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교회120503-요한계시록21장(목마른 자)38강a-이 근호 목사
제 38강a
요한계시록 21장 5절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에 전개되는 설계도, 계획안, 이것은 우리 인간이 관여를 하지 마세요. 인간이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것이 인간에게 기쁜 소식입니다. 인생을 내가 짜면 굉장히 안심할 것 같지만 나중에 실망이 따라오게 돼 있어요. 사람이 인생을 살면서 제일 힘든 게 뭐냐 하면 실망입니다.
왜 세상은 내 뜻대로 안 되는가, 내 소원대로 안 되는가, 내가 얼마나 여기다 신경을 많이 썼는데 내가 신경 쓴 만큼 효과가 없고 결과가 나지 않을 때 낙담을 하잖아요. 그것은 쓸데없이 현실을 내 현실로 강제로 끌어와서 그래요.
주님께서는 뭐냐 하면 한 마디로 ‘관여하지 마라’ 이 세상 모든 움직임에 니가 관여하지 마라는 거예요. 다른 말로 하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가져오라. 네가 갖고 있지 말고, 너는 그걸 가질 이유도 없고 자격도 안 되는 거예요. 우리조차도 주님의 계획안에 움직이는데 우리가 마치 중심인양 오해들을 하시면 안 된다 이 말입니다. 예수님이 중심이니까. 예수님이 중심이 돼서 어떤 시나리오를 전개하죠.
요한계시록 21장에 시나리오를 이렇게 전개하는 것에 대해서 이건 우리가 믿던 안 믿던 상관없이 일은 그대로 진행됩니다. ‘제가 이걸 믿었습니다.’한다고 해서 계획이 더 빨리 되고 ‘저는 이걸 안 믿습니다.’ 한다고 해서 계획이 늦춰지고 그런 게 없어요.
그래서 여기에 나오는 계획을 앞으로 이야기할 건데, 모든 계획에 대해서 지난 시간에도 했습니다마는 하늘에서 예루살렘이 내려오고 신부하고 신랑이 혼인잔치하고 모든 눈물도 씻겨주고 하는 이 모든 것이 주님께서 그냥 치르는 일이기 때문에 마태복음에서는 이걸 혼인잔치라 하지 않습니까? 혼인잔치의 음식 준비나 콜라, 사이다, 이런 거, 순서, 자리 마련, 그것은 참석자가 걱정할 이유가 없어요. 참석자가 거기 참석만 하지 지가 왜 혼인잔치, 그걸 걱정합니까? 딸 웨딩드레스는 뭘 입히고 아들은 어느 자리에 앉히고 그것은 본인이 관여할 게 아니에요.
만약에 관여하면 뭐가 생긴다 했습니까? 실망만 생기는 거예요. ‘아, 인생 더러워서 못 살겠다.’ 이런 식으로 한강 다리에 여러 번 왔다 갔다, 이게 뭐냐 하면 괜히 헛바람 불어서 그래요. 괜히 지가 관여할 것도 아닌데 주제넘게 관여해 놓고 지 뜻대로 안 됐다고 지가 자기 성질에 부딪혀서 자기 성질을 못 이겨서 욱하는 성질, 처음부터 관여하지 말라고 했는데 괜히 뭔가 얻을까 싶어서 해놓고는 뜻대로 안 되니까 화는 주님한테 분풀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관여하지 말라는 이유가 있어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너의 미래가 아니고 예수님의 미래, 나의 미래를 예수님의 미래로 교체를 해나가시는 것이 성도됨을 우리에게 적용시키는 형식 이예요. 우리는 우리의 미래가 있거든요. 우리가 미래가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이게 어려운데 과거를 돌아보면서 우리는 늘 살아갑니다. 현재 내가 어느 정도인지 하는 것은 그냥 ‘내가 옛날에 이렇게 생각했는데 지금 이렇게 되었구나.’ 항상 우리가 비교하는 그것이 지나간 과거의 경험가지고 지금 자기가 기분 좋아해야 되는지, 기분 나빠해야 되는지를 그걸 전제로 하는 거죠. 볶음밥을 먹는데 좀 싱겁다. 이걸 어떻게 알았지? 싱거운지 어떻게 알았어요? 혀 맛이 과거의 경험상 요정도 간이 맞아줘야 맛있는 건데 거기에 비해서 오늘 간은 좀 싱겁다. 이렇게 되잖아요.
애들이 성적표 가져왔을 때 가정에서 보면 항상 비교하는 게 과거에 내가 경험했던 것이 축적된 것에 비해서 그것을 잣대로 해서 ‘너 왜 공부 못했어?’ 또는 ‘너 왜 공부 잘했어?’ 이렇게 하는 거예요. 과거를 기준해서 현재를 생각하고 과거라 하는 것은 반드시 기대와 꿈이 있거든요. 과거의 기대와 꿈이 있는 것을 현재가 미흡하니까 그걸 +ℒ, 마저 채우는 것을 미래라고 하는 겁니다. 미래를 이끌어가는 추진력은 어디서 나옵니까? 과거에서 나오고 과거의 경험에서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과거의 경험이란 말을 이걸 분명히 할 필요가 있어요. 우리는 과거에 많은 것들을 경험했지만 다 기억을 못합니다. 못하기 때문에 경험한 것 전부 다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경험한 것 중에서 현재 내가 유용하다. 나한테 도움이 된다 싶은 것을 따로 선택해서 고것을 내가 기억하는 과거라고 일방적으로 만들어 놓고 그 기대와 꿈을 이루기 위해서 미래에 스스로 어떤 용기를 부여하는 거예요. ‘그래 하면 돼, 나는 할 수 있어.’ 어디 기준해서? 과거에 경험했던 그것에서 꿈이 나오고 기대가 나오니까 그걸 채우는 식으로 미래를 내다보는 겁니다.
