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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흐름14강 160918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10. 13. 18:56
2016-10-13 18:09:47조회 : 4         
뉴저지아카데미강의-구약의 흐름 14강이름 : 서경수 (IP:211.220.22.191)

14강

다니엘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묵시 세계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람 사는 동네에 유령이 나타나면 누가 괴롭습니까? 사람이 괴롭지요. 그래서 유령이 나타나는 것을 막기 위해 장례식을 치러요. 장례식은 고인을 묻어서 더 이상 돌아다니지 말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묻고 얼른 산 사람들은 그 자리를 떠나지요.

그러나 묵시 세계에서는 관점이 바뀝니다. 유령들이 사는 동네에 사람이 오면 유령들이 놀라 자빠집니다. 다니엘은 그 이야기입니다. “너희들은 사람으로 보이냐, 난 존비로 보인다.” 이게 다니엘이에요. 왜냐하면 다니엘은 국가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난 뒤의 이야기입니다. 그럼 이스라엘이 멸망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언약 안에서 죄를 지으면 그 사람은 죽은 자입니다. 죽은 자를 받아들인 국가가 바벨론입니다. 바벨론은 죽은 자를 받아들이면서 힘 센 자기 나라가 약한 이스라엘 백성을 포로로 잡아왔다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잡혀 온 다니엘과 세 친구는 존재적 관점이 아니고 언약적 관점이기에 “이 유령들아! 언약이 있는 우리가 산 자들이고 너희들은 유령이야.” 이렇게 됩니다.

언약적 관점은 이 세상 관점보다 범위가 넓어요. 이 세상 위에서 세상을 쳐다봅니다. 그러면 누가 누구를 잡았어요? 바벨론 사람들은 마르둑 신을 믿기에 마르둑 신이 여호와를 이겼다고 자부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왔다고 생각하는데, 그렇다면 온전히 잡아야지요.

그런데 유령들이 산 사람 때문에 괴로워해요. 이게 구약 다니엘입니다. ‘디 아더스(The Others)’라는 영화를 보면, 여자와 아이 둘이 외딴 저택에 살아요. 가끔 부동산 중개업자가 집을 보러 옵니다. 부동산 업자가 보기에 그 집은 비어있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집을 보러 오면 세 명의 유령들이 귀찮아해요.

유령이 왜 그 집을 떠나지 않았는가 하면 엄마가 우울증이 걸려 아이 둘을 죽이고 본인도 자살했는데, 자신이 자살했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서 계속 그 집에 머무는 겁니다. 영화의 주제가, 인간은 인정치 아니하면 그 지역을 떠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씩 정리하면서 삽니다. 그런데 정리되지 않으면 찝찝해서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아요. 추억과 기억에 사로잡힌 인간의 한계를 그 영화가 보여주는 겁니다.

맨손으로 고슴도치를 잡을 수 있습니까? 고슴도치의 가시에 손이 찔립니다. 바벨론에서 다니엘과 세 친구를 잡았는데 그들에게는 바벨론의 규칙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다니엘 1장부터 전개되는 이야기에 보면,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지혜로운 자로 뽑혀 느부갓네살 왕을 보위하기 위해 특별 장학생으로 교육을 받잖아요.

그래서 그들에게는 산해진미가 제공되는데 다니엘과 세 친구는 산해진미 대신 채식을 요구합니다. 관리인은 걱정합니다. 왕의 신하가 될 인재를 교육하면서 좋은 음식을 먹여 건강을 유지해야 하는데 그 음식을 거절하고 채식을 먹겠다고 고집하니 당연히 걱정을 하겠지요. 그 때 다니엘은 제안합니다. ‘10일 동안 채식을 먹게 한 후 산해진미를 먹는 자들과 비교해서 자신들의 얼굴이 야위고 초라해 보인다면 그 때는 당신 뜻대로 하소서.’ 라고.

