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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흐름10 160916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10. 8. 15:36
2016-10-08 09:31:05조회 : 11         
뉴저지아카데미강의-구약의 흐름 10강이름 : 오용익 (IP:125.136.25.28)

뉴저지아카데미-구약의 흐름 10강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해놓고 하나님 자신은 나타나지 않아요. 이것이 얼마나 인간으로서는 당황스러운 일입니까? “이쪽 신과 이쪽 신과 어느 쪽이 진짜 신인 줄 알아? 이쪽이 나니까 나를 믿어.” 얼마나 쉽습니까? 옛날 영화 <미워도 다시 한 번> 기억나시지요. 그 영화에 보면 낳아준 엄마와 길러준 엄마가 나오잖아요. 애 보고 “둘 중 누가 너의 엄마냐?” 고르라고 하잖아요.

 

관객들 그 때 막 울고 그랬습니다. 왜 우리에게 그렇게 쉽게 하나님을 선택할 권한을 주지 않고 나타나지도 않으면서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하니까, 신을 만들면 그것이 우상이고, 또 신을 만들면 그것도 우상이고, 여호와의 절기라고 해도 그것도 우상이고. 그것은 뭐냐? 인간이 있음으로 시작해서 뭔가를 행동하게 되면, 인간인 너는 모르지만 인간 배후에 인간을 장악한 세력이 너를 앞장세워서 자꾸 참된 하나님과 대립이 되는 요소로서 인간을 다루고 있다는 것을 우리 주님은 아십니다.

 

그래서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라 할 때, 아까도 쉬는 시간에 이야기를 했지만, 예수님을 죽인 것이 사람이 아니에요. 가룟유다에게 뭐가 들어갔습니까? 가룟유다에게 사탄이 안들어가면 그에게 예수님을 팔 마음이 없어요. 자기도 양심이 있는데 왜 스승을 팔아요. 얼마나 후회했으면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 자살까지 했겠습니까?

 

사탄으로서 예수님을 죽게 함으로써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사이에서 뱀의 후손이 여자의 후손의 뭘 반드시 물게 되어 있습니까? 발굼치를 물게 되어 있어요. 뱀의 후손이 여자의 후손의 발굼치를 문다는 것이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옵니까, 안나옵니까? 안나오지요. 현실에서 배제된 이야기거든요. 그러면 현실은 누가 만들어요? 나와 너라고 여기는 자들이 만들어요.

 

그러니까 현실에서는 마귀 이야기도 없고, 귀신이야기도 없고, 예수님 이야기도 없고 전부 다 배제되는 거예요. 그 있음의 세계는 있는 자들이 협력해서 지혜를 끄집어내서 문명의 수례바퀴를 돌리는 겁니다. 시련은 있으나 실패는 없다. 그 유명한 횬대사장이 했던 이야기가 아닙니까? 하면 된다는 거예요. 일곱 번 넘어져서 여덟 번 일어나면 된다는 겁니다.

 

결국 이 세상은 누구 손에 달렸다? 인간 손에 달렸다는 것을 우리는 어릴 때부터 교육 받아서, 아무리 성경을 배워도 ‘그래도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지고 내가 살아가는거야.’ 이것이 몸에 배어버렸어요. 이것이 몸에 배어버렸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도, “좀 도와주시면 될텐데.” 꼭 그런 식으로 해요. “주여! 오늘도 기도하러 왔습니다. 커피 세잔 마실 각오까지 하고 왔습니다. 철야합니다.” 기도가 자기노동이 되고 말았어요. “이 노동의 대가는 주셔야 되지 않습니까?”

 

이게 습관화, 몸에 배어서 기도하는 나에게 응답이 와야 되지 기도는 내가 했는데 응답은 저사람에게 오게 되면 기도할 맘 안납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안해도 은혜 주신다, 이 말을 하니까 많은 사람들이 “그러면 안해도 되겠네.” 그렇게 합니다. 그 말은 뭡니까? 그동안 모든 일은 누구를 위해서 했다? 내가 나를 위해서 했다는 그 티를 내고 말았어요.

 

그게 구약에서 십계명 시작할 때 너를 위하여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다시 말해서 너를 위해서 신을 만들지 말라는이야기와 합치되는 이야기에요. “그러면 목사님 이스라엘이 왜 있습니까?” 망하라고 있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망하라고 있는 겁니다. 왜요? 시범조교거든요. 모든 인간을 대표해서, 이래서 인간나라는 망해야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요한계시록에서 모든 나라는 바벨론제국으로 통합되면서 바벨론은 망합니다. 망하고, 망하고, 다 망하는 거예요. 망하는데 망하는 이유를 알도록 하기 위해서 망하는 유대나라에 독생자를 보내셔서 결국 메시아를 누구 손에 죽게 합니까? 이스라엘 손에 죽게 함으로써, 너희 애비는 악마라는 예수님의 말이 맞다는 것을 증명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유대인이 죽였다? 그러면 안되고, 있음이 없음을 죽였다, 이렇게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구원은 어떻게 됩니까? 있음이 뭐로 바꿔야 됩니까? 있음을 없음으로 바꾸고 그 없음에 주님께서 같이 참여해서 그 없음을 다시 새로운 있음,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내면 그게 바로 구원이지요. 그게 고린도후서에 나오는 이야기잖아요. 새로운 피조물이라고.(고후 5:17)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모든 사람은 죽은 것이다. 고린도후서 5장 14절에 보면,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분명히 죽은 것이 맞지요? 모든 사람이 죽은 거예요. 죽었으면 우리의 관심사는 죽은 나에게 있어야 합니까, 우리는 죽이신 예수님에게 둬야 합니까? 예수님에게 관심사를 둬야지요.

