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계시록42강-반복없는 반복 120705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5. 12. 13. 04:02

2012-07-06 01:22:26 조회 : 1561         
반복없는 것의 반복 120705 이름 : 이근호 (IP:117.55.17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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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교회120705-요한계시록22장17-21(반복 없는 것의 반복)42강a-이 근호 목사

제 42강a

시작해 봅시다. 오늘이 마지막이 될지 안 될지 모르겠어요. 해보면 알겠는데 어쨌든 다음 시간에 요한계시록 전체를 제가 요약해서 이렇게 글로 전체 내용을 적어오려고 합니다. 글로 하든지 그림을 그리든지 해서 요한계시록을 끝내도 하도 요한계시록 책이 어려우니까 그림으로 알기 쉽게 하든지 제가 지난 것을 해 와서 할 예정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요한계시록 전체 다를 정리합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7절을 보면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이렇게 돼 있거든요.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의 완성이 될 때 나타나는 게 성령입니다. 신부는 인간이 구원될 때 신부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성령과 신부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가 완성단계에 돌입했을 때 나오는 그런 표현을 말합니다.

요한계시록 1장부터 전체에 보면 모든 것이 성령께서, 성령께서 그렇게 죽 돼 있죠? 교회도 성령께서. 교회라는 것은 어디의 간섭을 받고 있다? 성령의 간섭을 받고 있고 성령은 바로 어린양, 주 예수님의 간섭을 받고 있다. 요한계시록에는 이렇게 돼 있거든요.

성령께서 교회를 다스린다면 어떻게 다스리느냐 하면 이것을 전체를 완료해서 전체 다를 보여주는, 한꺼번에 다 보여주는, 교회에게 세상 돌아가는 것을 다 보여줌으로 말미암아 이런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교회는 이렇게 신부로 되었다. 이런 절차로 되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겁니다. 몽땅 다 아는 거예요. 드라마를 1회부터 50회까지 다 보여주고 그 다음에 드라마 내용을 이야기하게 되면 우리가 이해가 되잖아요.

그렇게 이해되는 사람, 알아듣는 사람, 그런 사람을 하나님의 신부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일에서는 모르는 게 없다 이렇게 될 수 있어요. 요한계시록은 더 이상 모르는 게 없어요. 전부 다를 알았습니다.

그래서 18절에 보면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이렇게 돼 있죠? 이게 뭐냐 하면 성령이 보여준 것은 더 이상 빼고 자시고 할 것 없이 다 보여준 거예요.

이제 하나님이 한 일을 모른다 하면 안 돼요. 다 보여준 겁니다. 그 보여준 그 대상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신부라고 합니다. 교회죠. 결혼식에 들어가는 사람처럼 그렇게 마지막 혼인잔치에 들어가는 사람처럼.

그런데 오늘 강의할 것은 어렵다면 어려울 수 있는데 성령이 교회들에게 다 보여주는 이 말은 쉬운데 어린양과 성령 관계, 이걸 지금부터 설명해 드리고자 하는 겁니다. 성령을 요한계시록 1장에 보면 성전에 있는 7촛대의 영, 7촛대를 거니는 영을 성령이라 돼 있습니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에서 성령이라 하는 것은 ‘천국이라는 자체가 성전에 의해서 설명돼야 된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린양은 뭐냐, 어린양은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어린양은 어디 등장하느냐 하면 유월절 날 등장하죠.

어떤 점이 어려우냐 하면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빼놓고 예수님은 나중에 30세 이상 성장하고 난 뒤에 예루살렘을 한번 방문하게 돼 있어요. 그것도 마지막에, 끝에, 마태 마가 누가복음은 예루살렘이라는 지역을 마치 고 바위로 등산하듯이 점점 더 최후에 높은 곳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그렇지 않아요. 요한복음 2장에도 7장에도 또 예수님께서 3번 왔다 갔다 하죠. 그래서 예수님이 3년 동안 했다 하는데, 마태 마가 누가에서는 나사렛에서 출발해서 점차, 점차 어떤 확정된 절차에 따라서 목표를 향하여 다른데 새는 일이 없이 예루살렘에 도달하면서 예수님의 일은 끝나버립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도달할 때 예수님께서 어디에 맞추었느냐 하면 유월절에 맞추어서 입성하신 거예요.

지금 제가 설명하는 것은 모든 걸 다 이루어서 알려주는 성령과 어린양, 예수님이라 하지 않고 왜 어린양으로 했는가 하는 어린양의 관계를 설명하는 겁니다. 어떤 관계에 있기에 성령께서는 기쁘게 ‘다 했어. 다 했어. 너희들 신부야, 더 이상 뭐 너희는 다 알려준 거야.’라고 기쁘게 할 수 있느냐 그걸 설명하는 겁니다.
 
그렇게 설명할 적에 예수님께서는 어린양으로 했다 말이죠. 어린양은 절기가 무슨 절기냐. 유월절과 관련돼 있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에서 예루살렘에 도달함으로써 거기서 유월절에 맞춰서 도달해서 아기 예수로 출발했던 예수님께서 마지막에는 어린양으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요한복음 1장에 보면 나오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로다” 바로 이점에 대해서 어린양이 되어서 유월절 하려면 이게 성전 안에서 이루어진 유월절은 제사를 잘 드려야 유월절이 완성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거 이야기를 다 지우고 이제 제가 이야기하는 취지가 이걸로 요약됩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 맞춰서 성전에 가셔서 유월절의 어린양의 제사를 드렸다면 그럼 일반 모든 사람은 뭡니까? 지금 예수님께서 유월절 제사 드리려고 성전에 갈 때에 이런 모든 사람은 예수님만이 하는 일에서 저 바깥에 나와 있죠. 바깥에서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하고 있다 말이죠. 바깥에서 자기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뭐가 안 중요합니까? 예수님이 홀로 외롭게, 제자들도 나중에 다 떨어져요. 마치 로켓이 올라갈 때 1단계에 다 떨어지잖아요. 다 떨어지고 마지막 캡슐 제일 마지막 끝부분 끝자락만 어린양으로 제사 드리면서 예수님이 뭐로 바뀌느냐 하면 어린양으로 바뀐다 말이죠. 예수님이 어린양으로 바꾸도록 하는 시스템, 장치한 게 뭐냐 하면 성전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시간적으로 유월절이 돼야 되는 겁니다. 유월절 성전이 갖춰질 때 예수님은 어린양의 자태로 돼 있고 그것이 요한계시록 21장 22장에 보면 어린양의 보좌에서 생명수가 나온다고 지난 시간에 했죠? 그런데 이러한 아이디어, 이러한 생각이 일반인한테는 철저하게 감춰져 있는 것이고 숨어 있는 것이고 이건 따라오려 해도 참여가 안 돼요. 배제된 상태입니다.

그러면 일반인들은 뭘 보느냐 하면 세상을 눈으로 보고 있습니다. 해와 달과 별과, 그 가운데 뭐가 있느냐 하면 옛날 과거가 있었고 과거 시간에서 현재에서 미래로 흘러간다. 이게 있다 이 말이죠. 예수님의 성전 안에서 유월절 돼 버리면 이 시간이 끊어지겠죠. 이 끊어지는 이걸 가지고 뭐라 하느냐 하면 유일성이라 해요. 또는 단일성.

시간은 이렇게 반복이 되거든요. 전도서에도 있듯이 과거에 있던 것이 지금도 있고 후에도 있고 아침에도 먹고 내일 되면 아침을 또 먹고 하듯이 항상 우리는 반복을 통해서 세상을 규정하게 돼 있고 규명하게 돼 있어요. 회사 여기 있는데 어떤 직원이 와서 ‘가만있자, 회사가 이 근처인데.’ 그러면 안 되잖아요. 이 자리 있어야 반복해서 출근할 게 아닙니까? 모든 것이 반복 속에서 인간이 느끼는데 그 반복을 주께서는 배제해 버리는 겁니다.

니가 알고 있는 반복에 머물러 있다면 그것은 내 세계 속에 못 들어왔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유일성, 예수님만이 하는 일이기 때문에 이건 반복이 됩니까? 반복이 안 됩니까? 반복이 안 되죠. 그렇죠? 우리 인간은 자기가 아침 먹고 다음 날에도 아침 먹고 반복이 되잖아요. 그런데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홀로 했다는 말은 이건 인간들이 해낼 수 있고 흉내 낼 수 있는 그 반복의 노선에는 가담이 안 되겠죠.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뭐냐, 반복되지 않는 것이다. 반복되지 않는 것을 성령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반복을 해버려요. 반복되지 않는 것을 반복을 해버리면 날마다 어떻게 하느냐, 성령이 우리에게 온다는 것은 계속해서 칼을 가지고 자르는 역할, 잘라버려요. 우리는 어제의 나와 지금의 내가 일치하다고 생각하는데 중간에 반복되지 않는 것이 반복적으로 잘라버리면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내가 되는 것이 아니고 어제 주님이 함께 있었던 그것을 오늘 주님이 함께 있게 하는 거예요. 내가 직접 나하고 연결되는 것이 아니고 나와 주님과 연결돼 있고 그 주님께서 또 다시 나를 살게 할 경우에만 나는 오늘 살아있는 겁니다.

걷지도 못하는 간난 애를 엄마가 어디 놀러가면서 ‘얘야 니가 옷 차려입고 빨리 나와.’ 이러면 안 되잖아요. 옷 입혀서 걷지도 못하니까 바짝 안아서 차 안에 집어넣어버리면 애는 ‘이상하다. 분명히 조금 전까지 방에 있었는데, 오, 지금은 자동차에 있지?’ 이건 연속성이 안 되는 거예요. ‘아, 내가 이렇게 기어서 갔구나.’ 그건 말이 안 돼요. 자기가 걷지도 못하는데 뭘 기어옵니까? ‘뭔가 외부에서 나보다 강한 분이 나를 이렇게 옷을 입혀 줬고 나를 차에 실어줬다. 그것이 나의 어머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신부잖아요. 완성된 상태의 신부는 신랑 없이는 신부란 게 성립이 안 딥니다. 그런데 그 신랑이 단회성이라니까요. 신랑은 단회 성으로 오기 때문에 우리가 하는 이런 식으로 반복되지 않기 때문에 사람이 예수님을 잡으려 하면 잡히지 않습니다. 인간이 잡는 것은 반복된 것만 잡아요.

연어가 강물에 온다. 옛날 미개한 부족들이 연어 올 때, 연어인지 몰랐는데 연어가 오더란 말이죠. 나중에 보면 연어가 없어요. ‘아이쿠, 연어를 잡을걸.’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다음에 보니까 그 연어가 또 올라오더란 말이죠. 그래서 ‘아하, 연어가 날짜를 봐서 연어 올라올 때. 이때는 갈치가 올라올 때. 이건 멸치 잡을 때, 이건 숭어 잡을 때.’ 요런 식으로 하니까 고기가 잡히잖아요.

그러니까 인간은 뭐든지 반복적인 것이 될 때 인간의 손에 잡히게 되는 겁니다. 주님은 그 반복에 잡히지 않아요. 하나님께서 은혜 줄자에게 은혜를 주는 것이지, 인간이 은혜를 받았다고 그 은혜 받은 것을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겐 없습니다. 왜, 그 은혜가 단회 적이기 때문에 그래요. 은혜가 반복적일 것 같으면 우리는 그 반복적인 것을 나도 반복적이고 은혜도 반복적이고 ‘야! 이건 내 지갑에 넣어놓으면 되겠다.’ 하거든요.

