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강
지난 시간에 하다 만 이야기를 계속하겠습니다. 에스겔 24:15-18절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에스겔에게 ‘네 눈에 기뻐하는 것을 쳐서 빼앗으리라. 그러나 너는 슬퍼하거나 울거나 눈물을 흘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처음에는 이게 뭔지 몰랐는데 나중에 보니까 에스겔의 아내가 밤에 죽게 됩니다.
아내가 죽었는데 왜 하나님은 울지 말라고 하시는가? 에스겔은 인자입니다. 인자는 장차 오실 예수님의 호칭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일컬어 ‘인자’라고 하셨는데, 이 표현 속에 에스겔 24장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에스겔 24장 말씀을 풀어야 우리가 상상한 하나님이 아니고 참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에스겔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했고, 예수님에게는 성령이 임했지요. 그러면 에스겔과 예수님이 연결되는 고리에 우리가 뛰어드는 셈이 돼요. 에스겔도 보고 예수님을 보면서 ‘아, 이런 기능이 예수님의 일이구나.’ 하면서 우리는 에스겔과 견주어 예수님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먼저 해야 할 것은, 왜 하나님께서 에스겔이 기뻐하는 것을 빼앗고 슬퍼하지 말라고 하셨는지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 교리 중 가장 기본적인 것인데, 제가 질문하겠습니다. A, B 두 사람이 있는데 A가 B를 위해 죽을 수 있습니까?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각자 삽니다. 여기 계신 분을 위해 제가 죽는다면 제 죽음의 효과가 여기 계신 분에게 갑니까? 없어요. 너와 나는 따로 존재합니다. A와 B가 각자라면 예수님과 우리 사이도 역시 각자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내 대신 죽으심으로 내가 죄 사함 받는다는 말은 터무니없는 이야기입니다. 이걸 믿는 사람이 좀 이상한 것 아닌가요? 만약 믿는다면 그 믿는 자에게 묻고 싶어요. ‘어떻게 예수님의 죽으심이 너의 죄를 사할 수 있느냐?’고. ‘믿으라고 해서 믿었을 뿐인데.’라고 한다면 이건 믿는 것이 아니지요.
A의 죽음이 B에게 영향을 줄 수 없다면 이것을 예수님께 적용시키면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와 상관없는 겁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예수님이 죽는 것으로 끝나는 거예요. 이순신 장군이 죽었다고 집사님이 연금 받습니까? 아니지요. 그분의 죽음과 내가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마찬가지로 예수님 죽음과 우리가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예수님 죽음이 자신의 죄를 어떻게 사합니까? 이것을 정확히 모르면 그 신앙은 거짓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는 목사와 교인이 서로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흘린 피를 믿습니까?” “믿습니다.” “당신은 구원 받았습니다.” 서로가 말도 안 되는 것을 믿는다고 합의를 본 거예요.
A와 B가 있습니다. A가 부자여도 B는 상관없습니다. B가 배가 아픈 것이 A에게는 전혀 통증이 없습니다. 따라서 A에게 일어난 일이 B에게 영향을 주는 일도 없습니다. 그 이유는 A와 B가 따로 존재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A, B 모두 죽었다고 합시다. 살아 있을 때는 따로 놀다가 죽은 후에는 죽음의 세계에 모이지요.
그림으로 그려보겠습니다. 여기가 죽음의 공동묘지입니다. A가 어제 죽어서 묻혔고, B는 오늘 죽어서 묻혔습니다. 그러면 그 죽음의 세계에서 둘이 서로 대화를 나눕니까? 살아 있을 때도 죽어서도 각자입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부부라도 죽어서까지 사이좋게 지낼 수 없어요.
나의 죽음이 다른 이에게 영향을 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존재의 한계입니다. ‘나는 남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예수라는 존재가 나의 존재에 대해 큰소리를 쳐도 나에게 전혀 영향을 미칠 수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존재를 어떻게 처리하는가? 왜 죽었는지를 따집니다.
