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강
이사야 53:4-6절을 봅시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게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선지자들의 특징은 이스라엘의 멸망을 촉구하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이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할 때, 이렇게 이야기하세요. “이스라엘은 특수한 나라고, 하나님은 그 나라에 숨어 계시는데, 그 나라에서 펼쳐지는 일을 통해 하나님의 면면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구약 성경을 통해 알 수 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나라 이스라엘이 멸망했습니다. 멸망하는 가운데 쏟아져 나온 자들이 선지자입니다. 야구공의 실밥이 떠지면 그 안에 실뭉치가 터져 나오는 것처럼. 이스라엘이 깨지면서 선지자가 나왔다는 말은, 그 선지자가 나와서 한 말들은 그전부터 담겨 있던 이스라엘의 성격이요, 본질이란 뜻입니다.
‘김밥 옆구리 터졌다.’는 말이 있는데, 이렇게 되면 김밥 안에 들어있는 시금치, 단무지, 우엉이 다 쏟아져 나오잖아요. 선지자들이 외치는 말들이 처음부터 이스라엘 안에 포함되어 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깥으로 나와 외치는 소리가 뭔가 하면, ‘하나님이여, 이스라엘을 멸망케 하옵소서.’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멸망은 이미 이스라엘 내에 잠복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것을 몰랐어요. 그들은 자기 나라가 영원할 줄 알았습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그 당시 유대인들은, ‘한 번 온 메시아는 그 모습 그대로 자신들과 영원히 함께한다.’고 믿었습니다. 메시아가 죽을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베드로가 깜짝 놀랐습니다. “선생님이 죽도록 우리가 방치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목숨을 다해 지켜드리겠습니다.” 베드로의 이런 생각은 구약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기 나라에 대한 오해와 똑같은 오해를 반복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하면서 거기서 선지자들이 김밥 옆구리 터지듯이 나와서, 영원히 함께 할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안에 들어 있었던 겁니다.
그들이 외치는 소리를 우리가 놓치면 안 돼요. 하박국, 스가랴, 에스겔, 요나 선지자의 외침이 우리 귀에 들어와야 해요. 그 소리가 영원한 이스라엘을 조성하는 요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계속 구약의 흐름에 대해 살폈습니다. 오늘은 마지막 시간입니다. 이 마지막 시간에 이스라엘을 과거 지사로 돌리지 마시고 그들이 이스라엘의 멸망을 촉구할 정도로 기존 형식적인 이스라엘이 담당하지 못할 분출하는 하나님의 언약의 완성이 기존 인간들의 제도와 교회 제도와 교회 지평과 이런 것으로 하나님의 교회의 본질을 덮어씌울 수가 없습니다.
누가 감히 성령의 역사를 장로교, 침례교, 감리교 이런 제도로 틀어막으려 시도하느냔 말이지요. 이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활동을 서기관, 바리새인, 사두개인이 막을 수 없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외침을 어느 누구도 잠잠케 할 수 없습니다. 말라기, 하박국, 이사야가 외치는 소리는 한결같이 이스라엘의 멸망은 이스라엘의 멸망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곧 이 세상의 멸망으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저승사자’입니다.
성신 받은 선지자가 ‘저승사자’라면, 신약 시대에 성령 받은 저와 여러분들은 ‘저승사자’입니다. 선지자들이 외치는 내용을 보면 정말 저승사자다워요. 세상에 발 딛고 사는 사람들에게 욕들을 만합니다. 하박국 3:17절을 보겠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여기서 ‘없음’이 몇 가지 나옵니까? 6가지가 나오는데 이것들은 그 당시 기초 산업의 전부입니다. 이런 것을 없더라도, 그 다음에 나오는 말씀은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이것이 저승사자 입에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얘들아, 떠나자.”는 말입니다.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해 즐거워할 것 같으면 그 쪽으로 떠나자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날 성도가 할 일은 굉장히 간단해요. 보따리 싸고 떠나면 됩니다. 여기서 또 오해하면 안 됩니다. 재산 팔고, 사업 접고 기도원으로 떠나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의 방향이 구원의 하나님 쪽으로 가야한다는 것이지요.
