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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흐름11 160917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10. 8. 15:37
2016-10-08 09:32:41조회 : 9         
뉴저지아카데미강의-구약의 흐름 11강이름 : 오용익 (IP:125.136.25.28)

뉴저지아카데미-구약의 흐름 11강

 

지금 우리가 ‘구약의 흐름’을 하고 있습니다. 공룡의 골조에 대해서 언급을 한 이유가, 구약이 범위가 엄청나요. 그런데 그 골조를 언급하면서 그 범위의 최고정점이 다윗언약이라고 했습니다. 생소한 단어처럼 느껴지는데 성경에 분명히 나옵니다. 이 다윗언약으로 인하여 뭐가 밝혀지는가 하면, 성도의 운명이 확정됩니다. 성도의 운명, 또는 사람이란 무엇인가.

 

다윗언약을 지난 시간에 우리가 조사를 해보니까 거기에 끼어들지 말아야 할 것이 끼어들었어요. 그게 바로 ‘나’、 그 ”나”라는 이질적인 요소가 끼어들어서 나가 나에게 말썽을 일으켰습니다. 그 말썽을 일으킨 나는 마귀가 집어넣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 나를 뺄 수가 없습니다. 이빨이 아프면 내 이가 아파야 되는데 내가 아프잖아요. 누가 욕을 하게 되면 욕이라는 것은 그냥 음파에너지인데 욕을 얻어먹고 난 뒤에는 기분이 되게 더럽지요.

 

밥도 안 먹히고. 더 놀라운 사실은 내가 보고 싶은 사람은 못 본다는 것은 육체적으로, 시각적으로 거리가 멀어졌다는 그것뿐인데 보고 싶은 사람을 못 보기 때문에 시들시들 앓다가 죽어요. 상사병이지요. 우리는 분명히 육체밖에 없는데 도대체 이 육체를 자기 맘대로 가지고 노는 그 나라는 괴물 때문에 이 육체가 힘들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나라는 것을 잊을 수가 없어요. 결국 인간이라 하는 것은……, 한 번 적어보겠습니다. 인간이라 하는 것은 내가 나가 되기 위해서 사는 거예요. 나로 남기 위해서. 그런데 그 나가 누군지를 몰라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우리는 하나님의 지시에 따른 것이 아니고 건방지게 내가 나서서 하나님의 법을 지킵니다. 그렇게 법을 지키다 보니까 그 나가 얼마나 수상하다는 사실은 아는데 내가 나서서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그 나가 말썽을 일으키는 것에 대해서 대책이 없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나에 대해서 다루기 시작하는 것이 뭐냐? 다윗언약을 통해서 그 나를 변형시킵니다. 원래 육신의 주인은 하나님이고 하나님께서 이름을 지어줄 때 그 이름이 나가 되는 거거든요. 어제 이야기했지요. 어제 어려운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이름을 지어줄 때는 이름 말고 과잉된 여분의 의미가 또 붙어서 합치되지 않고 일치되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원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의 이 육체의 이름은 아담인데 아담에 합당하도록 해야 우리 육체가 편하거든요. 원래 주인이 합치한 나를 집어넣어줄 때 딱 나와 육체가 하나가 되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갈 수가 있고 천국에 살 수가 있는데 이 엉뚱한 나가 끼어들었으니까 그 나를 교체할 필요가 있는 겁니다. 교체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엉뚱하게 끼어든, 있을 필요가 없는 나를 끄집어내는 작업에 나서는데 그것이 예레미야 31장에 나옵니다.

 

예레미야 31장 31절을 제가 읽어볼게요.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어요? 그 무엇에? 그 마음에 두지요. 그 마음까지 누가 들어와요? 하나님의 언약이, 하나님의 치료시스템이 차고 들어오는 거예요. 그 마음 안에 뭐가 들어 있는가? 가짜 나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집어넣은 가짜 나가 들어 있어요. 그동안 신명기 28장에서 법을 지키면 복을 받는다, 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복을 못 받는가?

 

그 나가 가짜 나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집어넣어준 그 나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법이 왔을 때 지킬 수가 없어요. 지킬 수가 없으니 여기서 충돌이 일어나고 대결이 일어나는 겁니다. 육체는 하나님이 만들어놓고, 엉뚱한 괴물이 와서 이 육체를 내 것이라고 하니까, 하나님이 거기에 대해서 율법을 줘서 제대로 말씀대로 지키라고 하니까, 건방지게 마중을 나와서 지키는데 그게 가짜 나이기 때문에 그것이 안 맞지요.

 

법을 위반하면 저주가 주어지는 거예요. 결국 인간은 나를 감당 못해요. 잘못 들어온 나를 감당 못하기 때문에 결국 우리는 정말 세상 살기 괴로우면 이 육체를, 이 그릇을, 가짜 나가 이 육신을 깨뜨릴 수밖에 없어요. 여러분이 아시지요? 그것을 두자로 뭐라고 합니까? 자살이에요. 너무 힘들어서.

 

섭씨 16도에서 18도, 습도는 60퍼센트, 굉장히 행복한 조건이잖아요. 그런데 사랑하는 자식이 죽어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이 구비해주신, 하나님이 햇빛 주시고, 달빛 주시고, 별빛 주시고, 공기주시고, 하나님이 자기 육체를 이렇게 쾌적하고 이렇게 좋게 만들어놓았는데 자기 자식을 잃어버렸다는 그 괴로움 때문에 결국 자살하잖아요. 뭐예요, 인생이라는 게?

