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제3강 (강의:이근호 목사) 어제 한 것 계속해서 이야기해봅시다. 아브라함이 받은 복이 하나라 했습니다. 그 하나가 이삭이죠. 이삭을 이야기할 때 이삭이라는 출생자체가 인간의 혈육에서 나올 수 없는 특이한 임신, 특이한 출산 방법으로 나왔죠. 이거는 곧 인간의 혈육에 대한 부정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너희들이 갖고 있는 혈육적인 방식으로 어떻게 하나님과 접선을 시도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 쪽에서 일체 인정하지 않는다 이 말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긁어모아서 하나님과 교제에 나서는 것은 하나님 자체에서 거부당하는 거죠. 그런데 예를 들면 만약에 성경을 덮어버렸다 합시다. 성경을 덮고 교회를 한다면, 교회라는 것이 성경을 덮고서 이야기해버리면 교회가 유지되고 운영되는 모든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능력 하에서 그것이 안에서 움직이고 모아진다 이 말이죠. 그런데 그렇게 인간이 할 수 있는 걸 모아봐야 그게 교회이겠느냐 이 말입니다. 교회가 아니죠. 왜냐하면 성경을 덮어버리면 그건 교회라고 자기 나름대로 우겨도 누가 거기서 할 말이 없습니다. 자기들 자유인데 어떻게 합니까. 이걸 교회라고 이야기하는데 니가 왜 나서서 까불어. 할 말이 없죠. 남 교회하는 걸 자꾸 시비 걸지 말고 너희들 교회하면 되지. 이러면 같은 인간으로선 누가 누구 보고 교회이니, 아니니 하면서 질책할 수 있는 그런 자격과 권리라는 게 없습니다. 특히 민주주의사회에서 국가자체가 민주공화국 입장에선 그렇게 될 수 없다 이 말이죠. 전제군주 같은 게 있으면 몰라도. 이슬람교나 김일성 나라 같으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고 헌법 전문에 나오잖아요. 누가 뭘 믿든지 그것은 인간의 고유 인권에 속하고 자유에 속한다. 그런 조건 하에서 그런 계약 하에서 나는 이 나라의 국민이 되겠다고 서약했기 때문에 어떤 종교로 가던 그것은 누가 관여할 수 없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라고 생각할 때 성경을 덮고서 우리가 교회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를 항상 염두에 둬야 돼요. 성경을 안 펴서 교회를 만든다면 어떤 식으로 교회할 것인가? 그 대목이 이번에 쓴 [죽음으로 이끄는 삶]이란 제목으로 나와 있지요. ‘목적으로 이끄는 삶’을 패러디해서 제목으로 해봤어요. 여기에 초반부에 인생이 살고자 하는 것은 생물체의 본능이라고 그 내용이 다 나와 있습니다. 여기 앞부분에 한 이야기가 아리스토텔레스 나오고, 플라톤 나오고 하는데 무슨 이야기냐는 겁니다. 이 내용을 간단하게 말해서 사람은 자기 있음에서 출발할 때는 반드시 이름과 명칭과 언어가 들어가 있다 이 말이에요. 내가 여기 있다. 여기 있는 내가 뭔가 만들어낼 때는 뒤에 붙어있는 것이 언어를 통해서 개념을 붙여줘요. 이름이라든지 명칭, 지시 이런 걸 붙여준다 이 말이죠. 그러면 아까 성경을 덮었을 때 교회는 어떻게 만드느냐 할 때 교회라는 명칭은 사람들이 있다는데서 교회란 명칭을 어떻게 뽑아내느냐 그 과정을 설명한 겁니다. 글의 내용이 너무 난해하고 어렵기 때문에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간단하게 이야기할 수도 없네. [생명이란, 이미 존재하는 ‘있음’이 자기가 촉매가 되어 자기 설계가 가능하도록 구비조건을 만들어나가는 자기 창출활동을 의미한다.] 이게 무슨 뜻이에요? 이걸 되먹임이라고 하는데. 내가 나라는 것이 따로 대상으로 있는 것이 아니고 자꾸 소가 되새김질하듯이 자기 안에, 이거는 나 또는 자기, 자신, 자아, 주체 이 모든 것이 언어거든요. 언어가 있고 이게 있는 게 아니라 이 말이에요. 제 말은. 언어가 있음이 있는 게 아니고 있음을 나중에 이름을 갖다 붙인 거예요. 이것은 ‘자기’라고 해, 이거는 ‘자아’라고 해, 이거는 ‘주체’라고 해. 이것은 ‘교회’라고 해. 이것은 뭐라고 해. 이거는 ‘귤’이라고 해. 자꾸 뒤에 명칭을 붙이는 거예요. 이름은 현재 뭐가 있음을 표현하기 위한 표현방식이기 때문에 이름을 우선 괄호 치자 이 말이죠. 일단 빈칸으로 공백으로 남겨놨을 때 뭐가 움직이고 있고 그것이 어떤 식으로 자기 유지해 가는지 살펴보자 이 말입니다. 그럴 때 그것은 하나의 구더기처럼 꼼지락거리면서 그 안에 자기가 자기 스스로 촉매 역할을 하면서 뭔가 확대시켜나가는 방법을 하는 거예요. 현재 그 대표적인 것이 DNA라는 것이죠. 