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

잠언서5-인간의 지혜 140414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12. 19. 18:22
2014-04-14 23:39:46조회 : 1180         
[14 대구강의] '잠언'속의 그리스도 5 - 인간의 지혜이름 : 구득영 (IP:203.223.97.152)

[14 대구강의] '잠언'속의 그리스도 5 - 인간의 지혜

                                                            14,04,07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20페이지부터 살펴보겠는데, 우리가 흔히 지혜라고 할 때, 그것은 사람의 지혜가 된다는 것이다. 사람의 지혜라는 것은, 그 방향이 사람 자신에게 좋은 쪽으로, 그렇게 지혜를 끄집어낸다는 말이다. 그렇게 지혜를 끄집어내기는 내는데, 하지만 그것이 도대체 어디서 막히는지에 대해서는 사람들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 나는 인자(人子)이다 !!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호칭할 때 뭐라고 했는고 하니, 의도적으로 '사람의 아들' 이라고 했는데, 즉 '인자(人子)' 라고 말이다. 그렇게 사람의 아들이라고 했는데,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람의 아들로 들어오심으로 말미암아, 소위 사람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의 한계가 어디서 부딪치게 되는지, 그것을 말씀해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사람이 아닌데, 하나님께서 "내가 사람이 될게. 너희들과 섞여볼게" 라고 하시면서 이야기를 하지고 하시는데, 그러면 과연 이야기가 통하겠느냐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나도 사람이고, 너도 사람이다" 라고 되는데,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서로 이야기가 전혀 통하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나는 사람의 아들이다" 라고, 즉 인자라고 했을 때, 그럴 때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했는가? "당신만 사람의 아들인가? 우리도 사람의 아들이다" 라고 했는데, 그렇게 사람의 아들이라고 불렀던, 그렇게 둘 다 사람의 아들인데 둘 다 통하지 않을 때는, 어느 한 쪽은 가짜가 된다는 것이다. 즉 사람 자체가 아니라는 말이다.

물론 '인자' 라는 호칭은 다른 이방민족의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통용되는 사람의 아들인데, 그게 시편 8편에 보면 나오는데 말이다. 그것은 다윗이 스스로 자기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라고 하면서, 천사보다 못한 존재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천사보다 못한 벌레와 같은 자기를 구원하시느냐고 나온다는 것이다. 

(시 8:4)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시 8:5)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물론 주님께서는 벌레를 구원하려는 것이 아니라 진짜 사람을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작전이었는데, 다윗은 그 사실을 신앙고백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다윗 본인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의 말을 대비해주는고 하니,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미리 앞당겨서 보여준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자가 되시는 예수님을 천사보다 더 귀하게 생각하시고, 결국은 천사들에게 들려서 올라가신다는 것이다.

◈ 사람과 사람 중에서 누가 더 진짜인가?

그렇다면 우리가 이렇게 공부를 함에 있어서 간단한 전제는 이제 시작이 되었는데, 즉 "사람과 사람 중에서 누가 더 진짜인가?" 라고 할 때, 잠언은 지혜이기 때문에, 사람에게서 나온, 즉 사람이라고 우기는 인간들의 지혜와, 그리고 인자가 되신 하나님에게서 나온 지혜가 어떤 차이가 있는지, 그 차이만 알면 잠언은 풀리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열쇠가 거기에 들어있다는 말이다.

그러면 먼저 사람이 사람을 볼 때, 사람들이 자신의 지혜를 어떻게 보는지, 즉 인간들은 자기 지혜를 어떻게 보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기능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구성요소로 본다는 말이다. 즉 "사람은 무엇으로 구성되어있는가?" 라는 것이다. 이것은 공부를 하나마나 다 아는데, 즉 사람은 정신과 육체로 되어있다는 것이다. 철학자든 과학자든, 아니면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살아가는 할아버지에게 물어봐도 그렇다는 말이다. 그렇게 인간은 모두가 구성요소로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자는 무엇인가? 인자가 된다는 것은 정신과 육체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죽었다가 살아나심으로 인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다른데, 즉 기능이라는 말이다. 사람은 정신과 육체로 되어있다고 하는데, 하지만 하나님은 죽었다가 살아나야 사람이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여러분은 어느 쪽인지 궁금한데 말이다.

◈ 죄로 인해 죽고 의로 인해 살아나는 것, 그게 참 인간 !!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는데, 그런데 "사람은 무엇입니까?" 라고 물으면 그들은 뭐라고 하는가? "죄로 인해서 죽었다가 의로 인해서 살아나는 것이 참된 인간이다" 라고, 그렇게 하나님 본인이 결정하셨다는 말이다. 사람들의 회의를 열어서 결정한 것이 아니고 말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자신이 말씀하시기를, 참된 아담은, 즉 마지막 아담은 예수님뿐이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창조하신 분이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자기가 새로운 이론이라고 하면서 들고 와서는 멱살을 쥐고 흔들면 안 된다는 것이다.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 바로 그것이란 말이다.

그런데 사람에게는 무엇이 무서운고 하니, '죽었다' 라는 것이 무섭다는 것이다. 항상 사람은 "죽으면 안 돼. 죽으면 안 돼" 라고 하는데, 그러니 길을 가다가 왜 다시 돌아오느냐는 것이다. 죽었다가 살아나면 되는데 말이다. 그런데 죽음 직전에 되돌아선다는 것이다. "태어났다. 죽자" 라고 하면 되는데,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태어났다. 죽으면 안 돼" 라고 한다는 말이다. 
 
◈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

그래서 예수님께서 "다시 태어나야 하나님 나라를 본다" 라고 하셨는데, 그런데 니고데모는 이것을 "죽어서 태어난다" 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자기가 지금 살아있는 상태에서 어떻게 엄마 뱃속에 들어갔다가 나오는지, 그렇게 자기가 살아있다고 여기는 범위 안에서 모든 진리와 그 모든 해법을 얻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니고데모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사실은 니고데모에게 고마워해야 하는데,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니 말이다.

(요 3: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요 3:4)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요 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아무튼 죽음이라는 것은 끄집어내지 말고, 살아있는 자기가 어떻게 자기를 더 살려내는지, 오래 살고, 영원히 죽지 않는 이야기를 해달라는 것이다. 그렇게 자칭 인간이라는 자들이 요청할 때, 그들의 지혜로는 인간을 정신과 육체로 본다는 것이다.

◈ 계속해서 수정되는 진리관 !!

여러분의 정신이 맑을 때 어려운 것을 해야하니 지금 하겠는데 말이다(ㅋㅋ). 육체라는 것은 만져지고 느껴지는 것인데, 즉 감각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은 정신과 육체로 되어있다" 라고 한다는 것은, 만지는 것, 느끼는 것, 보는 것 등등, 그렇다는 말이다.

옛날에는 박테리아라는 것이 있는 줄을 몰랐는데, 후크라는 사람이 현미경을 만들기 이전에는 말이다. 렌즈를 다루다가 우연히 크게 보이는 것을 발견했는데, 갈릴레오는 멀리 보이는 것을 망원경을 만들었고 말이다. 그때부터 크게 볼 수 있으니, 물론 곤충 정도는 그냥 볼 수가 있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해서 박테리아를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때부터 약간의 충격이 주어지게 되는데, 왜냐하면 인간의 지혜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들 안에서 진리를 구축했는데, 그런데 그 범위에 들어오지 않는 것들도 있으니, 그러니 그런 것들도 집어넣어서 진리를 새로 구축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수정해야되는 문제가 생겼다는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사람은, 그게 B.C 400년경인데, 지금부터 무려 2500년 전의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는 뭐라도 했는고 하니, 세상의 모든 법칙은 달과 지구 사이에서만 통용되고, 달을 건너서 그 위에서는 정지상태가 된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달 위에 있는 별은 항상 그 자리에 위치해있으니, 별은 움직이지 않으니 말이다. 물론 별은 움직이지만, 항상 질서가 있게 움직이니 그 자리에 있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갈릴레오가 망원경을 발명해서 달 넘어 하늘에 떠있는 별을 살펴보니까, 별들이 인간들이 생각한 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지구는 지구대로, 별은 별대로, 그렇게 각자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고 있더라는 것이다. 그런 것이 밝혀지면서, 그동안 인간들이 알고 있던 진리관이 그만 수정이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인간은 육체와 정신으로, 이 정신을 영혼이라 하는데, 물론 육체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런데 정신 분야는 작아지고 육체 분야는 커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육체가 커지면서 인간은 사물이 되고, 물체가 되고, 물건이 되고, 더 나아가서 시장에서 하나의 상품이 된다는 것이다.

◈ 우리 아버지는 얼마?

인간을 똑똑하다고 보았는데, 그런데 인간이 상품이 되게 되면, 그 상품은 무엇으로 교환이 되는가? 돈으로 교환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의 가치는 무엇인고 하니, 그 사람이 시장에서 얼마인지, 그렇게 돈으로 환산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우리 아버지는 얼마? 우리 엄마는 얼마? 우리 아들은 얼마?" 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렇게 돈으로 환산이 되는데, 그러니 돈 가치가 없으면 핍박을 하고, 돈이 되면 아양을 떨고, 그것을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요령' 이라고 하는데, 이것을 세상 사람들은 '지혜' 라고 한다는 것이다. 요즘은 유식한 말로 '정보' 라고 하는데, 즉 살아가는 요령이라는 말이다. 돈을 벌기 위한 요령, 아무튼 사람은 이렇게 구성요소로 본다는 것이다. 육체는 감각이고 정신은 이성으로 되어있다는 것이다.

