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중심사상

성경중심사상과 그 전개5-2012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제5강

아빠와 함께 2013. 2. 12. 17:11

2012 겨울수련회 5강

 

시작하겠습니다.

‘법으로부터의 죽음’이라고 할 때, 이 법은 이스라엘 전체를 몽땅 법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합니다. 그것은 그 중 나쁜 사람만 골라서 죽이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전체를 죽게 하시는데, 그 이유가 ‘혈육으로부터의 죽음’을 보면 행함이 아니라 믿음을 끄집어내기 위해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받치게 하지요. 이삭을 받치게 함으로써 인간의 지혜가 하나님과 접선하는 것을 차단시킵니다.

 

인간의 지혜와 행함과 믿음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과 연결되는 것(언약을 이루는 것)을 사전에 차단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이 단절의 사건을 만들지요. 그것이 바로 이삭을 죽이는 겁니다. 지금 하나님의 약속이 뭔가 하면 ‘하늘의 별 같이, 바다의 모래같이 네 자식이 많을 것이다’는 말씀을 전제로 놓고, “너의 하나뿐인 자식 이삭을 죽여라.”는 겁니다. 이삭을 통해서 너의 많은 자손이 번식할 것인데 이삭을 죽이라고 합니다.

 

이삭이 없으면 남길 자손도 없는데, 하나님이 이삭을 통해서 많은 자손을(하늘의 별, 바다의 모래 같이) 번성케 하실 그 출발점으로 잡아놓고 그 이삭을 죽이라고 하면 그 때부터는 은근히 내 자손이 많을 것이라는 기대에서 아브라함은 밀려나게 되는 겁니다. ‘아하, 내 기대와 소망과 상상은 하나님이 만들고자 하는 수많은 자손의 번식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도 개입할 수 없구나.’ 라는 것을 알지요. 어떤 식으로도 거기에 개입할 수가 없는 겁니다. 왜? 이삭을 죽여야 되니까.

 

이삭을 죽임으로써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믿음의 자손이 되는 겁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자손. 그러니까 베드로에게 “네 반석위에 교회를 세우리라.”는 말은, 베드로의 혈통을 통해서 교회를 세운다는 말이 아니고 베드로에게 일어난 사건을 반복시키는 사람들의 모임이 교회가 되는 겁니다. 베드로에게 일어났던 그 사건의 되풀이가 같이 적용되는 사람들의 집합, 그것이 교회가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베드로에게 어떤 사건이 일어났습니까? 베드로의 신앙 고백,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했을 때, 예수님 하신 말씀이 “이것을 알게 된 것은 너의 혈육이 아니요” 신앙인은 항상 이것을 배워야 됩니다. ‘ ~아니요 ~이다.’ not but 용법이죠.

 

~이 아니고 ~다. ‘네 혈육이 아니요.’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사람의 뜻으로 난 것이 아니요.” 적어볼게요. ‘혈육이 아니다.’ 다른 말로 하면, ‘사람의 뜻으로 난 것이 아니다.’ 사람 속에는 누가 포함되어 있습니까? 구원 받는 본인이 포함되어 있지요. 나의 뜻으로 난 것이 구원이 아니고 나의 뜻으로 난 것이 천국이 아니라는 거예요. 내가 생각한 천국은 천국이 아니고 내가 생각한 구원은 구원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영생을 얻고,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구원 받는다는 겁니다.

 

제가 지난 시간에 정자, 난자 예를 들었지요. 정자가 난자 속으로 들어가면, 이 들어간 정자의 고백이 뭔가 하면, 처음에는 내가 들어간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는 나만 선택 받았음을 알지요. 정자가 난자로 들어가는 것의 예화가 이렇게 적절한 것인 줄 저도 예상 못했습니다.

 

그 수없이 많은 정자 중에서 나만 선택되었다는 겁니다. 이것은 내가 선택해서 내가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선택은 외부의 개입으로 되는 거지요. 외부의 호출 능력에 의해서 내가 난자의 벽을 뚫고 난자 속으로 들어간단 말이지요. 이것을 “창세전에 예수 안에서 선택했다.” 다른 말로하면, ‘예수님이 창세전부터 너를 선택한 거야.’ 그런 뜻이란 말이지요.

 

그리고 선택된 사람은 예수님이 하시는 일로 주어질 모든 혜택도 같이 공유하고 있단 말이지요. 이것을 ‘합류’ 또는 ‘세례’라고 하지요.

