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계시록38강-목마른 자 120504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5. 12. 6. 09:27

2012-05-04 01:22:54 조회 : 1419         
목마른 자 120503 이름 : 이근호 (IP:117.55.12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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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교회120503-요한계시록21장(목마른 자)38강a-이 근호 목사

제 38강a

요한계시록 21장 5절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에 전개되는 설계도, 계획안, 이것은 우리 인간이 관여를 하지 마세요. 인간이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것이 인간에게 기쁜 소식입니다. 인생을 내가 짜면 굉장히 안심할 것 같지만 나중에 실망이 따라오게 돼 있어요. 사람이 인생을 살면서 제일 힘든 게 뭐냐 하면 실망입니다.

왜 세상은 내 뜻대로 안 되는가, 내 소원대로 안 되는가, 내가 얼마나 여기다 신경을 많이 썼는데 내가 신경 쓴 만큼 효과가 없고 결과가 나지 않을 때 낙담을 하잖아요. 그것은 쓸데없이 현실을 내 현실로 강제로 끌어와서 그래요.

주님께서는 뭐냐 하면 한 마디로 ‘관여하지 마라’ 이 세상 모든 움직임에 니가 관여하지 마라는 거예요. 다른 말로 하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가져오라. 네가 갖고 있지 말고, 너는 그걸 가질 이유도 없고 자격도 안 되는 거예요. 우리조차도 주님의 계획안에 움직이는데 우리가 마치 중심인양 오해들을 하시면 안 된다 이 말입니다. 예수님이 중심이니까. 예수님이 중심이 돼서 어떤 시나리오를 전개하죠.

요한계시록 21장에 시나리오를 이렇게 전개하는 것에 대해서 이건 우리가 믿던 안 믿던 상관없이 일은 그대로 진행됩니다. ‘제가 이걸 믿었습니다.’한다고 해서 계획이 더 빨리 되고 ‘저는 이걸 안 믿습니다.’ 한다고 해서 계획이 늦춰지고 그런 게 없어요.

그래서 여기에 나오는 계획을 앞으로 이야기할 건데, 모든 계획에 대해서 지난 시간에도 했습니다마는 하늘에서 예루살렘이 내려오고 신부하고 신랑이 혼인잔치하고 모든 눈물도 씻겨주고 하는 이 모든 것이 주님께서 그냥 치르는 일이기 때문에 마태복음에서는 이걸 혼인잔치라 하지 않습니까? 혼인잔치의 음식 준비나 콜라, 사이다, 이런 거, 순서, 자리 마련, 그것은 참석자가 걱정할 이유가 없어요. 참석자가 거기 참석만 하지 지가 왜 혼인잔치, 그걸 걱정합니까? 딸 웨딩드레스는 뭘 입히고 아들은 어느 자리에 앉히고 그것은 본인이 관여할 게 아니에요.

만약에 관여하면 뭐가 생긴다 했습니까? 실망만 생기는 거예요. ‘아, 인생 더러워서 못 살겠다.’ 이런 식으로 한강 다리에 여러 번 왔다 갔다, 이게 뭐냐 하면 괜히 헛바람 불어서 그래요. 괜히 지가 관여할 것도 아닌데 주제넘게 관여해 놓고 지 뜻대로 안 됐다고 지가 자기 성질에 부딪혀서 자기 성질을 못 이겨서 욱하는 성질, 처음부터 관여하지 말라고 했는데 괜히 뭔가 얻을까 싶어서 해놓고는 뜻대로 안 되니까 화는 주님한테 분풀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관여하지 말라는 이유가 있어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너의 미래가 아니고 예수님의 미래, 나의 미래를 예수님의 미래로 교체를 해나가시는 것이 성도됨을 우리에게 적용시키는 형식 이예요. 우리는 우리의 미래가 있거든요. 우리가 미래가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이게 어려운데 과거를 돌아보면서 우리는 늘 살아갑니다. 현재 내가 어느 정도인지 하는 것은 그냥 ‘내가 옛날에 이렇게 생각했는데 지금 이렇게 되었구나.’ 항상 우리가 비교하는 그것이 지나간 과거의 경험가지고 지금 자기가 기분 좋아해야 되는지, 기분 나빠해야 되는지를 그걸 전제로 하는 거죠. 볶음밥을 먹는데 좀 싱겁다. 이걸 어떻게 알았지? 싱거운지 어떻게 알았어요? 혀 맛이 과거의 경험상 요정도 간이 맞아줘야 맛있는 건데 거기에 비해서 오늘 간은 좀 싱겁다. 이렇게 되잖아요.

애들이 성적표 가져왔을 때 가정에서 보면 항상 비교하는 게 과거에 내가 경험했던 것이 축적된 것에 비해서 그것을 잣대로 해서 ‘너 왜 공부 못했어?’ 또는 ‘너 왜 공부 잘했어?’ 이렇게 하는 거예요. 과거를 기준해서 현재를 생각하고 과거라 하는 것은 반드시 기대와 꿈이 있거든요. 과거의 기대와 꿈이 있는 것을 현재가 미흡하니까 그걸 +ℒ, 마저 채우는 것을 미래라고 하는 겁니다. 미래를 이끌어가는 추진력은 어디서 나옵니까? 과거에서 나오고 과거의 경험에서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과거의 경험이란 말을 이걸 분명히 할 필요가 있어요. 우리는 과거에 많은 것들을 경험했지만 다 기억을 못합니다. 못하기 때문에 경험한 것 전부 다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경험한 것 중에서 현재 내가 유용하다. 나한테 도움이 된다 싶은 것을 따로 선택해서 고것을 내가 기억하는 과거라고 일방적으로 만들어 놓고 그 기대와 꿈을 이루기 위해서 미래에 스스로 어떤 용기를 부여하는 거예요. ‘그래 하면 돼, 나는 할 수 있어.’ 어디 기준해서? 과거에 경험했던 그것에서 꿈이 나오고 기대가 나오니까 그걸 채우는 식으로 미래를 내다보는 겁니다.

그런데 그 미래를 달성하기 위해서 뭘 이용해야 되느냐 하면 주위 환경을 이용해야 되거든요. 그 환경이 성경대로 하면 우리가 관여하지 말아야 될 환경이거든요. 처음에 이야기했잖아요. 처음부터 관여하지 마라 했는데 자기가 과거에 경험한 것, 기억한 것, 자기의 꿈과 기대가 바짝 군기가 들다 보니까 관여하지 말라는 소리는 안 들리고 무조건 나한테 유리하고 이익이 되는 것은 다 무조건 끌어당기는데 급급하죠.

그렇게 되면 이 미래는 뭐냐 하면 나의 미래가 되죠. 나의 미래가 현실 속에 다가올 때 누가 가만있지 않습니까? 그 사람이 성도라면 주님이 가만있지 않아요. 왜, 주님께서 그 사람이 성도되기 위해서는 주님이 생각한 미래의 성도거든요. 어려운 말이다. 미래의 성도! ‘성도는 적어도 이렇게 돼야 되고 이런 자리에 있어야 되고, 이런 나라 여기 살아야 돼.‘라는 것을 누가 압니까? 예수님이 알아요. 그래서 이게 예수님이 아는 미래의 성도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미래라 하는 것은 나의 과거에서 유래된 거예요. 만약에 예를 들면 TV 연속극을 봤다. 연속극을 아예 안 보는 사람은, 특히 광주에 계시는 분들은 연속극, TV, 개콘, 아무것도 안 봅니다. 그분 특징들이 그래요. 아무것도 안 봐요. 그런데 만약에 어떤 가정에서 연속극을 봤다 하면 연속극을 보고 난 뒤에 일상생활을 하면서 무슨 생각을 하느냐 하면, ‘야, 연속극의 주인공이 위기에 처했는데 다음번에 할 때 주인공이 빨리 악한 놈들한테서 빠져나와야 될 텐데.’ 지금 그 생각한다고요. 자기 일을 하면서. 아무 드리마나 개콘이고 아무 것도 안 봤으면 그 경험, 그 체험이 없기 때문에 자기의 미래상에는 그 체험에 기준한 플러스알파가 없는데 뭔가 본 게 있기 때문에 ‘아휴, 시나리오 작가가 잘 써야 돼. 주인공 빨리 살아나야 돼. 좋아하는 사람하고 결혼해야지, 엉뚱한 못된 궤계에 빠지면 안 돼.’ 지가 드라마 본 게 있다고 그것 때문에 한 주일 내내 그거 기다린다고, 어떻게 전개될까. 그것이 자기 위주의 흐름이죠.

현실은 하나님이 관여하는데 우리는 억지를 부립니다. 그걸 제가 수요일 날 이야기했나? 억지 인생! 전부다 인간은 과거 경험 때문에 인간은 억지로 살아요. 억지 인생 때문에 억지 인생이 억지 미래를 낳고 그 미래는 결국은 뭐가 남는다 했습니까? 실망만 남을 뿐이죠.

그래서 하나님의 방법은 뭐냐 하면 나의 미래와 주님의 미래를, 미래의 성도의 상, 성도의 모습은 우리는 모르고 예수님만 아십니다. 우리는 뭐가 되느냐, 과거에 익히 아는 것 가지고 이것이 성도 아니겠는가, 지 혼자, 지 맘대로 지 멋대로 지 혼자 일방적인 생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나의 미래를 뭐로 바꾸느냐 하면 실망으로 바꿔주십니다. 고맙게도. 나의 미래가 뜻대로 안 되는 그 실망감을 일으키는 그 고마움! 그 축복! 그거 매일 받아야 돼요. 매일 실망하는 기쁨이 있어야 돼요. 이거 말이 안 된다고요. 실망하는 기쁨! 내 뜻대로 안 되게 하시는 주님의 주도적인 강압적인 이끄심, 강제로 질질 끌고 가시는 그 손길, 그것이 바로 우리의 미래에 예수님의 미래를 주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나의 미래는 내 몸에서 나온 것이라면 예수님의 미래는 예수님의 몸에서 나온 거죠. 예수님은 자신의 몸 가지고 뭘 했습니까?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했죠? 우리는 다 이루었다 보다도 내 몸 가지고 내 욕구를 다 이루려고 애를 쓰고 있죠? 착해지는 것도 그렇고 부자 되는 것도 그렇고 우리 가정이 다 화목한 것도 그렇고 우리 애 공부 잘하는 것도 그렇고 뭐든지 내 몸이기 때문에 남의 몸이 아니고 내 몸이 내 몸이라는 이유 때문에 내 몸이 즐기고 내 몸이 욕구하고 원하고 기대하는 것을 그걸 미래상으로 담아서 우리는 간곡히 소녀의 기도처럼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소녀의 기도 아십니까? 옛날 한국 버스에 보면 ‘오늘도 무사히’ 하늘색 원피스 입고 꿇어앉아 기도하는 모습. 간곡히 비나이다. 이게 성사되기 힘들 것 같으면 새벽기도 40일 연속으로 해버리고, 여기에 강도를 높이죠.

