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131108b-히5장7절(투쟁적 형상)-이 근호 목사
지금 사도가 편지 쓰면서 진행시키는 법칙이 있네요. 뭐냐 하면, 예수님과 그 다음에 예수님이 눈물로 기도했다. 그리고 이제 너희들 차례다. 그 다음에 예수님이 하는 모든 것은 멜기세덱의 원칙에 의해서 진행된다. 라고 하면서 “너희들 멜기세덱 모르지? 그러면 지금부터 내가 이야기해줄게.” 라는 것이 11절입니다.
멜기세덱에 관하여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하나님의 말씀에 초보에 지나지 않아서 내가 말해도 먹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멜기세덱의 이야기는 젖이나 먹고 단단한 음식을 못 먹는 사람한테는 감당 못할 이야기다. 이것은 하나의 성도에게 목표를 주는 거죠. 목표를.
성도되었으면 이제는 지가 하는 목표가 아니고 주께서 이렇게 해서 이런 코스로 빠져나가게 천국가게 한다는 주님이 제시한 밑의 카페트, 카페트를 까는데 까는 카페트가 빨강색인데 그 빨강색의 내용을 보니까 멜기세덱의 인생이 거기에 깔리는 거예요. 멜기세덱의 인생을 언급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깔린 그 인생을 멜기세덱도 같이 공유해서 누리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성도는 어디에 속하는가, 멜기세덱이 예수님과 관련돼 있다면 우리는 멜기세덱과 속해서 예수님과 관련된 존재로서 주께서 다루어주신다는 이야기죠.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①예수님께서 구원의 근거가 되셨고 ②거기에 멜기세덱을 일차 얹힙니다. 얹히고 ③그 위에다가 우리를 얹어버리면
멜기세덱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라고 그렇게 하도록 초보는 모르고 날이 가면 갈수록 예수님과 멜기세덱의 일치감을 더욱 더 느끼게 한단 말이죠.
그리고 멜기세덱에서 뭡니까? 물으면 멜기세덱은 땅에 속했지만 실은 하늘에 속한 본적이 소속이 하늘에 속했다. 그 다음 우리는 묻지요. “하늘에 속한 분이 어떻게 땅에 속합니까?” 이런 질문은 바로 우리가 성령을 받은 사람에게서만 나오는 질문이에요. 하늘에 속한 사람이 왜 이 땅에서 왜 삽니까? 하늘에 그냥 계시지, 왜 내려왔습니까? 하는 그걸 언급한다면 그 다음에 히브리서 6장에 말씀이 나와요. 왜냐 하면, 그것은 두 가지 맹세를 이루려 함이라.
그러니까 뒤에 나온 질문과 아귀가 맞아야 돼요. 왜 멜기세덱이 하늘에 속하면 그냥 하늘에 살지 땅에 왜 있습니까? 하면 땅에서 이루어질 맹세가 있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면 우리는 묻지요. 멜기세덱이 그러면 맹세를 혼자 합니까? 아니다. 그러면 누구와 합니까? 아브라함하고 했다. 또 아브라함이 등장하네. 그럼 예수님 등장했다가 그 다음에 멜기세덱 등장했다가 너는 초보라 모른다고 나오다가 그 다음에 멜기세덱이 누구냐고 물으니까 거기서 아브라함이 등장하고 아브라함을 통해서 두 가지 맹세가 있는데 그 맹세는 사실은 멜기세덱이 이룬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이뤘다. 이리 되는 거예요. 그리고 난 뒤에 히브리서7장에 보면, 예수님이 그러면 맹세를, 약속을 어떻게 이루었습니까? 나올 게 아니냐 말이지요. 어떻게 이루었습니까? 나오면서 나온 게 뭐냐 하면, 십일조이야기 나와 버리는 거예요.
십일조? 십일조는 우리가 수입의 10/1을 드리는 게 십일조 아닙니까?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십일조는 받는 분이 있고 드리는 분이 따로 있다는 거예요. 받는 분은 멜기세덱이었고 드리는 분은 아브라함이었다. 아브라함처럼 되지 아니하면 십일조 자격이 없고 멜기세덱 되지 아니하면 십일조 받을 자격이 없고 이것은 바로 우리에게 땅에 있으면서도 하늘의 작업은 하늘다운 작업으로 이 땅을 통해서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거예요. 하늘의 일을 하늘에서만 따로 하는 게 아니고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니가 그걸 파악해야 된다. 그게 바로 예수님의 흔적이었다는 말이죠.
예수를 본 사람도 많고 예수님과 같이 식사한 사람도 많고 예수님으로 귀신 쫒아낸 사람도 많고 예수님께 혜택 입은 5000명도 있었지만 땅에서 일어나는 땅의 일인 줄 알았지 하늘의 일인 줄 제자들도 몰랐습니다. 그것이 신앙의 초보라면 이제는 그것은 이 땅에 일어나는 주의 일에 대해서 이를 모른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이 말씀을 통해서 알려주는 겁니다. 지금 전체흐름을 제가 5,6,7장 흐름을 휙 지나가듯이 언급했어요.
아까 집사님한테 물어봤어요. 어제 가락강의 기억나느냐고 하니까 기억나지 않다고 했어요. 돌아서면 잊어버리고. 그런데 다시 보게 되면, 아! 그래, 이 말씀 내용이다. 라고 나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고 주의 말씀도 살라하면 어떻게 살지 다 잊어버려요. 그런데 주께서 우리에게 주의 인생 살게 하면 그래, 이게 주의 인생이라고 자기 인생을 지적하게 되죠. 주여, 지금 내 사는 이것이 바로 주께서 일으킨 일입니다. 라고 다시 한 번 소급해서 파악할 수 있어요.
