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교회120517-요한계시록21장11-24(보석)39강b-이 근호 목사
제 39강b
인간으로서 예수님을 모른다 했어요. 왜 그러느냐 하면 내가 나를 거울에 비춰 볼 때 바로 비추니까 ‘나네.’ 뒤에 시커먼 마귀가 이러지는 않잖아요. 그러니까 이거는 누가 뭐래도 ‘이건 남이 아니고 나다.‘라고 여길 때 이게 뭐라 했어요? 이렇게 시작하는 자체가 일방적인 생각이라는 거예요.
하나님은 뭐라고 생각하느냐, ‘내가 거울에 비친 내가 난데, 이건 하나님이 아니라 우 하나님이 와도 이건 틀린 게 아니다.‘라고 지가 그렇게 일방적으로 장담하거든요. 이게 만약 아니라면, 이게 아니란 발상을 인간은 할 수 없어요. 딱 이게 물이지 술도 아니고 물인데 물 보고 물이라 하는데 뭐가 나쁘노? ’그게 아니거든요.‘ 하면 이게 왜 아니냐. ’물인데, 컵 술이야?’ 뭐가 잘못됐어요.
그 잘못된 것이 창세기 3장에 보면 나옵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아담아 네가 이걸 몰라보느냐.’ 이걸 묻는 게 아니에요. ‘아담아, 저거 의자 알아 맞췄냐?’ 그걸 묻는 게 아니고 ‘아담아 네가 뭘 행할 수 있지? 네가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어?’ 이걸 묻는 게 아니고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묻는 거예요.
‘아담아, 너는 누구지?’를 묻는 게 아닙니다. 인간은 ‘내가 누구지? 내가 누구지?’ 그런 질문조차 할 자격이 인간은 없어요. 그럼 인간으로서는 인간일 경우는 한 가지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불러줄 때 그 부르심과의 엮어진 관계 성 안에 걸려들 때 비로소 주님이 불러준 존재로서의 사람 이예요. 그때 비로소 사람이 되는 거예요. 불러 줄 때!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불러줄 때.
그건 답변하라는 게 아닙니다. 네가 스스로 너를 세워서는 안 된다는 말 이예요. ‘나는 이렇습니다.’라고 말할 자격이 우리한테는 애초부터 박탈당한 거예요. ‘나는 이렇다. 나는 저렇다.’하는 자체가 이미 우리가 서 있는 이 자리에서 무지한 상태에서 기껏 눈에 띠는 대로 ‘나는 나다.’라고 우기는 그것, 그것이 세상 모든 과학과 문명의 출발점입니다. 합리적 사고의 출발점입니다. 나는 나다.
그러면 우리 자리를 우리가 알면 될 게 아니냐, 그건 우리가 우리 자리를 몰라요. 어떻게 아는데?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불러줄 때만 우리 자리가 주께서 주목하는 자리인 것을 아는 거예요.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할 때 아담이 어디 있었습니까? 부끄러워서 숨었다고 돼 있죠? 결국은 주님께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는 질문 자체가 뭐를 유발하게 된 겁니까? ’나는 숨었습니다. 나는 정상이 아니고 비정상적인 존재입니다. 주께서 나를 심판하고 죽여도 저로서는 할 말이 없습니다.‘
그것이 십자가를 가지고 성령이 우리에게 오게 되면 ‘주여, 제가 있는 자리는 주께서 심판해도 무방한 자리입니다.’라는 고백이 되는 겁니다.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디모데후서1장 9절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이 은혜대로 하심이죠? 이 은혜대로 하심이 디모데전서 1장 15절에 보면 “나는 죄인 중에 괴수니라”라고 한 거예요.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해요.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고 했으면 나는 지옥 가도 마땅한데 내가 지옥 가도 마땅하다고 우기면서 어떻게 내가 구원을 기대감을 품을 수 있느냐, 이게 이중인격이 되는 거죠. ‘나는 지옥 가도 마땅합니다.’라고 하면서 그러니까 ‘지옥 가도 마땅하다는 말을 했기 때문에 나 구원해줘 잉.‘ 이건 장난친 거 아닙니까? 이건 트릭이죠. 이건 꼼수죠. 꼼수.
그런데 그 꼼수 외에 달리 대안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그래서 그 꼼수를 허용해 달라고 요청하는 거예요. ‘주여, 나 부족합니다. 람쥐.’ 이런 거. ‘나 부족합니다.’하고 까부는 거예요. ‘나 부족합니다. 그러니까 나 구원되겠습니까. 불이.’
사도바울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창세전에 예정된 자만이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고 하는 이유는 그것이 내 구원에 관한 문제가 아니고 예수님이 우리를 호출했다는, 주님의 호출이 나의 구원을 결정했다고 보는 겁니다. 주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또 이렇게 이야기하면 많은 사람이 ‘안 찾아오면? 안 찾아오면?’ ‘안 될 놈은 안 돼.’ 사람이 안 된다 하면 오기가 나서 더 되려고 하는 거예요. ‘제가 당신은 구원 안 돼요.’라고 한 게 아니죠? ‘안 될 놈은 안 돼‘ 라고 했죠. 오해들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당신은 죽어도 구원 못 받아.‘ 한 게 아니고 ’안 될 놈은 안 돼.‘ 그런데 그 안 될 놈이 나라고 생각하면 그건 당신 자유예요. ’조 OO는 지옥 간다.’라고 그런 이야기한 적이 없고, ‘조OO 같이 믿으면 지옥 갑니다.’라고 했을 때 그 이야기를 조OO목사가 들었을 때 본인이 그렇게 안 하면 되잖아요. 그건 본인 문제라니까요. ‘어떤 사람은 지옥 간다.‘했을 때 특정인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이러이러한 조건 하에 지옥 갑니다. 하는 거예요.
