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중심사상

성경중심사상과 그 전개1-2012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제1강

아빠와 함께 2013. 2. 12. 16:34

 

2012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제1강
(강의:이근호 목사)




기도합시다.
하나님 살아계심으로 저희들이 살아있습니다. 살고 죽는 것이 살아계신 주님의 손 안에 있사오니 저희들이 이 땅에 태어난 이유와 목적이 오직 예수님과 비교해서 주님 하신 일 안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깨닫는 귀한 시간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강의는 이것(성경의 중심사상과 그 전개) 가지고 하겠습니다. 1페이지에 창세기에 보면, 위에서 세 번째 줄에, [하나님과 피조물의 ‘만남의 자리’도 말씀일 수밖에 없다.] 만남의 자리가 말씀일 수밖에 없는 것은, 만남의 자리를 우리가 만들어낸다든지 우리가 장만할 수 없고 우리가 우리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따로 멋있는 자리를 다듬을 수도 없고 그냥 주신 말씀 자리만 들어서 하나님과 만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우리가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날 때는 반드시 자신이 남긴 말씀으로 우리와 함께 만나기 때문에 말씀을 만들 수 없는 우리의 능력으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는 것으로 이 대목에서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


다만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때 그 말씀의 자리가 하나님과 우리의 만남의 자리다. 그럼 그 만남의 자리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것은 바로 만남의 자리에서 그 안에 모든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그게 다 집약이 된 거죠.


그림으로 그려보면, 어떤 자리를 마련하는데 이 자리에 무엇이 집약되느냐 하면, 여기에 조명발이 비추는 것처럼 집약되느냐 하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전부다 이 자리를 지나게 되는 겁니다. 지나게 되면 처음에 창세기부터 나오는 게 뭐냐 하면, 이 자리가 ‘보기에 심히 좋았더라’ 영어로 good. 이 자리 밖에 있으면, no good이죠. 나쁜 것이죠. 여기는 나쁜 것, 여기는 좋은 것. 그래서 말씀의 자리가 온 이것이 천국이고, 말씀 자리에 못 드는 이것은 지옥이고. 이렇게 구분되는 겁니다. 지옥과 천국은 이렇게 말씀이 있는 곳과 없는 곳으로 구분돼있습니다.


옆에 제가 그렸는데 사실은 나쁘다는 것이 제대로 그리면 좋음의 그림자로서 여기에 나쁜 것이 있어요. 그냥 나쁜 것이 아니고 이 자리가, ‘오메, 좋은 것’이라고 유사한 경상도 식 전라도인데 ‘야. 이 자리가 억수로 좋데이.’ 이렇게 추켜올리는 자리로서 지옥이란 말이죠. 그래서 천국과 지옥은 세트로 돼있지요. 그들은 천국 가는 사람들을 부러워하고 ‘되게 좋겠네.’라고 부러워하는 가운데서 자리가 배당이 돼있습니다. 지옥 가도 그냥 놀러가는 것이 아니고 ‘참 좋겠네. 천국 가는 사람은.’ 그러한 일의 배당 때문에 있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정리하면, 좋은 것과 나쁜 것, 천국과 지옥은 하나로 연결돼있어서 지옥 없는 천국 없고, 천국 없는 지옥 없는 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머리 좋은 사람은 아시겠지요.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찾아온 것은 우리 인간을 위함이 아니고
이 말씀의 자리가 원래부터 창세기부터 보기에 심히 좋았더라. 하나님의 자기 창조, 자기 작품을 위해서 여기에 하나님의 자기 창조의 솜씨와 월등함을 뽐내는 자리고, 이쪽 자리는 그것을 부러워하면서 그들은 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자리에 어떤 인간이 있다면, 이 인간은 어떤 인간이냐 하면, 말씀에 의해서 새롭게 좋다고 인정받는 사람만이 이곳에 합류가 되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들어온 사람만 여기에 합류가 되기 때문에 제가 처음에 전제가 말씀이 없으면 말씀 속에 못 들어온다 했지요. 그런데 여기 온 사람들은 모든 공로를 말씀을 주신 하나님의 공로로만 돌리는 사람만 여기 이 자리를 점령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러한 계획이 언제부터 있었는가? 1페이지 중간에, 책이 두껍기 때문에 진도가 팍팍 나갑니다. 안 읽고 오신 분은 제 책임 아닙니다. 알아서 하시면 됩니다. [말씀에 대한 거절은 반창조로 내려가는데, 반창조란 소멸이나 무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창조 이전의 무질서와 혼돈으로 전환되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없는 곳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혼돈과 무질서로 전환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한계시록에 되면 창조에 대한 화답이 나와 있어요. 창조가 어떤 질문을 던졌으면 요한계시록에서 답변이 오는데, 처음에 혼돈과 무질서의 성격, 왜 이렇게 혼돈과 무질서가 왔느냐 하는 이유가 마지막 요한계시록에 지옥을 묘사하면서 그게 등장합니다. 세 가지의 개구리영이 나오죠. 짐승과 거짓 선지자와 용, 음녀도 포함되는데 이렇게 해서 혼돈과 무질서가 되는 겁니다.