그런데 이건 어디까지나 누구 좋으라고? 그 일이 잘 될 때 누가 좋습니까? 이 명박 대통령이 좋습니까? 박 근해가 좋습니까? 내가 좋은 거예요. 내 기쁨을 얻기 위해서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멸망되는 세상에서 멸망돼서 재개발하는 그 현지에 가서 내가 원하는 것, 내가 기뻐하는 것, ‘이거 왜 버리지? 이 귀한 걸 왜 버려?’ 그런 것을 내 기뻐하는 것을 세상 속에서 끄집어내는 이유가 과거에 그런 것 때문에 나에게 기쁨을 주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나올 때 그들이 원했던 음식은 바로 애굽에서 먹었던 음식이거든요. 옛날에 애굽에서 먹었던 음식을 그대로 원하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것이 니 몸 중심이기 때문에 만약에 그런 식으로 가버리면 그 하늘나라는 누가 오야붕이 되고 누가 자꾸 신경 쓰느냐 하면, 하늘나라 가도 깡패 짓 하는 거예요. ‘누구야? 나 하늘나라 왔어. 나 건드리면 가만 안 두겠어.’ 이게 하늘나라 조폭이지, 그게 천국이겠습니까?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 다 그런데.

그러니까 천국은 면류관을 예수님 몸 앞에서 우리의 생명의 면류관까지도 반납을 하려면 미리 가기 전에, 혼인잔치 들어가기 전에, 미래의 신부, 우리가 원하는 내가 원하는 신부 말고, 주께서 주의 몸에서 발생된 신부, 그 신부의 모습으로 강제로 주께서 교체작업에 나섭니다. 그때 발생되는 감각이 뭐냐, 실망입니다. ‘나 세상 그만 살래.’하는 실망. 주님께서 ‘진작 그래야지. 처음부터 그래야지. 니가 살려고 하는 것이 니가 잘못이다.’ 이 말이죠.

이겁니다. 우리 인생은 간단한 거예요. 지금 안 죽어서 사는 겁니다. 살려고, 살려고 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안 죽었기 때문에 지금 살아있는 거예요. 완전히 요양병원이죠. 요양병원. 침해 1급 이예요.

우리의 몸에서 불룩불룩 죽음의 흔적이 계속해서 나옵니다. 혈압도 높죠. 당뇨죠. ‘니는 지금 죽일 거야‘ 하는 흔적이 볼록볼록 계속 튀어나오는 거예요. 우리는 그걸 강제로 운동을 해서 계속 누르고 치수재고 혈압재고 하지만 백날 해도 튀어나오고 나이 들면 또 튀어나와요.

언제까지 니 몸이 원하는 너의 미래상에 니가 얽매여 살 것이냐, 주께서 좁은 길로 가면 우리 몸 자체가 교체돼야 됩니다. 뚱뚱한 몸 가지고 좁은 길 가면 둘이는 비좁아서 못가죠. 홀쭉해야 돼요. 홀쭉해서 주와 함께 좁은 길 갈 때, 이게 제대로 된 넓은 길이다. 이렇게 생각이 들어야 되거든요. 그 작업을 할 때 거기에 적용되는 그 계획서, 그것이 예수님 몸에서 나오는 계획서가 요한계시록 21장에 펼쳐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다시 한 번 제가 강조합니다만 이것은 우리가 ‘관여하지 마.’ 또는 관여 안 해도 되게 돼 있습니다. 우리의 미래? 우리가 걱정 안 해도 거기에 어느 날 거기에 잠자고 나면 도착돼 있습니다. ‘아~ 잘 잤다.’ 기지개 펴고 일어나면 천국에 이미 와 있습니다. 뒤 돌아보면 주께서 그렇게 다 하셨어요. 우리가 그때에 비로소 평소에 관여하지 말라는 그 의미와 뜻을 그때에야 온전히 알겠죠. ‘아!’ 다 일방적으로 다 하시는데 우리는 걱정이 되어서 내 뜻대로 안 된다고 지옥 가지 싶어서 혼자 걱정을 늘어지게 했을 때 마귀가 옆에서 장난했는데. 관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 관여를 안 했을 때 어떤 현상이 벌어지느냐, 성경말씀대로 된다고 하니까 일단 기분은 좋다마는 하지만 내가 아무것도 안 했을 경우에 과연 성경말씀대로 그대로 적용된다는 보장이 없지 않느냐, 이렇게 생각할 텐데, 관여하지 않는 세계에서 뭐가 생기느냐 하면 투쟁, 전쟁, 전투. 전투와 전쟁의 차이점은 전투라 하는 것은 소규모에서 벌어지는 다툼을 전투라 하고 더 넓은 전체를 가지고 전쟁이라 하거든요. 보통 용어를 쓸 때.

전쟁과 전투와 투쟁을 우리가 목격하게 됩니다. 관여하지 않을 때 우리가 만약에 우리 인생에 관여하지 않으면 주님께서 우리의 대장되셔서, 찬송가에 나오죠? 주께서 대장되셔서 뭘 하느냐, 전쟁과 전투와 싸움과 투쟁과 씨름을 하시는 거예요.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평소에 가정에서 엄마가 시장에서 일 하는 것은 알아요. 엄마가 어떻게 돈 버는지는 몰랐어요. 그래서 애가 고등학교 때쯤 돼서 엄마가 집에 오면 항상 나를 반기고 방긋이 웃고 천하에 천사처럼 인자하신 분처럼 했는데, 그래서 인자하게 돈 벌어서 내 공부시키는구나. 참 고맙다. 그런 생각 하면서도 그래서 엄마가 시장에서 어떻게 일하는지 보고 싶어서 몰래 가보니까 그렇게 집안에서 인자한 어머니가 돈 한 푼 벌려고 팔 걷어 부치고 ‘뭐, 옷 보기만 하고 그냥 가는 게 어디 있어? 옷 봤으면 사야지.’ 하고 붙들고 싸우고 시장바닥에서 온갖 비난 소리를 들어가면서 기어이 한 푼 벌려고 애 쓸 때, 아, 우리는 관여하지 말라고, ‘니는 내가 벌어준 돈 가지고 열심히 공부나 해라.’ 관여하지 말라고 해서 포근하게 온실 안에서 살았는데 이러한 혜택이 오기까지 우리 어머니는 바깥에 나가서 치열한 목숨 건 벌이고 있다는 걸 알죠.

바로 예수님도 마찬가지예요. 우리에게 관여하지 말라는 미래의 성도, 니가 생각하는 성도 아니고 내가 알고 있는 성도, 성경에서 신부라 하죠. 그 화려한 신부의 모습, 뒤에 가면 보석입니다. 그 보석 같은 신부의 모습이 되기 위해서 ‘너는 관여하지 마, 내가 알아서 다 그렇게 시나리오대로 다 되게 돼 있어.’라고 했는데 막상 그것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현장에서는 예수님은 치열한 악마와의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학생은 엄마 싸우는 것 보고 어떻게 하겠습니까? 가만있겠어요? 같이 대들겠습니까? ‘아저씨, 왜 그래요? 우리 엄마가 연약하다고 무시하는 거예요?’ 같이 대들죠. 요게 바로 성도의 싸움! 이건 자기를 위한 싸움이 아니고 자기가 학급에서 친구들과 싸우는 게 아니고 엄마의 전쟁에 지가 뛰어든 거니까 이게 주님의 전쟁, 또는 복음을 위한 전쟁, 또는 주님을 위한 전쟁, 나의 자존심이 아니라 주님의 명예를 높이기 위한 전쟁, 복음과 비 복음,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했는데 ‘아니야, 행함도 있어야 돼.‘라고 우기는 그 세력과의 양보할 수 없는 전쟁에 우리는 거기에 참여하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보면 성경에서 공짜로 구원받는다 해놓고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고 했는데 딴 데 보니까 ‘싸워라’ 하는데, 오늘 본문 7절 봅시다. 뭐라고 돼 있죠? “이기는 자....”라고 돼 있죠. 거기 6절 끝 하고 좀 모순되잖아요. 6절 끝에 보면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목 마른 자에게 어떻게 준다 했습니까? 값없이 준다 해놓고 7절에 보면 이기는 자, 에이고, 앞 다르고 뒤 다르고, 왜 두말 하나 이렇게 나오겠죠. 이긴 값으로 받아야지, 값없이 하려면 아무것도 안해야 값없이 되는 게 세상은 그렇잖아요.

이 구조, 이 논리는 방금 이야기한 데서 설명됩니다. 여기서 ‘이기는 자’라 하는 것은 이미 이길 수밖에 없는 싸움, 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졌다’하는 것이 성립이 안 된 상태에서 싸움에 투입되는 거예요. 짐이 없는 이미 이기기로 작정된 전쟁터에 우리는 숟갈 하나 들고 젓가락 들고 가는 것뿐인데 지 솜씨 자랑하지 말고 솜씨 잘나서 이긴 게 아니고 이미 이겨버린 전쟁에 지는 폼만 재는 것뿐 이예요.

남자 주인공이 전투나 주먹다짐을 하는 영화에 보면 괴물하고 싸울 때 영화에 보면 괴물 없어요. 그냥 혼자서 픽, 픽 주먹만 날리죠. 그런데 괴물은 그래픽해서 영화를 합성해 보면 주인공이 괴물하고 싸우는 게 되죠. 우리는 마귀도 안 보이고 뭐도 안 보여요. 우리는 만날 뭐하느냐 하면 내 과거에 기준해서 그 과거에서 뭘 만들고? 내 욕구의 미흡함을 끄집어내서 그걸 현재 느껴서 그 미흡함을 채우기 위해서 미래에 나서는 추진력을 우리가 얻고자 하죠.

 그러면 이 미래라 하는 것은 미래의 일상이라 하는 것은 다 어디서 구축된 겁니까? 과거의 누적된 경험에서 누적된 것이고, 그러면 과거에 경험한 것 다 느낍니까? 아니죠. 현재에 유용한 것, 현재 나한테 이익이다 싶은 걸 따로 뽑아서 ‘이건 과거에 내가 생각했던 꿈이었어.’라고 일방적으로 편집을 하는 거예요.

우리가 평소에 행동하는 것이 그냥 무심코 행동하지만 분석해 보면 딱 요겁니다. (과거, 현재, 미래) 우리는 시간성 위에서 그냥 지렁이처럼 꿈틀대고 있거든요. 항상 인간은 시간성에서 못 벗어나요. 기차 철로 같아요. ‘아, 요것이 어제는 이랬는데 오늘은 어제보다 실적이 적었어. 다음에는 더 벌어야지.’ 항상 단선 철도 같아서 이 바깥으로 나갈 줄을 몰라요.

그래서 주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바깥으로 나가게 하는데 어떻게 나가게 하느냐, 우리가 관여할 필요가 없는 주님의 세계가 기다리고 있는데 우리는 내 고집을 부려서 주님이 좋은 것보다 내 좋은 게 나한테 더 좋아요. 주님이 기뻐하는 것보다 내가 기뻐하는 것이 나한테 더 큰 기쁨이 되고 그 기쁨이 다음에 내 행동을 할 때 하나의 에너지, 힘이 돼요.

주님께서 십자가 지셨다. 전혀 내 일에 도움이 안 돼요. ‘요거 하면 돈 벌게 해줄게.’ ‘ 그래, 앗싸,’ 그런 식으로 우리는 주님의 전투에 참여합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허풍쟁이죠. ‘주여, 주여’ 하면서 실은 속셈은 누구에게 있습니까? ‘내가 주님 일 하니까 원래 내가 노렸던 그거 이루어져야 됩니다. 주님께 요만큼 도움 줬으니까 반대급부로 이만큼 채워줘야 됩니다. 내가 그것 때문에 참여하지, 주님 좋으라고 참여하는 거 아닙니다.’ 이게 내 마음 속에 있어요. 그게 잘못인지 알면서도 원래 인간 자체가 그런데요 뭐. 인간은 자기가 자기를 바꿀 수 있는 요소가 없습니다. 바꾸려면 지가 인간밖에 나와서 자기를 바꿔야 되는데 그 생각하는 출발지가 자기기 때문에 내가 생각을 바꾼다는 그 자체가 그 자체를 바꿔야 되기 때문에 이건 말이 안 돼요.

