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저지아카데미-구약의 흐름 9강
구약이 공룡이라면 그 뼈대 같은 구조에 대해서 시작합니다. 공룡의 뼈대가 대단하지요. 공룡도 대단하지만 그 구조를 이루는 뼈도 대단합니다. 그 뼈대를 이루는 구조가 뭐냐? 성전입니다. 성전 안에는 뭐가 있을까? 성전 안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고 ‘없음’이 있습니다. 이 말이 장난처럼 들려서 미안하기도 한데요, 성전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아무것도 없는 그것에서 힘이 발휘됩니다.
모든 있음을 향하여 저주와 심판이 제공되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과연 우리가 여기 있다는 것이 제대로 있는 것인가를 한 번 의심해 보라는 겁니다. 우리가 지금 있다는 이것이 과연 영원불변할 정도로 그 있음이 보장되느냐 하는 겁니다. 당연하게 우리는 죽지요. 그렇다면 이 공룡의 뼈대같은 성전의 구조에서 뭐가 나오는가 하면, 인간은 태어났는데 왜 죽어야 되느냐 하는 그 문제까지 쏟아지게 되어 있어요.
교회를 다니세요, 성경을 읽으세요, 그것만 계시가 아니에요. 절에 다니든, 아예 교회를 안다니든 그 사람이 죽는다는 현상 이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일어난 현상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지 않더라도 이미 하나님의 영향력 안에 들어 있는 거예요. 바빠서 못 믿었다, 엄마가 절에 가서 교회 안 갔다, 그런 이야기들은 아무 의미 없는 이야기입니다.
“당신 늙어 죽잖아. 왜 죽는지 알려줘? 하나님이 그렇게 했어.” 이것은 인간 쪽에서 하나님을 믿고 안 믿고, 그것에 관계없이 이미 하나님께서는 손을 대고 있는 거예요. 구태여 전도한다는 것이 이상해요. 왜냐하면 안 믿는 사람이 걸어가고 있고 나중에 늙어 죽어가는 거기서 성도는 뭘 발견합니까? ‘아, 하나님이 손 탔구나. 지진을 일으켰구나. 차 사고를 하나님이 일으켰구나.’ 하나님이 손 안댄 구석이 없어요.
새삼스럽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이상해요. 하나님을 믿지 맙시다. 그냥 봅시다. 하나님이 활동하시는 것을 그냥 보고 살면 돼요. 유난 떨면서 믿쑵니다, 쌍시옷 넣어가면서 그럴 필요 없이 평소에 늘 ‘음, 하나님께서 애들 모아서 까불게 했구나. 하루 종일 행사 치렀구나.’ 이 모든 것을 하나님과 연관을 시키는데 그 모든 것에 영향력을 주신 하나님을 모신 곳이 바로 성전입니다.
그런데 막상 그곳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아무것도 없어요. 이상하지요? 하나님을 모셨으면 거기에 무엇이 있어야 됩니까? 하나님을 모셔야 되잖아요. 없어요. 아무것도 없어요. 이게 구약성경을 이끄는 구조입니다. 뼈대구조에요. 아무것도 없는데 그 아무것도 없는 것을 신약에서는, 왜 아무것도 없었는가? 그것을 감추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감추었다는 겁니다.
없는데 그 없다는 본뜻이 뭐냐? 감추었다. 이게 어디에 나오는가? 마태복음 13장 16절. 항상 구약은 신약을 통해서 봐야 해답이 나옵니다. 전에 이야기했지요. 구약은 질문이고 신약은 답변이라고. “이는 선지자로 말씀하신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어요? 창세부터,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강의 처음부터 새로 하겠습니다. 하나님 믿을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활동을 보고 살면 됩니다. 그게 신앙입니다. 믿는다고 유난떨고 별짓 하지 마세요. 그냥 모든 것이 하나님의 활동니까 편하게 그냥 사는 것이 곧 신앙생활이지요. 그러면 사람들은, “저 인간이 사람을 죽였다는데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감추었어. 없어.” “왜 없는데?” 하나님은 스스로 자신을 감추고 계시는 겁니다.
감추고 계시다가 짜잔, “이 세상은 내가 만들었어.”라고 그 감추어진, 숨겨진 베일 뒤에서 하나님 본인이 커튼 열어젖히고 나오는 때가 이게 마지막 때입니다. 존재하는 것을 존재하게 했던 그 분이 드디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데 그냥 곱게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지옥 갈 쪽과 천국 갈 쪽을 분류하면서 등장하니까 이것이 난리도 아닌 거지요.
천국 가는 사람에게는 복음이 되고, 감추었던 주님에 의해서 구원받았다고 고백하면서 복음이 되고, 안 믿는 사람에게는 마태복음 8장에 나온 것처럼 “이를 갈면서 통곡하리라.” “아! 이걸 몰랐네. 내가 숨 쉬고 살아왔으면서도 이렇게 숨 쉬게 해주시고 살게 해주신 그것이 하나님의 활동, 하나님의 손길이 닿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손길이 누구의 것인지를 내가 몰랐네.” 하며 통곡, 또 통곡. 그래서 그걸 ‘곡성’이라 하지요.