도킨스라는 사람은 [이기적 유전자]라는 책을 써서 유명해지지 않았습니까. DNA라는 염색체 자신은 진화론에 의하면 인간이 몸부터 있는 것이 아니고 옛날 미생물부터 미생물이 우리 속에 세포 내에 들어와서 자기가 확대시킨 것이 인간의 몸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미생물 같은 조직이 아직까지 60조 개의 세포 안에 있는데 세포 안에 있는 미토콘드리아의 모습이 옛날의 미생물이 들어왔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이유가 뭐냐 하면, 세포가 모여서 인간의 몸이 됐지만 인간의 몸에게 봉사하는 것이 아니고 세포는 자기 자신에게 봉사하는 거예요. DNA라는 것이. 그래서 우리 몸이라 하는 것이 내 몸을 위해서 DNA가 있는 것이고 DNA라는 유전인자를 위해서 몸이 옆에서 그냥 같이 큰 톱니바퀴로 돌아가는 거예요. 작은 게 돌아가니까 거기에 맞물려있는 큰 덩어리가 돌아가는데 그 덩어리를 다 우리 몸이라 하고 몸을 굴리는 엔진 같은 역할을 DNA가 하는 거예요. 이기적 DNA, DNA는 지금 자기밖에 모른다 이 말이죠. 그래서 종족의 번식이라 하는 것은, 사실은 우리는 암세포 때문에 죽었다 하는데 그 죽었다는 것은 의미가 없는 거예요. 진짜 너는 죽었기에 죽었고, 안 죽은 게 있으면 그건 살아있는 거예요. 뭐냐? DNA만 있으면 살아있는 거예요. 그러면 결혼해서 자식을 낳을 때 DNA를 반으로 나눠서 줍니다. 그 DNA가 살아있는 한 나는 영생불멸이에요. 일종에 토지분양한 거잖아요. 택지분양한 거예요. ‘그럼 나는 없잖아.’ 하면, 너는 처음부터 DNA의 포장지에 불과하기 때문에 네가 죽고 안 죽고는 중요한 것이 아니고 네 안에 DNA만 살아있으면 너는 살아있다고 보자 이 말입니다. 이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인간은 남이 줘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자신에 있는 본성이 자기를 키워하도록 확대하도록 스스로 자가 발전이 되는 것이 인간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이 이렇게 수축이 되게 되면 수축의 정도에 따라서 귤이 되기도 하고 어떤 것은 인간이 되기도 한다 이 말입니다. 수축 될 때 그냥 방치하지 않고 이름을 붙이는 거예요. 너는 이제 귤이라 하라. 너는 인간이라 하라. 이렇게 되는 겁니다. 빛 중에서 적색 빛은 가장 파장이 긴데 1초 동안 무려 500조 개의 파장이 있다는 거예요. 파장이 있어도 인간이 그걸 1/1000초간만 포착이 되는 겁니다. 포착이 된다는 말은 적색이야, 빨간색이라고 포착이 되는 거죠. 수많은 파장이 있더라도 나라는 개체가 그걸 포착하는 순간, ‘내가 포착했어.’라고 결과적으로 후차적으로 나라는 것이 형성되는 겁니다. ‘나는 저걸 적색으로 봤어.’ 옆 사람이, ‘나도 빨간색으로 보는데. 그럼 우린 둘 다 인간, 귤이 아니고 인간.’ 이렇게 되는 거예요. 같은 인간들끼리 지속가능한 것이 단단해지고 하나의 동일체가 돼버리면 파장이 같은 파장으로 뭉쳐지면 그건 덩어리가 되고 그 덩어리를 그냥 두지 않고 후차적으로 뭔가 명칭이 붙으면 그게 하나의 통용되는 언어가 돼버리는 겁니다. 사람을 분해하면 다시 파장으로 에너지로 자꾸 달라지죠. 19세기 후반에 물리학에서 사람들은 공간을 빈 공간으로 본 거예요. 그런데 패러디라는 사람이 간단한 실험을 했어요. 쇳가루 두고 막대자석을 놔두니까 막대자석 주위에서 쇳가루가 알아서 모양새를 내고 있다 이 말이죠. 막대 치워버리면 쇳가루는 다시 흩어지겠죠. 이게 뭐냐 하면, 우리가 인간이라는 동일성, 파장의 응축체로 보면 공간이 텅텅 빈 것처럼 보이지만 자석의 눈으로 봤을 때는 공간이라는 것이 전부다 에너지로 전파되고 연결되어있는 하나의 거대한 빈 공간이 없는 게 되는 거예요. 다만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는 이거는 비어있고 귤과 나 사이에는 텅텅 비어있다고 일방적으로 선언을 해버립니다. 그래서 현대물리학은 점점 더 언어를 개발하는 거예요. 이제는 옛날식으로 두루뭉술하게 표현할 수 없고 세세하게 공간과 시간을 쪼개서 표현하다보니까 과학시대는 옛날 인간들끼리 통용되는 도덕이라든지 윤리라든지 양심이라든지 이런 것들은 점점 중요하지 않은 용어가 돼버리고, 다른 말로 하면 시장에서 돈으로 바꿀 수 없는 용어가 돼버리고, IT산업, 컴퓨터 이런 새로운 용어들이 인간 도덕 바깥에서 가져오는 거예요. 그런 것들이 사람과 사람의 만남에서 시장을 형성하면 그 시장에서 교역이 되고 교역이 되게 되면 그때부터 거대한 문명이 발달되는 겁니다. 분업과 협업에 의해서. 같은 제품을 생산해도 분업을 하게 되면 100배, 10배. 20배 생산성이 많아지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이란 물품을 생산하는 하나의 도구와 기계가 되는 거죠. 사람이 옛날에는 봉사중심으로 했는데 지금은 내 안에 있는 나의 이기적, 자세히 말해서 내 안에 있는 DNA가 껍데기인 나에게 시켜서 ‘너는 너만 살아야 돼.’