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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흐름12 160917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10. 8. 15:38

      

이름 : 오용익 (IP:125.136.25.28)

 

2016-10-08 09:34:05조회 : 137         
뉴저지아카데미강의-구약의 흐름 12강이름 : 오용익 (IP:125.136.25.28)

뉴저지아카데미-구약의 흐름 12강

 

예레미야 31장 31절부터 33절까지 새언약이 준비되었지요. 그러면 뭐가 은퇴를 해야 돼요. 교장선생님 새로 등장하면 옛날 교장선생님이 은퇴를 해야 되고, 새목사 오면 옛날 목사는 천리만리 저 멀리 이민을 가든지 떨어져야 돼요. 가까이 있으면 교인들 다 줄줄이 따라옵니다. 한국교회 제 2세대, 3세대 내려오면서 오랜 된 교회의 문제점이 거기에 있지요.

 

초대목사는 괜찮은데 후대 목사가 초대목사와 비교가 되니까 그런 현상이 있습니다. 교인들도 후임목사에게 이걸 요구합니다. “우리 처음 목사 비난하지 말고 그 식대로 하면 당신을 우리가 목사로서 인정해주겠습니다.” 그런 조건부로 후임목사를 초빙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아요. 특히 유명한 교회에서는 그런 것이 많지요.

 

그렇다면 예레미야에 있어서 새언약이 왔다면 옛언약은 떨어져야 됩니다. 그런데 옛언약은 떨어져야 되는데 그 떨어진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는 거예요. 떨어진다고 해서 성경책은 그대로 있거든요. 유대인 욕해 봐야 유대인이 보는 구약이나 우리가 보는 것이나 똑같은 거니까. 로마서나 히브리서에는 이렇게 되어 있어요. 옛언약은 폐기되어야 된다. 폐기라는 말을 해요. 그게 무슨 뜻이냐?

 

폐기되어야 된다고 하니까 “폐하면 되겠네.”라고 한다면 “당신은 율법 폐기론자요.” 이렇게 뒤집어씌우는 거예요. 율법을 폐기한다는 말은, 마치 구약성경인 율법을 몰라야 되는 것으로 오해를 하는 거예요. 이 십계명 몰라야 됩니까? 십계명이 우리 속에 살아 있어야 십자가가 자꾸 증거되지요. 십계명의 마지막 계명이 탐내지 말라는 것이잖아요.

 

전에는 우리가 “사람인 이상 탐낼 수 있지.” 스스로 완화하고 변명을 했는데 십자가가 꽂히고 나서는 약과고 사이다고 다 탐이 나니, 아, 가만히 있어도 죄가 증강되고 늘어나는 것은 십자가의 구원을 이미 받았기 때문에, 십자가가 이미 꽂혔기 때문에 마음껏 이런 죄를, 약과 먹고 싶은 죄를 우리는 발산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약과를 막 빼앗으면 안 되고, 그런 것을 발산할 수가 있어요.

 

그러면 율법을 폐기를 한다는 것이 뭐냐? ‘갇혀 있다.’는 그 이야기를 이번시간에 해야 되겠는데 여기다 우선 적어놓고요. 이스라엘 멸망입니다. 같은 말로 교회 멸망입니다. 교회는 멸망하라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이스라엘도 멸망하라고 있는 거예요. 교회가 멸망함으로 진짜 교회가 그 배후에 등장하는 겁니다. 동남아에서 순회공연하기 전에 짝퉁가수, 조양필, 나운아, 이미테이션가수들 앞장세워서 먼저 해놓고 그 뒤에 진짜 가수 등장하듯이 가짜가 바람을 잡아줘야 돼요.

 

가짜가 무대 위에서 바람을 잡아놓고 퇴장하면서 꼭 이런 이야기를 해요. “나는 가짜였을 뿐이고 이미테이션이었을 뿐입니다.” 이 말을 꼭 붙여줘야 돼요. 그럴 때 그 율법은 복음이 되는 겁니다. 십계명 지키면 구원받는다고 분명히 구약에 나와 있어요. 구약에서는 복 받는 방법이 십계명 지키고 율법 지켜야 돼요. 그래놓고 그 율법이 퇴장하면서, 율법이 떠나가면서 이 율법의 완성은 율법이 아니고 다른 쪽에 있습니다, 이렇게 소개를 해줘야 돼요.

 

그게 율법 외에 한 의가 됩니다. 이러한 방법이 뭐냐? 세례요한이 등장하고 난 뒤에, 바람잡이로 등장하고 난 뒤에 누가 등장합니까? 바로 본게임 예수님이 등장하잖아요. “자, 여기 소개합니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가까이 왔다는 말은, 여기 왔다는 뜻이에요. 현존, 지금 여기 우리와 함께 있다는 뜻이에요.

 

가까이 왔다고 하니 아직은 안 왔잖아, 그런 해석을 하면 큰일 납니다. 안 왔다는 말이 아니고 왔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는 못해서 문제지 지금 왔다는 말입니다. 심지어 그렇게 이야기하는 세례요한도 “오실분이 당신이 맞습니까?”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지요. 그게 뭐냐? 저는 가짜입니다, 그런 뜻으로 퇴장하는 거예요. 퇴장할 때, “저 보지 마세요. 저는 아닙니다.” 하는 거예요.

