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계시록41강-수평과 수직 120628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5. 12. 12. 07:26

2012-06-29 01:25:32 조회 : 1639         
수평과 수직 120628 이름 : 이근호 (IP:117.55.17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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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한례 (IP:203.♡.41.16) 12-07-05 11:04 

가락교회120628-요한계시록22장8(수평과 수직)41강a-이 근호 목사

제 41강a

오늘은 요한계시록 22장 8절부터 시작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게 될 때 우리가 하나님을 일단 믿는다 치고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어떤 분인가 하는 내용을 살피는 식이 상식인데 그렇게 상식적으로 나가버리면 사실은 그 진짜 엑기스를 놓친 게 돼요. 무슨 말이냐 하면 신이 없는데 왜 자꾸 니는 신이 있다고 하느냐, 하는 그러한 도전을 그러한 나의 내부의 도전이나 외부의 도전이나 하여튼 그러한 생각을 우리가 그걸 억지로 잘라내면 안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종교생활을 하게 되는 거죠. 하나의 일종의 취미생활이 되는 겁니다. 10대도 아니고 현실도 아니고 그저 남이 안 하는 갈 하나 더 재미 삼아 꽃꽂이 하듯이 하나 하는 것밖에 안 돼요. 남들 꽃꽂이 하는 걸 보면 그걸 내가 꼭 해야 될 이유는 없잖아요. 그건 선택 사항이지, 필수도 아니고 운명도 아니잖아요. 우리는 하나님 믿는 것이 그런 식이 될 수가 있어버립니다. 그러면 우리들끼리의 재미난 모임, 게임을 하나, 취미생활 하나 영위하는 것밖에 안 돼요.

그러나 성경에 나오는 이 사도요한이나 사도들은 자기 책임, 자기 구원이 우선이 아니고 마치 댐 터졌을 때 네덜란드 애가 손가락으로 막았다는 전설 있잖아요. 댐 터지면 산으로 올라가면 될 텐데 손가락으로 틀어막았던 것처럼, 이것은 남이 알아주고 안 알아주고 문제가 아니라 이미 댐을 터졌다는 겁니다.

그 댐을 다급해서 ‘불났다. 도둑이야. 늑대다.’라고 외치는 것처럼 남이 양치는 소년이 거짓말을 몇 번이든 하든 관계없이 우리는 ‘늑대다. 불이야. 도둑놈 잡아라.’ 하는 것처럼 본인이 어쩔 수 없는 거예요.

어제 뉴스에 아파트 6층에서 애가 하나 떨어졌는데 그런데 옆에 있던 아저씨가 양 손으로 받았는데  1.5킬로의 중력의 힘인데 받아서 자기는 병원에 입원해 있어요. 애는 살고 중력 때문에 그 사람은 약간 중상 비슷하게 됐는데, 이거는 따지는 게 없잖아요. 그냥 ‘오! 오!’ 받아야 되는 것처럼.

지금 사도요한이 22장 8절 말씀이 그겁니다. 6절도 마찬가지고 “또 그가 내게 말하기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지라 주 곧 선지자의 영의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결코 속히 될 일을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보내셨도다” 이거는 그냥 받는 거예요. ‘가만 있어보자, 나 하는 일 없는데 목사 돼서 어디 인생을 보낼까?’ 이런 계산도 필요 없어요. 그건 선지자 학교 가면 되고, 선지자 학교 가는 것도 문제가 아니고 구약에서 선지자라는 것은 선지자 학교 가고 출신은 그게 아닙니다. 그냥 받는 거예요. 그냥 된 통으로 받는 겁니다.

비 안 오기를 누가 기도한 게 아니고 비가 안 와서 안 오듯이 비 오면 또 오라고 해서 오는 게 아니고 알아서 오듯이 우리가 주인공이 될 수가 없다는 거예요. 이 세상 이 현실 속에서 나는 결코 현실 자체가 주인공이지, 나는 현실이 덮치면 덮치는 대로 현실의 일부가 될 뿐이지, 내가 현실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그런 입장은 못 된다는 것을 또 다시 여기 성경에서 사도요한이 보여주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마지막 끝내면서 계속해서 이게 또 나온다는 말은 이미 우리가 내부에서 항상 끓어오르는 게 있어요. ‘신이  있기는 있나?’ 이 말이죠.

성경을 보기 이전에 먼저 그것부터 생각을 해야 돼요. 나는 이미 알고 있다 생각하지 마시고, 알고, 했는데 15초 지나서 ‘그런데 신이 있긴 있는 거야? 괜히 있다고 내가 혹시 나한테 최면을 걸어서 신이 없는 것보다 있는 게 낫지.’ 그런 식이 아닌가, 없는데 내가 조작하고 있지는 않는가, 아니면 실제로 신이 있는가, 실제로!

그럴 경우는 어떻게 하느냐, 신이 없다고 여기는 겁니다. 신이 없다고 여길 때 나한테 무슨 손해 볼 일 있습니까? 오히려 신이 없을 때 이익이 더 되죠. 안 믿는 사람과 친하게 지낼 수도 있고 친구로 우정을 유지할 수도 있는 문제고, 신이 없다면 우리는 이 땅에서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면서 완전범죄만, 안 들키면 된다 이 말이죠. 신이 없다면.

적어 볼게요. ‘신이 없는데 왜 자꾸 신이 있다고 우기는가?‘라는 이러한 사실을 진지하게 진정성 있게 한번 곰곰이 생각해 봐야 됩니다. 이걸 왜 생각을 해야 되느냐 하면 이 질문은 신이 없는데 왜 자꾸 신이 있다고 우기면서 하느냐, 그러다 어떤 한계나 어떤 사태나 어떤 사건이 일어나게 되면 하루아침에 신은 없었다고 외칠 그런 가능성이 농후한데 왜 자꾸 그때는 생각 안하고 그때 생각 안 하고 ’지금 모태 신앙이니 나는 그동안 교회를 몇 년 다녔느니 그것 가지고 신이 있다고 우기느냐.’ 하는 이 외부의 공격이 아니고 내 내부에서 이런 공격을 내가 나한테 아주 잔인하게 공격을 가해야 돼요. 이건 자기 스스로 부정하는 거죠. 자기 자신을 부인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 질문에 대해서 뭔가 속 시원한 답변이 마련돼야 되지 않습니까? ‘아니야, 아니야, 이래서 신이 있다.’ 내부에서. 이 질문을 한꺼번에 날려 보낼 정도로 강력한 답변이 있어야 될 텐데 이 답변이 없어요. 이 답변을 만들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러면 그 해결점은 뭐냐, 자, 이것을 부정할 수 있는 답변이 있으면 ‘훅, 하고 마귀야 나를 시험하지 마.’ 하고 쫓아낼 수 있는데 이걸 대항할 수 있는 대항의 말을 우리가 만들어 낼 수가 없어요.

요 문장 자체가 의미가 있기 때문에, 요 문장 자체가 하자가 없는 거거든요. 신이 없는데 왜 자꾸 신이 있다고 우기느냐, 신이 있다는 것은 신이 없는 상태에서 이거는 니가 니한테 자꾸 억지를 부리는 것밖에 안 된다 말이죠. 지금 북한에 김일성 죽었잖아요. 김일성 죽었는데 김일성 있다 하면 그 사람한테 우리는 뭐라 합니까? ‘니는 돌았다. 죽었어. 죽었는데 왜 자꾸 살아있다 하는 거야?’라고 했을 때 김일성 살아있다고 하는 사람이 뭐라고 답변하겠습니까? ‘나는 믿는다. 지금도 김일성 주석님이 살아있다고 믿는다.’라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믿음이지 그래. 그러니까 믿음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일방적인 니가 도라이 됐는데, 정신병자든 ‘나만 믿으면 믿는다.’ 하는 것처럼 ‘그렇게 니가 자기 스스로 니한테 속아 넘어가는 거야.‘ 하고 우리는 책망을 할 수 있고 구박을 줄 수 있다 이 말이죠.

그래서 이 질문에 대안되는 답변은 없습니다. 없는데 이 질문을 이렇게 바꾸게 되면 문제가 실제가 돼요. 신이 없는데 왜 자꾸 신이 있다고 하는가? 이 질문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 ‘왜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안 되는가?’ 요 질문으로 바꿔버리면 이렇게 되는 겁니다. 신이 없다고 나는 여기고 싶어요. 신이 없으면 이런 성경공부도 전부 사기니까 안 해도 되는데, 왜 나는 신이 없이 살고 싶은데 왜 나는 그것이 내가 용납이 안 되는가.

신이 없다는 것이 맞아요. 이성적으로, 왜, 안 보이니까. 그리고 숫자로 헤아려도 신이 없다는 것을 대다수가. 신이 있으면 신을 섬겨야 되잖아요. 교회 가는 사람도 누굴 섬깁니까? 자기를 섬기지 신을 안 섬기잖아요. 1등, 나 섬기기, 2등, 여유 있으면 신 섬기기, 이게 순서 아닙니까? 그런데 진짜 신이 있다면 내가 여기서 암에 걸리고 불에 화상 입어도 신을 섬기면 그걸로 족한 겁니다. 좀 냉정하지만. 냉정하게 말씀드리는 겁니다.

지금 사업이 하루아침에 망해도 아무 그건 신 섬기는 거와 관계없이 지장이 없어요. 하나님 섬기는데 지장이 없다면 집이 홀라당 타고 온 가족이 다 지금 죽어도 나는 울 필요가 없어요. 그게 내가 신 섬기는 거하고 무관하기 때문에. 심지어 내 몸이 아프다 할지라도. 돈이 한 푼도 없다 할지라도. 갑자기 지붕이 내려와서 내가 맞아 죽는다 할지라도 내가 거기서 애 닳아 하거나 안타까워할 하등의 그건 없습니다. 왜냐 하면 내 목적은 신을 섬기는 것이지, 신 섬기는 나를 섬기는 것이 내 목적이, 존재 이유가 아니기 때문에, 따라서 신을 섬긴다는 말은 이건 나한테는 이건 감당이 안 되는 거예요. 왜, 나는 평소의 버릇이 뭐냐, 나부터 챙기고 나부터 섬기고 나부터 이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게 누군지 알아요? 내가 제일 소중하잖아요. 주일 날 낮 설교에 이야기했잖아요. 사람이 자기보다 소중한 게 없다고요. 1순위  나고, 그 다음에 가족이고, 그 다음에 하나님이고, 이렇게 되는 겁니다.

나부터 제일 소중한 거예요. 그래서 나는 할 수만 있다면 하나님이 없다고 여기고 살면 좋겠는데, 그것이 내 뜻대로, 원대로 안 될 때 비로소 우리는 요한계시록 22장 7절과 8절에 합류하게 되는 겁니다. 그동안 우리가 자기가 이런 질문을 나는 신이 없이 살고 싶다는 질문을 안 한 상태에서 요한계시록 22장 6절~8절을 봐 버리면 우리는 비스무리하게 흉내 내려고 시도할 거예요. ‘나도 사도바울처럼 살아봐야지.’ 이런다고요. 그건 위선자입니다. 오히려 반대로 나가야 됩니다. 반대로. 성경에서 이렇게 해도 ‘나는 신이 없어. 그게 내 소망이야.’ 해놓고 그 뒤에 영어로 But, 그런데, 왜 하나님은 신을 좋아하지도 않는 나를 가지고 신, 하나님만을 섬기도록 그렇게 강제로 이끄십니까? 그 질문이 지금 사도요한이 받은 우리한테 외치고 싶은 이야깁니다.