“저리 가! 시끄러워서 안 돼. 지옥에 가서 통곡해. 지옥의 그 물 한 방울 없는 거기서 통곡해라.” 그렇게 되지요. 그러면 여기서 제가 질문을 하나 던져야 되겠지요. 주님이 나타나기 전에 감추었다 하잖아요. 그 감취어진 세계는 천국을 닮았을까요, 지옥을 닮았을까요? 주님이 빈자리에 나타나기 이 전에 구약은 천국을 닮았을까요, 지옥을 닮았을까요? 둘 중에 하나도 조심스러워하시는 모습을 보니 꼭 우리교회 오후 대표기도 시간의 모습과 똑같아요.
지옥을 닮았습니다. 그 근거가 신명기 4장에 나옵니다. 신명기 4장 11절에 보면, “너희가 가까이 나아와서 산 아래 서니 그 산에 불이 붙어 화염이 충천하고 유암과 구름과 흑암………” 마그마가 터졌다 그 말이지요. 화산이 터진 거예요. 12절에 “여호와께서 화염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되 음성뿐이므로.” 마그마만 터진 것이 아니고 거기서 같이 음성이 나오니까 기절초풍할 일인 겁니다.
그냥 화산은 화산일 뿐 거기서 주의 말씀이 안 들리잖아요. 그런데 화산과 더불어 주의 말씀이 들리니 도대체 하나님은 어느 가운데 계시다? 불 가운데 계신 거예요. 신명기 4장 24절에 보면, 여호와는 어떤 분인가?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라.” 질투의 대상은 물론 저주의 대상에게 질투하는 거지요.
이 세상은 뭘 닮았습니까? 지옥을 닮았습니다. “목사님, 왜 지옥을 닮아야 합니까?” 쫓겨났거든요. 여러분, 기억 안 납니까?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는 것. 에덴동산의 반대편이잖아요.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잖아요. 쫓겨난 주제에 뭘 더 원합니까? “아, 날씨가 왜 이렇게 더운줄 모르겠어요.” 쫓겨났잖아요. 그 주제에 시원한 것을 원해요? 시원한 사이다에 얼음넣어서 드릴까요?
이 세상에서 쫓겨난 주제를 왜 자꾸 깜박깜박, 치매걸린 노인네도 아니고 자꾸 잊어버려요. ‘아하, 우리가 살 데가 못되는 곳에 임시거처로 힘들게 머물러 있고 결국 우리는 여기서 속 시원하게 떠나면 되는구나.’ 왜? 나그네고 이방인이니까. 여기서 떠나면 되는 거예요. 왜 우리 자신을 그렇게 몰라요. 우리는 쫓겨난 신세입니다. 벌써 마음부터 팍 낮춰줘야 돼요.
이곳이 에덴동산이 아닙니다. 처음 알았어요? 살만한 곳이다, 살만한 곳이 못된다? 살만한 곳이 못되면 슬슬 보따리 쌀 준비를 하고 떠나면 될 문제지요. 그런데 고마운 것이 뭐냐 하면, 살만한 곳이 못되면 그냥 지옥으로 머물면 되는데 이 지옥까지 주께서 찾아오셔서 나무 크는 것, 햇빛 비추는 것, 전부 다 하나님의 활동으로 목격하게 하고 느끼게 하니 이런 횡재가 어디 있습니까?
지옥 갈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이 현실의 전부거든요. 이 범주가 자기가 아는 그 세상의 끝이에요. 그게 전부에요. 불교에서는, 모든 것이 인연과 인연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화엄경에서. 인연과 인연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끝이에요.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현대물리학에서는, 모든 것은 양자의 바다, 양자의 물결침의 바다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이것을 끈이론이라 하는데 11차원에서는 모든 것이 양자라는 최소의 입자가 그냥 요동치고 춤추는 것이라고 본 거예요. 불교하고 똑같아요.
아무리 과학자가 연구해도 거기에 예수 그리스도가 안 보입니다. 안 보인다니까요. 그런데 성도는 뭐냐 하면, 양자물리학이 어떠니, 전부 다 주님이 손대고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을 보여주면 내가 믿을게.” “이 바보야,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감추어진 분이에요. 구약에서. 그래서 하나님을 모신다는 것은 뭘 모시는 겁니까? ‘없음’을 모시는 거예요.
없음을 모시면서 있음의 세계와 없음의 세계에 무엇을 깔아두는가? 불을 깔아둡니다. 그 불은 어떤 불인가 하면, 있음의 존재가 감히 겁 없이 기어오르다가는 한방에 불태워지고 또 불태워지는 구조, 그게 바로 성전의 구조입니다. 이 성전의 구조는 어디서 나왔는가? 시내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장막이 있지요. 시내산에서 장막이 만들어집니다. 어떤 사람들은 모세가 시내산을 아홉 번을 왔다 갔다 했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너무 많이 올라갔어요.
몇 번을 올라갔다 왔는지는 정확하게 몰라요. 그러나 의미 있는 것은 세 번입니다. 그 불붙는 화산에 모세가 혼자 올라가지요. 그곳에는 모세도 들어갈 수 없어요. 부르니까 들어가는 거예요. “들어와, 들어와!” 불러주니까 들어가는 거지요. 다니엘 세친구가 불속에 들어갔잖아요. 그 당시에 느부갓네살왕쪽에서는 자기들이 집어넣었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그러나 사실은 주님이 “들어와, 들어와!” 하고 불속에서 주님이 부른 거예요. 불을 경계선으로 해서 세 명이 들어갔는데 몇 명이 나타났지요? 한 명이 용광로 불속에 더 있었잖아요. 불을 군사분계선으로 해서 어느 쪽이 불속에 있는 거예요? 느부갓네살쪽에서는 불 속에 세명을 넣었는데 한 명이 더 있으니까 네명이 불속에 들어갔다고 보고, 주님쪽에서 보면 어느쪽이 불 속에 있는 겁니까?