성경은 각자 죽음의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죽음의 이유가 뭔가 하면 죄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각자의 죽음이 하나의 언약에 저촉을 받게 됩니다. ‘누구든지 율법을 어기면 죽는다.’는 것이지요. 이 죽음은 우리가 보기에는 존재에서 나오는 죽음으로 보이지만 언약의 세계에 들어가면 동일한 율법에 의해 죽었기 때문에 동일한 심판을 받게 됩니다.
인간들은 존재로부터 출발합니다. 성경은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성경에 의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언약을 위해 존재합니다. 그러기에 그 존재가 죽으면 언약으로 되돌아가요. 제가 이것을 ‘죽음 속으로 간다.’고 했는데, 사실은 죄 때문에 죽음은 언약의 공간이며, 언약은 살아 있고, 살아 있는 언약에 의해서 우리는 ‘죄 값으로 죽었다’ 할 때 이 사람은 존재로 죽은 것이 아니고 죄로 죽었기 때문에 심판받기 위해서 이 사람은 생생하게 살아 있어야 돼요.
심판 앞에서 산 존재가 됩니다. 어떻게? 외부에서 볼 때는 죽은 채로. 언약 세계가 참 신기하지요? 우리 눈에 보이는 현실 세계는 언약에 의해 조성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출발을 혈통에서 시작합니다. ‘아버지 날 낳으시고, 어머니 날 기르시니 --’ 정철 시조입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계시기 때문에 내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럼 아버지, 어머니의 존재는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할아버지, 할머니죠. 그럼 할아버지, 할머니는? 계속 존재의 연쇄 고리로 올라가면 결국 ‘모르겠다’고 하든지 ‘하나님이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어떻게 만들었습니까?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나왔다고 할 수밖에 없어요.
그럼 없는데서 하나님이 흙으로 인간을 만들었다면 흙에서 인간이 될 때 개입된 원칙이 뭡니까? 성경에는 하나님의 언약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존재는 어디로 돌아가야 합니까? 하나님의 언약 안으로 돌아오게 되지요. 그러면 어떤 인간도 죽었다는 의미를 달리 보아야 합니다. 숨 안 쉬는 것이 죽음이 아니라 죄로 인하여 죽었다는 말이 옳습니다.
로마서 5에 ‘그 때는 산 자나 죽은 자나 다 부활하여 의의 심판과 죄의 심판을 받으리라.’고 했지요. 부자가 죽어서 어디에 갔습니까? 지옥 갔지요. 지옥에서 부자는 잠자고 있습니까, 살아서 고통 받고 있습니까? 살아 있지요. 안 죽었잖아요. 그런데 성경은 죽었다고 합니다. 왜? 죄 때문에 지옥 간 것을 죽음이라고 해요.
그러니까 우리의 존재로부터 출발한 인식이 얼마나 잘못 된 것입니까? 주님은 죄 있는 자를 죽은 자로 봅니다. 그런데 우리는 숨이 끊어지면 죽은 자로 봅니다. 이것은 살아 있는 우리 입장에서 보면 기껏 이것밖에 모릅니다. 주님은 죄 있는 자를 죽은 자로 보기에 살아 숨 쉬어도 죽은 자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창조하신 분의 관점입니다. 언약적 관점이죠.
제가 처음 던진 질문이 뭡니까? 남에게 일어난 일이 어떻게 나에게 영향을 주는가? 각자의 삶이 다른데. 이것은 죽음 후에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마찬가지죠. 그런데 언약 안에서 죄 때문에 죽었다는 말은 하나님의 의로 처벌 받은 것입니다. 죄에 대해서 화를 내시며 등장하신 분이 있습니다. 그분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이죠. 그분은 의로운 분입니다.