그래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는 것은 결국 무엇을 이야기하느냐 하면 유명한 소설 제목인데 ‘인간의 조건’, 인간의 조건을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만들 수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매일 주어지는 은혜는 주께서 만들어주는 인간의 조건에서 뽑아낸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해해서 내가 기대한 그 조건에 맞추어서 내가 오늘 하루 살려고 하는 겁니다. 나는 착한 사람이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해서 안 되고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나는 나쁜 짓을 안 해. 이건 누가 만든 조건입니까? 내가 마치 신자인 것처럼 착각해서 신자라고 우기면서 나온 내가 임의로 만든 나에 합당한 조건이죠.
그런 조건에 의하면 내 돈 떼먹고 사기 친 인간은 죽어야 되는 겁니다. 자기 조건이 자기 조건에 머물지 않아요. 나를 미워하고 싫어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교통사고 나서 뒤에서 받아서 입원하든지 해야 되고, 이처럼 항상 이건 인간이 자기 조건이 자기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고 인간은 자기 조건을 어디까지 확대시키느냐 하면 주변 인물들까지 확대시킵니다. 왜, 사실은 그 주변 인물 속에 자기의 입김을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남들이 알아주기 위해서 이미 우리는 행동을 취한 적이 있었거든요. 어려운 박사학위를 받고 ‘아버지’ 하고 아버지한테 제일 먼저 달려가는 그 모습을 연상하면서 아버지한테 갔는데 아버지가 술 먹고 와서 환상이 찢어졌다. ‘아버지 죽어라.’ 했는데 왜 ‘아버지 죽어라.’ 했습니까? 이미 그전에 내가 아버지한테 이미 성의와 애정을 투자한 게 있죠? 그 투자에 제대로 어떤 결실이 없을 때는 그건 내 투자한 것의 가치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그 가치를 모독한 자는 죽어야 되는 거예요.
이 방법 속에 주님께서 뛰어든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생각하면 주님께서 뛰어든 것은 초등학교 때 여자애들 잘 하는 놀이 있죠. 고무줄놀이 할 때, ‘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입니다.....’ 등 노래를 불러요. 이렇게 놀 때 여자애들끼리 치마를 펄럭이며 이렇게 노는데 멀쩡한 어른이 가서 ‘태극기가 바람에~~♫♪’ 하면서 뛰어 들면 이건 뭡니까? 불청객이잖아요. 예수님이 뛰어든 것이 그 식이예요. 인간들끼리 재미나게 노는데 주님이 벌떡 뛰어들어서 ‘아담아 니가 어디 있느냐.’하고 다시 한 번 우리가 재미나게 깔아놓은 이 바탕을 뒤집어 버리죠.
사울이란 사람이 아주 재미나게 예수 믿는 사람을 사냥하는 재미, 멧돼지 사냥은 유도 아니에요. 짐승 사냥같이 인간은 뭐든지 극단으로 치닫거든요. 짐승 사냥은 재미없어요. 사람을 죽여야 돼요. 진짜 군인감이 된다는 것은 사람 죽이는 재미를 가져야 그게 군바리로서 진급할 가능성이 많아요. 사람을 사냥한 재미에 빠진 그 사울에게 ‘사울아, 사울아’ ‘주여 누구십니까?’ 이미 사울을 호출할 때 사울이 있던 그 자리를 사울이 만들어 놓은 거기에서 뒤엎어버린 거예요.
제가 청도 강의할 때 하나 예를 들었죠. 모래시계 예를 들었죠. 선이 아래쪽으로 떨어지는 모래시계를 뒤집어버리면 악이 떨어지는 모래시계, 이게 선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악이 떨어지는, 우리 인간을 뒤집어버리는 거예요. 이렇게 악이 떨어지죠. 사울은 뭐라 합니까?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 지금까지 내가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 죽이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인 줄 알았는데 그것이 사실은 죄였다는 사실, 내 모든 것이 근본적으로 내 자리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내가 지금 어떤 자리에서 내가 활동하고 살고 있는지 그 근본 자체를 자기가 몰랐던 거예요. 왜, 마귀한테 이용당했던 거예요. 악마한테 이용당했어요. 악마는 우리를 피곤하게 만들어요. 좀 더 착하게, 좀 더 위로해 줄 수 있어. 할 수 있어, 하면 돼, 넌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
어디까지? 어디까지 말입니까? 어디까지? 단물 쓴물 다 빼먹고 나중에 남는 것은 침해 걸린 못 쓰는 그런 인간 만들어 가면서 악마는 계속 우리를 재촉하죠. 왕년에 나는 미남이었고 여러 여배우 울렸다는 성일, 성일 신성일, 지금 70대는 TV에 나오죠. 나중에 80대 되면 TV 나오지도 않아요. 부끄러워서.
점점 더 자기 진면목에 가까이와요. 젊을 때 모습이 제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이용당한 거예요. 주변에서 이용당한 거예요. 진짜 자기 모습은 늙어죽을 때까지 자기 모습이 안 나타나는 겁니다. 늙어서 죽음이 딱 닥쳤을 때 자기 본모습이 진짜 모습이죠. 그래도 소용없어요.
우리가 죽는 게 자살하면 아는데 주께서 원하는 것은 우리 죽음이 아니고 예수님 죽음 이예요. 자기는 열 백번 죽어봐야 구원 못 받아요. 진짜 구원받은 사람은 졸지에 예수님이 왜 죽었는가를 아는 사람이 그게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왜 죽었느냐 하면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왜 갖다 발랐느냐 말이죠. 페인트 모자라서 어린양 피로 발랐느냐, 피로 하면 파리 들끓고 모기 들끓는데 피 냄새 맡고 온갖 벌레가 다 날아드는데. 그날 밤 지나고 아마 씻었을 거예요. 게임 끝나고 난 뒤에 씻었을 거예요. 너무 지저분하니까. 언제까지 집안에 피비린내 나게 하겠어요.
