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교회120705-요한계시록22장17-21(반복 없는 것의 반복)42강a-이 근호 목사
제 42강a
시작해 봅시다. 오늘이 마지막이 될지 안 될지 모르겠어요. 해보면 알겠는데 어쨌든 다음 시간에 요한계시록 전체를 제가 요약해서 이렇게 글로 전체 내용을 적어오려고 합니다. 글로 하든지 그림을 그리든지 해서 요한계시록을 끝내도 하도 요한계시록 책이 어려우니까 그림으로 알기 쉽게 하든지 제가 지난 것을 해 와서 할 예정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요한계시록 전체 다를 정리합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7절을 보면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이렇게 돼 있거든요.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의 완성이 될 때 나타나는 게 성령입니다. 신부는 인간이 구원될 때 신부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성령과 신부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가 완성단계에 돌입했을 때 나오는 그런 표현을 말합니다.
요한계시록 1장부터 전체에 보면 모든 것이 성령께서, 성령께서 그렇게 죽 돼 있죠? 교회도 성령께서. 교회라는 것은 어디의 간섭을 받고 있다? 성령의 간섭을 받고 있고 성령은 바로 어린양, 주 예수님의 간섭을 받고 있다. 요한계시록에는 이렇게 돼 있거든요.
성령께서 교회를 다스린다면 어떻게 다스리느냐 하면 이것을 전체를 완료해서 전체 다를 보여주는, 한꺼번에 다 보여주는, 교회에게 세상 돌아가는 것을 다 보여줌으로 말미암아 이런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교회는 이렇게 신부로 되었다. 이런 절차로 되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겁니다. 몽땅 다 아는 거예요. 드라마를 1회부터 50회까지 다 보여주고 그 다음에 드라마 내용을 이야기하게 되면 우리가 이해가 되잖아요.
그렇게 이해되는 사람, 알아듣는 사람, 그런 사람을 하나님의 신부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일에서는 모르는 게 없다 이렇게 될 수 있어요. 요한계시록은 더 이상 모르는 게 없어요. 전부 다를 알았습니다.
그래서 18절에 보면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이렇게 돼 있죠? 이게 뭐냐 하면 성령이 보여준 것은 더 이상 빼고 자시고 할 것 없이 다 보여준 거예요.
이제 하나님이 한 일을 모른다 하면 안 돼요. 다 보여준 겁니다. 그 보여준 그 대상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신부라고 합니다. 교회죠. 결혼식에 들어가는 사람처럼 그렇게 마지막 혼인잔치에 들어가는 사람처럼.
그런데 오늘 강의할 것은 어렵다면 어려울 수 있는데 성령이 교회들에게 다 보여주는 이 말은 쉬운데 어린양과 성령 관계, 이걸 지금부터 설명해 드리고자 하는 겁니다. 성령을 요한계시록 1장에 보면 성전에 있는 7촛대의 영, 7촛대를 거니는 영을 성령이라 돼 있습니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에서 성령이라 하는 것은 ‘천국이라는 자체가 성전에 의해서 설명돼야 된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린양은 뭐냐, 어린양은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어린양은 어디 등장하느냐 하면 유월절 날 등장하죠.
어떤 점이 어려우냐 하면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빼놓고 예수님은 나중에 30세 이상 성장하고 난 뒤에 예루살렘을 한번 방문하게 돼 있어요. 그것도 마지막에, 끝에, 마태 마가 누가복음은 예루살렘이라는 지역을 마치 고 바위로 등산하듯이 점점 더 최후에 높은 곳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그렇지 않아요. 요한복음 2장에도 7장에도 또 예수님께서 3번 왔다 갔다 하죠. 그래서 예수님이 3년 동안 했다 하는데, 마태 마가 누가에서는 나사렛에서 출발해서 점차, 점차 어떤 확정된 절차에 따라서 목표를 향하여 다른데 새는 일이 없이 예루살렘에 도달하면서 예수님의 일은 끝나버립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도달할 때 예수님께서 어디에 맞추었느냐 하면 유월절에 맞추어서 입성하신 거예요.
지금 제가 설명하는 것은 모든 걸 다 이루어서 알려주는 성령과 어린양, 예수님이라 하지 않고 왜 어린양으로 했는가 하는 어린양의 관계를 설명하는 겁니다. 어떤 관계에 있기에 성령께서는 기쁘게 ‘다 했어. 다 했어. 너희들 신부야, 더 이상 뭐 너희는 다 알려준 거야.’라고 기쁘게 할 수 있느냐 그걸 설명하는 겁니다. 그렇게 설명할 적에 예수님께서는 어린양으로 했다 말이죠. 어린양은 절기가 무슨 절기냐. 유월절과 관련돼 있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에서 예루살렘에 도달함으로써 거기서 유월절에 맞춰서 도달해서 아기 예수로 출발했던 예수님께서 마지막에는 어린양으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요한복음 1장에 보면 나오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로다” 바로 이점에 대해서 어린양이 되어서 유월절 하려면 이게 성전 안에서 이루어진 유월절은 제사를 잘 드려야 유월절이 완성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거 이야기를 다 지우고 이제 제가 이야기하는 취지가 이걸로 요약됩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 맞춰서 성전에 가셔서 유월절의 어린양의 제사를 드렸다면 그럼 일반 모든 사람은 뭡니까? 지금 예수님께서 유월절 제사 드리려고 성전에 갈 때에 이런 모든 사람은 예수님만이 하는 일에서 저 바깥에 나와 있죠. 바깥에서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하고 있다 말이죠. 바깥에서 자기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뭐가 안 중요합니까? 예수님이 홀로 외롭게, 제자들도 나중에 다 떨어져요. 마치 로켓이 올라갈 때 1단계에 다 떨어지잖아요. 다 떨어지고 마지막 캡슐 제일 마지막 끝부분 끝자락만 어린양으로 제사 드리면서 예수님이 뭐로 바뀌느냐 하면 어린양으로 바뀐다 말이죠. 예수님이 어린양으로 바꾸도록 하는 시스템, 장치한 게 뭐냐 하면 성전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시간적으로 유월절이 돼야 되는 겁니다. 유월절 성전이 갖춰질 때 예수님은 어린양의 자태로 돼 있고 그것이 요한계시록 21장 22장에 보면 어린양의 보좌에서 생명수가 나온다고 지난 시간에 했죠? 그런데 이러한 아이디어, 이러한 생각이 일반인한테는 철저하게 감춰져 있는 것이고 숨어 있는 것이고 이건 따라오려 해도 참여가 안 돼요. 배제된 상태입니다.