그런데 주님은 한번 줘버리고 가버렸다 말이죠. 그 다음에 올지 안 올지는 주님 소관이지, 우리 소관이 아니다 이 말이죠. 그래서 ‘주님이여, 지난번에 은혜 주었는데 왜 지금 은혜 안 줍니까?’ 할 때 지난번에 은혜줄 때 우리가 은혜 받을 자격도 안 된다는 인간으로 달라져 있어야 되는데 은혜 받을 때 은혜를 제대로 이해를 못해서 ‘아하, 나니까 은혜 주는구나. 내일 되면 은혜 또 받겠지.’ 이렇게 돼 버리면 자기를 여전히 반복성 속에 그대로 놔둬버리고 나를 날마다 신자 되게 해주시옵소서.‘ 이런 식으로 하니까 결국은 그 사람한테 예수님은 똘마니 되는 거죠. 우리가 구원하는데 예수님은 은혜를 날마다 갖다 줘야 되는 어떤 서비스 맨이 된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만약에 그렇게 신앙생활 할 것 같으면 뭐가 빠져야 되느냐 하면, 성령을 구태여 언급할 이유가 없습니다. ‘니 예수 믿었나?’ ‘예수 믿었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니가 알아서 똑바로 해. 똑바로 하란 말이야, 예수 믿었으면 바로 예수 믿는 삶을 살아야지.’ 거기 성령이 왜 끼어들어갑니까? 성령은 처음 믿었을 때 한번 필요하고 그 다음부터 성령 필요 없어요. 우린 예수 믿고 난 뒤에 내가 알아서 착하게 예수님의 사랑을 알았기 때문에 알아서 사랑하면 그만 이예요. 그런데 거기 무슨 성령이 필요합니까?

그런데 요한계시록은 1장부터 마지막 끝장까지 계속 성령, 성령으로만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성도 신부라는 너 인간마저도 니가 손댈 수 없는 반복성에서 해당이 안 되고 반복될 수 없는 신부로서 너는 이 세상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야 된다는 취지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말이 어렵기 때문에 다시 한 번 알기 쉽게 정리해 봅시다. 제가 이런 이야기했죠. 하나님의 성전에서 모든 인간은 ‘나가 있어, 나가 있어. 다 나가 있어. 제자들도 나가 있어. 너도 나가있어. 다 나가 있어.’ 그리고 성전에서 왜 나가야 되는가, 아무나 어린양이 될 수 없어요. 어린양은 오직 한분만 돼요. 한분이 어린양이 됨으로 말미암아 이 안에는 모든 사람이 다 빠져 있다 이 말이죠. 빠져 있다면 이 안에 있는 어린양에 대해서 사람들이 이해가 됩니까? 안 됩니까? 이해될 수가 없죠. ‘나가 있어. 너희는 다 나가 있어라.‘

그럼 여기 어린양이라는 단순히 예수님이 아니고 어린양이라니까요. 요한계시록에서는 어린양! 어린양이라 하는 것은 단순히 예수님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어린양이라 하는 것은 이게 뭐냐, 세상은 뭐 중심이다? 지금 성전중심인데 이 성전은 지상에 있는 예배당이나 예루살렘에 있는 그 성전이 아니고 이거는 특수한 성전, 어린양이 계시는 그 성전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어린양이 계시는 그 성전은 지금도 그 성전에서 인간은 나가 있고 그때도 나가 있게 한 거예요.

그러면 성전에서 우리가 빠져있다면 우리가 무슨 수로 성전에 들어갑니까? 글쎄 그때는 바로 뭐냐 하면 여기서 성령께서 찾아오시는 거예요. ‘나가 있어.’ 성령이 찾아가시는 거예요. 성령이 찾아갈 때는 뭐냐 하면 우리 쪽에서 ‘나가겠습니다.’ 이게 허락이 안 된다니까요. 우리 쪽에서 나가겠다는 것은 반복 밖에 안 돼요. ‘야, 지난번에 어느 기도원에 가니까 은혜 돼, 올해도 그 기도원에 가야지.’ 이거는 반복 밖에 안 돼요. ‘지난번에 찬송가 405장 어메이징 그레이스는 은혜 돼, 한 번 더 불러야지.’ 한 번 더 불러도 소용없어요.

이건 철학적으로 따져도 이건 안 돼요. 헤라클레이토스인가 누가 이야기 했잖아요. 사람은 같은 물에 두 번 목욕할 수 없다고. 이미 강물은 흘러갔기 때문에, 강물에 목욕한다는 것은 그 같은 물에 목욕한 게 아니고 다시 옛날 지 목욕했던 땟물은 저 흘러가 버리고 새로운 물이 왔는데 들어가는 거예요. 이게 강물에 같은 물에 목욕 할 수 없다는 것만 아니고 남편하고 대화할 때도 같은 남편과 대화할 수가 없어요. 자식도 마찬가지고. 심지어 인간은 자기가 누군지 모르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맡겨야 돼요. 누구한테? 그리스도 몸으로 맡겨야 되지, 자꾸 내 몸으로 인수인계하면 안 됩니다. 내 몸을 인수인계하게 되면 내 몸은 고집이 있어서 내 몸을 반복해요. 내 몸을 반복하게 되면 이건 똥고집이라니까요.

‘뭐 주님께서 은혜 주신다 해놓고 은혜 주지도 않고 삐져서 기도 안 한다.’ 이런 식으로.  ‘니가 뭔데?’ ‘내가 하나님 아들 아닙니까?’ 아들이라는 것은 기능적인 문제고 사명적인 문제지, 존재 문제가 아니에요. 아들다워야 아들인 거예요. 어제 수요일 날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인간이기 때문에 이렇게 하라는 말은 잘못됐다 말이죠. 이렇게 할 때만 인간이라고 했죠.

신부답게 하는 일이 벌어질 때만 신부가 되는 거예요. 우리는 자꾸 내가 괜찮은 사람이고 그 다음에 뭘 하려고 하는데 그렇게 하는 것은 비성경적입니다. 그러려면 만약에 내가 이런 인간인데 뭘 하겠다 하면 성령이 없어버려요. 성령이 없어버리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방향이 어린양에서 우리에게 다가와야 되는데, 어린양이 다가오는 것이 아니고 내가 어린양쪽으로 다가가려고 한다 이 말이죠. 백날 해봐야 이거는 튕겨나가 버립니다. 여기는 유일성, 우리가 못하는 거예요.

신부답게 산다는 것, 그것은 성령이 올 때만 신부답게 사는 것이지, 내 힘으로 신부답게 살 수가 없습니다. 그 신부 늙은 신부예요. 옛날 한물 간 신부예요. 성경에 기름 준비하라 하는데 기름 준비한 다섯 처녀는 신랑하고 결혼했잖아요.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그걸 딱 보고 난 뒤에 ‘우리도 해야지.’ 해서 신랑하고 결혼하려고 미리 기름을 준비한다고요. 그런데 요번에는 새로운 조항이 첨가됐네요. 성령에 의해서. ‘SK인가, 아니면 현대 오일인가?’ ‘SK입니다.’ ‘아, 나는 안 받아. 난 현대 오일을 원했어.’ 그러면 그 다음사람부터 현대 오일 기름을 준비하면 ‘이번에는 이란 산이냐, 쿠웨이트 산이냐, 어디 산이냐?’ ‘이란 산입니다.’ ‘아, 난 쿠웨이트 산을 원해.’ 기어이 우리 행한 것으로 구원 못 받게 하시는 겁니다. 왜냐 하면 우리 행한 것이 돼 버리면 예수님의 유일성이 깨지잖아요. 예수님이 홀로 다했다는 게 깨진다니까. 이게 깨져버리면 은혜가, 은혜가 아닙니다.

이걸 로마서 1장에서는 하나님의 의로만 구원이 돼요. 우리 의는 안 되거든요. 안 되는데 우리에게 버릇이 뭐냐 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의 안다고 나름대로 흉내 내서 마리아 마르다 처럼 잡채 주고 주님 섬긴다고 하조. 마르다가 주님 섬기고 마리아는 앞에서 말씀 듣고 둘 다 착한 일 했는데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에 둘 다 믿음 있다? 없다? 있기? 없기? 없기. 둘 다 믿음이 없었던 거예요. 아직 성령이 안 왔으니까.

그러면 마리아 마르다가 구원 못 받았다는 뜻은 아니고 마르다 마리아는 하나의 연기자들이예요. 장차 완료된, 몇 번째 하는지 모르겠는데, 성령과 신부라 하는 것은 이미 우리가 손댈 필요 없어요. 이미 성령 왔으면 신부요, 구원받은 겁니다. 구원받았는데 우리가 잘나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유일한 단회적인 것이 우리 속에서 반복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신부요, 어린양, 천국 백성이 되는 겁니다. 그건 이해되겠죠?

그럼 더 나아가 봅시다. 그런데 예수님을 뭐라 하느냐, 어린양으로 돼 있죠. 그럼 어린양으로 됐다 하는 것은 뭔 뜻이냐 하면 만약에 우리가 천국 간다면 우리는 어린양이 있는 곳으로 가는 게 돼요. ‘이상하다. 교회서는 예수님 믿으면 된다 하는데.’ 아니거든요. 하도 예수란 말이..., 예수 믿으면 되는 게 아니고 어린양 쪽으로 가는 거예요. ‘아이, 난 어린양인줄 몰랐네.’ 그러니 문제 있죠.

요한계시록에 보면 어린양의 보좌에서 생명수가 나온다 하는데 ‘아이구, 예수님이 어린양이든 관계없어. 예수만 믿으면 돼.’ 이럴 경우에는 그 예수라 하는 건 분명히 자기 존재의 대행(유형)입니다. ‘나 여기 있는 것처럼 예수님은 얼마나 멋있게 생겼을까? 키는 180 될 것이고 허연 수염 났을 것이고 도포 휘날리면서....‘ 그것은 뭐냐 하면 눈에 보이는 것 가지고 멋있게 보이는 거예요. 내가 생각할 때 멋있는 정도는 ’메시아 정도는 이정도 멋있어야 돼.‘ 이건 나에게 나온 생각입니다. 인간의 문제는 뭘 걸치고 있다는 거예요. 명예 걸치죠. 학력 걸치죠. 재산 걸치죠. 사람은 걸치고 있는 그것이 자기가 감당이 안 돼요. 그게 무거운 짐이 되는 겁니다. 놀라운 사실은 우리가 걸치고 있는 것보고 주께서 심판하지 않는다는 사실 이예요. 주께서는 보시지도 않는 것 가지고 우리는 ’이거 걸쳤습니다. 명주 걸치고 비단 걸쳤습니다.‘ 이거 걸치고 우리는 평가 받으려고 한다 말이죠. 주님께서 우리 걸친 것으로 평가 안 하십니다.

공 집사님도 나중에 연세 많아지면 머리 빠질지 몰라. 나이 들면, 혹시 그럴 리 없겠지만, 다른 분 예를 들라하니까 빠지고 있기 때문에. ‘주여 머리 빠졌습니다.’ 그런 것 안 묻는다니까. 머리 빠져서 머리가 허예도 그런 것은 주께서 평가하는 평가항목에 안 들어가요. 이빨 아프면 치과 의사나 화내지 다른 사람은 관계없어요.

주께서는 그런 걸 묻지 않는다니까. 우리가 걸치고 있는 거. 그래서 사도바울은 벗고 싶다는 거예요. 이 몸에 걸치고 있는 것을 벗고 싶다는 거예요. 벗고서 그냥 그리스도 안에서 만나고 싶다는 거예요. 그만큼 우리는 못 걸쳐서 아예 한이 맺혔어요.