그럼 이 질문(왜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안 되는가?)을 하게 되면 여기서 뭐가 끄집어 나오느냐 하면 이걸 행위, 또는 행함이 나오겠죠? 그래서 그 행함 문제가 어디 나오느냐 하면 요한계시록 22장 11절에 나옵니다.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 12절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 주리라“ 이렇게 돼 있죠?

초반부터 어렵게 해서 죄송합니다. 할 수 없어요. 성경이 압축돼 있어서 어려워요. 행함이 2개가 있습니다. 첫 번째 행함은 내가 하고 싶은 내 행함, 두 번째 행함은 하나님이 말씀대로 묵시적 계획대로 나한테 실시하는 것, 우리 성도한테 실시하는 게 행함입니다. 이 두 가지 행함이 나오거든요.

첫 번째 행함대로 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이 모든 것이 목적이 뭐냐 하면 내가 소중하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죽어서 좋은 나라 가야돼, 내가 소중해요. 내가 소중하기 때문에 행하는 이것, 더러운 겁니다. 이건 뭐냐 하면 자기를 속이는 거예요. 분명히 우리 조상이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우리는 이미 제일 소중한 것이 내가 되고, 이제는 내가 소중하기 때문에 선악과를 그냥 가만둘 수가 없었던 거예요. 아담이 너무 자기가 소중하기 때문에 내가 신이 될 수 있는데 그 기회를 놓치면 안 되잖아요. 신이 될 수 있는데. 그러면 신이 되면 누굽니까? 하나님이 하나님 되는 게 좋아서 따먹었습니까? 아니잖아요. 하나님 좋아라가 아니고 누구 좋아라고? 이 피조물 내가 이번 기회를 놓치면 신이 될 수 없잖아요. 그럼 누구 좋아라고? 저걸 따먹는 순간 나도 신하고 맞먹을 수 있는 거예요. 왜 그 기회를 놓칩니까? 그 기회가 두 번 다시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데. 그 기회를 놓치면 안 되죠.

그러면 이미 따먹은 상태에서 누가 이미 소중해요? 내가 소중하잖아요. 그 소중히 여기는 그 조상의 DNA를 계속 우리가 물려받았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누가 소중해요? 우리가 소중하잖아요. 우리가 소중한 상태에서 거룩이고 의롭게 산다는 것은 결국은 위선자가 되는 겁니다. 이 행함이.

그래서 아까 제가 처음에 뭐라 했습니까? 솔직히 까놓고 이야기해라. ‘니 하나님 없이 그만 내가 있는 걸로 족한 걸, 나 있고 하나님 있는 것도 귀찮아.‘ 그럼 또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하나님 있으면 내가 섬겨야 되니까 나는 졸개가 되고 그분은 어른이 되니까 이건 내 성질에 안 맞아, 우리 각자 성질에 안 맞잖아요. 누구한테 굽실거리는 거. 남이 나한테 굽실거리는 건 우리의 성격에 맞는데.

말 쉽게 합시다. 내가 하고 싶은 게 뭐냐 하면 많은 사람들이 내 앞에 꿇고 섬기게 하고 싶어요. 마태복음 4장에 예수님이 금식했을 때 악마가 와서 예수님한테 한 그거다 이 말이죠. ‘니가 뛰어 내리면 많은 사람들이 추종할 것이고 돌이 떡 되게 하고 기적을 베풀면 메시아로 인정할 것이고 세상 부귀영화 권세를 네게 줄 것이다. 이건 마귀가 그런 식으로 꼬인다는 것은 이미 그만큼 평소에 우리를 많이 꼬여왔다는 것이고 우리는 거기에 호응을 해왔다는 겁니다. ’예~ 아이고, 세상에, 예, 어떻게 하면 됩니까? 예.‘ 우리는 그 본성이 맞아, 뭐 말 어렵게 할 것도 없어. 딱 그거야, 우리는.

내가 제일 높은 자리에 앉는 게 그게 우리의 본색에 딱 맞는다니까요. 제일 높은 자리에서 내려다보는 게 맞아요. 100층짜리 건물에 98층 싫어. 100층이어야 돼. 위층에 2층이 있어서 방귀 뀌면 냄새 나서 안 돼. 이게 우리 본성이 맞아요. 아무리 예수 믿고 복음 알고 감추고 나오지 말라고 성질 나오지 말라 눌러도 소용없어요. 이게 언제나 나오게 돼 있다 말이죠. 어떤 사태가 터지면 하나님 원망하고 불평하고 난리 나요.

그걸 한꺼번에 주께서 이미 아셔서 한꺼번에 다 하셔서 우리가 그런 본색을 드러내지 않는 시점이라도 이미 그런 본색을 다 드러났다는 것까지 다 챙겨서 하나님께서 뭐냐 하나님의 액션을 하나님의 행위로 우리에게 집어넣어 버립니다. 그래서 요 행위(1번) 부정되고 요 행위(2번) 긍정될 때  요걸 가지고 뭐라 하느냐 하면 믿음, 또는 믿음에 합당한 행함이라고 합니다.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 주리라” 하는 것은 이것을 뭐냐, 상 주기로 작정한 사람에게 상이 어떻게 해서 너를 통해서 어떤 경로에서 상이 주어지는가를 우리를 하나의 도구로 사용해서 하나님의 상을 우리로 마음껏 발휘하게 하는 겁니다. 그렇게 될 때 이 상을 받는 성도는 하나밖에 없죠. 자기를 부인하는 겁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방법이 뭐냐, ‘나는 죄인이다. 나는 부족하다.’하는 것은 바리새인이 하는 것이고, 성도가 하는 자기 부인은 뭐냐 하면 감히 성전에서 고개를 못 들고 ‘하나님이여, 저는 죄인입니다.’

어제 제가 수요일 날 설교에서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에 그냥 직접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아니고 여기 뭘 통해서 하느냐 하면 죄를 통해서 한다 했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원하는 게 뭡니까?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행함에서 나오는 죄는 인정을 안 해요. 죄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행위를 줘서 튀어나오는 죄, ‘이 안에 뭐야,’ 해서 발로 차니까 나오는 죄, 그것이 튀어나올 때 내가 만들어 내는 죄가 아니라 주께서 거룩한 말씀이 작용해서 ‘오! 나는 그동안 나를 섬겼구나.’ 하는 그 죄가 튀어나오는 그 죄를 주께서는 흐뭇하게 받으시는 겁니다. 왜냐 하면, 그 죄가 있을 때만 하나님과 그 사람은 소통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연락이 되고 관계가 성립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의 행함, 이 하나님의 상주기 위한 행하신 것을 끄집어내기 위해서 사도요한에게 뭐가 주어졌다? 천사가 왔고 천사로부터 하늘의 계시를 받은 겁니다. 만약에 하늘의 천사도 오지 않고 계시도 없이 우리보고 ‘너는 행한 대로 한다.’ 하면 우리는 기껏 뭐가 됩니까? 바리새인이 되는 거예요. 바리새인은 누굴 부정했습니까?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예수님이 계시다는 것을 부정했잖아요. 왜,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런데 그걸 보고 예수님께서는 ‘그게 바로 니 애비가 마귀다.’하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가 중간에 끼어들 필요 없이 직접(directly)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말씀 가지고 행한 대로 해서 복 받는다 하는 그게 바로 마귀가 그런 짓 한 겁니다. 왜 그런 짓했느냐 하면 하나님이 소중한 것이 아니고 내가 소중하고 이미 선악과 따먹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랑스러운 게 아니고 내가 사랑스럽고 하나님의 구원이 좋은 게 아니고 내 구원이 나한테 귀하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최선을 다하여 열심히 지켰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도 인정했습니다. ‘누구든지 바리새인보다 의가 더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고. 그래서 예수님의 그런 말씀을 우리가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 다음에 누가복음 12장49절 한번 봅시다. 보기 전에 또 한 번 잊어버리니까 다시 이야기합니다. 왜 신이 없는데도 왜 자꾸 신이 있다고 우기느냐에 대한 거기에 대한 해결책은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은 오직 나만 섬기는 것을 하고 싶다. 나는 나만 최고 자리에 앉고 내가 신이 되는 것, 딱 깨놓고 말해서 내가 신 되는 것, 그게 나의 영원한 소망입니다.‘라는 그 고백. 그런데 왜 하나님은 그걸 방해합니까? 방해하시면 그 사람은 땡잡은 거예요. 그 사람은 사도요한처럼 계시를 받았기 때문에 자기가 신이 되고자 하는 죄를 부모로부터 품고 왔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아주 적나라하게 까발려진다는 그 행복감! 만약에 엑스레이 단층 촬영하는 거와 똑같은 거예요. 내 속에 내가 제일 중요하다는 것을 엑스레이 찍으신 분 앞에서 완전히 발각되어 까발리는 그거 아무나 받는 축복 아닙니다. 최곱니다. 최고!!

병원에서 엑스레이 많이 찍어봤지만 하늘나라 엑스레이 언제 찍어봅니까? 이건 의료보험도 안 돼요. 누가복음 12장 49절을 보면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와~~ 세상에, 어느 교주가 이렇게 강력하게 대합니까?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다.’ 어제 설교를 해보면, 우리는 번개탄 같이 불에 타는 재질로 돼 있어요. 이런 사실을 우리가 몰랐던 거예요. 우리를 하나님이 창조할 때 불에 타도록 불에 타는 재질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왜 우린 몰랐을까? 이건 불에 태우기 위해서 우리가 만들어진 거예요.

베드로 후서에 보면 지구도 타는데 우리는 안탈까요? 지금도 화장터에 가면 잘 타는데 지금도 예약이 밀렸어요. 서울에 죽는 사람이 많아서. 그것도 자꾸 성남시에서 오지 말라고 하고, 서울시에서 오지 말라 하니까 하도 비좁으니까. 그건 뭐냐 하면 우리 몸 재질 자체가 불에 타도록 돼 있다 말이죠. 그리고 심지어 모든 금속, 백 구십 몇 가지의 모든 원소가 다 불에 탄다. 다른 말로 하면 물리적으로 봐서 에너지에 다 타도록 돼 있다. 재가 되게 돼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불을 던지러 왔다. 불 던지러 왔으면 그냥 한 곳에 예쁘게 불꽃만 피어지는 게 아니잖아요. 전체가 들풀에 불이 번지는 것처럼, 홀라당 다 태웠다. 불을 확 던지면 그 다음부터 앞부터 타들어가서 어떻게 됩니까? 캘리포니아 산불처럼 다 타들어가는 거예요. 내가 그 일을 하러 왔다 이 말 이예요. 우훅, 하고 가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불에 타면 어떻게 될까요? 이건 불에 탄다는 말은 무가치하다는 뜻이거든요. 그런데 인간이라 하는 것은 성도는 무가치한 가운데서 비로소 가치를 발견하게 하는 것이 성도됨입니다. 그게 다니엘 세 친구예요. 다니엘 세 친구가 자기의 존재의 의미를 어디서 찾았습니까? 그 대목 보면 하나님도 참 너무 인간을 모질게 다루시는데 우상에게 절을 안 하면 풀무 불에 던진다 했잖아요. 그 우상을 만드신 것도 배치를 해놓으신 것도 하나님이고 그리고 원래 절을 안 해도 되는데 다니엘 세 친구들은 많은 사람이 주목을 한 모양이라. ‘이래도 절 안하나 보자.’하고 벼르고 있는데 절을 안 했거든요.