◈ 플라톤과 국가 !!

이게 플라톤의 경우에는, 이렇게 침대가 있다고 하면 침대는 각각 모양새가 다르다는 것이다. 그래도 사람들은 그것을 한꺼번에 같은 침대라고 본다는 것이다. 의자가 아닌, 베개가 아닌, 침대라는 말이다. 진짜 침대의 원형은 따로 있지만, 그것은 정신적이고 이성적인 것이고, "침대마다 다르다" 라는 것은 감각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감각을 통해서 정신으로 통합한다" 라고 본다는 말이다.

그러니 실제 순서가 감각적으로 만져보고 정신으로 통합하지만, 사실 따져보면 이미 통합하는 정신이 먼저 있기 때문에, 감각을 자기 부하들로 삼아서 "내가 누구인지 너거들이 알아서 조사해봐라" 라고 해서, 자료를 모으고 해답을 내린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모아서 통합을 한다는 말이다.

◈ 며느리를 하나 보더라도 !!

예를 들어서, 며느리가 될 사람을 보았는데, 평소에는 아들이 나이가 마흔이 다 되어가니 치마만 두르면 허락해주겠다고 했는데, 진짜로 치마만 두른 사람을 데리고 왔다는 것이다(ㅋㅋ). 치마만 둘렀다는 것은 감각인데, 그런데 그 시어머니에게는 "이런 며느리라면 용납한다" 라는 것이 본인도 모르게 자기 안에 장착되어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며느리를 데리고 오니 "부모님은 무엇을 하시지?" 라고 하는데, 그러자 "예, 조그마한 버스회사를 하나 가지고 있습니다" 라고 하니, 그만 점수가 올라간다는 것이다. "그러면 학교는?" 라고 하니, "시간이 남아돌아서 대학원까지 나왔습니다" 라고 하니 또 점수가 올라간다는 말이다. "그러면 어디 저축은?" 라고 하니, "월급을 타서 돈을 쓸데도 없고 해서 아파트 한 채가 있습니다" 라고 하니, 점점 마음에 들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결혼을 하면 어떻게 할 건데?" 라고 하니, "먼저 아이를 낳고는 또 다시 직장생활을 열심히 할겁니다" 라고 하니, 시어머니는 이제 자기 아들이 팔자가 폈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저 여자를 만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나이가 들도록 장가를 보내지 않으셨구나" 라고 하면서, 갑자기 하나님까지 거론한다는 말이다.  

◈ 나라가 살아야 가정도 산다 !!

인간은 이런 구성요소를 가지고, 이런 것을 가지고 인간은 삶의 요령, 정보, 혹은 지혜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지혜가, 특히 여성들이 이런 현상이 많은데, 여자들은 가정만 전문적으로 책임을 지기 때문에, 그 지혜가 가정에 국한된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서 남자들은 바깥 생활을 많이 하기 때문에, 이런 인간의 감각과 정신이 어디까지 이어지는고 하니, 복잡하게 이야기할 것도 없이 결론부터 내리면 국가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라가 살아야 가정도 산다" 라는 것인데, 물론 그것을 새댁들은 모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이가 30대나 40대로 가게 되면, 그러다가 전쟁이라도 벌어지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자기 남편은 좋은 직장에 다닌다고 여겼는데 전쟁이 그만 터지게 되면, 그래서 그만 군대에 징집되어가서 죽고 말았다고 하면, 집에 아이가 둘이나 있는데 말이다. 자기는 졸지에 과부가 되어서 아이를 두 명이나 키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을 느끼겠는가? 자기가 빨래를 잘하고 설거지를 잘하는 것이 지혜의 끝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생을 살아보니, 그저 시부모를 잘 섬기고, 신랑이 출근하면 잘 갔다오라고 하면서 볼에 키스를 해주고, 또 퇴근하면 가방을 받아주면서 키스를 해주고, 그런 18살의 순박한, 아주 감수성이 풍부한 꿈 많은 여고생들, 일기를 써도 볼펜 색깔이 5개나 되는 것을 가지고 올 칼라로 쓰고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든 것이 막상 자기가 30대가 되고 40대가 되어서 직장생활을 해보니, 가정에 얽매이는 것이 삶의 요령과 지혜의 전부가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끝은 무엇인고 하니까, 그게 바로 국가인데, 그것이 바로 수많은 철학자들이 이야기한 것인데, 즉 "나라가 살아야 내가 산다" 라는 것이다.

◈ 국민 여러분, 한 달에 350만을 드릴까요?

여러분 가운데 여기에 이의가 있는 분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나라가 잘 되어야 거기에서 사는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에게까지 복지의 혜택이 돌아간다는 말이다. 이번에 스위스에서 그런 투표를 했다고 하는데, 한 달에 350만원인가 주는 것에 대해서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를 말이다. 스위스라는 나라가 잘 살기는 엄청나게 잘 사는 모양인데, 그런 투표를 다하고 말이다.

그런데 나라가 잘 살지를 못하면 어떻게 되는가? 어쩔 수 없이 그만 자기 나라를 떠나야하는 경우가 생긴다는 것이다. 필리핀이나 캄보디아와 같은 나라를 보라는 말이다. 우리나라의 농촌에 시집을 온다는 것이다. 자기 나라에서 대학까지 졸업하고 말이다. 자기보다도 나이가 무려 20살이나 나이가 많은 신랑을 만나서 사는데, 그것도 얻어맞으면서 말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자기가 살림을 못한다든지, 아니면 아기를 낳지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자기가 태어난 나라에 힘이 없으니 자기가 마치 노예처럼 팔려올 수밖에 없는, 그런 설움을 겪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도 일제시대에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아직도 유관순 누나를 기억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여기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인간의 감각보다도, 즉 살림을 잘하는 것보다도 정신적으로 하나의 국가가 되어야하고, 그런 국가가 되려고 하면, 전체 국민들이 단결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은 정신적으로 국가에 헌신하고 희생하는 자들이 있을 때, 비로소 자기 집안의 자식이나 가족을 먹여 살릴 수가 있다는 것이다.

◈ 군신유의(君臣有義) !!

그렇게 자기 몸 하나를 바쳐서 헌신하게 되면, 그 헌신의 혜택으로 온 가족이 잘 살아갈 수 있다는 국가관이 형성되는데, 그것은 비단 플라톤만이 그러한 주장을 한 것이 아니라, 중국의 유명한 사상가들도 마찬가지인데, 그들이 제일 먼저 주장한 것이 국가와 백성이 관계인데, 즉 '군신유의(君臣有義)' 라는 것이다.

왕이 예뻐서 섬기는 것이 아니라, 왕이 국가의 대표자이기 때문에 그 왕에게 충성을 다할 때, 그것은 왕이 좋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런 대표자로서의 구심점이 있어줘야 말썽의 소지가 해소된다는 것이다. 만약에 치안이 불안해지면 어떻게 되는가? 자기가 아무리 돈을 벌어놔도, 강도가 와서는 집에 불을 내고 가족을 해치고 빼앗아 가버리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국가가 치안을 담당하려면 그만큼 국민이 세금을 내줘야하고, 모든 것이 안정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게 안정감이 있도록 권위가 있게 잡아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잡아주는 사람이 든든할 때, 그것을 이데올로기, 혹은 헤게모니라고 하는데, 그렇게 이데올로기적으로 하나가 될 때 나라는 안정이 된다는 것이다. 북한의 김정은이 왜 그렇게 독재를 하는고 하니, 그것을 전제주의 국가라고 하는데, 전제주의 국가든 간에 아무튼 국가는 최종적이라는 것이다.

중국의 경우에는 종교가 국가 밑에 있는데, 신이 국가 밑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중국에서 종교를 허락하는 것은 신을 인정해서 그런 게 아니라, 국가 인민들의 정신을 돌보기 위해서 허락하는 것이지, 그러니 종교마저도 국가의 관리체제 아래에 있다는 것이다. 공산당이 전부 다 관리를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결국 국가가 최종적이니, 국가가 신이고, 국가가 우상이라는 말이다.

◈ 예수님의 지혜가 무엇인가?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해야하는고 하니, 지금 우리가 '인자'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 인자가 예수님인데 말이다. 즉 "예수님의 지혜가 무엇인가?" 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제가 이야기한 그 인간의 지혜에 대해서는 우리가 충분히 납득이 되고, 평소에도 그렇게 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다시 이야기를 하겠는데, 인간은 자기가 사람이라고 여기는데, 그런데 진짜 사람이 인자가 오기 이전까지는 그 한계를 몰랐다는 것이다. 어디가 막혀있는지를 몰랐다는 말이다. 방금 이야기를 했지만 다 잊어버렸으니 다시 하겠는데, 인간은 "무엇을 하는가?" 라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인간은 정신과 육체로 되어있고, 그래서 육체는 죽어도 정신은 살아남아서 하늘나라에 가면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 우리 인간의 아이디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하늘나라는 없다는 말이다.