 

그래서 요한복음 3장에 보면,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어디로 이동합니까? 예수님께로 이동하니까 세례요한보고 “선생님! 선생님 교인들 저쪽 교회로 다 갔습니다. 어쩌면 좋아요?” 세례요한이 하는 말이, 나는 쇠해야 되고 그분은 흥해야 된다고 한 거예요. 목회자 짱이에요. 최고에요. 나는 나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그분으로 인해서 존재하는 하나의 보이스,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에 불과하기 때문에, 나는 스피커에 불과하기 때문에 본 음성 나오면 스피커는 슬슬 철거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 모습이 선지자의 모습이고 오늘날 이 시대의 선지자는 성도입니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의 증인노릇 한 것처럼 오늘날 우리는 우리가 주인공이 아니고, 우리 개인구원이 목적이 아니라, 예수님이 이런 분이라고 증거하게 되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더는 욕심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서 새언약이 등장했다고 했지요.

 

새언약이 등장하게 되면 뭐는 철수해야 된다? 슬슬 일본말로 해서 시마이해야 돼요. 시마이라는 말도 하고 장날에 아침에는 분주한데 오후 대여섯 시 넘어가게 되면 드디어 시골장터에 바람이 붑니다. 바람이 삭 불면서 천막들이 흔들리면서 스산한 바람이 불면 굉장히 쓸쓸하지요. 그걸 파장분위기라고 하지요. 이 세상은 예수님 오시고 난 뒤에 파장분위기입니다. 이스라엘은 멸망을 해야 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멸망하고서 그 뒤에 진짜 이스라엘이 딱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등장합니다. 미식축구에서 공을 숨겨놓고 앞에서 덩치 큰 바람잡이가 까불까불 하잖아요. 공 빼돌려서 갑자기 뒤에 숨어 있던 선수가 나타나서 점수를 내지 않습니까? 이처럼 주님께서 장막을 쳐놓았다가 딱 벗기는 것, 이스라엘은 앞에 인도하는 예인선역할을 충분히 한 거예요.

 

말씀을 지키면 망하게 되어 있는 존재가 육체가 있는 나, 괴물이 그동안 우리 육체를 장악하고 있었다는 것을 괴물집단인 이스라엘이 마음껏 보여준 겁니다. 어떻게 보여주는가? 오늘 에스겔서를 합니다. 에스겔서는 그것을 멸망하는 이유에 대해서 분명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네 자입니다. 그게 뭘까요?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죄가 뭘까요? 우상숭배.

 

우상숭배해서 멸망하는 겁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우리의 옛자아는 이렇게 합니다. “우상숭배해서 멸망했다고? 우리가 축복받으려면 간단한 문제다. 우상숭배 안하면 되겠네.” 이렇게 되겠지요. 우상은 부처, 조상제사지내는 것, 진짜 하나님은 우상숭배하지 말라고 하신 그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고, 간단하네, 누구 믿으면 돼요? 여호와 믿으면 되겠네, 라고 나오겠지요.

 

이스라엘이 여호와 믿어서 망했어요. 자기가 믿는 여호와가 바벨론제국을 키웠습니다. 북쪽나라 BC722년, 남쪽은 BC586년, 성경설교 하다가 갑자기 BC, 이렇게 나오면 교인들은 짜증내요. 안 듣던 용어 왜 나오느냐는 거지요. 우리 무식한 것 폭로하려고 하느냐는 느낌이 들어요. 그래서 성경에 없는 용어를 쓰지 말라는 거지요. 성경에는 BC 722년도 없고 BC 586년이 없잖아요.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위쪽 아래쪽, 북쪽 이스라엘은 북한이고 남쪽 이스라엘은 남한이지요. 북쪽은 다른 제국에게 망했어요. 앗수르 제국에게. 그리고 남쪽은 BC722년에 어느 제국에게? 바벨론제국에게 망한 거예요. 그런데 그 자기나라 “나의 포도원이요 사랑하는 아내”라고 했던 그 이스라엘을 누가 그렇게 만들었는가?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었어요.

 

어떻게 만드는가? 몽둥이를 가지고 그렇게 만들었어요. 하나님이 키운 몽둥이가 바벨론이고 키운 몽둥이가 앗수르입니다. 마귀를, 사탄을 누가 부리십니까? 사탄이 본인 맘대로 안하는 것을 우리는 명심 또 명심해야 돼요. 마귀든 귀신이든 그것은 절대로 주님이 조종하는 거예요. 마귀가 자력으로 그렇게 한 게 아니에요.

 

그래서 하나님 세계의 내분, 하나님 자체의 모순이에요. 그 내분의 목적은 아들, 독생자를 주로 만들기 위해서 사탄이 자기를 반발하는 것을 허락하신 거예요. 그게 숨겨진 비밀인 겁니다. 하나님만 꼬깃꼬깃 알고 있는 숨겨진 비밀이에요. 그 여파로 우리 인간이 이 모양 이 꼴이 되었지만. 여기서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겁니다. 어떻게 여호와를 섬겼는데 그것이 우상이 되는가? 그것을 지금 설명하고자 하는 겁니다.

 

예수 믿는데 어떻게 그게 이단이 되는지 그걸 설명하고자 하는 거예요. 그걸 이스라엘이 잘 보여줍니다. 에스겔 본문 읽고 그 다음에 계속 진행하겠습니다. 교인들은 성경이 두껍기 때문에 성경을 잘 안 보게 되고 또 모르게 돼요. 그래서 제가 중요 구절을 찾아드리는 겁니다. 아까 본 예레미야 31장 33절이 중요한 것처럼. 에스겔 24장 18절이요. “내가 아침에 백성에게 고하였더니 저녁에 내 아내가 죽기로 아침에 내가 받은 명령대로 행하매 백성이 내게 이르되 네가 행하는 이 일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되는지 너는 우리에게 고하지 아니하겠느냐.”

