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중심사상

성경중심사상과 그 전개6-2012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제6강

아빠와 함께 2013. 2. 12. 17:12

2012 겨울수련회 6강

 

지난 시간까지는 언약궤가 이스라엘 진 안에 있었지요. 이번 시간에는 언약궤 자체가 진 바깥으로 탈출합니다. 어떤 계기가 있었는가 하면, 이스라엘과 주변 이방나라와 전쟁이 벌어져서 언약궤는 이스라엘 안에만 계시는 것이 아니고 바깥을 한 바퀴 돌지요.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과 싸우려는 블레셋에 의도적으로 포로가 돼요. 언약궤가.

 

언약궤는 언약이 담긴 상자잖아요. 그 상자가 지금 움직인다. 여기서 언약궤 자체가 인격화 될 수 있는 조짐이 하나님의 이름과 결부해서 등장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나는 사람의 손에 잡히는 그런 신이 아니라는 거지요. 블레셋 사람들이 섬기는 다곤 신의 경우는 신당에 세워두면 50년이 되었건 100년이 되건 세워둔 그 자리에 멍청하게 서있을 뿐이죠. 마치 영국의 버킹궁 앞에 서있는 경비병처럼.

 

그런데 언약궤는 그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전파하기 위해서 전쟁이라는 방식으로 손수 나서십니다. 순찰 한 번 돌면 그쪽 나라들은 다 패하게 되어 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 어떤 존재도 하나님의 거룩함 앞에서 살아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신명기에 보면, 하나님은 ‘소멸하시는 불’이라고 했어요.

 

이런 하나님 앞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가 너무 무섭습니다.”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양 잡아라! 흠 없는 양 잡으면 내가 너희들과 함께 있어줄게.” 그렇게 되는 거예요. 여기에 신학이 동원될 필요 없고, 윤리, 도덕, 양심, 봉사, 헌신 이런 것들이 무용지물입니다. “이것들이 어디 쓸데없는 밥그릇 가져와서 거룩을 담으려고.” 인간의 그릇에 거룩이 담기겠어요?

 

‘네 몸에서 나온 어떤 행위도 내가 안 받겠다.’고 하십니다. 주께서 받으시는 것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상한 심령. 상한 심령은 이렇게 생각하면 돼요. 여러분의 몸을 동해 바다에 푹 담갔다가 포항 죽도시장에서 팔다 남은 생선처럼 음식물 쓰레기장에 버리면 그곳에서 섞기 시작합니다. 그것을 상한 심령으로 생각하면 돼요.

 

악취가 나서 아무도 돌아보지 않고 “이걸 누가 가져가?” 특히 어물 썩은 것은 냄새가 지독합니다. 그것이 부패한 것이죠. 이것이 상한 심령입니다. 상한 심령을 너무 남발하다 보니까 어느 정도인지 감이 안 잡히죠. 포항 죽도시장 음식물 쓰레기 버리는 곳에 한 번 가보세요. 주님은 상한 심령을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이 상한 심령을 십자가 피에 찍어 잡수십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는 이동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난 후 언약궤가 안착하게 되면 그때부터는 이스라엘 자체가 이스라엘이 아니라 뭔가 대외적으로 정복이라는 요소를 아울러야 참된 이스라엘의 완성으로 이루어진다는 그런 분위기가 되지요. 그래서 이동하는 언약궤를 붙잡은 분이 계십니다. 다윗 왕입니다.

 

다윗 왕이 언약궤를 붙잡으면서 어떤 노선의 변화가 일어나요. ‘내가 이스라엘의 왕이 아니고 여호와께서 친히 왕으로 통치해 주셔야겠습니다.’ 그때부터 다윗은 전쟁에 나서게 돼요. 이 전쟁은 누구의 전쟁인가? 이스라엘의 전쟁이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의 전쟁에 나서게 되는 겁니다.

 

여기에서 언약궤가 의미하는 것은 뭔가? 다시 한 번 정리해 봅시다. 고정되어 있던 언약궤가 움직인다. 이 움직이게 된 것은 홉니와 비니하스가 전쟁에 나서면서 언약궤를 가지고 가지요. 마치 언약궤가 자신들을 지켜줄 것으로 믿고. 그러다가 블레셋 군사들에게 언약궤를 빼앗겨요.

