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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강의-결탁관계 161003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10. 19. 08:37
2016-10-18 22:30:57조회 : 8         
[16 대구강의] '잠언'속의 그리스도 64 - 결탁관계이름 : 구득영 (IP:203.223.97.152)

[16 대구강의] '잠언'속의 그리스도 64 - 결탁관계 
                                                                                 
                                                          16,10,03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177페이지부터 살펴보자.

**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보어야 하는고 하니까, 개미와 반대되는 경우를 찾아보라는 겁니다. 반(反) 개미의 특징을 지닌 자들이 과연 하나님을 경외하겠습니까? 그럴 수가 없는데, 놀기 좋아하고, 남을 비하하기를 좋아하는데 신경을 쓰다가보면, 진정 여호와를 경외하는 일에 열중할 수 없는 것은 뻔한 이치라는 겁니다. 

◈ 구약은, 특이한 일들을 믿자 !!

여기에서는 잠언서의 개미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이렇게 보면 되는데 말이다. 신약에서는 "하늘을 보면서 믿자" 라는 것이고, 반면에 구약은 "하나님께서 이 지상에 특이한 일을 발생시킨 것을 믿자"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구약을 보면, 이스라엘 민족의 내부에서 다른 민족과는 다른 특이한 일들이 일어나는데, "그 특이한 일들을 믿자" 라고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구약에서는 홍해가 갈라지고 여리고 성이 무너지고 하는데, 그렇게 구약시대는 이스라엘에게는 다른 민족들에겐 일어나지 않는 특이한 일들이 일어난다는 말이다. 심지어 이스라엘이 적들과 전쟁을 하면 태양도 멈추고 만다는 것이다. 그런데 신약은 무엇인고 하니, 이제는 더 이상 지상에서는 이스라엘과 다른 민족들과의, 그런 지역적인 특이성은 다 사라지고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의 대상이, 구약에서는 이 지상에서 이스라엘 내부에서 일어나는 특이한 기적들에 대해서 주의 깊게 파악하는 것이고, 거기에서 하나님의 일을 발견한다는 말이다. 이스라엘 내부에서 말이다. 하지만 신약은 무엇인고 하니, 방금 이야기했지만 그 모든 것은 모두 소멸해버린다는 것이다.

◈ 신약은, 특이한 지명의 가치는 없어 !!

그러니 신약에서 특이한 지명의 가치라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11장에 보면 뭐라고 하는가? 두 증인, 즉 두 성도가 복음을 전하게 되면 그곳을 소돔이라고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고, 그리고 그곳을 십자가에 못 박힌 곳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계 11:3)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
(계 11:7) 저희가 그 증거를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저희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저희를 이기고 저희를 죽일 터인즉
(계 11:8)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다음과 같은데 말이다. 이 지상에 마치 비눗방울이 터지듯이 무엇이 터지는데, 그것이 곧 사건이 된다는 말이다. 그러면 그것이 무슨 사건인고 하니, 그것이 그 어떤 사건이 되던지 간에 무슨 사건으로 보는고 하니, 그것을 십자가 사건으로 본다는 것이다. 신약에서는 그렇다는 말이다.

그것이 여기 요한계시록 11장에 보면 나오는데, 그러니 그 어떤 지역이든 간에, 그곳이 한국이든 미국이든, 그런 것에 관계없이 얼마든지 소돔이 될 수 있고, 또한 애굽이 될 수 있는데,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갈보리 언덕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 신약은, 땅이 아닌 '사건' 위주 !!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 "여기가 갈보리 언덕이지, 무슨 애굽인가?" 라고 한다면, 그것은 여전히 땅에 대해서 집착하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하지만 신약은 땅 위주가 아니라, 땅은 주님께서 포기하셨는데, 그래서 무엇 위주인고 하니, '사건' 위주라는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예수님에 의해서 이루어진 과거에 지상에 있었던 모든 일들을 사건화를 시키는데, 그런데 예수님에 의해서 일어난 일들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반복하게 되면 계시사건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이 어떤 지역이 되던 상관이 없는데, 그게 애굽이 될 수도 있고, 소돔과 고모라가 될 수도 있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장소도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주님의 시간과 공간이 성령에 의해서 마치 비눗방울처럼, 그것을 주일 낮 시간에 의성어로, '대롱대롱' 이라고 했는데, 그렇게 매달려 있다는 것이다.

◈ 성도는, 성령에 의해서 '대롱대롱' !!

그렇다고 하면 성도가 대롱대롱 매달려서 산다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그 어디에 살던 간에 지상에 구애받지 않고 어디에 구애를 받는다는 것인가? 예수님이 일으킨 십자가 사건에 소속이 된 상태에서, 그 사람이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간에, 그것은 십자가 사건을 증거하는 것에 해당되고, 그렇게 속해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성도가 되어서 무슨 일을 하던지 간에, 주님은 그것을 무엇으로 보는고 하니, 십자가 사건으로 보신다는 말이다. 그러면 십자가 사건은 무엇인가? 예수님이 홀로 이루신 사건인데, 그래서 성도로서 산다고 하는 것은, 성도가 추가적으로 무슨 일을 할 일은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다. 자기가 주체가 되어서 해야할 일은 없다는 말이다.

요한계시록 11장에 나오는, 소돔과 고모라, 애굽, 그리고 갈보리 언덕, 이것들은 다 예수님의 사건인데, 그렇게 성도 안에서 예수님의 사건이 재현되게 만드는 것, 그것을 발현되게 하기 위해서 남은 역사가 존재한다고 보면 된다는 말이다. 이게 요한계시록을 해석함에 있어서 필수적인데, 이것만 알아도 요한계시록 해석은 끝났다는 말이다.

◈ 목사님, 해결해주세요 !!

방금 제가 이야기를 한 것은 어디까지나 성도에 관한 것이고, 그러면 성도가 아닌 사람들의 경우에는 어떠한가? 그들은 이런 사건에서 그만 배제된 상태라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어디를 쳐다보는가? 그들은 십자가 안에, 성령 안에 있지 않으니까, 여전히 이 지상에서 자기 자신을 위한 사건만 골라서 챙긴다는 말이다.

그래서 가정에 무슨 일이 있으면, 교회에 와서는 "목사님, 해결해주세요" 라고 하는데, 그러면 누구를 위해서 해결해달라고 하느냐는 것이다. 목사에게 와서 따지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렇게 따지는 것이 결국 누구를 위함이냐는 말이다. 그것을 바로 '나'를 위해서 그런 것인데, 그것이 곧 우상이 되고 전혀 복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도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닌데, 예수님 때문에 그 지역에 살게 되었고 그 지역에 살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추가적으로 할 것이 더 남아있지 않는데,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던지, 어떤 가정을 꾸리던지 간에, 그 가정은 자기가 만든 가정이 아니고, 주님이 십자가를 증거하라고 의도적으로 몰아세운 가정이라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무엇이 악한 것인가를 눈치채라는 겁니다. 눈, 혀, 손, 마음, 발, 그리고 신체, 이런 것들이 총동원되어서 여호와 경외를 반대하는 것이 열중하고 마음을 빼앗기는 것이 악한 것입니다.

(잠 6:16)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 곧 그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육 칠 가지니
(잠 6:17) 곧 교만한 과 거짓된 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잠 6:18)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잠 6:19)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및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니라

늦게 오신 분들을 위해서 다시 말씀을 드리겠는데, 신약에서 믿을 것이 주님이 하신 일인데, 그래서 신약은 주님이 하신 일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구약은 아직도 옛 언약의 시대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이란 땅에서 일어나는 일상적인 일에 대해서, 하나님의 그 특이성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이웃'을 통해서 !!

제가 분명히 그렇게 이야기를 했는데, 그렇다면 여기 잠언서 6장 16절에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 곧" 이라고 하면서 나오는데, 이것을 직접 설명하려면 너무 복잡하고 말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하나님의 뜻이 이웃을 통해서 나타났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 대해서 "목사님,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 있지 않습니까?" 라고 반문할 수도 있는데, 그것은 신약의 경우인데, 주님께서 다 이루시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말이다. 그래서 골로새서 3장에 보면 "위의 것을 쳐다봐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골 3: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그것은 어디까지나 신약이고, 그러면 구약은 무엇인고 하니, 그 하늘의 뜻이 실제로 이웃을 통해서, 여기에는 친구나 친척도 포함이 되는데, 가까운 사람, 그리고 우연히 만난 사람도 포함된다는 말이다. 그런 이웃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구약 때는 말이다.

그러니 그 이웃을 대한 태도를 곧 주님에게 한 태도로 간주하겠다는 것이다. 구약 때는 말이다. 지금 우리가 구약의 잠언서를 공부하고 있는데, 그러면 우리가 할 일은 간단한데, 이웃에게 행하는 그 관계를 가지고 주님에게까지 연결되는 과정을 뽑아내면 된다는 것이다.