 

아침에 하나님의 말씀이 에스겔에 임했어요. 16절에 나옵니다. “인자야……” 인자라는 용어는 장차 예수님이 인자입니다. “인자야 내가 네 눈에 기뻐하는 것을 한번 쳐서 빼앗으리니 너는 슬퍼하거나 울거나 눈물을 흘리거나 하지 말며 죽은 자들을 위하여 슬퍼하지 말고 종용히 탄식하며 수건으로 머리를 동이고 발에 신을 신고 입술을 가리지 말고 사람의 부의하는 식물을 먹지 말라.”

 

부의하는 식물, 장례음식 먹지 말라고 해놓고 아침에 보니까 누가 죽었습니까? 아내. 평소에 이혼하려고 작심한 아내가 아니에요. 정말 사랑하는 아내가 아침에 죽었습니다. 이 대목, 이 구절, 참 줄긋기가 벌벌 떨릴 정도로, “줄그었으니 그대로 실행에 옮겨줄까?” 그렇게 나올까 싶어서 겁이 나는, 그래서 “안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하고 점프하고 싶은 구절이에요. 에스겔 선지자의 핵심이 뭐냐? 사랑하는 아내가 죽었는데도 울지 않아야 될 임무를 지닌 선지자가 바로 에스겔 선지자입니다.

 

그 에스겔이 뭡니까? 인자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뭡니까? 인자지요. 그러면 우리가 예수를 안다는 것, 예수를 알고 믿는다는 것은 안에 뭐가 들어 있다? 에스겔이 당했던 그 아픔과 괴로움과 황당한 일을 품으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고 그 황당한 일로 인해서, 그 아픔으로 인해서 천하의 죄인인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겁니다.

 

사탄 속에 갇혀 있는 우리, 우리 힘으로 못 빠져나오는 우리, 우리가 스스로 운동화 끈을 잡아당겨도 못 빠져나오는 우리, 그래서 우리는 절망하지요. 문학으로 안 되고, 예술로서도 안 되고, <채식주의자>같은 것 써서 구원받을 것 같으면 나도 쓰겠다, 소설 써도 구원이 안 되고, 위대한 헨델의 메시아를 쓴다고 해도 구원받는 것이 아니에요.

 

어떤 수단을 강구를 해도 우리는 우리의 자아의 횡포를 우리가 감당할 수 없습니다. 모차르트와 동시대의 살리에르라는 사람이 있지요. 살리에르가 뭐라고 했습니까? “신이시여, 왜 나에게는 저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주시지 않았습니까?” 영화 같은데서 모차르트가 독약으로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그것은 사실이 아니고요. 사람들이 모차르트를 높이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고요. 뉴턴이 사과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을 발견했다는 이야기도 다 거짓이고요, 그런 것은 실제가 아닙니다.

 

어쨌든 살리에르가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예술 자체가 자기에게는 구원의 시그널이 되고 말았어요. 더 멋진 작품이 없으면 진짜 약 먹고 자살합니다. 거기에 목숨 거는 거예요. 자식에게 목숨 거는 부모나 남편에게 목숨 거는 아내나 아내한테 목숨 거는 남편이나, 이것은 드문 경우지만 간혹 그런 경우나, 그 사람들은 절대로 정신상태가 정상이 아닙니다.

 

아내 죽으면 다 울어요. 너무 슬퍼서. 그런데 “스톱! 에스겔은 스톱, 인자 스톱!” 너는 특별해야 돼요. 비범해야 되고 인자라는 그 호칭 때문에 너는 달라야 돼요. 이렇게 되면 참 미치지요. 선지자가 하고 싶어서 “나는 선지자가 소망이에요.” 이렇게 선지자 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선지자는 그냥 하늘나라에서 네가 해, 하고 찍은 거예요.

 

모세가 하나님 찾아왔을 때 반겼습니까, 거부했습니까? 거부의 핑계가 뭔 줄 알아요? “난 말 못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럴 줄 알고 말 잘하는 아론을 옆에 세웠습니다. 이 말은 뭐냐? “하고 말고는 네가 결정할 사항이 아니고 내 피조물이니까 너는 무조건 내가 시키는 대로 해!” 하면 끝나는 거예요. 그게 믿음이에요.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고, 까라면 까겠습니다, 그게 백부장이잖아요. 세상에 이런 믿음이! 주님도 깜짝 놀랐어요. “세상에, 이렇게 깊은 믿음이! 나라의 본 자손들은 천국에서 다 쫓겨나고 너 같은 인간들을 모아놓은 나라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다.” 에스겔의 아내가 죽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왜 에스겔에게 이런 수모가 들어가야 되는가?

 

에스겔이 인자입니다. 그러면 인자는 뭐냐? 어려운 말로 하겠습니다. 다윗언약이 상대자가 인자에요. 다윗은 다윗언약이 아닌 것을 여러분이 아시지요. 다윗은 다윗 언약이 아니에요. 다윗언약은 뭐냐? 왕이 따로 있어요. 여호와 하나님이 다윗언약이고 그분은 없는 존재고 숨겨진 존재지요. 숨겨진 존재가 다윗으로 하여금 죄짓고 해서 인간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윗이 인장에요. 이런 방정식이 성립돼요. 다윗언약이 성취가 되면 우리는 모조리 인자가 된다. 이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우리가 되는 인자를 앞당겨서 인자라고 호칭하시는 분이 누구냐? 바로 예수님이고 그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구약부터 준비한 자들이 누구냐? 그게 바로 예레미야고, 에스겔이고, 다윗인데 그들의 공통점이 뭐냐 하면, 성신을 받았다는 거예요. 자기의 실력으로 한 것이 아니고.