 

옳은 설교, 참된 설교가 뭐냐 하면, 예수님 이야기 하는 거예요. 이런 조로 설교를 하면 나쁜 설교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해서 구원 받읍시다, 이것은 정말 나쁜 거예요. 이렇게 해서 구원받읍시다, 하면 관심사가 설교 내내 어디에 관심을 두겠습니까? “이렇게 하면 돼요? 저렇게 하면 돼요?” 자기한테 관심을 두겠지요. 그런데 “주께서 하셨습니다.”하는 말은 누구에게서 관심을 뚝 끊어라? 내가 어떤 자며, 내가 무엇을 해야 되며, 헌금을 얼마를 해야 되며, 교회출석, 예배전 몇 시까지 와야 되는데, 그런 것을 뚝 끊어버리라는 말입니다.

 

다 끊어버리고 그냥 지금 이 순간, 지금 이 순간, 주님은 나에게 무엇을 행사하고 계십니까? 그것을 만끽하면 돼요. 성질 같으면 설교하는 대신 양동이에 물을 담아서, 그 양동이에는 하나님의 의라고 써서 앞자리에서부터 퍼붓고 싶어요. 아무것도 하지 말고 퍼붓는 주의 은혜를 받으소서, 그런 이벤트를 벌이고 싶은데 이제는 힘이 없어요.

 

그게 바른 설교입니다. 그게 기쁜 소식, 복음이에요. 한 것도 없이 흠뻑 온 몸이 젖어버리는 겁니다. 뭘 해드릴까요, 이러고 있다가 흠뻑 젖어버리면 그동안 까불었던 것들이 다 날라 가버려요. “손 놓고 퍼붓는 것을 받아라.” 이게 성령세례고 성령충만이잖아요. 이거 외에 뭐가 있습니까? 제가 그동안 성경공부를 제대로 한 적도 없지만, 제가 알기로는 이거예요, 복음이라는게.

 

설교자가 되었으면 “주께서 이렇게 하셨습니다.” 가 나와야지 “여러분이 이렇게 하시면 구원받습니다.” 그게 왜 나옵니까? 속이 터져요. 우상이 교회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보면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관심사가 그리스도안이지요. 그리스도가 무슨 일을 했기에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까?

 

그 뒤에 19절에 보면,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여기서 행위의 주인공이 누구입니까? 주체가 누구예요? 하나님이잖아요.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세상에, 이렇게 고마울데가. 죄는 누가 짓고? 우리가 짓고, 우리가 우상을 만들고, 우리가 나밖에 모르고. 그런데 그 죄를 누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그 분이 누구냐, 21절에 보면,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참 횡재를 했네요. “우리로 하여금 저희 안에서 하나님의 뭐가 된다?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하심이라.” 교인들 성경 안 봅니까? 그들의 성경책에는 고린도후서 5장 21절이 빠져 있어요? 딱 보면 보이는데? 안보여요? 보이잖아요.

 

헌금하면 복받는다는 이야기가 나올래야 나올 수가 없어요. 우리가 선교하면 하늘나라 확장된다는 그런 이야기가 나올 수가 없어요. 선교가 몇 명 보내면 되느니, 제직회 할까요, 그런 이야기가 나오지 않아요. 제직회 하나 안하나 교회에요. 우리가 하나님이 퍼줘서 하나님의 의가 되었습니다. 그냥 사세요. 하나님의 의로서. 우리의 죄가 나오는 것은 맞아요. 우상 만드는 것 외에 다른 주특기가 없어요. 우상만드는 것이 우리는 재주에요. 자기자랑하려고.

 

그런데 그 죄를 빼돌리는 그 중간작업, 중보자작업을 믿는 것은 성령받는 사람들만이 가능한 겁니다. 자 이제 신약은 해답이고 구약은 문제지고. 그래서 해답부터 먼저 알고, 이런 반칙을 범합시다, 해답부터 먼저 알고 그 다음에 구약으로 돌아가 봅시다. 다윗언약인데……, 내심 걱정이 됩니다. 어렵지만 할 수 없어요. 구약성경이 있으니 전해야 됩니다.

 

다윗언약을 이제부터 합니다. 다윗은 유명합니다. 그런데 언약은 사람들에게 생소하기에 사람들에게 거부당해요. 언약이 나오면 다른 교회는 졸기 마련이에요. 자기가 모르는 이야기가 나왔기 때문에. 그런데 언약이라는 뉘앙스가 뭐냐 하면, 우리가 어떻게 바르게 하고, 착하게 행동하기 전에, 세상에는 우리 빼놓고 계약을 맺었다는 것이 언약이에요.