 

이 상태가 지금 에덴동산 같아요. 열시 지금 이 상태, 너무나 쾌적한 상태를 줬건만, 우리의 과거에 대한 아픈 기억, 트라우마, 미래에 대한 불안감, 현재의 주님의 축복을 완전히 찢어버리고 짓밟아버리는 것은 엉뚱하게 침투한, 원래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닌 가짜 나가 들어와서 나로 하여금 주신 선물과 은혜도 감당 못하고 못살겠다고 찢어버리고 죽어버리는 거예요.

 

뛰어내려서 죽고, 약 먹고 죽고, 차에 찡겨서 죽고, 괴로워서 죽고. “주여, 내가 주의 뜻은 알겠는데요. 내 맘이 편치 않습니다.” 맨날 하는 핑계가 그 핑계잖아요. “그 마음? 내가 손대줄게.” 이게 마지막 언약입니다. 방금 우리가 본문 보는데 교회에서 거의 나오지 않는 용어들이 막 쏟아지지요. 뭐라고 했습니까? 언약이지요. 교회에서 언약을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제가 했는데 그 이유가 뭐라고 했습니까?

 

성경에 언약이 이렇게 들어 있는데도 왜 교회에서 교인들에게 이 언약이라는 말이 생소하게 들리는 이유가 뭐냐? 언약이 되어버리면 일방적으로 하나님이 다 해주는 거거든요. 그런데 교회는 그렇게 하게 되면 장사가 안 된다고 생각해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자꾸 행함을 강조하는 거예요. 이것 하라, 저것 하라, 법이 있잖아, 법을 지키라.

 

법을 지키라고 하니까 교인들마다 가짜 나가 가동되는 겁니다. “이것 지키면 보상 줍니까? 이것 지키면 반대급부 주십니까? 이것 지키면 30배, 60배, 100배, 복 주십니까?” 그 복 받아서 뭐하려고요? 그 자체가 마귀적이고 괴물적인데요. 어제도 이야기했는데 최고의 설교는 뭐라고 했습니까?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어요. 주께서 이렇게 일하십니다.” 그것을 그대로 감사히 받도록 전하면 그게 최고의 설교라 했지요.

 

그러면 최악의 설교는 뭐예요? 자꾸 하라고 시키는 거예요. “십자가를 받아들여라.” 누가 받아들이기 싫어서 안 받아들입니까? 꼭 명령조라. “십자가를 받아들이라.”는 그 설교 하고, “십자가가 여러분 속에 스며들 겁니다.” 이거 하고 주체가 달라요. 행위의 주체가 진짜 설교는 주님이고 가짜설교는 내가 뭘 해야 된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침례교신학이고, 오늘날 개혁주의신학이고, 그게 구원파에요. 이게 신천지고 구원파거든요. 사람들이 구원파에 쉽게 빠지는 이유가 기존에 이미 훈련되어 있어요. 명령에 순응하는 것이 훈련이 되다 보니까 이왕 순응하는 것 천국에 확실하게 가는 조건을 제시하는 것으로 옮기겠다는 거예요. 확실하게 죽어서 천국가고 살아서 복 받는 교회로 옮기겠다는 겁니다. 꾀는 자도 엉터리, 마귀고 그걸 듣는 나의 자아도 엉터리에요.

 

하나님께서 그 점을 아십니다. 그래서 마지막 언약이 뭐냐 하면, 지키라는 것이 아니라, 지키라는 법을 아예 지킬 필요도 없이 우리의 마음을 절개해서, “이놈의 괴물, 마귀 괴물, 어디 들어 있나? 어디 숨었나?” 쫙 쪼개버립니다. “이 안에 들어 있네? 마음 안에 들어 있네.” 드디어 말씀을 지키라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와 버립니다.

 

들어와 버리면 우리의 자아가 곱게 순응할까요? 발작을 일으키면서 반발할까요? 발작하고 반발합니다. 고개를 젓습니다. “하라고 하면 듣지만 받아들이라고 하면 안 받아들이겠습니다.” 왜냐? 그냥 받아들이면 자기 고유의 가치와 의미가 다 파괴되잖아요. 지금까지 살아온 내 가정, 내 인생, 이것이 완전히 깨지잖아요. 극렬하게 저항입니다. ‘내가 예수 믿으면 손에 장을 지진다.’ 극렬하게. 십자가를 외면해요. ‘하라’는 것은 받아들여요.

 

하라는 것은 받아들이는 이유가 하기만 하면 점점 더 나의 가치가 증가하니까. 나는 내가 되기 위해서 살거든요. 나는 정말 내가 되기 위해서 산다. 전에 강의에서 나의 욕망은 무슨 욕망이라고 했습니까? 나의 욕망은 나를 욕망하는 거예요. 이상적인 나. 십자가는 절대로 끼어들면 안 되지요. 나를 파괴하는 십자가, 자기를 부인하라고 소리치는 십자가, 그것은 절대로 끼어들면 안돼요.

 

집안 식구가 너의 원수라는 말을 절대로 들어서는 안 되지요. 하면 된다는 쪽으로 긍정적 사고방식이 와야 계속해서 나라는 괴물로 되어갑니다. 하지만 이것은 가면 갈수록 하나님의 침투하는 언약과 대치가 되는 거예요. 자, 그렇다면 여러분이 궁금한 것이, “그러면 목사님, 마지막 언약인 새언약…….” 다시 읽어볼까요? 예레미야 31장 33절,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얼마나 간단합니까? 하나님의 방법은 “하라, 하라” 했는데 그 동안은 그 “하라, 하라.”가 마음까지 안 들어오고 코앞에 두었어요. 돌판에 써서 십계명 지키고, 안식일 지키고, 십일조 지키고, 그렇게 하다가 이제는 어떻게 한다? 지키지 못하니까 완전히 마음을 절개해서 할 필요도 없이 아예 장착을 해요. 법을 우리 속에 집어넣어요. 집어넣고 아예 봉합을 해버리지요.

