데, 자기도 따라잡을 수 있다고 하는 희망, 그런 대단한 신앙이 될 수 있다고 하는 희망이 말이다.

하지만 십자가를 보는 순간에 어떻게 되는가? 자기는 무엇을 해도 죄인이고, 오직 십자가의 피로만 용서를 받을 수 있으니, '나' 라는 가치가 십자가에서 설 수 있는 자리가 그만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영이 아니라, 성령을 직접 상대해서 성령을 받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그러한 분위기가 한국교회에 가득하다는 말이다.

◈ 주의 영이 있는 곳에 '자유함'이 !!

하지만 성경은 분명히 무엇이라고 하는가?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하는데, 이 그리스도의 영에서 주어지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바로 '자유' 라는 것인데, 무엇에 대한 자유인가? "너의 의로움에서 벗어나라" 라는 것이다. 자기가 의로워지려고 하는 것에 대해서 말이다. 그런 자기 자아에서 벗어나는 것인데,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기를 부인하라" 라고 하셨다는 말이다. 

성령을 받게 되면 우리의 그럴 듯한 기도도 낙제점수를 받을 수밖에 없는데, 아무리 열심히 기도해도 그 기도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께서는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해서 기도해서,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그 부르신 자를 의롭게 하시고, 또한 영화롭게 하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답답하면 기도하는데, 하지만 그런 기도는 주님에 의하면 가위표가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반드시 그리스도의 영으로서의 성령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게 잠언과 무슨 관계가 있는고 하니, 여기 교재 15페이지를 다시 보자.

** 이게 바로 강력한 외부구조의 투입입니다. 바로 지혜라는 것이 이런 겁니다. 이것이 사람이 사는 세상이라는 겁니다. 이런 차원에서 출애굽기 1장 6절을 다시 한번 읽어보세요.

(출 1:6) 요셉과 그의 모든 형제와 그 시대 사람은 다 죽었고

잠언서에 성령이 나오는가? 나오지 않는데, 성령을 구약에서는 성신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성신도 나오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언약이 주어질 때만 나오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제목을 '성령과 잠언' 이라고 하는고 하니, 그 배후에 있는 질서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 우리는 전부 다 '좀비' !!

여기 출애굽기 1장 16절에서 "요셉과 그의 모든 형제와 그 시대 사람은 다 죽었고" 라고 되어있는데, 그러면 잠언에서 성신은, 즉 언약의 신은 어떻게 작용하는고 하니, 우리를 전부 다 '죽은 자'로 본다는 것이다. 죽은 자로 말이다. 그러면 집에서 이불을 덮어쓰고 가만히 있으면 죽은 자인가? 그러한 죽은 자가 아니라, 설치고 돌아다니는 죽은 자라는 말이다.

설치는데, 그런데 이미 죽은 자로서 설친다는 것이다. 일종의 좀비와도 같은데, 그야말로 시체가 나댄다는 말이다. 그렇게 시체가 설치게 되면, 물론 좀비는 영화에 등장하는데, 실제로는 없지만 말이다. 그 좀비는 눈동자가 이상한데, 그렇게 우리의 일상생활이 이상하다는 것이다.