 

우리 빼놓고. “누구 구원받을까요?” “이 사람 구원하고 저 사람은 버리라.” 그것이 창세전에는 약속이고 그것이 세상에 나타난 것을 언약이라고 해요. 그러면 “신이시여, 제가 어떻게 하면 복을 받습니까?” 하는 사람에게 언약이 관심사가 되겠습니까, 관심사 밖의 이야기가 되겠습니까? 자기에게 관심두는 사람에게는 뭐가 자꾸 배척이 될까요?

 

하나님의 창세전 언약이 배척되겠지요. 그래서 언약이라는 말이 자꾸 배척되는 거예요. “목사님, 처음 들었어요.” 이런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닙니다. “그러면 언약이라는 말이 생소하니 그냥 약속이라고 하면 되지 않습니까?” 약속이라는 말을 못해요. 약속이라는 말은 왜 못하느냐 하면,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면 사람들이 대번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 “지키겠습니다.” 이렇게 나온다고요.

 

“네가 지키는 것이 아니야.” 그러니까 약속은 안 되겠어. 언약이라고 해야 돼요. 언약은 인간이 빠졌을 때 하나님과 하나님 사이에 맺은 것이 언약인데, 그게 사실은 약속인데 그걸 구체화 한 것이 언약이거든요. 방주만들 때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 만들어줄까, 그런 식으로 노아에게 협의를 한 것이 없어요. 그냥 만들라고 되어 있지요.

 

그래서 예수님도 했잖아요.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아버지의 뜻은 뭐냐? 우리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않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은 뭐냐? 어떻게 죄인을 하나님과 스스로 화목케 하겠다고 하는, 하나님이 자발적으로 나온 하나님 쪽에서의 조치가 화목제물이고, 십자가고, 언약이거든요. 지금 자기 일에 분주한 사람에게 뭔가 들이대게 되면 우리는 이질적인 것은 배척하게 되어 있어요.

 

우리 몸의 세포가 면역체계가 있어서 과도하게 밀치게 되어 있어요. 너무 과도해서 알레르기가 생기잖아요. 이만큼 들어왔는데 기침, 콧물, 두통, 재채기를 하면서 온갖 싫다는 표정을 다 짓게 되잖아요. 알레르기. 어릴 때부터 흙하고 안놀아서 그래요. 면역성이 떨어져서 과도하게 그런 반응이 나와요. 농촌 애들은 알레르기가 없는데 도시 애들은 알레르기가 있답니다. 애를 너무 깨끗하게 키우지 말라는 거예요. 할 수 없지요. 시대가 그런데 어떻게 하겠어요.

 

지금 언약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일방적으로 조치하면서 언약이 다가옵니다. 우리는 우리 행함만 생각하니 언약이 배척받지요. 그 점을 생각해 봅시다. 다윗의 적이 있어요. 다윗의 적이 누구지요? 사울이지요. 사울 때문에 생긴 책이 있어요. 그게 시편입니다. 얼마나 다윗을 못살게 구는지.

 

얼마나 힘들었으면 다윗이 이렇게 했어요. 시편 21편에 나오지요.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시편 22:1) 예수님은 그것을 그대로 십자가에서 인용해버립니다. “다윗아! 사실은 네가 한 것이 아니고 내가 네 속에서 너의 상황과 너의 시대상, 너의 삶의 정황 속에서 내가 너에게 그런 고통을 주었다. 그 고통의 완성은 십자가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누구 때문에 그렇게 했습니까? 그게 사울왕 때문에 그런 거예요. 우리가 첫째 시간에 배웠습니다. 사울왕은 무엇을 시도하느냐? 항상 중앙지점이 빈곳이어야 되잖아요. 빈곳에 덜렁 자기가 앉아 있네. 당회장실에. 참 기가 차서. 이스라엘 왕이 누굽니까? 여호와 하나님이잖아요. 안계신 분이 왕이에요. 말이 희한하지요. 안계신 분이 왕인데.

 

그걸 계신 분으로 바꾸겠다는 거예요. 본인이 그 자리를 차지하겠다는 겁니다. 다윗은 “임금님! 내려오세요.” “안 내려가.” 그 나라는 자기 나라라고 여기기 때문에 그래요. 교회 당회장이 교회 주인입니까? 아니지요. 그런데 왜 당회장이 주인노릇 합니까? 교인들이 목사를 그렇게 만들었어요. 왜요? 사무엘상 8장에 나옵니다. “우리한테는 지도자가 있어야 되겠습니다.”

 

어리석은 자들. 요한 1서 2장 27절을 봅시다. 이것은 다 같이 읽어봅시다. 너무 중요해서요.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누가 건방지게 나를 가르쳐? 누군데? 마태복음 23장에는 이런 말씀이 나오지요.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마 23:8-10)

 

그런데 왜 자청해서 너희가 백성의 스승이 되려고 하고 자청해서 아비가 되려고 하느냐는 말이지요. 이런 구절 쏙쏙 뽑으세요.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면 목사나 설교자는 뭐하는 사람입니까? 교회에서 가르치는 사람은 왜 있는겁니까? 그 사람은 자기 고백만, 신앙고백만 내놓으면 돼요. 왜? 성령받은 다른 사람이 참고로 하면 되니까.