 

그러면 우리 안에 뭔가 이질적이지만 들어왔어요. 성령의 세례인데 예수님께서 일점일획이라도 모든 법을 다 이루었기에 의가 되었다는 그 의가 우리보고 지키라는 것이 아니고, 그 의를 우리 마음속에 집어넣어 버린 거예요. 로마서 7장을 잠시 봅시다. 로마서 7장에 보면 기이한 대목이 나오는데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이 서서히 자살해 가는 몸에서……, 자살해야만 자살이 아니라 누구나 지금 자살하고 있는 중입니다. ~ing, 진행형이에요.

 

누구나 자살하고 있는 그 중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완전히 절망입니다. 절망인데 그 다음에 뭐냐? 절망으로 해 놓고 그 다음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지금 이 사람이 성도입니까, 아닙니까? 성도에요. 성도 안에 뭐가 있다? 계속해서 즐거운 마음으로, 가벼운 마음으로 충돌을 보고 있는 겁니다.

 

‘아하, 내가 저렇게 살았지.’ 그것도 이미 구원받은 상태에서 즐거운 마음으로 보는 겁니다. ‘아하, 내가 법 지켜서 30배, 60배, 100배의 욕심을 내는 그 죄가 아직도 내 안에 들어 있구나. 목사는 그것을 노리고 나를 속여 왔었어. 그리고 지금도 교회에서 속이고 있다. 아, 저게 평생 저기에 매여서 내 자아가, 엉터리 괴물 같은 자아가 저거한테 속아서 평생 돈 갖다 바치고 충성하고, 그러면 인생이 역전될 줄 알았지.’ 역전되어 봐야 그것도 자살이에요.

 

8장에 이런 내용이 나와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진짜 우리 맘속에 언약의 완성의 의가 마음을 절개해서 들어왔다는 사실을 어떻게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가? 확인이 되어야 우리가 구원받았는지 아닌지를 알 수가 있는데 어떻게 확인이 될 수 있는가? 그 방법은 뭐냐 하면, 새로운 법을 우리 속에 만듭니다. 우리 안에 새로운 법을 만드는데 그 법이 뭐냐 하면, 악이에요. 또는 죄입니다.

 

무엇과 관련되어 있느냐 하면, 십자가와 연결된 악을 우리 마음속에 생성시킴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생성하는 악이라는 이름으로 의인이 되는 겁니다. 우리 속을 죄인으로 만드는 거예요. 그런데 그 죄인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너무나 감사하게도 이미 십자가와……, 지금 카메라가 무엇과 연결되어 있어요? 전선과 연결되어 있지요. 연결된 십자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새언약의 완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네가 못한 것 내가 했다는 그 공로를 드러내 위해서 새롭게 연결된 죄와 악이 우리 속에서 점점 더 커지는 겁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그래서 우리는 죄인 되는 거예요. 전에 죄는 뭐냐? 내가 규정한 죄인데 이번에 죄는 뭐냐? 이미 우리를 구원해 주신, 우리 속에 하나님의 의를 집어넣으신 분이 새삼스럽게 우리를 죄인으로 규정하기 때문에 그 죄인이라는 말은 뭐냐 하면, “너 구원 받았어. 너 구원받았어.”의 반복을 우리에게 확인시키는 죄요, 악이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사도바울이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그래놓고 금방 1초도 안되어서 뭐라고 합니까? 똑같은 인간이 똑같은 고백을 해요.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고백하는 내가 “주여, 찬양합니다.”라고 고백하고 있어요. 다른 사람 같으면 “너의 정체를 밝혀라. 어느 쪽이 진짜 참 모습이냐?” 그렇게 하지요.

 

마음껏 죄인이 되어야 돼요. 즐겁게 죄인이 되고 감사히 죄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만이 성도입니다. 설교하는 목사가 “여러분, 설교하는 것이 죄입니다.”라고 마음껏 강단에서 고백하는 사람만 성도인 목회자에요. “제가 심방하고, 설교하고, 성경공부하고, 기도하는 그것도 다 죄입니다.”라고 마음껏 고백하는 사람, “이 교회 자체가 죄인의 집단이고 전부 다 죄 덩어리입니다.”라고 다 같이 동의하는 교회, 그게 참된 교회에요.

 

그게 새 언약의 부대효과, 동반되는 효과, 그게 바로 새 언약의 완성을 증거하는, 십자가를 증거 하는 성도입니다. 지금 우리가 구약의 흐름을 하고 있어요. 지난 시간에 뭐 했습니까? 다윗의 언약을 이야기했어요. 다윗이야기 하면서 다윗과 언약의 관계를 이야기했지요. 다윗이 비로소 죄인이 됨으로서 비로소 다윗언약의 노선에 있음을 본인이 확인했습니다. 제사를 원치 아니하고 번제를 원치 아니하고, 요새 말로 하면 돈을 원치 아니하고, 하나님께서는 상한 심령을 원한다는 그 고백이 방금 제가 말한 그 다윗언약의 완성, 십자가 앞에서, “주께서는 십자가로 인해서 새롭게 늘 발생되고 매일같이 발생되는 상한심령을 원합니다.” 하는 거예요. 여기 있습니다, 하고 내놓으면 되는 거예요.

