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교회120607-요한계시록21장25-22장7절(선악과 없음)40강b-이 근호 목사
제 40강b
자, 요한계시록 22장 봅시다. “또 저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이게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이라 하는 것은 무엇을 염두에 두느냐 하면 창세기 2장에 나오는 에덴동산을 염두에 두면 됩니다. 그러면 에덴동산을 염두에 두게 되면 에덴동산 창세기 2장 이야기하고 그 다음에 요한계시록 22장 이야기하면 끝났잖아요. 그런데 그 중간이 왜 필요하죠? 창세기 2장 그 다음에 요한계시록 22장 그 다음에 끝난 문제잖아요. 왜 중간에 뭐가 필요하냐 이 말이죠.
여기에 언덕이 있다 합시다. 창세기 2장과 3장이라 봅시다. 이게 요한계시록 22장이라고 봅시다. 그럼 여기에 창세기 2장 3장에서 바로 요한계시록 22장을 건너뛰려면 여기에 뭐가 필요합니까? 축 늘어진 줄로 노끈으로 만든 다리, 구름다리처럼 축 늘어진 다리가 있어야 되겠죠. 왜 축 늘어지느냐 하면 이 길이 항상 위태롭다 이 말이죠. 이게 아슬아슬하다 이 말이죠. 밑에는 심한 계곡이고.
자, 창세기 2장에서 요한계시록 22장까지 우리의 사상은 다리 없이 바로 통과합니다. ‘창세기 2장 우리 조상이 실수했구나, 주께서 실수한 것을 감안하시고 바로 예수님 보내서 바로 요한계시록 22장 천국에 갔구나.’ 그러면 여기 예수님께서 ‘오라’ 하면 바로 뛰어가면 되는데, 이렇게 축 늘어졌다는 이 말은 이것이 우리 생각에서는 이 지식과 이 지식을 바로 연결시킬 수 있는데, 그렇게 해버리면 뭐가 문제냐 하면 창세기 2장에서 이미 범죄 할 때 나오는 지식, 범죄 할 때 나오는 종교, 범죄 한 철학, 범죄 한 세계관, 이것이 그대로 천국에 들어가는 꼴이 생겨버려요. 그건 안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 중간에 다리로 가려면 뭐가 필요 하느냐 하면 ‘우리가 타락했다. 범죄 했다. 야, 그럼 좋은 나라 가려면 어떻게 하면 돼?’라는 사고방식 자체가 이게 허용이 안 되고 용납이 안 되는 세계가 바로 천국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죄 졌는데 죄 진 것을 눈 한번 질금 감아주시고 안 지은 것으로 해 주시고, 하나님, 무슨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이니까, 자비의 하나님이니까, 그래서 시편에 보면 나오죠. 욥기도 나오고, 인간이 죄를 진들 무슨 하나님께 영향이 있습니까? 그만 봐주소. 이런 식으로. ‘아이구, 뭐 인간들 갋아서 뭐 하려고? 주님이여 갋지 말고 눈 질금 감고 용서해줄게, 좀 어른답게 창조주답게, 그렇게 한번 해주시면 참 좋겠습니다.’라는 그것이 마귀적인 사고방식 이예요. 이게 악마가 그런 식으로 우리에게 유인하는 거예요.
여기 창세기 2장에서 우리가 죽었다. 고통스럽다. 괴롭다. 관심사가 여기 있는데, 그러니까 불교에서는 뭐라 합니까? 생, 노, 병, 사, 관심사가 뭡니까? 불교의 특징은 지독한 자기 짝사랑이거든요. 지독한 자기생각밖에 없어요. 오죽했으면 머리를 깎겠습니까? 여자들도 머리 깎잖아요. 지독한 자기 생각이기 때문에 24시간 도 닦는 게 딴 걸 도 닦는 게 아닙니다. ‘나는 누구냐, 나는 행복해 질 수 있느냐.’ 그래서 그 질문 자체가 범죄라니까. 그 사실을 몰라요.
‘엄마, 어떻게 하면 내가 예수 믿을 수 있어?’라는 그 질문 자체가 죄가 되는 거예요. ‘엄마, 어떻게 하면 천국 갈 수 있어?’ 그 질문 자체가 죄에요. ‘예수가 누구죠?’ 질문 자체가 죄라니까. 입에서 껌벅 나오면 뭐든 죄예요. 입을 껌벅 안 해도 죄가 들어있지만. 입에서 나오든 안 나오든 속에 담겨있어도 죄고 입에서 터져 나와도 죄고, 이래도 죄고 저래도 죄고 그래서 구원과 존재의 불멸을 추구해도 그것마저 죄가 된다는 이 사실을 분명히 하고 그 다음에 천국을 해버리면 인간들이 뭘 거부하느냐 하면 여기 있는 내가 천국에 간다는 이것을 누가 가로막습니까? 예수님이 가로막아버리죠. 믿지 말라고. 너 자신의 아이디어를 니가 믿어서는 안 된다고. 니가 죄에서 만든 죄의 이미지는 환상에 불과한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한계시록 22장은 굉장히 난해합니다. 지금 이게 뭐가 들어오느냐, 창세기 2장에서 요한계시록 22장이 돼 있죠? 이 시간개념이 잘못이죠. 이건(창2장) 과거고, 시간은 과거에서 현재에서 미래로 간다 하잖아요. 이 자체가 벌써 죄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성경은 요한계시록 22장의 뜻은 뭐냐, 이렇습니다. 이게(요한계시록 22장) 먼저 있고, 천국이 먼저 있고, 어린양의 보좌가 먼저 있고, 예수님이 누군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에덴동산이 앞에 설치돼 있다고 보는 겁니다. 고 아이디어! 그렇다면 에덴동산에서 범죄 한 인간도 인간을 위한 인간이 아니고 누굴 위한 인간이다? 요한계시록 22장에 나오는 어린양의 보좌를 더욱 더 영광스럽게 하기 위해서 필요로 해서 필요한 인형들이었습니다.