 

왜 하나님은 언약궤가 있는 이스라엘에게 패배를 안겨 주셨을까요? 그것은 그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에 소속된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즉 이스라엘을 통해서 언약궤가 하나님의 이스라엘로 빼내기 위해서 기존의 이스라엘을 전쟁에서 패하게 했어요. 왜 그런가 하면, 하나님은 무조건 승리하시는 하나님이지 패하는 하나님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패배함으로써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이 아니고 하나님을 위한 이스라엘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새롭게 그들에게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지요. 시편 135편 4절에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야곱 곧 이스라엘을 자기의 특별한 소유로 택하셨음이로다.” 라고.

 

이렇게 되면 이스라엘의 언약궤가 왕이라는 인물을 등장시키는 계기가 되는데, 여기 언약궤에 하나님의 이름이 계십니다. 이름은 어떤 인물을 이야기해요. 그런데 그분은 하나님의 이름이니까 하나님께서 언약궤를 앞장세워서 자신의 흔적을 남김으로써 이스라엘을 자기의 소속으로 새롭게 만드는 그런 계기가 됩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왕으로 등극하고, 여기 백성들은 왕국의 백성이 됩니다. 여호와가 왕이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가 여기에서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왕이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왕이 될 때 여기에 기름부음이 있어요. 하나님의 기름부은 자가 왕이 되는 겁니다. 왕이 된다는 말은 하나의 왕국을 이룬다는 말인데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시편 2편에 그 내막이 나옵니다.

 

제가 강의 처음부터 지금까지 ‘인간은 무엇을 할 것인가?’ 라는 것은 완전히 뺐습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어떻게 행동하면 됩니까?’ 이런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게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지요. 중요한 것은 ‘왕이 어떻게 행동해서 우리가 혜택을 입는가?’ 여기에 초점을 맞춰야 하고,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상한 심령이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시편 2편에 보면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도다.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

 

이게 뭐냐 하면, 잔챙이들은 가라는 말이죠. 우두머리끼리 놀자는 거지요. 인간은 하나의 왕국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악마가 인간의 왕이에요. 그런데 악마가 왕이라는 사실은 하나님이 왕 되는 나라가 오기 전까지는 몰랐어요. 그냥 ‘너는 네 나라 세워라. 나는 내 나라 세울 게.’ 보통 우리가 알고 있는 각 부족 국가의 공조는 그런 식이잖아요.

 

산 넘어 어떤 부족 사회가 있으면 그들은 그들끼리 살고, 이쪽은 이쪽대로 사는 거예요. 괜히 욕심을 내서 정복에 나서면 서로가 피를 흘려야 하고 상처를 입잖아요. 서로를 존중하고 인정해 주면 평화가 유지되고 그러면 그만이에요. 그런데 그것이 안 되는 나라가 있어요. 그게 바로 이스라엘 나라입니다.

 

이스라엘이 나라가 되면 주변 나라는 이스라엘에 대해서 시비 걸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의지가 불일 듯 일어나도록 하나님이 조성하십니다. 그게 시편 2편 말씀입니다. 참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을 지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서로 원수처럼 대립하고 있었는데, 예수님이 등장하면 이들이 졸지에 친구처럼 하나가 되지요. 또 법정에서 빌라도가 강도 바나바와 예수님을 세워두고 “둘 중 누구를 풀어줄까?” 라고 물었을 때, 빌라도는 자기 아내가 꿈 꾼 것이 있어서 예수님을 풀어주고 싶었고, 사람들에게 물으면 당연히 강도를 죽이고 예수님을 풀어주라고 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민족들은 오히려 강도를 풀어주라고 해요.

 

이 말은, 예수는 저 극악무도한 강도보다 더 가치 없는 존재라는 거지요. 이것을 또 신학자들은 교묘하게 해석을 합니다. 그 강도는 안중근 의사 같은 사람이라는 거예요. 열심당파에 속한 강도인데 그 강도를 풀어주면 로마에 대항해서 민족을 해방시킬 자로 여겨 그를 풀어주고자 했다는 겁니다. 전혀 아닙니다.

