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131213a-히6장9절(구원의 요건)- 이 근호 목사
히브리서6장9절을 보겠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나은 것과 구원에 가까운 것을 확신하노라”이리 되어 있지요. 구약에서의 구원이라 하는 것은 먼저 애굽나라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애굽나라에서 어떤 단체가, 나라가 나왔을 때에 그게 구원이 되는 겁니다. 구원이 되려면 애굽나라가 먼저 있어야 되고 그 어느 누구도 애굽나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겁니다.
고구마 하나 삶는 것도요, 솥이 있어야 되지요, 물이 있어야 되지요, 가스 불 켜야 되지요, 고구마 삶는 것도 빽빽빽 시끄럽게 돌아가야 되듯이 구원에도 요건이 있습니다. 구원의 요건이 무엇이 있는지 알아볼까요. 먼저 무엇부터 있어야 되겠습니까? 솥이 있어야 되지요. 애굽이란 솥이 있어야 되고, 10가지 재앙이 있어야 돼요. 애굽에서 압력이 압력밥솥에서 압력이 가해져야 돼요. 압력이 가해지면 신음소리, 픽픽 소리가 나지요. 극도로 신음소리가 나야 되지요. 지금 제가 이야기한 것이 구원의 요건입니다.
나중에 애굽은 이 세상은 어두운 세상을 말합니다. 어두운 세상의 압력이 있어야 되고 압력밥솥의 신음소리가 있어야 되고 그 신음소리가 시끄럽다고 하늘에 상달돼야 되겠지요. 하늘에 상달되면 하늘에서 10가지 재앙을 내리 게 돼있습니다. 10가지 재앙을 내리면서 압력을 행세한 쪽은 구원에서 제외가 되고 압력을 받은 신음소리를 냈던 자는 여기서 빠져나오는 방식이 구원의 방식입니다.
가만히 앉아 성경공부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이러한 요건이 주워져야 돼요. 그렇다면 여기서 압력을 할 때 사람들이 오해를 한 게 있어요. 뭐냐 하면, 원래 주인이 종한테 압력을 가합니까? 종이 주인한테 압력을 가합니까? 어느 쪽이 맞습니까? 채찍 들고 설치는 것이 주인이고 얻어맞는 것은 종이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누가 주인이고 누가 종이냐 하면, 아브라함 언약을 받은 사람들이 주인이고 그 외에는 저주 받아야 될 종이 되는 겁니다. 주인이 채찍을 휘둘러서 지배를 해야 정상인데 오히려 하나님을 모르는 저주받을 종들이 채찍을 가지고 주인장 되시는 히브리인들을 이렇게 횡포를 부리는 거예요.
횡포를 부릴 때, 상당히 말이 안 되잖아요. 주인이 종 되고 종이 주인 됐으니까 상당히 억울하잖아요. 그런데 그러한 억울함을 겪어서 진짜 주인은 여기 히브리인들도 진짜 주인이 아니고 애굽인들도 진짜 주인이 아닙니다. 진짜 주인은 주되시는 분이 따로 있어요. 주 예수 그리스도에요.
어제 수요 설교할 때, 애굽에서 출애굽했던 것이 이스라엘이 아니고 하나님이 출애굽했다는 이야기를 했지요. 보통 출애굽은 이스라엘이 출애굽했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이 빠져나왔는데 이스라엘은 오해했어요. 자기들이 애굽에서 나왔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를 들면, 서울대공원에 있는 사자가 우리에서 빠져나오면 그게 인간됩니까? 아니지요. 우리에서 빠져나와도 맹수잖아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오해한 거예요. 애굽에서 빠져나온다고 자기가 백성이라고 오해한 거예요. 인간이 안 된 주제에.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뭐냐, 애굽에서 빠져나와 약속의 땅에서 살면서 진짜 헤딩을 하는데 팍! 하고 박치기를 하는데, 제대로 박치기를 하는데 바벨론이라는 벽에다가 박치기를 하지요. 박치기를 하니까 튕겨 나오잖아요. 박치기 하니까 무섭잖아요. 무서우니까 기껏 도망가는 것이 하나님께로 가는 것이 아니고 애굽을 그리워해요. 내 몸이 애굽을 기억해요. 하는 것처럼.
누리려고 해도 못 누려요. 내 몸이 애굽을 기억해요. 예를 들면, 코미디 프로에 있어요. 옛날 포장마차 했던 사람들이 갑자기 돈 벌어 놓고 고급 식당에 가서 누리고 싶은데 이 몸이 포장마차를 기억해가지고 자기가 손님인데 “아이고, 손님 어서 오세요.” 하고 갑자기 튀어나오는, 옛날 버릇이 나오는 것처럼.
이스라엘 사람들이 구원은 하나님께 했다고 백날 이야기하지만, 실제로서의 해결책은 보다 더 돈 많고 보다 더 힘세고 보다 더 세상적인 것에 의지해서 자기를 압제하는 것에 대해서 구원을 해볼까하는 시도를 하게 되는 겁니다. 들어보니 옛날이야기 아니지요. 오늘날 우리 이야기 아닙니까?