어린양의 피는 지울 수 있어도 예수님 피는 우리가 지워지지 않습니다. 왜, 그분이 지금 우리 손이 안 닿는 곳에 가 계시기 때문에. 하늘나라 어린양으로 계시다는 거, 우리가 요한계시록에 봤죠? 어린양의 보좌에서 번개처럼 뭐가 비춥니까? 심판의 흔적들이, 징후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잖아요. 그 심판은 뭐냐, 예수님을 떠나보냈던 이 세상 전부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심판 내리실 때마다 악마가 괴로워서 소리칩니다.
그 악마가 괴로울 때마다 지가 괴로우니까 인간들을 더욱 더 혹독하게 다루고 괴롭히고 특히 예수 믿는 사람들, 예수님의 남은 자들, 괴롭히려고 온 자기 졸개들을 전부 다 동원시켜서 십자가 복음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집중 공격하는 조로 세상의 모든 것이 움직이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목 베인 영혼들이 나오고 순교한 사람들이 나오는데 그것이 뭐냐 하면 바로 터, 제자리 잡기, 진짜 우리 인간이 살았던 터가 저주받을 터라는 사실을 제대로 보여주는 거예요. 이 저주받을 터의 왕초는 누구냐 뱀입니다. 뱀이 왕초고 이 뱀한테 발꿈치를 물린 분이 누굽니까? 여자의 후손이 물리죠. 그런데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추리고, 추리고 자르고, 자르고 다 자르고 남는 것은 뭐냐, 바로 세상이 꿈틀거리면서 어떤 여인이 낳은 아들의 발꿈치를 무는 그 사건! 그 사건만 달랑 남는 거예요.
우리는 그 사건부터 시작하자 말이죠. 그 사건, 발꿈치를 물 때, 그때 정수리를 향하여 그 뱀은 완전히 깨지는 그거, 이것은 바로 어떤 한 시점을 두고 다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개인 역사의 시작과 끝을 전부 다 함축돼 있는 겁니다. 주님께서 그 악마를 치는 것과 주님한테 물리는 그것이 그러한 문장 안에 다 포함돼 있는 거예요. 십자가 이름 안에 다 포함돼 있는 겁니다.
마귀가 아무나 공격하는 게 아닙니다. 다 자기편인데 무슨 공격을 해요? 오직 마귀의 모든 사람들을 동원시켜서 안에 복음이 담겨있는 사람을 공격하게 돼 있습니다. 공격방법은 가장 악랄한 방법이 종교적인 방법이죠. 복음 대신에 교회를 만들면 되잖아요. 복음 대신에 교회를 만들면 사람들이 뭐를 믿겠습니까? 교회를 믿게 돼요. 그러면 대 성공 아닙니까? 교회 가면 눈에 보이는 목사 있고 장로 있죠. 얼마나 그럴싸합니까? 파이프 오르간 있죠. 거기다 ‘이것은 주의 떡이요. 잔이요’ 하고 성만찬하죠. 물 뿌려주죠. 성가대 가운입죠. 성가대장은 더 화려한 가운입죠. 목사는 더 화려한 가운입죠. 신부는 더~ 화려하죠. 주교는 더, 더 화려하죠. 추기경은 거기다 머리에 뭐 뾰족한 거 하나 더 쓰죠. 교황은 거기다 지팡이까지 하나 더 쥐죠. 이건 만화도 아니고, 난 이게 소꿉놀이 같아요. 이건 뭐 애들 소꿉놀이 같아요. 무슨 짓입니까? 퇴행 같아요. 유아기로 되돌아가는 것 같아요. 동화를 그리워하는, 애들 장난치는 것 같아요. 그게 무슨 짓 이예요? 그거, 옷 입는 거하고 구원하고 무슨 관계있습니까? 나는 그게 보이는데 다른 사람들은 왜 안 보이는지 몰라.
신부 수녀들은 그 복장이 뭐예요? 유니폼을 왜 입혀놨어요? 지가 야구 선수도 아니고 야구야 야구하는데 필요하니까 입지 그거 뭐하는데 왜 입습니까? 남을 속이기 위해서 입는 거예요. 수녀들, 신부들, 남을 속이기 위해서 입는 거예요. 왜, 그런 식으로 좀 날 속여 달라고 민중들이 외치고 있으니까 그런 거예요. 제발 거룩한 척해서 구약의 제사장 복장해서 너무 허전하니까 성령이 없으니까 너무 허전하잖아요. 구원은 받고 싶고 그런 식으로라도 누가 좀 연출해서 우리를 속여주면 돈 내고 돈 바치고 해서 같이 그럴싸한 천국 가는 여행사 한번 만들어 보자, 그렇게 해서 종교가 있는 거예요. 종교는 이 세상에 영원히 이 세상 갈 때까지 계속 가는 거예요. 이 세상에서 종교는 영원히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게 마귀의 마지막 최후의 아지트인데 아지트가 없으면 되겠어요?
그래서 마지막 악마를 뭐라 합니까? 별명이 뭐예요? 적그리스도예요. 적부처가 아닙니다. 적 공자가 아니에요. 오직 그리스도를 향하여 모든 게 집결돼 있어요. 적그리스도라니까요. 적그리스도!
전에 다니엘 할 때도 여러 번 했습니다만 사실 지난주일 오후에도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마는 참 신기하죠.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이 우상을 만들었잖아요. 그러면 이렇게 우상을 만들 때 그러면 이 세상의 모든 나라는 이 바벨론으로 끝났습니다. 왜, 우상이 바로 인자의 나라와 바로 직결되기 때문에. 우상을 누가 넘어뜨립니까? 어디서 날아온 돌멩이가 넘어뜨리죠. 돌멩이 안에 뭐가 들어있어요? 인자의 나라가 포함돼 있잖아요.