그런데 그 미래를 달성하기 위해서 뭘 이용해야 되느냐 하면 주위 환경을 이용해야 되거든요. 그 환경이 성경대로 하면 우리가 관여하지 말아야 될 환경이거든요. 처음에 이야기했잖아요. 처음부터 관여하지 마라 했는데 자기가 과거에 경험한 것, 기억한 것, 자기의 꿈과 기대가 바짝 군기가 들다 보니까 관여하지 말라는 소리는 안 들리고 무조건 나한테 유리하고 이익이 되는 것은 다 무조건 끌어당기는데 급급하죠.
그렇게 되면 이 미래는 뭐냐 하면 나의 미래가 되죠. 나의 미래가 현실 속에 다가올 때 누가 가만있지 않습니까? 그 사람이 성도라면 주님이 가만있지 않아요. 왜, 주님께서 그 사람이 성도되기 위해서는 주님이 생각한 미래의 성도거든요. 어려운 말이다. 미래의 성도! ‘성도는 적어도 이렇게 돼야 되고 이런 자리에 있어야 되고, 이런 나라 여기 살아야 돼.‘라는 것을 누가 압니까? 예수님이 알아요. 그래서 이게 예수님이 아는 미래의 성도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미래라 하는 것은 나의 과거에서 유래된 거예요. 만약에 예를 들면 TV 연속극을 봤다. 연속극을 아예 안 보는 사람은, 특히 광주에 계시는 분들은 연속극, TV, 개콘, 아무것도 안 봅니다. 그분 특징들이 그래요. 아무것도 안 봐요. 그런데 만약에 어떤 가정에서 연속극을 봤다 하면 연속극을 보고 난 뒤에 일상생활을 하면서 무슨 생각을 하느냐 하면, ‘야, 연속극의 주인공이 위기에 처했는데 다음번에 할 때 주인공이 빨리 악한 놈들한테서 빠져나와야 될 텐데.’ 지금 그 생각한다고요. 자기 일을 하면서. 아무 드리마나 개콘이고 아무 것도 안 봤으면 그 경험, 그 체험이 없기 때문에 자기의 미래상에는 그 체험에 기준한 플러스알파가 없는데 뭔가 본 게 있기 때문에 ‘아휴, 시나리오 작가가 잘 써야 돼. 주인공 빨리 살아나야 돼. 좋아하는 사람하고 결혼해야지, 엉뚱한 못된 궤계에 빠지면 안 돼.’ 지가 드라마 본 게 있다고 그것 때문에 한 주일 내내 그거 기다린다고, 어떻게 전개될까. 그것이 자기 위주의 흐름이죠.
현실은 하나님이 관여하는데 우리는 억지를 부립니다. 그걸 제가 수요일 날 이야기했나? 억지 인생! 전부다 인간은 과거 경험 때문에 인간은 억지로 살아요. 억지 인생 때문에 억지 인생이 억지 미래를 낳고 그 미래는 결국은 뭐가 남는다 했습니까? 실망만 남을 뿐이죠.
그래서 하나님의 방법은 뭐냐 하면 나의 미래와 주님의 미래를, 미래의 성도의 상, 성도의 모습은 우리는 모르고 예수님만 아십니다. 우리는 뭐가 되느냐, 과거에 익히 아는 것 가지고 이것이 성도 아니겠는가, 지 혼자, 지 맘대로 지 멋대로 지 혼자 일방적인 생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나의 미래를 뭐로 바꾸느냐 하면 실망으로 바꿔주십니다. 고맙게도. 나의 미래가 뜻대로 안 되는 그 실망감을 일으키는 그 고마움! 그 축복! 그거 매일 받아야 돼요. 매일 실망하는 기쁨이 있어야 돼요. 이거 말이 안 된다고요. 실망하는 기쁨! 내 뜻대로 안 되게 하시는 주님의 주도적인 강압적인 이끄심, 강제로 질질 끌고 가시는 그 손길, 그것이 바로 우리의 미래에 예수님의 미래를 주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나의 미래는 내 몸에서 나온 것이라면 예수님의 미래는 예수님의 몸에서 나온 거죠. 예수님은 자신의 몸 가지고 뭘 했습니까?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했죠? 우리는 다 이루었다 보다도 내 몸 가지고 내 욕구를 다 이루려고 애를 쓰고 있죠? 착해지는 것도 그렇고 부자 되는 것도 그렇고 우리 가정이 다 화목한 것도 그렇고 우리 애 공부 잘하는 것도 그렇고 뭐든지 내 몸이기 때문에 남의 몸이 아니고 내 몸이 내 몸이라는 이유 때문에 내 몸이 즐기고 내 몸이 욕구하고 원하고 기대하는 것을 그걸 미래상으로 담아서 우리는 간곡히 소녀의 기도처럼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소녀의 기도 아십니까? 옛날 한국 버스에 보면 ‘오늘도 무사히’ 하늘색 원피스 입고 꿇어앉아 기도하는 모습. 간곡히 비나이다. 이게 성사되기 힘들 것 같으면 새벽기도 40일 연속으로 해버리고, 여기에 강도를 높이죠.
그런데 이건 어디까지나 누구 좋으라고? 그 일이 잘 될 때 누가 좋습니까? 이 명박 대통령이 좋습니까? 박 근해가 좋습니까? 내가 좋은 거예요. 내 기쁨을 얻기 위해서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멸망되는 세상에서 멸망돼서 재개발하는 그 현지에 가서 내가 원하는 것, 내가 기뻐하는 것, ‘이거 왜 버리지? 이 귀한 걸 왜 버려?’ 그런 것을 내 기뻐하는 것을 세상 속에서 끄집어내는 이유가 과거에 그런 것 때문에 나에게 기쁨을 주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나올 때 그들이 원했던 음식은 바로 애굽에서 먹었던 음식이거든요. 옛날에 애굽에서 먹었던 음식을 그대로 원하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것이 니 몸 중심이기 때문에 만약에 그런 식으로 가버리면 그 하늘나라는 누가 오야붕이 되고 누가 자꾸 신경 쓰느냐 하면, 하늘나라 가도 깡패 짓 하는 거예요. ‘누구야? 나 하늘나라 왔어. 나 건드리면 가만 안 두겠어.’ 이게 하늘나라 조폭이지, 그게 천국이겠습니까?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 다 그런데.
