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교회120628-요한계시록22장8(수평과 수직)41강a-이 근호 목사
제 41강a
오늘은 요한계시록 22장 8절부터 시작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게 될 때 우리가 하나님을 일단 믿는다 치고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어떤 분인가 하는 내용을 살피는 식이 상식인데 그렇게 상식적으로 나가버리면 사실은 그 진짜 엑기스를 놓친 게 돼요. 무슨 말이냐 하면 신이 없는데 왜 자꾸 니는 신이 있다고 하느냐, 하는 그러한 도전을 그러한 나의 내부의 도전이나 외부의 도전이나 하여튼 그러한 생각을 우리가 그걸 억지로 잘라내면 안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종교생활을 하게 되는 거죠. 하나의 일종의 취미생활이 되는 겁니다. 10대도 아니고 현실도 아니고 그저 남이 안 하는 갈 하나 더 재미 삼아 꽃꽂이 하듯이 하나 하는 것밖에 안 돼요. 남들 꽃꽂이 하는 걸 보면 그걸 내가 꼭 해야 될 이유는 없잖아요. 그건 선택 사항이지, 필수도 아니고 운명도 아니잖아요. 우리는 하나님 믿는 것이 그런 식이 될 수가 있어버립니다. 그러면 우리들끼리의 재미난 모임, 게임을 하나, 취미생활 하나 영위하는 것밖에 안 돼요.
그러나 성경에 나오는 이 사도요한이나 사도들은 자기 책임, 자기 구원이 우선이 아니고 마치 댐 터졌을 때 네덜란드 애가 손가락으로 막았다는 전설 있잖아요. 댐 터지면 산으로 올라가면 될 텐데 손가락으로 틀어막았던 것처럼, 이것은 남이 알아주고 안 알아주고 문제가 아니라 이미 댐을 터졌다는 겁니다.
그 댐을 다급해서 ‘불났다. 도둑이야. 늑대다.’라고 외치는 것처럼 남이 양치는 소년이 거짓말을 몇 번이든 하든 관계없이 우리는 ‘늑대다. 불이야. 도둑놈 잡아라.’ 하는 것처럼 본인이 어쩔 수 없는 거예요.
어제 뉴스에 아파트 6층에서 애가 하나 떨어졌는데 그런데 옆에 있던 아저씨가 양 손으로 받았는데 1.5킬로의 중력의 힘인데 받아서 자기는 병원에 입원해 있어요. 애는 살고 중력 때문에 그 사람은 약간 중상 비슷하게 됐는데, 이거는 따지는 게 없잖아요. 그냥 ‘오! 오!’ 받아야 되는 것처럼.
지금 사도요한이 22장 8절 말씀이 그겁니다. 6절도 마찬가지고 “또 그가 내게 말하기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지라 주 곧 선지자의 영의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결코 속히 될 일을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보내셨도다” 이거는 그냥 받는 거예요. ‘가만 있어보자, 나 하는 일 없는데 목사 돼서 어디 인생을 보낼까?’ 이런 계산도 필요 없어요. 그건 선지자 학교 가면 되고, 선지자 학교 가는 것도 문제가 아니고 구약에서 선지자라는 것은 선지자 학교 가고 출신은 그게 아닙니다. 그냥 받는 거예요. 그냥 된 통으로 받는 겁니다.
비 안 오기를 누가 기도한 게 아니고 비가 안 와서 안 오듯이 비 오면 또 오라고 해서 오는 게 아니고 알아서 오듯이 우리가 주인공이 될 수가 없다는 거예요. 이 세상 이 현실 속에서 나는 결코 현실 자체가 주인공이지, 나는 현실이 덮치면 덮치는 대로 현실의 일부가 될 뿐이지, 내가 현실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그런 입장은 못 된다는 것을 또 다시 여기 성경에서 사도요한이 보여주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마지막 끝내면서 계속해서 이게 또 나온다는 말은 이미 우리가 내부에서 항상 끓어오르는 게 있어요. ‘신이 있기는 있나?’ 이 말이죠.
성경을 보기 이전에 먼저 그것부터 생각을 해야 돼요. 나는 이미 알고 있다 생각하지 마시고, 알고, 했는데 15초 지나서 ‘그런데 신이 있긴 있는 거야? 괜히 있다고 내가 혹시 나한테 최면을 걸어서 신이 없는 것보다 있는 게 낫지.’ 그런 식이 아닌가, 없는데 내가 조작하고 있지는 않는가, 아니면 실제로 신이 있는가, 실제로!
그럴 경우는 어떻게 하느냐, 신이 없다고 여기는 겁니다. 신이 없다고 여길 때 나한테 무슨 손해 볼 일 있습니까? 오히려 신이 없을 때 이익이 더 되죠. 안 믿는 사람과 친하게 지낼 수도 있고 친구로 우정을 유지할 수도 있는 문제고, 신이 없다면 우리는 이 땅에서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면서 완전범죄만, 안 들키면 된다 이 말이죠. 신이 없다면.
