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대구강의] '잠언'속의 그리스도 4 - 경로
14,03,24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16페이지부터 살펴보자.
** 잠언에 나오는 모든 지혜는 여호와에게서 나와요. 따라서 여호와에게서 나온다는 것은, 그 지혜가 나오는 출처가 한 곳으로 정해져있다는 말입니다. 당연히 우리 인간에게는 지혜가 나오지 않습니다.
◈ 모든 지혜는 여호와에게서 !!
이게 굉장히 중요한 대목인데, 즉 잠언에 나오는 모든 지혜는 여호와에게서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에게서 하나님과 유사한(?) 뜻이 나오더라도 그것을 지혜라고 간주하면 안 되는데, 지혜를 다른 말로 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인간에게서 진리가 나올 수 있느냐는 것이다.
사도바울의 경우에, "그가 복음을 전했으니까 그에게서 진리가 나오지 않는가?" 라고 하면, 과연 사도바울이 그것을 수긍하겠느냐는 말이다. 그는 오히려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굉장히 겸손해 보이는데, 그런데 막상 그렇게 이야기를 해버리면 그만 문제가 생기고 만다는 것이다.
그것이 어떤 문제인고 하니까, 사도바울을 통해서 복음이 나왔을 때, 그것은 사도바울 본인의 지혜가 아니고 주님이 주신 지혜라고 생각하면, 문제가 깔끔하게 해결이 된 것 같지만, 사실은 더 복잡하게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 사도바울의 말을, 오늘 본문에서는 솔로몬의 말인데, 그렇게 우리가 사도바울의 말을 들었을 때, 그것을 자기가 제대로 이해를 했다고 여길만한 근거가 과연 우리 자신에게 들어있느냐는 것이다.
◈ 사도바울은 하나의 '매개'로서 !!
사도바울 본인이 복음을 전하면서, "이것은 내 의견이 아니고 예수님에게 받은 것이다" 라고 했는데, 그것을 '매개', 혹은 '매개체' 라고 하는데 말이다. 즉 자기는 그냥 중간에 통과만 할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매개라는 것은 무엇을 염두고 두고 있는고 하니, 자기 본성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하는, 즉 섞이지 않았음을 강조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하면, "이것은 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나는 그냥 매개물에 불과합니다. 내 의견이 아닙니다" 라는 것이, 이것이 사도바울과 예수님의 관계에서는 아주 깔끔하게 해결되었는데, 즉 사도바울은 예수님의 종으로서, 사도로서 전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보아야 하는 게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우리 자신이 그 말씀을 이해하게 될 때, 그것이 두 가지의 경우인데, 먼저 하나는 "내가 이해했다" 라는 것이고, 두 번째로는 그와 반대로 "내가 이해하지 못했다" 라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 그런 내용은 없습니다 !!
그러면 여기서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내가 이해했다" 라는 것에 있어서, "이것이 과연 사도바울이 전한 복음에 들어있는가?" 라는 것이다. 그것을 제가 묻고 싶다는 말이다. 사도바울이 전한 복음 속에 우리교회 성도님들이 그 말씀을 이해했다는 것이 과연 들어있느냐는 것이다.
누가 대답을 좀 해주었으면 좋겠는데 말이다. 사도바울이 전한 복음 속에 어떤 특정 교회 교인들이, 그것을 이해했다는 내용이 들어있느냐는 말이다. 전혀 그것은 들어있지 않은데, 그런데 왜 자기가 일방적으로 이해한 것이 진짜로 이해한 것이 맞다고 하느냐는 말이다. 그런 근거는 없다는 것이다. 지혜적으로 보면 말이다.
◈ 다시 정리하면 !!
늦게 오신 분들을 위해서 다시 하겠는데, 사도바울은 자기가 말한 것은 자기 생각이 아니라 예수님의 종으로서, 예수님에게 받은 바를 그냥 흘려보내는 식으로 했다는 것이다. 옛날에 산 위에 왕궁을 짓고 성전을 지을 때, 거기에 사람이 살려고 하면 반드시 물을 저장하는 곳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물이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는데, 신체의 75프로는 물로 되어있는데, 물론 나이가 들어가면 그 양도 줄지만 말이다. 그러니 산 위에 집을 지었다고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그 산 위에 물이 있는가?" 라는 것이다. 지리산 꼭대기에 사는 것은 좋은데, 그 위에 물이 고여있느냐는 말이다. 물이 있으면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렇게 위에 저수지를 만들고, 아래 마을에서는 그 물을 사용하게 되는데, 그 물을 통과하는 수로의 경우에, 바로 그 수로가 매개라는 말이다. 이제 이해가 되지 싶은데, 물이 그냥 수로에서 튀어나오는 것이 나오고, 위에 있던 물이 수로를 통해서 아래로 흘러온다는 것이다.
그렇게 사도바울은 자기를 수로로 보는데, 그래서 "이것은 내 의견이고, 이것은 내 뜻이고" 라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사도바울의 서신에 그런 표현도 나오지만, 그런 표현마저도 예수님의 계시로서 성령께서 채택을 하셨기에, 사도의 개인적 의사라고 보면 안 된다는 말이다.
◈ 니들이 진리를 알어?
그러니 사도바울과 예수님의 관계는 깔끔한데,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아하, 사도바울이 이런 뜻을 가지고 있구나" 라고 우리가 이해를 했을 때, "그것을 이해를 했다. 하지 않았다" 라는 판정을 누가 내려는고 하니,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 내린다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 자신이 판정을 했으면, "내가 제대로 이해를 했다" 라고 판정해줄 진리, 그 진리를 잠언서에서는 지혜라고 하는데, 그러면 과연 그러한 진리와 지혜가 우리에게 확보가 되어있느냐는 것이다. 물론 우리에게는 전혀 그런 진리를 확보되어있지 않은데, 그러니 여기서 그만 복잡한 문제가 발생된다는 것이다.
◈ 이해가 아닌 믿음의 고백을 !!
그래서 제가 여기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고 하니, 우리는 "내가 복음을 이해했다" 라는 말은 할 수가 없고, "나는 복음이 덮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라고, 그렇게 믿음의 차원에서 고백을 해야한다는 말이다. 이해가 아닌 믿음의 차원에서 말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고 "나는 복음을 이해했어요" 라고 하면, 그만 그것은 머릿속으로 들어가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그 말을 이해했어요" 라고 하지 말고, "나는 지금 하루하루가 복음 안에서 움직여진다는 것이 믿어집니다" 라고, 그렇게 인정이 되어진다고 해야한다는 것이다. 이해가 된다고 하면 안 되고 말이다.
◈ 우리도 주님의 지혜가 통하는 수로(水路)가 !!
예를 들어서, 자기가 어떤 실수를 했다고 하면, 즉 사무실을 걸어가다가 그만 난로를 걷어차서 불이 났다는 것이다. 그러면 "아하, 저렇게 벌건 것이 불이구나" 라고 이해를 하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난로를 건드려서 넘어지게 했음을 인정하라는 말이다. 즉 우리는 복음 안에서, 매일같이 복음과 마주친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해하기는 무엇을 이해한다는 말인가? 어디 복음을 열심히 공부해서 하늘나라에 가기 위해서 시험이라도 칠 일이 있느냐는 말이다. 그러니 매일같이 복음과 부딪치고 있음을, 즉 진리와 부딪치고 있음을, 다른 말로 지혜와 부딪치고 있음을, 그것을 체험하고 있음이 수긍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유도 없이 말이다.
그러면 우리도 무엇이 되는가? 사도바울의 경우처럼 주님의 지혜가 통하는 수로가 되고, 즉 우리도 매개가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신앙생활인데, 그러니 어떻게 이해가 되고 써먹는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여전히 자기가 주인공이기에 말이다. 그러니 그것은 전혀 신앙생활이 아니라는 말이다.
◈ 옛날에도 왕따가 있었는데 !!
학교에 가보면, 우리도 과거에 학교를 다녀봐서 알지만, 옛날에도 왕따가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때는 당한 아이가 참았기에 그냥 지나갔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런 아이들의 특징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 주장을 강하게 펼치지 못하고 정신적으로 약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놈도 쥐어박고, 저놈도 쥐어박고,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물론 저는 한번도 그런 일을 당하지는 않았는데, 물론 쥐어박는 것도 아니고 그냥 구경하는 비겁자이었다는 것이다. 왕따를 당하는 아이를 보호하지 못하는 말이다. "이상하다. 왜 방어도 못하고 저렇게 얻어만 맞지? 자기를 때린 아이에게도 잘해주고 말이야" 라고 하는, 그런 입장이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그게 정신적으로 약해서 그러한데, 아이들이 무엇을 알겠는가? 자기보다도 약하다고 여기니까 때린다는 것이다.
◈ 매일 매일 쥐어 박히면서 !!