그래서 그대로 사시면 되는 거예요. 사시면 되는데 믿음이 있는 사람은 어쨌든 저쨌든 간에 구원받는 것은 내 소관이 아니라는 사실, 이건 내가 관여해서 내가 관여한 만큼 내가 구원받고 이런 것은 주님의 구원방식이 아니라는 것. 그건 이단들이나 다른 종교에서 괜히 우리 비위 맞춰줘야 돈이 나오니까, 그쪽에서 우리 비위 맞춰서 ‘꿈은 이루어진다.’ 이따위 소리 하면서 그런 식으로 설교하면서 괜히 우리의 허풍쟁이 꿈을 정당화 시켜주는 그런 식으로 사기 치는 곳이지, 실제로 예수님은 ‘관여하지 마’ 아예 액자로 만들어서 ‘관여하지 마’ 내 인생에 대해서 내가 개입하지 말라 이 말이죠. 니 인생에 개입하지 말고 니 몸이 느끼는 대로 끌리는 대로 살면 돼요. 운동하고 싶으면 운동하고 잠자고 싶으면  뒤비자고 걸리면 걸리고 아프면 아프고 나으면 낫고 그냥 살라 말이죠.

성경에 나오는 아브라함이나 이삭 야곱 이런 사람이 여러분, 훌륭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걸 성경을 이렇게 보게 되면 그들은 지 맘대로 살았어요. 다만 그들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그들의 하나님이 된 것은 그들이 지 맘대로 산 그것을 주님이 자기 맘대로 하는 재료로 활용했다는 사실, 정신 차렸기 때문에 좋은 재료가 되는 것이 아니고 지 맘대로 사는 그것을 재료로 한 거예요. 그걸 가지고 천국의 레시피 (recipe) 라고 해요. 파, 감자, 못 생긴 감자, 삐져나온 고추, 파, 이걸 주님께서 언약이라는 걸 가지고 전부 다 다다다닥 다듬어서 음식 레시피를 만들어서 보시며 ‘어, 요한계시록 21장에 한번 보자, 하늘에서 예루살렘이 내려오는구나. 쟤가 신부인데 옷이 없구나. 신부를 내가 입혀줘야지.’ 이렇게 예수님이 혼자 다 한다니까요. ‘자, 성전 조직을 끊어버리고 이렇게 끊어버리고.’ ‘이거 끄집어내 주세요.’라고 우리가 하지 말라 말이죠.

우리가 이거 단점이다. 장점이다. 하는 것은 지가 인생을 살면서 좁은 범위 내에서 짧은 인생 가운데 축적된 체험의 편집한 결과에 불과한 겁니다. 어떻게 우리가 이 동네에 살고 짧은 인생을 살면서 ‘옳다. 그르다.’를 온 인류를 다 섭렵해서 뭘 어떻게 이게 기준이라고 정의를 내릴 수가 있습니까? 안 됩니다. 그건 성립이 안 돼요.

자기가 과거에 생각했던 가운데 ‘이것만 옳을 거야. 나쁘다.’ 하는 것은 일방적인 생각입니다. 예를 들면 회사 근무하는 사람이 ‘사장님 저는 아침에 일찍 출근하고 농땡이 안치고 충실하게 일을 하고 난 뒤에 착실하게 퇴근시간에 퇴근했습니다. 저 착실하죠?’ 할 때 ‘너 아픈 사람 위해서 신장 떼 줬어?’ 안 떼 줬잖아요. 그러면 그 사람이 착하다는 것은 뭡니까? 니가 일방적으로 출퇴근 시간 잘 지키면 착하다는 것은 지 정당화를 위해서 지가 일방적으로 생각한 거죠.

치과에 손님 왔는데 ‘얘는요 얼마나 공부도 잘하고 얼마나 엄마 말도 잘 듣고 착실하고 어려운 사람 노숙자도 지나가다 돈 1000원 꼭 쥐어주고 이렇게 합니다.’ 의사 하는 말이 ‘이빨이나 잘 닦아.’ ‘이빨 잘 닦는데요.’ ‘제대로 닦아야지.’ 이리이리 옆으로 닦지 말고 아래위고 제대로 닦아야지.‘ ’누가 이야기해 주는 사람이 없는데.‘ ’내가 이야기 해줄게. 니는 앞으로 이를 옆으로 닦지 말고 위 아래로 결 따라 닦아라.‘ 그러면 걔가 ’에~‘하고 울죠. 왜 웁니까? 자기는 치과 오기 전까지는 자기는 착한 애인 줄 알았는데 치과 와서 새로운 소스, 새로운 정보를 딱 접수한 순간 자기는 이빨 아파도 싼 못된 인간이 되잖아요.

그러니 인간의 경험이라 하는 것은 얼마나 일방적입니까? 얼마나 자기 잘남을 내세우기 위한 핑계거리, 변명거리에 지나지 않는 그것 가지고 어딜 감히 거룩한 흠도 티도 없는 천국에 어디 감히 그걸 건방지게 생각해요? 말도 안 되죠. 차라리 모든 게 이빨만 나쁜 게 아니고 평소에 내가 도와주고 한 모든 게 죄인이고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이렇게 고백하도록 주께서 자기 자신에게 실망감을 안겨주는 겁니다. 그 애가 치과에 안 왔으면 자기가 얼마나 잘난 체 하겠습니까? 치과에 와서 한번 호되게 당하고 난 뒤에는 ‘앞으로 이빨 똑바로 닦아. 돈 때문이 아니야 니 건강을 위해서야.’ 한번 그 소리 듣고 난 뒤에는 그 소리 들을 때 얼마나 자기에게 낙심이 되겠습니까?

그런데 돌이켜 생각해 보면 ‘아!’ 이렇게 내 자신을 너무 몰랐다는 사실, 내 자신을 너무 부풀어 거품이 많은, ‘왜 나는 이렇게 완벽해? 몸도 되고 키도 되고 인물도 되고 왜 이리 잘난 거야?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냐?’ ‘이 왕궁에서 왕비가 제일 예쁩니다.’ 그것만 들었으면 아무 문제가 없는 걸 가지고 그런데 이 나라 밖에 있는 누가 있습니까? ‘백설 공주 있습니다.‘ 하니까 그때부터는 미흡함을, 드디어 백설 공주 잡으라는 새로운 미래에 대한 할 일이 생깁니다. 그래서 우리의 할 일이라 하는 것은 상당히 수상합니다. 분명히 노림수가 음흉해요. 내가 이렇게 정당한데 아직도 모자라? 그렇다면 이것마저 달성해서 내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를 똑바로 보여줄게.’라는 자기 욕심, 그게 우리의 모습인데 그 말도 안 되는 이 인간을 가지고 주님께서는 자기 군사라고 거룩한 영적 전쟁에 우리를 재료로 사용해 주시는 이 은혜, 아! 우리는 너무나 감사하죠.


인간답게 살았기 때문에 군사가 아니고 세리와 창기와 막가는 인생인데 불구하고 강도인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완벽함을 보여주기 위해서 허접스러운 우리를 지상에서 그냥 사용해 주시는 겁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두고두고 앞으로 계속해서 감사할 일이 되는 겁니다.

다시 한 번 이야기하지만 나의 미래가 있어요. 나의 미래는 우리는 매일같이 솟아납니다. 만약에 우리가 복음을 알면 이 복음을 아는 것 갖고 어디에 써 먹을까 하는 것도 나의 미래가 되죠. 그런데 나의 미래를 뭐로 바꾼다? 주님의 미래로 바꾼다. 나의 미래는 뭐로 바뀌고? 곧장 안 가서 실망감으로 바뀝니다. 실망감이 연속되게 되면 자기 자신이 죄인인 것을 알게 되죠. 죄인인 것을 알게 되면 이것은 악마가 더 이상 그 사람한테는 건드릴 게 없어요. ‘니 잘났지? 잘났지?’ 하면 ‘잘났지, 잘났어.’ 하고 깨춤 추면 좋은데 ‘너 잘났어?’하면 ‘어, 나 안 잘났어.’ 재미가 없어요. 찜 맛이 없어서 마귀가 건드릴 게 없어요. ‘니 기도하면 얼마나 잘 되나 보자.’ ‘나 기도하면 더 망하지 싶어.’

기존 교회에서는 이 말을 못 알아듣습니다. ‘여러분, 열심히 기도하시면 더욱 더 망합니다.‘ 이 말을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습니다. 개척교회 하는 사람한테 ’열심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교회 해체될 겁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른다 말이죠.

자, 방금 이야기한 것을 좀 더 어렵게 해보겠습니다. 4절에 봅시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오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하면서도 난해한 부분에 접근해 가고 있습니다. 어떤 것이냐 하면 처음 것들은 다 지나갔죠? 처음 것, 다른 말로 하면 옛 것이죠? 옛 것은 다 지나갔다 말이죠. 그러면 제가 먼저 질문을 던져보겠습니다. 옛 것 안에 새 것의 요소가 들어있습니까? 안 들어있습니까? 옛 것을 옛 것이라 할 때 옛 것을 없애고 새 것을 만들 때, 옛 것 속에 새 것의 어떤 힌트나 흔적이나 요소가 일부 들어있는 걸까요? 안 들어있는 걸까요? 흔적이 있다고 했죠. 요 질문을 해놓고 답변하는 과정이 좀 복잡하니까 제가 답변을 해보겠습니다.

인간의 몸은 세포로 돼 있는데 세포는 둘로 나눠져 있죠. 체 세포와 생식 세포로 돼 있습니다. 생식 세포 빼놓고 다 체세포인데 생식세포라 하는 것은 남자는 정자, 여자는 난자거든요. 그런데 이것이 1885년에 어떤 생물학자의 주장에 의하면 체세포는 죽지만 생식세포는 불멸하다는 거예요. 이게 19세기 말에 그렇게 이야기했는데 1953년에 왓슨과 크릭이란 사람이 DNA구조를 발견했어요. 그래서 나는 죽어도 나의 DNA가 타인에게 전수가 가능한 거예요. 그러면 나의 DNA 일부가(사실 반이지만) 자식에게 주게 되면 자식이 다른 사람하고 결혼하게 되면 일부가, 양은 어쨌든 상관없이 내 DNA는 계속해서 확산되는 거죠. 이건 불멸이죠.

그런데 내가 세상에서 운동을 해서 생긴 근육, 이런 것은 남한테 전이가 됩니까? ‘너 운동 좀 많이 해 놔라. 내가 근육이 없을 때 니 근육 나한테 떼 줘.’ 그게 안 되죠? 그런데 어떤 여자보고 ‘당신 나하고 결혼해 주렵니까?’ ‘왜요?’ ‘내 DNA를 내 자식에게 전하기 위해서 당신 몸이 필요합니다.’ 이건 말이 되죠.