살기 힘드니까 주님께 붙들어야 되는데 살기 힘드니까 돈 많은 홀아비 없는가, 이런 생각하는 거예요. 아내는 죽자고 악착같이 한 푼 두 푼 모아서 집 한 채 마련하고 살아보려고 애를 쓰는데 겉만 번지르르한 백수 남편은 회사 들어갔더니만 했는데 높은 젊은 이사하고 눈맞아가지고 실컷 농락해놓고 나중에 팬티바람으로 쫓겨 나오는 그런 것도 있어요. 왕가네 식구들 주말연속극 있어요.
보다 더 돈 많은 사람, 보다 더 권세 있는 사람, 보다 더 건강한 사람이 주어지게 되면 이게 하나님의 구원인양 생각하지요.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끄집어 낼 때, 몸만 나온 게 아니지요. 애굽적인 종교, 관습과 사고방식, 세상관 다 가지고 나왔어요.
그 애굽이 갖고 있던 종교관이 뭐냐 하면, 약속의 땅에서 그들은 우상을 보고 좋아서 환장한 거예요. 그것은 마치 창기가 멋있는 남자보고 자기 몸을 스스로 루즈 칠하고 멋있게 꾸며서 어떻게든 그 사람의 여자가 되고 싶어서 환장한 것처럼 그렇게 설치는 에스겔23장의 내용입니다. 그 내용과 똑같이 되는 거예요.
그 내용이 그거에요. 비로소 니 본색이 여호와 구원, 십계명, 제사 어떻고 저떻고 백날해도 소용없고 니 몸이 애굽을 기억해요. 대중노래 가사에도 그런 게 있어요. 당돌한 여자라는 노래가 있거든요. 술 한 잔 사주실래요. 당신여자이고 싶었어요. 그거 보면 에스겔23장이 생각나요.
구원의 조건이 이미 구약에서 이렇게 마련을 했으면, 구원의 조건을 경험했다고 해서 구원의 조건을 만드는 존재는 아니에요. 누구한테 경험했다고 해서. 내가 이발을 했다고 해서 이발 깎는 이발사는 아니잖아요. 이발 깎였지. 머리카락 깎였을 뿐이지 머리카락 깎는 사람이 아니다 말이죠. 이발을 했다고 해서 이발 기술을 갖고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들이 구원받았다고 해서 구원하는 요건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기술은 없는데 이 사람들이 오해하는 거예요. 구원받았기에 이제는 그 구원을 자기 힘으로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오해도 이런 엄청난 오해가 없어요. 기존교회도 마찬가지에요. “여러분, 구원받았습니다. 구원을 유지해야 됩니다. 유지하는 방법을 제가 알려드리겠습니다. 십일조내세요.” 이리 계속해서 하는데 자기가 스스로 구원하는 요건을 만들어 내지를 못하면서 만드는 척하는 그것이 애굽의 종교로 우상숭배자로 이스라엘 전체를 변질시키는 겁니다.
예를 들면, 사울 왕이 전쟁을 할 때 반드시 제사를 지내면 효과 있더라, 알았던 거예요. 전쟁을 하기 전에 무조건 여호와 앞에 제물 드리고 제사 드리면 반드시 이 전쟁은 승리하더라, 하는 그런 것을 한 번 경험했기 때문에 구원을 경험한 거죠. 경험했다고 해서 제사 드리면 전쟁에서 승리한다는 인간의 본색이 드러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제사를 드릴 때가 됐는데 사무엘이 오지를 않는 거예요. 제사장이 오지를 않는 거예요. 약속시간이 됐어도 오지를 않았어요. 누가 약속을 어겼느냐 하면, 사무엘 선지자가 약속을 어겼어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사울 왕이 제사를 드렸지요. 드렸는데 완전히 하나님한테 책망을 받지요.
사무엘이 와가지고 “내가 오지도 않았는데 왜 제사를 드렸습니까?” “약속시간이 지나서 왔잖아요.” 누가 잘못하고서는 우리한테 따지기는 하며 싸운 거예요. 제사 드린다고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예수 믿는다고 얘기함으로서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제가 여러 번 이야기하지만 구원받을 방법은 우리한테는 없습니다. 이미 쫓겨났는데 구원은 없습니다.
신천지의 가장 큰 문제점은 바로 구원 받는 방법을 정보를 자기가 입수한데 문제가 있는 거예요. 처음부터 잘못 됐어요. 어떻게 하면 구원받습니까? 출발점이 잘못된 거예요. 출발점이. 기존교회도 다 마찬가지이고. “어떻게 구원받습니까?”가 아니라 “이발 깎인 사람들 손 들어보세요.”이게 바로 교회에요.
그러니까 주님한테 구원받은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주님한테 구원을 받으면서 구원받은 당사자가 구원의 요건에 포함이 돼있습니다. 사람에게 버림받은 분이 모퉁이 돌이 되었지요. 그러면 그 모퉁이 돌에 합세해서 구원을 받으려면 같이 사람들한테 버림받은 벽돌이 되어야 돼요.