 

여러분이 인생을 살면서 참 힘든 일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저나 여러분이나 다 마찬가지지만. 그러나 이걸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의 몸에 옛 자아도 있어요. 옛 자아가 있어야 죄를 지을 것이 아닙니까? 옛날 자아도 있고 새로운 자아도 있고. 이것은 제 이야기가 아닙니다. 로마서 7장의 사도바울의 고백입니다. 성령 받은 사도바울의 고백에 두 개의 자아가 다 있어요. 그러나 그것이 즐겁지요.

 

왜? 한쪽은 오호라 곤고하다는 고백을 해야 될 그 자아고, 한쪽은 돌아서서 히히히, 웃어야 될 자아가 병행하는 자만이 성도거든요. “오호라 곤고한 사람이로다.”가 없으면 성도가 아닙니다. 사람이 제일 서글픈 것이 뭐냐 하면, 자기가 아는 죄를 자기가 아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원하고자 할 때 이것은 파탄입니다. 이것은 실패에요. 이것을 사자성어로, ‘복음폐인’이에요. 맨날 복음을 보면서도 폐인이라.

 

아주 꼼수를 부리는 거예요. 이 사람들에게는 즐거움이 없고 감사가 없어요. 노력하고 있는 중이에요. ‘그래. 내가 성경을 보고 죄인인 것을 알고 성경을 보고 십자가를 알아서, 내 속에 있는 내 십자가를 가지고 내 죄를 건져보자.’ 뭐해요, 지금? 장난치는 겁니까? 갑자기 표정들이 어두워지고 있어요. 불교경전에 이런 말이 있어요. “무쏘의 뿔로 가거라.”

 

성경에서는, 그 무쏘의 뿔을 톱으로 잘라버려야 해요. 무슨 무쏘의 뿔입니까? 뭔가 부딪히는 것이 왔을 때는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부딪히는 것이 왔을 때는 피하면 되는 거예요. 이거 몰라서 자살하는 사람이 수십만이에요. 부딪히는 것이 오면 피하면 될 것인데 그걸 꼭 이기려고 한다는 거예요. 이 더러운 자아가 고집을 부려서 자기도 망하고. 어려운 상황이 오면 피하면 되잖아요. 그렇지요?

 

왜 그걸 이겨야 됩니까? 이 뿔로, 무쏘의 뿔로 들이받으려고 하는 거예요. 무쏘의 뿔 다 자를 거예요. 쓸데없이 그 뿔 그걸로 뭐하려고요? 살아가려면 불어터진 쫄면처럼 살아가야 돼요. 어제 그 쫄면 이야기 아닙니다. 어제 그 쫄면은 정말 맛있게 안 불고 잘 되었어요. 거의 다 먹었을 때 보니까 그 때는 불어있어요. 인생 그렇게 살아야 됩니다. 불어터진 쫄면. 우리는 다 실감합니다. 동영상 보는 사람은 실감 못해요. 우리끼리의 혜택입니다.

 

지금 이 자아가 괴물인데 고맙게도 괴물인 것을 알려주시는 그 자체가 이미 구원받았기에 그 불어터진 것을 즐기라는 그 말입니다. 어차피 우리는, 어제 이야기했지만 우리는 이미 쫓겨난 입장이라는 말이지요. 우리가 날씨가 덥니 춥니, 할 그런 입장이 아니에요. 원래 살던 곳에서 “매나 맞아라.” 하고 쫓겨난 입장에서 그냥 이렇게 사는 것도 고마운 줄 아시기 바랍니다.

 

내 자아가 내 자아에게 문제를 던지면 그것은 해결이 안 됩니다. 물에 빠진 어리석은 자가 자기 운동화 끈을 잡아당겨서 물에서 건지려는 거예요. 그게 됩니까? 물에 빠졌다 칩시다. 허우적대잖아요. 수면에 자기 운동화가 보이거든요. 그 운동화 끈을 잡아당깁니다. 그렇게 해서 건져지겠습니까, 도로 빠지겠어요? 도로 빠지지요. 이게 종교라는 거예요. 자기가 자기를 구원하겠다는 겁니다. 도를 닦기도 하고, 금식도 하고, 회개도 하고, 헌금도 하고, 아프간선교도 하고, 백날 해봐야 운동화 끈 당기는 것밖에 안돼요.

 

문제는요, 썩어빠진 내 몸과 합치가 안 되는 자아를 사탄이 집어넣었기에 문제거든요.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아프가니스탄에 가지 말까요?” 아니 가세요. 가서라도 거기서 죄지으러 가시면 되는 거예요. 죄 지으려고 선교하시면 되고, 선교지에 가서 “나 죄인입니다.” 하면 그것이 복음전파가 되고, 무슨 일을 해도 마음껏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유발시킨 그 악과 죄를 마음껏 드러내시면 되는 겁니다.

 

“목사님, 그런 이론이 맞는 것 같은데 그렇게 되면 너무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습니까? 자기 구원받은 것 자랑질 하는 것 좋은데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습니까?”라는 오해를 할 수밖에 없지요. 그렇게 오해가 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옛날에는 칼 들고 설쳐야, 피를 흘려야 그것이 살인죄잖아요. 그런데 산상설교에 의하면, “나는 스테이크 썰 때 외에는 칼을 든 적도 없다.” 이렇게 나오다가 형제를 미워한 것도 ‘야, 이것이 악이 맞네.’ 추가적으로 죄를 지을 필요 없이 점점 더 십자가와 관련되어서 말씀만 보게 되면 악이 막 쏟아지면서 확대가 되는 거예요.