이 네명 빼놓고 전부다 불속에 있는 거예요. 인식의 전환이지요. 그 불이 만약 십자가라면? 갈라디아서 6장에 나옵니다. 십자가안에서 나는 살아 있는데 세상은 죽고, 세상사람 보기에 는 살았지만 나는 십자가 안에서 죽은자고. 그 불이 십자가로 바꿔치기 해서 오늘날 그대로 말씀 속에서 있는 겁니다. 말씀을 쏙 빼버리면 너와 나가 동일하게 같은 지대위에서 햄버거 먹고 차를 타고 왔다 갔다 하고, 아무 경계선 없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요.
여기서 중요한 발상의 전환을 성경이 요구합니다. ‘있다’ 하는 것은 없고 ‘없다’하는 것은 있다. 바꾸라는 거예요. 없는 쪽에서 나타나게 되면 그 없는 쪽이 채워지는 것은 미래입니다. 구약입장에서 없는데서 나타나시는 것은 주님이에요. 아까 본 마태복음 13장 24절, 감춘 것을 나타낸다고 하니까. 미래가 그렇게 채워진다면 미래입장에서 볼 때 진짜 영원히 있는 것은, 바로 구약에서 없다고 여긴 그 분이 태초 전부터, 창세전부터 영원히 있었고 소위 있다고 우기는 것들은 사실은 없는 것들이었어요.
이거 설명 필요합니다. 이번 강의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에 진입했습니다. 이것은 말이 너무 어렵기 때문에 카메라 화면에서 벗어나지 않는 상태에서 모션으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보시기에 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왜냐하면 아무리 봐도 내가 없어요. 뒤에도 나가 없고. 단지 있는 것은 손이 있고 몸체가 있지 여기에 나가 어디 있어요? 나가 어디에 떨어져 있어요? 주우면 되겠네요? 나가 없어요.
나라는 것이 없습니다. 제가 지금 말장난 하는 것이 아니에요. 진짜에요. 나가 없어요. 여러분 중에도 아무리 봐도 ‘너’라는 것이 안보여요. 아무리 봐도 여자라는 것이 없어요. 그냥 몸이 앉아 계신 거예요. 푸른색 원피스를 입으시고. 그러니까 없다니까요. 없어요. 나가 없고 너가 없어요. 그냥 하나님이 주신 신체만 있고 이 신체의 주인공은 감추어져 있다가 마지막에 나타나는 겁니다.
이게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요. 이게 없는 나를 상정할 때 하나님은 말합니다. “야, 너 되게 수상하다. 네 육체를 너라고 하는 분은 나 하나님인데 도대체 누가 중간에 끼어서 너를 너라고 하고 나를 나라고 하고, 누가 그렇게 했던가? 그렇게 만든 주인공을 나는 손볼 거야.” 그게 바로 영적전쟁이에요.
제가 어렵다고 했지요. 제가 계속 풀어갈 테니 조금만 참으세요. 흙으로 육체를 만들었지요. 그러면 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나는 없어요. 그냥 흙으로 육체가 된 거예요. 자꾸 머리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창세기 2장에서 흙으로 육체를 만들었잖아요. 더 쉽게 하겠어요. 내가 너를 볼 때 네가 보인다. 이 말은 맞지요. 그러나 그 보이는 너에게 이름을 붙일 때는 너 말고 그 너머의 잉여적인 여분의 것의 의미를 감고 이름을 붙이는 거예요.
여기 컵이 있네요. 여기에 물이 담겨져 있잖아요. 이게 보여요. 그런데 여기에다가 컵이 있네, 라고 컵이라는 이름을 날렸습니다. 그러면 이 컵이라는 단어 안에 이것도 포함되지만 다른 것도 포함되지요. 그러니까 내가 컵이라고 이름을 부르는 순간 더 많은 것을 포함시켜서 내가 이름을 붙였기 때문에 이 컵과 이름은 일치되지 않습니다.
이게 인간이 건방떠는 거예요. 하나님 보시기에 괘씸한 거예요. “마귀지? 마귀가 너를 그렇게 만들었지?” 진실로 주님 앞에서, 또는 십자가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내가 누구냐 하는 것은 누가 지정합니까? 그것은 만드신 분이 지정을 해야 될 텐데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인간은 자기에 대해서 너무 과도하게 다른 의미를 부과하고 말았습니다.
처음에 아담과 하와가 벌거벗었지요. 벌거벗었으면 벌거벗은 채로 있으면 돼요. 그런데 벌거벗음으로 있는데 거기에 플러스, 인간이 뭘 보탰습니다. 죄 짓고 난 뒤에 뭘 보탠 줄 알아요? “부끄러워라.”를 보탰어요. 거기다 부끄러움만 보탰습니까? 부끄러우니까 “부끄러워서 숨었습니다.”라고 했어요. 하나님 보기에 참 웃기지도 않아. 내가 그런 인간은 만든 적이 없다는 거예요. 벌거벗은 것을 부끄러워하는 인간으로 만든 적이 없어요.
