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중심사상

성경중심사상과 그 전개4-2012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제4강

아빠와 함께 2013. 2. 12. 17:10

2012 겨울수련회 4강

 

얇은 교재 [죽음으로 이끄는 길]을 이번 시간에 정리해 보겠습니다. 3페이지에 “2. 십자가 죽음에로의 돌진”이라는 대목이 있고 “(1) 땅으로부터 죽음”이 나오지요.

 

노아 언약에 있어서 기본적인 것을 아셔야 해요. 그게 뭐냐 하면, 환경이 우리를 대신해서 구원해 주는 겁니다. 내가 설친다고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둘러 싼 환경 자체에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져서 그 환경에서 쏟아지는 그 은혜성이 지상의 어느 한 지점에 집중해서 연결되고 있는가를 봐야 돼요.

 

여러 사람이 있어도 하나님이 주시는 삶의 환경은 어떤 한 지점, 한 인물에 집중해서 다른 사람들이 핵우산처럼 혜택을 입는 식입니다. 그래서 은혜 안에 있는데, 하나님의 은혜의 환경이 한 인물에 집약됨으로써 집약된 이 인물과 다른 인물간의 차별을 둬요. 그래서 이쪽은 죄인이 되고, 반대쪽은 의인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저쪽이 이쪽보다 훌륭해서 의인 된 것이 아니고, 이 사람(의인)을 분해해 보면, 분명히 죄인인데 이 죄인을 하나님의 의로 덧입혀 주니까 의인이 된 겁니다. 이 모습이 노아입니다. 노아는 당대의 의인이라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다른 사람은 죄인이 되버려요.

 

이 노아를 분석해 보면 분명히 죄인인데 의인의 혜택을 입었어요. 이러한 구성 요소는 나중에 이것이 노아의 핏줄을 통해서가 아니라, 노아에게 주신 언약을 통해서 의인이신 예수님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려고 십자가를 지신 일을 앞당겨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언약’인데, 요즘 이런 말을 잘 안 쓰고 대신 ‘영적’이라고 하는데, 이 말이 또 오용되어 이상한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임시적으로 ‘영적’이란 표현을 쓰겠습니다. 노아가 영적으로, 정확하게는 ‘성경적’으로 십자가와 연결되는데, 무엇은 아니다? 노아가 아무리 당대의 의인이라도 핏줄(혈육)로는 그 의가 전단되지 못합니다.

 

그런데 노아도 은근히 욕심이 나는 거예요. 내가 은혜를 받았으니까 내 자식들도 은혜를 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게 ‘모세 신앙’ 아닙니까. 은근히 밀어주고 싶은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러면 노아가 받았던 이 언약이 노아 소유가 되어 아버지가 자식에게 축복을 주는 양상으로 남들에게 그렇게 비취지요.

 

남들에게 그렇게 보여진다는 것은 본인도 그렇게 오해할 소지가 많아요. ‘우리 아버지가 목사이기 때문에 나는 믿음 좋다.’ 저는 아버지가 목사인 여자와 결혼하고 싶었어요. 왜냐? 목사님이 새벽마다 기도하는 모습을 봤기 때문에 그 기도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그러니까 항상 인간은 ‘내 몸’ 위주지요. 이것이 육적인 본성입니다. 심지어 영적인 은혜까지 양적으로 많이 퍼부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지요.

 

이렇게 사람들은 오해의 소지를 안고 있기 때문에 현재 자기가 누리는 은혜의 공로를 장차 오실 그리스도에게 돌리지 않고 조상 잘 만나서 잘 되었다고 공로를 조상에게 돌려요.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예수님과 바리새인이 대화를 나누는데, 예수께서 ‘내가 온 것은 죄에 갇힌 너희들을 건져내기 위해 왔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할 것이다.’ 했을 때, 바리새인들이 하는 말이 ‘우리는 아브라함 자손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은혜는 그 핏줄을 따라 전달되기에 죄에 갇혀있는 자가 아닙니다.’라고 하지요. 그러니까 주님 하시는 말씀이 ‘너희 아비는 아브라함이 아니고 마귀다. 너희들이 아비라고 우기는 그 아브라함은 오히려 내 때를 보기 원하다가 나를 보고 기뻐했다.’

 

정작 은혜를 받은 아브라함은 혈육적으로 구원 받는다는 생각을 안 했는데 바리새인들은 엉뚱하게 혈육적 노선으로 구원 받을 것이라고 오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노선이 두 개이다 보니까 혼선이 일어나요. 두 개의 노선이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못 믿는 이유는 사람의 본성 자체가 혈육 중심이기에 사돈의 8촌이라도 연결이 되면 좋게 보고, 아무 연결이 없으면 무조건 나쁘게 보고, 우리 집안을 공격하는 적으로 보는 거예요.