그러니까 천국은 면류관을 예수님 몸 앞에서 우리의 생명의 면류관까지도 반납을 하려면 미리 가기 전에, 혼인잔치 들어가기 전에, 미래의 신부, 우리가 원하는 내가 원하는 신부 말고, 주께서 주의 몸에서 발생된 신부, 그 신부의 모습으로 강제로 주께서 교체작업에 나섭니다. 그때 발생되는 감각이 뭐냐, 실망입니다. ‘나 세상 그만 살래.’하는 실망. 주님께서 ‘진작 그래야지. 처음부터 그래야지. 니가 살려고 하는 것이 니가 잘못이다.’ 이 말이죠.
이겁니다. 우리 인생은 간단한 거예요. 지금 안 죽어서 사는 겁니다. 살려고, 살려고 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안 죽었기 때문에 지금 살아있는 거예요. 완전히 요양병원이죠. 요양병원. 침해 1급 이예요.
우리의 몸에서 불룩불룩 죽음의 흔적이 계속해서 나옵니다. 혈압도 높죠. 당뇨죠. ‘니는 지금 죽일 거야‘ 하는 흔적이 볼록볼록 계속 튀어나오는 거예요. 우리는 그걸 강제로 운동을 해서 계속 누르고 치수재고 혈압재고 하지만 백날 해도 튀어나오고 나이 들면 또 튀어나와요.
언제까지 니 몸이 원하는 너의 미래상에 니가 얽매여 살 것이냐, 주께서 좁은 길로 가면 우리 몸 자체가 교체돼야 됩니다. 뚱뚱한 몸 가지고 좁은 길 가면 둘이는 비좁아서 못가죠. 홀쭉해야 돼요. 홀쭉해서 주와 함께 좁은 길 갈 때, 이게 제대로 된 넓은 길이다. 이렇게 생각이 들어야 되거든요. 그 작업을 할 때 거기에 적용되는 그 계획서, 그것이 예수님 몸에서 나오는 계획서가 요한계시록 21장에 펼쳐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다시 한 번 제가 강조합니다만 이것은 우리가 ‘관여하지 마.’ 또는 관여 안 해도 되게 돼 있습니다. 우리의 미래? 우리가 걱정 안 해도 거기에 어느 날 거기에 잠자고 나면 도착돼 있습니다. ‘아~ 잘 잤다.’ 기지개 펴고 일어나면 천국에 이미 와 있습니다. 뒤 돌아보면 주께서 그렇게 다 하셨어요. 우리가 그때에 비로소 평소에 관여하지 말라는 그 의미와 뜻을 그때에야 온전히 알겠죠. ‘아!’ 다 일방적으로 다 하시는데 우리는 걱정이 되어서 내 뜻대로 안 된다고 지옥 가지 싶어서 혼자 걱정을 늘어지게 했을 때 마귀가 옆에서 장난했는데. 관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 관여를 안 했을 때 어떤 현상이 벌어지느냐, 성경말씀대로 된다고 하니까 일단 기분은 좋다마는 하지만 내가 아무것도 안 했을 경우에 과연 성경말씀대로 그대로 적용된다는 보장이 없지 않느냐, 이렇게 생각할 텐데, 관여하지 않는 세계에서 뭐가 생기느냐 하면 투쟁, 전쟁, 전투. 전투와 전쟁의 차이점은 전투라 하는 것은 소규모에서 벌어지는 다툼을 전투라 하고 더 넓은 전체를 가지고 전쟁이라 하거든요. 보통 용어를 쓸 때.
전쟁과 전투와 투쟁을 우리가 목격하게 됩니다. 관여하지 않을 때 우리가 만약에 우리 인생에 관여하지 않으면 주님께서 우리의 대장되셔서, 찬송가에 나오죠? 주께서 대장되셔서 뭘 하느냐, 전쟁과 전투와 싸움과 투쟁과 씨름을 하시는 거예요.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평소에 가정에서 엄마가 시장에서 일 하는 것은 알아요. 엄마가 어떻게 돈 버는지는 몰랐어요. 그래서 애가 고등학교 때쯤 돼서 엄마가 집에 오면 항상 나를 반기고 방긋이 웃고 천하에 천사처럼 인자하신 분처럼 했는데, 그래서 인자하게 돈 벌어서 내 공부시키는구나. 참 고맙다. 그런 생각 하면서도 그래서 엄마가 시장에서 어떻게 일하는지 보고 싶어서 몰래 가보니까 그렇게 집안에서 인자한 어머니가 돈 한 푼 벌려고 팔 걷어 부치고 ‘뭐, 옷 보기만 하고 그냥 가는 게 어디 있어? 옷 봤으면 사야지.’ 하고 붙들고 싸우고 시장바닥에서 온갖 비난 소리를 들어가면서 기어이 한 푼 벌려고 애 쓸 때, 아, 우리는 관여하지 말라고, ‘니는 내가 벌어준 돈 가지고 열심히 공부나 해라.’ 관여하지 말라고 해서 포근하게 온실 안에서 살았는데 이러한 혜택이 오기까지 우리 어머니는 바깥에 나가서 치열한 목숨 건 벌이고 있다는 걸 알죠.