그런데 그들은 채소만 먹었는데 산해진미를 먹은 자들보다 더욱 얼굴이 윤택하고 빛났습니다. 벌써 이상한 조짐이 발생하지요? 과연 누구 산 사람이고 누가 유령인지 혼돈이 발생합니다. 그러다가 2장부터 이야기가 급작스럽게 바뀌기 시작합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했을 때 이스라엘 외부의 세계가 과연 역사의 의미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한 상태에서 이스라엘 외 다른 지역의 역사가 자체적으로 의미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자체로는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왜 그들의 역사는 흘러가는가? 그게 이스라엘의 묵시적 언약 완성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역사는 이스라엘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는 방편에 예속된 채 움직이는 역사입니다.

‘역시 여호와는 만유의 주야. 그분 언약대로 모든 것이 움직이고 있어.’라는 것을 증명해 줄 역사기 때문에 그들 고유의 역사는 없고, 이스라엘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속성을 보여주는 역사로 진행됩니다. 따라서 역사가 진행된다는 점에서는 같아요. 처음에 바벨론, 다음에 메데 바사, 그리고 헬라 마케도니아, 그 후 로마. 이것은 그냥 흘러갑니다.

로마 이후에는 왜 없습니까? 다니엘 예언이 마지막 때까지만 있거든요. 그럼 마지막 때라면 2016년 브리질 리우 올림픽도 나와야 하지 않습니까? 다니엘에 나타난 언약적 의미에서의 마지막은 언약이 다 성취다면 끝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등장할 때까지만 예언되어 있습니다. 그 때까지만 역사적 의미가 묵시에 종속되었다는 조건 하에서만 의미가 있어요.

그냥 역사는 의미가 없고 묵시의 종속 하에서만 의미가 있습니다. 그럼 역사의 의미는 역사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못 찾습니다. 언약, 묵시를 거쳐야 의미가 있습니다. 언약의 완성 세계가 묵시 세계입니다. 묵시와 언약의 완성이 뭐냐? 카메라가 있지요. 이게 묵시라면 언약은 삼발이입니다. 묵시와 언약의 접점에 다니엘과 세 친구가 포진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을 하나님이 ‘인자’라고 불러요. 그러면 묵시, 언약의 완성이 구체적으로 뭔가? 다윗 언약의 완성입니다. 지닌 시간에 이야기했어요. 예레미야 31:33절. 옛언약은 모세에게 율법으로 주어졌지만 새언약은 우리 마음속까지 들어옵니다.

에스겔 37:25을 봅시다. “내가 내 종을 야곱에게 준 땅 곧 그 열조가 거하던 땅에 그들이 거하되 그들과 그 자자손손이 영원히 거기 거할 것이요 내 종 다윗이 영원히 그 왕이 되리라.” 다윗은 이미 죽은 사람입니다. 여기서 다윗은 다윗의 자손이 온다는 것입니다.

26절에 “내가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워서 영원한 언약이 되게 하고” 이제 언약 없습니다. 다윗의 자손이 이 땅에 와서 아버지와 맺은 언약을 이루면 더 이상의 언약은 없습니다. 그것으로 완성이 되는 거예요. 완성이 되면 어떻게 되는가?

28절 “내 성소가 영원토록 그들의 가운데 있으리니 열국이 나를 이스라엘을 거룩케 하는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나님의 거주지가 우리들입니다. 그래서 천국에는 보좌가 두 개 있어요. 어린양의 보좌와 하나님의 보좌. 그러니까 하나님은 결국 자기 피조 세계에 자신의 거주지를 마련하시려고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진행시킨 거예요.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하나님이 피조 세계에 자신의 거주지를 마련하시려고 아들에게 십자가를 지게 했습니다. 이것이 다윗입니다. 다윗의 자손으로 오면 묵시 세계는 완성되는 겁니다. 그런데 다니엘에서는 고맙게도 완성의 세계가 미리 다니엘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물론 상징이지만.

