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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강의-복음의 보호막 161018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10. 23. 05:34
2016-10-19 00:14:01조회 : 72         
유튜브(166강, 167강), 복음의 보호막, 잡음과 소음 161018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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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강             음성            동영상

 이미아 (IP:122.♡.165.245)16-10-19 21:44 
166강-YouTube강의(복음의 보호막)161018-이 근 호 목사 

오늘은 166강, 제목은 ‘복음의 보호막’입니다.하나님의 모든 활동은 우리 인간을 위함이 아니고 복음을 위해서 활동하십니다. 근데 인간들은 오해를 해가지고 하나님이 이 피조물을 위해서 또는 나를 위해서 그렇게 하나님께서 활동하신다고 일방적으로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런 생각 하는 것은 성경보기 전에는 이해가 되고, 왜냐하면 성경보기 전에 교회 나오잖아요. 교회 나오는 것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나오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복 주실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교회에 나오는 것은 이해는 하는데, 근데 교회 나왔으면 성경이 과연 그런 것인가 확인을 해야 되죠. 

교회 나와 놓고 성경도 안 보고 그냥 교회에서 시키는 대로 하게 되면, 교회 나와서 지옥 갈 경우가 생기죠. 교회 나오는 것은 교회를 위해서 살라는 것이 아니고, 교회를 지키라고 한 게 아니고, 교회를 키우라고 한 게 아니고, 교회라고 하는 것은 말씀을 전파하는 현장이죠. 

그래서 처음에 교회보고 나왔다가는 그 다음에는 어디에 빠져줘야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빠져줘야 이게 정상적인 코스입니다. 만약에 말씀에 들어왔다, 그렇다면 말씀에서 이야기하는 그 하나님의 뜻과, 교회가 있기에 교회를 붙들어야 되고 유지해야 된다는 그 종교단체, 종교인들의 뜻과 이게 합치되어야 하는지를 한번 살펴봐야 해요. 그걸 왜 살펴봐야 하느냐, 본인의 구원과 관계되어 있기 때문에 살펴보는 겁니다. 

여기 누가복은 1장 67절부터 79절까지 보면 세례요한의 아버지 사가랴가 성령에 충만해서 뭐하는 대목이 나오느냐 하면 예언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근데 예언하는 대목이 개인적인 의견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그 사가랴의 입을 통해서 성령께서 하나님의 일하심의 원칙을, 원리를 거기다가 다 펼쳐놓았습니다. 

자, 교회 나왔을 때에, 우연히 누가복음 1장을 보았다, 누가복음 1장중에서도 67절에서 79절을 보았다, 거기에서 뭘 발견했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복음으로 일하시는 그 원칙과 기준을 발견을 했다고 쳐봅시다. 했다고 치고, 여기에 하나님의 일하실 때에 하나님께서는 복음으로 일하시지, 교회를 위해서 일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발견해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교회 나오면 구원되는 줄 알았다가, 막상 교회 나왔다가 우연한 기회에 누가복음 1장을 딱 보고, 1장을 보니까 거기에 뭐가 나오느냐 하면 성령님이 나오고 성령님이 사가랴의 입을 통해서 뭘 소개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원리와 원칙을 소개했더란 말이죠. 이 원리와 원칙을 딱 보니까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위해서 일하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위해서 일하더라는 것이, 그게 나오더라는 겁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위해서 일하지, 복음을 믿는 나를 위해서 일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나의 구원을 위해서 일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마 그 정도 안다면, 이거는 분명히 성령에 의해서 이야기한 것을 성령의 뜻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 되기 때문에 그 사람은 분명히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성령께서 보여주는 원리원칙이 나를 위해서 일하지 않고,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서 일한다는 것을 만약에 받아들인다면, 그 사람은 바로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 구원받아야 할 사람이기 때문에, 그러한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렇다면 거기서 나를 빼고 일하신다는 원칙이죠. 나를 빼고. 내 장래문제, 내 구원문제 빼고 하나님은 일하시는데, 그 일하시는 것에 대해서 누가복음 1장 67절부터 79절까지, 길지만 거기에서 핵심만 이야기한다면, 다윗의 그 거룩한 언약이라는 72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셔서, 하나님은 나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고, 72절, “하나님은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73절, “곧 우리 조상아브라함에게 맹세하신 맹세라” 그리고 거기에 그 앞에 보게 되면 72절, 73절의 말씀을 위해서 어떤 환경이 필요하냐 하면, 71절에 보면,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구원이라” 여기서 하나님의 원수가 나옵니다. 