적어 볼게요. ‘신이 없는데 왜 자꾸 신이 있다고 우기는가?‘라는 이러한 사실을 진지하게 진정성 있게 한번 곰곰이 생각해 봐야 됩니다. 이걸 왜 생각을 해야 되느냐 하면 이 질문은 신이 없는데 왜 자꾸 신이 있다고 우기면서 하느냐, 그러다 어떤 한계나 어떤 사태나 어떤 사건이 일어나게 되면 하루아침에 신은 없었다고 외칠 그런 가능성이 농후한데 왜 자꾸 그때는 생각 안하고 그때 생각 안 하고 ’지금 모태 신앙이니 나는 그동안 교회를 몇 년 다녔느니 그것 가지고 신이 있다고 우기느냐.’ 하는 이 외부의 공격이 아니고 내 내부에서 이런 공격을 내가 나한테 아주 잔인하게 공격을 가해야 돼요. 이건 자기 스스로 부정하는 거죠. 자기 자신을 부인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 질문에 대해서 뭔가 속 시원한 답변이 마련돼야 되지 않습니까? ‘아니야, 아니야, 이래서 신이 있다.’ 내부에서. 이 질문을 한꺼번에 날려 보낼 정도로 강력한 답변이 있어야 될 텐데 이 답변이 없어요. 이 답변을 만들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러면 그 해결점은 뭐냐, 자, 이것을 부정할 수 있는 답변이 있으면 ‘훅, 하고 마귀야 나를 시험하지 마.’ 하고 쫓아낼 수 있는데 이걸 대항할 수 있는 대항의 말을 우리가 만들어 낼 수가 없어요.
요 문장 자체가 의미가 있기 때문에, 요 문장 자체가 하자가 없는 거거든요. 신이 없는데 왜 자꾸 신이 있다고 우기느냐, 신이 있다는 것은 신이 없는 상태에서 이거는 니가 니한테 자꾸 억지를 부리는 것밖에 안 된다 말이죠. 지금 북한에 김일성 죽었잖아요. 김일성 죽었는데 김일성 있다 하면 그 사람한테 우리는 뭐라 합니까? ‘니는 돌았다. 죽었어. 죽었는데 왜 자꾸 살아있다 하는 거야?’라고 했을 때 김일성 살아있다고 하는 사람이 뭐라고 답변하겠습니까? ‘나는 믿는다. 지금도 김일성 주석님이 살아있다고 믿는다.’라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믿음이지 그래. 그러니까 믿음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일방적인 니가 도라이 됐는데, 정신병자든 ‘나만 믿으면 믿는다.’ 하는 것처럼 ‘그렇게 니가 자기 스스로 니한테 속아 넘어가는 거야.‘ 하고 우리는 책망을 할 수 있고 구박을 줄 수 있다 이 말이죠.
그래서 이 질문에 대안되는 답변은 없습니다. 없는데 이 질문을 이렇게 바꾸게 되면 문제가 실제가 돼요. 신이 없는데 왜 자꾸 신이 있다고 하는가? 이 질문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 ‘왜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안 되는가?’ 요 질문으로 바꿔버리면 이렇게 되는 겁니다. 신이 없다고 나는 여기고 싶어요. 신이 없으면 이런 성경공부도 전부 사기니까 안 해도 되는데, 왜 나는 신이 없이 살고 싶은데 왜 나는 그것이 내가 용납이 안 되는가.
신이 없다는 것이 맞아요. 이성적으로, 왜, 안 보이니까. 그리고 숫자로 헤아려도 신이 없다는 것을 대다수가. 신이 있으면 신을 섬겨야 되잖아요. 교회 가는 사람도 누굴 섬깁니까? 자기를 섬기지 신을 안 섬기잖아요. 1등, 나 섬기기, 2등, 여유 있으면 신 섬기기, 이게 순서 아닙니까? 그런데 진짜 신이 있다면 내가 여기서 암에 걸리고 불에 화상 입어도 신을 섬기면 그걸로 족한 겁니다. 좀 냉정하지만. 냉정하게 말씀드리는 겁니다.
지금 사업이 하루아침에 망해도 아무 그건 신 섬기는 거와 관계없이 지장이 없어요. 하나님 섬기는데 지장이 없다면 집이 홀라당 타고 온 가족이 다 지금 죽어도 나는 울 필요가 없어요. 그게 내가 신 섬기는 거하고 무관하기 때문에. 심지어 내 몸이 아프다 할지라도. 돈이 한 푼도 없다 할지라도. 갑자기 지붕이 내려와서 내가 맞아 죽는다 할지라도 내가 거기서 애 닳아 하거나 안타까워할 하등의 그건 없습니다. 왜냐 하면 내 목적은 신을 섬기는 것이지, 신 섬기는 나를 섬기는 것이 내 목적이, 존재 이유가 아니기 때문에, 따라서 신을 섬긴다는 말은 이건 나한테는 이건 감당이 안 되는 거예요. 왜, 나는 평소의 버릇이 뭐냐, 나부터 챙기고 나부터 섬기고 나부터 이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게 누군지 알아요? 내가 제일 소중하잖아요. 주일 날 낮 설교에 이야기했잖아요. 사람이 자기보다 소중한 게 없다고요. 1순위 나고, 그 다음에 가족이고, 그 다음에 하나님이고, 이렇게 되는 겁니다.
나부터 제일 소중한 거예요. 그래서 나는 할 수만 있다면 하나님이 없다고 여기고 살면 좋겠는데, 그것이 내 뜻대로, 원대로 안 될 때 비로소 우리는 요한계시록 22장 7절과 8절에 합류하게 되는 겁니다. 그동안 우리가 자기가 이런 질문을 나는 신이 없이 살고 싶다는 질문을 안 한 상태에서 요한계시록 22장 6절~8절을 봐 버리면 우리는 비스무리하게 흉내 내려고 시도할 거예요. ‘나도 사도바울처럼 살아봐야지.’ 이런다고요. 그건 위선자입니다. 오히려 반대로 나가야 됩니다. 반대로. 성경에서 이렇게 해도 ‘나는 신이 없어. 그게 내 소망이야.’ 해놓고 그 뒤에 영어로 But, 그런데, 왜 하나님은 신을 좋아하지도 않는 나를 가지고 신, 하나님만을 섬기도록 그렇게 강제로 이끄십니까? 그 질문이 지금 사도요한이 받은 우리한테 외치고 싶은 이야깁니다.