처음에 혼돈과 무질서에서 말씀을 주심으로서 어떤 질서가 잡히는데 그 질서는, 제가 여러 번 반복합니다. 한꺼번에 알 수 없는 거니까. 말씀대로 되매 그것이 좋은 것이다. 예수님 살아계실 때 추임새처럼 들어가는 구절들이 있어요.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말씀대로 응하게 함이라.” 추임새처럼 중간중간에 주께서 나귀 타고 가신 것도 말씀대로 응하게 하심이라. 주께서 말씀대로 응하니까 마리아가 잉태를 했다. 그것도 말씀대로 응하게 함이라.


구약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로보암이 유다나라를 배반한 것도 아히야 선지자의 말씀대로 응하게 함이라. 또는 여로보암 제단이 깨어지고 재가 쏟아지는 것도 아히야 선지자의 말씀대로 응하게 함이라. 또는 나단 선지자의 말씀대로 응하게 함이라.


제가 초반에 이렇게 설명해보면 궁금한 게 뭐냐? 사람의 자리, 인간의 자리, 그럼 나의 자리는 도대체 어디서 찾느냐 말이에요. 내가 어떤 행동을 하고, 말씀을 지키고, 찬양을 하고, 뭔가 부지런떨 수 있고, 영광 돌릴 수 있는 만반의 마음 준비가 돼있는데 이러한 액션들, 행동들의 가치와 행함의 의미는 어디서 찾느냐 이 말이에요. 저는 그걸 왜 찾느냐 하는 거죠.


말씀대로 응한다 하면, 그 말씀에 관심 두면 되는데 말씀대로 응하는 것이 good이고 좋은 것인데 이미 좋은 것이 확보돼있는데 왜 거기서 눈 돌리면서 내가 열심히 행동하고 성의껏 헌금하고 예배하고 찬송하는 이 가치는 어느 구석에 찾습니까? 여기에 대한 보상은 어디서 얻을 수 있습니까? 이런 시선 돌림이 저는 무척 수상하게 느껴지는 거예요. 왜 따로 당신의 가치를 챙기려고 합니까? 그럴 필요가 없는데.


문방구의 점원 하나 들여놓았더니만 주인이, ‘요번 장사 잘 되서 기쁘지?’ ‘기쁩니다.’ ‘그런데 인상 보니까 안 기쁜 것 같은데 왜 안 기뻐?’ 내 수입은 얼마냐고 묻는 거예요. 문방구에 취직해서 주인 생각 따로고, 직원 생각 따로인 거예요. 그러면 주인이 나가라 하겠지요. 네가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지 못하리라. 그러면 종이 화내고 나가겠지요. 나가면 주인이 섭섭하게 한 마디 합니다. “말씀대로 응하게 함이라.” 그렇게 삐지고 나가는 것도 말씀대로 응하게 함이라. 뒤에 추임새 던지듯이 툭 던지고 나면 끝나버려요. 문제가.


다시 한 번 봅시다. 이 자리에서 이 자리의 영광을 빛내기 위해서 새싹 돋아나듯이 사람들이 돋아나요. 이렇게 말씀이 구분되기 위해서 지옥에서 돋아난 사람과 천국에서 돋아난 사람으로 이렇게 인간이 이렇게 돋아날 때 역사가 이렇게 돋아난다는 사실을 말씀 이외에는 돋아난 본인들도 몰라요. 아무도 모릅니다. 말씀이 임하게 되면 사람의 행동과 상관없이 창세전에 이미 천국 갈 사람과 지옥 갈 사람이 결정돼있다는 사실이 나옵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 이름이라는 게 거기 없어요. 누구누구는 천국 가거라는 게 없고, 어떻게 돼 있느냐 하면, 명시적으로 돼있는데,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만 구원받는다고만 돼있지 구체적으로 대구에 사는 지묘동에 누구누구는 거기에 포함돼있다는 내용은 거기에 포함돼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보고 구원받았느냐고 자꾸 따지지 마세요. 왜냐하면 저도 같은 입장이기 때문에 구원받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처지가 못 되는 것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십사만사천에 포함됩니까? 할 때 글쎄요. 자꾸 그런데 관심두면 십사만사천에 포함돼는 게 아니고 십사만사천일에 포함되어서 탈락이 됩니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거죠. 관심이 엉뚱한데 가 있는 겁니다.