막상 내가 주의 일 뭐하지? 전도할까? 뭐할까? 하면 막상 주의 일이 분명치 않고 틀리지요. 그런데 내 하는 일이 막힐 때 아! 이 막히는 이것도 주의 일이구나! 하는 것을 아는 방식으로 주의 일을 날마다 우리에게 항상 깨닫게 하게 만듭니다. 멜기세덱이 어렵기 때문에 전체를 휙 한 번 언급을 했습니다. 그러면 자세한 부분을 말씀드리겠습니다.
5장 12절에 보게 되면,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이 무척 위험한 말씀입니다. 왜 위험한 말씀이냐 하면, 이런 게 위험하거든요. 목사한테 누가 교회에 처음 등록했습니다. 분명히 주의를 줘요. “당신은 이제 초보입니다. 인정하십니까?” “인정합니다.”태권도 같으면 흰 띠인데, 저 사람들 빨간 띠 봤죠? 당신도 나한테 계속해서 이 교회 다니면서 십일조 내고 내가 시키는 대로 다 하게 되면 당신은 흰 띠가 빨간 띠 되고 나중에 더 몇 십년해서 자격되면 검은 띠 되면 당신은 구원받습니다. 왜? 나는 띠 중에 띠, 검은 띠 두 개나 치고 목사기 때문에. 나는 수준이 높고 당신은 낮으니까. 당신은 나를 선생이라 생각하고 배워야 됩니다.
왜냐 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이 교회에 담임하라고 맡겨줬기 때문에 이 목사의 말을 위반하는 것은 그것은 당신은 초보에 불과하거나 탈락할 여기가 있습니다. 이 교회는 바로 이 목사한테 맡겼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거 거의 우리나라 한국교회 100% 가까이 유지합니다. 그런 주장을 하는 근거는 바로 히브리서 5장 이 대목에서 나왔다는 사실, 그러니 이 대목이 얼마나 위험한 거예요.
노골적으로 이렇게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고, 그 다음에 노골적으로 보다 더 못된 게 있어요.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노골적으로 내가 목사니까 내가 선생이니까 너는 나한테 배워라, 노골적으로 하는 사람 같으면 이건 사기지만 따지고 보면 솔직한 사기인 반면에, 숨어있는 것은 찾아내기가 더 힘들어요. 숨어있는 사기꾼들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지방교회, 워치만리, 한국교회의 비리를 언급하면서 영적인 깊이를 언급하는 사람들, 영적인 깊이, 깊이 언급을 해서 그렇게 이야기함으로서 니는 낮고 나는 깊다는 것을 언중에 대조해서 기죽이는 사람들, 이거 말리는 시누이입니다. 그 사람들도 이 부분 이야기합니다. 제가 이 말씀 주는 것은 너무 딱딱하기 때문에 여러분의 이빨 깨질까봐 내가 못하는데, 이것은 당신들 재끼고 우리 아는 사람들끼리 합시다. 이렇게 돼 버리면 그것은 하나의 특수 엘리트 신앙이 돼요. 엘리트 신앙이 되게 되면, 그게 영적 계급화가 돼 버립니다. 그게 더 얄미워.
그러면 이 말씀이 무슨 뜻이냐 하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신앙에 깊이 있고 넓이 있는 그 능력은 우리 개인의 자질이 아니에요. 성령께서 하실 몫이지, 우리가 어떤 자질을 소유하는 게 아닙니다. “야, 니는 얼마나 공부했나?” “나는 초급반이야.” 초급반, 중급반 하는데 그것은 쥐고 있다는 뜻이거든요. 그런데 성령은 우리의 소유대상이 아닙니다. 성령이 우리를 다루지요. 어떻게 다루느냐, 요 말씀이 피어나오도록 다루십니다. 성령께서 초보로 다루면 초보고, 깊이 있게 다루면 깊이 있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성도에게는 어떤 개인적인 자질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왜? 모두 다 무능하다는 점에서 공통점입니다. 모두 다 어떤 누구도 깊이 있는 영적사람이 되지 못하는 점에서는 아주 공평합니다. 주께서 이 말씀을 다루는 측면에서 어떤 사람은 초보로 다루시고 어떤 사람은 깊이 있게 다루시며 그것은 성령께서 그렇게 한 조치지 내가 깊이 있다. 네가 초보다. 라고 단정 지으면 절대로 안 됩니다.
아무리 복음을 많이 알아도 자기가 초보라는 것을 느낄 때가 있어요. 그게 증거입니다. 아무리 깊이 있더라도 바보야, 내가 그것도 모르고. 그 쉬운 것도 모르고. 미쳤어. 내가 초보인데, 초보를 부를 때 나를 부르소서. 대전공부하며 내가 은혜 받았어요. 죄인 오라 할 때 저를 부르소서. 다른 버전으로 바꿉시다. 초보 부를 때 저라고 손드세요. 초보 부를 때에. “여기 초보누구지?” “접니다.” “멜기세덱 모르는 사람 누구지?” “제가 모릅니다.” 손드세요.
성경의 모든 구절을 알게 하신 것은 사람의 설득력이 아니고 오직 성령의 역사입니다. 일하심입니다. 우리는 초보정도가 아니고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돌아서면 성령이고 뭐고 기억도 안 나요. 성령도 기억 안 나는데, 우리는 내 아르바이트 하기 바빠서 다 잊어버려요. 손님 하나 더 모셔야지, 성령 생각하다가 손님 놓치면 손해인데요. 안 되지요. 손님에게 성령에 대해서 아십니까? 하면 가버리지. “아, 나 무서워라, 신천지인가 보다.” 도망간다니까요.