그것이 바벨론 나라를 넘어뜨리고 12보석으로 기초 석을 쌓는 게 오늘 본문 내용이거든요. 이후에 뭐가 세워진다? 성전이 세워지죠. 그런데 이 나라가 자기 나라가 바벨론 나라라는 이 사실을 아는 사람만이 보석으로 된 성전이 파악이 돼요. 알 수가 있게 돼 있어요. 그런데 어느 인간치고 자기가 바벨론이라고 인정을 안 합니다. ‘에이고, 다 바벨론이었어. 다.’ 바벨론이라는 것이 자기가 판단해서 나쁜 짓해서 바벨론이 아닙니다. 본인을 포함해서 바벨론 이예요. 본인을 포함해서 바벨론 돼 버리면 ‘바벨론 이다, 아니다.‘라는 판단을 우리가 내릴 건더기 자체가 날아가 버려요.
바벨론에서는 보석이 없습니다. 그저 불에 탈 보석밖에 없죠. 12보석을 이야기한 것은 사실은 창세기 2장 에덴동산 할 때 에덴동산이 무슨 산이냐 하면 보석 산입니다. 아담이 보석 산에 살았다는 말은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한 그 자리가 사실은 보석 같아야 될 자리다 말이죠.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말미암아 졸지에 그 보석 같은 산이, 생수가 흐르고 보석이 있고 온갖 과실이 많았던 그 에덴동산이 졸지에 저주가 꾸물꾸물 기어오르죠. 그러니까 지렁이가 기어오르듯이 송충이가 온 천지에 기어오르듯이 정말 무시무시한 흉측한 장면입니다. 그것들이 기어 올라와서 사람까지 갉아서 뭐로 만듭니까? 흙으로 만들죠. 일종의 박테리아죠. 올라와서 사람을 모두 다 죽음으로 만들어 버리죠.
죽음으로 만드는데 주께서 원하는 것은 뭐냐, ‘이거 따먹는 날에는...’ 뭐하라? ‘죽으리라. ‘그 말이 맞잖아’ 하는 것을 자신의 말씀에 담긴 내용을, 그것만이 분명한 현실인 것을 확인시켜 주기 위해서 사실은 하나의 준비된 세트장이었습니다. 낙원이고 인간도 뱀도, 우리는 결국 말려든 거예요. 주님의 말씀에 말려든 거예요. 주님의 말씀이 주인공 되고 우리는 하나의 세트장 이예요.
저 경상북도 합천에 가면 세트장 있습니다. 그 세트장에서 지금도 빛과 그림자 촬영하고 있고 여러 가지 영화도 촬영하고 하는데 우리는 하도 많이 가봐서 많이 다니다 보니까 많이 가봤거든요. ‘아, 저 장면, 저 극장,’ 다 압니다. 몇 달 전에도 갔다 왔어요. 세트장을 알거든요. 왜, 난 갔다 왔기 때문에. 그런데 사람들은 그걸 몰라요. 실제로 사람 사는 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있는 눈에 보이는 뉴욕의 마틸도와 상하이의 거대한 무역센터. 이 모든 것이 하나의 누가 만든? 하나님이 허락한 세트장 이예요. 쉽게 말해서 세상이 이렇게 좋은데 이게 무슨 십자가가 무슨 의미가 있으며, 상하이에 금융센터 이런 거 보면 이거는 누구나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최고 직장이 거기예요. 연봉 높죠. 깨끗한 환경에서 사무 보죠. 모든 것이 부러움을 살 수 있는, 우리보기는 죽음의 흔적이 없어요. 하지만 그게 속임수라니까요. 그게 속임수예요. 그들은 그런 자리에 있기 때문에 복음이라 하는 것은 점점 더 시답지 않게 여깁니다.
사울이란 사람이 자기가 예수 잡아들이는 권세가 없었더라면 그때 개심을 안 당하죠. 자기는 자기가 출세한 줄 알았어요. 요새로 말하면 개혁주의 신학자들, 최고의 신학자들 돼야 개혁주의 신학에 어긋난 놈들은 전부 이단이라고 설쳐대는 그러한 권한을 받았다는 자체가 사도바울로 하여금 더욱 더 죄인 중에 괴수임을 확실하게 만들죠.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 은혜라는 말은 자기 자신이 끝 이예요. 수요일 날 이야기한 것처럼. 끝은 뭘 믿는 것이 아니고 내 자리가 내가 피어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어디 있느냐, 그 자리가 사실 끝의 자리였습니다. 죽음의 자리였고 죽어야 될 자리고 또 죽음이 우리를 잡아당기는 그 자리여야 하고 그런 기능이 나오는 거예요.
그 전부를 저는 ‘구조’라 해요. 그러니까 ‘내가 뭘 한다.’가 아니라 우리는 어느 구조 안에 있기 때문에 ‘나는 나다.’ 하는 것은 그 구조를 모르는 이상 그거 거짓말 돼 버려요. ‘나는 나고 저건 컵이고 이건 카메라’고 이 모든 것이 왜 거짓말이냐, 그 구조 자체를 모르는 상태에서 ‘이건 카메라다.’라고 이야기해봐야 그게 아무 의미가 없다니까요. 이거 카메라 안다고 천당 가는 거 아니잖아요. 우리는 천국 가지도 못 할 것에 우리는 온 청춘을 다 바치는 겁니다. 우리를 구원해 주지도 않는 그 일에.