그러니까 임금도 벼르듯이 잡아서 ‘절해라.’ ‘못 합니다.’ ‘절 안 하면 니 죽는다.’ ‘안 죽을걸요. 아, 말 취소. 만약에 죽는다 할지라도 절 못하겠습니다.’ 이렇게 나온 거예요. 무슨 똥  고집이, 이런 고집이 다 있나. 다시 말해서 이 대목에서 다시 한 번 보는 것은 느부갓네살이 하는 이야기가 ‘아이, 이 답답한 인간들아, 하나님이 없는데 왜 자꾸 있다고 하느냐.’ 그 질문을 외부에서 해주는 거예요. 이렇게 외부에서 하나님이 시키는 것은 우리가 평소에 내부에서 내가 그런 질문을 나한테 늘 하고 있다는 것을 외부를 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뭐냐, 성도라 하는 것은 지가 마음의 결심으로 믿는 게 아니고 이질 적인 것, 내 것은 다 부모한테 받은 것이기 때문에 그게 전부인데 그거 말고 어떻게 이질적인 게 온다면 그거 신기한 일이죠. 그 신기한 일로 인하여 다니엘 세 친구는 사실은 답답하죠. 자기도 절하고 제일 중요한 게 목숨 보존하는 게 제일 중요한 거 아닙니까? 절하면서 안 믿는다 할 수도 있고 그렇잖아요. 다른 사람도 그런 사람 많을 거예요. 절하면서 임금이 좋아서 절하는 사람 없고 대부분 ‘더러워라. 에이 해줄게, 해줄게.’ 하고 억지로 한다 말이죠.

그런데 왜 다니엘 세 친구는 그것마저 해당이 안 되느냐 말입니다. 누가 자기한테 답답해요? 다니엘 세 친구가 자기 가슴을 치는 거예요. ‘왜 나는 다른 사람같이 대충 넘어가는 법이 없느냐. 대충, 나도 대충 넘어가자.’ㅎ 다니엘 세 친구가 드디어 불 속에 들어가죠. 불을 7배나 더 뜨겁게 한 거죠. 온도가 약 1500⁰C까지 올라갑니다. 아마 원자 폭탄은 태양의 표면온도 6000⁰C 까지 올라갑니다. 하여튼 그 당시 최고로 올려야 되니까. ‘아이고, 똥고집이 사람 잡네. 잡아.’ 그건 본인도 그렇게 생각하고 다 했다 말이죠.

그런데 다니엘 세 친구 스스로 보기에 ‘역시 하나님은 없구나.’ 하고 들어갔는데 와 보니 거기 계시네. 불 속에 계셔요. 불 속에 있음으로서 저쪽(불 밖)사람은 이쪽에 들어올 수가 없어요. 다른 사람이 변화 산에 못 올라가듯이 엘리아 모세를 만날 수 없듯이 저쪽 사람들은 들어올 수도 없는 거예요. 이게 갈라디아서 6장에 보면 십자가 안이 되죠. 그렇게 흔히 십자가를 이야기하는데 사실은 십자가 안에는 성령이 아니면 못 들어간다는 말은, 아무리 종교생활을, 금식기도 많이 해도 헌금 많이 해도 못 들어옵니다.

그래서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안 돼.’ 그거 밖에 없어요. ‘안 돼.’라는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어요. 사람들에게. ‘예배 참석해도 안 되고 성경 공부해도 안 됩니다.‘라는 말 밖에 할 수가 없어요. 왜냐, 내가 구원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목사가 사람을 구원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사도바울이 손수건으로 사람을 구원하는 게 아니에요. 사도바울이 말발로 구원하지 않는다고 고린도전서 2장4절에 나옵니다. 내가 전한 것은 내 말과 지혜로 한 것이 아니다.’라고 분명히 이야기했잖아요. 그것은 성령의 나타남으로 했다는 말이죠. 이 말은 뭔 뜻인 줄 알아요? 내가 지금 말하고 싶은 것도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고 성령께서 시켜서 하는 말이니까 모든 공로는 성부 성자 성령께 돌려라 이 말입니다. 나한테 돌리지 말고. 그런 뜻이거든요. 사도바울도 죽을 지경 이예요. 오죽 했으면 빨리 죽고 싶다 했겠습니까?

이건 사람이 안 되는 걸, 이질적인 걸 갖고 있다는 말은 이 사람이 대학에 떨어지고 사업에 망하고 집에 불나고 어떤 일이 있더라도 지금 거기에 신경 쓸 필요조차 없는 존재가 된 겁니다. 몸이 아프고 하더라도. 왜 자꾸 내 몸도 아닌 걸 내 몸이라고 이렇게 만들어 내는 요 마귀가 미운 거예요. 내 인생도 아니고 내 몸도 아니고.

여러분, 잘 아시는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너무나 잘 아시는 건데 너무나 쉬운 거니까 제가 물어봅니다. 인간은 누가 만들었습니까?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었다. 너무 쉽죠? 그럼 인간 요소 속에 인간의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잖아요.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 때 인간 요소 속에 인간 자기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너무 쉬운데, 없잖아요. 없는데 왜 인간이 인간을 자기 것이라고 우깁니까?

성도는 이렇게 살아야 돼요. 걸으면서도 팔이 앞으로 나오면 오, 하나님 것이 요래 움직이네. 오, 하나님의 발이 하나는 뒤로 가고 하나는 앞으로 가고.‘ 이렇게 돼야 돼요.

 

왜냐 하면 가장 알 수 있는 상식에 의하면 우리는 누가 만들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만들었기 때문에. 어떤 공장에서 인간이 장난감을 만들어서 걸어가게 하면 누가 좋아해요? 만든 인간이 좋아하잖아요. 그런데 로봇이 지가 좋아하면 로봇을 때려버리죠. 누가 만들었는데 니가 좋아해? 왜 우리 일에 우리가 좋았다 우리 일에 우리가 슬펐다 할 수 있는 그런 권한이 없는데 왜 그런 쪽으로 나가느냐, 전부 다 우리 조상이 하나님을 잘라서 그래요. 하나님을 잘라버리고 이제는 하나님이 안 중요해요. 누가 중요해요? 내가 중요해요. 만들어 놓고 이제는 저리 가라 이 말이죠. 만들었으니까 이제는 별 볼일 없다 말이죠. ’이제는 내 인생 내가 알아서 살‘거야.‘

몇 개월 후에 한 군데 주례를 하게 됐는데 잠언 서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이것도 제가 주례를 하면서 하는 건데 ‘지혜로운 아내는 여호와께로 말미암음이라.’ 이건 뭔 뜻이냐 하면 지혜로운 아내는 여호와의 스파이입니다. 여호와의 스파이! 단, 지혜로운 아내. 그러면 지혜로운 아내가 아이큐가 높다든지 돈 잘 버는 아내가 아니고 지혜로운 아내가 어떤 아내인가 보니까 잠언서 마지막에 보니까 아니 이 여자가 여호와를 경외하네. 미쳤어. 왜 결혼했으면 누구를 경외해야 돼요? 남편을 경외하고 시집을 경외하든지 말든지 해야지, 아니 여자가 미쳤어. 여호와를 경외하는 거예요. 얼굴 고운 것이나 아름다운 것도 헛되고 거짓되나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지혜 자가 돼서 칭찬을 받는다는 거예요. 결국 잠언서 아들 보고 이야기해놓고 마지막 장면은 남자가 아니고 누가 칭송을 받아요? 여자가 칭송을 받아요. 여자의 후손을 갈라내는 건가. 잠언서 처음에는 아들보고 이야기하잖아요. 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게 은혜라 해놓고 마지막에는 경외하는 사람의 모델로 누가 등장합니까? 아내가 등장해요.

그래서 이것저것 따지고 보면 도대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기적 중에 기적입니다. 이건 있을 수가 없어요. 아무리 곰곰이 생각해 보고 다시 돌아서 또 생각해 봐도 이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우리의 능력에서는 안 나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3장에서 유명한 말씀 하셨잖아요. 이 천국이라는 것은 너희들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들에게는 허락이 안 되었다는 거예요.

제자들 좋아하면 안 됩니다. 제자들이 좋아하려면 뭘 알고 좋아해야 하느냐 하면 저들이 어떤 사람인가 알아서 본인들이 왜 저들 속에는 포함이 안 됐는지를 알고 난 뒤에 좋아해야 돼요. 왜 저들은 허락되지 않았는지 알아야 되고, 그 허락되지 않은 걸 왜 알아야 하느냐, 알아야 지금 내가 나는 우리고, 저희가 아니라고 우겼던 것이 저들이 분석해 버리면 ‘가만히 있어보자. 허락되지 않은 저들하고 나하고 똑같네.’ 이렇게 돼 버리면 갑자기 인상이 찌그러질 수가 있어요.

‘아이, 이거 허락이 안 되는구나.’ 그래서 제가 얼마 전에 질문에 대해 쓴 글에 제가 답변을 굉장히 어렵게 했어요. 어떤 분이 질문을 ‘세상이 이렇게 악하고 이단들이 설치는데 왜 하나님은 방치하시느냐? 왜 악한 자가 횡횡하고 설치는데 왜 하나님은 그냥 묵인 하십니까? 성도로서 괴롭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답변에 말하기를 ‘버림받은 자가 누군가를 알면 우리는 그런 것을 다 용납할 수 있고 기쁘게 받을 수 있다.’라고 한 거예요.

이게 무슨 말이냐, 예수 안 믿는 자가 아니라 무슨 자입니까? 버림 받은 자죠. 오늘 본문 요한계시록 22장 6절 7절 8절에 사도요한에게 누가 왔죠? 천사가 찾아왔죠. 그러면 천사가 왔으면 사도요한 개인의 입장에서 지금 귀양살이 하니, 몸이 아프니, 잠이 안 오니, 슬프니, 그런 것을 따질 입장이 됩니까? 안 됩니까? 버림 받지 않았다는 말은 누가 찾아왔다는 거잖아요. 찾아왔으면 이거는 그의 운명과 그의 팔자는 이미 끝난 거예요. 이건 수정이 안 돼요. 찾아왔으면 내가 내 힘으로 가라 하든지, ‘나는 내 식대로 살 거야.’ 고집을 부릴 수가 없어요. 덮치니까, 찾아오니까.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여기에 대해선 본인이 저항할 수가 없다니까요. 그 팔자를 저항할 수가 없어요.

지금 문제가 쉽게 됐다가 어렵게 돼 버렸는데 이렇게 그림으로 그리면 쉬워지는데요. 어릴 때 애들이 한 두 살쯤 됐을 때 한참 예쁠 때 아닙니까? 자기만의 공간 이불 속에서 놀고 있는데 아빠가 퇴근했어요. 그러면 애가 아빠를 보고 싶어서 반기려면 이불을 제치고 이렇게 튀어나가서 아빠를 반겨야 되는데 애들이 성질이 급해서 그냥 여기서 앉았다 일어나 버리면 뭐도 같이 일어섭니까? 이불도 같이 일어서죠. 이 이불이 뭐냐 하면 나의 세계관, 나의 현실관 이예요. 현재 내가 구성한 ‘나 이런 인간 되고 싶어, 나 세상에서 이 정도 되고 싶어.’ 그게 중첩된 내 이불 이예요. 하나같으면 말을 안 해요. 열 댓 개 겹겹이 있는 거예요.