예수님을 버릴 때, 사람들이 버린 이유가 “우리가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겠습니까? 천국 가겠습니까?”에 대해서 예수님이 일체 말을 안했지요. “너희 애비가 마귀인데 무슨 구원을 받아.” “너희 애비가 마귀인데 마귀도 구원하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네.” 이렇게 해서 튕겨 나왔거든요.
구원받은 사람도 마찬가지에요. “어떻게 하면 당신처럼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구원받긴 개뿔이나 구원받아, 주님이 찾아와야 구원받지. 구원받을 방법 없는데.” 이러다가 이상한 사람이네 하고 같이 튕겨져 나가는 거죠. 그렇게 튕겨져 나온 벽돌 하나, 하나가 모아서 성전이 되는 거죠.
우리나라가 우주선 매일 실패하잖아요. 나로호. 연기했다가 성공하고 돈만 날리고 하는데. 거기에 부속품 하나, 하나가 작은 부속품 하나가 고장 나도 날지를 않아요. 어떤 때는 날아 가다가 애들 폭죽 올라가다가 풍선 바람 빠지듯이 픽! 하고 바다에 빠져버리지요. 부속품 하나가 고장 나면 그리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천국을 받아들일 때 부속품 하나라도 신중히 해서 받아들입니다. 자기가 머리 깎고 온 사람 안 받아줍니다. 노아방주 보세요. 노아방주 할 때, 방주 만드는 것은 노아가 만들었잖아요. 누가 탔습니까? 만든 사람이 들어갔고 안 만든 사람들, 바로 옆집 사람도 가진 않았어요. 통장도 못 들어갔어요. 못 들어갔다니까요.
노아가 만든데 간 거지요. 노아가 구원 받은 자체가 방주의 요건이 된 겁니다. 방주를 만들면 만들수록 느껴지는 것은 ‘아! 이거 아무도 이 방주에 안 들어오는 것이 정상이다.’ ‘인간으로 생겨먹은 인간들이 이 예수 믿는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소리야, 어떻게 인간이 예수를 믿어.‘ 라는 생각이 들으시면 여러분들은 구원의 방주에 타신 겁니다.
‘내가 예수를 믿다니? 이 딴 거 안 믿어도 되는데 왜 믿어? 이건 말도 안 돼.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라고 느낄 때,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니 구원은 어려운 게 아니고 불가능이에요. 그래야 오늘의 본문이 설명이 돼요. 안 그러면 오늘 복음의 설명이 안 됩니다. 본문은 조금 있다가 들어가 봅시다.
구원에서 구약이 중요하니 다시 이야기할게요. 사울이 전쟁을 할 때, 제사를 드려야 된다, 라는 것은 자기가 어떤 효능, 효과 하나님의 축복의 효과를 자기 쪽에서 생산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 그것이 바로 애굽에서 나올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함께 들고 나온 거예요.
그래서 애굽에서 두 가지 나왔어요. 애굽적인 요소도 나왔고 하나님도 같이 나왔고. 하나님의 모습은 어린양으로 나왔고, 애굽적인 요소를 가진 자리에 튀어나온 그들이 바로 이스라엘이었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온 게 아니고 사실은 이스라엘 속에 애굽이 담겼으니까 애굽에서의 탈출이 아니라 애굽의 이동이 되겠지요.
애굽의 이동이고 가나안 땅의 애굽의 정착이고 결국은 이스라엘 자체가 애굽나라화 되면서 거기서 빠져나온 사람들이 듬성, 듬성 있었는데 그들이 누구냐 하면, 바로 ‘선지자들’입니다. 선지자의 팔자와 운명이 꼭 출애굽 그 당시의 히브리인들의 팔자 같아요.
신음을 하게 돼있고 억압을 받고 신음을 하고 하나님께 호소할 때, 하나님이 그들을 건져내시고. 그 요건 있잖아요. 다시 할게요. 원래는 억압은 누가 해야 돼요? 주인이 종한테 해야 되잖아요. 야곱에게 축복했잖아요. 에서에게는 저주를 했지요. 지난 낮 설교가 그거였어요. 야곱은 축복 받았고 에서는 저주받았다. “저한테 돌아올 남은 축복은 없습니까?” 할 때 이걸 몽땅 털어서 축복을 준다 했지요. 주인과 종의 관계지, 양쪽을 챙기고 각각 가는 게 아니라 했지요.
천국과 지옥은 같이 엮어져 있어가지고 만약에 어떤 사람이 지옥에서 불쌍하다고 지옥에서 10년 살다가 “아이고, 고생 많이 했다. 나와라.” 하고 풀어주게 되면 지옥에 가는 문제가 아니고 지옥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고 천국에 10년 살다가 “많이 살았지? 이제 나와! 그만 살아.” 이렇게 돼버려요.