 

그러면 오늘날 우리는 뭘 받아야 돼요? 성신을 받으면 안돼요. 성신은 신약 이전의 구약의 신을 성신이라 합니다. 성신의 목표는 우리가 아니고 예수님이에요. 그러면 우리는 성신을 받은 것이 아니고 성령을 받은 거예요. 물론 의미상은 같은 용어지만 옛언약에 속하는 신이 성신이고 새언약에 속한 신이 성령이에요. 성신은 율법을 우리 코앞에는 들이대지만 우리 마음까지는 안와요. 왜? 마음까지 오실 분이 방향을 틀어서 예수님 마음속까지 들어와 있기에 그렇습니다.

 

구약의 성신은 우리 앞에 들이대면서 “똑바로 해! 안하면 저주받아.” 여기까지 하십니다. 그리고 못하기에 이스라엘은 멸망당하고 언약은 백성이 멸망당했으니까 찢어지는 겁니까? 포기되는 겁니까? 실패하는 겁니까? 아니에요. 주께서 준비한 언약은 다른 사람이 대신 인터셉트해서 가져갑니다. 예수님이, 인자가 가져가서 그것을 이룹니다.

 

그 전에 우리는 에스겔 24장 18절을 봤습니다. 에스겔이 멸망하는 이스라엘을 대신 가져가는 거예요. 가져가게 되면 에스겔을 믿는 한 그 시대 사람들은 멸망해도 구원받습니다. 이게 하나님의 시스템이에요. 그 시대 사람에게는 아직 예수님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그 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구원을 받습니까? 이것은 흔하게 받는 질문이거든요.

 

예수님 오기 전의 사람들은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그 시대의 언약이 그 시대에 주어집니다. “그 시대의 언약은 십자가 아니잖아요. 새언약 아니잖아요.” 그렇게 할 수 있잖아요. 그 언약 안에 새언약과 연계되어 있어요. 그 언약 속에 들어가면 새언약과 이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 때는 예수님 오시기 전에 약 2천 년 전이거든요.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예수님 보기를 원했다가 보고 기뻐했다는 겁니다. 예수님하고 아브라함하고 언제 아는 사이로 되었습니까? 성신이 장차 올 예수님을 겨냥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신이 임한 사람은, 하나님의 계시가 임한 사람은 예수님을 알아요. 엘리야도 그렇고 모세도 그렇고. 그래서 예수님과 함께 변화산에서 나타났잖아요.

 

이것을 가지고 저는 포클레인 법칙이라고 하는데 여러분 궁금해요? 항구에 가면 거대한 크레인이 있는데 너무 거대해서 그 크레인을 골리앗크레인이라고 합니다. 골리앗 크레인 옆에는 컨테이너가 쌓여 있지요. 그 컨테이너를 부두에 있는 배에 실어내지요. 이걸 누가 합니까? 이걸 사람이 낑낑거리면서 옮기는 겁니까? 누가 해요? 골리앗크레인이 하잖아요. 앞에 있는 이 골리앗크레인은 모세언약이에요. 두 번째는 다윗언약이고 세 번째는 어제 보았던 예레미야 새언약이고 네 번째로 마지막 언약이 십자가라는 새언약입니다. “내 살과 내 피로 새언약을 세운다.” 새언약입니다.

 

그렇다면 각 시대의 사람들은 뭐로 구원받습니까? 그 시대에 주어진 골리앗 크레인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이게 구약의 흐름이에요. 이 골리앗크레인들의 연속성이 구약의 흐름입니다. 참 쉽지요. 그런데 왜 그렇게 성경을 보면서 이 골리앗크레인들이 왜 안보였을까요? 인간들은 괴물 같은 자아가 있어서 어떤 법을 주게 되면 골리앗 크레인이 해결할 문제를 누가 합니까? 내가 해보겠다고 하다 보니까 오버를 하고, 사울은 이스라엘나라 지켜보겠다고 소년 다윗을 “저놈 죽여라.” 하고 현상금까지 붙여서 가는 곳마다 잡으려 했어요.

 

그러다가 “다윗아! 미안하다. 내가 쓸데없는 짓을 했구나. 다시는 너를 잡지 않으마.” 하고서는 악신이 임하니까 또 정신이 이상해져서 “저놈 잡아라.” 다윗이 사울의 물병만 살짝 가지고 나와서 “임금님! 제가 이길 수도 있는데 그냥 풀어주잖아요. 임금님도 제 심정 알았으면 그만 싸웁시다.” “소년 다윗아! 내가 미쳤구나.” 후회도 잘해요. “내가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으마.” 해놓고 “저놈 잡아라.” 또 그렇게 합니다.

 

왜 그 시대 사람들은 악신이 임하면 왜 그렇게 성신 받은 사람을 못살게 굴까요? 이런 크레인들은 이 땅 인간의 이름이 저질러 놓은 악이 범람해야 그 속에서 다윗의 가치, 모세의 가치가 피어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모세가 데리고 인도한 사람이 모세를 좋아했습니까, 원망했습니까? 전부 다 원망했어요. 열 번이나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했어요.

 

육체 자체가 애굽에서 살던 버릇이거든요. 떡볶이 먹어야 되고 짜장면도 가끔은 먹어야 되고, 진 라면 먹어야 되고, 몸이 애굽의 몸이에요. 그러니까 주께서 수난 받는 모습으로 골리앗 크레인이 먼저 앞당겨서 삽입되어서 건질자는 건지면서 하나님의 언약은 빈틈없이, 그 프로젝트가 잘 진행되어 온 거예요. 온갖 수모를 겪으면서도 깨끗하게 진행되어 온 겁니다.