 

바라바는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악마의 집약된 주체입니다. 헤롯도 노렸지요. 어릴 때 못 죽였던 그 예수를 이제 죽이려는 겁니다. 그 기회를 놓칠 리가 있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교묘하지요. 예수님 동생들이 “형님, 요즘은 PR시대인데 PR 안하면 메시야인줄 모릅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일 때 메시야 됨을 한 번 보여주세요.” 라고 할 때 주님 대답은 “나는 때가 되어야 나선다.” 라고 했지요.

 

동생들은 예수님이 전혀 나서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 후 예수님은 오순절에 성전에 가셔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요7:37-38).”고 해서 소동이 일어나고 했지요.

 

주께서 뭐라고 하시는가 하면, 선지자의 말씀이 응하게 하기 위해서 “때가 되매 너희들이 나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죽는다.”고 하셨지요. 그러나 그 모양새는 사람들의 손에 죽임 당하는 모양새를 해야 이 세상은 인간들의 세상이 아니고 인간 배후에 악마가 왕으로 자리 잡고 있음이 폭로되지요.

 

하늘나라가 온다는 것은 저쪽에 이미 나라가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하늘나라를 말씀합니다. 하늘나라가 오게 되면, ‘내가 세상 나라의 주인(악마)을 묶고 그곳에 있는 세간 같은 너희를 불러내겠다.’ 이렇게 됩니다. 에베소서 2장에 보면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2-3절)”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런 우리를 주께서 성령을 보내셔서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런 말씀은 구약이라는 활주로를 깔고 비행기가 날아야 알 수 있는 말씀입니다. 언약궤의 움직임이 인격화 되었단 말이지요. 그렇다면 하늘나라는 우리가 생각하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고 움직이는 한 인물 안에 집약되어 있어요. 그 인물이 우리를 푹푹 쑤셔요. 마치 쌀 검사할 때 쌀가마니를 뾰족한 것으로 쑤셔보지요. 좋은 쌀인지 나쁜 살인지 판정하기 위해서. 이처럼 주님이 우리를 쑤셔서 ‘그 봐, 아직도 어둠의 왕이 자리 잡고 있네.’ 하고 쑤시는 거예요.

 

물 위를 걸었고, 장모가 병에서 나았고, “주는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런 멋진 고백을 했던 그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사단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베드로가 사단이면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운다고 하셨는데, 그러면 그 교회는 무슨 교회가 됩니까? 사단의 교회? 666인가? 그래서 지금 세상의 모든 과학, 철학, 종교 전부가 오직 하나만 노립니다. 은혜의 출처, 구원의 능력이 나오는 그 출구를 어떻게든 틀어막아서 “출구 없다.” 인간의 나라는 인간의 손으로 해결해야지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용서가 되는 그런 것은 없다는 거예요.

 

이것의 대표적은 구호가 뭔가 하면, ‘하나님 나라의 확장.’ 요즘 어디 개발지역이 많은 모양입니다. 신도시 개발하듯이. 이게 뭐냐 하면, 마귀의 가장 극단적인 표어입니다. 공간적으로 하나님 나라가 점점 퍼진다는 거예요. 민방위 훈련에 가스 살포했습니까?

 

하나님 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가 아니라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래서 ‘너희 안에 있다.’고 했지요. 왕에게서 나오는 통치. 그 통치를 받은 사람은 ‘오직 예수님의 공로로 제가 구원 받았습니다.’ 라는 고백을 하는 그 관계, 그 처소.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중세 시절에는 하늘나라 보겠다고 망원경 들고 찾기도 했어요. 지금도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망원경을 보다가 이상하게 생긴 구름을 보니까 사진을 찍어서 ‘내가 간절히 기도했더니만 구름을 통해서 예수님의 인자하신 모습이 나왔다.’고 그 사진을 자랑하고. 또 어떤 사람은 눈길을 걷다가 풍경을 사진으로 찍었는데 그 눈의 형상에 웃고 있는 예수님이 보였다. 그래서 그 사진을 액자로 해서 걸어놓고 “예수님은 이 집의 주인이요 --” 이런 문구 적어놓고.