그러면 일반인들은 뭘 보느냐 하면 세상을 눈으로 보고 있습니다. 해와 달과 별과, 그 가운데 뭐가 있느냐 하면 옛날 과거가 있었고 과거 시간에서 현재에서 미래로 흘러간다. 이게 있다 이 말이죠. 예수님의 성전 안에서 유월절 돼 버리면 이 시간이 끊어지겠죠. 이 끊어지는 이걸 가지고 뭐라 하느냐 하면 유일성이라 해요. 또는 단일성.
시간은 이렇게 반복이 되거든요. 전도서에도 있듯이 과거에 있던 것이 지금도 있고 후에도 있고 아침에도 먹고 내일 되면 아침을 또 먹고 하듯이 항상 우리는 반복을 통해서 세상을 규정하게 돼 있고 규명하게 돼 있어요. 회사 여기 있는데 어떤 직원이 와서 ‘가만있자, 회사가 이 근처인데.’ 그러면 안 되잖아요. 이 자리 있어야 반복해서 출근할 게 아닙니까? 모든 것이 반복 속에서 인간이 느끼는데 그 반복을 주께서는 배제해 버리는 겁니다.
니가 알고 있는 반복에 머물러 있다면 그것은 내 세계 속에 못 들어왔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유일성, 예수님만이 하는 일이기 때문에 이건 반복이 됩니까? 반복이 안 됩니까? 반복이 안 되죠. 그렇죠? 우리 인간은 자기가 아침 먹고 다음 날에도 아침 먹고 반복이 되잖아요. 그런데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홀로 했다는 말은 이건 인간들이 해낼 수 있고 흉내 낼 수 있는 그 반복의 노선에는 가담이 안 되겠죠.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뭐냐, 반복되지 않는 것이다. 반복되지 않는 것을 성령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반복을 해버려요. 반복되지 않는 것을 반복을 해버리면 날마다 어떻게 하느냐, 성령이 우리에게 온다는 것은 계속해서 칼을 가지고 자르는 역할, 잘라버려요. 우리는 어제의 나와 지금의 내가 일치하다고 생각하는데 중간에 반복되지 않는 것이 반복적으로 잘라버리면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내가 되는 것이 아니고 어제 주님이 함께 있었던 그것을 오늘 주님이 함께 있게 하는 거예요. 내가 직접 나하고 연결되는 것이 아니고 나와 주님과 연결돼 있고 그 주님께서 또 다시 나를 살게 할 경우에만 나는 오늘 살아있는 겁니다.
걷지도 못하는 간난 애를 엄마가 어디 놀러가면서 ‘얘야 니가 옷 차려입고 빨리 나와.’ 이러면 안 되잖아요. 옷 입혀서 걷지도 못하니까 바짝 안아서 차 안에 집어넣어버리면 애는 ‘이상하다. 분명히 조금 전까지 방에 있었는데, 오, 지금은 자동차에 있지?’ 이건 연속성이 안 되는 거예요. ‘아, 내가 이렇게 기어서 갔구나.’ 그건 말이 안 돼요. 자기가 걷지도 못하는데 뭘 기어옵니까? ‘뭔가 외부에서 나보다 강한 분이 나를 이렇게 옷을 입혀 줬고 나를 차에 실어줬다. 그것이 나의 어머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신부잖아요. 완성된 상태의 신부는 신랑 없이는 신부란 게 성립이 안 딥니다. 그런데 그 신랑이 단회성이라니까요. 신랑은 단회 성으로 오기 때문에 우리가 하는 이런 식으로 반복되지 않기 때문에 사람이 예수님을 잡으려 하면 잡히지 않습니다. 인간이 잡는 것은 반복된 것만 잡아요.
연어가 강물에 온다. 옛날 미개한 부족들이 연어 올 때, 연어인지 몰랐는데 연어가 오더란 말이죠. 나중에 보면 연어가 없어요. ‘아이쿠, 연어를 잡을걸.’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다음에 보니까 그 연어가 또 올라오더란 말이죠. 그래서 ‘아하, 연어가 날짜를 봐서 연어 올라올 때. 이때는 갈치가 올라올 때. 이건 멸치 잡을 때, 이건 숭어 잡을 때.’ 요런 식으로 하니까 고기가 잡히잖아요.
그러니까 인간은 뭐든지 반복적인 것이 될 때 인간의 손에 잡히게 되는 겁니다. 주님은 그 반복에 잡히지 않아요. 하나님께서 은혜 줄자에게 은혜를 주는 것이지, 인간이 은혜를 받았다고 그 은혜 받은 것을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겐 없습니다. 왜, 그 은혜가 단회 적이기 때문에 그래요. 은혜가 반복적일 것 같으면 우리는 그 반복적인 것을 나도 반복적이고 은혜도 반복적이고 ‘야! 이건 내 지갑에 넣어놓으면 되겠다.’ 하거든요.