 

그러니 ‘혈육이 아니요’ 이 말은, 사람의 뜻으로 난 것이 아니고 아버지의 뜻이란 말이지요. 그렇다면 이 안에 들어온 사람은 전부 다 소급해서 ‘나의 뜻이 아니요 하나님의 뜻이다.’로 바꿔야 해요. ‘내가 강도짓 한 것도 하나님의 뜻이다.’ 윤리적으로 상당히 위험한 발상이지요? 내가 주먹으로 상대를 한 방 때리는 것도 주의 뜻, 내가 한 방 맞고 두 방 때리는 것도 주의 뜻. 이렇게 되지요.

 

이런 주장을 하면 ‘당신 말을 들으면 인생이 나락에 떨어질 것이다.’라고 하는데, 나락에 한 번 떨어져 보지요. 어디까지 떨어지는 것이 나락인지. 설마 죽기보다 더하겠어요?

 

아브라함에게 일어난 사건을 집단적으로 되풀이하는 것이 이스라엘 국가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자손을 그냥 혈육의 자손으로 만들지 않고 믿음의 자손으로 만들려면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사건이 다른 양상으로(어려운 말로 ‘변양’이라고 하는데), 양태가 다른 형식으로 계속해서 바뀌어 가면서 같은 성질, 같은 취지의 사건들이 계속 진행되는 거예요.

 

‘혈육이 아니요, 사람의 뜻이 아니다.’라는 내용을 품고 계속 되풀이해서 주어지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바로 법으로 나오는데, 나중에 율법이 되는 겁니다. 율법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이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혈육으로부터의 죽음’에 보면,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살해하지요. 그렇게 되면 거기에 믿음으로 호응한다는 말은 ‘나는 하나님 앞에 마땅히 죽어야 할 존재인 것을 인정합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우리는 하나님의 믿음이란 세계 속에 가담이 되는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마땅히 죽여야 된단 말이지요. 죽을뻔 한 게 아니에요. ‘죽으려고 했는데 주님이 살려주셨다.’ 이것이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서는 계속해서 죽어있는 겁니다. 그래서 죽을뻔 했는데 살아났다는 그러한 계기적이고 연대적인 시간적인 차순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죽었는데 그것이 살아있는 상태라고 보는 겁니다.

 

마르다, 마리아의 오빠 나사로가 죽었잖아요. 동생의 입장에서 오빠는 죽은 지 나흘이나 되었지만 다시 살려내고 보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죽었다는 개념이 아니고 오빠는 주 안에서 살아있었어요. 그렇다면 우리가 ‘살았다, 죽었다.’는 인식의 지평은 목숨 끊어지는 그 경계를 넘어서서 더 넓은 범위로 그것을 전부 우리의 현 자리로 끌어당길 수가 있습니다.

 

에스더에 보면 나오지요. 에스더가 뭐라고 합니까? “죽으면 죽으리이다.” 에스더는 미스 바사 출신입니다. 아하수에로 왕 앞에 선 최고의 미인이었죠. 그런 자기가 죽는다는 말은 자기가 묻는다는 뜻인데, 자기가 죽으면 별처럼 아름다운 미모도 같이 죽음 속에 묻혀버리지요. 그게 바로 에스더 시대의 유대인들을 믿음의 사람으로 전환시키는 하나의 아브라함 사건으로 보시면 됩니다.

 

그래서 이것은 하나님이 죽게 해야 죽는 것이지 그냥 죽으면 죽는 게 아니에요. 상식적으로 말해서 사람이란 것은 평소에 살 때는 자기를 느끼지 않습니다. 어떤 일에 몰두하지요. 특정한 일에 몰두하기 때문에 ‘나’를 못 느끼는데 언제 사람이 ‘나’를 느끼는가 하면, 자기 뜻대로 안 될 때, 자기가 꿈꾸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꺾일 때, 자기 소망이 훼방 받을 때, 그 때는 자기가 등장하는 거예요.

 

상대방이 내 뜻을 가로막을 때 ‘저게 감히 나를 공격해! 그러면 내 이름으로 너를 처단하리라.’ 이렇게 나오지요. 그러니까 ‘나’가 언제 등장하는가 하면, 내 뜻이 막힐 때 등장합니다. 내 뜻대로 안 된다는 말은, 뜻을 계속 밀어온 게 있어요. 그게 뭐냐? 과거라는 겁니다. 과거가 AND쳐져서 현재가 되고, 미래는 아직 없는 겁니다. 이게 바로 어거스틴의 생각입니다.