 

그게 얼마나 즐거운 일입니까? 옛날에는 오른 뺨 때리면 왼뺨 내놓으라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몰랐던 거예요. 어제도 어떤 분이 전화해서 그런 이야기를 해요. 이 근호 목사님의 설교가 무슨 뜻인지 몰랐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제는 그렇게 쉽답니다. 제가 고맙지요. 더 이상 쉬울 수가 없다. 주님이 하신 일을 받으면 되고, 내가 꼼지락거리면서 내가 따로 어떤 작전을 안 벌려도 되거든요. 왜냐하면 우리는 결과물이라고, 항상 우리는 진리를 늦게 알아요.

 

항상 늦게 안다는 말은, 어떤 일이 벌어져도 그것은 주께서 유발시킨 결과물이지 내가 일을 잘못해서 생긴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아까 로마서 7장을 읽었지만 이번에는 고린도전서를 봅시다. “정말 우리 마음에 누가 들어왔습니까? 우리를 위로한답시고 거짓말 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렇게 의심할 수가 있어요. 이해합니다. 그런데 성경 고린도전서 2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와요.

 

2장 11절에,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하나님에게 집 사달라고 기도할 것이 아니고, “구하라 주실 것이요” 했다고 해서 발로 대문 차듯이 할 것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것이 뭐냐 하면, 우리 마음을 절개하고 우리 맘속에 하나님의 마음을 집어넣으면, 그 때부터는 우리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 앞에서 얼마나 악랄한가 하는 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구원받은 티를 팍팍 내게 되어 있어요.

 

마음껏 드러내면서도, 죄와 악을 마음껏 드러내면서도, 물론 대단한 것도 아니고 남 보기에는 웃기는 죄지만, 오늘 뺨 때렸는데 왼 뺨 내놓지 않은 그것을 죄라고 간주하는 그것은 남들 보기에 웃기는 게 아니겠습니까, 어쨌든 그런 죄를 마음껏 드러내면서도 그 드러내는 작업이 내가 시도한 것이 아니고 일방적으로 마음을 쪼개고 들어오신 주님의 결과물이라면 우리는 어떤 경우라도 편하게 살 수가 있는 겁니다.

 

이미 완제품이기에, 이미 우리가 완료거든요. 아예 김완료, 박완료, 이름을 그렇게 바꾸세요. 최완료, 배완료, 이미 완료된 완제품이거든요. 완제품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는 뭐만 기다리면 되느냐 하면, 이것만 기다리면 돼요. “주님이여, 내일은 또 무슨 이벤트를 벌이시나이가? 어디서 또 어떤 귀인을 만나게 하실는지?” 그것을 기다림으로 살면 돼요.

 

 

오늘 아침에 기다렸더니 방울토마토를 주셨습니다. 그런 이벤트를 주셨고, 노루인지 사슴인지 노는 것도 보게 하셨고. 만약에 성령을 안 받은 경우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나는 아침에 일어나서 산책을 하기 결심했다. 딴따다단~! 결심했다. 나는 노루를 보기로 결심했다. 나는 꽃사슴을 보기로 결심했다. 아! 이게 웬일인가? 사슴은 있었는데 꽃은 안보이더라.’ “아! 신이시여, 정말 내 인생 가지고 이러기에요?” 그게 바로 마귀입니다.

 

자기가 결심한대로 하나님께서 왜 안 따라주느냐는 거예요. 결심한대로. 오늘 계약 체결하기로 했는데 왜 그 계약이 어긋나게 하느냐는 말이지요. 아침에 이 자아가, 이 괴물이, 하나님한테 잘 보이겠다고 기도까지 하면서 아부와 재롱을 다 떨어놓았는데 실제로는 내 기도대로 안 될 때 그 원망은 누구에게 다 쏟아냅니까? 주님한테 쏟아내지요.

 

그게 바로 여전히 괴물이 들어 있는 거예요. 전에 여러 번 그런 예를 들었는데요. 어떤 젊은 목사가, “한국교회가 썩었다. 이제는 나라도 한국교회를 바른 교회로 만들겠습니다.” 하고 남들이 가지 않는 길, 예수님께서 저 낮은 곳으로 가셨기 때문에 낮은 곳으로 간다는 거예요. 그런 오해들이 넘치도록 신학교에서 사람들을 다 버려 놓았어요.

 

낮은 곳으로 간다고 해놓고 어디로 가느냐 하면, 낙도에 갔어요. 아무도 찾지 않는 곳, 생활비 줄 돈도 없어서 고구마로 생활비를 대신 하는 낙도에 가서 스스로 자기의 쾌락을 즐기고 있는 거예요. 낮아짐에서 오는 반대급부로서의 쾌락을 즐기고 있습니다. “신이시여, 아무도 가지 않는 좁은 길을 가니까 예뻐해 줘~잉!” 그러고 있어요. 그 재미로 사는 거예요.

 

그걸 선교사가 간증이랍시고 교회에서 하면서 봉투봉투 열렸네, 해서 돈 내라는 수단으로 그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자기 고난을 상품으로 해서 온 동네 돈을 챙기는 거예요. 다 아는 장사인데. 그런데 그 낙도목사의 딸이 여상 나와서 육지에 나가서 취직을 했거든요. 오랜만에 그 딸이 어머니 병수발 돕겠다고 왔다가 다시 육지로 나가는 길에 그만 물에 빠져 죽었어요.