다니엘은 겁을 내면 안 돼요. 이미 묵시 세계가 다니엘에게 온 겁니다. 다니엘 7:9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보았는데 왕좌가 놓이고 옛적부터 항상 계신이가 좌정하셨는데 그 옷은 희기가 눈 같고 그 머리털은 깨끗한 양의 털같고 그 보좌는 불꽃이요 그 바퀴는 붙는 불이며” 이렇게 나오다가 13절에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기 ‘인자 같은 이’가 나오는데, 다니엘에게 ‘인자’라고 불렀고, 예수님이 자신을 ‘인자’라고 했지요. 그럼 예수님은 하늘나라에서 이 땅에 일하러 오신 거예요. 그것을 지금 다니엘은 미리 예고편으로 자신이 표징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한 후에 이방인의 역사는 자체적으로는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멸망이 곧 이스라엘의 구원입니다. 이스라엘이 구원 되면 묵시 세계가 됩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은 뭐냐? 역사라는 지평을 이어오다가 멸망과 동시에 이스라엘 역사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그 이스라엘과 함께 있던 주님의 언약은 묵시로 가는 거예요.

떨어진, 멸망한 여기에 인자, 다니엘이 들어가 있는 거예요. 멸망한 자기 백성 속에 인자가 있으니까 인자가 유일한 통로가 되어 묵시 세계, 언약이 완성되는 그 상황과 수시로 연락을 취하는 겁니다. 연락을 취하되 다니엘이 먼저 요청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반드시 하나님께서 기이한 현상들을 다니엘과 세 친구 주변에 일으키십니다.

묵시의 지점을 지웁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이 보기에 묵시 세계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다니엘을 아무리 살펴봐도 묵시가 없어요. 예수님이 안 보입니다. 하나님이 안 보여요. 그러면 어떻게 하는가? 점선으로 삼발이를 그려야 해요. 그리고 점선으로 완성세계를 그려야 되겠지요. 이것을 요한계시록에서는 ‘환상’이라고 합니다.

존재론적 관점에서 환상은 없어요. 그냥 환상일 뿐이에요. 그런데 언약적으로 보면 환상이 현실이고 역사가 꿈같은 환상입니다. 완전히 바꿔서 살아야 합니다. 성령이 아니면 이 사실을 절대 알 수 없습니다. 그럼 이 세상은 꿈이 되는 거지요. 꿈의 특징은 갇혀 있다는 겁니다.

잠을 잘 때는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을 못해요. 잠에서 깨야 알지요. 어쨌든 꿈에 아들이 나쁜 놈에게 끌려갑니다. 그래서 아들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고함을 쳐도 소리가 나지 않고 손을 내밀어도 움직이지 않는 거예요. 얼마나 답답하겠어요? 그러다 잠에서 깨면 식은 땀이 나면서 꿈을 꾸었다는 것을 알지요.

꿈은 갇혀 있는 것입니다. 소리를 질러도 안 들려요. 그래서 인간은 환상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환상이 있으면 갇혀 있지만 환상이 없다면 제 마음대로 하지요. 세상이 전부입니다. ‘보이는 세상이 모두다.’ 이게 과학적 사고방식이죠. 이것을 학생들이 지금도 열심히 배우고 있습니다. 학교에서 교사가 묵시를 이야기하면 교사 자격증 박탈당합니다.

제가 질문을 드립니다. 다니엘이 핍박도 받고 어려움을 당하는데 그 환상을 다니엘이 철거시킬 수 있을까요? 안 됩니다. 그 이유는 다니엘이 지금 꿈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님 쪽에서 연락을 취하게 되면 기이한 현상이 벌어집니다. 보고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지요. 점선을 지우겠습니다.

느부갓네살이 명령을 합니다. 박사들 다 불러 모아, ‘어젯밤에 내가 꿈을 꾸었는데 그 꿈을 해석하라’고 합니다. 아무리 왕이지만 이런 횡포가 어디 있습니까? 학식이 높고, 지식이 풍부한 박사라 할지라도 왕이 꾼 꿈을 알 수가 없지요. 그래서 신하들이 꼼수를 씁니다. “왕이시여, 꿈을 말씀하시면 저희들이 해몽해 드리겠습니다.”

“너희들이 신과 교류한다는 박사들 맞지?” “예” “그럼 내 꿈을 알아내고, 또 해석도 해.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다 죽일 거야.” 그래서 박사들은 꼼짝 못하고 다 죽게 되었어요. 질문합니다. 다니엘은 왕의 꿈을 알았을까요, 몰랐을까요? 몰랐습니다. 그래서 왕의 명령에 박사들이 위기를 맞은 것뿐 아니라 다니엘에게도 위기였습니다.