그러면 천국 간 우리는 뭐예요? 안되잖아요. 아예 우리가 천국에 영원히 살기 위해서는 어느 쪽도 저 쪽에서 영원히 못 빠져나와요. 지옥에 가서 영원히 못 빠져나와야 돼요. 그걸 어린이 놀이터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시소라고 했지요. 시소는 특징이 혼자서는 못 놀아요. 절대로 혼자서는 못 놀아요. 한 쪽에서 내려가 줘야 한쪽이 올라가게 돼 있어요. 한 쪽이 땅바닥을 쳐야 한 쪽은 위에서 바라보게 돼 있다 말이지요. 위는 복 받은 자고 땅바닥은 저주받은 자고 저주받은 쪽이 지옥이고 이쪽이 천국이고 그런데 이 세상은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했지요.
천국 갈 사람은 이 땅에서 핍박을 받고 지옥 갈 사람들이 대장질하게 만드는 이유가 있어요. 그것은 장차 오실 예수님께서 구원의 증표로 징후로 유일한 구원이 과연 있고 천국이 실제로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유일한 사인, 그 증거물이 뭐냐,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려면 예수님 삶은 이 땅의 모든 인간들과는 반대로 거꾸로 사는 삶이 돼야 되지요. 그 분은 본체 하나님이시나 하나님 되심을 거절하시고 도리어 무슨 형체를 가졌다 했습니까? 하나님의 형체 영광을 가져야 할 분이 갑자기 종이 돼버려요.
내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고 온 것이 아니고 오히려 섬기려고 왔다 했어요. 완전히 졸지에 종이 돼버렸어요. 종이 되었으니까 그만큼 우리를 진짜 주인 되심이 종이란 말은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종이면서도 주인도 아니면서 되지도 않는 주인 노릇을 해왔냐 이 말이죠.
주인이 행세하게 되는 특징이 뭐냐 하면, 바로 ‘자리’인데 이걸 다른 말로 하면 ‘터’ ‘자리’ 하나의 민족 국가라 하는 것은 추상적인 말이 안 되려면 터가 있어야 되고 자리가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 국가가 돼요. 그런데 지금도 분명히 집시는 민족이잖아요. 민족인데, 그들을 국가라 하지 않지요. 왜 이 사람들이 국가가 아닙니까? 뭐가 없어요? 자리가 없고 터가 없어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히브리서11장에 보면, 그들은 이 땅에 뭐가 없습니까? 자리, 터가 없어요. 그래서 그 후손들도 결국은 애굽나라에 갔는데 애굽나라에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터를 자리를 허용치 않지요.
사람이 자기가 주인 노릇하려면 뭔가 이렇게 월세 방이라도 전세방이라도 뭔가 터가 있어야 요거 안에서는 자기가 선악 따먹은 그 행세를 해요. 우리 몸이 선악과를 기억해요. 우리 몸이. 그걸 따먹는 날에는 천하에 누가 와도 나만은 내가 주인공이 되고 이 역사의 주인공, 이 현실의 주인공, 실제 살아있는 지금 현재의 주인공은 누가 뭐래도 나인 거예요.
엄마들이 자식이 나쁜 짓을 해서 남한테 해 곶이해서 운전해서 사람을 죽였다든지 남한테 해괴한 짓을 해서 온갖 타인에게 상처를 입혀도 자기 자식이 유치장에 앉아있으면 면회 갑니다. 면회 가서 “누가 니보고 아무나 욕해도 나는 아이고, 나는 내 새끼! 내 강아지! 나는 니가 뭐라도 니를 끝까지 사랑할거야.” 그렇게 하지요. 어머니의 사랑은 과도하지요.
과도한 어머니의 사랑이지요. 제일 비싼 거, 애들 용품 외제, 애들 옷도 제일 비싼 거, 뭐라도 내 새끼한테는 남한테 기죽지 않게 제일 좋은 거, 스마트폰도 제일 일찍 사주고, 자식 사랑 그게 뭐냐 하면, 우리 애 기죽지 않게 내 몸이 선악과를 기억해요. 선악과 따먹을 때 마귀가 뭐라고 했습니까? 니가 따먹게 되면 지옥 간다, 이리 했습니까? 마귀는 거짓말만 할 줄 알아요. 왜 참말을 못 합니까?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이거 따먹으면 나처럼 지옥 간다. 이랬더라면 아담이 따먹었을까요? 안 따먹었을까요? 안 따먹었지요. 이게 구라를 해도 김 구라보다 더해.
구라를 쳐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선악을 따먹는 날에는 니가 정녕 하나님처럼 된다.” 처음에 아담은 그랬지요. 이미 우리가 아담 후손인 이상은 우리는 따먹었던 그 본성에서 그게 우리의 터가 돼요. 우리의 자리가 되는 겁니다. 이제는 말릴 수도 없어요. 이건 신도 아니면서 신인 것처럼 행세하고 싶은 이 욕망, 이 탐욕에서 우리는 발을 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일진회 같고 조폭 같아요. 돈이 없어 힘이 없어 조폭 못하지 돈 좀 있고 힘깨나 쓰면 조폭하지 말라 해도 다 조폭해요. 집사님이 갑자기 이 집에서 20층 빌딩을 세우면 이 동네 조폭 할 거예요. “이 부동산들, 나 때문에 빌어먹고 사는 인간들, 똑바로 해!” 이렇게 된다고요.