 

목사가 강단에 서서, 굳이 이대로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저는 이 본문을 이렇게 생각하는데 여러분 속의 성령께서 어떻게 하실지 그것은 제 소관이 아니고 친히 여러분의 성령께서 제 말에 대해서 옳다, 그르다, 하실 겁니다.’라고 강단을 내려와야지요. ‘저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저는 이 본문을 통해서 이렇게 은혜를 받았는데 여러분은 모르지요. 왜? 여러분을 구원하는 것은 제가 아니기에.’

 

자, 이 교회의 중앙지점은 비어있습니까, 채워져 있습니까? 비워져 있지요. 그게 바로 성전인 거예요. 있음은 무엇을 증명한다? 없음으로 인하여 있게 되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있음이 한시적인 있음, 즉흥적 있음, 사건으로서의 있음이 된다는 말이지요. 옛날 이런 낭만적인 카페이 있어요. 숲속의 빈터. 숲속 한 가운데 벌목을 해서 만든 카페. 상상만 했는데 뉴저지에 와서 보니 왜 그리 많은지. 빈터에 말이 어슬렁거리는 것도 봤고, 아침 운동하면서 사슴이 막 뛰어노는 것도 봤지만. 이 근처에도 빈터가 있어요.

 

숲 속의 빈터. 다시 말해서 원형탈모. 중앙이 비어 있을 때 거기는 아무도 범접하면 안돼요. 분화구거든요. 생명이 솟아나는 분화구. 거기 들어가면 불타버립니다. 하나님이 하도 이 마귀들이 인간들에게 신을 섬기라고 강요를 하니까 차라리 하나님은 없는 하나님으로, 없는 하나님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신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은 그 없는 하나님을 건드리지 못하는데 인간 배후의 악마가 “물어! 물어!” 해서 예수님이 물려죽었잖아요. 발꿈치.

 

그러니까 인간들은 그냥 예수를 보통 자기와 같은 목수의 아들로 쳐주지만, 사탄이 가룟유다에 들어가니까 사탄이 가룟유다 보고 “물어! 물어!” 그래서 물었잖아요. 희한하지요. 예수님의 진위의 기준은 빈 무덤입니다. 이것도 어렵다. 무덤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무덤이 없는 것과 빈무덤이 달라요. 무덤이 없는 것은 아예 죽은 적이 없다는 뜻이고, 빈무덤은 분명히 죽었는데, 분명이 죽었는데 있어야 할 시체가 없다는 것이 예수님의 본질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무덤이 없는 것이 아니고 빈무덤을 남기신 분을 우리가 믿습니다. 그러면 여전히 이스라엘처럼 없는 분이 오늘날 우리로 하여금 모이게 하셨고, 있게 하셨습니다. 그 분이 누구냐 하면, 그분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주의 이름으로 살라고 합니다. 그래서 주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다시 말해서 모이면 있겠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하나하나 호출해서 모일 때 오직 주의 이름으로만, 없음의 이름으로만 모이게 했다.”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 없음에 의해서 베드로는 교회의 반석이 되어야 되는데 반석의 자격이 뭐냐? 있음이 얼마나 통탄할만한 아픔으로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베드로가 배신해 버리지요. 배신했기에 베드로는 교회의 반석이 되는 겁니다. 있음이 없음을 핍박했다는 확실한 증거를 보여주기 때문에. 이 있음이 얼마나 악독하게 있음인지, 있음 배후에 악마가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

 

그래서 예수님께서 베드로보고 뭐라고 합니까? 자기 제자보고, 조금전까지도 칭찬을 해놓고. “사탄아!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을 생각지 않고…….” 그 다음에 뭡니까? “네가 사탄을 생각한다.” 그랬습니까? 네가 하나님을 생각지 않고, 그 다음에 무슨 이야기가 나옵니까? “네가 사람 일을 생각한다.” 사람일 = 뭐다? 사탄의 일이에요. 성경은 그렇게 통합니다.

 

그렇게 공룡의 뼈대구조를 형성합니다. 신앙생활 한다고 유난을 떨고, 설치고, 절기 지킨다고 난리 피운다고 그게 신앙이 아니고, ‘내가 없어야 되는데 왜 살았지? 주께서 활동하시는구나.’ 이렇게 살아가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뭐냐? 이것은 이번에 미국에 와서 제일 어려운 대목을 영광스럽게 우리가 대하게 되었습니다.

 

제일 어려운 대목을 찾아봅시다. 성경에 그런 말씀이 있었어요, 하고 깜짝 놀랄 겁니다. 마태복음 13장 12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아멘! 이게 무슨 뜻입니까?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이게 말이 됩니까, 안됩니까? 없는데 빼앗길게 어디 있어요? 이 말을 쉽게 설명하겠습니다.

 

“인간아! 네게 없는 것을 내놓아라.” 그런 뜻이에요. “인간아! 네게 없는 것을 내놓아라.” 없는 것을 내놓으라고 할 때 인간은 멍~ 하지요. “하나님이여, 제게 있는 것을 드리겠습니다.” “아니. 있는 것 말고 없는 것을 내놓아라.” 더 쉽게 해서 “분명히 없었는데 새로 생긴 것을 내놓아라.” 그런 뜻입니다. 분명히 없었는데.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현재 있음을 받는 것이 아니고 나를 없음으로 이전시켜요. 없음으로 이전시키고 난 뒤에 뭔가 남아 있는 것이 있을게 아니겠습니까? 주님은 우리보고 죽었다고 했어요. 죽었는데 손도 있고 발도 있고 뭐가 있지요. 그게 누구것이다? 그게 주님의 것이라는 거예요. 그걸 받겠다는 거예요. 명의이전이에요. 간단한 단어를 생각 못해가지고.