 

우리 몸도 마찬가지입니다. 외부의 이물질이 들어오게 되면 세포는 자동적으로 면역체계가 가동되어 밀쳐냅니다. 저도 지난 5년 동안 가을철만 되면 콧물과 재치기를 심하게 해서 설교, 강의 때 지장이 많았어요. ‘비염 알레르기’라고 후차적으로 명칭을 그렇게 붙여요. 그 명칭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몸이 그렇단 말이지요.

 

그런데 우리교회 고마우신 성도 한 분(의사)이 코에 뿌리는 약을 알려주셔서 그 약을 사용한 후에는 3년째 가을을 쉽게 지나갔어요. 너무 효과가 좋아서 그 이후 그 약의 전도사가 되어서 알레르기를 하는 사람을 만나면 그냥 지나칠 수 없어요. 사람 낚는 어부가 아니고 알레르기에서 출애굽(해방)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하여튼 노선이 두 개가 되었어요. 이것은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두 언약이 있는데 하나는 사라 출신이고 하나는 하갈 출신인데, 하나는 약속을 따라 났고 하나는 혈육을 따라 났다고 하지요.

 

‘혈육을 따라 났다’는 말이 성경에 나오지만 성경을 덮으면 그냥 혈육이란 명칭을 붙일 필요도 없이 그것이 전부입니다. 인간은 인간으로 끝나는 거예요. 혈육이란 말은 어떤 관점에서 사용하는가 하면, 영적은 다른 관점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둘 때 비교해서 혈육이지, 성경을 덮고 영적인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냥 사람 사는 것이 다 그렇고 교회 다니는 것은 종교고 취미 활동이고 그렇단 말이지요.

 

이런 영적인 관념을 가지려면 육에서 나와서 영으로 들어가야 되는데, 이건 성령의 바람이 불어야지 바람이 안 불고는 안 되는 일이란 말이지요. 바람은 보이지 않아요. 그러나 바람이 지나간 흔적은 있지요. 빨래가 펄럭이면 바람이 분다는 것을 알잖아요. 뭔가 사물을 움직이는 다른 힘이 존재하는 것을 알지요.

 

그래서 예수님이 성령의 활동을 바람에 비유한 것은 혈육에 의해 붙잡히지 않는다, 소유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인간이 바람을 잡을 수 없듯이 인간은 성령을 다룰 수 없고, 반대로 인간이 아무리 성령 없이 살고 싶어도 성령의 바람이 불면 그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성령의 흐름에 휩싸일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그렇다면 성령이 왔다 갔는지 악령이 왔다 갔는지 어떻게 아는가? 둘 다 영이기 때문에 인간은 감당을 못하는데, 악령이 왔을 때의 경우가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사울 왕이 악신이 들렸습니다. 자신의 병을 낳게 하기 위해 다윗이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데 그를 죽이려고 창을 던졌어요.

 

악신은 뭐냐 하면, 이유 없이 미워요. 왜 미우냐? 내가 미우니까 미운 거예요. ‘미워하는 이유는?’ ‘그런 것은 묻지 마! 내 기분이 그렇단 말이야.’ 무조건 미운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내 중심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악령에 사로잡히면 내 중심이고 성령에 휩쓸리면 그리스도 몸 중심입니다.

 

우리는 하루 24시간 중에 23시간 58분 58초는 내 중심이고, 2초 정도는 성령 중심이고 그렇지요? 그래도 성령이 놓지 않으면 구원 받은 사람입니다. 문제는 2초라고 했는데, 어떤 사람은 이틀에 2초, 어떤 사람은 두 달에 2초도 있는데 그건 상관없어요. 이런 이야기하니까 어떤 사람은 3개월에 2초가 되고 싶어하는데 그게 우리 마음대로 안 돼요. 이것을 성경에서는 간단하게 ‘회개하지 아니하면 구원 받지 못한다. 회개하고 날 믿어라.’

 

회개는 반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그동안 눈 돌렸던 곳의 정체를 발견하는 거예요. 내가 쓸데없는 꿈속을 헤맸구나 하는 것을 깨닫는 것이 회개지요. 어떤 사람이 그런 주장을 했는데, ‘꿈도 꿈이고, 꿈을 깨도 꿈이고, 꿈 깬 것을 알아도 꿈이다.’ 장자의 [나비의 꿈]입니다.

 

왜 꿈일 수밖에 없는가? 항상 그 중심에는 내가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은혜 받을까?’ 그것도 꿈이고, ‘내가 구원 받으려면 어떻게 살면 될까?’ 이것도 꿈이고. 왜? 항상 자신을 생각하기 때문에. 그래서 제가 첫째 시간에 ‘케이블카 안에 있는 사람은 자기는 생각 안 나고 바깥 풍경을 바라본다.’고 했지요.