이 땅은 모든 연극무대죠. 생명나무, 선악과나무도 무대장치였습니다. 그것 따먹으라고 유혹하던 뱀과 벌거벗은 두 남녀도 사실은 전부 다 연극배우였어요. 뭘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러니까 여기 이 범죄를 가지고 ‘그때 안 따먹었으면 좋았을 텐데.’ 이렇게 스스로 고민할 그런 자격도 우리한테는 없습니다. 고민할 자격이 없다는 말은 고민할 필요도 없다는 거예요. 어떤 관점에서? 모든 것이 예수님을 위하여 우리가 존재한다는 그런 관점만 있으면 나의 불행이냐, 슬프냐. 행복이냐, 그것까지 우리가 신경 써서. 내가 주제넘게 내 행복과 내 안녕과 성공과 구원에 대해서 주제넘게 내가 신경 쓸 자격이 우리한테는 아예 없습니다. 자격박탈! 자격을 뺏어버려요. ‘주여, 구원받겠습니까?’하는 그 입을 테이프로 막아버려요. 율법은 모든 입을 틀어막아요. 입을 막고 우리로 뭐하게 함이라? 저주 아래 있게 함이라.
인간이 참되지 않아야 예수님이 참됩니다. 그래서 로마서 3장에 보면 ‘모든 인간은 거짓되나 하나님은 참되시다.’라는 말은 인간이 거짓돼야 주님께서 참이 되는 겁니다. 로마서 10절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어져야 돼요. 의인은 없나니 한 명이라도 나오면 안 됩니다. 나오면 그건 안철수야. 안 돼. 그건 안 돼, 나오면 그 사람이 주가 돼요. 한 사람이라도 나오면 안 돼, 우리 중에도 누가 나오면 안 돼, 나오면 안 돼요. 나올까를 기대해서도 안 돼요. ‘우리 가운데 의인 있을 걸.‘라고 기대해서도 안 됩니다.
‘선한 선생님이여, 예수 당신은 선한 선생님입니다.’ 라 하면 주께서 ‘입을 다물라. 그 입 다물라. 니가 주제넘게 니가 함부로 선하다 아니다. 어디서 니가 나보고 선하다 하느냐. 선한 분은 하나님밖에 없어. 니가 그런 소리해서는 안 돼.’
시간을 거슬러서 반대로 생각해줘야 됩니다. 반대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우리를 위해서 우리가 존재하는 게 아니다. 날 위해서 내가 있는 게 아닙니다. 요러한 발상의 전환! 이거 성령 아니면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흔히 개혁주의에서 하나님 주권, 주권 하잖아요. 믿지 마세요. 그 하나님의 주권이라 하는 것은 하나의 자기가 여기 있다. 내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함으로써 나는 그 정도로 신앙인 맞습니다. 라고 자기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하나님 주권을 거론하는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거론할 입장도 못됩니다. 하나님의 주권이라 하는 것은 나의 존재와 달리 주님의 존재만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입장에서 보면 우리는 내 존재를 생각할 그런 존재가 아니에요. 나라는 존재가 나의 존재를 생각할 존재가 아니고 그냥 기능 이예요. 그냥 어떤 역할을 할 뿐입니다.
여러분들이 사시다가 힘들 때는 사고의 전환을 해보세요. ‘내가 뭐하기 위해서 왔지?’ 이렇게 생각하시면 돼요. ‘나라는 존재가 어떻게 하면 지금보다 더 뛰어날 수 있지?’ 자기 존재를 전체를 자꾸 건드리지 마시고요. ‘주여, 오늘은 뭐하면 됩니까?’ ‘어떻게 하면 내가 나아질 수 있습니까? 내가 어떻게 하면 행복해 질 수 있습니까?’라고 생각하지 말고. ‘내가 오늘 뭐하기 위해서 오늘 눈을 뜨고 있죠? 눈 감길 때까지 나는 뭘 해야 됩니까?’ 그거만 생각하면 돼요. ‘통장에 돈이 얼마 있지?‘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니까. ’내가 뭘 하면 되지?‘ 통장에 저금하라면 저금하면 되죠. ’지금 하면 나중에 펀드에서 몇 % 받고...‘ 이렇게 생각하면 골치 아픈 거예요. 자기 나름대로의 흩어진 역사, 이러면 안 되거든요. 그러면 나를 위해서 예수님이 있는 것처럼 그렇게 되니까 안 되죠. 아시겠죠?
어떻게 된다고요? 요한계시록 22장을 위해서 뭐가 있다? 마귀도 있고 창세기 2장이 있다. 그렇다면 이 다리 있잖아요. 창세기 2장과 요한계시록 22장을 잇는 이 다리, 이 다리는 그러면 어떻게 설치합니까? 그게 재밌어요. 어떻게 되느냐 하면 인간은 죄를 졌기 때문에 반드시 천국을 내다보게 돼 있죠. 그러면 인간은 나름대로 다리를 건설합니까? 건설 안 합니까? 다리를 건설해요. 이 건설은 축 늘어진 줄다리가 아니에요. 위험한 다리가 아니에요. 아~주 딴딴한 다리예요. 이게 무슨 탑이냐, 이게 바로 바벨탑, 걸어서 하늘까지. 지상에서 하늘까지, 차곡차곡 나쁜 것은 제거하고 옳은 것만 모으고 더욱 더 나은 것과 더 다시 한 번 숙고해서 더 나은 것, 결점은 줄이고 장점은 살리고, 이걸 변증법이라고 합니다.