그런데 무화과 나뭇잎으로 옷을 또 해 입었네요. 하나님 보시기에 놀고 있네. 웃기지도 않아요. 내가 만든 것이 아니에요. 그것은 괴물이에요. 제가 왜 이렇게 흥분하는지 모르겠지만 정말 참 답답해요. 이 육체를 일단 나라고 하자. 이것부터 사달이 난 거예요. 나가 있으니까 그 다음에 뭡니까? 하나님이 만든 육체를 ‘너’라고 부르고 거기에 또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거예요. 누구 맘대로 하나님을 불러요?
제가 이렇게 흥분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는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우상입니다. 우상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어디서 나오는가 하면, 언약궤에서 나오고, 언약궤는 시내산에서 돌판이 내려왔습니다. 시내산에서 돌판이 내려왔고 그 돌판을 안치하는 것이 언약궤고 그 언약궤를 둘러싼 구조물이 성전입니다.
성전을 통해서 우상이냐, 아니냐를 결정지어 버려요. 그리고 우상은 주님이 제일 싫어합니다. 우상숭배해서 지옥가는 거예요. 그런데 우상의 시작이 어디냐? 없으신 분이 우리한테 이름을 붙이기 전에 먼저 우리가 내가 여기 있는 것을 그 분의 허락없이 내가 내 맘대로 있다고 주장하고 내가 주인공이 되어서 활동을 개시하고 행동을 개시한 겁니다.
그러면 인간이 신을 섬길 때 그 신은 누굴 위한 신일까요? 내가 신을 섬긴다면 누굴 위해서 섬길까요? 나를 위해서 신을 섬기지요. 그것을 가지고 출애굽기 20장에서 십계명 시작할 때 “나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합니다. “ 너를 위하여 어떤 신도 믿거나 만들지 말라.” 신이 없다면 우리는 무신론자가 되어야 되는데 우리는 신을 믿어버려요. 그것은 누구를 위한 신입니까?
신이라고 이름을 붙이는 내가 과도한, 원래 신도 아닌데 과도한 이미지를 거기에 퍼부어서 그것을 신이라고 질질 끌고 나에게 결합을 시킨 겁니다. 그게 바로 우상입니다. 그 증거를 대겠어요. 흥분할 것이 아니고. 출애굽기 32장을 봅시다. 8절이요.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갔다 내려오는데 땅에서는 난리도 아니었어요.
손에 끼었던 금가락지와 귀걸이 빼서 금송아지 형상 만들고, 춤을 추면서, 이 날은 여호와의 날이라고 해서 주일 지킨다, 부흥회 한다, 난리가 났어요. 그런데 8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한 길을 속히 떠나” 그 다음에 무슨 말이 나옵니까? “자기를 위하여” 신이 없잖아요. 신이 없는데 자기는 있다는 겁니다. 이게 문제에요. 신이 없으면 누구도 없어요. 나도 없는 거예요.
내가 없으면 내가 없어집니까? 나는 없지만 뭐는 있습니까? 숨겨진 하나님이 만든 내 육체는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그러면 무엇이 필요해요? “숨어계신 하나님이여, 이 육체와 숨겨진 하나님과는 어떤 관계가 있고 어떤 고리로 맺어져 있습니까?” 이게 바로 언약이라는 겁니다. 이게 하나님의 율법이고 말씀이거든요.
처음에 하나님께서 흙으로 육체를 만들고 이름을 지었잖아요. 아담이잖아요. 하나님 보시기에는 우리의 신체와 아담이 부합이 돼요. 그런데 그 아담이 범죄하고 말았습니다. 그 다음부터 그 아담이 하나가 안돼요. 하나님 생각하는 아담과 그리고 인간 본인이 생각하는 아담과 일치되지 않을 때는 둘 중 하나를 없애야 되겠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흙으로 만들고 두 번째 아담을 준비했습니다. 그 두 번째 아담이 로마서 5장에 나오는 마지막 아담이에요. 누구십니까?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은 자기 아들을 인간이 만든 그 실패한 인간대신에 자기아들을 완벽한 인간으로 두 번째 보내신 거예요. 기독교가 감이 잡히십니까? 복음이 감이 잡힙니까? 가짜 붙들고 나라고 여긴 거예요. 간단한 문제에요.
가짜 붙들고 나라고 나오니까 진짜 예수님께서 피 흘리면서 “이리 와서 내 십자가 앞에서, ‘아, 나는 가짜군요.’라는 고백들을 하라.” 그 말입니다. 내가 너를 죽여주고 내 형상으로 다시 진짜 아담에 속한 지체로 만들어줄 테니까 오라는 거예요. 와서 너의 가짜임을 고백하라는 겁니다. “주여,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그렇게 되라는 그 말이에요.
지금 제가 이야기한 가운데서 일부러 뭘 빼돌렸는가 하면, 인간으로 하여금 ‘나’라고 규정했던 그 배후세력, 인간으로 하여금 신을 섬기게 만든 그 배후세력, 그리고 자기있음을 계속 강조하는 배후세력을 언급을 안했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그것을 계속 뭐라고 하느냐 하면, 우상이다, 우상이다, 우상이다, 그렇게 이야기를 해요.