 

이제 이 크레인은 에스겔에 옵니다. 이스라엘이 어느 신 믿습니까? 여호와 믿지요. 그들이 여호와를 믿는 이유가 율법대로,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겨서는 안 된다고 했고 그 신이 어떤 신이냐 하면, 여호와라 하지만 그 실제기능은 “애굽에서 종 되었던 너를 구원한 자.”라고 되어 있어요. 애굽에서 종 되었던 너를 구원 한 자라.

 

출애굽기 20장의 십계명을 봅시다. 오늘 시중에서 파는 십계명에는 뭐가 안 나오는가? 20장 1절, 2절이 빠져 있고 3절부터 나옵니다. “너는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 이렇게 나오지요. 그런데 해석은 1절부터 해야 돼요. 나는 너를, 여기서 너는 어떤 너냐 하면, “애굽에서 종 되었던 너”입니다. 갇혀 있던 너에요.

 

그러면 십계명을 제대로 지키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나는 내 힘으로 못삽니다. 갇혀 있어요.”라는 것이 구성이 될 때 십계명이 효과를 발휘하지요. 그런데 인간들은 애굽에서 나오고 난 뒤에 자기는 애굽에서 나왔으니까 본격적으로 십계명을 지킬 수 있다고 자부한 거예요. 그러면 십계명의 취지가 죽어버려요. 나타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줘서, 전에 숙제 10페이지를 쓰라는 것을 20페이지를 쓰라고 하고, 20페이지를 쓰니까 100페이지를 써라, 계속 숙제의 양을 늘려가는 거예요. 헉헉거리면서 숙제를 못하지요. 못하면 뭐가 됩니까? 죄가 되는 거예요. 죄가 있는 곳에 하나님의 의가 있다고, 은혜가 넘친다고 로마서 5장에서 하잖아요.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친다.

 

주님께서 은혜로 건지는 방법은 뭐냐? 종 되었던 곳에서 스스로 나왔다는 소리, 그 입을 다물게 하는데 있습니다. 입에 지퍼를 채운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아시지요? 내 힘으로 절대로 빠져나오지 못한 것을 동행하시는 주님의 힘으로 빠져나왔다고 계속해서 은혜만 쳐다봐야 십계명은 저절로 완성이 돼요. 이게 바로 골리앗크레인입니다.

 

모세언약이 보여주는 골리앗 크레인이에요. 여호와를 믿는 것이 우상숭배가 안 되어야 될 텐데 여호와를 믿는 것이 우상숭배라면, 여호와 말고 뭘 믿어야 하고 뭘 더 보태야 되는가, 하는 그 문제가 생기겠지요? 머리가 복잡하더라도 참으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믿습니다. 여호와를 믿는 줄 알았어요. 십계명대로 믿고 제사든 뭐든 시키는 대로 다 했어요.

 

제가 몇 시간 전에 했습니다. 이스라엘을 백성들은 제사를 드리는 것을 믿은 거예요. 예배드리려고 교회 나오는 그것을 그들은 믿은 거예요.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고 자아중심이에요. 주님이여, 오늘 교회 나왔습니다, 헌금했습니다, 찬양했습니다, 봉사했습니다, 아멘, 그리고 집에 가는 거예요. 자기가 행한 것을 믿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열심히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다 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하나님의 골리앗크레인과 안 맞은 거예요. 안 맞으면 언약이 중간에 깨지는가? 그럴 수는 없는 거거든요. 하나님의 언약은 반드시 지켜야 되고, 이스라엘은 착각하고 있고, 그러면 주위에 뭘 배치해야 됩니까? 모압, 암몬, 모압과 암몬의 선조는 누구였다? 소돔과 고모라에서 빠져나온 아버지와 딸이 동침해서 나온 자손들입니다.

 

여기에 아람, 오늘날의 아람은 지금도 전쟁 중입니다. 시리아죠. 시리아 내전중이요. 그 나라가 아람이에요. 그리고 이쪽에 팔레스타인, 옛날 용어로 블레셋, 현대어로 팔레스타인입니다. 또는 에돔도 있어요. 에돔은 야곱의 형, 저주받기로 작정된 에서가 조상이 된 민족이 에돔입니다. 또 가나안 땅 열 족속도 있겠지요.

 

이런 나라들을 하나님께서 배치해서 “물어 쉭!” 이렇게 물게 하거든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자기가 뭘 믿는다? 여호와를 믿는다고 자부하잖아요. “우리는 애굽군대도 물에 빠트리고 나온 민족이야. 우리가 이정도야.” 하고 나서다가 대패를 봅니다. 그러면 뭔가 반성, 수정작업이 이뤄져야 되겠지요. 승리를 기대했는데 왜 우리가 패배했던고? 어디가 잘못인가?

 

그 때 사사들이 등장합니다. 지금 사사기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사사들이 등장할 때 사사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고 거기에 뭐가 임하는가 하면, 하나님이 신, 성신이 결합이 돼요. 성신은 어디까지 연결된다고 했습니까? 성신은 골리앗크레인이니까 골리앗크레인은 마지막 오실 어디까지 연결됩니까? 최종골리앗크레인 십자가와 연관되어 있지요.

 

그런데 십자가는 뭐냐 하면, 너는 죄인인데 내가 내 공로로 구원한다는 그 법칙이지요. 그 법칙이 드디어 성신을 통해서 약간 쫄쫄 하고 사사에게 들어옵니다. 그러면 사사는 기존의 것, 내 힘으로 밀어붙이고 내 믿음으로 밀어붙이려는 승리하려는 것에 반적을 일으켜야 되겠지요. 미디안군대에 대적하기 위해서 2만 2천명을 모집했는데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기드온아! 보내라.”