그럼 이 질문(왜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안 되는가?)을 하게 되면 여기서 뭐가 끄집어 나오느냐 하면 이걸 행위, 또는 행함이 나오겠죠? 그래서 그 행함 문제가 어디 나오느냐 하면 요한계시록 22장 11절에 나옵니다.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 12절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 주리라“ 이렇게 돼 있죠?
초반부터 어렵게 해서 죄송합니다. 할 수 없어요. 성경이 압축돼 있어서 어려워요. 행함이 2개가 있습니다. 첫 번째 행함은 내가 하고 싶은 내 행함, 두 번째 행함은 하나님이 말씀대로 묵시적 계획대로 나한테 실시하는 것, 우리 성도한테 실시하는 게 행함입니다. 이 두 가지 행함이 나오거든요.
첫 번째 행함대로 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이 모든 것이 목적이 뭐냐 하면 내가 소중하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죽어서 좋은 나라 가야돼, 내가 소중해요. 내가 소중하기 때문에 행하는 이것, 더러운 겁니다. 이건 뭐냐 하면 자기를 속이는 거예요. 분명히 우리 조상이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우리는 이미 제일 소중한 것이 내가 되고, 이제는 내가 소중하기 때문에 선악과를 그냥 가만둘 수가 없었던 거예요. 아담이 너무 자기가 소중하기 때문에 내가 신이 될 수 있는데 그 기회를 놓치면 안 되잖아요. 신이 될 수 있는데. 그러면 신이 되면 누굽니까? 하나님이 하나님 되는 게 좋아서 따먹었습니까? 아니잖아요. 하나님 좋아라가 아니고 누구 좋아라고? 이 피조물 내가 이번 기회를 놓치면 신이 될 수 없잖아요. 그럼 누구 좋아라고? 저걸 따먹는 순간 나도 신하고 맞먹을 수 있는 거예요. 왜 그 기회를 놓칩니까? 그 기회가 두 번 다시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데. 그 기회를 놓치면 안 되죠.
그러면 이미 따먹은 상태에서 누가 이미 소중해요? 내가 소중하잖아요. 그 소중히 여기는 그 조상의 DNA를 계속 우리가 물려받았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누가 소중해요? 우리가 소중하잖아요. 우리가 소중한 상태에서 거룩이고 의롭게 산다는 것은 결국은 위선자가 되는 겁니다. 이 행함이.
그래서 아까 제가 처음에 뭐라 했습니까? 솔직히 까놓고 이야기해라. ‘니 하나님 없이 그만 내가 있는 걸로 족한 걸, 나 있고 하나님 있는 것도 귀찮아.‘ 그럼 또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하나님 있으면 내가 섬겨야 되니까 나는 졸개가 되고 그분은 어른이 되니까 이건 내 성질에 안 맞아, 우리 각자 성질에 안 맞잖아요. 누구한테 굽실거리는 거. 남이 나한테 굽실거리는 건 우리의 성격에 맞는데.
말 쉽게 합시다. 내가 하고 싶은 게 뭐냐 하면 많은 사람들이 내 앞에 꿇고 섬기게 하고 싶어요. 마태복음 4장에 예수님이 금식했을 때 악마가 와서 예수님한테 한 그거다 이 말이죠. ‘니가 뛰어 내리면 많은 사람들이 추종할 것이고 돌이 떡 되게 하고 기적을 베풀면 메시아로 인정할 것이고 세상 부귀영화 권세를 네게 줄 것이다. 이건 마귀가 그런 식으로 꼬인다는 것은 이미 그만큼 평소에 우리를 많이 꼬여왔다는 것이고 우리는 거기에 호응을 해왔다는 겁니다. ’예~ 아이고, 세상에, 예, 어떻게 하면 됩니까? 예.‘ 우리는 그 본성이 맞아, 뭐 말 어렵게 할 것도 없어. 딱 그거야, 우리는.
내가 제일 높은 자리에 앉는 게 그게 우리의 본색에 딱 맞는다니까요. 제일 높은 자리에서 내려다보는 게 맞아요. 100층짜리 건물에 98층 싫어. 100층이어야 돼. 위층에 2층이 있어서 방귀 뀌면 냄새 나서 안 돼. 이게 우리 본성이 맞아요. 아무리 예수 믿고 복음 알고 감추고 나오지 말라고 성질 나오지 말라 눌러도 소용없어요. 이게 언제나 나오게 돼 있다 말이죠. 어떤 사태가 터지면 하나님 원망하고 불평하고 난리 나요.
그걸 한꺼번에 주께서 이미 아셔서 한꺼번에 다 하셔서 우리가 그런 본색을 드러내지 않는 시점이라도 이미 그런 본색을 다 드러났다는 것까지 다 챙겨서 하나님께서 뭐냐 하나님의 액션을 하나님의 행위로 우리에게 집어넣어 버립니다. 그래서 요 행위(1번) 부정되고 요 행위(2번) 긍정될 때 요걸 가지고 뭐라 하느냐 하면 믿음, 또는 믿음에 합당한 행함이라고 합니다.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 주리라” 하는 것은 이것을 뭐냐, 상 주기로 작정한 사람에게 상이 어떻게 해서 너를 통해서 어떤 경로에서 상이 주어지는가를 우리를 하나의 도구로 사용해서 하나님의 상을 우리로 마음껏 발휘하게 하는 겁니다. 그렇게 될 때 이 상을 받는 성도는 하나밖에 없죠. 자기를 부인하는 겁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방법이 뭐냐, ‘나는 죄인이다. 나는 부족하다.’하는 것은 바리새인이 하는 것이고, 성도가 하는 자기 부인은 뭐냐 하면 감히 성전에서 고개를 못 들고 ‘하나님이여, 저는 죄인입니다.’