그러면 하늘을 보려면 어떻게 됩니까? 이불을 뚫고 나와야 될 텐데 우리는 현재 내가 나한테 유리하다고 여기는 세계관(이불)을 덮어쓴 채 ‘주여, 내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이러고 나오니까 이건 주님이 보이는 게 아니고 뭐가 보입니까? 만날 지 얼굴만 보이는 거예요. 욕심에 찬, 자기 얼굴만 보이는 거예요.

그러면 자기가 이불을 떨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떨칠 수 없죠. 바깥에서 이불을 제쳐줘야 되는데 이걸 가지고 출애굽이라고 해요. 이 이불이 뽕~하고 뚫려버렸어요. 야, 이거 그림 그리기 힘들겠네.ㅎ 이불을 구멍을 내줘야 얼굴을 내밀고 아버지를 만나거든요. 그런데 이불이 너무 두껍기 때문에 이불을 못 대는데 이 이불 찢어지는 게 뭐냐, 나의 지금까지 살아왔던 내 현실과 나의 세상 관, 나의 주관, 인생관, 이게 찢어지는 거예요. 이게 찢어진다고 그렇게 울고불고 난리치는 겁니다.

마리아 마르다 오빠가 누구죠? 나사로죠. 그들이 재미나게 살았잖아요. 예수 잘 믿는 것처럼 보이고 예수 잘 믿고 예수 오시면 영접하고 예수 잘 믿었는데, 예수 잘 믿을 때 본인은 그렇게 생각 안 했죠. 예수 잘 믿으니까 예수님, 우리 오빠도 챙겨주시고 내 동생도 챙겨주시고 아마 예수 잘 믿을 때는 그런 생각도 안 들었을 거예요. 그저 주의 은혜로 감사하다고 했는데 그런데 막상 주님께서 나사로가 아프다 할 때 그때 1단계 겁이 덜컥 났죠. 빨리 주님한테 연락했는데 주님이 안 오네요. 그렇게 자주 오더니만 주님이 안 오네요. 일부러 늦췄죠. 드디어 설마 숨이 꼴딱, 꼴딱 할 때 오시겠지, 안 오세요. 완전히 오빠 죽었을 때 그때 주님께서 벌써 아시고 ‘오빠 죽었다. 자 오빠 죽었다. 가자.’라고 갔을 때 마르다가 멱살을 쥐었죠. ‘내 이불을 왜 찢어놨느냐’고. 주님은 ‘니 이불을 찢지 않고서는 출애굽이 안 되고 그게 믿음이 아니기 때문에.

여기서 예수님 울었습니다. 내 이불 왜 찢느냐고. 그동안 행복하게 덮었던 우리 세 식구, 서로 하나가 없으면 우리는 곧 죽을 거 같던 우리 더불어 사는 예수님의 공로로 은혜로 사랑으로 축복으로 살았던 이걸 왜 주신 은혜를 왜 본인이 줘놓고 본인이 왜 찢느냐 이 말입니다. 출애굽이 뭔지 모르고, 내 인생관이 찢어져야 되는 걸 모르고, 찢어버렸어요. 그리고 하는 말이 이 이불은 뭐냐 죽기를 무서워하고 있다는 것, 죽음이 끝이라는 것, 이러한 이불은 그동안 고만고만한 인간들이 또는 악마가 인간을 속이기 위해서 그렇게 한 거예요. 마귀가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종노릇 했다. 이불에 덮여있는 종이 된 거예요. 노예가 된 겁니다. 링컨이 나타나든 해야 돼요. 우리는 노예 해방해야 돼요. 우리는 찢어질까봐 걱정돼요. 우리는 이 세계 자체에서 우리 자신이 나가기를 우리 자신이 안 좋아해요. 살아온 정이 많아서.

찢어야 그동안 십자가 피를 흘렸던, 찢을 때 피가 묻거든요. 십자가 피만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되는 거죠. 시원한 바람, 요걸 요한복음 8장에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진리는 예수님을 말하거든요. 예수님이 너희를 자유케 하러 왔다는 사실.

그래서 오늘 다시 22장 돌아가면 나는 불 지르러 왔다. 모든 것은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마지막 7대접이 떨어지면 모든 것이 불바다 돼 버리면 그 가운데서 의롭고 거룩한 것은 오직 사도요한이 모델처럼 하나님의 천사로부터 사도요한이 먼저 계시를 받고 이 사도요한의 계시대로 또 받고, 받고, 받고, 받은 사람들, 그 사람들만이 이렇게 하늘나라의 상을 받게 되고 구원받는다는 이야깁니다. 이 이야기하는데 이렇게 길고 힘이 듭니다.

왜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 우리 구원보다 더 소중함을 언급하기 위해서 이럴 수밖에 없어요. 자칫 잘못하면 우리 구원이 예수님보다 더 소중한 게 돼 버립니다. 이거는 계시를 받은 적이 없고 천사 만난 적도 없고 지가 지 머리 계산해서 구원받고자 시도하는 종교적인 취미생활에 불과한 겁니다.

그래서 사도요한은 이게 현실입니다. 이 이야기를 수백 번 했는데 할 때마다 제가 전율을 느껴요. 우리는 지금 취미생활 하는 게 아니에요. 우리는 계모임 하는 게 아닙니다. 선택이 아니고 우리는 필수고 이거는 운명 이예요. 이거는 특수한 운명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운명을 우리는 매일같이 스스로 이걸 반격해서 떨쳐내 보고자 애쓰고 있는 중입니다. 될 수 있는 대로 말씀 없는 곳에 도망치고 싶고... 쉽게 말해서 ‘하나님이여, 제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좀 살게 내버려 둬요.’라는 소리를 할 수 있는 사람 같으면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왜, 자꾸 귀신이 따라오니까, 성령이 따라오니까, ‘내 다리 내놔라. 니 인생은 없는 거야.’하고 따라오니까. 이거 질렸어요. ‘고만 대충 교회 가고 대충 헌금 내고 그래서 대충 그러다 천당 가고 세례 받아서 천국 가고 그만 내버려 둬요.’ 그게 안 된다니까요. 그건 누구나 그렇게 되고 싶죠. 그게 안 된다니까요. 하나님이 찾아온 사람은. 사도요한 보세요. 그게 안 되게 돼 있다니까요.

그래서 성령의 열매는 하나밖에 없어요. 뭐냐 하면 ‘안 돼!’ 이게 성령의 열매입니다. 우리는 뭐든지 내 맘대로 안 돼요. 다시 말해서 뭐든지 내 맘대로 안 된다는 말은 우리는 뭐든지 내 맘대로 하고 있다는 뜻이고, 내 맘대로 하고 있는 가운데서 구태여 이쪽은 착한 일이고 이건 악한 일이고, 구분하는 그런 숙제는 안 해도 된다 이 말입니다. 주께서 알아서 다 해주니까. 주께서 알아서 다 해주니까 내가 구태여 이건 착한 일 한 것이고 이건 나쁜 일 한 것,  내가 그걸 구분하는 그런 수고로움, 그런 번거로움은 안 해도 돼요. 괜히 하면 할수록 위선만 더 늘어나죠.

또 그 다음에 14절 봅시다.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두루마기 나오죠? 에스겔에 나오는 이야깁니다. 에스겔이 뭘 먹었습니까? 두루마리, 하나님의 말씀을 먹었죠. 먹었다는 말은 말씀이 인격화 됐다는 말 아닙니까? 그 말씀을 먹고 난 뒤에 그 다음에 해야 될 일은 뭐냐 하면, 살지 못하는 자를 살지 못한다고 이야기해야 되고 살려야 될 자는 산다고 이야기하고. 왜, 그 당시는 많은 선지자들이 살릴 영혼은 죽이고 죽일 영혼은 살리기 때문에. 그야말로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아닌 건 아니다 이 말이죠. 이런 것도 자기 맘대로 못하죠.

그 다음에 진짜 중요한 거 생명나무입니다. 생명나무 설명하고 쉽시다. 처음에 생명나무와 선악과는 짝을 이뤘잖아요. 생명나무만 있는 것이 아니고 선악과도 같이 있었던 겁니다. 같이 있었는데 생명나무가 같이 있을 때는 생명나무가 뭔지를 몰랐죠. 그런데 떨어지면서 생명나무가 ‘아! 그런 나무구나.’ 비로소 선악과를 훼손했을 때 비로소 드러나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만지고 예수님을 뽀뽀하고 예수님하고 대화하고 예수님한테 점심 대접하고, 바리새인들이 점심 대접했거든요. 그러고도 예수님이 누군지 몰라요. 그런데 언제 예수님을 아느냐 하면 내가 선악과로 인해서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생명나무가 생명나무답게 우리한테 딱 등장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생명나무와 선악과 사이에 인간은 없는 거예요. 그저 생명나무는 선악과만 바라보고 선악과는 그냥 생명나무만 바라볼 뿐입니다. 문제는 아담이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는 선악과가 어디에 속했습니까? 그게 인간 속에 들어와 버렸다는 겁니다. 들어와 버렸으니까 인간은 인간이 아니고 겨우 생명나무를 훼손한 자로서 그냥 인간인 거죠.

결국 남은 것은 선악과와 생명나무 생명나무와 선악과 두 종류밖에 없어요. 이미 그 둘은 훼손됐기 때문에 공유할 수 없고 떨어져 있죠. 결국 천국이라는 것은 선악과 없는 곳이 천국 이예요. 그리고 선악과대로 벌 받는 곳은 어디고? 지옥이고. 지옥 가는 것은 선악의 기준에 의해서 지옥 가게 돼 있어요. 선은 없으니까. 악밖에 없으니까. 선악의 기준에 의하면 악밖에 없으니까. 생명나무는 선악을 따지지 않는 거예요. 따먹었는데 안 따먹은 걸로 쳐줘 버리는 거예요. 안 따먹은 걸로.

처음부터 생명나무는 먹게 돼 있는데 선악과 따먹었기 때문에 못 먹잖아요. 그러니까 이제는 천국 간 사람은 여기 요한계시록 22장 보세요.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는다 했죠? 맘대로 먹어라 이 말 이예요. 먹고 싶은 대로 먹어라 이 뜻이거든요. 처음에 창세기 3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생명나무를 먹을 수 있어요? 없어요? 못 먹는다 했죠. 왜냐 하면 너는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생명나무 오는 길을 막아놓은 거예요.

막아놨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지금 인간의 가치보다도 무슨 가치를 우선한다? 생명나무의 가치를 위해서 니가 있는 것이지, 너를 위해서 생명나무가 있는 게 아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인간들로 하여금 선악과 따먹게 하고 거기 저주하는 것도 다 누구 때문에? 생명나무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천국 간 사람은 어떤 사람? 자기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 아니고 생명나무 가치를 높이는 분이예요. 그래서 천국 가는 사람은 주님께서 불을 싸지르러 왔다 하는 것에 대해서 박수를 짝짝짝 ‘잘하셨습니다. 선악과 확 태워버려라. 어차피 천국에는 없으니까. 잘 하셨습니다. 죄 있는 곳에는 필히 저주가 임해야 되기 때문에.’ 필히 저주가 임해야 돼요.
10분 쉽시다.

