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고린도전서88강-계시속의 교회(고전14;34-40) 160410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4. 11. 07:24
2016-04-10 12:38:10조회 : 56         
   계시 속의 교회160410 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계시 속의 교회(고린도전서 14:3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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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6-04-10 13:20 
계시 속의 교회

2016년 4월 10일                           본문 말씀: 고린도전서 14:34-40

(14:34)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14:35)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임이라

(14:36)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

(14:37)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

(14:38) 만일 누구든지 알지 못하면 그는 알지 못한 자니라

(14:39)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14:40)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

교회 안에서 남녀의 위치가 차이가 난다는 것은, 교회 자체가 세상적인 인간들의 합의에 의해서 조성되는 단체가 아님을 말해줍니다. 이 눈에 보이는 현실 너머의 세계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편하게 말하는 현실이란 곧 ‘눈에 보이는 세상의 전부’를 뜻합니다. 하지만 이것만이 아님을 알리는 특별한 민족이 있었으니 그 민족이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은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의 경계면을 형성합니다. 다른 민족들은 자체적인 결집력에 의해서 나라가 유지될 수 있지만 이스라엘은 수시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관리 대상이 됩니다. 즉 인간들이 신에게 원하는 것으로 꾸려나가는 나라가 아니라 경계선 너머로부터 유입되는 하나님의 계시(啓示)에 의해서 변화가 일어나는 나라입니다.

이러한 경계선상의 특이함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괴기함으로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고, 미친사람들이라고 무시당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방언이라는 기괴함이 통역을 거쳐 예언으로 정돈이 되게 되면 미처 인간들의 아이디어서 나올 수 없는 낯선 질서가 펼치지게 됩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입니다. 물론 황사마스크를 하고 교회에 출석하면 강제적으로 잠잠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억지로 하는 일은 언젠가 가중된 반발성을 나타내게 마련입니다. 오늘 본문 같은 것을 현대교회에다 던지면 사람들, 특히 여성들은 말조심하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냥 꾹 참고 지내는 것 밖에 안되는 태도입니다. 감사와 고마움을 품은 태도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여자니까 어쩔 수 없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서 입 다물어야지”라고 생각하는 것은 남성과 여성을 시초부터 나누신 하나님의 뜻을 반영하는 해석이 안됩니다.

왜 여성은 교회에서 잠잠해야 될까요? 그것은 바로 인간 쪽에서 먼저 신에게 요청하는 계시(啓示)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실은 ‘상담 요청’에 불과합니다. 자신의 은밀한 것을 기어이 감추고 내놓지 않으면서 자신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죄는 신 앞에서 자백하면서, 자기 인생에 드리워진 어두운 그들에게 벗겨지기를 간구하게 됩니다.

하지만 감추어놓은 그 은밀함이 누적이 되면 ‘가증함’이 됩니다. 로마서 2:16에 보면, “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왜 사람들은 은밀한 구석을 사수하고자 할까요? 그것은 ‘자신이 신에게 요청하는 계시’를 가지고 상담하는 식으로 신에게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이 주셨다는 그 율법을 수행해서 하나님과 자신과 개인적인 계약 관계를 통해서 천국에 들어가고자 합니다. 즉 ‘하나님은 바로 제가 이 말씀을 지켰기에 저를 천국에 넣어주세요. 이 말씀 제가 지켰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시구요“라고 나오게 됩니다. 하지만 정작 하나님에 의해서 이 세상에 주어진 계시(啓示)는 다른 내용을 말씀하십니다.

로마서 3:19-21에 보면,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사적 관계를 통해서 구원계약을 체결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다른 분과 계약을 성사시키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이미 하나님의 계약체결자가 따로 나선 입장에서, 개인들이 자신의 운명이나 팔자를 바꾸기 위해 시도할 그 어떤 것도 따로 남아있지 않습니다.

기도와 헌금, 전도나 예배, 봉사 이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께서는 오직 ‘율법 외의 한 의’의 원칙을 적용하십니다. 인간의 기도가 아니라 예수님의 기도, 인간의 헌금이 아니라 예수님의 몸 바치심, 인간의 전도가 아니라 예수님의 전도, 인간의 예배가 아니라 예수님의 예배만 하나님께 의(義)라고 인정하십니다.

이처럼 인간들이 신에게 요청하는 계시(啓示)와 하나님이 내리시는 계시(啓示)의 경계면에서 교회가 등장합니다. 이 등장된 교회 내에서 서로 상충되는 두 개의 현실을 다 맛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계시(啓示)에서 봐서 이 세상은 ‘거대한 스크린’입니다. 그 스크린에서 예수님의 살해당하셔서 추방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은 여전히 예수님의 살해사건을 은밀하게 감추는 속성이 가동 중입니다. 바로 이 사실을 스크린 너머에서 침투하신 성령님에 의해서 알려지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이요 통역이요 예언입니다. 이 계시의 내용은 남성과 여성에 대해 다른 위치를 지정해줍니다.