 

여러분들이 집에 가서 벽지를 뚫어져라 30분만 쳐다보세요. 그러면 그곳에서 예수님도 보이고, 12제자도 보이고 온갖 것이 다 보입니다. 이게 게슈탈트의 심리학입니다.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이고 나머지는 다 배경으로 빠져버려요.

 

어떤 사람은 ‘환자를 통해서 본 창세기의 비밀’ 별 희한한 것이 다 있어요. ‘창조과학회를 통한 증명’ 이게 뭡니까? 그렇다면 새로운 증거가 나오면 성경이 수정되어야 합니까? 그러면 얼마나 불안하겠어요. 새로운 증거가 나올까봐. 이 모든 것이 뭐냐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를 원하는 이 십자가의 복음을 유사복음으로 대치하려는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성령의 장난입니다.

 

다 끝났어요. 모든 상황이 종료되었다니까요. 우리는 그분의 혜택을 입고 살고. “사나 죽으나 우리는 주의 것이로다(롬14:8).” 더 이상 다른 말이 필요치 않아요. “아내 있는 자는 없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고전7:29-30).” 왜?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 다 헛것이라는 거지요.

 

세상은 이미 종말에 접어들었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모호하게 보이던 하나님의 이름도 구체적인 나사렛 예수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고, 숨어있던 마귀도 공격적으로 등장해서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틀어막는데 모든 역량을 동원하지요. 소위 공의회, 어떤 신학, 교회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총동원해서 십자가 복음의 광채를 가리는 일을 시도합니다.

 

교회 안 나오면 지옥 간다고 협박을 하고,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막아야 한다고 위협하고. 별 희한한 소리를 다해요. 어떤 사람은 ‘내가 보혜사다.’ 하고.

 

사람의 지혜로 알 수 없고, 사람들에게는 어리석게 들리는 십자가. “누가 믿으리요?” 아무도 알지 못하고 오직 성령만이 알 수 있는 십자가의 피가 우리의 죄를 씻어주므로, 일찍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의 그 솜씨와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깨끗한 흰 옷을 입고 주님 나라에 들어갑니다. 다른 방법은 일체 없습니다.

 

히브리서 13장 30절에서는 이것을 뭐라고 하는가 하면, ‘언약의 피’라고 해요. 그러니까 신보라 말이 맞는 거예요. “십자가 예수님의 피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언약의 피입니다. ‘모세의 법을 어긴 사람도 죽었는데 언약의 피를 모독하면서 어떻게 살기를 원하느냐?(히10:28-29).’ 하나님의 저주가 임하지요. 산천이 떨어요.

 

이스라엘로 하여금 주변 나라에 흩어지게 만들어요. 흩어져서 이스라엘이 망한 것이 아니고, 피자 판을 돌리면 그 판의 면적이 점점 넓어지지요. 넓어지면서 언약도 넓어지는 거예요. 넓어지면서 전 세계를 어두움으로 만들고 그 중앙에 십자가를 꽂아버립니다. 이게 마지막 종말 때의 작전이에요.

 

피가 있는 곳을 중심에 세우고, 피자 판처럼 도는 모든 곳, 구약은 이스라엘만 상대했지만 신약에는 모든 민족이 다 설치게 만들어요. 그렇게 해놓고 다음에 뭐라고 하는가 하면, 피를 흘리게 된 요인을, 이 피가 퍼져있는 모든 종들을 보내서 피의 현장을 보게 합니다. 그러면 이 종들이 죽는 현장이 애굽이고, 소돔이며, 그것이 바로 십자가가 있는 현장이고 요한계시록 11장에서는 ‘두 증인’이라고 해서 순교자로 나타납니다.

 

피자 판이 커지는 것처럼, 이제는 이스라엘이 멀리 퍼지는 거예요. 그래서 성지는 어디입니까? (사람들이 성지 순례를 가는데). 내가 사는 옆 동네가 성지입니다. 예수님 계신 곳이 하늘나라인 것처럼, 성령 받은 성도가 가는 그곳이 ‘하늘나라냐, 세상 나라냐?’를 구분 짓는 일군으로 파견된 겁니다.

