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여름수련회(한없이 작은 권력) 소감문
시간이 달린다. 과거에서 현재로 파고드는 기억의 지층을 칸칸이 매달아 전체성이 낳은 남자의 후손들을 가득 싣고 ‘생명의 신호’를 간단히 무시하는 욕망의 궤적을 늘여간다. 미지의 세계라고 하든, 예외성이라고 하든, 이미 기존의 전체성에 복역하도록 만들어진 신은 허풍이다.
우주 있음의 이유가 인간에 의한 진화의 최정점인 것을 증명하기 위함이라고 하든(스티븐 호킹),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종교)고 하든, 눈에 보이는 세계를 본체, 또는 전체로 하여, 거기에 미지의 세계마저 신의 이름으로 포획하면 결국은 인간으로 말미암고, 인간을 통하고, 인간으로 돌아간다는 그 관점은 그것으로 완벽, 완성일까?
몸의 충동을 법으로 다스려도 잡힐 듯 말듯 불안한 존재의 의미, 과도하거나 부족해도 안 되고 우리가 우쭐거리거나 혹은 우울하지 않을 평정심과 품위를 유지시켜줄 꼭 그만큼의 강제(법)의 적정선은 어디쯤일까? 내면의 응시에 시달리는 마음의 권력이든, 내가 속한 집단의 권력체든 힘의 누수를 걱정하는 불안한 눈빛들, 수다를 떨면 좀 나아질까? 신명나게 굿이라도 한 판 벌여야 할까보다.
지각하고 판단해서 결론내리고 다시 이 과정을 순환시켜 제 2, 제 3의 결론을 뭉쳐가며 자기정당성과 합리성으로 존재의미를 엮어 역사와 권력을 잘도 누적시켜 간다는 그 잘난 존재의 시야에는 생명의 신호가 포착되지 않는다. 영화관 속에서 자기들끼리 난리를 쳐도 영화관 바깥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왜 그렇습니까? 홀로 일찍 죽임을 당하신 그 분의 죽음에 대해서 모든 인간들이 가담되었기 때문입니다.”(생명의 신호, 158쪽)
복음이 달린다. 때가 차매 있는 대로 부풀려진 확정된 미래가 신원미상의 낯선 인물을 홀로 싣고 오염된 도시를 낱낱이 절개한다. 성전도 믿지 마라, 사람도 믿지 마라, 종교적 관행이나 관습도, 구원자도, 과학적 대상으로서 눈에 보이는 이 세계도, 인내하면 곧 오신다는 메시아 재림의 어느 때도 믿지 말고 특히 너, 너 자신마저 믿지 마라.(마 24장) 제대로 믿는 것 맞느냐고, 인식의 진위를 묻기도 전에, 믿겠다는 시도자체를 죄로 규정하는 ‘인자’의 횡포, 인간인 듯 인간 아닌 인간 같은 낯선 의의 전진하는 경계선. 기껏해야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파는 ‘생활공간’이 전부인 우리는 굳어질 대로 굳어진다, 마음까지.
연주시차(年周視差)의 변화를 통해서 지구의 태양공전을 증명한 베셀(과학)의 눈으로도 동방박사를 이끌어온 별의 움직임을 관측해내지 못하는 이유는, 모든 인간이 ‘기다림 + 메시아 = 구원(천국)’이라는 보편적이고 집단적인 사고에 매몰되어 있음이다. 같은 이유로 존재의 미흡함을 채우는 (+1)로 신, 또는 구원자를 상정하는 구원의식, 종교성을 마치 성령이라도 받아서 생긴 특별한 마음인줄 아는 종교집단, 특히 개혁주의신학은 죽었다 깨어나도 여인의 후손에 대한 출생의 취지(갈 4:4)를 독해하지 못한다.
왜 14-14-14, 14-15-14, 남자에서 남자로 곧잘 이어지는 계보에 메울 수 없는 구멍을 내는지, 그 빈자리에 왜 죽은 우리아의 아내가 들어가야 하는지? 왜 메시아는 여인의 후손으로 오셔야 했는지...? 남자의 세계(남자에 복속된 모든 여자를 포함하는)를 죽음의 세계로 일괄 몰아넣어 도살처분하여, 그 죽음에서 나오지 않고서는 예수님 족보에 가입될 수 없다는 구원불가능성, 곧 십자가죽음 안에서만 생산될 ‘지극히 작은 자’(마 18:3, 19:14)의 표상을 새겨 넣기 위함이다! 사람은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다 할 수 있다.(마 19:26)
“주여, 언제 우리가 주를 믿었으며 언제 우리가 주를 섬겼습니까? 미워하고 훼방하고 핍박하고 폭행자였을 뿐입니다.”(마 25:37-39, 딤전 1:13) 십자가의 파급효과는 개인구원이 아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나를 구원하기 위함이 아니라 뱀의 후손과 싸워 이기고 저주할 자를 저주하며 긍휼을 베풀 자에게 긍휼을 베푸는, 독점권한을 행사하는 주가 되시는 약속의 성취를 위함이다. ‘구원’이란 나의 구원에 목말라하는 나를 뱀의 후손으로 규정해서 도살해주시는 십자가의 능력이다.