그것은 여성이란, 죄와 의의 경계선상에서 허약하게 서있는 역할을 지니고 있는 존재라는 겁니다. 창세기 3:16에 보면,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즉 여성이 자식으로 인해 고통 받고 수고하고 남편으로부터 다스림을 받는 것은 상대적으로 남성이 우월해서가 아니라 도리어 그 ‘언약함’이 다른 세계의 현존을 소개하는 기능으로 작용의 증거들이기 때문입니다. 약하다고 무시해서는 아니되고 도리어 다른 세계를 짐작하는 계기로서 그 여성이 담고 있는 신의 계시(啓示)를 보호해야 한다는 겁니다.

즉 계시(啓示)의 나타남이 인간들이 새삼스럽게 찾기 이전부터 이미 인간 자체 안에 함유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남성과 여성이 아닌 자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은 모든 이가 하나님의 계시의 범주 안에 놓여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이러한 계시(啓示)는 이미 ‘단번에’ 주어진 것입니다.

로마서 6:10에 보면,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성도의 남은 여생은 이미 이 ‘단번에’ 해결되고 체결된 사항이다는 사실로 인해 자신의 남은 운명이 예수님에게 일임되었는가를 확인해가는 세월입니다. 당당함이 무엇보다도 필요한 세월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를 보호할 생각말고, 예수님의 복음을 귀하게 아끼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6-04-10 17:36 

184강-고전 14장 34-40(계시로 된 교회)160410-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14장 34-40절입니다. 신약성경 281페이지입니다.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찌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임이라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줄 알라 만일 누구든지 알지 못하면 그는 알지 못한 자니라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



사도바울이 교회에게 명령조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명령이 없으면 우리는 나의 존재감이 사라지지요. 하나님께서 명령하고 그 명령을 내가 지키면, 지킨 내가 하나님 앞에 인정받게 될 것이고 그러면 그 명령을 준수했다는 그것을 근거로 천국에 간다, 라고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인 고린도전서에서도 사도바울이 명령을 하니까 우리는 그 명령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고 그 명령에 마음을 열어 놓습니다. “예! 지키겠습니다.”



그런데 그 명령을 살펴보니까 좀 이상해요. 어떤 명령이냐 하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말하는 것을 허락한 적이 없다. 여자가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 가서 자기 남편한테 물어야지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다. 이걸 지키라.”라고 명령을 해버리면 남자야 해당사항이 없으니까 편안한 마음이 되겠는데 여자 입장에서는 무슨 말만 하면 주께서 “그 입 다물라.” 그런 식이 되어서 교회에서 무슨 말을 하면 주의 명령을 안 지킨 것이 되고, 안 지키게 되면 “너 지키지도 않았는데 왜 천국에 와? 지옥으로 가!” 이렇게 되면 자기만 손해고, 그렇다고 해서 교회에서 입을 다물라고 하니까 스트레스를 받지요.



입을 벌릴 일이 많고 수다 떨 일이 많은데 가만히 있으라고 하니 내가 지금 주의 명령을 오해했는지, 진짜 가만히 있으라는 말인지 그게 모호한 쪽으로 자꾸 해석이 가게 되거든요. 그래서 명령은 지켜야 되겠는데 그 명령, 지시한 내용이 구체화되지는 않고, 또 분명하지도 않고, 그러니 여자들은 교회 올 때 그냥 머리에 수건만 쓸 것이 아니고 아예 독감방지용 마스크를 써야 돼요. 머리에 수건만 쓴다고 될 문제가 아니고 마스크를 쓰든지 해서 입을 막아야 돼요. 입에 마스크를 쓰고 거기에 글자를 새겨야 돼요. ‘묵언’