그래서 불멸하는 것과 소멸하는 것, 사라지는 것이 우리 인간 내부에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때부터 인간들은 뭐냐, 새 것과 옛 것이라는 것을 소멸할 때는 소멸하지만 새로운 것, 영원한 것, DNA는 어떻게 조작을 하든지, DNA에 어떻게 영향을 줘서 좀 더 우수한 그러한 DNA를 자식에게 물려줄 수 있는가, 그때부터 그런 연구를 시작하는 거예요. 지금 의학에서 하는 모든 초점이 그러한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자, 방금 제가 인간의 몸의 구조를 예를 들었는데, 하늘나라도 그렇습니까? 옛 하늘과 옛 땅은 불에 타서 없어지죠. ‘그러면 옛 하늘과 옛 땅 속에 불멸의 요소가 들어 있습니까?’라는 질문과 아까 한 질문과 같은 질문 이예요. 이게 정말 어려운 문제예요. 만약에 불멸의 요소가 있다면 만약에 옛 하늘과 옛 땅을 불에 다 태워버리면 뭐도 같이 태워집니까? 그 불멸의 요소도 태워지니까 결국은 옛 하늘과 옛 땅과 새 하늘과 새 땅은 연속성이 없어요.

그래서 요 문제를 풀려면 우리가 어떤 오해를 갖고 있으니까 어떤 것이 오해냐 하는 것부터 해야 되죠. 여기 요한계시록 21장 1절에 보면 새 하늘과 새 땅이 나오죠? 우리가 알기로 새 하늘과 새 땅은 더 이상 소멸하거나 불에 태우지 않고 영원하다고 알고 있죠? 그런데 이것이 새 하늘과 새 땅이 영원하다고 알고 있고 그걸 믿고자 하고 그 아는 것을 기뻐할 때 그 기뻐하는 그 심보가 은연중에 뭐냐 하면 내가 소멸되지 않고 내가 영원하려는 어떠한 소식과 정보를 내가 습득하고 이해하면 되느냐 하는 노림수를 내가 갖고 있으면서 요한계시록 21장 1절을 볼 수가 있어요. 요거 반칙입니다. 요거 안 되거든요.

이러면 성경해석 잘못된 거예요. 옛 하늘과 옛 땅 중에서 불멸하는 것을 따로 추려내서 그것을 옛 몸에 속한 옛 몸에 해당되는 내가 그 옛 하늘과 옛 땅 속에 있는 영원한 것을 가지고 이렇게 연결시켜 버리면 나의 개인 몸도 새 몸으로 달라질 수 있는 그런 가능성과 희망이 보인다. 이렇게 해서 믿어 버리면 이건 믿음이 아니고 이건 교육 이예요. 훈련이라니까요. 교육이고 훈련이죠.

그러면 주님께서 학원차려서 천국 학원, 수강생 모아서 한 달에 5만원 내게 해서 ‘여러분 속에 불멸한 것 있죠? 고거 주께서 주신 거니까 잘 간직하셨다가 나중에 천국에 오시면 그거 내밀면 통과됩니다.’ 그렇게 가르치면 되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신학에서는 뭐라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본 겁니다.

우리 속에 짐승과 다르듯이 짐승은 하나님의 형상이 없는데 인간에게는 있다. 그럼 하나님의 형상은 뭐냐 하는 것은 무엇과 비교하면 되냐 하면 짐승과 인간의 차이점만 끄집어내면 그 차이점만 하나님께서 특별히 인간이란 이름 때문에 준 거라 그렇게 생각한 거예요. 그게 의와 거룩 이런 것도 있지만 좀 더 범위를 넓혀보면 직립보행, 언어 사용, 그리고 도구 사용, 불 사용, 이런 거, 특별하게 인간에게만 있는 거, 인간의 사회성, 이런 것들을 가지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런 것들을 이렇게 주장하다 보면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꼭 피까지 흘려서 죽게 할 이유가 없어요. ‘내 말을 듣고 내 말을 믿는 자는 구원하리라.’ 이러면 되는데 ‘내 피와 내 살을 먹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생명이 없다.’는 말은 이건 어울리지 않습니다. 이건 이 말이 들어갈 자리가 없어요. 공부해서 하면 되는데 학교 선생님이 ‘자, 책 보고, 삼각함수 코 싸인, 싸인, 이렇게 가르치면 되는데 갑자기 수학 시간에 선생님께서 칼을 내서 자기 목을 따면서 살점을 뜯어내면서 ’내 피와 내 살점을 먹지 않으면 너희에게 수학 100점은 없느니라.‘ ㅎ 이게 말이 안 되잖아요. 왜 이리 과격합니까? 우리 인간들이 얼마나 순한 인간인데, 우리 인간들이 얼마나 착합니까? 하나님이라 하면 껌뻑하고 ’종이 듣겠나이다.‘ 이럴 정도로 착하고 착한 순한 양인데, 교도소에 있는 사람 말고 교회 온 사람들, 착한 사람 앞에서 이거(목) 베고 못 박아 버리고, 문경의 어떤 미친 사람처럼 지가 지한테 못 박고 피 흘려서 양푼에 ’피 담아라.‘ 해서 담고 살도 담아서 ’내 살과 내 피를 마시지 않으면 영생이 없다.‘

이건 말이 통하겠다는 것이 아니고‘ 아예 너희들은 내 말을 못 알아듣게 돼 있어.‘라는 그런 뜻인지, 어느 쪽입니까? ’아버지께서 내게 보내지 아니하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 그 이야기하시려고 오신 거잖아요.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에 죽음이 없이는 안 되듯이 너희들이 아버지 나라에 가려면, 또는 천국 가려면 너희들의 죽음 가지고는 안 돼요. 베드로의 죽음도 소용없어요. 예수님의 죽음만이 거기 있어야 가는데 예수님께서는 왜 교육이나 훈련이나 삼청교육대 그런데 안 가고 왜 예수님이 피를 흘리는 이유를 니가 아느냐 이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성령이 아니고서야 너희가 그것은 모르느니라. 따라서 이 피에 대해서 설명할 때 성령 받은 사람과 받지 않은 사람을 가려내는 식으로 피에 대해서, 십자가에 대해서 언급을 해야만 한다는 겁니다. 지나 개나 하는 그런 십자가는 십자가도 아니에요. 성령을 못 받은 사람은 화를 발칵 내고 뛰쳐나가야 될 정도로 그렇게 십자가는, 예수님의 복음은 그렇게 전해야 됩니다. 그리고 뛰어나가는 그 사람을 보고 한마디 더 해야 돼요.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 교회가 저주가 없으면 안 됩니다.

제가 베르그손 글을 하나 썼지만 심판을 모르고, 마지막에 복음적 표현을 써놨죠? 그렇게 공부를 많이 하고 많이 아는 사람이 왜 주께서 분노해서 화산 터지고 지진이 일어나는 사실을 어떻게 이 땅에서 철학 가지고 화학 가지고 아무리 분석해도 의사가 아무리 실험실에서 실험해도 하나님이 분노를 거기서 찾아낼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신학자가 아무리 연구해도 거기서 하나님의 진노와 분노를 찾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분노와 진노는 하나님의 분노와 진노를 받은 사람만이 알아요. 그야말로 하나님 때문에 실망을 느껴야 주께서 화내고 있다는 것, 죄인에 대해서 화내고 있다는 것을 안 사람만이 ‘야!’ 살아있는 것이 고마운 줄 알죠. 죄인을 받아주시는 주님의 고마움을 알고 피를 흘린 고마움을 아는 거죠.

회원 모집하려고 강의하거나 설교해서는 안 됩니다. 마치 그러한 것이 추수 때와 같아요. 추수할 때 조심해서 추수해야지, 창고에 가라지가 섞여서는 안 된다 이 말이죠. 아주 주의를 요하는 거예요. 알곡 있는 것만 오도록 가라지와 알곡을 가려내는 그런 규정은 우리의 과거의 경험이 아니고 우리 몸에서 나온 경험이 아니고 ‘니가 6.25 때 폭탄 맞아 봤어? 안 맞아 봤으면 지옥 가.’ 이러면 안 된다니까요. 그걸 자기 몸의 경험이고. 그 경험도 사실 자기가 경험한 게 아니고 현재 자기가 유용하다 싶어서 일부러 안 잊어버리고 계속 반복해 놓은 거예요.

인간은 현재 자기가 유용한 것과 유용하지 않은 것을 다 가려냅니다. 그래서 아무리 과거의 경험 가운데서도 자기에게 필요 없다 싶으면 그런 것은 채택을 안 하는 법이예요. 얼마나 인간이 자기 위주인데요.ㅎ

알곡과 가라지를 가려내는 그 기준에는 십자가 복음이 있고 그 복음이 무엇이냐 해서 복음이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그 복음에서 파생돼 나오는 여러 가지 계열, 그 계열이 뭐가 되느냐 하면 요한계시록 21장이 되는 겁니다.

그림으로 그려보겠습니다. 간단하게 그릴게요. 피라미드, 꼭지 점에 이렇게 십자가가 있다고 합시다. 십자가 피가 흐르면서 무엇과 만나느냐 하면 이 죄 많은 세상과 만납니다. 이 죄 많은 세상이라 하는 것은 강의 죽 한 것처럼, 자기 몸, 자기 과거의 경험위주로 미래를 생각하는, 자기 밖에, 자기 몸밖에 모르는 죄많은 세상이 하나님과 만나면서 여기서 여러 가지 갈등과 시기와 오해와 그리고 격분 분노 무시 이런 것들을 마주치게 됩니다.


뺨을 때리면서 ‘니가 메시아냐? 우리 알아 맞춰봐. 누가 뺨을 때렸는지.’ 이런 식으로. 예수님 눈을 감겨놓고 뺨을 때리면서 ‘니가 메시아 같으면 선지자 같으면 우리 중에 누가 뺨 때렸지?’ 예수님을 자기 게임용, 자기 기쁨을 위한 게임용으로 사용한 거예요. 그런 것과 만나면서 피가 피답게 계속 내려오는 거예요. 그러면 이 중에 누가 섞여 있겠습니까? 역시 우리도 섞여 있는 거예요.

‘왜 기도했는데 내 뜻대로 안 됩니까?’라고 또 예수님 뺨을 때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 ‘십자가 복음 다 믿는데 왜 내 뜻대로 안 이루어지느냐 이 말입니다. 하나님이여, 하나님 말 귀를 못 알아듣네.’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이렇게 흘러나오면서 요한계시록 1장부터 21장까지 계속 발생되는 거예요. 온갖 전투와 전쟁, 숨어있는 마귀, 모든 성경에 나오는 단어 하나, 하나, 땅의 임금들과 거짓 선지자, 이것이 위에서 뭐가 흘러내려온다 했습니까? 예수님의 피가 적셔 내려오니까 피가 적시니까 멀쩡하던 세상이 예수님의 피에 대해서 조직적으로 반항하고 반발하는 악한 세력의 하나의 기지, 이 세상 전체가 하나의 군사들이예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모독하기 위해서 편성된 악마의 군대들로 이 세상이 짜여 졌다는 걸 아는 겁니다.

지난 수요일 날 어제 이야기했죠? 예레미야가 환상을 보는 순간 주변은 갑자기 뭐가 된다? 주변은 전부 다 지옥이 됩니다. 우리가 평소에 정 나누고 살던 사람들, 친하게 지내던 이웃 사람이 내가 복음을 발설하는 순간부터 그들은 자기의 본색을 드러냅니다. 같은 가족끼리도 마찬가지예요. 편하게 살려고 하면 입 다물어야 돼요.