우리 눈에는 돈 말고는 보이지 않는데, 교인들이 설교에 관심이 없는데, 물론 우리교회는 보통 사람들이 아니니 말이다(ㅋㅋ). 교인들이 설교를 하면 다 주무시는데, 그런데 돈 이야기를 하면 번쩍 눈이 뜨인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돈을 법니다" 라고 하면 잠이 잘 수가 없다는 것이다. "어떤 장로님이 부도가 나서, 마음을 고쳐먹고 기도를 열심히 하면서 사업을 하니까, 수출도 잘되고 해서 십일조를 전에는 10만원을 했는데, 이제는 천 만원을 합니다" 라고 하면, 자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전부가 다 좀비이니 말이다. 돈에 환장을 했기 때문에, 돈 이야기가 나오면 눈이 감기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심지어 설교시간에 바이어에게 전화가 오면, 밖에 나가서 거래를 성사시키고 와야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계약이 중요한데, 그 계약은 하나님의 축복이고 말이다. 돈이 들어오면 축복이고, 나가면 다 저주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이 시대의 좀비인데, 그것을 '굉하다' 라고 표현할 수 있는데, 즉 눈이 흐리멍텅하다는 말이다. 20대 젊은이들은 좋은 차만 보면 그야말로 정신이 혼미해지는데, 아가씨들은 명품만 보면 그렇게 되고 말이다. 물론 40대 아줌마도 그러한데 말이다. 명품을 보게 되면 발걸음이 떨어지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 최고의 성지순례 코스는, 백화점 성지순례 !!

그러니 저기 멀리 가서 목숨을 걸고 성지순례를 할 필요가 없는데, 괜히 테러나 당하지 말고 말이다. 그냥 가까운 백화점에 가면 된다는 것이다. 모든 스트레스를 왕창 풀 수 있는 방법은 백화점 성지순례를 통해서, 거기서 자기 마음껏 물건을 사서 카드로 긁을 수만 있지만, 그것 이상의 더 기쁜 소식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교회도 마찬가지인데, 예배당을 새로 짓는 것 외에는 더 기쁜 소식이 없고, 주차장을 넓히는 것 외에는 더 기쁜 소식이 없고, 노인정을 짓는 것 외에는 더 기쁜 소식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모든 것은 다 양적이고,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 외에는 정신이 없다는 말이다. 그 자체가 움직이는 시체이고 좀비, 즉 죽은 자라는 것이다.

(요일 2: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 잠언은 다윗언약에서 나왔기에 !!

그러면 잠언은 무엇인고 하니, 이 잠언은 다윗언약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잠언 1장 1절에 나오듯이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의 잠언이라" 라고 말이다. 이미 지난 시간에 이야기를 했는데, 그런데 다윗도 죽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윗을 어떻게 죽이셨는가? 그냥 죽이는 것이 아니라, 간통하고 살인을 한 살인자로서 그만 죽여버리신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다윗언약과 다윗의 매치도 그냥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일단 다윗을 천하에 둘도 없는 죄인의 모습으로 만들어놓고, 그리고 나서 다윗언약으로 다윗을 구원하신다는 것이다. 즉 "너는 이미 모친의 태에 있을 때부터 죄인이었다" 라는 것이다. 

그러자 다윗은 뭐라고 하는가? "아하, 그렇군요. 내가 진작 이것을 알았어야 하는데, 나는 율법을 지키면 더 착한 사람이 되는 줄 알았는데, 내가 죄를 짓고 난 다음에 나단 선지자가 와서 지적해줄 때, 비로소 나는 질서를, 말씀 배후에 있는 천국의 질서를, 그것을 나를 죄인이 되게 하는 능력과 더불어서 알려주시니, 나는 주의 신으로 말미암아서 찬양하리로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주께서는 예배나 제사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 빈 껍데기인 이 사탕 껍질을 원하신다는 것을 왜 이제야 알았을까?" 라고 하면서, 그 다음에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 라고 한다는 것이다. 무슨 뜻인가? 시온에 세워지는 예루살렘 성은 인간의 땀과 노력으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죄인임을 깨달았던 그 은혜로만 채워진다는 것이다. 그게 시온성이라는 말이다. 

(시 51:1)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저에게 온 때에]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시 51:2)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시 51:3)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시 51:4)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시 51: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시 51:6)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
(시 51:7)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시 51:8)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시 51:9)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
(시 51: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시 51:11)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시 51:12)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시 51:13) 그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시 51:14)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시 51:15) 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
(시 51:16)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시 51: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시 51:18)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
(시 51:19) 그 때에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저희가 수소로 주의 단에 드리리이다

그것을 두고 "주의 영이 있는 곳에 자유함이 있다" 라고 하는데, 그러니 이런 자유는 흉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유는 우리의 실상이라는 것이다. 즉 가만히 있어도 되는데, 괜히 경건한 척을 하면서 마음을 낮추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겸손하지 말고, 회개하지 말고, 굳이 그러한 것을 하지 않아도 자유라는 말이다.