성도는 무화과나무 열매를 탐하지 않고, 외양간의 소 숫자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히브리서 11장에서는 ‘세상이 감당치 못할 위인들’이라고 합니다. 정말 성경은 우리에게 너무 큰 부담을 주는 것 같아요. 그냥 살기도 급급한 사람들에게 떠나라고 하니까 상당히 힘듭니다.
나는 무화과나무 열매에 신경 쓰고 싶고, 밭은 소출을 기대합니다. 이번 설교 제목은 ‘제 길로 갑시다.’입니다. 이사야 53:6절에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고 되어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제 길로 가면 됩니다.
왜 제 길로 가야 합니까? 저승사자, 성령 받은 사람이 증거할 것은 메시아와 나 사이의 연결고리에 주목하는 거예요. ‘내가 얼마나 잘났는가?’가 아니라,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어지지 않고 연결되어 있는 고리에 무엇이 담겨있고, 무엇이 쏟아지는지 보란 말이지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말씀 지키는 자기 자신에게 주목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렇게 되면, 주님 말씀에 의해 구원 받았다는 사실을 훼손하는 짓입니다. 이사야 40:6-7절에 이른 말씀이 있습니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다.’
그러면 오늘날 선지자인 우리들은 ‘나 잘났다.’고 하지 말고, 주님과 나 사이에 연결된 이사야 40장을 집어넣고 그것을 증거 하자는 말입니다. 예수님과 우리 사이의 말씀은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니고 메시아의 효과로 단단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사야 40장 말씀을 이루신 메시아가 차질 없이 약속을 이루어 구원을 완성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사야 40장 말씀을 지킨다고 하나님의 능력을 훼손하는 짓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사야 53장도 마찬가지입니다. ‘각기 제 길로 갔다’고 하면, 우리는 각기 제 길로 가면 됩니다. 그런데 제 길로 가는 성질이 뭐냐 하면, 채찍 맞기 싫어서 가는 거예요. 이것이 우리 육신의 본성입니다.
이사야 53:5절에 “그의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라고 되어 있지요. 우리는 찔리기 싫어서 각기 제 길로 갑니다. 농부, 의사, 미용사 가릴 것 없이 각기 제 길로 가요. 채찍 맡기 위해 판사하는 사람 봤습니까? 없지요. 그냥 육신의 욕망대로 살란 말이지요. 선교사, 장로, 집사 전부 그릇 행하여 제 길로 간 거예요. 채찍 맡은 것을 피해서 간 거예요. 주님 앞에 구차한 변명하지 맙시다.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5절).”고 했어요. 우리는 상하기 싫어서 도망칩니다. 내 인생이 덜 망가지는 곳으로 피해 갑니다. 그 다음에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이 말은 뭐냐? 우리가 징계 받기 싫어서 제 갈 길로 간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결정하고 선택했을 때 “이것은 내가 하고 싶어서 했습니다.”라고 말하지요.
그러나 주님은 달리 말씀합니다. ‘너는 찔리기 싫고, 상하기 싫고, 징계 받기 싫어서 그 길로 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제 길로 가는가?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5절).”라고 했어요. 우리는 채찍 맞기 싫어서 제 길로 가는 겁니다. 불편한 것, 싫은 것, 귀찮은 것, 힘든 것 등을 피해서 각기 제 길로 간 것입니다.