바로 예수님도 마찬가지예요. 우리에게 관여하지 말라는 미래의 성도, 니가 생각하는 성도 아니고 내가 알고 있는 성도, 성경에서 신부라 하죠. 그 화려한 신부의 모습, 뒤에 가면 보석입니다. 그 보석 같은 신부의 모습이 되기 위해서 ‘너는 관여하지 마, 내가 알아서 다 그렇게 시나리오대로 다 되게 돼 있어.’라고 했는데 막상 그것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현장에서는 예수님은 치열한 악마와의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학생은 엄마 싸우는 것 보고 어떻게 하겠습니까? 가만있겠어요? 같이 대들겠습니까? ‘아저씨, 왜 그래요? 우리 엄마가 연약하다고 무시하는 거예요?’ 같이 대들죠. 요게 바로 성도의 싸움! 이건 자기를 위한 싸움이 아니고 자기가 학급에서 친구들과 싸우는 게 아니고 엄마의 전쟁에 지가 뛰어든 거니까 이게 주님의 전쟁, 또는 복음을 위한 전쟁, 또는 주님을 위한 전쟁, 나의 자존심이 아니라 주님의 명예를 높이기 위한 전쟁, 복음과 비 복음,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했는데 ‘아니야, 행함도 있어야 돼.‘라고 우기는 그 세력과의 양보할 수 없는 전쟁에 우리는 거기에 참여하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보면 성경에서 공짜로 구원받는다 해놓고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고 했는데 딴 데 보니까 ‘싸워라’ 하는데, 오늘 본문 7절 봅시다. 뭐라고 돼 있죠? “이기는 자....”라고 돼 있죠. 거기 6절 끝 하고 좀 모순되잖아요. 6절 끝에 보면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목 마른 자에게 어떻게 준다 했습니까? 값없이 준다 해놓고 7절에 보면 이기는 자, 에이고, 앞 다르고 뒤 다르고, 왜 두말 하나 이렇게 나오겠죠. 이긴 값으로 받아야지, 값없이 하려면 아무것도 안해야 값없이 되는 게 세상은 그렇잖아요.
이 구조, 이 논리는 방금 이야기한 데서 설명됩니다. 여기서 ‘이기는 자’라 하는 것은 이미 이길 수밖에 없는 싸움, 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졌다’하는 것이 성립이 안 된 상태에서 싸움에 투입되는 거예요. 짐이 없는 이미 이기기로 작정된 전쟁터에 우리는 숟갈 하나 들고 젓가락 들고 가는 것뿐인데 지 솜씨 자랑하지 말고 솜씨 잘나서 이긴 게 아니고 이미 이겨버린 전쟁에 지는 폼만 재는 것뿐 이예요.
남자 주인공이 전투나 주먹다짐을 하는 영화에 보면 괴물하고 싸울 때 영화에 보면 괴물 없어요. 그냥 혼자서 픽, 픽 주먹만 날리죠. 그런데 괴물은 그래픽해서 영화를 합성해 보면 주인공이 괴물하고 싸우는 게 되죠. 우리는 마귀도 안 보이고 뭐도 안 보여요. 우리는 만날 뭐하느냐 하면 내 과거에 기준해서 그 과거에서 뭘 만들고? 내 욕구의 미흡함을 끄집어내서 그걸 현재 느껴서 그 미흡함을 채우기 위해서 미래에 나서는 추진력을 우리가 얻고자 하죠.
그러면 이 미래라 하는 것은 미래의 일상이라 하는 것은 다 어디서 구축된 겁니까? 과거의 누적된 경험에서 누적된 것이고, 그러면 과거에 경험한 것 다 느낍니까? 아니죠. 현재에 유용한 것, 현재 나한테 이익이다 싶은 걸 따로 뽑아서 ‘이건 과거에 내가 생각했던 꿈이었어.’라고 일방적으로 편집을 하는 거예요.
우리가 평소에 행동하는 것이 그냥 무심코 행동하지만 분석해 보면 딱 요겁니다. (과거, 현재, 미래) 우리는 시간성 위에서 그냥 지렁이처럼 꿈틀대고 있거든요. 항상 인간은 시간성에서 못 벗어나요. 기차 철로 같아요. ‘아, 요것이 어제는 이랬는데 오늘은 어제보다 실적이 적었어. 다음에는 더 벌어야지.’ 항상 단선 철도 같아서 이 바깥으로 나갈 줄을 몰라요.
그래서 주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바깥으로 나가게 하는데 어떻게 나가게 하느냐, 우리가 관여할 필요가 없는 주님의 세계가 기다리고 있는데 우리는 내 고집을 부려서 주님이 좋은 것보다 내 좋은 게 나한테 더 좋아요. 주님이 기뻐하는 것보다 내가 기뻐하는 것이 나한테 더 큰 기쁨이 되고 그 기쁨이 다음에 내 행동을 할 때 하나의 에너지, 힘이 돼요.
주님께서 십자가 지셨다. 전혀 내 일에 도움이 안 돼요. ‘요거 하면 돈 벌게 해줄게.’ ‘ 그래, 앗싸,’ 그런 식으로 우리는 주님의 전투에 참여합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허풍쟁이죠. ‘주여, 주여’ 하면서 실은 속셈은 누구에게 있습니까? ‘내가 주님 일 하니까 원래 내가 노렸던 그거 이루어져야 됩니다. 주님께 요만큼 도움 줬으니까 반대급부로 이만큼 채워줘야 됩니다. 내가 그것 때문에 참여하지, 주님 좋으라고 참여하는 거 아닙니다.’ 이게 내 마음 속에 있어요. 그게 잘못인지 알면서도 원래 인간 자체가 그런데요 뭐. 인간은 자기가 자기를 바꿀 수 있는 요소가 없습니다. 바꾸려면 지가 인간밖에 나와서 자기를 바꿔야 되는데 그 생각하는 출발지가 자기기 때문에 내가 생각을 바꾼다는 그 자체가 그 자체를 바꿔야 되기 때문에 이건 말이 안 돼요.