 

내 명의로 된 것을 누구 명의로? 주의 명의로 바꾸는 겁니다. 바꿀 때 누굴 죽여야 돼요? 허구적인 누굴 죽여야 되는가? 육체는 있는데 뭐가 없다고 했습니까? 나는 없지요. 그 없는 나를 없애버리는 겁니다. 육체는 있는데 육체를 있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 있게 하셧습니다. 이름도 붙였어요. 아담이라고. 그런데 그 아담이 범죄하고 난 뒤에는 아담이 아담을 관리해요.

 

아담이 몇 개가 되었어요? 두 개가 된 거예요. 제가 아까 어렵다 했지요? 아담이 두 개인 거예요. 두 개 중 한 개의 아담을 없애야 될 필요가 있는 겁니다. 다윗언약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주인공은 사울이라 하지요. 다윗은 뭐냐? “임금님! 중앙을 비워놓으세요.” “이게 어디서? 이스라엘은 내꺼야.” “아닙니다. 하나님 겁니다. 중앙을 비워놓으세요. 골리앗 누가 이겼습니까? 임금님이 이겼습니까, 하나님이 이겼습니까?” 자기가 이겼다고 하지 않아요. 임금님이 이겼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이 이겼다고 하지요.

 

하나님이 눈에 보입니까, 안보입니까? “없으신 분이 이스라엘을 계속 지켜나갑니다.” 그렇게 한 거예요. 그랬던 사무엘하 11장에서 우리아장군이 암몬과 전쟁할 때 다윗은 심심해서 왕궁 지붕위를 거닐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누굴 봤는데 뒤태가 너무 아름다워요. 너무나 몸매가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어요. 아름다움 앞에서는 그녀가 유부녀냐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아요.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이미 그 여자를 보고 있다는 자체가 어떠한 조건도 다 끊어버릴 요량으로 보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어떤 인간이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이미 그 이야기의 주인공에 사로잡혀 있다는 뜻입니다. “뉴욕 양키스 4번타자 참 잘쳐. 그런데 뉴욕 양키스가 별거 아니야.” 자기딴엔 별게 아니라고 해도 이미 어디에 잡혀 있어요. 뉴욕양키스에 지금 반해버린 겁니다.

 

“한국교회 썩었어. 한국교회는 교회도 아니야. 당회장이 어쩌고저쩌고……” 그 말은 뭐가 부럽다는 말이에요? “큰 교회 부러워라.” 하고 같은 이야기에요. “북한 김정은이 그 나쁜 인간! 핵실험이나 하고 있고.” 아까 식사하실 때 고향이 가야산 야로분이라고 했는데 그분의 소망은 실제는 이런 말입니다. 어서 북한 땅도 우리 땅되었으면 좋겠다는 뜻이에요.

 

이야기를 끄집어낸다는 것은 이미 자기가 그 이야기의 범주안에 사로잡혔다는 뜻입니다. 암몬과의 전쟁은 뒷전이고 다윗은 그 여자를 사모해서 임금의 권세로 데려와서 동침했고, 마침 그것으로 임신이 되었고, 그 여자는 남편이 있는 것을 알았고, 모든 것을 다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다윗은 지금 중앙을 비워놓았습니까, 중앙을 차지하고 있습니까?

 

중앙을 차지하게 되니까 하나님께서 다윗으로 하여금, “그 자리 내 자린데? 내려와.”라는 조치가 필요하겠지요. 그 조치가 뭐냐? 그 조치를 위해서 주께서 준비한 것이 아리따운 여인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입장에서는 뭐냐? 환란이지요. 집의 재산이 한 80억된다. 환란입니다. 애가 공부 잘해서 브라운대학에 입학했다. 환란입니다. 딴 것은 다 내놔도 그 애는 못내놓을걸요?

 

나라는 이 이미지, 있지도 않는 나라는 이 이미지, 나라는 것은 없어야 되는데 그 내 아이, 그 나와 관련된 그 공부를 잘하는 내 아이가 나의 중앙을 차지하게 되면 그 애를 나는 흠모하면서, 사모하면서 바라보고 있는 거예요. “우리 외손녀! 오냐, 오냐!” 사모하는 거예요. “보고 싶어라. 외손녀!” 세상에, 주님이 중요합니까, 뭐가 중요합니까? 주님보다 귀한 것은 없다고 찬송가는 잘도 부르면서 실제생활에서는 허하기를 내가 허하지 아니해요.

