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대구강의] '잠언'속의 그리스도 68 - 우상
16,12,05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땅의 모든 끝을 정한 자가 누구인가?
오늘이 잠언서의 마지막 시간이 되겠는데, 다음시간부터는 전도서를 가지고 하도록 하겠는데 말이다. 먼저 교재 187페이지를 살펴보자.
** 잠언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땅의 모든 끝을 정한 자가 누구인지, 그 이름이 무엇인지, 그 아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너는 아느냐" 라고 합니다.
(잠 30:4) 하늘에 올라갔다가 내려온 자가 누구인지, 바람을 그 장중에 모은 자가 누구인지, 물을 옷에 싼 자가 누구인지, 땅의 모든 끝을 정한 자가 누구인지, 그 이름이 무엇인지, 그 아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너는 아느냐
여기에 "땅의 모든 끝을 정한 자가 누구인지" 라고 하는데, 그러니 땅의 끝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름이 무엇인지" 라고 하는 것은, 끝을 지정하신 분이 그 바깥에 있다는 의미이고 말이다. 땅에 끝이 있다는 것은 인간은 갇혀있다는 뜻이고, 물론 갇혀있게 하신 분은 갇혀있지 않은데, 그분은 영원하다는 것이다.
◈ 갇혀있는 순환구조 !!
다음시간부터 하게 될 교재인 '전도서 속의 그리스도' 라는 표지에 보면 뭐라고 되어있는고 하니까, 거기에 전도서 1장 9절의 말씀이 나와있는데 말이다. 그리고 그 교재의 중간쯤에 보면 "전도서에는 여호와라는 말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이는 솔로몬이 엘로힘의 입장에서 인간세상을 보았다" 라고 되어있다는 것이다.
(전 1:9)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
여기에 보면,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라고 되어있는데, 그것은 무슨 의미인고 하니, 갇혀있는데 순환구조로 되어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마치 사발에다가 부은 막걸리와도 같다고 할 수 있는데, 즉 아무리 휘저어도 막걸리는 여전히 사발에 담겨져 있다는 것이다. 아침부터 예가 조금은 거시기하지만 말이다(ㅋㅋ).
그렇게 막걸리를 손가락으로 휘젓게 되면 뱅글뱅글 도는데, 그것이 바로 순환구조라는 것이다. 그것도 그냥 순환구조가 아니라 갇혀있는 상태에서의 순환구조라는 것이다. 그러면 구원이란 것이 무엇인가? 갇혀있는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인데, 달리 말하면 '탈출' 이라고 할 수가 있다는 말이다. 탈출이 바로 구원이라는 것이다.
◈ 어서 오세요 !!
다시 설명하면, '갇혀있다' 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이것은 잠언서 30장 4절의 말씀으로, 땅의 모든 것을 정하신 분이 계시는데, 그러니 우리는 갇혀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갇혀있는 활동의 내용은 어떻게 되는가? 그래서 전도서 말씀을 이야기했는데, 즉 '순환된다' 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구원은 무엇인고 하니, 우리 인간은 갇혀있으니까, 그러면 어디에 갇혀있는고 하니, 그것을 신약성경에서는 죄에 갇혀있다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면 죄에 갇혀있는 근거가 무엇인고 하니, 우리는 육의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육이기 때문에 말이다.
우리가 성경말씀을 보면서 갇혀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말씀을 보면 굉장히 편리한데, 즉 "갇혀있다. 그러면 어디에 갇혀있는가? 죄에 갇혀있는데, 그러면 죄에 갇혀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은 육이기 때문이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구원은 무엇인고 하니, 이 순환에서 벗어나는 것인데, 갇혀있는데서 말이다. 그래서 구원은 탈출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그러면 우리가 제일 잘 아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빠져 나오는 출애굽, 즉 '엑소더스' 라는 것이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벗어나는 것인데, 그런데 그 이스라엘은 새로 생긴 이스라엘이란 말이다. 그래서 탈출은 달리 말하면 없는 것에서 생겨난, 즉 없는 국가가 새로 생겼다는 것이다. 그러니 새로 생겼다고 하는 것은, 탈출이라는 과정의 결과물로서 생겨났다는 말이다.
◈ 없는 인간이 탈출할 수 있는가?
여기서 첫 번째 질문을 하겠는데, "없는 인간이 탈출할 수 있는가?" 라는 것이다. 당연히 없는 인간은 탈출이 되지 않는데, 그러니 구원은 없다는 것이다. 즉 인간에게는 구원은 해당사항이 없다는 말이다. 인간에게 구원은 없고, 또한 인간은 갇혀있다는 것도 모르는데, 죄에 갇혀있는 육에 불과하다는 것도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을 대신해서, 즉 "인간은 어디에 갇혀있는고 하니, 죄에 갇혀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인간은 육이기 때문이다" 라는 모든 사실을 경험하시고, 거기서 벗어나신 분이 누구인가? 바로 예수님인데, 그러면 예수님에게만 무엇이 있는가? 예수님에게만 탈출이 있고, 구원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에게만 구원이 있다는 것은 방금 뭐라고 했는가? 구원이 되면 없는 국가가 생긴다고 했는데, 그러면 예수님만이 구원이 되고 탈출되어버리면, 그 탈출에 대한 결과가 무엇인고 하니, 없는 백성이 새로 생기는 것인데, 그 백성이 예수님에게 속한 주의 백성이 되고 천국백성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여기에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고 하니, "인간에게는 구원이 없고 천국에 갈 수 없다" 라는 것이다. 인간 자신이 구원이 무엇인지 모르는데, 인간이 천국에 가고 말고 하는 것은, 어떤 경우에만 국한되는고 하니, 예수님이 일을 저질러주어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하고 도를 닦아도 구원은 없는데, 구원이 없다는 것을 제가 처음에 뭐라고 했는고 하니, '순환된다' 라고 했는데, 구원이 없기 때문에 그냥 뺑뺑이를 돈다는 말이다. 그게 무엇인고 하니,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이라는 것이다. 해탈은 전체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고달픈 자기 인생에서 벗어난다는 말이다.
◈ 째깍째깍, 째깍째깍 !!
그러니 불교는 항상 '있음'을 의식하는데, 즉 "내가 여기에 있다" 라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가 있는데, 곱게 있는 것이 아니라 생로병사(生老病死)를 겪게 되니, 어떤 고민이 생기는고 하니, 있기는 있는데 죽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죽으면 어디로 가느냐는 말이다.
그래서 석가모니가 보리수나무 밑에서 도를 닦는데,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그렇게 도를 닦으면서도 '째깍째깍' 하면서 자기가 늙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도를 닦아도 소용이 없는데, 아무리 도를 닦아도 늙음이라는 갇힌 구조에서 벗어나서 닦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여전히 '째깍째깍' 하면서 도를 닦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냉동고 속의 아이스크림이 "나는 누구인가?" 라고 아무리 큰소리를 치더라도 끄집어내면 어떻게 되는가? 그만 줄줄줄 녹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 인간은 갇혀있는 구조 안에서 육이고, 갇혀있는 구조 안에서 자기를 사람이라고 하고 하는데, 갇혀있는 구조 안에서 자기가 '있음' 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자기가 갇혀있는 입장에서 "내가 누구인가?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 어떻게 해탈이 되는가? 어떻게 하면 행복할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죽어서 불멸의 존재가 되는가?" 라고 하니, 그렇게 해서 나오는 것은 전혀 정답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복음은 무엇인고 하니, 여기서 함께 하신 분이 벗어나는데 성공한 것이 바로 복음이고 기쁜 소식이라는 말이다. 제 아무리 철학박사가 되고 종교학 박사가 되어도, 그것이 진리가 아닌 이유는, 그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결정적이라는 말이다.
◈ 너는 죽어본 적이 있는가?
그래서 사도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십자가와 부활을 전했다는 말이다. 즉 "너는 죽어본 적이 있는가? 또한 죽었다가 살아난 적이 있는가?" 라는 것을 묻는다는 것이다. 물론 나이가 많아서 죽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제대로 죽어본 적이 있느냐는 말이다. 또한 하나님에 의해서 죽었던 그 죽음 속에서, 자기를 죽였던 그 하나님에 의해서 다시 살아난 적이 있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약속대로, 말씀대로, 예언대로 이루어졌다는 말이다.