그래서 그대로 사시면 되는 거예요. 사시면 되는데 믿음이 있는 사람은 어쨌든 저쨌든 간에 구원받는 것은 내 소관이 아니라는 사실, 이건 내가 관여해서 내가 관여한 만큼 내가 구원받고 이런 것은 주님의 구원방식이 아니라는 것. 그건 이단들이나 다른 종교에서 괜히 우리 비위 맞춰줘야 돈이 나오니까, 그쪽에서 우리 비위 맞춰서 ‘꿈은 이루어진다.’ 이따위 소리 하면서 그런 식으로 설교하면서 괜히 우리의 허풍쟁이 꿈을 정당화 시켜주는 그런 식으로 사기 치는 곳이지, 실제로 예수님은 ‘관여하지 마’ 아예 액자로 만들어서 ‘관여하지 마’ 내 인생에 대해서 내가 개입하지 말라 이 말이죠. 니 인생에 개입하지 말고 니 몸이 느끼는 대로 끌리는 대로 살면 돼요. 운동하고 싶으면 운동하고 잠자고 싶으면 뒤비자고 걸리면 걸리고 아프면 아프고 나으면 낫고 그냥 살라 말이죠.
성경에 나오는 아브라함이나 이삭 야곱 이런 사람이 여러분, 훌륭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걸 성경을 이렇게 보게 되면 그들은 지 맘대로 살았어요. 다만 그들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그들의 하나님이 된 것은 그들이 지 맘대로 산 그것을 주님이 자기 맘대로 하는 재료로 활용했다는 사실, 정신 차렸기 때문에 좋은 재료가 되는 것이 아니고 지 맘대로 사는 그것을 재료로 한 거예요. 그걸 가지고 천국의 레시피 (recipe) 라고 해요. 파, 감자, 못 생긴 감자, 삐져나온 고추, 파, 이걸 주님께서 언약이라는 걸 가지고 전부 다 다다다닥 다듬어서 음식 레시피를 만들어서 보시며 ‘어, 요한계시록 21장에 한번 보자, 하늘에서 예루살렘이 내려오는구나. 쟤가 신부인데 옷이 없구나. 신부를 내가 입혀줘야지.’ 이렇게 예수님이 혼자 다 한다니까요. ‘자, 성전 조직을 끊어버리고 이렇게 끊어버리고.’ ‘이거 끄집어내 주세요.’라고 우리가 하지 말라 말이죠.
우리가 이거 단점이다. 장점이다. 하는 것은 지가 인생을 살면서 좁은 범위 내에서 짧은 인생 가운데 축적된 체험의 편집한 결과에 불과한 겁니다. 어떻게 우리가 이 동네에 살고 짧은 인생을 살면서 ‘옳다. 그르다.’를 온 인류를 다 섭렵해서 뭘 어떻게 이게 기준이라고 정의를 내릴 수가 있습니까? 안 됩니다. 그건 성립이 안 돼요.
자기가 과거에 생각했던 가운데 ‘이것만 옳을 거야. 나쁘다.’ 하는 것은 일방적인 생각입니다. 예를 들면 회사 근무하는 사람이 ‘사장님 저는 아침에 일찍 출근하고 농땡이 안치고 충실하게 일을 하고 난 뒤에 착실하게 퇴근시간에 퇴근했습니다. 저 착실하죠?’ 할 때 ‘너 아픈 사람 위해서 신장 떼 줬어?’ 안 떼 줬잖아요. 그러면 그 사람이 착하다는 것은 뭡니까? 니가 일방적으로 출퇴근 시간 잘 지키면 착하다는 것은 지 정당화를 위해서 지가 일방적으로 생각한 거죠.
치과에 손님 왔는데 ‘얘는요 얼마나 공부도 잘하고 얼마나 엄마 말도 잘 듣고 착실하고 어려운 사람 노숙자도 지나가다 돈 1000원 꼭 쥐어주고 이렇게 합니다.’ 의사 하는 말이 ‘이빨이나 잘 닦아.’ ‘이빨 잘 닦는데요.’ ‘제대로 닦아야지.’ 이리이리 옆으로 닦지 말고 아래위고 제대로 닦아야지.‘ ’누가 이야기해 주는 사람이 없는데.‘ ’내가 이야기 해줄게. 니는 앞으로 이를 옆으로 닦지 말고 위 아래로 결 따라 닦아라.‘ 그러면 걔가 ’에~‘하고 울죠. 왜 웁니까? 자기는 치과 오기 전까지는 자기는 착한 애인 줄 알았는데 치과 와서 새로운 소스, 새로운 정보를 딱 접수한 순간 자기는 이빨 아파도 싼 못된 인간이 되잖아요.
그러니 인간의 경험이라 하는 것은 얼마나 일방적입니까? 얼마나 자기 잘남을 내세우기 위한 핑계거리, 변명거리에 지나지 않는 그것 가지고 어딜 감히 거룩한 흠도 티도 없는 천국에 어디 감히 그걸 건방지게 생각해요? 말도 안 되죠. 차라리 모든 게 이빨만 나쁜 게 아니고 평소에 내가 도와주고 한 모든 게 죄인이고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이렇게 고백하도록 주께서 자기 자신에게 실망감을 안겨주는 겁니다. 그 애가 치과에 안 왔으면 자기가 얼마나 잘난 체 하겠습니까? 치과에 와서 한번 호되게 당하고 난 뒤에는 ‘앞으로 이빨 똑바로 닦아. 돈 때문이 아니야 니 건강을 위해서야.’ 한번 그 소리 듣고 난 뒤에는 그 소리 들을 때 얼마나 자기에게 낙심이 되겠습니까?