그러니 회개하게 되면, 오히려 그렇게 회개한 자기 자신이 그만 우상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자기가 회개했다고 하는 그 잘남에 그만 자기가 얽매이게 되면, 그것처럼 바보가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다. "너는 회개를 몇 번이나 했는가? 나는 매일 한다" 라고 하면, 그것은 결국 자기 자랑밖에 되지를 않는다는 말이다.

교회마다 사순절이나 오순절이 되면 회개를 한다고 난리를 치는데, 조금 있으면 고난주간과 부활절이 다가오는데 말이다. 회개를 그때 다해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유를 그동안 누구에게 빼앗겼는가? 그것은 바로 마귀에게 빼앗겼다는 말이다.

◈ 다시 정리하면 !!

오늘의 주제인 '성령과 잠언'을 어설프게 말고 구체적으로 이야기해보면, "성령은 언약에서 나오고, 그 언약은 숨겨진 질서다" 라는 것이다. 그러면 잠언은 무엇인고 하니, 잠언은 일종의 도장인데, 여기에 말씀이 새겨져있고, 그 뒤에 길다란 기둥이 있는데, 그것은 천국과 연결되어있다는 것이다. 즉 잠언은 천국과 연결된 도장과 같다는 말이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인고 하니, 여기에 그냥 있는 게 아니라 죽음으로 들어있는데, 그것을 그만 도장을 가지고 콱 찍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아, 나는 말씀 앞에서 죄인이군요"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말씀으로 찍게 되면, 그 뒤에는 어린양의 피가 있고, 이 전체를 질서가 포함시키는데, 그것을 두고 '자유' 라고 한다는 말이다.

잠언서에도 그런 내용이 있지만, 같은 지혜문서인 전도서를 예를 들어보면, 전도서 9장 2절인데, 어제 낮 시간에도 했지만 다시 한번 살펴보자는 것이다.

(전 9:2)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모든 것이 일반이라 의인과 악인이며 선하고 깨끗한 자와 깨끗지 않은 자며 제사를 드리는 자와 제사를 드리지 아니하는 자의 결국이 일반이니 선인과 죄인이며 맹세하는 자와 맹세하기를 무서워하는 자가 일반이로다

◈ 모든 것이 일반이라 !!

어제 시간에 쫓겨서 빨리 읽는다고 미처 제대로 살펴보지 못했는데, 여기에 보면 "의인과 악인이며, 선하고 깨끗한 자와 깨끗지 않은 자며, 제사를 드리는 자와 제사를 드리지 아니하는 자의 결국이 일반이니" 라고 하는데, 그러니 모두가 똑같다는 것이다. 이것이 전도서에 나온다는 말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 바쁜 시간에 예배에 참석하고 난리를 치느냐는 것이다. 우리는 자꾸만 경건을 만들려고 하는데, 자기가 그냥 좀비로 살아가면 구원을 받는데 말이다. 그런데 자기가 그런 구원을 받아야하는 것을 만들어야 안심한다는 것이다. 즉 성경말씀을 소유하려고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성경말씀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 안에서 살면 되는데, 그런데 우리 인간은 어떻게 하는가? 자기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말씀을 따로 꽃다발로 만들어서 훈장처럼 달고 살려고 한다는 말이다. 자기가 필요할 때마다 말씀을 끄집어내어서 써먹고 말이다.