◈ 니가 이웃을 미워했지?

그런데 여기 잠언서 6장에 보면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이 나오는데, 그러면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어떤 것들이 있겠는가? "나는 여호와다" 라고 하면서 하나님이 등장하셨는데, 그러면서 "나를 미워할래? 좋아할래? 둘 중에 하나만 선택해라" 라고 하신다면,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이니 당연히 좋아하겠습니다" 라고 하면, 그러면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것이 아니라, 이웃을 통해서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이 나온다는 말이다. 이웃을 통해서 말이다. 그런데 자기가 가만히 보니 그 이웃이 꼴보기가 싫어서, 그래서 눈을 흘기면서 미워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이웃을 앞장세워서 여호와께서 나타나셔서, "니가 이웃을 미워했지? 그러면 나의 뜻을 미워한 것이다" 라고 하시는데, 그런 식으로 구약에서는 전개가 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 이웃이라는 범위에 이방민족도 해당이 되는가? 이방민족은 여기에 해당사항이 없는데, 언약에 의해서 묶여진, 언약에 의해서 자기 주변에 깔려진 사람들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깔아놓은 자들이 곧 이웃이라는 말이다.  

◈ 흐리멍텅 !!

잠언서 6장 16절에 보면,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 곧 그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육 칠 가지니" 라고 하는데, 그런 7가지를 하나로 모아보면, "눈에 총기도 없이 흐리멍텅하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마태복음 5장에도 보면, "눈은 마음의 창이다" 라고 했는데 말이다.

말씀에 관심이 없는 자들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흐리멍텅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초점을 하나로 모아야 하는데, 그게 진리를 발견한 자의 모습인데, 그게 안 되니 말이다. 그러나 진리를 발견한 자는 "야, 내가 찾던 게 바로 저것이구나" 라고 하면서, 마치 독수리가 먹이를 발견하고 잽싸게 낚아채듯이, 그렇게 놓치는 법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말씀에 꽂히지 않는 사람은, 뭔가를 늘 살피다가보니 그만 초점이 맞지 않다는 것이다. 마치 카메라를 자꾸 돌려서 초점이 흔들리듯이 말이다. 그래서 이런 자들은 상대방을 대하면서도 상대방의 이야기는 듣지 않고, 상대를 어떻게 이용해먹을지, 그런 것에만 관심을 가진다는 것이다.

반면에 말씀에 꽂힌 사람은 어떠한고 하니까, 비록 자기에게 그 어떤 어려움이 온다고 해도,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되는가?" 라고 하면서 담대하게 나온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진리' 라고 하는 하나에 꽂히게 되면, 그 하나에 초점이 그만 딱 맞아서 그렇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일에 대해서도, 그 하나로 인해서 벌어진 일이라고 하는, 이미 해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자기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그리고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그 하나로 인해서 발생된 것이고, 거기에 다 연결되어 있음을, 그것을 이미 다 알고 있는데, 명쾌한 해답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 엄마, 나 피곤해 !!

그런데 복음에 관심이 없는 자식들을 명절에 만나게 되면 눈동자가 그야말로 흐리멍텅한데, 그래서 "엄마, 나 피곤해. 그만 자고 싶어" 라고 하면서 이불부터 먼저 펴려고 하는데, 세상을 산다고 피곤에 쩔어있다는 것이다. 남의 돈을 빼먹으려고 하니 어떻게 피곤하지 않을 수가 있겠느냐는 말이다. 돈이 남의 호주머니에서 그냥 나오는 것인데, 사기를 치든지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항상 피곤하고 멍청한데, 그런데 이 안에는 무엇이 들어있는고 하니, 공포와 두려움, 그리고 불안감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눈동자가 항상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왔다갔다하는데, 불안해서 그렇다는 말이다. 웃어도 웃는 것이 아니고 음흉한 웃음이라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성경이 이야기를 하는데, 이것이 잠언서 6장 그 뒤에 나오는 것인데, 한 마디로 말해서 "권력에 찌달렸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권력에 주눅이 들어있다는 것인데, 그러니 아무런 자유도 없고, 돈은 좀 벌어놓았는데 늘 공포스럽고 불안하다는 말이다. 

◈ 오직 권력의 순수함뿐 !!

그래서 어제 낮 시간에 "인간에게는 순수함은 없고, 오직 권력의 순수함뿐이다" 라고 했는데, 얼마나 권력에게 괴롭힘을 당했는지 모르는데, 그러면서도 그 권력을 사모하고 말이다. 그러니 눈동자가 항상 두려움에 휩싸여 있는데, 그래서 언제나 경직되어있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조선TV의 아나운서인데, TV조선이 아니고 북한의 조선TV라는 말이다. "친애하신 지도자 동지께서!" 라고 시작하는데, 찌달려서 얼마나 경직되어있는지 말이다. 반면에 '국민 까불이' 라고 불리는 전현무 아나운서를 보라는 것이다. 지금은 아나운서가 아닌데, 얼마나 생기발랄한지 모른다는 것이다. 물론 권력을 사모하는 발랄함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심지어 교인들도 마찬가지인데, 교회에 오면서부터 하나님에게 불평불만이 가득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금요철야를 할 때는 커피를 마시고 오는데, 밤새도록 하나님에게 따져보겠다는 것인데, 하나님이 얼마나 잘못했기에 말이다. "내 인생을 왜 이렇게 힘들게 하십니까?" 라는 것인데, 하지만 인생성공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복음으로 다루시면, 조금 전에 요한계시록에서 한 것처럼 복음이 나오면, 그게 성공이라는 말이다.

◈ 권력의 층으로 꽉 차여져 있는 이 세상 !!

그러니 이웃이 가까이 왔을 때 정말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고 하니, 그 이웃을 미워하는 여러 가지의 것이 있는데, 그것은 권력과 관련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세상은 빈 공간이 아니라 꽉 차여져 있는데, 그것을 우리 인간의 손톱으로는 뚫을 수 없는데, 그런데 그 권력을 외부에서 뚫고 들어오는데, 그것을 '언약'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만화에 보면 코뿔소처럼 생긴 땅을 파는 기계가 있는데, 앞에 드릴이 달려서 땅을 마구 파고 들어간다는 것이다. 실제로 동굴을 뚫을 때도 이와 비슷한 기계를 쓰기는 쓰는데, 물론 속도는 엄청 느리지만 말이다. 이렇게 빡빡한 권력층을 그 어떤 인간도 뚫을 수가 없는데, 그런데 인간은 그런 권력층이 있는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항상 눈이 흐리멍텅해서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그냥 살아갈 뿐인데, 자기가 왜 살아가는지도 모르고 그냥 살아간다는 것이다. 자기도 알 수가 없는 공포와 두려움에 휩싸여서 시달리면서, 그냥 하루하루를 보낼 뿐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런 가운데 있는 인간세계를 외부에서 언약으로 뚫고 들어가면, 비로소 나타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우리 인간이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권력층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것을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보겠는데, 그래야 오늘 본문의 진도를 나갈 수 있느니 말이다. 여기에서 먼저 창세기 16장인데, 1절에서 6절을 보자.

(창 16:1)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생산치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
(창 16:2)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지 아니하셨으니 원컨대 나의 여종과 동침하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창 16:3)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가져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한지 십 년 후이었더라
(창 16:4)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잉태하매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그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창 16:5)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나의 받는 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창 16:6)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그대의 여종은 그대의 수중에 있으니 그대의 눈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

◈ '옥중화'를 아십니까?

여기 4절에 보면,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잉태하매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그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라고 하는데, 하갈이 주인어른의 성은을 입어서 임신을 했는데, 그런데 자기의 여주인을 시기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윤 대감의 하녀가 하는 짓과도 같은데, 주인의 아이를 가졌다는 이유로, 우유로 만든 죽을 내놓으라고 하면서 행패를 부리다가 정난정에게 걸려서 작살난다는 말이다. 드라마 '옥중화'에 나오는 내용인데 말이다(ㅋㅋ).

여기 창세기 16장에도 보면, 하녀이면서 주인의 아이를 임신해서 여주인을 질투한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언약이 개입하게 되면, 비로소 밝혀지는 것이, 인간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어떤 층으로 꽉 차여져 있는지를 보여주는데, 그것은 곧 권력층으로 빡빡하게 차여있다는 것이다. 물론 아브라함이 보통 사람이라면 이 세상의 숨겨진 정체가 드러나지 않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언약이 개입하면서 어떻게 되는고 하니, 언약의 그 현장에서 "아하, 내가 그동안 노리는 것이 있었구나" 라고, 그렇게 뭔가 자기도 모르는 자기가 노리는 것이 있다는 말이다. 그것은 바로 자기가 신처럼 최고의 권력자가 되는 것인데, 최고의 자리에 앉는 것, 여기에 대해서 그 누구도 부인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 권력을 맛보는 순간 !!