모든 성경은 우리는 죽을 때까지 초보에요. 초보인데, 그 초보라고 여기는 사람이 깊이 있는 이유가 뭐냐 하면, 내가 이 말씀 지키는 것이 아니고 말씀 그대로가 나한테 와가지고 나를 덮쳐버리는 거예요. 우면산 산사태처럼. 아파트에서 저녁하고 있는데 갑자기 흙더미 들어와 버리면 아파트가 아니고 흙더미지요. 말씀이 산사태 벌어져가지고 “니가 초보야” 라고 나서면 “맞습니다.”하면 그만인 거지, 초보가 아니고 멜기세덱 압니다. 라고 나오면 안 돼요. 말씀이 그대로 우리에게 도화지로 사용해서 그림을 그린다면 우리는 기꺼이 그림그리도록 전문가에게 맡깁시다.
말씀의 전문가는 주님이고 성령이지 우리가 아닙니다. 초보로 다루면 초보고, 깊이 있게 다루면 깊이 인데, 한 번 깊이 있다고 초보로 안 되는 게 아니고 깊이 있다가 초보 되고, 다만 멜기세덱에 대해서는 지금은 너희들은 뭐다? 모르니까. 왜 몰라요? 안 가르쳐 줬으니까 몰라요. 가르쳐 줘도 잊어버리면 도로 초보가 돼버리고. 멜기세덱이 누구더라?
우리교회 교인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실례지만 예수님이 누구시죠? 딱 물어보면, 단번에 나올 이야기의 순발력이 떨어져요. 단번에 뭐라고 이야기할지 몰라요. 평소에 늘 주님 생각하는 거 같으면 나오는데, 평소에 24시간 늘 주님생각 못하거든요. 수능 쳤다하면, 우리 애는 어떻게 했는데. 우리 애는 학원도 안 다니고 준비하려고 하는데 성령이 누구십니까? 물으면 갑자기 모르잖아요. 그 때 그 순간 초보에요. 말씀에 대해서 관심 없을 때 초보고 말씀이 깊이 있으면 이 말씀 전체를 초보라고 아는 그것이 말씀 깊이가 있는 겁니다. 기꺼이 초보가 될 수 있는 용의가 있으니까. 주의 뜻이라면 얼마든지 초보가 돼도 좋다. 그저 말씀의 사람만 된다면 황공무지로소이다. 이리 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 뒤부터는 6장 같은 경우는 멜기세덱에 관한 것이죠. 왜 7장에 멜기세덱이 나오니까. 그러면 6장에는 왜 나왔느냐 말이지요. 6장 이야기는. 아까 이 강의 제목이 뭐라 했던가요? 투쟁하는 형상. 창세기 14장 18절에 보면 멜기세덱이 나옵니다. 성경에 처음 나오는데. 창세기1장부터 죽 읽어 나오는 사람이 14장에 딱 와서 멜기세덱이 나온다면 순서대로 읽어 간 사람은 누구든지 멜기세덱이 등장한 걸 알지만 이게 중요한 인물이란 사실은 알 수가 없어요. 그 뒤에 반복해서 안 나오니까. 뭐든지 반복 안 한 것은 안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거든요. 아브라함은 뒤에 계속 나와요. 아브라함, 아브라함, 아브라함. 아브라함이 중요하고 멜기세덱은 그냥 아브라함이 만났던 어떤 아저씨정도. 어느 고을의 목사정도. 제사장 정도로 알았지 멜기세덱이 그렇게 중요한 인물이라 하는 것은 신약 때까지는 모르지요.
18절에 보면, 무슨 왕 멜기세덱이 나오지요? ‘살렘 왕’ 예루살렘입니다. 예루살렘 왕 멜기세덱을 줄여서 살렘 왕, 멜기세덱이 누굴 만났다? 아브라함을 만났다. 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사람을 찾아오게 되면 그 사람의 운명은 언약에 맞추어서 이게 각색이 돼있습니다. 각색정도가 아니라 확정이 돼 있어요. 지금은 새 언약 시대잖아요. 우리의 운명은 확정돼 있습니다. 니가 아무리 오래 살아도 니는 죄인이고 의인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고. 예수님의 의가 니 속에 성령을 줌으로서 너는 의인되었다. 이미 우리는 이름 다 떼고 남녀노소 다 떼버리고 공통적으로 다 똑같습니다.
죄인 오라할 때 나를 부르소서. 전부 다 똑같은 거예요. 그게 지금 이 시대에요.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이나 다 떼어버리고 목사 장로 다 떼어버리고 우리는 그냥 죄인이고, 죄인은 예수님의 용서로 구원받는데, 국회의원해서 구원받는 사람이 있는 줄은 모르겠지만, 국회의원해서 구원받는 사람은 국회의원하면서 죄를 알라고 하는 것이고 신학박사해서 구원받는 사람이 있다하면 혹시 입니다. 그 사람은 신학박사 하는 그것이 죄인 것을 알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목사하면서 구원받는 것은 목사 이 자체가 죄라는 것을, 목사를 해야 알 수 있기 때문에 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멜기세덱이 살렘의 제사장하는 것이 뭐고,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선택받는 이유가 뭡니까? 바로 새 언약 관점에서 보면, 제가 너무 앞서 얘기해서 죄송합니다. 하고 난 뒤에 물어야 될 건데. 새 언약은 의인되신 예수님과 그 다음에 죄인된 택한 자의 관계잖아요. 이게 새 언약이잖아요. 맞지요? 그냥 의인이에요. 십자가니까. 저주니까. 죄인은 무조건 저주고 부활했으면 무조건 의인이고 이 관계밖에 없어요.