그런데 지금 우리를 누가 쥐어박는고 하니, 지혜가 와서 쥐어박는다는 것이다. "아니 그러고도 이게 인간이야? 마귀의 자식이지"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툭툭 쥐어박는데, 하지만 그렇게 쥐어박을 때마다 우리는 고맙고 감사한데, 왜냐하면 천국에 우리를 데리고 갈 분이 와서 말씀을 우리를 쥐어박으니 말이다. 즉 "이런 마음가짐으로 천국에 가서 살겠어? 천국에 가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데모라도 할 폼인데, 그렇지?" 라고 하시면서 책망하시고 자극을 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반응을 하게 되는고 하니, "아하, 이것이 말로 설명이 도저히 불가능하구나. 내가 이해를 한다는 차원이 아니라, 내가 아예 그 속에서 푹 젖어서 사는구나" 라고 하는 것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렇게 그 안에서 젖어서 사는데 굳이 자기의 신앙생활을 따로 끄집어낼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햇볕이 내리쪼이면 다른 사람들은 "야, 따뜻하구나" 라고 하겠지만, 우리는 "저 햇빛은 노아언약에 의해서 선인과 악인에게 다 골고루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구나. 그런데 나는 햇빛을 이렇게 공짜로 받고 공기도 그냥 마시면서 왜 짜증을 내지?" 라고 하면서, 그렇게 말씀에 의해서 쥐어 박히면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렇게 쥐어 박힐 때마다 "내가 가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 의해서 내가 소유를 당했구나" 라는 것을 느끼면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지혜 안에서 살아가는 모습이란 말이다. 그래서 여기 교재 16페이지에 보면, "잠언에 나오는 모든 지혜는 여호와에게서 나와요" 라고, 아주 작고 간단한 문장인데, 그만큼 중요하다는 말이다.
◈ 또 다시 정리하면 !!
다시 한번 정리하면, 사도바울이 예수님에게 계시를 받을 때 그는 매개체였다는 것이다. 이런 '매개체' 라는 것은, 마치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를 때 수로가 필요하듯이, 그런 수로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도바울만이 수로가 아니라, 사도바울과 동일한 성령을 받은 자들은 모두가 다 그러한 수로로서 사용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원한 물이 내려가면 우리 속도 시원해지는데, 물론 우리는 쥐어 박히고 맞아야 시원한데 말이다(ㅋㅋ). 얻어맞지 않으면 뭔가 엉뚱한 곳으로 가는 것 같다는 것이다. 그렇게 헤매고 있는데 '탁' 하고 때려주니 방향이 떠올라서 "아하, 이쪽 길이로구나" 라고 하게 되는데, 그러니 얻어맞으면서도 항상 감사하게 된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 16페이지를 살펴보자.
** 당연히 우리 인간에게는 지혜가 나오지 않습니다. 정말로 잠언을 아는 사람은 어떤 결과를 드러내느냐 하면, "잠언을 내가 지켰다" 라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지혜의 출처는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였습니다" 라고 고백합니다.
◈ 잠언을 내가 지켰다 ??
여기에 보면, "'잠언을 내가 지켰다' 라고 나오는 것이 아니다" 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잠언에서 어떤 것들을 배워야 합니까?" 라는 질문자체를 우리가 할 필요가 있는가? 없는가? 갑자기 어려운 질문을 던져서 죄송한데, 즉 "잠언에 어떤 것들이 있으며, 내가 어떤 것을 지켜야 합니까?" 라는 질문을 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다.
전혀 그럴 필요가 없는데, 왜냐하면 잠언은 자기가 지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잠언을 실행에 옮기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렇게 하면 되는데, 자기가 뭔가를 당하게 되면 잠언을 찾아보라는 것이다. 그러면 거기에 모두 나온다는 말이다. 그것은 무릇 잠언뿐만이 아니라 성경자체가 그러한데, 우리가 성경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일을 당하게 되면, 그러한 것이 성경에 모두 다 나와있다는 것이다.
◈ 느부갓네살 왕의 꿈 !!
예를 들어서, 다니엘서 2장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오는데, 우리가 잠언서를 하면서 미리 서론적인 이야기를 많이 해야하는데 말이다. 왜냐하면, 이 잠언서가 예상보다 훨씬 더 난해하기 때문에 말이다. 여기 다니엘서 2장을 보면 느부갓네살 왕이 꿈을 꾸는데, 그런데 정작 그 꿈의 내용을 모른다는 말이다.
(단 2:1) 느부갓네살이 위에 있은지 이년에 꿈을 꾸고 그로 인하여 마음이 번민하여 잠을 이루지 못한지라
어제 낮에도 언급한 적이 있는데 여기서 다시 해보면, 꿈과 현실은 분명히 다른데, 꿈에서 깨어나면 현실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꿈과 현실은 같이 가지 못한다" 라는 것이다. 어렵지만 이것을 설명하고 가겠는데, 예를 들어서 여기 이렇게 같은 식판에 밥과 반찬과 국이 나온다고 하면, 이렇게 밥을 먹고 반찬을 먹고 국을 먹으면 되는데, 이럴 때는 깨어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수저를 가지고 골고루 먹으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꿈과 현실 사이에서는 그렇게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반드시 어떤 과정, 즉 경로를 하나 거쳐야 한다는 말이다. 어떤 경로인고 하니, 깨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깨어날 때, 그런데 자기 스스로 깨어날 수 있는가? 없는데, 그러니 깨어난다는 것은 수동성이라는 말이다. 아침에 해가 떠오르면 깨어나는데, 캄캄한 밤이면 절로 잠이 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따스한 해님의 미소가 우리를 깨어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 잠자는 자여, 깨어나라 !!
그런데 에베소서 5장에 보면 뭐라고 하는가? "잠자는 자여, 깨어라" 라고 말씀하는데, 그러니 이것은 곧 우리 내부에 있는 능력으로 인해서 우리를 보고 스스로 깨어나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 '깨어라' 라고 하는 말씀 자체가 우리를 깨어나게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내부에는 그런 능력이 전혀 없으니 말이다.
(엡 5:14)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
◈ 현실로 돌아오지 못한 느부갓네살 !!
꿈과 현실 사이에서 느부갓네살은 "이것은 꿈이고, 이것은 현실이다" 라고 하면서 현실로 돌아왔는데, 즉 중간에 깨어났다는 것이다. 그런데 실상은 그는 깨어나가는 했지만 아직도 현실로 돌아오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는 꿈의 내용을 모르기 때문에 말이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를 말이다. 그게 시시한 개꿈이라고 하면 잊어도 상관이 없는데,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느부갓네살이 도저히 잊지 못할 꿈을 꾸게 하셨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느부갓네살의 미래이기 때문에 말이다.
다니엘서에 보면, 느부갓네살의 미래가 어떠한고 하니, 그 느부갓네살의 미래가 계시가 되면, 그것이 느부갓네살의 개인적인 미래가 아니라 전 인류의 미래가 된다는 것이다. 기독교 신자가 성경을 보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게 자기 개인의 미래가 아니라, 거기에 자기를 포함한 전 인류의 미래가 담겨있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성경은 어떤 과학책이나 국어책이나 영어책이나 소설책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게 간주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소설은 '깨어있다' 라는 것이 필요가 없는데, 그냥 도서관에 앉아서 보면 된다는 것이다. 다 보았으면 다른 것을 보면 되고 말이다.
◈ 우리는 스스로 깨어날 재주가 없기에 !!
하지만 성경은 자기가 말한 현실이라는 것을 잘라버리고, 성경 속의 현실로 집어 들어갈 때는 반드시 우리를 보고 "이 인간아, 일어나서 성경 속의 현실로 들어가야지" 라고 하면서 우리에게 깨어나라고 하는데, 그런데 우리는 깨어날 재주는 없고, 그래서 '깨어나라' 라는 말씀자체가 우리를 깨어나게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령을 통해서 말이다.
그럴 때 우리는 그런 깨어남을 통해서, 만약에 성령을 받지 않으면 "지금 나는 잠자는 상태에 있다" 라는 것이, 그게 에베소서 5장에 나오는 이야기라는 말이다. 방금 했지만, 14절에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라고, 그렇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만약에 일어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그런 상태에서 성경을 보게 되면, 즉 헤롱헤롱한 상태에서 보게 되면 성경 내부의 세계로 들어갈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성경을 백 독을 해도, 그게 잠자는 상태에서 백 독을 한 것이니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것이다. 천 독을 하더라도 그 의미를 전혀 모른다는 말이다.
성령이 오셔서 "정신을 차려. 너는 다른 사람과 달라야 돼. 너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으니, 그 형상을 위해서 주님이 작업을 하셔. 그러니 너는 깨어있어. 나는 너를 보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너의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보고 이야기하는 거야" 라고, 그렇게 우리 속에 있는 그리스도를 보시고 이야기한다는 말이다.
◈ 성도는 '수로(水路)' 역할 !!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하나님에게, 주님이 주님에게 이야기하시는데, 우리는 매개물이 된다는 것이다. 만약에 하나님이 물이라고 하면, 우리는 그 물을 흘려보내고 또 흘려보내는 일종의 수로 역할이라는 말이다. 물이 아니라 '수로(水路)'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을 마귀가 와서 훼방을 놓는데, 즉 "너는 그런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다른 사람들과 같이 어울려서 살아라" 라고 말이다. 그러면 우리는 같이 살아갈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몸 자체가 죄인이기 때문에 말이다. 그렇게 같이 살아가는데, 그런데 성도는 성령께서 오셔서 자극을 주시는데, "그게 아니야. 너는 지금 잠자고 있어. 그러니 깨어나라" 라고 말이다.
◈ 나는 누구인가?
지금까지는 쉬웠지만 이제부터는 어려운 것을 하겠는데, 물론 질문도 하지 않고 말이다(ㅋㅋ). 꿈과 현실 사이에서 느부갓네살이 현실로 돌아왔다고 여겼지만, 자기는 여전히 꿈속에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꿈은 무엇을 요구하는고 하니, 꿈은 반드시 해석을 요구하는데, 사람은 해석이 되지 않는 꿈은 찜찜해서 견딜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왜 견디지를 못하는가? 세상이 무엇이며, 자기가 누구인지, 그것이 모호하기에 말이다.
사람은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면 자살을 할 수밖에 없는데, 우울증에 걸리고 말이다. 우리가 보기에는 다들 멀쩡하게 보일지 몰라도, 실제로 사회에 나가보면 정신병자가 많은 정도가 아니라 정신병자가 아닌 사람이 적을 정도라는 것이다. 결국은 성령을 받지 않으면 다 정신병자라고 할 수밖에 없는데, 모두다 제 정신이 아니라는 말이다. 자기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지로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 사람들이 왜 술에 취하는가?