그럼 의로운 분이 우리 죄를 처벌하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일괄적인 멸망이 발생합니다. 다수가 있더라도 모두 멸망이란 하나의 성격에 묶인다는 것입니다. 눈에 내릴 때 내 머리위에 내리는 눈과 다른 사람의 무리위에 내리는 눈이 다릅니까? 몸은 달라도 동일한 눈이 내립니다.
죄인은 동일한 처벌을 받습니다. 나와 너 가릴 것 없이 동일한 분이 처벌합니다. 언약 안에서 동일한 분이 여러 사람을 처벌합니다. 그분의 의인이고, 그분의 메시아고, 그분이 심판주입니다.
이제 문제가 풀리지요? 심판주가 죽음을 처리한다면 한 분이 내리는 처벌을 미리 받는 것이 됩니다. 처벌하시는 분이 미리 와서 우리를 처벌하면 너와 내가 각자 처벌을 받는 것이 아니고 동일한 자의 처벌을 받기 때문에 처벌 내릴 자 앞에서는 너와 나의 차이가 없습니다.
문제는 예수님 죽음이 어떻게 나에게 효과가 주어지는가 하는 점입니다. 나의 존재로 출발하면 문제가 풀리지 않습니다. 주님과 내가 어떤 관계인가 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직접 너와 나를 보지 말고, 너도 나도 주님을 경유해서 본다면, 주님 안에서 너와 내가 한 형제가 됩니다.
하나님이 맏아들을 우리 죄인 속에 집어넣으면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마저 아버지로부터 처벌 대상이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도 우리도, 성도는 모두 다 처벌자 앞에서 한 형제가 되어 한 몸처럼 다뤄집니다. 그 언약을 위해서 에스겔이 등장하는 거예요. 에스겔 24:27절을 보세요. “너는 그들에게 표징이 되고” 했지요? ‘표징’입니다.
학교 식당에서 햄버거가 제공되었습니다. 그런데 철없는 학생이 햄버거를 먹으면서 하는 말이 “내가 만든 햄버거보다 맛이 없다.”고 했어요. 한 친구는 ‘맛있다’고 합니다. 그 광경을 요리사가 물끄러미 바로 보면서 하는 말이 “내가 있는 한 너희들은 동일한 햄버거를 먹을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도 내가 만든 햄버거를 먹는다.”라고 할 때, 요리사나 맛없다고 하는 학생이나, 맛있다고 하는 학생 모두 하나가 되는 겁니다.
내(요리사)가 만약 참외를 제공하면 너희들은 동일하게 참외를 먹게 된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언약 안’입니다. 언약은 인간의 현실적 안목으로는 드러나지 않아요. 그래서 특별히 에스겔에게 ‘표징’으로 보여준 거예요. 일반인들은 모르는데 에스겔에게는 유난스럽게 상식 밖의 사태가 벌어집니다. 사랑하는 아내가 죽더라도 울지 말라고 하셨지요.
아내가 죽었는데 울지 않는 에스겔을 보면 사람들은 낯설고 희한합니다. 이 에스겔의 호칭이 ‘인자’입니다. 그래서 에스겔은 24장에서 표징을 보여주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계속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특이한 상황이 계속 나옵니다. 이 상황을 다 모으면 예수님의 일생이 됩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인자’지요. “너희는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 청사진이 에스겔의 일대기를 통해서 미리 묘사되어 있어요. 이것이 아까 이야기한 골리앗 크레인의 작용입니다. 위에서 에스겔에게 표징을 남기는 겁니다. 그러면 에스겔의 아내를 왜 죽이는가?
멸망이 곧 구원입니다. 악에서 선이 생성됩니다. 제가 ‘성령의 법’을 설명할 때 말했지요. 우리 속의 악을 등장시킴으로 십자가를 증거한다고. 그러면 결국 우리는 이 시대에 ‘표징’이 되는 거예요. 명절에 불신자들 가운데 성도가 섞이면 분란이 일어납니다. 불신자들은 존재와 존재의 관계로 연결되어 있는데, 그 속에 성도가 투입되면 언약이 끼어드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존재 이야기를 하지요. 명절에 만나면 아이 자랑으로 시작해서, 정치 이야기로 갔다가, 지루하면 화투도 치고, 그러다 유산문제 거론하다가 싸우고 합니다. 그런데 성도는 표징이기 때문에 특이성을 드러내지요. 친척 중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있으면, 우리 교회는 사람이 얼마나 모이고, 이번에 새로 교육관을 지었고, 담임 목사님은 어떤 사람이고 등등.