반증해서 진리에 접근하는 방식, 변증법, 이건 경영의 필수입니다. 맞죠? 시행해 보고 오류와 오류를 찾아내서 다음에 할 때는 그 발견된 장점을 집어넣어서 또 다시 거기다가 계획대로 실행에 옮기는 방법,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점점 더 완벽에 완벽을 기할 수 있죠. 이건 경영뿐 아니고 의학도 마찬가지예요. 허준의 동의보감. 이 약초를 써보고 안 되면 이 약초 써서 어떤 사람이 부작용이 나면 그것을 적어놓고 그 후배 의사는 그걸 다 외워야 돼요. 이거 썼을 때는 기가 어떠하고 이건 음양이 어떻고, 이건 어떨 때는 안 받고 이건 어떤 때는 안 받고 어떤 때는 써야 되고, 전부 다 달라요. 이건 한의학도 마찬가지고 서양의학도 마찬가지죠? 전부 다 경우에 경우를 계속 다 외워야 되죠. 그걸 많이 외워서 경험 많이 한 사람이 용한 의사가 되잖아요.
어떤 일률적인 방정식이 아니잖아요. 이건 자기만의 노하우라 할까, 계속해서 실패와 실패를 거듭하면서 터득할 수 있는 지혜에 어프로치 하는 그 방법, 이게 인간의 모든 심성인데 이게 천국 가는데 그 방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죠. 이게 바로 가짜, 사실 지옥으로 통하는 길이 이 길입니다.
이렇게 되면 여기 다리를 건설하는데 동원되는 것은 인간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보다 영웅적인 것, 보다 위대한 것, 보다 착한 사람들, 좋은 것은 여기다 콘크리트처럼 시멘트에다 발라 다 집어넣겠죠. 다 집어넣고 뒤돌아보면서 혹시나 다리가 무너지는데 실수로 집어넣은 사람을 다시 그런 사람을 빼내겠죠. 정반합이니까.
변증법이 뭐냐 하면 정 반 합해서 합이 되죠. 합이 정답인데, 새로운 사태와 변화가 오고 시간이 지나다 보면 ‘아! 이런 약점이 있었네, 이걸 미처 몰랐었네.’ 하고 그걸 반으로 줄이고 그 약점을 줄이면서 새롭게 한 단계 도약하면 이게 합이 되는 동시에 뭐로 바뀌느냐 하면 정으로 바뀌죠. 모든 분야가 다 그래요. 모든 분야가 이 변증법에 의해서 이런 식으로 가는 거예요. 이 변증법을 이야기한 사람이 마르크스예요. 그런데 여기서 갈 때는 마르크스는 그냥 되는 것이 아니고 투쟁이 있다. 이게 엥겔스나 마르크스가 전부 다 뭐하는 사람이냐 하면 신학 하는 사람입니다. 스탈린도 신학교 나온 사람 이예요.
인류의 사상과 인류의 모든 문명은 어떤 식으로 하나님이 이끌어 내는가, 그걸 연구한 사람 이예요. 이걸 제시한 겁니다. 그러면 최고는 진 선 미, 최고의 진과 최고의 선과 최고의 미, 최고의 아름다운 세계는 칸트에 의하면 바로 예지계, 형상학적으로 말하면 예지계, 그리고 플라톤에 의하면 이데아의 세계, 여기는 모방의 허상의 세계, 이게 신플라톤주의가 되는 겁니다.
이러한 의식이 헬라주의 적 기독교와 그러한 헬라주의는 어려우니까 쉽게 말해서 옛날에 그리스의 철학가들의 사상, 아리스토텔레스의 것과 결합했다고 보면 돼요. 그런 것을 결합해서 기독교를 정립하게 된 이유가 뭐냐 하면 모든 사람들 속에 이러한 철학적 요소가 있기 때문에 이것을 기독교로 바꾸어주면 자동적으로 태어날 때부터 기독교 신자가 되고 그 신자들의 집합이 뭐냐 기독교 제국을 형성할 수 있거든요. 전체 로마 제국에 기독교만 딱 집어넣으면 그 자체 전체가 하늘나라 천년왕국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이 교회 교권 잡은 사람들이 그 철학을 집어넣어서 ‘이런 식으로 여러분 이해되죠? 이해되면 구원받았습니다.’ 이런 식으로 한 겁니다. 그런데 그걸 반대하고 나온 사람이 누구냐 하면 바로 1516년인가 루터라는 사람이 뭘 들고 나왔느냐 하면 십자가를 들고 나왔어요. 십자가 신학을 들고 나왔다는 말이죠. 십자가 신학을 들고 나와서 루터가 하는 말하니까 제일 먼저 그들이 들고 나온 게 뭐냐, ‘십자가 우리도 안다.’ ‘너희들은 십자가 몰라.’ 내가 말하는 십자가 신학은 하나님은 숨어있는 하나님 이예요. 숨어있는 하나님은 다른 말로 하면 도망치는 하나님 이예요. 잡으려하면 잡히지 않고 잡는 걸 포기하면 찾아오고, 완전히 약 올리는 거예요. ‘주님 여기 계시다.’하면 안 잡히고 ‘아이고, 나 포기했어, 이제 안 잡을 거야.’ 하면 찾아오고. 숨어있는 하나님!!
이번 가야산 수련회에 이걸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교재를 아마 6월 말이나 7월 초에 쓰려고 해요. 바울 신학과 교회사와 어떻게 발전되고 어떻게 무시당했는가를 교회사적으로 밝혀보려고 합니다. 안 바쁘시면 참여하시면 좋죠. 주께서 허락하시면...