다시 할게요. 모든 말씀은 인간에게 가려져있고 말씀이 와서 이 윤곽이 뚫립니다. 그런데 왜 인간에게 모든 말씀이 가려져 있느냐 하면, 인간이라는 것이 조상이 뭔가 일을 잘못 저질렀다든지 어떻게 했는지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우리 내부에서 사망이라는 것이 여기서 가동이 돼요.

오늘 아침에 한 걸 예로 들면, 애가 유리창을 깨니까 고층아파트에 찬 바람이 들어와서 감기 들었습니다. 애가 유리창 깨기 전까지는 찬 바람이 들어온 게 원인이 되어서 나한테 감기 걸린다는 그러한 인생 경험을 해보지 못해서 그런 것 몰라요. 그냥 장난치다 유리창 깨니까 찬 바람 들어와서 감기 걸렸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담이 선악과 따먹을 때 자기가 어떻게 되는지 몰라요. 어린애가 유리창 깨면 찬 바람이 들어오는지 모르듯이 나중에 이야기하지요. 찬 바람이 원인이었고 너는 결과물에 불과하다고 통보해주죠. 그러면 ‘내가 감기 걸렸구나. 감기라는 것은 찬 바람이 들어오면 걸리는구나.’ 비로소 찬 바람과 자기 사이에 인과관계가 성립되듯이 인간은 감기 정도가 아니라 사망이 온다.


죽음이 오고 이마에 땀 흘려야 밥 먹고 살고, 여자는 해산의 고통이 있고 그리고 인간은 불안하고 수치를 느끼고 뭔가 가려야 살 수 있고, 부부가 같이 있으면서도 필요할 땐 남남으로 치고, 서로 변명하고 지적하고, 서로 타인으로 여기는 모든 어색하고 이상스러운 모든 것은
바깥에 있는 현상은 내 안에 있는 죽음이 자가 발전한 결과에요. 내 안에 죽음이 나라는 껍데기를 통해서 이것이 바로 죽음이다. 이제부터 서서히 맛보라고 죽음이 개시되는데 이게 세상 끝날 때까지 계속되는 거예요. 우리 인생 마감할 때까지 계속되는 거고. 


창세기 4장에 가인이 동생을 죽이고 싶지 않더라도 죄가 덮치니까 자신도 모르게 ‘동생아 미안하다. 내가 왜 이런 짓을 하지?’ 하면서 한단 말이죠. 이것은 본인은 동생을 죽이고 싶지 않더라도 죽음이 나를 덮치면 동생을 죽여야 되는데 그게 왜 그러냐 하면, 선악과의 죽음의 세력이 새로운 양상으로 변양되어서 새로운 봇물 터지듯이 강물이 내려오다가 갈라지듯이, 이제 죽음이라는 것이 어디까지 갈라질지 몰라요. 계속 갈라지면서 새로운 양상, 새로운 결과들을 양산해낸다 이 말이죠.


그래서 가인은 동생을 죽였지요. 거기서 파생된 죄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네가 동생을 죽였느냐?’ 하니까 제가 동생을 지키는 자냐고 아닌 척하면서 거짓말하지요. 그러니까 죽인 것 살인죄에다 거짓말했으니까 거짓말 죄 그리고 나한테 죄가 심하다고 반항하는 죄까지 계속해서 나오는 거예요.


인간 속에 죄가 하나님이 만드신 역사에 따라서 죄가 드디어 담쟁이넝쿨이 퍼지듯이 온 세계에 퍼져가는 거예요. 인간은 세균을 옮기는 전염인자가 되어서 확 퍼져나가는 겁니다. 이거는 아벨도 마찬가지고 가인도 마찬가지고. 모든 인간은 같은 아담과 하와의 자손들이기 때문에 예외가 없어요. 구원받은 사람이고 안 받은 사람이고 죄가 확대돼 나갑니다. 어떻습니까? 즐겁지 않습니까? 상당히 즐겁지요.


이게 왜 즐거우냐 하면,
내가 하나님 말씀대로 지켜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겠다는 그 고집이 그게 자기 주제파악을 못하고 있는 트릭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일찍이 접수를 했다는 점에서 우리의 심적인 스트레스와 부담을 덜어주는 겁니다. 지금 나 혼자 더는 것 같아.


성경 자체를 보세요. 창조 이전에 무질서와 혼돈으로 가고 있다는 데에 대해서 우리는 나도 거기에 끌려가고 있고 모든 사람이 가재도구가 탁류에 쓸리듯이 걷잡을 수 없이 하나님 말씀대로 되고 있다는 그 사실로 인하여 우리로 하여금 큰 안심과 즐거움과 기쁨을 제공하는 겁니다.


