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제2강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첫 번째 시간을 요약하면, 인간 자체가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죽음이 작동하는데 이 죽음이 어느 정도 세력을 펼치는지 몰라요. 그런데 살아가면서 인류를 거치면서 죽음은 조절 대상이 안 됩니다.죄는 우리의 관리대상이 아닙니다. 무엇을 하든지 간에그렇게 발산해줘야 그 자체가 말씀대로 되가는 거예요. 말씀대로 되가는 것을 우리가 억지를 부린다고 해서 말씀 안 되게 하는 것은 반역자가 되는 거잖아요. 성경에 하나님이 응하게 하심이라는 멘트가 계속 나온다는 것은, 우리가 말씀의 세력, 죄의 세력에서 우리 힘으로 벗어날 수 없다는 겁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하면 그래도 천국 가는 사람은 있기는 있잖아요. 왜 자꾸 천국 가는 사람을 놓칩니까? 이렇게 불만을 터트리는데 그것이 창세기 2페이지에 보면 나와요. 대신이에요. 대신 죽으심이에요. 인간 안에 죽음이 있다 했지요. 인간 안에 죽음이 있는 것에 대해서 메시아께서 자기도 죽음으로 우리한테 나타나는 거예요. 자기가 살아있으면서 오병이어 행하시고 물 위를 걸으시고 그것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등장하는 이유가 이미 주님의 죽으심으로 볼 때 사실은 인간은 이미 죽은 자들이기 때문에 그래요. 죽은 자들은 죽음 안에서 둘이 이야기할 수 있단 말이에요. 구원받을 자와 메시아는 죽음 안에서만 이야기돼요. 저는 살아서 찬양했습니다. 살아서 헌금했습니다. 그런 소리 하지 마라. 죽은 놈이 찬양했겠지. 죽은 놈이 헌금했겠지. ‘대신’ 뒤에 뭐가 나왔지요? 이야기해보세요. ‘대신 죽으심’이 나오잖아요. 그래서 대속, 대신 할 때는 반드시 ‘죽으심’을 포함시켜서 이 안에 우리를 집어넣어버리면 우리는 주님의 대신 죽으심에 참여되는 거예요. 죽으심에 참여되면 죽기 전에는 우리의 개성, 우리의 고집, 우리의 사상, 우리의 신학, 우리의 믿음, 소망, 사랑 다 갖고 있어요.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죽으심 속에 들어가면 그런 것은 나를 죽게 만든 요인이 돼요. 너 대신 내가 죽을 수밖에 없는 이유들을 늘 달고 들어가는 게 돼요. 신학 한다는 것, 내가 믿었다는 것, 내가 소망했다는 것, 내가 주님을 사랑했다는 그 모든 것까지 대신 죽으심 안에 들어가 버리면 그것이 주님께서 대신 죽어야만 해야 될 이유들로, 요건들로 재료로써 들어간다 이 말입니다. 라면 끓일 때 계란을 저었는데 그런데 딸이 하는 말이, ‘엄마, 계란은?’ 엄마가, ‘다 부셨잖아.’ 계란 없는 거예요. 계란이 라면 안에서 헤어졌다. 부셔졌다. 다 없는 거예요. 그런데 왜 찾습니까? 자기 기도, 헌금, 예배참석, 전도한 것 왜 찾아요? 대신 죽으심이 뭐가 돼버려요? 대신 죽으심 바깥에서 놀았지. 십자가 근처에 풀장이 있는데 풀장에서 십자가 구경하는 거예요. 십자가에 못 들어오고. 애들아 저게 십자가란다. 이것 보고 안압지 보러 가자. 그 다음에 경주박물관 보러 가자. 우선 십자가 봐라. 그 다음에 부활 볼까? 이건 부활이고. 각자 너 자신의 모습으로 고정된 너의 자리로 돌아가. 이게 뭐예요? 취미지. 취미잖아요. 그건 종교 활동이죠. 보트 뒤에 있는 스크루에 휘말려 들어가면 갈기갈기 찢어져서 나라는 것을 남기지 않지요. 휘저어버리니까. 그래서 모든 성경의 한 복판에 대신 죽으심, 스크루가 돼요. 전부다 완전히 믹서기처럼 갈아버려요. 넣고 돌리고, 넣고 돌리고. 대신 죽으심이 죽은 아벨을 대신해서 나온 거예요. 그러니까 그 뒤에 나온 사람들은 전부다 앞의 아벨에 복속 또는 예속이라고 해요. 아무리 뒤에 씨앗이 많이 나와도 그 사람은 죽은 아벨 대신 나온 셋이고 그래요. 그것이 창세기 4장 중간에 나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가인으로 하여금 아벨을 죽게 만들어서 죽은 아벨 대신 다른 신이라는 이런 새로운 양상의 의미를 창조하신 거예요. 누가? 케이블카 끝에 있는 십자가 진 예수님께서 자기 먼저 아벨을 보내서 아벨을 죽게 만들어서 아벨의 죽음을 대신 죽음의 차원으로 그걸 당기면서 케이블카에 전류를 보내는 겁니다. 그 케이블카에 탄 모든 사람은 전부다 대신 죽으심을 맛보면서 주님한테 끌려오도록 강력하게 전류를 보낸 거예요. 강의 끝나버렸네. 말씀의 자리가 보기에 심히 좋았다. 