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

잠언서2-지혜와 법 140308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12. 19. 16:37
2014-03-08 21:17:31조회 : 1179         
[14 대구강의] '잠언'속의 그리스도 2 - 지혜와 법이름 : 구득영 (IP:203.223.97.152)

[14 대구강의] '잠언'속의 그리스도 2 - 지혜와 법

                                                            14,02,24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14페이지부터 살펴보자.

** 잠언의 특징이란, 애초에 우리 인간 속에 없는 '지혜'이다.

이렇게 인간 속에 없는 것이 지혜라고 하면, 그런데 우리에게 "지혜를 깨달아라" 라고 한다면 그것은 무슨 의미이겠는가? 그것은 우리 속에 있는 진리성을 바깥으로 드러낸다든지, 혹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고백하라는 의미는 아니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진리가 우리 속에 없으니 말이다. 그러니 애초에 율법이라는 것은 우리 속에 없다는 것이다.

보통 종교에서는 자기 속에 있는 것을 끄집어내는데, 그래서 불교는 인간이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그것을 다 끄집어 내어보자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는 무엇인가? 계시종교라고 하는데, 계시는 어디서 오는 것인가? 인간 속에 들어있는 것을 스스로 끄집어내는 것이 아니라, 계시는 외부에서 주어진다는 말이다.

◈ 계시는 오직 이스라엘에게만 특별히 !!

그러니 아무에게나 다 계시를 주는 것이 아니라, 특별히 계시는 주는 나라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 이란 말이다. 그래서 이 잠언서의 경우에도,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의 잠언이다" 라고 하면서 시작한다는 것이다. 즉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말이다.

(잠 1:1)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의 잠언이라

그래서 우리가 성경말씀인 잠언서를 보면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지 않은 이방인들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고 여긴다고 하면 그것은 커다란 오해인데, 오직 이스라엘에게만 특별히 주어진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주어진다는 말이다. 

◈ 하나님의 백성은 어디서 생기는가?

그러면 하나님의 백성은 어디서 생기는가? 하나님의 백성은 아브라함의 자손에서 생기는데, 이것은 우리가 다 아는 것이지만, 그래도 정리하는 의미에서 다시 한번 해보자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어디서 생겼는고 하니, 아브라함의 자손이 커져서 그게 이스라엘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무엇을 받았는고 하니, 복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아브라함이 복을 받았다는 것은, 그런데 그 복의 뒷면에 무엇이 있는고 하니, 저주가 있다는 것이다. 즉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복을 내리고, 너는 저주하는 자에게는 저주를 내린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창 12: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그렇게 복과 저주는 언제나 같이 주어지는데, 그러면 이것을 말을 바꾸어서 해보면,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되는 동시에 또 무엇의 근원이 되는고 하니, 저주의 근원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태어나면서 이미 저주 속에 있는데, 그런 영원한 저주의 확실한 근거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주어지게 된다는 말이다.

◈ 아브라함 자체가 곧 하나님의 계시 !!

여기서 제가 한번 적어보겠는데, 즉 "아브라함 자체가 곧 하나님의 계시다" 라는 것이다. 우리는 계시라는 것은 말이나 명령을 두고서 이야기하는데, 그런데 아브라함이 계시라고 한다면 어떻게 되는가? 이런 말과 명령이 인물화가 된다는 것이다. 말과 명령이 말이다.

예를 들어서, 산에 가서 기도를 하는데, 어디선가 "이 아무개야!" 라고 하면, 그것도 계시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데 어떤 아저씨가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도 역시 계시가 된다는 말이다. 즉 아브라함이 걸어가면 그것이 계시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모든 뜻이 아브라함에게 집중이 되어있다고 보면 된다는 말이다.

◈ 아브라함과 아비멜렉 !!

창세기 20장에 보면, '아비멜렉' 이라는 사람이 아브라함을 만나고 난 뒤에 졸지에 아비멜렉에 속한 여자들이 임신을 하지 못하게 되는데, 그렇게 임신이 되지 않는 것을 저주라고 하고, 그 저주는 바로 아브라함 때문에 생겼다는 것이다. 그러면 저주가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대해서 뭔가 잘못을 했기 때문에 저주가 주어졌다는 말이다.

(창 20:1) 아브라함이 거기서 남방으로 이사하여 가데스와 술 사이 그랄에 우거하며
(창 20:2) 그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 하였으므로 그랄 왕 아비멜렉이 보내어 사라를 취하였더니
(창 20:3) 그 밤에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취한 이 여인을 인하여 네가 죽으리니 그가 남의 아내임이니라

예를 들어서, 길에 어떤 아저씨가 걸어가고 있는데, 자기가 그 아저씨에게 욕을 했더니만 그만 저주가 왔다고 하는, 그런 식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대해서 뭔가 잘못을 했기 때문에 저주가 왔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양반이 도대체 무엇을 잘못했는지 살펴보니, 그것이 참으로 모호하다는 말이다. 

그게 무엇인고 하니, 아브라함에게 아내가 있었는데, 그 아내를 보고 마음에 들어서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누구냐고 물어보니, 아브라함이 그만 자기 누이동생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자기 마누라라고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렇게 누이동생이라고 하면, 외부인사가 동침하고 결혼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아브라함이 아내인 사라가 실제로 자기의 이복누이동생도 되지만 말이다.

그래서 아비멜렉이 그만 아브라함의 아내와 동침할 뻔했는데, 실제로 동침을 한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그만 저주가 된다는 것이다. 동침을 할 뻔해서 그렇게 저주를 받았는데, 만약에 진짜로 동침을 했다면 어떻게 되었겠느냐는 말이다.

그래서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보고 뭐라고 하는가? "이것이 다 당신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당신이 우리 집안의 여자들이 임신하지 못하게 했으니, 이 저주를 푸는 것도 당신이 해라" 라는 것이다. 그러니 저주를 푸는 것이 하나님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달렸다는 말이다.

◈ 특정 인물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 !!

그러니 하나님에게 계시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 뭉치이고 계시 덩어리가 그 당시에 이미 그렇게 걸어다녔다는 말이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까, 인간이 신을 향해서 아무리 기도를 해봤자 하나님의 응답노선은 그런 기도와 상관이 없이 이미 실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특정 인물을 통해서 말이다.

그러니 "하나님은 저기에 계시고 나는 여기에 있으니, 내가 기도하면 응답이 된다" 라고 하는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는 것이다. 그런 시대는 아브라함 시대에 이미 끝났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응답이 무엇인지를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어떤 특정 인물이 살아있다는 것이다. 특정 인물이 말이다.

바로 그 인물에 대해서 어떻게 호응하고 어떻게 동조하고, 그렇게 그 존재의 가치를 인정해주게 되면 복을 받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반면에 그 인물에 대해서 인정해주지 못하겠다고 하면 저주를 받고 말이다. 그러니 이 세상전체가 "축복인가? 아니면 저주인가?" 라고 하는, 그런 두 개의 판(板)으로 되어있다는 것이다. 베니어 합판과 같은 그런 두 개의 널빤지로 말이다.

그렇게 두 개의 판으로 완전히 정렬되고 정리가 되는데, 그러니 우리가 성령을 받고 예수님을 믿으면, 이 세상을 볼 때 깔끔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한국판과 러시아판, 또한 한국판과 일본판,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독도는 우리 땅!" 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하면 판이 2백 몇 개나 되는데, 각 나라마다 판이 다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그렇게 하지 말고 국가자체를 능가하는 다른 판을 이 세상에 깔아보자는 말이다.

◈ 축복을 받는 판, 저주를 받는 판 !!

그것은 바로 두 종류의 판밖에는 없는데, 복을 받는 백성과 저주를 받는 백성, 그렇게 말이다. 이제 여러분도 나이가 들만큼 들었으면 이 세상을 보는 것도 깔끔하게 마무리를 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내 나라, 니 나라" 라고 하면서 다투는 것도 젊었을 때의 이야기이고 말이다.

이제 마지막 때가 되면 깔끔하게 축복을 받는 베니어판과 저주를 받는 베니어판으로, 그렇게 마무리를 해줘야 한다는 말이다. 합동측인지 통합측인지, 아니면 감리교인지 장로교인지, 그런 판도 이제는 때려치워야 하는데, 교단도 우리나라에 무려 2백 개가 넘으니 말이다.

아무튼 성경에 근거하면 판은 단지 두 개인데, 축복을 받는 축복의 베니어판에 있는 사람과, 그리고 저주를 받는 저주의 베니어판에 있는 사람으로 말이다. 그것은 바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계시 덩어리로서 출몰했을 경우에, 이 세상은 그렇게 둘로 갈라진다는 것이다. 축복과 저주의 판으로 말이다.