만약 우리가 다니엘 입장에 있었다면 어떻게 했겠어요? “하나님, 제가 무슨 죄를 지어 이런 환경을 만나게 하십니까? 그냥 착실하게 고위 공무원으로 살게 해 주시옵소서.” 이 이런 기이한 현상이 일어납니까? 이것을 그림으로 그리겠습니다. 수평세계에 다니엘 중심으로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데 수평적으로 보면 무늬가 발생되는데, 수직적으로 보면 전선이 활동하고 있는데 이것을 밟아 수평으로 만드니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는 겁니다.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했을 때 사람들은 수평적 능력으로 보았지만 사실은 수직적, 묵시적 하나님께 기도했어요. 기도하고 오병이어로 무리들을 먹였어요. 예수님만이 그 당시 묵시적 접점으로 이동하고 있고 제자들은 멋도 모르고 예수님 따라다니면 성공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꿈같은 역사적 존재는 의미 없어요. 인자가 행하는 역사적 의미만 묵시로서의 의미가 있지, 그 외에는 없어도 관계없어요. 주님은 묵시화 된 역사를 안고 다시 성령으로 오시니까, 우리는 양동이에서 불이 쏟아지듯 성령을 받으니 모든 것을 존재적관점이 아닌 언약적 관점으로 보게 된 거예요.

언약적 관점에서 보니 이 세상은 꿈이고,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는 다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지 아버지께로 온 것이 아니라(요일2:16).’는 말이 이해가 되고, 그리고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골3:3).”는 말씀이 성도에게는 납득이 되는 거예요.

사도의 기록은 묵시적 기록입니다. 교회 부흥시키라고 준 기록이 아닙니다. 특이한 표징이 되게 하기 위해 준 말씀입니다. 그 말씀 듣고 갑자기 머리 기르고 도포입고 돌아다니지 마세요. 연락은 주님이 취합니다. 내가 억지로 예수님 흉내 낼 이유가 없어요. 저는 개량한복 입고 짚신 신고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수상합니다.

나이아가라 폭포에 가니까 온 가족이 특이한 복장을 하고 왔는데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일종의 문화입니다. 왜 인위적으로 티를 냅니까? 천주교 신부, 수녀들이 이상한 옷을 입고, 목사가 까운 입고, 중이 머리를 깎고 폼을 내는 것은 불신앙을 보여주는 거예요. 정말 믿는 것이 없기 때문에 믿을만한 상품 마련해서 돈 내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계절 따라 커튼 바꾸고, 행사를 벌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감추기 위한 위선적 행동입니다. 절기 지킨다고 믿음이 생깁니까? 못 믿을 상황이 올 때 믿음 있고, 없음이 드러납니다.

언약적 안목에서 보면 이 세상은 멸망 받을 곳이요 적그리스도의 세상인 것이 보입니다. 이것이 보이는 사람은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제가 만약 신학교를 세운다면 중, 사비이 교주, 이단 지도자들을 불러 강의시킬 거예요. 그래서 그 강의에 대해 성경적으로 비판하라고 요구할 거예요. 제대로 비판하면 성령 받은 사람이고 그 강의 듣고 넘어가는 사람은 예초에 성령 안 받은 사람이기에 신학교에 계속 다닐 이유가 없는 자입니다.

설치지 말고 가만히 있으세요. 성도는 묵시적 존재이기에 가만히 있어도 이상한 현상들이 주위에서 벌어지는데 그것을 통해 절망을 느낍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이 일을 벌일 때마다 죽은 자가 됩니다. 아무 능력이 없습니다. 자기 꿈도 잊어버리는데 남의 꿈을 어떻게 알고 해석을 합니까?

하나님은 극적으로 다니엘에게 느부갓네살의 꿈과 그 해석을 알려주십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꿈을 해석한 후 왕에서 박사들을 죽이지 말라고 요구합니다. 왜냐? 심판할 왕이 심판할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역사는 자체적으로 의미가 없기 때문이지요. 죽인다고 정의고, 안 죽인다고 악이 되는 것이 아니에요.