그걸 우리의 모든 인생의 유일한 희망이 있다면 그동안 말을 표현 못했는데 이제는 표현하세요. 우리는 조폭들, 우리는 내가 주인이 되는 것. 내가 스스로 나 있음으로 자족하는 주인공으로 사는 것, 역사의 주인공, 시대의 주인공, 영웅이 되는 것, 그것이 우리의 숨길 수 없는 우리의 포부입니다.
이것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나 교회에 가나 교회에 가도 노골적으로 더 들통 나지요. 엎드려서 울면서 기도하는 게 뭐냐 하면, 언제쯤 저로 하여금 신이 되게 해 주실 겁니까? 언제쯤 내가 일대에 이 시대에 영웅이 되겠습니까? 내 자식은 언제 커서 민족과 국가를 교회를 위해서 영웅이 되겠습니까? 매일 그런 거 가지고 십자가 들고 빌고 십자가 보고 비는 게 말이 돼요? 그게?
십자가가 뭡니까? 종이 되는 거잖아요. 왜 선악과는 따먹을 줄은 알면서도 선악과는 따먹으면서 왜 그 따먹는 손길가지고 십자가는 왜 안 따먹어요? 선악과 따먹어 입에 꿀꺽 삼키지 말고 십자가 입에 집어넣어가지고 따먹으란 말이죠.
성령이 오게 되면 선악과가 본인이 아니지만 성령에 의해서 들어오게 돼요. 들어오게 되면, 미국영화에 헐크라는 게 있어요. 갑자기 얼굴이 변화면서 몸집이 커져요. 속옷 다 찢어지고 바지 다 찢어져요. 호르몬의 작용 이상이 생겨서 두루루 다 찢어지지요. 성령이 임하면 나라는 내 자리가 두루루 다 찢어져요. 갈기갈기 다 찢어져요. 그래서 뭐든지 내 뜻대로 안되면 성령이 임한 줄 아시기 바랍니다. 뭐든지 내 뜻대로 안돼요. 니 주인이 따로 있다는 거예요.
주인이 나로 하여금 예수님처럼 살게 하기 때문에 바깥으로 떨어져 나가는 속옷이나 바지는 뭐냐 하면, 어떻게 하면 나는 주인공이 될까, 어떻게 하면 이 시대에 영웅이 될까, 이런 것들이 완전히 헝겊조각 넝마처럼 다 찢습니다. “영웅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그래서 하나님 뜻은 이거에요. 제가 글에 댓글을 남겼지만, 이 땅에서 도시 한복판에 주차하고 싶어요. 어떤 주차자리에 주차하고 싶어요. 왜냐 하면, 그게 누구 터입니까? 그거는 내 자리입니다. 주차 잘했다고 하는 순간 어느 날 성령이 오셔서 밤중에 견인해 가지고 폐차장에 집어넣어버리는 거예요. 그 폐차장이 십자가에요. 폐차장에서 너를 다시 발견하는 겁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 예수님 믿었으니까 그만 됐습니다. 이제는 건드리지 마세요. 조용하게 살겠습니다. 하고 있는데 조용하긴 어딜 질질 끌어가지고 십자가에 완전히 폐차 만들어버리지요. 폐차의 특징은 어느 게 엔진인지 어느 게 자동차인지 구분이 안 된다는 거예요. 온통 뒤죽박죽이 돼버려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성령 받고 살아가게 되면, 청소를 해놔도 안 한 거 같기도 하고 뒤죽박죽이라, 애들 양말은 어디다 놨더라, 내복을 어디다 개놨더라, 엉망진창이에요. 매일 복음만 생각한다고. 다른 건 생각도 안나. 다 잊어버려요. 깔끔하게 살림 살려하면 성령이 가만두질 않아요. 깔끔하게 청소해놓으면 그 청소자리가 뭐가 됩니까? 나의 터가 되기 때문에. 남이 오거나 동에서 오기나 해봐라, 동이고 뭐고 아무도 못 들어와. 딱 요건 내 터니까.
그래서 20대 청년들이나 처녀들이 제일 그리워하는 것이 바로 터 확보, 그래서 30대 초반에는 총각들이 빨리 전세라도 마련해가지고 터를 마련해서 여자를 모셔오려 하는데 이건 아파트라도 있어야 여자를 모셔오던지 장가를 들던지 하지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 총각들이 아무리 무대포가 아닌 이상은 여자라도 데려오려면 같이 살 수 있는 방이라도 있어야 될 거 아닙니까? 그거 마련하는데 20대 후반부터 밤 잔업까지 해가면서 죽자고 돈 버는 거예요. 그리고 심지어는 여자도 마찬가지에요.
남자하고 결혼하는 게 아니고 남자와 결혼한 번 해보고 이거거든요. 결혼이 아니라니까요. 한 번 해보고. 해보고 잘해주면 살 거고 두 발을 다 딛지를 않아요. 한 발은 들여놓고 다른 한 발은 빼놓고. 또 돌싱이 인기 있다네. 여자들한테는. 엄마 같고 누나 같고 총각들한테는 인기 있다네. 노총각들이 돌싱을 그렇게 좋아한다네요. 해보고 빼려고. 시대가 참 이래요. 전부 다 내 자리 확보입니다.