 

미디안 군대 대적하는데 2만 2천도 모자랄 판인데 보내라는 거예요. 성경에 보니까 그 이유가, 숫자가 너무 많다는 거예요. 1만 2천 보내고 만 명 남았는데 그것도 많다는 거예요. 그러면 누굴 보내고 누굴 남기란 말입니까? “제일 작은 숫자를 찾아 봐라.” “어떻게 합니까?” “물가에 가서 물을 먹여 보라.” 각양 모양대로 물을 마시는데 가만 보니 제일 작은 숫자가 뭐냐? 물을 손으로 떠서 먹는 그들이 숫자가 제일 적어요.

 

“됐다. 네가 목격했지? 하나님이 보낸 숫자가 어떤 숫자라고?” “제일 적은 숫자를 보냈습니다.” “내가 제일 적은 숫자를 보내는 것은 평소에 너희가 이방민족에게 침범을 당한 이유가, 압제를 당한 이유가, 힘으로 모든 것을 계산했고, 힘으로 이스라엘을 지탱하려는 그것이 바로 말로만 여호와, 예수, 천국, 하나님, 백날 해도 힘, 권력을 쥐고 그 권력을 소유해서 내가 내 모든 것을 얻고자 하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 보시기에 우상숭배라는 것을 이런 전쟁사건을 통해서 너에게 깨우쳐준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이 해석으로 기존교회가 설교 못해요. 이 본문가지고 해석하면 이렇게 해야 됩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가 이렇게 침체한 것은 여러분이 침착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사기 보세요. 그 300명은 정예부대였습니다. 꿇어앉아서 물을 마시면서도 적이 오는지를 다 살피면서 다 침착하게 마셨던 겁니다. 우리도 신천지가 오는지, 여호와의 증인이 오는지 침착하게 살펴서 우리는 비록 소수지만 소수라고 실망하지 말고 남은 힘을 주시면 우리가 기드온 군사가 되어서 이길 수 있습니다.” 이렇게 거꾸로 해석해버려요.

 

또 뭘 의지합니까? 힘을 의지해버리면 힘을 가진 자는 자기를 죄인으로 간주를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십자가와 소통이 안돼요. 중간에 언약과 언약이 끊어진 거예요. 북쪽 이스라엘이 망하고 난 뒤에 남쪽 이스라엘이 회개를 한 것이 아니에요. 북쪽이 힘이 모자라서 망했다고 한 거예요. 힘 기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어떻게 했느냐 하면, “요것들 봐라? 앗수르가 만만해 보이냐?” 그러면 앗수르를 정복했다는 말은 바벨론 제국이 앗수르 이후의 제국이거든요. 그러면 앗수르보다 힘이 더 세지요. 이 더 센 힘을 감당해 보라고 하니 감당 못합니다. 감당 못할 뿐더러 감당을 못하니까 어떻게 됩니까?

 

감당을 못하는데 또 거기에 안중근 의사가 등장하네요.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있으니 우리가 힘이 모자라면 하나님이 도와주실 줄로 믿습니다!” 하는 안중근의사, 또는 상해의 홍구공원에서 도시락 던진 사람, 일본천황 행렬에 권총 들이대다 실패한 이봉창, 요새 <밀정>이라는 영화도 한국에서 상영되고 있거든요. 그 전에 나온 영화는 <암살>

 

이런 애국자들이 그 당시에 등장했는데 성경은 그걸 두고 이렇게 합니다. 거짓선지자라고. 희한하지요. 힘을 의지하면 주님 보시기에는 거짓선지자에요. 왜? 십자가와 연계되지 않기 때문에. 고린도후서 13장에는 십자가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저에게 이렇게 질문해요. “목사님, 딱 깨놓고 이야기합니다. 십자가가 뭡니까?” “고린도후서 13장을 보세요. 십자가는 ‘약하사 돌아가심’ 약해서 돌아가신 거예요.”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까?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그러면 십자가가 뭡니까? 약했다는 증거예요. 너무 약했다는 겁니다. 그 약함이 3절에 보면 강함이라. 고린도후서 12장에 나오지요. “내가 약한 중에 강하다. 이것이 내 은혜다.” 강해지는 것이 은혜가 아니고 “주여, 저 못해요.” 이게 은혜라는 거예요.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 12:10)

 

참 한국교회 설교와 비교해볼 때 억장이 무너집니다. 어쩌면 그렇게 정반대로 설교합니까? 근처만 가도 말을 안 해요. 어떻게 그렇게 정반대에요. “힘 생길 때까지 철야하세요.” 어떻게 그렇게 기도하는 목적이 정반대에요. 힘을 모으기 위해서 기도하라는 거예요. 힘을 빼기 위해서 기도해야지요. 어깨에 힘을 빼고, 목에서도 힘을 빼고 강도로 살고, 세리로 살고, 거지가 되어서 사시라는 것이 주의 뜻이에요. 그래야 감사의 폭이 넓어질 것이 아닙니까?

 

많이 용서받은 자가,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 뭐예요? 많이 용서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 성경이 폼으로 있는 것이 아니잖아요. 이 소리를 듣는 목사들이 “이 목사님 말이 맞는데, 우리가 신학교에서 다 그렇게 배웠는데 장사가 안 된다고요, 장사가요. 영업이 안 된다고요.” 장사는 속이는 거예요. 모든 장사는 무조건 속이는 겁니다.

 

제가 설교할 때 그런 설교했습니다. 사람이 왜 스트레스를 받느냐 하면, 내가 속이는데 상대방이 내 속임에 안 걸려들어서 화가 나서 스트레스를 받는 거예요. 스트레스의 원인제공을 누가 했습니까? 내 기대가 너무 높아서 그래요. 내 욕심이 너무 과해서 자기가 자기 손으로 눈을 찌르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아이큐 40되는 정박아가 스트레스 받습니까? 그 사람들은 암에 안 걸린답니다.