◈ 축복은 어디에서 왔는가?

그렇다면 그것은 아브라함 시대의 이야기이고, 잠언의 시대에는 베니어판이 어떻게 되느냐는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이 계속해서 연속이 되니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축복의 베니어판이고 그 나머지는 저주의 베니어판이 된다는 것이다. 간단한데 말이다. 그렇게 축복을 받은 베니어판에다가 '잠언' 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주셨다는 것이다. 축복에 대한 근거, 즉 축복이 어디서 왔는지를 알려주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니 "너희들이 축복을 받았다" 라고 하면, 물론 그것을 좋아해야 하는데, 그렇게 축복을 받은 것에 머물지 말고, 그런 난데없는 축복이 어디서 왔는지, 그 축복이 어디에서 나와서 자기에게 도달되는지, 거기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축복의 베니어판에 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거기에 관심이 없다고 하면 세상 사람들과 동일하다는 말이다.

잠언서에 들어가기 전에 이사야서 30장 19절에서 21절을 보자.

(사 30:19) 시온에 거하며 예루살렘에 거하는 백성아 너는 다시 통곡하지 않을 것이라 그가 너의 부르짖는 소리를 인하여 네게 은혜를 베푸시되 들으실 때에 네게 응답하시리라
(사 30:20) 주께서 너희에게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을 주시나 네 스승은 다시 숨기지 아니하시리니 네 눈이 네 스승을 볼 것이며
(사 30:21) 너희가 우편으로 치우치든지 좌편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정로니 너희는 이리로 행하라 할 것이며

◈ 흐르는 강물처럼 ??

방금 읽은 성경내용을 해석함에 있어서, 국어문법으로 해석하면 백 날을 해도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해석을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그냥 평범해 보이고, 평이해 보이는데 말이다. "시온에 거하며 예루살렘에 거하는 백성이 하나님의 지시를 받는다" 라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해석이 되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만약에 우리가 흐르는 물을 고정시키려고 하면 어떻게 하면 되겠는가? 강물이 흘러가는데, 어떻게 고정시킬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날씨가 영하로 떨어지게 되면 물이 그만 얼게 되는데, 그러면 물이 흐르는가? 정지가 되는가? 얼었으니 정지가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을 주실 때, 우리 인간은 시간을 따라서 흘러가고 있는데, 그렇게 흘러가는 우리 자신이 성경말씀을 보게 되면 뭐라고 하겠는가? 성경말씀도 흘러가는 강물처럼 되어서 "에이, 이것은 옛날 이야기구나!" 라고 하고, 그리고 "앞으로 이렇게 된다는 말이죠?" 라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 그런데 말씀이 동결되면?

그런데 그러한 말씀이 동결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주님께서 말씀을 우리에게 주실 때, 우리가 흘러가고 있듯이 이 세상도 역시나 흘러가고 있는데, 그런데 흘러가는 세상을 그만 동결을 시켜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흘러가지 못하도록 동결을 말이다.

왜 '겨울왕국' 이라는 만화영화를 보게 되면, 사람들이 여름에 사용할 얼음을 위해서 어떻게 하는가? 겨울에 날씨가 아주 추울 때 연못에 가서 얼음을 썰어서 서빙고와 같은 창고에 넣어놓고는, 여름에 그것을 파니까 부가가치가 높아진다는 것이다. 즉 호수가 동결되었을 때, 물을 잡아놓는다는 말이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시게 되면 흘러가는 시간이 스톱이 되는데, 그렇게 되면서 "앞으로 우리가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라고 하는 것은, 이미 동결된 그 내부의 범위 내에서 그대로 진척이 될 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고, 흘러가는 세월을 따라서 "내일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어" 라는 마음으로 성경을 보게 되면, 아무리 봐도 해석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Q.T' 라는 것도 사실은 한 번만 하면 되는데, 그런데 매일같이 하게 되면, 말씀도 매일같이 흘러가게 되어서, 어제와 오늘의 해석이 그만 달라진다는 것이다. 같은 본문말씀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래서 정작 본인도 혼동하게 된다는 것이다. 

◈ 동결된 계시 안에서 움직이면 !!

아무튼 강물이 이렇게 흘러가는데 하나님의 계시가 이것을 동결시킨다는 것이다. 그렇게 얼음처럼 굳어지게 되면 이게 투명하게 되는데, 그러면 이사야 30장 19절의 "앞으로 네게 은혜를 베풀겠다" 라는 말씀을 지금 이 'A' 라는 시점에서 이야기를 해도, 우리가 보기에 아직 도달되지 않은 'B' 라는 시점이라도 할지라도, 이렇게 전체가 동결된 상태에서는, 그렇게 동결된 계시 안에서 우리가 움직이게 되면, 이스라엘은 한 인물과 관련성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평발이 되어서 눈 위를 걸으면 발자국이 넓적하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은 발자국이 볼록한데 말이다. 그러면 그 사람이 기분이 좋으면 발자국이 볼록하게 되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 사람은 언제나 넓적하다는 말이다. 본인의 기분과는 상관없이 언제나 자기 발자국은 평발의 발자국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기분이 좋을 때나 나쁠 때나, 예수님도 분명히 기분이 나쁠 때가 있었을 텐데 말이다. 그렇지요? 예수님이 가신 그 안에는 모든 이스라엘의 예언이 동결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안에서 산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하는 선택과 결정으로 우리의 운명이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오후 2시에 결정한 것과 4시에 결정한 것이 다른데, 왜냐하면 시간의 저촉을 받기 때문에 말이다. 그렇게 우리의 모든 두뇌세포와 감정은 환경에 따라서 변한다는 것이다. 이빨이 아프면 기분이 나빴다가, 다른 좋은 일이 있으면 기분이 풀리고 말이다.

◈ 그런데 인생은 동결되지 않아 !!

사람이 사랑을 하게 되면 인물이 달라지는데(ㅋㅋ), 그것을 한국말로는 '브링브링(?)' 이라고 하는데, 영어로는 '트라이트(?)' 라고, 뭔가 굉장히 화사해진다는 것이다. 주위에 그런 사람이 없어요? 그렇게 뭔가 화사해지면서 삶에 목적이 생기고 의미가 생기면서, 하루하루가 그만 천년왕국에서 사는 기분이 든다는 것이다. 마치 꽃밭을 노니는 것과 같은 말이다. 사랑을 하게 되면 말이다.

물론 사랑해서 결혼을 하게 되면, 곧 꽃은 시들고 손을 아무리 잡아도 아무런 감각도 없어지지만 말이다. 하지만 처음에 사랑을 하게 되면 부픈 가슴을 앉고 모든 것이 화사하게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의 감정은 기분에 따라서, 환경에 따라서,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말이다. 만약에 10년 전에 자기 돈을 떼먹고 도망간 놈을 만나든지, 자기에게 복수를 하려고 덤비는 놈을 만나게 되면 인생자체가 그만 꼬이게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사람은 동결되지 않는데, 부단하게 움직이면서 부셔지고 째지고 말이다. 그러니 몸과 마음이 온통 상처투성이인데, 그것을 낫게 해주는 파스도 없다는 것이다. 인생을 사는 것 자체가 온통 흠집투성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인생이 동결되어야 하는데, 동결이 되지 않으면 힘이 없고 괴롭다는 말이다. 그러니 자기 인생을 자기에게 맡긴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데, 왜 맡기느냐는 것이다. 믿을 놈이 따로 있지, 자기가 자기 자신을 어떻게 믿느냐는 말이다.

그러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우리 자신이 아니라, 등장한 복의 근원, 즉 아브라함의 자손인 그분은 오직 한 분밖에 없다는 것이다. 바로 아브라함으로 자손으로 오신 그분이 소급해서 우리 인생을 그만 동결시키게 되면, 상처를 받은 우리의 영혼도 여기 동결된 얼음 속에서는 하나의 점으로서 표시가 된다는 것이다.

◈ 우리는 주님의 시간에 들어가서 !!