왜? 그 말씀 가운데 뭐가 들어있습니까? ‘내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뗏목이다.’ 뭐 이런 식으로. 내가 건질 자만 건져내는, 내가 대신해서 죄 사해준 사람만 떠내려가는 탁류에서 너는 올라타라고 낚시하듯이 그 주님의 역할도 그 말씀 안에 포함됐다는 것이 우리의 즐거움입니다. 우리의 소망이고, 우리의 낙이고.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서나 세상에 대해서 손쓸 필요나 손쓸 여지는 전혀 없는 거예요. 따라서 우리의 몸짓과 우리 행동과 우리 양심과 우리의 태도 모든 것은 바로 아주 솜씨 있고 매끄럽고 또는 아주 교묘하면서도 그냥 쑥덕거리면서 죄에 대해서 마음껏 펼치면 되는 거예요. 펼치면 되는데 그것이 다른 사람한테 지저분해보이는 사람은 교도소 가고, 점잔해 보이면 성화되었다고 칭찬도 받고. 그거는 속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간에 주님 보시기에는 똑같은 형편이에요.


나는 의인을 부르러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왔다 했거든요. 그러니까 자기가 의인이라고 우기거든 그것도 죄가 만들어낸 또 하나의 위선인 줄 알라는 그 말입니다. 왜 그래야 되느냐 하면, 예수님만 오야, 예수님만 패를 쥐고 있고 나머지 모든 사람들은 그 패에 놀아나야 될 피조물이기 때문에 예수님 앞에서 아무리 자기가 훌륭하다고 자기를 설득해봐야 주님의 판정은 이미 결정 났습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온 것이 아니고. ‘의인 손 들어보세요. 나가주세요.’ 이런 식으로. 나는 의인을 부르러온 것이 아니라고 해놓고, ‘자기가 의인이란 사람은 나가주세요. 안녕히 가세요. 지옥으로.’ 이렇게 된다 이 말이죠.


나는 죄인을 부르러왔다. 그러면 죄인이라 하면 구원되는 줄 알고 죄인 여기 있습니다. 손 내려. 내가 죄인이라고 할 때까지 기다려. 너는 네가 죄인이라고 우기는 의인이야. 의인 노릇하는 거야. 죄인인 척 많이 하고 있는. 2011년도 최우수연기상. 전부다 똑같아. 손 내려. 전부 마찬가지야.


그러니까 말씀이 자리만이 좋은 것이고 말씀의 자리가 아닌 것은 나쁜 것입니다. 그런데 좋다, 나쁘다는 것을 우리가 판정할 자격이 안 됩니다. 우리는 말씀밖에 있는 말씀을 모르는 존재인데 말씀이 오게 되면, ‘너는 창세전부터 원래 말씀 안에 있었어.’ 우리에게 소급, 집약돼있는 말씀 전체에서 에베소서 1장 4절을 끄집어내면서 너는 창세전부터 예수 안에서 택정 받았다고 소식이 말씀의 자리에 오게 될 때 그게 성령을 통해서 반드시 중요합니다. 성령을 통해서입니다.


인간의 양심과 마음은 안 되고 성령을 통해서 믿게 된 사람은 에베소서 1장 4절, 창세전에서 예수 안에서 예정되었다는 그것만 믿어지는 게 아니고 창세기부터 전부다 믿어지는 거예요. 그게 믿어진다는 말은 자기 나름대로의 기준은 헛방이라는 것을 기준자체를 바꿔치기한 거예요. 말씀이 옳고 나는 옳지 않다고 바꿔치기한 겁니다. 그걸 바꿔치기할 때 에베소서 1장 4절을 바꿔치기한 게 아니고 전부 다 바꿔치기하는 능력이 말씀의 자리에서 일어나는 겁니다. 왜? 이게 좋기 때문에.


그 다음에 1페이지 끝에 보면, 
[인류가 활동하고 쉬는 터전인 땅은 그 모든 변화약속을 위한 역사적 배경과 공간으로서만 의미가 주어진다.
그전에 창세기 3장 15절 있지만 넘어가고요. 이 말 중에서 제일 중요한 말은 ‘변화’입니다. 변화란 비고정적이다. 고정되지 못했기 때문에 뭔가 종잡아 이게 나야. 이것이 아니야 이것이 나야. 이런 모습이 내 모습이라고 하나로 규정지을 수 있는 그러한 재주가 우리한테 허락되지 않습니다. 왜? 모든 것이 변화하니까.