라고 하는 그것이 바로 없는 사람에게 밥을 주고, 이 아픈 사람에게 이를 고치고. 그렇게 하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서 세상은 돌아가게 돼있습니다. 아담 스미스가 이야기한 보이지 않는 손이 거기서 나온 거예요. 신에게 빌지 마라. 시장에서 통하는 보이지 않는 손이 바로 그렇게 된다. 시장의 특징이 뭐냐 하면, 옛날에는 아무 사람끼리 의사가 통했는데, 오늘 첫 시간에 제일 중요한 대목에 들어갑니다. 시장의 특징은 돈만 갖고 있으면 말이 되더란 말이죠. 희한하죠. 옛날에는 일가친척이 아니면 상종을 말아야 되는데 지금은 돈만 있으면 공산주의든 사회주의든 관계없이 전부다 이야기가 돼요. 이야기가 된다는 것은 언어를 소통했다는 말은 그 언어가 담긴 원천의 힘은 어디서 나온다 말입니까? 돈에서 나오는 거예요. 6자회담 원천은 어디서 나옵니까? 돈 얼마 줄게 핵개발 포기하라. 돈과의 문제에요. 희한한 세계 아닙니까. 옛날에는 밤중에 몰래 형이 볏단 들고 동생 집에 갖다 주고 동생은 형을 걱정해서 형네 식구 많다고 주고 해서 밤중에 만나서 아이고 형님 아닙니까. 동생 아니가. 그렇게 돈이 필요 없어요. 형제간이니까 서로 돕고 지내는 겁니다. 지금은 돈 있는 사람이 형제보다 더 형제에요. 돈이 의리고 돈이 신용이에요. 왜? 이기적 유전자 때문에 그런 겁니다. 남의 나의 DNA를 책임지지 않거든요. 죽은 사람은 죽고 산 사람은 살아야 되지 않습니까. 나의 DNA는 살려내라고 야단을 치니까. 과학이 발달하는 동시에 인문학을 와르르 무너져버린 거예요. 이건 자연발생적인 겁니다. 기술 있다는 말은, 돈 되는 기술 있다는 말입니다. 믿음 좋은데요. 믿음 좋은 게 무슨 돈 되는 기술입니까? 물론 일부는 돈 되는 기술로 만드는 사람도 교회 내에 빈번합니다만. 시장에서 돈으로 서로 모르는 사람이 만나면서 거기서 교역이 되면서 그전에 형제간에 찾지 못한 인정과 의리를 시장 사람의 모임에서 찾기 시작했습니다. 시장에서 문명이 발달해요. 모든 4대문명의 발달이 시장에서 됩니다. 거기서 분업이 되면서 사람들이 필요한 것을 내가 생산하고 그것도 과잉, 여분으로 생산하고 여분의 것을 줌으로 하는 거예요. 그전에는 자급자족이었습니다. 자기들 혈육밖에 몰랐어요. 그때부터 멀리 있는 사람과 교역을 하는데 교역에 필요한 것이 바로 화폐였고, 그 돈으로 모르는 사람과의 신용과 의리를 교환할 수 있는 겁니다. 인정과 의리를 여기서 살 수 있다면 결국 나의 외로움이라는 것, 그리움이라는 걸 어디서 찾을 수 있습니까? 사람들이 모이는 집단에서 찾을 수 있겠지요. 그러면 이 집단, 이게 교회인데, 지금 제가 계속해서 이야기하는 게 성경을 덮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성경을 덮고 교회를 만든다면 외로움과 그리움, 사랑받고 싶은 충동 이 모든 것이 결국은 교회가 교회를 위함이 아니고 내 속에 있는 DNA, 나의 이기적인 나의 자아의 영향력의 확대, 권력의 확대, 아는 사람이 많다는 걸 과시하는,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지만 알 수 없는 복수심을 보상받으려는 태도, 이 모든 것을 바로 사람들이 모이는 집단, 교회에서 해결하려고 하는 거예요. 세상에 동호회, 친목회에서 복 바치는 사람 없잖아요. 그 동호회라는 것은 나한테 이득이 될 때만 동호회에요. 나한테 손해가 안 될 경우에만 동호회라고요. 그러면 교회라는 것은 결국 내가 거기서 얻을 게 있을 경우에만 교회 다니는 거예요. 그리고 교회 가도 나의 외로움과 그리움을 안 달래주면 내가 그동안 교회 봉사 너무 많이 했구나. 가끔 다녀야 되겠네. 그래서 가끔 나와요. 우리 십자가마을 교회 특징이 그렇잖아요. 자기 이기적 유전자에 도움이 안 되기 때문에 그래요. 성경 덮었을 때 경우에. 교회가 크려면 고객만족이라고 여러분들이 원하는 것을 교회가 줄 수 있다고 계속해서 설교단에서 설교하고 선전하고 광고시간에 해야 되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사랑받고 싶으면 목사님이 친히 방문해서 사랑해드리겠습니다. 어떻게 보상해드리겠습니다. 돈이 안 되면 하나님께 기도해서라도 돈 벌기 위해서 30배, 60배 벌게 해드리겠습니다. 자꾸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실적이 없더라도 인간은 희망의 힘으로 살기 때문에. 인간은 스스로 자기 발전이 있기 때문에 희망 없이는 못 산다. 되던 안 되던 희망을 주는 데가 있다는 자체가 고마워서 희망이 끊어질 때까지만 그 교회 계속 다니는 거예요. 그러면 그 교회는 자기가 접수하는 거죠. 교회가 아니고 자기 이익 된다는 조건 하에 다니는 교회가 되는 겁니다. 성경을 덮었을 때 하는 경우에요. 문제는 성경을 열지 말아야 되는데 그게 교회라고 교회가 하나의 시장이고 친목단체라고 하면 되는데 성경을 펼쳤을 경우에 어떻게 되는가? 성경에 보면 교회가 따로 있습니다. 성령은 개인 소유가 아니에요. 성령은 에베소서 4장에 보면 그리스도 몸 소유입니다. 