 이한례 (IP:203.♡.41.16) 12-07-07 19:16 
가락교회120628-요한계시록22장8(수평과 수직)41강b-이 근호 목사

제 41강b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이 말씀을 주님이 안 해도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 말을 끄집어내는 이유가 뭐냐 하면, 그냥 ‘야, 생명나무다. 니 구원받아라.’ ‘감사합니다.’ 이러면 되는데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왜 이 걸 꼭 언급을 해야 되느냐, 지금 우리에게 주는 그것이 우리 개인을 위한 게 아니고 알파요 오메가요 처음이요 나중의 계획의 일부로서 우리가 포함돼서 들어오게 된다 이 말이죠.

이게 뭐냐 하면 수평의 문제를 수평이 아니고 반드시 수직에 의해서 해결되게 돼 있습니다. 수평이라 하는 것은 인간 대 인간이죠. 인간 문제는 누가 해결한다? 같은 인간이 도와준다. ‘이웃을 사랑하라. 도와줘라.‘ 인간 아니면 누가 도와주느냐 이렇게 되거든요. 사람이 더불어 이래야 살아가지 하는 이 모든 문제, 배가 아플 때는 의사가 있어야 되고 이가 아프면 치과도 있어야 되는 문제인데 이 문제를 근원적으로 봤을 때는 이웃에서 수평으로 봐버리면 도로 나에게로 돌아오는 경향이 있어요. ’저 사람 덕분에 난 살았다.‘ 이게 뭡니까? 결국 마지막 결론은 뭡니까? 나는 살았다가 되잖아요.

이건 내 수평적 세계에 내가 계속 갇혀있는 셈이 된다 이 말이죠. 뭔가 이불을 뚫고 나와야 될 텐데 수평적 사고를 해서 ‘야, 어떤 사람을 만나야 도움이 되고 어떤 사람을 만나면 내가 행복해 질까.’라는 불교적인 사고방식이나 노자 사상 이야기를 했는데 그게 다 수평적 사고잖아요. 결국은 뭡니까? 내가 어떻게 행복하고 내가 어떻게 잘 되고 전부 다 나에게 돌아오죠. 이렇게 되면 누가 알파요 오메가입니까? 내가 알파요 오메가요 내가 시작이요 끝이 되는 겁니다. 그게 니를 원래 창조한 본래 의미가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만들었으면 더 이상 인간은 자기에 대해서 권리 같은 주장, 행사는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 안 되는데도 하는 걸 어이합니까? 왜, 조상이 이미 따먹었기 때문에 이건 안 되는데, 본인이 우리가 ‘안 돼, 안 돼.’한다고 안 되는 게 아니에요. 죽을 때까지 계속 이 짓 할 거예요. 나는 나만 챙기고 내가 소중하고 드르륵 배를 두드리면서 내가 좋아서 그러지, 내가 하는데 다른 사람이 뱃살 빠지는 것은 없어요. 다 내 좋아라고 하는 걸 하면서 계속 갈 거예요.

하지만 우리는 뭐는 아니다? 알파요 오메가도 아니고 오메가도 아니고 알파도 아니고 시작도 아니고 끝도 아니라고 그렇게 돼야 문제가 해결 나는 겁니다. 그게 뭡니까? 수평이 아니고 뭐다? 수직에서 수직적으로 수평을 관리해야 되는 겁니다.

골로새서 3장에 보면 유명한 말씀 나오잖아요. 보기는 보아서 어디를 보라 합니까? 위를 보라. 지금 화물연대, 거기다가 건축 자재, 기름 값, 전쟁, 여러 가지 있는데 해결점이 뭡니까? 반 기문 유엔 사무총장? 수평에서 수평으로 대통령 바꾸기? 어떻게 됩니까? 수직적으로 내려오게 되면 어떻게 되겠어요? 수직적으로 만약에 지금 비가 안 온다. 지금 서산이나 충청도가 가물었다. 그들은 수평적 사고로 하기 때문에 ‘하나님이여, 비를 내려주소서.’ 이러겠죠. 그들이 바라는 그 수직적인 안목은 누구 좋아라고? 결국 어디로 돌아옵니까? 알파요 오메가가 누구예요? 서산에 살고 있는 자기가 알파요 오메가가 된다면 비 오게 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누구 좋아라고? 내 좋아라고 하는 거예요. 지금 경상도나 부산이나 경남에는 ‘가물었다 하니까 무슨 소린지 모르겠네.‘ 하거든요. 거기는 6월 달에 비가 계속 오고 있었어요. 부산지방이나 대구 지역으로 저쪽에 비가 왔다니까요. 그래서 가물었다고 하니까 실감이 안 나는 겁니다.

왜 하나님께서 같은 대한민국인데 이쪽은 땅이 마르게 하고 이쪽은 비가 촉촉하게 내리느냐 말입니다. 그 둘의 문제 해결은 둘 다 이  땅의 어떤 것도 알파요 오메가는 이 지상에는 더 이상 없다는 거예요. 주님께서 이 땅에 왔다가 가셨잖아요. 가셨으면 이 땅에는 알파요 오메가가 더 이상 없는 겁니다.

그러면 이 알파요 오메가란 이것을 묵시적으로 이야기하지 않고 역사적으로 이야기하면 어떻게 되는가, 그것은 바로 멜기세덱 이야기를 할 때 나타납니다. ~없고, ~없고  이렇게 없다고 이야기하죠.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도 없고, 시작은 있어요. 하늘나라에 있는데 이 수평적 안목에서는 없다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당신 차 있습니까?’ ‘없습니다.’ ‘당신 아내는? 없습니다.’ ‘당신 자식?’ ‘없습니다.’ ‘그럼 당신 몸은?’ ‘없습니다.’ 없다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게 멜기세덱이 하는 이야기예요. ‘오, 있네, 있으면서 사람이 거짓말을 해, 있네.’

이번에 수련회할 때 그 대목 다룰 거예요. 수련회 할 때는 집중해서 하기 때문에 난해하게 해버립니다. 뭐냐 하면 ‘있음’이라는 것이 숫자로 표시하면 ‘1’로 귀환되는 겁니다. 내가 여기 있다. 얼른 들으면 ‘아, 당신은 여기 있고 나는 여기 있다.‘로 들리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고 ’내가 여기 있는 것만 제일 중요합니다.’ 이런 뜻 이예요.

비가 왔다. ‘내가 있는 곳에 비가 와야 마땅해.‘ 항상 ’1‘을 이미 나만 있고 다른 사람은 있으나마나한 걸로 보는 의미가 포함된 있음을 나에게만 사용하는 거예요. 어려워라. ’참, 날씨 좋다.‘는 말은 나한테 날씨 좋으면 날씨 좋은 거야, 까불지 마. 가만히 있어. 나한테 좋은 거야.’ ‘오늘 참 더워.’ 이 말은 ‘남이야 시원해도 내가 더우면 더운 거야.‘ 요러한 내용을 품고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 귀환하는 식으로 단어를 사용하면서 평생 살고 있습니다.

그것에 역풍이 불죠. 내가 뭐다? “알파요 오메가요“ 니 자리는 거기에 없다는 거예요. 너는 없는 존재예요. 아까 했죠? 이 세상은 없음, 없음이죠. 하늘나라에 계셨던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 세상을 다녀가시면서 있음 존재가 이 땅에서는 없음 존재로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없는 존재가 되는 사람만이 주님과 함께 영원히 있을 사람이 되는데 그때는 내가 있는 게 아니에요. 그때는 주님만 있으면 됩니다.

이게 천국이 어려운 점인데요. 천국에는 시집도 아니 가고 장가도 아니 가죠. 그러면 화장품은? 그러면 여자 화장품은 어디에 필요합니까? 화장품이라는 것이 수평적 사고에서 필요했던 마스카라 이런 거, 화장품이 왜 있는지 알아요? 명품 가방이 왜 있는지 알아요? 누가 알파요 오메가이기 때문에? 이 수평에서는 누가 있음이고? 내가 있음이고 내가 있다는 것은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알파요 오메가로 있는 거거든요. 내가 숫자로 치면 뭐로 있다? 유일하게 ‘1’이거든요. 이걸 선악과 따먹을 때 뭐가 됩니까? 이게 나는 뭐가 된다? 신이다. 유일하게 나만이 신처럼 대우 받아야 할 합당한 나예요. 이건 이유를 묻지 말아요. 무조건! 무조건! 무조건 그래요.

제가 수요일 날 설교한 내용을 여기서 다시 하게 되면, 사울이 처음에 왕 될 때 왕은 숫자로 치면 1입니다. 왕이 2되는 것 봤습니까? 왕이 2되면 말이 안 되죠. 왕이 되면 무조건 1이예요. 사울이 처음에 왕 될 때 얼마나 겸손했습니까? 자기는 ‘안 하겠다’ 했습니다. 안하겠다는 것을 하나님이 제비 뽑아서 억지로 행구 속에 숨은 걸 끄집어내서 왕을 시켜줬다 이 말이죠. 그래서 사울은 왕을 내가 왕이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왕 되게 해서 나(사울)는 말려든 거죠. 그러면 알파요 오메가는 누굽니까? 하나님이고 왕 있음은 결국 누가 왕 있음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왕 있음이 되고 나는 그 앞에 왕 있음 앞에서 나는 왕 없음이 되는 거예요.

왕은 내가 왕이 아니어야 주님이 왕이 되니까, 사무엘상 8장에 나오는 이야깁니다. 너희들이 왕을 구함은 나의 왕 됨을 거부했기 때문에 그렇다고 이야기하거든요. 그런 말씀도 설명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이야기예요. 그래 놓고 왕은 주고. 앞뒤가 안 맞잖아요. 그렇던 사울이 본인이 자기는 믿음 좋고 금식하고 기도하니까 도와주니까 믿음 좋을 줄 알았습니다. 언제까지 그걸 안 들켰느냐 하면 소년 다윗이 나올 때까지. 더 나아가서 골리앗이라는 그 적군의 큰 장수가 자기 앞에 등장될 때까지는 자기가 왕으로서 제대로 되는 줄 알았어요. 어느 날 하나님께서 골리앗을 보내버리죠. 골리앗 입에서 뭐라 합니까? ‘야, 할례 받은 너희들, 나한테 붙자. 야, 사울 나와. 붙자.’할 때 사울은 골리앗이 감당이 안 된다는 사실을 알죠. 의도적으로 하나님이 그렇게 한 거예요.

처음부터 이스라엘 운영은 사울이 감당할 자격의 수준이 아니었던 겁니다. 그런데 어느 날 왕 자리의 권력의 자리를 오래하다 보니까 내가 아니면 감당할 사람이 없다고 여기고 또 나는 마땅히 감당할 사람이라고 착각한 거예요. 그러니까 거기에 감당 못할 골리앗을 줌으로 말미암아 사울로 하여금 자기 한계를 드러냈는데, 그때 소년 다윗이 등장했는데 사울이 불러서 ‘갑옷 줄까? 창줄까?’ 하니까 다 거절하죠. ‘얘가 아무것도 안 걸치고 아무것도 안 갖고 어쩌려고 그러느냐?’ 돌멩이 하나 가지고 골리앗 죽일 때 그때부터 사울은 누굴 미워하게 됩니까? 다윗을 미워하게 됩니다. 뭐냐 하면 인간은 예수님을 미워하고 싫어할 수밖에 없어요. 왜, 나만 알파요 오메가이어야 한다는 속성을 부모로부터 물려받았는데 왜 내가 알파요 오메가도 아니고 신이 아닌 것을 왜 엉뚱한 소년 다윗이 등장해서 왜 이걸 까발리느냐 말이죠.