만약에 임신이 되지 않았다면 여주인에게도 고분고분 순종을 하면서 잘 살았을 텐데, 그러면 하갈은 자기에게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겠는가? "나는 성격이 좋아서 이렇게 주인에게도 잘한다" 라고 하면서 오해를 했을 것이란 말이다. 그런데 임신을 하는 순간 권력을 맛보기 시작하는데, 그게 바로 언약의 효과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언약이 펼쳐지는 필드에서는, 자기 자신도 모르는 죄의 층들이 발각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도 임신을 했다" 라고, 즉 "너의 남자를 나도 가졌다. 오히려 나를 더 사랑해" 라고 하면서 멸시를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멸시를 하는 이유가 있는데, "너는 임신도 하지 못했잖아" 라는 것이다. 정난정도 비슷한 입장이었는데, 딸만 있었다는 말이다. 

일단 이렇게 해놓고, 여기서 사무엘상 1장 1절에서 6절을 보자.

(삼상 1:1) 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에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라 하는 자가 있으니 그는 여로함의 아들이요 엘리후의 손자요 도후의 증손이요 숩의 현손이더라
(삼상 1:2) 그에게 두 아내가 있으니 하나의 이름은 한나요 하나의 이름은 브닌나라 브닌나는 자식이 있고 한나는 무자하더라
(삼상 1:3) 이 사람이 매년에 자기 성읍에서 나와서 실로에 올라가서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며 제사를 드렸는데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여호와의 제사장으로 거기 있었더라
(삼상 1:4) 엘가나가 제사를 드리는 날에는 제물의 분깃을 그 아내 브닌나와 그 모든 자녀에게 주고
(삼상 1:5) 한나에게는 갑절을 주니 이는 그를 사랑함이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니
(삼상 1:6)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므로 그 대적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동하여 번민케 하더라

◈ 권력이 없는 자, 당신은 천국의 후보감 !!

이게 무슨 내용인지 다들 아시지 싶은데, 한나는 자식이 없고 브닌나는 자식이 있다는 것이다. 이게 성경전체에서 얼마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지 모르는데, 복음의 핵심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말이다. "없는 자의 자식이 있는 자의 자식을 제쳐놓고 구원을 받는다" 라는 것인데, 쉽게 말해서 "이 땅에서 권력이 없는 자라고 하면 당신은 천국의 후보감입니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어제 낮에도 그런 설교를 했지만, 없는 자를 있게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작전을 벌이려고 하면,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에게 어떤 특이성을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남들이 모두 가지고 있는 권력에 대해서 소외를 당하는 처지에 놓이도록 하나님의 약속이 몰아세우는데,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우리는 감사해야 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너는 이 세상의 권력과 관계를 맺을 필요가 없다" 라는 것인데, 그러니 자기가 남들이 가지고 있는 재산과 권력이 부럽다고 하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생각해야 하는데, "주님이여, 마귀가 나의 발목을 또 잡습니다" 라고 말이다. "부럽지? 그러니 너도 교회에 가서 예수를 믿어봐라. 그러면 복을 받아" 라고 하는, 그런 사탕발림에 부러워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항상 없는 자리에서 발견되는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인데, 언제나 죽은 자라고 간주될 때만 주님께서 살려주시는데, 그래서 그게 범사에 감사함으로 이어지게 되어있다는 말이다. "누가 권력에 센지 한 번 붙어봐?" 라고 하는 것은, 그것은 하나님의 대적 브닌나가 하는 짓이라는 말이다. 저주를 받을 자들이 곧잘 이런 성격을 발휘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에게 저주를 받을만한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말이다.

◈ 다시 창세기 16장으로 돌아가서 !!

다시 하겠는데, 신약은 모든 것을 포기한 상태에서 주님만 쳐다보는 것인데, 그게 신약이라는 것이다. 반면에 구약은 무엇인고 하니, 그러한 신약의 내용이 실제적으로 실생활에서 같이 엮여서 돌아가면서, 즉 "그런 실상 가운데서 너는 무엇을 좋아했고 무엇을 싫어했는지, 그것을 통해서 너 자신을 파악하라" 라는 것이 구약인데, 특히 구약 잠언서의 내용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 지금 제가 언약이 개입된 상황을 설명해드리고 있는데, 그러면 창세기 16장을 계속해서 살펴보자. 하갈이 함부로 대하니, 사래가 뭐라고 하는가? 5절에 보면,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나의 받는 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감히 종인 하갈이 임신을 했다는 이유 때문에 자기를 학대하니, 정실부인인 사래가 뭐라고 하는가? 자기의 자리를 걸고서, "하나님이 개입해주시기 원합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사래나 아브라함이나 하갈이나 어떻게 하나님에 대해서 오해를 하고 있는가? 없는가? 모두 오해하고 있는데, 하나님에게 제사를 드린다고 해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기에게 아픔이 발생되고, 그러면 그것을 해소하는 차원에서 하나님을 이용하겠다고, 그렇게 하나님을 끌어당기는 죄가 발생하게 될 때, 비로소 그 자리에 하나님께서 자기 정체를 드러내신다는 것이다. 그런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그냥 좋게 좋게, "하나님을 믿습니다. 사랑합니다" 라고 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오냐. 알았다" 라고 하면서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니가 아직 혼이 덜 났구나. 솔직하게 말해봐라. 니가 편안하면 나를 찾지 않고, 아프니까 찾잖아. 그렇지?"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 하나님, 제발 도와주세요 !!

마찬가지로 아브라함의 경우에도 집안에 문제가 생기니 하나님을 찾는데, 그러니 그 노림수가 상당히 수상하다는 말이다. 가정의 화목을 위해서, 각자 자기 자리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것인데, 그렇게 할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한다는 말이다.   

이러한 일들이 나중에도 똑같이 반복이 되는데, 애굽에 있던 히브리인들이 여호와를 언제 찾았는가? 배부를 때는 찾지 않았는데, 언제 찾았는가? 낯선 바로 왕이 등장해서 자기들을 노예로 삼을 때, 그제야 그들은 "여호와여, 제발 도와주세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도와달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이여, 지금 무엇을 하십니까? 나를 도와주지 않고 말이죠" 라는 것인데,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이용하겠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 자체로서 이미 자기 죄가 발견되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 불안, 공포, 그리고 두려움 !!

그것이 바로 아까 이야기했던, 불안, 공포, 그리고 두려움인데, 이것이 표면화될 때 어떻게 되겠는가? 그것이 살며시 외부로 드러나면서, "하나님이여, 지금 사는 것이 힘들어 죽겠습니다. 제발 도와주세요" 라고, 그런 식으로 우리의 입을 통해서 나온다는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되니, 아브라함이 자기 아내인 사래를 보고 뭐라고 하는가? 꽤나 사랑했던 모양인데 말이다. "여보, 당신의 여종이니 당신이 알아서 하세요" 라고 했는데, 그러자 사래가 하갈을 그만 학대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권력투쟁인데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이것이 어디서 까불어? 내가 지금까지 윤 대감의 아이를 임신한 여자들을 다 죽였어. 너도 내가 반드시 죽일 거야" 라는 것인데, 이게 정난정이가 드라마에서 하는 소리인데(ㅋㅋ), 이것이 바로 복음이라는 것이다. 복음이라기보다는 복음을 전하는 과정인데 말이다. 

◈ 안 된다. 다시 돌아가라 !!

그러자 하갈이 도망을 치는데, 그러자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서 뭐라고 하는가? 여기 9절에 보면,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은 결코 개인의 소원이나 권력욕을 충족시켜주시는 분이 아니라는 말이다.

(창 16:7)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 곁 곧 술 길 샘물 곁에서 그를 만나
(창 16:8) 가로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가로되 나는 나의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창 16:9)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창 16:10)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자손으로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하갈이 임신을 하기 전까지는 가정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 각자가 자기 자리를 지켰는데, 하갈도 마치 갑순이처럼 순종하는 것이 자기 자리라고 여기고, 여주인인 사래의 말을 시키는 대로 잘 들었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순박하기 짝이 없는, 시골에서 올라와서 차장을 하는데, "오라이!" 라고 하면서 말이다. 저는 그게 영어인 줄 몰랐는데, 그게 "All right!" 라는 의미라고 하는데 말이다.

드라마를 모르면 지금 강의를 이해할 수 없는데(ㅋㅋ), 아무튼 그것이 자기 자리라는 것이다. 그때는 하갈도 자기가 착한 줄로 알았는데, 자기 자리를 지키니 말이다. 그런데 인간이 그렇게 자기 자리에 만족하는 게 아니라, 여주인의 자리를 노리는 사태가 유발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몫이란 것이다.