그리고 보기에 심히 좋았다의 그림자가 지옥이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가 지옥에 속할지, 천국에 속할지 알 수 없었는데 하나님의 말씀에 응해서 아벨을 죽게 함으로 말미암아 장차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일부를 담당할 자에게만 너는 구원받았다고 예수님이라는 모자이크에 편입되도록 그렇게 조치한 거예요. 사실은 모자이크라면 약간 어폐가 있어요. 모자이크라 하면 전체 그림에 일부인데 사실 그건 잘못된 거고요. 아벨 속에 예수님의 전부다 들어있기 때문에 모자이크라 할 수 없고. 그냥 예수님의 하나의 부분이라 하면 그게 적당한데 너무 어렵기 때문에 쉽게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이 있다면, 이 그리스도의 상은 4세기에 나온 그림이에요. 예수님이 누구신지 모릅니다. 하여튼 이렇게 보게 되면 이 모든 예수님의 그림의 일부를 아벨이 담당하게 되는데 그럼 다른 부분은 없느냐? 그게 아니고 아벨 속에 전체 내용이 다 포함돼있다 이 말이죠. 노아 같으면 방주 안에 그리스도가 다 포함돼있고. 그렇다면 오늘날 신약에 우리가 성령을 받게 되면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모든 것이 다 들어옵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하면 어렵게 이야기하지 말고 쉽게 ‘우리가 바로 예수다.’ 하면 될 건데 왜 빙빙 돌리느냐 이러거든요. 우리가 예수가 아니고, 대신 죽으심을 보여주기 위한 죄인이죠. 하나님의 언약 안에 우리가 언약 맨으로서 언약 안에 들어가요. 그러면 두 명 들어갑니까, 세 명 들어갑니까, 열 명 들어갑니까? 한 명 밖에 없어요. 그걸 그리스도 몸이라 하는 겁니다. 신약에서 수천 명 되더라도 한 몸이라고 보는 이유는, 구약에서 이스라엘을 단체 개념으로 봐요. 내 아들이라고. 이스라엘이 수십만 되어도 그건 하나에요. 아간 잘못했을 때 전체가 기합 받아요. 항상 하나가 된다고. 다수를 하나로 취급하는 이유가 언약이란 한 전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말은 사람을 행동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네 안에 전류가 통했느냐? 네가 전류가 통과하고 있느냐고 본다 이 말이죠. 찌릿찌릿. 나는 여자로서 통했습니다. 여자는 빼란 말이죠. 나는 재벌로 통했습니다. 재벌은 빼고. 나는 거지 나사로로 통했습니다. 거지 빼고 네 속에 아브라함 언약이 들었느냐? 들었으면 나사로는 아브라함 언약에 의해서 아브라함 품에 안기는 겁니다. 개인적인 행동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개인적인 행동은 할 필요 없어요. 어떤 행동을 해도 대신 죽으심에만 혜택이 된다면 구원받습니다. 기쁜 소식하는데 한 시간만 하면 금방 나오네.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으면 언약이 인생을 조지게 만들었어요. 어떤 사람은 잘됐다 하는데 잘된 게 아니죠. 인생 공짜 아닙니다. 그만큼 고생을 해야 돼요. 연세 많으신 분 보면 존경스럽습니다. 희망도 없는 인생 그것 끌고 온다고 얼마나 그동안 아부와 거짓말과 죄악으로 떡칠을 하면서 그동안 버텨왔습니까. 젊은 사람들은 몰라. 마법의 성만 생각하고 공주님이 와서 왕자님이 날아다니고 찾을 줄 알지. 그 공주와 왕자가 얼마나 사기꾼인지. 아벨이 대신 죽음이란 아까 케이블카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뭘 증거할 수 있느냐 하면, 하나님은 실존을 통해서만 계시한다. 바람으로도, 태풍으로도 하나님 뜻은 다 아니에요. 하늘에 움직이는 달과 별로도 하나님을 모릅니다. 하나님은 실존,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죽어야만 되는 그 피를 통해서 죄 없고 흠 없다고 여겨지는 그 피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계시, 하나님의 언약을 우리에게 전한 거예요. 그래서 마귀는 필요합니다. 마귀는 성도를 죽여줘야 돼요. 스데반 집사한테 돌 날아올 때 빼지 않았습니다. 날아온 돌 다 맞아야 돼요. 다 맞으면 하나님께서 스데반 집사의 영을 받으면서 스데반 집사가 예수 안에서 돌 맞은 것이 표가 나게 돼있습니다. 스데반 집사 같은 경우에 성령에 충만했다고 했거든요. 성령에 충만한 것은 스데반 집사가 어떤 행동을 했다는 게 아니라 주님께서 그 행동을 유발시켰다. ‘빨리 와. 이번 촬영을 돌 던지는 신이야. #46들어갑니다. 돌 던지고, 스데반 얻어맞아.’ 주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여러분을 때릴 돌 던질 사람을 돈 주고는 수집하지 마세요. 그거는 순교를 위장한 순교에요. 가짜입니다. 