하지만 마지막에 감추어진 것이 나타날 때는 그 배후세력은 바로 뱀, 사탄이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옵니다. 옛뱀, 용, 사탄. 사탄이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소유된 육체를, 이미 소유당한 피동적인 육체가 자기를 주인공 삼기 위해서 자기가 자기에게 이름을 붙이는 오류와 망발을 저지르는 이것을 마귀가 뒤에서 조종한 겁니다.
“이제는 에덴동산 그리워하지 말고 독자적으로 살아라. 네 힘으로 살아라.” 그게 바로 가인의 족속이잖아요. 그러면 거기에 대해서 “아니야. 우리는 나와 나의 기초가 된 육체와 합치되지 않아.”라고 하는 사람은 그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하면, 그 안에 장차 오실 미래의 어떤 분의 자리, 예수 그리스도가 그 안에 들어 있어서 그 예수 그리스도가 “진짜 인간은 나고 너 아니야.”라고 이야기할수 있어야 되겠지요.
그게 누구냐 하면, 아벨 속에 있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영이 아벨 속에 있다 했지요. 결국 아벨은 가인이 “이 씨!” 하고 때려죽여버렸잖아요. 죽이니까 아벨은 죽은 거예요. 아벨이 죽음으로서 뭐가 들통났습니까? 그런 발언, 그런 멘트를 날렸다는 말은 이미 가인의 세계, 인간의 세계는 엉터리라는 것이 폭로가 되어버린 겁니다. 인간의 있음의 세계가 폭로가 된 겁니다.
이제부터 어렵지 않아요. 쉽게 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궤를 만들었지요. 맞지요? 어떻게 만들었습니까? 자기 패물 다 내놓아서 성막 만들고 언약궤 만들었지요. 그 재료를 다 내놨잖아요. 자 이제 문제 나갑니다. 언약궤를 누가 만들었습니까? 방금 이스라엘이 만들었다고 했잖아요. 이스라엘이 만들었지요. 그러면 이스라엘은 어떠한 것을 숙제로 부여받느냐 하면, 언약궤, 그 아카시아로 만든 그 나무상자를 비롯해서 모든 성막안의 모든 물건과 장식들에 대해서 “우리가 만들었다.” 그러나 사실은 누가 만들었다? “하나님이 만들었습니다.” 하는 그 간격, “내가 만들었다? 아닙니다. 하나님이 만들었다.”
하나님이 만들었느냐, 내가 만들었느냐, 그 간격을 뛰어넘어야 될 책임과 의무를 지게 되어 있어요. 얼마나 이게 어려운지 몰라요. 우리 애가 좋은 대학에 갔다. 자, 애 좋은 대학 보내기 위해서 엄마가 수고한 것은 누구나 다 알아요. 누가 묻습니다. “그 애 좋은 대학에 갔는데 엄마가 수고했지요?” “예. 제가 엄마로서 수고했습니다.” 와 “주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사이의 그 간격, 그걸 그 엄마가 어떻게 뛰어넘을 것인가, 그 말입니다.
어떻게 그걸 좁힐 거예요. 좁힐 수가 없어요. 내 자식을 내가 키운 것이 맞기 때문에. 주님이 천사 보내서 키운 것이 아니잖아요. 내가 빨래 하려고 하는데 천사가 “저리 가! 내가 할게.” 이렇게 나타난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왜냐하면 천사는 늘 없는 존재고 늘 없는 존재가 되어야 할 이유가 뭐냐? 있음의 세계는 우리가 이미 있음의 세계를 장악하고 있고 점령하고 있잖아요.
그래서 성전과 성막의 그 없음을 봉인해야 돼요. 뭘 봉인한다? 없음을 봉인을 해야 되는데, 그 없음의 장소를 봉인을 해야 되는데 없음에서 모든 있음이 있게 하는 능력이 나왔기 때문에 없음을 봉인을 해야 되고, 여기에 들어가게 되면 불로서 태워버려요. 번제의 불로 타죽어요.
문제는 갈수록 이스라엘이 여기에 있는 이 모든 것을 누가 만들었다? 있다는 그 우리들이 만들었다고 해서 그 없음을 뭘로 바꾸는가 하면, 마저 메워버려요. 뭘로? 우리 자신들의 공로로, 자신들의 있음으로 메워버립니다. 그 증거가 뭐냐? 블레셋과 전쟁하는데 홉니와 비느하스가 언약궤를 앞장세우는 겁니다.
그 점을 봅시다. 제가 너무 어렵게 하지는 않는지 걱정이 됩니다. 민수기 10장을 봅시다. 35절, “궤가 떠날 때에는 모세가 가로되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다시 한 번 묻습니다. 궤를 누가 만들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만들었지요?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다고 합니까? 하나님은 자기가 만들었다는 거예요. 증거를 대라고 한다면, 궤가 움직일 때 누가 움직입니까? 하나님이 움직이잖아요.
그러면 궤는 누구하고 연관되어 있어요? 하나님하고 연관되어 있지요. 그러나 아무리 연관되었다고 이야기를 해도 너무 추상적이고 모호해요. 왜냐하면 그 언약궤는 누가 만든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자기가 금붙이 빼서 만들었잖아요. ‘이상해. 우리가 만든 언약궤인데 그 언약궤가 움직일 때 하나님이 왜 움직이지? 우리가 만들었는데.’ 주님은 말합니다. “그 원인이 네가 지금 있다고 우기기 때문에, 자꾸 너 중심으로 생각하기에 건너 뛸 수가 없다.”는 겁니다.