 

제 말을 이해 못하는 사람들 중에 ‘성령을 받았으면 24시간 성령 안에 있는데 왜 2초, 3초라고 하는가?’ 라고 의문을 가져요. 구약 예레미야, 에스겔을 보세요. 이들이 늘 계시 받았습니까? 아니지요. 계시를 받을 때는 사람이 몸이 아파요. 신병이 걸린 것처럼 몸살을 알아요. 이 말은 평소에 자기 생활을 했다는 거예요.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이 화장실 가는 것, 밥 먹는 것 이 모두가 계시는 아닙니다. 계시는 그 사람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성령에 의해서 계시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이지 사도 바울의 감동으로 성경이 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신학자들은 사도 바울의 감동으로 몰아가서 바울에게도 오류가 있다고 주장하는데, 사도 바울은 여자에게 머리에 뭘 쓰라고 하는데 그 말대로 하면 요즘도 여자들이 머리에 뭘 쓰야 구원 받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지옥 갑니까?

 

‘사도 바울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고 사도 바울의 말씀이 전부가 아니고 사도 바울의 말씀 전체를 계시라고 신봉하지 마라.’ 이런 주장을 신학자들이 하는 거예요.

 

영과 육이 같이 갈 때 영은 반드시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서 희생을 남기고, 그 희생의 의미를 쫓아가 보면 대신 죽으심이 나란히 같이 가게 되어 있어요. 베이징 올림픽에서 박태환선수가 수영경기를 할 때 화면에 어떤 모습이 나옵니까? 박태환이 물살을 가르며 앞으로 가면 카메라도 같이 움직이잖아요. 주님께서 우리를 죄인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우리를 따라다니면서 ‘네 죄를 회개해라!’ ‘알았습니다.’이렇게 계속 따라가는 거예요.

 

죄를 알아야 희생을 알고, 희생을 알아야 자기에게 눈길을 두다가 나밖에 모르는 인간을 대신해서 죽으신 분이 계신다는 것을, 그분이 내 몸 속에 같이 계시다는 것을 파악하는 순간입니다. 그래서 3초만 신자가 아니고 그 3초 이전의 시간도 신자의 생활이었다는 것을 3초를 통해서 인식하지요. 이것은 인신론입니다.

 

안다는 것은 순간적인 문제입니다. 사람이 일에 몰두하면 자기 옆에 누가 있는지도 몰라요. 이것이 게슈탈트의 심리학에 나오는데, 어떤 일에 몰두하면 다른 것은 배경으로 빠지고 내가 보고자 하는 것만 보이는 겁니다. 나중에 보니까 “어, 네가 있었나? 언제 왔지?” 다시 그 사람에게 집중하면서 다른 것은 배경으로 빠지는 거예요.

 

이것이 인간의 심리적인 착각인데, 그러니까 인간은 부분을 보면서 전체는 오도하게 되어 있습니다. 설교나 강의 들을 때 분명히 잘 들었는데 녹취된 것을 다시 읽으면 놓친 게 발견돼요. “아, 이런 이야기도 있었네.” 하면서.

 

젊은이들이 연예할 때는 상대방에 푹 빠져서 “당신만 있으면 모든 것 다 없어도 괜찮아!” 이런 마음으로 결혼 했거든요. 여러분들은 그런 마음으로 결혼 안 했습니까? 그랬는데, 밤 안 해준다고 집 나라가고 하고, 이혼하자고 고함치고 난리입니다. 처음의 그 사랑은 다 어리로 갔습니까? 그러면 저쪽에서 말하지요. “너는 부분만 알았다.”

 

인간은 늘 부분만 알지 전체를 아는 순간이 없어요. 죽을 때까지 살아보세요. 전체를 다 아는지. 죽을 때가 되어서 “역시 모를 것은 여자야!” 라고 하는 사람이 있어요. 마치 여자를 아는 것이 일생의 큰 사명이나 되는 것처럼. ‘나는 뭘 제대로 아는 것이 없다.’ 이것이 사명이 되어야지, ‘같이 살아도 모를 것은 여자의 마음이야!’ 누구 허락 없이 함부로 알아.

 

성경에서는 당시의 역사적 상황 그런 것은 필요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해를 해서 ‘우리는 구원 받은 백성이다. 하나님이 도와주신다.’ 이런 오해가 혈육적인 오해고, 그 순간 희생과 대신 죽으심의 본뜻을 잊어버렸다는 것을 폭로하는 그 다음 준비된 사건이 벌어집니다.