어떤 사람의 순교는 목욕탕에서 ‘어 시원하다’ 이러다 죽는 사람도 있어요. 목욕탕에서 문신 한 사람과 싸우다 자기 발에 미끄러져서 죽은 사람이 있어요. 그런 사람도 순교라니까. 성도 안에서는 누구나 순교에요. 순교 안 하고 성도는 되는 법 없고 성도는 다 순교하는데 순교로 죽는 폼이 상당히 오지랖 넓은 모습일 수 있고, 민망스러울 때도 있고, 어떤 사람은 하이킥하다 죽는 사람도 있고. 그거는 몰라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순신 장군이 적의 유탄에 맞아 죽었다 하는데 이순신 장군은 왜놈이 쏜 총에 안 맞아 죽어도 거북선이 코너 돌다가 못에 박혀서 죽을 수도 있어요. 꼭 유탄을 자꾸 부각하지 마세요. 죽을 때가 되매 죽은 겁니다. 전도서에 나온 이야기에요. 사람은 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어요. 말씀을 좀 믿읍시다. 미치겠다, 정말. 연초에 토정비결 믿지 말고 말씀을 믿으세요. 특별히 제가 토정비결 대신 권해드리는 말씀은 한나의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고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도 병들게도 하시고 낫게도 하시고. 올해부터 추이를 봅시다. 일월 달에 죽이는지 살리는지 안 그러면 이월 달에 아픈지 어떤지 보자 이 말이죠. 주께서 어떤 조치를 하시는지. 확실한 토정비결이 나와 있는데 다방에 앉아서 동전 백 원 넣고 땅콩 까먹으면서 끄집어내고, 여성지 뒤에 나와 있는 것 보고. 다시 한 번 정리하면,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일으키고 대신 죽으심이 고정이고, 대신 죽으심의 의가 얼마나 파생된 각가지의 변화 속에서 변화 중에도 고정을 끄집어내니까 이 변화가 얼마나 변화무쌍하겠어요. 남의 신앙을 제발 흉내 좀 내지 마세요. 꼭 남 따라 하지 말고 본인의 개성이 있잖아요. 본인의 개성 따라, 환경 따라 주님이 주신 신앙이 다 다릅니다. 그걸 일률적으로 강요하면 안 돼요. 특히 부모들이 자식들 신앙 강요하는데 자칫하면 강요가 아니고 반복학습이 될 가능성이 있어요. 반복학습은 다단계에서나 쓰지 복음에서는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대신 죽으심을 보이는 쪽으로 그러니까 복음을 위해서 우리는 이 세상에 어떤 변화든 다 겪으면서 내가 이렇게 겪는 것은 나 때문이 아니고 내 안에 있는 아벨과 연결돼있는 십자가의 용서하심을 증거하기 위해서 우린 이 땅에서 이런 식으로 나름대로의 죄를 우리가 발산할 수 있는 겁니다. 남 죄 짓는다고 따라하지 말고 본인 나름대로의 죄가 또 따로 있어요. 각자각자 다 달라요. 지문 다르듯이. 그것은 DNA 검사한다고 같은 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 2페이지 중간에 보면, 대신 죽으심의 역할 속에 희생으로 나타난다. 그 희생이 뭘 지켜주는가? 땅을 지켜줍니다. 언제까지 땅을 지켜주느냐 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때까지 땅을 지켜줘요. 십자가 이후에는 땅이란 개념은 하늘로 올라가고 지상에는 혼돈과 무질서가 되는 겁니다. 약속의 땅이라는 것은 약속의 주인공은 이분이었습니다. 그때까지만 약속의 땅으로서 기능을 다하고 드디어 예수님이 떠나버리면 거기에 따라서 약속이라는 것도 예수님 몸에 붙어서 땅에 있지 않고 하늘로 올라가버립니다. 그러면 약속의 땅은 하늘에 있어요. 골로새서 3장 1절에 나오죠. 우리는 이미 땅에서 죽었고 우리의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늘에 감추어져 있다. 보관돼있다.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죠. 그래서 사도 바울이 삼층천에 올라갔죠. 구약에서 시작했던 이륙, 비행기가 구약이란 활주로를 타고 가다가 십자가,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할 때 구약의 모든 개념도 완성이란 의미에서 같이 따라서 승천해버렸다 이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닭 쫓는 개가 되지 않겠는가? 물론 닭 쫓는 개인데 닭과 개 사이에 성령이 와버립니다. 일종의 계영이죠. 올라가신 예수님의 영, 올라가신 그분의영이 우리에게 임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이 땅에 있으면서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돼요.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겁니다. 