다시 한 번 봅시다. 창세기 2장, 3장에서 우리 인간이 여기 있는 게 아니고 이미 창세기 2장에 갔죠? 여기서 우리는 이미 죄인이죠. 어느 정도로 죄인인지 우리는 몰라요. 이제 슬슬 죄의 행세를 하는 거예요. 여기서 생로병사로 힘드니까 뭘 원하느냐, 극락이라든지 천국을 내다보겠죠. 내다본다고 가는 게 아닙니다. 거기 갈 수 있는 방안을 간구하겠죠. 간구하는 게 뭐라 했습니까? 정반합이라 했어요. 근데 이게 뭐가 잘못 이예요? 내 쪽에서 출발해서 책임과 처리를 누가 한다? 내가 잘못했기 때문에 누가 처리한다? 내가 알아서 내 잘못을 내가 처리하겠습니다. 진짜 이거 지옥 가야 됩니다. 좀 지옥 좀 가줘야 돼요. 이런 인간들.
그런데 성경은 뭡니까? 그렇게 처리 못 한다 정도가 아니고 그건 어지간한 신학자는 다 이야기했고 성경은 그게 아니고, 신학자들이 동의한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그들은 이런 죄를 드러내야 될 이유가 처음부터 뭐가 있었다? 요한계시록 22장부터 먼저 있었고,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의 모형으로 창세기 아담과 하와가 있었던 거예요. 이렇게 이야기하면 뭐라고 합니까? ‘우리 인간은 뭐야, 쪼다야?’ ‘왜, 기분 나빠? 왜 기분 나쁘냐?’ ‘아이구, 기분 좀 나쁘네요.’ ‘왜 나쁜데?’
왜 나쁠까요? 이미 마귀가 들었기 때문에 기분 나쁜 거예요. 마귀가 노리는 게 하나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되는데 대드는 것, 마귀가 이거밖에 없어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모든 게 있다는 것 자체에 대해서 마귀는 용납 안 합니다. 마귀는 모든 걸 줄 용의가 있는데 딱 하나는 뭐냐, 예수님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그것은 마귀가 용납 못 해요. 밥 퍼주는 사랑, 다 좋아요. 다 하라고 합니다. 하지만 뭐는 입 다물라?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있다는 것. 마귀는 그걸 뭐로 바꿉니까? 예수님의 입장을 뭐로 바꿔요? 하나님을 위해서 우리가 있다고 바꾸죠. 이게 바로 기독교 2천년 신학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있는 게 아니고 뭐로 있다? 하나님으로 인하여 있다. 이건 모든 이들이 납득을 하고 있다. 왜 그럴까요? 이미 여기서 인간은 죄에서 뭐를 끄집어내요? 인간은 본인이 한계를 느끼니까 본인이 알거든요. 그러면 하나님 나라에 가야 되잖아요. 하나님에게 잘 보여야 되잖아요. 잘 보이려면 최선을 다해야 된다 이 말이죠. 하나님께 잘 보이려면 하나님을 섬기는 흉내를 내야 되고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을 섬긴다 하려면 여기서 종교적인 방법과 모든 방법을 다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 주권을 주장하는, 이게 개혁주의 아닙니까? 여러분, 개혁주의라는 것은 마귀가 만든 신학이 되는 거예요. 개혁주의 뿐 아니라 모든 신학도 마찬가지예요.
그럼 개혁주의라는 것은 뭐를 주장하는지 알아요? 어떤 신학도 완전하지 않다. 이 말은 뭔 뜻입니까? 정반합이죠. 완전하지 않다. 시대를 따라서 우리의 약점과 결점을 보완, 보완하면 된다.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어느 세월에?? 어느 세월에 보완합니까?
태양이 있는데 금성이 지나갑니다. 어제 TV보니까 금성이 지구를 지나가는 게 보여요. 그들이 하는 말이 217년 뒤에 이걸 다시 본다는 거예요. 그런데 마침 애가 어제 잠자느라 못 봤다. ‘아빠 난 못 봤는데 언제 또 보여주는데?’ ‘217년 뒤에 볼 수 있다.’ 그럼 그 애가 뭐라 합니까? ‘보여줘’ 하잖아요. 그런데 이건 볼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안 되는 겁니다. 인간은 자기 형편이 이렇다는 걸 몰라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우리가 존재한다는 이 사실은 인간에게서는 나올 수 있는 게 아니고 인간이 역겨워하고 인간이 제일 싫어하는 거예요. 왜, 이미 마귀가 인간 속에 들어왔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도적으로 마귀가 안 좋아하는 것을 줌으로 말미암아 인간들이 구원받는 걸 줘도 그걸 ‘에이씨, 안 믿어 이거.’ 하고 내칠 수밖에 없게 만들어 버려요. 그게 바로 십자가예요.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어리석고 꼴 보기 싫고 ‘에게, 에게, 그게 무슨 구원의 능력이야. 우리가 착해야 되지.’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식으로 십자가는 우리에게 다가오는 겁니다. 일체 우리는 선이고 뭐고 우리는 죄인밖에 안 된다는 사실은 인간들의 좌절과 희망을 끊어버리죠.
그래서 인간들이 다리를 건너갑니다. 건너가는데 문제는 이렇게 건너갈 때 주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이쪽에서 언약이란 방식으로 이렇게 줄다리가 이어져 있어요. 이어져 있는데 사람들 생각하기에 사람들이 건설한 아주 튼튼한 최신공법으로 잘 지은 이 다리에 비하면 이 줄다리는 찾는 이가 없고 너무나 초라하기 짝이 없는 거예요. 이건 아슬아슬해요. 이건 자기를 미워해야 되고 자기를 부인해야 되거든요.