제가 수련회 공부하면서 이런 글이 나와요. 옛날에 초대교회에 순교하고 피를 흘린 것이 국가의 권력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고개 숙이면 살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국가 권력을 거부했기 때문에 피를 흘렸다면, 요즘 교회는 권력 안 준다고 피를 흘려요. 안 알아준다고, ‘왜 목사인데, 유지인데 공무원들이 내가 이 큰 교회 목사인데 왜 안 알아줘?’ 권력에 목말라서 권력을 안 준다고 피를 흘리고 싸우고 있어요. 이 이야기는 하르낙이라는 사람인데 종교 교회사에서 자유주의 신학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걸치고 있는 그것들 속에서 처음에 아기 예수 태어나고 할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따르고 했습니까? 따를 때에 자기들이 걸치고 있는 것에 대해서 뭔가 보탬이 되고자 은근히 노린 거예요. 물론 진짜 예수 믿는 사람은 걸치고 있는 것도 벗은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냐 하면 삭개오, 삭개오가 갑자기 뭐라 합니까? ‘내가 토색한 게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이건 걸치고 있는 것을 벗기 바빠요.  이거 ’아이고 무거워, 아이거 무거워라.‘ 하는 식으로.

그런데 부자 청년은 어떻게 합니까? 주께서 ‘어이, 너 옷 벗어라.’ 하니까 근심하며 돌아갔다 했죠? 예수님께서 사람을 괴롭히려고 그렇게 하는 게 아닙니다. 뭐냐 하면 사람한테 관심이 없어요. 나는 지금 오르막길, 아기 예수로 태어났을 때 온 하늘나라가 다 찬양했잖아요. 천군천사가 찬양하고 목자가 밤에 양 지킬 때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이런 난리 쳤으면 예수님이 고생 덜 해야 될 건데 날 때뿐이고 그 다음부터 고생이 기다리고 있잖아요. 희한하죠. 만약에 제가 태어났을 때 동방박사 세 명이 멀리서 찾아와서 몰약과 유향, 황금 바쳤다면 저는 우쭐댈 겁니다. ‘이래도 무시하지 마. 이래도 내 생일날 동방박사 찾아왔어. 찾아왔어?’ ‘안 찾아왔어.’ ‘안 찾아왔으면 말을 말아.’ 동방박사가 문제가 아닙니다. 별이 내 머리 위에 있다 말이죠. 적어도 그 정도 됐으면 알아서 주위에서 길을 비켜줘야 될 텐데 이건 세상은 마귀는 꿈쩍도 안 해요. 아니 그 정도 별 까지 떴으면, 심지어 어머니가 아버지하고 합궁도 안 하고 날 낳았으면 적어도 그 정도 했으면 알아서 기어야 될 텐데 알아서 기기는 오히려 마귀가 더 달려들죠.

그래서 요한복음 15장에 이렇게 돼 있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는 아무것도 아니야, 너희 안에 나 예수가 있기 때문에 마귀가 너희들을 못 잡아먹어서 그렇게 달려든다. 니보고 달려든다고 생각하지 마라. 나로부터 사랑받은 너이기 때문에 내가 사랑해 준 걸 보고 마귀는 알아보고 나를 공격하는 식으로 너희를 공격한다.‘는 거예요.

스데반 집사는 헬라 계 유대인 그리스도교의 대표자로 볼 수 있거든요. 그 스데반 집사가 죽을 때 AD34년 쯤 되는데 그때 시울이란 사람한테 옷을 맡겼잖아요. 그때 사울이란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고 할 때 예수님 하시는 말씀이 ‘바로 그 사람들을 핍박하는 것이 나를 핍박하는 것이다. 사울아, 니가 해봐야 니만 고생이다.’ 이유가 뭐냐 이미 예수님의 신부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 보고 ‘니 알아서 열심히 해라.’ 이러면 그건 갋아도 괜찮아요. 그런데 성령이 와버리면 그건 신부예요. 신부라 하는 것은 덜 신부, 많이 신부 필요 없어요. 신부 그 자체로 완료된 거예요. 신부 배후에 누가 있다? 신랑이 있는데 신랑이 누굽니까? 어린양! 어린양이 신랑이 돼 버린 혼인잔치가 돼버린 상태기 때문에 마귀는 알아요. 안 된다는 걸. 하지만 다른 사람은 모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악마로 하여금 그렇게 활동을 하게 하는 것은 하도 가짜가 많으니까, 짝퉁이 많으니까, 특히 중국에서 얼마나 만들어 냅니까? 짝퉁. 명품도 아닌데 짝퉁. 하도 믿는다는 짝퉁이 많기 때문에 마귀를, 미친개를 풀어줘야 돼요. 미친개를 풀어줘야 물릴 때 예수님 바라보는지, 아니면 자기 자신이 믿는 미신 바라보는지, 자기 행함 바라보는지 한번 보자. ‘이렇게 열심히 했는데 이러십니까?’ 이러면 가짜고 ‘주여 마땅합니다.’이렇게 나오면 진짜고. 지금 미친개 한두 마리가 아닙니다. 온 거리마다 진짜 성경 말씀대로 우는 사자와 같이, 미친 사자죠. 사자가 울긴 왜 웁니까? 미쳐서 울어요. 마귀가 미친 사자와 같이 귀신들 풀어서 안 믿는 인간은 그냥 나둬요. 자기 백성이니까. 복음 아는 사람을 그렇게 집요하게 달려듭니다. 진짜 신부인지 아니면 신부 행세하고 있는 유사 신부인지, 그렇게 해요.

좀 더 해봅시다. 성도가 신부로 성전에 들어갈 때는 예수님이 보이면 안 되고 어린양이 보여야 됩니다. 물론 어린양이 예수님 같은 거죠. 이게 요번 수련회 때 할 건데 삼위일체로도 설명이 안 된다니까요. 삼위일체 믿으면 구원 못 받는다는 이야기하고 싶어요. 이번 수련회 때 삼위일체 믿어서, 천국 가는데 ‘교리냐, 아니면 복음이냐.‘ 해서 교리는 안 된다 이 말입니다.

어린양이 보여야 되는데, 이미 어린양이 보였다 하는 것은 이미 우리는 성전 안에 들어왔다는 거예요. 그리고 들어올 수 없는 곳인데 성령이 오니까 어디 들어왔다? 성전 안에 들어와 버린 겁니다. 이것이 요한계시록 21장에 12문이 있죠? 그리고 요한계시록 21장에 하늘에서 뭐가 내려온다? 새 예루살렘성이 내려온다 했죠? 성전에서 지금 우리가 생각해야 될 것은 뭐냐 하면, 성전에서 왜 그런 식으로 예루살렘 성, 신부, 어린양, 왜 그런 식으로 꼭 표현을 해야 되느냐, 그걸 제가 지금 설명하고자 하는 겁니다.

구약을 한번 봅시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망하죠. 이스라엘이 망했으면 승리자가 누굽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승리자죠. 왜 하나님은 자기가 승리자가 되는데 있어서 자기 백성이 멸망하는 그런 일들이 왜 필요했느냐 하는 겁니다. 그럼 완전히 약 올린 것밖에 안 되잖아요. ‘내 백성이다. 내 백성이다.’ 해놓고 자기 백성을 망하게 해놓고 승리자는 여호와다.

단체적 일치성 또는 단체적 단일성
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스라엘이 뭐를 품고 있습니까? 성전을 안고 있죠. 레위기에 보면 성전에는 뭐로 돼 있느냐 하면 지성소 있고 성소 있고, 그리고 여기 번제 단 있고 이 전체가 뭐냐 하면 하나의 장막 뜰이 되겠죠. 이것은 어디서 내려왔느냐 하면, 이건 그대로 시내 산 위에 본 걸 가지고 내려왔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이걸 간편하게 그리면 여기 점이 있는데 이건 하늘나라고 이건 지상이고, 이 점에서 조명을 비춰버리면 요기 이러한 터가 있는데 이게 바로 성전이 되고 성소가 된다 이 말 아닙니까? 그럼 이게 거룩이 되겠죠. 하늘나라는 이곳은 속된 세계고 이 위는 거룩한 세계이니까.

모세가 시내 산 위에 올라가서 요 점을 통해서 조명을 통해서 말씀을 주니까 여기에 성전이라는 게 생겼다. 또는 이스라엘이 생겼다. 요점이 뭐냐 하면 언약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에서. 그러면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것 안에 들어가야 되는데 지금 문제는 여기에 이스라엘 인간들이 있죠. 이 인간들을 한번 뜯어보면 이 인간들이 어떤 생각을 하느냐 하면 인간들이 자기가 조명발을 발휘해서 뭘 만드느냐 하면 거꾸로 여기에 하늘나라를 만듭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성전이 있으니까 이 이스라엘 인간들이 하나님의 성전, 예루살렘 성전, 시온 성전 등 이걸 통해서 뭘 조명하느냐, 하늘나라를 조명한다 말이죠. 인간 하나하나가. 이렇게, 이렇게 비춰보는 거예요. 그리기가 애매하네요.



하늘에서 내려오는 요것과 인간이 구원받고 천당 가고자 하는 요것과 요 둘이 어디서 만나느냐 하면 공통점이 성전에서 만나는 거예요. 그러면 성전이 있다 하는 것은 인간에게는 굉장히 좋게 여기는 겁니다. ‘하나님, 어떤 일이 있더라도 성전에서 기도하면 응답되죠?’ 하나님께서 ‘응답된다.’ ‘거봐~ 응답된대. 이제 살았어. 우리 이스라엘은 구원받았어. 아브라함 자손은 구원받는 거야.’ 이렇게 오해들을 하는 거예요.

그렇게 오해하게 되면 여기 성전에서는 뭐냐 하면 죽음의 반복이거든요. 아까 반복 이야기했죠? 죽음의 반복. 이 반복은 연속적인 반복이 돼요. 매일같이 상번제 어린양을 드리는. 누가 죽어요? 어린양이 죽죠. 그러면 어린양을 어디서 구하느냐 이 말입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그거야 자기 집에, 어떤 사람은 수천 마리 키우고 한다 이 말이죠. 그래서 인간들이 양을 잡아서 상번제로 아침, 저녁으로 양을 바치면 겨우 인간들은 뭘 생각합니까? 하나님께서 양을 받았으니까 이 피를 받으시고 하나님이 응답하시면 우리 죄는 있다? 없다? 우리 죄는 없고 우리는 하나님께 복을 받고, 원래 복이라 하는 것은 죄가 없을 경우에는 자동적으로 복이 오게 돼 있어요. 죄는 없는데 복이 안 오는 경우는 없습니다. 죄 때문에 복이 안 오니까 죄가 없으면 의만 있으면 무조건 복이 오게 돼 있어요. 그러니까 너희들은 죄가 없고 거룩하게 되면 복이 오게 돼 있고 복을 받은 우리나라는 망하지 않는다. 이렇게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했던 나라가 망했다 이 말이죠.

어디서 망했고 누구한테 망했습니까? 바로 여호와께 어디서 망했습니까? 약속의 땅에서 망했죠. 누가 어린양이라 하느냐 하면 바로 요따위 식으로 생각하는 전체가 어디에 포함됐느냐 바로 어린양의 합숙훈련 해야 되는 거예요. 어린양에게 들어가야 되는 거예요. ‘니가 이 쓴잔을 마실 수 있느냐? 한 목사님 설교한 것처럼. 너희들이 하늘나라 높은 자리를 앉을 생각하지 말고 내가 마실 잔을 니가 마실 수 있느냐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제자들이 뭐라 합니까? 아니 천당 가는데 뭐를 못 마셔요? ’마시겠습니다.‘ 할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못 마신다 하지 않고 뭐라고 했느냐 하면 ’기필코 니가 마시게 되리라.‘라는 이야기를 언급한 이유는 니 인간 속에서 나온 모든 것은 오해와 오해, 곡해와 곡해 이외는 아무것도 할 줄을 모릅니다. 심지어 제자들도. 전체가.

그러니 오늘 강의 처음으로 돌아가면 지금 성전이 있고 어린양이 있으면 그 어린양은 예수님만 어린양 될 수 있어요. 그러면 나머지 우리는 뭐냐,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걸치는 것, 이쁜 것 더 걸치는 세일하면 뛰어가서 또 걸치고 이렇게 걸치는 걸 좋아한다 말이죠. 