 

투쟁과 경쟁이 없는 곳에서는 암이 안 걸려요. 암이 어디서 생기는가 하면, 스트레스에서 생기고, 스트레스는 항상 현장을 조사해보면, 대기업에서 밤새도록 불을 켜고 야근하듯이 경쟁마당에서는 스트레스가 생겨서 암이 걸리고 그런 거예요. 살아보려고, 살아보려고, 그게 서서히 자살하고 있는 중이에요. 사사기는 무기 값도 안 되는, 무기라고 할 수도 없는 것들, 그게 무슨 무기입니까? 항아리 들고, 횃불 들고. 캠프파이어 하는 겁니까? 나팔이나 불고. 그게 뭐예요?

 

하나님의 모든 전쟁은 여리고성 도는 것도 마찬가지인데, 이미 결과물로서 표현하는 것이 전쟁이에요. 시작하기 전에 전쟁이 아니고 전쟁은 이미 끝났다는 것을 미리 앞당겨 보여주는 증거물이 바로 전쟁의 무기입니다. 빰빠라밤~! 나팔은 언제 불어요? 전쟁이 끝났을 때 부는 나팔이거든요.

 

그게 바로 희년의 나팔입니다. 사람 이름 아닙니다. 7 곱하기 7 더하기 1, 그래서 50년째가 희년입니다. 희년이라는 것은, 모든 하나님의 법은 완료되었음, 그것이 희년입니다. 희년에서는 처음 있던 위치로 돌아가는 거예요. 모든 종들은 해방시켜 주고, 처음부터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 누가 갑이 되고 또는 을이 되는 사람이 따로 없었어요.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 갑이었고 전부 다 여호와의 거저주시는 콩고물, 혜택 받고 땅을 분배받았어요. 그 땅은 조상이 물려준 것이 아니고 여호와에 의해서 배분된 땅이기에 그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것을 기업, 쉬운 말로 상속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묻습니다. 천국은 소유권이 누구한테 있습니까? 예수님.

 

그렇다면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은 무슨 공로로 들어갑니까? 공로 없지요. 그러면 왜 들어갑니까? 아들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이 맏아들 것으로 다 했으니까 둘째 아들, 셋째 아들은 맏아들에 종속되니까 상속을 받은 거예요. 그것이 기업이라 하는 겁니다. 그 기업을 갈라디아서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성령이라 해요.

 

아브라함에게 뭘 준다? 씨 주지요, 땅 주지요, 복 주지요. 그걸 신약적 용어로 바꾸면, “너희에게 성령을 주리라.” 누가복음 11장에 나오지요.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아비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찌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 11:9-13)

 

마태복음의 버전을 누가복음에서는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11) 마태복음에서는 좋은 것으로 준다고 했는데 누가복음에서는 성령을 주신다고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성령으로 이어지는 책이거든요.

 

성령을 준다 하니 땅의 것이 아니고 붕 떴지요. 그러면 땅의 것을 찾으면 우상숭배가 되지요.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 3:5) 이것이 이번에 대전에서 할 수련회의 내용인데, 땅에 것을 생각하는 것을 탐심이라고 하고 탐심은 곧 우상숭배라고 나와 있어요.

 

그러니까 너희는 땅의 것을 생각지 말고 하늘의 것을 생각하라고 되어 있어요. 왜냐 하면,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골 3:4)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하니까 또 사람들이 오해를 해서 그것을 율법으로 지키려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하니 부동산을 다 팔아서 교회에 바칠까? 그러면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될까?’ 그렇게 생각하는데 여러분, 죽을 때까지 재산 꼭 쥐고 있으세요. 돈 없는 부모는 부모가 아니라고 했잖아요.

 

죽는 날까지 놓으면 안돼요. 죽고 나서야 n분지 1로 갈라먹든지 말든지 그것은 알아서 하라고 하고. 돈은 바치는 것이 드리는 것이 아니에요. 쥐고 있으면서 주의 주신 것이라고 알기만 하면, 그 소유권이 이미 누구의 것으로 등기되었느냐 하면 주의 것으로 이미 등기가 되었어요. 주님 주신 혜택을 왜 마다합니까?

 

골프장에 가서 “나이스 샷! 할렐루야!” 왜 이런 기회를 놓치십니까? 빠라빠라바라빰! 비싼 오토바이 몰고 도로를 누비는 이 축복을 주님이 주신 것으로 알면 되지, 왜 오토바이를 팔아서 교회에 갖다 바치는 짓을 왜 하느냐는 말이지요. 누구 좋으라고? 20시간 이상 강의하니 복음이 이제 나오네. 미국에 와서 이제야 복음이 나오네.

 

노동한 것도 주의 은혜고, 노동해서 얻은 월급도 주의 은혜고, 모든 것의 소유권만 등기이전하면 돼요. “천국은 공짜로 받습니다.” 하는 증거가 “이 재산은 주님이 주신 재산입니다.”라는 겁니다. “손 떼! 자식들 다 저리가! 내꺼야.” 이게 뭐냐 하면, 천국은 이와 같이 공짜로 주셨다는 겁니다. 왜? 이미 구원받은 사람은 최후의 승리가 된 상태를 생활로 마음껏 발산해 주면 돼요.

 

“골프 쳐도 나는 구원받았어.” 하면서 마음껏 골프를 치시고, 뭐든지 마음껏 하시면서, 누리면서, 이것이 바로 다윗언약의 정점, 바로 전도서 아닙니까? 묵시문학이고 계시문학이라고 해요. 전도서, “네가 살아가면서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아라. 이것이 너에게 준 기업이다.” 분배하는 하늘의 복인데 거기 보면 놀라운 말씀이 나와요.