그렇다면 아브라함과 멜기세덱의 관계는 뭐냐 말이지요. 의인과 죄인사이는 새 언약의 관계고, 아브라함과 멜기세덱의 관계는 아브라함 언약이 이루어집니다.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을 만난 것은 행운이죠.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을 만난 것은 행운입니다. 그런데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난 건 행운일까요? 행운 아닐까요? 역시 행운입니다. 둘 다 만난 것은 서로가 다 행운이거든요. 아까 김춘수의 꽃 이야기했지요. 꽃을 부를 때 꽃은 나에게 의미 있지만, 꽃의 입장에서 보면 꽃이 우리보고 “아이고 꽃이 예쁘다.“ 하는데. 왜냐 하면, 의미라 하는 것은 나를 닮을 때 의미가 주어지거든요. 꽃을 꽃이라 보지 않고 인간으로 볼 때 우리한테 의미가 있고, 꽃은 자기가 꽃이라면 우리를 같은 꽃으로 봐야 꽃에게는 의미가 있어요. 서로 상통의 의미를 줘야하기 때문에.
멜기세덱의 입장에서 아브라함이 필요하고,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멜기세덱이 필요한데 아브라함은 뭐냐 하면, 아브라함 자손을 낳습니다. 아브라함 자손은 아브라함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언약을 통해서 나온 겁니다. 이건 안 어렵지요?
아브람은 그냥 아브람이에요. 아브라함이 안 된다니까요. 그런데 장차 올 메시아는 아브람 자손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자손이 오는 겁니다. 그러면 아브람의 자손은 없어요. 그런데 아브라함의 자손은 이삭이 나옵니다. 이삭은 누구 자식이냐 하면, 아브람 자손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언약의 자손이지요. 아브라함의 언약의 자손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아브라함 언약이 있다면, 아브라함은 아브라함 쪽으로 자손을 이루기 위해서는 멜기세덱의 입장에서는 아브라함이 행운입니다. 왜? 멜기세덱의 사는 방법은 자기에게 달린 게 아니고 아브라함이 누구를 낳아줘요? 이삭을 낳아줘야 자기가 살거든요. 그래서 아브라함 언약 속에서 아브라함과 멜기세덱은 하나가 되어야 됩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신 게 아니고 새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의인되시고 우리는 죄인 되어서 만나야 뭐가 이루어집니까? 새 언약이 이루어져요. 새 언약이.
하나님도 언약의 하나님이라서 언약을 위해서 하나님이 있는 겁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언약을 위해서 하나님이 있어요. 예수님도 언약을 위해서 있습니다. 아버지 언약을 위해서 있는 겁니다. 우리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이 히브리서6장 들어가기 전에 분명히 제가 하는 겁니다. 히브리서6장 들어가게 되면요, 한 번 비췸을 얻은 사람이 성령의 은사를 받고 빛을 얻었으면 멸망합니까? 아니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만날 이 질문을 수십 년째 이 질문을 하고 있고 나는 수십 년째 답변을 하고 있어요. 시작이 잘못된 거예요. 시작이 언약 중심이 아니고 누구 중심입니까? 나 살겠어요? 죽겠어요? 어디 미아리 점쟁이입니까? 살겠다! 어디 부채도사입니까? 질문을 할 때 성령이 주신 질문을 하는 게 아니고 자기가 출발점이 되어서 자기가 사는 것을 염두에 두고 어떻게 나에게 이득이 되겠습니까? 죽어서 천당 가겠습니까? 이런 질문을 하는 거예요. 점쟁이한테 가가지고 우리 딸이 혼사되겠습니까? 우리 딸이 시험 잘 치겠습니까? 물으면 점쟁이가 하는 말이 그거 하지 말고 십자가 믿으세요. 하는 점쟁이 못 봤잖아요. 새 언약이 중요하지 당신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못 하잖아요.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위해서 있어요. 그럼 우리도 아버지의 뜻에 따라서 예수를 믿게 된 거예요. 그러면 뭐가 중요합니까? 내 살기 위해서 믿는 예수는 애초에 언약에 해당이 안 됩니다. 언약에 해당이 안 되면 마귀에 해당되는 거예요. 우리는 마귀가 나보고 대신 질문하고, 질문한 질문을 우리가 주님 앞에 내뱉습니다. 히브리서 6장4절 봅시다. 하도 유명한 질문이 돼가지고.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되어 있잖아요. 현재 예수님을 십자가에 욕보이는 사람은 구원됩니까? 구원 안 됩니까? 하는 질문입니다. 요 질문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못 박아 죽은 사람은 지옥 갑니까? 구원받습니까? 그런 질문으로 막 이어지거든요. 주님의 십자가 목 박아 죽은 사람, 거기에 반대되는 사람은 지옥 갑니까? 그 사람은 구원받습니까? 구원 못 받습니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 찬성을 한 사람은 다 지옥 갑니까? 아니면 그 중에서 구원받은 사람 있습니까? 없습니까? 구원받은 사람 있지요. 사울도 그런 사람 아닙니까? 그렇다면 이 히브리서 6장 6절 말씀과 다르네요. 다른 게 아니고 니가 질문을 잘못한 거예요. 질문을.
새 언약 시대 되면, 새 언약은 이미 확정됐잖아요. 새 언약시대에 확정됐으면 옛 언약적인 그런 의식가지고 질문을 하면 안돼요. 예수님의 십자가는 취소가 안 되거든요. 예수님의 십자가는 취소가 안 되는데, 내가 예수님 십자가 믿고 타락해도 구원받지요? 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도 이제는 다시 취소될 수 있지요? 라는 질문과 동일한 질문이 되는 거예요. 확정된 것에 대해서 우리가 동의하지 않은 상태에서 예수님의 피를 이용해서 자기가 어떻게 살아 보겠다 하는 것은 아직도 언약에 포함이 안 된 사람이에요. 그저 피 찍어 발라서 구원 받겠다 하는 사람은 자기 생각이지 언약의 관점이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예수님 피 흘리고 피 믿고 난 뒤에 다시 죄 지으면 구원받습니까? 안 받습니까? 라고 질문하는 것은 결국은 내 생각에서 다시 나한테 이야기하는 거니까 그것은 애초부터 구원하고 관계없던 인간이 구원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동의할 수 없는 거예요.