◈ 오잉, 하나님께서 친히 이 땅에 오셨어요?

그러면 천국은 무엇인고 하니, 인자의 나라이고 예수님의 나라인데, 인간들이 그리워하던 천국은 처음부터 없었다는 것이다. 신과 연합하고 결합한다고 하는데, 하지만 신이 누구인지 만나봐야 결합을 하든지 말든지 하지 말이다. 그래서 인간들이 자꾸만 신을 상상만 하는데, 즉 "나를 만드신 분이 계실 건데, 그 자리에 내가 죽어서 합류하면 되지" 라고 말이다.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인간이 언제 하나님을 본 적이 있습니까?" 라고 하면, "하나님을 우리가 어떻게 보겠습니까? 언젠가 만나겠지요" 라고 나오는데,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친히 이 땅에 오셨습니다" 라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인간들은 "오잉, 고뤠?" 라고 하는데,

제가 신학교를 다니면서 제일 충격을 받은 것이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께서 친히 이 땅에 오신 적이 있다는 것인데, 대통령이 여기 지묘동에 온 적이 있다는 말이다. 실제로 노태우 대통령이 온 적이 있었는데, 그리고 제가 왕산(?)에서 산책을 하다가 실제로 만났다는 것이다. 경호원 3명을 대동하고 있었는데, 물론 그냥 스치고 지나왔지만 말이다.

노태우 대통령도 그렇게 만나면, "여기가 보통 동네가 아니구나. 왕이 사는 진짜 왕산이구나" 라고 하게 되는데,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땅을 방문했다고 하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방문하셨다고 하는 순간, 그 하나님을 자기가 알아보지 못한다든지, 그 오신 하나님을 인정하지 못하게 된다면, 그러면 자기의 팔자와 운명이 어떻게 끝이 날지, 그것은 그야말로 아찔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 복음은, 이 땅에 오신 하나님으로부터 !!

그러니 복음은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고 하는, 그것을 기준으로 해서 시작한다는 말이다. 그러면 왜 오셨는가? 사람에게 맞아 죽으려고 오셨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악하기 때문에, 죄인이기 때문에 말이다. 그러니 매우 간단한 이야기인데, 복음이 그리 복잡하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보통 교회에서는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 출발점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이다. 즉 "나는 사람이니 이 땅에서 오래 살아야하고, 이왕 살아갈 것 복을 받으면서 살아야하고, 그런 복을 받기 위해서 내가 어떤 정신 활동을 해야하는가?" 라는, 그러한 관점에서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거기에 필요한 것을 끄집어내면 그것이 요령이고 또한 지혜라는 말이다.

그런데 진짜 복음은 무엇인고 하니, "내가 사람이고" 라는 것이 아니라, 진짜 인자는 죽었다가 살아남으로서, 하나님이 유일하게 인정하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땅에 오신 하나님만이 진짜 사람이고, 물론 나머지는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 진짜 사람에게 합류하려고 하면, 육으로 난 것은 육이기 때문에 안 되고,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육으로 죽고 영으로 다시 말이다. 그렇게 해야 인자의 나라에, 즉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나라에 합류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꾸어야 한다는 말이다. 감각과 정신, 혹은 육체와 영혼, 그런 식으로 자기를 구성하는 것, 그렇게 자기로부터 출발하는 것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을 누가 바꾸는가? 물론 목사는 전혀 아니고, 예수님께서 그렇게 바꾸어주신다는 말이다. 그러면 어떻게 바꾸는고 하니, 그것이 교재 20페이지에 보면 나온다는 것이다. 거기에 보면 그 예가 몇 가지 나오는데 말이다.

일단 교재 20페이지를 보자.

** "주여, 내 자식의 시험성적이 잘 나오게 하옵소서" 라는 마음을 가지고 교회에 나왔는데, 주님께서 설교하시기를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를 포기하라" 라고 나온다면, 결국 그 교회에는 다니지 못하게 되는 겁니다. 

(요일 2: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 무엇이 진짜 지혜인가?

여기에 두 가지의 지혜가 나오는데, 자기 자식의 시험성적이 잘 나오는 것과, 그리고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를 포기하라는 것인데, 이 둘 중에서 어느 것이 진짜 지혜인가? 성경말씀이 진짜 지혜라는 것이다. 그렇게 바꾸어져야 하는데, 바꾸어지지 않으면 천국에 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바꾸어주신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런 복음을 전하는 목사에게 욕하고 달려들면 정말 곤란하다는 것이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지혜가 무엇인지 알지만, 하지만 그것을 하늘의 지혜로 바꾸어주세요" 라고 했는데, 그런데 그만 삐쳐서 등을 돌리고 만다면, "너무 사람을 부정적으로 보십니다. 저는 그런 극단적인 교회에는 안 나가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다시 말해서, 바꾸어야 하는데 바꾸지 않겠다고 하면서 버틴다는 것이다. "저는 사나 죽으나 앞으로 계속해서 이런 자세로 밀고 나가겠습니다" 라는 것인데, 도대체 그런 고집을 누가 꺾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마귀가 꽉 쥐고 있는 고집인데 말이다.

◈ 예수님, 저의 재산을 좀 찾아주세요 ??

그리고 누가복음 12장에 보면, 형에게 유산을 모두 빼앗긴 동생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하소연을 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말이다. 그게 누가복음 12장이 맞지 싶은데, 맞이요? 요즘은 일일이 찾아서 확인을 해야하는데, 머리 속에 있는 것은 이제 나이가 들어서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ㅋㅋ). 동생이 예수님에게 하는 말이, 형의 몫까지 달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 몫을 찾아달라는 것이다.

(눅 12:13)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눅 12:14)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눅 12:15)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그런데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다음과 같은데, 즉 "예수님, 저는 인간이 맞지요? 인간이기 때문에 살고 싶어요. 살기 위해서 돈이 필요한데, 그런데 그 돈을 형이 모두 가지고 갔어요. 형이 자기만 살려고 말이죠. 그러니 형은 참 나빠요. 하지만 저는 착하죠? 그런데 예수님도 착하잖아요. 그러니 착한 저의 편을 들어주셔서, 저의 재산을 돌려주세요" 라는 마음가짐으로 예수님을 찾아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오늘날 교인들이 교회에 나오는 심정과 무엇이 다르냐는 말이다. "저는 사람이거든요. 더 살고 싶어요. 그런데 몸아 아파요. 낫게 해주세요" 라고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냐는 것이다.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자기가 살아가는 지혜를 얻겠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찾아온 것이란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을 누구를 야단치는가? 형이 아니라 오히려 동생을 나무라신다는 것이다. "누가 나를 너희들의 재판관으로 삼았는가?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쳐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아니 형의 것이 아니라 자기 것을 달라고 하는데, 그것이 무슨 탐심이냐는 말이다. 이 세상의 지혜로서는 그런 결론이 나올 수가 없다는 것이다. 자기 몫을 자기가 챙기겠다는 것이 어떻게 탐심이냐는 말이다.

◈ 육신으로 지혜를 담는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돼 !!

왜 그런가? 우리의 지혜로는 알 수 없는데, 그런데 골로새서 3장에서 뭐라고 하는가? 땅의 것을 사랑하면, 그것이 곧 탐심이고 우상숭배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은 모두가 이 세상을 쫓아난 것이기에 말이다.

(골 3: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우리에게 지혜가 없고 지혜를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의 육신으로 그런 지혜를 담는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터무니없고, 부담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거지가 되라는 말인가요?" 라는 것과 같은 의미로 들리는데, 그러면 주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너는 처음부터 거지였어"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제가 아파서 죽어야 속이 시원하겠습니까?" 라고 하면, "너는 진작 죽었어야해. 니가 이만큼 살아온 것도 내가 살렸기 때문이야" 라고 하신다는 말이다.

◈ 야곱의 경우에 !!

어제 오후시간에 그런 설교를 했는데, 야곱이 하나님의 사자를 만났을 때 깨달은 것이 무엇인고 하니, "내가 내 인생을 공들여서 사는 것이 아니구나" 라는 것인데, 즉 주님께서 살려주실 때만 사는 것이지, 자기가 힘들여서 살아가는 것은 생명 축에 들지도 않는 것이란 말이다. 바로 그것을 야곱은 얍복강가에서 깨달았다는 것이다. 
  
천사를 만나서 그런 경험을 하게 되면 정말이지 대끼리인데, 이것은 이 세상에서 로또에 당첨이 되는 것과도 비교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야말로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것이다. 진짜 사람이 된 것인데, 인자가 된 것이라는 말이다. 야곱의 경우에 말이다.

우리 인간은 죽을 때 비로소 "내가 죽어 마땅한 인간이구나" 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인데, "아하, 내가 죽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이구나" 라는 것을 말이다. 그것을 그야말로 커다란 감격으로 고마워하면서 받아들이는 순간은, 하나님께서 직접 우리 자신을 죽이는 순간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우리가 살고자 하는 이 고질병을 고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자기가 똑똑하다고 하는 모든 철학자들이나 과학자들의 경우에, "일단 살고 보자"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런 경우는, 진짜 인자가 되시는 분의 죽었다가 살아난 그 기능과는 전혀 노는 동네가 다르다는 것이다. 아무리 지혜를 얻고 싶어도 안 된다는 말이다.