그렇게 하게 되면 주의 명령을 잘 지킨 것이 되지 않겠는가, 하는데 이렇게 명령 지켜서 명령 지킨 내가 그 명령 지킨 그것을 근거로 천국에 가겠다는 자체가 사도바울의 복음을 오해한 겁니다. 사도바울의 복음은 한마디로 말해서 이렇습니다. 내가 너하고 지킬 계약은 더 이상 없다는 것이 사도바울의 복음이에요. 너라는 인간과 하나님과 계약해서 계약에 맞으면 구원해줄게, 라는 계약조항자체가 이제는 없어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율법 외에 다른 의로 구원하기 때문에, 단독적으로 하나님과 개인의 만남에서 지키면 구원해주고 못 지키면 지옥 보내는 그런 관계가 이제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서 지켜보려고 했던 모든 것들이 이제는 명령을 지켰다고 나오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처음부터 명령을 못 지킬 저주받을 존재구나.’라는 것을 확인 차 율법을 준 거예요. 지키려고 덤벼들었는데 덤벼든 그 말씀이 못지키는 쪽으로 우리 내부를 파헤치는 겁니다. 오늘 말씀도 마찬가지에요.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말은 교회에서 떠들라는 말이에요. 제가 일부러 지어낸 말인 것 같은 이상한 느낌이 드는데. 교회에서 마구마구 떠들어서 내가 입 다물어서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나의 떠드는 것에 대해서 다른 사람이 “교회에서 여자가 잠잠하라고 하는데 왜 그렇게 떠듭니까?”라고 지적한다고 해서 그게 교회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오늘부터 시끄럽게 됐어요. 여자들은 교회 와서 남자한테 물을 필요도 없어요. 마구 떠드세요. 그렇게 떠듦으로서 진정 내가 속한 교회가 사도바울이 말한 교회와 일치되고 합치되는지를 보세요. 합치되지 않습니다. 안 떠들고 꿈 참으면 된다고 하는데 참는다는 이것은 차라리 말하는 것보다 더 못해요. 참는다는 것은 나중에 불쑥 튀어나올 가능성이 있다는 거예요. 참는 것과 ‘고맙습니다.’ 하는 것과 달라요. 말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 하는데 ‘참는다.’ 이것은 이 말씀에 순종한 것이 아닙니다. 그냥 참고 있을 뿐이지요. 언젠가 터질 가능성이 많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율법을 줘놓고 그 율법 앞에서 어떤 인간도 주의 명령과 지시를 지킬 위인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드러냅니다. 그래서 율법 지켜서 “제가 지켰습니다.” 손들고 율법 지켜서 천국 간다고 자랑 질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게 만들었어요. 이제는 내가 말씀 지켜서 구원받는 것은 잊으세요. 그런 것은 생각하지 마세요. 말씀을 못 지키는 것으로 노출되시는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주신 것은 노출시키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노출시켜서 이 구원문제에 대해서 하나님이 직접 나하고 상대하고 나하고 거래하고 흥정하는 것이 아니고, 나 말고 예수님을 통해서 이미 이야기가 끝나버렸어요. 이야기가 끝난 거예요. 방금 제가 한 이야기가 로마서 7장에 나옵니다. 로마서 7장 4절에 보게 되면,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6절에 보면,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미 율법에서 벗어났다는 거예요. 그 얽매임에서.



모든 하나님의 법에서 우리가 벗어나버렸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지킬 것이 없어요. 지킬 것이 없다는 말은 ‘이것은 내가 지킬 수 있다.’ 하는 생각, 그 가능성을 접으세요.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지켜서 구원받고자 한다면 로마서 7장에 있는 말씀, 율법에 의해서 우리가 죽었다는 사실을 극구 반발하는 셈이 되어버립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에 의해서 우리를 죽은 자로 만드는 것은 율법 말고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명령을 너 말고 다른 분 예수님에게 모든 것을 일임함으로 너의 남은 세월, 평생 남은 모든 기간은, 내 운명과 팔자와 내 미래는 누구에게 일임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70, 80, 계속 살아야 되는 거예요.



이 얼마나 노년이 즐겁습니까? 평생 살아가는 모습이 내가 내 인생에 대해서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그 풍요로움, 그 완성됨, 이제는 내 인생에 대해서 내가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내가 스스로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그 여유로움을 만끽하는 세월을 남은 평생 보내시라는 그 말입니다. 제가 보내라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주께서 그렇게 보내도록 하는 거예요. 그것을 확인하는 방법 중의 하나가 우리에게 계속해서 법을 쏘아대는 겁니다.



왜? 우리 속에는 아직도 법을 지킴으로서 내가 이만큼 잘났다는 것을 남 앞에 과시하고 싶은 생각들이 계속해서 남아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법은 우리가 지킬 수가 없습니다. 이걸 단단히 합시다. 법은 우리가 지킬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못 지켰다는 것을 늘 확인해야 돼요. 주의 말씀 하나도 못 지킵니다. 거룩한 말씀 못 지킵니다. 이거 분명히 해야 돼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가 가볍게 수용을 할 것 같은데 우리 속에 괴물이 있어요.



우리 속에 괴물이 있어서 “너 하나님의 법을 못 지켜.” 이렇게 되어버리면 우리 내부가 극한 반발을 일으킵니다. “나 잘났는데 왜 법을 못 지켜. 나 지킬 수 있어. 나 착해. 나 어릴 때부터 교육 잘 받았어. 나는 내가 생각해도 양심 고운 사람이야. 하나님이 나에게 숙제 주세요. 내가 숙제 해낼게.”라는 이런 되도 않는 고집들이 있어요. 나이도 들지도 않았으면서도 그런 망발을 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친절하게 짐을 놓으라고 하는데 말씀 지키겠다는 짐을 스스로 짊어지고 가요. 소풍갈 때 “도시락 따로 싸지 마세요. 다 준비해서 옵니다.” 해도 꼭 아침에 일어나서 김밥 싸는 사람이 있다니까요. 준비 다 해준다는데. 꼭 자기 먹을 김밥 자기가 싸먹어야 마음이 편한 그런 사람들이 있어요. 시키는 대로 하겠다고, 주의 말씀대로 착한 사람 되어보겠다고.



그것이 주님을 도리어 욕되게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일임하지 않고 다른 분에게 일임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어요. 우리인간에게 말씀을 주면서도 기대를 하지 않는 이유가 있어요. 우리 눈에 보이는 세상과 숨어 있는 세상, 두 개의 세상이 있거든요. 보이는 세상과 숨어 있는 세상이 있다는 것을 인간들은 몰라요.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이스라엘 민족, 숨어 있는 세계와 나타난 세계의 경계면, 접촉점을 갖고 있는 민족은 이스라엘밖에 없어요.