성경공부 마치고 난 뒤에 서울대학교 시음회에서 주스를 팔러 오겠다는 거예요. 약을 파는지 뭘 파는지 오겠다는 거예요. 저한테 전화를 했어요. 성경공부하고 난 뒤에 10분간 주시면 주스를 판매할 수 있습니까? 했는데 제가 성경공부 참석하세요. 라고 했지요. 그게 무슨 뜻이에요? 그 생각을 잊어라 이 말 아닙니까? 지금. 그 사람은 성경공부를 이용할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런 인간들이 이걸 가지고 질문을 해대니 질문자체가 잘못된 질문이에요.
말씀은 우리보고 이용하라고 있는 게 말씀이 아닙니다. 말씀은 오히려 이용당하라고 있는 게 말씀이에요. 히브리서4장 12절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그렇다면 이 말씀이 맞다하면, 6장에 있는 이 말씀가지고 현재 우리가 뭐든지 예수님을 이용하려는 우리의 혼과 육을 지금 쪼개는 작업이 있는 사람 같으면 이런 질문을 할 수가 없어요. 마음껏 쪼개 주시옵소서. 다 쪼개주옵소서.
요번에 나온 ‘전도서 속의 그리스도’ 머리말에 ‘허무야, 같이 가자.’ 그 밑에 말에 읽어드릴게요. 무를 먹을 때 정말 맛있는 부분을 찾아내기 위해 칼로 깎아 들어가 보면, 나중에는 아무것도 남는 게 없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위해서 말씀을 하게 되면 결국은 남는 것은 뭡니까? 자기 자신밖에 없는 거예요. 그것을 말씀으로 잘라 들어간다면 결국 우리는 죽으면 사라집니다. 사라진다는 것은 없다는 뜻이에요. 처음부터 우리는 없는 존재에요. 없는 존재를 말씀을 말씀되기 위해서 잠시 이 땅에서 1900 해놓고 주민등록 앞에 있지요. 이 땅에 잠시 태어났다가 없어지는 거예요.
잠시 태어난 인간이 잠시 태어난 인간보고 니는 택함 받지 못했다고 고함지르는 겁니다. 그만큼 기대가 많으니까. 결국은 뭐냐, 결국 정답은 뭐냐, 참 우리가 너무 오래 나타나 있어요. 빨리 무대에서 퇴장해야 되는데. 앞으로 더 오래 살면 그것보다 더 심한 말도 있는 문제거든요. 참, 주님께서 좋은 따님 주셨습니다. 그런 쓴 소리하기 위해서 내 본색을 유감없이 드러내기 위한 기회로 삼았으니까. 그래서 후회하지 마세요. 왜냐 하면, 후회한다는 자체가 아직도 자기한테 미련이 있다는 뜻이거든요. 아, 그것만 안했으면 괜찮은 존재인데. 이리 된다니까요.
그러니까 이 새 언약시대에서 아직도 자기 생각하고 있잖아요. 주께서 이런 말씀을 주신 것은 더 이상 십자가 앞에서 더 이상 너는 없다는 겁니다. 십자가만 있으면 되지, 니가 꼭 십자가 때문에 살아날 이유가 없다는 거예요. 십자가만 잠시 나타날 우리 속에서 죽을 때까지 나타나면 그만이지 용도가 다 끝났으면 우리는 폐기처분하면 되지 말씀이 주관할 문제지 우리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다 말이지요.
아브라함에 누가 달라붙었습니까? 멜기세덱이 달라붙었지요. 멜기세덱이 일부러 찾아온 거예요. 그리고 아브라함은 자손을 낳습니다. 계속 자식을 낳잖아요. 멜기세덱은 달라붙고 떨어져서 관람하고 있다가 나중에 아브라함이 낳은 마지막 자손이 누굽니까? 예수님이죠. 예수님과 멜기세덱이 하나가 돼버려요. 그동안 아브라함은 이용해 먹은 거예요.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이삭, 야곱, 야곱에는 아들이 몇 명입니까? 12명. 12명이 얼마나 몸부림 치고 살려고 했습니까? 그 모든 것을 멜기세덱은 지켜보는 거예요. 이 모습이 바로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미리 구약에다가 빨간 양탄자를 깔아놓았다는 그 취지를 멜기세덱을 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아브라함을 만났고 헤어진 것 같지만 헤어진 게 아니고 멜기세덱이 품고 있던 메시아의 그 본질을 이제는 누가 펼치는가? 멜기세덱은 가만히 있고 누가 펼칩니까? 아브라함이 역사 속에 남기면서 결국은 끝이 바로 멜기세덱 그 분으로 일치시키는 겁니다.
히브리서7장3절에 보면,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멜기세덱은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서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 했잖아요. 없다. 없다. 전부 다 없다 예요. 그것에 비해서 아브라함은 있다. 있다. 있다 예요. 있다는 것은 없음을 위해서 봉사해야 된다, 이 이야기입니다. 지금 우리는 있잖아요. 없는 분을 위해서 봉사해야 되는 거예요.
주님은 지금 본적도 없고 의료보험증도 없어요. 없어요. 없지만 있는 우리가 없음을 위해서 존재했다는 것이 골로새서 1장 15장 16절 말씀입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그 분을 위하여 우리가 만들어졌다 이 말입니다. 없는 분을 위해서 있는 우리가 만들어진 거예요. 우리가 만든 건 아니고 투쟁하는 형상, 주님께서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증거 하라고 투쟁하는 겁니다.