◈ 잃어버린 채로 와야 내 아들이다 !!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교만케 하시는데, 그렇게 해서 우리를 탕자로 만드신다는 것이다. 탕자는 "아버지가 죽을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저의 몫을 미리 주세요. 그런 재산만 있으면 아들입니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아버지의 생각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잃어버린, 그렇게 잃어버린 채로 와야 내 아들이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주여, 제가 착한 일을 많이 했으니 천국에 보내주세요. 제가 아들답지요?" 라고 하는데, 하지만 하나님은 "아니, 그게 아냐. 너의 모든 착한 일을 다 버리고 난 뒤에,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하는 것이 가장 아들다운 것이야" 라고 하신다는 말이다.

◈ 그 어떤 인간도 아들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어 !!

다시 말해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라는 예수님의 기도처럼, 그것이 가장 아들답다는 것이다.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하는, 즉 아버지가 내리는 모든 저주를 마땅히 감수할 수 있을 때, 그게 가장 아들답다는 것이다.

마귀에 속한 인간들 중에서 아들은 한 명도 없는데, "나는 지옥에 가는 게 당연합니다" 라고, 그것을 솔직하고 진지하게 생각하는 인간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즉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데, 그 어떤 인간도 말이다. 그래서 어떤 인간도 아들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데, 아들이 아니니 말이다.

◈ 모두가 부산행, 모두가 좀비 !!

그러니 성경말씀은 우리가 모르는, 우리의 죄로 인해서 가려진, 그게 바로 공포심과 흐리멍텅한 눈빛인데, 총기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말이다. 그렇게 두려움과 염려로 인해서 찌달린, 그런 것들로 인해서 모두가 부산행인데, 모두가 다 좀비라는 말이다.

회사에 출근하기 위해서 지하철에 가득 들어차 있는, 그리고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보라는 것이다. 그들이 모습이 좀비가 아니면 무엇이라는 말인가? 그리고 퇴근하고 한 잔하고 집으로 돌아올 때는 그야말로 피곤에 찌들어서, 컨디션을 마치면 돌아오는가? 사람들이 왜 직장생활을 하는가? 그저 돈 때문인데, 돈만 있으면 좀비들처럼 달려들고 말이다. 그러니 돈이 없으면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권력층인데, 그런데 여기에 언약이 들어가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그때부터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전혀 없던 총기를 만들어내시는데, 그야말로 반짝반짝 빛나는 총기를 말이다. 그러시면서 "니 자리로 돌아가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더 재미있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창세기 21장을 보겠는데, 창세기 16장에서는 하나님께서  "니 주인에게로 돌아가라" 라고 하셨고, 창세기 21장은 무엇인고 하니, 8절에서 10절을 보자. 

(창 21:8) 아이가 자라매 젖을 떼고 이삭의 젖을 떼는 날에 아브라함이 대연을 배설하였더라
(창 21:9)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소생이 이삭을 희롱하는지라
(창 21:10)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매

◈ 이제는 내어쫓아라 !!

하나님께서 일을 아주 절묘하게 꾸미시는데, 그러니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이 꾸민 인생이지 우리가 어떻게 조성한 인생이 결코 아니라는 말이다. 자기가 열심히 노동해서 얻은, 그런 착실한 자기 인생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꾸미신 인생이지 말이다. 

여기 창세기 21장이 무슨 내용인고 하니, 어른들의 일은 이제 정리가 되고 각기 자식을 낳았다는 것이다. 하라는 이스마엘을 낳고, 사라는 이삭을 낳았다는 말이다. 이제 그 이삭이 자라서 엄마 젖을 뗄 나이가 되었는데, 그래서 아브라함은 잔치를 베풀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돌잔치를 했다고 보면 되는데, 아이가 이제 엄마 젖도 잘 먹고 무사히 잘 자랐다고 해서 잔치를 베풀었는데, 그런데 그때 사라가 보니까, 하갈이 낳은 아이가 이삭을 그만 놀렸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이삭보다는 나이가 더 많을 테니까, 그럴 가능성이 있는데 말이다. 그가 바로 이삭의 형인 이스마엘이라는 것이다.

사실 아이를 키우다가보면 그럴 수도 있는데, 그 어린아이들이 무엇을 알겠는가? 얼마든지 자기 동생을 노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라가 이것을 보고 아브라함에게 뭐라고 하는가? 그대로 일러바쳤다는 것이다. 그것도 좋은 말로 하면 되는데, "여보, 아들이이 장난을 좀 쳤어요" 라고 해도 되는데, 그게 아니라 "여보, 저게 내 아들을 희롱합니다" 라고 했다는 말이다.

쉽게 말해서 "어디 종년의 아들이 감히 내 아들을 괴롭히는가?" 라는 것인데, 그러니 이게 권력싸움이라는 것이다. 즉 "주제파악도 되지 않는 것이 어디서 까불어?" 라는 것인데, 굳이 요즘 유행하는 말로 하면 "개돼지인 주제에 어디서 까불어? 그냥 그대로 찌글러져서 얌전히 주는 것이나 얻어먹고 있어" 라고 말이다. 

그러면서 아브라함에게 뭐라고 요구하는가?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어쫓아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그대로 동의했는데, 그러니 이것은 하나님의 뜻인데 말이다. 창세기 16장에서는 '돌아가라!' 라고 했는데, 여기서는 '나가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14절에서 16절을 보자.

(창 21:14)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취하여 하갈의 어깨에 메워 주고 그 자식을 이끌고 가게 하매 하갈이 나가서 브엘세바 들에서 방황하더니
(창 21:15) 가죽부대의 물이 다한지라 그 자식을 떨기나무 아래 두며
(창 21:16) 가로되 자식의 죽는 것을 참아 보지 못하겠다 하고 살 한 바탕쯤 가서 마주 앉아 바라보며 방성대곡하니

(창 21:16) 혼자 화살이 날아가는 거리만큼 떨어져 앉아서 `아들이 저렇게 죽는 꼴을 차마 볼 수가 없구나' 하면서 목놓아 울었다. (현대어 성경)
(창 21:16) 100미터쯤 떨어진 곳에 가서 주저앉아 자식이 죽는 것을 차마 볼 수 없다며 목놓아 울기 시작하였다. (현대인의 성경)

◈ 하갈과 그 아들을 동정해야 하는가?

여기에 곡성이 나오는데, 누가 울었는가? 하갈이 자기 자식을 붙들고 방성대곡을 했다는 말이다. 그러면 여기서 제가 묻겠는데, "이들을 동정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라는 것이다. 만약에 우리가 길가는 과객이라고 하면, 이런 여인과 아이를 보았다고 하면 어떻게 해야하느냐는 말이다.

그러면 자초지종을 물어보고, 윤 대감 집에 전화를 걸어서 "여기 당신의 여인과 자식이 울고 있으니 좀 데리고 가세요" 라고 해야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물론 여기 창세기 21장에서는 아브라함의 자식인데, 지금 질투의 화신인 본처에 의해서 자기 자식이 물이 없어서 죽게 생겼다는 말이다.

그러면 적어도 아브라함이 남자라고 하면, 자기가 낳은 자식이라고 하면 거두어야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이것은 너무 잔인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집안문제인데, 그것을 가지고 자식을 죽이고 하면 되겠느냐는 말이다. 요즘 같으면 가정법원에 제소해야 하는데 말이다. 그러면 자칫 잘못하면 아브라함은 아동학대에 걸려서 10년형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ㅋㅋ).  

그러면 아브라함은 과연 어떻게 해야하겠는가? 내어쫓아야 하는가? 아니면 다시 데리고 와야하는가?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언약으로 우리가 사는 세상을 파고 들어가는 것인데, 우리의 인간적인 양심이라면 어떻게 되는가? 누구의 잘못인가? 아브라함이 잘못했는데, 그렇게 쫓아내면 안 된다는 것이다. 끝까지 여자들의 싸움을 말려야 하는데, 자기는 머리카락이 하나도 남지 않아도 말이다(ㅋㅋ).

하지만 그것이 사탄의 마음인데, 즉 죄라는 것이다. 그러니 평소에 우리가 얼마나 아무 것도 모르고 살았는지가 드러나는데, 사탄이 누구인지, 하나님이 누구인지, 그리고 자기 자신도 누구인지 모르면서 살았다는 말이다. 그냥 사는 대로 살아가는데, 예수를 믿으면 천당에 간다고 하니 믿어주고 말이다.

그냥 그것뿐인데, 도무지 자기가 바뀔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기가 천국에 가려면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 그 모델도 우리는 찾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 정도면 괜찮지 않은가? 양심대로 살면 되는데" 라고 하는데, 그러니 그놈의 양심이 문제라는 것이다.

◈ 자신이 있다고? 너는 이미 죽었어 !!