그 이스라엘 나라 속에 어떤 내용이 스며드느냐? 그 이스라엘 나라에게 숨어 있는 하나님께서 법을 주시고 동반해서 뭘 주느냐 하면, 법을 못 지키는 것을 뻔히 아시기에 중보자적인 기능도 함께 병행해서 주는 겁니다. 법을 보면서 자기가 못 지키는 것을 알고, 그 의미를 가지고 제사제도, 억울한 제물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통해서 그 틈새에서 새로운 종족,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탄생한다는 것을 다른 민족은 몰라요.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그것이 알려졌습니다. 그러한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는 것이 뭐냐? 눈에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의 접촉점, 또는 경계면을 형성한다고 방금 이야기했잖아요.



그것이 이스라엘을 지나서 오늘 본문 고린도전서 14장에 들어오면 교회라는 곳이 옛날 이스라엘과 똑같은 입장에 있습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경계면에 있어요. 그게 오늘날 교회라는 겁니다. 교회라는 것은 완전한 것이 아니고 경계면에 있다니까요. 완전히 저쪽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고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세계라고 보면 됩니다. 그래서 교회를 믿지 말라는 그 말입니다. 교회는 극히 세상 못지않게 세속적인 거예요. 교회가 있으면 교회에는 반드시 영업 전략이 여기에 동원됩니다.



서울의 어떤 교회는 집사, 장로, 권사, 없애버렸어요. 어떻게 바꿨나? 팀장으로 바꿨습니다. 완전히 회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교회가 유지되는 영업 전략은 세상과 똑같습니다. 저는 이것을 ‘떴다방’이라고 하는데 이게 뭐냐? 노인들을 꾀일 때 2천 원짜리 물건을 천원에, 또는 5천 원짜리 물건을 반값에 팔아요. 그러면 동네 할머니들, 아주머니들 다 옵니다. 설탕 만 원짜리를 헐 값에, 5천원에 주니까, 세제 만 원짜리 5천원에 살 수 있으니까. 집에서 노는 아줌마들 다 그거 사러 나오지요.



그걸 가지고 미끼상품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헐값에 산 물건을 써보니까 값은 반값인데도 불구하고 제품은 괜찮은 제품이에요. 그게 미끼상품이에요. 그래놓고 그 다음에는 고가의 항아리, 액자, 달마도 그림, 건강식품, 이런 것들을 들이대니까, 처음에 샀던 미끼상품이 정품이었으니까 같은 사람이 속일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 상품도 정품인줄 알고 사게 되는 겁니다. 교회가 뭐하는가? “여러분이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는 것은 오직 십자가뿐이고 오직 복음으로,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라고 외쳐요. 그게 미끼상품이에요.



그렇게 십자가를 믿게 해놓고, “여러분이 십자가 믿음으로 공짜로 구원받았습니다. 아멘, 하십니까?” 하면 “아멘!” “공짜로 구원받았으면 사람이 염치가 있어야지. 공짜로 구원을 주고 이렇게 좋은 일 많이 하는 이 교회에 돈을 좀 내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오고 난 뒤에 공짜로 구원받아놓고 그 다음에 십일조 했습니다. 돈들 내세요.” 영업 전략이 그렇게 나가는 거예요. 미끼상품 던져놓고 본론은 그 다음에 나온다니까요. 선교헌금이 어떠니, 뭐가 어쩌니, 불교에서 정당 만드는데 기독당도 만들어야 하다는 둥, 온갖 이야기를 다 하면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만약에 사람들이 거기에 대해서 “어? 믿음으로 구원받았다고 해놓고 왜 또 다른 소리 합니까?” 하면 “천국 가는 것은 믿음으로 구원받지만 이 땅에서 자식 잘되고, 사업 잘되고, 복 받고, 이렇게 잘 되는 것은 여러분이 헌금 많이 하고, 봉사하고, 기도해야 그 기도의 응답으로 살아계신 주님, 살아계신 주님의 응답으로, 기도응답으로 복이 팍팍 주어집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헌금과 봉사를 안 하면 여러분이 천국은 가겠지만 부끄러운 구원을 받습니다. 상급은 없어요.” 이런 식의 영업 전략이 나왔고 거기에 배운 사람이고 안 배운 사람이고, 교수, 박사고 다 속아 넘어가는 거예요.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다시 이야기합니다만, 처음부터 하나님께서는 우리와의 계약이 없어요. 우리가 기도해서 응답받는다는 그런 계약이 없습니다. 계약을 하든, 헌금을 하든, 봉사를 하든지 일체 하나님은 우리하고 일대 일로 상대해서 우리에게 복이나 구원을 해주지 않습니다. 율법 외에, 이 명령 외에 다른 법으로 우리에게 의가 오고 의가 오게 되면 축복도 덩달아 오게 되어 있어요. 저주를 받는 이유는 저주가 남아 있기 때문에 저주가 오는 것인데 저주가 의로 바뀌어버리면 그 모든 것이 복이 돼버려요.