이것을 두고 '그리스도인(人)(印)' 이라고 하는데, 즉 도장을 받는다는 것이다. 성령의 도장을 말이다. 그렇게 성령 안에 들어오게 되면, 우리의 시간을 버리게 해서 주님의 시간에 우리를 집어넣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주님의 시간에 들어가게 되면, 우리는 창세 전부터 사랑을 받기로 작정되었다고 하는, 그런 상황이 우리의 눈에 띠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박물관에 가게 되면 처음에는 출입구가 눈에 띠는데 말이다. 서울 용산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에 가게 되면, 처음에 들어가면 벌써 선사시대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고조선, 삼국시대, 그렇게 둘러보게 된다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둘러보든 보지 않든 간에 그 안에 삼국시대가 있고, 고려시대가 있고 조선시대가 다 있다는 것이다. 둘러보면 다 나온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의 할 일이 무엇인고 하니, 그리스도 안을 둘러보면 된다는 것이다. 동결된 안을 말이다. 즉 "과거에 아담은 이랬고, 우리의 선배인 가인과 아벨은 이랬고" 라고 하면서, 참 가인은 선배라고 하면 곤란한데 말이다(ㅋㅋ). 그리고 "노아는 이랬고, 아브라함은 이랬고, 야곱은 이랬고, 요셉은 또 이렇게 고생을 많이 했고" 라고 하면서, 그렇게 둘러보면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들러보라고 성경책을 이렇게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확정을 시켜놓았다는 것이다. 확정이 되었다는 것은 동결되었다는 것과 같은 의미인데, 그렇게 동결된 성경계시를 우리에게 주시면서 매일같이 우리의 인생 속에서 이것을 반복시킨다는 말이다.

◈ 아는 과거로는 갈 수 없고, 미래는 몰라 !!

저를 보고 강의시간에 똑같은 소리를 반복한다는 분이 있는데, 그렇게 반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가 2013년으로 돌아갈 수 있는가? 안 되는데, 그런데 우리는 2014년도 모른다는 것이다. 즉 내일을 모른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과거는 알지만, 그 아는 곳으로는 돌아갈 수는 없고, 날마다 우리는 미지의 것만 마주치게 되는데, 그러니 우리는 매일같이 불안불안하다는 것이다. 브링브링한 것이 아니고 말이다(ㅋㅋ).

아는 곳으로 가게 되면 쉬운데, 그런데 그 시점은 이미 지나가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우리가 만나는 것은 내일인데, 그 내일이 되면 무슨 일이 터질지, 자녀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언제나 불안하다는 말이다.

◈ 언제나 따라오는 '복'으로 인해서 !!

이번에 소치 올림픽에서 이상화 선수가 금메달을 땄는데, 제가 그 스피드 스케이팅에서 주의 깊게 본 것이 무엇인고 하니, 이상화 선수가 스케이트를 타면 카메라도 같이 따라 돈다는 것이다. 이상화 선수가 빨리 가면 빨리 따라가고, 늦게 가면 늦게 따라가고 말이다. 팔을 어떻게 흔들든 간에 그 카메라는 항상 이상화 선수를 따라다닌다는 것이다. 금메달이든 은메달이든 상관없이 말이다.

바로 그 카메라를 복으로 보면, 그 카메라가 우리 인생을 따라오는데, 바로 그것을 믿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이다. 복이 따라오는 것을 믿는 것이 말이다. 그러니 카메라인 복은 우리가 어떻게 하든 상관없이 따라오는데, 우리가 팔을 오른 쪽으로 젖든 왼 쪽으로 젖든 간에 말이다.

◈ 잠언, 그리고 율법 !!

그것이 곧 이스라엘 왕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잠언, 즉 하나님의 계시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강의 처음으로 돌아가서, "복은 어디서 오는가?" 라는 것이다. 바로 그 복을 잠언이라는 바구니에 담아서 우리에게 전달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복을 전달하는 방식이 곧 잠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잠언이 전달방법이라고 하면, 여기서 우리가 아는 이야기를 해보면, 우리가 알기에는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는 방식이 따로 있다고 아는데 말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율법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기존의 율법이 있는데 왜 잠언이 또 필요하냐는 것이다.

지금까지 무엇만 하나 알면 이해가 되는고 하니, 바로 이 동결된 얼음장, 그것만 알면 된다는 말이다. 시간도 얼어버렸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동행했지만, 그가 하나님에 대해서 다 알았는가? 아브라함은 다 몰랐는데, 자기 인생을 살았던 만큼만 알았다는 것이다.

◈ 아브라함도 어린아이보다 작아 !!

그래서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는가? 구약에 있는 많은 성도라고 할지라도, 이미 모든 것이 종결된 상태에 있는 신약에서의 어린아이보다 작다고 하셨다는 것이다. 즉 오히려 천국에 있는 작은 자라도 구약에서의 큰 자보다 더 크다고 하셨다는 말이다.

(눅 7:2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이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하시니

그래서 아브라함의 경우에는,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도 변화산에서 뭐라고 했는가?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별세에 대해서 말이다. 그렇게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궁금해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인데 말이다. 아브라함도 장자 오실 예수님을 보기를 원했고 말이다.

(요 8: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이런 이야기가 성경에 나올 때, 그 당시의 바리새인들도 예수님의 그 말씀에 대해서 몰랐듯이, 오늘날 이성적으로 따지게 되면 아브라함이 어떻게 예수님을 생각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성경책이 그냥 교훈집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는 말이다. 성경은 그냥 착하게 살면 된다고 하는 책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예수님 때를 보기를 원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아브라함이 예수님 때를 보기를 원했고 보았다고 하면, 우리도 아브라함 때를 봐야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왜냐하면, 다같은 패밀리이니 말이다. 그들과 같은 패밀리가 아닌가요? 그래야 우리가 다른 세계에 속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설교는, 다른 세계로의 초대 !!

어떤 분이 저의 설교를 듣고 나서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고 하니까,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나면 다른 세계에 속했다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그분이 한 말이 맞는데, 이것은 제가 저의 설교를 자화자찬하는 것이 아니라(ㅋㅋ), 설교를 하는 저 자신도 그것을 느낀다는 것이다. (녹취자 - 저도 공감합니다.)

설교를 듣기 전에는 골치 아픈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닌데, 그런데 설교를 듣고 하게 되면, 그런 것을 가지고 고민을 한다는 것 자체가, 자기가 그렇게 엉뚱한 것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그게 또한 죄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다른 세계에 그렇게 초대해도 오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있는데, 자꾸만 다른 곳으로 도망을 치려고 해서 조금은 아쉽다는 것이다.

지금 제가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하는고 하니, 계시를 전달함에 있어서 이미 계시로서 율법이 있는데, 왜 계시로서 또 잠언이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면 이것을 한 번 구분해보겠는데, 법과 잠언, 즉 격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법과 격언의 차이점이 무엇인고 하니, 법은 지켜야 복을 받고, 만약에 지키지 못하면 저주를 받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 율법의 완성체로서의 지혜 !!

그러니 율법은 결국 유보적인데, 복을 받을지 저주를 받을지 말이다. 그런데 잠언은 무엇인고 하니, 율법의 완성체로 보면 된다는 것이다. 지혜가 말이다. 즉 율법은 인간이 지킬 경우에만 자기 정체를 드러내는데 비해서, 잠언의 경우에는 인간이 지키든 못 지키든 간에 자기의 본질을 드러내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지키든 못 지키든 간에 말이다.

이러한 것을 소위 '지혜문서' 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잠언서를 비롯해서 욥기, 시편, 아가서, 전도서와 같은 것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만 지혜가 아니고 성경 안에 군데군데 지혜가 들어있지만 말이다. 대략적으로 이런 것을 지혜문서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지혜문서는 이미 완성되고 종결된 상태를 그 시대의 언어로서, 삶의 언어로서, 생활의 언어로서 표현해준다는 것이다. 

그러면 율법은 무엇인고 하니, 법은 사실상 순종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에게는 법에 대해서 순종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러니 법은 무엇을 겨냥하는고 하니, 우리 인간의 부실함과 허술함과 모자람, 즉 인간의 한계성을 보여주는 것이 곧 법이라는 말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십계명이고 말이다.

◈ 욥은, 율법적으로는 고난을 받을 이유가 없어 !!

그러니 십계명과 잠언을 비교하면 쉽지 싶은데, 그것보다도 십계명과 욥기를 비교하면 되지 싶은데 말이다. 욥은 십계명에 의하면 흠이 있는가? 없는가? 없는데, 그러니 율법적으로 욥이 그러한 혹독한 고난을 당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다른 계시도구인 잠언에 의하면, 즉 지혜에 의하면 욥은 고난을 받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것은 욥이 잘못했다는 말이 아니라, 즉 지혜는 인간의 잘잘못이 아니라 장차 모든 율법과 계시가 완성되는 그분의 그림이 그려져 있는 스티커를 욥의 어깨에다가, 마치 파스를 붙이듯이 그렇게 일방적으로 붙여놓았다는 것이다. 어제 그런 설교를 했는데 말이다.

여기서 성경을 한 군데 보겠는데, 마가복음 16장 16절을 누가 읽어보세요.