이렇게 하나님의 언약이 들어오면, 여기에 대해서 "저는 아브라함처럼은 하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 라고 할지도 모르겠는데, 그때 들어온 언약이 지금은 십자가로 들어온다는 것이다. 지금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말이다. 즉 "잘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 라는 것이 아니라, "너는 이미 죽었어" 라는 것인데, 그게 십자가에 담긴 내용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 다음부터는 어떻게 되는가? "이제부터 너는 무장해제야. 그러니 너는 너에게서 손을 떼라. 이제부터 너희들을 배치하겠어. 너는 지옥에 갈 종의 계열이야. 그리고 너는 어떻게 해도, 종이라고 내어쫓는 악한 주인역할을 해도 천국이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 '인과응보(因果應報)'에 주눅이 들린 인간들 !!

여러분, 이게 이해가 됩니까? 천국에 가려면 그래도 지옥에 가는 자들보다는 착해야하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그게 우리의 상식이라는 것이다. 어제 오후에 설교를 하면서 인과응보를 언급했는데, 우리는 인과응보에 주눅이 들어있다고 말이다. 착한 일을 하면 복을 받고 악한 일을 하면 언젠가는 벌을 받는다는 것인데, 우리는 그런 것에 짓눌려서 눈에 총기를 그만 날려버렸다는 말이다.

그래서 세상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저 예수를 믿으면 복을 받는다고 생각하는데, 즉 예수님을 믿는 것도 착한 일이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그러니 기도하는 착한 일, 또 헌금하는 착한 일, 그렇게 되는데, 왜냐하면 인과응보의 틀 안에서 그게 맞다고 본다는 말이다. 

그렇게 뭔가 착한 일을 하면 그 대가로서 좋은 결과가 주어질 것이라고, 그런 인과응보사상에 의하면 창세기 16장과 21장은 전혀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누가 봐도 아브라함이 조치를 잘못한 것인데, 그래서 믿음도 없는 현대신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는데, "저주를 받은 이스마엘을 돕자" 라고 말이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조치가 잘못되었다는 것인데, 같은 사람인데 어떻게 그렇게 차별할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사랑의 하나님인데, 자비의 하나님인데, 그런 하나님이 어떻게 하갈을 그렇게 대할 수가 있느냐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하갈 편에 서서 하갈을 돕고 이스마엘을 도와야 한다는 것인데, 그러면서 "이슬람교도 구원이 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갈의 아들인 이스마엘이 현재 아랍권의 조상이니 말이다.

◈ 천주교, 하나님은 생명이다 !!

그러니 이삭과 이스마엘이 형제이니, 우리도 이슬람과 형제라고 하는 것이 현재 천주교이고, 개신교도 점점 퍼지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를 믿으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도 독선적인데, 그러니 십자가를 빼고 기독교를 전하자고 한다는 말이다. 특히 천주교가 그러한데, 십자가를 빼고 기독교를 전하게 되면 무엇이 되는고 하니, 공식이 그러한데, "하나님은 생명이다" 라고 말이다. 천주교에서는 이렇게 생명을 강조하는데, 그래서 "낙태를 하지 말자" 라고 한다는 것이다.

다르게 이야기하면 "하나님은 사랑이다" 라고 하는데, 이것은 개신교의 경우에 선교단체나 교회에서 미끼 상품으로 던질 때, 주로 이것을 던진다는 말이다. 개척교회를 하면 처음에는 이런 간판을 내걸고 하는데 말이다. 그러면 "아하, 이것은 교회가 아니구나" 라고 여기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기존 교회의 주일학교에서 행사를 할 때도 이렇게 하고 말이다.

이번에 사드를 배치할 때 누가 반대데모를 했는고 하니, 말끔하게 차려입은 원불교 승려들이 했는데, "생명을 해치려거든 차라리 내 목숨을 달라고 해라" 라고 하면서 말이다. 롯데 골프장 앞에서 그렇게 데모를 했는데, 하필이면 그 근처에 원불교 성지가 있어서 말이다. 그러니 그것도 따지고 보면 일종의 이기주의라는 말이다.

지구자체가 생명이라는 것인데, 이게 소위 '가이야 이론' 이라는 것인데, 즉 "이 땅은 살아있다" 라는 것이다. 그래서 부산에서 KTX 터널을 뚫는데 어떤 여자 승려가 도룡뇽의 서식지를 파괴한다고 하면서 결사적으로 반대데모를 했는데, 혼자서 말이다. 

스님들은 장작을 떼다가 벌레가 나오면 도로 끄집어낸다고 하는데, 그러면 눈에 보이는 것만 소중한 생명이고 박테리아와 같은 것은 죽여도 된다는 말인가? 그런 논리라면 예방주사도 맞으면 안 되는데, 박테리아를 죽이는 것이니 말이다. 그러니 모두가 총기가 없는데, 흐리멍텅하다는 것이다.

◈ 권력과 무관한 사람은 없어 !!

아브라함의 조치가 잘했다는 것이 아닌데, 아브라함은 자기가 자체적인 권력자라고 우기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니가 감히 어디 본처를 건드려?" 라는 것인데, 물론 사라도 그렇고 말이다. "어디 감히 내 자리를 넘본다는 말인가?" 라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 모두가 그 자체로서 하나의 권력 덩어리로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서, 사라를 통해서 권력자체를 해부하고 계시는데, 즉 "그 누구도 권력과 무관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라는 것이다. 각자 각자가 "나를 건드리지 말라" 라고 하는 권력체의 입장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제 잠언서 6장으로 다시 돌아와서, 16절에서 19절을 보자.

(잠 6:16)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 곧 그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육 칠 가지니
(잠 6:17) 곧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잠 6:18)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
(잠 6:19)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및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니라

이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포에 지나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 어느 누구도 자기가 교만하고 싶어서 교만한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누구도 죄가 없는 자의 피를 흘리는 것이 취미인 자는 없다는 말이다. 정신병자가 아니라면 말이다. 그리고 그 누구도 악한 계교라고 생각하면서 부리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가치가 자기의 권력에서 나오기에 말이다.

그러니 여기 16절에서,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것 곧" 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무엇인고 하니, 우리가 따로, 즉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나는 나다" 라고, 그렇게 각자가 따로 권력체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폭로시키기 위해서 이런 말씀을 주셨다는 것이다.

사람이 자기가 행동을 하면서, "여러분, 이것은 교만한 겁니다. 이것은 간교한 겁니다" 라고 하면서, 그것을 자랑질을 하면서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전부가 자기의 생존과 생계를 결부시켜서 최선을 다하는데, 그런데 하나님 쪽에서는 그것을 무엇으로 보는고 하니, 그게 바로 교만이고, 거짓된 혀이고,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것이고, 그게 악한 계교를 꾀하는 짓이라고 하신다는 말이다.

자기는 자기 자식이 잘 되라고 했는데, 그런데 그게 남의 자식을 밀치는 것이 되도록 누가 그렇게 한다는 말인가? 주께서 일을 그렇게 꾸민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우리를 죄인으로 만들기 위해서인데, 주님이 그렇게 몰아세운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여기 이 말씀에 대해서 당장 동의하기가 힘드는데, 왜냐하면 나름 최선을 다해서 바르게 살아가려고 노력하기에 말이다.

이제 교재 178페이지를 보자. 

** 무엇이 악한 것인가를 눈치채라는 겁니다. 눈, 혀, 손, 마음, 발, 그리고 신체, 이런 것들이 총동원되어서 여호와 경외를 반대하는 것이 열중하고 마음을 빼앗기는 것이 악한 것입니다.

◈ 어디 악하지 않는 구석이 없어 !!

여기에 눈, 혀, 손, 마음, 발, 그리고 신체가 나오는데, 방금 여기에 결부된 죄를 하나씩 나열을 했는데 말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의 온 몸이 여호와 경외를 거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 몸이 이용되고 있는데, 누구한테 말인가? 그것을 잠언서에서 '악함'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작전은 굉장히 절묘한데, 언뜻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상대로 이야기를 하시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고 하다가보니, 어느 구석이든 간에 그 말씀과 부딪치지 않고 충동하지 않는 곳이 없다는 말이다.

우리는 악과 '결탁관계'에 !!