하나님께서는 이런 식으로 우리에게 하지 않습니다. “너 하는 것 보고.” 그런 것이 없어요. 하나님께서는 우리보고 “네가 개인적으로, 사적으로 하는 것을 보고 복을 줄게.”라는 것이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하고 계약을 안했기 때문에 그래요. 주님하고 계약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섞여 있으면 우리도 덩달아 성취된 거예요. 우리가 복을 받는 것도 주님의 기도덕분에 복을 받지 내 기도덕분에 응답받는 게 아닙니다. 주님의 기도덕분에 응답받고 주님의 몸 바쳐서 복을 받는 거예요. 우리가 헌금해서 복 받는 것이 아닙니다. 십일조해서 복 받는 게 아니에요. 주님 자체가 십일조에요.



교회 봉사? 우리는 봉사 못해요. 주님 혼자 자기교회에서 봉사했고 우리는 덩달아 그 혜택을 입은 것뿐입니다. 남은 우리의 인생이라 하는 것은 ‘내가 하지 않더라도 이렇게 구원받고 복 받는 것은 내 덕이 아니다. 분명히 나 말고 다른 분이 계시다.’라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감사하라고 우리에게 남은 인생을 살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라 하는 것은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의 경계선에 서 있는 거예요. 이쪽 보면 세상 보여요. 세상이야 자기와 똑같은 인간들이니까 잘도 알지요. 저쪽으로 돌아서게 되면 나대신 모든 것을 해결하신 주님이 보이고, 그 경계선 사이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증언하는 증인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그게 바로 중보자적 기능이에요.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상대하는 통로가 막혀 있어요. 그런 법은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기도하면 복 받습니다. 개인적으로 헌금하면 복 받습니다.” 그것은 마귀들이 교회를 점령해서 그렇게 한 거예요. 그것은 떴다방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불구하고 ‘뭔가 성의를 표해야지 복을 받지.’라고 나서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서 성경말씀이 이야기한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내 쪽에서 요청하는 계시가 있어요.



내 쪽에서 요청하는 계시, 이건 제가 지어낸 이야기인데, 내 쪽에서 요청하는 계시를 상담이라 합니다. 사람이 자기 어려울 때, 힘들 때, 괴로울 때는 상담을 하게 돼요. 상담을 하게 되면 무엇이 누락되는가 하면, 진짜 자신의 은밀한 것, 감추고 싶은 것은 뒤로 빼돌려 버립니다. 상담하고 싶은 것을 상담하겠다는 것은 ‘그 짓 한 것은 안 들키게 뒤로 서. 뒤로 들어가. 너는 들키면 안 돼.’라고 정작 자기가 한 은밀한 짓은 뒤로 빼돌리고 자기가 발설해도 되는 이야기만 내놓으면서 자기 죄를 더 깊숙한 곳에 감추는 수작을 상담이라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여, 이런 죄가 있는데 이 죄를 하나님께서 좀 덮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런 죄 때문에 지금 인생이 꼬여서 풀리지를 않는데 내가 이런 죄에 대해서 잘못했다고 반성할 테니까 이 반성을 받아주셔서 때리시는 저주에서 복으로 바꿔주세요.”라고 해놓고는 ‘야, 야! 너는 들키면 안 되니까 가만있어.’ 해서 정작 은밀한 것은 뒤에 숨겨져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이 요청하는 계시에요. 주님의 계시를 이야기해야 될 교회가 사람들이 요청하는 계시로 가득 차 있는, “뭘 하면 복 받습니까?” 하는 식의 교회가 되어버리면 그것은 떴다방입니다.



여러분들이 그걸 구분할 수 있어야 돼요. 제가 서울에서 금요일에 강의하고 토요일에 결혼식주례가 있었어요. 서울에서 금요일에 하루 자고 토요일 오후에 결혼식에 참석했습니다. 제가 묵었던 용인에서 잠실의 뚝섬유원지까지 차를 태워주셔서 가면서 들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분이 치과에서 일하는 간호사거든요. 손님들 중에 행패부리는 말썽꾸러기 손님들이 있어요. 간호사들이 딱 주소를 보면 그 동네 사람들은 주로 말썽꾸러기들이 사는 동네에요. 그 동네가 주로 택지인데 주공에 사는지 아니면 맨션에 사는지가 구분이 된다는 거예요. 캐슬에 사는지, 아니면 주공에 사는지가 구분이 돼요. 말썽꾸러기 고객들은 주로 주공에 산대요.



주공에 사는 사람들은 사람 차별한다고 또 볼멘소리 하겠습니다만 지금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주공에 사는 분들 특징이 뭐냐? 나이들이 많아요. 쉽게 해서 심심하다 그 말이거든요. 심심하니까 치과에 전화를 해서 “스케일링하는데 얼마입니까? 언제 가면 됩니까?” 이런 식으로 한다는 거예요. 치과 간호사들이 굉장히 바빠요. 의사 보조해줘야지, 차트 정리해야지, 이일 저일 바쁘니까 “예, 어느 시간에 오시면 됩니다.”라고 전화를 먼저 끊었답니다. 먼저 전화 끊었다고 그거 가지고 시비를 거는 거예요.