하나님의 원수인데, 그 우리라는 것은 앞에 68절에 보면 이스라엘 하나님이시고, 그리고 그것이 구체화되게 되면, 69절에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그래서 여기서 이야기하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다윗의 집,
언약,
아브라함,
맹세,
하나님의 원수,

이 모든 용어는 우리가 고대했던,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우리가 생각하는 이 세상 인간들끼리 통하는 용어가 아니고, 낯선 용어고, 이거는 복음을 전개하기 위해서 하나님 쪽에서 필요해서 계속해서 유입되는 그런 개념들이에요. 

이 개념들에 의해서 우리의 기대, 우리의 소망, 우리의 구원은, 이게 어떻게 돼요? 이게 빠져야 되는 겁니다. 이걸 포기해야 돼요. 나에 대한 구원을 포기를 해줘야 해요. 그리고

내가 여기에 있다는 것이, 이게 현실이 아닙니다.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이 현실이 아니고
복음을 위해서 필요한 용어와 개념들 때문에 내가 여기 있다. 이게 바로 현실입니다. 

내가 여기 있는 것보다도, 내가 여기 있다가 되면 항상 시작은 나를 위해서 돼요. 그런데 내가 여기 있다가 아니라, 누가복음 1장에 비추어보니까, 나보다 더 중요한 것, 복음,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의 맹세, 다윗의 언약, 이런 것 때문에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겁니다. 그것을 교회가지 전에는 이야기한 적도 없고, 들어본 적도 없고, 심지어 교회가도 이야기 안 해요. 

이것은 우연히 누가복음 1장을 보니까 발견되는 거예요. 나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돌아가는 모든 것이 무엇을 보호하기 위해서?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는 그 기준을 지키고자 하기 위해서, 원리를 사수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필요한 것들을 지금 운영하고 있습니다. 

자, 어떻습니까? 나를 위해서 어떻게 해보려고 하다가, 나 자체가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우리가 이렇게 알게 됩니다. 어떻게 편하십니까? 당황스럽습니까? 이게 편해야 돼요. 쓰레기 같은 나를 더 이상 붙들 이유가 없어요. 몇 년 더 살겠다는 그런 시도가 의미가 없고, 더 잘 살아야 된다는 것도, 돈 벌어 밥 먹고 더 잘 살아야 된다는 것도 주의 뜻에 포함이 안 되어 있습니다. 

더구나 내가 건강해야 된다는 것도. 내가 가을철에 알레르기 걸려서 기침 나오고 콧물 나오는 것도 주님의 뜻하고 아무런 관계가 없어요. 오히려 그것 때문에 주의 복음이 가려질까봐 복음 쪽에서는 보호하고 있어요. 쓸데없는 것 가지고 나한테 다가오지 말라고 복음 쪽에서 보호하고 있는 겁니다. 

자, 그 다음에 우리가 필요한 것은, 그렇다면 우리가 만약에 교회 가서 이 말씀을 알았는데, 이걸 모른 척 한다고 해봅시다. ‘에이, 이거는 알 필요 없어. 나는 이거 알고 싶지도 않아.’ 하고 덮었다고 칩시다. 그러면 남는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우리 뜻입니다. 

이제부터 중요해요. 인간이 내 뜻이 있으면, 내 뜻은 뭐냐, 자기를 위해서 삽니다. 모든 게 자기 위주죠. 그렇다면 내 위주를 포기 못하고, 성령 안 받은 상태입니다. 내 위주를 포기 안 하고 그냥 교회 나와서 성경 본다고 한다면 성경 구절을 가지고 누굴 위해서 하겠습니까? 나를 위한 성경구절이기를 설교자가 그렇게 설교하기를 내심 요청하겠죠. 내심. 