그러니 사람이 이렇게 있게 되면,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남들도 있는데, 그러니 있음과 있음의 대결장이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비교가 생기고 경쟁이 생기는데, 그리고 이런 비교와 경쟁은 외부뿐만이 아니라 자기 내부와도, 즉 자기가 자기와 비교하고 경쟁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엄청 스트레스를 받을 일인데, "내가 왜 이렇지? 아프지 않아야 하는데, 왜 아픈가?" 라고 하면서, 자기가 아프지 않던 시절과 비교한다는 것이다. 즉 아프지 않던 자기와 경쟁을 하는데, 이 모든 것이 '있음'에서부터 시작한다는 말이다.
◈ 정죄함이 없나니 !!
그래서 여기 교재 187페이지에 보면 무엇이라고 하는가? 성령을 받은 자에 한에서 "정죄함이 없나니" 라는 혜택이 주어진다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성령을 받지 않으면 죄를 많이 지은 자기의 과거와 적게 지은 자기의 과거를 비교하게 된다는 것이다.
** 우리 마음이 지혜로 말미암아 허무해지면, 그 허공 속에 하나님의 신이 채워집니다. 성령을 받은 자에 한에서 '정죄함이 없나니' 라는 혜택이 주어집니다.
(롬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신앙생활을 하면서 받는 스트레스가 무엇인가? 자기는 죄를 짓고 싶지 않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싶고, 말씀에 순종하고 싶은데, 그런데 살다보니 자꾸만 타협하고 협상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마치 옆에서 밀어서 넘어지는 것처럼, 일종의 도미노 현상인데, 저쪽에서 죄를 짓자고 하니, 동조해서 짓지 않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조직사회인 회사에서 파업을 하는데 거기에 동조하지 않을 수가 있는가? 그러니 자기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기 싫어도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왕따를 당하고 결국 사표를 내야하는데, 그러면 사표를 내고 나면 대책이 있는가? 없다는 말이다.
물론 회사에 사표를 내고 개인사업을 시작할 수도 있는데, 그렇게 개인사업을 하면 거기에는 경쟁이 없는가? 개인사업을 하면 천국처럼 서로 서로 도와주면서 사이좋게 사업을 할 수 있느냐는 말이다. 오히려 직장생활보다도 훨씬 더 경쟁이 심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모든 문제를 복음에서 출발해야 하는데, 그게 아니라 "내가 여기에 있다" 라는 것으로 시작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자기의 있음을 근거로 해서 무엇을 하는고 하니, 구원을 언급하고, 율법을 언급하고, 십자가를 언급하고, 천국을 언급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출발이 있음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러니 구원, 율법, 십자가, 천국, 교회, 율법 등등, 그 모든 것을 이야기해도 어떻게 되는가?
그것은 복음이 아니라 그만 불교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대한 예수교가 아니라 대한 조계종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항상 "내가 여기에 있다" 라는 것인데, 그러니 "나에게 유리한 것이 무엇인가? 나에게 이익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 라고, 그렇게 나온다는 말이다.
그런데 '나' 라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부터 출발하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우리는 죽어도 살고 없어져도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바탕을 자기에게 두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 두어야 한다는 것인가? 바탕은 자기에게는 아예 없었고, 오직 예수님에게만 있다는 말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는데, 그러니 태초에 말씀이 먼저 있었고 그 다음에 생명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생명은 생명에서 출발하면 안 되고, 생명을 생명이 되게 한 원천을 찾아가야 하는데, 그러면 오리지널이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말씀이라는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인데, 그러니 세상 만물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생겨났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성령이 임해야만 선이 닿아진다는 것이다.
오늘은 잠언서가 마지막이고 다음 시간부터는 전도서를 한다고 했는데, 교재를 가지고 하면 30분이면 다 끝이 나는데, 하지만 마지막에는 정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정리가 되려면 이 테두리, 즉 마지막 끝을 분명히 해야 끝냈다고 하는 뿌듯함이 있다는 말이다.
그 테두리에 무엇이 침입하는고 하니, 예수님이 성육신이 되어서 이 땅에 오시기 이전에 먼저 지혜로, 즉 잠언으로 이 세상을 침투했다는 것이다. 이제부터는 어렵더라도 저금은 참아야 하는데, 마무리를 하려면 속도를 좀 내야하니 말이다.
◈ '1'이 어떻게 '2'로 변하는가?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들어왔다" 라고 한다면, 말씀은 '하나(1)' 인데, 이 말씀이 물질성을 입었는데, 신체를 말이다. 그러면 말씀이 하나라면 육신도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와서 보니 말씀이 하나가 아니라 둘이 된다는 말이다. 이것을 먼저 설명을 해야하는데, 순서가 그렇다는 것이다.
제가 분명히 "말씀이 육신이 되기 이전에 구약에서 잠언에 갇혀있는 인간세계에 미리 들어왔습니다" 라고 했는데, 그러면 말씀은 1이고 떠 육신이 1이라면, 여기에 들어오면 1이 등장해야 하는데, 그런데 막상 잠언서의 내용을 보면 1로 되는 것이 아니라 2로 정립이 된다는 것이다.
그 2가 무엇이고 하니까, "의인은 이러한데 악인은 이렇다" 라고 하는, 즉 "이 길로 가면 천국이지만, 이 길로 가면 지옥이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잠언서의 내용이 열심히 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의 끝은 이렇다" 라고 하면서 끝까지 몰아세우는,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니가 이렇게 살면 행복하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니가 이렇게 살면 지옥에 간다. 그런데 이렇게 살면 생명나무를 얻는다" 라는 식으로, 그만 끝을 봐버린다는 것이다. 그 끝을 말이다. 잠언서의 내용이 그러한데, 지혜가 바로 그렇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알아야 하는가? 이 테두리가, 이 경계선이 무엇이기에 1이 들어오면 2가 되느냐는 것이다. 이 경계선이 어떤 작용을 하기에 1이 2로 변하는지, 그것을 한 번 추적해보자는 말이다. 말이 좀 어렵지 싶은데, 그것을 달리 말하면 다음과 같은데 말이다.
◈ 세상 안에서 예수님을 찾으면, 곧 '우상' !!
우리는 "이 세상 안에서 예수님을 찾자"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렇게 해서 예수님을 찾게 되면 어떻게 된다는 말인가? 그러면 그만 우상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찾고자 하면, 그 예수님은 우상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세상 안에서 예수님을 찾으면 말이다.
갇혀있는 인간의 특징이 뭐라고 했는가? "내가 여기에 있다" 라는 것으로 시작한다고 했는데, 그것을 어제 낮 설교시간에 "나는 내 편이고, 나는 나밖에 모른다" 라고 지겹도록 강조를 했는데, 자기만이 최고이고, 그러니 자기를 지켜도 누가 지키는가? 자기가 지킨다는 것이다.
그렇게 '나'부터 출발하게 되니, 그것을 숫자로 표현하면 최종적인 '1'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이든 뭐든 간에 모든 것들이 다 자기를 위해서 있는데, 그 있음의 '나'가 확장이 되면, 그 어떤 일을 해도 반드시 자기의 이익과 자기의 번창과 자기의 성공을 원하는 쪽으로, 그렇게 나오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지혜의 말씀처럼 천국과 지옥이 구분이 된다고 하면, 그러면 '나'로부터 출발하게 되면 어떻게 나오는가? 둘 다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는 천국에 갈 사람이니 지옥에는 관심이 없고, 지옥만 받아들이겠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 축복과 저주 !!
그러면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신명기 28장에 보면 율법이 나오는데, 하나님의 무엇이라고 하시는가? 말씀을 지키면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는데, 반면에 지키지 않으면 들어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는다는 것이다.
(신 28:1)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신 28:3)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
(신 28:15)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니
(신 28:16) 네가 성읍에서도 저주를 받으며 들에서도 저주를 받을 것이요
그러니 하나님의 관심은 무엇인고 하니까, 우리는 "나는 천국에 갈 사람이니 지옥에는 관심이 없고, 지옥만 받아들이겠다" 라고 하는데, 하나님은 그게 아니라, "성도라면 반드시 그 안에 천국과 지옥을 다 품어야 한다" 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살아있는 내가 저기에 가고 싶어" 라고 할 수 있는 권한이 우리 인간에게는 없다는 말이다.