(막 16:16)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마가복음은 짧아서 16장이 마지막 장인데, 여기에 보면 뭐라고 하는가?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라고 하는데, 이것은 행함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율법은 '행하라' 라고 하는 차원인데 말이다.

욥의 경우에, 욥이 무슨 특별히 나쁜 짓을 행한 것이 있는가? 욥이 자기 자식을 위해서 제사를 드린 것이 과연 나쁜 짓을 한 것인가? 그렇지가 않은데, 욥은 적어도 행함에 대해서는 의로운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욥과 노아와 다니엘은 행함에 대해서는 당당하다는 것이다. 즉 그들은 당대의 의인이라는 말이다.

◈ 나는 죽었다가 깨어나도 못한다 !!

그런데 여기 16절에 보면, 이것은 '행하라' 라는 게 아니라 '믿어라' 라는 것인데, 즉 "니가 하지 못한 것을 누군가가 다 했다" 라는 것이다. 그게 복음이라는 말이다. 즉 "니가 하지 못한 것을 누군가가 다 했으니, 나는 못하고 그분은 했다" 라는 것을 믿으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냥 믿는 것이 아니라, 그 앞에 전제가 무엇인고 하니, "나는 죽었다가 깨어나도 못한다" 라는 것인데, 그리고 나서 "하지만 그분이 다 하셨다" 라고,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고, 그냥 "그분을 믿는다" 라고 하게 되면, 그분을 믿는 것도 자기 행함의 일부가 되어서, 자기가 잘한 짓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니 믿는다는 것은 일체 자기에게는 잘한 짓이 없다는 것인데, 심지어 예수님을 믿는 것도 잘한 짓이 아니란 말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무엇을 행하게 되면 그 관심사가 자기에게 쏠리게 되는데, 즉 "이것은 내가 행했어. 이 음식은 내가 만들었어"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항상 "내가 했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교회라는 것은 믿음이 살아나야지 행함이 살아나면 안 된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오늘 아침에 제가 먼저 교회에 와서 이 난로를 켰는데, 그러면 강의하는 동안에 "내가 이 난로를 켰어. 그러니 복을 받아도 내가 받아야돼" 라고 한다면, 그런 것은 성도의 모임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기가 난로를 켜든 말든, 그것과 상관없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에 주목을 해야하는데, 그게 성도라는 말이다.

◈ 복음은, 구원과 정죄가 모두 다 들어있어 !!

그래서 여기 마가복음 마지막 장인 16장 16절 보면, 물론 1장 1절도 마찬가지인데 말이다. 1장 1절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라고 해놓고, 16장 16절에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라고 하는데, 이게 복음이라는 것이다.

(막 1: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그런데 우리 인간들의 생각은 무엇인고 하니, 진짜 복음이라고 하면 무엇이 없어져야 한다고 여기는고 하니,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라고 하는, 즉 "믿지 않는 사람은 지옥에 간다" 라고 하는 것이 없어져야 제대로 된 복음이라고 생각하고 싶어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왜 그런가?" 라는 것이다. 

하고 보니 제가 어려운 질문을 하고 말았는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라고 할 때, 우리는 이것을 보는 순간 "천국에 가는 이 복음은 내 것이다" 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제일 마지막에 조건이 무엇인고 하니, "믿는 사람은 구원을 얻는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초반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나오니 그것이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라고, 그렇게 복음이 나왔으면, 예수를 믿지 않는 우리 엄마와 아버지도 구원을 받아주어야 자기가 기분이 엄청 좋아질 것인데, 그런데 그 뒤에 조건이 따른다는 것이다. 믿는 자는 구원을 얻고, 믿지 않는 자는 정죄를 받는다고 말이다. 

◈ 모든 일은 너 중심에서 벗어나 있다 !!

그렇다고 하면 뭔가 세상이 자기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인데, 바로 이것을 욥이 몰랐다는 말이다. 욥은 자기가 착하기 때문에, 즉 율법을 어긴 적이 없기 때문에, 물론 그 당시에는 율법이 오기 이전이라서 없었지만 말이다. 아무튼 자기가 바르게 살았기 때문에 저주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어디까지나 철저히 자기 중심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욥기를 비롯한 잠언서나 아가서의 특징이 뭔고 하니까, "모든 일은 너 중심에서 벗어나 있다" 라는 것이다. 그래서 아까 얼음 덩어리를 이야기했는데, 그렇게 동결된 상태에서 '나' 라는 것이 과연 있을 수 있느냐는 말이다. 얼음 덩어리는 하나밖에 없는데, 여기서 '나' 라는 것은 하나의 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즉 이 얼음 덩어리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보면, 우리 자신은 하나의 지체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인생을 좀 살았으면 적어도 이런 철은 좀 들어야 하는데, 이것을 저는 베니어판으로 보는데 말이다. 즉 이 세상은 축복의 베니어판과 저주의 베니어판으로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 두 개의 판 위에 사람들이 있다는 말이다.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는데 말이다.

◈ 지혜자의 여유로움을 !!

그러니 그것을 우리가 인생을 살만큼 살았다고 하면, 느긋하게 그것을 좀 받아들이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저의 개인적인 생각인지 몰라도 말이다. 그것이 바로 지혜자, 즉 지혜를 받은 사람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잠언서를 다 뗀 사람의 여유로움이나 느긋함, 바로 그렇다는 말이다.

그런데 지혜를 받지 못한, 즉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은 무엇인가? "이것을 지키면 복을 줄까? 주지 않을까? 저주를 받을까? 받지 않을까?" 라고 하면서, 그러니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는 목적이 무엇인고 하니, 교회에 나오지 않는 목적도 그렇고 말이다. 여유가 있을 때는 나오지 않다가, 답답하면 새벽기도에 나오고 말이다. 그게 무슨 의미인가? 철저하게 자기 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지혜에 속한 것이 아니라 여전을 법을 달라고 하는데, "하나님이여, 법을 주옵소서. 그래서 그 법을 지킨 나는 복을 받게 하시고, 법을 지키지 못한 저 사람은 더 후지게 살게 하소서" 라고 하는, 이것이 곧 고만고만한 인간들끼리 경쟁하는 모양새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잠언서나 아가서와 같은 지혜문서에 보면 항상 겸하여 나오는데, 법에 속한 사람들의 허우적거림이나 우왕좌왕함, 그런 뭔가 잡히지 않는데서 오는 불안함 등이 말이다.

◈ 그대로 멈춰라 !!

저의 책을 본 사람들 가운데 그런 분들이 굉장히 많은데, 설교도 많이 듣고 책도 많이 보았는데, 그런데 뭔가 손에 잡히는 것이 없다고 한다는 말이다. 그것을 저에게 하소연해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는데, 성령을 받지 않아서 그러하니 말이다. 굳이 잡을 이유가 없는데, 그것은 아직 동결되지 않아서 움직이는데, 동결이 되면 그대로 멈추게 되는데 말이다.

서기 79년에 베수비오 화산이 터져서, 그것이 이탈리아 남쪽의 나폴리 부근에 있는데 말이다. 여기에 있던 고대도시가 '폼페이(Pompeii)' 라고 하는데, 불과 18시간만에 이 모든 것이 다 화산재로 뒤덮여서 무덤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왕족도 있었고, 지방의원도 있었고, 상인도 있었고, 또 노예도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화산재 앞에서는 어떤 차이점이 없었다는 말이다. 그냥 덮이고 말았는데, 그것이 곧 종말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종말을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즉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한 마음으로, 하늘나라 이외에 다른 계급이나 차이점에 대해서 일절 신경을 쓰지 말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말이다.

(마 18:3)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니 결국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계속해서 우리를 힘들게 만들고 우리의 마음을 마구 흔들어놓고, 우리를 안절부절하도록 하면서 살아가도록 하는 것은, 그것은 바로 이 세상의 힘이 우리를 그렇게 한다는 말이다. 이 세상의 힘이 말이다.

◈ 야고보서는, 지혜와 율법이 둘 다 통합이 !!

신약에 잠언과 유사한 것이 나오는데, 즉 유일하게 잠언이라고 할 수 있는 대목이 있는데, 그게 바로 '야고보서' 라는 말이다. 잠언서에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야고보서를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율법의 완성으로서의 지혜이니, 그러니 이 야고보서에서는 지혜와 율법이 둘 다 통합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야고보서는 율법으로 해석하게 되면 되지를 않고, 방금 제가 이야기한, 즉 지혜와 율법의 결합으로 보게 되면 된다는 것이다.

그 예로서 야고보서 4장 4절을 보자.