설교 시간에 설교를 들어준 나에게 그 설교가 무슨 큰 행운과 복을 갖다 줄 것인가를 교회 쪽에서 이야기를 해달라는 거예요. 또는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 쪽에서 이야기를 해달라는 거예요. “니가 교회 나왔으니까, 착한일 했으니까, 하나님에게 이런 복이 준비되었으니까 너에게 안겨줄게.” 라는 조로 나에게 그런 이야기만 계속 이야기해달라는 거예요. 

그러면 이제 마지막 결론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보호한다고 했죠.

그럼 원수가 누구죠? 복음을 사수하기 위해서 내쳐야 될 원수가 누굽니까?
바로 우리 자신들이죠.


이것은 성령 받은 사람이 아는 거예요. 매일같이 우리는 교회 나와서, 교회 갈 때 그냥 가지 않고 내 뜻을 가지고 나갈 때, 성령께서는 이 말씀을 가지고 계속해서 우리를 내치시는, 그러한 절대적인 진리로 지금도 이 세상에서 우리를 내치시는 일을 하시는 겁니다. 교회뿐만 아니고 교회 바깥에서도. 

그럼 내치면 죽어야 되는데 왜 살아 있느냐? 내치시면서 살아있는 이유가 니 뜻을 위해서 아니고, 복음 기뻐하라고 아직도 우리가 살아있는 겁니다. 이게 복음 위주로 움직이는 하나님의 보호막 활동입니다.

 이미아 (IP:122.♡.165.245)16-10-19 23:28 
167강-YouTube강의(잡음과 소음)161018-이 근호 목사 

  

두 번째 167강, 제목은 ‘잡음과 소음’입니다. 어디 차타서 라디오를 듣든지 할 때, 잡음이 많으면, 소음이 많으면 진짜 듣고 싶은 것이 안 들리죠. 하나님께서 일하실 때, 이스라엘 사람들을 그냥 애굽에서 건져내가지고 깔끔하게 포장을 해서, 그것도 진공포장을 해서 아무것도 훼손되지 않고 애굽에서 나온 그대로 깨끗하게 보존해서 천국에 넣어주시면 되는데,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왜 하나님께서는 온갖 잡동사니와 온갖 소음과 잡음이 일어나는 민족으로 만들었을까요? 한 번 생각해 본 일이 있습니까? 

  

구원을 하려면 처음부터 끝까지, 그야말로 완제품으로 그대로 산뜻하게 구원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잖아요? 왜 그렇게 온갖 것들이 다 섞이도록 그렇게 하시는 이유가 뭐냐, 그것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그것은 처음부터 구원의 대상이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그 당사자, 대상은 잡음과 소음 속에 같이 섞여 있어요. 잡음과 소음 속에 같이 섞여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자기가 진짜 듣고 싶은 하나님의 음성이지, ‘나는 잡음에 속해 있어.’ 아니면 ‘나는 하나님의 듣기 싫은 소음이야.’ 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걸 구약의 율법에서는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세속이라고 이야기하고 오염되었다고 이야기하고 부정하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정결한 것이, 그냥 쟁반에 달랑 하나만 정결한 것만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보기에는, 하나님 보시기에는 더러움만이 있어요.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더러움만 있는데, 누가 봐도 “하나님이여, 이 더러움밖에 없습니다. 천국 못 갑니다. 다 죄인이고 다 더럽습니다. 쟁반에 담겨있는 이스라엘 백성도 마찬가지고, 누가 봐도 그거는 온당치 않습니다. 말씀을 합당하게 다 지킨 사람이 없습니다.” 라고 누구나 그렇게 볼 수밖에 없는데, 다시 말해서 거룩이 없어요. 

  

없는데, 없는데서 만들어내는 솜씨를 하나님께서 발휘하십니다. 어떻게 그러느냐, 이게 뭐냐 하면, 계속 추가적으로, 추가적으로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주셔요. 계속 추가해서 말씀을 주십니다. 왜 그러냐 하면, 부모가 자식에게, 예를 들어서 신발 함부로 벗으니까, “야야! 학교 갔다 와서 바지 함부로 벗고, 신발 함부로 벗고, 양말 함부로 벗으니까, 내가 니 뒤치다꺼리하는데 너무 힘들다. 정말 이제 니가 알아서 가지런히 놓고 양말 빨래 통에 니가 넣고!” 라고 엄마가 잔소리를 하죠. 