 

지금 말장난 하고 있습니다. 뭔가 비어있는 것을 내가 허락지 아니해요. 지난번에 강의할 때 했잖아요. 주님께서 식빵속의 중앙을 다 떼어갔는데, 비어 있으니까 우리는 이생의 자랑과 육신의 안목과 정욕의 안목으로 이 비어 있는 것을 다 메우는 거예요. 이게 어디서부터 왔다? 세상으로부터 왔다. 왜? 세상은 없음을 모독하기 때문에. 없음을 부정하기에, 없음의 자리를 허락하지 않고 모든 것을 있음으로 하기에. “인간의 지혜와 인간의 노력은 모든 문명을 이끌어갈 수 있다. 이 문명은 인간 손에 달렸다. 있음으로 채워라.” 이것이 배후의 악마, 예수님의 발꿈치를 물었던 악마의 마음입니다. 뱀의 후손과 그 졸개들의 구호에요. 하면 된다.

 

아까 참된 설교는 뭐라고 했습니까? 그냥 주께서 이 시간, 지금 이 순간 주께서 우리에게 뭘 해줬는가를, 양동이에 물 부어서 덮치라고 했지요. 그러나 세상 교회는 뭡니까? 뭘 하려는 준비가 되어 있어요. “목사님! 뭘 해드릴까요? 뭘 해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까요? 뭘로 영광을 돌릴까요?” 이거 하고 있다는 말이지요. 그 목적이 뭐냐? 이 교회를 나로 꽉꽉 채우기 위해서, 빈자리가 생기면 안되고, 우리의 열심과 경건함과 훌륭함과 의지와 영광돌림으로 꽉 채우면 참된 교회가 된다고 그렇게 거짓말 하고 있는 겁니다.

 

교회란 비어 있어야 되고 ‘우리’라는 성전도 비어있어야 돼요. “주께서 나로 하여금 있게 하셨습니다.” 하는 고백이 늘 나와야 되는데, 말은 그렇게 해놓고, ‘오늘도 힘들게 설거지는 내가 다 했다.’ 꼭 허구적인 육체의 이미지인 나라는 것을 가지고 내가 깃발을 꽂아야 속이 차고 만족하니까 도대체 이 성질을 언제 고치겠어요? 죽을 때까지 안 고쳐집니다. 죽을 때까지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는 조치가 없으면 우리는 구원 못받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할 일은 간단해요. 그런 죄를 계속 쏟아내면 됩니다. 하나님이 비워놓으면 우리는 채우고, 하나님이 비워놓으면 우리는 채우고, 평생 우리 할 짓이 그것밖에 없어요. 다윗은 그 빈자리를 자기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 차지함의 결과가 뭐냐? “우리아를 죽여라.” 우리아를 왜 죽입니까? 지금 우리아가 누구하고 전쟁을 하고 있지요? 암몬하고 전쟁하지요.

 

그러면 암몬은 누구의 적입니까? 이스라엘의 적이지요. 그러면 이스라엘왕은 누구를 원수로 삼고 죽여야 됩니까? 암몬을 죽여야 되는데 암몬을 위해서 전쟁하고 있는 하나님의 일군을 누구 손으로 죽입니까? 이스라엘 왕이 하나님 편에 서지 않고 암몬 편에 서서 암몬의 적들의 화살에 의해서, 하나님 편에 서 있는 우리아 장군을 죽여 버렸지요.

 

그게 바로 다윗언약에 장착된 내용물입니다. 모세가 돌판 깬 것 여러분이 아시지요. 깨진 돌판 그거 무효로 돌리지 않습니다. 깨진 돌판을 대신한 돌판으로 언약궤를 장만합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광야에서 원망했지요. 원망해서 주어진 것이 만나지요. 언약궤옆에 만나를 든 항아리를 배치합니다. 고라자손이 모세와 아론의 제사장을 공격했지요. 공격해서 나온 사건이 뭡니까? 지팡이에서 싹이 났지요.

 

그거 언약궤 옆에 보관합니다. 인간의 궁극적인 죄가 드러나는 그곳이 바로 주님이 나타나시는 곳이 되는 겁니다. 천국은 더러운 땅에서 피어나는 것이 천국입니다. 더러운 인간의 이름속에서 주의 이름이 핍박받는 모습으로, 주님이 빈무덤을 남기면서, 무덤이 없음의 무덤이 아니고 빈무덤, 빈무덤을 남기고 갔을 때, 주께서 승천해서 올라갔을 때……, 여기 어디 승천하는 유명하는 그림을 본 것도 같은데.

 

옷자락 휘날리면서 올라가는 그 그림 생각나지요. 사람들은 어디 봅니까? “주여, 언제 다시 오십니까?” 하지요. 주께서 땅을 떠나서 주의 나라를 만들게 되면 이 세상에는 주의 나라와 땅의 나라가 함께 공존하고 있는 형편에 있습니다. 성령안과 성령밖, 예수 안과 예수 밖, 십자가 안과 십자가 밖, 같이 공존하는 세계.

 

사도바울은 성령을 통해서 그것을 그대로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그 우리아를 죽이고 난 뒤에 입 싹 씻었지요. 세상에 자식까지 낳았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 자식의 이름은 없습니다. 이름이 없어요. 그런데 그 죽은 자식 이름이 나중에 붙습니다. “에이, 목사님! 애가 죽었는데 무슨 이름이 있습니까? 죽은 애의 이름이 있다니까요?” “에이, 그런 이름은 없어요.” 있습니다. 여디디아라는 이름이 붙습니다.