김정은이 자기 부하 70명 죽여도 의미 없고, 살려도 의미 없어요. 의미 없는 인간이 의미 없는 처형을 했기 때문에 죽은 사람을 동정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들도 인민들의 피를 빨아먹은 자들입니다. 김정은이 부하를 죽인 것은 악인이 악인을 친 거예요. 세상은 하나님 허락 없이는 처형도 성사될 수 없습니다.

멸망당한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갔지요. 이 말은, 바벨론이 멸망당할 제국이란 것입니다. 따라서 멸망당할 제국이 멸망하는 것은 지옥으로 가기 위한 것이지만, 멸망당할 제국에 포로 잡힌 이스라엘은 구원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다른 사람과 똑같은 죽음이지만 그 죽음이 묵시적 죽임인 것을 믿으면 그 사람이 바로 다니엘과 같은 인자에 속한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양 옆에 같이 달린 자들이 있었지요.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한 사람은 구원 받고, 한 사람을 지옥 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쪽은 언약적 안목이었고, 다른 한쪽은 역사적 안목이었습니다. 주께서 강도되게 했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구원 받고, 내가 살다보니 강도되었다고 믿는 역사적 지평은 가진 사람은 지옥 갑니다.

왜냐? 역사적 안목이기에 예수님께 “당신이 하나님 아들이라면 날 구원해 봐? 그러면 믿어줄게.” 이렇게 나옵니다. 이런 사람은 묵시적 존재로 살겠어요, 역사적 존재로 살겠어요? 역사적 존재인 자신을 위해 역사적 존재인 예수님을 이용한 것이지요.

참 신자라면 교회 와서 기도할 때 “주여, 죽여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할까요, “주여, 살려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할까요? 죽여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너무 심하고,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라고 기도해야지요. 그러면 주님의 응답은 이렇게 나올 것입니다. “이미 내가 너를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어.”

성도는 설교를 들을 때 주께서 주시는 것으로 감사하고 만족합니다. 그래서 설교자가 ‘~하라.’고 설교하면 안 됩니다. ‘믿으세요.’라고도 하지 마세요. ‘믿게 될 것입니다.’라고 해야지요. 제가 강의 중에 헌금에 대해 이야기를 했는데 그 때 녹음이 안 됐어요. 녹음기고 고장이 나서.

“헌금을 할까요, 말까요?”라고 묻는 분이 계신데, 제 답변은 요한 1서 2:26절 말씀처럼 성령이 가르치는 대로 하세요. “누구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 성령의 지시를 받는 자가 묵시적 존재이고, 이 모습을 미리 보여주는 자가 다니엘입니다.

다니엘이 느부갓네살의 꿈을 해석해 줍니다. 그런데 그 꿈이 느부갓네살 개인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느부갓네살 개인 안에 지구 역사의 미래가 다 들어 있었어요. 이것을 ‘보편적 단독자’라고 합니다. 놀라운 일이지요? 개인 안에 남아 있는 이방인의 역사가 다 포함되어 있어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는 ‘큰 성 바벨론’이란 표현을 써요.

지금 느부갓네살 왕은 다니엘과 상대하잖아요. 그런데 다니엘의 이름이 뭡니까? ‘인자’지요. ‘인자’는 주님입니다. 보편적 단독자에요. 그러니까 모든 인구를 축소하게 되면 1:1입니다. “뱀의 후손 나와.” 여자의 후손을 호출합니다. 타락 없는 구원은 없어요. “뱀아, 내 발꿈치 물어!” 뱀이 물었습니다. 이긴 줄 알았지요.

악이 승리하게 이스라엘이 패배할 줄 알았지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여자의 후손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여자의 후손 손에 해머가 들려 있는데 뱀이 발꿈치를 무는 순간 뱀의 머리를 때립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고(물리고) 부활하신 거예요.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을 보니까 흔적이 있습니다.

도마가 하는 말이 “못자국, 창자국을 보아야 믿겠습니다.”라고 했지요. 주님은 “봐라” 하시면서 그 자국을 보여줬어요. 사건을 흔적을 보여준 것입니다. 부활은 신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새겨진 사건의 반복이 부활의 취지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3장에서는 “십자가가 너희 눈앞에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라고 했지요.