사람이 자기를 미워할 수 없거든요. 인간은 자기를 짝사랑하기 때문에 나를 미워하면 짝사랑 대상이 없습니다. 사랑의 대상이 없으면 사람이 미치잖아요. 사랑의 대상이 없을 때는 남는 것은 자살밖에 더 있습니까? 자기가 미워지면 자살밖에 없죠. 자살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그래야 볼 수밖에 없는 이 다리로 오니까 여기 제일 먼저 온 사람이 누구냐, 아벨이 오죠. 그런데 이 튼튼한 다리로 걸어간 사람은 제자 중에 누굽니까? 가인이죠. 창세기 4장부터 이미 뭡니까? 가인의 길이냐, 아벨의 길이냐, 어느 쪽이냐, 우리가 어느 쪽으로 갈 수 있습니까? 제사는 드릴 수 있어도 형한테 얻어맞는 것은 우리는 원치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 길은 사실은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천국에서 진짜 숨어져서 온 거지만 과거 우리한테는 숨어있는 길이예요. 숨어있는 길이고 우리가 갈 수도 없는 거예요. 그런데 주께서는 죽여 놓고 억지로 가게 하실 때 바로 여기서 하나님의 언약 사건을 유발시킬 때 우리는 위에 있는 인간들만 고집했던 내가 미워지는 거예요. 죄인인 내가 미워지는 게 아니고 바로 이런 식으로 구원받겠다고 시도했던 자기 자신이 미워지는 거예요. ‘아, 내가 내 영광도 챙기고 구원도 받으려는 토끼 두 마리를 다 잡으려는 이 더러운 심보가 납니다.’하고 미워지는 겁니다.
요걸 창세기 33장에 보면 여기 누가 나오죠? 바로 야곱이 나오죠. 재산도 챙기고 아내도 챙기고 구원도 받고 복도 받고 그 모든 게 무슨 소용 있습니까? 하나님 만난 순간 그게 바로 하나님과 싸움을 벌인 죄라는 것을 ‘내가 그 자리에서 죽어버리죠. 야곱의 존재는 죽고 어떤 기능만 있죠. 어떤 기능? 이스라엘의 기능이 있죠. 야곱이란 존재가 이스라엘이라는 존재가 된 것이 아니라 야곱이란 존재는 사라지고 이제는 사라질 이유가 이스라엘 기능 때문에 이제는 죽어도 못 죽는 나그네 인생을 살 수밖에 없죠. 130년 동안. 이제는 나를 위한 나는 없어졌어요. 이스라엘 되기 위해서 억지로 이스라엘 하기 위해서 야곱은 그 길을 가야 됩니다.
그런 길 가면서 야곱이 경험하는 것은, 야곱의 이름이 뭐로 바뀌었습니까? 이스라엘로 바뀌었죠. 이스라엘에서 누가 나옵니까? 예수님이 나오죠. 이스라엘 나라에서 메시아 나옵니다. 그러면 야곱 안에서 누가 나온다는 말입니까? 예수님이 나오죠. 그러면 야곱 안에 누가 들어있다? 예수님이 처음부터 들어있던 거예요. 야곱은 그걸 몰랐던 거예요. 자기 안에 예수님 있는 걸 모르고 자기는 자기로서 충분하다고 본 겁니다. 나에게서 나온 것은 오직 뭐밖에 없다? 내꺼 밖에 나올 게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올 줄은 생각도 못했거든요. 주께서 사건을 일으켰어요. 사건을 일으키니까 야곱에서 예수님이 나올 때는 그냥 나오는 게 아니고 야곱을 죽이고 나온다는 사실을 야곱은 알았습니다.
사도바울은 뭐라 했죠? ‘내가 날마다 죽노라.’ 했죠. 내가 살아있는 한 예수는 안 나오고 ‘나는 죽어야 마땅합니다.’하는 순간 이미 예수님이 터져 나온 거예요. 빙의(憑依) 진짜 예수 귀신 들은 거예요. 나는 껍데기로 사는 것이고, 야곱은 몰랐다니까요.
요한복음 1장 끝에 보면 “인자 위에 천사가 오르락 내리락....” 이건 누가 이야기했던 거예요? 옛날 야곱이 꿈에서 천사가 오르락 내리락 했잖아요. 그걸 예수님이 그대로 자기한테 인수인계 한 거예요. 그러면 야곱을 위해서 예수님이 있었던 게 아니고 예수님을 위하여 누가 이 땅에 등장했습니까? 야곱이 등장 했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은 야곱의 하나님이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으로서 예수님이 되는 겁니다. 내 안에서는 죽은 자는 없고 산자뿐이다. 엘리야도 그랬고 모세도 그랬고 예수님과 이야기했죠. 변화 산에서. 이것이 바로 우리가 아는 세계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세계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주인공은 내가 주인공이고 내 구원, 죽어서 좋은데 가려고 하는 내가 주인공이기 때문에 이건 그리스도의 세계가 아닙니다. 그래서 종교는 죕니다. 종교는 누가 만들었습니까? 내가 만든 거예요. 남이 만들었어도 내가 동의하면 내가 만든 거예요. ‘아, 그거 그럴싸하네, 그것만 지키면 복 받아? 그거 나도 동의해.’ 나를 위한 내 종교. 예수가 되던 하나님이 되던 천주교가 되던 인간은 전부 다 자기 종교예요. 그 종교가 깨져야 돼요. 그 종교가 박살나고 미워지고 깨어지는 그 사건, 그 사건을 통해서만 우리가 주의 생명책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요한계시록 22장에서 거기 무슨 나무가 없습니까? 선악과나무가 없죠. 선악과나무가 없고 또 해와 달아 없죠. 자 뭐와 뭐가 사라집니다. 해와 달과 선악과가 결국 뭐였습니까? 그리스도를 보여주기 위해서 임시방편으로 설치된 뒤에 있는 무대장치였습니다. 그리고 생명나무가 좌우에 어때요? 한 두 그루가 아니죠. 가로수 같아요. 대구 신천대로 같아요.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서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고” 할 때 우리가 이걸 따먹는다고 좋아하시면 안 됩니다. 원래 이 모든 과실은 누굴 드러내기 위해서 있는 과실입니까? 예수님이죠. 그러면 그걸 따먹을 때는 우리 좋아라고 따먹지 말고 누구 좋아라고? 예수님 때문에 했다는 것을 증거 하면서 이걸 따먹어야 되겠죠.