 

어거스틴 이전에 시간을 이야기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사람인데, 이 사람이 주장하는 시간은 현재뿐인데 ‘지나간 현재, 현재, 다가올 현재’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이 사람은 현재밖에 없다고 본 겁니다. 그 주장에 대해 어거스틴을 비롯한 그 후대 사람들은, ‘시간이라는 것 자체가 없고, 시간 의식이 있을 뿐이다.’

 

시간 의식밖에 없는데 그 의식은 뭐냐 하면, 인간은 영혼 속에 시간 의식밖에 없다고 생각한 겁니다. 시간의식 밖에 없기 때문에 과거라는 것은 밀려온 거예요. 미래는 아직 없는 것이고. 그래서 여기서 내가 지금 어떤 행동을 하겠다는 목적이 있는데, 그 목적은 과거에 습득한 것들이 쌓여서 지금의 행동을 몰아세우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시간에서 벗어나서 인간으로 가는 거죠. 시간에서 인간으로 가는 이유가 있어요. 뭐냐 하면, 주님의 계시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계시가 다 드러났잖아요.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지요. 예수님이 하나님을 대신해서 우리에게 왔잖아요. 그렇다면 예수님은 하나의 산도 아니고 들도 아니고 강도 아니고 바다도 아니고 해도 아닙니다. 그러면 뭡니까? 그냥 인간이죠.

 

그러면 하나님의 계시를 분석하기 위해서는 뭘 분석해야 돼요? 예수 그리스도를 분석하면 되지요. 예수 그리스도를 분석하려면 내가 몸으로 접근해서 ‘내 몸은 이런데 주님의 몸은 이렇구나.’ ‘나는 이렇게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데 주님은 어떤 시간 속에 살아가지?’ 라고 비교하면서 주님이 품고 있는 계시를 우리가 파악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가질 수 있단 말이지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사람의 희망이란 것은 과거의 기대한 것이 밀려와서 지금 나에게 희망이 있단 말이지요. 그런데 그게 하나님의 뜻에 의해 꺾이면 내가 가져왔던 과거를 버리고 주께서 시도한 하나님의 사건에 의해서 새로운 미래가 펼쳐지는데 그것이 뭔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몸 중심의 예수님이 안고 있던 시간성, 내가 안고 있던 시간성은 묵살당하고 주님이 안고 있던 시간성이 나에게 덮치면서 나는 거기에 합류해서 나의 미래는 주님이 갖고 있는 미래로 같이 동참해서 나갈 수 있단 말이지요. 이런 아이디어가 생길 수 있겠지요?

 

예를 들어, 나는 사업하면서 인생을 보내려고 했는데, 갑자기 은혜를 받아서 “누구누구야, 너는 목사가 되어라!” 그러면 그 다음부터는 어떻게 됩니까? 성경에 이런 것이 없습니다만 사람들이 하도 말하니까 제가 흉내를 내 본 거예요. 이렇게 해서 목사가 되면 결국은, 내가 목사 된 것은 사업이라는 과거 때문에 목사가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살아계심 때문에 목사가 되었기 때문에 나의 현재는 내 과거와 연관되어 있습니까,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연관되어 있습니까?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연관 되겠지요. 그러면 그 사람은 하나의 계시에 접합이 된단 말이지요.

 

철로가 가다가 이쪽 철로로 방향을 틀어버리니까 이쪽에 합류되면 나는 구원 받을 수 있다는 아이디어가 발생되는 겁니다. 어떤 계기가 되면.

 

어거스틴의 이러한 주장은 나중에 어디로 이어지는가 하면, 후설의 현상학으로 이어져요. 이것은 시간을 시간 의식으로 봤는데 ‘시간은 두께를 가진다.’고 했어요. 과거에 있던 시간도 여기에 모이고, 이 과거의 시간이 현재에서 솟구쳐 오르지 않으면 잠재되어 있는 것이 나중에 구멍을 뚫고 나오지요. 잊고 있던 옛 친구를 길에서 우연히 만나면 “아, 오랜만이다. 대성초등학교 20회 --” “그래, 반갑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렇게 잠재되어 있던 과거의 기억들이 어떤 계기를 통해서 지평으로 솟구쳐 나오는 거예요. “아, 그래. 요새 너는 뭐하노?” “정수기 사업한다. 너희 집에 정수기 있나?” “있다.” 이렇게 만났다가 헤어지지요. 그리고 5년 뒤에 또 만나면 과거에 잠재되어 있던 것이 솟구쳐 나와서 “아, 요즘도 정수기 사업하나?” “아니, 변액보험 한다.” “그래?” 그렇게 또 헤어지고.