십자가 사건은 오래 전에 일어났고 이제는 다 끝났습니다. 그런데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고 합니다. 이 세상의 십자가를 근거해서 심판의 대상이 됩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묵시가 역사를 잡는데 바벨론 왕은 착각하기를, 자기가 다니엘을 포로잡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언약적으로 보면 바벨론이 다니엘을 보호하고 모시고 있는 거예요. 다니엘을 묘목, 혹은 모판처럼 모시고 있어요. 역사가 묵시를 모시고 있다는 사실을 다니엘은 잠시 잠깐 알았어요.

“다니엘아, 네가 믿는 하나님의 최고다. 나는 꿈 때문에 잠도 못 잤는데 네가 내 꿈을 알게 해 주었구나.” 느부갓네살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해서 회개한 것은 아닙니다. 이 말을 듣고 다니엘은 “나는 역시 묵시적 존재야!”라고 생각했겠어요, 아니면 “휴, 살았다.”고 하면서 안도의 한 숨을 쉬었겠습니까?

“하나님, 이런 장난 다시 하시면 정말 곤란합니다. 제발 이런 장난하지 마세요. 죽는 줄 알았습니다. 주님이 꿈을 알려주지 않았다면 나와 친구들, 그리고 박사들이 다 죽었습니다.” 절망 속에서 비로소 구원하시는 주님을 체험케 되었습니다. 이런 사건이 한 번으로 끝이 아니고 또 옵니다.

느부갓네살이 정신을 차리면 좋겠는데 아닙니다. 또 금신상의 꿈을 꾸었고, 그 꿈을 해석하라고 합니다. 다니엘이 또 나섭니다. “이것은 왕의 시대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앞으로 오는 모든 세계를 말합니다. 왕이여, 죄송하지만 이 나라는 망합니다. 망하지만 기뻐하소서. 왕의 나라보다 못한 나라가 일어납니다.” 이것이 열역학 제 2법칙입니다.

갈수록 이 세상 에너지의 질은 떨어진다는 법칙을 19세기 말 물리학자들이 발견했어요. 쓸 만한 에너지가 갈수록 고갈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무질서의 법칙’이라고도 합니다. 세상은 갈수록 무질서화 된다는 것입니다. 무질서화 된다면 그 원인자가 밝혀져야겠지요.

바다와 육지의 경계고 깨집니다. 바다에서 뭔가가 올라옵니다. ‘아르케’ 원초적 괴물이 올라와요. 이 괴물은 영적입니다. 인간은 육적입니다. 육은 육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영적 싸움터를 배경으로 해서 아담이 창조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나오는 괴물의 형태가 이 땅에서는 볼 수 없는 것입니다.

땅에는 없고 바다에서 올라온 괴물이 이 땅을 정복했다는 것은 이 세상은 역사의 한계가 드러났고 이제는 역사의 바탕이 되는 묵시 세계가 역사 세계를 완전히 뒤덮었다는 뜻입니다. 육지의 사람들이 근원적인 짐승에 대항할 힘이 없어요. 그러면 사단의 세력이 시키는 대로 해야지요.

그런데 이 이야기는 묵시적 존재인 다니엘에게만 연락이 왔는데, 이 이야기를 알아듣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묵시적 존재가 되어야만, 즉 성령이 임한 자에게만 가능한 일입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감춰진 비밀입니다.

짐승이 땅을 정복했습니다. 이러면 판이 커졌어요. 사람에 의해서 움직이던 역사가 원래는 악마에 의해 움직인다는 것이 확인된 것입니다. 그 짐승의 모양은 어떻습니까? 하이브리드(hybride)입니다. 혼용체이요. 사자인지 독수리인지 애매합니다. 질서 잡힌 인간 세계의 바탕은 무질서입니다. 그래서 땅에 있는 인간들의 삶의 의미는 찾을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왜 사는 지, 왜 태어났는지 답변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질문만 했지 평생 답을 모르는 채 죽었습니다. 모든 철학자, 과학자는 소크라테스의 후손들입니다. 천문학자가 별이 몇 개 인지 알지 못합니다. 지금까지 발견된 별만 알지 그 외에는 모릅니다.