 

사도 바울이 그것을 보여주었지요. 바울은 사람을 설득하기 위해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고 “내 말을 누가 믿겠나? 오직 영생 받기로 작정된 자 외에는 아무도 내 말을 믿을 수 없다.”고 했지요. 사람 꼬시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하늘나라 확장이 아닙니다. 이건 교회나 선교단체에서 외치는 표어고.

 

그냥 피만 전하면 되는데, 피를 전했으니까 취직 시켜 달라, 청춘을 보상하라. 온갖 요구를 다합니다. 주님이 몸이 열 개라도 바쁘겠어요. 주님은 피를 흘리시고 다 이루었다고 하시는데 사람들은 뭔가를 자꾸 요구하니까, 주님도 ‘내가 아직 다 이룬 게 아닌가? 아이들 취직도 시켜줘야 하고, 할 일이 많이 남았네.’ 이렇게 됩니까?

 

왜 자꾸 예수님을 등쳐먹으려 해요. 피 흘린 것은 생명을 주신 것인데. 우리를 위해 죽은 주님 앞에 무슨 요구를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십자가 앞에 놓고 갑상선 암 걸렸다고 낫게 해달라고 기도를 안 하나, 취직 시켜달라고 기도를 안 하나. 주님은 죽었어요. 그 주님은 ‘너도 나처럼 죽어라.’고 하시는데, 그 주님께 무슨 요구를 그렇게 많이 합니까.

 

성령은 다른 게 아니고 우리의 힘을 막습니다. “네가 지금 뭘 달라고 하는데, 주님은 너 때문에 죽었어. 영생 받았으면 고맙다고, 심봤다! 하고 그냥 돌아가. 그리고 네 자리에서 이 소식을 증거해.”

 

증거한다고 또 쪽지 만들고 이러지 마시고 그냥 사시면 돼요. 여러분 잘 사시잖아요. 이기적 유전자. 뭘 해도 우리 가족밖에 모르고, 내 몸밖에 모르고, 남이야 죽든 말든 나만 살면 되는 식으로 잘 사시잖아요. 그게 바로 어두움을 통한 빛의 증거입니다. 평소에 하던 대로 하세요. 그러면 성령이 와서 그때그때 방향을 잡아줍니다.

 

“네가 방금 전도했는데, 그 전도에 대한 보상을 기대하고 있지?” “어떻게 하셨습니까?” “나는 인간 때문에 죽었어.” 그러니까 우리가 평소에 하던 대로 하시면 그때그때 평소 우리의 육적인 본성이 노출되도록 그렇게 기쁨을 주십니다. 아까 그런 말씀 드렸잖아요. 어떤 사람이 날 괴롭힐 때, 어깨 두드리면서 “당신 때문에 내가 마음이 많이 낮아졌어. 당신 안 만났으면 천지를 모르고 까불 텐데 당신을 만나서 내가 죽도시장의 쓰레기통에 있는 상한 오징어란 사실을 알게 되었어. 알려줘서 고마워.” 이렇게 안 믿는 사람들을 상대해 주세요. “당신 나한테 잔소리 한다고 고생 많다. 하지만 그것이 당신 역할이니까 열심히 해라.” 이렇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단아 물러가라!”한다고 물러가겠어요?

 

확대하는 겁니다. 그 다음부터는 뭐냐? 이스라엘의 왕이 되면 그 때부터 전쟁에 나서는 하나님인데, 그 전쟁 스토리가 열왕기상, 하, 역대기상, 하입니다. 열왕기와 역대기는 차이가 있어요. 같은 내용이지만 열왕기는 선지자 중심입니다.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서 다윗이 있다면 여기에 하나님이 선지자를 보내요. 그래서 ‘왜 너희는 다윗처럼 되지 못하느냐? 다윗의 등불을 바라보라.’

 

다윗이 열왕기에서는 일종의 등대입니다. 반짝반짝 빛을 발하는 등대. ‘다윗의 등불을 봐라. 네가 지금 죽어야 마땅하지만 다윗을 봐서 너를 살려준 거야.’ 솔로몬이 말년에는 이방신 섬기는 일에 굉장히 몰두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솔로몬을 처참하게 안 죽이는 이유는 다윗을 봐서 안 죽였어요.