특히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보라는 것이다. 공부를 많이 하고 말고 하는,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들이 왜 술에 취하는고 하면, 정답이 없어서 그러한데, 즉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자기가 누구인지를 잡아줄 수 있는 존재가 없다는 말이다. 옛날에는 그것을 엄마가 했는데, 그런데 이제는 그 믿었던 엄마마저도 치매에 걸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여자가 처음에 결혼할 때는 남편을 의지하게 되는데, 그런데 그 남편이 자기가 쭈글쭈글하다고 관심을 두지 않으면, 도대체 자기가 누구인지, 거기에 대해서 헤매게 된다는 말이다. 의지하려고 하는데, 그 상대방이 자기를 떠나게 되면 자기는 그만 넘어지고 마는데, 그렇다면 자기가 누구인지를, 그것을 이야기할 곳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때부터는 여자들은 교회를 찾기 시작하는데, 그러면 교회는 그만 위험한 곳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래서 목사가 사람을 데리고 놀면서 사기를 치고 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주님을 의지해야하는데, 그런데 목사나 사람을 의지하게 되면, 그러면 그만 여기서 새로운 문제들이 양산되고 만다는 것이다.
◈ 주께서 만들어낸 미래가 느부갓네살 왕 안에 !!
아무튼 느부갓네살은 꿈은 해석을 해야하는데, 그런데 해석이 되지 않으니 해석을 해줄 사람을 찾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찾은 사람은 다니엘인데, 그러자 다니엘은 느부갓네살에게 뭐라고 이야기하는가? 이것은 왕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그 느부갓네살 왕 안에 인류의 미래가 달려있다는 것이다. 즉 주께서 만들어낸 미래가 느부갓네살 왕 안에 들어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느부갓네살은 짐승이 되는데 말이다.
그렇다고 하면 이 세상이라는 것은, 즉 이 세상을 해석할 때는 이 바깥을 무엇으로 간주해야 제대로 해석이 되는고 하니, 짐승으로, 즉 이 세계를 악마에 사로 잡인 세계로 간주할 때만 이 안에서 진짜 하나님 나라가 나온다는 것이다. 좀 어렵지요?
다니엘이 느부갓네살 왕의 꿈을 해석함에 있어서, 그것은 왕 개인의 꿈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즉 "이 꿈은 왕 개인의 일이 아니라, 당신에게 이 세상이 담겨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짐승입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멀쩡한 인간을 보고 짐승이라고 하는데, 이 짐승은 바다에서 올라오기 때문에 악마의 종이 된다는 말이다. 즉 "당신은 악마의 종입니다" 라는 것이다.
따라서 바깥에 있는 왕, 즉 그러한 상황들을 현실로 보는데, 눈에 보인다는 말이다. 느부갓네살 왕이 보인다는 것이다. 박근혜가 보이고, 또 김정은이 보인다는 말이다. 요즘 얼마나 TV에 자주 나오는가? 그러니 사람들이 이런 눈에 보이는 현실을 전부로 여긴다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 나라는 어디에 있는고 하니, 명료하게 눈에 보이는 것을 허구로 만들고, 진짜 현실은 그 속에 숨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걸 알려고 하면 성령이 아니면 안 되는데, 즉 깨어나지 않으면 그 속에 있는 세계로 들어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복음을 받아서 전하는 사람은, 자기 혼자서 구원을 받으라고 준 것이 아니라, 그러한 역할이 아니라 이 세상을 읽으라는 것이다.
◈ 다니엘 - 현실과 꿈의 접촉점에 있는 '인자' !!
일단 지금까지 이해를 했다고 치고 진도를 더 나가보겠는데, "그러면 다니엘 너는 무엇인가?" 라는 것이다. 다니엘은 현실과 꿈의 접촉점에 있는데, 그것을 가지고 다니엘을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부시는고 하니, '인자야!' 라고 부르신다는 것이다. '인자(仁者)'가 아닌 '인자(人子)' 라는 것이다.
굳이 풀이하면 '사람의 아들' 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말이다. 장차 사람으로 오실 어떤 분을 미리 보여준다는 것이다. '사람으로 오실 분' 이란 것은, 본체는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인데, 사람의 형상을 하고 오실 그분을 표현할 때 '인자' 라고 한다는 것이다.
지금 제가 일부러 어렵게 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어려운데, 방금 '인자'가 무엇이라고 했는가? 현실과 꿈을 같이 묶어내는, 오직 그분에게만 꿈과 현실이 둘 다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니 진짜 현실은 오직 그분을 통해서만 알려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현실이라는 꿈에서, 진짜 현실인 꿈으로 들어가려고 하면 다른 이름으로는 안 되고 '인자' 라는 이름 외에는, 그 이름이 아니면 구원받을 길이 없다는 말이다.
◈ 죽은 자여, 말씀을 듣고 살아나라 !!
그러면 지금 이것이 현실이 아니라는 단적인 증거가 무엇인고 하니, 그게 바로 '죽음' 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서 이렇게 "잠자는 자여, 깨어라" 라고 하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죽은 자여, 말씀을 듣고 살아나라" 라는, 그런 의미라는 것이다.
에스겔서 37장에 보면 해골이 나오는데, 해골은 해골이란 것이다. 현실적으로 보면 말이다. 그런데 그 해골에 인자가 되는 에스겔을 대동해서 성신이 임하게 되니, 인자의 눈에는 해골이 무엇으로 보이는고 하니, 죽은 해골이 결국 이스라엘의 군대가, 즉 '이스라엘' 이라는 나라가 된다는 것이다.
(겔 37:10) 이에 내가 그 명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 성령이 임했기 때문에 !!
그러니 진짜 구원을 받은 '이스라엘' 이라는 나라는 어떤 경로를 통해서 그렇게 되었는지를, 그것을 물론 본인들은 아는데, 즉 "내가 잘난 척을 했지만, 사실은 주님이 보시기에 죽은 자였다" 라는 것을 안다는 말이다. 그러면 그들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가?
그것은 바로 "성령이 임했기 때문에 내가 천국에 와있는 것이지, 진리의 영이 임하지 않았으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과 한 통속이 되지 않았으면 절대로 천국에 올 수 없다" 라는 것을 고백할 수 있는 자로서, 이 꿈과 같은 세상에서 진짜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마치 다니엘처럼 꿈과 현실을 공유하고 있는 매개체가 된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수로의 경우에 거기에 자갈이나 돌을 까는데, 그러면 '돌' 이라는 물질성과 흐르는 시원하고 차가운 액체인 '물', 그 두 가지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물질성밖에는 없는데, 60조의 세포와 뼈와 골격 등으로 이루어진 말이다.
우리 집사님의 경우에는 심혈관 검사도 받아야 하는데, 그런 것이 다 물질이라는 것이다. 그런 것은 동물들도 다 가지고 있는 세포인데, 그러니 그런 것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거기에 뭔가가 흘러야 하는데, 생명수가 말이다. 시원한 물이 흘러야 한다는 것이다. 성령을 통해서 말이다. 거기에 예수님의 피가 흘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내 살과 내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영생이 없다" 라고 하신, 주님이 사용하신 그 언어의 표현은, 누가 들어도 우리가 아는 물질이라는 것이다. 찍찍한 피와 물컹물컹한 살이라는 것이다.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셨기에 우리도 물질로 보았는데, 그런데 나중에 천국에 가는 사람을 보니, 그들이 예수님의 피와 살로 요리를 해서 먹고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요 6: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강도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가? 강도는 예수님과 대화를 통해서, 즉 "오늘밤에 낙원에 가리라" 라고 해서 천국에 갔다는 것이다. 예수님 자신은 피와 살을 이야기했는데, 그런데 실제로 구원을 받는 사람을 보니, 그냥(?) 갔다는 것이다. 그것을 사도행전에서는 뭐라고 하는고 하니, "이방인에게도 성령이 오더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 '살과 피'가 어떻게 '성령'으로?
그러니 예수님께서 "내 살과 내 피를 먹고 마시면 영생을 얻는다" 라고 하신 것이, 사도행전에서는 "성령을 받으면 구원을 받는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살과 피라는 물질이 어떻게 성령으로 대체가 되느냐는 것이다. 그 문제를 우리가 생각해보아야 하는데, 성경을 보면서 그런 것을 놓쳐버리면 안 된다는 말이다.
방금 말한 바와 같이 살과 피가 성령을 오게 하셨을 때, 그 살과 피는 우리가 보통 말하는 개인적인 그런 살과 피가 아니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살과 피라는 것이다. 공자나 부처의 살과 피가 아니고,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살과 피라는 것이다.
그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게 되는데, 그러면 살과 피를 흘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전에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의 약속이 무엇인고 하니, 너희들이 지금 마시는 포도주, 또 여기에서 '포도주' 라는 물질이 나오는데 말이다. 피라고 해놓고 포도주가 나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살점을 떼어주는 것이 아니라 떡을 준다는 것이다. 또 물질이라는 말이다.
◈ '아들의 죽음' 이라는 특수한 죽음으로 !!
그렇게 물질과 물질이 만나면서, 그 물질을 가지고 무엇을 보여주는고 하니,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있어서 '아들의 죽음' 이란 것은 일반적 죽음이 아니라 특수한 죽음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죽어도 자기의 죄 값으로 죽기 때문에, 심지어 자살을 하더라도 그것으로 구원을 받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구원을 받으려고 하면 우리의 죽음이 아닌, 우리를 대신한 어떤 분의 특수한 죽음이 발생해야 하는데, 그 특수한 죽음의 흔적으로서, 즉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말미암아서 율법이 완성되었다고 본다는 것이다.