그런데 그런 말 나오는 가운데 성도가 “십자가를 아십니까?” 라고 하면, 분위기가 사늘해 지지요. 복음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십자가 이야기는 어느 정도 충격적인 말인가 하면, “삼촌들, 형님, 형수님 잘 들어보세요. 어제 제 아내가 죽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안 울었어요.” 이런 소리와 같습니다.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너는 너의 존재를 부정하느냐?” “예, 저는 저를 존재로 보지 않습니다. 저는 표징입니다.” “지금 무슨 소리하는 거야? 표징이라니.” “저는 언약의 표징입니다.” “이제 그만하자. 너는 앞으로 명절에 오지 마라.” 성경 이야기를 하는데 교회 다닌다는 사람도 못 알아들어요.
표징을 이야기하는 것은 보아도 알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그 표징의 해석은 더 충격적입니다. 멸망이 구원에 포함됩니다. 구원의 필수 요소가 멸망입니다. 멸망 없는 구원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가 구원하는 거예요. 하나님 이름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이름으로 구원 받아요. 왜냐? 예수는 십자가 지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십자가가 구원의 능력이다.”라고. 존재 세계에서 십자가는 죽음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성도에게 십자가는 죽음이 아닙니다. 죄와 관련된 사건입니다. 대신 심판 받은 표징이 십자가입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예수 혼자 주장하더라. 너의 죄를 위해 내가 죽었다고. 하지만 생각해 봐라. 예수 존재와 우리 존재는 2,000년 간각이 있는데 예수와 우리가 무슨 관계가 있냐?”
“형님, 그것이 바로 존재론적 관계를 유지하기 때문에 생긴 오해입니다. 언약 안에 있으면 예수님의 심판은 내가 당할 심판을 해소하기 위해 당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죽음에 우리도 같은 것이고 주님 부활에 같이 부활한 것입니다.” 여기서 부활은 표징의 부활입니다.
예수님 존재의 부활이 아니고 표징의 부활이란 말은, 존재는 한 번 구원으로 끝나지만 표징은 반복을 가져옵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너희 눈앞에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고 하잖아요. 예수님 존재의 부활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십자가 사건을 반복시키는 것이 부활의 능력입니다.
부활의 내용은 부활이 아니고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효과를 드러내기 위해서 부활의 능력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세상에 갇혀 있고, 존재에 갇혀 있고, 죄에 갇혀 있는 우리에게 십자가는 고속도로를 자유롭게 통과하는 하이페스와 같습니다. 성령은 죽음의 권세를 벗어났기 때문에 비밀번호가 필요 없어요. 이미 비밀번호를 풀고, 죽음의 권세를 풀고 왔기 때문에.
죽음의 권세만 풀었습니까? 죄를 풀고, 율법도 풀었습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한 사람은 죄와 관계없고, 율법과 관계없고, 사단의 저주와 관계없고, 주와 한 형제가 되는 겁니다. 이것을 ‘사귐’이라고 합니다.
제가 아까 에스겔은 하나의 스토리를 가진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스토리죠. 그렇다면 그 표징은 에스겔 본인만의 표징이라면 다른 사람과는 상관없잖아요. 인자 된 에스겔에게 일어난 표징이 멸망입니다. 멸망이 곧 구원이라고 했지요. 멸망이 구원이 되기 위해서는 그 표징을 계속 ‘인자’의 이름으로, 또는 인자에게 일어났던 그 사건을 다른 형제들에게 파급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존재 세계가 아닌 언약 세계 안에서는 같은 형제가 구성됩니다. 에스겔 36:26절을 보면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라고 했습니다. 이게 어떤 경우냐 하면, 이스라엘이 멸망한 후에 하나님이 주신 약속입니다.