그리고 나서 여기에 전개되는 모든 개념들이 ‘옛 것은 지나갔으니 새 것이 되었다.’는 말이 우리 살기 위해서 새 것이 아니고 주의 피 안에 담겨있던, 피 속에 담겨있던 새 하늘과 새 땅이 비로소 만개되는 거예요. 어떻게? 우리의 기대와 실망, 이 세상에 대한 기대와 실망을 완전히 꺾는 식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이 우리가 좋아하는 새 하늘 새 땅이 아니고 우리가 기대하는 새 하늘 새 땅마저 구겨버리고 찢어버리는 식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이 전개됩니다.
10분 쉽시다.
 이한례 (IP:203.♡.40.73) 12-05-13 17:01 
가락교회120503-요한계시록21장(목마른 자)38강b-이 근호 목사

제 38강b

자 시작하겠습니다. 이 피라미드 꼭지 점에서 피가 내려오죠. 피가 내려오면서 세상의 전부를 적셔보면 아름답게 보이는 세상이 시커멓게 달라집니다. 이게 어떤 효과냐 하면 피가 그들에게 와 있을 때 그들은 자기 본색을 드러내요. 그러면 굉장히 다채롭고 문화적 활동, 아름답고 진 선 미, 진실 되고 참되고 아름답고 좋았던 것이 예수님의 피 앞에서는 전부 다 어둡고 죄악 된 것이고 무모한 것이고 의미 없는 것이고 헛되고 가짜고 악한 것으로 전부 다 폭로가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옛 것은 뭐죠? 주님께서 ‘보라 처음 것은 다 지나갔다.’는 것은 결국 피가 그 위를 지나간 거예요. 피가 그 위를 지나가 버리면 이쪽(옛 것)에 아까운 것은 없습니다. 진작 저주받아야 될 것만 가득 차 있었던 거예요. 그러니 제가 하는 말은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지 않았더라면 이런 사실이 폭로되지 않을 건데 피를 흘림으로서 악마가 이렇게 장악하고 있음이 다 드러나고 모든 게 드러날 때 이 중에 하나를 끄집어내서 ‘이것은 내꺼’라고 할 때 그 ‘내꺼’라는 게 주님 앞에 저주스러운 그런 사고방식에 불과하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모든 것은 다 지나갔다.’ 할 때 거기 누구도 포함돼야 됩니까? 내가 꿈꾸던 희망, 내가 꿈꾸던 천국, 이런 모든 것도 죄의 일종으로서 이것도 짓밟고 지나갈 꺼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우리가 발견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 믿고 구원받고자 하는 자기 자신도 주께서 피로 적셔버리면 ‘너도 똑같아, 너도 지옥 가야돼.’ 했을 때 우리는 삐지고 삐치고 ‘나는 그런 예수 안 믿겠다.’라고 나오잖아요.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구원받을 사람 예수님밖에 없고 아무도 구원받을 자격이 아무도 없다 하는 것이 더 분명해졌습니다.

제가 이 예를 드는 것은 이겁니다. 복음 때문에 세상은 어떻게 만들어 졌는가를 생각을 해야 된다 이 말이죠. 만들어 진 것이 복음으로 어떻게 구원 받는가 생각하지 말아 달라는 겁니다. 이 발상의 전환! ‘날 어떻게 천국 보낼 거요? 나 어떻게 구원 받습니까?’ 이런 질문 자체가 예수님 피 앞에서는 그 말조차 해당이 안 되는 거예요. 그럴 자격조차 안 되는 거예요.

예수님의 피가, 복음을 위해서 모든 것이 있고 모든 것이 다 장착되고 모든 것이 만들어지고 사태가 일어나야 되는 겁니다. 만약에 이빨이 아프다. 그럴 때는 ‘아! 내 이빨’ 하잖아요.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자 말이죠. ‘복음을 위해 아프구나.’ 그것마저 복음을 다시 한 번 생각게 하기 위해서 나에게 이빨 아픈 일이 벌어진 거예요.

그러니까 복음을 위해서 내가 이런 일이 있다는 것은 제가 어제도 이야기했지만 그것은 바로 우리가 성경 보듯이 예레미야, 에스겔이나 이런 사람들한테나 해당 될 이야기죠. 아내가 얼마 전에 죽었다. 왜 죽었는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잡혀서 죽는 것을 미리 보여주기 위해서 선지자 가정에 하나님이 심판이 떨어지는 먼저 선점에서 심판이 떨어지게 해서 니 아내가 죽은 것처럼 니 백성도 죽을 것이라고 니가 아내 죽은 것 보고  나가서 외쳐라. ‘내 아내 죽었다. 다음에는 너희 차례다.’라고 전하라고 복음을 위해서 아내가 죽은 거예요. 복음을 위해서!

그러니까 그걸 보고 다른 사람은 에스겔 보고 뭐라 그러겠습니까? 아내 죽어서 정신이 완전히 돌아버렸다 이렇게 생각할 게 아닙니까? 뻔한 이야기거든요. 아내 죽었는데 울지도 않아요. 부조도 안 받는다니까요. 조의금도 안 받고 그냥 ‘내 아내 죽었는데 왜 죽었느냐, 다음에는 너희 차례야.’ 그 외치라고 아내 죽인 거예요. 아내는 남편 소유입니까? 아닙니까? 처음부터 복음 소유지, 자기 소유가 아니죠. 아내를 소유했다고 여기는 그 본인 자체도 어디 소속돼야 된다? 복음의 소유물이 돼야 돼요. 복음을 위해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주를 위하여, 십자가 예수님의 죽으심, 내 몸이 아니고 그리스도 몸을 위하여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났고 살아왔고 앞으로 살 것이고 앞으로 죽을 것이고 모든 것이 그렇게 돼야 돼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낙심과 실망, 예상 밖의 사고, 이것 때문에 정말 살기 싫을 때 다시 한 번 생명의 전화기를 들어보세요. ‘주님 도저히 못 살겠습니다.’ 그러면 ‘귀하는 복음을 위해서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여기는 하늘나라 생명의 전화입니다.’라고 끊죠. 그것마저 복음을 더 깊이 알게 하기 위해서 그런 일이 벌어진 겁니다. 어느 하나 버릴 게 없어요. 복음을 위해서 어느 하나, 이거는 복음에 필요 없는 거라고 따로 떼 낼 게 전혀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복음을 위해서 그렇게 조치하게 되는 겁니다. 그 새 하늘과 새 땅, 그건 우리가 감히 예상치도 못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나라에 어떤 사람이 들어가느냐, 여기 6절에 봅시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이런 대목들이 어려운 거예요. ‘너 이렇게 하면 구원받는다.’ 이렇게 간단하게 이야기할 것을,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이러면 우리 보기에는 이런 쓸데없는 이런 이야기를 안 끄집어내도 잘 믿을 텐데 왜 이 이야기를 하면서 믿게 하느냐, 그것이 참 어려운데 그건 이따가 설명하고 “내가 생명수 샘물로...” 누구한테? 목마른 자!

제가 좋아하는 찬송가 중에 하나입니다. 목마른 자들아~ 다 이리 오라~♪♬. 목마른 자, 양식이 없어 목마른 게 아닙니다. 돈이 없어 목마른 게 아니고, 생명수가 없어서 목마르려면 그 사람의 몸은 예수님의 복음과 예수님의 작용에 의해서 생명수가 없어서 목마른 그릇으로 변형돼 있어야 돼요.

그렇다면 미래의 성도상이라 하는 것은 앞서서 어떤 그릇이다? 생명수를 요청할 정도로 항상 생명수 없을 적에도 목마를 수밖에 없는 반응을 자아내는 그릇, 그런 그릇으로 주께서는 바꿔주는 겁니다. 뭐 우리야 돈이 없어 목마르고 안 안아줘서 목마르고 친구 없어 인기 없어 목마르고 외로워서 목마르고 사람은 혼자 못 살거든요. 개라도 키워서 섬기고 해야 살지 아무도 대화상대 없으면 미치잖아요. 그럴 때 목마른 것은 사람이 없어 목마르고 애인이 없어 목마르고 그런 거죠.

그런 건데 여기서는 정작 말씀이 없어 목마른 사람. ‘주여, 하나님의 계획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십자가 지게 된 계획서가 어떤 계획서기 때문에 십자가 피로 뭐 보태지도 않고 구원이 다 이룬 겁니까?‘ 그런 것이 목마를 때 그것은 돈 있고 없고 상관없이 주께서 그렇게 만들어지게 하는 겁니다.

목마른 자에게 생명수! 그러니까 생명수는 아무나 주는 게 아니고 어떤 자에게만? 목마른 자에게만 줘요. 그런데 목마른 자가 없어요. 없으면 되게 하시는 거예요. 주께서 목마르게 만들어 놓고 생명수 안겨줄 때 ‘주여 이게 생명수입니다.’하고 감사하는 것. 고것이 새 하늘과 새 땅에 살 사람, 주님의 신부입니다.

신부도 주께서 알아서 미래의 성도 상을, 성도를 자기 몸의 흘린 피의 능력으로 만들어 낸다는 사실, 우리가 애쓰고 발광하고 부르짖고 해서 만들어 지는 게 아니고, 사람들이 기도하고 열심히 할 때는 뭐가 목마른 게 수상해. 교회서 대표기도 못해서 목마른 것은 자존심에 관한 문제입니다. 남보다 믿음 없어 하는 것도 지 자존심에 관한 문제입니다. 사람은 지 자존심 때문에 목말라 해요. 그런데 남이 나보고 욕해도 좋으니까 나는 주님의 원대한 계획, 그 뜻, 어떻게 해서 주님 때문에 우리가 천국을 가게 됐는지, 그걸 더욱 더 그 사랑을 깊이 알고 싶습니다. 그렇게 목마른 것은 주께서 성령으로 작용을 해야 그러한 사람으로 그 순간 돌변해 지는 집니다. 그때뿐이고 돌아서면 다시 마찬가지로 되겠지만 그 순간에는 ‘내가 이 일에 너 자신과 세상일에 관여하지 마라.’는 뜻이 무슨 뜻인지 그 짧은 순간만큼은 이해가 돼요. ‘아! 그냥 주께서 나를 아예 작심하고 만드시는구나.‘ 이렇게 되는데 그 순간이 지나면 내가 내 원하는 자아상을 내가 애써서 만들려고 시도합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 6절 봅시다. “내가 알파와 오메가요” 뭔 뜻이냐 하면 처음과 나중이라. 어떻게 처음과 나중만 되겠습니까? 중간도 포함됩니다. “처음과 나중이라” 제 아내가 저한테 여러 번 이야기한 게 있어요. 자기는 터널 공사하는 게 그렇게 신기하답니다. 어떻게 산이 있는데 이게 어떻게 어긋난 길로 안 가고 여기에서 뚫은 거하고 위에서 뚫은 거하고 중간에서 딱 만나는지 그렇게도 신기하대요. 신기한 게 아닌데, 측량하면 다 나오는데.