(약 4:4)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에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

여기에 보면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하나님과 원수가 되지 않는 사람은 이 세상에 대해서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란 말인가? 세상과 친구가 되지 않으면 된다는 것이다. 사실은 신약성경 전체를 지혜라고 보면 되는데, 왜냐하면 신약이 율법의 완성이니 말이다.

오늘 강의에서 얼음, 즉 '동결', 이것 하나만 알면 된다고 했는데, 거기에 하나를 더 추가하면, 그것이 고린도전서 15장에 나오는 말씀인데 말이다. 그게 무엇인고 하니, 즉 '흙에 속한 사람' 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하나 더 추가해서, '1+1'로 알게 되면 오늘 강의는 오케이라는 말이다. 즉 '동결 + 흙에 속한 사람' 이라는 것이다.

(고전 15:47)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고전 15:48)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고전 15:49)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 흙에 속한 사람 !!

'흙에 속한 사람' 이라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흙이 되어야 할 사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아무리 세상과 벗이 되지 않으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는데, 어디 일주일에 한 번 교회 친구들만 만나면 해결이 되는가? 세상 친구들이 더 재미있는데 말이다.

우리는 세상을 벗어나서 살아갈 수가 없는데, 그러니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물론 동결도 잊지 말아야 하지만, "나는 흙에 속했다" 라는 사실이라는 것이다. 흙에 속한 자가 아무리 예쁘게 꾸며도 역시 흙에 속했다는 것이다.

◈ 여보, 제발 그만해 !!

어제 오후설교를 하고 나니 제 아내의 반응이 뭔고 하니, 야곱이 손자들에게 축복을 하듯이 어긋맞게 엑스자를 그었는데(ㅋㅋ), 하지만 그 순간 뭔고 하니, 우리가 흙에 속한 존재가 아니냐는 말이다. 흙에 속했으면서 왜 예쁜 흙이 되기를 원하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예쁜 흙은 흙이 아니냐는 것이다. 역시나 흙이라는 말이다.

자기의 과오나 자기 집구석이 엉망진창이라는 것을 까발리는, 그렇게 스스로 자기 허물을 노출하는 것이, 물론 그것이 제 아내의 경우에 자기 영혼의 아픔이겠지만, 하지만 그것은 자기가 흙에 속했다는 것을 평소에 놓치고 예쁜 흙, 참한 흙, 50대이지만 40대로 보이는 흙, 정말로 누가 봐도 칭찬하는 흙, 그러면 그런 흙이 하늘이 되는가?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 여기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흙에 속한 자가 하늘의 형상을 입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계속해서 흙으로 유지되어서 남아있어야 한다는 것인데, 그렇게 흙으로 죽어야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고 보너스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고, "나는 흙이 아니다" 라고 하는 순간에는 악마의 유혹을 받을 수밖에 없는데, "나는 잘 되어야 돼. 깨끗해야 돼. 훌륭해야 돼. 흠이 없어야 돼. 남의 모범이 되어야 돼. 순결해야 돼. 경건해야 돼. 완전해야 돼" 라고 말이다. 세상이 벗된다는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바로 이 세상과 벗된 모습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어려운 것을 해보면, 야고보서 4장을 하겠는데 말이다. 세상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만들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 다 세상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흙에 속했는데, 그렇게 흙에 속한 것들이 기분 좋게 만들고,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자기의 벗으로서 새롭게 등장하는 세상이니 말이다. 

◈ 너는 '흙' !!

세상을 좀 살았다고 하는 분들은 "나는 이 세상에 많이 시달렸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나이가 70이 넘어서 마음에 드는 쏙 드는 친구를 사귀면 뭐라고 하겠는가? 역시나 마찬가지인데 말이다. 그래서 우리 자신이 흙에 속했음을 까발릴 수 있는 어떤 배경이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우리가 좋아하는 이 세상이라는 것이다.

성경은 바로 그러한 우리 자신과 이 세상을 합쳐서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문서로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즉 그것이 우리가 속해있는 지혜문서가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잠언은 우리 속에 깊숙이 들어오는데, 물론 잠언은 외부에서 주어진 것이지만, 그 주어진 것으로 인해서 우리 자신이 생생하게 잠언이 되게 만드는 하나의 요소로서, 그렇게 우리는 거기에 작용하는 요소로서 끌려들어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계시가 될 수 있도록 잠언이 그렇게 조치를 취했다는 것이다. 그러한 가운데서 우리가 살 길은 무엇인고 하니, 우리가 흙이란 사실을 깨닫는 것이란 말이다. 우리가 성경말씀을 보지 않으니, 우리 자신이 대단한 존재인 것처럼 여겨지는데, 멋있고 우수한 존재로 말이다. 하지만 잠언을 보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물론 우리는 보기 싫은데 말이다.

◈ 일목요연하지 못한 잠언서, 왜?

그래서 제가 이렇게 요약을 해서 가지고 왔는데, 이렇게 주제를 23개로 나누어서 말이다. 그런데 잠언서를 보면 이런 주제조차도 왔다갔다하면서 흐름이 깨지고 하는데, 그래도 잠언서의 진도를 나가려고 하면 나중에 잠언이 아니라 잠이 온다는 것이다. 어떤 분이 잠이 오지 않을 때 저의 설교를 들으면 그렇게 잠이 잘 온다고 하는데, 지금 웃는 분들은 조금 수상한데 말이죠(ㅋㅋ). 

이렇게 왕에 대해서, 명예에 대해서, 악인과 의인에 대해서, 그렇게 같은 테마를 한꺼번에 다 모아놓았기 때문에, 빨리 읽는 사람은 15분이면 다 읽는다는 것이다. 그 많은 잠언을 불과 15분만에 말이다. 이렇게 일목요연하게 정리가 되고 요약이 되는데, 그런데 막상 잠언서를 보게 되면 마구 섞어놓았다는 것이다.

◈ 이 세상은, '모나미' !!

왜 그런고 하니, 우리의 몸이 그렇게 일목요연하지 않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 몸에는 각종 요소들이 다 섞여서 들어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그런 요소들이 잠재되어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 바깥에다가 우리가 그렇게 좋아하는 이 세상을 깔아놓았는데, 그렇게 우리의 친한 친구처럼 우리와 같이 합류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때에 우리는 가난에 대해서 안다고 하다가도, 갑자가 부자를 만나게 되면 그 부자가 더 좋아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자에게 문제가 있음을 부자를 통해서 알다가, 갑자기 왕을 만나게 되면, 그 왕에 대해서 우리의 흙된 존재임을, 즉 이 세상과 벗된 존재임을, 다른 말로 하면, 우리의 근본적인 죄와 욕망을 말하는데 말이다. 그런 것이 툭툭 튀어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와 접촉되는 어떤 사태에 따라서, 어떤 경우에는 왕으로, 어떤 경우에는 어리석음으로, 어떤 경우에는 명예로, 어떤 경우에는 거만함으로, 어떤 경우에는 의인으로, 어떤 경우에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로, 어떤 경우에는 친구의 관계로, 어떤 경우에는 교회의 관계로 말이다.

그렇게 우리의 몸이 하나의 잠언책이 되어서, 부딪치는 그때 그때마다 우리 속에 내장되어있는 완성된 지혜가, 조금 전에 말한 마가복음에서의 그 복음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지혜 안에 있음을 확인시켜주는 계기로서, 그렇게 우리가 다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 우리 인생이 일목요연한 것이 아니기에 !!

길게 이야기를 했지만 정리하면 다음과 같은데, 잠언서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있는 게 아니라 왜 섞여있는고 하니,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이 결코 일목요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새로운 사태가 벌어지게 되면, '울컥' 하면서 아무리 점잖은 인간이라도 성질을 낼 때는 내게 되어있다는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까,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낯선 사태 앞에서, 우리가 준비한 것을 미처 발휘하지도 못하고, 미처 우리가 준비하지 않은 것을 자극하게 될 때, 우리는 준비되는 않은 욕망이 거기서 마주치다가, 결국 우리로 하여금 후회하게 하는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말이 좀 어려운가요? 

◈ 아하, 미처 그것을 몰랐어 !!

강의가 끝나고 나서 저에게 질문을 하는 분들이 많은데, 그분들의 공통점이 무엇인고 하니, "목사님의 강의를 들으면, 이전에 누구하고 논쟁을 할 때 그것을 이야기해주면 참 좋았을 텐데, 왜 그때는 그런 생각이 나지 않았는지 모르겠어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ㅋㅋ).