주님이 만들었다는 사실과 자꾸 거리가 생겨버려요. 거리가 생기면 자동적으로 충돌이 일어나지요. 계속 봅시다.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로 주의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하였고 궤가 쉴 때에는 가로되 여호와여 이스라엘 천만인에게로 돌아오소서 하였더라.” 이것은 누가 봐도 조금만 이해력이 있다면, 전쟁은 누가 한다? 이스라엘이 하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속에 동행하시는 하나님이 하시는데 그 증거가 뭐다?
언약궤를 앞장세우면 언약궤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같이 움직여서 “누구야? 사랑하는 내 백성을 누가 감히!” 하고 앞장서서 다 처분해 주시고 승리해서 어떻게 돌아온다? 편안하게 “봐라! 내가 다 이겼잖아.” 하고 백성에게 돌아온다, 라고 예언하시면서 이 말씀을 주신 이것에 하자가 없지요? 그 말이 맞지요? 분명히 우리는 다짐했습니다.
그러면 사무엘상을 봅시다. 4장 3절을 누가 크게 읽어보세요. “백성이 진으로 돌아오매 이스라엘 장로들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로 오늘 블레셋 사람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하니.”
이 전쟁의 현장에 우리가 있었더라면 언약궤를 앞장세워서 승리하게 하자는 이 지도자의 제안에 대해서 우리가 동의했겠어요, 안했겠어요? 동의하지요. 왜? 아까 민수기 읽어봤잖아요. 언약궤 폼으로 있는 것이 아니잖아요. 언약궤에 주신 약속이 뭡니까? 언약궤 움직이면 상자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같이 누가 움직인다?
하나님이 움직이시고 적들을 쳐부숴서 편안하게 승리해서 “그동안 많이 기다렸지? 승리했다.” 하고 돌아오는 그 장체가 언약궤라고 민수기에 이미 이야기했잖아요. 그러면 민수기에 말씀하신 그것을 사무엘상 4장 3절에서 홉니와 비느하스가 그대로 써먹었다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누가 봐도 하자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그러면 사무엘상 4장을 봅시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언약궤를 빼앗겼어요, 안 빼앗겼어요? 난리도 아니에요. 사무엘상 4장 10절부터 보면 언약궤는 빼앗기고 난리가 났어요. 22절에 “또 이르기를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으므로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였더라.” 이런 엉망진창에 대해서 누가 해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홉니와 비느하스가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성경말씀대로 했는데. 우리가 구약을 보면서 이런 것을 발견해야 돼요. 그냥 믿자, 그렇게 되면 안 됩니다. 지금 공룡뼈대입니다. 있음이 없음을 옹위해야 되는 이유는 있음이 있음으로 인하여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없음으로 인하여 구원받는다고 했지요. 동화책에 <벌거벗은 임금님>이라고 있지요. 임금님이 얼마나 명품을 좋아하는지 신하들이 그 임금을 놀려먹기로 작정했습니다.
“임금님, 제가 재단한 옷이 어떻습니까?” 임금님이 “안 보이는데?” “임금님, 마음 착한 사람에게만 보이는 최고의 옷입니다.” 임금님이 자존심이 있어서 “그래? 음, 최고의 옷이 맞구나. 한 번 입어보자.” “와! 멋지십니다. 박수! 박수!” 모든 어른들은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단 한명의 어린애가 하는 말이 “얼레리꼴레리! 임금님이 벌거벗었다.”
성전은 하나님이 계신 곳이다. 누구나 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어린애가 올라가더니만 “아빠! 성전에 아무것도 없어.” 우리는 그 아무것도 없음을 믿어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아무것도 없음을 못믿습니다. 우리가 있기 때문에. 있음은 반드시 더 큰 힘을 가진 있음을 상징하도록 되어 있는데 그 상징이 바로 우상이에요.
왜 우상인가? 나를 위해서, 현재 그 있음을 옹위해주고, 있음을 후원해주고, 그 있음을 정당화해주고, 내 있음의 모든 활동을 죄로 여기지 아니하고, 착하다고 간주하는 상상의 신을 섬기는데 그것이 없는 하나님 보시기에 그것이 우상이 되는 거예요. 제가 전에 총신신학대학원 수련회에 갔는데 큰 기도원에서 했어요.
그 때는 신학생들이 차고 넘쳐서 제대로 잘 곳도 없어서 학교당국에서 학생들보고 되는 대로 자도록 했어요. 저는 강대상 앞쪽 밑에서 잠을 잤는데 어떤 학생들은 용감하게(?) 지성소에서 잠을 잤습니다. 기도원원장 난리 났어요. “하나님의 성령이 계시고 주님이 계신 그 장소에 왜 건방지게 소위 신학을 한다는, 믿음이 있다는 신학생들이 왜 거기서 잠을 잤느냐?” 해서 수련회에서 큰 말썽이 일어났습니다.
왜 지성소에서 자느냐는 말이지요. 그래서 신학생들이 “지성소가 어디 있는데요?” 벌거벗은 임금님이야기하고 똑같은 거예요. 또 한 3, 40년 전에 여전도사가 멋도 모르고 강대상에 올라갔어요. 어디 강대상에 여자가 올라갑니까? 강대상에는 제사장인 남자만 올라가는 것이지 여자는 아래 강단, 찬송 인도하는 거기만 머물러야지 여전도사가 위에 올라가느냐는 말이지요.