그렇게 없는데,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하고 싶다는 것이다. 천국에 가고 싶다는 말이다. 그러니 자기가 자기를 위해서 스스로 우상을 만들어내는데, 그러니 우상은 하나님의 취지가 아닌, 자기가 조작해서 만들어내서 자기에게 덧입히는 것이란 말이다. 그래서 천국 이야기만 해달라는 것인데, 지옥 이야기는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의도적으로 '지옥의 하나님' 이라는 책을 냈는데, 물론 팔리지는 않았는데 말이다(ㅋㅋ).
하나님께서는 천국만 나타내시는 것이 아니라 지옥도 함께 나타내실 때, 그게 움직이는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일방적으로 소유하려고 하는데, 그러니 우리가 그 얼마나 자기 위주인지 모르는데, 주님 위주가 되어야하는데 말이다.
그렇게 천국만을 사모하니까, 그들이 교회에 모여서 뭐라고 하는가? 사랑의 하나님을 이야기하는데, 긍정적 사고방식을 이야기하고 말이다. 그렇게 축복의 하나님을 이야기해야지, 만약에 저주의 하나님을 이야기하고 지옥의 하나님을 이야기하면 어떻게 하는가?
그런 교회에는 나가지를 않으려고 하는데, 자기와 자기 아이들에게 부정적인 사고방식을 심어줄까 싶어서 말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이 평소에 살아가는 모습이 얼마나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자이고 우상숭배주의자인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는 것이다.
◈ 잠언서는, 율법의 바탕 위에서 !!
그러니 이 잠언서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고 하니, 바깥에 있는 율법이라는 바탕에 실려서 잠언서를 해석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율법은 신명기 28장의 말씀처럼, 이것을 지키면 복을 받고 지키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모세가 에발산과 그리심산에 백성들을 세워놓고 어떻게 하는가? 에발산에서 저주의 미사일을 발사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저주를 받습니다. 아멘. 이렇게 하면 저주를 받습니다. 아멘"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이게 신명기에 분명히 나오는데, 그러니 구약성경은 축복 위주가 아니라 오히려 저주 위주라는 것이다.
(신 27:11) 모세가 당일에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신 27:12) 너희가 요단을 건넌 후에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요셉과 베냐민은 백성을 축복하기 위하여 그리심 산에 서고
(신 27:13) 르우벤과 갓과 아셀과 스불론과 단과 납달리는 저주하기 위하여 에발 산에 서고
(신 27:14) 레위 사람은 큰 소리로 이스라엘 모든 사람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신 27:15) 장색의 손으로 조각하였거나 부어 만든 우상은 여호와께 가증하니 그것을 만들어 은밀히 세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응답하여 아멘 할지니라
(신 27:16) 그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신 27:17) 그 이웃의 지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
(신 27:26)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실행치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그리고 신명기 32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아, 너희들은 저주를 받는다" 라고 하는데, 그렇게 신명기가 끝난다는 것이다. 이렇게 저주를 이야기를 하고 저주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은 그게 성경에 없는 것처럼 오해하고 있는데, 그런데 이것이 사실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구약성경 전체가 이스라엘의 멸망에 관한 것이기에 말이다. 이스라엘의 구원이 아니고 말이다.
물론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그래도 신약은 구원이 아닙니까?" 라고 하는데, 하지만 구약을 거치지 않은 신약은 우상이라는 것이다. 신약, 즉 새로운 언약은 옛 언약을 출발점으로 해서 전체를 다 관통해야 한다는 말이다. 자기에게 유리한 것만 신약에서 뽑아내면 안 되는데, 구약이 없는 신약은 없다는 것이다. 구약이 먼저 깔리고 신약을 해야한다는 말이다.
◈ 나는 구원을 받고 싶어라, 받고 싶어라 !!
예를 들어서, 여기에 난로에 물이 끓고 있는데, 난로가 있기에 물이 뜨거워진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물이 뜨거운 것은 결과물인데, 난로 때문에 말이다. 그런데 난로를 치워버리고서 "물아, 뜨거워져라. 뜨거워져라" 라고 하는 것은 구약으로 말하면 무엇이라는 말인가? "나는 구원을 받고 싶어라. 구원을 받고 싶어라" 라는 것인데, 그것은 그만 우상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니 저주가 없이는 구원이 없는데, 저주라는 것은 다른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구원을 받고자 하는 자기에게 문제가 있다는 말이다. 구약을 경유해야, "내가 구약의 사람들과 똑같구나. 이렇게 하다가 망했구나" 라고 하게 되는데, 그렇게 해서 자기 자신을 다시 한 번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어디에 비추어서 그렇다는 말인가? 하나님의 약속, 즉 언약에 비추어서 자기 자신을 바라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구약의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닌데, 우리의 모습을 잘 대변해준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율법에 근거해서 잠언서를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 우리는 계란탕 !!
예를 들어서, 계란탕과 같은 것을 만들 때 그냥 그릇에 바로 하면 맛이 없고, 물을 끓게 해서 중탕을 하게 되면 맛이 제법 나는데 말이다. 그렇게 우리의 모습을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율법에 담아서 봐야한다는 것이다. 율법에 실어서, 즉 중탕이 된 형태로 봐야 제대로 된 자기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면 우리가 우상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설명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이 땅에서 우리가 2가 되어야 하는데,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고집한다는 것인가? "나의 미래는 천국이야. 나는 천국에 가고 싶어" 라고 하면서, 자꾸만 1을 주장한다는 것이다. 그것 자체가 이미 우리 자체가 우상임을 보여주는데, 즉 2가 나와야 하는데 1이 나온다는 것은, 이미 우리 자신이 가짜라는 것이다.
◈ 탐내지 말라 !!
그러면 가짜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고 하니, 율법에 의해서, 혹은 잠언에 의해서 우상이 된다는 것을, 예를 들어서, 십계명의 경우를 보면 알 수가 있는데 말이다. 테두리를 이렇게 그려놓고, 우리는 거기서 벗어나지를 못하니 말이다. 십계명에서 "탐내지 말라" 라고 하는데, 제가 이런 예를 드는 것은 사도바울이 로마서 7장에 그런 예를 들었기에 말이다.
(롬 7: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우리가 "탐내지 말라" 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 "그 말씀을 위배하고 있는 것이 나입니다. 그래서 나는 지옥에 가도 마땅합니다" 라고 나오면 제대로 성경해석이 된 것인데,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탐내지 말라" 라는 말씀이 중간에 인간을 찾아왔는데, 즉 "나를 경유했다" 라는 것이다.
여기서 해답부터 먼저 말씀을 드리면,
율법은 신약에 의하면, 즉 요한복음 1장에 의하면 말씀이 누구를 경유하게 되어있는가?
예수님을 경유하는데, 그렇게 되면 1이 아닌 2가 나온다는 말이다.
"죄로 말미암아 죽었다가, 하나님의 의로 말미암아서 부활된다" 라는 것인데,
즉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그러한 두 가지의 결과물이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율법이 예수님을 거치면, 성육신을 거치면 말이다.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그런데 율법이 우리를 거치면 어떻게 되는가? "탐내지 말라" 라고 하면,
여기에서 그만 가짜가 나오는데, 즉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지키겠나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날아가는가? 갇혀있음의 경계선이 그만 무용지물이 되고 마는데,
즉 죄에 갇혀있지 않는 상태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래서 최선을 다해서 말씀에 순종하자고 나온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소리를 하는 순간에도 '째깍 째깍' 늙어가고 있고 말이다. 입
술은 터지고 몸은 아프고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그것을 또 뭐라고 하는고 하니,
말씀을 제대로 지키지 못해서 그렇다고 하는데,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탐내지 말라" 라는 말씀이 왔는데 그것을 제대로 지킨다고 하면 어떻게 된다는 것인가?
자기는 더 이상 늙지 않고 젊음을 유지하는, 그렇게 자기가 원하는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여긴다는 말이다.