그들이 멸망당했으니까 그들 나름대로의 행위나 주장은 일체 다 끊어진 상태입니다. 멸망당했다는 말은 멸망시킨 분이 있지요. 그럼 멸망시킨 분이 멸망당한 자를 대표해서 책임지겠지요. 그러면 멸망당한 자와 멸망시킨 분이 같이 움직이잖아요. 왜냐하면 그래야 의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의를 소유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의는 멸망시키는 행위입니다. 죄에 대해 멸망시키는 처벌 행위가 얼마나 의롭습니까? 죄를 그냥 두지 않고 처벌하는 행위 자체가 나타난 의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의가 나타나려면 처벌받는 자가 있어야 하고, 처벌자가 있어야 되지요.
처벌자와 처벌 받는 자 사이에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은 절대 죄를 용납하시는 분이 아니다.’ 라는 점이 드러나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가 됩니다. 에스겔 37:1절을 봅시다.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하시고 그 신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뼈가 가득하다고 했으니까 존재로 보면 죽은 자입니다. 그러나 ‘죽었다’고 하면 안 돼요. 언약 안에서는 죽은 것이 아니고 그들은 ‘죄를 지어 멸망당했다’고 봐야 해요. 왜냐? 그래야 심판주가 등장하고, 언약에 의해 의가 등장하는 현장이 돼요.
여호와께서 에스겔에게 묻습니다.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죄를 지어 죽었는데 죽은 자가 다시 한 번 죄를 만회할 기회가 없지요. 그래서 믿음으로 구원 받지 행위로는 구원 못 받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행위는 주님 앞에서 다 확정지어졌습니다. ‘앞으로 잘하겠습니다.’는 것이 용납 안 됩니다.
우리가 평생을 살아도 똑같은 죄를 지을 뿐인 것을 미리 단정하시고 주님은 우리에게 찾아왔습니다. 그러니까 구원 받고 난 뒤에 행위를 내세우면 안 돼요. “내 행위로 안 되는 것을 믿습니다.” 다른 말로는 “내가 이제야 죄인 된 것을 믿습니다.”가 됩니다. 타락, 멸망 이것이 구원의 핵심 요소가 될 줄은 상상도 못했지요.
이방인이 믿음의 대표자가 될 줄은 상상도 못했지요? 백부장이 믿음의 표상이 될 줄 누가 상상했어요? 백부장은 율법이 없습니다. 유대인과 차이가 있습니다. 유대인은 죄인이면서 죄를 모르고, 백부장은 이방인이면서 주님 앞에 죄인인 것을 알기에 가장 언약적인 표징이 백부장입니다. 세리, 창기, 강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존재로 보는 세계와 언약으로 보는 세계의 차이를 알겠습니까? 언약 세계는 우리를 숨 쉬냐, 아니냐로 보지 않고 죄냐 의냐의 관점으로 봐요. 죄가 있으면 의로 폭격합니다. 그 때 “왜 나를 때립니까?”라고 하면 안 되고 “때려주시는 분이 계시니 감사합니다.” 이렇게 나와야 돼요.
나를 존재로 보지 않고 죄로 보시는 것도 감사하지만, 그런 안목에서 처벌을 하시니 너무 감사한데, 이 처벌을 우리 혼자 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같이 받았으니 더욱 감사하지요. 즉 심판주가 처벌을 받았으니까 세상에 이런 든든한 배경이 또 없어요. “내가 너 때문에 죽었어.”라는 말을 주고받은 것이 있어요.
비록 강도지만 언약 안에서는 주님의 의를 드러내기 위한 조직원이에요. 우리는 예수님의 조직원이에요.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해 조직원이 된 겁니다. 세상적 시각에서는 아저씨, 아줌마지만 언약적으로 보면 우리는 인자를 보여주는 표징입니다.