구약으로부터 활주로로 비행기를 날려야 되는데 구약을 치워버리니까 신약만 들여다보고 있으니까 뭐가 나오느냐 하면, 흉내 내기, 모방하기, 곧잘 연기하기, 믿는 척하기. 믿는 척하기는 목사가 시키는 대로 반복 학습하는 것밖에 없어요. 1단계 이것 하시면 2단계 할 수 있습니다. 맨날 교회에서 하는 게 그거에요. 3단계 합니다. 보통 3단계 하고 교인들이 포기해주면 되는데 꼭 눈치 없이 악착같이 4단계 다 밟는 사람이 있어요. 그러면 목사로서 입장 난처하거든요. 그때는 없는 단계를 만들어요. 7단계로. 그러면 악착같이 7단계까지 올라가는 사람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목사가 제일 무서워합니다. 제발 좀 목사 신앙 따라 붙지 마라. 그러면 목사 권위는 뭐가 되느냐 말이야. 적어도 우리 교회에서 내가 믿음 제일 좋아야지 네가 앞장 서버리면 나는 네 앞에서 설교 못한다. 적당하게들 하세요. 목사보다 추월하지 마시고. 추월하면 너무 뛰어나면 곤란해요. 그만큼 성령이 오게 되면 요한일서의 말씀처럼 누가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①있다. ②없다. ‘없다’입니다. 성령이 너희를 친히 가르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네가 사람들에게 이야기할 때 네가 아니고 하나님의 성령이니라. 우리끼리만 이야기하지 개혁주의에서 하면 계룡산에서 왔다 하며 미친놈이라 합니다. 성경에 있는 말해도 미친놈이라 하니 곤란합니다. 왜 그것을 사람들이 겁을 내냐 하면, 구약부터 이동을 하지 않고 바로 성급하게 신약에 가서 모방을 했기 때문에, 믿는 사람 흉내를 냈기 때문에 착해지고 술 끊고 담배 끊으면 성령 받은 줄 알고. 구약에서는 우리보다 착함의 선배, 선함의 도사들이 수두룩합니다. 특히 바리새인 같은 사람들은 보통 사람 아니에요. 지금도 바리새인 같은 종파가 있어요. 남녀칠세부동석이라 하지요. 그 사람들은 남녀사세부동석이에요. 버스도 여자가 뒤에 타면 아예 안 탔어요. 아주 지독해요. 천국사람 돼보겠다고. 땅의 사투리 쓰면 아예 상종을 안 해. 오직 자기들만이 천국사람 돼보겠다고. 그러니까 로마서 10장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너희들은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는데 그것이 얼마나 하나님의 의를 몰랐으면 그렇게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느냐 이 말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니까 말씀으로 뭘 생산해야 합니까? 이거는 철야근무야. 밤낮이 없어. 새벽을 깨우리라 해서 새벽마다 깨우고 밤늦게까지 기도하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자기 의를 생산해요. 그래프 해놓고 오늘은 성경 넉 장, 성경 다섯 장 그런 목표를 해요. 기도 30분 더 늘이기. 그런 목표를 잘 채우면서 헌금은 목표에 안 드는지 몰라. 그것은 돈이 아깝기 때문에 돈이 하나님이기 때문에 돈 내는 대신 다른 걸로 돈 내는 걸 상쇄시키려고 통박 굴려요. 교회에서 온갖 것 다 봅니다. 대신 죽으심이 날아가 없고, 자기 반복학습만 남아있어요. 그러니까 그동안 공들인 게 아까우니까 건드리면 그야말로 발작을 일으키죠. 바리새인처럼 더 의가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 일단 천국에 가려거든 누구한테 심사를 받아라? 바리새인한테 먼저 심사를 받으세요. 여기서 슈퍼K 나와서 예선 통과해야 돼. 지방예선 통과해서 본선해서 금요일마다 계속 노래 불러서 우승해야 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사람들이 등장하게 되면 바리새인들이 수준을 낮출까요, 높일까요? 높이죠. 어디 감히 따라 와. 금식의 날수도 더 늘일 것이고 십일조도 상세하게. 십일조의 특징이 뭐냐? 절대로 십의 이조를 할 수 없다는 거예요. 완전히 미쳤어. 절대로 십의 이조를 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 십일조만 해야 돼. 아마 여기서 경제관념이 발전 그래서 따라잡을 수 없는 바리새인, 하늘같은 바리새인을 예수님이 뭐라 했습니까? 너희 아비는 악마다. 악마의 전형적인 모습을 너희들이 보여주고 있고 모든 사람은 그걸 부러워하면서, ‘나도 언제 바리새인처럼 저렇게 착해보느냐?’ 바리새인은 모이면 연구하는 것이 얼마나 더 어렵게 힘들게 말씀을 완벽하게 지키느냐 연구하는 거예요. 에베레스트 올라갈 때 그냥 올라가면 재미없어. 남이 안 가는 코스로 그것도 여름철 말고 겨울철, 혹한기에 더 난코스 개발해서 자기 이름 걸어서 이거는 ‘박영석 코스’라 만들어보려고. 