물론 그때는 다른 것을 생각했는데, 무슨 말인고 하니, 여러 가지 주제가 있는데, 자기는 이것을 써먹으려고 만반의 준비를 다하고 있는데, 그런데 상대방이 그만 다른 것을 가지고서 나오니 어떻게 되겠는가? 자기가 준비한 것이 전혀 먹혀들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집에 와서는 땅을 치면서(?) 후회를 한다는 말이다. "야, 그때 이것을 사용하면 되는데, 무기가 이렇게 많은데 말이야. 개미를 잡는데 원자폭탄을 터트려서 상대방이 전혀 이해하지 못했어. 개미킬러를 뿌리면 되는데 말이야" 라고 하면서 말이다. 나사못을 뽑는데 망치를 들고 설치니, 그게 될 리가 없다는 것이다.

◈ 구약의 잠언은, 십자가 앞에서는 율법 !!

이처럼 잠언서가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우리 인간은 예상하지 못한 돌발사태에 대해서 우리는 항상 실수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구약에 있는 지혜문서인 잠언은 주님이 보시기에 율법이 된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 모든 율법은 우리의 죄를 더하기 위해서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러한 죄가 더한 곳에 무엇이 넘치는가? 놀랍게도 은혜가 넘친다는 것이다. 그러니 구약에 있다는 이유 때문에, 이런 잠언서와 아가서와 같은 성경마저도 율법적인 기능을 십자가 앞에서 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말씀이 완성된다는 말이다. (녹취자 - 아하, 그렇군요!)

(롬 5:20)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

그러니 우리가 잠언을 마주칠 때마다 우리는 흙에 속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는데, 그런데 잠언을 통해서 자기를 꾸며서 돋보이게 만들고 우수하게 만들려고 하는, 즉 동결된 상태가 아니라 점점 더 나아진다고 하는, 그렇게 자기 나름대로의 미래의 찬란한 모습을 추구하는 것이, 그것이 이 세상에서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도 어찌 그리 닮았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이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는 모습이나, 교회에 다니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더 추구함으로서 자기는 지금보다 더 우수한 존재가 되겠다고 하는 발상이나, 친구도 그런 친구가 없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사고방식이 똑같다는 말이다.

◈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

우리는 흙에 속한 존재인데, 하늘의 형상은 죽게 되면 입는다는 것이다.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 무엇과 같이 되었는가? 해와 같이 빛나는데, 마태복음 13장의 비유에도 보면 그게 나온다는 것이다.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난다고 말이다.

(마 13:43)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있는 자는 들으라

그리고 변화산 사건은 마태복음 17장에 나오는데, 거기서 모세와 엘리야는 해와 같이 빛나는데, 물론 그 앞에 있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초라하기가 이를 때가 없고 말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직 흙에 속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모세와 엘리야는 이미 그런 흙에 속한 군대생활을 다 끝내고 하늘에서 해와 같이 빛난 모습으로 있다는 것이다.

(마 17:1)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 가셨더니
(마 17:2)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그들이 그렇게 빛날 때, 그것은 그들이 훌륭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누가 그렇게 했는가?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들에게 해와 같이 빛나는 영광을 주었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 무엇과 같이 빛났는가? 예수님이 해와 같이 빛났는데, 즉 예수님의 몸이 하늘에 속한 형상을 입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아담에 속했기에 흙에 속한 형상을 입고 있지만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이렇게 흙이라는 사실을 알고 마음껏 이 세상에 나가서 뛰고 까불고 마음대로 해도 괜찮다는 것이다. 하지만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나는 흙에 속했고 나의 운명은 동결되었다" 라는 사실, 그것은 결코 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인생을 살만큼 살았으면 이 정도는 정리가 되어주어야 하는데, 물론 젊은 20대도 이렇게 정리가 되어주면 참 좋겠는데 말이다.

이제 잠언서에 대해서 감을 좀 잡았지 싶은데, 잠언서가 이렇게 일목요연하게 해주면 참 좋을 텐데, 왜 이렇게 분잡스럽게 주제가 너무나 얽혀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잠언서를 읽으면 잠이 올만하다는 것이다. 흐름이 있어야 하는데 자꾸만 깨어진다는 것이다. 조각조각으로 말이다.

그러면 이제 잠언서 1장에 들어가겠는데, 참 들어가지 전에 교재 15페이지를 보면, 들어가기가 참으로 힘드는데 말이다. 그렇지요? (ㅋㅋ).

** TV 코미디 프로에 '웅이 아빠' 라는 코너가 있습니다.

◈ 웅이 아빠는 죽었고 !!

이 '웅이 아빠' 라는 코너가, 물론 오래된 코너인데 말이다. 이것이 SBS의 '웃음을 찾는 사람들' 이란, 일명 '웃찾사' 라고 하는데 나오는데 말이다. 그게 뭐냐 하면, 아이디어가 참으로 기발하다는 것이다. 개그맨들이 자기 역할에 맞추어서 무대에서 연기를 하고 있는데, 그런데 무대의 저 뒤쪽에서 성우의 음성이 들리는데,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래서 웅이 아빠는 죽었고" 라고 한다는 것이다. 지금 무대에서는 웅이 아빠가 재미나게 살고 있는데 말이다.

그러면 그 소리를 듣자마자 웅이 아빠는 그 자리에서 졸지에 죽어버린다는 것이다. 정작 웅이 아빠 본인은 죽을 마음이 전혀 없는데 말이다. 그러면 그 다음에 무대 뒤에서 "웅이 엄마는 시집을 새로 가고" 라고 하면, 그러면 소리가 나는 대로 앞의 무대에서는 무조건 웅이 엄마는 시집을 새로 가야만 된다는 것이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우리 인간이 살아가면서 어떻게 기쁘고 슬프고 간에, 외부에서 들려오는 낯선 음성, 그것이 한 소리를 하게 되 면 인간은 즉석에서 죽고 만다는 것이다. 그것이 여기 교재에도 나오지만, 출애굽기 1장 6절을 보면, "요셉과 그의 모든 형제와 그 시대 사람은 다 죽었고" 라고 되어있다는 것이다.

(출 1:6) 요셉과 그의 모든 형제와 그 시대 사람은 다 죽었고

이미 '죽었고' 라는 것인데, 이렇게 죽었다고 하는 순간, 그들은 아무리 살고 싶어서 살 수가 없다고 하는 입장임을, 바로 그것을 죽은 입장에서 되돌아봐서 모든 인간은 자기가 살고 싶어서 산 것이 아니라는 것이 이미 결론이 났다는 것이다. 죽고 싶어서 죽은 것이 아니듯이, 산 것도 살도록 해주었기 때문에 '죽었고' 라고 말씀하신 그분이 살게 해주었기 때문에 살았고, 그리고 죽었던 시점은 그분이 '죽었고' 라고 했기 때문에 죽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주도권이 누구에게 있다는 말인가? 우리는 사나 죽으니 주의 것인데, 죽었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지금 성경말씀을 보고 있는데, 그러면 이 계시를 우리가 받게 되면, 사람이 아무리 풍족하게 살고 칭찬이 자자하고 해도, 결국 사람은 죽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지금 이 시간이 자기가 죽는 시간이라고 하면, 그러면 우리는 왜 살았는가? 그렇게 실컷 살아도 결국에는 죽는다고 하면, "도대체 내가 왜 살았는가?" 라고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

그러니 그동안 뭔가가 잘못이었는데, 그게 무엇인고 하니, "내가 산다" 라고 하는 것이 옳은 문장이고, 당연한 문장이었는데, 그런데 이게 틀려먹은 문장이라는 것은 죽는 순간에 비로소 온 몸으로 절감하게 된다는 것이다. "아하, 내가 산 것이 아니었구나. 누가 나를 살려주셨구나. 그런데 왜 이것을 죽는 순간에 알았을까? 바보같이 말이야" 라고 말이다.

왜냐하면, 그동안 아무도 그것을 가르쳐주지를 않았는데, 물론 성경말씀은 이미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때는 자기가 살았다고 여겼기 때문에 실감이 나지 않았는데, 그런데 막상 죽음의 경험을 하게 되면, 비로소 "내가 산다" 라는 것 자체가 전혀 성립되지 않는 문장이었음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산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다" 라고 되는데, 그렇게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말씀이 다가온다는 말이다. 이제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기 이야기임을, 즉 "나는 죽고 내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사신다" 라는 것을, 물론 죽을 때가 되면 알겠지만, 그 이전부터 진작에 알았어야만 될 일이었다는 것이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것을 가지고 제가 어제 낮 시간에 뭐라고 설교했는고 하니, 조금 어려운 말인데, '경험적 주체'고 했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내가 경험하는 그 순간만큼은 이 말씀은 나의 말씀이 된다" 라는 것이다. 그 이전까지는 아무리 안다고 해도 남의 이야기이고 말이다.

◈ 인간 이성은, 영원성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어 !!