 

‘사람이란 과거가 만들어낸 작품이다.’ 이렇게 본단 말이지요. 그런데 그러한 사람의 구원관이 과연 예수님 앞에 통합니까? 안 통하지요. 왜냐하면, 인간의 죽음 앞에서는 이런 모든 시간관도 같이 죽어버립니다. 주님의 시간관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주님과 시간관의 만남은 반드시 그냥 만나지 않고, 내 시간관과 주님의 시간관과 만나서 “너는 목사가 되어라.” 이렇게 만나는 것이 아니고 ‘너는 죽어라.’ 이렇게 되기 때문에 우리의 시간관으로 만날 수 있는 여지를 남기지 않지요. 그 일을 하나님의 율법이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는데, 법이란 것은 이스라엘 집단 전체를 하나님이 죽은 자로 간주하기 위해서 주시는 겁니다. 여기서 성경 한 구절 찾아봅시다. 로마서 7장 9절입니다.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율법이 오면서 건더기는 건지고 쓸데없는 것은 밑으로 가라앉아버리죠. 건더기가 뭐냐 하면, 우리의 건더기가 아니고 내 속에 살아있는 죄가 진짜 자기를 주관하는 건더기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자, 우리가 율법을 지킵시다.”라고 하면, 주님이 뭐라고 하시는가 하면, “잔챙이는 꺼지고 주인 오라고 해.” “제가 나의 주인입니다. 말씀만 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 “너 말고 너를 주관하는 괴물 나오라고 해.” 그래서 죄가 등장하는 거예요.

 

계명이 이르매 나의 원래 주인인 죄가 살아나는 거예요. 플랑크슈타인 같아요. 관 속에서 ‘드디어 때가 왔도다.’하고 나오는 것처럼 숨어있던 죄가 그동안 꽁꽁 감추어 안 들키고 있다가 법이 오면서 “나, 법 왔다. 이리 오너라.”하고 있단 말이지요. 그 소리 듣고 우리가 문을 열고 “반갑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나의 가치와 나의 위대함을 보여드리려고 했는데 때마침 하나님이 귀한 십계명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어서오세요.” 하니까, 법이 하는 말이 “너 말고 주인 나오라고 해.” “내가 주인인데요.” “너 말고 주인 따로 있어.”라고 하니까, 죄가 듣고 있다가 “어허, 밖이 시끄럽구나. 누가 이 죄를 불러내느냐?” 율법이 하는 말이 “야, 죄! 너 오랜만이네. 인간 속에 도망가도 소용없네.”

 

마태복음 8장에 보면, 귀신 들린 청년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서 예수님을 만났는데 그 청년 속에 있던 귀신이 나왔지요. 그 귀신이 예수께 하는 말이 “우리를 쫓아내실진대 돼지에 들여보내소서.”하고 부탁하니까 예수님이 허락하셔서 돼지들이 바다에 들어가서 다 죽었잖아요. 우리 속에 죄가 있는데, 죄는 결국 우리를 이용물로 사용하는 거예요.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우리는 그동안 내가 나의 주인인줄 알았는데 이것은 착각이고, 실재 주인은 따로 있는데 그것이 죄였고, 그 죄가 주인으로 나를 갖고 논 거예요. 이것을 율법이 오니까 알게 된 거예요. 율법이 오기 전에는 이게 안 들켰는데 율법이 오니 그게 발각된 거예요. 이게 로마서 7장 9절 말씀입니다.

 

이런 말이 굉장히 생소하게 들릴 거예요. 왜냐하면, 교회에서 들은 말은, “목사님 설교말씀 잘 듣고 순종하면 빛과 소금이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립니다.” 이런 이야기를 얼마나 많이 들었습니까? 오래 교회 다닌 사람은 수 천 번도 더 들었을 거예요. 그럴 때 우리 자신이 행동에 나선다면 그것은 아직도 졸병이 나선 거예요. 주인은 숨어있고 우리를 앞장세워서 “그래, 말씀 들었으니까 바르게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 돌려라. 밥 퍼주는 사랑도 베풀고, 아프리카에 가서 선교도 하고 열심히 해라.” 이렇게 그동안 마귀가 부추겨 온 거예요.