이런 우리를 향해 주님은 박수를 치면서 잘했다는 것입니다. “잘했어. 그것이 네 본성이야. 그렇게 해.” 만약 우리가 알아서 바른 길로 간다면 메시아의 공로를 우리가 갉아먹는 셈이 됩니다. 채찍 맞아서 목사가 되었다고요? 거짓말입니다.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 이런 가사의 찬송가가 있는데 가사가 너무 비복음적이라 우리교회는 한 번도 안 부른 찬송가입니다.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가오리다.” 거짓말입니다. 자기 명예를 위해 간 것이지 복음 때문에 간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본인은 징계를 받아서 갔다고 여깁니다.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입니다. 메시아의 공로를 갉아먹고 복음을 훼방하는 짓입니다. 이런 것을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선교사가 되어 험난한 길로 가도 그것이 메시아의 공로를 가리면 안 됩니다. 미혼 여성이 제게 물어요. “목사님, 어떤 사람과 결혼하면 좋겠습니까?” 제 답변은 이렇습니다. “키 크고, 인물 잘 생기고, 성격 좋고(후손은 DNA 영향을 받기 때문에), 그리고 아내만 챙겨주고, 돈도 좀 있는 사람과 결혼해라.”
“목사님은 왜 신앙 좋은 사람은 조건에 넣지 않습니까?” 신앙 좋은 사람과 결혼하겠다는 것은 채찍 안 맞겠다는 사전 공작에 지나지 않습니다. 즉 결혼생활 편하게 하겠다는 것이잖아요. 제가 너무 정곡을 찔렀습니까?
사람은 자기 편한대로 살려고 해요. 믿음 좋은 사람과 결혼해서 복 받으며 살면 얼마나 편하겠어요? “그럼 목사님은 제가 불신자와 결혼하면 좋겠습니까?”라고 하를 내겠지요. 불신자와 결혼한다는 것은 마귀와 사는 것과 같아요. 마귀와 결혼하려고 하면 말려야 하지 않습니까? “너도 마귀다.”
얼마나 마귀에 사로잡혔으면 예수님 이용해서 편한 결혼생활을 꿈꿨겠습니까? 신앙이 보증수표인줄 압니까?
40대 이혼한 남자분이 저한테 이런 질문을 했어요. “목사님, 제혼하면 어떤 여자와 하면 좋겠습니까?” “예쁜 여자와 결혼하세요.” 50대 남자가 물어도 같은 대답입니다. “예쁜 여자와 결혼하세요.” 60대가 질문하면 대답이 달라집니다. 왜냐? 60대는 퇴직할 때가 되었으니까 “돈 많고 젊은 여자와 결혼하세요.”라고 합니다. 이게 제 갈 길입니다.
제 갈길 따로 챙겨놓고 “주여, 신앙 좋은 여성 만나게 하옵소서.”라고 하는데, 가식입니다. 채찍 안 맞고 남은 인생 편하게 사는 쪽으로 가겠다는 속셈을 주님이 다 아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해한 것이 뭔가?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만든 나라이기에(교회는 하나님이 만든 것이기에, 나는 하나님 믿는 자이기에) 절대로 하나님이 멸망시키지 않을 것이라는 오해를 했던 거예요. 그들은 메시아와 친하게 지낼 생각만 했지 메시아가 나를 폭파시킬 것이란 생각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선지자는 뭐라고 합니까? ‘무화과나무, 포도나무 열매에 신경 쓰지 마라.’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저승사자입니다. 이 세상을 떠나라는 거예요. 이게 선지자의 외침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잘 믿었어요. 열심히 섬겼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바알’을 섬긴 거예요.
바알을 섬긴다는 것은 뭐냐? 착하면 복 받고, 나쁜 짓하면 저주받는다는 것입니다. 바알은 십자가가 없어요. 성심 성의껏 노동하면 그 댓가를 돌려받는 것이 바알 종교입니다. 바알은 모든 종교를 말합니다. 바알의 아버지가 ‘엘’인데, ‘엘’은 하나님입니다. 언약 없는 사람들이 신을 지칭하는 하나님입니다. 이슬람 사람들에게는 ‘알라’, 한국 사람에게는 ‘조물주’지요. 가나안 종교에서는 ‘엘’이라 하고, ‘엘’의 아들이 ‘바알’입니다. 희망을 주는 신이 ‘바알’입니다.