 

그것을 사건들의 ‘마디’라고 합니다. 지속되는 가운데 마디로 툭툭 불거지면서 그 마디를 통해서 새로운 지속이 시작되는 겁니다.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족보가 14대, 14대, 14대로 나누는 이유가 거기 있어요. 구약 전체를 14대, 14대, 14대로 나누는 일은 모든 완결된 것을 거기에 담아내는 것이 아니고 어떤 경과들이 축적되어서 하나의 희생적인 사건을 유발 시킨 요인이었는가를 보라는 겁니다.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14대,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까지 14대,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14대(마1:17)라고 했는데, 따져보면 14대가 아니에요. 그러나 14대로 맞춘 이유는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의 역사적인 방식으로 층층이, 겹겹이 올라오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 중간에 3명의 여인이 개입합니다. 다말, 라합, 룻을 통해서 이것이 기존의 혈육적 관점이 아니라 언약적 관점으로 아브라함이 다윗과 연결되는 거예요. 이것이 영적인 새로운 족보로 연결됩니다.

 

DNA 연속성의 족보가 아니라 하나님이 개입된 사건이 있어야 되는데, 그 사건은 뭐냐? ‘혈율은 죄인이다.’ 라는 사건을 거기에 집어넣는 거예요. 그러면 여러분들이 ‘새로운 피조물이다.’ 또는 ‘거듭났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주님께서 임의로 어떤 사건을 집어넣는데 그것은 십자가 사건인데,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는 뭘 느껴야 됩니까? 나의 지나온 일과 앞으로 되어질 모든 일들은 다 죄다. 주님께서 대신 죽을 수밖에 없는, 주님이 희생할 수밖에 없는 죄의 질료, 또는 소재였음을 알려주시는 겁니다.

 

이것을 알 때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이 얼마나 기쁜 소식입니까? 내가 무슨 수로 죄인임을 압니까?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나를 죄인이라 할 수 있어요? 모든 죄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것이 바로 죄입니다. 왜? ‘나’에 계속 시선이 모아진다는 그 분위기가 바로 죄입니다.

 

‘나’가 발생되면 사적인 복수심에 나서게 되어 있습니다. 모든 복수심은 복수 이전에 ‘나’가 먼저 구축되어 있기 때문에 생깁니다. 즉, ‘네가 나의 DNA 확대 작업에 훼방을 했기 때문에 복수한다.’ 이것이지요.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냥 사세요. 그냥 자기 위주로 사시다가 ‘내가 이렇게 살다가는 지옥 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거든 주의 은혜인줄 아시기 바랍니다.

 

천국이 있는데 우리가 여기 땅에 살면서 ‘내가 행동을 회개해서 예수 믿어야 천국 간다.’ 이런 사고방식이 죄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회개는 천국이 덮쳐왔기 때문에 회개가 됩니다. 성령이 오기 전까지는 ‘회개하고 십자가 믿고 그 다음 의롭게 살아서 성화되어 영화롭게 된다.’ 이런 생각을 했는데, 막상 성령이 덮쳐오니까 이따위 생각들이 몽땅 죄였다는 것을 발견한 거예요.

 

내가 뭘 챙기고 계산할 수 있는, 나를 쳐다보는 또 다른 나를 생각할 수도 없도록 주님이 우리를 다스리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다음부터는 ‘지금 내가 죄인으로 사는 이것도 은혜다. 나는 은혜로 산다.’ 이렇게 되지요. 이게 오래 가면 좋겠는데 2초 갑니다. 이 순간이 2초 정도 가요. 그 다음에 어떻게 되는가 하면 ‘내가 이렇게 은혜를 받았으니까 목사님 말씀대로 막 살면 되겠네.’ 라고 또 ‘나’가 등장합니다. 그러면 또 박태환에게 카메라 따라가듯 주님이 따라와서 우리를 죽입니다.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인간의 역사라는 것은 다 허무한 것인데 그것은 인간의 ‘현존재’ 속에 ‘시간성’이 있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했어요. 제가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지요. 그러면 인간은 존재하는데 이 존재 말고 진짜 존재가 따로 마련되어 있다. ‘신이 아니고 존재다’는 말은 하이데거는 신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현존재와 존재를 나누어서 모든 현존재, 곧 인간은 존재에서 나왔다고 보고 있습니다. 죽게 되면 현존재는 존재층으로 사라지는 겁니다.

 

그 존재는 감춰져 있는데 어떻게 나타나는가? 그것은 현존재를 끝장내는 순간이 오는데 그것이 죽음이다. 그래서 그 죽음을 앞당겨서 먼저 선취하고 먼저 경험하는 순간 우리는 거기서부터 비로소 현존재에서의 불안과 두려움에서 해방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런 주장은 사르트르도 했는데 “죽음에 대해서 맞서라. 죽음도 나의 일부다. 그러기에 죽을 때 용감하게 죽으면 그게 가장 ‘나’다운 것이다. 왜 너 자신을 스스로 포기하려 하는가? 끝까지 가라. 무소의 뿔처럼.” 무소의 뿔은 불교의 남전대장경에 나오는 이야기죠.