그게 바로 우상인데, 즉 자기가 우상임이 드러나는 순간이 된다는 것이다.
◈ 레비나스는, 욕심의 특징을 성욕(性慾)으로 !!
이것을 '레비나스' 라는 유대교 철학자는 이러한 짓거리를 무엇으로 보았는고 하니, 성욕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모든 욕심의 특징을 성욕으로 보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이것은 늘 먹어도 허기가 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허기가 졌다는 것은 우리 속에 무엇이 있다는 것인가? 미흡함이 있다는 것인데, 그런데 그 미흡함은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것은 요한복음 4장의 물을 길러온 그 사마리아 여인이 보여주는 것과도 같은데, 그 여자가 남자를 몇 명이나 사귀었는가? 5명을 사귀었고, 한 명은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그 여자가 6명을 사귀면, 그 다음에는 남자가 꼴도 보기 싫다고 나오겠느냐는 말이다. 물론 여러분 가운데 그런 분도 있겠지만, 그것은 괜찮은 남자를 만나지 못해서 그렇다는 것이다(ㅋㅋ).
6명을 사귀면서 더 이상 사귀지 않는다고 하면, 레비나스는 그것은 자기 자신을 몰라서 그렇다고 한다는 것이다.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항상 미흡함에 끌려가는 인생을 산다는 말이다. 거기에 대해서 가장 예민하게 굴었던 자들이 불교의 승려들인데, 그들은 낮추고 낮추고 내려놓고 내려놓고, 그래서 여자의 경우에도 머리를 다 밀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산 속에 들어가서, 마치 산장의 여인처럼 말이다. 아무도 찾지 않는 산장에 들어가서 마지막 목숨을 내놓는, 그런 식으로 모든 것을 다 쏟아 부으면서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 해탈을 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해탈을 하고 싶은 이유가 있는데, 무엇이 자기를 괴롭힌다는 말인가?
◈ 욕망아, 불처럼 타올라라 !!
아무리 해도 끊어지지 않는 것이 있는데, 그게 인간의 욕심이란 것이다. 불교가 그렇게 발악을 한다는 것은, 다른 것은 자기가 다 알아서 처리하는데, 그런데 자기가 관리할 수 없는 것이 자기를 통치하고 있다는 것이고, 그게 곧 자기 욕심이고, 그것을 철학적으로 '욕망' 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그러해야 한다는 것이다. 불교는 욕심을 끊으려고 하는데,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불처럼 욕망이 일어나야 한다는 말이다. 즉 "탐내지 말라" 라는 말씀이 들어오는 순간, 우리 속에서는 갑자기 무엇이 타오르는고 하니, 그게 불소시게와 같은 역할을 해서, 탐냄을 아는 아궁이와 같은 역할로 우리 인간의 몸이 가동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탐내지 말라" 라는 말씀이 그만 자동차의 키가 되어서, 키를 꽂으니까 '부르릉' 하면서 시동이 걸린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탐에 탐냄을 추구하는데, 그렇게 해서 끝까지 탐내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 인간이 그 말씀을 따라잡을 수 있는가? 전혀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본격적으로 탐심이 발동하기 시작하니 말이다.
여러분은 이런 이야기가 즐겁지 않은지 모르겠는데, 즐거워야 한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 자기가 본격적으로 죄를 이기려고 하다가, 그만 자기는 도저히 죄를 이길 수 없다고 하는 티가 나는 순간이니 말이다. 그러니 어떻게 즐겁지 않을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면 여러분은 "목사님, 죄를 지으면 안 되지 않습니까?" 라고 나오지 싶은데, 그런데 제가 처음에 뭐라고 했는고 하니, "정죄함이 없나니" 라고 했다는 것이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정죄함이 없는 것으로 인해서 즐거워하고,
반면에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은 자기가 조금이라도 더 죄를 줄인다고 하면서,
그렇게 나름대로 보람을 느끼면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게 육에 속한 사람이라는 말이다.
◈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용하시는가?
지금 제가 하는 이야기가 "우리가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을 것인가?" 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용하시는가?" 라는 것인데, 그게 바로 "성육신을 빼놓고는 다 가짜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가짜가 가짜로서 살면 되는데, 성육신이 되신 예수님을 쳐다보면서 말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 정죄함이 없다는 것이다.
간단한데, 그러니 기독교 방식으로 불교인의 생활을 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죄를 줄여야지. 욕심을 끊어야지"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살라고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만드신 것이 아닌데, 가짜이면서도 가짜가 아닌 척을 하면서 살아가니, 그것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힘이 드느냐는 것이다.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은 남과 비교하는데, 그리고 자기 자신과 비교하는데, 자기의 과거와 말이다. 그리고 자기가 기대한 것과 자기의 현재 모습을 비교한다는 것이다. 남을 통해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확인하고 싶어하고 말이다. 그래서 남에게 질문을 해서 답변을 듣고는 화를 낸다는 것이다. 그 모든 문제가 바로 "내가 여기에 있다" 라는 것인데, 그게 화근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자기가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잠언서는 우리를 쫓아내는데, 갇혀있는 이 땅에서 말이다.
그런데 그냥 쫓아내어 버리면 우리는 죽어도 이 테두리에서 빠져나가지를 못하는데,
그런데 2의 모습을 보이면서 빠져나갈 때,
그것이 바로 비로소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언약과 함께 구원을 받는 자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보통 인간들은 하나를 보여주는데, 즉 "나는 이렇게 해서 구원을 받았다" 라고, 그렇게 자기 자신에 관해서 남들에게 이야기를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제대로 잠언서에 꽂힌 사람은 어떻게 나오는가? "아하, 이게 지옥이고, 또한 이것이 천국이구나!" 라고 하면서 양면을 다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러면 지옥을 보여주는데 있어서 자기가 발뺌을 할 수 없는데, 자기 모습을 통해서, 자기 삶을 통해서 무엇을 보여준다는 말인가? 지옥을 보여주는데, 즉 "어느 말씀 하나라도 내가 지킬 수 없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이 잠언서의 말씀이 한 두 개가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서 교재 187페이지를 살펴보자.
** 지혜는 우리 안에서 살고, 그 지혜가 우리 안에서 살아서 역사함으로서 우리가 날마다 죽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도 역시 우리의 가슴팍을 면도칼로 좍좍 찢어버립니다.
(잠 10:2) 불의의 재물은 무익하여도 의리는 죽음에서 건지느니라
(잠 10:3) 여호와께서 의인의 영혼은 주리지 않게 하시나 악인의 소욕은 물리치시느니라
(잠 10:4)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
여기 2절에 "불의의 재물은 무익하여도 의리는 죽음에서 건지느니라" 라고 하는데,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 바르게 살면 죽음에서 면제가 된다는 것인데, 그러면 여러분은 바르게 살 용의가 있는지 모르겠는데, 하지만 죽고 나면 소용이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3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의인의 영혼은 주리지 않게 하시나 악인의 소욕은 물리치시느니라" 라고 하는데, 과연 그러한가? 그렇다고 하면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먹고 살 수 있다는 말인데, 단언컨데 그런 경우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리고 4절에 보면,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 라고 하는데, 택배기사들이 얼마나 부지런한지 모르는데, 새벽 3시에 나와서 밤 9시에 집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러면 일주일에 최소한 70시간인데, 그러면 그들이 부자가 되었는가? 전혀 아닌데, 그렇게 고생을 하다가 나이가 들어서 그것마저도 놓게 되면 다시금 가난으로 내리꽂고 만다는 것이다.
여기 교재에 성경구절들이 계속해서 나오는데, 살펴보자.
(잠 10:21) 의인의 입술은 여러 사람을 교육하나 미련한 자는 지식이 없으므로 죽느니라
그러면 지식이 있으면 사는가? 우리 인간으로서는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잠 10:27) 여호와를 경외하면 장수하느니라 그러나 악인의 연세는 짧아지느니라
'인간시대' 라는 TV프로에 보면 할머니가 나오는데, 그 나이가 94살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할머니가 아침마다 "관세보살, 관세음보살!" 이라고 하면서 빌고 있다는 것이다. 부처를 믿어도 오래 사는데, 우리로서는 확인할 수 없다는 말이다.