여호와께서 질문하신 말씀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는 말씀에, 에스겔은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그런데 주님은 ‘살리라’고 하시면서 에스겔에게 대언하라고 명하십니다. 37:13절을 봅시다.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한즉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여호와는 언약의 하나님입니다. 여호와는 언약을 성취하는 일 외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언약 성취를 위해서 누가 호출되었습니까? 택한 백성 이스라엘이죠. 그래서 이스라엘은 멸망당한 겁니다. 그래서 에스겔은 아내가 죽어도 울지 말아야 합니다. 내 존재를 위한 아내가 아니고 표징의 아내고 언약을 위한 아내입니다. 그러면 에스겔 아내는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해서 죽습니다.
사실은 에스겔의 아내가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의 아내가 죽어야 하지요. 죄를 지었기에. 그런데 그 죄책을 인자라는 호칭 때문에 대신 가져가는 그 자체가 그 시대에 필요한 인자으 표징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날은 십자가가 구원의 표징이 되고, 그 표징은 한 번 지나면 끝나는 것이 아니고 계속 살아서 부활의 힘으로 십자가를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에스겔은 마른 뼈들이 살아난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지요. 그러나 주님의 능력으로 살리는 광경을 보게 됩니다. 언약의 하나님이 준비한 스토리를 전개하시는 겁니다. 에스겔의 아내가 죽은 후에는 또 무슨 일이 전개 될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공생애입니다. 처음부터 죽음을 향하여 가다가 죽은 후 부활하지요.
예수님은 자신을 ‘인자’라고 칭했어요. 그 ‘인자’의 내막은 예수님 오시기 전 에스겔의 일대기를 통해서 미리 보여주셨습니다. 에스겔 37:7-8절을 봅시다. “이에 내가 명을 좇아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더니 이 뼈, 저 뼈가 들어 맞아서 뼈들이 서로 연락하더라 내가 또 보니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나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
질문합니다. 뼈에 살이 오르고 가죽이 덮이는 것이 살아 있을 때입니까, 죽은 후의 일입니까? 죽은 후에 살점이 붙었지요. 그러면 오늘날 우리 몸은 죽음으로 향합니까, 이미 죽었습니까? 이미 죽은 몸이죠. 그렇다면, 말씀이 들어오면 우리 겉사람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로 새롭지요.
마술사가 검은 상자를 열면 예측도 못한 비둘기가 나오지요. 바나나 껍질을 벗겨야 하얀 속살이 나오지요. 바나나 우유 포장지가 노란색입니까, 하얀 색입니까? 노랗지요. 그러면 그 바나나 우유 버려야 합니다. 왜냐? 바나나는 노릇 껍질을 먹는 것이 아니라 하얀 속을 먹기 때문이지요.
주님이 우리 겉사람을 벗기는 것이 구원 작업입니다. ‘죽어라 이놈아!’ 이 말은, ‘살아라 이놈아!’라는 뜻입니다. “주님이여, 제가 죽어갑니다.” “말 바꿔” “제가 지금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 말 잘했다.” 이렇게 우리 주님은 친절하고 말을 바꿔 주십니다. 성령이 지금도 십자가로 이 작업을 하십니다. “너는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를 위해 표징으로 있다.” 이것이 바로 에스겔이 보여주는 예수님의 공생애입니다.
에스겔 36장에는 그러한 영이 우리 마음속까지 들어오기 때문에 내가 그 영을 어찌할 수 없습니다. 빼도 박도 못해요. 그래서 고린도후서 1장에서는 성령의 오심을 ‘보증’으로 표현했어요. 그리고 ‘인 치심’이라고도 했어요. 인감도장을 찍었다는 거지요. 그래서 지울 수 없어요. 이것을 요한계시록에서는 ‘예수님의 인을 받았다.’고 했어요. 이 인을 받은 자(천국 백성) 외에는 다 짐승의 인을 받아서 666이 됩니다.