 

고독하지만 고독을 즐겨라. 누가 너를 비웃든지 개의치 말고 너 자신을 지키면 그것이 바로 네가 얻고자 하는 진리의 전부다.

 

이 내용을 성경으로 말한다면 “네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리라.” 그 말씀을 갖다 붙이면 되겠지요.

 

이러한 속성은 불교만의 이야기가 아니고 모든 인간이 보편적으로 다 갖고 있습니다. 단, 불교에서는 노골적으로 불거졌다 뿐이고, 우리는 음흉하게 감추고 있어요. 항상 급하면 마지막에는 내 쪽으로 끌어당기고, 죽음도 스스로 이겨보려고 하고, ‘죽음도 내가 선택한다. 내가 내 몸으로 한강에서 뛰어내렸는데 경찰관 당신이 왜 말리는가? 당신이 내게 월급주고 내 인생 책임질 것인가? 내 몸 내가 죽겠다는데 당신이 왜? 언제부터 주님이 내 몸 관리했어?’ 이런 식으로 나오겠지요. 그 사람이 모르는 것이 뭔가 하면, 인간은 벌써 죽었는데 새삼스럽게 죽겠다고 나서는 것이 우습단 말이지요. 살아도 죽은 건데 그 사실을 모른 거지요.

 

환경이 어떤 한 인물에 집중되면 다른 사람들은 한 사람 덕분에 사는 거예요. 그래서 하늘에 있는 언약의 대신 죽음과 희생이 한 인물에 집약되면 이 사람은 참 힘들지요. 모세가 오죽했으면 “나는 이제 목회 안 할랍니다.” 이런 소리 했겠어요. 선지자를 인터뷰 해보면 다 공통적인 이야기를 해요. “나 이런 짓하기 싫습니다.” 못하겠다는 거예요.

 

에스겔 같은 경우를 보면, 하나님이 이런 말씀을 했어요. “에스겔아, 내가 네 아내를 죽게 해도 너는 울어서는 안 된다.” 그러면 에스겔은 뭐가 됩니까? 아내에게 쏟아 부은 사랑은 다 헛것이 되잖아요. 어쨌든 에스겔의 아내는 죽었고 에스겔을 울지 못했습니다. 조의금도 받지 말라고 하셔서 안 받았어요. 이게 무슨 짓입니까? 사람이 할 짓이 아니잖아요.

 

이게 바로 비정상적인 출산입니다. 모든 성령으로의 출산은 비정상적 출산을 거쳐요. 정상적인 출산은 수상합니다. 가짜에요. 그냥 지식일 수가 있어요. 흉내 내는 것이거나 반복적인 교육에 의한 것일 수가 있어요. 이런 것은 전부 가짜입니다. 진짜는 황당합니다. 진짜 구원 받은 사람은 스스로 자신이 미쳤음을 알아야 됩니다.

 

한 사람이 바보 되고, 병신이 되어서 다른 사람들이 혜택을 입는 거예요. 그러나 다른 사람들도 좋아할 것이 못됩니다. 왜냐 하면, 한 사람의 희생 때문에 이 집단 이스라엘은 그들이 원하는 쪽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예상 못하는 쪽으로 자꾸 가버려요. 한 예를 들면, 블레셋 사람들은 뱃사람들이라서 여러 지역을 다니며 약탈을 했어요. 그래서 이집트 제 2왕조가 이들을 점령한 적도 있습니다. 어쨌든 이들에게 이스라엘이 포위되었을 때에 사무엘은 금식하고 회개할 때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승리했어요. 이게 문제가 된 거예요.

 

그 다음 왕들은 어떻게 하는가 하면, ‘예전에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어떻게 이겼지? 아, 예전에는 이렇게 해서 이겼지.’ 하면서 예전의 일을 흉내 내면서 그들은 죄를 짓는 겁니다. 이게 바로 혈육적인 거예요. 홍해가 갈라져서 바다를 건너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라면 요단강 건널 때도 강이 갈라질 것을 기다렸다면 200년을 기다려도 못 건넜을 거예요. 그 때는 또 새로운 방법을 하나님이 사용하십니다. 왜 자꾸 새로운 방식을 사용하시는가 하면, 기존의 것을 버리라는 거지요. 기존 것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언제까지? 십자가에서 다 이룰 때까지.