에베소서 4장에 보면 네가 은사를 받아서 그리스도 몸으로 자란다고 돼있고, 에베소서 2장에 보면, 성령께서 성전의 터를 닦기 위해서 성전이 마디마다 기둥마다 연결된다고 돼있죠. 그러니까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교회는 여러 교회가 아니고 하나밖에 없는 교회고, 성령도 우리 좋으라고 준 성령이 아니고 그 교회 만들기 위해서 주신 성령이에요. 성령이 개인소유가 아니라 이 말이죠. 하여튼 인간들은 삼위일체 하나님 좋다 하면 다 가져다녀. 오메가3부터 해서 영양제 다 찾는 것처럼 성경에 좋다는 건 다 끌어당겨. 자기 이기적 DNA 때문에, 자기 확대 때문에. 그런데 정작 성경을 펼쳐보면 그동안 엉뚱한 짓하고 있었어. 교회 다니면서 지옥 갈 짓만 한 거예요. 교회가 망하다니? 교회가 왜 망해요. 교회가 머리 되시는 주님이 계시고 그 머리에서 내려오는 성령이 계신데 교회가 왜 망합니까? 자기한테 사랑 주는 교회가 망하겠지요. 그거는 진작 망해야죠. 그래서 성경을 펼치게 되면 그 성경에 나오는 교회가 활주로가 구약 이스라엘부터 시작돼요. 이스라엘부터 내려와서 종말에 나타난 게 교회기 때문에 구약 이스라엘부터 추적해보면 이스라엘은 개인을 위한 나라가 아니에요. 그 이스라엘은 오직 이스라엘을 만드신 그분만을 위해서 존재하고 등장했다고 사라져야 될 그 나라였거든요. 그 성격과 본질이 그대로 그리스도의 몸을 통해서 들어와 버리면 이 교회는 우리가 아무리 해도 만들 수 없는 교회, 오직 성령이 임해야 우리가 거기에 소속돼있다는 걸 발견하는 그 교회에요. 그 교회가 성령이 보증해서 줬고 머리되시는 주님한테 나오는데 그 주님은 음부의 권세를 이긴 상태에서 계시기 때문에 거기서 나온 성령도 교회가 무너지지 않는, 죽음이 교회를 못 이기는 그런 단단한 모습으로 이미 존재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런 교회를 보내주기 위해서 어떻게 하느냐? 내가 기대했던 소박한 성경 덮어버리고 내 몸에서 나왔던 교회는 마땅히 무너져야 되죠. 그게 무너져야 그 교회가 보이는 거예요. 내가 그동안 돈을 얼마나 처발랐고 얼마나 십일조 바쳤는데 그 교회가 무너져. 그 교회는 없어져야 돼요. 무너지는 걸 고마운 줄 아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있는 하나밖에 없는 교회 떠나면 진짜 자기 이익을 위해서 교회 온 사람들 악담을 하면서 떠납니다. ‘내가 이놈의 교회 잘되나 봐라!’ 그런 소리 들을 수 있는 목회를 해야 돼요. 제발 다른 사람들이 악담을 퍼붓는. ‘이놈의 교회 다 빠지고 몇 명 남는가 보자. 이놈의 교회 되면 손에 장을 지진다.’ 그런 악담이 들려오는 교회를 해야 돼요. 지금 전용렬 목사 교회에 자기 집안 식구밖에 없습니다. 복음 잘 전합니다. 그게 왜 그러냐 하면, 하나밖에 없는 그 교회에 소속돼있기 때문에 그래요. 설교한 동영상 보고 내가 상상을 했어요. 만약에 이 교회에 누가 200억 줘서 건물 진다면 전 목사님 어떻게 나오겠는가? 200억 주고 건물 짓죠. 벽돌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예배당 지으면 안양에서 가만있어도 일년에 50명은 오거든요. 그 다음에 문제에요. 50명 왔으니까 교인들이, ‘교회 너무 큰데 사람은 없으니까 채웁시다.’ 이렇게 나올 때 전 목사님의 설교가 바뀔 것이냐, 안 바뀔 것이냐? 그게 중요한 거예요. 정말 성경을 계속 펼치고 성경에 있는 교회를 전할 것인가? 아니면 교회 200억인데 참 아깝다. 몽땅 부동산 넘어가고 다시 옛날 우리 집에서 셋이 모이고 다섯 명 모이고 했던 그 시절 지긋지긋하다, 참담하다. 두 번 다시 돌아보기도 싫은데 이왕 이렇게 된 것 생활비도 나오는데 유지해볼까. 이런 식으로 그 환경을 감안해서 설교 나온다면 비로소 그 본색이 드러난 거죠. 그동안 설교한 것도 누가 200억 갖다 주기를 은근히 기다리면서 한 거죠. 어떤 희망을 갖고. 그것이 결국 뭐냐 하면, 자기 확대가 돼요. 이거는 내 교회야. 그걸 이름을 교회라고 부른 거예요. 사실은 교회 앞에 내 교회야. 사실은 교회 앞에 ‘내’가 은근히 숨어있어요. 근데 내 교회 앞에 뭐가 숨어있어요. ‘이씨’ 내 교회야. 모든 교회 앞에 대한예수교 장로회 있으면 그걸 삭제해버리고 앞에 ‘이씨 내 교회’ 이것만 붙이면 정확해요. 성당도 마찬가지고. 교회가 그 후에 자존심의 대체물이 되었고 자기의 위신을 결부시켰던 거예요. 이것이 성경을 덮었을 때 교회뿐만 아니고 동호회 심지어 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공화제로 시작했던 로마제국이 이인독재로 나가다가 나중에는 처음에는 폼페이우스, 율리시스,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 드디어 황제로 나가거든요. 그 당시 기독교 역사와 같이 맞물려있는데. 로마제국이 커졌다고 생각해봅시다. 로마 시내에 닭 키우는 어떤 농부가 로마제국과 무슨 관계있습니까? 