(잠 11:1) 속이는 저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공평한 추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
이번에 재벌 총수가 8명이나 한꺼번에 국정조사에 나왔는데, 그들이 속이지 않았는가? 누구보다도 더 많이 속였기에 재벌이 되었다는 것이다. 지분이 2퍼센트로 그룹을 지배하고 있으니, 그것 자체가 사람들을 속이는 것이라는 말이다.
(잠 11:2)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
그러면 겸손한 사람이 욕은 듣지 않는가? 오히려 더 많이 듣는데, 그러니 이 말씀과 다르다는 것이다.
(잠 11:8) 의인은 환난에서 구원을 얻고 악인은 와서 그를 대신하느니라
계속해서 이야기를 했지만, 잠언서는 의인의 길과 악인의 두 가지 길을 다 보여준다는 것이다.
(잠 12:3) 사람이 악으로 굳게 서지 못하나니 의인의 뿌리는 움직이지 아니하느니라
여기서 "의인의 뿌리는 움직이지 않는다" 라고 해주면 좋겠는데, 그런데 "악으로 굳게 서지 못한다" 라는 말을 함으로서, 이런 두 가지 요소가 다 자기에게 있다는 것인데, 그러니 "정신을 차려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게 정신을 차린다고 해서 될 문제인가? 이 세상에서 혼자 살면 모르겠는데, 더불어 사는 세상에서 그렇게 될 수 없다는 말이다. 본의 아니게 악을 저지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잠 12:5) 의인의 생각은 공직하여도 악인의 도모는 궤휼이니라
우리가 평생 한 번도 속이지 않는가? 심지어 설교를 해도 내내 속이고 있는 것인데 말이다.
(잠 13:9) 의인의 빛은 환하게 빛나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느니라
예수를 믿으면 얼굴이 훤하게 피는가? 항상 건강하고 말이다. 전혀 그렇지 않은데, 몸이 아프면 얼굴빛도 사라지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잠 14:22) 악을 도모하는 자는 그릇 가는 것이 아니냐 선을 도모하는 자에게는 인자와 진리가 있으리라
인자와 진리를 얻기 위해서 선을 행하기에는 그 보상이 너무 약하다는 것이다. 선을 행하면 부자가 된다고 하는 것이 있어줘야 용기가 날텐데 말이다.
(잠 14:29)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크게 명철하여도 마음이 조급한 자는 어리석음을 나타내느니라
노하고 싶어서 노하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그리고 조급한 것이 취미인 사람이 누가 있는가? 그런데 상황이 그렇게 되니 화가 나고, 급하니 조급해진다는 말이다. 우리는 말씀대로 살고 싶어도, 주변환경이 가만히 두지 않고 흔들어버린다는 것이다.
(잠 15:16) 가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이왕이면 부자가 되어서 여호와를 믿는 것이 좋지 싶은데, 그런데 지지리도 궁상이 되어서 하나님을 믿으면 그 꼴이 좋겠냐는 말이다. "교회에 나오면 가난하게 만들어드리겠습니다" 라고 하면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겠느냐는 것이다.
(잠 15:17) 여간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물론 요즘은 채소가 몸에 좋다고 해서 많이 먹기도 하지만, 그래서 한 번씩은 고기를 먹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비싼 한우까지는 아니더라도 국내산 삼겹살 정도는 말이다. 요즘은 스님들도 고기를 먹는데 말이다(ㅋㅋ).
(잠 15:25) 여호와는 교만한 자의 집을 허시며 과부의 지계를 정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를 완전히 부수어 버린다는 것인데, 이 세상이 정말로 그러한가? 우리나라 재벌그룹의 회장들은 보라는 것이다. 그 누구보다도 튼튼하게 잘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대를 이어가면서 말이다.
(잠 16:1)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
그러면 마음의 경영만 하고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되는가? 대구의 어느 교회의 목사가 이야기한 것처럼 멋대로 살면 되느냐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알아서 다 해주시는가? 지금 제가 질문을 받던 것을 저에게 하는 느낌인데 말이다(ㅋㅋ).
(잠 16:25)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이런 말씀이 왜 문제가 되는고 하니, 저 사람은 누구나 다 천국에 갈 것이라고 여기는데, 그런데 지옥에 가더라는 말이다. 그러면 누가 천국에 갈지 지옥에 갈지, 그 기준을 내세운다는 것 자체가 인정받지 못하는데, 그렇게 되면 거기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아무런 기준도 없이 평생을 허송하게 되는데,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는 말이다. 자기가 말하는 것이 틀릴 수 있다고 하면, "저 사람은 천국에 간다" 라고 했는데, 그만 지옥에 가버리면, 그러면 그것은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자기가 무슨 이야기를 해도, 그것은 하나마나한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잠 17:15) 악인을 의롭다 하며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자는 다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느라
악인을 의롭다고 하며 의인을 악하다고 하는 이유가 있는데, 자기는 그게 악이 아니고 의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자기는 악이라고 여기고, 그렇게 판단을 내렸는데, 그런데 처음부터 이것은 판단을 잘못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 인간에게는 제대로 판단할 수 있는, 그런 기준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모든 인간이 이런 실수를 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잠 18:1) 무리에게서 스스로 나뉘는 자는 자기 소욕을 따르는 자라 온갖 참 지혜를 배척하느니라
이 말씀은 정말로 곤란한데, 왜냐하면 이 말씀을 어긴 분이 바로 예수님이기에 말이다. 모든 사람들이 '예' 라고 할 때, 예수님은 혼자서 '아니오'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나는 빛이고 너희들은 어둠이다" 라고 하신 것은 갈라서겠다는 것인데, 그러면 이 말씀과 전혀 맞지 않다는 것이다.
(잠 18:8)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 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
이것은 남의 말을 하지 말라는 것인데, 그러면 여자들이 전화를 왜 하는가? 그것도 두 시간씩 말이다. 그리고 TV 드라마는 왜 그렇게 열심히 보느냐는 말이다. 전부가 다 남의 일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남들이 어떻게 하는지, 거기에 신경을 쓰지 말고 "니나 잘하세요!" 라는 것인데, 이영애가 그런 말을 했지 싶은데 말이다.
(잠 18:14) 사람의 심령은 그 병을 능히 이기려니와 심령이 상하면 그것을 누가 일으키겠느냐
몸이 아프면 그게 곧 마음의 문제라는 것인데, 우리가 그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자기 마음이 아픈 것을 자기가 어떻게 고치느냐는 말이다. 과연 고칠 수 있는가? 그러니 이 말씀도 우리에게는 너무나도 버거운데, 물론 잠언서 전체가 그렇지만 말이다.
(잠 19:1) 성실히 행하는 가난한 자는 입술이 패려하고 미련한 자보다 나으니라
성실한 자가 미련한 자보다 낫다는 것은 우리가 모르는 바가 아닌데, 그러면 그렇게 되려면 거기에 대한 보상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그냥 "낫다. 끝!" 라고, 그렇게 되어버리면 어떻게 하느냐는 말이다.
(잠 19:11) 노하기를 더디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
남을 용서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르는데, 설령 그렇게 용서를 해준다고 해도, 그러면 상대방은 그것을 악용해서 또 이용하고 또 이용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오죽했으면 베드로가 "7번까지 용서해주면 됩니까?" 라고 했느냐는 것이다. 주님의 대답은 490번이었는데, 그러면서 그것으로도 모자란다고 하셨다는 말이다.
(잠 19:13) 미련한 아들은 그 아비의 재앙이요 다투는 아내는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이니라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쉽게 말해서 "결혼을 괜히 했다" 라는 것인데, 자식 가운데 하는 짓이 마음에 드는 자식이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다. 물론 가끔은 마음에 들 수도 있지만 말이다. 그리고 물방울이 떨어진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고 하니, 참으로 재미있는 표현인데 말이다. 똑똑 물방울이 떨어진다는 것은 그야말로 뒤끝작렬인데, 했던 소리를 또 하고 또 하고 말이다.
그래서 21장에 보면, 잔소리가 많은 여자와 사는 것보다도 혼자서 사는 것이 낫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두 번이나 나오는데, 물론 이 말씀을 결혼하지 전에 알았으면 다행인데, 그 이후에 알게 되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하느냐는 말이다(ㅋㅋ).