 

그 전까지는 미완성이기 때문에 십자가에 도착할 때까지는 모든 것은 두 번 다시 되풀이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 십자가에서 완성 되고 난 다음에는 십자가만이에요.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는데 누가 너희를 꾀더냐?” “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것 외에는 일체 아무것도 알지 않기를 원한다.” 이미 구원의 능력은 십자가로 종결 되었어요.

 

혈육적인 본성이 등장하면 ‘십자가 이야기는 이제 그만하고, 이제 딴 것 없나? 성령의 열매, 성화에 힘써볼까?’ 이렇게 나오는데, 이것은 아직도 십자가의 영을 받지 못해서 그래요. 구약적인 오해를 계속 하고 있단 말이지요. 그래서 사울 왕은 언약궤를 가져오라고 했지요.

 

블레셋이 침략해 와서 빨리 하나님께 제사 드리고 전쟁에 나가 승리해야 되는데, 그 때 사무엘 선지자는 일부러 늦게 도착했어요. 예를 들면, 원래 9시에 도착해야 되는데 10시 30분이 되어도 오질 않았어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서 사울 왕이 직접 제사를 드렸어요. 그런데 그 때 선지자 사무엘이 나타난 거예요.

 

선지자가 제때 도착하지 않아 왕이 제사를 드렸는데, 사무엘은 화를 내면서 ‘왕이여, 왜 제가 도착하지 않았는데 제사를 드렸습니까? 하나님은 순종을 원하지 제가를 원치 않습니다.’ 라고 책망을 했지요. 이 말씀을 오늘날 목사들이 악하게 도용을 해요. ‘성경 말씀보다 목사의 말에 순종하는 것이 복을 받는 비결이다.’ 라고 사기를 치지요. 못 배웠으면 좋겠는데 배운 게 죄가 돼요.

 

선지자 사무엘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하면서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삼상15:23).” 라고 했고, 사울이 선지자의 옷자락을 붙잡아 찢어지고 했지요. 그 때 선지자는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나라를 왕에게서 때어서 왕보다 나은 왕의 이웃에게 주셨나이다.”

 

제 말은 뭔가 하면,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까불고 신경 쓰고 해도 다 하나님의 놀이게입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로봇은 반발은 안 하는데 인간들은 로봇보다 더 못해요.

 

지금 전쟁을 앞두고 뭐하는 짓입니까? 전쟁을 앞두고 내분이 일어났어요. 이것은 바로 인간에게 하나님이 주신 사건이 오게 되면 그 사건을 육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해결은 누가 하는가? 육적으로 달려들어서 그것이 죄가 되게 해놓고 해결은 새롭게 투입되는 하나님의 사건에 의해서 하나님 스스로 해결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구원의 공로가 주께만 돌아가고 인간에게는 조금도 영광이 돌아가지 않는 방식으로 일하십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오해 때문에 남겼던 그 희생물이 우리 곁에 남아있어요. 바로 그 모습이 이 땅을 다녀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앞당겨 미리 구약에 깔아놓은 겁니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그것을 이스라엘, 그 언약이 있는 공동체를 오늘날 교회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교회라는 것은 다 이루었다는 관점에서 ‘너는 구약에 일어났던 이런 잘못들을 다 이룸 속에 있는 내 지체의 모습으로 구약의 죄들을 너의 육신 속에서 되풀이하고 있는가를 똑바로 보면서 너는 말씀 안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분명히 하라.’는 말입니다.

 

사람의 육적 영광은 다 떨어져 나가도, 꽃의 영광은 따 시들어도 주의 말씀은 영원하리라. 육적인 영광이 시들어야 주의 말씀이 서요. 우리가 죄 안 지으면 말씀은 서질 않습니다. 에서가 태어나고 야곱이 태어나서 에서와 야곱이 자기 할 짓을 해야 말씀이 굳게 서게 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행동과 상관없이 하나는 사랑받게 되어 있고, 하나는 미움 받게 되어 있다는 것을 그들이 태어난 것으로 확인 될 수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결국 주께서 다 이루신 것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 겁니다. 그러니 인생이 얼마나 푸근합니까? 그런데 이것을 만약 나의 것으로, 내 자존심 챙기기 위해 유지, 관리하려 한다면 우리는 필히 주의 모든 말씀을 오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욕을 먹고 복음 전하는 사람이 희생을 당합니다.

 

그 다음을 봅시다. 5페이지 ‘(3)세상 국가로부터의 죽음’ 이 부분을 생각해 봅시다.