더 나아가서 왜 하나님은 골리앗 같은 내가 감당 못할 것을 왜 보내줬느냐 말입니다. 우리가 사업하면서 우리가 이 세상 살면서 감당 못할 일이 올 때 얼마나 자기가 초라해지던가요? ‘이럴 것 같으면 차라리 나를 죽이지. 뭐하려고 나를 지금까지 살게 만드느냐, 차라리 죽이고 말지.’ 그런데 그게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한번 감당했다 싶으면 그 다음에는 더 센 게 와요. 파도가 지나가면 더 센 파도가 와요. 휴, 한숨 돌리면 더 센 게 올 수가 있어요. 계속해서 우리가 느끼는 건 뭡니까? 우리는 어느새 감당했음 그 다음부터 내가 감당한 내가 알파요 오메가 돼 있어요. 분명히 우리는 겸손하고 기도하고 신앙 좋다 하는데 막상 사태가 벌어지면 그때 졸지에 우리는 왕이 돼 있고 신이 돼 있고 내가 바로 나의 전부가 돼 있고 내가 이 세상의 현실의 중앙에 서 있는 거예요. 그 현실에서 하나님은 빠져버리고 내가 현실의 주인공처럼 서 있는 것을 본다 이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통해서 사울의 숨어있던 그 본성을 까발리죠.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와서 까발린 게 뭘까요? 우리가 흔히 아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서 모든 사람이 죄 졌다 했죠? 그 죄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5장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니가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러운 것이 아니고,(바리새인들이 음식 먹을 때 손 씻고 먹는) 니가 속으로 들어가는 것에 신경 쓰나본데 니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새삼스럽게 너를 더럽게 만드는 것이 아니고 니 속에서 나오는 것들이 이미 니가 썩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들만 쏟아져 나온다.’는 뜻 이예요.

그러니까 지금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그것도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들을 앞뒤 안 가리고 마구잡이로 그들을 공격해대니까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처해서 그들에게 죽임을 당하도록 어떤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신 느낌이 들어요.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러운 것이 아니고 니 속에서 나오는 것이 더럽다.’ 할 때 나오는 그 용어들 있잖아요.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어 버려지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마태복음 15장 17절~20절)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 이것과 요한계시록 22장 15절 한번 봅시다.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밖에 있으리라” 이렇게 돼 있죠? 예수님의 계시나 예수님의 계시를 받은 사도요한이나 또 오늘날 성도가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우리 속에 딱 보내신 곳은 바로 이미 개들과 이미 술객들과 행음자들이 득실거리는 그 속에 우리를 보낸 거예요.

그럴 때 우리는 그들을 충분히 이해가 되고 납득이 되는 거예요. 요점을 중요하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우리가 불신자 속에 또는 하나님의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들 속에 들어갔을 때에 ‘난 이해가 안 된다.’라는 말을 하는 게 아니고 저들이 사는 것과 내가 평소에 사는 것하고 뭐가 차이가 나는데? 똑같은 거예요. 속이 상해서 술 한 잔 먹었다. 우리고 속이 상하면 꼭 술을 한잔 안 먹고 싶어도 마음속으로(술을 안 드시겠지만) ‘야, 진짜 술 한 잔 먹고 푹  잤으면 좋겠다. 이럴 때는 먹어야 돼.’라는 마음이 들 때가 있다 이 말이죠. 손으로 치면서 ‘아, 참 내가 예수만 안 믿으면 무슨 짓.... 참는다.’

우리가 행동이라는 게 마음까지 포함해서 행동이라 합니다. 성경에서. 꿈속에 나오는 행동도 마음에서 나오는 거라 그것도 행동에 속해요. 제가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우리 성도를 이 땅에 보낸 것을 그들이 일부 이해가 된다가 아니라 충분하게 이해가 돼요. 그들이 왜 그런 짓을 하고 왜 점쟁이 집에 찾아가고 왜 사주팔자를 보는지 충분하게 이해가 됩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그들이 지옥 간다는 것에 대해서 주님한테 반발하고 싶을 때가 있어요. ‘에게, 조 정도 죄는 눈 한번 질금 감아 줄 수도 있는 문젠데. 아니 강도가 강도짓을 하는 그런 것은 예수님도 알 텐데, 얼마나 어려웠으면 강도짓을 했을까.’하고 눈 한번 질금 감아 줄 수가 있는데 용납이 안 되거든요.

어떤 강도든 어떤 창녀든 용납이 안 됩니다. 예수님 피 때문에 구원받거든요. 예수님 피 때문에 구원받지, 내 행동을 용납해서 구원받는 법은 지금껏 없습니다. 지금까지 그런 사람은 한 사람도 천국에 못 들어가요. 예수님의 피로서 구원받지, 주께서 용납해서 구원받는 법은 없습니다. ‘그래, 그래 니 행동 그대로 해도 천국에 용납해 줄게.’ 이런 법은 없습니다.

왜 이런 말을 하느냐 하면 바로 여기서 ‘....자마다 성 밖에 있으리라“ 성 밖이라 할 때 성은 성전이죠. 제가 지난주일 오후 설교 때 요나할 때 잠간 언급을 했습니다. 다시 한 번 해보겠습니다. 성전의 의미는 고정적이다. 고정적이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알파요 오메가 모든 시작과 끝이 한 구멍으로만 전부 다 확산되고 한 구멍으로 전부 다 소급된다는 것을 확실하게 결정적으로 보여줬다는 겁니다. 비가 오지 않거든 이 성전을 향해서 기도하면 비 온다. 뭔 뜻입니까? 니가 비오지 않는 이유가 성전에 의하면 죄가 되기 때문에 비가 오지 않는다. 그래서 니 죄를 고백하고 ’주여, 이러 이런 죄 잘못됐습니다.‘ 하게 되면 다시 성전을 통해서 다시 비가 오게 된다. 이런 뜻이거든요. 열왕기상 8장에 나오는 이야깁니다.

니가 만약 이스라엘이 적군에게 포로 잡혀 가서 깨닫게 되면 이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라. 그러면 성전을 통하는 은혜가 너로 하여금 다시 돌아온다. 전부 다 뭡니까? 성전은 뭐다? 저주와 축복의 통로가 하나로 확정돼 있다. 고정돼 있다는 거예요. 이동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다른 매체가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 요나 2장에서 요나가 물에 빠졌을 때 다시 이야기할게요. 어려워서. 여기 배를 타고 가는데 이 배 탄 사람의 안목에서 물속에 빠진 요나는 배 탄 사람이 볼 때 어떻게 됩니까? 바이 바이죠. ‘아이쿠, 심청아 안 됐다.’ 바이, 바이 보내버렸죠? 사라진 거죠? 이 말은 이 사람들은 이 세계에 들어올 수 있다? 없다? 없는 거예요. 그런데 요나가 빠지면서 큰 물고기가 요나를 이렇게 삼켰잖아요. 그럼 이 물고기 안에 요나가 있었잖아요. 그러면 이 사람들 보기에 요나는 이미 죽은 거예요. 십자가 안에 있을 때 세상 사람들 보기에 십자가 안에 있는 사람은 이미 죽은 사람이고, 십자가 안에서 보게 되면 이 사람들은 이 세계에 참여를 못해요. 물고기 속에 못 들어온다고요. ‘안 됐다 쯧쯧쯧, 아이, 인생 저리 끝나네. 자기가 믿는 신에게 잘해야지. 벌 받았지. 쯧쯧쯧’ 하는데 오히려 누가 불쌍한 사람 이예요? 이 사람들이 여호와로부터 벌 받은 불쌍한 사람들이예요. 왜, 이 사람들은 물고기 속에 못 들어온 거예요.

그런데 더 중요한 상황은 물고기 뱃속에 있을 때 뭐가 보이느냐? 비로소 성전이 보이는 겁니다. 사도요한이 언제 성전을 봤습니까? 밧모 섬에서 죽음을 기다릴 때 비로소 하늘이 열리고 성전을 봤잖아요. 성전을 봤다는 것은 뭘 봤다? 고정적이고 확정된 축복의 통로를 봤다는 겁니다. 더 이상 변경되지 아니하는,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말미암아 어떤 죄도 용서받는다는 그 변경되지 아니하는 그게 어디서 보이느냐? 내가 죽을 때, 나는 죽어 마땅함을 알 때, 더 정확한 표현으로서는 ‘나는 이렇게 물에 죽어도 마땅합니다.’라는 것을 깨달은 그 순간 비로소 십자가가 보인다니까요. 강도처럼. 한쪽 강도는 ‘웃긴다.‘ 한다니까요. ’살려 달라.‘ 안 합니까? 수평에서 수평이라. 수평에서 수평인데 예수님은 한쪽 강도를 데리고 살려줬죠. 수평에서 수직으로 가버린 거예요. 다른 사람은 낙원에 못 쫓아와요. 다른 사람은 예수 시체나 치우지, ’아이쿠, 이 양반, 훌륭한 양반.‘ 하면서 시체나 치우지, 그 강도가 간 그 장소에 합류가 되지를 못하는 겁니다.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을 때(대전 강의에서 그런 얘기 했는데) 사람들이 스데반 옷에다 집어던지는 거와 똑같다. 껍데기, 옷에다 던지고 알맹이는 빠져서 어디 계시죠? 하나님 우편에 계시죠. 하나님 우편에 계시다는 것을 대전 강의에서 이렇게 설명했잖아요.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까 이렇게 갈라진 거예요. 신세계 앞에 있는 중앙우체국 본사처럼. 이렇게 갈라졌다 이 말이죠.


오른편에서 아버지와 아들만이 주고받는 거예요. 이쪽에서는 안 보이는 거예요.

그러면 구원받은 사람은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어디에 올라가 있습니까? 이렇게 오른편에 합류가 되면 비로소 아버지를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자리에 들어가는 겁니다. 이게 기존의 신은 없어요. 이게 기존의 모든 민족의 신은 이렇게 갈라진 신이 없습니다. 시편 110편에 나오는 이런 말씀에 의해서 이런 오른편이라는 게 여호와에게만 갈라진 신이 있는 겁니다. 이걸 베드로가 사도행전에서 설교하죠.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시110편 1절)

하나님을 믿어라. 아닙니다. 하나님을 섬겨라가 아니고 성령에 의하면 바로 우리가 볼 수 없는 자리에서 보도록 예수님께서 주의 오른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거기서 앉아 계셔서, 앉아 계셔야만 주로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게 되면 주께서 머리가 되고 우리는 지체가 되어서 같이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겁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종이지만 아들이라고 양자의 칭함을 받는 겁니다. 아들이 되면 예수님과 예수님이 누리는 모든 것을 함께 그 기업을 함께 받아서 예수님이 받은 모든 영광을 우리도 같이 받는 그곳, 그곳이 천국입니다.

그래서 천국 가면 어느 것 하나 우리가 한 게 아무것도 없어요. 홀로 누가 했습니까? 예수님이 홀로 하셔서 주어진 것들 속에 우리는 노닐면 되는 거예요. 맘껏 주님 앞에 찬양하면서 노닐면 되는 거예요. 그걸 수평적인 정경으로 묘사한 것이 이사야 11장에 보면 나오죠.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이사야 11장 6절-9절)

젖 먹이 아이가 뱀 굴에 집어넣고 잔디밭에서 놀고 이리와 어린양이 함께 거하고...., 왜 그러느냐 하면 본인의 성격이 사라졌으니까, 본래 나만의 성격이 사라졌으니까 전부 다 주님의 성격에 덧입혀진 것만 있으니까.