 

「목사님은 섬 주민들과 함께 생활전선에 뛰어들었고 겨우 고구마로 연명하다가 설상가상으로 사모님까지 영양실조에다 전신이 마비되는 중풍이 찾아들었다. 이 소식을 서울로 취직해 간 큰 딸이 들었다. 여상을 졸업해서 착실하게 홀로 서울서 살았는데 아버지 어머니가 살기 힘들다는 소식을 듣자 회사를 그만두고 어머니 병수발을 위해 섬에 내려와 있었다. 그런데 하루는 볼일이 남아 있어 서울로 가는 길에 차를 놓치고 갯벌로 가로질러 가다가 밀물 시간이 되어 그 딸이 바다 한가운데서 그만 죽고 말았다. 다음날 바닷가에서 죽은 딸의 장화와 옷이 발견되자 목사인 아버지가 교회 제단에 장화를 던지면서 하나님에게 달려들었다. “그 어린애가 무슨 죄가 있다고 물에 빠져 죽게 합니까? 제가 자진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생면부지의 낙도까지 오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왜 저희 가정을 돌보지 않는 겁니까?” 하면서 통곡했다. 이 근호, 그 목사의 잘못은 간단하다, p9-10」

 

하나님은 가만있다가 오른뺨 맞았어요. 자기 혼자 시나리오 다 쓰고. 그 목사가 낙도가는 것이 주의 일이고 낮아진 곳에 가는 것이라고 한 것은 뭐냐? 그동안 그가 배웠던, 그를 둘러싼 엉터리 같은 관행과 관습, 거짓 신학과, 거짓 선교와, 거짓 순교와, 거짓 낮아짐과 십자가에 대한 가짜 실적들로 둘러싸여 있으니까 거기서 뭘 느꼈느냐 하면, 내 자아도 저렇게 고상하고 거룩하고 경건했으면 얼마나 좋을까를 생각하는 거예요.

 

마귀가 마귀를 모델로 삼아서 자아를 계속해서 엉터리로 구축한 겁니다. 참, 캘거리에서 만날 한 분이 또 선교단체 출신이라는데. 선교단체가 그런 단체에요. 이미 거기서 해방되었으니 마음껏 이야기하지만. 젊은 애들을 다 버려놓았어요. 적어볼게요. 이게 다 뭐냐 하면, 산다는 것은 형식을 수호하는 것이다. 자아가 새지 않도록 울타리를 치는 거예요.

 

산다는 것은 어느 형식, 어느 울타리가 가장 이 괴물 같은 자아를 빛낼 수 있을까, 흉내 내기로, 모방하기로 평생을 살아가요. 산다는 것은 형식을 수호하고 사수하는 거예요. 지난 강의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소유가 없으면 존재도 없다고. 존재란 뭐냐? 그 범위 안에 들어 있는 여러 가지 잡동사니가 내 존재가 되는 거예요.

 

치매 걸린 할머니들보고 이사 가라고 하면 할머니가 기겁을 합니다. 그 집에 가면 온갖 잡동사니를 다 끌어 모아 놓았어요. 동네 돌아다니면서 다 끌어 모은 거예요. “어머니, 이거 다 새로 바꿔줄 테니 다 놔두고 우리 집에 들어오세요.” 하면 “안 된다. 이놈아. 이거 버리면 안 돼. 이건 죽은 너희 아버지가 아끼던 볼펜이다.” 나오지도 않는 볼펜. “이것은 죽은 큰 아들이 나에게 선풍기다.” 고장 나서 돌지도 않는 선풍기.

 

전부 다 잡동사니에요. 어떤 집에서는 한 트럭이 나온다는 거예요. 자기기억의 부스러기들이고 추억의 조각들이에요. 그 파편들을 조립해서 자아를 그만큼 구축한 겁니다. 그것이 바로 서서히 진행 중인 자살행위입니다. 그 할머니뿐만이 아니고 모든 인간은 마귀에 의해서 자살로 전부 다 밀침을 당하고 있어요. 교회가 해결해주지 않습니다. 성경공부가 절대로 해결해주지 않습니다.

 

이것은 새언약, 진짜 마음 절개하고 “그동안 마귀야 참 수고 많았다. 마귀는 어디까지나 마귀야.” 어제 이야기했잖아요. 베드로보고 “사탄아, 물러가라.” 그 이야기 했잖아요. “베드로야, 물러가라.” 하지 않고 “사탄아, 물러가라. 사탄이 여기 들어 있었네?” 그 사탄, 사탄이 준 자아가 네 육체를 못 이겼어요. 인간은 아무리 상상해도 이 자아는 근본적으로 육체 성향적이에요. 마아슬루라는 유명한 심리학자가 있는데 그 사람이 인간심리를 다섯 단계로 나눴습니다.

 

최고의 단계가 자아실현의 단계, 고독하게 혼자 살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그 자아가 문제가 있어요. 혼자 살고 싶은데 혼자 살게 되면 또 무슨 문제가 생기느냐 하면, 예수 없이는 살아도 외로워서 못살겠다, 그렇게 나오네. 예수 없이는 살아도 외로우면 못살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쩌라고? 네가 추구하는 것이 단독자라고 해놓고 단독자로 올라서니까 또 외롭다네?

 

이걸 언제까지 달래줘야 할지. 촌에 집짓고 사니 찾아오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좋은데 또 밤이 되면 외로워서 미치는 거예요. 혹시 현대 예술작품들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현대예술가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자아를 구현하는데 그 자아가 실제 자아가 안 맞는 것이 현대 예술의 딜레마에요. 자기 몸에 물감 칠하고 뒹굴기도 하고요. 우리나라 비디오아티스트 누굽니까? 백남준은 첼로 여인이라고 해서 예술이라기보다는 발광이지요. 자체발광과 관계없는 그냥 발광.