그런데 일이 너무 많고 힘드니까 간호사들은 계속 바뀌지요. 그래서 간호사들은 바뀌더라도 알아볼 수 있도록 차트에 D라는 글자, D가지고도 모자라면 스티커를 붙여요. 행패부리는 소위 블랙 컨슈머, 이런 표시를 다 붙여놓는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을 때에 로마서 2장 16절이 절로 생각이 났습니다. ‘야, 바로 저거다.’ 로마서 2장 16절에,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날이라.”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날이라.



말썽꾸러기 할아버지가 치과에 시비 걸려고 바쁘게 일하는 간호사에게 전화걸 때 간호사는 주소를 보고 이미 은밀한 것을 체크를 다 해놓았다는 말이지요. 우리가 “하나님이여, 헌금했습니다. 복주세요. 교회 나왔습니다. 천당 보내주세요. 이렇게 봉사했으니 사업 잘되게 해주세요.” 할 때 하늘나라에서는 이미 체크를 해놓아요. 블랙컨슈머, 불량고객이에요. 하나님을 자기이용물로 삼는 거예요. 이렇게 성의를 표했으니까 알아서 해달라는 겁니다. 그런 것은 떴다방에 가세요. 그런 미끼상품에 걸려들어야 돼요. 집사, 장로 되었다가 나중에 팀장이 되어봐야 정신을 차리는 거예요.



왜 은밀한 것이 자꾸 누적이 되느냐 하면, 잘난 체를 하기 때문에 자기가 실수한 것은 뒤로 빼돌려서 누적이 되는 거예요. 주님은 어딜 보는가? 네가 나에게 요청한 그 계시로 인하여 네가 숨겨놓은 은밀한 것, 그것에다 주께서는 마지막 심판을 가해버립니다. 그 심판은 뭐냐? 내가 행함으로 구원을 받겠다는 그것이 악마의 사고방식에서 나온 거예요. 마귀 적 사고방식에서 나온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하는 그 이야기가 굉장히 어려운 이야기거든요.



그 어려운 이야기를 하기 전에 기초부터, 지지대부터 지금 닦아놓는 거예요. 인간이 요청하는 계시는 엉터리다. 왜? 그것은 자기가 잘나 보이기 위해서 은밀한 것은 다 뒤로 빼돌리는 거예요. 빼돌리면서 상담하는 식으로 교회 나왔다는 말은, 율법 외의 한 의로 구원받는 그것, 다시 말해서 나에게 모든 은밀한 그것은 이미 누가 다, 쓰레기차 와서 쓰레기 처리하듯이 그 은밀한 너의 것을 누구에게 다 뒤집어씌웠는가? 하나님께서 예수님한테 다 뒤집어씌운 거예요. 노출돼도 부끄러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복음은 복음 앞에서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바람피우다 현장에서 걸린 아줌마도 당당했잖아요. “누가 너에게 돌을 던져? 당당해.” 이렇게 나왔다는 말이지요. 복음이라는 것이 뭐냐? 더 이상 우리에게 은밀한 것은 남아있지 않다는 선언이에요. 우리가 부끄러워할 것이 남아 있지 않다는 선언입니다. 세상에서 오는 그것만 보지 마시고, 세상에서 오는 계시 같은 것에는 신경 쓰지 마시고 우리가 경계선이니까 우리 너머의 세상에서, 이 바깥에서, 예수님을 통해서 새롭게 유입된 율법 외에 한 의가 우리를 구원한다는 그러한 주께서 주신 계시 안에서 더 이상 우리는 부끄러울 필요가 없이 당당해야 되고, 당당하면 할수록 주님을 증명하게 되는 겁니다.



아까 우리가 읽었던 교독문 15번, 시편 51편인데 거기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만 범죄 했다. 나는 사람에게 범죄 한 적 없다. 내가 범죄 했다면 오직 하나님께 범죄 한 것이다.’ 다윗이 이런 고백을 하는 것은 “너희들 보기에는 눈에 보이는 세계만 보이지. 나는 경계선에 서서 보이는 세계도 보고, 그 속에서 나는 망해야 마땅함을 깨닫고 너희들이 모르는 경계선 너머, 주의 영입니다, 주의 영안에서 나는 주께만 범죄 한 것”입니다.



주께만 범죄 했다는 것은 이 범죄, 내가 내 범죄 함에 대해서 해결할 수가 없고, 그리고 너희들도 해결할 수가 없고 주께만 범죄 했기에 주께서만 처리한다면 곧 그것이 확정날짜에요. 그것이 확정된 처리, 하나님의 말씀의 완성이 되는 겁니다. 그게 율법외의 한 의입니다. 그게 복음이에요. 남은 평생은 그것 자랑하면 되는 겁니다. 편하게 사세요. 그렇다면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은 뭐냐?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은 거대한 스크린입니다. 거대한 스크린인데 어떤 스크린인가 하면, “유령은 좀 가라. 귀신은 좀 떠나라.”