◈ 부자가 왜 어리석은 자인가?

그래서 예수님께서 비유로서 어떤 부자에 관한 이야기를 하시는데, 그 부자가 장사가 매우 잘 되어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눅 12:16)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눅 12:17)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눅 12:18)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눅 12: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눅 12: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눅 12: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주식이 대박이 난다든지 하늘에서 돈벼락을 맞으면 흔히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 즉 "오늘은 내가 기마이를 쓴다. 내가 자랑할 것은 돈이 많은 것밖에 없다" 라는 식으로 헛세를 부린다는 말이다. 이것은 그만큼 돈이 있어서 헛세를 부리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 돈으로 헛세를 부리고 싶은 마음이 그만큼 잠재가 되어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돈이 많은 순간부터 그런 게 아니라, 이미 7살이나 10살 때부터 그런 마음이 있었다는 것이다. "내가 부자 친구의 코를 납작하게 할만큼 사회에 나가서 돈을 많이 벌어서, 너희들을 다 내 앞에서 무릎을 꿇게 할거야" 라고 말이다. 그런 것이 이미 다 잠재가 되어있었는데, 그것이 잘 되지 않으면 돈이 많은 여자를 꼬드기든지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남자나 여자나 다 마찬가지인데 말이다.

◈ 나는 왕이로소이다 !!

그것을 인간들은 지혜라고 이야기하는데, 바로 그 점을 우리가 잠언을 공부하기 이전에 이렇게 살펴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사회에서는 지혜라고 통용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한 지혜 중에서 최고가 무엇인고 하니, 국가에서 왕이 되는 지혜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국가라는 것이 인간이 육신이라고 우기면서 도달하는 마지막 지점이니 말이다. 그 국가에 헌신하고 충성함으로서 자기 집안도 잘 된다는 것이다. 안중근 의사가 왜 이토오 히로부미를 총으로 저격했는가? 자기 한 몸이 잘 되기 위함인가? 유관순은 왜 태극기를 흔들었는가? 왜 그런가?

그것은 바로 국가가 잘될 때 다같이 잘살 수가 있으니, 그러니 국가라는 커다란 명분을 위해서 자기 한 몸을 희생하는 것이 조금도 아깝지 않다고 하는 것, 그것이 곧 남아로서 할 일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유관순도 남아라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한다고 국가가 사는 것도 아니지만 말이다.  

◈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 ??

공직자에게 요구하는 것이 바로 그러한 희생정신인데, 국민을 먼저 생각하는 말이다. 영화 '변호사'를 보면 송강호가 뭐라고 하는가? "주권은 국민에게 있습니다" 라고 하는데, 영화 끝 장면에 그런 것이 나오는데, 정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국민에게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 말도 틀렸는데, 왜냐하면 민주주의는 대의정치인데, 그냥 민주주의가 아니라 의회 민주주의이고 국회 민주주의라는 것이다. 국회는 국민을 대표하고 대의하기 때문에, 이미 권력이 국회로 넘어가서, 국회에서 법을 발의하면 그 발의된 법에 의해서 삼권이 다 움직이기 때문에, 사실상 국민에게 권력은 없다는 것이다. 물론 잠시 4년마다 주권이 돌아오지만, 평소에는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남자가 되어서 국회의원이 되고 싶고, 정권을 쥐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 지혜의 마지막 모습은 최고의 자리인데, 이것이 그냥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강의와 관련이 되어있기에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 다음의 예를 들어보면, 그것도 여기 교재에 나오는데 말이다.

교재 21페이지를 살펴보자.

** 또 "가정에 불화가 생겼습니다. 도와주세요" 라고 하는데, 예수님이 "아내 있는 자는 아내 없는 자 같이 살라. 때가 마지막이라" 라고 하신다면, 앞으로 어떤 기도를 감히 예수님 앞에 자신 있게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고전 7:29)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고전 7:30)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고전 7:31)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

◈ 나는 아내가 있어도 없어 ??

우리가 이 말을 얼른 듣게 되면, 남편이 바람을 피우는 것을 조장하는 듯한 분위기의 문장인데, "당신이 뭔데 내가 바람을 피우는 것에 대해서 잔소리를 하노? 성경말씀도 모르나? 아내가 있는 자는 없는 자 같이 하라고 했는데, 그것도 몰라? 너는 나에게 없는 존재야" 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 말씀은 그런 의미가 아니라, 여기 31절에 보면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 라고 하는데, 즉 잠시 잠깐 만났다가 헤어지는 것이 부부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지혜인데, 아내에게 너무 빠지는 것도 문제이고, 남편에 대해서 빠지는 것도 문제라는 말이다. 그것이 인간이 인자와 다른 점인데, 즉 인자가 주신 지혜와 인간이 스스로 행복을 추구하는 지혜와는 이렇게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강의한 것을 요약한 것이 교재 28페이지에 보면 나오는데, 21페이지를 하다가 갑자기 28페이지로 넘어가니까 조금은 어리둥절할지 몰라도, 그 중간에 나오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요셉의 꿈 이야기라서 건너뛰었다는 것이다.

일단 교재 28페이지를 보자.

** "아, 성공을 하려면 일곱 번을 참아야 하는구나" 라는 식입니다. 혹은 "성공을 하려면 하나님께 다 맡겨야 하는구나" 라는 식입니다. 항상 앞에는 가 따내려는 것을 염두에 두고서, 뒤에 지혜로 힘을 보태려고 합니다. 

◈ 앞에 항상 '나' 라는 것이 자리잡고 있기에 !!

"아, 성공을 하려면 일곱 번을 참아야 하는구나" 라고, 혹은 "성공을 하려면 하나님께 다 맡겨야 하는구나" 라고 나오는데, 왜 이렇게 나오는고 하니, 그것이 잠언에 보면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이 왜 문제인고 하니, 그 앞에는 항상 '나' 라는 것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성경이 지혜인 줄 알면서도 지혜 속에 들어갈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말이다.

(잠 24:16)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
(잠 16:3)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

그래서 강의 처음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이야기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신약에서 주님께서 바꾸어주시는데, 그게 무엇인고 하니, 그 위치를 바꾸어주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위치를 바꾸려고 하면, 우리 자신이 말씀에 대해서 노리고 있는 것을 치고 분리를 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제 아내가 바람이 났어요" 라고 하면, "아내가 있는 자는 없는 자 같이 하라" 라고 나오고, "형님이 저의 재산을 다 가지고 갔어요" 라고 하면, "탐심이 가득한 자야, 생명은 돈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 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리고 "제 아이의 성적이 오르지 않습니다" 라고 하면, "이 세상에 대한 욕심은 탐심이다"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 '방향성' 때문에 !!

그러니 이것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떤 요령을 가지고 있어야 잘 사는 것이 아니고, 그런 지혜를 가지고 있는 우리 자신을 공박하고자 하는 게 참된 지혜라는 말이다. 그러면 결론은 무엇인고 하니, 지혜는 그냥 정보를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공격하는 속성과 기능으로서 작용하는 것이 지혜라는 말이다. 그런 논리가 성립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를 공격할 때 어떻게 하는가? 행동을 똑바로 하라고 야단을 치는가? 그것이 아니라, "인자는 와서 죽으려고 하는데 너희는 살려고 한다" 라는 것인데, 따라서 모든 해답은 무엇인고 하니, '방향성'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인간은 자꾸만 살려는 쪽으로 가려고 하고, 예수님은 자꾸만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죽으려고 하신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누구에게 시험을 받았는가? 마귀에게 받았는데, 이 마귀는 예수님과 그 방향이 반대라는 것이다. "이 양반아, 떡을 먹으면 살 수 있어" 라고,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떡을 먹으면 산다는 것을 누가 모르는가? 하지만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방향성이, 그게 그쪽 방향이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 손에 손을 잡고 ♪

이렇게 성령께서 일부러 예수님에게 마귀를 붙여준 것은, 교회에 찾아오는 모든 인간들이 마귀와 동일하게 박자를 맞추어서 거대한 행진을 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함인데, 지옥으로, 지옥으로, 그렇게 행진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보람찬 하루 일을 다 마치고서 ♬" 라고 하면서 지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이다. 살려고, 살려고, 그 거대한 길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손에 손을 잡고 모두가 다같이 지옥으로 가고 있다는 말이다.  

그때 우리의 어깨를 치는 분이 계시는데, 그래서 우리는 "아니, 누구십니까?" 라고 하면, "얼른 나와. 잡은 손을 놓고 나오란 말이야" 라고 하시면서 빼주시는 분이 바로 주님이라는 것이다.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는 자는 산다" 라고 이승만 대통령이 이야기했는데, 그 비슷한 이야기가 성경에 나오는데, 즉 "자기를 미워하는 자는 살고, 자기를 사랑하는 자는 있는 것도 잃어버린다" 라고 말이다(??).

(눅 14:11)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 ?