하지만 말씀을 써먹을 정도로 우리는 대단한 존재가 아닌데, 오히려 말씀을 우리를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그때그때마다 우리는 말씀을 증거하는 증거자료로서 사용되어질 뿐이지, 자기가 자기를 사수하기 위해서 말씀을 선택한다든지 뽑아낼 수 있는 권한이니 자격이 우리에게는 없다는 말이다.

◈ 잠언서는, 도장을 '콱' !!

이렇게 전도서에 의하면 모든 인간이 다 일반인데, 그러면 잠언서는 무엇인고 하니, 모든 인간을 대패를 가지고 밀어버리는데, 그렇게 똑같이 밀어놓고, 그러면 편평하게 되는데, 거기에 도장을 찍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 결과가 나오는고 하니, 잠언서에서 아무 곳을 펼쳐봐도 괜찮은데, 그렇게 해서 펼치니, 이렇게 잠언 24장 16절이 나왔는데 말이다.

(잠 24:16)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

여기에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라고 되어있는데, 그러면 여기서 누가 일어난다는 말인가? 자기가 일어난다는 것인가? 그게 아니면 말씀이 자기로 하여금 일어나게 한다는 것인가? 자기가 말씀을 알아서 스스로 일어난다는 것인가? 그것이 아니면 말씀이 넘어지는 자기로 하여금 계속해서 일어나게 하신다는 말인가?

말씀이 일어나게 하는데, 그것을 바로 '나'로부터 벗어난 자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자기는 일어나지 않으려고 하는데, 주의 말씀을 자기를 천국으로 질질 끌고 가신다는 말이다. 그것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자가 바로 잠언 속의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자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말씀이 그렇게 하신다는 것이다. 자기가 말씀을 믿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이 그렇게 믿게 하신다는 말이다. 그게 에베소서 2장 8절에 보면,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 라고 하는데, 선물은 자기가 오지 말라고 해서 오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일방적으로 주어진다는 것이다.

(엡 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그렇게 자기를 믿게 하신 그분이 누구인고 하니까, 그분이 바로 그리스도라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주님을 소유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이미 우리를 소유해버렸는데, 그렇게 주님이 소유하니까, 그것을 잠언서대로 증명해주신다는 것이다.

또 잠언서를 펼쳐서 읽어보면, 21장 13절이 나왔는데 말이다.

(잠 21:13) 귀를 막아 가난한 자의 부르짖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면 자기의 부르짖을 때에도 들을 자가 없으리라

◈ 아하, 이 말씀을 위반한 자가 바로 나로구나 !!

제가 랜덤으로 그냥 찾아서 읽었는데, 이 말씀을 성령을 받은 사람은 어떻게 하겠는가? 주님께서는 이 말씀이 드러나도록 자기를 느끼게 하신다는 것이다. "아하, 이 말씀을 위반한 자가 바로 나로구나" 라고 말이다. 왜냐하면, 자기는 모든 말씀을 위반할 수밖에 없는데, 그 위반을 통해서 말씀이 살고 자기는 다시 한번 죽은 자로서 확인되는, 그러한 작업을 주께서는 하신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성경말씀을 지켜서 지킨 것이 아니라, 위반을 함으로서 그 위반을 통해서 우리 자신이 아닌 말씀이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방식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몇 개를 지킨 것이 아니라, 그 어떤 것도 지키지 못했다는 것을 온 몸으로 느끼는 가운데서, 즉 우리는 말씀을 지키는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말씀이 우리를 데리고 말씀이 드러나게 하신다는 것이다.

◈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

그러면 우리가 지킨 말씀을 몇 개인가? 그 어떤 말씀도 없는데, 주께서 원하시는 것은 상한 심령인데,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피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 우리가 증거해야할 것은, 자기가 말씀을 지켰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뿐이라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무엇을 받았는가? 성령을 받아서 마지막에 하는 말이 무엇인고 하니까,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라고 했는데, 그 정도로 자기의 착함과 자기 의로움에서 손을 털었다는 것이다. 

(갈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 이제 마지막으로 !!