그런데 주님은 한번 줘버리고 가버렸다 말이죠. 그 다음에 올지 안 올지는 주님 소관이지, 우리 소관이 아니다 이 말이죠. 그래서 ‘주님이여, 지난번에 은혜 주었는데 왜 지금 은혜 안 줍니까?’ 할 때 지난번에 은혜줄 때 우리가 은혜 받을 자격도 안 된다는 인간으로 달라져 있어야 되는데 은혜 받을 때 은혜를 제대로 이해를 못해서 ‘아하, 나니까 은혜 주는구나. 내일 되면 은혜 또 받겠지.’ 이렇게 돼 버리면 자기를 여전히 반복성 속에 그대로 놔둬버리고 나를 날마다 신자 되게 해주시옵소서.‘ 이런 식으로 하니까 결국은 그 사람한테 예수님은 똘마니 되는 거죠. 우리가 구원하는데 예수님은 은혜를 날마다 갖다 줘야 되는 어떤 서비스 맨이 된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만약에 그렇게 신앙생활 할 것 같으면 뭐가 빠져야 되느냐 하면, 성령을 구태여 언급할 이유가 없습니다. ‘니 예수 믿었나?’ ‘예수 믿었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니가 알아서 똑바로 해. 똑바로 하란 말이야, 예수 믿었으면 바로 예수 믿는 삶을 살아야지.’ 거기 성령이 왜 끼어들어갑니까? 성령은 처음 믿었을 때 한번 필요하고 그 다음부터 성령 필요 없어요. 우린 예수 믿고 난 뒤에 내가 알아서 착하게 예수님의 사랑을 알았기 때문에 알아서 사랑하면 그만 이예요. 그런데 거기 무슨 성령이 필요합니까?
그런데 요한계시록은 1장부터 마지막 끝장까지 계속 성령, 성령으로만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성도 신부라는 너 인간마저도 니가 손댈 수 없는 반복성에서 해당이 안 되고 반복될 수 없는 신부로서 너는 이 세상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야 된다는 취지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말이 어렵기 때문에 다시 한 번 알기 쉽게 정리해 봅시다. 제가 이런 이야기했죠. 하나님의 성전에서 모든 인간은 ‘나가 있어, 나가 있어. 다 나가 있어. 제자들도 나가 있어. 너도 나가있어. 다 나가 있어.’ 그리고 성전에서 왜 나가야 되는가, 아무나 어린양이 될 수 없어요. 어린양은 오직 한분만 돼요. 한분이 어린양이 됨으로 말미암아 이 안에는 모든 사람이 다 빠져 있다 이 말이죠. 빠져 있다면 이 안에 있는 어린양에 대해서 사람들이 이해가 됩니까? 안 됩니까? 이해될 수가 없죠. ‘나가 있어. 너희는 다 나가 있어라.‘
그럼 여기 어린양이라는 단순히 예수님이 아니고 어린양이라니까요. 요한계시록에서는 어린양! 어린양이라 하는 것은 단순히 예수님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어린양이라 하는 것은 이게 뭐냐, 세상은 뭐 중심이다? 지금 성전중심인데 이 성전은 지상에 있는 예배당이나 예루살렘에 있는 그 성전이 아니고 이거는 특수한 성전, 어린양이 계시는 그 성전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어린양이 계시는 그 성전은 지금도 그 성전에서 인간은 나가 있고 그때도 나가 있게 한 거예요.
그러면 성전에서 우리가 빠져있다면 우리가 무슨 수로 성전에 들어갑니까? 글쎄 그때는 바로 뭐냐 하면 여기서 성령께서 찾아오시는 거예요. ‘나가 있어.’ 성령이 찾아가시는 거예요. 성령이 찾아갈 때는 뭐냐 하면 우리 쪽에서 ‘나가겠습니다.’ 이게 허락이 안 된다니까요. 우리 쪽에서 나가겠다는 것은 반복 밖에 안 돼요. ‘야, 지난번에 어느 기도원에 가니까 은혜 돼, 올해도 그 기도원에 가야지.’ 이거는 반복 밖에 안 돼요. ‘지난번에 찬송가 405장 어메이징 그레이스는 은혜 돼, 한 번 더 불러야지.’ 한 번 더 불러도 소용없어요.
이건 철학적으로 따져도 이건 안 돼요. 헤라클레이토스인가 누가 이야기 했잖아요. 사람은 같은 물에 두 번 목욕할 수 없다고. 이미 강물은 흘러갔기 때문에, 강물에 목욕한다는 것은 그 같은 물에 목욕한 게 아니고 다시 옛날 지 목욕했던 땟물은 저 흘러가 버리고 새로운 물이 왔는데 들어가는 거예요. 이게 강물에 같은 물에 목욕 할 수 없다는 것만 아니고 남편하고 대화할 때도 같은 남편과 대화할 수가 없어요. 자식도 마찬가지고. 심지어 인간은 자기가 누군지 모르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맡겨야 돼요. 누구한테? 그리스도 몸으로 맡겨야 되지, 자꾸 내 몸으로 인수인계하면 안 됩니다. 내 몸을 인수인계하게 되면 내 몸은 고집이 있어서 내 몸을 반복해요. 내 몸을 반복하게 되면 이건 똥고집이라니까요.
‘뭐 주님께서 은혜 주신다 해놓고 은혜 주지도 않고 삐져서 기도 안 한다.’ 이런 식으로. ‘니가 뭔데?’ ‘내가 하나님 아들 아닙니까?’ 아들이라는 것은 기능적인 문제고 사명적인 문제지, 존재 문제가 아니에요. 아들다워야 아들인 거예요. 어제 수요일 날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인간이기 때문에 이렇게 하라는 말은 잘못됐다 말이죠. 이렇게 할 때만 인간이라고 했죠.
신부답게 하는 일이 벌어질 때만 신부가 되는 거예요. 우리는 자꾸 내가 괜찮은 사람이고 그 다음에 뭘 하려고 하는데 그렇게 하는 것은 비성경적입니다. 그러려면 만약에 내가 이런 인간인데 뭘 하겠다 하면 성령이 없어버려요. 성령이 없어버리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방향이 어린양에서 우리에게 다가와야 되는데, 어린양이 다가오는 것이 아니고 내가 어린양쪽으로 다가가려고 한다 이 말이죠. 백날 해봐야 이거는 튕겨나가 버립니다. 여기는 유일성, 우리가 못하는 거예요.