그러자 유대인들이 뭐라고 하는가? "당신은 도대체 누구야?" 라고 나오는데,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 "우리를 왜 이렇게 심리적으로 압박을 가하는가? 그런 당신은 도대체 누구인가? 당신은 어디서 왔는가? 다윗인가? 베들레헴인가? 예루살렘인가? 아니면 나사렛 사람인가?" 라는 것이다. 그러자 예수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나는 아버지에게로부터 왔다" 라고 하시는데, 그게 요한복음 7장과 8장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서로 대화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요 8:52) 유대인들이 가로되 지금 네가 귀신들린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네 말은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맛보지 아니하리라 하니
(요 8:53) 너는 이미 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크냐 또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
(요 8:5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내게 영광을 돌리면 내 영광이 아무 것도 아니어니와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이는 내 아버지시니 곧 너희가 너희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이시라

예수님은 자신이 어디에서 왔다고 하시는가? "너희들이 믿고 있는 아버지께로부터 왔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 18절에 보면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라고 되어있다는 것이다.

(요 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그래서 성경말씀을 그냥 보지 말고, 자기 자신이 부정을 당하면서 보면 성경말씀이 보인다는 것이다. 그것을 영으로 본다고 하는데, 성경은 영으로 봐야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문자를 통해서 정보를 빼내려고 하면, 자기가 살기 위해서 말이다. 그렇게 본다면 성경을 천독을 하든 만독을 하든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사가 교회부흥을 시키기 위해서 아무리 성경을 봐도, 전혀 성경말씀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목사 본인이 "나는 죽어야 돼" 라고 하는 마음으로, 즉 "나는 이것을 하다가 굶어죽을 거야" 라고 하는 마음가짐이 아니라면 성경말씀을 전혀 해석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강단에서 아무리 외쳐도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서로 박자를 맞추어서 목사와 교인들이 다같이 지옥으로 가는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 성령께서는, 과거 책을 지금의 생명말씀으로 매일같이 반복을 !!

의존교회의 임창길 성도님이 글을 하나 올렸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천주교와 기독교의 차이점' 이라는 글인데 말이다. 그게 2010년도에 제가 쓴 글인데, 제가 다시 읽어보니 차이점이 잘 나와있는데 말이다. 그동안 제가 그 글을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그런데 다시 보니 새롭게 느껴진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뭔가 "저것이 어떻게 나의 삶에 보탬이 되겠는가? 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은 항상 제자리 뛰기를 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에 알았던 것을 다시 돌아보게 되면 새롭게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성경은 뭔가 더 더해진 것이 없는데, 즉 과거의 책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성령께서는 어떻게 하시는가? 과거의 책을 지금의 생명말씀으로 매일같이 반복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번에 분명히 보았던 구절이지만, 하지만 이번에 다시 보면 또 새롭게 깨닫게 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우리 자신을 성령께서 다루시고, 또한 성경말씀도 성령께서 다루시니, 그렇게 양쪽을 모두 다루시는 상태에서 만남을 주선하니, 거기에서 깊이를 더욱 더 새롭게 발견하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 다시, 요셉 이야기를 !!

일단 여기서 교재 38페이지에서 빠진 부분을 설명해드리도록 하겠는데, 그것이 바로 요셉 이야기인데 말이다. 요셉은 국가적으로 보면 최고 고위층에 올랐는데, 물론 위에는 바로 왕이 있지만 그는 허수아비이고, 자기가 최고 고위층이라는 것이다. 모든 국가의 정책은 요셉이 제안하고 결정하면 다 수용하게 되어있다는 말이다.

그러면 이렇게 요셉은 애굽이라는 나라에서 최고이니, 요셉은 하나의 국가이고, 즉 국가의 대표격이고, 최고의 권력자라는 말이다. 아까 인간은 육체와 정신으로 되어있다고 했는데, 육체는 감각에서 나오고 정신은 이성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면 감각과 이성으로 되어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을 통해서 자기가 살고 또 자기 가족이 사는데, 그 범위를 끝까지 밀어 부치게 되면 결국은 국가가 잘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국가가 곧 신이고, 우상이고, 절대 단체가 된다는 말이다. 인간은 국가가 없이는 못 산다는 것이다. 국가가 치안을 유지시켜주어야, 우리가 강도로부터 재산과 생명을 보호받을 수 있다는 말이다.

◈ 현실이 아닌, '유일한 현실' !!

사람들은 이것을 두고 '현실' 이라고 하는데, 그런데 문제는 이것을 두고 사람들은 그냥 현실이 아니라 '유일한 현실' 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즉 다른 현실은 없다는 것이다.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은, '국가 안에 있는 나', 그것으로 끝이라는 말이다. 이것이 인간의 유일한 현실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현실 속에 인자가 들어왔는데, 그런 인자이신 예수님이 오시기 이전에 앞당겨서 온 자가 누구인고 하니까, 그게 바로 요셉이라고 보면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요셉은 언약에 속한 인물이니 말이다. 예수님은 새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오셨는데, 그 새언약 이전의 언약이 바로 언약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언약 속에 누가 들어있는고 하니까, 하나님의 이름이 들어있는데, 하나님의 이름은 주의 기능이 들어있다고 보면 된다는 것이다. 즉 장차 오실 분이 어떤 분인지, 그것을 현실이라는 배경을 깔아놓고, 그것이 무대인데 말이다. 그렇게 인간이 유일한 현실이라고 여기는 무대 위해서 진짜 살아계신 하나님은 어떤 면면을 보이는지, 어떤 모양새를 보이면서 일을 하시느냐는 말이다. 성경말씀이 바로 그 이야기라는 것이다. 

◈ 인간 속에 섞여버린 하나님을 과연 알아볼 것인가?

성경은 단순한 이스라엘의 역사 이야기가 아닌데, 인간 속에 섞여버린 하나님이 움직일 때, "사람들이 과연 그 하나님을 알아볼 것인가? 그렇지 않은가?" 라는 것인데, 결론은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사람은 알아보게 되어있는데, 그런 계시를 받은 자들이 여럿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요셉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요셉은 아무런 연고나 빽도 없이, 물론 학식도 없이 그냥 그 당시 최고의 나라에, 즉 인간으로 생각할 수 있는 마지막 정점에 있는 애굽 나라에서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누가 그렇게 했는가? 그것은 바로 요셉이 꾸었던 꿈, 즉 하나님의 계시였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기존의 애굽나라는 허수아비가 되는데, 인간의 막다른 현실, 즉 최고라고 여겼던 그 국가, 그 국가가 곧 신이고 우상인데, 바로 그러한 현실보다 더욱 더 큰 현실이 지금의 현실을 지배하고 있었다는 사실, 바로 그것이란 말이다.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뭐라고 하시는가? 예수님의 기도 가운데 보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습니다" 라고 하시는데, 그러면 제자들은 어디에 속했다는 말인가? 바로 주의 나라에 속했다는 것이다. 주의 나라에 속했기 때문에, 이 세상 나라 사람들이 감당하지 못하는, 그런 요소가 성령을 통해서 성도에게 주어진다는 말이다.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어떤 요소가 성령을 받은 우리들 속에 있다는 것이다. 분명히 있다는 말이다.

(요 17:13)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저희로 내 기쁨을 저희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 17:14)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

◈ 요셉에게 응축되어 들어있는 것은?

아까 "내가 언젠가는 이 나라에서 최고가 되겠다" 라는 것이 인간 속에 잠재되어있다고 했는데, 그런데 요셉은 그런 것이 있었는가? 없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최고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요셉 속에 잠재되어있던 것은 무엇인가? 눈에 보이는 현실에서 최고가 아니라, 어느 나라인가? 진짜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사는 것, 그것이 바로 진짜로 성령을 통해서 잠재되어있는 하나님 계시의 완성태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것이 요셉에게 응축되어서 들어있는데, 그것을 로마서 8장에 보면,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라고 했는데, 그것을 누가 바라겠느냐는 것이다. 물론 성령을 받은 '우리끼리' 그렇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가운데서 요셉이 느끼는 것은 무엇이겠는가?

(롬 8: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그것이 교재에 나오는데, 29페이지를 보자.

** 즉 잠언의 어떤 구절이나 나로 하여금 성공자로 만들어낼 수 있을까를 염두에 두고 잠언을 대하게 됩니다. 이것은 바로 '불가능'의 경로가 아니라 '가능성'의 통로입니다.

아무튼 인간이 가장 큰 희망으로 여겼던 국가에서, 그것도 그 국가에서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고 하면, 그것은 평소에 인간들이 기대했던 것인지 아닌지, 거기에 관한 문제인데 말이다. 그것을 여기 교재에서는, 인간들이 대하는 것은 불가능성이 아니라 가능성의 통로라고 하고 있다는 것이다.

◈ 가능성이 아닌, '불가능성'의 통로 !!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 땅에 지혜를 펼치는 것에 대해서, 현재 인간들은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러니 요셉은 통해서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은, 그것은 불가능, 불가능, 불가능성의 연속이라는 것이다. 매일같이 말이다. 예를 들어서, "내가 오늘도 아침에 일어나서 밥을 먹고 지냈다" 라고 하면, 그것을 우리는 가능성으로 보지 말고 불가능성으로 보자는 것이다.