주부가 애 본다고 해서 ‘주여, 주의 뜻대로 잘 봐야지.’ 애를 잘 본다고 해서 그걸 근거로 구원되는 게 아닙니다. 애를 잘 보나 수면제 먹여서 잠재우나 관계없이 구원은 그거와 관계없다니까요.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주님이 구조를 몰고 와서 그쪽의 구조 안에서 네 위치는 이런 위치고 너는 이런 위상이고 알려 준 사람에게만 구원이 되는 겁니다. 그 사람을 보고 구원하는 게 아니고 그 사람 속에 뱀과 여자의 싸움을 집어넣어서 구원해 주죠. 우리는 껍데기니까. 우리는 세트장이니까.
세트장이 영화 안 찍으면 나중에 철거됩니다. 우리의 세트장에는 예수님과 악마가 싸우는 세트장이기 때문에 실컷 우리 속에서 그리스도와 악마가 싸우는 세트장으로서 우리는 구원받는 거예요. ‘주님은 승리했고 이미 악마는 졌습니다.’를 '내가 믿습니다.‘가 되죠. 왜, 본인은 알죠. 자기는 세트장이니까. 자기 속에서 날마다 주님은 승리하고 악마는 나를 치니까. 악마는 날마다 ’너는 아직 희망 있어. 너는 착할 수가 있단 말이야, 지레짐작 자포자기하지 마. 너는 예수 믿고 성령 받아서 착해질 수 있어.‘ 자꾸 평소에 ’나는 누구다.‘하는 그 구조를 우리보고 계속 고수하라고 하는 거예요.
지금 많은 목사들이 그걸 하잖아요. 많은 목사들이 복음 믿지 말고 십자가 믿지 말고 ‘당신은 예수 믿고 착할 수가 있어.’라고 해서 우리로 하여금 나라는 인식에서 계속 마귀가 역사한다니까요. 십자가마을을 공격하고 복음을 공격하는 사람 글 보세요. 뭡니까? ‘이상하다. 예수 믿고 착할 수가 있는데 왜 자꾸 모든 걸 죄라고 하는지 이상하다.’
그게 뭐냐 하면 ‘네가 어디 있느냐.’라는 그런 성령을 안 받았기 때문에 그런 질문이 나오는 거예요. ‘할 수 있는데 왜 죄인 안 될 수 있는데 포기하느냐. 예수 믿고 할 수 있는데, 있는~데’ 뭐가 있기는 뭐가 있어요?
그동안 얼마나 예수를 핑계대고 자기 자존심을 위하여 살아왔습니까? 다시 말해서 주님 구조가 아니고 나한테 맞춘 예수의 구조를 억지로 끼어 맞춘 거예요. 내가 주인공 되고.
보석이라 하는 것은 내가 보석이 아닙니다. 그 구조 안에서 보석이 나오게 돼 있어요. 누구 힘으로? 예수님께서 우리는 ‘너는 보석이야.’라고 일러주면 보석이 되는 거예요. 그것은 아담아 네 자리가 예수님 피 안에서 살아갈 때는 뭐를 해도 보석이 돼요. 강도라는 이름의 보석, 창녀라는 이름의 보석, 강통하다 현장에서 잡힌 보석, 그 모든 보석이 전부 다 보석이 되는 겁니다. 주님의 구조가 보장해 줘요. 주님의 능력이 그걸 보장해 준다니까요. 우리 능력으로 보석되는 게 아니고 보석에 합당하게 살라는 게 아니고 주께서 그렇게 이미 보석으로 규정을 한 겁니다.
그게 왜냐, 구조 자체가 보석 될 수밖에 없게 만든 구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환경과 그 구조를 우리가 붙잡는 게 아니고 그 구조가 우리를 집어넣어버립니다. 십자가 안에다. 그래서 제가 강의 처음에 뭐라 했습니까? 십자가 안목이 아니면 성경해석을 할 수가 없는 겁니다. 십자가 안목에서 나는 이미 죽은 존재라고 발견되지 아니하면 이 성경 어느 구절도 해석 안 됩니다.
여기 나오는 12사도들, 12문, 12보석들, 전부 다 이미 이 세상에서 죽은 적이 있던 사람 이예요. 예수님의 십자가에 함께 죽었던 사람에게만 이렇게 주어지는 거예요. 17절 봅시다. “그 성곽을 척량하매 일백 사십 사 규빗이니 사람의 척량 곧 천사의 척량이라” 사람의 척량 곧 천사의 척량이라. 144규빗이죠? 144는 뭐 곱하기 뭐입니까? 12X12죠. 뭣을 보여주는 거예요? 490번, 용서는 70X7, 일흔 번씩 7번이죠. 뭐를 끄집어내는 겁니까? 7을 끄집어내죠. 12X12, 이건 12를 끄집어내는 거예요. 12라 하는 것은 구원받은 인간 이예요. 12에 해당되지 않으면 구원 못 받는다는 뜻입니다.
제가 수요일 날 이야기했잖아요. 예수님은 어디에서 태어난다? 야곱에서 나오죠? 예수님은 야곱에서 나와요. 말을 바꾸어서 말하면 야곱이 있다는 말은 야곱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고 야곱을 먼저 있게 해서 야곱 속에서 기어 나오기 위해서, 그럼 야곱은 하나의 드럼통 이예요. 야곱이란 드럼통에서 예수님이 기어 나오는 거예요. 기어 나올 때 어떻게 기어 나옵니까? 12로 나오죠. 12이 모여서 ‘변신 합체 따다닥 마징거 제트’ 하면 12가 1(하나) 되죠.
구약에서는 12가 하나 되지만 신약에서는 1이 뭐가 됩니까? 12가 되는 거예요. 그걸 요한계시록이 보여주는 거예요. 12(열 둘)라도 신부는 하나예요. 한 신부예요. 여러 명이 아닙니다. 신부는 하나예요. 하나의 신부되기 위해서 신부라는 그 터, 신부라는 자리, 그 자리를 만들기 위해서 이 12라는 언약이 여기 야곱의 언약에다 다 투입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믿어서 구원되는 게 아니라 12(열 둘)가 되기 위해서 언약이, 주님의 약속이 저로 하여금 신부되게 했습니다.‘ 이렇게 돼요. 예수 그리스도의 새 언약이 저로 하여금 구약처럼 12지파, 1명의 야곱이 있었기에 12지파가 된 거예요. 말을 달리하면 12지파라 하는 건 잠재돼 있던 야곱의 모든 본질과 본성이 12지파를 통해서 드디어 그 내막이 펼쳐진 겁니다. 어떻게? 아름답게.