참 이야기가 웃기지도 않지요. 왜 인간은 언약궤라는 것을 우상으로 만들었고, 성전을 우상으로 만들었습니까? 그 이유는 뭐냐? 내가 여기 있음을 없음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그래요. 나는 인간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네가 인간이 아니고 예수님이 인간이야.” “아닙니다. 저도 인간입니다.” 우리는 인간 아닙니다. 새로운 인간 되어야 돼요. 우리는 서로가 보기에 인간이라고 하지만 주님 보시기에는 흙입니다.
진짜 천국가야 인간입니다. 세리가 되었든지 창기가 되었든지. 진짜 천국에 가려면 진짜 인간과 만남이 있어야 돼요. 진짜 인간으로부터 호출당하든지 붙잡히든지 해야 돼요. 그 진짜 인간되시는 예수님이 홀로 하신 그 효과, 같이 동반되는 그 효과, 부대효과, 주님이 우리를 대역해서 하신 그 대역의 효과를 우리가 성령으로 받을 때 우리는 “아 참! 우리는 그냥 육체이지 나가 아니군요.” 진짜 나는 주님이 와서 ‘너는 내 것이다.’ 할 경우에만 주님의 인생으로서 ‘나’라고 명칭을 붙일 수가 있는 겁니다.
아까 이야기해지만 이런 컵과 ‘컵’이라는 이름과 합치되지 않습니다. 컵은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하지요. 딱 이것을 컵이라고 할 수 있는 언어는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은 아무리 둘러봐도 여기에 ‘나’는 없습니다. 내 눈에 분명하게 보이는 것은, 다리 보이고, 손 보이고, 옷이 보이지 여기 ‘나’가 어디에 있습니까?
머리, 이 부분에 있습니까? 글자 써놓으면 ‘나’가 되는 거예요? 있지도 않은 나를 위해서, 허구적인 나를 위해서 왜 우리 육체가 평생 걱정하고, 염려하고, 공포속에 놓이고, 위협을 받았습니까? 성경에는 “살든지 죽든지 너희는 나의 것”이라고 했는데, 나의 주인이 따로 있는데 우리는 그 나의 주인을 모르고 우리는 일방적으로 누구의 꾐에 빠져서 “이것은 내 것입니다.” 하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이 “너라는 그것을 내놔봐.” 있어야 내놓지 없는데요. 결국 나는 허구고 그 나가 믿는 신도 허구인 거예요. 진짜는 뭐냐 하면, 내가 움직이지 않는데 주께서 움직이는 겁니다. 언약궤를 만든 것이 나라고 우기면 안돼요. 사실은 주님이 언약궤를 만들었기 때문에 주님이 언약궤를 움직일 때만 언약궤에서 주님이 일어서고 언약궤가 우리를 구원하는 겁니다.
내가 홉니와 비느하스같이 언약궤를 들고 간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도와주는 것이 아닙니다. 언약궤하고 언약궤라고 이름을 부르는 우리의 생각하고 합치되지 않아요. 그런데 홉니와 비느하스는 뭐냐? 우리 이스라엘을 지키기 위해서 우리는 이것을 동원하자고 나선 겁니다. 이스라엘은 누구의 나라입니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나라지 이스라엘 본인들의 나라가 아니에요.
이 육체는 하나님의 것이지 내 것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따로 있고 이스라엘이라고 여기는 이스라엘이 따로 있는 거예요. 두 번째 이스라엘은 환상이고 허구지요. 그것은 없는 이스라엘인데, 원래 이스라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되게 했는데 그 이스라엘 당사자가 하나님 말고 따로 자기들이 생각하는 이스라엘을 만든 거예요.
그래서 그 이스라엘을 누가 지킨다? 이스라엘을 이스라엘이 지킨다고 나대다가 다 망한 거예요. 언약궤도 빼앗기고 누구도 죽고? 엘리제사장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었습니다. 죽여버려요. “어디서 가짜가 까불어?” 사무엘상 5장 봅시다. 진도 잘 나갑니다. 5장 1절에 언약궤를 누구한테 빼앗겼지요? “블레셋 사람이 하나님의 궤를 빼앗아가지고”
블레셋 사람에게 언약궤를 빼앗겼습니다. 제가 묻습니다. 블레셋사람이 언약궤를 갖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언약궤가 블레셋 사람을 갖고 있습니까? 어느쪽입니까? 지금 5장 1절에 보면, 분명히 블레셋 사람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빼앗았지요. 그러니까 이 모습은 뭐냐? 이스라엘이 그동안 하나님을 오해했다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간직하고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빠져나온 거예요. “어디서 착각을 해? 내가 이스라엘 되게 할 때만 이스라엘 되는 거야. 누가 갑이고 누가 을인데?” 그래서 하나님께서 진짜 이스라엘을 알려주기 위해서 일부러 이스라엘의 적이 되는 블레셋 손에 사로잡힙니다.
사로잡히고 난 뒤에 그 다음 5장 4절을 보세요. “그 이튿날 아침에 그들이 일찌기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얼굴이 땅에 닿았고 그 머리와 두 손목은 끊어져 문지방에 있고 다곤의 몸둥이만 남았더라.” 희한합니다. 그들에게 다곤신이 있었거든요. 우리가 믿는 다곤신이 이스라엘이 믿는 여호와를 이겼다고 언약궤를 포로 끌고 오듯이 가져왔습니다.