제가 주일 오전에 강당에 서게 되면, 그 이전에 항상 느끼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누가 이 복음을 들으려고 오겠는가?" 라는 것인데, 그런데 놀랍게도 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불가능성이고, 기적이라는 것이다. "우리교회 교인들이 다른 곳에 갈 곳이 어디에 있겠는가? 당연히 여기에 와야지" 라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리고 제 자신에 강단에서 설교를 한다는 것, 목 감기에 걸리지 않고 그래도 설교를 할 수 있다는 것, 그런 것이 전부다 다 처음부터 집어넣어진 불가능성이라는 말이다. 창세 전에 예정된 것도 불가능성의 시작이고 말이다. 제가 1953년도에 태어난 것도 불가능성의 연결이고 말이다. 물론 그러한 연결점은 우리가 한 것이 아니라, 불가능성을 주신 하나님에 의해서 연결, 연결, 연결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연결고리가 만들어지게 되었다고 보자는 말이다.

◈ 존재가 아니라, '사건 덩어리' !!

그것을 가지고 '사건' 이라고 하는데, 이 사건은 무엇의 반대말인고 하니, 존재의 반대말이라는 것이다. 즉 "나는 존재가 아니라, 나는 사건 덩어리다" 라고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 유명한 '그대 이름은 바람, 바람, 바람' 이라는 노래가 있는데, 그렇게 우리는 바람과 같은 존재라는 말이다.

그것을 야고보서 4장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인간은 안개와 같은 존재라고 한다는 것이다. 언제 없어질지, 언제까지 살지, 그것은 시어머니도 모르고 며느리도 모른다는 것이다. 물론 안개는 아침이 되면 사라지지만 말이다. 아무튼 사라진다는 것은 분명하고 말이다.

(약 4: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 고집멸도(苦集滅道) ??

그런데 그러한 안개가 아니라 존재라고 여기니 자꾸만 집착을 하게 되는데, 그것을 불교에서는 '고집멸도(苦集滅道)' 라고 하는데, 언제가 이야기한 적이 있지 싶은데 말이다. 즉 고생은 집착에서 나왔고, 그런 집착을 없애려고 하면 자아를 멸해야 하는데, 그 자아를 멸하는 방법이 곧 팔정도라는 것이다. 이 팔정도는,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보고, 바르게 일하고 등등, 그렇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런 것은 전혀 인자의 지혜가 아닌데, 살고자 하는 인간이 스스로 자기가 자기에게 작업을 건다는 말이다. 물에 빠진 사람이 자기가 자기 운동화 끈을 잡아당긴다고 해서 살 수 있는가? 물에 빠져가고 있으면서 말이다. 그야말로 말이 안 되는 소리인데, 불교가 그렇다는 말이다.

30대에 행정고시에 합격하고도 중이 되겠다는 젊은이들이 있는데, 이 세상에 환멸을 느끼고 말이다. 그리고 여승들을 보라는 것이다. 아이까지 낳고 남편에서 버림을 받아서 중이 되겠다고 하는데, 하지만 그런 것이 다 자기 운동화 끈을 잡아당기는 행태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한다고 해서 안 된다는 것을 자기도 알지만, 그런데 왜 불교가 융성하는가? 그래서 업종을 바꾸는데, 점을 치는 것으로 말이다. 사주팔자를 보고 말이다.

◈ 안 되는 줄 알면서도 !!

여기 팔공산의 갓바위를 보라는 말이다. 사실 이런 갓바위와 불교정신은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어제 설교를 하면서 월경스님 이야기를 했는데, 자기 소원이 이루려는 기도와 같은 것은, 오히려 불교에서 없애야 되는 고집멸도의 그 '멸'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렇게 해서는 장사가 안 되는데,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자기를 복을 받을 수 있는지, 그것만 바라고 있기 때문에, 불교가 거기에 맞장구를 쳐준 것이란 말이다. 고객은 왕이니 말이다. 불교도 거기에 해답이 없다는 것을 아는데, 그래서 그냥 한번 쑤셔보는 식으로 머리를 빡빡 밀어보았다는 것이다. 어디 장사를 한 두 번 하는 것도 아니고, 자기들도 이미 다 알고 있다는 것이다. 해답이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역시 불교신자들인데, 개혁주의 신학을 한 마디로 말하면, "누가 알겠노? 갈 때까지 가보자" 라는 것이다. 어디 갈 때까지 가보면 되는가? 늙어죽는데 말이다. 성령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다 이루었다' 라는 것이 없는데, 그냥 착한 일을 꾸역꾸역 하면서 도를 닦는 것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성화라는 말이다. 물론 그렇게 도를 닦는 과정에서 자기 잘난 척을 하는데, "나는 이만큼 도를 닦았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 불가능성을 무서워하는 인간들 !!

그들은 불가능성을 무서워하는데, 왜냐하면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성령을 받지 않았기에 말이다. 아무리 믿으려고 해도 믿어지지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십자가를 믿는 대신에, 자기가 착한 일을 해서 복을 받는지 받지 않는지, 그렇게 해서 복이 오는 것을 더 믿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착한 일을 했을 때 복이 온다" 라는 것은 가능하다고 보기에 말이다.

그래서 "착한 일을 하면 복이 온다. 기도하면 복이 온다" 라고 하면서 성경말씀을 찾아보려고 하는데, 하지만 그런 사람은 십자가는 구경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오히려 십자가가 자기 죄를 사해준다는 것이 믿어지는 것이 미친놈이라는 것이다. 사실 그들의 말이 맞는데, 그것이 믿어지는 것이 또라이고 정신이 어떻게 된 놈이라는 말이다.

자기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심지어 사람을 때려죽여도 십자가의 피가 자기 죄를 용서해준다는 것을 믿는 것이 미친놈이라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 옆에 달린 강도가 미친놈인데, 평소에 그렇게 악한 일을 해놓고, 지금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믿어서 천국에 가려고 하는 놈이니 말이다.

◈ 주여, 왜 저를 미친놈이 되게 했습니까 !!

그래서 진짜로 성령을 받은 사람은 다음과 같이 외쳐야하는데, 즉 "주여, 왜 저를 미친놈이 되게 했습니까?" 라고 말이다. 그런 고백이 나와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즐겁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그것이 있다고 해서 무조건 '아멘' 이라고 할 것이 아니라, 그리고 그게 전혀 남의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처녀가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 어디 말이 되는가? 그러니 마리아가 얼마나 힘이 들었겠느냐는 것이다. 우리 같으면 당장에 산부인과에 같지 싶은데 말이다. 처녀의 몸으로서, 그것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이냐는 것이다. 벌써 남자친구로부터 문자로 통보가 도착했는데, "이제 그만 헤어지자. 그동안 즐거웠다" 라고 말이다. 그야말로 인생이 꼬이고 꼬였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러한 것이 전혀 불가능한데, 그런데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믿습니다' 라고 함부로 말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아무리 곱씹어서 생각해봐도, 믿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자기를 완전히 무시하는 처사라는 말이다.

◈ 십자가가 누구의 아이디어인가?

하지만 그렇게 무시를 당하라는 것이다. 깡그리 무시를 당하는 말이다. 왜냐하면, 오직 십자가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약속이니 말이다. 어린양의 피로서 페인트칠을 하면 죽음의 사자가 "그래, 봐줄게" 라고 하면서 그냥 넘어가 준다는 것이다. 이것이 누가 만든 아이디어이냐는 말이다.

소크라테스인가? 공자인가? 아니면 부처에게 그런 아이디어가 있는가?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면 용서해준다는 것이 말이다. 그러한 아이디어가 도대체 어디에서 나왔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장차 오실 예수님을 미리 앞당겨서 내다보면서 주신 약속이란 말이다.

여기 교재에 보면, "잠언의 어떤 구절이나 나로 하여금 성공자로 만들어낼 수 있을까를 염두에 두고 잠언을 대하게 됩니다. 이것은 바로 '불가능'의 경로가 아니라 '가능성'의 통로입니다' 라고 되어있는데, 이것이 바로 인간들이 하는 짓거리라는 것이다. '나' 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즉 자기가 살기 위해서 잠언을 보고 성경을 본다는 것이다. 그런 쪽으로 나오니 성경해석이 전부다 반대로 된다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이런 정신으로 잠언 1장부터 훑어 들어가게 되면, 그에게 선별을 당한 구절들의 집합으로 말미암아서 그 인간 속에 음흉한 괴물이 들어있음이 폭로됩니다.

여기 '선별을 당한 구절들의 집합' 이란 표현이 나오는데, 그것이 뭔고 하니, 인간들이 잠언을 보면서 자기에게 편리한 것만을 골라서 본다는 것이다. 잠언 3장 30절에 나오는, "사람이 네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였거든" 라는 구절들은 빼버리고 말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악을 행하지 않을 수 없으니 말이다.

(잠 3:30) 사람이 네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였거든 까닭 없이 더불어 다투지 말며

◈ 사람은 악을 행할 수밖에 없어 !!