어제 제가 수요일 날 설교에서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에 그냥 직접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아니고 여기 뭘 통해서 하느냐 하면 죄를 통해서 한다 했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원하는 게 뭡니까?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행함에서 나오는 죄는 인정을 안 해요. 죄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행위를 줘서 튀어나오는 죄, ‘이 안에 뭐야,’ 해서 발로 차니까 나오는 죄, 그것이 튀어나올 때 내가 만들어 내는 죄가 아니라 주께서 거룩한 말씀이 작용해서 ‘오! 나는 그동안 나를 섬겼구나.’ 하는 그 죄가 튀어나오는 그 죄를 주께서는 흐뭇하게 받으시는 겁니다. 왜냐 하면, 그 죄가 있을 때만 하나님과 그 사람은 소통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연락이 되고 관계가 성립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의 행함, 이 하나님의 상주기 위한 행하신 것을 끄집어내기 위해서 사도요한에게 뭐가 주어졌다? 천사가 왔고 천사로부터 하늘의 계시를 받은 겁니다. 만약에 하늘의 천사도 오지 않고 계시도 없이 우리보고 ‘너는 행한 대로 한다.’ 하면 우리는 기껏 뭐가 됩니까? 바리새인이 되는 거예요. 바리새인은 누굴 부정했습니까?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예수님이 계시다는 것을 부정했잖아요. 왜,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런데 그걸 보고 예수님께서는 ‘그게 바로 니 애비가 마귀다.’하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가 중간에 끼어들 필요 없이 직접(directly)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말씀 가지고 행한 대로 해서 복 받는다 하는 그게 바로 마귀가 그런 짓 한 겁니다. 왜 그런 짓했느냐 하면 하나님이 소중한 것이 아니고 내가 소중하고 이미 선악과 따먹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랑스러운 게 아니고 내가 사랑스럽고 하나님의 구원이 좋은 게 아니고 내 구원이 나한테 귀하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최선을 다하여 열심히 지켰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도 인정했습니다. ‘누구든지 바리새인보다 의가 더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고. 그래서 예수님의 그런 말씀을 우리가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 다음에 누가복음 12장49절 한번 봅시다. 보기 전에 또 한 번 잊어버리니까 다시 이야기합니다. 왜 신이 없는데도 왜 자꾸 신이 있다고 우기느냐에 대한 거기에 대한 해결책은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은 오직 나만 섬기는 것을 하고 싶다. 나는 나만 최고 자리에 앉고 내가 신이 되는 것, 딱 깨놓고 말해서 내가 신 되는 것, 그게 나의 영원한 소망입니다.‘라는 그 고백. 그런데 왜 하나님은 그걸 방해합니까? 방해하시면 그 사람은 땡잡은 거예요. 그 사람은 사도요한처럼 계시를 받았기 때문에 자기가 신이 되고자 하는 죄를 부모로부터 품고 왔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아주 적나라하게 까발려진다는 그 행복감! 만약에 엑스레이 단층 촬영하는 거와 똑같은 거예요. 내 속에 내가 제일 중요하다는 것을 엑스레이 찍으신 분 앞에서 완전히 발각되어 까발리는 그거 아무나 받는 축복 아닙니다. 최곱니다. 최고!!
병원에서 엑스레이 많이 찍어봤지만 하늘나라 엑스레이 언제 찍어봅니까? 이건 의료보험도 안 돼요. 누가복음 12장 49절을 보면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와~~ 세상에, 어느 교주가 이렇게 강력하게 대합니까?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다.’ 어제 설교를 해보면, 우리는 번개탄 같이 불에 타는 재질로 돼 있어요. 이런 사실을 우리가 몰랐던 거예요. 우리를 하나님이 창조할 때 불에 타도록 불에 타는 재질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왜 우린 몰랐을까? 이건 불에 태우기 위해서 우리가 만들어진 거예요.
베드로 후서에 보면 지구도 타는데 우리는 안탈까요? 지금도 화장터에 가면 잘 타는데 지금도 예약이 밀렸어요. 서울에 죽는 사람이 많아서. 그것도 자꾸 성남시에서 오지 말라고 하고, 서울시에서 오지 말라 하니까 하도 비좁으니까. 그건 뭐냐 하면 우리 몸 재질 자체가 불에 타도록 돼 있다 말이죠. 그리고 심지어 모든 금속, 백 구십 몇 가지의 모든 원소가 다 불에 탄다. 다른 말로 하면 물리적으로 봐서 에너지에 다 타도록 돼 있다. 재가 되게 돼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불을 던지러 왔다. 불 던지러 왔으면 그냥 한 곳에 예쁘게 불꽃만 피어지는 게 아니잖아요. 전체가 들풀에 불이 번지는 것처럼, 홀라당 다 태웠다. 불을 확 던지면 그 다음부터 앞부터 타들어가서 어떻게 됩니까? 캘리포니아 산불처럼 다 타들어가는 거예요. 내가 그 일을 하러 왔다 이 말 이예요. 우훅, 하고 가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불에 타면 어떻게 될까요? 이건 불에 탄다는 말은 무가치하다는 뜻이거든요. 그런데 인간이라 하는 것은 성도는 무가치한 가운데서 비로소 가치를 발견하게 하는 것이 성도됨입니다. 그게 다니엘 세 친구예요. 다니엘 세 친구가 자기의 존재의 의미를 어디서 찾았습니까? 그 대목 보면 하나님도 참 너무 인간을 모질게 다루시는데 우상에게 절을 안 하면 풀무 불에 던진다 했잖아요. 그 우상을 만드신 것도 배치를 해놓으신 것도 하나님이고 그리고 원래 절을 안 해도 되는데 다니엘 세 친구들은 많은 사람이 주목을 한 모양이라. ‘이래도 절 안하나 보자.’하고 벼르고 있는데 절을 안 했거든요.