(잠 21:9)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
그것을 여기 교재에서 설명하기를, 비가 샌다고 하는데 말이다. 얼마나 바가지를 많이 긁었으면 그러하냐는 말이다. 아내의 바가지는 끝났다 싶으면 시작하고, 끝났다 싶으면 또 시작하고, 그렇게 끝이 없다는 것이다. 끝없는 사랑이 아니라 끝없는 바가지라는 말이다.
(잠 20:1) 포도주는 거만케 하는 것이요 독주는 떠들게 하는 것이라 무릇 이에 미혹되는 자에게는 지혜가 없느니라
이게 소위 주사라는 것인데, 못된 술버릇이라는 말이다. 그러면 술은 왜 마시는가? 그렇게 주사를 부리고 떠들어도, 술을 마시는 그 쾌감이 그 모든 것을 상쇄하고 남기 때문에, 또 다시 뭐라고 하는가? "아, 땡긴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잠 20:11) 비록 아이라도 그 동작으로 자기의 품행의 청결하며 정직한 여부를 나타내느니라
비록 아이라고 해도 어른보다도 더 낫다는 것인데,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아이를 어른으로 여기고서 섬길 수는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잠 20:14) 사는 자가 물건이 좋지 못하다 좋지 못하다 하다가 돌아간 후에는 자랑하느니라
장사를 하는 사람을 두고 감정 노동자라고 하는데,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다 그러한데 말이다. 첫 손님부터 살듯 살듯, 그렇게 하다가 그냥 돌아가 버리면 열을 받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입만 실컷 아프게 해놓고 말이다. 그러면 소금을 뿌리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잠언서에서 계속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왕이 말하기를 "너희들이 구원을 말할 입장이 되지 못한다. 구원은 고사하고 저주를 받아야 합당하다. 물론 너희들끼리는 그게 용납이 되겠지만, 이 잠언서의 말씀 앞에서 누가 이것을 견디고 버틸 수가 있는가?" 라고 한다는 말이다. 사실은 이게 버틸 문제가 아니고 말씀이 오게 되면 시동이 걸린다고 했는데, 이 말씀이 그만 잠자는 욕망의 코털을 건드린다는 것이다.
◈ 우상 = '미지의 엑스 + 물체성' !!
(잠 20:25) 함부로 이 물건을 거룩하다 하여 서원하고 그 후에 살피면 그것이 그물이 되느니라
이 말씀을 제가 꼭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이게 무슨 의미인고 하니까, 우상이라는 것은 보이지 않는 신과 미지의 엑스(X), 그리고 물체성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우상은 어떤 물체를 두고, 그 물체 안에 무엇인가 들어있다는 것인데, 그 들어있는 미지의 엑스, 거기에 비는 것이 곧 우상숭배이란 말이다.
그냥 빌면 막연하니, 어떤 물체를 만든다는 것이다. 천주교 신자들의 안방에 가면 마리아 상이 있는데, 그 앞에서 빌면 집중해서 기도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냥 기도하는 것보다 말이다. 그게 바로 우상을 섬기는 행위인데, 그래서 그 물체에 손을 대면 안 되는데, 그 안에 무엇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얘들아, 안방에 있는 마리아 상에 손을 대면 안 된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과 같은 것, 그리고 왜 중국에서 너무 예수님을 보고 싶었는데, 눈이 오는 가운데 우연히 찍은 사진이 예수님을 닮았다고 하든지 말이다. 그런 것을 함부로 대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천주교 신자들이 불교에서 하는 것과 같이 묵주를 돌리면서 기도를 하는데, 그것을 보고는 제 아내가 손 운동은 되겠다고 하는데, 치매 예방용으로 말이다(ㅋㅋ).
◈ 그러니 인간의 행동 하나하나가 곧 우상성 !!
그게 바로 우상인데, 우상은 물체 안에 뭔가 다른 기가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집에서는 기도가 되지 않고, 새벽에 교회에 나와서, 그것도 앞자리에 앉아야만 기도가 된다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것은 자기가 예배당이라는 우상에 끌린 것이고, 그리고 그것은 자기가 평소에 그렇게 우상적이라는 것이다. 행동 하나하나가 말이다.
그러면 왜 우상적으로 행동하는가? 그것은 어떻게 하든지 자기를 건지려고 하고, 자기를 관리하려고 하는데, 괜찮은 존재로서 자기를 개조시키기 위해서 집중력을 자기에게 쏟아 붓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게 바로 우상이고, 우상을 섬기는 행위라는 말이다.
그냥 "나 같은 인간은 말씀이 없어서 지옥에 갑니다" 라고 하면 되는데, 그런데 그게 아니라 자기를 기어이 죄 많은 이 세상에서 건져서 천국에 들여보내려고 한다는 것이다. 자기가 할 수 있는 한 모든 종교적인 기술을 다 발휘해서 말이다. "이케요? 저케요?" 라고 하면서 말이다.
(잠 21:1)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보의 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
대통령이 되면 함부로 하야를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인데, 특히 태국과 같은 경우에는 왕에 대해서 좋지 않은 소리를 했다고, 인터넷으로 말이다. 그래서 징역 20년을 받았다는 것이다. 태국은 왕을 없애든지 해야하는데, 무슨 왕을 그렇게 신처럼 섬기느냐는 말이다. 다른 나라의 왕들은 상징적 존재라서 괜찮은데, 태국은 그렇지가 않다는 것이다. 완전히 우상인데, 최고 존엄성이 어쩌고 하는 북한의 김일성처럼 말이다.
(잠 21:31) 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거니와 이김은 여호와께 있느니라
백 날을 준비해도 승리는 누구에게 있다는 말인가? 주님께서 결정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결정은 주님이 하셔도 준비는 우리가 해야지" 라고 나오는데, 하지만 이런 논리라면 수능을 앞두고 기도회를 하는 것도 정당화가 되는데, 준비는 우리가 하고 점수는 알아서 하나님이 주시고 말이다.
하지만 그 기도의 내용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대로 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압력을 가하는 것인데, "그저 준비한 것만 나오게 하소서" 라고, 쉽게 말해서 백점을 맞게 해달라는 것이다(ㅋㅋ). 이것을 우리 인생전체로 본다면, "하나님이여, 저는 욕심이 없습니다. 다만 제가 최선을 다했다는 것은 잊지 말아주옵소서"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 다시 정리하면 !!
여기에서 잠시 다시 정리를 하겠는데, 우리가 '있음'부터 출발을 하는데, 그 있음을 주님은 말씀으로 하시는데, 그러니 "니가 있다" 라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너' 라는 것이 있으면 우상이 되어버리는데, 그래서 "잠언이 있다. 지혜가 있어서 너밖에 모르는 너를 관통해서, 천국과 지옥의 양면을 너의 몸을 통해서 보여주겠다" 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아하, 내가 이렇게 행동하는 게 지옥에 가는 행동이구나. 이렇게 행동하는 게 지옥에 가는 행동이구나" 라고, 그것으로 끝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 구원을 받았다고 하지 말라는 것인데, 구원은 그렇게 해서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몸을 위해서 한 몸을 준비한 것이 있는데, 그게 바로 성육신, 즉 예수님의 몸에 말씀이 합쳐져서 구원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죄를 짓지 않아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정죄함이 없나니" 라는 것인데, 즉 "그 어떤 죄를 지어도 나는 너에게 죄를 묻지 않겠다" 라는 것이다. 그것으로 인해서 구원되는데, 왜냐하면 죄 값은 이미 치렀으니 말이다. 그러니 자기의 살 것은 생각한다면 그것 자체가 이미 우상이라는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잠언서를 보게 되면 그렇게 어렵지 않다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잠 23:1) 네가 관원과 함께 앉아 음식을 먹게 되거든 삼가 네 앞에 있는 자가 누구인지 생각하며
조심해서 살라는 것인데, 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조심해서 산다는 것도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잠 23:12) 훈계에 착심하며 지식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
(잠 23:13)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치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죽지 아니하리라
여기에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치 말라" 라고 하면서 두 번이나 부정적인 표현을 사용하는데, 그러니 이것은 우리가 평소에 얼마나 '내 새끼' 라고 하면서 살아가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채찍으로 때리라고 하는데, 쉽게 말해서 "죽도록 패라" 라고 하신다는 말이다.