로마제국이 커졌습니다. 그런데 그 농부가 일평생 살아온 자기의 소박한 희망과 관계있어요? 소박한 농부는 자기가 여기 살아있고 살아있는 어떤 행동에 나간 것에 대해서 그만한 업적과 실적만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하겠다. 이것이 그 농부의 소박한 희망 아닙니까. 닭을 키웠는데 달걀을 많이 낳았다. 그게 기쁩니까? 로마제국이 커지는 게 기뻐요? 어느 게 기쁩니까? 로마제국 커지는 것과 무슨 관계있어요. 지는 농부인데. 그 이야기를 여기 초반부에 써놓은 거예요. 생물체가 보여주는 생명활동에서 뭐가 어려우냐 하면, 보편자와 특수자 이야기가 나온 겁니다. 어렵더라도 교재에 있기 때문에 잠간 언급하고 지나가겠습니다. 보편자, 특수자 개념이 뭔 뜻이냐 하면, 사람이라 할 때 여러 사람을 모아서 사람이라 하잖아요. 그 사람과 나하고 무슨 관계있느냐 이 말입니다. 사람과 나하고 관계있습니까? 누구 보고 사람이라 하면 기분 나쁘다니까 내 이름 불러줘야지. ‘당신 사람이네.’ 하면 ‘내가 곰이가.’ 그쪽에서 ‘사람보고 사람이라 했는데 왜 기분 나쁩니까?’ 사람이란 보편적인 추상적인 개념이고 내 이름 따로 있잖아. 내 이름을 불러줘야지. 그러면 그 사람이 하는 말이, 그러면 사람이란 명칭이 왜 나왔습니까? 이 논쟁이 바로 보편과 개별자 논쟁이에요. 그걸 좀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이게 가정주부들 살림살이와 다 연관이 있어요. 사과를 보면 어떤 특징이 있느냐 하면, 사과는 붉다, 새콤하다, 단단하다, 속성이 여러 가지 있지만 세 가지만 뽑아봅시다. 지금 뭘 이야기하느냐 하면, 교회가 유기체란 말이 맞느냐 이 말입니다. 그걸 따지는 거예요. 교회가 유기체란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개혁주의신학에서 다 그렇게 이야기하지만. 사과의 특징은 많지만 단단하다. 젤리보다 단단하니까 단단하다고 봅시다. 그 다음에 붉다. 맛은 새콤하다고 합시다. ‘붉다’만 끄집어내서 다른 붉다 또는 적색이다, 빨갛다와 연결시켜보자. 예를 든 게 붉은 노을이죠. 붉은 노을의 붉다가 사과와 똑같네. 할 때 듣는 사과 기분 나쁘죠. 내가 빨갛긴 하지만 노을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나오죠. 그러면 사과야. 네가 붉다는 것은 붉다고 하지 말고 파랗다 해야지. 사과가 내가 붉으니 붉다 했지 얻어맞아 멍드렇나? 파랗게. 그러니까 추상적인 개념을 네가 함부로 사용해놓고 추상적인 것을 따로 뽑아냈다고 해서 왜 그렇게 기분 나쁘다 하나. 왠지 기분 나쁘네. 전부다 십자가마을 사람들이네. 하니까 듣는 십자가마을 사람들 기분 나쁜 거예요. 같이 묻히지 말라. 나는 따로다 이러거든요. 교회는 유기체다. 교회라는 개념에서 모든 사람을 한꺼번에 묶어서 말할 수 있는 개념이냐 이 말입니다. 절대 그럴 수 없는 거예요. 교회 앞에 뭘 붙이라 했습니까? 내 교회 될 때만 이 교회를 교회라 하고 만약에 교회가 나를 차버리면 이 교회는 졸지에 이단 되죠. 교회 나간 순간 이단 돼버려요. 왜 이단입니까? 교회란 게 있어요, 없어요? 교회가 없고 타인의 몸들이잖아요. 내가 그 교회에서 얻고자 하는 것을 다른 교인들이 합세해서 내가 요구하는 어떤 사랑받는 것, 나한테 관심 가져주는 것 이것을 제대로 했어요, 안 했어요? 안 했다고 지가 일방적으로 판정한 거예요. 들어보면 그렇지 않은데. 늘 연락하고 했는데 관심 없다고 삐져서 안 나오더라. 이것은 본인이 결정한 거예요. 그 사람은 교회라고 들어온 게 아니고 처음에 등록할 때부터 그 교회를 나의 것으로 접수하려는 노림수를 가지고 들어온 거예요. 그러면 이 교회를 접수할 있습니까? 교회가 있어야 접수하지. 지 같은 똑같은 몸들 있는데 무슨 교회가 있어요. 교회란 결국 추상 개념화시킨 겁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은 자기 확대를 위해서 자기 주변에 있는 것을 영적인 존재로서 자기 것으로 흡수하는 영적인 본능을 발휘하고 있다는 겁니다. 실체가 없어요. 실체가 없어도 무조건 좋다는 것은 다 끌어들여요. 예수든 삼위일체든 하나님이든 전부다 하나님도 내 하나님, 나를 붙여요. 내 예수, 내 성령, 내 복음, 내 구원, 내 십자가, 내 언약, 전부다 나를 집어넣는 거예요. 그게 내 몸에서 나왔죠. 성경을 펼쳐봅시다. 그리스도 몸은 누구 몸이에요? 세례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몸의 하나죠. 그리스도의 몸은 무너집니까? 악담을 저주를 해도 음부의 권세를 이긴 상태에서 성령으로 유지되는 교회기 때문에 무너지지 않죠. 진짜 성경 안에 나오는 교회의 교인이라면 내 교회라 하는 것이 여기에 붙습니까? 없지요. 그러니까 이 말은 이미 교회 돼버렸는데 무슨 내 교회를 따로 설정할 필요가 없죠. 이미 성령을 통해서 교회에 소속돼버렸는데 무슨 내 교회가 있으며, 내 교회가 되니, 안 되니 하는 게 어떻게 성립이 돼요. 