하지만 주님께서는 우리와 상대를 하는 것처럼 하면서 우리 배후에 있는 악을 지목하시는데, 그래서 악과 우리가 사이가 어떠한고 하니까, 우리는 악의 하수인 노릇을 하는 결탁관계에 놓여있다는 것을, 오늘은 강의제목을 '결탁관계' 라고 했으면 좋겠는데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악과 결탁관계에 놓여있는데, 주님께서는 "너만 모르고 있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너는 너의 결단과 각오로 너의 인생을 끌어왔다고 생각하지? 하지만 그게 아니라 나는 악과 결탁되어있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주님, 정말 몰랐습니다" 라고 하는데, 당연히 우리는 모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이 상황을 그렇게 몰아넣기 이전까지는 우리는 전혀 알 수가 없다는 말이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여유가 있게 되면, 물론 그런 여유 있는 환경은 자기가 노력해서 만든 것이라고 생각하기 마련인데 말이다. 그런데 언제 하나님에게 불평을 터트리는고 하니까, 자기가 모든 것을 해봤는데도 일이 전혀 안 풀릴 때인데, 일이 안 풀려도 너무 안 풀린다는 것이다. 장사를 해도 일년은 고사하고 세 달을 견디지 못하고 말아먹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니 일에 손을 대기가 겁이 나는데, 마이다스의 손이 아니라, 마이너스의 손이라는 것이다(ㅋㅋ). 일이 힘든 것이 문제가 아니라, 아무리 힘들어도 주님께서 방향이라도 가르쳐주면 숨통이라도 터일텐데 말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해보라고 해놓고 막아버리고, 해보라고 하면서 막아버리고 하신다는 말이다.

◈ 주님의 군화발 !!

마치 군에서 유격을 받을 때, 조교가 군화발로 위에서 짓밟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위에서 밟고서 "니가 몸부림을 칠 대로 쳐봐라" 라고 하시는데, 그렇게 일부러 애를 먹이는 듯한 상황에 놓이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비로소 "주님, 제가 무엇이 잘못입니까?" 라고 하게 되는데 말이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박수를 치시면서 "진작에 그렇게 나오지. 그게 바로 너의 모습이었어.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하면서 섬기는 척을 하는데, 그것이 아니라 이것이 바로 너의 모습이야. 그래도 이렇게 된 것을 행운으로 알아라" 라고 하시는데, 즉 언약이 다가왔다는 것이다. 

◈ 하지만, 다가온 언약으로 인해서 !!

구원하기 위해서 뭔가가 접촉이 되었는데, 하나님의 촉수가 다가왔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이 바로 언약과 결합된 것인데,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그가 얼마나 이기주의자인지를 다 드러내시고, 또 사라로 하여금 얼마나 못된 여자인지를 다 드러내시고, 그야말로 정난정 못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갈만 불쌍한데, 하갈에게 동정심이 그냥 간다는 것이다. 말을 하고 보니 졸지에 현대신학자가 되고 말았는데(ㅋㅋ), 하갈이 어디 임신을 하고 싶어서 했는가? 주께서 아브라함을 이용하기 위해서 하갈로 하여금 임신이 되게 하셨는데, 그런데 끝까지 책임도 지지 않고 내쫓기게 하시는데, 하갈이 무슨 씨받이도 아니고 말이다. 사실 씨받이보다도 더한데, 그 자식까지도 같이 내어쫓기니 말이다. 

사라가 평소에 하갈과 그 자식 이스마엘을 얼마나 싫어했으면, 딱 지켜보고 있다가, "옳다구나. 제대로 결렸구나!" 라고 해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하갈과 그 자식을 쫓아내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악독한 주인여자인데, 인과응보라고 하면 지옥에 가고도 남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가 예상과는 전혀 다른 상황을 만들어서, 구원이란 것은 무엇인고 하니, "이렇게 못된 너희에게 구원이 주어지고, 불쌍한 저들은 지옥에 간다" 라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준비하신 천국과 지옥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상상을 초월하는데, 그동안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았느냐는 말이다. 우리는 완전히 반대로 살았다는 것이다.

◈ 하나님의 절묘한 작전 !!

하나님의 절묘한 작전이 무엇인고 하니, 선악과를 누가 따먹었는가? 분명히 아담이 따먹었는데,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것을 지적하시면서 책임을 누구에게 묻습니까? "하와야, 누가 따먹었지? - 남편이 따먹었습니다. - 옳지. 아담아, 누가 따먹었지? - 뱀이 따먹게 했습니다. - 옳지. 알았어!"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전쟁은 인간과의 싸움이 아니라, 선악과 사건을 통해서 숨겨진 인물인 메시야와 악마와의 싸움인데, 그 결과에 의해서 구원이 될 자는 구원이 되고, 구원이 되지 않을 자는 구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차피 모든 인간의 배후에는 누가 있는가? 악마의 권력에 주눅이 들어서 살아가고 있는 처지에 놓여있는 것이 바로 우리 인간이라는 말이다.

사람이 권력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하지만 일단 권력을 잡게 되면 그 권력을 놓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전두환이 그런 경우인데, 잠시 박정희 대통령의 시해사건을 조사하라고 했더니만 어떻게 되었는가? "본인은 ~" 라고 하면서, 그만 본인이 대통령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게 바로 인간이라는 말이다.

◈ 사울에게는 악신이, 다윗에게는 성신이 !!

사울은 겸손할 때만 이스라엘의 왕인데, 그런데 그 사울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 난 뒤에 어떻게 했는가? 다음 번의 왕인 다윗을 잡아먹지 못해서 난리가 났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관계, 즉 사울에게는 악신이 임하고 다윗에게는 성신이 임했는데, 바로 그 관계로서 하나님께서는, 신약시대의 모든 세계를 악마에 사로잡힌 자와 성령을 받은 자로서, 그러한 그림을 미리 구약 때부터 앞당겨서 땅 위에 펼쳤다는 말이다.

아까 브닌나 이야기를 했는데, 한나는 자식이 없고 브닌나는 자식이 있을 때, 자식이 없는 자로 하여금 핍박을 받음으로 말미암아서 한나는 하나님에게 호소하게 되었고, 그렇게 호소해서 생긴 자식인 사무엘이 어떻게 하는가? 자기 어머니인 한나를 괴롭힌, 즉 "누가 자식이 없다고 괴롭혔어? 다나와!"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너희의 원수가 아니고 숨겨진 하나님의 원수인 악마였다" 라는 것인데, 그렇게 이 세상은 바로 가진 자, 즉 권력이 있는 자의 천지라는 것이다. 그런 이 세상을 악마의 세상으로 규정하고, 그래서 다른 방식으로, 즉 아주 낮아진 모습으로 메시야가 출현한다는 말이다.  

◈ 잠시, 뉴저지 아카데미로 !!

뉴저지 아카데미에서 제일 마지막으로 한 것이 강의가 아니고 설교였는데, 그래서 시간이 좀 짧다는 것이다. 그때 한 것을 여기서 잠시 언급하자면, 그게 이사야서 53장의 내용인데,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지 싶은데 말이다.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 라는 대목인데, 그때 우리는 무엇을 했는가? 우리는 모두 양 같아서 각자의 갈 길로 갔다는 것이다.

(사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 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찾아와야 !!

제가 여기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제 갈 길로 갔으니, 본받자!" 라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제 갈 길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흘린 피가 어디까지 오는고 하니까, 이것이 제 갈 길로 간 양들을 위해서 채찍에 맞아서 흘린 피이니 때문에, 그 채찍이 채찍 값을 하려고 하면, 제 갈 길이 그대로 그 자리에 머물러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찾아와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마귀는 이 대목을 어떻게 보는고 하니, "니가 제 갈 길로 갔기 때문에, 주님을 찾아가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자기가 찾아가게 되면 주님이 흘린 보혈의 피를 야금야금 다 갉아먹게 되는데, 이게 바로 십자가라는 이름으로 벌이는 이단적이고 비복음적인 작태라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벌어지는 말이다. 

"인간들아, 십자가의 은혜를 받았으면 염치가 있어라. 주님은 귀한 생명을 바쳤는데, 너희들은 무엇을 바쳤는가?" 라고 한다는 것이다. 찬송가에 그런 가사가 있지 싶은데, "주님은 귀한 생명을 바쳤는데, 우리는 무엇을 드릴까요?" 라고 하는 말이다. 드리기는 무엇을 드린단 말인가? 그냥 죄만 짓고 있으면 되는데 말이다. 그러니 찬송가 가사도 마귀의 짓을 하고 있는데, 보답을 해야한다는 것인데, 우리가 무슨 보답을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우리가 바다 속에 가도 십자가의 피는 따라오는데, 끝까지 말이다. 그러니 우리의 인식자체가 달라져야 하는데, 아무 것도 보답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많이 용서를 받은 자가 많이 사랑하는데, 사랑은 자기가 할 것이 없을 때 나타나는 느낌이고 감정이라는 것이다. 즉 "내 쪽에서 할 것이 없었습니다" 라고 하는 것이 사랑이란 말이다.