모든 변화를 하나로 묶어내는 걸 ‘시간’이라 합니다. 
시간을 변화 중에서 어떤 한 시점에 이게 나라고 의식이 있을 때 
나 의식에서 전체 변화된 시간을 보는 걸 ‘역사’라고 합니다. 
여기서 사람 이름은 의미 없습니다만 들어놓으세요. 하이데거란 철학자가 있습니다. 
그 사람의 책에 [존재와 시간]이란 게 있는데 거기에 보면, 
역사란 변화하는 건데 역사는 실제로 일어나는 사건이 역사가 아니고 
그걸 역사라고 규정짓고 있는 나라는 현 존재 속에 시간성이 역사를 창출한다고 했습니다.


내 속에 흐르는 시간성이 나를 위해서 봉사하는 시간성이 역사를 만들어내니까 
이 역사가 누구 중심이겠습니까? 역시 모든 역사가 나라는 인간을 증명해주는 그런 역사에 불과하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역사를 믿지 말라는 겁니다. 뭔가 이거는 가문의 역사라고 할 때 믿지 말란 말이죠. 
뼈대가 있는지 힘줄이 있는지 뭐가 있는지 그런 건 다 헛소리에 불과하다. 역사란 없는 거예요.


역사가 왜 없느냐 하면, 
A라는 사람이 역사를 만들면, B라는 사람이 역사를 만들고, C라는 사람도 역사를 만든다고. 
그러니까 역사라는 게 다 달라요. 
죽도 아니고 밥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에요. D라는 사람도 있단 말이죠. 
전부다 X표에요. 
네가 뭔데 이 사건은 빼고, 이 사건은 집어넣고, 
이 사건은 과장되고, 이 사건은 소홀히 여기고 
왜 네가 무슨 자격으로 그렇게 함부로 사건을 이렇게 조립하고. 
너, 뭐야? 네가 뭔데 이렇게 만드는 거야.


그러니까 인간이 역사에 대해서 비난하고 부정해버리면 
그 비난이 역사의 비난이 아닙니다. 
어디까지 파급되겠습니까? 나라는 인간에 대해서 도전장을 내는 거예요
그러면 네가 뭔데 나한테 공격하느냐 하면, 
이쪽에선 너는 변화하잖아요. 작년의 너야, 내년의 너야. 다 달라. 
아침마다 다르고, 저녁마다 다른 네가 
기분 좋다면 기분 좋은 대로 업 되어서 기마이 쓰고, 기분 나쁘면 애들을 나무라고. 
도대체 어느 모습이 네 모습이야? 지킬과 하이드처럼 너, 어느 쪽인데?


모든 사람의 변화는 사실은 A도 아니고 B도 아니고 C도 아니에요. 
뭐냐 하면 약속, 하나님의 약속을 위해서 이런 시간이 있는 거예요. 
약속이란 새 언약인데 새 언약은 십자가인 줄 여러분 아시죠. 
예수님의 십자가를 위해서 시간이 있다는 말을 바꾸어서 생각해야 됩니다. 
십자가가 역사를 만들어낸다고 봐야 돼요. 
주님의 고정된, 완전한 말씀을 다 이루었다는 십자가의 긴 그림자가 세상의 모든 역사가 되는 겁니다.


대구의 팔공산에 가면 케이블카가 있거든요. 
창세기 3장 15절에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싸워서 여자의 후손이 이긴다는 것에서 출발하면, 
여기서 케이블카를 깔아보자 이 말이죠.그럼 여기에 십자가가 있다. 
그러면 창세기 3장 15절부터 십자가까지 대롱대롱 매달려 가는 이것, 이게 약속 주머니에요.


그러면 우리는 어디 안에 있느냐? 여기 안에 있는 사람은 이 케이블카가 안 보이게 됩니다. 
오늘 강의중 제일 어려운 대목인데, 뭐가 보이느냐 하면, 창세기 3장 15절과 십자가가 보입니다. 
그럼 이 케이블카를 보려면 케이블카에서 뛰어내려야 돼요. 
여기 케이블카 있고 창세기 있네. 
그럼 이 사람은 이것이 변화되고 보고 있는 나는 변화가 안 되죠.


그럼 이 전체를 뭐라고 하면, 불교신자가 기독교 교회라고 판정을 내려요. 세상에 수천 종교가 있는데 그 중에 한 종교로 기독교가 있는데 그 기독교는 성경이라는 경전을 섬기는데 그 내용에 이런 게 있다고 이 사람은 판정을 내리죠. 그렇다면 판정내릴 때 이 사람은 신자입니까? 전혀 신자 아니죠. 그냥 호기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죠. 기독교가 뭔지 호기심을 가지고 교회 다닌 사람이죠.