이 인간세상과 맞지 않는 사람은 다 죽여서 보내버리고 이 세상에 합당한 인간들만 끌어 모으는 세상, 스크린, 거대한 영화의 막이에요. 그런데 그 막에 구멍이 뚫려버리고 거기에 뭐가 오는가? 이 현실바깥에 있는 그 사실이 구멍을 뚫고 들어오게 되면 그 세계가 바로 성령입니다. 성령이 소개하는 바에 의하면 스크린 같은 이 세상이 작동하는 것은 메시아가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서 작동하고 있는 중이라는 겁니다. 이게 복음의 눈으로 봤을 때 보이는 거예요.



교회가 왜 있는가? 교회는 예수 죽으심을 감추기 위해서 교회가 있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교회가 마귀 짓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교회가 마귀 짓을 해서 얻고자 하는 것은 뭐냐? 그것은 사도바울이 이미 편지로 이야기 했어요. 데살로니가후서에 보면,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 예수그리스도를 추방시킨 교회는 오직 남아 있는 것이 뭐냐? 신기한 기적을 어떻게 확보할 수 있는지 그것만 이야기하고, 그것만 기대하고 있고, 그것만 믿고자 하는 거예요.



내가 잘되는 신기한 기적, 그런데 그러한 기적은 사탄의 속임수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속임수가 왜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느냐?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그렇게 되어 있어요. 율법 외에 한 의를 모르기 때문에 사적으로 빡세게 기도해서 기도한 응답을 사적으로 확보한 그것으로 하나님과 내 관계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 거예요. 살아 있으면서. 부족합니다, 자기를 때려가면서. 나는 죄인입니다, 하고 고난 받으면서. 이런 짓 하면 혹시나 복이 들어오겠지, 혹시나 내 일이 열리겠지,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주께서 개인을 상대하지 않는다고 함에도 불구하고 주님 앞에 나올 때 자꾸 상담 받는 식으로 나오는 거예요. “어떻게 하면 꼬여버린 내 인생이 풀리게 되겠습니까?” 처음부터 우리는 죄인입니다. 처음부터 주님은 우리를 죄인으로 이미 규정을 시켜놓은 거예요. 죄인은 주님하고 상대하면 안돼요. 죽습니다. 자, 그렇다면 그것과, 오늘 본문에 “교회에서 여자는 잠잠하라.”하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제발 여자를 남자로 만들지 말라는 거예요. 여자를 남자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여자는 어떤 위치냐 하면, 창세기 3장에서 여자는 하나님의 세계와 인간세계, 범죄 한 세계의 경계선에 여자가 서 있어요. 그 증거가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오늘 본문 34절에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복종할 것이요, 라는 이것이 어디에 나오는가? 창세기 3장 16절에 나옵니다.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무슨 말이냐 하면, “남편 네가 보기에 여자가 네 소유물로 보이지? 아니야. 하나님의 계시의 소유물”이라는 거예요. 이 현실너머에 준비된 하나님의 그 말씀을 이 세상 안에 집어넣어놓고 하나님이 여자로 여자답게 다루고 있는 그 계시를 남자들은 무시하거나 부정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여자가 교회에서 잠잠할 때 약해서 잠잠한 것이 아니에요. 남자에게 져서 잠잠한 것이 아니고 그 여자는 지금 하나님과 상대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남자는 여자가 잠잠하니까 자기기에 눌려서 잠잠한 줄 알고 있어요. 욱, 하니까 겁이 나서 잠잠한 줄 알고요.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제가 어제 주례사에서 그런 이야기 했습니다만, 남자는 몰라요. 여자한테 큰소리만 쳐도 여자는 부서집니다. 왜 남자는 그걸 모르는가 하면, 남자는 남자끼리 사업하고 남자들끼리 일했기 때문에 남자끼리 하던 그 행세를 그대로 여자에게 해버리니까 ‘내 친구한테 그런 이야기할 때는 다 참을 만하던데 너는 그게 뭐라고 그걸 가지고 가슴이 아파, 아파, 하고 있느냐?’



그게 바로 여성이 이 현실너머의 계시와 연관된 존재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여자의 후손입니다. 남자의 후손은 없어요. 남자는 계시에서 완전히 빠져버립니다. 그 여자의 후손이 악마를 이겨요. 뱀을 이겨버립니다. 남자는 거기 끼어들지도 못해요. 남자는 그저 힘자랑 할 뿐이에요. 그래서 어제 주례할 때 그랬습니다. 힘으로 살아왔던 그 삶의 방식을 이제는 힘 빼고 살아가는 삶의 방식으로 바꿔야 된다. 그것이 뭐냐? 약한 자가 나를 구원하는 방식이 아니면 우리는 구원받을 수 없다.