언약궤를 다곤신당에 가져다 놓은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약궤가 움직이면 하나님도 같이 움직인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 전략은 대실패였습니다. 언약궤는 그냥 상자일뿐이었습니다. 상자일뿐이라는 것은 그 상자를 누가 만들었습니까? 그냥 내가 만든 상자일뿐이라고 여긴 겁니다. 이거 의미 있습니다. 내가 만든 상자이기에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그 상자도 아무것도 아니라, 그것부터 출발해야 진짜 우리자신을 알아요.
이 정도로 우리는 우리를 못 넘습니다. 모든 것이 내것이라는 그 욕심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요. 하지만 못벗어나는 우리를 주께서 구원해 내시는데 방법이 뭐냐? 일단 주님이 우리를 떠나요. 떠나게 되는데 언약궤가 다곤신당에 안치가 됩니다. 아침에 일어나니 어떤 현상이 일어났습니까? 4절에 “그 이튿날 아침에 그들이 일찌기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얼굴이 땅에 닿았고 그 머리와 두 손목은 끊어져 문지방에 있고 다곤의 몸둥이만 남았더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자, cctv를 달아봅시다. 다곤 신당에 cctv를 달아놓고 언약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살펴본다고 생각합시다. 무슨 일이 일어났지요? 언약궤가 있는데 상자에서 어떤 허연 수염을 한 노인네가 나오더니 “이놈의 손모가지!” 뚝뚝 부러뜨리고, 목가지도 부러뜨리고 다시 상자 속으로 사라졌습니까?
그렇게 상상하신다면 그것은, 우리가 ‘나’라고 하는 범주를 못 벗어난 범위내에서 극단적으로 상상해 낸 그 상상의 전부입니다. 문제는 그 상상의 전부가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을 생각할 때 자비하신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상상의 전부와 합치되고 같은 내용을 구성하고 있다는 겁니다.
허연 영감님이 나와서 안수하시고, “여기는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이니 잠잠할지어다.” 하박국 3장 1절을 예배시작하면서 읽고 파이프오르간 치고, 이게 다 뭐냐 하면, 우리가 상상했던, 내가 여기 있음에 내가 지어낸 전부가 그 정도에요. 그러면 어떻게 해서 다곤신상은 부서졌습니까? 잠시 침묵이 흐르고 있습니까? 왜 다곤신상의 모가지가 부러지고 손모가지 발모가지가 다 부러진 겁니까?
어떤 물리적인 접촉도 없었을 것인데 왜 그렇게 된 겁니까? 도대체 이 상황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결국 우리는 뭡니까? 정답은 모른다는 것이 정답이지요. ‘모른다’가 정답입니다. 그 ‘모른다’가 우리를 구원하는 거예요. 우리가 안다는 것은 누가 아는가? 내가 아는 거예요. 나라는 것은 애초부터 없는데 나를 상정해놓고, I know, 라고 한 거예요. 두 단어잖아요. I 있어야 되지요. 그리고 know도 있어야 되지요.
I know, 내가 안다, 둘 다 엉터리입니다. “주께서 아시나이다.” 이렇게 나와야지요. 다시 말해서 “내가 죄인이며 나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라는 결과를 낳는 것은 바로 아무것도 한 것도 없이 다곤신상이 손모가지를 다 분질러 놓으신 주님의 능력이 나에게 임했기에 주님에 의해서 나는 모른다는 이런 결과가 나왔습니다.”라는 고백만 내놓는다면 그것이 바로 구원받은 성도입니다.
그냥 사세요. 어떻게 살더라도 주께서 유발한 결과입니다. 어떻게 해도 우린 30배, 100백의 열매를 마음껏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졸음마귀를 이기고, 그런 식으로 해서 우리가 얻은 것이 아니에요. 그냥 좋은 땅이에요. 그냥 좋은 땅에 주께서 씨앗을 심어서 주께서 자라게 하셨습니다. 왜? 우리 몸을 통해서 숨겨진 것이, 우리 몸을 통해서 나타날 때 그것을 두 자로 뭐라고 하느냐? 감추인 것이 나타난다고 했지요. 마태복음 13장 35절에서요.
그것을 뭐라고 하는가? 두자로 크게 써야 돼요. 성전입니다. 구약이 공룡이라면 그 공령의 뼈대구조가 뭐라고 했던가요? 그게 성전이라고 했지요. 성전이 무엇이냐? 없는 것이라고 했지요. 없는 것인데 있는 자들이 없는 것을 옹위해야 되고 그것을 봉인해서 있다는 말이지요. 봉인한 그것이 드디어 신약세계에서는 공개되어 버립니다.
“성전 보여줘.” “자, 여기.” “그것은 너잖아.” “나 아니야 성전이야.” “성전 꼴 하고는. 세수도 안하고 손톱도 길고, 무슨 이런 성전이 다 있어?” 손톱이 길든, 머리가 헝클어졌든, 민낯이든 아니든 관계없이 그것마저 주께서 하신 결과로 보는 거예요. “내가 먼저 있고 그래서 내가 나를 만든 것이 아니고 네 육체에 합치되도록 활동하시는 분은 내가 아니고 주님 쪽입니다.”를 늘 고백할 때 이것이 바로 성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