신부답게 산다는 것, 그것은 성령이 올 때만 신부답게 사는 것이지, 내 힘으로 신부답게 살 수가 없습니다. 그 신부 늙은 신부예요. 옛날 한물 간 신부예요. 성경에 기름 준비하라 하는데 기름 준비한 다섯 처녀는 신랑하고 결혼했잖아요.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그걸 딱 보고 난 뒤에 ‘우리도 해야지.’ 해서 신랑하고 결혼하려고 미리 기름을 준비한다고요. 그런데 요번에는 새로운 조항이 첨가됐네요. 성령에 의해서. ‘SK인가, 아니면 현대 오일인가?’ ‘SK입니다.’ ‘아, 나는 안 받아. 난 현대 오일을 원했어.’ 그러면 그 다음사람부터 현대 오일 기름을 준비하면 ‘이번에는 이란 산이냐, 쿠웨이트 산이냐, 어디 산이냐?’ ‘이란 산입니다.’ ‘아, 난 쿠웨이트 산을 원해.’ 기어이 우리 행한 것으로 구원 못 받게 하시는 겁니다. 왜냐 하면 우리 행한 것이 돼 버리면 예수님의 유일성이 깨지잖아요. 예수님이 홀로 다했다는 게 깨진다니까. 이게 깨져버리면 은혜가, 은혜가 아닙니다.
이걸 로마서 1장에서는 하나님의 의로만 구원이 돼요. 우리 의는 안 되거든요. 안 되는데 우리에게 버릇이 뭐냐 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의 안다고 나름대로 흉내 내서 마리아 마르다 처럼 잡채 주고 주님 섬긴다고 하조. 마르다가 주님 섬기고 마리아는 앞에서 말씀 듣고 둘 다 착한 일 했는데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에 둘 다 믿음 있다? 없다? 있기? 없기? 없기. 둘 다 믿음이 없었던 거예요. 아직 성령이 안 왔으니까.
그러면 마리아 마르다가 구원 못 받았다는 뜻은 아니고 마르다 마리아는 하나의 연기자들이예요. 장차 완료된, 몇 번째 하는지 모르겠는데, 성령과 신부라 하는 것은 이미 우리가 손댈 필요 없어요. 이미 성령 왔으면 신부요, 구원받은 겁니다. 구원받았는데 우리가 잘나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유일한 단회적인 것이 우리 속에서 반복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신부요, 어린양, 천국 백성이 되는 겁니다. 그건 이해되겠죠?
그럼 더 나아가 봅시다. 그런데 예수님을 뭐라 하느냐, 어린양으로 돼 있죠. 그럼 어린양으로 됐다 하는 것은 뭔 뜻이냐 하면 만약에 우리가 천국 간다면 우리는 어린양이 있는 곳으로 가는 게 돼요. ‘이상하다. 교회서는 예수님 믿으면 된다 하는데.’ 아니거든요. 하도 예수란 말이..., 예수 믿으면 되는 게 아니고 어린양 쪽으로 가는 거예요. ‘아이, 난 어린양인줄 몰랐네.’ 그러니 문제 있죠.
요한계시록에 보면 어린양의 보좌에서 생명수가 나온다 하는데 ‘아이구, 예수님이 어린양이든 관계없어. 예수만 믿으면 돼.’ 이럴 경우에는 그 예수라 하는 건 분명히 자기 존재의 대행(유형)입니다. ‘나 여기 있는 것처럼 예수님은 얼마나 멋있게 생겼을까? 키는 180 될 것이고 허연 수염 났을 것이고 도포 휘날리면서....‘ 그것은 뭐냐 하면 눈에 보이는 것 가지고 멋있게 보이는 거예요. 내가 생각할 때 멋있는 정도는 ’메시아 정도는 이정도 멋있어야 돼.‘ 이건 나에게 나온 생각입니다. 인간의 문제는 뭘 걸치고 있다는 거예요. 명예 걸치죠. 학력 걸치죠. 재산 걸치죠. 사람은 걸치고 있는 그것이 자기가 감당이 안 돼요. 그게 무거운 짐이 되는 겁니다. 놀라운 사실은 우리가 걸치고 있는 것보고 주께서 심판하지 않는다는 사실 이예요. 주께서는 보시지도 않는 것 가지고 우리는 ’이거 걸쳤습니다. 명주 걸치고 비단 걸쳤습니다.‘ 이거 걸치고 우리는 평가 받으려고 한다 말이죠. 주님께서 우리 걸친 것으로 평가 안 하십니다.
공 집사님도 나중에 연세 많아지면 머리 빠질지 몰라. 나이 들면, 혹시 그럴 리 없겠지만, 다른 분 예를 들라하니까 빠지고 있기 때문에. ‘주여 머리 빠졌습니다.’ 그런 것 안 묻는다니까. 머리 빠져서 머리가 허예도 그런 것은 주께서 평가하는 평가항목에 안 들어가요. 이빨 아프면 치과 의사나 화내지 다른 사람은 관계없어요.
주께서는 그런 걸 묻지 않는다니까. 우리가 걸치고 있는 거. 그래서 사도바울은 벗고 싶다는 거예요. 이 몸에 걸치고 있는 것을 벗고 싶다는 거예요. 벗고서 그냥 그리스도 안에서 만나고 싶다는 거예요. 그만큼 우리는 못 걸쳐서 아예 한이 맺혔어요.
제가 수련회 공부하면서 이런 글이 나와요. 옛날에 초대교회에 순교하고 피를 흘린 것이 국가의 권력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고개 숙이면 살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국가 권력을 거부했기 때문에 피를 흘렸다면, 요즘 교회는 권력 안 준다고 피를 흘려요. 안 알아준다고, ‘왜 목사인데, 유지인데 공무원들이 내가 이 큰 교회 목사인데 왜 안 알아줘?’ 권력에 목말라서 권력을 안 준다고 피를 흘리고 싸우고 있어요. 이 이야기는 하르낙이라는 사람인데 종교 교회사에서 자유주의 신학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걸치고 있는 그것들 속에서 처음에 아기 예수 태어나고 할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따르고 했습니까? 따를 때에 자기들이 걸치고 있는 것에 대해서 뭔가 보탬이 되고자 은근히 노린 거예요. 물론 진짜 예수 믿는 사람은 걸치고 있는 것도 벗은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냐 하면 삭개오, 삭개오가 갑자기 뭐라 합니까? ‘내가 토색한 게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이건 걸치고 있는 것을 벗기 바빠요. 이거 ’아이고 무거워, 아이거 무거워라.‘ 하는 식으로.