이사야에 나오는 하나님의 종은 바알 종교에 의해서 찔림을 당하고 상함을 당하고 징계를 받고 채찍에 맞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벌이는 그 연극에서 예수님만 당하는 것이 아니고 택한 백성이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게 뭔가 하면,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가는 것’입니다.
탕자는 아버지 재산 가지고 가출을 해야 돼요. 가출 안 한 큰아들이 나빠요. 성경은 간단합니다. ‘네가 성경을 해석하지 말고 너는 메시야가 해석한 결과물로 남아 있어라.’는 것입니다. 전혀 어려운 것이 없습니다. 자신이 지키려고 하니까 어렵지요. 그냥 시키는 대로 제 갈 길로 가면 주님이 때리는 채찍을 맞게 됩니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안위(인도)하시는 것을 깨닫게 되지요. 그런 식으로 끌려가면 됩니다.
천국은 100% 예수님 공로로만 가는 곳입니다. 주님이 채찍을 이야기하는 것은 고난 받으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 99,9%의 사람들이 이렇게 해석합니다. 제가 질문하겠습니다. “고난 받는 것이 위대합니까, 제 갈 길로 가면서 주님 보는 것이 위대합니까?” 주님과 연결된 것을 보는 것이 위대한 진짜 선지자입니다. 고생하고 아픈 것만 고난입니까? 잘 먹고 잘 사는 것도 고난입니다.
이사야 53장은 내가 지키는 것이 아니고 이 말씀을 주신 메시아가 홀로 다 지켰음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미용사, 어부, 변호사, 장사 등 무엇을 하든지 아버지의 사랑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선교하는 것이 주님 일에 동참하는 것이 아니고 ‘제 갈 길로 가는 것’ 즉, 채찍 맞기 싫어서 도망치는 요나의 모습인데, 그것마저 주님이 이루시는 구원의 연출에 엑스트라로 넣어 주시니까 우리 자리가 얼마가 귀한지 몰라요.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가는 이 자리가 이사야 53:6절에 의하면 메시아를 보여주는 귀한 자리가 됩니다.
말라기 4:6절을 보겠습니다.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데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하늘에서 조치가 떨어졌어요. 엘리야를 보내겠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아서 우리 마음을 하나님께 돌리면 안 되고, 돌이키게 하시는 메시아에게 모든 것을 맡겨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이 약속을 다 이루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엘리야가 와서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 자녀의 마음을 아비에게 돌이키게 한다’는데, 그 엘리야의 자리에 세례 요한이 왔어요. 여기에서 문제가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엘리야냐, 아니면 그 뒤에 오시는 예수님이 엘리야냐 하는 문제가 등장합니다. 누가복음 1:17절에 보면, 세례 요한을 엘리야라고 했습니다. 정확히 말해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엘리야 됨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여준 거예요.
세례 요한이 말라기 4장에 예언된 역할을 하고 있는데 ‘너희들이 얼마나 악독한지 그 엘리야를 죽었다.’ 그렇다면 말라기 4:6절은 취소되는가? 천만의 말씀. 세례 요한이 죽임 당했다는 그 양상이 그대로 예수님이 옮겨집니다. 유대인들은 말라기 4:6절을 믿습니다. 그래서 광야에서 엘리야가 등장하기를 기다렸습니다.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외쳤을 때, “당신이 오실 메시야입니까?”라고 물었잖아요. 그들은 자신이 엘리야를 반길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고 엘리야 오기를 학수고대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세례 요한)가 와서 말하는 내용은 예수님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민중들은 세례 요한을 엘리야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광야에서 생활했고 복장도 과거 엘리야의 복장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여하간 세례 요한이 엘리야인지 아닌지 왔다 갔다 했는데, 그 엘리야를 백성들이 죽였을 때 그동안 자식의 마음이 아비에게 돌아오지 않았던 이유가 폭로된 거예요. 유대인들은 성경을 믿기 때문에 ‘엘리야가 온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이 엘리야처럼 왔잖아요. 그 때 사람들은 요단강에 가서 세례를 받고 난리가 났어요.
