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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강의-죄와벌.구원의 방해자 161004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10. 23. 08:27
2016-10-05 01:12:30조회 : 148         
유튜브(164강, 165강), 죄와 벌, 구원의 방해자 161004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164강                 음성                  동영상

 

165강                 음성                  동영상

 이미아 (IP:122.♡.165.245)16-10-16 13:29 
164강-YouTube강의(죄와 벌)161004-이 근호 목사 

  

오늘은 164강, 제목은 ‘죄와 벌’입니다. 인간에게는 거울로 봐서는 보이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양심이라는 겁니다. 양심이라는 것은 참 놀랍게도 직업이라든지, 나이, 학벌, 이런 것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그 내부에서 화산처럼 인간 전체를 장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아무리 남들 보기에 멀쩡하게 살고 성공했다고 쳐도 죄와 벌에 대해서 굉장히 민감하게 돼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이 양심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인간내부에 의해서 작용하는 율법기능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인간은 자기가 최고인줄 알지만, 계속해서 인간을 강력하게 압박하고 또는 협박하는 그러한 초월적인 힘을 인간을 배제할 수가 없습니다. 

  

양심에 대해서 자유롭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숙면을 취하기가 힘들 겁니다. 쾌적한 환경에서 잠자고 싶지만, 뭔가 자기가 보기에 꺼림칙한 일을, 만약에 낮에 일상생활 할 때 일을 벌였다면, 아무리 좋은 침대에서, 비싸고 호사스러운 그런 쾌적한 입장에서도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전전긍긍할 것입니다. 근데 이것이 양심이 주는 공포, 또는 저주의 협박이라고 그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이 양심과 인간의 관계는 어떤 관계냐 하면, 인간이 아무리 그 양심이라는 것을 제거하려고, 또는 손보려고 해도, 항상 양심은 인간 위에서, 인간을 내다보면서 통제하고 통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어떤 의미에서 양심의 노예, 또는 양심의 종, 그렇게 시달리고 살아가고 있죠. 

  

그래서 성경은 이 양심에 대해서 이렇게 합니다. 니가 선과 악에 대해서 의식을 갖고 있다는 자체가, 이것은 처음부터 하나님이 만든 그 인간존재가 아니라, 이질적인 것이 스며들었기 때문에 평생을 그렇게 힘들게 한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양심에서부터 뭔가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해서 벌을 받음으로써 깔끔하게, 이 저주로 오는 괴로움을 해소하려는 나름대로의 노력을 시도하게 되죠. 

  

스스로 자책한다든지, 일기장을 쓴다든지, 반성을 한다든지, 자기가 아는 죄의 분량만큼 착한 일을 도모해가지고 신 앞에, 양심 앞에 뭔가 한 줌 거리낌 없이 당당해보려고 그렇게 시도합니다. 이것이 뭐냐 하면 죄와 벌 사이에 놓여있는 균형 감각이라고 그렇게 할 수가 있는데, 그러나 인간이 아무리 잘 살고 바르게 산다고 할지라도 끊임없이 계속해서 양심은 더욱더 세밀하게, 세밀하게 우리로 하여금 자꾸 죄 항목의 리스트를 양심자체가 스스로 만들어내고, 늘이게 되고, 거기에 따라서 벌도 점점 더 증가하기 마련입니다. 

  

인간은 헐떡여가면서, 그래도 착하게 살았잖아요? 바르게 살았잖아요? 최선을 다했잖아요? 제가 얼마나 바르게 산다고 희생을 많이 했습니까? 이런 너저분한 변명들을 계속 늘어놓으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완벽하게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다는 그러한 완벽한 의인이 되지 못하는 한, 그 사람은 그 미흡한 죄에 대해서 온전하게 덮을 수가 없는 한, 나중에 처벌받는다는 처벌의 협박에 죽을 때까지 시달리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어떤 양심의 지시를 받고 통제를 받는다는 자체가 겉으로는 멋있어 보일지 모르지만 지옥 같은 생활을 죽을 때까지 계속하는 겁니다. 사람들은 그래서 뭘 찾는가? 종교를 찾죠. 종교를 찾으면서, 뭐 한꺼번에 죄 용서받았습니다. 하는 위로의 말을 찾기도 하고 또 듣기도 하고. 그리고 여러분들이 죄보다도 선을 많이 행하면 나중에 다 상쇄가 되어가지고 신께서, 또는 심판주께서 많이 봐 줄 것이라는 그런 위로를 받기도 받지만, 사실은 그건 전부다 구라고 거짓말입니다. 