그러니까 임금도 벼르듯이 잡아서 ‘절해라.’ ‘못 합니다.’ ‘절 안 하면 니 죽는다.’ ‘안 죽을걸요. 아, 말 취소. 만약에 죽는다 할지라도 절 못하겠습니다.’ 이렇게 나온 거예요. 무슨 똥 고집이, 이런 고집이 다 있나. 다시 말해서 이 대목에서 다시 한 번 보는 것은 느부갓네살이 하는 이야기가 ‘아이, 이 답답한 인간들아, 하나님이 없는데 왜 자꾸 있다고 하느냐.’ 그 질문을 외부에서 해주는 거예요. 이렇게 외부에서 하나님이 시키는 것은 우리가 평소에 내부에서 내가 그런 질문을 나한테 늘 하고 있다는 것을 외부를 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뭐냐, 성도라 하는 것은 지가 마음의 결심으로 믿는 게 아니고 이질 적인 것, 내 것은 다 부모한테 받은 것이기 때문에 그게 전부인데 그거 말고 어떻게 이질적인 게 온다면 그거 신기한 일이죠. 그 신기한 일로 인하여 다니엘 세 친구는 사실은 답답하죠. 자기도 절하고 제일 중요한 게 목숨 보존하는 게 제일 중요한 거 아닙니까? 절하면서 안 믿는다 할 수도 있고 그렇잖아요. 다른 사람도 그런 사람 많을 거예요. 절하면서 임금이 좋아서 절하는 사람 없고 대부분 ‘더러워라. 에이 해줄게, 해줄게.’ 하고 억지로 한다 말이죠.
그런데 왜 다니엘 세 친구는 그것마저 해당이 안 되느냐 말입니다. 누가 자기한테 답답해요? 다니엘 세 친구가 자기 가슴을 치는 거예요. ‘왜 나는 다른 사람같이 대충 넘어가는 법이 없느냐. 대충, 나도 대충 넘어가자.’ㅎ 다니엘 세 친구가 드디어 불 속에 들어가죠. 불을 7배나 더 뜨겁게 한 거죠. 온도가 약 1500⁰C까지 올라갑니다. 아마 원자 폭탄은 태양의 표면온도 6000⁰C 까지 올라갑니다. 하여튼 그 당시 최고로 올려야 되니까. ‘아이고, 똥고집이 사람 잡네. 잡아.’ 그건 본인도 그렇게 생각하고 다 했다 말이죠.
그런데 다니엘 세 친구 스스로 보기에 ‘역시 하나님은 없구나.’ 하고 들어갔는데 와 보니 거기 계시네. 불 속에 계셔요. 불 속에 있음으로서 저쪽(불 밖)사람은 이쪽에 들어올 수가 없어요. 다른 사람이 변화 산에 못 올라가듯이 엘리아 모세를 만날 수 없듯이 저쪽 사람들은 들어올 수도 없는 거예요. 이게 갈라디아서 6장에 보면 십자가 안이 되죠. 그렇게 흔히 십자가를 이야기하는데 사실은 십자가 안에는 성령이 아니면 못 들어간다는 말은, 아무리 종교생활을, 금식기도 많이 해도 헌금 많이 해도 못 들어옵니다.
그래서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안 돼.’ 그거 밖에 없어요. ‘안 돼.’라는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어요. 사람들에게. ‘예배 참석해도 안 되고 성경 공부해도 안 됩니다.‘라는 말 밖에 할 수가 없어요. 왜냐, 내가 구원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목사가 사람을 구원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사도바울이 손수건으로 사람을 구원하는 게 아니에요. 사도바울이 말발로 구원하지 않는다고 고린도전서 2장4절에 나옵니다. 내가 전한 것은 내 말과 지혜로 한 것이 아니다.’라고 분명히 이야기했잖아요. 그것은 성령의 나타남으로 했다는 말이죠. 이 말은 뭔 뜻인 줄 알아요? 내가 지금 말하고 싶은 것도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고 성령께서 시켜서 하는 말이니까 모든 공로는 성부 성자 성령께 돌려라 이 말입니다. 나한테 돌리지 말고. 그런 뜻이거든요. 사도바울도 죽을 지경 이예요. 오죽 했으면 빨리 죽고 싶다 했겠습니까?
이건 사람이 안 되는 걸, 이질적인 걸 갖고 있다는 말은 이 사람이 대학에 떨어지고 사업에 망하고 집에 불나고 어떤 일이 있더라도 지금 거기에 신경 쓸 필요조차 없는 존재가 된 겁니다. 몸이 아프고 하더라도. 왜 자꾸 내 몸도 아닌 걸 내 몸이라고 이렇게 만들어 내는 요 마귀가 미운 거예요. 내 인생도 아니고 내 몸도 아니고.
여러분, 잘 아시는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너무나 잘 아시는 건데 너무나 쉬운 거니까 제가 물어봅니다. 인간은 누가 만들었습니까?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었다. 너무 쉽죠? 그럼 인간 요소 속에 인간의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잖아요.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 때 인간 요소 속에 인간 자기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너무 쉬운데, 없잖아요. 없는데 왜 인간이 인간을 자기 것이라고 우깁니까?
성도는 이렇게 살아야 돼요. 걸으면서도 팔이 앞으로 나오면 오, 하나님 것이 요래 움직이네. 오, 하나님의 발이 하나는 뒤로 가고 하나는 앞으로 가고.‘ 이렇게 돼야 돼요.