 

그래서 신약에 보면 문둥병자나 소경들이 예수님을 뭐라고 합니까? “다윗의 자손이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등대는 아주 높이 있어서 불빛이 반짝반짝 빛나요. 다윗의 등대로 역사는 끝나버렸어요. 이제 오실 분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지요.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데, 다윗이 자기 자손보고 뭐라고 하는가 하면 “나의 주여”라고 했단 말이지요.

 

이렇게 되니 인간의 역사를 위반하지요. 자식이 아버지께 ‘아버지!’라고 해야 되는데, 아버지가 자식에게 “아버지!”라고 부른다면 둘 중 누가 진짜 아버지인지 난처하게 되지요. 예수님이 바리새인에게 그 질문을 한 거예요. 다윗이 예수님을 주라고 했다면, 지금까지의 역사는 다윗에서 하향곡선, 혼돈과 무질서로 내리닫는 그러한 다윗의 등불만 남기고 나머지는 다 함몰되고 꺼져버리는 그런 역사에 해당된다고 본 겁니다.

 

왜냐하면, 다윗의 주니까 다윗 위에 주님이 계시고, 그 주님이 바로 예수님이거든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오신 그 기간은 일종의 종말이죠. 다윗의 틀로써 완성이니까. 완성된 틀 속에 오셨기 때문에 이후부터는 이 틀 속에서 모든 것이 끊어지고 주저앉는데 같이 주저앉는 그 내막에 참여된 사람들을 선지자라고 합니다.

 

선지자들은, 왜 이스라엘이 멸망할 수밖에 없고 주저앉을 수밖에 없는가를 온 몸으로 보여주는 그런 특수한 임무를 띠고 온 겁니다. 그래서 스가랴 같은 선지자는 바른 소리 했다가 요아스 왕에게 살해당했습니다(대하24:20 이하). 그 말은 뭐냐 하면, 열왕기에서는 선지자가 하나님과 통하는 분인가 아니면 왕이 하나님과 통하는 분인가를 놓고, 왕은 다윗의 혈통을 따라 온 것이기에 가짜고, 다윗의 정신을 가지고 예수님의 마지막 십자가와 연결되는 것은 선지자 노선이라는 것이 열왕기의 주제입니다.

 

그러나 역대기는 달라요. 역대기는 다윗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고, 70년 포로생활 이후에 창세기부터 새롭게 출발해요. 이것은 성전을 중심으로 합니다. 성전이 있어야 하나님과 우리가 유일하게 통할 수 있다고 해서 성전 중심으로 나갑니다. 왜 그렇게 하는가 하면, 역대기의 마지막은 70년 포로생활 이후 해야 할 일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게 뭐냐? 성전을 재건하는 것입니다.

 

성전 재건 이야기가 나오니까 제가 그냥 넘어갈 수 없어요. 부흥사들이 설교했다 하면 항상 나오는 것이 학개 말씀입니다. “당신들 집은 좋게 짓고, 예배당은 이렇게 초라하게 해놓고 어떻게 당신들이 복을 받겠어요? 천국 가는 것은 믿음으로 가지만, 하늘나라 상급을 받기 위해서는 성전 재건하는데 투자해야 됩니다.”

 

이런 말해도 사람들이 안 움직이면 히든카드를 꺼냅니다. “여러분, 이 성전은 여러분이 죽더라도 여러분 자식들을 위해서 제대로 지어놓아야 합니다.” 자식이야기 나오면 부모들이 깜빡 넘어갑니다. “자식들을 위해서 예배당을 잘 짓고, 그곳에서 말씀을 잘 가르치면 그 자녀들은 복을 받고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리는 자로 자라갈 것입니다.” 이렇게 사기를 쳐요.

 

예수님의 피를 이런 식으로 가로막아요. 부자도 가난한 자도 다 타고난 팔자입니다. 팔자는 변경이 안 됩니다. 거지 나사로가 재벌 되어 천당 간 것이 아닙니다. 죽을 때까지 개한테 핥이고 상한 심령으로 갔어요. 있어도 없는 것처럼 할 수 있는 정도로 마음을 낮추려면 십자가 피 앞에 우리가 할 말을 잊은 죄인의 모습을 늘 유지해야 언제 죽을지라도 우리는 상한 심령으로, ‘나 같은 인간 구원 받는 것은 예수님 피 때문입니다.’ 라고 끝까지 십자가 증거하면서 돌아가시면 그게 증인의 삶입니다.