이미 성령을 받아버렸는데 그리스도 몸 안이 됐는데 무슨 십자가마을 왜 필요하며, 우리교회가 왜 있어야 돼요? 성경에 십자가마을 안 나옵니다. 십자가는 나와도 마을은 안 나와요. 성경에 우리교회 안 나와요. 심지어 내 이름도 안 나와요. 왜냐하면 이름이라는 것은 뭐라고요? 내가 어떤 파장의 덩어리를 나라고 후차적으로 명칭을 붙인 그것이 바로 나였기 때문에 성경에서 나라는 게 안 나오죠. 성경의 세계는 감히 상상도 예상도 못하는 세계에요. 그런데 교회는 어떻게 했습니까? 지교회 따로 만들어놓고 자기 교회 키우는 용도로서 성경을 이용했죠. 그렇게 되면 결국은 교회가 누구와 적대적 관계에 들어갑니까? 이미 완성된 그리스도의 몸에 대해서 대적하는 악마 짓을 하는 그 장소가 교회가 돼요. 교회는 곧 교회를 공격하는 악마의 선봉장이다. 이런 결론에 도달한 겁니다. 교회는 다니는 곳이 아니고 교회는 그 안에서 사는 곳이에요. ‘교회 갈게.’ 자기들은 편리한 방법인데 그래서 교회의 근원은 어디서 찾는가? 구약 이스라엘에서부터 시작되는 겁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주님께서 먼저 앞서서 세우신 교회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7장에서 스데반 집사의 설교에 보면, 과거의 이스라엘을 광야교회라고 하죠. 우리교회가 아니고, 내 교회가 아니고 광야교회에요. 광야교회를 교회라고 하는 건 무슨 뜻입니까? 광야에서 교회 있다는 말이 아니고 이 교회만 지나가면 주변이 뭐로 변한다? 졸지에 아무리 옆에 빌딩이 서있어도 광야라는 관점에서 전부다 해석해야 된다는 해석을 요구하는 그런 교회에요. 아무리 개발지역이고 해도 무조건 광야에요. 아무리 수십만 살아도 광야에요. 광야교회의 특징이 왕이 계셔요. 왕은 보이지 않는 분인데 그 왕은 계명이 있습니다. 그 계명은 한 계명에 종속돼요.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거예요. 이 말은 굉장히 재미있는 말씀이에요. 그것은 바로 이삭과 야곱의 언약에서 나오는데 아브라함에서 아들이 하나밖에 없죠. 아들이 둘 있어도 저쪽 아들은 아니라는 의미에서 비정상적인 임신에서 태어난 아들만 아들이 되고 정상적인 아들은 아들이 아니에요. 하나님도 하여튼 못 됐어. 인간들이 하는 건 무조건 비정상적이고 하나님, 본인이 아는 건 무조건 정상적이라. 그래서 예수님은 이 땅에 와서 죽어 마땅했죠. 세상 자체를 어두움으로 봤으니까. 그래 너 잘났다 해서 죽였잖아요. ‘너 혼자 빛 많이 하세요.’ 하고 죽여 버렸잖아요. 그 죽은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심으로 말미암아 누구야. 누가 내 아들 죽였어? 하고 등장한 게 성령의 역사 아닙니까. 세상을 책망하기 위해서. 누가 내 아들 가치를 모르고 죽였어? 그리스도 몸으로 인간의 모든 몸을 부정하는 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역사는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주님을 살해한 사건을 근거로 해서 우리를 책망하는 거예요. 네 몸에서 나오는 것은 죄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선악과 따먹은 결과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그걸 고발하는 것이 성령이 역사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내 중심의 자가 발전해서 포기하고 주님의 그리스도의 몸의 완성 안에 들어가는 그것이 바로 영생입니다. 그게 생명나무 열매를 따먹는 일인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죠. 그런데 이삭은 하나밖에 없죠. 진짜 이삭이 참된 약속의 자녀라 하는 것은 이스마엘에게는 벌어지지 않는 이삭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게 뭐냐 하면 죽었는데 하나님이 준비하심으로 다시 되살아나는 사건이 이삭의 정보로서 새겨져버립니다. 각인돼버린다고요. 이삭의 이마에 십자가가 새겨지는 거예요. 그리스도의 이름이 새겨져있는 거예요. 요한계시록의 십사만사천처럼. 인간의 이마에 이름을 새기듯이 하나님의 십자가 사건을 새겨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이삭의 운명은 자기가 정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이마에 박혀있는 고정된 운명으로 가는데 그 고정된 운명을 제가 첫째 시간에 케이블카로 이야기했습니다. 창세기 3장 15절부터 십자가까지 케이블카로 이어질 때 대롱대롱 달려있는 그 이삭의 운명, 이삭의 운명이 그대로 사람 숫자로 확대되면 이스라엘 돼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정체성, 본질이 뭐냐 하면, 이겁니다. 