 

왜 자꾸 갭이 생기는 거예요? 이만큼 잡아서 나를 규명했다고 하니까 자아는 또 잉여, 여분의 것을 또 나타내가지고 또 목마름, 또 목이 말라요. 목마르니까 1960년대의 우리나라 1세대 포크송 가수가 이런 노래를 불렀어요. “물 좀 주소.” 미국에 와서 살다가 한국으로 도로 들어왔어요. “물 좀 주소~!” 그 노래나 “사노라면~” 그 노래나, 또 운동권학생들이 부르는 그런 노래들.

 

민족운동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자아를 어떻게 하면 발견하고 발췌할 수 있는지 잡으려고 하는데 괴물은 싱긋이 웃고 있어요. “따라오려면 따라와 봐.” 따라잡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욕망의 심원, 깊이, 어떻게 합니까? 그래서 종교를 버리고 예술로 갔다? 해답이 있습니까? 종교를 버리고 예술로 갔다는 말은 종교가 해답이 안 된다는 뜻이거든요.

 

어딜 가도 이 세상에 해답은 없어요. 그러면 대책은 간단해요. 그냥 상한심령으로 내놓으면 되는 겁니다. 이렇게, “물 좀 주소, 하는 이 목마른 상황을 주께서 만들었지요? 이제야 알았다.” 하는 순간 모든 괴로움과 모든 무쏘의 뿔은 다 잘리는 거예요. 불어터진 쫄면처럼 이게 형체가 모호한, 그렇게 살아가는 그것이 바로……, 사도바울은 빌립보서 4장에서 이렇게 합니다.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라.”(빌 4:11) 사도바울은 정말로 대단해요~! 사도바울이 결혼도 안했지요. 천막장사해서 적금 부어봐야 얼마나 부었겠습니까? 즐기는 거예요. 세상에 있으면서 즐기는 것이 아니고 세상을 떠나면서. 세상에 있으면서 즐기는 것은 불교고요. 불교의 한계는 뭐냐 하면, 자기가 죄를 고백할 대상이 없다는 거예요. 불교는 정신병자들입니다.

 

그래서 불교의 교리를 이야기했어요. 아까 적었는데. 나는 누가 되고 싶다? 나는 내가 되고 싶다. 그게 부처가 그렇게도 보리수 밑에서 고생하면서 깨달은 깨달음, 그것을 저는 한 문장으로 합니다. “나는 내가 되고 싶다.” 그 한 문장이에요. 부처가 들었으면 약 올라 죽겠다. “보리수 괜히 갔어.” 간단한 문장, 나는 내가 되고 싶은 거예요.

 

그러나 그 앞에 있는 나가 괴물이고 그 뒤에 있는 나가 사탄이거든요. 괴물이 괴물 되고 싶다는 거예요. 그런데 사탄이 만만치 않거든요. 계속해서 완전히 갖고 노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뻔히 그 괴로움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새언약을 본격적으로 시작합니다. 존재는 갇혀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갇혀 있다는 말은 벗어나서 구원받으라는 말이 아니고, 이미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내가 새로운 법을 주겠다. 그 새로운 법이 뭐냐 하면, 율법입니까, 복음입니까?

 

새로운 법이 이 성경책이에요. 이 성경책은 맨 성경책이고 달라진 것이 없어요. 이것이 성경책인데 옛날에는 이 거짓된 자아가, 내 육체하고 합치되지 않는 자아가 이것을 지키려고 했다면 지금은 뭐냐? “아, 주님께서 이것을 이렇게 지키셨구나. 이렇게 우리를 이런 식으로 죄인인 것을, ‘오호라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렇게 할 만한 우리를 ‘찬송하리로다.’ 이렇게 바꾸었구나.”라는 점에서 성경을 보게 하시는 겁니다.

 

똑같은 성경책이에요. 보태거나 뺀 것이 없어요. 똑같아요. 똑같은데 보는 관점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성경을 보면서 바리새인을 욕했는데 내가 바리새인이고, 사울이 사람 죽였다고 했는데 내가 사울이고, 충분히 이해가 되는 거예요. 사울이 다윗을 공격할 때, ‘저 못된 사울, 하나님이 좀 말리시지.’ 가만 보니 그 사울이 납득이 돼요. 어디까지 납득이 되는가 하면, 스데반 집사에게 짱돌을 던져서 죽였잖아요.

 

그들이 분해서 스데반집사를 죽였다는 말이지요. 그게 납득이 되는 거예요. 만약에 우리에게 교회가 있다. 이 교회에서 생활비가 나오고 노후대책까지 다 보장이 되는데, 차마 그 소리는 교인들에게 이야기는 안하지만 그렇게 되는데, 어떤 젊은 부교역자가 왔는데 설교를 해도 너무 잘해요. 11시 예배는 별로 안 오고 부교역자가 설교하는 아침 9시 예배는 막 웅성웅성 왔다가 다들 집에 가니까 어떻게 됩니까?

 

조용히도 아니고 종용히 불러야 돼요. 종용히 불러서 “참 설교 잘한다. 많이 배우고 참 똑똑하다. 너는 우리교회에서 크면 큰 인물이 못된다. 그러니 올 12월로 계약만기하고 섭섭하지 않고 이사비용 다 주겠다. 얼마 전에 이 근처에 전세 얻은 것도 다 내가 아는데 이사비용 보태줄 테니까 다른 교회 가서 복음 맘껏 전해라.” 그렇게 좋게 좋게 이야기해서 내 보내버립니다.