  

그러면 우리도 어릴 때가 있었지만, 그 엄마 잔소리가 화가 난다 이 말이죠. 화가 나면 내부적으로 어떤 정당성을 만들어내느냐 하면, “그러면 엄마! 내가 양말 제대로 넣고, 바지 제대로 넣고, 신발 가지런히 할 테니까, 성적 나빠도 나한테 딴소리 하지 마!” 이렇게 협상조로, 흥정조로 나오죠. 이러한 성질은 교회 가서 하나님한테 기도해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 이거 해 줄 테니까 이거까지는 저한테 너무 윽박지르지 마소서. 아직까지 내 믿음의 수준이 그거까지는 안 됩니다.” 라고 나오는 거예요. 

  

“형제를 미워하지 말고 서로 사랑해라.” 라는 말씀이 나오잖아요. “그럼 그거 지키기 위해서 노력할 테니까 딴 것 까지 안 지킨다고 너무 닦달내지 마세요.” 딴 것이 뭐냐 하면, 처나 자식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내게 합당치 않다는 이런 것이라든지, 이런 난해한 것 있잖아요. “그런 것 까지는 나한테 너무 요구하지 마세요.” 다른 말로 하면, “그거 안 지켰다고 저한테 저주나 벌을 내리지 마세요. 그러면 저는 너무 힘듭니다. 진짜 교회 나온 지 몇 년 안 됐는데, 그렇게 나오시면 진짜 하나님 안 믿는 수가 있어요. 교회 발 끊는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나오는 겁니다. 

  

사람들이 교회를 안 나오는 이유가 뭡니까? 몇 개 몇 개 지켜서, 성만찬 하고 세례 받으면 천국 간다고 이렇게 이야기만 한다면, 교회 안 나오고 하는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그런데 나왔더니만 목사가 말라기 3장을 펼쳐가지고 십일조를 해서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지 안 주시는지 시험해봐라. 십일조 안 하면 믿음이 없는 거고, 뭐가 어떻고 저떻고 하면서 갑자기 성경구절을 갖다대어가지고, 그럼 교인이 어떤 생각이 들까요? 그럼 어디까지? 그럼 몇 가지 지켜야 해요? 십계명만, 열 가지 밖에 없다고 좋다고 했는데, 이건 열 가지가 더 되고, 계속해서 나오니까, 어느 세월에 그걸 다 지켜서 구원받습니까? 그런 생각이 여러분들은 안 들던가요? 

  

교회 주일 낮에만 나오고 저녁에는 이렇게 쉬려고 했더니만, 또 목사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주일 오전만 나오는 것은 이거는 초보고, 적어도 오후까지 나와야 주일성수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오후까지 다녔다. 다니니까 그 다음에 무슨 소리 하느냐 하면 주일날, 안식일은 거룩히 지켜야 하니까 오전에서 오후사이에는 심방도 해야 되고, 그때는 책도, 여성잡지 같은 것 보지 마시고, 거룩한 책을 보시면서 경건한 마음을 해야 됩니다. 

  

심방도 하시고, 재직회원들은 또 심방해서 안 오는 교인들도 돌아보고 해야 됩니다. 그럼 목사님 몇 시까지 해야 됩니까? 11시 59분까지 하셔야 됩니다. 그러니까 처음 온 교인들도 11시 59분까지 해야 해요. 드라마도 녹화해놓고 11시 59분 이후에, 새벽에 봐야 할 참이에요. 그전까지는 경건하지 않는 것은 보지 말라고 했으니까. 요새는 이런 것이 없지만 옛날에는 그랬어요. 옛날 1960, 70년대 그때는 신앙생활 한다고 안식일 지키는 것을 그렇게 했단 말이죠. 요새는 많이 자유분방해졌잖아요. 