여자가 자진해서 교회에서 잠잠하거든 그것은 남자보다 못나서 그런 것이 아니고 남성의 세계에 침범한 저쪽 세계, 스크린 너머에 숨어있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연약함을 여성에게 심어줬다고 보고 도리어 보호해야지요. 보호해야 돼요. 어제 주례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상투적인 사랑사랑, 명품가방이나 사주고 머플러만 사주지 말고, 말이나 사주는 것으로 때우려고 하지 말고, 저는 사준 적도 없지만, 남자들이여, 그냥 보호막을 쳐야 돼요. “누가 너를 힘들게 해. 내가 지켜줄 게. 내가 지켜줄게.” 이렇게 돼야지요. 여자는 싸우는 대상이 아니고 보호할 대상이에요. 그게 가장 남성다움이에요.



남자가 여성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고 여자의 여성다움을 인정할 때 비로소 남자는 자기 본래의 위치를 찾아가는 겁니다. 그 연약한 여자를 보호함으로써 비로소 잃어버렸던 남성의 자리를 회복할 수가 있어요. 그래서 교회는 숨겨진 나라와 이 눈에 보이는 세계, 힘으로 움직이는 이 세계와, 힘 너머 죄를 용서하시는 사랑의 세계의 경계선, 주님께서 희생으로써 죄 많은 우리를 위해서 “손대지 마라. 내가 다 일임할게. 내가 대신 다 받아줄게.”라는 그 사랑의 세계의 경계선에 교회가 있는 겁니다.



교회는 떴다방 아닙니다. 미끼상품 던져서 영업하는 회사가 아니에요.

어느 누구도 약한 사람이 가장 하나님과 가까이 있는 사람이라고 알아보는 사회, 집단, 그게 교회입니다.

돈 내고 싶어도 돈 없는 사람, 봉사하고 싶어도 몸 아픈 사람,

그러면서도 주님만 의지하는 그 모습이, 주님한테 보호받는 그 보호가

다른 사람들이 사실은 부러워야 될 보호입니다.

‘아, 저 사람은 해결 받았구나.’

우리는 사적으로 하나님에게 잘 보여서 천당 가고 복 받으려고 생각했는데

저 분은 그걸 포기하고, ‘주여, 몸이 아파도 괜찮아요. 돈이 없어도 괜찮아요.’ 하는 넉넉함과 여유로움,

그런 것을 우리는 이 교회에서 배워야 되는데 그 당시에는 어디서 배워라? 여성한테 배워라.



39절에 보면,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 이 말은 교회라는 것이 이스라엘처럼 이 세상너머와 이 세상의 경계선에 있기 때문에 세상적인 힘의 논리가 아니라 낯선 논리, ‘이상하게 저런 예언은 처음 들어봤다.’ 하는 그런 논리들로 이 죄 많은 교회를 그럭저럭 주께서는 이끌어 가시고 인도해내시는 겁니다.



따라서 이러한 원리가 이제는 우리 안까지 파고 들어와야 돼요. 하나님의 말씀이 안에 들어오게 되면, 내 안에서 이 두 가지 요소가 날마다 다투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거예요. 그것에 관해서 하고 마치겠습니다. 그 다투는 요소에 대해서 로마서 6장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여기에 ‘단번에 죽으심’이라는 말이 나와요. 단번에 죽었다는 말은 하나님이 우리하고 흥정하지 않았다는 뜻이에요.



주님께서 “너는 천국 간다.”는 그 도장을 우리보고 한 것이 아니고 우리 말고 단번에 체결해야 할 분을 따로 이 땅에 보내신 거예요. 예수님과 아버지가 도장 찍어서 그 단번에 찍으심을 그 뒤에 나타나는 우리가, 그 단번에 해결했음을 늘 감사하면서 바라보면 되는 겁니다. 제가 그 ‘단번에’라는 말을 강조하고 싶은 것은, 너무나 많은 사람들, 자기 행함에 의미를 두는 사람들이 그렇게도 많아요. ‘내가 이렇게 죄를 지었으니 벌을 받는구나.’ 하나님과 자기가 직접 계약한 것처럼 자꾸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우리는 ‘단번에’에 들어갈 입장도 아니고 그럴 자격도 없어요. 우리는 ‘단번에’의 계약체결, 그 자리에서 빠져나오세요. 거기서 발을 빼세요.



그러면 우리는 뭔데? 주님께서 단번에 해결함으로써 그 다음에 혜택은? 하나님께 우리가 살아 있다는 거예요. 계약체결은 주님이 하시고 살아 있다는 결과물은 우리가 결과물이 되고, 이런 횡재가 어디 있습니까? 시편 51편에 다윗이 고백한 것처럼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옵소서.” 무슨 말이냐 하면, 내가 이 세상과 보이지 않는 세상의 경계선에서 늘 머물게 하옵소서. 이쪽도 바라보게 하시고 저쪽도 바라봐서 너희들은 한쪽만 바라보지만 우리는 두 쪽 다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세상에 나가서 증거 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복음, 복음, 참 그토록 많이 들었건만 돌아서만 잊어버리고, 또 놓쳐버리고, 또 착한 일 해서 복 받으려고 하고, 남들 보기에 착한 사람 만들어서 칭찬받으려는 이러한 마귀 적 욕구가 또 튀어나옵니다. 그럴 때마다 단번에 해결하신 그 십자가의 일을 생각하게 하여주옵소서. 그래서 그 십자가덕분에 우리가 주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증언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