이것은 심판 이전에 이미 심판 받을 자가 구분 되었다는 것입니다. 정육점에 걸려 있는 돼지고기에 ‘검’(검사를 받았다는 표시) 도장이 찍힌 고기와 없는 고기를 구분하듯이 주님은 우리를 삼겹살로 봐요. 언약을 위한 삼겹살이죠. 예수 도장이 찍히면 검사를 통과한 것입니다. 예수 도장이 없으면 사단의 도장이 찍힙니다.
이것이 바로 존재로 보는 세상관이 아니고 언약으로 보는 세상관입니다. 그런데 모든 철학자, 과학자들은 존재로 세상을 봅니다. 그래서 철학자 하이데거는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인간은 다른 존재를 위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불신자 띠를 내는 것이지요. 그러면 어떻게 하는가? “우리가 서로 도와주자.” 이렇게 나와요. 이건 천주교의 주장이 됩니다.
천주교는 십자가를 믿지 않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내려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믿기 때문에 사랑을 전하면 하나님이 그 사랑을 가상히 여겨 구원해 준다는 겁니다. 그럼 십자가는 뭔가? 사랑의 모델, 희생의 표상입니다. 제가 천주교의 주장을 잠시 거론했는데, 여러분이 듣기에 어떻습니까? 천주교와 개신교가 별 차이가 없지요.
복습해 봅시다. ‘인자’ 안에 무엇이 들어있습니까? 표징이 들어 있지요. 그렇다면 예수님의 죽음에서 부활은 존재론적 부활로 보면 안 됩니다. 심판, 멸망 자체가 구원의 재료가 됩니다. 그래서 타락하라는 거예요. 타락이 있어야 구원이 있지요. 그래야 모든 공로는 예수님 혼자 다 받게 됩니다. 그것이 정착되는 세계가 ‘아들의 나라’ 즉 성경에 말하는 진짜 천국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표징이기 때문에 면류관 반납하고 주님만 높이게 됩니다.
이제 다니엘을 봅시다.
하나님이 다니엘을 어떻게 호칭하는가 하면 ‘인자’라고 해요. 에스겔에게도 ‘인자’라고 호칭했지요. 그럼 다니엘의 인자와 에스겔의 인자가 어떤 차이가 있는가? 에스겔은 땅에서 예수님의 활동을 미리 보여주었다면, 다니엘은 그 활동과 관련된 배경, 묵시적 세계와의 연관성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을 누가 핍박했나?’를 보면, 에스겔은 바리새인, 사두개인과 같은 (수평적)인간들의 핍박을 묘사했다면, 다니엘은 마귀가 인간들을 어떻게 시험했고, 부추겼는지 수직적 관계를 보여줍니다. 그래서 에스겔에서는 비행장에서 비행기가 수평으로 왔다 갔다 합니다. 그런데 다니엘에서는 비행기가 하늘로 날아갑니다.
한국교회의 모습이 비행기를 차로 생각하고 있다는 겁니다. 매일 새벽기도를 하지만 날지를 못해요. 날개가 있어야 날지요. 늘 종교놀이를 하고 있고, 날아오르는 사람이 없어요. 그래서 하늘을 이야기하면 알아듣지 못해요. 예배당을 넓혔고, 교육관을 지었고 이런 이야기는 알아듣는데 ‘예수님 십자가로 다 이루었습니다.’라고 하면 무슨 말인지 몰라요.
비행기를 활용할 줄 모릅니다. 비행기를 날기 위해 있잖아요. 교회는 이 땅을 떠나기 위해 있는 것이고, 떠날 때는 존재론적 관점에서 언약적 관점으로 달라져서 떠나야 성령의 힘으로 하늘로 올라갈 수 있어요. 비행기가 휘발유의 연소되는 힘으로 떠는 것처럼 성도는 성령의 힘으로 세상을 떠나 하늘로 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