그렇다면 해와 달과 별 같은 것도 결국 예수님만 빛인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유사 빛 덩어리를 하늘에다 박아놓은 거예요. 해와 달과 별 이런 것. 그래서 과학자들이 아무리 망원경을 동원하고 안드로메다를 이야기해도 예수님을 위해서 그게 만들어졌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결론이 나올까요? 안 나올까요? 안 나옵니다. 이게 나오지 않아요.
제가 과학의 정체란 글을 썼잖아요. 한 10년 전에 썼잖아요. 그걸 쓰면서 나름대로 과학책을 봤는데 우주가 어떻게 형성되고 어떻게 생성됐는가, 하는 모든 것은 유에서 유로 갑니다. 뭐가 빠졌어요? 아무것도 없는데서 유가 생긴다는 이것에서 출발한 게 아니고, 있는데서 있는 것들이 어떻게 변화를 일으키느냐 하는 거예요. 그러니 창조론이 아니에요. 변화론 이예요. 변화론이라 하고 진화론이라 합니다. 그냥 이건 이렇게 변했다. 가을 되면 잎 떨어진다. 그런데 나무는 누가 만들었느냐, 그건 몰라요. 누가 만들었는지는 모르고 이렇게 변한다는 거예요. 이렇게 변하고 결국 나온 결론이 뭐냐 하면 모든 것은 변화만 연속이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들뢰즈나 화이트헤드, 모든 철학자들이 변화만 있는 것이다.
그래서 종교에서 이런 변화만 주장하는 종교가 무슨 종교죠? 불교 아닙니까? 모든 인연에서 인연으로, 윤회설, 돌고 도는 물레방아 인생, 계속 도는 거예요. 돈다는 것은 무슨 의미냐 하면 쥐 있고 소 있고 돼지 있고 인간 있잖아요. 이게 지금 돌아가잖아요. 이것들이 휙 돌아가다가 인간으로 툭 튀어나오고 한번 돌면 소 튀어나오고 돌면 쥐가 튀어나오고, 한 바퀴 또 돌면 개가 튀어나오던지, 자기 업보에 따라서 튀어나온다는 이 종교가 불교입니다. 어지러워요. 그러니까 이거는 부처를 믿는 종교도 아니고 가만히 있어도 인간은 누구나 결국 많이 돌다 보면 부처가 된다는 거예요. 왜, 고생을 많이 하다 보면 나중에 쥐 됐다 소됐다 하다 보면 나중에 ‘그래, 아무것도 아니야.’ 언젠가는 부처가 되는 거예요. 시간이 지나면 부처가 되는 거예요. 믿는 종교가 아니고 믿는 것은 누구만 믿어라? 자기만 믿으면 돼요. 내가 부처인 것을 믿으면 돼요. 지독한 자기에 대한 지독한 짝사랑이 불교예요. 이게 동양철학이거든요.
그런데 요한계시록에서는 뭐냐 하면 분명히 선악과가 있었고 분명히 해와 달이 있었죠. 이게 없어진다는 거예요. 이게 없어지고 대신 뭐가 등장합니까? 예수님의 빛만, 빛 되심만 등장하는 거예요. 생명나무가 선악과를 대신해서 등장해버리는 겁니다. 이제는 생명나무의 천지요. 해와 달이 없는 예수님이 빛으로 사는 천지다 말이죠. 그렇다면 그 세계는 결국 우리가 있다는 것은 있는 게 아니었죠. 그 이쪽 세계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임시적으로 있었던 세계가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세계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세계는 그리스도의 세계와 동일하지 않습니다.
동일하지 않다는 말은 지금 우리가 어느 세계를 위해서 살아가고 있는가를 스스로 한번 돌아봐야 되죠. 눈에 보이는 세계를 위해서이냐, 아니면 그리스도의 세계를 위해서이냐, 내가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되죠. 그러면 이 목사 물어봅시다. ‘ 이 목사 죽고 난 뒤에 당신은 어디 가 있습니까?’ 그런 질문 할 수 있거든요. 질문 자체를 보세요. 현재 당신 있죠? 있는 당신이 죽어서는 어디가 있겠습니까? 있음에서 있음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건 완전히 불교 사고방식 이예요.
그런데 나는 뭐라 해야 합니까? 현재 나는 없고, 예수님의 계심에 내가 있잖아요. 그러면 죽어서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님 계시면 나는 있는 겁니다. 그 자리에. 아브라함이 있잖아요. 아브라함이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하나님 때문에 있는 거예요. 아브람은 없어요. 아브라함은 있어요. 아시겠습니까? 왜냐, 아브람은 하나님의 세 천사가 와서 아브라함 되게 했거든요. 야곱은 없고 이스라엘은 있어요. 이삭도 마찬가지고. 현재 이삭이 있다.