남녀가 결혼을 하게 되면, 그렇게 결혼을 하게 하신 분은 하나님인데, 그러면 그 부부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제가 이 사람의 아내가 된 것은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었습니다. 제가 이 사람의 남편이 된 것은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었습니다" 라고 말이다. 그것이 유지될 때만, 그 결혼이 낮아짐 속에서 유지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내가 너를 데려오기 위해서 퍼 붓은 돈이 얼마인데?" 라고 하면 야금야금 다 갉아먹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너에게 밥을 그렇게 해주었는데, 밥값을 낸 적이 있나?" 라고 해도 그렇고 말이다. 그래서 복음으로 맺어진 부부라면 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남편이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고민하는 분들이 있는데, 그러면 서로 갈라서면 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남편을 자기 위주의 남편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인데, 물론 서로가 다 그렇지만 말이다. 그것은 일종의 내부적인 권력싸움이라는 것이다.

이제 잠언서 6장 24절에서 27절을 보자.

(잠 6:24) 이것이 너를 지켜서 악한 계집에게, 이방 계집의 혀로 호리는 말에 빠지지 않게 하리라
(잠 6:25) 네 마음에 그 아름다운 색을 탐하지 말며 그 눈꺼풀에 홀리지 말라
(잠 6:26) 음녀로 인하여 사람이 한조각 떡만 남게 됨이며 음란한 계집은 귀한 생명을 사냥함이니라
(잠 6:27) 사람이 불을 품에 품고야 어찌 그 옷이 타지 아니하겠으며

◈ '우리끼리'가 아니기에 !!

여기에 이방 계집이 나오는데, 이렇게 잠언서에서 '이방' 이라는 것이 나오면, 이게 무슨 뜻인고 하니, "이것은 우리들만의 이야기다. 저쪽은 해당이 안 된다. 그러니 조용히 해!" 라는 겁니다. 지난 시간에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왜 가로 유다를 사랑하면 안 되는가?" 라고 말이다. 왜 사탄을 사랑하면 안 되느냐는 것이다. 또 물어도 또 모르지 싶은데 말이다(ㅋㅋ). 

성경에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데, 그런데 가룟 유다는 왜 사랑하면 안 되느냐는 말이다. 왜 우리끼리만 사랑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끼리' 라는 것이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인데, 그게 자기가 결정한 '우리끼리' 라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것은 주께서 유발시킨 우리끼리인데, 그 우리끼리는 특징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우리는 다 죄인이다" 라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다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는 누구를 사랑할 능력이 없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우리끼리' 라는 것이다.

그런 자들에게는 주님의 사랑만 공급되기 때문에, 그 자체가 이미 원수를 사랑한 레벨이 되고 만다는 말이다. "저는 죄인입니다" 라고 했을 뿐인데, 그런데 주님께서는 "니가 이웃을 위해서 희생하는구나" 라고 칭찬해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우리끼리'는 성령을 받지 않은 이방인들은 전혀 납득할 수가 없는데,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하면서 어떻게 자기들끼리만 사랑하는가?"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면 되는데, "내가 속한 우리끼리는 우리끼리가 아니거든!" 이라고 말이다. 그러면 "무슨 소리야? 너희들끼리 모였잖아?" 라고 나오는데, 그러면 "우리끼리 모인 것은 사건으로 모인 것이지, 납득이 되어서 모인 것이 아니다" 라고 하면 된다는 말이다. 물론 상대방이 알아들을 수 없겠지만 말이다.

하나의 사건으로 모였는데, 그것이 어떤 사건이라는 말인가? 주님 앞에서 자기를 죄인으로 드러내는 사건인데, 그래서 자기가 있는 곳이 소돔이 되고 애굽이 되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그 장소가 된다는 것이다. 그게 곧 '대롱대롱' 매달린 사람이란 말이다. 그러니 항상 주님에 의해서, 주님 앞에서 산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우리끼리' 인데, 자기가 골라잡은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러면 여기서 여기 6장 27절에 나오는 '음란' 이라는 개념을 정리해보겠는데, 아까 오늘강의 제목을 뭐라고 한다고 했는고 하니, 저도 돌아서면 잊어버리는데 말이다. 참 '결탁관계' 라는 것인데, 갑자기 제목이 음란으로 바뀔 수가 있다는 것이다(ㅋㅋ).

◈ 이스라엘아, 너희들이 간음했구나 !!

간음이나 음란을 이야기하려고 하면, 반드시 구약의 에스겔서를 거쳐야 하는데, 그 에스겔서에 보면 새언약에 대한 예고가 나오는데, 11장과 36장에 말이다. 즉 "장차 새언약이 오는데, 그것이 너희들의 마음속에 들어갈 것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겔 36: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겔 36:27)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그런데 그렇게 새언약에 오기 이전에 전제가 되는 게 있는데, 그게 무엇인고 하니, "이스라엘아, 너희들이 간음했구나!" 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제가 언제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웠다는 말입니까?" 라고 하는데,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서에서 낯선 이야기를 하시는데, "광야에서 동행했던 것이 너희의 남편이었다" 라고 말이다.

◈ 너희의 남편이었느니라 !!

지금부터 좀 어려운데, 그런데 민수기나 신명기에 보면 남편의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데, 그런데 여기 에스겔서나 아모스서나 호세아서 등에 보면 나온다는 것이다. "너희의 남편이었느니라" 라고 나중에 말씀하신다는 말이다. 이렇게 나중에 이야기한다는 것은, "모든 의미는 중간이 끊지 말라. 너희가 무엇을 안다고 끊는다는 말인가?" 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자기가 지옥에 갔다고 치고, 그러면 모세와 엘리야는 천국에 가고 자기는 지옥에 갔다고 하면, 그것은 그들이 믿음이 좋고 착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것은 어떤 빽이, 즉 권력이 작용해서 그렇다는 말이다.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이나, 그리고 모세나 엘리야가 다 똑같은데 말이다.

그게 바로 예수님의 권력으로 인해서 일방적으로 천국에 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유를 우리 쪽에서 찾으면 안 되는데, 그러면 복음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것은 언약이 아닌데, 그저 주시는 사랑이라는 말을 모독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라는 로마서 11장의 말씀처럼, 그 긍휼의 증인으로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우리 인생을 너무 탓하면 안 되는데, 주님의 긍휼,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이다.

(롬 11:32)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그렇다고 하면, 우리가 지옥에 갔다고 치고 모세와 엘리야를 보면, 그들은 빽이 있는데, 그게 누구의 빽인지 보니까, 예수님의 빽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이 무엇인데 그들을 구원하신다는 말인가?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그들의 신부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그것은 창세기 2장을 보면 되는데, 거기에 무엇이 나오는가? "둘이 벌거벗었지만 부끄러워하지 않는 한 몸이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한 몸' 이라는 이유 때문에, 즉 머리가 이룬 그 효과로 인해서, 남편과 아내가 한 몸으로 전환이 된다는 말이다.

(창 2: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창 2:25)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 그게 바로 간음죄 !!

그런데 그것을 끝에 와서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시는고 하니, 에스겔서에 와서 "너는 너의 남편이었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스라엘이 그 남편이라는 관계를 끊어버리고 그만 이방 신을 섬겼기 때문에, 그러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 그게 바로 '간음죄'에 해당이 된다는 것이다.

이 간음죄의 특징은 이미 결혼을 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데, 즉 결혼하지 않으면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법에서는 이것을 '간통' 이라고 하는데 말이다. 그러니 한 몸이라는 것이 확정된 상태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광야에서 동행했던 하나님은, 이미 한 몸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그들과 함께 하셨다는 말이다.

그러니 "예수님이 십자가에 지신 것을 믿으면 구원을 받겠네" 라는 것이 아닌데, 예수님과 한 몸이 된 자만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나오는 암호와 같은 것, 그것이 곧 십자가인데 말이다. 그러니 십자가는 자기가 믿는다고 해서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 여기에 피가 간다. 그런데 이 피는 나의 피이면서도 너의 피가 된다. 내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면 되는데, 그것이 너는 믿어지는가? 이해가 된다고? 그렇다면 나의 신부다. 어서 오너라!"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그게 놀랍게도 납득이 되고 수용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남편에게서 일어나는 일이 곧 자기에게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하면, 우리가 독자적으로 주님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누누이 이야기한 게 무엇인고 하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리는 죄밖에 지을 수 없습니다" 라고 했다는 말이다. 

◈ 개인구원이 아니기에 !!

그러면 "주님이 진작에 이런 이야기를 하면 되지 않는가?" 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게 문제인데 말이다. 하지만 주님이 진작 이야기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이게 구원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의 속성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에, 즉 이스라엘은 "남편이 누구인가?" 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있기 때문에, 그러니 개인구원을 위해서 미리 알려주고 하는 것은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구원은 결과로서 되는 것이지, 미리 알아차려서 받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내가 잘해서 구원을 받아야지" 라고 하는 말이다. 즉 "구원을 받아야 하겠는데, 어떻게 하면 됩니까? 아하, 신랑이 되신 예수님을 믿어야지" 라는, 그런 구원은 없다는 것이다. 그런 꼼수는 주님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주님이 나에게 해준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이게 긍휼이라고요? 그러면 구원이 된 겁니까? 아하, 그렇군요" 라고 하면서, 그렇게 결과로서 구원이 되었으니 자기의 모든 것이 주님이 주신 긍휼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구원은 항상 결과로서 얻어지는 것이고, 느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다음부터 할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무엇이 간음인가?" 라는 것인데, 

자기 입장에서의 간음이 아니라, 

우리 가정이 아니라 주님의 가정에서, 

즉 주님이 신랑이고 우리가 신부가 될 때, 

무엇이 간음죄인고 하니, 이 세상 것을 좋아하는 것이 바로 간음죄에 해당된다는 것을, 

그것을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혹독하게 만끽하게 된다는 말이다.  