  

왜냐하면 천국이라는 것은 흠도 티도 없이 완벽한 의를 한번이라도 죄 지은 적이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거룩하게 되질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가질 못합니다.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말씀 그대로입니다. 이 말씀을 일점일획이라도 어기는 자는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저주가 퍼부어집니다. 그래서 양심껏 살아서 구원받겠다는 것은 인간에게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19장에서 부자청년이 어릴 때부터 십계명을 지켰다고 우겼는데, 결국은 부자청년은 영생도 얻지 못하고, 자기 딴에는 완벽에 완벽을 기했지만 영생의 나라를 들어가지를 못했습니다. 하물며 이렇게 자기 딴에 완벽을 추구한 자가 못 들어간다면, 심지어 바리새인도 못 들어간다면, 보통 사람이야 천국 간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그러한 세계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 성경에서 아무도 들어갈 수 없고 완벽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근데 천국에 들어간 사람이 있지 않느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라든지, 엘리야 모세 이런 사람들도 천국에 갔잖아요? 갔거든요. 열 두 제자도 마찬가지고. 그러면 그들은 어떻게 해서 갔는가?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선악과를 따먹도록 허락하시고,
그 선악과 따먹어서 양심에 시달리면서, 내부적인 계명에 늘 휘둘리면서, 힘들게 양심에 아픔을 느끼면서 살게 하신 것은,
바로 니가 아는 선악적인 방식으로 천국가지 못한다는 것을 평생을 거쳐서 혹독하게 체험케 하도록 그렇게 하신 겁니다.

 이미아 (IP:122.♡.165.245)16-10-16 13:30 
165강-YouTube강의(구원의 방해자)161004-이 근호 목사 

  

이번에는 165강, 제목은 ‘구원의 방해자’입니다. 흔히 구원의 방해자 같으면 내 방해자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내가 천국 가는데 방해하는, 시집온 시댁이 교회가려고 하는데 시어머니가 머리끄덩이 잡고 가지 말라고 하는 것, 시어머니가 사탄이고 뭐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죠. 

  

내가 장래에 죽어서 잘 되겠다는데, 왜 훼방 놓느냐? 훼방 놓으면 무조건 사탄이고, 무조건 이거는 하나님의 저주받을 마귀자식이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살아온 환경이나 습관 같은 것이 어릴 때부터 나만 잘 되면 된다는 것. 그게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이, 항상 인간들은 자기 위주로 정돈이 되게 되어 있습니다. 현실을. 착착 정돈될 때, 이 모든 것은 나를 위한 현실이야! 일방적으로 그렇게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건 성경을 아무리 백독을 봐도, 그런 선입견가지고 성경을 보고 있다는 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것하고는 이게 비켜가기 마련이죠. 성경은 누구 책이냐 하면, 우리 개인구원 받으라고 주신 책이 아니고 예수님의 구원에 대해서 언급한 책입니다. 쉽게 말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무엇을 남겼느냐 하면,

구원이라는 열매
를 남겼는데,
그 구원이 누구 중심으로 움직이는 구원인가,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누굴 위해서 구원되어야 하는,
그러한 예수님과의 관계를 드러내기 위해서
이 세상은 처음부터 그렇게 전개되어 왔다는 겁니다. 

그렇게 된다면, 그럼 주님 구원하는데 우리가 딸려 가면 되겠네요? 라고 그렇게 안일하게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은 예수님 중심이라는 그 말 자체가 무엇과 대비가 되는가 하면, 평소에 우리가 내 중심으로 된다는, 내 중심과 예수님 중심이 서로 마찰을 일으키고 충돌을 일으킵니다.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누가복음 15장에 탕자가 나옵니다. 탕자이야기하면서, 거기에 아버지에게 아들 둘이 있다는 생각을 해줘야 합니다. 아들이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에요. 왜 예수님께서 탕자이야기하면서 아들 둘을 내세웠을까요? 아들 둘 중에 하나는 아버지 재산을 허비한 가출한 아들이 하나 있고, 또 다른 하나가 숨어있어요. 그 아들은 뭐냐 하면, 가출한 적이 없고, 늘 아버지 곁에서 아버지 일을 도와줬던, 누가 봐도 착실하고 성실한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예수님께서 두 아들을 거론하신 이유는 뭐냐 하면, 집 나간 적이 없고, 가출한 적이 없으면 진정 내 아들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원하는 아들 안에는 어떠한 내용이 장착되어 있어야 하느냐 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대신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을 오해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내 개인적인 구원 때문에, 훼방했고, 싫어했고, 미워했습니다.” 그러한 내용이 장착되어 있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자기를 부인할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나는 예수님의 하신 구원에 대해서, 예수님이 하신 모든 일에 대해서, 내가 천국가기 위한 용도로써 일방적으로 그렇게 오해를 해서, 주님이 하신 그 모든 일을 내 구원에 필요한 요소로써 일방적으로 착각했습니다. 이게 바로 내가 그동안 몰랐던 근원적인, 사탄적인 악마의 모습이었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이 장착되어 있어야 해요. 그 내용이. 

  

어차피 우리는 나를 위한 나, 그것밖에 없기 때문에, 뭘 해도 나한테 어떤 것이 이익이냐, 유용성을 갖고 있느냐, 그거만 생각할 수밖에 없는 나이기에, 주님께서는 그런 나를 지금 찾아오셔서 구원하고자 하시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가 생각하는 내 구원이라 하는 것은, 이것은 순수한 내 모습이 아니고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것은 나를 더욱더 가치 있게 보고, 나를 정당화시키고, 나를 옹호해주고, 나를 귀히 여기고, 나를 남보다 더 위대하게 만드는, 그러한 가치 있는 많은 쓰레기들을 주워 모은 거예요. 