그러면 신부가 뭐냐, 신부라 하는 것은 성령이 와야 신부잖아요. 이스라엘이 망했잖아요. 이스라엘 망한 그것을 보따리 싸서 택배로 해서 신부될 사람에게 성령을 통해서 어떻게 합니까? 우리 안에 집어넣어 버려요. 집어넣어 버리면 구약 이스라엘이 망했던 그 모든 체험과 경험들이 이제는 솔솔하게 오늘날 우리 일생으로 드디어 장착이 되는 겁니다. ‘주여 이래서 망했습니다. 이런 오해와 곡해해서 망했습니다. 그것이 장착될 때 그게 신부입니다.

이렇게 장착이 되면 그 다음부터는 우리에겐 어떤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성전 이야기를 하고, 그리고 어린양 이야기를 할 때 그게 무슨 말인가를 오히려 성령 받은 사람은 알아들어요. ' 나 어린양 믿으면 구원받는다.‘ 이게 아니고 ’어린양이 나 때문에 죽었다.‘ 이걸 믿는 거예요. 마치 구약 이스라엘 때 자칭 그들이 매일같이 어린양 갖다 바쳤지만 갖다 바쳐봤자 그 성전 불타 버리고 어린양 다 죽어버리고 자기도 죽고 다 포로 잡히고 참혹하게 다 죽었잖아요.

말벌이 개미집을 습격하는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는데 한 2만 마리 되는데 말벌 폭격대가 와서 다 몰살시키고 꿀을 다 빼내가요. 그걸 보고 느낀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서 말벌 바벨론이 개미 같은 이스라엘을 다 뜯어서 죽여 버려요. 그런 식이라. 그런데 그걸 누가 시켰어요? 하나님이 그렇게 시킨 거예요. 곡해와 오해와 왜곡과 일방적인 자기생각, 이거 보세요. 인간들이 ‘우리는 성전이 있었어. 우리는 제사 드렸어. 아마 하늘나라 갈 걸.’ 일방적인 자기가 쏴 대는 자기 조명발, 이 모든 것. 말벌  나와서 다 뜯어 먹혀요. 다 뜯어 먹힌 요것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한테 그대로 주어지는데 주어지면 우리는 진짜 성전 안에서 진짜 어린양만 바라보는 사람이 되면서 우리의 면류관도 누구한테 반납한다? 주님 발 앞에 아낌없이 ‘이 면류관 제가 썼다는 게 말이 안 됩니다. 주여.’ 하고 바치는 거죠. 뭘 보고? 우리 속에 뭐가 있기 때문에? 멸망했던 이스라엘이 있기 때문에. 이게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걸 주께서는 반복하는 거예요.

반복되지 않는 것이 우리 안에서 반복되지 않는 것으로 매일같이 우리를 반복시켜 버리면 우리는 어제의 나와 오늘 나를 연속성 가지려는 나 위주의 욕심을 날마다 절단당하는 그런 인생을 살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6장에 보면 ‘내일 염려는 오늘 당겨서 하지 마라.’ 말이죠. 왜 그러느냐 하면 오늘 일은 니 소유의 오늘이 아니기 때문에 내일 되면 또 내일 치의 내일이 있고 또 내일 치의 너가 있고, 키를 누가 한자라도 더할 수 있느냐, 키를 한자라도 더할 수 있고 없고가 안 되죠. 왜, 오늘 있다가 내일 죽을지, 들풀처럼 우리는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내일 살아있어야 키가 자랐는지 키 재고 할 텐데, 죽어버리면 그것도 소용없잖아요.

솔로몬의 걸치는 것, 솔로몬의 입은 옷이죠. 솔로몬이 입은 걸치는 것도 뭐보다 못하다? 들에 있는 백합화보다 못하다는 거예요. 또 그거 연구한다고 현미경 들여다보고, 백합화와 인간이 어느 것이 아름다운가, 백날 보세요. 그게 보이는가, 안 보이죠. 왜 안 보이는지 알아요? 과학이라는 것이 곡해요 오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과학이라는 게, 인간의 이성이라는 거, 인간의 감정이라는 거, 인간의 의지라는 것이 옛날 우리 선배 이스라엘이 다 해봤던 거예요. ‘하나님 이게 아름다운 거죠? 저게 아름다운 거죠. 아름다운 것을 많이 드릴까요?’ 아름다운 것을 많이 드려서 성전 되는 게 아닙니다. 어린양 때문에 그런 거거든요. ‘하나님, 어린양 내가 바쳤습니다. 어제 어린양, 우리 조카가 바쳤고,’ 그 어린양 바쳐도 안 돼요. 그거 소용없는 짓 이예요.

어린양은 다 배제하고 오직 누구만 어린양이 된다? 예수님이 어린양.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은 어린양이라 하는 겁니다. 예수님 안다 하지 마세요. 어린양을 알아야 돼요. 어린양 앞에서 이스라엘은 망했다? 안 망했다? 망해버렸다. 그 망했던 사실을 통해서 오직 예수님만이 어린양이 희생제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줄 때 거기서 생명수가 흐르고 있다. 거기가 바로 천국 이예요. 이게 바로 낙원이 되는 겁니다.

그럼 좀 더 해봅시다. 요한계시록 1장 한번 봅시다. 1장 4절에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와 그 보좌 앞에 일곱 영과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과...” 이렇게 돼 있죠? 예수 그리스도를 일곱 영이라 표현한 것은 일곱 영이란 뜻이 아니고 일곱 영, 성령을 다루고 계시는 주인공이 되는 겁니다.

여기 1장에 보면 일곱 교회 나오고 일곱 별 나오죠? 일곱 교회는 하나의 모델로 뽑힌 겁니다. 시범 조교라 하죠. 뽑힌 거예요. 내가 이 교회를 어떻게 다루는가 보라 이 말이죠. 어떻게 다룹니까? 그 다루어진 그 모습이 오늘 요한계시록 22장 17절 “성령과 신부가 말하기를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이렇게 하는 겁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2장 3장 4장에서 일곱 교회서 하는 것을 마지막에 또다시 이것을 반복해 주고 있습니다. 뭔 뜻이냐, 완료했다는 거예요.

7촛대라는 것은 앞에 지성소 있고 그 앞에 성소 있는데 성소에 여기 단이 2개 있어요. 하나는 떡이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6개, 6개 12개가 있고 그 안에 조명하라고 가지가 7개 난 촛대가 있다 이 말이죠. 이것을 어디서 봤느냐, 하늘나라에서 본 거죠. 하늘나라에서 언약을 통해서 이렇게 주어졌죠. 이것이 유지되려면 언약 완료 돼야 되니까 십계명을 누군가 지켜야 돼요. 십계명을 다 지킨다는 보장 하에, 십계명도 지키면 거룩해집니다. 의로워지고, 십계명을 다 지킨 경우에만 이것이 그대로 유지가 되는 겁니다. 만약에 여기서 십계명을 못 지키고 하나님의 의가 생겨나지 아니하면 이것은 사라지게 돼 있어요. 이런 것은 없는 겁니다.

우리는 이것이 계속 있어서 우리가 이걸 하고 싶어 하는데 이것은 불타 버리고 없는 거예요. 그래서 이것은 불타 버리고 예수님께서 이 모습 그대로 어린양이 되셔서, 성전이 없으면 뭐도 없습니까? 어린양도 없잖아요. 성전이 없으면 양을 바칠 때가 없잖아요? 번제 단이 있어야 양을 바치죠. 번제 단 불타 버리고 바벨론이 불 타 버리고 다 날라 가 버렸는데요. 성소도 날라 가 버리고 지옥도 날라 가 버리고 다 전부 다 없잖아요. 없는데도 주께서는 어린양이 되더라 이 말이죠.

어떻게? 어떻게 됐습니까? 불집게 있어야 되고 어린양 되려면 잡아야 되니까 예수님께서 ‘뜨거워, 뜨거워.‘ 했습니까? 제사장 있어야 제사장이 어린양을 잡고 칼 가지고 난도질해야 되는데 예수님을 눕혀놓고 칼 가지고 내장 꺼내고 해야 되는데 그거 할 사람도 없는데 예수님이 어떻게 어린양이 됐느냐 말입니다. 이거는 유대인들이 질문을 할 수가 있어요. 유대인들이 율법대로 문자대로 하기 때문에.

예수님은 어린양이 될 수가 없죠. 왜, 어린양이 되려면 제사장이 양을 잡아야 되는데 잡을 사람도 없었고 불쏘시개도 없고 레위 지파도 없는데 지 혼자 어린양이라. 말도 안 된다. 이렇게 주장할 수가 있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예수님이 어떻게 어린양 됐습니까? 지금 문제가 어디 있느냐 하면 유대인들이 오해한다 했죠? 유대인들은 옛날 양 잡을 때 ‘우리가 인간이다. 두 팔 있겠다. 힘 좋겠다.’ 양 잡고 양을 잡으면 그게 양 잡는 줄 안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은 양을 누가 잡느냐, 하나님이 잡는 거예요. 하나님이 잡는 방법과 인간들이 율법으로 오해해서 자기들이 불쏘시개 들고 잡는 것하고 이게 같은 줄 알았던 겁니다. 아까 그림 나오잖아요. 인간이 쏘아대는 그 율법과 주님이 나타나는 예수님이 일하는 그 완전이 이게 같지 않다 정도가 아니고 대 충돌이 일어나는데 대 충돌이 뭐냐 하면 십자가라 말이죠.

그러면 십자가를 믿는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내 식대로 내 아이디어대로 하는 모든 것들은 다 죄고 거짓입니다.’라는 걸 고백하는 겁니다.

‘이 정도하면 주께서 기뻐하시겠지.’ 이런 아이디어들, 그게 전부 다 거짓말, 다 엉터리, 사기고. 마귀한테 속아서 한 거예요.

로마서 2장에서 사도바울이 유대인보고 하죠. ‘너희들이 율법을 갖고 있나?’ ‘그래 갖고 있다.’ ‘가지면 뭐하노. 할례 했나?’ ‘할례 했다.’ 좋다고 ‘우린 할례 했다. 고추 보여줄까?’ 이러고 있어요. ‘그 육신의 할례하지 말고 마음의 할례 해야 한다.’ ‘????..’ 마음의 할례를 무슨 수로 합니까? 누가 잘라요? 자를 사람이 없는데, 할례는 의사가 자르면 되지만 마음의 할례는 누가 자르는데? 아내가 자릅니까? 자식이 자릅니까? 누가 잘라요? 지 마음의 할례를 누가 자릅니까? 내장 같으면 지라도 자르면 되는데, 그것도 안 되고. 마음이 실체가 없는데 어떻게 자릅니까? 마음의 할례를 하라 하니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는 거예요.

그 말은 뭐냐, 니 마음은 할례 받지 않은 마음을 가지고 니가 감히 율법을 거론했다 그런 뜻입니다. 할례 받지 않은 마음. 마귀한테 덤터기 씌운 마음을 가지고 감히 예수, 감히 하나님, 삼위일체, 성령, 그런 걸 언급했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건 하나의 종교, 취미, 오락에 불과한 거예요.

그럼 다시 한 번, 예수님이 어린양 된 것은 어떻게 어린양이 될 수가 있었는가, 성전이 있으면 어린양 될 수 있죠? 그러면 성전이 있었잖아. 글쎄 그 성전은 그 성전이 아니라니까요. 다윗이 지은 성전, 성전이 아니에요. 그럼 성전만 있으면 돼? 그럼 촛대도 있어야 되고, 그 촛대가 그 촛대가 아니라니까. 옛날 유대인들에게 있던 촛대 있잖아요. 절에 가면 있듯이. 굿하듯이. 그 촛대가 아니고 교회가 촛대라니까요.