왜냐 하면 가장 알 수 있는 상식에 의하면 우리는 누가 만들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만들었기 때문에. 어떤 공장에서 인간이 장난감을 만들어서 걸어가게 하면 누가 좋아해요? 만든 인간이 좋아하잖아요. 그런데 로봇이 지가 좋아하면 로봇을 때려버리죠. 누가 만들었는데 니가 좋아해? 왜 우리 일에 우리가 좋았다 우리 일에 우리가 슬펐다 할 수 있는 그런 권한이 없는데 왜 그런 쪽으로 나가느냐, 전부 다 우리 조상이 하나님을 잘라서 그래요. 하나님을 잘라버리고 이제는 하나님이 안 중요해요. 누가 중요해요? 내가 중요해요. 만들어 놓고 이제는 저리 가라 이 말이죠. 만들었으니까 이제는 별 볼일 없다 말이죠. ’이제는 내 인생 내가 알아서 살‘거야.‘
몇 개월 후에 한 군데 주례를 하게 됐는데 잠언 서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이것도 제가 주례를 하면서 하는 건데 ‘지혜로운 아내는 여호와께로 말미암음이라.’ 이건 뭔 뜻이냐 하면 지혜로운 아내는 여호와의 스파이입니다. 여호와의 스파이! 단, 지혜로운 아내. 그러면 지혜로운 아내가 아이큐가 높다든지 돈 잘 버는 아내가 아니고 지혜로운 아내가 어떤 아내인가 보니까 잠언서 마지막에 보니까 아니 이 여자가 여호와를 경외하네. 미쳤어. 왜 결혼했으면 누구를 경외해야 돼요? 남편을 경외하고 시집을 경외하든지 말든지 해야지, 아니 여자가 미쳤어. 여호와를 경외하는 거예요. 얼굴 고운 것이나 아름다운 것도 헛되고 거짓되나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지혜 자가 돼서 칭찬을 받는다는 거예요. 결국 잠언서 아들 보고 이야기해놓고 마지막 장면은 남자가 아니고 누가 칭송을 받아요? 여자가 칭송을 받아요. 여자의 후손을 갈라내는 건가. 잠언서 처음에는 아들보고 이야기하잖아요. 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게 은혜라 해놓고 마지막에는 경외하는 사람의 모델로 누가 등장합니까? 아내가 등장해요.
그래서 이것저것 따지고 보면 도대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기적 중에 기적입니다. 이건 있을 수가 없어요. 아무리 곰곰이 생각해 보고 다시 돌아서 또 생각해 봐도 이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우리의 능력에서는 안 나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3장에서 유명한 말씀 하셨잖아요. 이 천국이라는 것은 너희들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들에게는 허락이 안 되었다는 거예요.
제자들 좋아하면 안 됩니다. 제자들이 좋아하려면 뭘 알고 좋아해야 하느냐 하면 저들이 어떤 사람인가 알아서 본인들이 왜 저들 속에는 포함이 안 됐는지를 알고 난 뒤에 좋아해야 돼요. 왜 저들은 허락되지 않았는지 알아야 되고, 그 허락되지 않은 걸 왜 알아야 하느냐, 알아야 지금 내가 나는 우리고, 저희가 아니라고 우겼던 것이 저들이 분석해 버리면 ‘가만히 있어보자. 허락되지 않은 저들하고 나하고 똑같네.’ 이렇게 돼 버리면 갑자기 인상이 찌그러질 수가 있어요.
‘아이, 이거 허락이 안 되는구나.’ 그래서 제가 얼마 전에 질문에 대해 쓴 글에 제가 답변을 굉장히 어렵게 했어요. 어떤 분이 질문을 ‘세상이 이렇게 악하고 이단들이 설치는데 왜 하나님은 방치하시느냐? 왜 악한 자가 횡횡하고 설치는데 왜 하나님은 그냥 묵인 하십니까? 성도로서 괴롭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답변에 말하기를 ‘버림받은 자가 누군가를 알면 우리는 그런 것을 다 용납할 수 있고 기쁘게 받을 수 있다.’라고 한 거예요.
이게 무슨 말이냐, 예수 안 믿는 자가 아니라 무슨 자입니까? 버림 받은 자죠. 오늘 본문 요한계시록 22장 6절 7절 8절에 사도요한에게 누가 왔죠? 천사가 찾아왔죠. 그러면 천사가 왔으면 사도요한 개인의 입장에서 지금 귀양살이 하니, 몸이 아프니, 잠이 안 오니, 슬프니, 그런 것을 따질 입장이 됩니까? 안 됩니까? 버림 받지 않았다는 말은 누가 찾아왔다는 거잖아요. 찾아왔으면 이거는 그의 운명과 그의 팔자는 이미 끝난 거예요. 이건 수정이 안 돼요. 찾아왔으면 내가 내 힘으로 가라 하든지, ‘나는 내 식대로 살 거야.’ 고집을 부릴 수가 없어요. 덮치니까, 찾아오니까.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여기에 대해선 본인이 저항할 수가 없다니까요. 그 팔자를 저항할 수가 없어요.
지금 문제가 쉽게 됐다가 어렵게 돼 버렸는데 이렇게 그림으로 그리면 쉬워지는데요. 어릴 때 애들이 한 두 살쯤 됐을 때 한참 예쁠 때 아닙니까? 자기만의 공간 이불 속에서 놀고 있는데 아빠가 퇴근했어요. 그러면 애가 아빠를 보고 싶어서 반기려면 이불을 제치고 이렇게 튀어나가서 아빠를 반겨야 되는데 애들이 성질이 급해서 그냥 여기서 앉았다 일어나 버리면 뭐도 같이 일어섭니까? 이불도 같이 일어서죠. 이 이불이 뭐냐 하면 나의 세계관, 나의 현실관 이예요. 현재 내가 구성한 ‘나 이런 인간 되고 싶어, 나 세상에서 이 정도 되고 싶어.’ 그게 중첩된 내 이불 이예요. 하나같으면 말을 안 해요. 열 댓 개 겹겹이 있는 거예요.