그런데 돌이켜 생각해 보면 ‘아!’ 이렇게 내 자신을 너무 몰랐다는 사실, 내 자신을 너무 부풀어 거품이 많은, ‘왜 나는 이렇게 완벽해? 몸도 되고 키도 되고 인물도 되고 왜 이리 잘난 거야?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냐?’ ‘이 왕궁에서 왕비가 제일 예쁩니다.’ 그것만 들었으면 아무 문제가 없는 걸 가지고 그런데 이 나라 밖에 있는 누가 있습니까? ‘백설 공주 있습니다.‘ 하니까 그때부터는 미흡함을, 드디어 백설 공주 잡으라는 새로운 미래에 대한 할 일이 생깁니다. 그래서 우리의 할 일이라 하는 것은 상당히 수상합니다. 분명히 노림수가 음흉해요. 내가 이렇게 정당한데 아직도 모자라? 그렇다면 이것마저 달성해서 내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를 똑바로 보여줄게.’라는 자기 욕심, 그게 우리의 모습인데 그 말도 안 되는 이 인간을 가지고 주님께서는 자기 군사라고 거룩한 영적 전쟁에 우리를 재료로 사용해 주시는 이 은혜, 아! 우리는 너무나 감사하죠.
인간답게 살았기 때문에 군사가 아니고 세리와 창기와 막가는 인생인데 불구하고 강도인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완벽함을 보여주기 위해서 허접스러운 우리를 지상에서 그냥 사용해 주시는 겁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두고두고 앞으로 계속해서 감사할 일이 되는 겁니다.
다시 한 번 이야기하지만 나의 미래가 있어요. 나의 미래는 우리는 매일같이 솟아납니다. 만약에 우리가 복음을 알면 이 복음을 아는 것 갖고 어디에 써 먹을까 하는 것도 나의 미래가 되죠. 그런데 나의 미래를 뭐로 바꾼다? 주님의 미래로 바꾼다. 나의 미래는 뭐로 바뀌고? 곧장 안 가서 실망감으로 바뀝니다. 실망감이 연속되게 되면 자기 자신이 죄인인 것을 알게 되죠. 죄인인 것을 알게 되면 이것은 악마가 더 이상 그 사람한테는 건드릴 게 없어요. ‘니 잘났지? 잘났지?’ 하면 ‘잘났지, 잘났어.’ 하고 깨춤 추면 좋은데 ‘너 잘났어?’하면 ‘어, 나 안 잘났어.’ 재미가 없어요. 찜 맛이 없어서 마귀가 건드릴 게 없어요. ‘니 기도하면 얼마나 잘 되나 보자.’ ‘나 기도하면 더 망하지 싶어.’
기존 교회에서는 이 말을 못 알아듣습니다. ‘여러분, 열심히 기도하시면 더욱 더 망합니다.‘ 이 말을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습니다. 개척교회 하는 사람한테 ’열심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교회 해체될 겁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른다 말이죠.
자, 방금 이야기한 것을 좀 더 어렵게 해보겠습니다. 4절에 봅시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오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하면서도 난해한 부분에 접근해 가고 있습니다. 어떤 것이냐 하면 처음 것들은 다 지나갔죠? 처음 것, 다른 말로 하면 옛 것이죠? 옛 것은 다 지나갔다 말이죠. 그러면 제가 먼저 질문을 던져보겠습니다. 옛 것 안에 새 것의 요소가 들어있습니까? 안 들어있습니까? 옛 것을 옛 것이라 할 때 옛 것을 없애고 새 것을 만들 때, 옛 것 속에 새 것의 어떤 힌트나 흔적이나 요소가 일부 들어있는 걸까요? 안 들어있는 걸까요? 흔적이 있다고 했죠. 요 질문을 해놓고 답변하는 과정이 좀 복잡하니까 제가 답변을 해보겠습니다.
인간의 몸은 세포로 돼 있는데 세포는 둘로 나눠져 있죠. 체 세포와 생식 세포로 돼 있습니다. 생식 세포 빼놓고 다 체세포인데 생식세포라 하는 것은 남자는 정자, 여자는 난자거든요. 그런데 이것이 1885년에 어떤 생물학자의 주장에 의하면 체세포는 죽지만 생식세포는 불멸하다는 거예요. 이게 19세기 말에 그렇게 이야기했는데 1953년에 왓슨과 크릭이란 사람이 DNA구조를 발견했어요. 그래서 나는 죽어도 나의 DNA가 타인에게 전수가 가능한 거예요. 그러면 나의 DNA 일부가(사실 반이지만) 자식에게 주게 되면 자식이 다른 사람하고 결혼하게 되면 일부가, 양은 어쨌든 상관없이 내 DNA는 계속해서 확산되는 거죠. 이건 불멸이죠.
그런데 내가 세상에서 운동을 해서 생긴 근육, 이런 것은 남한테 전이가 됩니까? ‘너 운동 좀 많이 해 놔라. 내가 근육이 없을 때 니 근육 나한테 떼 줘.’ 그게 안 되죠? 그런데 어떤 여자보고 ‘당신 나하고 결혼해 주렵니까?’ ‘왜요?’ ‘내 DNA를 내 자식에게 전하기 위해서 당신 몸이 필요합니다.’ 이건 말이 되죠.
그래서 불멸하는 것과 소멸하는 것, 사라지는 것이 우리 인간 내부에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때부터 인간들은 뭐냐, 새 것과 옛 것이라는 것을 소멸할 때는 소멸하지만 새로운 것, 영원한 것, DNA는 어떻게 조작을 하든지, DNA에 어떻게 영향을 줘서 좀 더 우수한 그러한 DNA를 자식에게 물려줄 수 있는가, 그때부터 그런 연구를 시작하는 거예요. 지금 의학에서 하는 모든 초점이 그러한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자, 방금 제가 인간의 몸의 구조를 예를 들었는데, 하늘나라도 그렇습니까? 옛 하늘과 옛 땅은 불에 타서 없어지죠. ‘그러면 옛 하늘과 옛 땅 속에 불멸의 요소가 들어 있습니까?’라는 질문과 아까 한 질문과 같은 질문 이예요. 이게 정말 어려운 문제예요. 만약에 불멸의 요소가 있다면 만약에 옛 하늘과 옛 땅을 불에 다 태워버리면 뭐도 같이 태워집니까? 그 불멸의 요소도 태워지니까 결국은 옛 하늘과 옛 땅과 새 하늘과 새 땅은 연속성이 없어요.