마지막으로 이것만 하고 마치겠는데, 그러면 자기가 악하면 어떻게 되는가? 혹시 자에게 악한만큼의 저주와 벌이 주어진다면, 그것이 걱정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성령 안에서는, 십자가 안에서는 이미 저주거리가 다 해소된 상태인데, 즉 저주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마귀가 자꾸만 말씀을 지키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고 윽박지르는데, 그것은 우리 육신의 옛날 버릇이 그대로 남아서 그렇다는 말이다.

우리 인간은 항상 자기 몸 중심이기 때문에, 자기 일이 잘 풀리지 않고 팔자가 더럽게 되면, 그 책임이 자기에게 있다고 여기고 그 팔자를 바꾸는 방식으로, 그렇게 신경을 많이 써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령의 십자가 안에서는, 그 십자가가 우리의 죄를 용서했는데, 모든 저주를 죄가 있을 때만 오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 누가 정죄하리요 !!

그런데 십자가의 피로 우리의 죄를 이미 다 용서해버렸는데, 즉 "누가 너를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라는 것인데, 그러니 죄가 없는 곳에는 저주가 오려고 해도 올 수가 없다는 것이다. 저주를 받을 건더기가 없으니 말이다. 죄에서, 저주에서 해방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선이고, 모든 것이 예가 되고, 모든 것이 복이 된다는 말이다.

(롬 8: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그런데 우리 육신의 기억은 무엇인고 하니, 자기 욕망대로 되지 않으면 저주이고, 자기 뜻대로 되면 복이라고 하는, 그런 육신의 잔재가 남아있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스트레스를 받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행동하면 이번 한 주가 복된 주가 될까?" 라는 것을 생각한다는 말이다. 그냥 살아도 복인데, 그런데 우리는 세상 욕망에 부합되는 복을 따로 계산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누가 힘들겠는가? 마귀가 와서 자꾸만 "니가 그렇게 하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 그러니 이렇게 해야한다" 라고, 그렇게 마귀와 한 통속이 되도록 한다는 것이다. 물론 거기에 대해서 제가 도와드릴 방법은 없는데, 이미 본인이 복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으니 말이다. 제가 믿을 주는 사람도 아니고 말이다.

믿음이 없는 자에게 믿음을 줄 수는 없는데, 그러니 성경말씀대로 이렇게 산 것도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알고, 우리보다 더 힘들게 사는 사람을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우리가 나쁜 짓을 해도 그들보다도 적게 한 것이 결코 아닌데, 그런데도 이렇게 우리가 목숨을 유지하고 있는 것을 보면 분명히 십자가의 혜택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 모든 것이 다 은혜 !!

북한교회에 있는 사람들이 불쌍하다고 하는데, 하지만 불쌍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들은 김정은을 욕할 사람도 아니고 욕을 해서도 안 되는데, 오히려 김정은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만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만약에 남한의 교회에 오면 어떻게 되겠는가? 돈밖에 눈에 들어오지 않고, 자기 자식밖에 눈에 들어오지 않고, 자기 남편이 하는 사업밖에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를 치장하는 것에 모르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눈을 돌리게 될 수밖에 없는데, 바로 그것을 마귀가 노리는 것인데, 십자가에서 눈을 돌리는 것 말이다. 그러니 결국 질서인데, 이 질서는 잠언서 앞에서 우리를 죄인이 되게 함으로서, 이제는 우리 자신이 우선이 아니라 말씀이 우선임을 깨닫게 하신다는 것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마치 잔소리처럼 들리는 이 잠언서의 말씀을 주신 이유가, 그것을 지킬 수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주셨다는 것을 저희들이 미처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우리가 지켜서 복을 받아서 우리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시험이었고, 이렇게 사나 저렇게 사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이고 사랑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4,3,17 오후 7시에 마침.

                                                 하나님의 잔소리는 질서, 마누라의 잔소리는 무질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