히브리서6장에서 강조하는 것은 십자가입니다. 히브리서 전체가 마찬가지지만. 십자가 시대의 의미를 보여줄 수 있는 구약의 유일한 사람은 멜기세덱입니다. 왜, 그것은 지상에 있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잠시 등장했다가 사라지잖아요. 아비도 없고 족보도 없고 이것이 새 언약에 부합되는 새 언약에 신분, 새 언약의 성도의 신분과 부합됐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아들, 천사와 같이 방불 되는 천사와 유사한 사람이다. 이러한 존재입니다. 천사와 유사한 사람.
그래서 오늘날 이 시대의 우리들의 사고방식은 내가 천사다. 어차피 우리는 천사처럼 돼요. 나중에 죽어서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안가고 우리는 결국 천사와 같이 된다 했으니까.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잖아요.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고 산 자의 하나님이라 이야기하면서 우리는 천사와 같이 된다 하니까. 그러한 인식을 우리가 스스로 가져야 되는 겁니다. 그런 가짐을 위해서 이 세상에 우리 육신이 있잖아요. 그럼 육신이 있다는 것은 이건 있음이고 눈에 보이는 것이고 눈에 보이는 것은 결코 눈에 보이는 자체가 그 목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뭔가 배후에 있는 분을 위해서 지금 우리는 무대 밖에서 그림자 연극을 하고 있다, 이리 보시면 되는 겁니다.
따라서 어떤 성경을 해석하더라도 멜기세덱을 거론하는 이유는 현재 너 자신을 위해서 말씀이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언급하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뭡니까?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분의 맹세, 보이지 않는 분과 보이지 않은 사이에 일어난 맹세를 이루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이용한 것처럼 이제는 너희를 이용하겠다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아브라함 언약을 위해서 아브라함이 이용당했다면 오늘날 우리는 새 언약을 위해서 십자가 사건을 위해서 우리는 이 땅에서 철저하게 지금 이용당하고 있는 중입니다. 즐거워하시기 바랍니다.
그 맹세의 특징이 뭐냐, 거짓말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18절 읽어보세요.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하나님은 거짓말 못한다고 했지요. 하나님은 거짓말 못한다고 했는데 제가 대전강의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속인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어떤 사람이 해명하라고 썼는데, 내가 문재인도 아니고 내가 왜 정상회담 초고를 내가 어디 위반하지 않으려고 해명해야 돼요? 내가? 참고인 조사를 받아야 됩니까? 8시간 동안.
안티, 반 메시아, 다른 메시아로 오시는 겁니다. 거짓말하지 못한다고 하니까 우리는 진짜 거짓말인지 아닌지를 측정에 나설 수 있는 입장이 못 돼요. 우리는 도리어 우리에게 거짓말하는 하나님으로 찾아와 가지고 참말이 어떻게 너에 의해서는 거짓말이 되는 원인이 바로, 문제는 바로 니한테 문제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그런 참말로 주께서는 오시는 거예요. 그런 맹세로. 그러니 맹세를 우리가 “야, 주의 맹세는 믿겠다.” 이런 것이 아니고 “아이고, 이런 맹세는 거짓말이야.” 라는 식으로 진짜 맹세가 우리에게 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도 참 어려운 문제가 있는 게 거짓말이라고 다 주의 뜻입니까? 그건 아니거든요. 거짓말이 섞여서 들어오면 어느 것이 진짜 거짓말인지, 우리는 가짜 거짓말인데 진리가 거짓말 티를 내는 것인지 분별할 수 있는 자질과 능력이 우리한테는 없어요. 그러면 어떻게 판정하느냐, 히브리서 6장6절에 보면 뭐냐, “십자가에 죽었다는 것은 사실이 맞잖아.” 이리 되는 거예요. 어쨌든 어떤 아저씨가 33살 아저씨가 죽었잖아! 죽었는데 그 사울이란 사람은 그것은 그냥 정치범이라, 예수라는 이름의 자칭, 자칭 메시아고 그래서 나는 자칭 메시아를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겠다는 것이고 그 뒤에 바뀐 사도바울은 뭐라고 합니까? 자칭 메시아가 자칭 메시아가 아니고 “아이고, 그게 진짜더라.” 이 말이죠.
그러면 누가 가짜에요? 하나님 잘 믿는 내가 한 번도 예수를 만나본 적 없기 때문에 나는 가짜인 줄 몰랐는데 막상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만나보니까 가짜가 따로 없더라. 내가 살았던 모든 여호와, 삼위일체, 내 뱉는 모든 것이 메시아가 전부다 가짜에서 나온 죄들밖에 아니라는 사실을 안겁니다. 죄들뿐이라는 사실을 자기가 비로소 알고 죄인 중에 괴수라고 한 겁니다.
‘나는 항상 가짜다.’ ‘all unright' 그러니까 가짜를 통해서 진짜를 성립시키는 그 하나님의 솜씨를 보세요. 놀랍지 않습니까? 가짜로 가짜를 가지고 천국을 보내시는 이 놀라운 솜씨! 얼마나 대단합니까? 우리는 할 말을 잊어버립니다. 살아가는 게 가짜인데, 나 밖에 모르는데 이 가짜를 주님 중심으로 살아가야 될 천국 사람으로 바꿔주시는 이 놀라움. 그게 바로 말씀의 위력입니다.