그래서 이 내 자리 확보 이것을 인간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을 가나안 땅을 내 자리 확보 차원에서 했는데, 일단 약속의 땅을 주니까 그 다음부터는 여호와하고 잡동사니가 된 거예요. 자기 몸이 애굽을 기억하니까 애굽적인 종교, 자기가 애굽에 있을 때 했던 그 종교를 그대로 가지고 왔는데 그 종교 중에서 아주 우수한 종교가 뭐냐, 주변에 있는 강대국들이 누리고 있는 종교입니다.
그러니 그 종교에 대해서 부러워하고 그걸 흠모하고 그걸 외교적인 정책으로 해가지고 서로 교류하고 하나님은 이제 하나의 귀찮은 형식이고 그저 세상과 물들고 큰 것, 잘 된 것, 높은 것, 이런 것들과 결탁해서 세상처럼 한 번 살아보겠다고 나설 때, 그것이 바로 애굽적인 요소를 데리고 나온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계속 어린양으로 계시고.
인간의 속성이 또 잘 드러난 것이 뭐냐 하면, 창세기 11장에 나오는 바벨탑이에요. 바벨탑에 보면 우리 이름을 하늘에 닿게 하자. 우리 몸이 그걸 또 기억해요. 그러니 이름을 하는데 터가 있어야 되고 터를 높이 쌓으면 하늘까지 이어보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들이 신을 찾는 원리는 이렇습니다. 대자연과 자기 사이에 매개체로서 신을 도입합니다. 인간이 신을 좋아하는 게 아니고 인간은 뭐를 좋아하는가 하면, 대자연을 좋아해요. 이 웅장한 모든 것이 다 내 품안에 어서 오라, 세상을 내 맘대로 다루고 싶다. 할 때 맘대로 안 되니까 헬라 신 같으면, 자연을 조각 조각내요. 퀼트처럼 누벼요. 헬라의 신화는 자연을 조각, 조각 조각보처럼 다 꿰매요. 하나, 하나 전담 신을 만들어요.
전담 신을 만들어서 바다의 신은 요 신에게 빌고 곡물의 신은 요 신에게 빌고 그게 바로 가나안 땅의 바알인데, 바알의 담당은 폭풍 또는 곡물, 농사가 잘되는 곡물이 바알신이에요. 여호와는 목축과 관련된 신이라고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신을 전부 주관하지 않고 우리는 목축하는 조상의 신은 여호와고 현지인들이 농사지을 때 동원되는 신은 바알신인 거예요.
그러니까 신이라 하는 것은 애굽에서 나왔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전체를 통괄하는 신으로 생각하지 않고 자기가 지금 막상 눈앞에 보이는 것에 필요한 신들을 그 때 그 때 채용하는 거예요. 성경에 보면 궁합보는 예수님은 안 계시잖아요. 성경에 예수님이 궁합 보는 거 나옵니까? 안 나옵니까? 안 나오니까 교회 다니는 권사가 궁합보려고 하니까 점쟁이 찾아가는 겁니다. 왜, 그게 전공이니까.
예수님은 죄를 용서하는 게 전문이고 결혼 잘 되겠습니까? 하는 것은 그 쪽 중심이고 그리고 또 자손 잘되는 것은 제사중심이기 때문에 이건 조상에게 제사지내야 되고 그러니 천주교나 기독교에서는 그게 너무 찢어지니까 교회 식으로 통합하면 안 되겠나 해서 추도예배라는 것을 만들어가지고 조상에게 비는 사람은 추도예배로 대체하고 또 궁합보는 것은 상담하는 목사한테 찾아가가지고 대체하려고 하고 이런 식으로 뭐든지 기독교 성경 말씀 붙이면 다 기독교 되는 줄 알고 그런 식으로 한 것이 바로 옛날 가나안 땅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렇게 한 거예요. 지금까지 한 것을 정리해 봅시다.
하나님의 이름이 애굽에서 나왔다. 나올 때 하나님의 이름이 어린양으로 나왔는데 누구와 동반했느냐 하면, 약속의 백성인 이스라엘과 함께 동반해서 나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가 구원받았다고 여겼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애굽을 아예 통째로 어깨에 메고 하나님 앞에서의 진정한 애굽의 정체가 무엇이냐를 보여주는 역할을 하면서 약속의 땅에서 살다가 결국은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서 멸망당하고 전 세계에다 유골을 뿌리듯이 전 세계에게 다 뿌려놓은 거예요.