지금 진도를 나가려고 하니 제가 불안해서 안 되겠는데, 그래서 여기서 속도조절을 하겠는데, 모르고 그냥 나가면 안 되니 말이다. 이렇게 살과 피, 그리고 포도주와 떡, 이러한 것들은 전부가 그 범위가 물질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런 물질은 우리도 있는데, 우리도 살과 피가 있고, 포도주와 떡을 먹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것은 우리의 영역인데, 그러한 우리의 영역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계시영역으로 들어가려고 하면, 도대체 여기에 무엇이 필요한고 하니, 죽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지금 제가 죽음을 이야기하려고 하는데, 그 죽음을 통하면 이게 무효가 된다는 것이다. 물질은 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흙에 속한 형상이기 때문에 말이다.
◈ 흙에 속한 형상으로는 천국에 갈 수 없어 !!
이제 여러분도 감이 잡히지 싶은데,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고 하니, 흙에 속한 형상은 없애버리겠다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언어는 그 기초가 무엇인고 하니, 흙에 속한 육신을 통해서, 그렇게 해서 언어생활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바리 코트, 이것은 난로, 이것은 카메라, 또한 이것은 먹는 약, 등등", 그렇게 흙에 속한, 흙에 관한 것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성경에 의하면 흙에 속한 자는 천국에 갈 수 없는데, 그러니 이런 흙에 속한 물질성이 바뀌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흙으로 와서 흙으로 돌아가는데, 쉽게 말해서 툭툭 모두 털리는 것인데, 그러니 이미 끝났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공항 검색대를 통과하는데 "주머니에 있는 것을 다 꺼내세요" 라고 하면, 우리의 주머니에 들어있던 것은, 그게 아무리 맛있는 사탕이라고 해도 다 내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가 이 땅에서 사용하던 언어는, 그게 믿음이고 소망이고 사랑이라고 해도, 그것이 천국이라고 해도 모두 다 털린다는 말이다.
우리가 죽는 순간에, 그것이 비록 참으로 서글프지만 엄연한 우리의 현실인데, 우리가 죽으면서 "으윽, 십자가…" 라고 아무리 해도, 그런 언어는 우리의 죽음과 함께 모두 다 날아가 버리고 마는데, 그러니 그런 고백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의 언어로서 말이다. 그런 것은 죽음과 함께 다 사라져버린다는 것이다.
◈ 탈탈 남김없이 털려야 !!
그러니 교인들이 오해하면 안 되는데, 즉 "내가 이것은 가지고 가야지. 다른 것은 몰라도 내가 기도를 오래한 것은 가지고 가야지" 라고 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그런 것은 다 털리고 만다는 것이다. 자기가 기도를 얼마나 했던, 헌금을 얼마나 했던, 봉사를 얼마나 했던, 그런 것은 하나도 남김없이 털리고 만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몸의 죽음과 동시에 그동안 우리가 했던 모든 개념들은 우리의 흙에 속한 형상에서 유발된, 그래서 자기 잘남을 드러내기 위한 요인들로 가득하기 때문에, 그 잘난 '나'를 해골로 만드는 순간, 그 잘남은 바로 해골이 기도한 것이고, 죄인이 헌금한 것이란 말이다. 그렇게 죽어야할 인간이 전도한 것이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 동행하신 분이 있기에 !!
그런데 그런 해골이 죽기 전에 같이 동반한 것이 있었는데, 동행을 말이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광야로 나왔을 때 그들은 홀로 나왔는가? 아니면 같이 동행한 분이 있었는가? 하나님의 사자가 동행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의 것을 손해보는 법이 없는데, 그런 철없는 이스라엘을 데리고 가시면서도 기어이 어떻게 하시는가? 그러니 이스라엘은 실패해도, 그들은 동행하시는 분의 뜻에 의해서 약속의 땅에 무사히 들어간다는 것이다.
여호수아의 경우에, 그 여호수아가 전쟁을 했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군대장관이 했는가? 어제 설교시간에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전쟁을 하는데 갑자기 하늘의 해가 멈추고 우박이 떨어지고 말이다. 무슨 그런 전쟁이 다 있느냐는 것이다. 그것을 '붙이시매 전쟁' 이라고 하는데, 즉 "너희들은 보통 존재가 아니다. 너희들이 잘나서가 아니라, 너희들과 동행하신 분이 들어가야 하는데, 너희들은 거기에 질질 끌려서 들어간다"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수 2:24)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진실로 여호와께서 그 온 땅을 우리 손에 붙이셨으므로 그 땅의 모든 거민이 우리 앞에서 간담이 녹더이다
◈ 증인, 종, 그리스도의 종 !!
왜 우리가 질질 끌려서 들어가는가? 증인이 되라는 말이다. "내 공로가 아니고 같이 동행하시는 분의 공로입니다" 라는 증인이 되라고 우리는 호출을 당했다는 것이다. 그냥 길에서 빈둥거리면서 놀고 있는데, 포도원의 일군으로서 차출을 당했다는 것이다. "어서 와서 일을 해" 라고 차출을 말이다. 그것을 '종' 이라고 하는데, 사도바울은 그런 의미에서 자기를 '그리스도의 종' 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 자신의 가치를 유지하려고 할 필요가 없는데, 그런 자기 가치, 자기 명예를 유지하려고 하면 괜히 자꾸 스트레스만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오늘도 차출하고 내일도 차출해서, 그렇게 해서 우리는 끌려가면 되는데, 왜냐하면 껍데기는 버려도, 즉 흙에 속한 우리의 육신은 버려도 괜찮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에서 "어서 이 몸을 벗어버리고 새 몸을 입고 싶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고후 5: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니라
그것이 구약에서는 주의 이름이 동행하지만, 신약에서는 성령이 그렇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로마서 8장에 보면, "주의 영이 너희와 함께 하면 죽을 몸도 살리신다" 라고 되어있다는 것이다. 즉 주님께서는 우리는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을 보고 죽을 우리의 몸을 살려내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하늘의 형상으로 옷을 갈아 입혀 주신다는 말이다.
(롬 8: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
그래서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너희들이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라고 되어있는데, 로마서 23장에도 나오는데, 그게 다음 주 설교본문인데 말이다. 그러니 설명을 하려면 또 복잡해지는데, 이렇게 그리스도로 옷을 입는다는 것이, 여기에 옷이 등장하는데, 또 물질이라는 것이다.
(갈 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롬 13:12)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 대충 끼어 맞추는 인간들 !!
그러니 아무리 하나님의 성령이 하시는 일이라고 해도, 일단 인간 속에 들어오게 되면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어려운 말로 '상징계' 라고 하는데, 그게 전부가 아니라고 해서 상징계라고 한다는 말이다. 상징계라고 하는 것은 원본은 모르겠다는 것인데, 그래서 언어를 가지고 적당히 끼워 맞춘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대충 말이다.
예를 들어서, 꽃이 핀 것을 보면 '아름답다' 라고 하는데, 그 아름다운 것이 몇 그램이냐고 하면, 그냥 아름답다는 것이다. 그 아름다움의 색깔이 어떠하냐고 하면, 그것은 모르고 그냥 아름답다는 것이다. 어떻게 아름다우냐고 하면, 그냥 무척 아름답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그 아름다움에 접근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평양에 갔던 어떤 시인이 시를 짓는데, 너무 아름다우니 며칠 동안 전혀 시를 쓰지 못하고 그냥 내려왔다고 하는데, '···' 라고 하고 말이다. 그게 과거에 교과서에 실린 내용인데, 그냥 점으로만 표시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다. 일치가 되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러니 한계라는 말이다. 표현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 다시, '나는 누구인가?'
그러니 답답해서 미치는데, 이렇게 정확하게 설명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그것은 바로 설명을 하려는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겠다고 하는 것과 엮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성경은 뭐라고 하는가? "니가 정확할 필요는 없다. 다만 정확한 것을 하나 알려주면, 니가 어떻게 살던 간에 죽는다는 사실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 자신이 죽는다는 것보다도 더 정확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십자가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 그리고 그 십자가와 더불어서 사흘만에 다시 부활하셨다고 하는 그 정확함, 그래서 이 세상이 자기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 때, 그것이 바로 정확하게 안 것이란 말이다. 모든 것이 주님을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하지만 불교나 다른 모든 종교는 항상 자기 중심으로 돌아와야 하는데, 왜 불교와 같은 종교가 필요한고 하니, 자기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모르니까, 심지어 자기를 학대하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머리도 빡빡 밀고 말이다. 젊은 아이들이 머리를 밀고 절에 가있는 것을 보면 기가 차는데, 왜 가는고 하니,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
여기에 대해서 성경은 뭐라고 하는고 하니, "너는 평생을 가도 그것을 몰라. 그리고 정확한 것은 니가 그렇게 진리를 찾다가 죽는다는 사실인데, 그렇게 누가 너를 죽이냐는 것이 중요하지, 니가 누구인지, 그것을 알 필요도 없고 알 수도 없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 기회도 우리에게 허락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내가 누구인가?" 라는 것을 직접 아는 게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우리 자신을 세우게 함으로서, 그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된다는 것이다. 즉 "너는 죄인이야" 라고 하신다는 말이다.
◈ 스스로 자신을 개봉하시는 하나님 !!