 

아무튼 역대기는 성전 중심입니다. 그런데 이걸 아셔야 해요. 학개에서 성전 이야기하는 것은 무너지라고 있는 성전이에요. 왜냐하면 스가랴에 보면, ‘현재 너희들이 성전을 지었지만 장차 있을 성전은 사람의 힘으로 세우는 건물이 아니고 오직 성신으로만 짓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너희들로 하여금 성전 짓도록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이 지은 성전은 일종의 세트장이기 때문에 때가되면 철거되어야 합니다. 그냥 철거되는 것이 아니라 뭔가를 보여주면서 철거됩니다. 헤롯 성전은 무엇을 보여주면서 철거됩니까? 요한복음 2장에 보면,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난 그 몸이 성전이거든요. 예수님의 몸과 현재 거창하게 잘 지은 부동산 성전 중 어느쪽이 하나님과 통하는 유일한 통로인가를 확인케 하면서 사라져야 될 부동산이 바로 인간이 지은 성전입니다.

 

자식 구원은 부모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영의 부모이신 하나님께 달렸습니다. 평소에 우리가 영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이 안 보이니까 자식들이 고개를 갸우뚱하지요. 예수님 피를 믿는다고 하면서 돈만 좋아하고 “너 그렇게 공부해서 돈 못 번다. 공부 안하면 굶어죽는다.” 이런 소리나 하면서 만날 잔소리만 하지요.

 

‘돈 못 벌면 굶어 죽습니다.’ 맞는 이야기에요. 굶어 죽는데, 굶어 죽더라도 예수 피를 믿고 굶어 죽도록 하세요. 이런 말이 자식 교육에 도움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공부 못하면 굶어 죽는 것은 맞는 소리인데, 돈 벌어 돼지가 되든지, 돈 못 벌어 가난뱅이가 되든지 구원은 몸무게로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피로 됩니다.

 

그만큼 부모가 세상에 대해서 좀 초월하고 자유로운 면을 자식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 헌금 내는 것보다 이게 더 중요합니다.

 

선지자 이야기 다시 해봅시다. 선지자는 대신 죽으심과 희생의 면면을 보이면서 역사 속에서 하나 둘씩 등장합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선지자들 본인은 절대 선지자노릇을 원해서 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선지자의 모든 말들이 다 계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선지자가 하는 일은 남들이 알고 있는 정치적인 문제점이나 지적하고 이런 일은 선지자의 일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진중권씨나 이런 사람이 하는 거예요. 선지자는 인간의 지혜로는 알 수 없는 것들만 이야기해요. ‘나라 돌아가는 꼴을 보니까 곧 망하겠다.’ 이런 소리는 선지자가 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가들이 하는 거예요.

 

사람의 지혜로는 알 수 없고 선지자 본인도 모릅니다. 말 보다 예를 들게요. 어떤 이름 모를 선지자가 있었는데, 여로보암 왕이 제단에서 일하고 있으니까 선지자가 나타나서 하는 말이 “하나님의 뜻이 임했다. 제단이 갈라지면서 너희 아들이 여기서 죽을 것이다.” 라고 했고, “내 말이 맞는지 안 맞는지는 제단이 갈라지고 재가 쏟아지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말을 던지자 말자 제단이 갈라지고 재가 쏟아졌거든요(왕상13:1-3).

 

선지자가 그런 말을 했는데 제단이 안 갈라졌으면 그 선지자는 우스운 꼴이 되었겠지요. 그러니까 여로보암이 자존심이 있어서 “저놈 잡아라!” 하고 손을 뻗었는데 손이 굳어버렸어요. 다시 접을 수가 없어요. 이런 대목을 보면서, 예수 믿는 나에게 불신자가 주먹질을 할 때 그 사람의 손이 안 접혔으면 내가 선지자란 것을 남에게 대외적으로 공포하는 것이 안 되겠는가 이런 생각도 해보는데.