유대인들이 이렇게 멸망했다는 것을 사탕 뿌리듯이 뿌리는 거예요. 전 세계에 유대인들을 뿌려놨다는 말은 전 세계 사람들이 뭘 압니까? 여호와의 백성들이 여호와에 의해서 전부다 추방되었다는 사실을 전 세계 사람들이 알게 되겠지요. 그들이 모여 봤자 가짜니까.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지금까지 강의한 거 정리해 보면, 이미 구원은 하나님께서 이미 구원을 알고 있지요. 갖고 있지요. 이스라엘만 몰랐을 뿐이죠. 그런데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흩어짐으로서 진짜 주의 이름만 구원받는다는 사실, 그리스도 몸만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보여줄 수가 있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그 원리를 신약까지 한 번 가지고 와 봅시다. 오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이니까 잘 들어보세요. 새 하늘과 새 땅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언제 온다 했느냐 하면, 예수님 재림할 때 새 하늘과 새 땅이 온다고 알고 있지요. 요한계시록 21장에. 그 때 하늘에서 신부가 내려오지요. 보통 예식장에서 신부가 2층에서 내려오는 게 있어요. 신부가 단장해서 2층에서 내려와요. 하여튼 호돌갑을 떨어요. 하여튼 너무 까부는 것도 뭐해요. 여러분들 빙판길에서 제발 까불지 마세요. 빙판길에는 까부는 게 아닙니다. 대통령이라도 누구라도 빙판길에서는 소용없어요. 대통령이니까 안 넘어지겠지. 이런 거 없어요. 참으로 대자연은 점잖아요. 사람의 외모에 대해서 절대로 봐주질 않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위에서 내려오게 돼있는데 저는 이렇게 봅니다. 묵시적으로 봐가지고 이미 예수님 오실 때 그 안에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미 있다고 간주하고 오늘 성경을 보자는 겁니다. 봐버리면 이 자리가 애굽같은 어두운 세계라 하면 예수님이 오실 때, 우리는 예수님이 땅에 오셨다. 이리 하잖아요. 그러지 말고 새 하늘과 새 땅을 딛고 오셨다고 보자 이 말이죠.
그러니까 새 하늘과 새 땅이 예수님이 올라 갈 때 구름타고 올라가지요. 신천지에서는 구름 타고 올라간 것이 무슨 뜻인지 아냐, 이리 말해요. 그런 것 가지고. 오직 구원파들이 “당신은 몇 월 몇 시에 언제 구원받았습니까?” 그것 가지고 따지는 것처럼. “구름의 진정한 의미를 아십니까?” “실제로 구름타고 온 줄 아십니까?” 이리 하는 거예요. 그러면 사람은 아이고, 새로운 게 있는가 보다. 하게 하려는 기라.
구름이라 하는 것은 이 지상과 주님의 세계의 층을 나누는 가리게 역할을 해요. 땅에 있는 사람은 구름 위를 볼 수가 없어요. 쳐다보게 되면 천사가 와서 “어딜 쳐다봐. 왜 쳐다 봐. 올라가신 대로 내려오는데. 쳐다본다고 니가 그 나라 가는 줄 알아?” 현재 인간들이 인간으로 그냥 사는 게 아니잖아요. 옛 하늘과 옛 땅의 주변에 둘둘 감고 살아가고 있어요. 현재 우리가.
우리가 생각하는 게 전부 다 시간과 공간 이 자체가 옛 시간과 옛 공간 전부 다 그런 겁니다. 옛 하늘과 옛 땅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거예요. 시간은 어디서 생깁니까? 시간은 별과 달과 그런 것들과 생겨요. 별과 달이라 하는 것은, 1시간은 60분이죠. 초는 60초지요. 60으로 나눈 것이 수메르왕국 BC2300년경에 현재 이라크 나라에 있었던 수메르 왕국이 처음으로 60을 나눈 거예요. 왜 나눴는가, 농사짓기 편해서 하는 거예요.
농사짓기나 혹은 어부들이 밀물 썰물을 잘 조정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거예요. 그러니까 뭐냐 하면, 대자연과 인간 사이에 합리적인 질서를 부여하면서 종교도 생기고 신도 생기고 문명도 생기고 우리는 그렇게 했던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문화와 문명 속에 푹~ 젖어 사는 겁니다.
우리 몸을 한약 달이듯이 짜보면 물이 줄줄 떨어지면서 전부 다 문화와 문명이 우리의 이 세속적인 문명이 줄줄 다 떨어져요. 그러니까 그 말은 항상 우리는 옛 하늘과 옛 땅에 둘둘 쌓여서 시간마저도 하늘의 별과 달의 움직임이라면 공간도 시간도 우리는 거기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거기서 벗어나지 못한 인간이 새 하늘과 새 땅을, 주님을 알아본다는 것은 이리해야 돼요. 거기서 벗어난 적이 있을 때는 우리가 아, 옛 하늘과 옛 땅이라 생각했는데 벗어난 적도 없는 인간이 새 하늘과 새 땅을 생각한다는 것은 기껏해야 옛 하늘과 옛 땅보다 약간 더 좋은 것, 더 멋있는 것, 이쪽에서는 잔디밭이 죽어 가는데 그 하늘나라에는 잔디밭이 파랗게 있는 것. 이쪽에서는 분수가 한 2시간 켰다가 전기 값 아깝다고 끄는데 거기는 늘 분수가 있는 곳.