이건 취미고 이런 도박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제발 선배들의 이런 것을 본받지 마시고 그저 본받으려면 세리, 창기, 강도, 쉽잖아요. 얼마나 쉽습니까. 물론 그 사람과 똑같으면 안 되고 나는 나 나름대로의 개성이 있기 때문에. 다만 우리 속에 대신 죽으심이 그 다음에 뭘 낳는다 했습니까? 희생. 이 개념 어렵습니다. 세상적인 희생 개념은 희생의 덕을 보는 타인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성도의 희생 개념은 타인이 존재하지 않는 희생입니다. 내 희생 덕분에 남이 사는 그런 희생이라는 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없어요. 왜 없느냐? 희생되신 분이 오직 한 분,한 분에 전속된 희생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 희생 때문에 누가 구원받는 게 아니고 나를 통한 주님의 희생 때문에 남이 구원받거든요. 그렇다면 나의 희생 때문에 구원받는다면, 만약에 A라는 사람의 희생 때문에 구원받는다면 그리고 B라는 사람의 희생 때문에 구원받는다면 서로 멘토 싸움이 벌어져요. ‘나는 박완규가 노래 제일 잘 하는 것 같아.’ ‘아니고 그것도 가수고 그것도 노래드나.’ 저희끼리 싸운다고. 그러니까 모든 구원은 오직 누가 전도했던 관계없이 어느 권사님이 전도했던 간에 누가 전도했다고 해야 돼요? 바로 주님이 주신 믿음으로 구원됐다고 해줘야 되는 거예요. 이게 바로 사도행전에 나온 사도들의 역할입니다. 절대로 사도, 나한테 거쳐서 주님한테 가지 말라. 왜? 내가 너한테 준 게 없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너를 위해서 희생한 게 없어. 주님의 희생이 나를 통해서 흘러갔을 뿐이죠. ‘뭔가 빠져나간 느낌이 드는데, 아 주님의 희생이 왔다갔구나.’ 이렇게 겸손하면 그것도 흉내 내는 사람이 있을까 겁난다. 방금 뭐가 왔다갔네. 저 사람 구원받았네. ‘주님이 나를 가지고 저 사람을 구원했구나.’ 이렇게 돼야 되는 겁니다. 전도상은 누가 받아야 돼요? 주님이 홀로 받아야 돼요. 지가 냉장고 타고 목걸이 차면 안 됩니다. 주님께서 통과시키면서 우리를 죄인으로 만들어요. ‘새로 온 저 사람은 제가 전도했습니다.’라는 죄를 짓게 만들어요. 그러니까 우리 집에선 그런 분 없습니다. 나중에 권사나 장로 투표할 때 표가 나요. 니가 누구 덕분에 교회 왔는데. 말은 안 해요. 말은 안 해도 기억에 남지요. 그걸 순수 기억이라 합니다. 이게 베르그송의 책에 보면, 습관적 기억과 이미지 기억이 있는데 순수 기억 속에 포함돼 있는 거예요. 자기는 생각 안 나는데 어떤 계기가 되면 툭 튀어나오는 것. 여러분 그런 경험 있지요. 평소에는 생각 안 나는데 어떤 뷔페에서 과자를 하나 먹었는데 이 맛은 내가 일곱 살 때 돌아가신 이모님이 만드신 과자하고 기억이 나는 겁니다. 물론 좋은 것만 기억나면 좋겠는데, 그때 그 애 너무 왕따시켜서 자살 직전까지 갔는데 그때 사고 났으면 퇴학당할 뻔 했는데 지금 찾아가서 미안하다고 해야 되겠다. 삼십 년 후에 가서 사과하는 경우가 있어요. 그것 사과 안 해도 됩니다. 그렇게 당했던 그 애가 벌써 일 쳐놨어. 사람은 엮이게 돼있지 순수하게 당하기만 하는 인간은 없어요. 반드시 사기를 치는 인간들은 꼭 사기를 당했기 때문에 그 수법을 배워서 남한테 사기를 치는 겁니다. 군에 가봐야 알지. 뭐 하나 잃어버렸잖아요. 삽 잃어버리면 반드시 남의 것 훔쳐서라도 빈자리 채워야 돼요. 꼭 이빨 빠진 것 같아. 나중에 점호하다보면. 지금 군에 갔던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다 아멘할 거예요. 세상은 다 도둑놈이에요, 도둑놈. 희생? 뭘 희생했는데? 한 게 뭐가 있다고. 뭔가 노렸지. 나의 희생을 갚고 너는 나의 종이 되어라. 일방적 거래지만 일방적으로 뭔가 노림수, 방정식이 나왔잖아요. 내가 이만큼 해주면 분명히 다른 데 안 가고 나한테 올 거다. 그게 무슨 대신 죽으심입니까? 내 사람 만들기 위해서 그 사람에게 투자한 거지. 그게 무슨 희생입니까? 부모와 자식 간에도 마찬가지고. 부모가 이야기하죠. 어느 손가락 깨물어도 안 아픈 손가락 없다고. 어느 자식도 다 귀하다고요? 제일 귀한 것은 부모 지 몸이 제일 귀합니다. 그 다음에 땅은 희생이 있어야 되는데 그 희생의 증거를 통해서 대신 죽음과 연결돼있습니다. 그러면 노아 같은 경우에 방주가 노아를 살렸습니까? 노아 방주에 함께 탔던 희생제물이 돼야 될 정결한 짐승이 노아를 살렸습니까? 정결한 짐승이 노아를 살렸지요. 그래서 방주에서 나와서 정결한 짐승을 받았으니까 하나님께서 그걸 흠향하시고 인간들 태어날 때부터 악한 걸 알지만 그것으로 문제 삼지는 않겠다. 