그리고 이 세상을 만드신 분은 숨어있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때에는 십자가에 달리신 분으로 우리에게 오신다는 것이다. 아무도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지만 하나님 스스로 자기를 나타내셨는데, 즉 독생자이신 아들을 보내셔서 "자, 이게 하나님이다" 라고 스스로 자신을 개봉해버렸다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인을 떼는데, 즉 개봉이란 말이다. 일곱 나팔을 부는데, 그것도 역시 개봉이라는 말이다. 물론 일곱 대접도 개봉이고 말이다. 그러한 개봉은 바로 예수님에 달리신 그분이 이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이었다는 것을, 그것을 드러내는 것이 곧 요한계시록의 핵심주제라는 말이다. 여기에는 천사가 그런 활동을 했는데 말이다.
(계 5:1)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책이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계 5:2) 또 보매 힘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치기를 누가 책을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니
(계 5:3)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할 이가 없더라
(계 5:4) 이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않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
(계 5:5) 장로 중에 하나가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다시 다니엘서로 돌아가서, 꿈과 현실의 경계선에 서있는 인자인 다니엘로 인해서, 우리는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님을, 그것이 다니엘로 인해서 밝혀지게 된다는 것이다. "아하, 이것이 지혜로구나" 라고 말이다. 그래서 다니엘은 지혜인데, 다니엘은 그 지혜로 인해서 칭송을 받는다는 것이다.
◈ 외부인에 의해서 툭툭 침을 당할 때 !!
다시 질문을 하겠는데, 이 지혜를 우리가 건드릴 수 있는가? 없는데, 우리가 지킬 수 있는가? 없다는 말이다. 잠언의 그 많은 구절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이다. 툭툭 친다는 말이다. 지혜 안에 있는 사람은, 잠언의 말씀이 툭툭 친다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가 외부인에 의해서 툭툭 침을 당할 때, 우리는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처럼 주님의 사자와 함께 있다는 것이다.
구약의 여호수아의 경우에, 그 붙이시매 전쟁, 즉 여호와 전쟁에 있어서 군대장관이 함께 하기 때문에 어떻게 되었는가? 우리 인간은 실패해도 주님은 실패가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이 '예'가 되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 때문에, 그들이 무사히 약속의 땅에 진입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그러니 결코 그들의 노력이 아니었는데, 오히려 그들은 질질 끌려가는 입장이었다는 것이다. 즉 물이 흐르는 하나의 수로에 지나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게 우리의 모습이고 말이다. 지금 제가 반복할 수밖에 없는데, 여러분이 연세도 있고 해서 중요한 부분을 자꾸만 놓치니 말이다.
방금 다니엘은 했고 이제 요셉 이야기를 해보면, 먼저 창세기 37장을 보자.
(창 37:1) 야곱이 가나안 땅 곧 그 아비의 우거하던 땅에 거하였으니
(창 37:2) 야곱의 약전이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칠 세의 소년으로서 그 형제와 함께 양을 칠 때에 그 아비의 첩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로 더불어 함께 하였더니 그가 그들의 과실을 아비에게 고하더라
(창 37:3)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보다 그를 깊이 사랑하여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창 37:4) 그 형들이 아비가 형제들보다 그를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언사가 불평하였더라
(창 37:5)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고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
(창 37:6)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청컨대 나의 꾼 꿈을 들으시오
(창 37:7) 우리가 밭에서 곡식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 두 명의 요셉이 등장하는데 !!
2절에서 "야곱의 약전이 이러하니라" 라고 하면서 요셉의 이야기를 하는데, 이 요셉도 역시 꿈을 꾼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꿈이 매우 독특한데, 그 꿈의 내용이 무엇인고 하니, 7절에 보면 "우리가 밭에서 곡식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라고, 그렇게 요셉이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꿈에서 요셉의 단이 나오는데, 요셉이 그것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요셉이 자기가 자기를 보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성경적으로 말해 그 꿈을 보고 있는 요셉이 요셉인가? 아니면 꿈에 나오는 그 단이 요셉인가? 어느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 구체화가 된 요셉이냐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까, 꿈속에는 나오는 그 요셉의 단이 요셉인가? 아니면 그 꿈을 꾸고 있는 요셉이 요셉이냐는 것이다. 그 중에서 어느 것이 진짜 요셉이냐는 말이다. 꿈속에 있는 요셉이 진짜 요셉이고, 그것을 보는 요셉은 진짜 요셉을 따라가야 되는 가상의 요셉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나를 보았다" 라는 그 '나' 자체도, 그 꿈속의 요셉이 '나'가 되면서 자기 자리를 내어줘야 한다는 것이다.
◈ '나'와 또 다른 '나' !!
지금 표정들이 영 그러한데, 어려워도 할 수 없다는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몸인데, 우리는 창세 전에 예수 안에서 창조가 되었고 말이다. 그렇게 예수 안에서 예정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 안에 있는 그 '나'가 '나' 인가? 아니면 1990년도 태어난 '나'가 '나' 인가? 예수 안에 있는 '나'가 '나' 인데, 그러한 '나'로 바꿔치기를 한다" 라는 것이다. 그렇게 예수 안에 있는 '나'를 '나' 라고 하니, 그만 또라이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ㅋㅋ). 그것도 교회에서 말이다.
그러니 교회에서도 "기도하면 복을 받습니다" 라는 소리만 해야하는데, 왜냐하면 기도는 자기가 하고 복도 자기가 챙긴다는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니 기도를 하는 '나'도 '나', 복을 챙기는 '나'도 역시 '나' 라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성경적으로 보면 그 '나'가 바로 어떠한가? 진짜가 아니라 가짜라는 말이다.
◈ 여기도 구라, 저기도 구라 !!
그러니 교회는 모두가 거짓말인데, 몽땅 다 거짓말만 하고 있다는 말이다. 아무리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라고 해도, 그것도 역시나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믿고자 하는 '나' 라는 것인데, 그러니 역시 가짜라는 말이다. 이런 것을 보고 있으면 저는 참으로 답답한데, 사람들이 이것을 모른다는 것이다.
성경적으로 이야기하면, "희생을 통해서 선물이 온다" 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을 틀린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여기서 희생을 보이지 않고 선물만 기대하는데, 그래서 선물을 골라잡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문제인데, 즉 "주님이여, 제가 기도를 할 테니 이 선물을 저에게 주세요. 저는 저 선물을 주세요" 라고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정작 선물은 그 방향이 희생에서 주어지는 것이지, 자기가 골라잡는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도 교회에서는 "기도한대로 이루어집니다" 라고 하는데, 왜 품목을 건방지게 자기가 정하고 난리를 치느냐는 것이다. 그냥 말로만 "교회가 문제가 있다" 라고 하지만 말고, 먼저 자기 문제부터 파악을 해놓고 교회 문제로 들어가야 한다는 말이다.
다른 교회의 문제에 대해서 시비를 걸지만 말고, 사실은 우리 자신도 생활을 하는데 아쉬움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눈에 보이는 현실만 현실이고, 다른 나머지는 다 허상이다" 라고 간주를 하니, 눈에 보이는 것을 잘 되게 하기 위해서 자꾸 주님을 이용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십자가와 복음까지도 말이다. 그러니 그렇게 하지 말고 우리 자신이 하나의 수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 수로에 자기 욕심이 흘러가면 안 되고, 주님의 생수가 흘러가야 한다는 것이다.
◈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이 나오는데, 그녀의 욕심이 무엇이었는가? 그녀는 우물에 물을 길러 왔는데, 그래서 양동이를 들고 왔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그녀의 욕심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중에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그녀는 그 양동이를 어떻게 했는가? 그만 집어던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아마 모르기는 해도 집에 돌아가서 한 소리를 들었지 싶은데, 물을 길러가서는 물은커녕 양동이조차도 버리고 왔으니 말이다.
그 여인은 자기 욕심대로 분명히 양동이를 가지고 물을 길러왔는데, 그런데 정작 받은 것은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그만 우물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자기가 그만 수로가 되어서 생수가 터져 나오는데, 그것을 어떻게 도저히 말릴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을 만나서 '심봤다!' 라고 외치고 싶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것을 보고서 주님께서는 "나도 벌써 추수가 시작되었다" 라고 하셨는데, 즉 "너희들이 수고하지도 않은 것을 챙기기만 하면 되는데, 그것이 바로 추수다. 그것이 바로 나의 양식이고 내 떡이다" 라고 하신는 것이다. 그러자 제자들이 뭐라고 하는가? "아니, 떡이라구요? 그것을 어디서 샀습니까? 우리가 마트에 가서 사다드리지 않았는데요?" 라고 나온다는 말이다.
◈ 주님의 양식은?
하지만 주님의 양식은 무엇인고 하니, 먹어서 양식이 아니라 자기를 내어주는 것을 곧 양식이라는 것이다. 즉 주님의 자기 희생이 확산되는 것, 주님의 피와 살이 생명의 양식이 된다는 말이다. 그것이 곧 종말이고, 그렇게 이미 예수님 때부터 분리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천국과 지옥이 말이다. 그런 갈라짐으로 인한 차이가 이미 개시되었다는 것이다.
(요 4:31)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가로되 랍비여 잡수소서
(요 4:32) 가라사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요 4:33)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한대
(요 4: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요 4:35) 너희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요 4:36)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
(요 4:37)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요 4:38) 내가 너희로 노력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의 노력한 것에 참예하였느니라
(요 4:39) 여자의 말이 그가 나의 행한 모든 것을 내게 말하였다 증거하므로 그 동리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 현실과 너무나 다른 요셉의 꿈 !!