그래서 요 문제를 풀려면 우리가 어떤 오해를 갖고 있으니까 어떤 것이 오해냐 하는 것부터 해야 되죠. 여기 요한계시록 21장 1절에 보면 새 하늘과 새 땅이 나오죠? 우리가 알기로 새 하늘과 새 땅은 더 이상 소멸하거나 불에 태우지 않고 영원하다고 알고 있죠? 그런데 이것이 새 하늘과 새 땅이 영원하다고 알고 있고 그걸 믿고자 하고 그 아는 것을 기뻐할 때 그 기뻐하는 그 심보가 은연중에 뭐냐 하면 내가 소멸되지 않고 내가 영원하려는 어떠한 소식과 정보를 내가 습득하고 이해하면 되느냐 하는 노림수를 내가 갖고 있으면서 요한계시록 21장 1절을 볼 수가 있어요. 요거 반칙입니다. 요거 안 되거든요.
이러면 성경해석 잘못된 거예요. 옛 하늘과 옛 땅 중에서 불멸하는 것을 따로 추려내서 그것을 옛 몸에 속한 옛 몸에 해당되는 내가 그 옛 하늘과 옛 땅 속에 있는 영원한 것을 가지고 이렇게 연결시켜 버리면 나의 개인 몸도 새 몸으로 달라질 수 있는 그런 가능성과 희망이 보인다. 이렇게 해서 믿어 버리면 이건 믿음이 아니고 이건 교육 이예요. 훈련이라니까요. 교육이고 훈련이죠.
그러면 주님께서 학원차려서 천국 학원, 수강생 모아서 한 달에 5만원 내게 해서 ‘여러분 속에 불멸한 것 있죠? 고거 주께서 주신 거니까 잘 간직하셨다가 나중에 천국에 오시면 그거 내밀면 통과됩니다.’ 그렇게 가르치면 되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신학에서는 뭐라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본 겁니다.
우리 속에 짐승과 다르듯이 짐승은 하나님의 형상이 없는데 인간에게는 있다. 그럼 하나님의 형상은 뭐냐 하는 것은 무엇과 비교하면 되냐 하면 짐승과 인간의 차이점만 끄집어내면 그 차이점만 하나님께서 특별히 인간이란 이름 때문에 준 거라 그렇게 생각한 거예요. 그게 의와 거룩 이런 것도 있지만 좀 더 범위를 넓혀보면 직립보행, 언어 사용, 그리고 도구 사용, 불 사용, 이런 거, 특별하게 인간에게만 있는 거, 인간의 사회성, 이런 것들을 가지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런 것들을 이렇게 주장하다 보면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꼭 피까지 흘려서 죽게 할 이유가 없어요. ‘내 말을 듣고 내 말을 믿는 자는 구원하리라.’ 이러면 되는데 ‘내 피와 내 살을 먹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생명이 없다.’는 말은 이건 어울리지 않습니다. 이건 이 말이 들어갈 자리가 없어요. 공부해서 하면 되는데 학교 선생님이 ‘자, 책 보고, 삼각함수 코 싸인, 싸인, 이렇게 가르치면 되는데 갑자기 수학 시간에 선생님께서 칼을 내서 자기 목을 따면서 살점을 뜯어내면서 ’내 피와 내 살점을 먹지 않으면 너희에게 수학 100점은 없느니라.‘ ㅎ 이게 말이 안 되잖아요. 왜 이리 과격합니까? 우리 인간들이 얼마나 순한 인간인데, 우리 인간들이 얼마나 착합니까? 하나님이라 하면 껌뻑하고 ’종이 듣겠나이다.‘ 이럴 정도로 착하고 착한 순한 양인데, 교도소에 있는 사람 말고 교회 온 사람들, 착한 사람 앞에서 이거(목) 베고 못 박아 버리고, 문경의 어떤 미친 사람처럼 지가 지한테 못 박고 피 흘려서 양푼에 ’피 담아라.‘ 해서 담고 살도 담아서 ’내 살과 내 피를 마시지 않으면 영생이 없다.‘
이건 말이 통하겠다는 것이 아니고‘ 아예 너희들은 내 말을 못 알아듣게 돼 있어.‘라는 그런 뜻인지, 어느 쪽입니까? ’아버지께서 내게 보내지 아니하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 그 이야기하시려고 오신 거잖아요.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에 죽음이 없이는 안 되듯이 너희들이 아버지 나라에 가려면, 또는 천국 가려면 너희들의 죽음 가지고는 안 돼요. 베드로의 죽음도 소용없어요. 예수님의 죽음만이 거기 있어야 가는데 예수님께서는 왜 교육이나 훈련이나 삼청교육대 그런데 안 가고 왜 예수님이 피를 흘리는 이유를 니가 아느냐 이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성령이 아니고서야 너희가 그것은 모르느니라. 따라서 이 피에 대해서 설명할 때 성령 받은 사람과 받지 않은 사람을 가려내는 식으로 피에 대해서, 십자가에 대해서 언급을 해야만 한다는 겁니다. 지나 개나 하는 그런 십자가는 십자가도 아니에요. 성령을 못 받은 사람은 화를 발칵 내고 뛰쳐나가야 될 정도로 그렇게 십자가는, 예수님의 복음은 그렇게 전해야 됩니다. 그리고 뛰어나가는 그 사람을 보고 한마디 더 해야 돼요.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 교회가 저주가 없으면 안 됩니다.