 

다시 복습해 보겠습니다. 인간이 구원 받는 것은 환경에 언약이 작용해서 구원 받지 인간의 개인적인 행동으로 구원 받는 법은 없습니다. 구약뿐 아니라 신약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하나님의 계시는 예수님의 실존에서 나와서 예수 그리스도가 다스리는 환경을 조성하고, 그것을 ‘예수 안’이라고 성경에서는 이야기하고, 예수 안에서 의롭게 되고, 예수 안에서 선택되었고, 예수 안에서 구원 받고, 예수 안에서 영광스럽게 되고, 이 ‘예수 안’이라는 조건 속에 우리가 하나의 갭슐 안에, 풍선 안에 들어오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 밖에 있는 사람이 예수 안에 들어오려면 언약적인 관계가 있어야 되는데, 그 언약적인 관계는 언약을 다 이루신 분만 불러 들일수가 있는 겁니다. 이유가 뭐냐 하면, 우리 안에 들어있는 것은 죄와 죽음이며, 사단이고, 악이기 때문에 악에서 먼저 빠져나간 사람의 능력이 아니면 어느 누구도 스스로 이것을 뚫을 수가 없어요.

 

정자가 아무리 많아도 여자의 난자로 뚫고 들어오는 하나 외에는 나머지는 다 포기해 버리지요. 얼마나 의리 있습니까. 인간의 정자는 의리가 있는데 왜 남자는 의리가 없는지 모르겠어요. 예수 안을 뚫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만 되기에 진짜 예수 안에 들어온 사람은 오직 예수님의 공로만 자랑하지요.

 

예전 설교시간에 그런 예를 들었습니다. 연말 시상식을 하는데 개그 연예대상에 신보라가 수상 소감을 말하면서 뭐라고 했는가 하면, “자랑할 것은 오직 예수님 피밖에 없습니다.” 라고 했어요. 교회에서 배운 모양이에요. ‘자랑할 일 있으면 먼저 예수님을 자랑해야 한다.’고 배운 것 같아요.

 

그래서 신보라는 ‘예수님의 피밖에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라고 먼저 말한 후에, ‘엄마와 그동안 저를 보살펴 주신 분들에게 이 영광을 돌립니다.’ 뭐 이렇게 했어요.

 

제가 깜짝 놀랐어요. 기독교 방송에서도 안 나오는 ‘피’ 이야기를 일반 방송에서 들으니까.

 

진짜 예수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자기가 뚫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오직 예수님의 피밖에 없습니다.’ 라고 피만 자랑하는 거예요. 예수 안에서. 그런데 이게 인식론 적으로 2초, 3초 밖에 안 가요. 예수 안에 있으면서 애굽에 있던 육신의 본성이 있어서, 육신 안에 DNA가 있고, DNA는 무조건 이기적이기 때문에 자신이 최종적인 의미고, 목표는 오직 자기 생존뿐입니다.

 

이것을 예수 안에 있으면서 마음껏 죄를 퍼뜨려 나가는 겁니다. 이게 바로 구약 이스라엘을 우리 안에서 재연하고, 구약의 말씀을 우리 안에서 재연하는 거예요. 그래서 가인, 노아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돈 좀 벌면 보란 듯이 감사헌금 봉투에 ‘아들 대학 합격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남편 건강 회복하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등등으로 올리지요. 이것이 가인의 제사 아닙니까.

 

인간의 모든 행동하는 것이 구약 때 항상 자기 이익 쪽으로 생각하는 그 구약적인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보였던 그 모습을 우리가 다시 한 번 재연하면서 구약에 나오는 사람들의 행동이 남의 일이 아닌 나의 일인데 십자가 피로 구원되었음을, 오직 예수님의 공로만 더 높이기 위해 주께서는 그런 구약의 경로를 밟게 하는 겁니다. 이것이 광야교회입니다.

 

국가로부터의 죽음은 뭐냐 하면, 애굽이란 나라가 있는데 이것이 환경입니다. 애굽이란 나라에서 사람이 탈출을 한다는 것은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지리적, 공간적으로 탈출할 때 이것이 과연 탈출한 것이 맞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것은 탈출이라고 할 수 없어요. 왜냐하면, 애굽을 나와서 광야 지나서 들어간 약속의 땅이 누구의 땅이냐 하면 함(저주받은 노아의 둘째 아들)의 땅입니다.

 

애굽도 함의 땅, 가나안도 함의 땅입니다. 함의 땅을 나와서 함의 땅으로 들어갔으니까 이것은 탈출이 아니지요. 손오공이 아무리 도망쳐도 부처님 손바닥 안에 있다고 하잖아요. 삼장법사 이야기에 보면 나오지요. 인간의 상상력이 이렇게 풍부합니다.

 

애굽에서 빠져나와 봐야 소용없습니다. 애굽에서 빠져나올 때 지리적, 공간적으로 빠져나온 것 말고 애굽 사람이었던 자가 없는(존재하지 않는) 약속의 땅을 만들고자 하는데, 그러니까 신장개업하는데 점원도 옷을 다 갈아입어야 해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가게를 새롭게 여는데 옛날 입던 옷으로는 못 들어와요.