그런데 그 엘리야(세례 요한)가 살해당했지요. 그러면 그들이 기다린 엘리야에 내용이 하나 추가가 돼요. 오는 엘리야도 살해할 정도로 우리의 마음은 아비에게 돌이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이 추가됩니다. 엘리야 1을 보내도 죽이고, 엘리야 2를 보내도 죽이고. 그들은 엘리야가 와도 죽일 정도로 그들 마음은 자력으로 아버지께로 돌아올 수 없습니다. 예수님님께서 말라기의 예언을 성취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취지가 뭐냐 하면, “나는 오는 엘리야다. 나는 메시야다. 믿어라.” 이것이 아니고, “너희들은 메시아를 알아볼 수 없다. 그리고 내가 아니면 절대 너희들 마음은 아버지께 돌아올 수 없고, 내가 아니면 절댈 아버지 마음을 너희에게 돌이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위해 채찍 맞으신 겁니다. 유대인들의 메시야 사상은 채찍이 필요 없고, 징계가 필요 없고, 상함이 필요 없습니다. 그냥 기다리다가 오시면 만나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에 의하면 ‘자기 양들은 각기 제 길로 가는 것’이 메시아의 임무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가 탕자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메시아가 할 일속에 포함되어 있어요.
채찍 맞기 싫어서 도망치며 각기 제 길로 가는 것은 너무 자책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마지막 시간에 하는 거예요. 이것을 자책한다는 것은 주님 공로를 또 갉아먹는 셈이 되니까요. “저는 목사님 말씀대로 안 하고 믿음 좋은 사람과 결혼하겠습니다.”라고 하는데, 그렇게 하세요. 그러나 그것 자체가 주님의 일은 아니고 메시아와 관련된 주의 일입니다. ‘그릇 행하여 제 갈 길로 가는 것’으로 메시아의 업무 한 모퉁이를 담당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3:6절에 보면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라고 합니다. 그러니 심고, 물 주세요. 단 이것이 자라나는 일과는 무관합니다. 심고 싶어서 심었고, 물을 주고 싶어서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구원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채찍 맞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징계가 아닙니다.
주께서 인정하는 채찍과 징계는 자신이 몽땅 다 가져가시고, 그분의 징계 받음과 채찍 맞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가 얼마나 철없이 제 멋대로 살아가는가를 세팅하듯이 ‘나는 제 갈 길로 갔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성령 받은 선지자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제 갈 길 가는 인간이 무화과나무 열매를 걱정하고, 감람나무 소출을 염려하겠습니까?
그런데 염려하지요? ‘이런 것을 걱정할 수밖에 없는 우리를 위해서 채찍 맞으신 구원의 하나님을 더 사랑합니다.’ 이것이 사랑의 기쁨입니다. 제 갈 길로 갔는데 사랑의 기쁨을 맛보게 되고, 채찍 맞으신 분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어디에 살더라도 사랑의 기쁨을 잊지 마세요. 그러면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스라엘 백성들의 오해가 아담의 자손인 우리가 어찌 그리 똑같이 되풀이하고 있는지 한심할 뿐입니다. 잘난 척하면서 주님 앞에 다가서고, 주님 때문에 고생했다고 다가서고, 주님 고난에 동참했다고 다가선것 다 오해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채찍을 담당하실 분은 오직 주님뿐임을 부끄럽지만 인정케 하시고 그 채찍의 효과로 우리가 메시아으 한 직분을 금방지게 맡게 된 것을 세상의 어떤 것보다 더 귀한 줄 알게 하시고 거기서 주님과의 사랑의 기쁨이 늘 쏟아져 나오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