 

그런데 정작 예수님이 오셔서 율법에 대해서 해석하고 성경 말씀을 해석하시니까 진짜 율법의 기능은 우리에게 지키라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배후에 있는 주인(마귀, 사단)을 불러내는 거예요.

 

그 주인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사망이 왔다는 내력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은 왜 죽을 수밖에 없는가? 그 이유는 죄의 열매로써 사망이 왔다는 것을 압니다. 이 사망은 목숨 끊어지는 사망이 아니고 죄 값을 치러야 될 사망이 우리 전체를 점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미 우리 몸의 자리는 죄에게 모든 것을 허락하고 다 내어줬어요. 이것을 간단한 말로 ‘죄의 종’이라고 해요.

 

그러면 죄의 종으로 있는 현상은 어떤 것인가 하면, 나를 의롭게 하는 거예요. 어떻게 의롭게 하는가 하면, 죄는 감추고 선을 앞장세우는 방식으로 나를 선한 쪽으로 몰아세우는 그런 일을 하게 합니다. 나는 외부의 어떤 도움이나 희생, 대신 죽으심 이런 것이 일체 필요 없이 나 스스로 선할 수가 있고, 이 선을 유지한다면 나는 선한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식으로 사람들을 그동안 속여 온 거예요.

 

교재 6페이지 ‘(4)법으로부터의 죽음’을 보게 되면, 모세가 하나님의 돌판을 받고 내려오는데(돌판은 하나님의 법입니다) 돌판이 오다가 깨어집니다. 돌판이 깨어졌다는 말은, ‘너희들은 이 법(하나님)의 계약 상대자가 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추잡한 존재다.’ 라는 것이 확인된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은 모든 것이 완전히 깨어졌어요.

 

제가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듯이, 애굽에서 지리적으로 탈출한다고 해서 그것이 구원이 아니고, 애굽 사람으로 살았던 사고방식이 바뀌어서 약속의 사람(무서운 하나님과 함께 살면서도 버틸 수 있는 사람)으로 달라질 때 비로소 약속의 땅에서 살 수가 있어요.

 

어쨌건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계약을 체결할 자격이 안 된단 말이지요. 처음에는 안 되는 이유를 몰랐어요. ‘우리는 송아지 만들어놓고도 여호와만 찾았는데, 왜 우리가 하나님께 거절당하지?’ 라고 몰랐는데, 하나님과 진짜 관계를 맺는 사람이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아하, 그런 방식으로는 안 되는구나.’ 우리의 잘남으로 하늘나라에 갈 수 있는 방식은 어디까지나 죄 지은 우리의 아이디어고, 진짜 하나님이 받아주시는 천국 사람은 다른 방식을 사용한다는 것을 알게 된 거예요.

 

어떻게 하는가 하면, 돌판이 깨어집니다. 깨어졌으면 그들은 구원 못 받아요. 그런데 깨어진 돌판을 대신해야 돼요. 그런데 그 제작의 주인공이 누구인가 하면 모세입니다. 그래서 출애굽기에 보면, 하나님은 모세를 중재자로 내세우는 조건 하에서 이스라엘과 계약이 체결되는 거예요.

 

그래서 모세의 말을 듣지 아니하면 그들은 끝나는 겁니다. 그게 바로 모세 율법이라는 거예요. 모세 율법을 통해서 그들은, 우리가 구원 받을 수 없는데 모세가 벌이고 있는 새로운 말씀의 자리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유일하게 거룩한 하나님과 만나고 동거가 가능하다는 것이 율법을 준 상황에서 알려줘요.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는데 아무데서나 만나는 것이 아니고 지정된 장소가 있는데 그것을 ‘장막(또는 성막)’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이스라엘 진영의 중심을 차지합니다. 이스라엘 진영 한가운데 가로 25m, 세로 50m 되는 텐트를 쳐놓고 성소, 지성소로 나눠져 있는데 이 성막의 핵심부분은 지성소고, 이 지성소에 언약궤가 있는데 깨어진 돌판을 대신한 돌판이 언약궤 속에 들어갑니다. 그러니까 그 돌판은 깨어졌다는 정보가 담겨있는 돌판이죠.