알파요, 시작과 끝을 뚫어버리고 그 가운데서 성도를 생산해 내는 겁니다. 이게 신기해야 돼요. 미래의 사람을 위해서 처음부터 창세전부터 계획 잡아진 것이 미래에 이미 완료된 상태를 가지고 계속 적용시키는 겁니다. 처음이요 나중이니까 처음과 나중이 결국 주님 안에서 하나가 되죠. 주님께서 피라미드처럼 처음도 만드시고 끝도 만드시고 중간도 만드시고 뭐하려고? 목마른 자를 만들어내는데 성공하기 위해서.

마태복음 5장에 보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너희 것이다. 이미 천국은 규정 됐습니다. 아무나 못갑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만 천국에 갑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도 천국 갑니다. 그런데 그런 의인이 이 세상에 없어요. 왜, 우리는 아담의 자손이니까. 우리는 DNA 불멸성 때문에 우리는 아담의 DNA 쪼가리를 전부다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의 체세포는 없어져도 우리의 DNA는 또다시 파생됩니다. 물론 결혼 안하면 그것도 끝나지만. 자식 없으면 그것도 끝나지만. 우리의 DNA는 계속 유전을 통해서 가거든요. 아담의 요소가 계속 남아 있는데. 그게 어떻게 의에 주리고 목마를 수가 있습니까? 어떻게 예수님처럼 심령이 가난할 수가 있습니까? 그런 것은 안 되죠. 베드로도 나중에 세 번씩이나 주님을 비난한 것 보세요. 그 성질이 어디 안 가거든요. ‘아버지께서 내게 오게 하지 않으면’ 이란 말은 예수님과 아버지,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 이미 둘 사이에 짝짜꿍해서 일을 끝내버립니다.

자, 처음이요 나중이라 했는데 피라미드 다시 그립시다. 처음이요 나중이라. 이 위를 처음이라 하고 이 밑바닥을 나중이라 합시다. ‘처음이요 나중이라’ 할 때에 오늘 강의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을 시작합니다. 제일 어려운 대목인데, 두 물체가 동시에 한 장소에 차지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인간 세상에서는 안 되죠. 바로 인간들이 아무리 연구하고 생각해도 납득이 안 되는 방법으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뭐라고 하시느냐 하면 ‘나는 내 안에 아버지 계시고 아버지 안에 내가 있다.’(요10:38, 요14:10, 요14:11, 요14:20, 요17:21) 이건 뭐 이거 이해하라는 말이 아니에요. ‘너희는 모르지롱.’ 이 뜻 이예요.

우리가 아는 세상에서는 시간과 공간에서는 동시에 이거 마시면서 동시에 글 쓰는 게 안 돼요. 동시에 온전히 물 마실 때는 글 쓰는 걸 멈춰야 돼요. 지금 카메라 비추는데 하나 비추는데 동시에 카메라 없는 장소에서 일하면 이건 말이 안 됩니다. 왜냐 하면 나는 어디까지나 한 몸이기 때문에, 한 몸으로 시작해서 한 몸이 하죠. 한 몸인 내가 무슨 일하면 내 한 몸이 일하는 거예요. 이걸 니가 일하는 것이 아니라 니 안에 그리스도가 일한다. 이걸 두 몸으로 바꾸겠다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 여러분 아시죠?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나니 이제는 내 안에 사는 것은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사는 것이라. 그럼 내가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살아있기 때문에 생긴 믿음이 나를 날마다 살려내는 능력으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거예요.

말은 그런데 이게 실제로 지금 되면서 사시느냐 이 말입니다. 그건 제가 강요할 수가 없는 문제입니다. 제가 하나님이 아니고 십자가 지신 주님이 아니기 때문에. 주께서 능력이 임할 때는 말씀에 합당한 말씀 덩어리로 임하기 때문에 이 능력은 말씀 따로 능력 따로가 아니라 말씀 자체가 우리에게 능력이 되는 거예요.

그럼 우리 속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니는 죽었고 니 안에 내가 산다. 니는 죽었고 니 안에 내가 산다.’ 계속해서 반복되면서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그 능력은 능력대로 하면서 딴 짓하고 있는 거예요. 내 몸의 과거에 의해서 미흡한 것을 미래에 하겠다. 이러면 뒤통수 한 대 맞고 징계 맞고 해서 ‘아이고, 내 뜻대로 안 된다. 세상만사 내 뜻대로 안 된다.’ 실망을 느낄 때 그렇게 실망케 하시면서 미래의 신부로 바꿔주시는 거예요.

목마른 자 되게 하시고 니 몸에 니만 있는 것이 아니고 니 안에 내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니가 니 주인공이 아니고 내가 너의 주인공이었고 너의 주인은 실상은 내가 주인이었고 너는 내가 만들어 낸 작품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거죠. 무슨 작품? 말씀대로 되었음을 증거 해주는 작품.

그러니까 관여할 수가 없죠. 우리는 관여하게 되면 내가 이해하는 식으로 말씀 이해해서 ‘주님 내가 오늘 말씀 지켰습니다.’ 이렇게 까불, 까불이 하면서 돌아다닌다 말이죠. ‘오늘은 내가 심령이 가난했습니다.’이렇게 까분다  이 말이죠. 그러니 그렇게 되면 목마를 수가 있습니까? ‘내일 아침에 마시면 되지 지금은 생명수 영 생각이 없네요. 지금은 배부르니까.’

그렇다면 구원, 안 구원이 문제가 아니고 말씀이 내 안에서 나오지를 않으니까 목마른 자에게 생명수 샘물이 주어진다는 이 말씀이 현재 오늘 5월 3일 이렇게 나오도록 해야 되지, 목마른 자에게 생명수 샘물이 나오도록 하는 거예요. 설거지 하면서 목마른 자에게, 운동하면서 목마른 자에게 생명수, 이렇게 나온다 이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또 딴 생각하고 뭐 주식 몇 장 사놨는데 올랐나, 뉴스 보고 수원에 여학생 체포돼서 죽고 하면 ‘아이쿠, 겁나라. 밖에 못 나간다.’ 이러면 목마른 자 다 잊어버려요. 그래서 다시 한 번 성경을 보게 되면 볼 때마다 주시는 건 아니지만 주님께서 보게 하시면 거기에 목마른 자에게 생명수를 주기까지 어떠한 복잡한 사건들이 벌어졌는가를 생명수만 달랑 마시는 게 아니라 그 절차까지 우리에게 다 들어오게 돼 있습니다.

하나 예를 들면 시편을 보겠는데, 제가 갑자기 시편을 보는 이유는 성경을 보실 때 시편 69편을 봅시다. 요한계시록 21장을 하면서 시편과 연관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생각정도는 해야 합니다. 여기 시편 69편에 보면 “1 하나님이여 날 구원하소서” 그 다음에 빨리 지나갑니다. “4 무고히 나를 미워하는 자” “6 주를 찾는 자로 나를 인하여 욕을 당케 마옵소서” “10 내가 곡하고 금식함으로 내 영혼을 경계하였더니 그것이 도리어 나의 욕이 되었으며” “14 나를 수렁에서 건지사 빠지지 말게 하시고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서와 깊은 물에서 건지소서” 그 다음에 “17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서 숨기지 마소서” 나오죠?

이 정황이 한 마디로 뭡니까? 21절에 보면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로 주며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오니 저희 앞에 밥상이 올무가 되게 하시며 저희 평안이 덫이 되게 하소서” 이게 뭐냐 하면 지금 어떤 사람이 되게 시달리고 있죠? 요거하고 요한계시록 21장 6절 “목마른 자에게 생명수 샘물로....” 그것도 돈 얼마 줬습니까? 값없이 마시는 것하고 이걸 한번 엮어보자 이 말입니다. 엮어보면 결국 우리는 값없이 생명수를 마실 때에 이게 진짜 우리한테는 값없지만 하나님한테는 이게 값있는 거예요. 그 혹독한 값을 내대신 치렀기 때문에 우리에게 값없이 주어지는 것이고, 첫 번째는 그렇고, 두 번째는 우리가 이미 마신 자로서 시편 69편의 예수님의 운명을 지금 그 길을 가고 있는 거예요.

왜, 다시 이야기할게요. 피라미드에서 피가 쏟아지면, 참 이 말을 하면서 어렵다 싶은데, 피가 적셔지면 피가 적셔져 지나간 자국마다 갑자기 찬란하고 아름답던 진 선 미, 정 있고 서로 도와주고 다정한 이웃이고 다정한 친구이고 사랑을 주고받았던 그 가족들, 이런 것이 피가, 복음이 적셔 지나가면 뭐로 변한다? 악마의 앞잡이로 바뀌어요. 그러면 그들은 나를 비방하고 무시하고 모독하고, 무슨 일로? 주의 이름 때문에, 우리는 시달리면서 우리 몸에는 주의 피가, 값없는 생명수가 발산됩니다. 그걸 가지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심령이 가난한 자,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한 것을 한 마디로 축약해 버리면 뭔 뜻이냐 하면 주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철저하게 말씀 성취용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 이예요. 우린 예수님한테 이용당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그걸 모르고 예수님 말씀을 지키려고 하니까 엄청난 큰 오해를 하고 있는 거예요. 주의 말씀에 관여하지 마세요. 이미 주께서 우리 주변의 모든 현실과 나 자신을 포함해서 관여하고 있기 때문에 친히 우리 자신을 손을 대고 있어요. 날마다 우리에게 실망감을 주고 세상에 대해서 낙담하게 만들고 낙심하게 만들고 ‘아휴, 더러운 세상, 그만 살래.’라는 소리가 나오게 만드시는 거예요.

그럴 때 우리는 성경 말씀 하나, 하나가 이해가 돼요.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마라. 이게 비로소 이해가 된다고요. 이미 땅에서 너는 죽었고 너의 생명은 위에 있고 너는 나그네라. 이게 비로소 옛날 선지자들이, 성도들이 그렇게 고난을 받았듯이 너도 고난을 받아라. 환난이 인내를... 이 말이 비로소 우리 속에 다~ 소름 돋듯이 다 나와요. 특별히 나오는 기반이 뭐냐 하면 ‘이런 것이 내 피로 말미암아 너희 죄를 용서해 주었으니 아무도 너를 정죄할 수 없기 때문에 누구 앞에서도 너는 당당해라. 그리고 용맹하게 살아라. 우리 대장 예수님 계시니 너는 꿀리지 말고 이미 승리한 전쟁에서 승리자로서 니가 행세하라. 그것이 바로 몇 사람을 고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증거 하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이 대번(담박)에 전체 순환의 역사가 대번에 확 이해가 돼요. ’아! 예수님 때문에 그들은 목 베었구나. 그리고 그들은 예수 이름으로 마귀들한테 잡혀서 순교 당했구나.‘ 그게 바로 초대교회였습니다.

우리보기에는 안타깝다. 저 사람은 남편 죽으면 마누라는 뭐 먹고 사느냐, 온갖 것들을 다 생각하지만 본인이 죽고 싶어 죽는 게 아니고 주께서 그렇게 쓰신 거예요. 말씀 자체가 실제 상황이라는 걸 알려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들어 쓰시는 겁니다.