 

여디디아가 누구게요? 솔로몬이에요. 그래서 솔로몬은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태어난 거예요. 마태복음 1장입니다. 다윗이라고 붙여놓고는, 남자 이름의 두 개가 들어가지요. 다윗아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는 것이 아니고,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았기 때문에 죄인을 누가 구원한다? 우리아를 희생시켜서, 죽을 죄인을 주께서 우리아를 희생시켜서 구원함으로 말미암아 진짜로 다윗은 이스라엘왕의 자격을 얻습니다. 왜? 죄인 중에 괴수기 때문에.

 

세상죄를 지고 가는 예수님과 딱 닮았어요. 죄도 없으시면서, 우리아를 건드린 일도, 밧세바와 간음도 한 일이 없는 예수님이 간음한 죄인으로, 살인한 죄인으로서 우리 대신 아버지 앞에서 화목제물이 되심으로서 그 제사를 완성시켜서 그 부대효과로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의가 된 겁니다. 이게 놀라운 하나님의 복음입니다.

 

구약부터 이미 그 카펫을 깔아놓았어요. 영화배우들의 희망이 뭐냐 하면, 레드카펫 밟고 지나가는 거예요. 우아한 드레스 입고. 양쪽에서 카메라가 찍지요. 뭘 깔고? 카펫을 깔고 우아하게 걸어가서 영화제에서 상 받는 그것. “다 팬들 덕분입니다. 오늘 아름다운 밤입니다.” 이러고 싶은 거예요. 그렇게 극악무도한 죄, 살인죄에다 또 간음죄에다, 그 보다 더 무서운 죄는 이스라엘 왕으로서 이스라엘 적의 편을 도왔다는 그 모든 죄에 대해서 주께서는 타작마당을 마련해서 그 죄인을 살리기 위해서 호렙산에서 제사를 드리게 합니다.

 

그 다윗의 제사의 효과가 솔로몬, 여디디야. 그 뜻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 그렇다면 사랑은 어떤 토대위에서만 그 사랑이 만끽되고 느껴지겠어요? 개판일 때, 개판 5분전도 아니고 완벽하게 개판일 때, 엉망진창일 때, 다시 말해서 내가 나에게 절망해야 내 가상적 이미지가 스스로 손을 떼고 포기를 먹게 되는 겁니다.

 

“내가 만든 나말고 주께서 만든 나 주시옵소서.” 그게 로마서 7장에 나옵니다. “내 안에 또 다른 나가 있어서 그 나가 우세해서, 나는 선을 행하고 싶은데 내가 나를 포기를 안 먹네요. 주여, 어쩌면 좋아요.” 그래놓고 돌아서서 하는 말이 “찬양하리로다.” 방금 전까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어쩌면 좋아?” 하다가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그 다음 구절이 뭐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라.” 이렇게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죄없는 육신의 몸으로 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율법에서 해방하셨다.”

 

결국 이스라엘의 적은 뭐냐? 암몬이 아니에요. 이스라엘의 적, 다윗의 적은 자기가 있음을 유지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가상적인 다윗 본인이 다윗의 최후의 적이었던 겁니다. 왜? 마귀가 다윗을 나라고 여기고 그 내가 나를 구원 못받도록 훼방질을 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다윗은 시편 51편에서 이렇게 합니다. “주여, 주께서 내가 드린 제사 안받고, 내가 드린 번제 안받고 주께서 원하는 것은, ‘나는 마귀편이었습니다.’ 하는 그것, 마귀편 된 나를 가지고 상한심령이라고 하는데, 상한 심령을 그대로 드리는 그것, 그럴 때 예루살렘에 은혜를 바가지채로 부어주옵소서.” 이렇게 해서 시편 51편이 끝납니다.

 

시편 51편 18절,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성을 쌓으소서.” 지금 본인이 이스라엘 왕이잖아요. 본인이 지금 예루살렘에 거주하잖아요. 이런 벽돌로 만든 예루살렘성은 미래의 것이 아니고 허물어져야 될 것이지요. 진짜 미래의 것은 은혜로 세워지는 예루살렘, 성령으로 세워지는 예루살렘성, 요한계시록 21장에 보면 하늘로부터 내려옵니다. 하나님의 신부의 드레스를 입고 내려옵니다. 오늘 아름다운 밤이에요, 하고 내려오는 겁니다.

 

성경은 그렇게 관통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언약을 알 때 그래요. 인간 배제하고 하나님끼리의 관계에서 성립된 그 언약이 바로 이 지상에서 구체화되면서, 구원받는 사람은 철저하게 마귀에 농락당했다는 것을 보여주지요. 좀더 깊이 나가봅시다. “그러면, 목사님! 다윗언약이라고 했는데 다윗은 그렇다 치고 왜 다윗 뒤에 언약이 붙습니까?”

 

다윗은 그렇게 구원받았다. 은혜롭고 참 좋은데 그 뒤에 왜 언약이라는 것이 붙느냐? 언약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가 하면, 그 전의 언약이 들어 있어요. 그 전의 언약이 무슨 언약이냐 하면, 모세언약입니다. 모세언약을 두 자로 율법이라고 이야기하지요. 율법을 하나님께서 그 전에 모세에게 주었습니다. 그러면 모세가 그 율법을 지켜야 됩니까, 지키지 말아야 돼요? 지키라고 요구를 받게 되지요.