그런데 부자 청년은 어떻게 합니까? 주께서 ‘어이, 너 옷 벗어라.’ 하니까 근심하며 돌아갔다 했죠? 예수님께서 사람을 괴롭히려고 그렇게 하는 게 아닙니다. 뭐냐 하면 사람한테 관심이 없어요. 나는 지금 오르막길, 아기 예수로 태어났을 때 온 하늘나라가 다 찬양했잖아요. 천군천사가 찬양하고 목자가 밤에 양 지킬 때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이런 난리 쳤으면 예수님이 고생 덜 해야 될 건데 날 때뿐이고 그 다음부터 고생이 기다리고 있잖아요. 희한하죠. 만약에 제가 태어났을 때 동방박사 세 명이 멀리서 찾아와서 몰약과 유향, 황금 바쳤다면 저는 우쭐댈 겁니다. ‘이래도 무시하지 마. 이래도 내 생일날 동방박사 찾아왔어. 찾아왔어?’ ‘안 찾아왔어.’ ‘안 찾아왔으면 말을 말아.’ 동방박사가 문제가 아닙니다. 별이 내 머리 위에 있다 말이죠. 적어도 그 정도 됐으면 알아서 주위에서 길을 비켜줘야 될 텐데 이건 세상은 마귀는 꿈쩍도 안 해요. 아니 그 정도 별 까지 떴으면, 심지어 어머니가 아버지하고 합궁도 안 하고 날 낳았으면 적어도 그 정도 했으면 알아서 기어야 될 텐데 알아서 기기는 오히려 마귀가 더 달려들죠.
그래서 요한복음 15장에 이렇게 돼 있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는 아무것도 아니야, 너희 안에 나 예수가 있기 때문에 마귀가 너희들을 못 잡아먹어서 그렇게 달려든다. 니보고 달려든다고 생각하지 마라. 나로부터 사랑받은 너이기 때문에 내가 사랑해 준 걸 보고 마귀는 알아보고 나를 공격하는 식으로 너희를 공격한다.‘는 거예요.
스데반 집사는 헬라 계 유대인 그리스도교의 대표자로 볼 수 있거든요. 그 스데반 집사가 죽을 때 AD34년 쯤 되는데 그때 시울이란 사람한테 옷을 맡겼잖아요. 그때 사울이란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고 할 때 예수님 하시는 말씀이 ‘바로 그 사람들을 핍박하는 것이 나를 핍박하는 것이다. 사울아, 니가 해봐야 니만 고생이다.’ 이유가 뭐냐 이미 예수님의 신부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 보고 ‘니 알아서 열심히 해라.’ 이러면 그건 갋아도 괜찮아요. 그런데 성령이 와버리면 그건 신부예요. 신부라 하는 것은 덜 신부, 많이 신부 필요 없어요. 신부 그 자체로 완료된 거예요. 신부 배후에 누가 있다? 신랑이 있는데 신랑이 누굽니까? 어린양! 어린양이 신랑이 돼 버린 혼인잔치가 돼버린 상태기 때문에 마귀는 알아요. 안 된다는 걸. 하지만 다른 사람은 모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악마로 하여금 그렇게 활동을 하게 하는 것은 하도 가짜가 많으니까, 짝퉁이 많으니까, 특히 중국에서 얼마나 만들어 냅니까? 짝퉁. 명품도 아닌데 짝퉁. 하도 믿는다는 짝퉁이 많기 때문에 마귀를, 미친개를 풀어줘야 돼요. 미친개를 풀어줘야 물릴 때 예수님 바라보는지, 아니면 자기 자신이 믿는 미신 바라보는지, 자기 행함 바라보는지 한번 보자. ‘이렇게 열심히 했는데 이러십니까?’ 이러면 가짜고 ‘주여 마땅합니다.’이렇게 나오면 진짜고. 지금 미친개 한두 마리가 아닙니다. 온 거리마다 진짜 성경 말씀대로 우는 사자와 같이, 미친 사자죠. 사자가 울긴 왜 웁니까? 미쳐서 울어요. 마귀가 미친 사자와 같이 귀신들 풀어서 안 믿는 인간은 그냥 나둬요. 자기 백성이니까. 복음 아는 사람을 그렇게 집요하게 달려듭니다. 진짜 신부인지 아니면 신부 행세하고 있는 유사 신부인지, 그렇게 해요.
좀 더 해봅시다. 성도가 신부로 성전에 들어갈 때는 예수님이 보이면 안 되고 어린양이 보여야 됩니다. 물론 어린양이 예수님 같은 거죠. 이게 요번 수련회 때 할 건데 삼위일체로도 설명이 안 된다니까요. 삼위일체 믿으면 구원 못 받는다는 이야기하고 싶어요. 이번 수련회 때 삼위일체 믿어서, 천국 가는데 ‘교리냐, 아니면 복음이냐.‘ 해서 교리는 안 된다 이 말입니다.
어린양이 보여야 되는데, 이미 어린양이 보였다 하는 것은 이미 우리는 성전 안에 들어왔다는 거예요. 그리고 들어올 수 없는 곳인데 성령이 오니까 어디 들어왔다? 성전 안에 들어와 버린 겁니다. 이것이 요한계시록 21장에 12문이 있죠? 그리고 요한계시록 21장에 하늘에서 뭐가 내려온다? 새 예루살렘성이 내려온다 했죠? 성전에서 지금 우리가 생각해야 될 것은 뭐냐 하면, 성전에서 왜 그런 식으로 예루살렘 성, 신부, 어린양, 왜 그런 식으로 꼭 표현을 해야 되느냐, 그걸 제가 지금 설명하고자 하는 겁니다.