그리고 불교의 극락이나 이슬람교의 낙원 같은 곳은 귀에 의하면 천국에 가면 여자가 그리 많데요. 여자가 많더라도 뚱뚱한 여자, 못생긴 여자 말고 눈이 주저앉은 여자 이런 여자 말고, 거기서 말하는 여자라 하는 것은 일단 못생긴 여자는 제외하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못생긴 여자라 하면 그건 지옥이죠. 안 되지요. 그 꼬라지 또 봅니까? 만약에 천국 가서 못생긴 여자, 아주 싫은 여자를 만났는데 가만히 보니 자세히 보니 자기 부인이에요. 아하, 이거 잘못 왔구나! 왜냐 하면, 남자들이 천국 가는 것은 새로운 여자 만날 수 있는 희망 때문에 그런 거예요. 갈아 치우는 것밖에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모든 보석이 있잖아요. 이 용어가 기존에 있는 옛 하늘과 옛 땅에 있는 용어들을 가지고 저 쪽을 묘사한 거예요. 그러니까 실제 저 쪽하고 달라요. 다른데 기껏 표현하자면 그것 밖에 표현 못해요. 이게 언어의 한계에요. 철자 언어라는 자체는 의미가 없어요. 의미는 없는데 이걸 하나, 하나 주워 모으면 거기서 의미의 집합이 되거든요.
그 주워 모을 때 그 의미를 어디서 주워 모으겠습니까? 기존의 쓰임새, 옛 하늘과 옛 땅에서 쓰였던 그 의미를 뚝딱 뚝딱 떼어가지고 타일처럼 갔다가 발라 놓으면 그 타일의 모든 모양새가 천국이다 하지만, 우리가 보기에는 전부 다 옛 하늘과 옛 땅에 있던 그런 일들, 사건들, 사항들, 그런 것들을 조립하고 만들어 놓은 모아 놓은 그거다 말이지요. 여러분들이 좋아하는 거.
그러니 예수님도 표현하실 때 사도바울이 계시자체가 언어니까 언어의 한계가 있어요. 그리고 사도바울이 말한 고린도후서12장에 보면, 언어가 없어요. 뭐라고 표현할 말이 없네. 삼층천을 표현하는데 묘사하는데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어떻게 묘사할 단어가 없다는 거예요. 왜, 기존 단어는 이 세상 가게에서 온 물건이거든요. 이쪽이 아니다 말이지요.
그래서 그것은 뭐냐, 그럼 새 하늘과 새 땅이 어디 있느냐, 그럴 때는 우리도 뭘 하느냐 하면 욥의 식처럼 당하지요. 바로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하는 거예요. 그냥 죽었다. 또는 기껏 이야기한 것이 이사야가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라는 식으로 천국의 그 영광을 묘사할 뿐이죠. 천국을 봤다. 헉! 또는 두 자로 하면 허걱! 또는 헐! 으악! 이사야처럼 화로다, 내가 망하게 되었구나!
그러면 이 천국을 주께서 구원받은 사람은 다 보여주느냐, 그걸 보여주는 게 아니고 로마서에 보면 누가 너를 데리고 천국까지 올라오게 하시느냐, 예수님이 어디 엘리베이터도 아니고요, 하늘에 올라가게 할 수 있느냐, 누가 지옥을 데려가게 하겠느냐, 니 눈앞에 있는 십자가 피, 그 피를 통해서 우리는 허걱! 내가 폐차란 말입니까? “그래, 폐차였어.” 예수님이 죽었으니까 폐차 아닙니까? 예수님이 폐차해서 죽었잖아요.
그러니 예수님이 폐차란 말은 누가 곧 폐차다? 내가 바로 폐차다 말이지요. 특히 전목사님은 매일 같이 느끼는 거예요. 왜, 고물이니까. 흑, 내가 고물이란 말입니까? Kg에 32원 받는 고물이지만, 이것은 값도 안 나가는 아무도 누가 보아서 누가 믿었으리요, 누가 돌아 보리요,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누가 믿으리요. 쓰레기 중에 쓰레기로 취급받는 주님. 선지자도 그렇게 대우 받았고 모든 성도도 그렇게 대우받았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재벌 같으면 더 많은 사람이 왔을 거예요. 그러나 사도 베드로 있는 교회에 돈 있는 사람도 가면 죽어 나오더라, 라는 소문이 들어버리면 어떻게 되겠어요? 아나니아, 삽비라 막대한 헌금 내놓고 둘 다 죽고. 베드로는 완전히 사람 죽여요. 완전히 오로라 공주도 아니고. 무조건 등장했다하면 죽여 버리고. 개까지 죽어요.
그러니 이 히브리서 대목을 할 때는 주님만 생각하지 말고 새 하늘과 새 땅과 함께 내려와 놓고 누가 이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갈 존재냐, 그렇다면 정답은 나왔지요. 옛 하늘과 옛 땅이 지긋지긋한 사람, 그만 살고 싶은 사람, 세상이 좋다고 프라다, 구찌 그거 좋다고 나 더 이상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하는 그 사람들 꼴 보기 싫은 사람들, 그런 것들이 하나의 이 세상의 성공이 영광스럽고 영웅 되는 것이 목표가 된 이 세상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없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고린도후서6장10절 말씀처럼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나는 것은 어떠한가 한 번 보자 이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어야 하느냐, 그건 10분 쉬고 합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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