달리 말하면, "그런 나쁜 짓을 하는 자식을 살려놓은 부모인 내가 나쁜 놈이다" 라는 것인데, 그러니 이것은 진짜로 그렇게 죽도록 때리라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때릴 위인이 없다는 말이다. 말을 잘 들어야 하는데, 자식이 나쁘다고 해서 "니가 있으면 남들에게 피해를 주니 너는 죽어라" 라고 하는 부모는 없다는 것이다.
자기 자식을 죽이려고 자식을 낳은 부모는 없는데, 그러니 부모의 심정은 자식이 아무리 잘못했어도 "잘했다, 잘했어!" 라고 한다는 것이다. "나는 앞으로 예수님을 믿지 않을 거야" 라고 해도, "잘했어요. 내 새끼!" 라고 한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없어요" 라고 해도, "똑똑하기도 해라. 내 새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부모의 경우에, 자식이라는 것은 자기의 있음으로 인해서 생긴 있음인데, 그래서 부모는 어떻게 나온다는 말인가? 인간 자체가 우상이기 때문에, 반드시 주의 말씀에 대해서는 거부하고 기피하는 쪽으로 모든 사고하고 행동이 나오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잠 23:25)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
연세가 많은 분들은 이런 말씀을 보면 흐뭇해하는데, 어떻게 부모를 즐겁게 해줄 수 있는가?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신 경우에 홀로 계신 아버지에게 어떻게 하면 최고의 효도를 할 수 있는가? 젊은 여자를 소개해주면 되는데, 왜냐하면 아까 뭐라고 했는가? 인간의 최고 욕망은 성욕이라는 말이다. 반대로 어머니가 홀로 계시면 돈 많은 남자를 소개시켜주면 되는데, 그 이상의 효도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식이 아무리 부모를 기쁘게 해드린다고 해도, 그게 한도 끝도 없다는 것이다. 전화를 하지 않다가 1년에 한 번만 해도 엄청 고마워하는데, 그런데 자주 하는 경우에는 한 달만 하지를 않아도 미워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 번 찾아오게 되면, 계속해서 찾아와야 하고 말이다. 물론 봉투도 점점 그 두께야 두꺼워져야 한다는 것이다(ㅋㅋ).
그러니 부모라고 해서 욕심이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본격화가 되는데, 그러니 부모를 기쁘게 해드리려고 하면 다니던 직장도 그만 두어야 하는데, 그리고는 계속해서 부모의 우상성을 남발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주 안에서 효도하라" 라고 하는데, 즉 "아버님, 지옥에 갑니다" 라는 것이 바로 효도라는 말이다.
(잠 23:30) 술에 잠긴 자에게 있고 혼합한 술을 구하러 다니는 자에게 있느니라
요즘 '혼술남녀' 라는 말이 있는데, 거기서는 혼자라는 의미이고(ㅋㅋ), 여기서는 폭탄주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술을 마시는 자들이 뭐라고 하는가? "내가 술이 좋아서 마시는 것이 아니고, 얼마나 답답했으면 마시겠는가?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맨 날 술이야 ♬" 라는, 그런 노래도 있는데 말이다.
(잠 23:35) 네가 스스로 말하기를 사람이 나를 때려도 나는 아프지 아니하고 나를 상하게 하여도 내게 감각이 없도다 내가 언제나 깰까 다시 술을 찾겠다 하리라
이게 바로 술을 마시는 사람들은 물질로 변한다는 것인데, 때려도 아픈 줄도 모르고 말이다. 그러니 이런 인간은 지옥에 간다는 것인데, 그런데 술을 마시는 자들은 뭐라고 하는가? "내가 오죽 답답했으면 마시겠는가? 그것마저도 마시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다. 그래서 술이라도 먹어야 남들에게 해꼬질도 하지 않고 곱게 잠이라도 잔다" 라고 하면서 자기 변명을 한다는 것이다.
(잠 24:11) 너는 사망으로 끌려가는 자를 건져주며 살륙을 당하게 된 자를 구원하지 아니치 말라
이것은 상당히 위험한 짓인데, 그럴 때는 경찰에게 신고하면 된다는 것이다. 만약에 지하철을 타려고 갔는데, 어떤 술에 취한 사람이 그만 철로에 떨어져 있다고 하면, 그러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자기만 생각하면 안 되고, 자기가 만약에 건지려고 들어갔을 때, 그때 자기 가족들이 얼마나 걱정할지, 그것까지도 신경을 써야한다는 말이다. 그것도 0.5초 내에 말이다.
(잠 24:28) 너는 까닭없이 네 이웃을 쳐서 증인이 되지 말며 네 입술로 속이지 말지니라
쉽게 말해서, "보증을 서지 말라" 라는 것인데, 그 사람의 인생을 자기가 보증을 선다고 하는 것 자체가 매우 건방지다는 것이다. 모든 인생은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시는 것이지, 제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자기가 어떻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잠 25:2)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
왕을 함부로 폄하하지 말고 욕하지 말라는 것인데, 그러면 만약에 왕이 독재를 하면 어떻게 하는가? 이런 문제가 또 발생한다는 것이다.
(잠 25:16) 너는 꿀을 만나거든 족하리만큼 먹으라 과식하므로 토할까 두려우니라
이 말씀이 참 어려운데, 족하다는 것을 알려고 하면 토하는 지점을 넘어서야 한다는 말이다. 나쁘다는 것을 알려고 하면, 갈 때까지 가보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잠 25:17) 너는 이웃집에 자주 다니지 말라 그가 너를 싫어하며 미워할까 두려우니라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자주' 라는 것이 몇 번이냐는 것인데, 그것은 사람에 따라서 다르다는 것이다. 너무 자주 가도 귀찮아 할 것이고, 너무 가지 않아도 그렇고 말이다. 적당하게 해야만 하는데, 그게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이다.
(잠 26:11)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
이것은 더욱 더 어려운데, 미려한 자가 거듭 행하는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자기를 미련하지 않다고 보기 때문인데, 자기는 거듭 할만하다고 여기기에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판단은 남들이 관여할 문제가 전혀 아닌데, 어디까지나 자기가 알아서 결정할 문제라는 말이다. 그러니 이 말씀도 현실과는 맞지 않다는 것이다.
(잠 27:1)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
사람은 불안해서 살아갈 수가 없는데, 뭔가 편안해야 하는데 말이다. 그러니까 이 말씀도 우리가 지킬 수가 없다는 것이다.
(잠 27:10) 네 친구와 네 아비의 친구를 버리지 말며 네 환난 날에 형제의 집에 들어가지 말지어다 가까운 이웃이 먼 형제보다 나으니라
결혼하고 난 다음에 남자 쪽에 친구들이 많으면 여자들이 싫어하는데, 총각 때처럼 집에다가 친구들을 몰고 오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친구를 끊어야 하는데, 그런데 이 말씀은 반대라는 것이다. 심지어 아버지의 친구도 버리지 말라고 한다는 것이다.
우리 할아버지의 경우에는, 친구 분들이 너무나 많아서 할머니는 술상을 차린다고 정신이 없었는데, 저는 그것을 어릴 때부터 보면서 자랐는데 말이다. 물론 그러면서도 하루가 멀다하고 친구 집에 놀러가서 라면을 끓어먹고 했지만 말이다(ㅋㅋ).
(잠 27:19) 물에 비취이면 얼굴이 서로 같은 것 같이 사람의 마음도 서로 비취느니라
이것은 같은 인간들끼리 모인다는 말인데, 그러니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이다.
(잠 28:4) 율법을 버린 자는 악인을 칭찬하나 율법을 지키는 자는 악인을 대적하느니라
이것도 왜 문제가 되는고 하니, 자기가 율법을 버린 자라고 하면, 그런 자들만 찾아서 친구로 삼는다는 것이다. 그게 살아가는 재미인데, 그러니 그것을 어떻게 포기할 수 있느냐는 말이다.