처음에 인간을 창조할 때 분명히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했었거든요. 선악과 따먹기 전에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한 거예요. 그때는 너, 나가 없었어요. 다만 ‘우리’만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담이 처음에 하와를 만들었을 때 한 고백이 뭡니까? 나에서 뭐로 느꼈다? 나로 살다가 뭐로 삽니까? ‘우리’라는 걸 발견한 거예요. 그런데 나중에 너, 나로 갈라진 거예요. 선악과 따먹은 후에 ‘저 사람 때문에, 저 양반 때문에, 저 여자 때문에 따먹었다.’ 갑자기 너, 나로 갈라졌죠. 지금도 계속 갈라지고 있어요.

사랑한다는 것은 내 것을 얻는 게 사랑이 아닙니다. 그리고 상대방에게서 얻는 것도 사랑이 아니고, 사랑은 너, 나가 사라지고 제 3의 우리가 자꾸 보이는 게 그게 사랑 이예요. 그걸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몇 번 맛본 적이 있어요. 어린 시절 때에 아이가 부모를 대할 때 우리로 대합니다. 엄마, 아빠를 우리로 대합니다. 아이는 ‘나’라는 말을 배우기 전에 아빠, 엄마부터 먼저 배워요. 이 말은 뭐냐, 자기 존재를 알기 전에 관계를 먼저 알고 그 다음에 더 못돼 지면 ‘나는?’ 하고 나가 나오죠. 특히 동생이 생기거나 할 때, ‘동생만 예뻐하고 나는 안 예뻐하고.’ 하고 갑자기 나가 등장해요. 그러면 엄마 말이 ‘우리는 다 우리다.’ 하거든요. 이미 틀어져서 우리는 깨져버렸어요. 왜 아빠, 엄마, 나, 셋이 우리가 돼야 되는데, 여기 왜 제 3자가 끼어드느냐는 거죠.

그건 왜 끼어드느냐 하면 창세기 4장을 이루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가인과 아벨이 싸운 그것이 매일 가정이 싸우게 돼 있어요. 누가 아버지의 간택을 받느냐, 누가 엄마의 사랑을 받느냐, 그래서 애가 둘이 있다 할 때는 어떻게 하느냐, 두 개의 우리가 생겨서 엄마는 딸 편, 아빠는 아들 편, 이렇게 또 갈라지는 거예요. 어느 자식이든지 혼자서 우리라 하지 않습니다. 꼭 만만하게 자기 편 될 사람을 뽑아서 그렇게 해요. 한 가정도 그런데 회사도 얼마나 그렇겠습니까? 니는 어느 파고, 모든 조직에는 그것 때문에 회사가 어려운 게 그 인간관계 그거 아닙니까? 이건 파가 없이 다 우린데 그렇게 교육하잖아요. 그렇게 열심히 교육해도 결국 나중에 보면 누구하고 친하고 누구하고 친하고 누구하고 안 친하고, 왕따 당해서 삐져가 있고.

사랑이라 하는 것은 뭐가 없다? 나를 생각하지 않는 게 사랑 이예요. 그래서 처음에는 남자들이 여자한테 할 때는 진짜 간이라도 다 빼줄 것처럼 해서 결혼을 하잖아요. ‘당신이 어떤 인간이라도 나는 묻지 않겠다. 당신이 나와 결혼해 준다면 나는 당신에게 모든 것을 할 용의가 돼 있다.’ 구라가 아닙니다. 진짜로 사랑할 때는 그렇게 해요. 그런데 나중에 왜 그렇게 안 해주느냐 하면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이때고.’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술객들과 간음 자들과 살인자들 속에 우리를 보내는 것은 주님의 사랑, 우리가 알파요 오메가가 아니고 알파요 오메가 따로 있고 그분에 의해서 우리가 여기서 빠져나왔다는 거예요. 뭐로? 사랑으로, 긍휼로, 어린양의 피로 빠져나온 거예요. 요한계시록에서 어린양의 피로 말미암아 빠져나온 거예요. 따라서 우리가 있을 장소는 고상한 사람끼리 있으면 안 되고 우리 있을 장소는 세상 한가운데 있어야 되는 거예요. 그리고 그들이 하는 행동이 누구든지 가만히 그 사람의 사정을 들어보면 다 이해가 돼요. 다 어쩔 수 없이 하는 거예요. 남을 술 먹고 패는 것도 다 이유가 있어요. 다 들어보면 ‘나라도 패겠다.‘ 한다니까요. ’당신 왜 마누라 패노?‘ ’내 얘기 들어봐라. 안 패게 됐나.‘ ’내가 회사 가고 나면 만날 TV 쇼핑해서 쓰지도 않고 창고에 있고.‘ ’어이쿠, 나라고 줘 팼겠다.‘ 이래요

그래서 남의 사정 다 들어보면 더 맞고 우리가 다 이해될 이야기예요. 그래서 이 사람들이 나쁜 짓해서 구원 못 받는 것이 아니고 간택을 못 받아서 구원을 못 받는 거예요. 택함을 받지 못해서. 이미 아신 자가 아니어서 구원을 못 받은 것이고 생명책에 명단이 없기 때문에 못 받은 것이고 사랑하기로 작정이 안 됐기 때문에 구원을 못 받은 것이고 버림 받기로 작정된 사람이기 때문에 버림받은 겁니다. 그리고 그만한 권한은 알파요 오메가이신 그분에게만 있기 때문에 천국은 자기 공로를 내세울 수가 없는 겁니다.

제가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교회서도 설교하면서 이야기했어요. 우리교회 교인들 보고 ‘저의 관심사는 여기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여러분들이 천국 가겠느냐. 그게 관심입니다. 천국 가려면 천국 가는 기준과 그 원칙이 있는데 그것에 관심 있느냐‘ 하고 그것만 묻겠습니다. 하고 설교 시작한 적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선택받은 사랑‘ 이예요.

그런데 천국 못 갈 사람은 꼭 자기 행함을 전면에 앞장세워요. 심지어 나쁜 짓해도 마찬가지예요. 간음 자  행음 자 다 나름대로 이유 있고 변명 다 있어요. 어쩔 수 없었다는 거예요. 충분히 이해되죠. 하지만 그걸 묻는 게 아니고 ‘선택받았습니까?’ 그걸 묻는 거예요. ‘나 같은 죄인이 구원받았습니다.’하고 나와야 되는데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살고 교회도 20년 다녔습니다.’ 이렇게 나오니까 어떻게 그 사람을 구원받았다고 할 수가 있습니까? 십자가 이야기하고 복음 이야기하고 언약 이야기하고, 끝까지 들어봐야 돼요. ‘예, 예, 그래서, 그래서?’ ‘그러니까 이걸 행해야 되죠.’ ‘그건 땡! 떨어졌어요.’ 제 4단계에서 떨어졌습니다. 상금도 못 타고. 자기 의로 행하고.

성경에 보면 이런 게 있어요. 주께서 내 안에 행한 것으로 구원받는다 했거든요. 이게 요한복음 3장 20절에 나옵니다. 한번 볼까요? 오랜만에 한번 요한복음 봅시다. “악을 미워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그 다음에 제일 중요해요. 그 다음에 뭡니까? 나타내려 함이라. 우리는 하나의 도화지고 하나의 기계고 그런 겁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친히 우리를 구원했다는 것을 나타내는 행위들만 나오게 한다 말입니다. 그러면 무슨 행위가 쑥 들어가야 합니까? 천국에서 적합하지 않은 행위는 우리는 만날 정죄 당해야 되죠. 만날 죄로 규정당해야 되죠. 천국에서 그런 짓하면 안 된다는 것이 나오기는 나오지만 그건 계속 제거돼야 되겠죠. 그게 뭐냐, 내가 행했다는 것. 내가 행했다.

여기 행음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 또 재밌는 것은 술객들과 행음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 하는 자‘ 어느 죄가 제일 나쁩니까? 순서적으로 제일 죄가 나쁜 순서로 일렬로 맞추면, 객관식 문제로 수능에 나올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게 순서가 되겠습니까? 안 되겠어요? 이게 안 되죠. 똥 묻는 개가 겨 묻는 개 나무랄 수가 없죠. 지옥 갈 때 좀 죄 적게 진 사람은 온도가 따뜻한 데 찜질방에 가고, 지옥 가더라도 죄 많이 지은 사람은 펄펄 끓는 데 가고 그런 것 없죠? 똑같아요.

사실은요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 행음 자들, 이게 따로 구분 된 게 아니고 행음한 자들이 살인자고 살인한 자들이 우상숭배자고 우상숭배자들이 거짓말 하는 자고, 그게 다 아담이고 다 똑같은 자들 이예요. 우리도 이랬던 사람들이고 다 그래요. 우리가 개들이고 술객들이고, 술객이란 말은 하나님의 기적을 조작해 내는 사람, 행음 자들이란 세상을 좋아하는 사람, 세상 것에 대해서 그걸로 행복을 찾는 사람, 그러니까 사마리아 여인 같은 갈증을 느끼는 사람, 남자 8명해도 마찬가지예요. 9, 10명을 해도 마찬가지고 선을 100번 봐도 마찬가지고 똑같아요. 그런데 한번 보고 딱 조져야지 여러 번 보고..., 살인자라 하는 것은 나의 가치를 위해서 남이 존재한다고 여기는 사람들, 마음속으로 다 살인자입니다. 부부 사이도 마찬가지고 ‘니는 말이야. 나 때문에 있는 거야.’ 살입자입니다. 나는 죽어도 아깝지만 니는 죽어도 돼, 죽어도 그만이야.‘ 그 뜻이거든요. ’나는 이빨 아파도 안 되지만 니는 아파도 돼.‘

그 다음에 우상 숭배자들, 언약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하는 말씀이 없는 신, 자기의 확장이죠. 그 다음에 거짓말을 지어 내는 자마다. 이것은 자기 의로움, 하나님은 우리보고 죄인이라 하는데 자기는 자기 의를 뭐라 합니까? 자기는 의라 하죠. 거짓말 하는 자. 이런 사람은 어디 밖에 있다? 성 밖에 있다. 아! 재밌는 이야깁니다.

성 밖에서는 너희들이 맘대로 놀아라. 서로 멱살 쥐지 말고 ‘어디서 감히,  어디서 간음 한 놈, 어디서 살인 한 놈.’ 싸워도 똑같다 이 말이죠. 어디서? 성 밖에 있는 입장에서는 서로 똑같다 이 말이죠.