세상은 에너지로 구성되어 있는데 에너지가 제로(0)인 것보다 더 떨어지는 영역이 있어서 거기서 새로운 물질이 창조된다는 것이 양자 물리학의 결론입니다. 이것을 ‘힉스 장’이라 하는데, ‘힉스 장’에서 최초의 질량이 나온다는 것을 발견했어요. 이것은 과학인지 신화인지 분간이 안 됩니다.

그런데 물리학자는 이것에 대해 규명을 못해요. 왜 떨어지는지 몰라요. 느부갓네살 신하들 같아요. 이들은 묵시 세계를 몰라요. 묵시 세계는 센드위치 같아요. 위에는 완성된 세계가 있는 반면 이 지상에는 바다가 땅을 정복하니까 결국 인간과 인간의 전쟁이 아니고 배후에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이 벌이는 전쟁이 남은 역사를 진행합니다.

그 역사를 진행하면서 악마의 세계도 뚜렷이 드러나면서 더불어 메시아도 뚜렷하게 가까이 오는 거예요. 심판주가 나타날 때가 가까이 온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기 의미를 모르는 채 이유도 없이 왔다 갔다 하는 시대에 메시아가 옵니다.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채 살아갈 뿐입니다. 자기 욕망에 휩싸여서.

이런 엉망진창 짐승의 세계에서 유독 셋별처럼 떠오르는 것이 있어요. 그것이 바로 예수님 말씀입니다. 셋별은 캄캄한 밤에 떠오르지요. 어둠이 짙을수록 셋별을 더욱 빛납니다. 그래서 택한 백성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어둠의 시대에 ‘인자’같은 역할을 하라고 하는 겁니다.

두 번째 이벤트가 뭔가 하면, 느부갓네살 왕이 우상을 만들어 놓고 모두에게 절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 다니엘 세 친구에게 우상에 절하지 않았습니다. 절하지 않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들은 왜 난데없이 우상에게 절해야 하는 상황을 만드셨는지 모르는 거예요. 하지만 자신들의 역할은 이 바벨론에서 언약의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왕의 명령을 거절한 거예요.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시작된 일이라면 마무리도 언약대로 하실 것임을 믿고 다니엘 세 친구들은 우상에게 절하지 않았고 그 죄로 불속에 던져졌습니다. 이 상황을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해 봅시다. 이런 일이 지금도 일어납니까? 매일 일어나지요. 성도들의 입에 달린 말이 있어요. “그리 아니하실 지라도 --”

우리의 매일의 삶에 절망이 밀물처럼 밀려오고 감사가 썰물처럼 나가는 그 경계선에 우리가 지금 놓여 있다는 뜻입니다. 다니엘과 똑같은 처지입니다. 내일 또 깜짝 놀랄 일이 있을 거예요. 주님은 항상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왜냐? 우리로 하여금 역사적 존재로 희석되지 말고,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생의 자랑에 매료되지 말라고.

어쨌든 내일 일은 난 몰라요. 다만 대비를 해야 돼요. 어떤 깜짝 놀랄 일이 있더라도 그것은 내가 지금까지 하지 못한 감사가 나오도록, 묵시적 존재로 세상을 언약적으로 볼 수 있도록 일을 일으키십니다. 내일은 역사 속에 묵시로, 수직적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은 자기 그림자 밖에 몰라요.

“엄마, 오늘도 100점 맞았어.” 100점 맞았다고 천당 갑니까? 아니지요. 그런데 얘들은 그것밖에 몰라요. “여보, 나 부장으로 승진했어.”라는 말을 들은 성도는 ‘주님이 또 사건을 일으키셨구나.’ 이렇게 받아들입니다. “부장되면 골치 아픈데 주님이 시키셨으니 감사함으로 감당하겠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모든 것이 다니엘 세 친구처럼 불속에 들어가는 일입니다. 깜짝 놀랄 예상 못한 일들. 하지만 그것은 감사로 이어지게 하는 주님의 사건인 것을 약속 속에 있는 사람은 알지요. 그리고 언제 이곳을 떠날지 모르지만 늘 떠날 준비를 하며 살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