(잠 28:9) 사람이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
이렇게 되면 기도할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왜냐하면 기도하기 전에 가기를 돌아봐서,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면 기도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아까 "탐내지 말라" 라는 것을 했는데, 십계명도 지키지 못하면서 어떻게 기도를 하느냐는 말이다. 속에 탐심이 있는데 말이다.
그런데 상태에서 아무리 열심히 기도해도, 그 기도에는 무엇만 들어있겠는가? 자기의 탐욕만 가득히 담기게 되는데, 그러니 그것은 가증한 기도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기도만 받지, 우리의 기도는 받지 않는다는 말이다.
(잠 29:3) 지혜를 사모하는 자는 아비를 즐겁게 하여도 창기를 사귀는 자는 재물을 없이 하느니라
이것이 과연 "자식은 영원히 아버지의 품에서 살아라" 라는 의미이겠는가? 그게 아니라, "아버지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살아야 한다" 라는 것이다. 하지만 자식이 언제까지 아버지의 품에 살려고 하겠는가? 자립을 하려고 하지 말이다.
(잠 29:21) 종을 어렸을 때부터 곱게 양육하면 그가 나중에는 자식인체 하리라
이런 말씀은 참 좋은데, 예쁘다고 해주니까 마구 기어오른다는 것이다. 물론 직원일 경우에는 좋은데, 그런데 그 직원이 나중에 사장이 되면 뭐라고 하는가? 병원에 간병인을 불러놓았더니만, 자기가 앉아서 큰소리를 친다는 것이다. 오히려 보호자는 눈치를 보고 말이다.
(잠 29:24) 도적과 짝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미워하는 자라 그는 맹세함을 들어도 직고하지 아니하느니라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 죽고 싶으면 도적과 친구를 하라는 말인데, 자기 마음이 도둑놈의 심보라면 그런 도둑놈을 친구로 삼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잠 30:15) 거머리에게는 두 딸이 있어 다고 다고 하느니라 족한 줄을 알지 못하여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참 재미있는 표현인데, 거머리에게 딸이 둘이 있는데, 시집을 보냈는데 너무 가까운 곳에 보내서 매일같이 친정에 와서 달라고 한다는 것이다. "엄마, 언니는 이번에 무엇을 가지고 갔어?"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거머리와 같은 딸인데, 그래도 엄마는 그 딸이 귀엽다는 말이다. 그러니 인간은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이용하려고 하는데, 그게 바로 인간의 심보라는 것이다.
드디어 제일 교재 마지막인 204페이지까지 왔는데, 계속해서 보자.
(잠 30:21) 세상을 진동시키며 세상으로 견딜 수 없게 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잠 30:22) 곧 종이 임금된 것과 미련한 자가 배부른 것과
(잠 30:23) 꺼림을 받는 계집이 시집간 것과 계집 종이 주모를 이은 것이니라
여기에 4가지 경우가 나오는데, 즉 종이 임금이 된 것, 미련한 자가 배부른 것, 꺼림을 받는 계집이 시집을 가는 것, 그리고 계집종이 주모가 되는 것, 그게 그게 견딜 수 없이 밉다는 것이다. 그러니 참으로 구닥다리인데 말이다. 특히 23절에 "꺼림을 받는 계집이 시집간 것" 이라고 하는데, 시집을 갔다는 말은, 시집을 가서 고생하는 것이 아니라 호강을 한다는 말이다.
(잠 30:24) 땅에 작고도 가장 지혜로운 것 넷이 있나니
(잠 30:25) 곧 힘이 없는 종류로되 먹을 것을 여름에 예비하는 개미와
(잠 30:26) 약한 종류로되 집을 바위 사이에 짓는 사반과
(잠 30:27) 임금이 없으되 다 떼를 지어 나아가는 메뚜기와
(잠 30:28) 손에 잡힐만하여도 왕궁에 있는 도마뱀이니라
여기에 개매, 사반, 메뚜기, 도마뱀 등이 나오는데, 사반은 오소리라고 보면 되고 말이다. 여기에 나오는 것들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질서에 잡힌 대로 자기 위치를 알아서 자기 일에 성실하다" 라고 정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질서가 잡힌 대로, 그러니 자기가 스스로 알아서 독자적으로 행동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게 세상을 살아가는 이치라는 것이다.
(잠 31:30)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여기에 "고운 것도 아름다운 것도 다 헛되다" 라고 하는데, 이것은 무슨 의미인고 하니까, 남자들이 무엇이 고운지, 무엇이 아름다운지, 그것을 전혀 분간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즉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지혜에 대해서 감각이 없다" 라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스스로 우상화가 되어있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인간은 자기밖에 모른다는 말이다.
◈ 인간은 죽어 마땅한 존재 !!
그 다음에 여기 교재에 나오는 '글을 마무리하면서' 라는 부분은 지난 시간에 했는데, 다시 간단하게 하면, "인간은 결국 죽는다" 라는 것이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고, 그래서 여기에 보면 "인간은 죽어 마땅한 존재이다" 라고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은 진작 죽어도 마땅한 존재인데, 그렇다면 왜 사는가? 그것은 말씀과 지혜와 율법이 관통이 되는 사람, 마치 어묵을 꼬지에 꽂듯이, 그렇게 꽂는 꼬지가 하나님의 새 언약이라고 하면, 그것이 복음이라고 하면, 우리는 촘촘하게 하나씩 꽂혀있는데, 그러니 개인구원이 아니라 공동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 마치 꼬치오뎅처럼 !!
그렇게 오뎅에 꼬지가 관통하게 되면, 거기서 "정죄함이 없나니" 라는 것이 나오는데, 즉 "너희들이 하지 못한 것을 누가 하셨는고 하니, 우상이 아니신 예수님의 유일한 신체성이 하셨다" 라는 것이다. 즉 말씀이 신체성이 된 것인데, 유일하게 우상이 아닌 말이다. 우상은 물질 속에서 엉터리 기가 나오는데, 그 기는 개인의 욕망을 의미하고 말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은 자기가 어디에 갇혀있다는 것도 전혀 모르고, 자기가 스스로 자기를 구원하려고 절대자가 되기 위해서 애쓰다가 보니까 어떻게 되는가? 천국에 가고 싶어하는 욕망, 바로 그 구원의 욕망이 점점 더 자기를 우상으로 만들고 만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우리 인간이 처해있는 현주소라는 말이다.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이 오셔서, "진짜 인간은 이런 인간이다. 이런 인간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 라고 하시는데, 그래서 말씀이 육신이 되는데, 즉 '성육신' 이라는 것이다. 이게 곧 십자가이고 복음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여기 복음의 막대기에 하나씩 꽂히게 되면, 그러면 말씀에 꽂히게 되니 말씀이 사람이 되는데, 즉 '지혜의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거기에는 자기가 말씀을 지켰다고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정죄함이 없나니" 라는 혜택을 입은 자들만 나란히 꽂혀있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꼬치어묵을 좋아하셔서 그렇게 했는지 모르겠는데(ㅋㅋ), 그래서 이런 자들이 천국을 차지하게 되면, 그 천국에서는 자기 자신이 아니라, 오직 주님에게만 영광을 돌리게 된다는 말이다.
◈ 이제 마지막으로 !!
이제 이 말씀만 하고 마치겠는데, 잠언서를 참 오랫동안 한 것 같은데 말이다. 교재 187페이지에 보면 잠언서 30장 4절의 말씀이 나오는데, 다같이 읽어보도록 하자.
(잠 30:4) 하늘에 올라갔다가 내려온 자가 누구인지, 바람을 그 장중에 모은 자가 누구인지, 물을 옷에 싼 자가 누구인지, 땅의 모든 끝을 정한 자가 누구인지, 그 이름이 무엇인지, 그 아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너는 아느냐
여기 마지막에 보면 "그 아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너는 아느냐?" 라고 하는데, 물론 그 이름을 우리는 아는데, 그분이 누구인가? 나사렛 예수인데, 즉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 잠언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잠언서를 끝내면서 우리가 스스로의 힘으로 결코 구원될 수 없음을 다시 한 번 일깨워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우리를 관통하셔서, 우리가 무엇을 먹든지 무엇을 하든지 간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드러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6,12,15 오후 6시에 마침.
그 아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너는 아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