요셉이 다시 꿈을 꾸는데, 이번에 요셉이 하는 말이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요셉은, 꿈속에 있는 요셉으로 현재의 요셉이 바뀌어진다는 것을, 그것을 물로 요셉이 어느 정도 짐작은 했겠지만, 사실 그것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얼마나 서글프고, 그야말로 믿음이 없이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는, 그런 환난과 핍박을 행함으로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가는 길이 꿈과는 정반대라는 것이다. 자기는 분명히 꿈을 꾸기를, 높은 자리에 앉는 꿈을 꾸었는데, 그런데 높기는커녕 점점 더 낮은 자리로 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그 가기 싫은 낮은 자리가 바로 높은 자리라는 것이다. 십자가 속에 들어가야, 그것이 곧 천국의 입구라는 말이다. 천국이 십자가 안에 들어있다는 것이다.
(창 37:9)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 형들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창 37:10) 그가 그 꿈으로 부형에게 고하매 아비가 그를 꾸짖고 그에게 이르되 너의 꾼 꿈이 무엇이냐 나와 네 모와 네 형제들이 참으로 가서 땅에 엎드려 네게 절하겠느냐
(창 37:11) 그 형들은 시기하되 그 아비는 그 말을 마음에 두었더라
◈ 다시 다니엘의 꿈 이야기를 !!
요셉 이야기는 그만하고, 이제 다시 다니엘 이야기를 조금 더해보면, 다니엘은 꿈과 현실의 경계선에 있는 사람, 즉 '인자' 라는 것이다. 꿈도 보고 현실도 보고, 다니엘은 그렇게 양쪽을 다 본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다니엘 때문에 다니엘의 세 친구도 덩달아서 혼이 났는데, 친구를 잘 사귀어야 하는데 말이다(ㅋㅋ).
그 친구들의 현실은 불 속에 들어가는 것인데, 그런데 불 속에 들어가면 어떻게 되는가? 불에 타서 죽는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집어넣은 느부갓네살 왕이나 다니엘의 세 친구들도 공감하고 있었고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들어갔는데, 놀랍게도 그 죽음 가운데서 자기들을 반겨주는 자가 있었다는 것이다. 4번째의 사나이가 말이다.
물론 그것을 미리 알았다면, 좀 더 큰 소리를 치면서 불 속에 들어왔을 것인데,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라는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인데 말이다. 그것을 미리 몰랐으니까, "주께서 살려주실 겁니다. 물론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할 수 없지요" 라고, 그들은 그렇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단 3:16)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단 3:17)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단 3:18)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 인간의 고백은 구원과 상관이 없어 !!
그래서 제가 하는 말이 무엇인고 하니, 인간의 고백은 구원과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 어떤 환경에 처하든지 간에, 주님께서 책임지시고 우리의 자리로, 즉 창세 전의 예정한 곳으로 데리고 가신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은 가짜이기 때문에 말이다. 지금 이곳은 매일같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보통 꿈속에서의 자기 모습은 20살 정도가 적은데, 그렇게 젊다는 것이다. 그래서 막상 거울을 보기도 짜증이 나는데, 잘생긴 영화배우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놓고 있기 때문에, 거울을 보기가 무섭다는 것이다. 거울 속에 나타난 얼굴은 그 영화배우의 얼굴이 아니기에 말이다. 이처럼 우리는 날마다 달라지는데,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제 그런 말을 했는데, 치매에 걸려도 얼마든지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이다(ㅋㅋ).
이제 교재 17페이지를 보자.
** 빙글빙글 도는 강력한 토네이도의 홀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내뱉는 소리가 "지혜는 여호와에게서 나왔습니다" 입니다. 자신에게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다는 말입니다.
◈ 강력한 토네이도 !!
그러니 강력한 토네이도의 홀 속이 진짜 현실이고, 빙글빙글 도는 그 바깥은 처분이 되어야할 것이란 말이다. 우리의 육적인 형상으로서, 해골과 같은 것인데, 그러니 하나님의 형상은 따로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흘만에 죽었다가 부활하신 분의 영으로서 알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성령을 받지 않은 자들이 볼 때, 예수님이 죽었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났다는 것은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데, 혹시 그런 일이 있더라도 그것은 옛날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령은 그것이 아니라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로, 마치 스프링처럼 탱탱 거리면서 계속해서 반복을 해버린다는 것이다.
◈ 어머, 내가 미쳤나봐?
그렇게 죽은 우리를 들고 반복해버리면 여기서 생명이 나오는데, 참으로 희한한데 말이다. 죽은 우리를 흔들어버리니까 우리와 함께 계시던 생명이, 즉 주님의 영이 바깥으로 마구 보여진다는 것이다. 즉 '죽어라' 라고 하는데, 거기서 생명이 나온다는 말이다. 빨래를 한다고 남편의 옷을 터니 비자금이 떨어지듯이 말이다. 아니면 박 마담의 명암이 나오든지 말이다(ㅋㅋ).
아무튼 예상 밖의 것이 나오는데, 자기도 몰랐던 것이 말이다. 주님이 잡고 흔드니, 전혀 예상 밖의 고백이 마구 나온다는 것이다. 물론 고백으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전혀 자기가 의도하지 않은 말이다. "이 세상보다 저 세상이 더 좋아" 라고 하는 말이다. 물론 하고 나서 "방금 내가 무슨 말을 했지? 미쳤나봐?" 라고 하겠지만 말이다.
◈ 우리 자신의 한계성이 노출되면서 !!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는데, 즉 "하나님께서 너희를 어려운 곳에 집어넣을 때, 그때는 너희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 속의 성령이 말씀하신다" 라고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힘든 상황에 처해봐야, 우리의 한계성이 노출되어야 나온다는 것이다.
(마 10:19)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마 10:20)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사사기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평소에 여호와를 섬기는가? 섬기지 않는가? 섬기지를 않는데, 그러다가 주위에서 공격하면, 그제야 "주여, 살려주세요" 라고 비는데, 그때 주님이 들어오신다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도 마찬가지인데, 잘날 때는 우리 혼자 잘랐다가, 어려울 때 탈탈 털리게 되면, 그때 동행하시는 성령께서 갑자기 튀어나오신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진짜 우리의 있을 곳인 우리의 자리로 데리고 가기 위한 강력한 토네이도인데, 그 강력한 힘을 우리는 도저히 저항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억지로 끌려가든지 어떻게 해서 가든지 간에, 우리는 반드시 거기로 가게 되어있다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이번 수련회의 공부는 바로, 지혜가 자체적인 역동성을 뿜어낼 때 그 경과(PATH)에 성도가 어떤 양상으로 휘말려서 들어가게 되느냐를 파악하는데 있습니다. 그 경로의 모델이 있습니다. 그 모델은 구약에 나타나지 않고 신약에 나타납니다. 그분이 누구냐 하면 예수님이죠. 예수님은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여호와에게서 나왔던 지혜의 경로에서 이탈하지 않고 그대로 밟아나가시는 분입니다.
◈ 그 경로(PATH)의 모델은 곧 예수님 !!
그 경로(PATH)의 모델이 바로 예수님인데, 그런 예수님께서는 여호와에게서 나왔던 지혜의 경로에서 이탈하지 않고 그대로 밟아나가신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인데 말이다. 우리도 그 지혜의 경로, 즉 말씀을 경로를 이탈하지 않고 살아가는데, 그것은 우리가 말씀을 제대로 지켜서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하시는 것,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길을 가게 하는 경로가 된다는 말이다.
◈ 말씀을 지킨 것을 해석해주심에 감사해야 !!
어제 낮에 한 설교를 듣게 되면 기가 찰 사람도 있지 싶은데 말이다. "우리가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지킨 것을 해석해준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참으로 위험한 발언인데, 물론 하루나 지났으니 벌써 다 잊어버렸지 싶은데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가 성경말씀을 지켰다고 하는 것은 잘못이란 말이다. 왜 그런고 하면 "지켰다. 혹은 지키지 않았다" 라고 할 권리가 우리에게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한 권리를 일임하고 포기한 입장에서, 제가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내가 사도바울이 전한 말씀을 이해했다" 라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해를 했다' 라고 시건방을 떨면서 자기가 판정을 하니, 당연히 가짜인 자기가 판정했으니, 그런 판정도 역시 가짜가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자기가 알아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 성령이 오게 되면 소급해서 해석을 !!
성령이 오게 되면 소급해서 해석을 해주시는데, 즉 "니가 그때 술집에 간 것은 고난을 받으러 갔다" 라고 하신다는 말이다. 자기는 기분이 우울해서 박 마담의 손이나 잡으면서 술을 한 잔 하려고 술집에 갔는데, 그런데 십자가로 소급해서 보니까 술을 마시는 것도 고난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고난이 맞는데, 술을 한 잔만 한 것이 아니라 마구 퍼시다가 그만 자빠지고 말았는데, 그러니 그 다음날 속이 얼마나 쓰렸는지 모른다는 것이다(ㅋㅋ).
소급해서 그렇게 해석을 해주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우리 자신의 잘남이 아니라, 우리의 못남에 대한 존재의 해석권은 우리보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계시는, 우리의 대행자이신 성령이 계시고 주님이 계시니까, 그래서 아버지로부터 주의 이름으로, 그렇게 우리 이름이 아닌 주의 이름으로 해석을 해주시니, 우리가 주 안에서 무엇을 해도 의인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게 얼마나 무서운 말이고, 무책임한 말이고, 불경건을 조작하는 말이고, 타락과 방탕과 방종과 막삶을 유발시키는 요인이 되느냐는 것이다. 지금 제가 이런 말을 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걱정이 되는데, "무슨 짓을 해도 의인가 된다" 라는 말이, 그것은 "막 살아라" 라는 것보다 진일보한 것인데, 그러니 앞으로 또 무슨 말이 나올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런 느낌이 오지 않은가?
◈ 성령을 받은 자는, 언제나 감사가 나올 수밖에 없어 !!