그러니까 옛날 진짜 하나님을 믿는 성전에 대한 모든 개념들은 성령이 오고 난 뒤에는 오늘날 제대로 완성된 모습을 다 보여주는 겁니다. 교회가 촛대고, 그리고 우리가 사는 이곳이 성전이고, 어린양 계시면서 생명수 흐르는 그곳이 천국이고, 우리가 생각하는 새 하늘 새 땅은 다 가짜고 그런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요한계시록에서 성전이 하나의 구약에서 말하는 그 성전이 완성된 모습으로 요한계시록은 이렇게 마감하고 있다는 것을 아시면 됩니다.
10분 쉽시다.

 이한례 (IP:203.♡.41.16) 12-07-18 11:23 
가락교회120705-요한계시록22장17-21(반복 없는 것의 반복)42강b-이 근호 목사

제 42강b

자, 20절을 봅시다. 마지막 절을 하려니까 떨린다.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이렇게 돼 있죠? 그 다음에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찌로다 아멘”

요한계시록 마지막 대목에서 여기서 “이것들을 증거 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내가’가 나와요. 현재 지금까지 인간 2천년 역사에서 신학의 제일 큰 문제점이 뭐냐 하면, 예수님만이 ‘나’라고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몰라요. 예수님만이 고정된 나입니다. 다른 사람은 고정되지 않는 ‘나’예요. 유사 나? 중구난방 나,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붙여보는 나, 몸 동아리 있기 때문에 이걸 몸이라고 할 수 없고 그래서 붙여보는 이름 나.

그런데 내가 남의 몸도 모르듯이 내 몸도 내가 몰라요. 내일 일을 내가 모르잖아요. 사람이 자기 일에서 뭔가 알아야 되는데 자기에 대해서 모르고 있어요. 그리고 과거도 인간은 몰라요. 내가 분명히 스쳐왔는데 어떤 걸 스쳐왔는지 몰라요. 제가 수련회(청도강의_) 때 이야기했잖아요. 어떤 시골의 한 마을을 지나가면서 분명히 어떤 떡갈나무를 지나왔는데 그 떡갈나무 잎사귀가 40개인지, 50개인지, 내가 분명히 스쳐지나가면서도 그걸 모르죠.

그걸 모른다 하는 것은 내 자신에 대해서 모른다는 겁니다. 왜, 내 주변에 있는 모든 상황을 다 알아야 그 상황에 맞춰서 나를 정립할 수 있는데 나는 내가 필요한 것만 골라서 기억하고 나머지는 다 버려놓고 그게 ‘나’라는 거예요. 우리가 어떤 대인관계에 있어서 나 때문에 힘들었고 나 때문에 울었고 나 때문에 속상하고 나 때문에 가슴 아파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길에서 우연히 만나서 ‘나 옛날에 니 때문에 많이 울었다.’ 하면 ‘울긴 미쳤다고 우나. 왜 우는데?’ ‘그때 당신이 말 한마디 해서 내가 서럽게 울었다.’ ‘내가 무슨 말 했는데?’ ‘이런 말 했잖아.’ ‘그럴 수도 있지.’ 몰라요. 상대방이 어떤지 모른다 이 말이죠. 특히 부부사이에도 그렇겠지만. 뭐 한마디 할 걸 가지고 찔찔찔 울고 그러면 남자들은 처음에는 겁을 덜컥 내지만 결혼하고 수십 년 되면 만날 우는 걸.... 자기 편 만들려고 하는지.

아들 있고 딸 있고 부부 있는데 엄마가 우니까 딸은 엄마 편들고, 아들은 아빠 편들고, 남편 입장에서는 4식구를 2패로 나눴다는 책임 소재가 아내 울음 때문에 있다고 책임을 아내에게 전가하고.

내가 나를 책임 질 수가 없습니다. 그걸 성경이 이야기하는 거예요. 성경은 하나님이 하는 일에 인간이 손대지 마라. 변경할 수도 없고 니가 손 댈 필요도 없다는 거예요. ‘그냥 어서 오시옵소서. 어서 오기만 하십시오.‘ 이러면 되는 거예요. ’내가 어서 갈게‘ 하시면 우리가 할 말은 ’어서 오시면 됩니다.‘ 둘 다 이야기가 끝났어요.

아까 먼저 와서 사훈을 봤는데 ‘고객에 대한 철저한 책임’ 이라 돼 있다고요. 고객도 책임 많습니다. 터무니없게 가격을 낮게 해서 사이비 물건처럼 그렇게 사려고 할 때 그들은 헐은 물건 줄 수밖에 없었고 지가 괜히 오해해서 ‘이건 아마 좋은 물건이야. 니 준 값에 합당해. 이건 좋은 물건 아니야. 니 돈 낸 것에 합당해.’ 거기에 대해서 소비자들도 책임 안 지려합니다. ‘나는 좋은 물건 사려는데 왜 이런 것을 주느냐,’ 그걸 어떻게 다 책임을 집니까? 책임질 수 없죠.

세상은 ‘나’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만이 뭐하고 하느냐, 자꾸 ‘나’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제부터 예수님이 이 ‘나’라고 하는 것이 어디서 나왔는가를 알려드릴게요. 다니엘 7장에 볼게요. 인자 같은 이, 다니엘 7장에서는 인자 같은 이라고 해서 메시아가 인자 같은 이로 오는 거예요. 인자 같은 이, 인자 같은 이인데 실제로 왔을 때는 인자 같은 이가 아니고 ‘나는 인자’라 했잖아요.

인자 같은 이라 하는 것은 신학자들이 말하는 일반적인 개념은 ‘고난 받는 종’을 인자라고 합니다. 고난 받는 종이니까 다윗, 에스겔, 다니엘, 이들을 합치면 선지자죠. 이 사람들이 고난 받는 것이 본인이 나쁜 짓을 해서 고난 받는 것이 아니고 장차 오실 분이 고난 받기 때문에 자기는 그 역할을 지금 앞장서서 대행하거든요. 주인공 따로 있고 그 대행자 따로 있는데 대행자는 주인공이 일어날 일을 대행자로 맛보기로 미리 앞서서 보여줘야 되는 겁니다.

여러분, 세례요한이 본인보고 뭐라고 하던가요? 바리새인들이 ‘너 누구냐’고 물었죠? ‘야, 세례 주는 너, 이리 와봐. 너 누구야? 뭔데 세례 주는 거야?’ 분명히 묻기를 ‘Who are you' 너 누구냐고 물었어요. 대답하기를 ’나는 나라고 할 입장이 못 된다.‘는 겁니다. 왜, 관계성 때문에. 뭐라고 이야기해요? ’니 나한테 묻지 말고 니는 누가 보냈어?‘라고 물어줘. 나는 내 뒤에 오시는 분이 나보다 앞선 것은, 참 이 이야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김영욱 교수가 그런 것 못 믿어요. 내 뒤에 오시는 분이 나보다 앞선 것은 내가 그분의 외치는 자 되기 때문에. 길을 연다. 길을 튼다. 그러니까 세례요한이 오기 전까지는 길이 없었던 거예요. 세례요한이 와서 길이 생겼다는 말은 길이 생기도록 예수님께서 조치를 한 겁니다. 조치를 해서 세례요한을 통해서 세례요한한테 가니까 뭐가 보이더라? ’메시아가 보이더라.‘하는 통로를 만드는 겁니다.

세례요한이 한 것이 세례죠? 세례란 말은 뒤에 오시는 예수님 만나도 그 세례와 세례와 세례의 연속성. 아까 배웠죠? 반복되지 않는 단일성의 반복이죠. 계속 매일같이 세례 속에, 세례 속에 세례 속에 있는 겁니다. 여기 세례요한이 있고 여기 예수님이 있다면 이미 세례요한한테 모든 사람이 세례 받았죠? 세례 안 받고 온 사람 없어요. 세례 받고 난 뒤에는 이 모든 강물이 모든 세례물입니다. 그런데 이 세례물이 예수님이 오게 되면 거꾸로 흘러가면 이 모든 것이 피예요. 다 쓴잔이 되고 피가 되는 겁니다. 이 안에서는 인간이라 하는 것은 어떤 환경 속에 어떤 상황 속에 어떤 기능 속에 어떤 기능이 작렬하는 속에 내가 포함돼 있느냐가 중요한 겁니다. 내가 누구냐 하는 것은 나한테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느냐가 납니다.

어제 수요일 날 제가 이야기했죠. 인간이 내가 인간다우려면 이렇게 해야 된다. 이런 건 없다 했죠? 니가 이런 일이 벌어지고 이런 일을 할 때는 니는 이런 인간이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세례요한이 세례를 안 주면 세례요한일까요? 아닐까요? 아니죠. 신학교에 신학 책에 보면 이런 게 있어요. 초대교회 때 그런 논쟁이 있었어요. ‘인간이 죄 안 져도 성육신 됐겠느냐, 안 됐겠느냐,‘ 하는 논쟁이 되었습니다. 알기 쉽게 하면 인간이 선악과 안 따먹어도 예수님이 십자가 졌겠느냐, 안 졌겠느냐, 하는 문제.

세례요한 같으면 뭐라고 했겠어요? 세례요한 같으면 자기에게 일어난 모든 것이 이미 그것이 십자가와 관련돼 있다고 하겠죠. 아담 같으면, 내가 선악과 따먹은 것이 십자가와 이미 관련돼 있죠. 그래서 의미라 하는 것은 인간의 행동에서 의미가 생기는 것이 아니고 의미를 줄 때 비로소 예수님께 속한 인간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지난주일 아침에 이야기했잖아요. 우리 안에서 이질적인 것이 나와야 된다고. 들으니까 기억나죠? 안 들으면 기억 안 난다니까요.

내가 할 수 있는 것 말고 세상 사람들이 납득되고 이해되는 거 말고 나로부터 해서 세상 사람들이 도저히 이해 안 되는 이질적인 것이 내 속에서 그게 나와야 된다 이 말이죠. 이건 내 아이디어에서 내 머릿속에서 도저히 꾸밀 수 없고 구성될 수 없는 게 나와야 돼요. 그럴 때 우리는 내가 원하는 현실 속에 있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만든 현실 속에 나는 주님을 위하여 여기서 뭔가 존재하고 있는 겁니다. 주의 일 하라고.

사도바울이 로마 갈 때 풍랑 일었잖아요. 주님께서 왜 그 풍랑을 일으켰어요? 그게 뭐냐 하면 니 곁에 누가 있다? ‘니 곁에 나 있다.’는 거예요. 참~ 주님께서는 우리를 힘들게 해요. 그냥 ‘니 옆에 나 있다.’ 하시면 그냥 ‘네, 알아요.‘ 이러면 될 텐데, 꼭 우리로 하여금 우리 곁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그렇게 만들어 가버려요. 화를 돋워놓고 하는 말이 ’니 화나지?‘ ’화 안 납니다.‘ ’화난다고 솔직하게 해. 화나지?‘ ’화납니다.‘ ’주님이 준 믿음 아니잖아.‘ 꼭 이렇게 나온다 이 말이죠.

우리로 하여금 이게 구약 사사기에 보면 이스라엘 편안할 때가 문제가 돼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감당 못할 지경에 집어넣었을 때 비로소 뭐가 보였습니까? 그때야 삐지지 ‘여호와여, 살려주옵소서.’ 이러고 있다고요. 평소에 살려 달라 하는 것은 거짓말 이예요. 지 혼자 살만하니까 배부르니까 그 소리 하는 거고, 진짜로, 진짜로 두 손 두 발 다 들고 절망 희망 낙담해서 깜깜할 때 항의조로 ‘하나님, 내 인생 책임 져라.’ 그때 주께서 나타나시는 거예요. 피 묻은 손으로! ‘이 죄인아, 딱 걸렸어. 바로 그거야, 나한테 항의하는 그것이 바로 니 모습이다.’ 말이죠. 이것은 지난, 지난 주 겟세마네 기도할 때 했잖아요. 그리스도와 함께 겟세마네 기도라는 경계선을 통과하면서 비로소 아버지가 보인다고 했어요. 그 이야기했죠.