이 결정에 우리는 뭐냐 하면 군대 간 사람은 알지만 오 분 대기조라는 게 있어요. 대기소. 우리는 대기소에 앉아 있다가 ‘니 나와’ 하고 불러주면, 꼭 나이트클럽의 가수들처럼 자기 순서 기다리는 대기소에 있는 것처럼, 대기실에 있는 것처럼 뽑혀서 노래 부르고 춤추고 마술부리고 하듯이 주께서는 자기 백성을 뽑아서 세우는 겁니다. 자기 순서도 아닌데 은혜 받았다고 나선다면 되도 않은 죽도 밥도 안 되고 자기 영광 돌리는 것밖에 안 돼요.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값없이 주는 생명수가 우리에게 흘러들어오는 과정을 우리는 설거지하는 것을 보여주고 공부하는 것을 보여주고 사업을 하든지 여러 가지 일을 통해서 값없이 생명수를 마셨다는 것을 보여주는 그런 것에 활용되고 있습니다. 그때, 그때는 모르지만 뒤돌아보면 다 되는 거예요. 그럴 때 비로소 예수님이 처음이요 나중이라. 그걸 제가 처음에는 처음이요 나중이란 말을 다른 말로 했습니다. 일체 관여하지 마라. 이 세상에 너 자신에 대해서 니가 관여할 자격이 안 된다는 거죠.

자, 그러면 7절을 봅시다.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이긴다는 말은 바로 이미 이긴 전쟁에 참여를 받은 사람은 “이것들을 얻으리니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야, 참 어렵다. 요한계시록은 전부 다 함축이 돼 있어서 이걸 풀어 제치면 너무 표면이 많은 몇 시간짜리 필름이 계속 튀어 나와요. 여기 아버지가 되고 아들이 된다 했죠? 아버지와 아들은 아버지 따로 있고 아들 따로 있는 그런 관계가 아니고 같은 공간에 동시에 한 장소에 같이 있는 관계가 아버지와 아들 관계입니다.

이건 제가 하는 말이 아니고 예수님이 한 기도 가운데 나와요.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너희 안에 하나님이, 아버지가, 성령이 오게 되면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안에 있다는 말을 따로 분리시킬 수 없어요.

그럼 이걸 어떻게 설명하느냐, 설명하는 게 더 어려워요. 한번 들어 보세요. 여기 책이 없다. 하고  책이 없음하고 이게 같은 말이 아니에요. 어렵다 했죠? 이건 질문하지 않겠습니다. 여기 책이 없다는 말은 책이 없는 대신 의자는 있게 되잖아요. ‘책이 없음‘이란 것은 아예 여기 책 자체가 없다는 거예요.

아버지와 아들이 정보가 함께 있다는 말은 예수님 바깥에는 아버지가 없다는 말 이예요. 예수님 안에서만 아버지가 있고 그 안에서만 우리 자신이 있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이 있고 예수님 계신 걸 모르고 우리는 예수님 안을 따로 바깥에 세워요. 평소의 버릇이 몸의 습관이 매일 거울을 보니까 거울을 볼 때 내가 거울을 볼 때 예수님께서 뒤에서 몰래 이렇게 등장하지 않죠? 그러면 아마 나자빠질 거예요.

내가 여기 만들어 놓고 예수님을 바라보니까 결국 나는 예수님 바깥에 나와서 관찰자 입장에서 바라보잖아요. 이럴 경우에는 내가 바라보는 곳에는 예수님이 없어요. 예수님이 없다는 말은 아들이 아들다운 행동을 못 보여주는 겁니다.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 관점으로 함께 있을 때 우리는 아버지를 제대로 이야기하고 예수님 이야기하고 심지어 나 자신이 죄인 중에 괴수라는 것을 예수 안에 있을 때 보여주는 겁니다.

사도바울 말하기를 ‘나는 예수 안에서 의인되었다.’ 이렇게 이야기해요. 이 말은 예수님 때문에 의인되었다는 말인데 그걸 다른 사람은 오해하기를 ‘니가 잘났어? 니가 잘났어?’ 사도바울은 예수님을 증거 하려고 하는데 저쪽은 아무리 봐도 예수님은 안 보이고 ‘니가 없다는 말이냐’고 나온다 말이죠. 그러한 오해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똑같은 오해를 받은 거예요.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는데 왜 자꾸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가만있어 보세요. 어디 있나, 조금 비켜 보세요. 안 보이는데, 아버지가 어디 있나?’

아버지가 있어도 아버지인 줄 알겠습니까? 아버지를 본 자는 예수님 밖에 없는데. 그래 본 적도 없는 걸 찾아내려 하니까 그들은 하나님 아버지를 상상할 수밖에 없잖아요. 그 상상한 하나님 아버지가 예수님 죽였습니다. 신이 예수님을 죽인 거죠. 그래서 예수님이 말하기를 너희들이 가짜 천국 열쇠를 가졌다. 천국 열쇠가 아니고 그들은 가짜를 만들어서 유포시킨 겁니다. 오늘날 교회하고 똑 같아요. 천국을 열 수 없는 가짜 열쇠를 가지고 오는데 그게 뭐냐, 예수님 거기 있고 나 여기 있는 식으로 열쇠를 열고자 하는 거예요.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그것이 천국인데 내가 예수님한테 잘 보이고 비비고 헌금하고 전도해서 예수님 앞에 많은 재롱이 잔치 벌여서 많은 업적을 쌓아서 그러면 주께서 날 잘 봐주고 또 내가 더 일을 많이 하면 예수 안 믿는 내 남편까지 보너스로 끼워서 천국 넣어줄 지 아느냐, 이건 완전히 불교식입니다. 그런 건 안 돼요.

차마고도라는 것 있죠? 차와 말이 가는 높은 길, 티벳 이야기입니다. 티벳에는 어지간하면 해발 5천 미터예요. 대충 높다 싶으면 6천 미터, 보통이다 하면 5600미터, 거기에 오체투지[五體投地] 몸의 다섯 가지 요소를 지면에 던진다. 쫙~ 미끄러져서 절하는 거예요.

거기에 불교에서 삼보일배[三步一拜] 세 번 걷고 한번 절하는 것, 이건 그 수준이 아니고 온 몸을 지면에 던지는 거예요. 그래서 다 까지니까 여기다가 소가죽을 해놓고 팔에도 무장해서 미끄러지지 않도록 해서 쫙 미끄러져서 하는데 가기 전에 박수를 세 번 쳐요. 내 뜻과 내 마음과 내 생각을 부처님이여 이렇게 바치면 내가 한 몸이 한 것이 아니고 모든 세상의 중생들이 부처를 믿는 중생들까지 내 한 몸에 흡수해서 부처의 자비가 온 누리에 퍼지기를 내 한 몸 희생하겠습니다. 그런 뜻으로 몇 백 키로 미터를 그렇게 가요. 한번 미끄러지고 또 엎어지고, 식사하고 나서 또 엎어지고, 힘나면 또 엎어지고.

그렇게 하듯이 교회 다닌다는 게 뭔 뜻입니까? 부처와 내가 함께 있는 것이 아니고 항상 부처와 떨어져 있다는 것,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있고 싶은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육신의 죄 있는 몸으로 오셨기 때문에 우리와 함께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성령, 예수님의 영이 임하면, 성령이 있는 곳에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고 요한복음 14장에 그렇게 기록돼 있습니다. 그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한 거예요.

그래서 여기 나오는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이것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일의 효과 속에 있는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사람 이예요. ‘어떻게 예수 잘 믿어서 천당 가볼까’ 하는 이런 노림수를 가진 사람은 안 되고, 이미 예수님의 영이 임한 사람에게 이건 빼도 박도 못해요. 내가 이렇게 예수님 바깥에 있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이건 착각이었고 그래서 주께서는 ‘너는 내 안에 있어.’라고 지정해버리면 그 순간 다시 ‘아! 내가 정신 차리지 못하고 착각했구나. 환상을 꿈꾸고 주와 함께 있는 걸 모르고, 바깥에서 주여 저 어떻습니까?’하고 있다는 그걸 깨닫게 되죠. 깨달았다고 온다는 뜻이 아니고 이미 함께 있는데 우리의 몸의 습관이 자꾸 남들, 이웃을 상대하듯이 예수님을, 하나님을 내 이웃으로 상대하고 그런 식으로 믿고자 하는 버릇이 아직 남아서 그래요. 평생 가도 그 버릇은 없어지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그때 이미 너 안에 내가 있고 내 안에 네가 있다는 것이 믿어지도록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니가 오늘 아침에 밥 먹을 때도 내가 너에게 준 은혜라는 걸 늘 믿어지게 하는 거예요. 따로 내 몸 밖에 나가서 주님 앞에 제사 드리고 이런 게 아니라니까요. 먹든지 마시든지 이미 우리 주님의 소유가 되었기 때문에 주께서 쓰시는 도구예요.

예수님이 빗자루를 들고 쓰시는데 빗자루가 ‘우리 주님이 어디 계시노.’ 돌아볼 것 없이 이미 빗자루를 쥐고 사용하시는 분이 주님인데 빗자루가 그걸 모르고 ‘주님 어디 계세요? 주님 어디 계세요?’하면 메아리만 들려올 뿐이지 백날 헛수고하죠. 이 몸 자체가 주께서 다루십니다. 건강부터 모든 것이.

8절 봅시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 이 항목들에 나오는 사람들을 한 마디로 축약하면 뭐냐,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다?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죠. 간단한 문제 아닙니까? 세상에 이 항목이 나오니까 사람들이 이거 지키기 위해서 분주한 거예요. 교회 다니는 불신자들은.

지키다 보니까 어떤 문제가 생기느냐 하면 살인과 행음은 안 했는데 딸래미 시집보낸다고 궁합은 봤네, 그건 어디 해당되느냐 하면, 이건 우상숭배에 해당되고 술객에 해당되기 때문에 불과 유황불이 타는 못에 참예하는 거예요. ‘아휴, 궁합 안 보려 했는데 궁합이 안 좋다 했는데 야, 큰 일 났다. 불과 유황불에 탄다 했는데 딴 것은 지켰기 때문에 불과 유황불 한 가운데는 아니고 변두리 열기만 따뜻한 자리,’ 이렇게 지 맘대로 생각하는 거예요.

이것은 정도의 문제가 아니고 예수님과 함께 있지 아니하면 예수님의 피가 없으면 그 나오는 모든 구석이 어떤 때, 24살 때는 살인하다가 27살 때는 행음하다가 29살 때는...., 이거는 거꾸로 22살 때는 거짓말 하다가, 이것을 그리스도 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런 현상들이 계속 발생되는 거예요.