 

못 지키는 것은 알지만 지키라고 요구받게 되는데, “인간이 약해서 못 지키면 그만이지.” 아닙니다. 못지키면 뭘 받는가? 저주 받아요. 목사님들이 대심방할 때 주로 인용하는 것이 신명기 28장이잖아요. 앞부분에 좋은 말씀이 나오지요.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고. 따라다니는 전도사는 지겨워죽어요. 했던 소리를 또 하고 또 하고.

 

그래서 제가 심방하는데 여전도사님이 따라왔을 때는 ‘같은 것 또 할 줄 알아요?’ 해서 하루에 열다섯 번 심방했는데 열다섯 번 다 다른 본문 가지고 했습니다. 재주가 뛰어나서가 아니라 나는 공부해야 되기에 심방기간을 내 공부하는 기간으로 삼아서, 예레미야면 예레미야, 아모스면 아모스, 1장부터 시작해서 어느 집에 가든 1장, 그 다음 집에 가면 2장, 그 다음 집에 가면 3장, 돌아오는 데로 다 했어요. 빨리 떼야 되니까. 빨리 성경을 관통해야 되니까.

 

그래서 서로 다른 이야기를 안 할 것이 아닙니까? 통으로 뚫어야 되기 때문에. 그런 좋은 기회로 삼았던 거예요. 그 신명기 28장 앞부분에 짧게,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는다고 하는데 조건이 있어요. 이 말씀을 지키는 자라는 조건. 그런데 세배나 넘게 나오는 것이 뭐냐 하면, 들어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게 됩니다.

 

심방 갔으면 그 저주 이야기를 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 이야기는 안 해요.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와도 복을 받고, 그렇게 해놓고는 나올 때는 봉투 받아 나와요. 그러면 누가 복받은 거예요? 목사 자기가 복을 받은 거예요. 그 봉투 받아서 여전도사에게 커피 값 5천원 던져주고 나머지는 자기가 챙기고. 나중에 그걸로 사달이 나지요. “목사님, 제가 강단에 올리라고 준 봉투인데 안 올라 왔습니다.” 그래서 회계집사에게 찾아가서 물어낸다고 바쁘고, 쉬쉬하면서 물어내고, 웃기지도 않아요. 그런 해프닝이 벌어집니다.

 

율법은 못 지키면 그만이 아니에요. 우리가 연약한 인간이니 봐주겠지, 그런 것 없어요. 저주 내려야 됩니다. 전에 있던 언약은 뭐다? 율법이다. 율법은 뭘 전수한다? 다윗에게 저주를 전수하는 거예요. 그 율법에 의해서 율법의 진수를 다윗이 보여주는 겁니다. 무엇의 대표자로서?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 왕으로 있을 때 인구조사를 해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세상에, 전염병이 퍼져서 무려 7만 명이 죽었어요.(삼하 24:9) 요압이 말렸는데도 불구하고 인구조사를 했던 거지요.

 

대표자, 왕이라는 자리가 율법을 못 지키면, 한 사람이 잘못하면 저주가 백성에게 주어집니다. 그게 언약이에요. 그렇다면 반대로 생각해 봅시다. 왕 하나 잘 만나면 백성은 어떻게 됩니까? 공짜로 복받지요. 그게 바로 언약안입니다. 그 언약이라는 말을 예수님으로 바꿔봅시다. 예수안이 되겠지요. 성령으로 바꿔봅시다. 뭐가 됩니까? 성령안이 되겠지요.

 

성령 안, 십자가 안, 예수 안에서 우리는 뭘 얻는다? 구원을 얻는다. 그러면 이것은 누구의 공로입니까? 예수님 공로지요. 예수님이 왕이 되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누구를 쳐다보고 살아야 돼요? “오늘 이렇게 살아가는 것도 다 우리 임금님 덕분입니다.” 이게 바로 주 예수를 부르는 자 아닙니까? 이게 성령받은 자잖아요. 이게 바로 교회잖아요. 네 자랑, 내 자랑 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예수님을 경유하세요, 라고 제가 수백번 이야기하는 것이 그 때문이에요.

 

예수님 경유하세요. 여기 미국에 오니까 창고가 이상해요. 시카고에 가도 있고 여기에 와도 있고. 제가 목사님에게 물었어요. “이게 뭡니까?” 이런 조그마한 집이 있어요. 창고라고 하던데요. 색깔은 초록색깔도 있고 여러 가지 있지만. 못봤어요? 저는 많이 길가에서 봤는데요. 그게 구조가 뭐냐 하면, 정점이 있고 몽고사람들의 천막처럼 되어 있지요. 그게 바로 예수 안이에요. 정점에 누가 있다? 머리 되시는 분이 있고 그 나머지는 머리 휘하의 효과를, 주님의 의의 효과를 누리고 있는 거예요.

 

그게 바로 성경에서 사도바울이 말하는,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의롭다는 그 이야기입니다. 해답은 그렇게 되어 있어요. 이제 과정에서는 그 예수 안이, 율법 안, 그 다음에 다윗 왕 안에서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흐름을 보여주는 겁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