그러면 하늘을 보려면 어떻게 됩니까? 이불을 뚫고 나와야 될 텐데 우리는 현재 내가 나한테 유리하다고 여기는 세계관(이불)을 덮어쓴 채 ‘주여, 내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이러고 나오니까 이건 주님이 보이는 게 아니고 뭐가 보입니까? 만날 지 얼굴만 보이는 거예요. 욕심에 찬, 자기 얼굴만 보이는 거예요.
그러면 자기가 이불을 떨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떨칠 수 없죠. 바깥에서 이불을 제쳐줘야 되는데 이걸 가지고 출애굽이라고 해요. 이 이불이 뽕~하고 뚫려버렸어요. 야, 이거 그림 그리기 힘들겠네.ㅎ 이불을 구멍을 내줘야 얼굴을 내밀고 아버지를 만나거든요. 그런데 이불이 너무 두껍기 때문에 이불을 못 대는데 이 이불 찢어지는 게 뭐냐, 나의 지금까지 살아왔던 내 현실과 나의 세상 관, 나의 주관, 인생관, 이게 찢어지는 거예요. 이게 찢어진다고 그렇게 울고불고 난리치는 겁니다.
마리아 마르다 오빠가 누구죠? 나사로죠. 그들이 재미나게 살았잖아요. 예수 잘 믿는 것처럼 보이고 예수 잘 믿고 예수 오시면 영접하고 예수 잘 믿었는데, 예수 잘 믿을 때 본인은 그렇게 생각 안 했죠. 예수 잘 믿으니까 예수님, 우리 오빠도 챙겨주시고 내 동생도 챙겨주시고 아마 예수 잘 믿을 때는 그런 생각도 안 들었을 거예요. 그저 주의 은혜로 감사하다고 했는데 그런데 막상 주님께서 나사로가 아프다 할 때 그때 1단계 겁이 덜컥 났죠. 빨리 주님한테 연락했는데 주님이 안 오네요. 그렇게 자주 오더니만 주님이 안 오네요. 일부러 늦췄죠. 드디어 설마 숨이 꼴딱, 꼴딱 할 때 오시겠지, 안 오세요. 완전히 오빠 죽었을 때 그때 주님께서 벌써 아시고 ‘오빠 죽었다. 자 오빠 죽었다. 가자.’라고 갔을 때 마르다가 멱살을 쥐었죠. ‘내 이불을 왜 찢어놨느냐’고. 주님은 ‘니 이불을 찢지 않고서는 출애굽이 안 되고 그게 믿음이 아니기 때문에.
여기서 예수님 울었습니다. 내 이불 왜 찢느냐고. 그동안 행복하게 덮었던 우리 세 식구, 서로 하나가 없으면 우리는 곧 죽을 거 같던 우리 더불어 사는 예수님의 공로로 은혜로 사랑으로 축복으로 살았던 이걸 왜 주신 은혜를 왜 본인이 줘놓고 본인이 왜 찢느냐 이 말입니다. 출애굽이 뭔지 모르고, 내 인생관이 찢어져야 되는 걸 모르고, 찢어버렸어요. 그리고 하는 말이 이 이불은 뭐냐 죽기를 무서워하고 있다는 것, 죽음이 끝이라는 것, 이러한 이불은 그동안 고만고만한 인간들이 또는 악마가 인간을 속이기 위해서 그렇게 한 거예요. 마귀가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종노릇 했다. 이불에 덮여있는 종이 된 거예요. 노예가 된 겁니다. 링컨이 나타나든 해야 돼요. 우리는 노예 해방해야 돼요. 우리는 찢어질까봐 걱정돼요. 우리는 이 세계 자체에서 우리 자신이 나가기를 우리 자신이 안 좋아해요. 살아온 정이 많아서.
찢어야 그동안 십자가 피를 흘렸던, 찢을 때 피가 묻거든요. 십자가 피만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되는 거죠. 시원한 바람, 요걸 요한복음 8장에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진리는 예수님을 말하거든요. 예수님이 너희를 자유케 하러 왔다는 사실.
그래서 오늘 다시 22장 돌아가면 나는 불 지르러 왔다. 모든 것은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마지막 7대접이 떨어지면 모든 것이 불바다 돼 버리면 그 가운데서 의롭고 거룩한 것은 오직 사도요한이 모델처럼 하나님의 천사로부터 사도요한이 먼저 계시를 받고 이 사도요한의 계시대로 또 받고, 받고, 받고, 받은 사람들, 그 사람들만이 이렇게 하늘나라의 상을 받게 되고 구원받는다는 이야깁니다. 이 이야기하는데 이렇게 길고 힘이 듭니다.
왜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 우리 구원보다 더 소중함을 언급하기 위해서 이럴 수밖에 없어요. 자칫 잘못하면 우리 구원이 예수님보다 더 소중한 게 돼 버립니다. 이거는 계시를 받은 적이 없고 천사 만난 적도 없고 지가 지 머리 계산해서 구원받고자 시도하는 종교적인 취미생활에 불과한 겁니다.