 

그래서 애굽에서 살던 사람의 사고방식을 바꿔서 약속의 땅에서 살 수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서 애굽에 거룩한 하나님으로 찾아온 거예요. 거룩한 하나님을 다른 말로 하면 무서운 하나님이에요. 이 무서운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은 살아남았어요. 그러면 이스라엘이라는 인간과 무서운 하나님의 동행이 가능한 본드(접착제), 연결 고리가 무엇입니까? 바로 흠 없는 중간 매개물이 들어가지요.

 

흠 없는 매개물이 들어간다는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흠이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흠이 있지요. 흠 있는 인간이 흠 없는 제물을 드렸다고 흠 없는 것이 되지 않아요. 역시 흠 없는 것은 어린양만 흠 없지 어린양을 잡은 사람은 역시 흠이 있어요.

 

어린양을 매개로 해서 거룩한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다는 새로운 인간상으로 나오는데 그것을 언약 공동체, 거룩한 제사장 나라라고 합니다. 왕이 주도권을 가진 것이 아니라 제사장이 지배하는 나라, 다른 말로 하면 반복되는 제사 제도가 그 나라 백성의 목숨을 부지하는 나라. 더 쉽게 이야기하면 죽어 없어지는 그것으로 인하여 그들이 사는 나라. 죽어야 할 나를 대신해서 죽는 제물 때문에 가동이 되는, 공장이 돌아가는 그런 나라.

 

공장을 가동할 때 전력을 공급하듯 양을 공급해요. 양 1마리, 양 2마리, 양 3마리. 계속 죽이는 거예요. “(양)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고 하면서 계속 집어넣는 거예요. 그렇게 될 때 그들은 약속의 땅에서 살 수 있습니다. 약속의 땅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어오니까 함 족속들이 일단 피했어요. 방귀 끼면 피하듯이 그 땅에 살던 10 족속이 피했는데, 멀리 떠난 것은 아니고 변두리로 피했다가 하나님이 불러들이면 이스라엘을 공격해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흠 없는 제사가 형식적으로 되었다. 혼내줘라.” 하면 그들이 달려들어 이스라엘을 공격하고 깡패 짓을 했어요. 추수 한 곡식을 몽땅 빼앗고, 침략해서 약탈하고.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더 이상은 못살겠습니다.”고 하나님께 아우성을 치지요. 그러면 주님은 “그 모습이 네가 출애굽 할 때의 본래 모습이었다. 이방인들이 침략한 것은 내가 그렇게 하도록 한 것이다.” “왜요?” “내(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제사 드렸잖아요. 뭘 어떻게 돌아오란 말입니까?” “네 입에서 못살겠다는 소리 나온 것을 보니 안 돌아온 거야.”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힘으로 살아왔다는 본능을 발휘한 거예요. 이것은 정상적인 겁니다. 그것 말고 비정상적인 것, ‘나는 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피 때문에 내가 지금 살고 있다.’는 비정상적인 생각이 들 때까지 계속 때리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그 다음은 어떻게 되는가? 자기를 그렇게 괴롭히던 사람을 찾아가서 어깨를 치면서 “수고했어. 네가 몽둥이 들고 나를 괴롭히지 않았으면 내가 인간되기 걸렀는데 너 때문에 내가 인간 되었어! 내가 마음이 높아져서 까불었는데 당신 만나고 난 후에는 나는 마땅히 고생해야 되고, 굶어도 싸고 그런데 당신이 와서 날 건드려주니까 나는 저주 받아야 마땅할 죄인인 것을 이제 알았어. 고마워.” 하면서 감사하는 거예요. 이것은 이틀 갑니다.

 

“네가 뭔데 날 쳐?” 또 복수심이 발현되지요. 그러니까 우리의 몸이 죽지 않는 한 이런 일이 반복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빨리 이 몸을 벗고 주님 계신 곳으로 가기를 간절히 소망했습니다. 이것이 최고의 소원이었어요. 자기 좋아라고 한 말이 아니고 주님 계획 속에 잡혀 있기 때문에 빨리 그 계획이 실행되어서 제대 날짜가 빨리 오기를 바라는 거예요. 제대를 앞둔 말년 병장같은 느낌으로 살았어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우리는 나그네요, 객이다.’라고 하면서 살았지요. 왜 그런가? 주님이 우리에게 ‘너는 이미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미 살았는데 그 은혜를 모르고 있어요. 살긴 살았는데 내가 왜 살았는지 모를 때 희생과 대신 죽으심의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 이미 예수님이 죽고 부활한 것은 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내가 죽었다는 사실.

 

이제 점심 먹고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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