여기 보면 “두려워하는 자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두려워하는 경우와 믿지 아니하는 경우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두려워하는 자들, 믿지 아니하는 자들, 그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 만날 간음하고 행음하죠. 마음속으로라고 살인하죠. 그것은 이게 아니고 믿지 않는 자들, 두려워하는 자들, 전부 다 이것은 어쩔 수 없이 믿지 않는 자들이 지가 개가천선해서 믿을 수 없는 것이고, 믿지 않게 만든 자들, 두려워하도록 만든 자들, 행음하게 만든 자들, 이런 자들에게는 불과 유황 못에 간다.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자는 다 간다, 이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다 플러스, 플러스 하면 돼요. 그래서 행음하는 자들이 술객들한테 욕할 게 아니고 다 똑같은 자들이니까 둘 다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이상 둘 다 목마른 자들이 아닌 이상은 둘 다 하나님이 값없이 주신 생명수를 못 마신 자들은 어디서 어떻게 살든 간에 돈을 해먹든 10억을 받았든 안 받았든 유황불에 다 가게 돼 있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자들은 다 지옥에 가게 돼 있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 죄가 돼요. 모든 인간은 다 죄인인데 주께서 함께 계시니까 늘 수시로 주께서 계시기 때문에 믿음이 나오는 겁니다. ‘아! 세상은 내가 관여할 게 아니구나. 관여할 게 남아있지 않는구나.’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 다음에 9절 봅시다.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중 하나가 나아와서 ...” 뭔가 7, 7, 7로 연결되죠. 처음에는 7대접, 7재앙, 7천사죠. 7대접, 7재앙, 7천사는 우리가 관여할 필요가 없다 이 말입니다. 이 재앙이나 대접은 누가 쏟아 부는 역할  을 하는 겁니까? 천사가 하죠. 천사는 누구의 종입니까? 천사는 자체적으로 기획하는 게 아닙니다. 천사는 시키는 대로 할 뿐 이예요. 예수님의 천사잖아요. 그러니까 이거는 천사가 했다고 하지만 예수님이 시키는 대로 했으니까 예수님께서 천사를 앞장세워서 이 세상을 이 난리를 일곱으로 완전히 재앙의 나라로 만드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한테 묻죠. ‘아쉽냐? 왜, 아까운 면이 있어? 왜, 내가 하는 일에 못마땅해?’ 이번 주일 날 이야기했잖아요. 심판은 창조라고, 창조의 절차라고. 왜 재앙이 오느냐, 예수님의 십자가는 뭘 받은 겁니까?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저주와 재앙을 받은 거죠. 그 예수님이 당했던 그것을 그대로 세상에다 필름으로 사용해서 예수님의 흔적을 그대로 박아버리면 예수님이 죄 있는 사람으로서 아버지한테 이런 저주를 받았으면 예수님뿐만 아니고 모든 죄 잇는 사람들도 마땅히 저주받아야 마땅함을 드러낸 거죠.

그렇다면 그 중에 신부, 그야말로 값없이 구원받는 그 사람은 특별혜택을 입은 사람만 뽑아 나옵니다. 빠져 나와요. 이게 하나님의 계획인데 이 계획에 니가 관여할 바가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예수 안에 있으면서 걱정 근심 한다는 것은 이것은 우리가 부질없는 시간 낭비에 불과합니다. 걱정 근심을 사실은 할 이유가 없는데, 할 건덕지가 없어요. 그건 없는데 돌아서면 또 ‘차가 막히면 안 되는데,’ 쓸데없는 걱정 근심을 만들어 내는 것이 우리 몸에 죄가 남아있다는 걸 까발리는 결과가 되겠죠.

그리고 재앙을 해놓고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에 하나가 하는 말이 그 다음에 뭡니까?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그러니까 결혼식장이 좀 이렇게 잔잔한 음악도 들리고 꽃도 있고 이렇게 결혼식을 해야 될 텐데, 결혼식장이 신부만 예쁘지, 주변은 지금 울고불고 난리가 났어요. 유황불이 완전 뒤범벅이 된 상태에서 가뿐하게 신부는 딴따따라라~~♬♫♪ 걸어 나옵니다. 야~ 희한하죠? ‘그동안 니 괴롭혔던 사람 저렇게 유황불에 고생하고 있다.’ 그걸 만끽하면서 아름다운 결혼식을 진행하고 있는 중입니다.

다음에는 ooo대통령 지옥 가는 모습을 보여주겠습니다. 이런 거. 다음은 김일성이 지옥 가서 고생하는 모습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결혼식장에다 이런 걸 찍은 걸 보여주는 거예요. 취미가 이상한 취미인지.., 또 춘향이 죽는 걸 변 사또 생일에 하이라이트로 여기는 것처럼. 이렇게 악마와 불신자들이 지옥 가는 그것을 환경삼아서 신부가 웅장한 결혼식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신랑 되시는 예수님이 손수 다 해치우신 거예요. ‘어때? 내 솜씨,’ ‘오! 멋지십니다.’ 그걸 자랑하려고 그 중에 특정인간을 알파와 오메가, 처음부터 예정하신 자기 백성을 처음(알파)이요 나중(오메가)이니까 신부 만들어서 마지막까지 신부로서 확정지으시고 그걸 말씀하시는 겁니다. ‘이 신랑의 솜씨 어떠냐.’ ‘ 제 면류관도 반납해 드립니다. 모든 것은 예수님 홀로 다 이루었습니다.’ 이 모든 이야기의 증거가 뭐냐, 바로 십자가로 그 역사적 증거가 되죠.

자, 아까 질문에 답해 봅시다. 옛 하늘과 옛 땅에 새 하늘과 새 땅의 증거가 남아 있습니까? 없습니까? 만약에 남아 있다면 그게 옛 하늘과 옛 땅이 소멸됐을 때 새 하늘과 새 땅의 요소도 같이 소멸되기 때문에 이것은 악한 것만 작살내야 될 것 속에 선한 것도 같이 작살나는 모순이 있잖아요. 그렇잖아요.

그걸 어떻게 해야 되는지, 이것은 바로 같은 동시대에 같은 장소에 이질적인 두 개의 사물이 함께 있을 수 있다는 이 원리와 원칙으로 되는 겁니다. 함께 있는 거예요. 아브라함 전쟁할 때 그때 누가 있었습니까? 아비도 없고 족보도 없는 멜기세덱이 함께 있어서 아브라함이 전쟁한 것이 아니고 누가 전쟁했다? 멜기세덱이 전쟁한 거예요. 하나님 이름이 전쟁한 겁니다.

그리고 여호사밧 왕이 전쟁 나갈 때 찬양했을 때 그 수많은 군대가 죽었잖아요. 그리고 산헤립 군대가 185000명을 몰고 예루살렘을 포위할 때 천사가 와서 하룻밤에 다 죽여 버렸죠. 그리고 엘리사가 있을 때 게하시가 벌벌 떨 때 엘리사가 게하시의 눈을 뜨게 하니까 저쪽 편에 있는 사람보다 이쪽의 천사들이 숫자가 더 많다는 것. 이게 뭐냐 하면 바로 천사가 또는 주님의 성령이 세상 끝 날까지 너와 함께 있다는 이 말을 우리 이 죄 많은 육신으로서는 우리가 실감이 안 나요.

우리는 사람이 없으면 외로워하고 친구 없으면 외로워하죠. 그래서 여자들이 전화 오래 붙들고 수다 떨고 하잖아요. 저도 전화 오래 해보려고 하지만 도저히 힘이, 체력이 안 돼요. 그런데 약하디 약한 여성분들은 어떻게 전화 오래하는지, 한 시간, 두 시간 거뜬히 넘어가요.

함께 있다는 것을 우리는 그걸 혼자 있을 때는 외로워서 사적으로 주님 안 찾아요. 주님을 찾아서 주님과 함께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종교예요. 우리가 세상사람 찾는 그 순간, 뒤통수 때릴 그때 친구상대로 놀러가 버리고 아무도 없을 때 또 다시 나의 미래가 와장창 무너질 그때 나로 하여금 실망감이 쓰나미처럼 확 밀려오는 그때, 또 내 욕심 챙겼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거죠.

성령은 우리의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서 우리를 책망하실 때 주와 함께 있는 겁니다. 함께 있지 않으면 우리가 그리스도 십자가 피로 나는 이미 죄가 없다는 사실을 아무도 이것을 믿을 위인이 없어요. 십자가의 효과는 성령이 아니고서는 하나님의 깊은 그 영, 성령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이 사실을 눈치 챌 수 없습니다. 성령이 임하게 되면 혼자 아무 일도 없는데 혼자 싱글벙글해, ‘세상에 내가 모든 것이 복음을 위해서 있어야 될 건데 내가 왜 걱정했지?’ 하고 혼자 싱글벙글해요. 그건 혼자만이 알아요. 혼자만이 그 사랑 알고 혼자만이 그 은혜알지. 설명할 수도 없어요.

그런데 남 은혜 받은 거 흉내 낸다고 ‘니 기도해서 은혜 받았나?’ 이렇게 하면, 그거 소용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신부로서 현재 이미 진행 중이라는 것, 이미 신부로서 이 말씀이 우리를 휘감고 있습니다. 이미 우리는 유황불로 감고, 왜냐 하면 같은 동시에 성경 전체의 시작과 끝이 처음과 나중이 이 시간에 함께 말씀을 통해서, 성령을 통해서 함께 믿어지게 되는 거예요. 나름 가봐서 아는 게 아닙니다. 요한계시록 22장에 나오는 이 모든 천국모습이 한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는 그걸 이미 그 안에서 즐기고 있는 겁니다. 감사하다고 외치고 있는 겁니다.

이것 때문에 감사하는 게 아니고 앞으로 되어 질 것도 미리 다 체험케 하시니 감사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의 체험이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나 자신이 아무 죽이 되던 밥이 되던 나 자신은 진짜 개뿔 아무것도 아닌 걸 느낄 때 오는 그 기쁨, 그게 성령 받은 기쁨입니다.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어떤 사태가 일어나도 내가 걱정할 자격이나 권리가 없다는 겁니다. 나한테 어떠한 흔히 재앙이나 병이나 어떤 식으로 죽음이 온다 할지라도 내가 거기서 시비 걸 그러한 문제가 아님을 내가 기쁨으로 내가 수용이 된다는 사실. 아! 고거 2초  갑니다. 고게 오래 가지를 않아요.

하나 하고 마치겠습니다. 11절,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아래쪽에서는 지금 유황불에서 악마와 불신자들이 고통 받는 것도 보이고 동시에 하나님의 영광이 아름다운 보석이 내려오는 것도 보이고 이게 어떻게 가능 하느냐, 가능합니다. 동시에 한 장소에서 하나님의 말씀 전체가 동시에 벌어지는 그 동일한 환경에 우리가 동일한 말씀 환경 속에 놓여 있기 때문에, 이렇게 보면 지옥이 보이고 이렇게 보면 천국이 보이고 이렇게 보면 주님이 보이고 다 그 안에서 다 이러면 창세기 보이고 이러면 요한계시록 보이고 다 보이는 거예요.

이게 바로 목마른 자에게 주께서 이러한 은혜를 주시는 겁니다. 다 안다는 게 아니고 그 때를 따라서 필요한 말씀들이 슥슥 떠오르게 한다니까요. 아까 집사님 했잖아요. 산에 가서 흙을 보고 우리 다 흙 같은 존재라는 사실, 앞으로 그 산에 가서 해보세요. 그때는 그 느낌이 안 와요. 왜, 그때는 그때고, 그걸 흉내 낸다고 되는 게 아니거든요. 그때는 그때의 은혜 줬고 지금은 다른 방식으로 은혜를 주시기 때문에 옛날 받은 은혜를 자꾸 소유하려고 하지 마세요. 그러면 이것이 또 우상화돼요. 내 믿었던 자체가 우상이 되니까. 매일같이 우리로 하여금 내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값없이 생명수를 꿀꺽 꿀꺽 마시고 있는 그것이 현재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이 투쟁과 시련과 아픔과 고난을 통해서 다시 한 번 그게 확인이 되는 그 기쁨이 성령이 주신 열매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 믿은 게 아니고 주께서 우리를 이렇게 찾아와 주시니 우리가 예상 밖에 참된 현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있고 예수님이 아들이고 성령께서 모든 것을 관할하고 지켜주시고 보호한다는 이 현실이 저희들 머리에서 저희 마음에서 떠나지 않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