여기에 대해서 이야기를 조금 하겠는데, "사람은 악을 행할 수밖에 없다" 라는 것에 대해서 말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어제 낮 시간에 그런 예를 들었는데 말이다. 저의 가까운 친척들의 경우에, 정말로 고생을 많이 하는 것을 보았는데, 그리고 대부분이 남자에게 이용을 많이 당했다는 것이다.

착한 누나가 시집을 갔는데 그만 이혼을 당하는 것을 보면서, 그것도 말도 안 되는 엉터리 남자를 만나서 말이다. 왜 옛날 시골에서는 그저 밥만 먹여주면 시집을 보냈다는 것이다. 그 남자가 어떤 놈인지도 전혀 모르고 말이다. 우리 외갓집 이야기인데, 오늘 따라서 어머니가 참석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제가 보기에 너무 착한 누나인데, 법 없이도 살 정도로 말이다. 그런데 왜 그렇게 고생고생을 하다가 이혼까지 당하느냐는 것이다. 

이미자의 '여자의 일생'을 들어봐도, 여자의 일생이 어떠한가? 그야말로 힘센 남자에게 온갖 수탈을 다 당한다는 것이다. 여자가 고생고생해서 돈을 좀 모아놓으면, 남자가 도박을 해서 다 날리고 말이다. 돈이 없다고 하면 또 때리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 드라마나 영화도 많이 있는데, 그런 것을 보면 가슴이 미어진다는 것이다. 물론 착한 남자도 있겠지만, 어떻게 남자가 되어서 그렇게 여자를 괴롭힐 수 있는지, 차라리 벼룩의 간을 빼먹지 말이다.

◈ 착한 남자, 착한 여자는 없어 !!

그렇게 생각을 했는데, 그런데 여자들이 자식을 낳고 보니, 다른 여자들과 이기적인 싸움을 벌린다는 것이다. 즉 "내 자식만 최고다" 라고 나온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 세상을 보는 범위가 어떠한고 하니, 물론 교육을 받지 않은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교육을 받지 않아서 나오는 피해를 남들이 받더라는 것이다. 본의 아니게 말이다.

예를 들어서, 시골 할머니가 이렇게 육교가 있어도 거기로 건너가지 않고 밑으로 건너게 될 때, 서문시장에 가면 그런 경우가 많은데 말이다. 그래서 대구시에서 길 가운데 봉을 세우고 했지만, 그것이 없었을 때는 마구 건너다녔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신혼부부가 차를 몰고 가다가 그만 무단횡단을 하던 할머니를 치게 되면, 그 신혼부부는 신혼이고 뭐고 다 날아가 버린다는 것이다. 

할머니는 그런 법을 몰라도 그냥 건너가는데, 그것을 배우지 못한 것이 나쁜 것이 아닌데, 하지만 그 피해를 다른 사람이 받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을 배우지 못했다고 모른다고 하기는 좀 그렇지만, 그래도 교육을 철저히 받았으면 그런 일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튼 예를 들어서 그러한데, 이런 경우가 사회에서 매일같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 담배꽁초는 버리면 안 돼요 !!

지난번에 어떤 화물차에서 담배꽁초를 버렸는데, 그만 그것이 짐칸에 불어서 차가 홀랑 다 타고 말았다는 것이다. 물론 자기 차였는데,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가? 담배꽁초는 버리면 안 된다는 것이다. 자기는 몰라서 했다고 하는데, 모르는 게 자랑인가? 그런 사람은 담배를 피우다가 버리면 안 된다는 의식조차도 없다는 것이다. 그런 일로 인해서 얼마나 자동차 보험의 돈이 얼마나 많이 낭비되는지 모르는데, 자기는 담배를 그냥 기호식품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교육을 다 받아야 하는가? 모두가 다 대학에 가야 하느냐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비용은 또 얼마나 많이 드는지 모르는데, 지금 우리나라가 그런 대학교육 때문에 지불하는 비용이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이다. 말도 안 되는데, 그러면 그것도 아니고, 그러면 도대체 무엇이냐는 것이다.

◈ 이 땅에서 완전한 것은 없어 !!

지금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고 하니,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완전한 것은 없다" 라는 것이다. 즉 완전한 천사와 같은 여자는 없는데, 물론 그러한 남자도 없지만 말이다. 전부가 다 자기 코앞에 있고 눈앞에 보이는 것을 가지고, 그렇게 자기만을 위한 현실로 재구축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날마다 그렇게 구축하면서 살아간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이 평소에는 아무리 남을 배려하는 것 같지만, 결국은 무엇인가? "내 자식만 살리고, 내 가족만 배부르면 최고다" 라고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제 아무리 착하고 천사와 같은 누나라고 하더라도, 자기 가족과 자기 자식을 살리는데 있어서는 눈앞에 다른 것은 전혀 보이지를 않더라는 것이다. 

◈ 악(惡), 너는 좀 빠져있어 !!

여자가 한이 맺히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온다고 하는데, 요즘의 날씨가 그래서 추운가?(ㅋㅋ) 그래서 60대의 감성(?)으로 볼 때 여자는 이기적이라는 것이다. 자기밖에 모른다는 것이다. 물론 여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전부가 다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서 잠언서를 보면서 인간은 이기적으로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자기 중심적으로 말이다.

그래서 잠언서에 악이 나오면 빼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그게 악이라고? 그러면 내 자식을 굶겨 죽이란 말인가? 남에게 크게 해꼬지를 하지 않고 키우면 되지" 라고 하는데, 하지만 해꼬지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 자기가 생각해놓은 현실감각에서만 해꼬지를 하지 않는 것인데, 하지만 그것이 남들에게 피해를 준다는 것이다.

◈ 당신이 뭔데 내 남편을, 저리가 !!

이것은 제가 실제로 경험한 일인데, 어떤 부부가 싸움을 해서 제가 뜯어말렸다는 것이다. 여자가 일방적으로 얻어맞기에 말이다. 그래서 저는 싸움을 말려주어서 순진하게도 여자로부터 고맙다는 소리를 들을 줄 알았는데, 그런데 그 여자가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하늘같은 내 남편을 왜 야단을 치는가?" 라고 하면서 나온다는 것이다. 얻어맞아서 얼굴이 퉁퉁 부어있으면서도 말이다(ㅋㅋ).

이런 가정폭력에 대해서 경찰이 개입하기 시작한 것은 사실상 최근의 일인데,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부부싸움을 하게 되면, 그것은 부부간의 문제로서 이웃에게 피해를 준다는 생각은 하지를 못했다는 말이다. 그저 눈앞에 있는 것만 본다는 것이다. 그래서 경찰도 개입하기를 주저했다는 말이다.

그래도 시골 사람들이 정이 많다고 하는데, 하지만 돈 문제로 들어가게 되면 그렇지 않다는 말이다. 돈 문제가 걸리게 되면 그것도 한계에 도달하고 만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무리 다정한 이웃이라도 그렇게, 사실은 모두가 다 그러한데, 물론 친구도 돈이 있을 때 친구이지, 그렇지 않으면 친구도 아니라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나는 '부지런한 자는 부자가 될 거야' 라는 구절이 참 좋더라" 라고 하면, 나중에 "부자가 되려고 하지 말라. 속히 부하는 멸망한다" 라는 구절과 덜커덩 맞닥뜨리게 되어있습니다.

(잠 10:4)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
(잠 12:27) 게으른 자는 그 잡을 것도 사냥하지 아니하나니 사람의 부귀는 부지런한 것이니라
(잠 21:5) 부지런한 자의 경영은 풍부함에 이를 것이나 조급한 자는 궁핍함에 이를 따름이니라

(잠 23:4) 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고 네 사사로운 지혜를 버릴지어다
(잠 28:20) 충성된 자는 복이 많아도 속히 부하고자 하는 자는 형벌을 면치 못하리라

◈ 부지런함이 곧 부자 !!

여기에 보면, 부지런하면 부자가 된다는 구절이 3개가 있고, 그리고 또 부자가 되지 말라고 하는 구절이 2개 나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들 중에서 어느 것을 선택하겠는가? 당연히 앞에 있는 것인데, 뒤에 것은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기 탐심을 채우기 위해서 성경구절을 자기 마음대로 뽑아내는데, 그러니 복음을 통해서 이런 구별하는 것을 철폐시키는, 그런 성경해석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도 이왕 있으니 설명을 하고 지나가겠는데, 여기 잠언 10장 4절에 보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 라고 되어있는데, 이것은 무슨 의미인고 하니, 부지런함 자체가 곧 부자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떻게 이해하는가? 당연히 부지런하게 되면 그 결과로서 부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지런함은 부자가 되기 위한 수단이고 과정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만약에 부자가 되었다면, 계속해서 부지런할 이유가 있는가? 없는가? 이미 목적을 달성했으니 더 이상 부지런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또 잠언에 보면 뭐라고 하는가? 게으르게 되면 가난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부자가 되었다가 또 가난하게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면 정작 이 잠언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부자라는 것은 하나의 미끼에 불과하고, 결국은 어떤 사람이 되라는 말인가? 부지런한 자인데, 그러니 부지런한 자체가 곧 부자인데, 그러니 이 부지런함에는 부자가 됨이 포함되어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부지런함 자체가 결국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지혜자가 된다고 하면, 그러면 잠언의 목적이 "인간아, 니가 지혜자가 되지 아니하면 망한다"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즉 지혜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 구약에서 지혜자의 모델 케이스는?