따라서 거기서 우리 자리를 찾지 말고 주님의 구조를 찾으면 되죠. 우리 자리가 아니라 한 신부의 자리를 찾으면 돼요. 꼭 거기서 나를 고집하면 안 됩니다. 이미 그 안에 포함이 됐다고 보면 되죠. ‘여기 12보석이 있는데 나는 어느 보석 할까?’이렇게 나오시면 안 됩니다. ‘여기 7번째가 황옥인데 8번째가 녹옥인데 황옥 한번 끼어보고 녹옥 한번 끼어볼까.’ 그런 식으로는 안 된다니까요.
황옥이 바로 너고, 녹옥이 바로 너다 이 말이죠. 모든 게 너고 너는 모든 것이 되고, 이렇게 되는 거예요. 요한복음 17장에 보면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 같이 너도 아버지와 하나고 너는 나와 하나다.’ 하나라는 말은 ‘너하고 나하고 둘이라는 말을 쓰지 말아다오.’ 이 말입니다. 너와 내가 있다고 둘로 보는 것은 어느 버릇이냐 하면 옛날 인간들의 세상에서 셈하는 버릇을 그걸 천국까지 가져왔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나는 겁니다. 그런 식의 셈은, 그런 식으로 세상을 판단하는 그것은 더 이상 여기서는 하늘나라에서는 허용하지 않습니다.
이걸 어려운 말로 실제적인 자아 관에서 벗어나서 실존적 자아 관으로 바뀌어야 된다 이 말인데, 실존적 자아라 하는 것은 바로 구조 안에서 인간, 나란 존재는 구조를 위해서 존재하지, 나를 위해서 구조가 있는 건 아니다 하는 겁니다. 하도 말을 빨리해서 알아듣는지 모르지만, 흐름은 아시겠죠?
그러면 이 보석이라는 것이, 왜 보석이 여기에 나오는가, 여기 요한계시록 21장 11절에 보면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더라” 돼 있죠?
보석이라는 것이 인간 세계에서도 흔하디, 흔한 게 아니라는 겁니다. 돌멩이가 7개 있고 보석이 하나 있다면 8개가 있는 게 아니에요.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 아, 이건 여덟이 아니야. 요건 빼내야 돼, 요건 하나야. 보석은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있고, 그리고 보석이 하나 일곱 개 있다면 이걸 123456에다 여기 7을 집어넣으면 이 7은 123456과 동등 된 레벨에 속해버립니다. 차원에 속하기 때문에 이건 별개 아니죠. 그런데 ‘어, 이건 보석이잖아. 보석은 섞이면 안 되지.’해서 새롭게 1이 되면 보석이란 말은 보석이 1이 되면 이 전체(123456)가 6개라도 이 전체를 보석 1에 맞추려면 6개가 뭐로 바뀌어야 됩니까? 하나의 질로 바뀌어야 됩니다.
결국 보석이라 하는 것은 인간 세상의 모든 것은 보석이 아니다. 그러니까 쓸데없는 거다. 그런 것 위해서 내가, 주님이 일하는 건 아니였었어. 라고 심판할 수 있는 이유를 대기 위해서 보석을 부각시키는 겁니다.
제가 성령 이야기할 때 성령은 뭡니까? 구원받을 사람에게만 찾아오지만 이 말은 뭔 뜻입니까? 성령이 찾아오지 않은 사람은 ‘안 될 놈은 안 돼.’ 그 작업을 같이 하는 거예요. 성령 받지 않은 사람이 성령 받은 사람을 아무리 흉내 내도 누가 칩니까? ‘야, 요거 질기네. 요거 안 떨어지나.’ 부산 강의에서 했잖아요. 천국 가는 비행기 타고, 지구하고 외계하고 언약이란 비행기 타고 갈 때 만약 어떤 사람이 문짝 잡고 계속 따라 온다. 그럼 문짝 떼버리죠. 문짝 떼버려요. ‘우리 문짝 없이 가자.’
왜 그러느냐 하면 보석이 하나여야 되는데 이 보석 아닌 걸 갖다 붙여버리면 뭡니까? 갑자기 보석이 둘이 될 수가 있잖아요. 아버지와 내가 하나고 너희와 내가 하나가 되면 천국이 뭐가 됩니까? 천국은 2가 없어야 되고 3이 없어야 돼요. 그냥 1, 하나이어야 돼요.
그래서 이 하나 되기 위해서 이 세상은 뭐냐 12X12X1000, 얼마입니까? 또는 12X12, 이 여러 가지 이것이 언약적인 다수인데, 야곱에서의 12라 하는 것은 결국 야곱언약 1(하나)로부터 나왔잖아요. 결국 하나로 하기 전에 사전 이 땅에서의 전제 작업은 다수가 있어야 되는데, 그냥 다수가 아니고 12라는 숫자를 붙일 만한 다수에 해당되는가, 12를 붙일 만한 질적인 요소를 갖고 있는가, 그것은 여기서 말하는 ‘언약이 있는가. 야곱 언약이 있는가.‘ 이 말입니다.