구약을 한번 봅시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망하죠. 이스라엘이 망했으면 승리자가 누굽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승리자죠. 왜 하나님은 자기가 승리자가 되는데 있어서 자기 백성이 멸망하는 그런 일들이 왜 필요했느냐 하는 겁니다. 그럼 완전히 약 올린 것밖에 안 되잖아요. ‘내 백성이다. 내 백성이다.’ 해놓고 자기 백성을 망하게 해놓고 승리자는 여호와다.
단체적 일치성 또는 단체적 단일성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스라엘이 뭐를 품고 있습니까? 성전을 안고 있죠. 레위기에 보면 성전에는 뭐로 돼 있느냐 하면 지성소 있고 성소 있고, 그리고 여기 번제 단 있고 이 전체가 뭐냐 하면 하나의 장막 뜰이 되겠죠. 이것은 어디서 내려왔느냐 하면, 이건 그대로 시내 산 위에 본 걸 가지고 내려왔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이걸 간편하게 그리면 여기 점이 있는데 이건 하늘나라고 이건 지상이고, 이 점에서 조명을 비춰버리면 요기 이러한 터가 있는데 이게 바로 성전이 되고 성소가 된다 이 말 아닙니까? 그럼 이게 거룩이 되겠죠. 하늘나라는 이곳은 속된 세계고 이 위는 거룩한 세계이니까.
모세가 시내 산 위에 올라가서 요 점을 통해서 조명을 통해서 말씀을 주니까 여기에 성전이라는 게 생겼다. 또는 이스라엘이 생겼다. 요점이 뭐냐 하면 언약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에서. 그러면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것 안에 들어가야 되는데 지금 문제는 여기에 이스라엘 인간들이 있죠. 이 인간들을 한번 뜯어보면 이 인간들이 어떤 생각을 하느냐 하면 인간들이 자기가 조명발을 발휘해서 뭘 만드느냐 하면 거꾸로 여기에 하늘나라를 만듭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성전이 있으니까 이 이스라엘 인간들이 하나님의 성전, 예루살렘 성전, 시온 성전 등 이걸 통해서 뭘 조명하느냐, 하늘나라를 조명한다 말이죠. 인간 하나하나가. 이렇게, 이렇게 비춰보는 거예요. 그리기가 애매하네요.
하늘에서 내려오는 요것과 인간이 구원받고 천당 가고자 하는 요것과 요 둘이 어디서 만나느냐 하면 공통점이 성전에서 만나는 거예요. 그러면 성전이 있다 하는 것은 인간에게는 굉장히 좋게 여기는 겁니다. ‘하나님, 어떤 일이 있더라도 성전에서 기도하면 응답되죠?’ 하나님께서 ‘응답된다.’ ‘거봐~ 응답된대. 이제 살았어. 우리 이스라엘은 구원받았어. 아브라함 자손은 구원받는 거야.’ 이렇게 오해들을 하는 거예요.
그렇게 오해하게 되면 여기 성전에서는 뭐냐 하면 죽음의 반복이거든요. 아까 반복 이야기했죠? 죽음의 반복. 이 반복은 연속적인 반복이 돼요. 매일같이 상번제 어린양을 드리는. 누가 죽어요? 어린양이 죽죠. 그러면 어린양을 어디서 구하느냐 이 말입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그거야 자기 집에, 어떤 사람은 수천 마리 키우고 한다 이 말이죠. 그래서 인간들이 양을 잡아서 상번제로 아침, 저녁으로 양을 바치면 겨우 인간들은 뭘 생각합니까? 하나님께서 양을 받았으니까 이 피를 받으시고 하나님이 응답하시면 우리 죄는 있다? 없다? 우리 죄는 없고 우리는 하나님께 복을 받고, 원래 복이라 하는 것은 죄가 없을 경우에는 자동적으로 복이 오게 돼 있어요. 죄는 없는데 복이 안 오는 경우는 없습니다. 죄 때문에 복이 안 오니까 죄가 없으면 의만 있으면 무조건 복이 오게 돼 있어요. 그러니까 너희들은 죄가 없고 거룩하게 되면 복이 오게 돼 있고 복을 받은 우리나라는 망하지 않는다. 이렇게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했던 나라가 망했다 이 말이죠.
어디서 망했고 누구한테 망했습니까? 바로 여호와께 어디서 망했습니까? 약속의 땅에서 망했죠. 누가 어린양이라 하느냐 하면 바로 요따위 식으로 생각하는 전체가 어디에 포함됐느냐 바로 어린양의 합숙훈련 해야 되는 거예요. 어린양에게 들어가야 되는 거예요. ‘니가 이 쓴잔을 마실 수 있느냐? 한 목사님 설교한 것처럼. 너희들이 하늘나라 높은 자리를 앉을 생각하지 말고 내가 마실 잔을 니가 마실 수 있느냐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제자들이 뭐라 합니까? 아니 천당 가는데 뭐를 못 마셔요? ’마시겠습니다.‘ 할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못 마신다 하지 않고 뭐라고 했느냐 하면 ’기필코 니가 마시게 되리라.‘라는 이야기를 언급한 이유는 니 인간 속에서 나온 모든 것은 오해와 오해, 곡해와 곡해 이외는 아무것도 할 줄을 모릅니다. 심지어 제자들도. 전체가.
그러니 오늘 강의 처음으로 돌아가면 지금 성전이 있고 어린양이 있으면 그 어린양은 예수님만 어린양 될 수 있어요. 그러면 나머지 우리는 뭐냐,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걸치는 것, 이쁜 것 더 걸치는 세일하면 뛰어가서 또 걸치고 이렇게 걸치는 걸 좋아한다 말이죠.
그러면 신부가 뭐냐, 신부라 하는 것은 성령이 와야 신부잖아요. 이스라엘이 망했잖아요. 이스라엘 망한 그것을 보따리 싸서 택배로 해서 신부될 사람에게 성령을 통해서 어떻게 합니까? 우리 안에 집어넣어 버려요. 집어넣어 버리면 구약 이스라엘이 망했던 그 모든 체험과 경험들이 이제는 솔솔하게 오늘날 우리 일생으로 드디어 장착이 되는 겁니다. ‘주여 이래서 망했습니다. 이런 오해와 곡해해서 망했습니다. 그것이 장착될 때 그게 신부입니다.