꽁꽁 감춰두고 지키고픈 나의 지성소에서 한 맺힌 곡성으로 일그러진 나의 형상을 파내고 주님의 형상, 주님의 약속성취의 단독수행, 십자가복음을 모시는 작업이다. 십자가는 중심에 모셔야 한다. 중심에 모셨던 내가 필살되는 자리에. 오직 십자가의 영인 성령만의 작업이다. 성령만이 관점을 바꾼다. 십자가 이용해서 내가 구원되겠다는 것이 악마의 복음이며, 그런 죄인도 용서해서 십자가를 자랑하겠다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는 복음적 관점으로 존재의미가 정리된다.
12지파(죄인) + 율법 + 피, 출애굽기 24장의 언약공식 그대로 주께서 자기양말 찾아 신듯이 율법을 챙겨 십자가로 가시면 십자가의 능력으로, 성령의 작업으로 생산된 성도들은 주님이 지정해준 본래의 자리에 안착한다. 죄인의 자리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고, 아무것도 할 것도 없고, 죄만 짓는 본래의 기능에 충실한 가운데 모든 죄를 사하시는 대리변론의 특혜(히 9:12), 그 사랑의 결실물로만 존재감을 구성한다(고전 15:10).
인간의 법은 인간 나고 법 나지만, 주님의 법은 율법이 먼저고 사람이 나중이다. 법의 엄위를 위해 심판이 주어지고 온전한 심판만이 온전한 의에 걸맞다. 주님의 모든 율법을 홀로 이루어내신 대리변론, 피가 먼저고 그 피를 증언하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받기만 해야 하는 선물로서의 삶이 날마다 배달된다. 주님의 자취, 주님의 일생, 우리가 얼마나 복음을 싫어하고 미워하는지 알아가는 철드는 과정의 한평생, 수동적 믿음이다. 막사세요. 하나도 어렵지 않아요.
울산 태화강변 대나무 숲에 까마귀가 또 왔다 갔을까? 검은 점이 후르륵 점점이 흩어져 가는 것을 머릿속에서 상상해본다. 관점정리의 사고실험. 낯선 의의 경계를 홀로 그으며 십자가에까지 진격하신 신원미상의 동선, 그 확정된 미래의 관점에서 세상을 오염된 닭장이나 돼지우리로 보는 것이 나에게 될까? 그래서 하늘나라 보건당국의 살 처분에 느긋하고 기쁜 마음으로 응할 수 있을까? 오직 한 분 실체이신 주님의 상징에 걸맞게 하찮은 감응체가 되어 주님이 마련하신 촘촘한 말씀의 거미줄을 따라 미끄러지듯이 지극히 작은 자로 살 수 있을까?
말씀의 날줄과 씨줄의 무늬로 곱게 수놓아지는 수동적 믿음을, 주님만 쳐다보며 물위를 걸었던 베드로처럼, 무덤 속에서도 주님의 음성을 듣고 성큼성큼 걸어 나왔던 나사로처럼 사나 죽으나 주의 것으로 살 수 있을까? 간음하다 붙잡혀서 동네방네 쪽팔리게 된 여자처럼 너를 정죄하는 자가 있느냐고 물으실 때 “없습니다!” 큰 소리로 대답할 수 있을까? 따가운 타인의 시선에 아랑곳 않고 복음 때문에, 의로운 피 때문에 부러운 것도 없고, 부끄러운 것도 없다고 주님과 소곤소곤 대화할 수 있을까?
함께 강의를 들었던 분들의 안부가 벌써 궁금하다. 잘들 가셨겠지. 각자의 생활공간 속으로. “불안위에 평화를 세우고 공포에서 힘을 얻어 전쟁으로 몰아붙이는 무서운 생태계(교재 4쪽)속으로. 벤츠, 파사트, 또 벤츠, 아슬란, 차들이 빠져나간다. 번쩍거리는 승용차에 금새 마음을 빼앗긴다. 마음의 발작이 격렬하다. ‘같이 예수 믿으면서 누군 꽃가마 타고 누군 달구지 타고.’ 강의 끝난 지 5분도 안되어서 그걸 그렇게 부러워하느냐고 정 목사님이 핀잔(온정어린)을 줘서 겨우 정신이 돌아왔다. 선지자가 없으면 안 된다. 복음 아니면 안 된다.
우리 십자가마을은 수다가 꽃피는 마을이다. 자주 뵙지는 못하지만 만나면 천국처럼 설렌다. 처음에는 서먹해도 말씀이 요동치면 견디지 못하고 속 깊은 이야기를 다 토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몸이 지쳐가는 기색이 역력하지만 눈빛들은 투명하고 사랑스러워진다.
사람 기죽이는 내면의 공포, 알 수 없는 응시의 살기가 주의 대리변론의 광채에 어느새 녹아 붙는 현상, 성령께서 십자가의 능력으로 우리를 책망하사 우리각자를 죽여서 천국의 기능이 한통속으로 발휘되는 ‘우리’의 자리에 안착시키는데 성공하기 때문일 것이다. 죄인의 자리.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삽니다. 주께서 하셨습니다. 실체와 상징의 관계. 십자가마을은 늘 만나면 그거 확인한다. 우린 절대 우리끼리 일 대 일로 만나면 안 된다. 심지어 부부라도. 꼭 주님 끼고, 복음 끼고 만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