  

마태복음 3장을 보겠습니다. 바로 거기에 세례요한이 나오는데, 이 세례요한의 복장 자체가, 의도적으로 세상으로부터 이미 벗어나있는, 세상을 새롭게 관찰하는 관찰자의 입장에 세례요한이 있습니다. 세례요한은 광야에 나갑니다. 광야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고, 그곳이 바로 세례요한이 저쪽 예루살렘을 새로운 각도로 볼 수 있는 위치가 되겠습니다. 

  

그리고 세례요한의 복장부터가 수상합니다. 마태복음 3장 4절에 보면, “이 요한은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 이었더라” 이것은 뭐냐 하면, 벌써 너희들과 다른, 너희들에게로부터 빠져나와서, 너희들이 군중 속에서 자기 자신을 으쌰으쌰 보는 그런 관점이 아니고, 현재 사람들의 사회라는 것, 그리고 뭔가 공동체라는 것, 그것을 객관적으로 외부에서 볼 수 있는 그런 위치에서, 소외된 자리에서 지금 세례요한은 복장부터 해서 자기의 발언을 쏟아냅니다. 

  

발언을 쏟아내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바로 임박한 진노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7절에 보면, “요한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 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독사의 자식들아! 사람을 향하여 뱀 새끼라고 욕설을 날린다는 것은, 그 사람이 욕하는 개인적인 감정이라고 보지 마시고, 그렇게 욕설을 날리는 그 본인의 위치가, 그 사람의 위치가 어디쯤인가를 봐야 됩니다. 

  

지금 세례요한은 어디 위치에 서 있느냐 하면, “지금 세상은 멸망해도 다 마땅해!” 라고, 멸망을 당했다고 치고, 그 멸망당한 현장의 바깥에서, 멸망당해야 마땅한 세상의 관점으로 보고 있는 겁니다. 그렇게 볼 때, 자진해서 구원될 수 있는 위인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세례요한이 아주 보편적으로 언급하고 있죠. 

  

그래서 우리는 생각해야 됩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구원자를 보내주신다고 하면서도,
왜? 모든 인간을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라고 규정짓기 위해서, 세례요한을 통해서 그렇게 과격하게 느껴지는 그런 발언들을 쏟아냅니까?
그것은 바로 서로가 서로를 속이는 사회 속에 우리가 한 사람으로서 놓여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구원받겠다고 하는 것은,
정작 구원자의 안목에서 결정되어야 할 기준을 가지고, 우리는 외부에서 주어지는 그 기준은 나 몰라라 하고,
똑같이 구원받고 싶은 군중들끼리, 군중들 속에서 서로가 서로한테 질문하고 답변하는 거예요. 

  

“너는 어떻게 생각해?” “나는 어떻게 생각해?” 다 같이 구원될 수도 없는 인간들끼리 모여가지고, 쓰레기 같은 인간들끼리 모여가지고 구원을 논해봤자, 전혀 그것은 하나님께 반영되지 않습니다. 그냥 인간들끼리 개인적인 구원의 욕망만 서로에게 주고받을 뿐이죠. 따라서 그들을 한꺼번에 일괄적으로 처리하기 위해서는 그들 바깥에, 그들이 속하지 않은 어떤 선지자를 보내서 일괄적으로 그들을 평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게 뭐냐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들이 구원받을 거 같으면 차라리 돌멩이가 구원받겠다.” 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그 당시 어떤 위치에 있던 사람이냐 하면, 구원받을 제일 0순위에 있는 사람들이에요. 저 사람들처럼 거룩한 자들이 구원 안 되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아마 구원TO(Table of Organization의 약자로서 일정한 규정에 의하여 정한 인원을 뜻한다.)가 있다면, 저 사람들이 먼저 채워지고, 그 다음에 저 사람들보다 못한 우리가 구원받을 것이다.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반대로 이야기합니다. “돌멩이라도 능히 너희들보다 낫다.” 그 다음에 나오는 이야기가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도끼라는 것은 작살내기 위한 도구죠. 그냥 간질이기 위한 이쁜 도구가 아닙니다. 주님의 의중을 나타내기 위해서 나온 무기가 도끼입니다. “성질대로 하면 다 잘랐으면 좋겠다.” 그런 것이 도끼에요. 

  

그래서 도끼를 언급하는 것은 앞으로 너희들의 모든 것은,

진짜 구원, 예수님의 피 흘림으로 구원받는 그 진짜 구원방식을, 구원받고자 하는 너희들이 훼방질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과 거기에 어울리지 않는 우리들의 구원방식의 마찰입니다.
그 마찰로 일어난 사건이 바로 십자가라면, 성령은 그 십자가를 앞장세워서 우리에게 찾아왔을 때,

“맞습니다. 우리의 방식대로 처절하게 죽으신 분이 주님이시고
놀랍게도 주께서 우리를 버리셔도 되는데,
자기를 가해한 그 가해자에게 피해자입장으로 흘린 피로써 무작정 우리에게 용서해주시니,
우리의 자랑은 오직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구원자이신 주님의 결정이 곧 우리의 천국입니다.”
라는 것을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