단 이제부터 문제 삼는 것은 대신 죽었던 희생의 피를 무시하면 이제는 더는 용서 없다. 이것이 바로 대신 죽으심을 끌고 가시는 하나님의 추동력, 추진력입니다. 내가 너희들이 잘못한 건 시비 안 거는데 너희에게 햇빛과 공기를 주기 위해서 죽었던 케이블카에 매달린 그 희생, 흠 없는 어린양, 제물을 잊어버리면 나는 너희를 저주하겠다고 나온 겁니다. 그래서 나와서 노아의 아들 가운데서 셈과 야벳은 축복 분류에 속했고 함과 아들인 가나안은 저주로 분류가 됩니다. 그들이 분류될 때 기준이 있었죠. 그 기준이 바로 하나님께서 대신 죽으심은 우리의 허물과 우리의 죄 때문이죠. 그러니까 허물과 죄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덮어지는 겁니다. 이것 사라지면 완전히 도사돼버려요. 자기가 예수돼버려요. 우리가 죄인 되려면 허물과 죄가 항상 우리 안에서 계속해서 새로운 것들이 유행 따라 나와야 돼요. 인간은 변하니까. 허물과 죄를 누가 덮어줍니까? 희생 제물의 피가 있죠. 이 피는 희생제물인데 앞에 뭐가 붙어요. 흠 없는 자의 피인데 피를 레위기에 보면 생명이라 하니까 다시 이야기하면 흠 없는 자의 생명이 허물 많은 생명을 대신해서 이 사람들을 흠 없는 자가 누리는 혜택을 같이 받게 된다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수련회를 끝나고 몇 년 되도 상관없어요. 항상 잊지 말아야 될 것은, 자기를 덮는 두께를 항상 느끼고 살아야 됩니다. 경주 오시나 대구 가시나 오늘밤에 가실 사람도 있는데 어디가시더라도 어디서 뭘 하든지 어떻게 살든지 관계없이 항상 그 두께,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언약의 두께를 우리가 해야 됩니다. 그래서 저는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게 되면 뭘 보느냐 하면, 너는 너의 죄를 덮어주는 두께가 있는지를 우회적으로 물어요. 교회 나가느냐? 나가면 그 교회는 예수님을 어떻게 가르치느냐고 물어요. 지 잘났다가 아니라 나는 못났는데 구원받았다는 이야기가 겸해서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그런데 세상 사람들 동창생을 만나면 뭘 보느냐 하면, 희미한 등불 밑에서 어떻게 살았기에 그렇게 늙었느냐? 사업하다 망했느냐? 그런 것부터 살피는 사람이 있어요. 그게 아니고 성도의 만남 심지어 부부간에, 자식간의 만남은 허물과 죄로 만나지 말고 두께를 가지고 만나야 돼요. 뚜껑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하느냐? ‘그래 너 잘났다.’ 이러고 끝나지. 그럴 수밖에 없죠. 방금 이야기한 노아의 뭘 덮어줍니까? 노아의 하체를 덮어줌으로 창세기 3장은 절대로 양보될 수 없다. 하나님의 언약 안에 전체 성경이 다 담긴다는 이야기를 첫째 시간에 했죠. 이미 하나님의 언약 안에는 지나간 게 아니에요. 모든 성경은 다 두께로 작용하기 때문에 노아의 하체를 덮어줌으로 말미암아 장차오실 예수님이 우리의 어느 부분을 덮어준다는 사실을 미리 앞당겨서 보여주는 거예요. 네 수치가 굴러간다. 남들 앞에서 무슨 소리하든지 하여튼 예수 앞에서 부끄럽다고 이야기하지 마. ‘어이 강도! 너 무슨 짓했어?’ ‘강도질했습니다.’ ‘내 앞에서 부끄럽다 하지 마.’ ‘알겠습니다.’ ‘어이 탕자! 어떻게 조치하랴?’ ‘제가 감히 아버지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걱정하지 마. 여기 소고기, 가락지, 여기 양복.’ 탕자한테 온갖 것 다 줘버려요. 그 두께. ‘어이 거지 나사로! 평생 뭐 했노?’ ‘긁었습니다.’ ‘알았어.’ 개들이 핥던 긁던 관계없어요. 그냥 덮어줌으로써 아는 거예요. 이게 바로 하나님 언약 속에 있단 말이에요. 그것이 성경에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이건 하나의 기독교교리가 아니에요. 우리가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어디 가더라도 항상 두께를 유지하라 이 말이죠. 그러면 두께를 유지하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느냐?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 어렵지 않아요. 그게 바로 땅이라는 환경이 우리를 이렇게 유도합니다. 우리는 구조 속에 놓여요. 주님께선 바깥쪽에 둬서 우리로 하여금 여기에 적응하게 만드는 식으로 이렇게 보쌈하듯이 데려가서 구원하는 겁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애굽에 있던 히브리인들이 사적으로 모세에 대해서 어떤 감정을 갖고 있고 안 좋게 생각하는지 묻지를 않아요. 