그러면 오늘 잠언서를 이야기하는데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왜 나오는고 하니, 그것이 오늘 강의에서 또한 중요한 테마가 되는데 말이다. 아까 처음에는 동결이 나왔고, 그 다음에는 흙에 속했다는 것이 나왔고, 세 번째로 나오는 것이 바로 이것이란 말이다.

우리 인간의 이성 가운데는 영원성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즉 인간의 이성은 영원성을 추구한다는 것을 파헤친 유명한 철학자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칸트' 라는 것이다. 즉 "인간 속에는 영원성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다" 라고 그가 분석해내었다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별로 어렵지가 않는데, 즉 "나는 불멸하고 싶다" 라고 하는, 그런 불멸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다음에 어려운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교회에서 말하는 신학이라는 것이, 즉 성경해석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우리 인간 자신의 여망, 자기의 희망, 자기의 기대를 성경구절을 가지고 차용한 것에 지나지 않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믿음도 아닌 것을 가지고 믿음인 척을 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으면 장수하고 천국에 간다" 라는 것은 전혀 복음이 아닌데, 그러면 복음은 무엇인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셨다" 라는 것이 복음이란 말이다. 그러니 관심사가 여전히 자기에게 머물고 있으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 둘 중에서 하나는 가짜 !!

그런데 인간의 이성 속에 천국과 영원한 것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다고 하면, 이것은 사실 우리에게 불리한 요소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 속에 자기 여망, 자기 희망, 즉 천국에 가고 싶고 오래 살고 싶다고 하는, 그런 종교성과 진짜로 주님이 주신 믿음과는, 그 둘 중에서 하나는 가짜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 가짜를 가려내어서 버려야만 하는데, 하지만 진짜를 받지 못한 핑계로 가짜를 교묘하게 꾸며서, 그것을 가지고 믿음, 소망, 사랑이라고, 그렇게 성령의 은사라고 착각했을 경우에는, 여기에 대한 지적을 누가 해줄 수 있느냐는 말이다. 본인은 그게 안 된다는 것이다.

"교회에 와서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에 갑니다" 라고, 그것은 누구나 다 하는 이야기인데, 하지만 가만히 들어보면 다 가짜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가짜라고 이야기하면 사람들이 얼마나 화를 내는지 모르는데, "니만 잘났나? 니만 잘 믿나?"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러니 그 관심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어야 하는데, 만약에 그런 사람들처럼 "내가 믿어서 구원을 받는다" 라고 하게 되면, 그 믿음을 세월이 지나가면서 오전 오후마다 자기가 지켜야 하는데, 그것을 어떻게 지키느냐는 것이다. 치매에 걸리면 아무리 지키고 싶어도 안 되는데 말이다. 오늘 오셔야 될 분이 안 보이는데 말이다(ㅋㅋ).

◈ 믿음이 없으니 오버액션을 !!

그렇게 자기가 지키지 못한다는 것을 아니까 오버액션을 하는데, "10년 전에 기도해서 은혜를 받았고, 그리고 암에서 나았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목사님을 잘 섬겨야 한다" 라고 오버를 하는데, 하지만 성경에 도대체 목사와 관련해서 그런 내용이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다. 그런 것은 전혀 믿음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자꾸만 "우리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로 부흥이 되어서, 이번에 엄청 크게 지었다" 라는 식으로 나오는데, 왜 자꾸만 그렇게 곁가지를 동원시키는가? 그것은 바로 그만큼 자기가 믿음이 없어서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니 실상 자기는 믿지도 않으면서, 믿는 척을 하기 위해서 그렇게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온갖 기독교적인 것을 가지고 자기의 믿음 없음을 숨기려고 하는데, 그래서 윤리적이고 거룩한 것을 모두 동원시킨다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 라고, 그렇게 끝난 문제인데 자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자기가 믿음생활을 한 지가 몇 년이 되었고, 그리고 자기가 어떻고 저떻고 하면서 그렇게 자기 이야기를 끄집어낸다는 말이다.

◈ 잠언서에 왜 죽음이 들어있는가?

그 차이점이 무엇인고 하니, 그래서 잠언서에는 죽음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즉 "니가 이미 죽었다고 치고" 라는 것이다. 그러면 자기 인생에 있어서 "내가 살았고" 라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말이다. "내가 살았고" 라고 되려면, "내가 살아있기에 이제부터 말씀을 지키고, 순종해야지" 라고 나오는데, 그게 우리에게는 옳지 않은 문장이라는 것이다. "주께서 지켜주시고" 라는 게 옳은 문장이란 말이다.

그런데 자기가 죽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니, "이제부터는 내가 예수를 믿고, 내가 지켜야지" 라고 나오는데, 그렇게 되니 자꾸만 가짜가 가짜를 낳게 된다는 것이다. 이단이 교주를 낳고, 교주가 목사를 낳고, 그렇게 자기들끼리 한 통속이 된다는 것이다. "내가 지켜야지" 라고 하니 말이다.

다시 이야기를 해보면, 욥이 뭔가 잘못한 것이 있는가? 없는데, 그런데 고난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욥기가 지혜문서라는 말이다. 즉 율법에 속한 것이 아니라 지혜에 속했다는 말이다. 그렇게 지혜에 속한 사람은, 자기 행동과 상관이 없이 자기 인생은 자기의 잘잘못으로 인생을 꾸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 의해서 그런 인생을 살라고 이미 맡겨준 것이란 말이다.

◈ 전도서의 경우에 !!

우리가 수련회 때 전도서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게 작년 여름이었지 싶은데 말이다. 전도서의 내용이 무엇이었는고 하니, "착하게 산다고 해서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고, 나쁜 짓을 한다고 가난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한 번 적어보겠는데, 이게 얼마나 좋은 말씀인지 모르는데 말이다. 

악한 놈이라고 해서 가난하게 되는 것이 아니고, 일찍 죽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반면에 착한 놈이라고 해도 얼마든지 일찍 죽고, 또한 가난하게 된다는 말이다. 악한 일을 해도 권력을 얻고, 대장노릇을 한다는 것이다. 잘 먹고 잘 산다는 말이다.

그리고 같은 지혜문서인 시편에 보면, 믿음이 없어도 죽을 때까지 고난도 없고 만사가 형통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절에 다녀도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해놓고 시편에서는 뭐라고 하는고 하니, "그래도 역시 죽은 놈이잖아" 라고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부자로 살아도 지옥에 가고, 가난하게 살아도 천국에 간다는 말이다.

◈ 이미 끝난 이야기 !!

아무리 악행을 일삼고 권력을 얻어도, 마지막에는 어떻게 되는가? 지옥이라는 것이다. 잠언서 8장에 보면, "지혜는 얻는 자는 생명을 얻지만, 지혜가 없는 자는 생명이 없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미 끝난 이야기라는 말이다.

(잠 8:35) 대저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얻을 것임이니라
(잠 8:36) 그러나 나를 잃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해하는 자라 무릇 나를 미워하는 자는 사망을 사랑하느니라

그러면 그것을 꼭 우리가 죽을 때 경험을 해야하겠는가? 살아있을 때 경험하면 안 되느냐는 말이다. 이미 자기는 죽었으니, 죽은 자로서 산다고 치고, 그랬을 때 생명이라는 것을 이미 보장받은 것인데, 우리 행동과 상관없이 말이다. 그래서 잠언서에는 이미 죽음이 들어있는데, 그리고 죽음이 있는 그곳에 생명이 있다는 말이다.

◈ 그리스도의 판박이기 때문에 !!

그래서 욥기의 경우에는 "너희를 죽이는 자가 너희에게 영생을 주노라. 그러니 욥아 걱정하지 마라. 나쁜 짓을 해서 고난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판박이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고난을 준 것이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욥에게 그리스도의 일을 맡기는데, 즉 욥이 기도하면 친구들이 용서를 받고, 반면에 욥이 기도하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하는데, 그래서 욥이 기도함으로 친구들의 죄를 사해준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기능이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도 역시 그런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복음을 전파하면서, 우리의 몸 자체가 하나의 계시로서, 즉 "나는 흙에 속했으며, 나는 죄밖에 지을 수 없다" 라는 것을 보여줌으로서, 이렇게 그리스도에게 속한 소자, 작은 자, 즉 형제로서 대해주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대하는 식으로, 그렇게 우리가 계시 안에 존재하도록 성령께서 조치를 취해주신다는 말이다.

◈ '동결'과 '흙' !!