그런데 이 옆에 교회 다닌 사람이 있더라도 교회 다니는 사람이나 불교 중이나 천주교 신부나 상관없이 이런 관점에서
자기가 고정됐다는 관점에서 바라보면 전부다 하나의 말씀 밖에 존재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케이블카에서 바라보면 기독교, 불교, 천주교 이걸 종교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케이블카 안에 있는 사람은 종교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종교라는 오락은 있는 줄 알죠. 그게 무슨 의미가 없죠. 
다만 종교라는 것을 마귀가 만들어낸다는 것은 알지요. 
그리고 이들이 보는 어떤 나름대로의 역사관을 주장한다는 것도 알지요. 
여기서 발달한 것이 성경고고학. 개혁주의신학 이런 것들을 만들어내는 거예요.


이런 것들이 애들 조립하는 장난감, 레고 랜드처럼 학자들이 신학으로 조립하는 거예요. 구원론을 여기다 집어넣을까? 창조론을 여기다 집어넣으면? 교회론은 여기다, 종말론은 여기다. 어떻게 강의나 해볼까 집어넣는 거예요. 신학교수들이 그런 짓을 많이 하죠. 자기 나름대로 평생 갖고 놀던 만지작거리는 장난감 같은 겁니다.


어떤 아저씨는 결혼해도 마징가Z 비슷한 그것 만든다고 수천만 원 날렸다는 사람도 있어요. 그건 자기 취미거든요. 그러니까 성경 보고 신학 만드는 취미를 우리는 말릴 수 없습니다. 심방하고 목회하는 게 취미인 목사들을 말릴 수가 없어요. 그것도 취미니까. 그런데 신자는 아니죠.


그게 신자 아닌지 어떻게 아느냐 하면, 이 자체가 주의 말씀과 상관없다고 찔러버리면 뭔가 화를 낸다는 것은 본인이 뭔가 고정된 자아가 있다는 증거거든요. 고정된 자아가 없으면 찔러도 묵에 찔린 것처럼 아무 의미 없는데 ‘뭐 있네?’ 찔렀는데 왜 찌르느냐고 나온다면 그거는 케이블카 탄 게 아니고 케이블카 바깥에 나가 있는 거예요.


십자가에서 자기를 부인하라. 그런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라 했죠. 그러면 십자가란 요새 말로 하면 죽을 때 관이라고 보면 되는데, 말이 어려워요. 옛날 서부영화에 장고가 관을 끌고 갔잖아요. 그것은 자기 죽을 관이 아니고 저쪽 죽일 관을 끌고 왔는데, 이 관을 짊어지는 것은 아직 덜 죽은 거죠. 그런데 지가 관 속에 죽을 채로 들어가면 관은 누가 끕니까? 애매합니다. 진짜 애매해요. 애매한 걸 오늘 정해드리겠습니다. 우리의 아름다운 약속이에요.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란 말은 너는 이미 죽은 인간이라고 바깥에서 관에 못을 박아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이 말은 내가 뭘 하라가 아니라 덮친다는 의미에요. 
주의 말씀은 십자가로 관으로서 내게 덮쳐지는 것은 바로 우리로 하여금 
케이블카 안에 들어있는 사람에게는 더 이상 나를 주인공으로 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말씀에 의하면 주인공은 십자가로 케이블카로 앞서서 우리에게 주어지고 창세기 1장에서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거예요. 
그분이 하나님의 형상이란 분의 이름이에요.


하나님의 형상되시는 분이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됨을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말씀 속에 집어넣기 위해서 
이제는 우리는 변화될 수밖에 없는 것이 
세상에 고정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만 고정돼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통보하고 확인해주는 식으로 가는 거예요. 
그리고 네가 어떤 변화가 있더라도 예수 안에서 택함 받음에는 변화가 없다. 
교도소 들락날락하고    어떤 변화가 있더라도 그리스도 안에서는 변함이 없다는 것이 주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살인강도가 사형장에 끌려가면서 그 사람은 두 가지의 선택을 해야 돼요. 내가 나쁜 짓을 해서 사람을 죽여서 형장에 끌려가는 이 결과가 나로부터 나온 결과냐 아니면 주께서 의도적으로 몰아넣은 결과냐를 선택해야 된다니까요. 변화무쌍한 우리 자신은 어떤 일에 대해서 책임질 수 있는 입장이 못 됩니다. 언제 책임질까요? 27살 때? 서른 살 때 일어난 살인사건에 대해서 29살 때 일로 책임질까요, 32살 때 일로 책임질까요? 어떻게 책임질 건데?


가인이 아벨을 죽일 때 가인에게 벌을 내리죠. 세상의 벌은 책임지라고 준 벌이에요. 사실은 그건 잘못된 겁니다. 형법에서. 사람은 벌 내린다고 원상복귀 안 돼요. 사회적 복수심의 발로입니다. 너도 한 번 당해봐라. 나쁜 놈아. 같은 동료를 목줄 해서 비스킷 먹이고. 너도 한 번 그래봐. 그러면 사회적으로 사람들이 속이 후련하죠. 누가 속 탑니까? 가해자 부모만 속 타지요. 자기 부모한테는 그런 애가 아니기 때문에. 못난 건 내 새끼기 때문에. 사회적 복수심이 정의라고 할 수 없거든요. 괜히 화나서 화풀이하고 뒷북 치고 있는 거예요. 복수한다고 죽은 애가 돌아오고 자살한 애가 다시 돌아옵니까?