 

돌판을 언약궤 속에 넣고 언약궤의 뚜껑을 닫지요. 그 뚜껑에다 수염소와 수송아지의 피를 바르면 여기에서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가 확 퍼집니다(마치 자일리톨 껌을 씹으면 향기가 확 퍼지듯이). 퍼지게 되면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의 죄가 용서를 받는데, 죄를 알아야 용서가 되기 때문에 죄를 알기 위해서 이러한 제사법도 있지만 십계명을 준 겁니다.

 

하나님이 십계명을 준 용도가 뭔가 하면, ‘네 죄를 알렸다!’입니다. 간호사들이 주사를 놓을 때 그냥 팍 찌릅니까? 아니죠. 먼저 솜에다 알코올을 적혀서 주사 놓을 부분에 살살 닦아내지요. 그 때 얼마나 긴장됩니까? 그 알코올 솜으로 닦아주는 것이 십계명입니다. ‘자, 이제 주사바늘 들어간다.’

 

십계명 주는 것 자체가 주사는 아닙니다. 이것을 이야기해야 돼요. 십계명 지키는 것이 예수님의 피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해야 된단 말이죠. ‘자, 주사바늘 들어갑니다.’ 하고 그 다음에 팍 찔러 넣지요.

 

십계명이 그냥 시원한 알코올 솜 정도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이게 평생 가니까 문제입니다. 십계명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다가와서 우리의 원래 주인, 우리 육신을 장악하고 우리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하나님의 원수, 사망이라는 원수, 죄라는 원수와 예수님은 대화하겠다는 겁니다. ‘이근호 너와 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네 속에 있는 죄와 대화하겠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우리는 기분이 좀 상하지만 뒤로 빠져야 됩니다. ‘나는 몰랐어요.’ 하면서 비겁하지만 뒤로 슬쩍 빠져야 됩니다. ‘내 속에 있는 죄가 그렇게 했습니다. 나는 죄가 시키는 대로 하다 보니 그렇게 했습니다. 내게 뭐라고 하지 마세요.’ 하면서 비겁하게 좀 빠져주세요. 나서서 용감하게 ‘사단아 물러가라!’하고 설치다가 돈키호테처럼 두들겨 맞지 말고.

 

이것이 로마서 7장 17절에 나오지요.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가 무슨 짓을 했습니까? 나로 하여금 죽어야 될 나를 더욱 더 죽게 만드는 용도로 나를 활용해 왔다는 겁니다. 사람은 언제 죽습니까? 태어날 때부터 이미 죽었어요. 태어날 때부터 죽어가는 과정입니다. 2살 아이 보다가 오랜만에 4살 아이 보면 많이 늙어 있어요. 모든 사람은 다 하향 곡선을 그립니다.

 

30대 초반의 아가씨가 제일 크게 착각하는 것은 아직도 자신이 20대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화장품 좋은 것 발랐다고 해서 20대가 되는 게 아니거든요. 본인만 모르지 다른 사람은 다 알아요. 30대 라는 사실을. 29세와 30세의 그 경계선이 아주 애매합니다. 40대가 되면 포기를 하니까 관계없지만.

 

‘동안입니다.’라는 말에 속아 넘어가지 마세요. 우리 속에 있는 죄가 우리를 동안이 아닌 노안으로 몰고 가고 있는데 무슨 동안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죄에 대해서 No touch. 터치하지 마세요. 우리가 죄를 말린다고 될 문제가 아닙니다. 시리아 대모하는 것을 누가 말립니까? 못 말려요. 마찬가지로 죄를 못 말려요. 화산의 분화구를 무엇으로 막습니까? 솥뚜껑으로 막습니까?

 

제가 환경을 이야기했지요. 이스라엘 전체를 법의 환경으로 전환시킴으로 말미암아 세상 전부는 다 어두움이요 구름기둥과 불기둥만 밝히 보이게 하지요. ‘저것이 바로 우리를 살리고 있다는 증거다.’ 다시 말해서 ‘구원될 수 없는 너희들을 내가 지금 이렇게 부지런히 구원하고 있잖아!’ 그 지점을 보라는 겁니다.

 

민수기 16장 32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땅이 그 입을 열어 그들과 그 가속과 고라에게 속한 모든 사람과 그 물건을 삼키매 그들과 그 모든 소속이 산채로 음부에 빠지며 땅이 그 위에 합하니 그들이 총회 중에서 망하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사람을 산채로 땅에 묻어요. 조폭 같아요. 채무자를 산채로 땅에 묻어버리는 사채업자 같아요.