세례요한은 ‘나’라고 이야기할 때 뭐라고 하느냐 하면 ‘찬스다.’ 해서 나를 증거 하는 찬스로 보지 않고 자기 뒤에 오실 분을 증거 할 찬스로 보는 겁니다. ‘나는 내 뒤에 오시는 분을 위해서 이 짓하니까 너희들은 이거 내가 했다고 내가 이 시점에서 내가 하는 일과 나와 직접 엮이지 말고 나를 제켜버리라. 나를 밀쳐 버려라. 밀쳐버리고 저 인간에게 누가 시켰지? 세례 하는 걸 누가 시켰지?’하고 내가 가는 걸 살~살~살 따라오게 되면 그분 있는 곳에 결국 나한테 이런 지시를 내리신 게 되죠.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살~살 따라왔죠. ‘나 있는 곳에 주님 있다.‘하니까 따라왔죠. 따라왔는데 바리새인 서기관 사두개인들은 세례요한만 보고 갔어요. 물로 세례 주는 것. 요단강에서 세례 주는 것만 본 거예요. 심지어 세례 받은 사람도 세례요한만 보고 갔어요. 그러나 요한의 물세례 받는다고 구원 못 받죠?

딱 한사람, 세례요한만이 비둘기가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 받을 때 임하는 것을 비로소 자기 혼자 그걸 알았죠. 음성도 들렸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 바리새인들이 카메라 들고 그거 찍으려고 아무리 해도 예수님이 군중들 속에 섞여 있으니까 ‘저 많은 사람들 중에 세례요한한테 물세례 시킨 분이 누구지? 내 뒤에 오신 분이라니, 별 사람 없는데, 전부 다 똑같이 물속에 들어가서 세례 받고 회개하고 다 하는데, 어디?? 에이, 구라네.’ 이렇게 된다 말이죠.

성령이 임하는 사람에게만 예수 그리스도가 독특함이, 특이함이 보입니다. 성령 받지 않은 일반 사람한테는 예수는 4대 성인 가운데 한 사람 이예요. 소크라테스 공자, 맹자 중 한 사람 이예요. 부처, 똑같은 레벨 이예요. 그러나 성령 받은 사람한테는 공자 제키고 소크라테스 제키고 맹자 부처 다 제키고 오직 우뚝 뭐만? 예수 그리스도만 주가 되셔서 주님 어서 오시면 되는 거예요, 부처는 올 필요 없어요. 공자도 올 필요 없어요. 주만 오시면 되는 거예요. 지금 내 꼬라지가 어떻든 신세가 어떻든 애가 시험에 떨어지든 관계없어요. 주만 오시면 돼요. 내 애 잘 키우는 것이 내 사명이 아닙니다. 여러분 천국의 사명이 아니에요. 여러분이 천 년 만 년 잘 사는 것이 이 땅에서의 사명이 아니고, 세례요한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하는 일을 보여주는 것 때문에 그때 비로소 우리는 그 사명이 있을 때 ‘나’라고 하는 거예요. 그때 나는 어떤 관계? 예수님과 관련된 뭐가 됩니까? 나, 따라서 나는 독자적으로 나는 있을 수 없어요. 독자적으로 내가 있으면 내가 유일성이 되기 때문에, 이게 누구냐? 이만희 아닙니까? 이게 문선명이잖아요. 자기가 유일하잖아요.

그런데 세례요한은 나는 어떻게 된다? 나는 망해야 되고 나는 쇠해야 되고 누구는 흥해야 되고? 주님은 흥해야 되고. 사도바울도 보세요. 나는 십자가 진 적 없다. 내가 누구한테 세례 준 적 없다. 아볼로가 뭐며 게바가 뭐며 바울은 뭐냐, 오직 구원의 능력은 누구밖에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

그러니까 이런 이야기가 예수님의 유일성이 수천 명 모아놓고 거기서 어떤 특정한 사람 찾아보세요. 우리는 못 끄집어냅니다. 우리는 수천 명과 더불어 나와 함께 있을 때 우리는 손가락 가지고 누굴 지명하느냐 하면 ‘야, 여기 1001명 가운데 가장 귀한 사람 손으로 가리키라.’ 하면 대번 나를 가리키죠. 자기 유일성을 죽을 때까지 못 벗어나거든요. 이빨 아프면 내가 아프지 내가 이빨 아프다 해서 옆 사람이 아픈 게 아니잖아요. 아무리 치과 의사도 내가 아프다고 이야기해줄 수는 있어도 같이 아파줄 수는 없잖아요.

그러나 예수님은 아니에요. 예수님은 우리 죄를 가져가 버립니다. 얼마나 아팠겠어요. 죄 져놓고 죄 값도 안하면서 우리는 아프다고 엄살떠는데 실제 저주받을 죄를 가져가신 주님은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그게 대속이거든요. 대신 가져간 게 대속이지, 그냥 치료하는 것은 의사가 할 일이고, 치료가 아닙니다. 세상에 무좀을 낫게 한다고 의사 지가 무좀 다 가져가서 낫게 하는 그런 의사는 본 적도 없고, 같이 비위 맞춰서 같이 무좀 걸리면 몰라도.

세례요한 입장에서 ‘나’라고 할 때 이 ‘나’라는 것은 인간에게는 ‘나’라는 말은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박탈당했습니다. 그러면 성도는 뭐냐, 인자 같은 이, 또는 처음에는 인자, 그 다음에 인자 같은 이, 인자라 하는 것은 예수님이죠. 처음에는 인자는 다니엘, 에스겔, 성신 받은 사람들, 성령 받은 사람이 인자 같은 이와 엮어져서 여기서 예수님만이 ‘나’가 되고 그 ‘나’를 기다릴 때 그 사람은 ‘나’에게 예속된 신부가 되는 겁니다.

그걸 가지고 요한복음 17장에서는 성경에서 제일 어려운 용어를 사용합니다. 그게 뭐냐, 제일 어려운 용어라고 제가 지금 쓰게 되면 피식 웃으면서 ‘저게 뭐가 어렵냐.’ 할 겁니다. 실지로 제일 어려워요. 이게 뭐냐, ‘우리‘ 이겁니다. 아! 요한복음 17장 겟세마네기도 내용에 ’아버지와 내가 하나된 것처럼 저희들도 나와 하나 되어서, 우리와 같이.‘  이 ’우리‘가 창세기 1장에 보면 우리의 형상대로 천지 창조를 하죠. 이 ’우리‘를 우리는 못 풉니다. 인간은 못 풀어요. 왜냐 하면 이 ’우리‘는 숫자로 1 아닙니까? 우리가 2가 아니잖아요. 1은 예수님에 한해서만 나오기 때문에 인간들이 말하는 자기를 하나(1)로, 최후의 하나로 있는 이상은 이 우리는 풀리지 않습니다.

나를 하나로 간주하고 이 세상에서 내가 제일 중요하다고 여기고 그 다음에 우리로 하게 되면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 다 나를 위해서 내가 이용하는 사람이 돼요. 교회가 그렇거든요. 교회 어떤 집사가 다니면 그 교회집사는 목사, 장로 전부 다 누굴 위해서? 나  좋아라고 그들이 있어야 돼요. 장로 입장은? 장로 자기 좋아라고 목사 교인들 있어야 되고, 목사는? 자기 좋아라고 교인들 있어야 돼요. 전부 다 나를 하나로 두는 이상은 제대로 된 우리가 될 수가 없어요.

결혼식 주례를 많이도 했습니다마는 해보면 결혼식 주례 할 때마다 참 신부 신랑도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요. 안 되는데, 두 몸이 한 몸이 안 되거든요. 안 되는데 뭔가 철없어서 한번 해볼까 싶어서 하는 거예요. 그야 본인이 당겨서 하는 거예요. 그거야 자기가 실패해도 결혼하는 게 좋은 거죠.

따져서 어떻게 조건 맞으면 한 몸 될 수 있습니까? 그런 인간, 그런 남자 그런 여자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런 조건 따지면 못하고요. 그냥 당기거든 ‘와, 번쩍, 와 번쩍.’ 하거든 그걸 사랑이라 말하든지, 뭔지 모르겠는데 그냥 살아버리란 말이죠. 그냥 조건 따지면 그 조건 계속 갑니다. 그 조건이 오히려 힘들게 되죠.

이 ‘우리’에 들어가려면 뭣을 없애야 되느냐 하면, 교만을 없애야 되거든요. 이 교만이라 하는 것은 ‘나’를 기정사실화될 때 있는 겁니다. 그럴 경우에 우리 속에 교만을 없애려면 여기 십자가 있어야 되거든요. 인자가 온다는 것은 인자 하나로 ‘주여 오시옵소서.’ 할 때 이건 ‘우리’가 되기 위해서, 인자가 오실 때 우리가 되기 위해서 주께서는 자기 약속대로 우리에게 오시는 거예요. “이것들을 증거 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요 문제를 깊이 있게 보겠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아담 옆에 여자가 있고 이것은 분명히 2, 두 사람이죠. 두 사람인데 아담이 뭐라 했습니까? 두 사람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어디서 나왔기 때문에? 갈빗대가 늘어진 거예요. 이건 두 사람이 아니죠. 내 살 중에 살이요. 내 뼈 중에 뼈, 나의 연장, 아담의 연장인 여자니까. 붙어있는 겁니다. 이게 둘(2)이 아니고 하나(1)가 되는 겁니다.

하나가 됐는데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어!’ 둘이 한 몸이 아니고 어떻게 됐습니까? 둘로 갈라졌어요. 갈라지면서부터 여기서 뭐가 생기느냐 하면 남자와 여자의 의미가 발생됩니다. 남자 따로, 여자 따로 예요. 그 전까지는 내 살 중에 살이지, 남자 여자 따로 있는 게 아니에요. 그냥 한 몸이었습니다. 그런데 남자 여자 따로 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여자의 후손이 남자를 살려줍니다. 그래서 여자의 후손이 살려주는데 여자의 이름이 뭡니까? 하와라고 지었죠. 여자의 이름은 생명이고, 남자는 뭐냐, 그냥 죽음이죠. 생명이 와서 죽음을 살린다.

그러면 아담이 하와와 산다는 것은 뭐냐 하면 여자, 아내와 산다는 것은 여자 안에서 뭐가 작용한다? 이름이 있으니까 이름이 뭡니까? 이름에 생명이 작용하죠. 지금 무슨 이야기냐 하면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이 없다 했잖아요. 사도행전 4장 12절에 나오잖아요. 지금 이름과 연관시켜서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여자의 이름과 남자의 이름이 이미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갈라졌죠. 아담은 뭡니까? 재가 되고 흙이 돼 버리고, 여자의 이름은 하와, 생명이 되죠. 그러면 이름이 몇 가지입니까? 둘이잖아요. 둘이니까 이건 1이 아니고 뭡니까? 2가 되는 거예요. 2가 되니까 남자와 여자가 이건 생명이고 이건 죽음이 된다 말이죠. 그러면 생명의 노선이 죽음의 노선에 같이 개입하는 고 계기가 남자 여자를 잘라 두고 그 벌어진 그 사이에서 나온다 이 말이거든요. 그럼 남자 여자 그 잘라내는 것은 누가 잘라야 되겠습니까? 누구 꾀에 빠져서 잘라져요? 뱀이죠. 뱀.

그래서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뱀이 나온다 말이죠. 남자 여자가 이렇게 갈라지게 해놓고, 플라톤이 그런 이야기했는데 세상은 하나의 연극무대다 말이죠. 연극무대에 있을 때에 1, 2, 마귀가 3, 있다면 1,2,3이라 하는 것은 결국 1,2,3 따로 있다는 말은 결국 하나가 된다? 안 된다? 하나가 안 돼요. 우리가 안 돼요. 안 되고 역할만 할 뿐 이예요.