남자 여섯 명 밝힌 사마리아 여인이 자기는 그냥 있는 내가 목마르잖아요. 그래서 물 뜨러 오잖아요. 그 순간은 누가 있어요? 내가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 말씀 듣고 누가 있어요? 나 이전에 메시아가 있고 난 뒤에 내가 있고 그 내가 목마르다 이 말이죠. 그런데 목마른 이유가 예수님 있음을 알려주기 위해서 나한테 목마른 것을 계기로 해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 이야기를 했잖아요. 그럼 내가 있음은 의미 없는 것이고, 누가 있음에? 예수님의 계심에 나는 그 계심을 보여주기 위해서 내가 사마리아 여인으로서 그 당시에 태어난 겁니다. 그럼 그 여인은 어디 가 있습니까? 예수님께 안겨서 예수님이 계신 곳에 그 여인은 있어야 돼요. 왜, 그 여인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 있음이 드러나기 때문에.
사도바울이 있음에서 사도바울 용서해준 주님 계시잖아요. 주님이 계신 곳에는 예수님이 용서하신 모든 사람이 함께 있는 겁니다. 그게 천국입니다. 그런데 질문하는 사람은, 예수님은 가위로 냉면처럼 뚝 잘라버리고, 예수 믿는 내가 갑자기 예수님이 계셔서 있는 게 아니고 예수 믿는 나라는 거예요. 그런 나는 없어요. 주님을 드러내는 나는 있지만 예수 믿는 나는 의미 없어요. 그런 세상 적인 그건 의미 없는 거예요. 그걸 믿다가 안 믿으면 어떻게 하는데요? 예수 안 믿는 나, 예수 믿는 나, 예수 안 믿는 나, 예수 믿는 나, 이것은 팔을 앞으로 나올 때는 있네, 뒤로 가면 없네, 하는 거와 똑같은 거예요. 눈에 보이면 있는 거고, 안 보이면 없는 거고.
심리학에서 이렇게 이야기해요. 사람 얼굴이라 합시다. 이 사람 뒤통수가 어디 있습니까? 분명히 뒤통수가 안 보이죠? 그런데 이걸 사람으로 본다면 뒤통수 없는 사람을 우리가 생각 합니까? 생각 안 합니까? 안하죠. 이게 뭐냐 사람은 보는데서 보는 게 아니고 거기서 공작을 바꿔요. 머릿속에서 안 보이는 것까지 조작을 해요. 안 보이는 것까지 갖다 붙여서 전체를 생각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부분을 통해서 전체를 보는 게 인간 의식의 구조가 그렇습니다.
따라서 사물에 대해서도 그런데 하물며 인간의 존재에 대해서 사람이 죽는 것은 그냥 죽는 게 아니고 주께서 정해놓은 것이고, 죽고 난 뒤에는 뭣이 있다? 심판이 있는 것도 주께서 정해놓은 겁니다. 이게 보지 않은 자를 믿는 자가 복되다 그랬잖아요. 이게 주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더 이상 니 자신에 대해서 손 좀 떼라. 힘들지도 않나, 왜 자꾸 저 사람 닮아야 되고 저 사람처럼 해 달라 하고.’
제가 설교할 때 이야기했죠? 미장원에 가서 인물은 안 받쳐주는데 드라마에 나오는 그 미장원처럼 머리 해달라고. 인물은 안 맞는데, 왜 저 사람처럼 해 달라. 저 인생처럼 살게 해 달라. 우리 인생 따로 있어요.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우리 인생 따로 있어요. 그건 주께서 주님의 다른 면을 보여주기 위해서 니는 그길로 가고 나는 다른 길로 가는 겁니다. 니는 암 걸리고 나는 암 안 걸리고 어쩔 수 없어요. 주께서 그렇게 하신 거니까.
그래서 제 책에서 사람 대 사람 관계에서 자기를 정죄하지 말라 했잖아요. 그건 환상이고 공상에 불과한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보느냐, 당신은 지금 생명나무 강가에서 지금 거닐고 있다고 봐라 말이죠. 만날 안양에서 걷지 말고. 지금 좌우에 생명나무에서 걷고 있다고 봐라 이 말이죠. 왜, 이 말씀이 그렇다는 말은 말씀대로 우리가 그렇게 되게 하시는 거예요. 지금 생명 책 안에 니 생명이 있다고 생각하라 이 말이죠. 생각하라 한 게 아니고 믿어지죠. 우리의 생명은 하늘에 있는지라, 했잖아요. 그 말씀이 현실로 우리에게 성령 안에서 다가오게 하시는 거예요.
해와 달, 많이 봐 놓으세요. 결국 못 보고 없어지니까, 해와 달과 별이 다 없어진다 말이죠. 그래서 어떤 천문학자는 이런 아이디어를 생각했어요. 어떤 아이디어냐, 그 사람 글 보고 속으로 제가 웃었어요. 성경도 이렇게 이용하는 사람이구나. 뭐냐 하면 우주를 평행구조를 만들어서, 현재 과학자들은 중력이 어디서 나오는지 몰라요. 중력이 힘인데 힘이 어디서 나오느냐, 중력이 나오는 알맹이를 찾지 못했어요. 결국은 중력은 알맹이가 아니고 하나의 구조다. 이렇게 결론을 내렸는데 어떤 구조냐, 구조를 설명을 해야 될 게 아닙니까? 이게 15차원, 13차원, 하여튼 평행 우주와 또 다른 우주가 있다고 하는데 이 우주와 우주 사이를 겹치게 되면 여기서 파괴가 일어나겠죠. 다른 우주가 배후에 숨어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나온 게 바로 중력이다. 이 이유가 뭐냐, 현재 우주의 75%가 우주의 총질량을 해보면 이게 우주의 모든 질량은 우주의 총 질량의 25%밖에 안 돼요. 75%는 어디가 있어요? 그건 암흑 물질 이예요. 암흑 물질이 있다는 말은 이것은 뭐냐 다른 옆의 평행우주 때문에 그렇다.