아예 통째로 애굽 나라에 있는 쪽은 열 가지 재앙이 떨어지고 이쪽에 있는 히브리 사람들은 처음 1~3재앙은 떨어졌지만 4~10재앙은 안 떨어지고. 차별 되어서 다른 환경을 줘놓고 마지막에 하나님의 약속을 줘버리죠. 그러면 저쪽에는 다같이 재앙이 떨어졌다. 이쪽은 약속이 주어지죠. 약속은 애굽인에겐 안 주어지고 바로 히브리인들에게만 비밀스럽게 전해지면서 저쪽에 없는 것, 저쪽 사람들이 해내지 못한 저 사람이 아무리 해도 불가능한 것이 이쪽 히브리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방법은? 정답은 간단합니다. ‘사람으로선 할 수 없다.’ 그게 정답이에요. 그게 신자입니다. 내가 구원받는 방법은, ‘나는 할 수 없다.’ 그게 정답이에요. 그럼 다른 사람이, 네가 할 수 없는데 너는 왜 구원받았느냐? 그러면 뭐라고 합니까? 예수님을 증거하게 돼요. 예수님께서 나를 구원했다. 그러면 저쪽에서 또라이, 미친놈. 계룡산에서 내려온 놈. 요새 유행하는 영지주의. 너는 아무 행함도 없는데 구원받았느냐? 졸지에 귀싸대기 맞는 셈이죠.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주여, 어쩌란 말입니까? 정말로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창세전에 택해서 생명책에 기록되어서 구원받았는데 저 사람들은 자꾸 뭔가 내놓으라 하는데 제가 뭘 내놓겠습니까? 내놓을 게 있어야 내놓지. 그러면 저쪽에서 뭐라 합니까? 네가 헌금한 게 있잖아. 헌금했는데 헌금도 죄였다. 이걸 내놓는 거예요. 예배 참석했잖아. 예배 참석 그것도 있지. 예배참석도 죄였더라. 옳지 예수 믿는 것도 죄였어. 자꾸 이런 걸 끄집어내는 거예요. 십자가 믿는 것도 죄였더라. 그러면 저쪽에서 환장합니다. 십자가 믿는 게 왜 죄냐? 십자가 믿어서 구원받는데 그게 왜 죄냐 말이죠. 믿음의 주체가 누굽니까? 누가 믿게 했는데? 내가 믿게 해버리면 십자가가 나의 소유물이 돼버립니다. 그런데 주님이 믿게 하면 나는 십자가의 소유물이 돼버립니다. 성령을 안 받은 사람은 뭔가 소유해야 안심을 해요. 우리는 소유하면 불안해서 안 돼. 소유 안 해야 돼. 주님께서 소유하지 말라 했으니까. 지금 이 장소가 어떤 장소냐 하면, 우리가 못하는 것을 이미 바깥에 있는 모든 저주와 심판을 대신 맡아 담당하는 장소가 된다 이 말이죠. 마치 풍선 속에 있는 우리가 돼요. 공중에 뜨는 열기구, 그것도 참 위험하긴 위험해. 뉴질랜드에서 떨어져서 열 몇 명 죽었잖아요. 예수 안이라는 풍선 안은 단단하거든요. 예수 안에서는 우리가 나설 이유가 없어요. 주께서 다 처리해버립니다. 이걸 제가 하이카가 다 알아서 하기 때문에 지가 본넷 열어서 엔진 만진다고 손대지 말란 말이죠. 십만 원 나갈 것 이십만 원 나가요. 그냥 부르세요. 이게 행함이 아니고 믿음이라니까. 만약에 고장 났는데 우리가 손대면 주께서 그 손댄 것 때문에 투덜투덜합니다. 우리의 행함은 십자가 앞에서 다 깨져요. 돌을 던지면 돌이 산산조각 내버립니다. 모든 걸 조각내버립니다. 손대지 말라 했지. 전문가가 아닌 게 왜 자꾸 손대고 난리야. 니가 마귀를 이겨? 니가 어떻게 돌이 떡 되게 하는 것을 기피할 수 있느냐? 니가 인기 얻는 것을 거부할 수 있고, 세상 부귀 얻는 것을 싫어할 수 있느냐 말이죠. 로또 당첨 돼보세요. 지 혼자 싱글벙글 하면서 얼마나 좋아한다고. 그걸 어떻게 표정 관리할 수 있겠어요. ‘에이씨 1등 당첨 됐네. 이러면 복권 안 사는 건데.’ 이렇게 표정 관리할 수 있습니까, 인간이. 오늘 아침에 했지요. 사람은 두 주인을 못 섬겨요. 돈이 어느 자리에 있느냐 하면, 구약 자리에 돈이 와버렸어요. 예수님께서. 사람은 두 주인 중에 하나의 종이 된다. 돈은 섬김의 대상이지 소유의 대상이 아니란 겁니다. 그게 인간이란 겁니다. 우상이 다른 게 우상이 아니라 돈 좋아하는 내가 우상이라. 구약에서 말하는. 한쪽을 미워하면 한쪽을 사랑하게 돼있고, 한쪽을 사랑하면 한쪽을 미워하게 돼있다. 그래서 제가 오늘 아침에 했잖아요. 어느 인간이, ‘미치겠다. 돈이란 우상 그만 섬기겠다. 돈 좀 누가 다 가져갔으면 좋겠다. 그래서 제발 주님만 섬겼으면.’ 그런 마음이 안 생겨요. 돈이 최고의 신이고 예수님은 뭐냐? 내가 섬기는 돈 벌어주는 하급 신. 하급 신이라고 제 노릇하면 수고했다고 십일조로 커미션 줄 거고. 돈 안 벌어주면 교회고 십일조고 없다. 우리가 그런 식으로 이미 고정돼있는 것을 즐거워하세요. 왜냐하면 말씀대로 우리 안에서 지금도 죽음이 작동하기 때문에 그래요. 아까 두께 있지요. 두께 안에서 우리는 늘 여기서 나도 깜짝깜짝 놀라는 죄와 허물이 계속 생산됩니다. 아주 기계가 스물네 시간 가동돼요. 현대자동차라. 계속 나한테 이런 죄가 막 나와요. TV 보다가도 저 인간 죽어야 돼. 