사람의 복수란 자기가 고정돼있다고 여길 때만 복수가 생기는 거예요. 너 반드시 죽일 거야. 왜? 17살 때 나한테 돈 빼앗아 갔잖아. 그런데 옆에 다른 애가, 너는 내가 복수할 거야. 13살 때 내 이불에다 오줌 쌌잖아. 서로 얽히고설키고 한쪽은 복수하고 한쪽은 복수 당하고 바빠. 도대체 세상이 누구 복수하라고 있는 세상입니까?


교회 다니는 것도 하나님 이름 빌려서 자기 사적인 복수하려고 하나님 부추기 위해서 교회 다니는 거예요. ‘내가 돈 없어서 서러움 당하는 것 하나님 돈 팍 줘서 저 콧대 낮추게 하옵소서.’ 사적인 복수심에 하나님이 왜 끼어듭니까? 자기는 고정돼있다고 보는 거예요. 자기는 영원불멸하다는 거예요. 그게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그것 때문에 너무 힘들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누구나 그렇기 때문에. 나만 특별하게 못된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은 복수심을 갖고 있어요. 이게 홉스라는 학자의 주장입니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고


경제라는 것은 다른 게 아니고 사적인 복수심의 발로가 경제라는 겁니다. 이를 악물고 출세하고 성공해야 될 이유가 자기도 기억나지는 않지만 잊혀지지 않는 뭔가 있어요. 알 수 없는 복수심이 나를 추동시킨다. 나를 격려하고 독려해서 나는 남한테 복수할 수 있는 권리와 자격이 있다고 남한테 떠벌이기 위해서 나는 죽으면 안 돼. 지금 죽으면 복수를 못하기 때문에. 그런 심정으로 교회 찾아와서 철야기도하고 성경 쓰고 이 짓하고 있는 거예요. 성경 쓰기는 왜 쓰는데 성경 보면 될 텐데.


모든 것은 뭔가 내가 내 속에 알 수 없는 끓어오르는 복수심을 어떻게 해소해보려는 심보로서 작용하는 거예요. 주님이 모든 복수심은 나한테 가져오라. 그래 내가 얻어맞을게. 분풀이 다 나한테 해. 다 나한테 가져와.


케이블카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케이블카에 대롱대롱 달려있으면 이 안에서 우리는 뭘 갖고 있느냐 하면, 역사성을 갖고 있다 했죠. 복습해봅시다. 어떤 경우에 역사성이 있다 했습니까? 나 위주로 나의 역사가 나와요. 이씨 가문이면 이씨 가문의 역사가 나오고, 대성초등학교 나왔으면 대성초등학교 동창생의 역사가 드러나야 되고, 내가 삼성그룹에 있으면 삼성그룹의 동기생들이 나열되고, 202동 아파트 주민들은 주민들 모임 있어요. 장구 치면 장구 동호회도 있고.
역사성이란 전부다 자기로부터 나온 겁니다.


이것을 묵시로 예수님 중심의 시간이 들어와 버리면 
이 묵시, 시간이 흐르지 않은데서 뭐로 바뀌느냐 하면, 
그저 변화무쌍한 거죠. 결국 여기서 녹아져야 됩니다. 
어떻게 녹아지는가? 
과거는 잊어버리고, 
미래는 오지 않았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지금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주님의 소유로 전환, 주님의 것으로 날마다 드려줘야 돼요
내일되면 내일의 것으로 또 하나님께서 만들어내게 되면 
그것도 주님이 만들었기 때문에 넘겨지죠.


넘겨지게 되면 이 변화는 변화를 바라보는 변화가 아니고 
나는 변하는데 무엇이 고정이냐? 무엇이 고정적인가가 보이죠. 
고정적인 것이 있다면 변화 때문에 무서워하진 않습니다. 
사람이 자기 행동을 하게 되면 자기 행동은 반추라 하죠. 되새기게 되면 내 행동에 따라서 거기서 역사가 생깁니다. 
이 역사는 나의 자존심이에요. 누가 역사를 짓밟으면 내가 화를 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곧 내가 고정돼있다는 거예요.