그렇다면 이 우주를 없애서 부숴버리면 우리가 생각하는 다른 우주가 나올 것이다. 이 우주가 요한계시록 22장이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성경하고 현재 우리가 보이는 것하고, 그래 이 말은 뭐냐, 천문학에서 어디로 비약한다? 천문학도 인정하면서 천문학을 통해서 드디어 영적 세계, 천국의 세계까지 들어가 보겠다는, 이건 무슨 다리입니까? 여기서 축 처진 어리석은 다리가 아니고 뭐냐, 인간의 똑똑한 다리, 또 하나의 정반합의 새로운 가설이 튀어나오는 거예요.
왜 그런 아이디어가 튀어나오느냐 하면 내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존재는 끌어 담아야 존재가 정립이 돼요. 그런데 기능이라는 것은 내일 뭘 할지는 내일 또 업무가 주어지기 때문에 내일 따로 업무가 주어지기 때문에, 어떻게 주어집니까? 내일 사태가 일어나요. 어떤 사태가 일어나면 허겁지겁 그거 해결한다고 하루해가 다 지나가 버려요. 그렇잖아요. 내 나름대로 계획 잡아도 중간에 어떤 일이 생기면 틀어지면서 내 계획대로 안 돼요. 그거 마무리하다가 벌써 다 끝나버려요. 우리 인생이란 늘 이래요. 하나 막으면 하나 터지고 하나 막으면 하나 터지고, 둘째 애가 일이 없으면 첫째 애가 말썽 있고 첫째 애가 괜찮으면 친정아버지가 어떻고 계속 일이 터지는 겁니다.
그 말은 뭐냐 하면 우리가 주님에 의해서 내 것이라고 따로 잡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하나의 기능인으로서 이미 천국에 속한 사람으로서 그리스도를 어떤 식으로든 그리스도만의 주되심을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로 동분서주하게 만드시는 겁니다. 혼자 혼란하다가 혼자 돈 때문에 고민하고 혼자 ‘앞으로 어떻게 굶어죽겠다.’고 고민하게 만들고 온갖 몸부림 만부림 다 치게 만들면서 결국은 성경에 나오는 현실을 현실로 받아들이게 하는 겁니다.
끝으로 하나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4절에 봅시다.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이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이마에 있다는 말은 우리가 내 소유가 아니다 이 말이죠. 아까 사마리아 여인 이야기했죠. 남자 7명을 하던 8명을 하던 다른 사람은 행실 나쁜 여자로 보지만 사마리아 여인이 나중에 소급해서 볼 때 행실 나쁜 여자가 아니고 남자 밝힌 여자가 아니고 밝히는 걸 통해서 그리스도를 알라 하는, 뭐 그런 여자도 괜찮지 않습니까? ㅎ 이왕이면 12명 밝히고 구원받으면 괜찮죠. 그러나 아무나 하나, 그런 기능을 아무나 하나, 또 어느 정도 생겨야 되지, 아무나 되는 게 아닙니다.
다시 5절에 보면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노릇하리로다” 다윗 언약, 시편에서 이것이 성전에서 있게 돼요. 성전에서! 이사야 끝에 보면 바로 성전만 완성되면 이런 혜택은 주어진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이 성전이 어디서? 어린양의 보좌, 그래서 성전의 주인공이 드러나기까지는 유보적이다가 드러나게 되면 이것이 완전히 드러내는 겁니다.
그 다음에 6절 봅시다. “또 그가 내게 말하기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지라” 이 말할 때 사도요한이 어디 장난치고 있는 겁니까? 오히려 이러죠. ‘아! 정말 이거 참 좋은데, 이거 성도한테 참~ 좋은데 표현할 길은 없고, 야~ 정말 이 세계가 좋은데.’ 얼마나 답답해하겠습니까? 이거 내가 꾸며낸 말도 아니고, 변화 산에서 본 게 꾸며낸 겁니까? 실제로 모세 엘리아하고 이야기했잖아요. 그때 베드로 마음에 나중에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아! 봤는데, 내가 직접 봤는데.’ ‘에이, 거짓말 하지 마.’ ‘내가 변화 산에서 봤는데, 직접 봤는데.’
그 동방박사가 속 타겠습니까? 바로 오늘날 성령 받은 성도의 심정이 이 심정 이예요. ‘아이고, 이 쪼다 같은 인간들아, 진짜 성경대로 맞는데.’ 참되고 신실하고 이거 어떻게 말을 해요? 참되고 신실하단 말밖에 못하죠. “이걸 보이려고 그의 천사들을 보냈고 내가 속히 오리라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뭐냐, ‘진짠데, 진짠데 이거. 아~ 이거 진짠데. 돈 주고 살 게 아닌데, 이게 진짠데. 이게 현실인데, 대한민국 이게 현실이 아니고 이게 현실인데.’ 그렇게 하는 겁니다. 이 말씀이 우리는 이 세상에서 2초, 3초 짧은 순간이지만 이게 한꺼번에 확 밀려들어오는 그 순간이 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축~ 늘어진 아슬아슬한 자기를 미워하고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보면서 가는 그 길! 하지만 그 길은 아무나 갈 수 없고 걸핏하면 우리는 튼튼한 다리, 많은 사람들이 가는 그 다리, 얼마나 그 다리를 선호했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죄였던 것을 깨닫게 해주시고 주께서 불러주셨기 때문에 사명 받들어서 오늘도 산다는 사명을 감당케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