이렇게 선악과 따먹은 뒤에 남자 여자 갈라지고 난 뒤에 이 사이에서 뭘 끄집어내느냐 하면 뱀의 의미를 끄집어내고 덩달아서 여자의 후손도 끄집어내서 남자 여자는 그냥 있는데 여자의 후손하고 뱀의 후손하고 싸움 벌여서 승자에 의해서 ‘우리’가 창세기 2장에 있던 그 우리를 한 몸 되게 하는 그것을 하나님께서 이루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뭐가 필요 하냐, 하나님이 주시는 이름이 중요한 거예요. 우리가 나한테 붙여준 이름 있잖아요. 이건 의미 없어요. 그리고 이름이라 하는 것은 운명입니다. 절대로 이름이 갖고 있는 것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요. 아브라함 같으면 아브라함 돼야 돼요. 본인이 ‘싫습니다. 안 됩니다.’ 할 수 없어요. 안 돼요.

우리 성도 이름은 뭡니까? ‘그리스도의 것‘이라 돼 있어요.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주의 이름의 것‘으로 돼 있어요. 우리는 우리에 속하지 단독적으로 나는 그리스도라 할 수 없어요. 나는 뭐라 할 수 없고, 1, 그리스도의 것으로만 우리가 되는 거죠. 그래서 우리는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라는 그러한 말만 하는 게 아니고 주님이 오시는 것을 고대할 수밖에 없는 팔자와 인생을 살도록 그렇게 강제되고 강요당하는 그런 입장입니다. 아이구, 불쌍해라. 세상에서는 이제 딴 거 기대하면 안 돼요. ’로또여 어서 오시옵소서. 주식이여 터져라.‘라 할 수 없고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그 짓하라고 인생을 이렇게 조져나 버렸어요.

그것은 우리 이름은 없고 우리 이름은 강탈해 가고 그 자리에 주의 이름이 와버리니까 주의 이름이 안고 있는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재림하신 그 모든 내용이 우리 안에서 우리 소망으로 부채 살처럼 펼쳐지게 돼 있어요. 그런데 아까 첫째 시간과 연관시켜 보면 그 일 하면서 우리 안에 뭐가 들어온다 했죠? 성령께서 우리 안에 집어넣은 게 뭐겠습니까? 옛날 이스라엘 선배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곡해하고 오해하고 잘못 해석했던 그래서 그들은 실패할 수밖에 없던 그것을 우리한테 그대로 성령께서 집어넣어 버립니다.

그 집어넣는 이유가 있어요. 집어넣는 이유가 언약과 새 언약의 차이점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언약이라는 것은 맹탕 그냥 율법 이예요. 그냥 문자인데, 새 언약은 뭐냐, 이 문자 때문에 튕김을 당했던 새 언약이거든요. 그러면 이 율법으로 인하여 뭐가 나오느냐, 죄가 나옵니다.

그러면 우리 성도라 하는 것은 뭐가 되느냐, 죄인이 돼야 돼요. 죄인이 되기 위해서 이스라엘이 실패한 그것이 몽땅 우리 속에 다 들어와야 됩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성전에서 기도할 때 세리가 뭐라 합니까? 감히 고개도 못 들고 주님 앞에서 뭐라 해요?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하죠. 소경도 그런 이야기하고 문둥병도 ‘다윗의 자손이여 불쌍히 여겨 달라.’ 했잖아요. 불쌍히 여겨 달라는 것은 뭘 보고 있다는 말입니까? 그 사람이 뭘 봤다는 거죠. 어떤 아저씨 보고 불쌍히 여겨 달라 그 소리 안하거든요. 뭔가 저분 앞에 서면 나는 불쌍하고 이건 죄인 중에 괴수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어떤 분을 자기는 지금 접촉했다는 거예요.

세리가 성전에 가서 성전의 의미를 봤다는 겁니다. 성전에 같이 서 있는 예수님을 보고 뭔가 의미를 알았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바리새인은 ‘이레에 두 번씩 금식 하고’했다는 것은 성전에 와서 누굴 보고 있어요? 성전에 거울이 많은 모양이라. 성전에 와서 누구 보고 있어요? 자기 모습 보는 거예요. 성전에 기도하면서 상상하면서 내가 얼마나 대단하고 훌륭하고 ‘야, 오늘 내가 기도까지 하러 왔다. 나 멋있잖아. 나 오늘 예배 참석했다.’ 자꾸 자기 자신을 보는 거예요.

나로 하여금 입도 못 열고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할 분을 만나본 적이 없는 거예요.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아이쿠, 불쌍한 인간. 이 동네 술 처먹고 담배 피는 인간들.. 목요일에 가보면 밤새도록 술 먹는 인간들 모양이라. 누가 와서 나를 짓밟아버린 그런 인간을 못 만난 거예요. ‘이 인간아 죽어라.’ 하는 인간을 만나야 될 텐데, 지 자랑 못해서 환장한 것 같아. 지 잘 난체 한다고 환장했어요. 경쟁적으로.

그러니 욥처럼 그냥 아무 소리 못하고 재 뒤집어쓸 수밖에 없어요. 요새 개그우면 신보라, 전에 이야기했잖아요. 신인상 타면서 ‘내가 자랑할 것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피 밖에 없습니다.‘ 그 이야기한 사람, 요새 CF 막 들어오니 ’아, 십일조 많이 하겠다.‘ 생각이 들어요.ㅎ

그런데 어떤 의미에서는 ‘예수 피밖에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하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마저 입을 다물어야 되지 않겠나 생각이 들어요. 다른 사람은 안 보는데 자기 혼자 유령을 본 거예요. 다른 사람들이 있는데 ‘어! 오!’ ‘목사님, 뭐 유령이 있나,’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는데 ‘주여 나 죄인입니다.’ 본인만 느끼는, 그것이 뭐냐, 성령이 예수 십자가를 반복하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하는 이것이 남들한테 안 보이는데 사도바울 혼자 지금 보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이 처형당한 것이 AD 30년 사도바울이 예수님 만난 것이 AD 34년이나 35년이 되는데 한 5년 뒤에 쯤 본 거예요. 그래서 남이 안 보는 유령을 보고 있기 때문에 사단의 가시를 줘도 매를 때려도 고생을 해도 풍랑이 일어도 예수님 귀신(귀신이 아니고 실제지만)이 딱 붙어 있으니 ’니 고생 좀 해라. 니는 안 죽어. 로마 가서 복음 전해야 돼.‘ 이러면 부득불 해야 되는 거예요. 그야말로 부득불.

이걸 가지고 저는 사명이 존재보다 우선이라는 말을 해요. 그 받은 사명이 자기 존재보다 더 우선되는 겁니다. 사명이 그 사람을 가만두지 않아요. 미치겠어. 그러나 그 사명이 옆 사람하고 공통된 게 아니에요. 사람마다 얼굴 다르듯이 맡은 사명이 다 달라요. ‘니 내 따라 해라.’ 하면 안 됩니다. 그 사람은 그 사람에게 준 하나님의 사명이 따로 있기 때문에, 그러나 공통점은 있죠. 그 공통점은 뭐냐 하면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일을 시킨다. 그 뿐이죠. 자기 사랑, 자기 행함을 자랑하지 않는 것. 그래서 복음만 전해야 되는 이유가 진짜 형제자매가 누군지 알아낼 수 있어요. 자기 행함이라든지 자기 공로라든지 그걸 완전히 죄라고 부정해버리는 사람이, 그런 기적 받은 사람이 누구냐 이 말입니다. 참, 보기 힘들어요. 찾기 힘들어요. 목사들은 더더구나 안 되는 것 같아요. 정말 기적 안 받으면 나올 수 없는 겁니다.

지금까지 설명한 것이 ‘나’가 안 된다 이야기했거든요. ‘나’가 안 되면 그러면 나를 못 쓰는  게 뭐냐, 인자라고 달리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인자 같은 이가 다니엘에서는 예수님, 인자 같은 이가 인자로 온다는 말은 바로 하나님이 인간이 된다는 그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됨으로서 인간은 자기 이름을 가질 자격이 박탈당한 겁니다.

왜 우리가 이름을 가지면 안 되느냐 하면 이름이라 하는 것은 운명이고 팔자인데 내가 내 운명을 내가 정할 수 없는 거 아닙니까? 이름이 한나 많아도 한나 같이 살지도 않고 성경에 나오는 솔로몬 해도 솔로몬 저축은행...솔로몬이 그런 솔로몬이 어디... 내 이름이 내가 내 운명을 모르기 때문에 내 이름을 내가 정할 수 없어요. 정할 수 없으면 정해준 분이 있기 때문에 구태여 우리가 정할 필요 없어요. 그리스도의 것으로만 살면 되는데 그것은 뭣 때문에 그렇다 했습니까? 그게 바로 뭐하기 위해서? ‘우리’가 되기 위해서. 아버지와 내가 하나가 된 것처럼 이제는 너희들도 내 안에서 하나가 돼서 우리가 하나가 된다는 그걸 하기 때문에 우리는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하는 것이 우리는 매일 일상으로 말로 안 해도 모든 몸짓으로 모든 행동으로서 주께서 어서 왔으면 좋겠다는 그 모양새를 다 보여주게 되는 겁니다.

그 다음에 21절에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찌어다 아멘” 이게 편지 끝에 상투적인 그냥 끝, 하면 미안하고 뭐 좋은 소리 하나 붙이는 게 아니고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찌로다 아멘” 할  때 개혁주의 시대 때, 칼빈 시대 때에 개혁주의와 천주교가 싸울 때에 ‘모든’이란 말이 뭔 뜻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 싸웠습니다. 디모데전서 2장 4절에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한다 할 때에 그거 가지고 하나의 교파가 생겼죠. 하나님의 뜻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는데 인간이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거부해서 그 ‘모든’에 포함이 안 될 뿐이지 실제는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원한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선택이라 하는 것은 있다? 없다? 하나님이 미리 선택했다는 것은 없다. 예지는 있지만 예정은 없다. 유명한 말을 했어요. 누가요? 알미니안. 그걸 알미니안 주의라 합니다.
 
하나님은 예지는 했지만 예정은 없다. 그러면 예지와 예정의 차이점을 알아야 되겠죠. 예지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미리 정해놓은 건 아닌데 나중에 ‘나 예수 안 믿어.’ ‘나 그럴 줄 알았다.‘ 요게 예지예요. ’니가 기어이 구원 안 받을 줄 알겠다.‘ 이게 예지고, 일단은 누구한테 맡깁니까? 일단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맡겨 놓고 자유의지가 사용해서 그 결과에 대해서는 미리 알고 계시다. 이 말이거든요. 그게 예지거든요. 그게 복음적이고 참 하나님도 포함돼 있으니까 그것도 맞는 것 같기도 하죠.

예정은 뭐냐 하면 아무리 니가 구원받고 싶어도 처음부터 구원 안 하기로 작정했기 때문에 구원 못 받는다 하는 것이 예정입니다. 아~ 하나님 독하죠? 어느 게 맘에 듭니까? 인간의 자유의지를 허락을 하는, 인간의 선택권에 허락을 해주시는 것이 굉장히 자비롭고 인간이 무슨 몸부림 맘 부림 쳐도 ‘안 될 놈은 안 돼‘처럼 ’니가 오면 나는 천국 도망갈 거야.’할 정도로 ‘나는 니 꼴 보기 싫어.’하는 그런 경우가 예정이라는 겁니다.

예지는 믿느냐, 아니 믿느냐의 여부에 대해서 인간의 의지가 개입이 돼요. 그러니까 이것은 한다, 안 한다.로 이야기하는 반면에, 예정은 사랑한다. 밉다. 특히 ‘나 니 밉거든.’ ‘에서는 미워하고‘라고 돼 있죠? 에서는 안 할걸 예정하시고, 그런 걸 말하는 게 아니고, ’야, 해봐, 열심히 해봐.‘ ’안 돼.‘ ’왜 안 되지?‘ 이거하고, ’나 니 밉거든.‘ 이거하고 다르죠?