이렇게 장착이 되면 그 다음부터는 우리에겐 어떤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성전 이야기를 하고, 그리고 어린양 이야기를 할 때 그게 무슨 말인가를 오히려 성령 받은 사람은 알아들어요. ' 나 어린양 믿으면 구원받는다.‘ 이게 아니고 ’어린양이 나 때문에 죽었다.‘ 이걸 믿는 거예요. 마치 구약 이스라엘 때 자칭 그들이 매일같이 어린양 갖다 바쳤지만 갖다 바쳐봤자 그 성전 불타 버리고 어린양 다 죽어버리고 자기도 죽고 다 포로 잡히고 참혹하게 다 죽었잖아요.
말벌이 개미집을 습격하는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는데 한 2만 마리 되는데 말벌 폭격대가 와서 다 몰살시키고 꿀을 다 빼내가요. 그걸 보고 느낀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서 말벌 바벨론이 개미 같은 이스라엘을 다 뜯어서 죽여 버려요. 그런 식이라. 그런데 그걸 누가 시켰어요? 하나님이 그렇게 시킨 거예요. 곡해와 오해와 왜곡과 일방적인 자기생각, 이거 보세요. 인간들이 ‘우리는 성전이 있었어. 우리는 제사 드렸어. 아마 하늘나라 갈 걸.’ 일방적인 자기가 쏴 대는 자기 조명발, 이 모든 것. 말벌 나와서 다 뜯어 먹혀요. 다 뜯어 먹힌 요것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한테 그대로 주어지는데 주어지면 우리는 진짜 성전 안에서 진짜 어린양만 바라보는 사람이 되면서 우리의 면류관도 누구한테 반납한다? 주님 발 앞에 아낌없이 ‘이 면류관 제가 썼다는 게 말이 안 됩니다. 주여.’ 하고 바치는 거죠. 뭘 보고? 우리 속에 뭐가 있기 때문에? 멸망했던 이스라엘이 있기 때문에. 이게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걸 주께서는 반복하는 거예요.
반복되지 않는 것이 우리 안에서 반복되지 않는 것으로 매일같이 우리를 반복시켜 버리면 우리는 어제의 나와 오늘 나를 연속성 가지려는 나 위주의 욕심을 날마다 절단당하는 그런 인생을 살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6장에 보면 ‘내일 염려는 오늘 당겨서 하지 마라.’ 말이죠. 왜 그러느냐 하면 오늘 일은 니 소유의 오늘이 아니기 때문에 내일 되면 또 내일 치의 내일이 있고 또 내일 치의 너가 있고, 키를 누가 한자라도 더할 수 있느냐, 키를 한자라도 더할 수 있고 없고가 안 되죠. 왜, 오늘 있다가 내일 죽을지, 들풀처럼 우리는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내일 살아있어야 키가 자랐는지 키 재고 할 텐데, 죽어버리면 그것도 소용없잖아요.
솔로몬의 걸치는 것, 솔로몬의 입은 옷이죠. 솔로몬이 입은 걸치는 것도 뭐보다 못하다? 들에 있는 백합화보다 못하다는 거예요. 또 그거 연구한다고 현미경 들여다보고, 백합화와 인간이 어느 것이 아름다운가, 백날 보세요. 그게 보이는가, 안 보이죠. 왜 안 보이는지 알아요? 과학이라는 것이 곡해요 오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과학이라는 게, 인간의 이성이라는 거, 인간의 감정이라는 거, 인간의 의지라는 것이 옛날 우리 선배 이스라엘이 다 해봤던 거예요. ‘하나님 이게 아름다운 거죠? 저게 아름다운 거죠. 아름다운 것을 많이 드릴까요?’ 아름다운 것을 많이 드려서 성전 되는 게 아닙니다. 어린양 때문에 그런 거거든요. ‘하나님, 어린양 내가 바쳤습니다. 어제 어린양, 우리 조카가 바쳤고,’ 그 어린양 바쳐도 안 돼요. 그거 소용없는 짓 이예요.
어린양은 다 배제하고 오직 누구만 어린양이 된다? 예수님이 어린양.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은 어린양이라 하는 겁니다. 예수님 안다 하지 마세요. 어린양을 알아야 돼요. 어린양 앞에서 이스라엘은 망했다? 안 망했다? 망해버렸다. 그 망했던 사실을 통해서 오직 예수님만이 어린양이 희생제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줄 때 거기서 생명수가 흐르고 있다. 거기가 바로 천국 이예요. 이게 바로 낙원이 되는 겁니다.
그럼 좀 더 해봅시다. 요한계시록 1장 한번 봅시다. 1장 4절에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와 그 보좌 앞에 일곱 영과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과...” 이렇게 돼 있죠? 예수 그리스도를 일곱 영이라 표현한 것은 일곱 영이란 뜻이 아니고 일곱 영, 성령을 다루고 계시는 주인공이 되는 겁니다.
여기 1장에 보면 일곱 교회 나오고 일곱 별 나오죠? 일곱 교회는 하나의 모델로 뽑힌 겁니다. 시범 조교라 하죠. 뽑힌 거예요. 내가 이 교회를 어떻게 다루는가 보라 이 말이죠. 어떻게 다룹니까? 그 다루어진 그 모습이 오늘 요한계시록 22장 17절 “성령과 신부가 말하기를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이렇게 하는 겁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2장 3장 4장에서 일곱 교회서 하는 것을 마지막에 또다시 이것을 반복해 주고 있습니다. 뭔 뜻이냐, 완료했다는 거예요.