우리는 너무나 이 세상을 좋아하고, 그래서 이 세상의 신부가 되어서 살다보니, 입에서 늘 불평과 불만이 나오는데, "주님이여, 나에게 해준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라고 말이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그것이 바로 정신은 엉뚱한 곳에 판 것인데, 그래서 눈에 총기가 없어서 초점이 맞지 않다는 것이다.

◈ 이상현 목사님, 땡큐 !!

우리가 사용하는 이 카메라도 교체를 했는데, 너무 오래 사용해서 초점이 맞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니제품으로 바꾸었는데, 이것을 이상현 목사님이 사주셨는데,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강의를 할 때마다 누가 사주었는지를 이야기해주겠다고 약속을 했다는 것이다(ㅋㅋ). 

하나님께서는 이방여인과 절대로 혼인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오해를 했는고 하니, 자기들의 개인적인 욕구에 사용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가만히 있어봐라. 출신이 어디지요? 이방여인이라구요? 그러면 안 됩니다. 잠언서 6장에 보면 이방여인과는 결혼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라고, 그렇게 자기들의 사적인 혼인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시켰다는 것이다.
    

(잠 6:26) 음녀로 인하여 사람이 한조각 떡만 남게 됨이며 음란한 계집은 귀한 생명을 사냥함이니라

자식이 어떤 여자를 사귀는데, 그런데 여자가 절에 다닌다는 것이다. 엄마는 보살이고 말이다. 물론 서로가 사랑하는 사이인데, 그러면 결혼을 어떻게 해야하겠는가? 허락을 해야하겠는가? 말아야 하겠는가? "사랑하나? 헤어지고는 살 수 없다고? 그러면 결혼을 해라. 너도 신자가 아니기는 마찬가지이니 말이다. 둘 다 똑같다" 라고, 그렇게 허락을 해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초점이 진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만 사랑에 꽂히고 말았는데, 즉 예수님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것을 탓할 문제가 아닌데, 누구나 다 그런 과정을 겪게 되는데, 탕자의 과정을 말이다. 그런 과정을 겪어야 한다는 말이다. 결혼을 허락해주면 교회에 나가서 복음을 받아들이겠다고 하는데, 하지만 그게 자기 결심으로 될 문제는 아니란 것이다. 교회는 나갈 수 있어도, 복음은 그런 게 아니란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도 있는데, 우리교회에도 있다는 것이다. 결혼을 하기 전에는 교회에도 다니지 않았는데, 복음을 아는 남편을 만나서 복음을 받아들이고 같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고 말이다. 어차피 그것은 자기가 감당해야 하는데, 물론 그렇게 하다가 초점만 제대로 잡히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 179페이지를 보자.

** 예수를 믿는 것은 도를 닦는 생활이 아닙니다. 세상살이에 충실해서 살다가 예수를 믿고 난 뒤에 이 세상을 보는 관점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에 이 차이남을 모르면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아하, 저 세계가 무서운 세계인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모르기 때문이구나" 라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래서 어둠의 세계는 오로지 자기밖에 모르는 세계가 됩니다. 증거할 것은 오직 자신의 정당함과 변명뿐이라는 겁니다. 

◈ 우리는 하나의 언약맨으로 !!

이 세상은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의도가 있어서 언약적 관점에서 깔아놓은 그물망이라는 것이다. 거기에 우리가 하나의 언약맨으로서 걸려들었다는 말이다. 어제 낮 시간에 후딱 지나갔는데, 헬라철학에서는 세상을 무엇을 보았다고 했는가? 경이로움이라는 것이다. 기원전 5세기경의 헬라철학에서는 경이로움인데, 즉 인간의 지혜로는 다 알 수 없는 것이 이 세상이라는 말이다.

그러면 불교는 무엇인가? 고통으로 보았는데, 그리고 동양철학인 중국철학에서는 이 세상을 난세, 즉 정치적 싸움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베르거송은 모든 것이 존재에서 와서 존재로 흘러간다고 보았다는 말이다. 하이데거의 경우에는, 존재는 숨겨져 있는 것이고, 나타난 것은 존재자라는 것이다. 즉 "이 세상은 인간세상이다' 라는 것인데, 그게 하이데거의 주장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종교에서는 무엇이라고 하는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으로 나누는데, 그래서 "나는 천국을 보고 왔다" 라고 하면서 간증집회를 열어서 돈을 빼먹고 한다는 것이다. 과거에 '내가 보고 온 천국' 이라고 해서 베스트셀러가 되고 했는데, 다들 기억이 나지 싶은데 말이다.

◈ 과학은 이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 '운동' !!

여기서 빠진 것이 있는데, 과학에서는 이 세상을 뭐라고 하느냐는 말이다. 과학은 이 세상을 운동으로 본다는 것이다. 세포의 운동이 곧 의학인데, 입자의 운동이 물리학이고 말이다. 염소새끼의 움직임이 곧 생물학이고 말이다. 과학에서는 그렇게 모든 것을 운동으로 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과학에서 인간을 무엇으로 보느냐는 말이다. 역시 운동으로 보는데, "저 사람이 온다" 라고 하면, 그것을 사회과학으로 본다는 것이다. 이 사회과학 속에 정치가 포함되는데, 그러니 정치는 이 세상을 과학적으로 본다는 말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오게 되면, "저 사람이 어떤 유권자일까?" 라고 하면서, 표로 본다는 것이다.

◈ 야, 돈이 굴러 들어온다 !!

그리고 가게에 손님이 들어오면 가게 주인은 사람이 아니라 돈으로 보는데, 그것은 학교도 역시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어느 대학교는 실제로 총장이 신입생들을 보고 "야, 돈이 굴러 들어온다" 라고 했다는데 말이다. 그렇게 모든 것을 돈으로 본다는 것이다.

만약에 시어머니가 아들의 신부감을 고른다고 하면 뭐라고 하는가? "부모님은 무엇을 하시노? 핵교는 어디까지 나왔는데? 그리고 몸은 건강하고?" 라고 하는데, 그리고 요즘 같으면 "어디 뜯어고친 곳은 없고?" 라고 하는데(ㅋㅋ), 아무리 고쳐봐야 그게 자식과는 상관이 없으니 말이다. 성형수술은 DNA에 반영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이 세상 자체를 운동으로 보는데, 어제 미처 이 부분을 하지 못했는데 말이다. 옛날의 철학이 문제가 아니라, 실감이 나는 것은 지금은 과학시대라는 것이다. 과학시대는 모든 것을 힘과 운동으로 보는데, 왜냐하면 에너지의 운동으로 인해서 힘이 생기니 말이다.

◈ 죄와 거룩 !!

그렇다면 복음은 이 세상을 무엇으로 보는가? 죄와 거룩으로 보는데, 즉 더러움과 깨끗함으로 본다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더러운데, 그 어떤 인간도 천국에 갈 수가 없는데, 더러워서 천국에 못 간다는 것이다. 선악적인 것으로 인해서 말이다.

아무리 "죽을 때까지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라고 해도, 그것도 역시 더럽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간음이고 이 세상과 짝하는 것인데, 그게 언약이 투입되면 비로소 파악이 된다는 말이다. 즉 "얼마나 이 세상을 십자가 중심으로 보는가?" 라는 것인데, 그러니 십자가에 눈이 꽂혀서 총기를 회복해야 한다는 말이다.

모든 것을 십자가 중심으로, 즉 "우리는 죄인이고 오직 주님의, 일방적인 남편의 빽으로만 그냥 천국에 가게 되었다" 라는 것이다. 그 앞에 그 어떤 이의를 달 수가 없는데, 달아도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확정된 신분이니 말이다. 그러니 막 사시고, 아까 말한 전현무 아나운서처럼 까불면서 살면 된다는 것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언약이 파고 들어왔을 때 비로소 우리는 권력에 주눅이 들어서 살아왔다는 것을, 그런 우리의 힘든 인생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권력에 매이지 말고 주님의 십자가 사건을, 그 갈보리 사건을 증거하면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6,10,18 오후 6시에 마침.
권력이 너무너무 좋아요. 
정유라, 최순실, 그리고 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