그러면 그걸 어떻게 하는가, 그게 2~4절입니다.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데 나아갈찌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이게 가짜입니까? 진짜입니까? 진짜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진짜 하늘의 은사를 맛본 게 진짜지요. 진짜 맞잖아요. 그렇죠? 고거 가짜입니다. 분명히 성령에 참예를 받고 은사를 받았으니까 누가 때려서 죽더라도 나는 간다. 라고 여겼던 사람에게는 뭐가 누락됐어요? 십자가 새 언약이 누락 됐어요. 이 시대가 무슨 시대입니까? 새 언약 시대에요. 십자가로 결말지어야 되고 십자가 보이는 그 막장으로 가야될 걸 십자가 보기 이전에 중간에 새서 중간에 빠져버렸어요. 나는 구원받았다! 이러고 중간에 새버렸어요. 6.25때 폭탄 맞아 죽는데 나는 살았기 때문에 나 이제 부흥사다! 이거 옆길로 새버렸어요. 이것도 죄입니다. 하면 그 사람은 살았어요. 왜? 새 언약이 나와야 되니까.
아들, 딸에게 나는 못된 소리했다. 나는 나쁜 여자다! 이건 안돼요. 나쁜 여잔데 그래도 구원받았다! 이리 되어야 돼요. 이게 구원 받았어요. 그러니 걱정할 거 하나도 없어요. 원래 그래요. 원래 그렇고 앞으로 더 심하게 나올 수 있어요. 자기가 소스라치게 오그라들도록 깜짝 놀라요. 어떻게 그런 심한 말을. 할 수도 있어요. 살날이 창창하니까. 어떤 경우라도 후회하지 말라했지요. 제가. 더 나아갑니다. 반성하지 마세요. 막살고 반성하지 말고 막살고 후회하지 마시고 그거 회개랍시고 하지 마세요. 그냥 회개 당하세요. 회개하지 마시고 회개당하시고 기도하지 마시고 기도 당하시고. 후회하지 마시고 후회 당하세요. 항상 수동형입니다. 항상 수동형으로 살아야지 능동적으로 나서겠다면 그건 안 됩니다.
예수님 십자가 증거 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지 주의 주권이야기하면 큰일 날 이야기입니다. 주권이 아닙니다. 새 언약입니다. 십자가 언약입니다. 우리 앞에는 모든 것이 죄가 되고 따라서 압니다. 성도는 압니다. 성도는 내가 두 번 세 번 망해져도 안 망할 때보다 똑같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아요. 후회하고 그 짓하고 후회하고 또 그 짓해도 그 짓 안하고 10년을 버텨도 열 번한 거 하고 똑같이 십자가 앞에서는 죄인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 십자가는 변경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이런 질문을 안 해요. “그런 짓을 해도 망합니까? 안 망합니까?” 그런 질문 자체가 나올 수 없는 시대에 우리가 도립한 거예요. 왜, 우리는 이용당했으니까. 이용당한 자가 왜 그리 말이 많겠습니까? 이용당한 자가.
하나의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야구를 너무 잘해요. 이 승룡 코치 아십니까? 우리는 복음만 생각하기 때문에 그건 모르죠. 이 승룡이가 잘 치면 일본 가서 약 50억 받을 수 있는 선수인데 우연히 사기꾼을 만났다 칩시다. 사기꾼이 “너는 그렇게 해가지고는 야구선수는 끝났어. 그냥 백수야.” “아, 그러면 어쩌면 좋습니까?” “내가 연봉 한2000천만원 줄게. 계약하자.” “아이고, 고맙습니다. 내 생명의 은사입니다.” 그래, 2000받아도 니 실력으로는 2000도 가해. 속으로 웃겠지요. 니는 일본가면 50억 짜리야. 알지만 사기를 치기 때문에 2000만원도 내가 애써서 준거야. 하고 속으로 웃지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선생님, 제가 지금 폼을 이렇게 치면 됩니까? 어떻게 반성하고 어떻게 회개하면 됩니까?” 할 때 “아이고, 니 맘대로 해!”하잖아요. 이미 새 언약을 모르는 상태에서 제가 타락하면 돼요? 안 돼요? 타락 안하고 버티면 구원받습니까? 라는 말 자체가 십자가를 모르는 사람한테는 이게 해당된다? 안 된다? 아무 소용없는 짓이에요.
십일조를 떼어 먹었습니다. 떼먹은 거 다시 내년에 합해서 드리면 안 되겠습니까? 이미 새 언약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런 질문 자체에 대해서 “아이고, 십자가만 아세요. 그런 소리하지 말고.” 이리 되어야 돼요. “제가 어떻게 애를 때렸는데 어떻게 나쁜 짓을 했는데 두 번 다시 안하고 제가 1년 동안 회개하면 되겠습니까?” 이런 질문 자체가 나온다는 것은 시대가 새 언약시대라는 것을 모르고 옛 언약시대인 줄 알고 구약인 줄 알고 그렇게 하는 겁니다.
구약은 뭔가 흐름이 있어요. 아브라함의 흐름이 있습니다. 그 흐름은 어디서 나오는가 멜기세덱에서 나왔어요. 멜기세덱에서 나와서 멜기세덱으로 옮겨가는 흐름이 있습니다. 그 흐름을 놓쳐버리고 멜기세덱을 놓쳐버리고 아브라함은 착했다. 우리도 착하자. 세상에 야곱도 착하다. 우리도 착하자. 이렇게 나와 버리면 뭘 놓친 거예요? 진짜 그 당시에 아브라함만 쳐다보고 아브라함의 언약을 놓친 거예요.
예수님만 본받자. 예수님만 보다 예수님의 새 언약을 놓쳐버렸는데 안 되지요. 그런 사람은 이런 질문 자체가 그건 이미 안 되는 거예요. 그것을 가지고 8절에서는 뭐냐, 가시와 엉겅퀴라고 하는 거예요. 새 언약시대에 이런 저주받을 짓들을 그런 식으로 계속 한 거예요. 새 언약도 모르고 자기 생각, 자기가 어떤 구원의 이득을 볼 생각에 거기에 매진하고 있는 겁니다.