 

35절에 “여호와께로서 불이 나와서 분향하는 이백 오십 인을 소멸하였더라.” 화염방사기까지 동원해요. 어디에서? 성소에서. 결국 이 말은 뭐냐 하면, ‘너희들이 하나님을 아주 우습게 생각하는데 진짜 하나님과 동행했던 그들은 화염방사기로 죽었고 땅에 묻혀 죽었다.’는 겁니다. 지금 우리가 믿는 자비롭고 사랑이 많은 그 하나님이 이런 분이에요. 우리가 만나고자 하는 하나님, 우리가 가고자 하는 하늘나라에 계신 하나님이 이런 분입니다.

 

49절에 보면 “고라의 일로 죽은 자 외에 염병에 죽은 자가 일만 사천 칠백 명이었더라.”

 

하나님은 사람을 이렇게 막 죽여요. 하나님은 자신의 제사법대로만 받으세요. ‘살인하지 말라.’고 해놓고 부모를 거역했다고 죽어버려요. ‘너희들끼리는 살인하지 마.’ 해놓고는 안식일 어겼다고 죽어버려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살인하지 말라.’고 하실 때는, ‘아하, 사람이 죽는 일은 없구나.’ 생각했는데, 너무 쉽게 사람을 죽여요. 안식일 어겼다고 죽이고, 부모에게 거역했다고 죽이고, 무당을 찾아갔다고 죽이고. 이렇게 해서 죽고, 저렇게 해서 죽고. 온통 죽이는 판이에요. 그것도 모자라서 온갖 고문 기술은 다 동원해요. 물 없다고 원망하니까 불뱀이 나타나서 원망한 사람들을 다 물어 죽였어요.

 

불평하는 사람들은 진 뒤에서 따라갔어요. 행동이 느려요. 학교에서도 노는 아이들은 꼭 뒷자리에 앉지요. 광야 길을 걸을 때 원망하며 뒤에 처져있는 사람들에게 불뱀이 노리고 들어갔어요.

 

하나님의 뜻이 뭡니까? 주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을 모르는 놈은 죽이겠다는 겁니다. ‘우리가 살고 죽는 것은 주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 다른 말로 하면 ‘나는 은혜 없으면 죽어도 마땅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에요. 그런 사람은 저희 아버지 자손이지 믿음의 자손이 아닙니다.

 

믿음의 자손이 아니면 어차피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가는데, 사전에 미리 제거하겠다는 것입니다. 모든 성경은 계명으로 되어 있습니다. 십계명뿐만 아니고 사도바울의 권면과 명령도 전부 계명입니다. 이 계명을 준 것은 네 육신의 정체를 빨리 밝히라는 뜻이에요. 어떤 분이 제게 질문했어요. ‘십계명까지만 율법적 기능을 합니까, 아니면 사도들의 권면과 명령도 다 율법적 기능은 합니까?’라고. 시험해 보기 위해서.

 

이분은 뭘 모르는가 하면 하나님의 계명이 나와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인으로 모시고 있는 죄와 상대한다는 것을 몰라요. 그래서 계명이 십계명뿐만 아니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게 되면 이제 계명을 다 이룬 입장에서, 계명의 완성체의 입장에서 우리에게 들어오면 그 때부터는 상황이 많이 달라집니다. 계명 몇 개 지킨 것이 문제가 아니고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 이것은 혹을 떼려다가 혹을 더 붙이는 겪이지요.

 

“그러면 주를 사랑하면 저주를 안 받겠네?” “안 받지.” “그러면 우리가 주를 사랑하면 되잖아.” 그런데 거기에 동원되는 것이 뭐냐 하면, 십자가 질 때까지 주어진 모든 계명이 다 동원됩니다. “누구든지 처나 자식이나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 이런 말씀이 막 온단 말이지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이런 말씀이 오면 도대체 우리 속에서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십자가 이후에는 점점 더 가능성이 없는 거죠.

 

그러면 또 묻겠지요. “목사님, 가능성이 없으면 어떻게 합니까?” “가능성이 없어야 구원 받지요.” 이 부분이 소통이 되어야 하는데, 여기에서 소통이 안 되면 곤란합니다. 정자이야기 또 합시다. 정자가 난자 속에 들어가는 것은 난자가 받아줘야 들어가요. 생물학적으로 옳은 말인지 모르겠지만. 난자가 받아주는 것 이것이 선택입니다.