오늘 이해가 안 되더라도 다시 보시고 가셔서 들으시면 되는 겁니다. 모든 건 이렇게 생각하시면 돼요. 예수님께서 혼자 말인지 아니면 들으라고 한 말인지 모르겠는데, 결국 제자들도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지만, ‘이 떡을 먹어라. 이 잔을 마셔라. 이것은 잔이 아니고 이건 떡이 아니고 내 피고 내 살이다.’ 할 때 제자들은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다니까요. 그 말을 못 알아들었어요. 못 알아들어야 돼요. 왜, 단절이고 절단이니까.
왜 못 알아듣는가, 제자들은 자기 살점만 생각하거든요. 내 살이 있고 내 피가 있잖아요. 내 살과 내 피로 예수님의 살과 피로 건너뛸 수가 없다니까요. 왜, 절단이고 단절되니까. 인간의 살과 피로서 그동안 언약을 이뤄왔다고 보는 거예요. 이루지를 못한 거예요. 인간의 살과 피는. 그런데 예수님의 살과 피는 언약을 이루면서 이게 살과 피가 찢어지고 흐르면 여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죽음이 나오죠.
결국 창세기 3장에서 선악과 따먹으니까 아담이 죽었다고 돼 있죠? 그런데 신약에 오면 그것이 뒤집어져요. 예수님이 죽기 위해서 선악과는 심어졌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위하여! 예수님의 죽음을 위하여 선악과는 심어졌고 아담은 죽어야만 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만, 십자가 짐으로만 ‘주’가 되신다는 이 원리를 위해서 악마를 비롯한 모든 피조물들은 그것을 위해서 움직여야 되고 활동했어야 됐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위해서.
그래서 언젠가 언약 할 때 그런 이야기했는데,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아버지가 존재한다. 아들이 존재한다. 그거 의미 없습니다. 인간들이 의미를 두고 신학자들이 의미를 두는데, 지가 존재하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존재하니까 아버지가 존재하고 존재하는 끼리 붙어봐.’ 존재가 문제가 아니고 아버지와 아들 사이는 존재가 아닙니다. 죽을 수 있느냐, 아버지여, 나를 버릴 수 있습니까? 너는 나에게 순종해서 버림을 받을 수 있느냐, 예수님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런 십자가는 세상의 인간의 지혜와 인간의 똑똑함으로 그걸 알아낼 수가 없습니다. 이거는 성령의 깊은 것, 깊은 데서 나오는 성령의 마음, 하나님의 마음이 성령의 마음, 하나님의 깊은 마음이 아니면 하나님의 깊은 것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걸 뭐라고 한다? 십자가라 해요. 십자가는 하나님의 깊은 것이고 이건 하나님의 깊은 영이 아니면 아무도 십자가를 알 수 없다고 돼 있어요.
알 수가 없다는 말은 이미 알아버린 자가 있다는 뜻 이예요. 알 수가 없다 하니까 어떤 사람은 말해요. ‘누가 십자가를 아느냐. 인간이’ 이래요. 이건 십자가를 뭐든지 다 안다. 70%, 80%, 그렇게 안다가 아니라 십자가는 구조적으로 이미 그 속에 들어가 버리면 십자가를 알 게 될 수밖에 없게 돼 있어요. 그건 온전한 십자가지, 반쯤 알았다든지 70% 안 게 아닙니다. 무슨 70%, 80%를 알아요? 20% 나머지 모자라면 지옥 가겠네.
우리 쪽에서 생각하는 모든 것은 우리의 존재 위주로 하거든요. 항상 나의 존재를 염두에 두지 아니하면 우리는 생각하거나 활동하지를 않는 법이예요. 우리가 무심코 예를 들어 졸음운전을 한다 합시다. 졸음운전 할 때 졸기 바빠서 자기 생각 안 하죠? 그런데 졸음운전해서 앞 차를 박았습니다. 뭐라 합니까? ‘아이쿠, 미안합니다.’하죠. 나는 잘못 없는데 졸음이 잘못했다. 이런 소리 하는 사람 없죠? 사실은 졸음이 나를 졸게 만들어버렸잖아요. 그래도 누가 잘못했습니까? ‘내가 졸았습니다.’ 앞에 나를 붙이잖아요.
그러니까 항상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니까 아담이 하는 이야기가 뭡니까? 자기 변명하죠. ‘내가 부끄러워서 벗었으므로...’ 또 자기를 집어넣잖아요. 그걸 주님께서 인정을 안 해주는 거예요. 네가 있는 자리는 네가 숨으라고 있는 자리가 아니고 주께서 약속을 이루기 위한, 십자가를 이루기 위한 그 자리에 네가 이제는 세트로 가담하게 됐다. 그래서 내가 찾아가서 너는 네 역할을 다 하면 되는 거예요.
그 역할이 뭡니까? 죄 값을 치르고 죽는 역할을 하는 거예요. 여자는 애 낳으면서 해산의 역할을 하고, 그럼 여자가 애 안 낳고 홀로 사는 처녀는? 처자는 처자대로 다른 고민이 있겠죠. 처자도 처자대로 ‘나도 결혼했으면 하는’ 그런 미흡함에서 오는 ‘내가 뭐가 못났는데 내 좋아하는 남자가 없지? 좋아하는 남자가 있겠지. 정말 내 인생 실패한 게 아닌가. 결혼 못해서 나이 40 넘어버리면 진짜 내 인생 조진 게 아닌가, 진자 내 인생 엉망이네. 어떻게 결혼도 못해보고 이렇게 죽다니.’ 그럼 친구들이 ‘야, 결혼해도 소용없다.’ 이러면 그 말이 약 올리는 것으로밖에 안 들리는 거예요. ‘니는 결혼해 봤으니까 그렇지 나도 후회하더라고 한번 해보고 싶다.’ 이렇게 나온다니까요.