주님은 지옥 갈 사람을 미워해서 지옥 보낸다는 거예요. ‘열심히 해봐 안 돼? 아이고, 안 돼? 지옥 가라.’ 이게 아니고 니가 무슨 짓을 해도 밉다는 거예요. 이걸 가지고 버림받은 자예요. 뭐 어떤 사람은 버림받은 여자보다 더 슬픈 여자가 잊혀 진 여자라고.

버림 받았는지 버림 안 받았는지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하면 ‘밉다’의 반대가 뭐예요? ‘사랑 한다’잖아요. 이 사랑에 대해서 성령을 통해서 사랑을 알게 되면 그 사람은 미움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이 사랑의 특징이 뭐냐 하면 ‘니가 뭘 해도 사랑한다.‘입니다. 니가 무슨 짓을 해도. 성폭행을 하거나 사람을 죽이든 뭐를 하던 간에 무슨 짓을 해도 사랑한다는 거거든요.

사랑은 무엇과 관계없다? 내가 하는 짓과 상관있다? 없다? 상관없는 거예요. 왜냐 하면 이 사랑은 근거가 내 하는 짓에서 근거가 아니고 예수님의 하신 일에서 근거가 주어지기 때문에 우리한테는 아예 근거를 찾지도 안했어요. 찾지도 않는 걸 가지고 자꾸 ‘나는 이렇게 행했습니다.’하면서 내밀면 그건 이상하잖아요. 아무것도 행한 것도 없이 의롭다 함을 받는 게 사랑이잖아요.

그래서 사랑을 받은 사람의 특징은 뭐냐, 자기의 행함의 잘잘못에서 이미 벗어났죠. 떠나버렸다 이 말이죠. 그런데 미운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주님 나 밉지?’라는 생각을 절대 안 해요. 어느 인간치고 신이 나를 미워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순간적으로는 해보지만 궁극적으로는 ‘그래도 신은 나를 버리지 않을 거야.’ 심지어 교회 한 번도 안 나오고 예수도 모르고 성경도 안 보는데, 꼭 인간은 왜 그러느냐 하면 자기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 사랑하는 것에서 하나님도 뭔가 도와줄 것이라고 항상 그렇게 생각하듯이 본인이 그렇게 하고 싶어 해요. 인간에게서 뭐가 나와요. 그물이 나와서 신이고 예수고 부처고, 어떤 연속극에 보면 '예수여, 부처여.‘ 그런 기도하잖아요. 이미 내 사랑 끝났죠? 내가 누굴 섬깁니까? 내가 나를 섬기잖아요. 섬기기 때문에 신이든 별이든 전부 다 누구한테 들어와야 돼요? 나를 위해서 존재해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신을 미워 안 해요. 신을 미워 안 하는데 신이 나를 미워 할 리가 있습니까? 내가 신을 안 미워하는데. 신을 필요로 하고 있는데, 이게 바로 지옥 갈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사랑받은 사람은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는 거예요. 괜히 예수님 붙들고 닦달내지 마세요. 요한계시록에서 지금까지 이야기한 전체가 뭐냐 하면 은혜잖아요. 은혜라는 것은 뭐냐 하면 우리는 이미 성전에서 배제된 상태예요. ‘나가 놀아라. 나가 놀고 예수님하고 아버지하고 유월절 이루었습니다. 예수님이 어린양 되시고 하나님은 그 어린양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상관없는 거예요. 이것을 성령을 통해서 완성된 상태에서 이 안에서 이루어진 예수님이 이루신 모든 것을 우리에게 값없이 줘버렸습니다. 줘버리니까 그 안에 뭐가 들어있다? 우리는 처음부터 내 것이라는 게 없고 그리스도와 우리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이 땅에서 출현돼야 돼요. 이 땅에서 태어나야 돼요. 예수님과 우리가 되기 위해서.

그런데 우리 되기 위해서 예수님 쪽에서 하신 일이 뭐냐 하면 우리의 죄를 다 용서하시고 사랑하신 일을 하는 거예요. 그걸 공짜로 은혜를 주신 거예요. 미리 천국에 이미 엘리야 가 있습니다. 모세 가 있어요. 부러워 죽겠어. 사도바울 벌써 가 있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다 가있죠. 그리고 마리아 마르다에게 뭐라 했습니까?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다.’했죠.
나사로는 실제로 죽었다가 나흘 만에 벌떡 일어났잖아요. 그게 얼마나 부러운 이야깁니까? ‘아! 저 자리가 내 자린데.’ 우리는 기다린다 말이죠. 그게 뭐냐 하면 우리가 하나가 되는 거예요.

여러분, 어렵게 말 안 할게요. 내 것이 ‘요건 내 자식이고, 요건 내 직업이고, 요건 내 재산이고.’ 내 것이 있어버리면 우리가 됩니까? 안 됩니까? 때려죽여도 우리가 안 된다니까. ‘니 헌금 얼마 냈노?’ ‘난 2원 냈다.’ 이러면 때려죽여도 우리가 안 돼요. 어깨동무 해가면서 ‘사랑하는~~♫♬’ 찬송가 불러 봐야 나중에 짜증나고 하면 우리가 안 된다니까.
 
우리가 되려면 우리는 그냥 나가 있다가 그냥 부름 받아야 돼요. 그냥 호출당해야 돼요. ‘당신 어떻게 왔나?’ ‘어이해 왔습니다.’ ‘나도.’ 내 것이 없을 때는 이건 자연스럽게 우리가 돼 버려요. 먹든지 마시든지 시집가고 장가가든지 그것이 전부 다 나를 위해서 하는 일이잖아요. 노아 때 보세요.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나를 위한 일인데 인자가 어떻게 온다? 인자가 갑자기 우리에 해당되는 사람을 부르러 와요. 오는데 이미 우리가 내 것이 없을 때 그때 부르는 겁니다.

지혜로운 5처녀가 기름을 왜 준비합니까? 신랑도 없는데 왜 준비해요? 신랑이 왔다고 치고 뭐합니까? 기름 준비한 거예요. 사장님이 먼데 출장 갔는데 게으른 종은 일을 대충하는 거예요. 하지만 충실한 종은 뭡니까? 사장님이 출장 가든 안 가든 자기 옆에 있는 거예요. 왜, 우리니까. 주님 빼고 우리끼리가 아니고 주님 합해서 우리니까. 주님 때문에 우리가 됐거든요. 그건 왜냐, ‘내 꺼‘라는 내 이름이 없어요. 그냥 이름이 없어도 주님의 것이 되니까 내 이름 내가 붙일 이유가 없다니까요. 내 인생을 내가 손댈 이유가 없어요. 우리는 내일 일을 몰라요. 내일 되면 또 주께서 반복되지 않는 반복을 또 집어버립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스라엘의 범죄 한 그것을 그대로 품고서 ‘역시 우리가 주의 말씀을 지킬 수 없군요.’라고 감사하면서 주께서 베푼 은혜에 감사하는 거예요.

그래서 다시 해보면 사랑과 미움에서 누구든지 자기를 하나님이 미워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뭐냐 하면 사랑이 없기 때문에 반드시 뭘 하느냐 하면, 자기의 행위와 행함을 점검하게 돼 있어요. 자꾸 자기 행함과 행위를 점검하게 돼 있다고요.

처음에 구약 때는 다들 그렇게 살았어요. 그런데 강제로 점검 자체가 불가능하게 만든 사람이 한 사람 있습니다. 누구냐 하면 욥입니다. 욥은 점검하고 싶어도 점검할 게 없어요. 왜, 지금 긁는 것밖에 안 하는데 점검할 게 있어야죠. 주님께서 어떻게 몰아놓습니까? 욥으로 하여금 자기 생각할 수가 없어요. 원치 않는 고난이 왔기 때문에, 애들이 애 먹여서 죽은 것도 아니고 재산도 나쁜 짓 한 것도 아닌데 한꺼번에 다 가져가고 나중에 자기 몸도 온 몸에 악창이 나니까, 아픈 사람 보면 고관대작이라도 이빨 아프면 두 손으로 이빨 감싸고 찡그리고 나오잖아요. 지금 아픈 게 있는데 딴 데 신경 씁니까? 안 씁니까? 그때는 병고쳐주는 의사가 최곱니다. 예수님도 필요 없어요.

자기가 아픈데, 아프다는 말은 뭡니까? 자기가 원하지 않는 인생이 소유해버리면 어떻게 손 쓸 수가 없어요. 그냥 원망만 해대죠. 나중에 마지막에 보니까 원망한 것조차도 입을 다물고 ‘주님께서 알아서 해네.’ 하고 끝나버렸다 말이죠.

자기 행함을 주장하지 않는 사람이 이미 사랑이 주어졌기 때문에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이겁니다. 요한일서에 나온 말씀처럼 사랑이 있으면 그 다음에 뭐가 없습니까? 두려움이 없나니. 그거 이야기하고 싶은 겁니다. 끝으로. 두려움이 없다는 말은 왜, 심판이 이르지 않기 때문에. 그런데 두려움이 있는 자는 어디에 이른다? 심판이 이른다.

왜냐 하면 자기가 자기를 너무 핍박해. 그러니까 인간이 회개할 것은 사실은 자기한테 지은 죄를 회개해야 돼요. 왜, 지 몸이 지 몸이 아니고 누구 몸입니까? 주님 몸인데 내 몸이라고 여기고 지 몸 굴렸으니까 내가 나보고 잘못했다고 해야 돼요. 내 몸이라고 여겼던 그 죄를 자기한테 회개해야 돼요. 자기를 너무 못살게 굴어요. 너무 힘들게 해요. 만날 하는 소리가 ‘똑바로 해, 똑바로 살아, 그래야 복 받지. 전번에 사업 안 된 것도 니가 잘못해서 그래.’ 만날 우리보고 너무 질책하고 너무 나무라고 너무 따지고 그 가운데 예수님의 십자가도 빠져버리고 주님의 은혜도 빠져버리고 대속의 은혜도 빠져버리고 사랑한 것도 빠져버리고, 지 인생 지가 관리하겠다고 우기는 진짜 마귀자식처럼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가룟 유다 아닙니까? 가룟 유다 죽을 때 어떻게 죽었습니까? 끝까지 지 인생 누가 관리했습니까? 지가 관리해서 마지막에 뭐했습니까? 자살했잖아요. 그게 악마들, 사탄들의 모습이 그겁니다. 지가 지 관리하는, 제발 주의 몸에 너무 관여하지 맙시다.

중요한 것은 ‘뭘 할까’가 아니라 사랑 받고 있는지, 그리고 미움 받은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 우리는 미움 받은 사람이 아니니까 우리한테 찾을 게 없고 지금 어디에서 찾아야 합니까? 미움 받은 사람, 버림받은 사람 주변에 많잖아요. 눈만 뜨고 돌아서면 보이잖아요. 그런 사람들이 평소에 무슨 자랑하는지, 어떻게 자기 관리하는지 그런 사람 보면서 ‘그래, 저 모습이 바로 내가 성령받기 전의 모습이 저 모습이야, 내가 저렇게 할 때 예수님을 알 리가 없어. 예수님은 4대 성자 중에 한 사람이고 우리가 본받아야 되고 이런 소리했지.’

우리가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이러한 이미 범죄 한 이스라엘 속에서 살아가는 것처럼 이미 범죄 한 이 세상 속에서 우리는 지금 성령, 신부로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실 내 몸이 내 몸이 아니고 태어날 때도 관여한 적 없는데 이상스럽게 내 인생 내가 아름답게 관리합니다. 주여 사랑도 날라 가 버리고 주님의 은혜도 없고 지 잘난 맛에 살아가는 이 모습이 구약 때 범죄 한 유대인의 모습인 것을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오직 어린양은 주님밖에 없음을 고백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