 

그래서 안 되니까 선지자에게 부탁해서 “하나님께 기도해서 내 손을 낫게 해달라.”고 해서 기도하니까 나았어요. 그리고는 여로보암이 당신은 진짜 선지자 맞군요. 하도 가짜가 많으니까. 그래서 “예물을 드리겠습니다.” 라고 하니까, “받을 수 없습니다.”라고 했어요. 왜요? “하나님이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고 왔던 길로 도로 가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고는 떠났어요.

 

그런데 길을 가는데 어떤 늙은 선지자가 찾아와서 하는 말이 “소문 들었습니다. 카리스마가 대단하십니다. 제가 대접하고 싶은데 저희 집으로 가시지요.” 하니까, 그 선지자는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거론하면서 거절했지요. 그 때 늙은 선지자는 말합니다. “나도 당신과 같은 선지자인데 여호와께서 당신을 내 집으로 데리고 와서 떡을 먹이고 대접하라고 했습니다.” 라고 거짓말을 했지요.

 

그 말에 속아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고 늙은 선지자의 집에 따라가 떡을 먹고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 때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에게 임했습니다.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어기며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한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고 돌아와서 여호와가 너더러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라 한 곳에서 떡을 먹고 물을 마쳤으니 네 시체가 네 열조의 묘실에 들어가지 못하리라(왕상13:22)”고.

 

그리고는 그 집을 나서 길을 가는데 길에서 사자가 나와서 그 선지자를 물어 죽였어요. 그런데 사자가 선지자를 죽이고는 그 시체를 먹지 않았어요. 이 소문을 늙은 선지자가 듣고는 그 시체를 가져다 장례를 치렀습니다.

 

이 이야기의 핵심이 뭡니까? 이스라엘은 개판이라는 겁니다. 파견된 선지자조차도 하나님의 말씀을 위반할 정도로 환경의 압박이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버틸 수 없을 정도로 악해서 이 나라는 이미 물 건너갔다는 겁니다. 이것이 오늘날 이 세상의 모습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선지자, 어떤 목사도, ‘나는 복음만 전하고 바르게 살았다.’고 할 사람은 없어요. 그러기에 선지자 보지 말고, 목사 보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봐야 됩니다. ‘어떤 목사 훌륭하다. 설교 잘한다.’ 그 소리에 말려들면 그 사람에게 돈 털립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믿을 것은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믿어야지 목사를 믿으면 안 돼요. 그 이유가 뭔가 하면, 어떤 선지자, 어떤 목사가 이야기할 때 여전히 그 사람 속에는 그 사람을 지배하는 죄가 있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 복음을 이야기한다는 이유로 자기는 죄와 무관하고 죄 안 짓는 사람으로 자기를 새롭게 포장할 가능성이 많단 말이지요. ‘내가 이렇게 복음 전하고, 선교하고 바른 설교 했으니까 마귀가 나에게는 접근 안 할 거다.’ 그런 되지도 않는 망발을 하면 안 됩니다.

 

지방교회에서는 건전한 사람끼리 모이기 때문에 온전한 교회가 된다고 하면서 하는 말이, “이번에는 형제님이 계시 받은 것을 말씀해 주세요.” 하면, “예, 제가 받은 계시는 이것입니다. 애가 성적이 떨어졌는데 기도했더니 성적이 올랐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번에는 자매님이 받은 계시를 말씀해 주세요.” “남편이 그렇게 핍박을 하더니만 이제 예수 믿겠다고 합니다.” “할렐루야!” 이런 짓을 음악 틀어놓고 분위기 잡아가면서 해요.

 

하여튼 취미도 오락도 별 희한한 것이 다 있어요. 마지막 때에 인간이 온갖 아이디어를 동원해서 종교를 만들어내고 발광을 하는지 주께서 이미 아시고 찾아오셔서 “쓸데없는 짓 하지 마라. 내가 너를 대신해서 죽었다. 너는 이미 내 피로 구원 받았어.” 이런 식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만 우리에게 증거되게 하십니다.

 

온갖 실험, 실습 다 해봤어요. 해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고, 온갖 짓을 해봐도 그 모두는 자기를 알아달라는 것입니다.

 

저녁 먹고 계속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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