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강-YouTube강의(복음의 보호막)161018-이 근 호 목사
오늘은 166강, 제목은 ‘복음의 보호막’입니다.하나님의 모든 활동은 우리 인간을 위함이 아니고 복음을 위해서 활동하십니다. 근데 인간들은 오해를 해가지고 하나님이 이 피조물을 위해서 또는 나를 위해서 그렇게 하나님께서 활동하신다고 일방적으로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런 생각 하는 것은 성경보기 전에는 이해가 되고, 왜냐하면 성경보기 전에 교회 나오잖아요. 교회 나오는 것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나오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복 주실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교회에 나오는 것은 이해는 하는데, 근데 교회 나왔으면 성경이 과연 그런 것인가 확인을 해야 되죠.
교회 나와 놓고 성경도 안 보고 그냥 교회에서 시키는 대로 하게 되면, 교회 나와서 지옥 갈 경우가 생기죠. 교회 나오는 것은 교회를 위해서 살라는 것이 아니고, 교회를 지키라고 한 게 아니고, 교회를 키우라고 한 게 아니고, 교회라고 하는 것은 말씀을 전파하는 현장이죠.
그래서 처음에 교회보고 나왔다가는 그 다음에는 어디에 빠져줘야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빠져줘야 이게 정상적인 코스입니다. 만약에 말씀에 들어왔다, 그렇다면 말씀에서 이야기하는 그 하나님의 뜻과, 교회가 있기에 교회를 붙들어야 되고 유지해야 된다는 그 종교단체, 종교인들의 뜻과 이게 합치되어야 하는지를 한번 살펴봐야 해요. 그걸 왜 살펴봐야 하느냐, 본인의 구원과 관계되어 있기 때문에 살펴보는 겁니다.
여기 누가복은 1장 67절부터 79절까지 보면 세례요한의 아버지 사가랴가 성령에 충만해서 뭐하는 대목이 나오느냐 하면 예언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근데 예언하는 대목이 개인적인 의견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그 사가랴의 입을 통해서 성령께서 하나님의 일하심의 원칙을, 원리를 거기다가 다 펼쳐놓았습니다.
자, 교회 나왔을 때에, 우연히 누가복음 1장을 보았다, 누가복음 1장중에서도 67절에서 79절을 보았다, 거기에서 뭘 발견했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복음으로 일하시는 그 원칙과 기준을 발견을 했다고 쳐봅시다. 했다고 치고, 여기에 하나님의 일하실 때에 하나님께서는 복음으로 일하시지, 교회를 위해서 일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발견해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교회 나오면 구원되는 줄 알았다가, 막상 교회 나왔다가 우연한 기회에 누가복음 1장을 딱 보고, 1장을 보니까 거기에 뭐가 나오느냐 하면 성령님이 나오고 성령님이 사가랴의 입을 통해서 뭘 소개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원리와 원칙을 소개했더란 말이죠. 이 원리와 원칙을 딱 보니까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위해서 일하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위해서 일하더라는 것이, 그게 나오더라는 겁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위해서 일하지, 복음을 믿는 나를 위해서 일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나의 구원을 위해서 일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마 그 정도 안다면, 이거는 분명히 성령에 의해서 이야기한 것을 성령의 뜻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 되기 때문에 그 사람은 분명히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성령께서 보여주는 원리원칙이 나를 위해서 일하지 않고,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서 일한다는 것을 만약에 받아들인다면, 그 사람은 바로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 구원받아야 할 사람이기 때문에, 그러한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렇다면 거기서 나를 빼고 일하신다는 원칙이죠. 나를 빼고. 내 장래문제, 내 구원문제 빼고 하나님은 일하시는데, 그 일하시는 것에 대해서 누가복음 1장 67절부터 79절까지, 길지만 거기에서 핵심만 이야기한다면, 다윗의 그 거룩한 언약이라는 72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셔서, 하나님은 나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고, 72절, “하나님은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73절, “곧 우리 조상아브라함에게 맹세하신 맹세라” 그리고 거기에 그 앞에 보게 되면 72절, 73절의 말씀을 위해서 어떤 환경이 필요하냐 하면, 71절에 보면,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구원이라” 여기서 하나님의 원수가 나옵니다.
하나님의 원수인데, 그 우리라는 것은 앞에 68절에 보면 이스라엘 하나님이시고, 그리고 그것이 구체화되게 되면, 69절에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그래서 여기서 이야기하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다윗의 집, 언약, 아브라함, 맹세, 하나님의 원수,
이 모든 용어는 우리가 고대했던,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우리가 생각하는 이 세상 인간들끼리 통하는 용어가 아니고, 낯선 용어고, 이거는 복음을 전개하기 위해서 하나님 쪽에서 필요해서 계속해서 유입되는 그런 개념들이에요.