 

그거나, 짱돌 들고 때리는 것이나 똑같은 거예요. 왜 나와바리에 걸리적거리느냐는 말이지요. 내가 혼자 살고 싶은 이 절대적 성역에 네가 건방지게 끼어드느냐는 말이지요. 내가 너를 부교역자로 부른 것은 너보고 복음전하라는 것이 아니고, 나는 너를 이용하겠다는 내 심보에 놀아나라고 채용한 거예요. 이게 갑질이에요. 회사도 마찬가지고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내가 당회장이고 네가 부교역자로 왔으면, 너를 뽑은 이유가 뭐겠는가?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잘했습니다.’ 박수치라고 내가 뽑은 거야. 그러면 그 용도가 다 되었다면 폐기처분하는 것이 당연하니 너는 섭섭하게 여기지 마라. 아쉬우면 너도 5백 명 모으든지. 네가 천명 모으든지. 이것은 내 나와바리야.” 나와바리 무슨 뜻인지 아시지요? 조폭들의 그 나와바리. 개들 영역표시하려고 오줌 누는 것. “이것은 내 영역이야, 내 영역.”

 

인간의 자아는 근본적으로 아무리 고상을 떨어도 결국은 자아실현, 자기가 신이 되는 것이고 그 밑바닥 제일 처음 단계가 뭐냐 하면, 생존의 욕구입니다. 먹는 것 입는 것 없으면 안 되는 거예요. 아무리 예수, 예수 하지만 배고프면 빵 주는 사람이 천사고 예수님이라고 느껴질 수밖에 없어요. 육체니까. 육체와 자아가 지금 어울리지를 않아요. 아담의 이름에 부합되지를 않아요. 우리는 아담이 아닙니다. 인간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인간은 없고 죄인밖에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성령을 보내주지요. 그 마음이 예수의 마음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예수님의 에고를 우리 속에 집어넣어줘요. 집어넣어주면 육체가 있는 한, 고린도후서 이야기입니다, 육체가 있는 한 우리는 강력하게 반발하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이미 그 육체의 유혹을 사랑으로 용서하고 다시 들어오신 분이기 때문에 그 육체의 반발에 대해서 느긋하게 대처하고 자비하고 긍휼을 베풉니다.

 

그러니까 “오호라 곤고한 사람이로다.” 해놓고 돌아서면 뭐라고 합니까? “찬송하리로다. 주님의 십자가의 법이 내 깊숙한 곳까지 침투했기 때문에 내가 자랑할 것은 내 재산이나 자식이나 이런 것보다 근원적인 자랑은 십자가밖에 없습니다.”라고 주님한테 그렇게 고백해요. 그런데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이걸 주님한테 고백해야지 같이 계신 분에게 고백하지 마세요. 괜히 오해합니다. 짜증나요. ‘자기만 예수 아나.’ 짜증나요.

 

그래서 우리교회 교인들은 오후에 기도하라고 하면 할 것이 없어요. 알면서도 십자가 빼고 하고, 그러면서도 딴 것 기도하려니 할 것이 없어요. 제가 어디 가서 강의를 하니까 아내가 주의를 줬어요. “내가 당신의 취지는 알겠는데 함부로 그렇게 칭찬해 버리면 어떻게 하는가?” 그럴 분들 아닙니다. 무슨 뜻인지 모르면 그냥 넘어갑시다.

 

사모가 되니 예민하잖아요. 그런데 이 분들은 세상풍파 다 겪은 분들이라서 걱정할 필요 없거든요. 그래서 편안하게 이야기한 거예요. 사람이라는 것은 그 자아가 결국은 자기자랑으로 맺어질 때 제가 외칠 것은 복음밖에 없습니다. 화를 내든, “당신을 나를 모독했어요.”라고 하든, 그러면 그러는 것이고, 이렇게 해서 결국은 십자가를 남에게 자랑하지 마세요. 속으로만 하세요.

 

그리고 남에게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는 너하고 똑같아.” 세상이나 나나 누구 욕할 것이 없어요. 똑같아요. 화내면 화내고 질투하면 질투하고 똑같아요. 똑같은데 새언약이, 너는 내 나와바리, 내 영역인 십자가 안이라고 선을 그어줬기에, 우리는 맘 편하게 성경에 위배되는 짓을 하는 것이 아니고 성경에 위배되어 있는 우리의 잠재성을 맘대로 주께서 들춰내는 결과물로 우리는 감사할 수 있는 겁니다.

 

말을 조심해야 돼요. 항상 결과물입니다. 하라, 하는 그 할 것은 없어요. 그냥 산다는 것이 결과물이에요. 예레미야를 다시 봅시다. 예레미야 31장 33절을 읽어보세요.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빈 그릇이라는 말이 디모데전서에 나오지요. 우리는 빈 그릇이라. 빈 그릇은 옛사람의 우리의 육체가 빈 그릇입니다. 그러면 이 육체는 이미 자아로 물들었기에 그냥 욕구밖에 없어요. 욕구밖에 없는데 그 빈 그릇에 주님께서 십자가 법이 담긴다는 것은 피가 담기는 거예요. 이미 용서했음이 담겨버리면 빈 그릇도 쓸만 해버리지요.

 

배신했던 베드로도 주께서 버리지 아니하시고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그러나 다는 아니다. 여러분이 그 의미를 생각해 보세요. 끝까지 사랑하는데, 열두 명 중에 다는 아니다. 사랑은 돌아갈 자에게만 돌아가야 사랑의 값이 되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