제가 베르그손 글을 하나 썼지만 심판을 모르고, 마지막에 복음적 표현을 써놨죠? 그렇게 공부를 많이 하고 많이 아는 사람이 왜 주께서 분노해서 화산 터지고 지진이 일어나는 사실을 어떻게 이 땅에서 철학 가지고 화학 가지고 아무리 분석해도 의사가 아무리 실험실에서 실험해도 하나님이 분노를 거기서 찾아낼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신학자가 아무리 연구해도 거기서 하나님의 진노와 분노를 찾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분노와 진노는 하나님의 분노와 진노를 받은 사람만이 알아요. 그야말로 하나님 때문에 실망을 느껴야 주께서 화내고 있다는 것, 죄인에 대해서 화내고 있다는 것을 안 사람만이 ‘야!’ 살아있는 것이 고마운 줄 알죠. 죄인을 받아주시는 주님의 고마움을 알고 피를 흘린 고마움을 아는 거죠.
회원 모집하려고 강의하거나 설교해서는 안 됩니다. 마치 그러한 것이 추수 때와 같아요. 추수할 때 조심해서 추수해야지, 창고에 가라지가 섞여서는 안 된다 이 말이죠. 아주 주의를 요하는 거예요. 알곡 있는 것만 오도록 가라지와 알곡을 가려내는 그런 규정은 우리의 과거의 경험이 아니고 우리 몸에서 나온 경험이 아니고 ‘니가 6.25 때 폭탄 맞아 봤어? 안 맞아 봤으면 지옥 가.’ 이러면 안 된다니까요. 그걸 자기 몸의 경험이고. 그 경험도 사실 자기가 경험한 게 아니고 현재 자기가 유용하다 싶어서 일부러 안 잊어버리고 계속 반복해 놓은 거예요.
인간은 현재 자기가 유용한 것과 유용하지 않은 것을 다 가려냅니다. 그래서 아무리 과거의 경험 가운데서도 자기에게 필요 없다 싶으면 그런 것은 채택을 안 하는 법이예요. 얼마나 인간이 자기 위주인데요.ㅎ
알곡과 가라지를 가려내는 그 기준에는 십자가 복음이 있고 그 복음이 무엇이냐 해서 복음이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그 복음에서 파생돼 나오는 여러 가지 계열, 그 계열이 뭐가 되느냐 하면 요한계시록 21장이 되는 겁니다.
그림으로 그려보겠습니다. 간단하게 그릴게요. 피라미드, 꼭지 점에 이렇게 십자가가 있다고 합시다. 십자가 피가 흐르면서 무엇과 만나느냐 하면 이 죄 많은 세상과 만납니다. 이 죄 많은 세상이라 하는 것은 강의 죽 한 것처럼, 자기 몸, 자기 과거의 경험위주로 미래를 생각하는, 자기 밖에, 자기 몸밖에 모르는 죄많은 세상이 하나님과 만나면서 여기서 여러 가지 갈등과 시기와 오해와 그리고 격분 분노 무시 이런 것들을 마주치게 됩니다.
뺨을 때리면서 ‘니가 메시아냐? 우리 알아 맞춰봐. 누가 뺨을 때렸는지.’ 이런 식으로. 예수님 눈을 감겨놓고 뺨을 때리면서 ‘니가 메시아 같으면 선지자 같으면 우리 중에 누가 뺨 때렸지?’ 예수님을 자기 게임용, 자기 기쁨을 위한 게임용으로 사용한 거예요. 그런 것과 만나면서 피가 피답게 계속 내려오는 거예요. 그러면 이 중에 누가 섞여 있겠습니까? 역시 우리도 섞여 있는 거예요.
‘왜 기도했는데 내 뜻대로 안 됩니까?’라고 또 예수님 뺨을 때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 ‘십자가 복음 다 믿는데 왜 내 뜻대로 안 이루어지느냐 이 말입니다. 하나님이여, 하나님 말 귀를 못 알아듣네.’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이렇게 흘러나오면서 요한계시록 1장부터 21장까지 계속 발생되는 거예요. 온갖 전투와 전쟁, 숨어있는 마귀, 모든 성경에 나오는 단어 하나, 하나, 땅의 임금들과 거짓 선지자, 이것이 위에서 뭐가 흘러내려온다 했습니까? 예수님의 피가 적셔 내려오니까 피가 적시니까 멀쩡하던 세상이 예수님의 피에 대해서 조직적으로 반항하고 반발하는 악한 세력의 하나의 기지, 이 세상 전체가 하나의 군사들이예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모독하기 위해서 편성된 악마의 군대들로 이 세상이 짜여 졌다는 걸 아는 겁니다.
지난 수요일 날 어제 이야기했죠? 예레미야가 환상을 보는 순간 주변은 갑자기 뭐가 된다? 주변은 전부 다 지옥이 됩니다. 우리가 평소에 정 나누고 살던 사람들, 친하게 지내던 이웃 사람이 내가 복음을 발설하는 순간부터 그들은 자기의 본색을 드러냅니다. 같은 가족끼리도 마찬가지예요. 편하게 살려고 하면 입 다물어야 돼요.
그리고 나서 여기에 전개되는 모든 개념들이 ‘옛 것은 지나갔으니 새 것이 되었다.’는 말이 우리 살기 위해서 새 것이 아니고 주의 피 안에 담겨있던, 피 속에 담겨있던 새 하늘과 새 땅이 비로소 만개되는 거예요. 어떻게? 우리의 기대와 실망, 이 세상에 대한 기대와 실망을 완전히 꺾는 식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이 우리가 좋아하는 새 하늘 새 땅이 아니고 우리가 기대하는 새 하늘 새 땅마저 구겨버리고 찢어버리는 식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이 전개됩니다. 10분 쉽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