나 외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겁니다. 그 뜻의 의미를 이렇게 새겨야 돼요. 중요한 것이니까 이것만 들으시고 조세요. CSI, 과학수사대와 비슷한데 거기 보면 범인 남긴 지문이 하나 나올 겁니다. 지문이 뜨면 이런 장면이 나올 겁니다. 지문감시시스템이 가동되어서 그 지문과 유사한 범죄자나 전과자나 등록된 얼굴들이 지나가다가 그 지문과 일치되면 딩동, 스톱이 돼버리죠.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많은 사건 가운데서 보내다가 ‘저 신은 아니야, 저 신도 아니야. 이 신이야.’ 하고 딩동하고 닫는 거예요. 하나님이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할 때 사람들은 하나님이 어떤 신인가 궁금하잖아요. 그걸 우리의 죄 속에서 상상하게 만드는 거예요. 그래서 출애굽기 32장에서 애굽에서 가져왔던 송아지 형상을 만들잖아요. 그런데 진짜 하나님의 지문에 비교하니까 그것은 아닌 거예요. 언약궤로 홉니와 비느하스가 전쟁에 나갔을 때 그것도 아니야. 쫘악 지나가게 하면서 딩동 이거야. 그래서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가 어디까지 지문감시시스템이 가동되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을 때 다 이루었다 그때 비로소 하나님 외에 아닌 진짜 하나님의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다. 그게 주의 이름이다. 하나님의 이름이 앞서서 구약부터 이스라엘을 왕으로서 자기 쪽으로 이끌어온 겁니다. 지난 12월 25일 설교에 별 따라 왔다는 그 대목이 생각나는데 동방박사가 밧줄로 별을 끌고 온 게 아니고 별이 동방박사를 끌고 간 거죠. 무엇이 상당히 특이하냐 하면, 별이 베들레헴까지 와야 되는데 중간에 별이 사라졌어요. 사라지니까 어디를 방문하느냐 하면, 헤롯이라는 정치적 주체가 있는 정치단체에 잠시 머물다가 보이지 않던 그 별이 다시 떠서 베들레헴에 도착하죠. 결국 동방박사가 따라온 그 경로는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그리스도가 지금 어디 안에 포함돼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겁니다. 그리스도는 지금 방치돼있는 것이 아니고 두꺼운 어떤 무게에 짓눌려있는데 그 두꺼운 무게가 뭐냐 하면, 정치적인 추상적인 관념, 아까 정치적인 것 배웠지요. 로마제국 이야기했잖아요. 이제 그것과 연관됩니다. 인간이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정치적인, 추상적인 관념을 확대시킨 것이 국가고, 시장이고, 교회들이죠. 다른 말로 유대교, 알라 믿는 이슬람교, 천주교 이렇단 말이죠. 그런데 그 속에 품어있는 곳에서 별이 사라지고 직접 동방박사가 대면하면서 그쪽의 주체가 묻지요. ‘너는 어디서 흘러온 사람이냐?’ ‘별 따라 왔습니다.’ ‘누구를 만나러 왔고?’ ‘메시아가 태어났답니다.’ 이 간단한 내용은, 결국은 이쪽의 헤롯정권에 비상사태가 발생되면서 색출작전에 나가지요. 누구를 색출합니까? 이 땅 안에 출현한 메시아를 죽이는 색출작전에 나서서 베들레헴에서 두 살 밑에 애들 다 죽였잖아요. 그러니까 크리스마스가 죽은 날이에요. 크리스마스가 통곡의 날이고 그런 거예요. 그건 뭐냐 하면, 지금 아기 예수가 유발시키는 여파라 하는 것은 단순히 메시아, 아기 하나 태어난 정도가 아니고 그동안 우리를 품어줬고, 우리가 기대했고, 우리가 염원했던 미래의 상, 국가의 발전, 문명의 발전, 국민소득 향상, 우리가 평소에 시장에서 통용되고, 사람들 단체에서 통용되고, 우리가 간절히 기도하고 신에게 빌었던 모든 내용들이 사실은 그것들이 집결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살해하는 악마의 지시라는 것이 폭로되는 그러한 현장입니다. 왜 그러냐? 국가에 대해서 봉사하고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결국 그 국가 앞에 뭐가 붙어있습니까? 내 국가, 내 나라죠. 우리가 언제 박주영과 아는 사이가 됐습니까? 박주영이 못 뛰니까 안타까워하는 사람 있어. 서울사람이 이대호와 관계있어요? 이대호 홈런 치면 기분이 좀 좋지요. 무슨 관계있다고 그렇습니까? 외부에 있는 모든 인물들 중에서 내가 희망하고, 내게 보탬이 될 때는 골라골라 슈퍼마켓의 바구니에 담아서 나의 비전으로, 나의 꿈의 대행체로 삼으로서 내 속에 있는 DNA를 만족하는 거예요. 언제 박주영과 악수도 안 해봤어. 박주영이 한 골 넣으면 앙리가 넣은 것보다 기뻐. 왜 그렇습니까? 이미 우리는 빈 공간이 아니에요. 대한민국축구대표팀과 나하고 빈 공간이 아니고, 한국야구팀과 빈 공간이 아니란 말이죠. 