  

그런데 요즘도 있는 것이 있어요. 서리집사에서 장립집사가 되려면 검사하는 것이 있습니다. 뭐냐 하면, “십일조 하십니까?” 요새는 십일조지만, 옛날 60년대, 70년대에는 십일조는 기본이고, 이렇게 물었어요. “집안에 자녀들은 우리교회 나옵니까?” “목사님. 그건 왜 묻습니까?” 디모데전서에 보면 자녀를 잘 다스리지 않는 자는 집사 되지 말라고 했으니까, 자녀까지 교회 잘 나와야 집사 된다는 거예요. 특히 장립집사는. 그럼 장립집사는 가족들한테 사정해야 되죠. 일당 줘야 하죠. “둘째, 니 주일에 교회 나오면 오 만원 줄게.” 이런 식으로. 일당 줘서 데리고 나와야 돼요. 

  

이게 뭐냐 하면 성경말씀이 계속해서 추가되니까, 예수 믿고 의인이 돼서 구원받는다. 이거 좋아서 교회 다니려고 했는데, 왜 갑자기 사전에 이야기도 없었던, 추가적인 율법이 왜 계속 주어지냐 이 말이죠. 추가적인 율법이. 그러니까 목사가 추가적인 율법을 주니까, 교인들이 문제가 있을 게 아니겠습니까? 목사님이 제대로 하는지. 거기에 대비해서 목사는 뭐냐 하면, 자기 친구를 헌신예배 강사로 초청을 해요. 해가지고 그 친구하고 목사가 오후시간에 조항을 더 붙인다고요. 

  

“우리 목사님은 여러분들을 사랑해서 부담 안 주기 위해서 목사 섬기는 조항을 안 줬는데, 사실은 목사가 10년 정도 됐으면, 여러분들도 염치가 있어야죠. 당회장 10년 정도 했으면 성지순례는 보내줘야 합니다. 여기 장로님 계시면 손 들어보세요.” 장로가 손든다고요. “장로님. 뭐 하십니까? 모세를 옆에서 받쳐주는 사람이 누굽니까? 아론과 훌이 장로인데, 목사님이 힘 빠질 때 장로가 옆에 받쳐줘야, 지팡이가 올라가야 복을 받는데, 성지순례해가지고 목회에 낙담될 때, 원기를 팍팍 넣어주고, 성지순례하면서 옆에 유럽도 여행하도록 할 수 있어야 하죠. 차라리 약속 합시다. 장로님! 얼마 낼랍니까?” 

  

그렇게 해줘야 이 목사가 친구 목사네 가서 해주고. 서로 상부상조하는 거죠. 바람잡이를 하는 거에요. 이거는 뭐냐 하면 계속해서 그거는 거짓 율법이고, 성경말씀을 계속해서 몰아세우는 겁니다. 어디까지? 아무도 구원받지 못한다는 데까지. 그럼 처음부터 뭐가 문제에요? 구원받으려고 온 것 자체가 이거는 애초에 성경에 있다? 없다? 없었던 거예요. 이게 세속입니다. 이게 세리고 강도고. 

  

우리는 어떤 인간도 이 땅에서 구원주세요! 라고 할 입장이 못 된다는 것을 다 보여줄 때, 그게 바로 성령세례입니다. 하나님의 십자가에 참여시킵니다. 참여시키면 십자가는 뭐냐 하면, 아버지로부터 저주받는 자리죠. 그 저주받는 자리에서 성경의 모든 취지가 보입니다. 주여! 버림받아 마땅하다 할 때, 거기에 누가 함께 끼어들었습니까? 버림받아 마땅한데, 주님은 왜 그 자리에 끼어들었습니까? 내 피가 너의 죄를 대신 가져가기 위해서. 

  

그렇게 할 때, 그 너가 누구냐, 예수님께서 계획하신대로, 같이 십자가에 함께 죽도록 초청당한 사람의 죄만 하나님께서는 이미 구원으로 확정 시켜놓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구원해놨기 때문에, 차후에 성령을 통해서 그런 경험을 하게 하시는 겁니다. 이게 뭐냐,

구원받아 놓고 우리가 하는 모든 짓은 잡음이고 소음이고
그런 세상 것들 속에서 오직 십자가만이 진정한 진리라는 것을,
우리를 통해서 증거케 하기 위해서
아직도 우리는 이 땅에서 소음과 잡음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