 

포도주를 마시면서, 네가 마음껏 즐겁게 살아라. 왜? 어차피 세상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기 때문에. 헛된데 허무주의로 빠지는 것이 아니고 그 헛됨이 헛되기에 즐겁다? 이게 바로 다윗언약의 골리앗크레인이 주는 축복입니다. 어제인가, 우리교회에 질문한 것이 있지요. “목사님, 성경에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헌금을 하라고 하는데 헌금하지 말라는 목사님 말과 성경이 지금 충돌을 일으키고 다른 것이 아닙니까?”

 

왜 그렇게 엄청난 짓을 합니까, 라는 식으로 비난하듯이 “헌금하지 말라는 말을 왜 합니까? 설교하는 사람에게 봉급도 주려면 헌금을 해야 되지 않습니까?” 이렇게 하기로 제가 답변을 못하다가 이제야 한글 자판이 있어서 답변을 했어요. 연보는 가족끼리는 하는 법이 아니에요. 성도는 가족이지 남이 아닙니다. 그러면 고린도전서에서 연보를 모으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이름도 성도 모르는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서 잠시 돈을 모으는 것이지 한 가족일 경우는 서로가 서로의 생계를 책임지면 되지요.

 

물론 자기 생계가 기본이고요. 자기 생계도 안 되면서 남 도와주는 그런 오버는 하지 마시고, 여유가 된다면 같은 가족이라 도와줄 뿐이지요. 복음 전하는 사람은 가족이지 봉급고용인이 아닌 거예요. 그리고 복음 전하니까 도와주라고요? 복음 전하는지 아닌지를 누가 판단해요? 돈 내는 오야 나름이지요. 헌금하려고 했는데 설교자가 지난주까지는 복음을 전했는데 이번 주는 정신이 이상해졌는지, 무슨 욕심을 내는 지, “선교합시다.” 이렇게 나오더라는 말입니다.

 

“선교합시다.”가 왜 복음이 아니냐는 것은 지금 따지지 맙시다. 지금은 단적인 예를 드는 거예요. 선교합시다, 다른 교회와 연합집회 합시다, 정치꾼으로 나오더라는 거지요. “에이, 거둬라.” 하고 꺼내던 봉투 도로 집어넣어버려야 돼요. 왜? 복음전파가 되어야 하는데 복음이 아닌 곳에 돈을 주는 것은 사탄의 일을 하라고 협조하는 것밖에 더돼요?

 

그런데 일반교인들은 그런 식으로 생각 안 해요. ‘하나님 보시기에 내 할 것은 했으니까 나한테 책임지우지 마소.’ 이런 식으로 한다고요. 주께서 무슨 거지입니까? 주님한테 왜 동냥을 해요? 주님 돈인 것 같으면 알아서 제대로 복음 전하는데 써야지, ‘난 책임 다 했으니 장로님이나 집사님들이 나보고 책임 지우려 하지 마세요. 십일조는 따로 안 해도 얼추 계산하면 십일조 한만큼 됩니다.’ 이런 계산을 다 해가면서 왜 그렇게 합니까?

 

그냥 복음 전하면 가족이고 가족은 연보를 하면 안돼요. 먹는 것 같이 먹고, 쫄면도 먹고, 떡볶이도 먹고, 이렇게 함께 살면 되는 거예요. 더 중요한 것이 있어요. 복음 전하는 사람은 목표가, 굶어죽는 것을 목표로 해야 돼요. 왜냐하면, 복음의 내용 안에 무슨 내용이 들어 있느냐 하면, 이 땅보다 천국에 좋다는 것이 들어 있고, 사도바울의 소원이 뭐냐 하면, 하루 빨리 죽어서 천국 가는 것이 소원이에요.

 

그런 훌륭한 목사님께 연보를 해버리면 목사로 하여금, 지금 아파트 좋은데 사놓고 가려고 하는데 하꼬방에서 발목을 잡는 것 밖에 안 되는 거예요. 제가 지금 과한 예를 들어서 남을 가리키던 손가락이 점점 나에게 오니까 말을 정도껏……?

 

그리고 더 마지막 네 번째 이야기한 것은 뭐냐? 복음적설교자의 목표가, 돈 내라는 것이 목표가 아니고 “성경에 있잖아. 이 교인들아! 성경도 안지키나? 일하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하라고 했으니 돈 내라.” 이것이 목표가 아니고, “제발 좀 놔주소. 이렇게 전하다가 굶어죽을래.” 이게 목표가 되어야 되고, 중요한 것은 네 번째로, 방금 한 세 번째 것 있잖아요.

 

그걸 흉내 내는 사기꾼들이 있으니 조심하라, 이것으로 답글을 달았어요. 내가 이렇게 목숨 바쳐서 전하는데 “나 지금 굶어죽는다. 내가 이렇게 굶어죽는 것이 소원이었어.” 왜 그 이야기를 자꾸 합니까? 누구 들으라고? 그것은 무슨 꼼수고 무슨 통박입니까? “그래? 그럼 잘 가!” 하니까 “내가 죽는다니까?” “가라니까!” 선교사들 가운데서 99퍼센트가 그런 사람들이에요.

 

“주를 위해서 목숨 바치기 위해서 왔습니다.” 그 이야기를 왜 우리한테 하는데? 반전을 노리는 거예요. 혹시 꼼수 아니에요? 그냥 복음만 전해요. 내가 이렇다는 이야기를 하지 말고, “여러분, 예수님이 이렇게 해주십니다.” 그 이야기만 하게 되면 “당신 죽고 싶어? 못 죽여.” 하고 발목 잡는 식으로 “더 외쳐!” 이렇게 할 수도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