결국은 뭐가 중요하다? 역시 장소가 중요하다. 개그 콘서트에 보면 ‘생활의 발견’에 보면 남자와 여자 신보라가 만나자마자 하는 소리가 ‘야, 이 식당 맛있다.’ 해놓고 ‘우리 헤어지자.’ 하거든요. 그러면 ‘이런 족발 집에서 헤어지자는 말이 나와?’하면 ‘장소가 문제야?’ 하거든요. 원래 장소가 문제예요. 터전이 장소가 어디냐가 중요합니다. 홍수가 날 때 하나는 모래 위에 지은 집이냐, 아니면 반석 위에 지은 집이냐, 뭐가 중요합니까? 장소가 중요한 거예요. 생명의 샘이 나오는 장소냐, 아니면 니 노력과 니 잘남이 나오는 장소냐, 그게 중요하다 이 말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하늘에서 올 때부터 우리 껍데기를 보는 게 아니고 우리가 딛고 있는 장소의 본질과 속성을 지적하기 위해서 오신 거예요. 그 장소가 어느 장소냐, 주께서 죽으신 그 장소가 바로 우리가 저주 받을, 주님이 아버지께 저주받은 장소고, 그 장소가 우리와 함께 딛고 있는 그 장소예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게 저주받은 장소예요. 그러니 우리는 이 장소를 복음에 의해서 항상 복음적으로 우리가 판단하고 복음적으로 볼 수 있는 안목을 유지해야 됩니다. ‘나는 저주받아야 될 인간인데 하나님의 은혜로 이만큼 살아왔다.’ 늘 이렇게 자기의 바탕을 놓치면 안 돼요. 자기의 바탕을 놓쳐 버리면 우리는 바로 술객들과 행음 자 살인 자들을 이해하게 돼요. 사람이 남을 죽여 놓고 다 이유 없는 사람 없잖아요.

16절 봅시다.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거 하게 하였노라” 여기 하나님의 천사를 누구를 위해서 보냅니까? 교회만 보냈죠. 그러면 예배당 지어놓으면 천사 옵니까? 안 옵니까? 안 오죠. 거기에 성경은 반대로 이야기합니다. 천사가 온 사람을 교회로 보는 겁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위에가 원인이고 결과가 아래이기 때문에. 위에서 먼저 언급을 하면, 천사 오라고 해서 오는 게 아니에요. 천사가 온 쪽이 교회가 되는 겁니다. 이게 사도행전에 나옵니다.

사도행전에 베드로가 옥에 갇혔을 때에 누가 왔죠? 천사가 왔죠. 바울과 실라가 제 2차 전도할 때 빌립보인가 갇혔을 때 누가 왔습니까? 천사가 왔잖아요. 그리고 사도바울이 로마로 끌려갈 때 배에 풍랑이 일 때 천사가 왔잖아요. 천사가 오면 그게 교회가 되는 거예요. 그걸 묘사할 때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런다고요. 그런데 이 말을 땅에서 수평적으로 보면 얼마나 오해될 소지가 반대로 오해할 소지가 다분히 있잖아요.

그래서 허락된 자만 알아듣고 그 외의 사람은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하게 하는 겁니다. ‘그래, 우린 교회야, 천사 오게 돼 있어.’ 자꾸 먼저 자기부터 챙기고 자기가 알파요 오메가라 여기고 시작하는 거예요.

한 번 물어 봅시다. 천사가 오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납니까? 천사가 오게 되면 말씀도 끌고 오니까 천사가 이렇게 날개를 달고 오게 되면 뒤에 뭐를 끌고 옵니까? 말씀 구조를 끌로 오죠. 말씀 덩어리를 끌고 오죠. 그럼 천사가 왔다는 것은 뭘 새롭게 느낀다? ‘아하, 이 말씀이 이 말씀이구나. 야, 말씀의 세계 속에 우리가 이미 놓여 있구나.’ 우리가 말씀의 숲, 말씀의 밀림, 말씀의 수풀 속에 있는데 왜 하루 종일 말씀은 안 보이고 눈에 보이는 사람만, 수평적인 사람만 보이는지, 그런데 어떤 차 사고가 난다든지 깜짝 어떤 일이 나든지, 지갑을 잃어버렸다든지, 중요한 서류를 잃어버렸을 때,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게 되면 그 순간 우리는 뭘 느끼느냐, ‘야, 잃었다가 얻었으니 기뻐하자.’ 이게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나 드라크마 이야기나 잃어버린 양을 찾았을 때 기쁨이 이 기쁨이라. 모든 일과를 통해서 말씀이 다시 새롭게 들려지게 하는 현상을 보게 되는 겁니다.

베드로가 옥에 갇혔을 때 천사가 와서 옥문을 열어줬잖아요. 그런 우리 같으면 이랬을 겁니다. 장난삼아 베드로가 교도소마다 다 방문해 봅니다. 우리 같으면. 참 성경 보면 희한한 게, 오병이어 행했잖아요. 우리 같으면 일부러 한번 둘러보는 거예요. 그리고 물고기 아가리를 벌리니까 동전 나왔잖아요. 우리 같으면 낚시하러 가서 고기 아가리를 벌려볼 겁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처음에 부름 받았을 때 어부였을 때 그물을 오른 쪽에 던지니까 배가 가라앉을 정도로 고기가 많이 잡혔잖아요. 우리 같으면 장난삼아 어떻게 했겠습니까? 배 타고 노 져 가서 한번 해 볼 거다 말이죠. 혹시 잡을까 싶어서. 그런데 두 번 다시 그런 짓을 못하는 이유는 그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나는 순간 자신이 얼마나 죄인인 걸 깨달았기 때문에 함부로 기적 질을 안 해요. 장난질을 안 할 거다 말이죠.

그런데 성령을 안 받은 은사 받은 인간들은 이거는 병고치고 이런 걸 하나의 영업으로 삼아요. 남대문 시장에 목사가 와서 이름을 적어가면서 기도해주고 이름 풀이해주면서 그런 사기 치는, 자기가 옛날에 배운 그것을 돈으로 바꾸기 위해서 그 짓하는 거예요. 신학교 나와서 신학교 팔아서 돈벌이하는 거와 마찬가지예요.

성령이 왔다는 것은 성경 말씀대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그리고 빚진 마음으로, 이거는 부득불, 유명한 말, 부득불, 어쩔 수 없이 한다는 마음 이예요. 이건 하나님이 시킨다는 그 마음으로 서게 되죠.

그리고 이거 하나 하고 마치겠습니다. 16절 보게 되면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별이라”이렇게 돼 있죠. 여기 “ 나 예수는” 해놓고 뒤에 (   )에 새벽별 돼 있고 그 다음에 다윗의 뿌리라 했죠. 이걸 왜 이 안에 집어넣느냐 하면 그 전에 요한계시록 1장, 2장, 3장에서 그 전에 교회한테 사자를 통해서 편지를 보낼 때에 그때에 새벽별, 다윗의 뿌리란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그 사용할 때는 어떻게 사용했느냐 하면 이거면 축복이고 이거 아니면 저주, 축복과 저주를 가늠하는 거죠.

그래서 새벽별, 다윗의 뿌리, 이 두 개를 합치면 이게 뭐냐 하면 심판 주= 구원 주다. 심판 주고 구원 주인데 이건 우리가 알거든요. 그런데 새벽별, 다윗의 뿌리, 이 말을 왜, 심판 주라 하면 되는데 왜 이 말을 하느냐, 심판과 구원에 관하여 이미 내가 너희들에게 언약이란 원칙을 준 적이 있는 그분이 언약대로 심판을 한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새벽별이나 다윗의 뿌리라 하는 것은 다 두 자로 줄이면 우리말로 줄이면 뭐가 되겠습니까? 언약, 이미 이렇게 심판하고 이렇게 구원한다는 언약을 준 적이 있다는 겁니다. 이건 구원을 위한 언약이 아니고 심판할 때도 뭐로 심판한다? 언약으로 심판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새벽별은 뭐냐, 새벽별이 온다는 것은 모든 인간 세상은 어둡다는 겁니다. 달리 말해서 ‘니가 본인이 어두운 걸 아느냐?’ 알면 교회고 모르면 그건 지옥 가고 그렇다 말이죠. 이게 하나님의 약속대로 하면. 예수님 자신이 언약 적 표현으로 왔기 때문에 성도는 언약 적 표현에 그 세계 속에 우리가 거기에 들어가야 돼요. 젖어야 돼요.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약속인 것을 우리가 수용해 줘야 돼요. 수용해 줄 때 ‘아, 요건 요 말씀, 아 요건 요 말씀.’ 말씀의 풀장에 우리가 매일같이 놓여 있는 겁니다.

그게 현실이고 우리가 그걸 인정할 때만이 아니고 인정 하나 안 하나 관계없이 우리는 현재 언약 속에 놓여있는 거예요. 심판과 구원, 구원과 심판의 그 구조 속에 이미 우리는 놓여서 사는 거예요. 그런데 불신자들은 그게 안 보이잖아요. 불신자들은 사람만 보이죠. 언약이 안 보이고 사람만 보이니까 진짜 지 하고 싶은 대로 하니까 불의한 자는 그대로 불의하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롭게 되고 마지막에는 결국 분류될 것이라고 그 이야기를 계속 하고 있는 겁니다.

17절 이거하고 마치겠습니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도다” ‘값없이’라 하는 이것은 어디 나오느냐 하면 고엘 사상입니다. 고엘 하는 것은 히브리말인데 뭔 뜻이냐, 우리말로 번역하면 후견인, 구속 자, 이런 뜻 이예요. 이건 무슨 말이냐 하면 어떤 본인이 노예가 됐을 때, 어떤 사람이 빚을 졌을 때에 친척 가운데서 후견인 노릇을 해서 이 사람이 진 빚을 다른 사람이 대신 갚아 줘 버리면 이 사람이 자기의 원래 자기 것을 되찾을 수가 있어요. 그래서 후견자, 구속 자 특징은 뭐냐, 되찾음, 하나님의 주신 것이 악마가 빼앗고 사람이 빼앗을지라도 하나님이 나서서 그것을 다시 너에게 되찾아주게 하는 거예요.

그러려면 우리는 처음부터 우리 것이 있으면 안 되고 처음부터 우리 것은 누구 것이다? 처음부터 몽땅 하나님의 것이었다는 거예요. 하나님 자신의 것을 하나님 자신의 값을 쳐서 하나님 자신에게 돌아오기 때문에 그 가운데 우리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는 거죠. 우리 게 없다고요. 내 몸이, 우리 몸이 영광스럽게 부활돼도 내 몸이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거예요. 그래서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잖아요.

다시 할게요. ‘값없이’란 말은 고엘 사상에서 후견자인데 후견자가 대신 값을 치러줬기 때문에 값이 없이 받는 겁니다. 선악과 따먹은 자에게 생명나무를 못 따먹게 돼 있어요. 그런데 ‘값없이 생명수를 마시라’ 하거든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니 때문에 니가 구원받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니 믿음이나 니 소망이나 니 사랑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다 말이죠.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했거든요.

성령 안에서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해 주심으로 말미암아 이미 우리는 죽음과 저주와 마귀의 심판에서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어요. 벗어났다 이 말 이예요. 그 말은 뭐냐 하면 내 인생에 대해서 걱정할 수 있는 권리가 나한테는 없는 거예요. 우리가 걱정 근심하는 것은 내가 날 섬기고 싶으니까 걱정 근심이, 죄인이니까 죄인은 저주가 와락 따라오는 거예요.

걱정 하고 싶을 때는 할 수밖에 없죠. 하지만 처절하게 따라와서 기어이 놓치지 않고 계속해서 추궁하시는 분이 누굽니까? 주님께서 ‘니 지금 누가 소중하노? 지금 누구 섬기는 거야?’하고 따지시면서 오실 때 ‘아!’ 그것조차도 값없이 생명수 마셨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요런 식으로 내 죄를 알 수 있는 환경을 주께서 지금도 우리는 언약으로 조성되고 있는 중에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렇게 말씀을 생각할 수 있도록 은혜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내 몸을 위해서 그런 게 아니고 주의 몸을 위해서 주께서 값없이 말씀을 주셨사오니, 이후라도 내 몸이라 여기지 말고 주의 몸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