7촛대라는 것은 앞에 지성소 있고 그 앞에 성소 있는데 성소에 여기 단이 2개 있어요. 하나는 떡이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6개, 6개 12개가 있고 그 안에 조명하라고 가지가 7개 난 촛대가 있다 이 말이죠. 이것을 어디서 봤느냐, 하늘나라에서 본 거죠. 하늘나라에서 언약을 통해서 이렇게 주어졌죠. 이것이 유지되려면 언약 완료 돼야 되니까 십계명을 누군가 지켜야 돼요. 십계명을 다 지킨다는 보장 하에, 십계명도 지키면 거룩해집니다. 의로워지고, 십계명을 다 지킨 경우에만 이것이 그대로 유지가 되는 겁니다. 만약에 여기서 십계명을 못 지키고 하나님의 의가 생겨나지 아니하면 이것은 사라지게 돼 있어요. 이런 것은 없는 겁니다.
우리는 이것이 계속 있어서 우리가 이걸 하고 싶어 하는데 이것은 불타 버리고 없는 거예요. 그래서 이것은 불타 버리고 예수님께서 이 모습 그대로 어린양이 되셔서, 성전이 없으면 뭐도 없습니까? 어린양도 없잖아요. 성전이 없으면 양을 바칠 때가 없잖아요? 번제 단이 있어야 양을 바치죠. 번제 단 불타 버리고 바벨론이 불 타 버리고 다 날라 가 버렸는데요. 성소도 날라 가 버리고 지옥도 날라 가 버리고 다 전부 다 없잖아요. 없는데도 주께서는 어린양이 되더라 이 말이죠.
어떻게? 어떻게 됐습니까? 불집게 있어야 되고 어린양 되려면 잡아야 되니까 예수님께서 ‘뜨거워, 뜨거워.‘ 했습니까? 제사장 있어야 제사장이 어린양을 잡고 칼 가지고 난도질해야 되는데 예수님을 눕혀놓고 칼 가지고 내장 꺼내고 해야 되는데 그거 할 사람도 없는데 예수님이 어떻게 어린양이 됐느냐 말입니다. 이거는 유대인들이 질문을 할 수가 있어요. 유대인들이 율법대로 문자대로 하기 때문에.
예수님은 어린양이 될 수가 없죠. 왜, 어린양이 되려면 제사장이 양을 잡아야 되는데 잡을 사람도 없었고 불쏘시개도 없고 레위 지파도 없는데 지 혼자 어린양이라. 말도 안 된다. 이렇게 주장할 수가 있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예수님이 어떻게 어린양 됐습니까? 지금 문제가 어디 있느냐 하면 유대인들이 오해한다 했죠? 유대인들은 옛날 양 잡을 때 ‘우리가 인간이다. 두 팔 있겠다. 힘 좋겠다.’ 양 잡고 양을 잡으면 그게 양 잡는 줄 안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은 양을 누가 잡느냐, 하나님이 잡는 거예요. 하나님이 잡는 방법과 인간들이 율법으로 오해해서 자기들이 불쏘시개 들고 잡는 것하고 이게 같은 줄 알았던 겁니다. 아까 그림 나오잖아요. 인간이 쏘아대는 그 율법과 주님이 나타나는 예수님이 일하는 그 완전이 이게 같지 않다 정도가 아니고 대 충돌이 일어나는데 대 충돌이 뭐냐 하면 십자가라 말이죠.
그러면 십자가를 믿는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내 식대로 내 아이디어대로 하는 모든 것들은 다 죄고 거짓입니다.’라는 걸 고백하는 겁니다.
‘이 정도하면 주께서 기뻐하시겠지.’ 이런 아이디어들, 그게 전부 다 거짓말, 다 엉터리, 사기고. 마귀한테 속아서 한 거예요.
로마서 2장에서 사도바울이 유대인보고 하죠. ‘너희들이 율법을 갖고 있나?’ ‘그래 갖고 있다.’ ‘가지면 뭐하노. 할례 했나?’ ‘할례 했다.’ 좋다고 ‘우린 할례 했다. 고추 보여줄까?’ 이러고 있어요. ‘그 육신의 할례하지 말고 마음의 할례 해야 한다.’ ‘????..’ 마음의 할례를 무슨 수로 합니까? 누가 잘라요? 자를 사람이 없는데, 할례는 의사가 자르면 되지만 마음의 할례는 누가 자르는데? 아내가 자릅니까? 자식이 자릅니까? 누가 잘라요? 지 마음의 할례를 누가 자릅니까? 내장 같으면 지라도 자르면 되는데, 그것도 안 되고. 마음이 실체가 없는데 어떻게 자릅니까? 마음의 할례를 하라 하니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는 거예요.
그 말은 뭐냐, 니 마음은 할례 받지 않은 마음을 가지고 니가 감히 율법을 거론했다 그런 뜻입니다. 할례 받지 않은 마음. 마귀한테 덤터기 씌운 마음을 가지고 감히 예수, 감히 하나님, 삼위일체, 성령, 그런 걸 언급했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건 하나의 종교, 취미, 오락에 불과한 거예요.
그럼 다시 한 번, 예수님이 어린양 된 것은 어떻게 어린양이 될 수가 있었는가, 성전이 있으면 어린양 될 수 있죠? 그러면 성전이 있었잖아. 글쎄 그 성전은 그 성전이 아니라니까요. 다윗이 지은 성전, 성전이 아니에요. 그럼 성전만 있으면 돼? 그럼 촛대도 있어야 되고, 그 촛대가 그 촛대가 아니라니까. 옛날 유대인들에게 있던 촛대 있잖아요. 절에 가면 있듯이. 굿하듯이. 그 촛대가 아니고 교회가 촛대라니까요.
그러니까 옛날 진짜 하나님을 믿는 성전에 대한 모든 개념들은 성령이 오고 난 뒤에는 오늘날 제대로 완성된 모습을 다 보여주는 겁니다. 교회가 촛대고, 그리고 우리가 사는 이곳이 성전이고, 어린양 계시면서 생명수 흐르는 그곳이 천국이고, 우리가 생각하는 새 하늘 새 땅은 다 가짜고 그런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요한계시록에서 성전이 하나의 구약에서 말하는 그 성전이 완성된 모습으로 요한계시록은 이렇게 마감하고 있다는 것을 아시면 됩니다. 10분 쉽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