그래서 사도요한은 이게 현실입니다. 이 이야기를 수백 번 했는데 할 때마다 제가 전율을 느껴요. 우리는 지금 취미생활 하는 게 아니에요. 우리는 계모임 하는 게 아닙니다. 선택이 아니고 우리는 필수고 이거는 운명 이예요. 이거는 특수한 운명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운명을 우리는 매일같이 스스로 이걸 반격해서 떨쳐내 보고자 애쓰고 있는 중입니다. 될 수 있는 대로 말씀 없는 곳에 도망치고 싶고... 쉽게 말해서 ‘하나님이여, 제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좀 살게 내버려 둬요.’라는 소리를 할 수 있는 사람 같으면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왜, 자꾸 귀신이 따라오니까, 성령이 따라오니까, ‘내 다리 내놔라. 니 인생은 없는 거야.’하고 따라오니까. 이거 질렸어요. ‘고만 대충 교회 가고 대충 헌금 내고 그래서 대충 그러다 천당 가고 세례 받아서 천국 가고 그만 내버려 둬요.’ 그게 안 된다니까요. 그건 누구나 그렇게 되고 싶죠. 그게 안 된다니까요. 하나님이 찾아온 사람은. 사도요한 보세요. 그게 안 되게 돼 있다니까요.
그래서 성령의 열매는 하나밖에 없어요. 뭐냐 하면 ‘안 돼!’ 이게 성령의 열매입니다. 우리는 뭐든지 내 맘대로 안 돼요. 다시 말해서 뭐든지 내 맘대로 안 된다는 말은 우리는 뭐든지 내 맘대로 하고 있다는 뜻이고, 내 맘대로 하고 있는 가운데서 구태여 이쪽은 착한 일이고 이건 악한 일이고, 구분하는 그런 숙제는 안 해도 된다 이 말입니다. 주께서 알아서 다 해주니까. 주께서 알아서 다 해주니까 내가 구태여 이건 착한 일 한 것이고 이건 나쁜 일 한 것, 내가 그걸 구분하는 그런 수고로움, 그런 번거로움은 안 해도 돼요. 괜히 하면 할수록 위선만 더 늘어나죠.
또 그 다음에 14절 봅시다.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두루마기 나오죠? 에스겔에 나오는 이야깁니다. 에스겔이 뭘 먹었습니까? 두루마리, 하나님의 말씀을 먹었죠. 먹었다는 말은 말씀이 인격화 됐다는 말 아닙니까? 그 말씀을 먹고 난 뒤에 그 다음에 해야 될 일은 뭐냐 하면, 살지 못하는 자를 살지 못한다고 이야기해야 되고 살려야 될 자는 산다고 이야기하고. 왜, 그 당시는 많은 선지자들이 살릴 영혼은 죽이고 죽일 영혼은 살리기 때문에. 그야말로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아닌 건 아니다 이 말이죠. 이런 것도 자기 맘대로 못하죠.
그 다음에 진짜 중요한 거 생명나무입니다. 생명나무 설명하고 쉽시다. 처음에 생명나무와 선악과는 짝을 이뤘잖아요. 생명나무만 있는 것이 아니고 선악과도 같이 있었던 겁니다. 같이 있었는데 생명나무가 같이 있을 때는 생명나무가 뭔지를 몰랐죠. 그런데 떨어지면서 생명나무가 ‘아! 그런 나무구나.’ 비로소 선악과를 훼손했을 때 비로소 드러나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만지고 예수님을 뽀뽀하고 예수님하고 대화하고 예수님한테 점심 대접하고, 바리새인들이 점심 대접했거든요. 그러고도 예수님이 누군지 몰라요. 그런데 언제 예수님을 아느냐 하면 내가 선악과로 인해서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생명나무가 생명나무답게 우리한테 딱 등장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생명나무와 선악과 사이에 인간은 없는 거예요. 그저 생명나무는 선악과만 바라보고 선악과는 그냥 생명나무만 바라볼 뿐입니다. 문제는 아담이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는 선악과가 어디에 속했습니까? 그게 인간 속에 들어와 버렸다는 겁니다. 들어와 버렸으니까 인간은 인간이 아니고 겨우 생명나무를 훼손한 자로서 그냥 인간인 거죠.
결국 남은 것은 선악과와 생명나무 생명나무와 선악과 두 종류밖에 없어요. 이미 그 둘은 훼손됐기 때문에 공유할 수 없고 떨어져 있죠. 결국 천국이라는 것은 선악과 없는 곳이 천국 이예요. 그리고 선악과대로 벌 받는 곳은 어디고? 지옥이고. 지옥 가는 것은 선악의 기준에 의해서 지옥 가게 돼 있어요. 선은 없으니까. 악밖에 없으니까. 선악의 기준에 의하면 악밖에 없으니까. 생명나무는 선악을 따지지 않는 거예요. 따먹었는데 안 따먹은 걸로 쳐줘 버리는 거예요. 안 따먹은 걸로.
처음부터 생명나무는 먹게 돼 있는데 선악과 따먹었기 때문에 못 먹잖아요. 그러니까 이제는 천국 간 사람은 여기 요한계시록 22장 보세요.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는다 했죠? 맘대로 먹어라 이 말 이예요. 먹고 싶은 대로 먹어라 이 뜻이거든요. 처음에 창세기 3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생명나무를 먹을 수 있어요? 없어요? 못 먹는다 했죠. 왜냐 하면 너는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생명나무 오는 길을 막아놓은 거예요.
막아놨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지금 인간의 가치보다도 무슨 가치를 우선한다? 생명나무의 가치를 위해서 니가 있는 것이지, 너를 위해서 생명나무가 있는 게 아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인간들로 하여금 선악과 따먹게 하고 거기 저주하는 것도 다 누구 때문에? 생명나무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천국 간 사람은 어떤 사람? 자기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 아니고 생명나무 가치를 높이는 분이예요. 그래서 천국 가는 사람은 주님께서 불을 싸지르러 왔다 하는 것에 대해서 박수를 짝짝짝 ‘잘하셨습니다. 선악과 확 태워버려라. 어차피 천국에는 없으니까. 잘 하셨습니다. 죄 있는 곳에는 필히 저주가 임해야 되기 때문에.’ 필히 저주가 임해야 돼요. 10분 쉽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