5절에 보면,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은 우리 인간하고 타협이나 흥정하지 않고 철저하게 이용한다. 이용하는데 어떤 사람들을 이용합니까? 성령의 은사를 맛보고 버리더라도 그 사람은 나한테 항의할 수 있다? 없다? 항의 할 수 없어요. 왜 항의 할 수 없느냐 하면, 하나님은 우리 실력보고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누구하고 흥정합니까? 멜기세덱의 반차, 멜기세덱의 계열, 예수님과 의논해서 구원을 결정했기 때문에 우리가 타락하나 안하나 상관없이 우리하고 안 하기 때문에 그 사람을 배제한다고 해서 그 사람은 섭섭할 일이 있다? 없다? 섭섭할 이유가 없어요.
이 비정하고 냉정한 시대가 새 언약시대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택한 자만 건지는 새대! 그 사람은 십자가라 하는 것은 절대로 양보 못하는 것을 능히 알기에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타락하고 안하고 의미 없음을 성도는 압니다. 왜, 십자가만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 타락 같은 것이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지가 타락했다고 생각하는 그 타락은 그건 본인이 잘못 오해한 타락이에요. 사람이 아무리 나쁜 짓해도 타락이 안 됩니다. 본인이 타락에 대해서 진정한 경험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래요. 한 번 성령 받은 사람은 타락이 성립 안 되기 때문에 자꾸 가짜 타락만 자꾸 염두에 둔다면 그것은 의미 없는 거예요. 기분 좋지요. 정말 세상에 이런 복이 어디 있습니까? 타락해도 타락이 안 되는 시대! 그런 사람의 존재가 된다는 사실.
그런데 가짜는 관심이 누구한테 있습니까? 내가 타락하겠느냐, 타락 안 하느냐, 사느냐, 죽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이건 지가 셰익스피어도 아니고 만날 문제가 주님 생각 안하고 주님과 아버지와 이야기 끝났다는 생각은 안하고 만날 내가 어떻게 대체하느냐에 따라서 운명은 내가 결정한다는 식이에요. 내 계시는 내가 만든다. 이게 인간들의 생각 아닙니까? 내 살릴 방책은 내가 만든다. 이게 인간들의 잘못된 생각입니다. 인간이 못 만들어요. 만들 필요도 없고. 아브라함이 이삭 낳고 싶어서 낳는 게 아니거든요. 아브라함은 멜기세덱 때문에 만나고 난 뒤에 아이를 자꾸 낳아야 돼요. 낳아서 그 자식이 결국 멜기세덱과 만나도록 해줘야 그 아브라함의 반열이 곧 멜기세덱의 반열이 되거든요. 소급적으로 해석하면 그렇게 되는 거예요. 하늘의 철도가 땅에 철도를 깔았다 보면 돼요. 땅의 철도는 하늘 철도의 그림자라 보면 돼요. 하늘에는 구름 떠있고 땅에는 그 그림자가 가는 거예요.
아브라함의 자손 낳는 모든 과정과 또 이삭이 야곱 낳는 그 과정 속에는 그게 땅의 일이 아니고 사실은 하늘의 언약이 개입된 도장 파듯이 하늘의 계시가 예정된 계시가 미리 후벼 판 거예요. 도장 파듯이, 이름 파듯이, 이름을 새겨 보니까 다 같이 그 이름이 예수라. 다 예수이름이 새겨진 거예요. 멜기세덱의 이름이 새겨진 거예요.
끝으로 하나만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이용당했어요. 이용당하기 때문에 저는 어떻고 라는 말 할 자격이 못되고 마음껏 주님에 의해서 이용당할 때 이미 우리는 거기서 천국생활은 이미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천국생활 하는데 이 세상자체가 지옥이기 때문에 애굽의 영향을 받잖아요. 이씨~ 나는 뭐 예수 믿고 얻은 것도 없고. 이런 생각하면 이용당한 게 아니고 수동적이 아니고 갑자기 누가 됐어요? 내가 평소에 예수님을 이용하려 하다가 잘 안되니까 입이 대발 나와 가지고 “나를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어도 됩니까?” 주님께서 “뭐가 비참한데?” “지금 내 모습 보세요. 비참하거든요.” “비참한 것은 잘 먹고 사는 이건희가 비참하다.” 그들은 복음도 모르지 성령도 안 받았지. 진짜 비참한 사람을 보지도 못했나? 복음 모르는 사람들이 비참한 사람들이에요.
그게 마지막 만찬이거든요. 마지막 그거 먹고 죽어요. 그들은 마지막 만찬 먹고 죽어요. 그들은 이 세상사는 게 그게 전부에요. 백날해도 나중에 요양병원에 다 모입니다. 잘 먹으나, 못 먹으나, 잘 나나, 못 나나, 요양병원에 가면 거기 다 있어요. 물론 요양병원도 차이가 있어요. 200만원짜리도 있고 다 있겠지요. 그러다가 죽을 때가 되면 객기 부리는 것은 집사고 장로고 관계없이 전부 다 똑같이 그렇게 다 되는 겁니다.
한 가지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철저하게 이용당하는 거 죽을 때까지 주님 앞에 이용당해서 나의 증인되지 마시고, 주의 증인되시기 바랍니다. 새 언약 시대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저희들 이용하셨습니다. 안 봐도 되는데 돈 생기지도 않는 말씀을 봤습니다. 하지만 십자가를 통해서 세상의 전부를 알게 하시고 우리는 잠시 나타나 사라진 존재인 것을 실감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