이 개념들에 의해서 우리의 기대, 우리의 소망, 우리의 구원은, 이게 어떻게 돼요? 이게 빠져야 되는 겁니다. 이걸 포기해야 돼요. 나에 대한 구원을 포기를 해줘야 해요. 그리고
내가 여기에 있다는 것이, 이게 현실이 아닙니다.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이 현실이 아니고 복음을 위해서 필요한 용어와 개념들 때문에 내가 여기 있다. 이게 바로 현실입니다.
내가 여기 있는 것보다도, 내가 여기 있다가 되면 항상 시작은 나를 위해서 돼요. 그런데 내가 여기 있다가 아니라, 누가복음 1장에 비추어보니까, 나보다 더 중요한 것, 복음,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의 맹세, 다윗의 언약, 이런 것 때문에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겁니다. 그것을 교회가지 전에는 이야기한 적도 없고, 들어본 적도 없고, 심지어 교회가도 이야기 안 해요.
이것은 우연히 누가복음 1장을 보니까 발견되는 거예요. 나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돌아가는 모든 것이 무엇을 보호하기 위해서?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는 그 기준을 지키고자 하기 위해서, 원리를 사수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필요한 것들을 지금 운영하고 있습니다.
자, 어떻습니까? 나를 위해서 어떻게 해보려고 하다가, 나 자체가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우리가 이렇게 알게 됩니다. 어떻게 편하십니까? 당황스럽습니까? 이게 편해야 돼요. 쓰레기 같은 나를 더 이상 붙들 이유가 없어요. 몇 년 더 살겠다는 그런 시도가 의미가 없고, 더 잘 살아야 된다는 것도, 돈 벌어 밥 먹고 더 잘 살아야 된다는 것도 주의 뜻에 포함이 안 되어 있습니다.
더구나 내가 건강해야 된다는 것도. 내가 가을철에 알레르기 걸려서 기침 나오고 콧물 나오는 것도 주님의 뜻하고 아무런 관계가 없어요. 오히려 그것 때문에 주의 복음이 가려질까봐 복음 쪽에서는 보호하고 있어요. 쓸데없는 것 가지고 나한테 다가오지 말라고 복음 쪽에서 보호하고 있는 겁니다.
자, 그 다음에 우리가 필요한 것은, 그렇다면 우리가 만약에 교회 가서 이 말씀을 알았는데, 이걸 모른 척 한다고 해봅시다. ‘에이, 이거는 알 필요 없어. 나는 이거 알고 싶지도 않아.’ 하고 덮었다고 칩시다. 그러면 남는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우리 뜻입니다.
이제부터 중요해요. 인간이 내 뜻이 있으면, 내 뜻은 뭐냐, 자기를 위해서 삽니다. 모든 게 자기 위주죠. 그렇다면 내 위주를 포기 못하고, 성령 안 받은 상태입니다. 내 위주를 포기 안 하고 그냥 교회 나와서 성경 본다고 한다면 성경 구절을 가지고 누굴 위해서 하겠습니까? 나를 위한 성경구절이기를 설교자가 그렇게 설교하기를 내심 요청하겠죠. 내심.
설교 시간에 설교를 들어준 나에게 그 설교가 무슨 큰 행운과 복을 갖다 줄 것인가를 교회 쪽에서 이야기를 해달라는 거예요. 또는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 쪽에서 이야기를 해달라는 거예요. “니가 교회 나왔으니까, 착한일 했으니까, 하나님에게 이런 복이 준비되었으니까 너에게 안겨줄게.” 라는 조로 나에게 그런 이야기만 계속 이야기해달라는 거예요.
그러면 이제 마지막 결론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보호한다고 했죠. 그럼 원수가 누구죠? 복음을 사수하기 위해서 내쳐야 될 원수가 누굽니까? 바로 우리 자신들이죠.
이것은 성령 받은 사람이 아는 거예요. 매일같이 우리는 교회 나와서, 교회 갈 때 그냥 가지 않고 내 뜻을 가지고 나갈 때, 성령께서는 이 말씀을 가지고 계속해서 우리를 내치시는, 그러한 절대적인 진리로 지금도 이 세상에서 우리를 내치시는 일을 하시는 겁니다. 교회뿐만 아니고 교회 바깥에서도.
그럼 내치면 죽어야 되는데 왜 살아 있느냐? 내치시면서 살아있는 이유가 니 뜻을 위해서 아니고, 복음 기뻐하라고 아직도 우리가 살아있는 겁니다. 이게 복음 위주로 움직이는 하나님의 보호막 활동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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