 

왜 자기 자신에게 구원의 가능성을 계속 두려고 합니까? 이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척하지만 사실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까지 내가 나를 사랑할 만한 요건으로 장착시켜 놓은 거예요. 그러한 술법에 지나지 않아요. 다시 말해서 이게 그동안 있었던 죄가 정이 들어서 끝까지 우리의 발목을 잡고 “너, 나 버리지 마라. 너는 나와 친하게 지냈잖아. 나는 너의 친구였잖아! 너는 내 덕분에 남에게 인간성 좋다는 소리 많이 들었잖아.”

 

저는 인간성 좋은 사람 한번 만나보고 싶습니다. 저는 분명히 성경적으로 그런 사람은 없다고 보는데 있다고 하니 보고 싶어요. 베드로가 인간성 좋았습니까, 요한이 좋았어요? 인간성 좋은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겠어요. 한경직 목사가 좋았습니까?

 

인간성 좋다. 인격 훌륭하다. 그 사람 됨됨이가 됐다.’ 이런 발언들은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으로 구원 받게 하는 그 은혜의 유일한 출처를 틀어막는 악마의 소리입니다. “너는 아직 가능성이 있어. 너는 할 수 있어. 할 수 있다고 하면 무엇이든지 못할 일이 없어.” ‘거위의 꿈’인지 뭔지 노래를 불러가면서 자꾸 사람들에게 헛된 꿈을 심는 거예요. 자아도취.

 

그래서 마르크스는 종교를 아편이라고 했지요. 적절한 표현입니다. 포이에르바하는 신을 인간이 투영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른 소리 했어요. 맞는 이야기지요. 신은 인간이 투영된 것이니까 지렁이의 신은 지렁이처럼 생겼고, 인간들이 섬기는 신은 인간처럼 생긴 거예요. 왜? 신이라는 것은 자기 확대니까 자기를 환등기에 비추면 그것이 신이에요. 그런 신이니까 나와 동질성, 유사성이 있고, 소통이 가능하지요. 얼마나 편리합니까. 집에 있는 강아지도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강아지가 자신의 반려자고 메시야 되어 있어요. 왜? 자신이 아프면 아들은 안 찾아오는데 강아지는 돌보니까. 영화에 보니까 교통사고로 다쳤는데 개가 와서 도와주니까 자신의 유산을 개한테 남겨요.

 

누가 되었든 나를 좋아하고 아껴주면 그가 메시야고 날 위한 그분이 하나님이에요. 날 도와주면 그분이 성령이고. 그러니까 삼위일체라는 것은 나를 위한 삼위일체라니까. 그 딴 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런 신학이 어디에 쓸데 있습니까. 백화점 가면 상품권으로 이용됩니까?

 

다시 말씀드립니다. 법이라는 것은 제사법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주변을 십계명으로 전부 다 깔아놓아서 모두를 죄인으로 규정시킨 겁니다. 그리고 그 죄라는 것은 우리 속에 있는 죄에게 이야기하기 때문에 이 죄에 대해서 우리가 피할 수가 없어요. 피했다 하면 못 피하는 더 세밀하고 더 혹독한 죄가 또 있어요. 단계를 더 높여요. 그래서 결국은 우리로 하여금 로마서 3장 19절 말씀처럼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이것이 성경을 펼쳤을 때만 나올 수 있는 이야기고, 성경 외에는 이런 이야기가 없습니다. ‘모든 법은 여러분이 저주 아래 있음을 알리기 위함이다.’ 라고 하면, 그 이야기 듣고 기분 좋게 십일조 할 사람 아무도 없고, 주일 성수할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목사들이 이런 이야기를 안 하지요.

 

이것은 은혜의 출처를 틀어막아서 기어이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더 보태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요) 이미 다 이루었다는 이 기쁜 소식을 기어이 접수하지 못하도록, 복음을 듣지 못하도록 세상 신이 활동하고 있는 겁니다. 이미 교회인데 무슨 교회를 위해서 뭘 따로 합니까? 성령이 있는 그 사람이 교회인데 무슨 교회를 만들어요?

 

그래서 이 제사법에 의해서 결국은 피를 증거하기 위해서 율법이 주어졌다. 피와 율법이 하나의 세트로 끌고 가게 됩니다. 그러면 여기서 새로운 율법 위반 조항들이 발생되는데 그것은 10분 쉬고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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