그러니 지금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고 하니, 성령을 받지 않으면, 즉 성령을 받은 사람과 받지 않은 사람을 이런 식으로 구분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은 "그래, 그런 식으로 조장하는구나" 라고 나오는데, 그때 저는 "그런 식으로 성령을 받지 않은 티를 내는구나" 라고 볼 수 있다는 말이다.
반면에 성령을 받은 사람은 어떠한가? 소급해서 해석을 해주시는 그 해석의 고마움을 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마음이 "이제부터는 막 살아야하겠다" 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마음을 낮추어야지" 라고 하면서, 모든 것에 대해서 감사가 나올 수밖에 없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가 과거에 여자들이 있는 술집에 간 것도, 지금까지는 그것이 몹시 후회가 많이 되었는데 말이다. 물론 그것이 잘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마저도 용서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라고 하는, 그런 감사가 나오면 성령의 일이고, 그렇지 않으면 악령의 일이라는 말이다. 이렇게 따지고 보니 나름 깨끗하게 정리가 되는데, 소급해서 보면 말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것을 자꾸 잊어버리고, 오늘도 집에 가서 자기가 무슨 실수를 하게 되면, 아내와 싸운다든지 말이다. 그래서 후회를 하게 된다면, 그것은 주님의 경로가 아니라는 것이다. 주님의 경로는 십자가가 크게 보이는 것이지, 자기 잘남이 달음질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가고 있는 넓은 길인데, 하지만 십자가만 자랑하는 길은 찾는 이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마 7: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예수님께서 이 세상 길을 밟고 나가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한결같은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너희는 지혜를 몰라" 라는 겁니다. 이게 마태복음 마태복음 11장 25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마 11:25)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여기에 있는 마태복음 11장 25절의 말씀을 보면서, 여기에 부합되는 설명을 하도록 하겠는데, 지금 이 말씀은 누가 누구에게 하시는 말씀인가? 예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지금 예수님이 아버지에게 하시는 말씀이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가 듣도록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것은 무슨 뜻인가? 왜 그렇게 하시느냐는 말이다.
◈ 너희는 지혜 앞에서 어린아이야 !!
그것은 바로 "애들아, 너희들의 코스는 이미 내가 정해놓았어. 그러니 내가 아버지와 합류하는 코스가 나의 코스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바로 너희들의 코스가 되도록, 그렇게 앞으로 내가 계속해서 반복할거야" 라고 하는, 그런 의미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말씀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시니, 우리는 이러한 말씀이 반복될 때마다, 우리는 어른이 되어서 계속해서 어린아이이고, 또 어른이라고 여겨도 역시 어린아이라는 것이다. "이만하면 어른이겠지" 라고 하면, 또 어린아이가 되고 말이다. "이만하면 지혜롭겠지" 라고 하면, 그것이 슬기로운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와 같이 되고 말이다. 결코 지혜롭지 못한 말이다.
그러니 결국은 누가 지혜자인가? 예수님만이 지혜자이고, 우리는 그 지혜를 얻어먹는, 그 지혜를 통과시키는 매개물이라는 것이다. 마치 어린아이와 같은 말이다. 어린아이는 지혜 자체에 대해서 순수하게 감사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는데, 그러한 기쁨을 유지하도록 마치 스프링을 당기면 '탱' 하면서 제자리로 돌아오듯이, 그렇게 주께서 반복을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잠언서 해석은 끝났는데, 잠언서는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경로인데, 그 경로는 바로 주님이 오셔서 반복을 시킴으로서, 즉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지혜 앞에서 어린아이와 같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 어리석다는 것을 말이다. 그것이 잠언서의 해석으로 요약할 수 있다는 말이다.
◈ 예수님이 가셨던 그 경로를 반복하도록 !!
그러니 이 잠언서라는 것은, 어떤 경로를 이야기하는데, 주께서 이 땅에서 십자가를 지시고 아버지에게 가는 그 경로를, 그 당시에 미리 잠언이라는 형태로 앞당겨서 주셨고, 우리에게 그것을 보게 하시면서, 우리도 예수님이 가셨던 그 경로를 똑같이 반복하도록 하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것을 지켜라" 라고 하는 게 아니라, "이 길이야" 라는 것이다. "이것을 행해라" 라는 것이 아니라, "이 길이야" 라고 하신다는 말이다. 즉 좁은 길을 알려주신다는 것이다. 만약에 잠언을 지키게 되면 그것이 자기의 의가 되기 때문에 있을 수 없는데, 자기 잘남은 십자가가 보이지 않는 길이기 때문에, 전혀 천국으로 통하는 길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 십자가가 보인다는 것은, 그 십자가가 무엇인가? 우리의 죄 때문에 대신해서 죽은 죽음인데, 그러한 죽음이 보이는 길이라고 하면, 우리는 말씀을 지키지 못해서 죽어 마땅하다는 것을 항상 인정하는, 그런 현상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제 교재 18페이지를 보자.
** 천국은 교회의 힘이나, 기독교의 힘이나, 사람의 힘으로 갈 수 없는 곳입니다. 수도원이나 수녀의 힘으로 갈 수 없는 곳입니다.
◈ 우리는 천국에 가는 길을 몰라도 돼 !!
이 말은 "교회에 다니지 말자", 혹은 "기독교 신자가 되지 말자" 라는 것이 아니라, 교회나 기독교를 의지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행함을 의지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사람의 힘으로 갈 수 없는 곳인데, 그러니 자기 힘도 의지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오직 지혜 자체가 스스로 살아있어서 우리를 강제로 데리고 가신다는 것이다. 동행해주는 그 힘으로 가는 곳이 천국이란 말이다.
그러니 천국에 가는 길을 우리 쪽에서 알 수 있는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걱정이 없는데, 우리는 몰라도 괜찮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동행하시는 분이 잘 아시기 때문에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아는 십자가는 십자가가 아닌데, 우리와 같이 동행하시는 분이 매일같이 새롭게 우리에게 그 십자가를 밝혀주신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자기가 10년 전에 알았던 십자가가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구체화하게 되면 틀렸다는 것이다. 성령이 오셔서 해석을 해주어야 하는데, 그만 자기 자신이 해석을 하게 되면, 그렇게 자기가 나서게 된다면 그 해석은 엉터리라는 말이다.
◈ 손님, 이번에 만든 스테이크가 맛있죠?
예를 들어서, 고급 식당에 가면 귀찮은 것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물론 저는 가본 적이 없는데, 드라마에 보면 그런 식당이 나온다는 것이다. 주방장이 직접 VIP실에 들어가서 요리를 해주면서 묻는 대목이 나오는데, 즉 "이번에 새로 만든 스테이크 맛이 어떻습니까?" 라고 말이다. 그러면 "예, 맛이 참 좋습니다" 라고 하면, "감사합니다. 맛있게 드세요" 라고 하면서 나간다는 말이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그 스테이크를 만든 주방장의 솜씨에, 제 아무리 VIP 고객이라고 해도 그 맛을 제대로 음미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맛을 따라갈 수 없다는 말이다. 다만 맛을 어떻게 아는고 하니, 그 고객은 전에 먹어보지 못했던 것을 지금 먹어보니 맛있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 그것은 바로 '차이' !!
그러면 그게 무엇인가? '차이' 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 '차이'가 무엇인고 하니까, 이게 이번 강의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어려운 것이니, 정신을 바짝 차리고 들어야 하는데 말이다. 우리는 흙에 속한 형상이니 변하는데, 도저히 종잡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어디로 튈지 몰라서 말이다.
분명히 5년 전에 먹었던 스테이크에 비해서 방금 먹은 스테이크가 맛있는데, 그것은 그 차이를 두고 맛있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스테이크의 전문가인 주방장은 전 세계의 모든 스테이크를 다 먹어보았고 연구를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맛있다는 차원에서는 우리보다 훨씬 앞서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손님, 이번에 만든 스테이크 요리가 참으로 맛있죠?" 라고, 그렇게 주방장이 자기 입장에서 이야기를 했을 때, 솔직히 우리는 그러한 주방장의 말에 동의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과거에 자기가 먹은 스테이크에 비해서 맛있으면 맛있다고 하니까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러니 2년 후에 주방장이 똑같은 맛의 스테이크를 내놓는다고 하면 우리는 맛있다고 하겠는가? 물론 겉으로는 "예, 맛있습니다" 라고 할지 몰라도, 본래 마음은 "그때보다는 맛이 없습니다" 라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그때보다 맛이 떨어져서 그런 것이 아니라, 맛의 차이가 나지 않으니 그런 말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십자가, 그 다음은 ??
제가 갑자기 왜 이런 스테이크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까, 주님께서 십자가를 이야기했을 때 옛날의 그 십자가가 틀린 것이 아닌데, 분명히 그 당시에는 은혜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만큼 시간이 지났으니까, 그 차이만큼의 십자가 폭을 우리에게 알려주신다는 것이다. 스프링을 '탱' 하고 퉁기듯이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십자가, 십자가라고 하지 마라. 그것은 이미 나도 다 안다" 라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십자가 마을에서 공부한 사람들 중에서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르는데, 즉 "이제 십자가는 아니 넘어가고, 십자가 그 다음이 무엇인데?" 라고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주방장이 제대로 만든 스테이크의 맛을 보라는 것이다. 먹으면 먹을수록 새로운 맛이 나온다는 것이다. 십자가의 맛이 얼마나 깊은지 모르는데, 그런데 그 다음이 무슨 말이냐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당신, 나를 사랑하지? - 응, 사랑해. - 그러면 사랑은 이제 되었고, 그 다음은 현찰이야" 라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사랑이 끝인데 말이다. 사랑 다음에 현찰을 요구하면, 그것이 과연 사랑이겠느냐는 말이다. 오히려 그것은 사랑을 떠난 것인데, "십자가 그 다음이 무엇인가요?" 라고 하는 사람은 백 프로 무엇인고 하니, "나는 주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라는 것에 다름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말을 그렇게 표현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의 관심사는 주님의 사랑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을 통해서 내가 챙기고 싶은 것을 슬슬 챙겨봐?" 라는 것인데, 즉 교회부흥이나, 자기가 목사로서 얼마나 위대한지를 말이다. 자기가 얼마나 위대한 주의 종이며, 자기를 추종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런 것을 말이다. 평소에 그런 것을 그리워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 니가 생각한 것은 바로 가짜였어 !!