내 입에서 갑자기 아무 돈 빌려준 적도 없이 어떤 인간, 저 이미지는 밥맛이 없어. 그러한 형제 미움이란 살인죄가 나오다니. 막 나와요. 그래서 갑자기 댓글 달고 싶고. 김연아 까불지 말라고 IOC위원이 왜 필요하냐? 스케이트나 타라고 막 쓰고 싶고요. 우리 십자가마을 사이트 그런 즐거움을 제공하지 않았습니까. 온갖 미친개들 다 와서 나 예수 믿는 걸 알아줘. 미쳤나. 니가 뭔데. 이게 우리에게 계속 작동하고 생산되는 거예요. 제발 나 여기 있음을 좀 알아줘. 그러면 복음 아는 사람은 처음부터 죽은 인간인데 어떻데 알아달라는 거예요? 디모데전서 5장 6절, “일락을 좋아하는 이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 세상 즐거움을 좋아하는 사람은 니가 살았다고 우기나 사실은 죽은 자로다. 그걸 우리한테 적용시키면 다 죽은 자에요. 전에 오후예배 보는데 본당으로 오질 않아요. 유아실에 TV가 있었는데 한국과 일본과 야구 준결승하고 있었어요. 일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나 실은 죽은 자로다. 이것이 마음껏 발휘되어서 삽겹살보다 더 두꺼운 두께가 니가 아무리 버텨봐라 내가 너한테 용서하고야 말지. 그래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치는 이것이 바로 실제상황이라는 거예요. 십자가가 눈앞에 있는데 누가 너를 꾀더냐. 실제상황은 이것밖에 없어요. 나는 죄 짓는 전문가고, 주님은 용서하는 전문가고.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성경이 처음부터 나와 있는 겁니다. 괜히 자기 자존심을 챙기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온갖 마귀는 다 이끌어요. 그 다음에 3페이지에 보면, 네가 복의 근원이 되겠다. 아브라함의 복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이삭이라는 자식이에요. 이삭이라는 실존인물이 복입니다. 네가 자손이 어떻게 되고, 땅이 어떻게 되고 하는 것은 아브라함은 손댈 권한이 없어요. 네 몸에서 비정상적인 출생이에요. 비정상적인 출생이란 혈육은 절대로 믿지 않는다. 혈육에서 난 인간은 천국에 못 온다. 육에서 난 것은 육이다. 육에서 나오지 않은 인간만 골라서 천국 간다는 그걸 보여주는 내용이 아브라함에게 준 복입니다. 육에서 나와 버리면 육을 믿게 돼요. 육을 믿게 되면 영을 믿지 못합니다. 육에서 나온 것들을 믿기 때문에 육에서 나온 것을 믿는 것은 육의 행함을 믿죠. 그런데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뭘 믿음으로 의가 된다 했어요?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의가 된 거예요. 하나님의 의란 아브라함에게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과 동반해서 같이 오는 거예요. 어제 아내가 주문해서 택배로 화장품 하나 왔는데 문화상품권 만 원짜리인가 올해 특별히 경품 준다고 신청하시면 한 장 드린다고 했어요. 하나님의 의란 외부에서 공급된 것이고 수입품이에요. 명품 중의 명품입니다. 여러분 다른 명품 탐내지 마시고 하나님의 의가 그냥 명품으로 온 거예요. 왔기 때문에 그 가방 자랑할 때는 제발 내가 기도했더니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그냥 가는 거예요. 그게 바로 아브라함에게 주는 경품입니다. 아브라함 자손에게만 주는 거예요. 아브라함 자손이란 혈통에게 하나님의 의가 주는 것이 아니고 그 의가 있는 사람을 나중에 결과적으로 되돌아와서 명칭을 붙이기를 하나님의 의만 선물로 받은 자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후차적으로 명칭을 갖다 붙여버려요. 그걸 케이블카가 바로 십자가에서부터 연결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무시고 내일 아침에 봅시다.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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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파일 : 2012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b.hwp (55.0K), Down: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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