다시 해보면, 부지런해야 부자가 된다고 하면, 그러면 그 부지런함의 모델 케이스가 어떤 경우인가? 지혜자의 모델 케이스가 누구냐는 말이다. 구약에 보면 어떤 여자 분이 등장하는데, 그녀가 누구인고 하니, 솔로몬 왕을 만난 어느 남방의 여왕이라는 것이다. 엄청나게 부지런한데, 왜냐하면 자기 나라인 남방에서, 그게 지금의 예멘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말이다.

그곳에서 솔로몬을 찾아왔는데, 그 찾아온 목적은 하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지혜를 얻기 위해서 왔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 여자가 부지런한가? 부지런하지 않은가?" 라고 하는 것은, 지혜를 얻고자 하는 그 여자가 곧 지혜자가 된다는 것이다. 만약에 지혜자가 된다고 하면, 그 여자에게 부지런함은 내장되어있는 것이고, 그게 내장되어있는 이상 그 여자는 이미 부자라는 말이다.

잠언서에 나오는 성경구절의 마지막 성취성은 무엇인고 하니까, 그 성취되는 모습은 어떤 움직이는 인물로 보아야하는데, 그 인물이 어떤 기능화가 되어야만 하고, 그 기능화는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과 관련이 될 때만이 지혜자가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는가? "이 세대가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악하기 때문이다. 차라리 너희는 옛날 솔로몬 시대에 남방 여인이 지혜를 얻기 위해서 솔로몬을 찾아온, 그런 지혜자가 지금은 없구나"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과 어떻게 관련되어있는가?" 라는 것인데, 그것이 지혜자라는 말이다.

(마 12:3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마 12:40)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
(마 12:41)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어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마 12:42)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어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 성경공부를 한다고 해서 부지런함이 아니라 !!

그러니 성경공부를 한다고 해서 부지런함이 아니라, 성경말씀을 공부할 수 있게 된 그 여건이 주님이 주신 성령의 혜택임을 아는 그 사람이 이미 부자이고, 지혜자이고, 물론 부지런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신약을 가지고 구약해석을 이렇게 해야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대심방을 하면서 목사가 잠언서를 펴놓고 어떻게 하는가? 이번에 2구역을 심방하려고 그 구역의 구역장을 불러놓고 분위기는 묻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구역장은 뭐라고 하는가? "요즘 경제도 어렵고, 그리고 특히 우리 구역에서는 가난한 사람이 많습니다" 라고 하면, 목사는 아까 이야기한 잠언서 10장을 펼친다는 것이다.

4절에 보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 라고 되어있는데, 그래서 그 구절을 중심으로 심방을 한다는 것이다. 물론 봉투도 준비시켜놓고 말이다. 그러면 교인들은 목사님이 심방을 해주셔서 이번에 자식놈이 취직이 되어서 너무 감사하다고 하면서 봉투를 내놓고 하는데 말이다.

이것이 바로 이 땅에 내려온 갓바위인데, 교회는 다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아닙니다. 우리교회는 개혁주의 교회라서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라고 할지 몰라도, 개혁주의도 돈이 안 되면 어떻게 하는가? 돈이 안 되면 당장에 바꾸고 만다는 것이다.

다시 교재를 살펴보자.

** 이런 정신으로 잠언 1장부터 훑어 들어가게 되면, 그에게 선별을 당한 구절들의 집합으로 말미암아서 그 인간 속에 음흉한 괴물이 들어있음이 폭로됩니다.

◈ 오잉, 내 속에 괴물이 !!

이렇게 잠언은 인간 속에 음흉한 괴물이 들어있음이 폭로시키는데, 그러니 우리는 잠언을 지킬 수가 없고, 그 잠언을 통해서 자기 속에 잠언의 뜻과는 전혀 다른, 즉 "뭔가 부자가 될 때만 나답다" 라고 하는 괴물과도 같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만났던 그 악마, 일단 살고 보자는 그 악마 말이다. 전혀 방향성이 다르다고 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죽으려고 했는데, 그것이 곧 지혜인데 말이다. 그런데 악마는 뭐라고 하는가? "일단 살고 봐야지" 라고 하는데, 그렇게 살고 보자는 그 흉악한 본능이 아담의 자손인 우리에게도 가득가득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가득하기 때문에 이 잠언서를 가지고 쑤신다는 말이다. "너, 부자가 되고 싶지? - 예, 부자가 되고 싶습니다. - 그러면 부지런해야 돼. - 감사합니다. 하나님!"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어떠한가?

◈ 목사와 집사의 로맨스 !!

* 집사 : 목사님, 계셔요?
* 목사 : 예, 들어오세요.
* 집사 : 목사님, 이번에 우리 아이가 승진해서 높은 자리에 앉으면 좋겠습니다.
* 목사 : 그래요. 그러면 요셉의 꿈을 꾸시기 바랍니다.
* 집사 : 요셉의 꿈은 어떻게 꿉니까? 
* 목사 : "꿈아, 꾸어져라" 라고 하면 큰 꿈을 꾸게 됩니다. 
* 집사 : 아하, 그렇군요.
* 목사 : 입을 크게 열면 채워주신다고 했으니, 일단 가방을 크게 여세요.
* 집사 : 그러면 큰 가방을 준비해야하겠군요.
* 목사 : 일단 그렇게 꿈을 크게 가져야 합니다. 그만큼 믿음이 큰 겁니다. 
* 집사 : 예, 잘 알겠습니다.
* 목사 : 큰 믿음을 가지면 큰 것을 얻고, 작은 믿음을 가지면 작게 얻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새벽기도회를 나와서 명품가방을 달라고 기도하는 아줌마들이 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자기가 명품가방이 좋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정말로 하나님이 살아계신지를 알아보고 싶어서 그렇다는 말이다. 시험을 해도 꼭 마귀가 시키는 대로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잠언 28장 20절에서는 무엇이라고 하는가? "속히 부하고자 하는 자는 형벌을 면치 못하리라" 라고 한다는 말이다. 지금 이 땅에 부지런해서 부자가 된 사람이 많은가? 아니면서 제 아무리 부지런해도 부자가 되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은가? 과연 어느 쪽이 더 많으냐는 것이다.

물론 부자가 되지 않은 자들이 훨씬 더 많은데, 공무원으로 있으면서 아무리 부지런히 해도 결국에는 6급으로 정년퇴직을 하게 되는데, 요즘은 5급도 되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과연 부자가 될 수 있는가? 물론 뇌물을 많이 처먹으면 얼마든지 될 수가 있겠지만 말이다.

지금도 부산에서 근무하는 법관 중에서 자기 집도 없이 전세로 있는 분이 무려 2명이나 있다고 하는데 말이다. 공직자들이 재산을 공개하면 보통은 몇 십억씩 되는데, 물론 재벌들은 수 백억, 수 천억이 되는데 말이다. 그러면 그 재벌들은 공직자들보다 열 배가 더 부지런했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 잠언서의 유일한 모델은, 예수님 !!

그러므로 잠언서의 모델은 이 땅에서 재산은커녕 머리를 둘 곳도 없었던 예수님, 그분이 바로 모든 잠언서의 유일한 모델이란 것이다. 머리를 둘 곳조차도 없었던 분이 말이다. 그러므로 잠언은 우리를 이 땅에서 부자가 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우리 속에 괴물이 들어있다고 하는 것을 폭로하는 율법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잠언서의 존재 이유인데, 왜냐하면 우리는 언제나 가능성만을 생각하기에 말이다. 뭔가 불가능성을 생각해야하는데, 왜냐하면 우리가 가고자 하는 나라는 우리의 힘으로 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닌데, 그렇게 갈 수 없는 나라이기에, 그래서 잠언서로 "너희들은 가지 못한다" 라는 것을 먼저 쫙 깔아놓고, 그 잠언서를 밟고 오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너희 속에는 괴물이 있어서, 그 괴물의 장악된 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 오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어디까지 와야하는가? 십자가 앞에서 부딪쳐야하는데, 그렇게 십자가에 부딪치게 되면, 그 십자가에서 틈이 생기면서 "아하, 죄인도 받아주시는구나" 라는 것을 무릎을 치면서 알아야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려고 오셨다고 하는 사실을, 그것을 말씀을 통해서 죄인이 되게 하시고, 성령을 통해서 깨닫게 하실 때, 비로소 십자가가 크게 보이면서, 우리가 가야만 하는 지혜의 자리에 도달되면서, 이미 하늘나라의 백성이 된다는 말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인간의 지혜는 자기가 살고자 하는 것에서 왔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깨달아도 매일같이 생각하는 것은 "내가 더 살아야하는데, 건강하게 잘 살아야 하는데" 라고 것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날마다 십자가를 보여주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신 주님의 그 십자가만이 참된 지혜임을, 십자가의 피만이 구원의 능력임을 증거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4,4,14 오후 7시에 마침.

                                              도대체 부지런히 장사를 하라는 말인가? 말라는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