그런데 한국대표축구팀이 월드컵에서 16강 들어갔을 때 땅을 치고 울부짖던 사람들 있잖아요. 포르투갈한테 7:0 졌던 북한팀, 그들은 왜 짜증을 내는 거예요? 자기들 편이 아니거든. 다른 노선이거든요. 그래서 국가란 다양한 노선끼리 붙어 서로 망하게 돼있습니다. 망하게 돼있는데 같이 힘을 합치는 순간이 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서로 자기 노선을 주장하지만 딱 한 순간에 마음이 일치가 됐죠. 그렇게 화평을 이루신 분은 누구였습니까? 고마우신 분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그렇게 싸우다가 휴전에 들어가서 평화를 이루는 평화의 기여자가 누굽니까? 예수님이잖아요. 평소에 뭐라 했습니까? 천하 자식이나 남편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 지금 평화로운 가정 같으면 말씀이 실감이 안 나죠. 하지만 진행 중인 가정 같으면 성경의 세계가 장난이 아니란 것을 혹독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주의 말씀은 네 이웃을 사랑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말라는 겁니다. 왜? 그 하나님이란 개념, 이웃이란 추상적 개념은 내가 십자가 지고 성령을 통해서 새롭게 넣어주겠다. 그 말은 내가 신을 사랑하고 여호와를 사랑하고 삼위일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지 말라. 왜? 그 여호와, 삼위일체 전부다 네 몸에서 나와서 삼위일체 앞에 뭐가 붙어있어요? 나를 위한 삼위일체. 이웃도 나에게 보탬이 되는 이웃이 되는 거예요. 강도 맞은 사람이 누워있을 때 몇 사람이 지나갔습니까? 처음에 지나간 사람 제사장, 두 번째 레위 사람 지나갔지요. 왜 안 도와줬습니까? 내 이웃이 아니거든. 자꾸 숨어있는 나를 찾아내야 돼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내가 사랑해야 될 이웃은 어디 있습니까? 내가 사랑할 하나님은 어디 있습니까? 그 말 한 너부터 조질 거야. 너라는 개념 자체가 잘못됐어. 너라는 개념 자체가 파장이요 뭉치인데 거기서 너를 왜 집어넣느냐 말이죠. 예수님의 이웃을 사랑하게 만들고 예수님이 섬기는 아버지를 사랑하게 만들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너는 내 안에서 너와 주님과 아버지와 전부 하나가 될 것이다. 그게 요한복음 17장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성령이라는 처소 안에서 아버지와 내가 하나된 것처럼 너도 이제는 나와 하나가 될 것이다. 따로 구심점을 우리로 유지하려고 하지 마세요. 나의 DNA로 유지하려고 하지 마세요. 주께서 DNA라는 혈육을 허용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 DNA는 선악과의 죽음의 세력이 담아있는 DNA에요. 그래서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영으로 난 것은 영이고. 영으로 났던 유일한 흔적은 바로 모세가 놋뱀 든 것처럼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난 십자가와 부활이 이 땅에서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영적 활동의 흔적입니다. 다른 건 없어요. 이 시간 마치기 전에 말씀드리면, 그러면 지금 내 몸을 갖고 있는 한 나는 항상 내 중심이고 뭐든지 교회든 하나님이든 나한테 필요에 따라서 교회 다니고, 하나님 믿는데 이 나를 어떻게 없애느냐 하는 거예요. 그런 질문을 하신다면, 질문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그런 질문을 주님께서는 때리고 싶다고. 내가 나를 어떻게 없애느냐? 여기 나와 여기 나를 구분을 지은 거예요. 나는 현재 내 구원을 방해하는 나고, 앞에 있는 나는 너 하나 조져서 네 덕분에 내가 사는 그래서 뭔가 노림수를 가진 나가 되는 거예요. 이 둘 다를 없애버리는 겁니다. 어떻게 하느냐? 너는 나의 것으로 구원받는다. 주님의 것으로 주님의 몸의 지체로서 들어오기 위해서 그동안 죄인으로써, 무슨 죄인? 나밖에 모르는 죄인으로 살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다시 한번 하나님 말씀을 여기서 한 5분 됐지만 수정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세요. 이웃을 사랑하세요. 왜? 그것이 죄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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