그걸 주님의 은혜가 오게 되면 케이블카에서 피가 흐르게 되면 내가 또 내 위주로 생각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이러한 어떤 사태가 주어진 것은 나로 하여금 
내가 고정된 것이 아니고 내가 주님의 것으로만 고정돼있다는 것
주님 바라보라고 나한테 이런 일들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그동안 주님 안 바라보고 나만 바라봤던 나의 시선을 다시 예수님 바라보라고 이런 변화가 일어났었구나.

내가 강도가 되었다. 사형장에 끌려간다. Green Green Grass Of Home 노래 부르면서 내가 곧 죽는데 죽게 되면 목사님께서 나를 푸른 초장이 있는 고향에 묻어주겠지. 마지막 멘트 남기면서 사형장 끌려가면서 부른 톰 존스가 부른 노래가 있잖아요. 그 가사처럼 사형장에 끌려가면서 뭘 느끼느냐 하면, 왜 다른 사람은 오래 사는데 나는 젊은 나이에 강도질하다가 일찍 죽느냐? 그것이 누구한테 원인이 있다? 고정된 주님이
너는 그런 변화를 겪으면서 고정된 분을 믿으라고 나에게 그런 변화를 준 거예요.


여러분 허파를 보면 허파꽈리가 얼마나 복잡합니까? 그 복잡한 허파꽈리 하나하나가 내가 허파라고 우기게 되면 허파에 구멍 납니다. 그럴 때 뭐라 합니까? 인간의 몸이 허파꽈리야 내 속에 허파가 있다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강도든, 살인자든, 창기든 관계없어요. 예수 그리스도로 모든 것을 전부다 고정되어서 그런 변화, 혼돈과 무질서를 통해서 주님이 만든 그 자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유일하게 보기에 심히 좋은 자리가 되는 거예요.


이걸 바꿔서 생각하면 내가 사람 죽이고 도둑질 한 것이 주님 보시기에 좋은 모습이 되는 거예요. 이 기막힌 반전, 이 어처구니없는 반전을 어떻게 해결할 거예요? 믿지 않는 것이 저주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저주에요. 우리는 나를 고정시켜서 어떻게 나 같은 인간이 도적질해. 주께서 뭐라고 합니까? 니가 뭔데? 니가 거기 왜 등장하는데? 도적질 안 하면 구원 받는 그런 건 없어요.


예수님이 믿게 해서 우리가 믿는 것이지 내가 평소에 믿는 것은 허파꽈리가 잘난 척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은 믿음 아닌 것으로 주님께서 일들을 통해서 계속 다 부셔버립니다. ‘빨리 고백해. 너는 예수 믿는 적 없고 예수 믿는 너 자신을 믿었다고. 빨리 빨리 고백해. 괜히 연기하지 마. 나중에 천당 가면 다 들통 나.’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다시 한번 이번 시간 정리한다면, 
모든 것은 말씀 안에 있고, 말씀 안에 있을 때만 보기에 심히 좋은 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말씀 안에 있는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자기 자신을 믿는 게 아니고 말씀을 주신 말씀 자체를 믿게 돼요. 
그러면 말씀 자체가 고정이 되고 
동시에 우리는 그 고정 앞에서 날마다 변화무쌍한 종잡을 수 없는 존재가 돼요.


여러분 일곱 살, 다섯 살 애들 뛰놀면 엄마가 종잡을 수 없지요. 엄마가 집을 비웠다하면 친구들 데려와서 엉망진창 하잖아요. 그런데 본인한테 물어보세요. ‘애야. 집안을 너무 어질러놨는데 거기에 대해서 할 말 없나?’ ‘엄마. 내가 무슨 문제 있는지 모르겠는데요. 나는 재미있을 뿐인데.’ ‘봐라. 집을 어질러놨잖아.’ ‘그거야 치우면 되지요.’ 그러니까 자기는 어떤 경우라도 마지막 최종점은, 내가 한 행동은 어쨌든 저쨌든 나는 정당하다는 자기 고정성을 내세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게 바로 선악과 따먹은 내가 하나님처럼 살아야 내 몸이 편해요. 하나님 믿지 마세요. 지가 하나님이면서 뭘 믿어요. 내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교회 다니는 것은 우리 몸에 참 편하고, 나는 주님 앞에 죄인이라는 것을 확인하려는 것은 교회 가는 것도 괴롭고 조금 다니는 척하다 결국은 뛰쳐나오게 돼있어요. 제발 나 보고, ‘너는 하나님이야. 너는 사랑받기에 합당한 존재라고 외칠 수 있는 그런 사람 없느냐? 여러분!’ 제발 너는 사랑받을 만 하고 너는 하나님이며 너는 어떤 일을 해도 정당하다는 그런 소리를 하는 그런 친목단체, 그게 오늘날 교회라고 만들어진 거예요.




10분 쉽시다.


 첨부파일 : 2012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a.hwp (51.0K), Down: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