그러니 이번 강의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이미 강물이 얼었는데, 즉 동결이 되었다는 것이다. 시간이 흘러도 동결된 것은 전혀 변하지 않고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거기서 하나의 점박이로서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세상에서 벗어날 수 없는데, 세상 친구를 아무리 사귀지 않으려고 해도 사귀지 않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우리는 시장에 가서 통일교 교인이 파는 채소를 살 수 있고, 여호와 증인이 운영하는 식당이 갈 수 있다는 것이다. "당신이 종교가 무엇인가요?" 라고 묻는 게 아니라, 그냥 물건이 값싸고 좋으면 구입하게 되는데, 그러니 이 세상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당신은 대한예수교 장로회 합동측인가요?" 라고 묻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렇게 물을 수 있는 세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까, 우리가 흙에 속했다는 사실인데, 하지만 예쁜 흙, 참한 흙, 우수한 흙, 쫀득쫀득한 흙, 그렇게 자기 주제를 벗어나는 환상 가운데 있게 되면, 우리는 이 세상과 더불어 같이 가게 되는데, 그야말로 간음한 여인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이 세상과 벗된 자가 말이다. 우리는 결코 우수하지 않는데, 이렇게 살다가 죽고 만다는 것이다. 사실은 진작 죽어야 하는데, 주님께서 계속해서 살려내니 살고 있다는 말이다.

(약 4:4)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에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

이번에 경주에서 리조트의 강당이 무너져서 그 19살의 신입생들이 깔려죽고 말았는데, 그들이 어디 나쁜 짓을 하다가 죽었는가? 신입생 환영회에 참석했다가 그만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들이 무슨 죄가 있는가? 오히려 그것을 보고 회개하지 않는 자가 죄가 있다는 말이다. 욥기에 있는 말씀 그대로라는 것이다.

(욥 1:19) 거친 들에서 대풍이 와서 집 네 모퉁이를 치매 그 소년들 위에 무너지므로 그들이 죽었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 한지라

그러니 이미 우리는 종말인데, 즉 우리는 죽은 자인데 주님께서는 끈질기게 살려내고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잠언을 증거하라고 말이다. 지혜의 덩어리로 살라고 말이다. 그리고 우리가 속한 이 세계는 이미 동결되었음을, 십자가에서 모든 죄가 용서되었다는 것이다.

이 세상은 두 개의 판으로 되어있는데, 하나의 축복의 판이고 다른 하나는 저주의 판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 두 개의 베니어판 위에서 뛰놀고 있다는 말이다. 가만히 따져보면 전혀 어렵지가 않은데, 의외로 간단한 문제라는 것이다.

이제 잠언 1장을 보겠는데, 먼저 7절을 보자.

(잠 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 진짜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분이 누구인가?

여기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라고 하는데, 여호와를 경외하는 분이 누구인가? 오직 예수님뿐인데, 다른 사람들은 여호와를 몰랐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작 여호와와 동행을 하면서도 동행하는 그분이 누구인지를 몰랐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들은 멸망을 당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인데, 성령이 왜 오셔야 하는고 하니, 성령은 누구의 영인고 하니, 그리스도의 영을 성령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3장에서(?) 말이다. 그렇다면 왜 그리스도의 영이 와야만 하는가?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신' 인데 말이다. 즉 하나님의 영이라는 것이다.

(롬 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 그리스도의 영이 곧 하나님의 영 !!

그런데 신약시대에 오면 어떻게 되는가? 하나님의 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이 곧 하나님의 영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알았다는 말이고, 그때부터는 "아하, 그리스도께서 내 속에서 나를 살려내는구나" 라는 것을 아는 자가 곧 성령을 받은 자라는 것이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는 잠언을 가지고 왔고, 즉 성경전체를 가지고 오셨는데, 그래서 우리는 그 성경말씀에 비추어보면, 자기가 그동안 주제파악도 하지 못하고 날마다 우수한 존재라고 여기면서 살아간다고 하는 것을, 그런 현상을 유발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때마다 우리는 "내가 세상과 또 벗이 되어서 살았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 성령께서 그렇게 하신다는 말이다.

따라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라고 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재편성이 되는 것을 너희들은 각오해라"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즉 "이스라엘아, 이제부터는 법이 아니고 지혜다. 물론 법도 동행하지만, 법보다는 지혜로 할텐데, 너희들은 이 지혜 앞에서 너희들이 얼마나 자기 중심인가를 파악하라" 라는 말이다. 

◈ 예수님은 율법과 지혜를 통합해서 !!

우리는 우리 자신의 개인중심으로는 율법에 대해서 실패할 수밖에 없는데, 그렇게 실패하면 희망이 있는가? 실패로 끝나면 그것으로 그만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잠언은 무엇인고 하니, 실패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완성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으로 실패해서 지혜로 다시 돌아오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준비된 구원이 거기에 있다는 말이다. 즉 예수님은 율법과 지혜를 통합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이것을 풀어보면, 예수님은 율법의 저주 아래서 죽으시고, 지혜의 완성으로서 살아나셨다는 것이다.

◈ 욥은, 예수님으로서 고난을 !!

욥기의 경우에, 욥의 친구들이 인간이라고 하면 욥은 예수님이라는 말이다. 그 당시로 보면 말이다. 욥의 친구들은 욥을 오해했는데, "니가 무슨 하나님인가?"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재미나게 일을 하셨는데, 그게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이 육신이 되셨는데, 그러면 육신이 되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 육신이 되신 하나님을 죽임으로 말미암아서, 인간들이 알고 있던 하나님은 몽땅 그 순간에 가짜임을 폭로를 시키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들이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전부 다 가짜라는 말이다. 하나님은 이 땅에 오신 예수님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의 눈에는 그 예수님이 하나님이라고 도저히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거를 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들이 사는 세상에는 하나님은 그렇게 많지만, 진짜 하나님은 이미 사라지고 없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없는 가운데, 가짜 하나님만 난립을 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상숭배라는 말이다.

교회라고 하면 당연히 예수님의 십자가 중심이 되어야 하는데, 그런데 예수님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한다면, 그것 자체가 교회가 아니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십자가 중심으로 하면 사람들이 교회에 안 나옵니다" 라고 하는데, 그렇게 안 나와야만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가짜를 가짜라고 해주어야 하니까 말이다.

아니 가짜 명품 가방을 들고 있는데, 가짜 명품 시계를 차고 폼을 잡고 있는데, 그래서 그것을 보고는 가짜라고 지적하는 게 무엇이 잘못이냐는 말이다. "그래도 진짜라고 생각하면 되잖아" 라고 한다면, 하지만 그것은 그 어떤 위로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칸트가 이야기한 것처럼, 인간 속에는 하나님이 있는데, 즉 인간은 영원성을 사모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가짜라는 말이다. 그 증거가 무엇인고 하니, 그런 영원성을 추구하는 인간들에 의해서 예수님이 뭇매를 맞고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진짜 하나님은 당연히 매를 맞은 하나님만이 진짜 하나님이고, 그 나머지는 모두 짝퉁이라는 말이다. 인간들이 아무리 "전능하신 하나님! 자비하신 하나님!" 이라고 해도, 그것은 다 가짜라는 것이다.

◈ 매맞은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 !!

인간들이 그렇게 전능하신 하나님을 운운하면서 설치니 진짜 하나님이 "그래, 알았다" 라고 하시면서 진짜 하나님을 보내주셨는데, 그런데 인간들이 멱살을 잡고 흔들고 그만 귀싸대기를 때라고 급기야 죽여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매맞고 죽으신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인간들이 예수님의 등짝을 때릴 때 얼마나 기분이 좋았겠는가? "꼴좋다. 자칭 하나님이 나 같은 인간에게 맞아도 반항조차도 하지 못하고, 가관이다" 라고 하는데, 바로 주님은 그런 식으로 오셨다는 것이다. 반항하지 않게 말이다. 왜냐하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지혜의 근본이기에 말이다.

그래서 잃어버린 이스라엘이 십자가로부터 새롭게 시작해서, 이스라엘의 새로운 12지파가 거기에서 생겨난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성령을 받았기에, 그리스도의 영을 받았기 때문에, 이러한 사실을 도저히 숨길 수가 없는데, 마치 천기를 누설하듯이 까발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창세기를 봐도 그리스도 중심으로, 잠언서를 봐도 그리스도 중심으로, 모든 성경말씀을 그렇게 십자가 중심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통일된 그리스도의 세계임을, 성령께서는 우리의 헛됨을, 즉 우리가 흙이라는 사실을 통해서 전하게 하신다는 말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께서 우리가 오직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라고 살려주시는 취지가 곧 지혜의 완성임을 깨닫게 해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니 날마다 그 살려주시는 취지를 결코 잊지 않게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4,3,5 오후 3시에 마침.

                                                          개인적으로 겨울이 너무 싫지만, '동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