이 정도가 되었으면 이제는 좀 즐겨도 되고, 공부를 그만해도 되고, 굳이 성경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자기 팬들이 많이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이제는 대충 설교해도 되지 않겠냐고, 하지만 그렇게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그 사람은 '탱, 탱' 하다가 그만 '탱' 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뒤의 소리는 스프링이 끊어지는 소리인데 말이다(ㅋㅋ).
그것은 바로 동행자를 놓쳐버리고, 수로가 그만 물질화가 되어버리고, 흐르던 물이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갑자기 죽었던 인간이 살아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짝퉁이었다는 말이다. 우리가 그럴 때마다, 주님께서는 고맙게도 다시 한번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바로 니가 생각한 것은 가짜였어" 라고 일러주신다는 것이다.
◈ 기도하면서, 헌금하면서 !!
요셉의 단의 요셉이 아니라, 요셉이 걱정한 요셉, 즉 꿈속에 있는 자기를 현실 속의 자기라고, 그것을 최종적 자기라고 오해했음을, 바로 그것을 지적해주시는 성령의 지적질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도하라' 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게 기도해보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시는 성령의 기도를 접할 수가 있다는 말이다.
그런 기도 가운데서 자기 기도가 엉터리임을 알아야 하는데, 헌금을 하면서 우리가 얼마나 돈을 좋아하는지를 알아야하고 말이다. 헌금을 하면서, 이렇게 자기가 헌금하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고, 헌금을 하면 자기 자랑을 하게 되어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교회에 오면 또 자기 자랑을 하는데, 물론 교회에 나오지 않으면 변명이 많다는 것이다. 너무 바쁘고, 아프고, 고프고(?) 등등 말이다. "십자가를 다 아는데 굳이 교회에 가서는 뭘 하느냐? 가봐야 꼴 보기 싫은 사람들도 있고, 전혀 은혜가 안 된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성경말씀은 뭐라고 하는가? 모이기를 힘쓰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장소가 뭐가 중요한데? 집에 있어도 그게 교회라고, 어제오후에도 그런 설교를 했는데, 왜 또 다른 소리를 하는가?" 라고 하는데, 하지만 항상 말을 할 때는 무엇인고 하니, "내가 그것을 알았으니 정당하다" 라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성령께서 함께 하시면, "알았으니 정당하다" 라고 한 것이 바로 자기 육체가 마치 스펀지처럼 품고 있는 죄의 모습의 튀어나왔다고 보면 된다는 것이다.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자기를 바라보는 말이다.
그러니 항상 십자가를 경유하게 되면, 교회에 나와도 감사하고 나오지 않아도 감사하고, 항상 끝에는 감사가 나오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설교자의 말을 이용해 처먹는다고 하는 것 자체가 "나로 인해서 감사하겠다" 라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조금만 더하고 마치겠는데, 교재 19페이지를 보자.
**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할 수가 없는 것처럼, 이런 바늘구멍을 유지해야 정상적인 교회입니다.
◈ 불가능성이기에 천국다워 !!
왜 그런고 하니, 꿈과 현실의 교차점이 곧 교회라는 것이다. 세상적으로 보면 그 교차점이 바늘구멍이고 말이다. 그러니 세상적으로는 천국이란 것이 불가능한데, 그것을 알았다면 제대로 보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현실에서는 천국이 불가능한데, 우리가 꿈이라고 여겼던 현실에서는 어떠한가? 이 세상에서 불가능이기 때문에 그것이 천국답다는 것이다. 교회답고 말이다.
그러니 아무나 오고싶다고 해서 올 수 없는 곳이 교회이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천국자체가 가고 싶다고 해서 갈 수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말이다. 그 누구라도 말이다. 그것을 제대로 보여줄 때만, 그러한 사건의 순간이 바로 교회라는 것이다.
◈ 주의 은혜로 401번을 타고 왔습니다 !!
그래서 가끔은 교회에 오는 사람에게 인터뷰를 할 필요가 있는데, "어떻게 교회에 오게 되었습니까?" 라고 하면, "주의 은혜로 왔습니다" 라고 하면, 물론 이게 정답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고 "401번을 타고 왔습니다" 라고 하면, 물론 그것은 물질적으로는 틀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까 물질을 배웠는데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물질적으로만 하지 말고, 돌을 깔아놓은 그 수로라는 물질만 좋아하지 말고, 그런 파이프만 좋아하지 말고, 과연 무엇을 흘렀는지, 그것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생수를 말이다. 그러니 401번을 타고 왔으면, "주의 은혜로 401번을 타고 왔습니다" 라고 하면, 생수가 흐르는 것이란 말이다. 주의 은혜가 통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집사님은 오늘 예배시간에 왜 그렇게 늦게 왔습니까?" 라고 한다면 뭐라고 해야하겠는가? "주의 은혜로 늦게 왔습니다" 라고 해야한다는 말이다. 자기는 일찍 오고 싶었지만, 그런 권리를 박탈당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출발했는데, 그런데 가스를 잠그지 않은 것이 생각나서 다시 집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2분 늦었는데, 그것이 다 주의 은혜라는 말이다.
◈ 방종이 아닌 주의 은혜 !!
그러니 제 강의를 잘못 듣게 되면 방탕과 방종을 양상시키는 것이 되고 마는데, 그런 것을 정당화를 시키고, 자기의 욕정과 욕망대로 다 해놓고, 그 뒤에 "주의 은혜입니다" 라는 말만 붙이면, 그러면 그것이 주님의 영광으로 느껴지게,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왜 이렇게 위험한 발언을 하는고 하니까, 성령을 받은 사람과 받지 않은 사람을 구분하기 위해서 그렇다는 말이다. 좋게 이야기한다고 해서, 덤으로 성령을 받았다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아주 경건하게 말을 조심조심한다고 해서, "아휴, 성령을 받으셨네요" 라고 해줄 수는 없다는 말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면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은 발작을 일으키는데, "뭐? 막살라구? 사도바울이 언제 그런 이야기를 했어? 고린도전서에 그런 구절이 어디에 있어? 오히려 '깨어있어라' 라고 했고, '본받아라' 라고 했지 말이야"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그것을 당신이 어떻게 이해를 하게 되었는데? 당신의 이해가 제대로 된 이해라고 누가 판정을 했지? 사도바울이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라' 라고 했을 때, 당신은 그렇게 서로 사랑하고 용서했다고 하는데, 그것이 옳다는 것을 증명해봐라. 성경에 그런 구절이 어디에 있지?" 라고 한다면, 그것을 증명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뭐라고 해야하는고 하니, "나는 죄인인데, 주께서 용서케 하셨다" 라고,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자기가 왜 죄인인가? 막 살았기 때문에 죄인이라는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제가 지금 경로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러니 "무엇을 지켰다" 라고 하지 말고, 경로를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잠언서라는 말이다.
◈ 나의 경로가 아닌 주님의 경로를 따라서 !!
이 '경로'가 오늘 강의제목인데, 그런데 그런 경로가 아니고 "내가 지켰다" 라고 하게 되면, 그래서 "내가 막 살지 않았다" 라고 하게 된다면, 그런 사람은 경로를 이탈했다는 것이다. 즉 성령이 없다는 말이다. 성령이 있으면 십자가를 증거해야 되는데, 그런데 "나는 이것을 지켰고, 또한 이것은 지키지 않았다. 또 헌금을 했는데 성령을 통해서 했다" 라고, 그렇게 "내가 행했다" 라고 하게 되면, 그것은 전혀 십자가가 증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리 성경을 연구하고 십자가 마을을 들락거리면서 글을 읽어도, 결국은 자기 부인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물론 이것을 나무랄 수는 없는데,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우리도 그럴 수밖에 없는 존재인데, 오히려 그런 것이 잘 이해가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도 역시 그러하니 말이다. 그런데 성령이 오셔서 "그것이 바로 죄다" 라고 일러주신다 것이다. 그것은 정말이지 십자가의 영이 온 사람에게만 해당된다는 것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해를 하는 것이 아니고 푹푹 발길로 차이고, 매일같이 가슴이 찢기고, 그리고 책망을 받는 이 즐거움, 우리가 가보지 못한 원치 않는 길로 가고 있다는 두근거림과 설레임, 그러니 우리가 창세 전에 구원받은 그 우리의 본래의 자리까지 가도록 오직 십자가의 피로서 이끌어주실 줄 믿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4,4,1 오후 8시에 마침.
녹취를 마치기 직전에 이 목사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녹매교회의 설교 동영상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일년에 한 번 정도 올까말까하는 전화인데,
그냥 이게 전부다.
물론 목사님은 이게 말할 수 없는 사랑이라고 하시리라. ㅋㅋ
이근호 (IP:119.♡.90.53) 14-04-04 07:40 하나님께서 구 목사님에게 전화할 수 있는 사태를 만들어 주신 것에 감사합니다. 다음에는 직접 만날 수 있는 사태가 허락되기를 고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