그게 뭐냐 하면 인간의 결혼이라는 것은 항상 뭣과 연결돼 있어요? 자기 자신과 연결돼 있어요. 결국 인간의 모든 기도는 어떻게 하면 나를 빛나는 보석으로 만들까하는 자기 나름대로의 보석 같은 존재가 되고 싶어 환장했기 때문에 ‘그건 아니거든’하고 주께서는 바로 그렇게 니가 보석되고 싶은 사람에게 추방된 사람이 누구라고요? 바로 예수님이 그렇게 추방되어서 따로 보석을 만드는 거예요.
어느 몸에 의에서? 예수님 몸 자체를 하늘에서 내려와서 영광스럽게 만들어서 그 안에 있는 모든 언약, 12라는 숫자로 표현된 모든 언약된 사람한테는 전부 다 뭐가 된다? 하늘나라 성전의 보석같이 영광스럽게 만들어 버리고 마는 거예요. 그 영광스럽게 될 필요도 없어요. 그냥 만든 거예요. 그 치수를 재보니까 사람의 치수요, 정확한 정해놓은 천사의 치수, 사람의 척량, 곧 천사의 척량이니 이건 빈틈이 없어요. 양보도 없고 빼주는 것도 없어요.
오직 언약 받을 사람만 12지파에 의해서 구원될 사람만 구원되고 안 될 놈은 안 돼, 그 원칙을 그대로 고수한 그래서 ‘야! 척량 완벽하네, 성전 제대로 돼 있네. 벽돌 하나도 허비한 게 없네.’ 그렇게 할 때 그것이 바로 온전한 성전이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 이 말입니다.
21절 봅시다.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 성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옛날 성전도 보지 못하고 예수님 자체가 성전이고 하나님 자체가 성전이 돼 있는 성전. 그러니까 여기는 어린양은 사라지고 예수님이 어린양이 되셔서 앉아 계시는 거죠. 24절에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리라 성문들을 낮에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모든 것이 예수님 중심으로 구조가 이미 편성돼 있다 이 말이죠. 끝으로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그렇다면 지금도 그렇습니까? 아니면 앞으로 될 거예요? 지금도 그런 거예요. 아까 했죠? 이미 섞여 있다고. 예수님이 초라하게 다닌다고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것이 아니듯이 성도가 꼬라지는 이래도 이 땅에 보석으로 존재 한다. 다시 말해서 다른 구조에 의해서 보석 취급 받으면서 사는 것이고, 인간은 지가 보석되려고 애쓰다가 보석도 아닌 게, 먼지 같은 존재가 보석되려고 애쓰는 거예요.
심지어 다른 사람과 성도의 문제가 아니고 성도 내부도 바로 성도의 옛 사람이 우리의 새 사람을 그런 식으로 매일같이 압박과 핍박을 하는 거예요. 사람이 자기 생각에 돌아서게 되면 반드시 자기의 과거와 미래가 새롭게 설정이 되면서 자기가 보석인 것을 까먹어 버리죠. 지가 지 원대로 튀어보려고. 내 꿈에 맞는 내 입맛에 맞는 보석되려고 그렇게 또 노력하다 보면 내 보석에 방해되는 놈들은 ‘죽어라’하고 입에 담지 못할 저주를 퍼붓고 하죠.
결국 저주를 퍼붓다 보면 저주가 누구한테 갑니까? 결국 모든 책임은 누구한테 가겠어요? 결국 하나님 책임이죠. 하나님이 이렇게 착한 나를 이렇게 초라하게 만들었으니까 시집도 못하게 만들었으니, 내가 뭐가 못나서 시집도 못가나,.‘ 하면서 이렇게 중얼중얼 거리면서.
그 다음 25절 “성문들을 낮에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는 밤이 없음이라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고 들어오겠고” 밤이 없다는 말은 영원토록 뭐만 있다? 빛만 있다. 빛이 있으니까 거기는 숨길 것이나 또는 감출 것이나 뒤 구석에 애들 담배 피우는 데 있잖아요. 그런 골목이 없어요. 그래서 CCTV가 필요 없어요. 빛 자체가 CCTV라. 거기는 오히려 숨기 보다는 마음껏 드러내는데 오히려 기뻐하죠.
보석은 빛을 받는 기능을 하는 겁니다. 빛을 받아서 아름다운 빛을 되비추라고 보석으로 존재하는 겁니다. 그러니 온 천지가 보석이니까 빛과 빛이 반사, 반사가 일어나서 온 천지가 빛의 궁전이 되는 거예요. 보석이 있기 때문에, 보석이 존재하기 때문에 빛이 보석을 반사해서 온 천지가 보석 이예요.
그러니까 주님의 공로, 주님의 의가 와서 반사해서 주님의 의만 나오니까, 교회라 하는 것은 전부 주님의 공로, 주님의 의만 반사하니까 그게 진짜 교회잖아요. 예수님의 공로로 나같이 죄인 중에 괴수가 구원받았다. 그것이 이미 교회 안에서 이미 되는 거예요. 전부 다 빛을 튕겨요. 예수님의 공로만 높여요.
마치 옛날 코미디에 양반절하는 것처럼, 구봉서하고 배 삼룡이, ‘어른으로부터 시작합니다.’ 할 때 상놈이 양반 인사 배워서 베껴 와서 하는데 겸손하다고 둘이 인사하는데, 둘 다 나중에는 땅바닥까지 엎드려 인사하는, 그럴 필요 없어요. 자신만만하게 ‘나는 죄인이기 때문에 이렇게 빛처럼 구원받았다.’라는 것을 맘껏 드러내면 그것이 진정한 성전이요. 그 안에 주님이 함께 계시는 곳이고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빛의 교회가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그 다 이뤘다는 그것이 결국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는 그 일인 것을 우리가 다시 한 번 감사합니다. 우리 힘으로 죄를 씻고자 해도 죄 자체가 뭔지도 모르고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이미 주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기에 그 이루신 것을 인하여 우리가 얼마나 우리 자신 위주로 살아왔는가를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